최근 수정 시각 : 2024-10-27 09:31:49

실향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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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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失鄕民 | Refugee

1. 개요2. 발생 원인
2.1. 정치적 이유
2.1.1. 분단2.1.2. 전쟁 및 내전2.1.3. 망명 및 도피2.1.4. 기타 사유
2.2. 자연재해 및 인재2.3. 개발
2.3.1. 댐 건설로 인한 수몰2.3.2. 도시 개발이나 대규모 시설 건설
2.4. 문화유산 복원
3. 상세
3.1. 유래3.2. 현황3.3. 역사3.4. 주요 정착 지역3.5. 실향민들의 성씨
4. 국내 실향민 및 2세 실존인물5. 타 국가의 실향민
5.1. 아프로유라시아5.2. 아메리카5.3. 기타
6. 외국의 실향민 실존인물
6.1. 중화권6.2. 일본6.3. 인도6.4. 파키스탄6.5. 프랑스6.6. 영국6.7. 독일6.8. 네덜란드6.9. 루마니아6.10. 구 유고슬라비아6.11. 이탈리아6.12. 핀란드6.13. 폴란드6.14. 헝가리6.15. 그리스6.16. 튀르키예6.17. 에티오피아6.18. 소련6.19. 러시아·우크라이나
7. 관련 항목8. 실향민 캐릭터
8.1. 국산 창작물8.2. 가공의 세계의 실향민 캐릭터
[clearfix]

1. 개요

실향민이란, 전쟁· 내전· 분단 등의 정치적인 이유로 고향에 갈 수 없거나, 자연재해· 인재(人災)· 개발 등으로 인해 고향이 파괴되거나 사라진 사람들을 뜻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주로 남북분단 6.25 전쟁 이후 월남 이북 5도 출신 국민들을 실향민이라고 하나[1], 그밖에도 건설로 인해 고향이 수몰되었거나, 도시 개발이나 문화유산 복원 등의 이유로 고향이 사라져 실향민이 된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만 실향민이 있는 것은 아니며, 다른 나라에도 위와 같은 이유로 생겨난 실향민들이 있고, 지금도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다.

단순히 이사 이민 또는 국적 변경을 해서 언제든 다시 고향에 돌아갈 수 있는 경우 실향민이 아니다. 물론 도중에 전쟁이나 재난으로 고향으로 절대 돌아가지 못하거나 정치적인 문제로 모국으로부터 영구적으로 입국금지를 당하면 실향민이 되겠지만 말이다. 실제로 많은 이북 출신 실향민들은 6.25 전쟁 이후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었다.

2. 발생 원인

2.1. 정치적 이유

대부분의 실향민은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발생하며, 이 경우에는 이산가족을 수반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이 중 대부분은 전쟁이나 내전으로 인해 발생한다.

2.1.1. 분단

남북한이나 동서독처럼 원래 하나였던 나라 이념 차이나 기타 사유로 인해 둘로 쪼개지고, 양국 간에 서로 왕래를 금지하면서 생겨나는 실향민이다. 분단이 되었더라도, 중국 대만처럼 서로 왕래가 가능한 경우에는 실향민이라 하지 않는다.

분단국가는 다른 나라에 비해 실향민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 원래 한 나라 안에서 다른 지방으로 자유롭게 거주지를 옮기면서 사는 것은 흔히 일어나는 일이고, 일이나 기타 사유로 인해 고향을 떠나 다른 지방에서 사는 사람이 많은데, 갑자기 분단이 되어 버리면서 왕래가 막히면, 분단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 하고 이주한 사람들은 그대로 모두 실향민이 되는 것이다. 이밖에도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신앙이나 이념 등으로 인해 정부로부터 적대계층으로 몰리거나, 정부의 혹독한 통치를 피해 고향을 등지고 탈출을 감행해야만 하는 사람들도 있다.

분단국가는 양국 간 외교 관계가 수립되지 않은 채 왕래를 허용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전쟁이나 재해 등으로 고향에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언젠가 전쟁이 끝나고 고향이 수복되면 다시 고향에 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지만, 아예 국경이 고착화되어 버린 경우에는 통일이 될 때까지 막연한 세월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역시 분단국가로, 실향민 중 상당수는 1945년 광복 이후에 남북이 분단되면서 생겨났다.

2.1.2. 전쟁 및 내전

대부분의 실향민은 전쟁이나 내전 등의 불안 요소로 인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 하는 사람들로, 전쟁 중에 고향이 적군에게 함락된 경우, 혹은 전투를 피해 객지로 피난을 갔다가 휴전이나 종전이 되어 피난지와 고향이 휴전선이나 국경으로 가로막힌 경우가 있다. 전쟁으로 인한 실향민은 역사적으로도 많았으며, 현재도 전쟁과 내전은 계속 일어나고 있으므로, 계속해서 발생하는 중이다.

대한민국의 경우는 6.25 전쟁 때 실향민이 가장 많이 발생하였는데, 이 중에는 1945년 광복 이후 남북이 분단될 때에는 월남하지 않고 소련군정- 북한 치하의 38선 이북에서 살다가 6.25 전쟁 중에 월남한 사람들이 있고, 6.25 전쟁 발발 전에는 개성· 연백· 벽성· 옹진 등의 미군정-대한민국 치하의 38선 이남에서 살다가 6.25 전쟁 때 고향이 북한에 함락된 채 휴전선이 그어져 돌아갈 수 없게 된 사람들이 있다.

마찬가지로 북한에서도 6.25 전쟁 이전에 점유하던 38선 이북 지역 중 고성· 속초· 김화· 철원 양양· 인제· 양구· 화천· 춘천· 김화· 포천· 연천의 각 일부 지역이 남한령으로 넘어감에 따라 이 지역에서 실향민이 발생하였다.

2.1.3. 망명 및 도피

정치적 이유로 망명, 혹은 기타 사유 때문에 외국으로 도피하여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사람들이 있다. 독재국가에서 정권에 항거하다가, 또는 폐쇄적인 국가에서 자유를 찾아 다른 나라로 탈출하는 경우가 있다. 북한이탈주민이 이에 해당하며, 반대로 이념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북한으로 월북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2.1.4. 기타 사유

전쟁이나 분단 등으로 고향이 타국의 영토로 넘어가지는 않았으나, 전선과 가까운 관계로 그곳에 살던 주민들을 민간인 출입통제선 밖으로 이주시키면서 실향민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6.25 전쟁 이후에 비무장지대 안에 살던 주민들을 밖으로 이주시켰고, 지금도 비무장지대에는 이때 버려진 마을들이 많이 있다. 현재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민간인 거주 구역이라고는 대성동이 유일하다.

조선 시대에는 지역에서 왜구의 약탈이나 살인이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아예 섬에 살던 주민들을 뭍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이른바 공도 정책이 시행되었고, 이때 섬에 살던 주민들이 대거 실향민이 되었다. 이렇듯 군사적인 이유로 인해 한 지역을 아예 비워 버리는 경우는 역사적으로 종종 있어 왔으며, 지금도 그러고 있다.

2.2. 자연재해 및 인재

지진· 해일· 화산 폭발· 산사태 등의 자연재해나, 환경 오염· 방사능 누출· 지구 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 등의 이유로 고향 파괴되거나, 오염되어 돌아갈 수 없게 된 경우이다.

이 경우의 대표적인 예시는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주변 지역으로, 원전 폭발로 인해 대량의 방사능이 누출되면서 피난 권고가 내려진 이후, 아직 상당수의 주민들은 고향으로 복귀하지 못 한 채 객지에서 살아가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지구 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해안가 지역 주민들이 살아온 터전을 뒤로 하고 이주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몰디브 투발루 같은 나라는 아예 국토 전체가 수몰 위기에 놓여 있는 나라로, 국민 전체가 머지않아 실향민이 될 처지에 놓여 있다. 이는 비단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며, 부산 같은 해안 대도시들도 해안선의 후퇴가 예상됨에 따라, 국내에서도 머잖아 해안에 가까운 지역들부터 이러한 유형의 실향민이 대거 발생할 수 있다.

2.3. 개발

2.3.1. 댐 건설로 인한 수몰

건설로 의 상류 지역에 있던 지역들이 수몰되면서 고향이 사라진 사람들도 생각보다 많다. 배우 임하룡 이병태 전 교수, 국회의원 신기석 등이 이 경우에 속한다.

이런 곳을 고향으로 둔 사람들은 가끔 고향을 그리워하며 배를 타고 물에 잠긴 고향 위로 찾아가기도 하고, 가끔씩 가뭄으로 인해 댐 상류가 가물어 고향이 수면 위로 드러날 때 찾아가서 옛 추억을 회상하기도 한다. 댐으로 인해 고향이 잠기는 것을 잘 나타낸 소설로는 '강물이 흘러가도록'이 있다.

2.3.2. 도시 개발이나 대규모 시설 건설

일반적인 의미의 실향민은 아니나, 도시를 개발하거나, 군사기지· 발전소 등의 대규모 시설이 들어서면서 고향 상전벽해를 이루게 되어 고향을 잃어 버리는 경우도 의외로 많으며, 최근에는 이러한 유형의 실향민이 도시 시골을 가리지 않고 대규모로 발생하는 중이다. 도시에서 자랐어도, 재개발로 인해 동네의 옛 모습이 아예 없어진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다만 이러한 유형의 실향민들은 고향의 모습이 바뀌긴 했어도, 고향이 있었던 자리로 갈 수는 있다는 점이 다른 유형의 실향민들과는 다르다.

특히 거의 30년 주기로 재개발이 있는 대한민국에서는 전 국민이 다 이러한 유형의 실향민에 해당될 정도로 세대를 가리지 않고 나타나며, 최근에는 남북분단이나 6.25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실향민들보다도 많아지고 있다. 또한 오히려 도시민들이 시골 주민들보다 실향민이 되는 경우가 많다.

2.4. 문화유산 복원

마을이 있는 자리에서 유적이 발견되어 마을을 없애고 유적지를 복원하기도 하는데, 이 과정에서도 실향민이 생긴다.

흔한 사례는 아니나, 국내에서도 1980년대 백제의 수도였던 위례성의 유적으로 추정되는 몽촌토성이 발굴되면서 그곳에 살던 주민들을 이주시킨 사례가 있다. 이곳은 본래 몽촌(夢村)이라 불리던 마을이 있던 곳으로, 약 200여 호가 사는 큰 마을이었으며, 이동(二洞)이라는 별도의 법정동으로까지 편제된 곳이었으나, 결국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마을을 철거했다.

물론 몽촌토성이 발견되지 않았더라도,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해당 지역이 올림픽공원 부지로 수용되어 주민들의 이주는 이미 확정되어 있긴 했다. 여하튼 몽촌 주민들은 다른 곳으로 떠났고, 이동은 방이동으로 합병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올림픽공원 안에 몽촌유허비(夢村遺墟碑)를 세워 그곳이 몽촌 주민들이 살던 곳이었음을 알리고 있다. 석촌동 고분군 역시 고분 위로 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고분이 발견되면서 그곳에 있던 민가들을 헐고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지금도 이러한 사례는 꾸준히 생기고 있는데, 땅만 파면 유적이 나오는 경주 국가유산청에서 꾸준히 토지를 매입하면서 건물들을 헐고 유적지를 복원시키는 중이며, 몽촌토성과 함께 위례성 유적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이 있는 풍납동도 장기적으로는 모든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풍납토성을 완전 복원할 방침이다. 특히 풍납동은 아예 동네 전체를 비우는 사업이기 때문에 이주 방침이 발표되기 이전부터 기존에 살던 주민들로부터 크게 반발이 있었으며, 이주가 시작된 지금은 하나씩 집이 헐리거나, 주민들이 떠나면서 동네가 을씨년스럽게 변하고 있다.

3. 상세

3.1. 유래

6.25 전쟁 이후에 현재까지 산발적으로 북한에서 탈출한 북한이탈주민들도 고향을 떠나 다시 가지 못하는 신세라는 점에서는 위에서 정의한 실향민과 동일하다. 이들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성향과 남북통일을 바라는 비중이 일반 한국인보다 높다. 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에서 1986년에 출간한 '한국 학생건국 운동사'에 의하면 월남한 청년들은 백색테러단에 많이 참가하여 테러단의 지원과 지시로 북한 지역에 원정테러를 많이 하러 갔다고 한다. 이들이 이 단체에 많이 참가한 이유는 자신들의 고향을 뺏어간 조선노동당에 대한 분노와 테러단 지도부의 교육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기회가 되면 고향에 한 번 다녀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45년 남북분단이 되고 1950년 6.25 전쟁 통에 자의든 타의든 남한으로 넘어오게 된 북한 출신의 사람들이 밀집하게 되고 1953년 휴전 성립이 되어서 더 이상 이북에 있는 고향에 갈 수 없게 되면서, 이 때부터 실향민이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실향민은 ' 북한 지역에 본적지를 두고 있으나 고향에 가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2]

3.2. 현황

실향민의 출신을 살펴보면, 황해도 출신이 35%로 가장 많고, 함경북도 출신이 가장 적어 남쪽과의 거리와 반비례함을 알 수 있다. 다만 이산가족의 경우 평안도, 함경도 출신이 비교적 많다.[3] 황해도, 미수복 경기도, 미수복 강원도 출신 실향민들은 남한과 가까워 가족 단위로 온 사람들이 많았지만[4], 평안도, 함경도 출신 주민들은 혼자 월남하거나 가족들 중 일부만 월남한 사람들이 많았다.

또, 실향민 2세를 대상으로 자신의 고향을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겠느냐는 설문에 응답자의 46%가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말한 뒤 이북계라고 말한다.'라고 응답하였고, 응답자의 42%가 '아버지의 고향은 곧 나의 고향이므로 바로 북한의 지명을 말한다.'라고 응답하여 실향민 2세들의 계승의식이 강력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다만, 3세로 가면 전자는 몰라도 후자의 비율이 급감하는데, 10대~30대에 해당하는 3세들은 바로 북한의 지명을 말했다간 북한이탈주민으로 오해받기 쉬운지라 조부모의 고향에 대한 강력한 프라이드가 없으면 그냥 남한의 출생지를 말한다. 본적지를 언급하는 사람이 아예 없진 않지만, 2세들에 비해 찾기 힘들다.[5] 사실 젊은 세대들은 고향을 남한 쪽의 고향으로 말하는 게 당연하다. 일단 실향민 3세대가 되면 조부모 양쪽이 다 실향민일 가능성도 별로 없고 이미 그 실향민이었다는 조부모들도 남한에서 더 오래 살았을 마당에 자신의 조부모가 6.25 전쟁 때 피난민이었다는 정도만 인식할 뿐이다. 물론 통일에 관심이 있거나 북한이탈주민들과 가까운 사람들도 많고, 이북5도위원회 통일부도 실향민들과 그 후손들, 북한이탈주민 간 협력 체계를 구축하고 관리하고 있다.

사실 실향민이라고 하면 대놓고 오해를 받을 수 있지만 오히려 가족과 이별하고 고향을 떠나게 만든 김일성 일가, 북한 정권,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감이 남한 본토 출신 사람들보다 더 강한 경우가 많다. 물론 사람의 정치관이란 다양한 만큼 이런 고통은 강경하게는 물론 유화적으로도 풀 수 있다는 사람도 있기는 하다. 실향민이 엄청나게 많은 관계로 실향민이면서 정부요직을 맡은 사람들도 엄청나게 많다. 당장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부터가 황해도 출신이고, 김구 황해도 출신이다. 초장기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한 김형욱도 실향민 출신이며 6.25 전쟁 초기에 을 지휘한 채병덕, 초대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6.25 전쟁 참전용사이자 최재형 감사원장의 부친인 최영섭, 베트남 전쟁 당시 당시 파월 국군 사령관을 역임했던 채명신 역시 실향민 출신이다. 6.25 전쟁 이후부터 국민의 정부까지 실향민 중 정부 요직에 오른 사람이 많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제24대 국정원장이자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에 깊은 관여를 한 임동원 등이 있다.

현역으로 정치활동을 하는 인사로는 김진표[6], 김형석, 임동원 등이 있다. 최근까지는 김동길 교수도 유튜브를 운영하며 정치 활동을 했었다. 이 외에도 수가 꽤 많은 관계로 한국 사회에 영향을 끼쳤거나 지금도 영향을 주는 경우가 있다. 경제적으로도 북한의 박해를 피해 상업을 영위하고자 한 사람들이 있어 현대그룹 초대 회장 정주영이나 기타 현재까지 내려오는 식품이나 유통 관련 기업을 창업한 실향민도 있다. 그리고 일부 기업가들은 개성 상인의 후손인 사례도 있다.[7] 대한민국의 개신교 주요 인사들도 실향민 비중이 높고, 문화예술계 인사도 있으며, 연예계에는 김동건, 윤여정, 이상벽, 이순재, 현미, 조영남, 전원주[8]가 지금도 유명하며, 교육 쪽으로는 경희대 설립자[9] 숭실대 초대 총장 등 숭실대와 관련된 인사들, 성문종합영어 저자인 송성문, 경북대학교 총장이었던 고병간, 계철순, 장영희 교수[10]의 부친인 장왕록 박사, 소설가인 황순원, 박완서 등의 인사가 있다. 심지어 한국 의료보험의 창시자라고도 불리는 의사 장기려는 북한이 세워지고 나서도 김일성을 수술한 바가 있다. 스포츠계에도 야구 지도자로 유명한 김동엽, 김응용, 마라토너 손기정 등이 있다. 경기도 성남의 모란시장 같은 명칭은 평양 출신 실향민 김창숙이 고향의 모란봉에서 따온 지명이다.

2020년대 현재 실향민의 출생연도가 20세기 초반이기에 지금은 상당수가 작고했으며, 생존한 사람들은 대부분 80대 이상의 고령이다. 그래서 2010년대까지 대한민국 정부 측에서 북한과의 협상에서 중요하게 다뤘던 것 중 하나가 바로 남북 이산가족 상봉인데 이는 실향민들의 나이가 매우 고령이고, 이들의 죽음은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남북한 간의 연결 매개체를 아예 단절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20년대 현재에는 대부분이 고령으로 사망하기는 했지만, 아직 살아있는 이산가족들이 남아 있어서 2020년대까지는 이산가족 상봉 문제가 남북관계에서 의제 중 하나로 다뤄질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사항은 남북 이산가족 상봉 문서를 참고.

실향민 중 전쟁 이전에 월남한 사람들은 주로 도시 지역에 정착했고, 전쟁 이후에 월남한 사람들은 군 지역에도 많이 정착했다는 통계가 있다. 전쟁 이전 월남자는 약 80만 명으로 추산되며, 전쟁 기간 월남자는 약 6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11][12]

그 외 간척사업, 관개사업으로 인해 지형변화가 많기 때문에 고향의 행정구역 자체가 소멸해버려서 실향민이 된 케이스도 존재한다. 댐이 건설되어 수몰된 지역이 대표적이고[13], 자연재해나 인재로 고향이 박살나 아예 없어진 케이스도 존재하며 극단적인 인구유출로 인해 자연소멸된 케이스도 있다.

실향민 비율이 가장 높은 성씨는 (桂)씨와 (弓)씨이다.

3.3. 역사

1945년 해방과 동시에 38선 이북에는 소련 군정이 들어섰고, 1946년부터는 북한의 시초인 공산정부가 들어섰다. 소련 군정의 통치와 북한 공산정부의 통치는 매우 폭력적이었고, 급진적이었다. 독소전쟁에서 소련군이 독일군에게 한 것이 38선 이북 주민에게 거의 똑같이 행해져 이를 접한 젊은 세대는 믿지 않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아주 폭력적인 일이 있었고[14], 이보다 더한 권력에 대한 통제가 김일성이 주도권을 갖던 북한 정부에 의해 행해졌다. 강도 높은 토지개혁, 화폐개혁이 실시되어 많은 지주와 중농들,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재산을 빼앗겼고, 고향에서 쫓겨나 머나먼 타지로 강제 이주되었다. 당시 이북 지역에서 상당한 세를 갖추고 있던 기독교 세력에게도 재산 몰수와 같은 강력한 탄압이 가해졌다. 조만식을 필두로 한 조선민주당 한국독립당 계열의 반공 지식인들에게도 비슷한 수준의 압박이 들어왔다. 실향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탄압에 반발한 이들은 고문을 당하거나, 심하면 살해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카인의 후예 같은 소설 등에서 언급되는 증언의 일치, 신의주 반공학생의거, 1945년~1950년 사이 한국 언론의 북한 방문 취재를 참고한다면 실향민들의 증언은 신빙성이 매우 높다. 결국 지주, 중농, 기독교인, 반공 지식인에게 38선 이북의 땅은 살 수 없는 땅이 되었다.

지주, 중농, 기독교인, 반공 지식인, 그리고 상인과 일부 친일파들까지 많은 '반동분자'들은 소련 군정과 북한 정권에 적극 저항하기보다는 남쪽으로의 도망[15], 일부는 김일성에 대한 충성을 통한 보신을[16] 택했다. 1945년에는 이념과 신변상의 이유로 월남한 이들이 대다수였고, 1946년부터는 토지개혁의 여파로 지주와 중농의 월남이 급증했다. 미군정 조사에 따르면 1946년 한 해 동안 월남자 총계는 185,536명이었는데, 1월과 2월에는 월남자 수가 1,200명 남짓에 그치던 것이 동년 3월 북한에서 토지개혁이 전면 실시된 이후부터 급증했다. 1945년 8월부터 1947년 12월까지 월남자 총계는 545,821명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17] 이후 1945년 8월부터 1950년 6월까지 38선을 넘어 월남한 이들의 수는 대략 60만 명에서 80만 명까지 추산된다. 이렇듯 전쟁 이전에 월남한 사람들은 말 그대로 북한 공산정권이 싫어서 고향을 떠난 이들이 대부분이었고, 자연스럽게 남한에서 해방정국의 반공 세력의 주축으로 자리잡게 된다. 많은 반공 청년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서북청년회 등 반공 청년단에 투신하였으며, 상당수는 군부에 투신, 1950년대 군부의 주축으로 부상한다.

전쟁 이전에 월남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중부 지방에 정착하였다.[18] 1949년 인구 센서스 기준 월남자의 46.1%가 서울, 15.2%가 경기도, 10.5%가 강원도에 정착하였다. 6.25 전쟁 당시 서울특별시 피난민 조사에 따르면 전쟁 이전 서울에 정착한 월남자 인구는 약 40만 명 규모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중 대부분은 사대문안 용산구 해방촌 후암동 일대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6.25 전쟁이 발발한 후에도 실향민이 대거 발생했다. 전쟁 기간 실향민들은 1.4 후퇴 때 가장 많이 남한으로 넘어왔다. 이 시기의 실향민은 두 달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이북을 통치한 국군과 유엔군에 협조했던 잔존 반공 세력도 있었던 반면, 전쟁과 폭격을 피해 이리저리 피난을 다니다가 38선 이남에 넘어온 이들도 많았다. 특히 평양 흥남에서는 원자폭탄이 투하될 것이라는 소문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피난 간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육로로 피난한 경우도 많았지만 동해안에서는 흥남 철수작전을 통해, 평안남도에서는 진남포 철수작전을 통해 해로로 피난한 경우도 있었다. 1.4 후퇴 이후에는 이북에서 남한으로 넘어갈 수 있는 육로가 사실상 차단되어 월남이 수월하지는 않았지만, 평안도 서해안과 황해도 서해안을 중심으로 국군, 유엔군, 반공 유격군의 도움을 받아 해로로 월남하는 이들이 없지는 않았다. 1951년 1월 황해도 해안에서 구출된 피난민은 6만 명 이상에 달했다. 한편 개성시민들은 휴전 직전까지도 육로를 통해 몰래 월남하거나 남쪽과 교류하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전쟁 이후 실향민들은 전국 각지에 정착하였고, 대한민국 사회에 비교적 성공적으로 동화되어 사회 전반에 진출할 수 있었다. 대부분이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작고하였지만, 수백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그들의 후손은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실향민의 숫자는 1985년 5백만명으로 집계됐으며, 2~3세까지 합하면 8백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5백만명이 부풀려진 수치이며[19] 140만 명에 그친다는 의견이 있다. 당시 이북 지역의 인구와 전쟁 기간 북한의 인구 손실을 감안하면 실향민 인구는 140만 명으로 추정하는 것이 온당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과거와 달리 지금은 실향민과 비실향민과의 혼인도 늘었고 정체성 파악이 쉽지 않아 정확한 자료가 도출되기 어렵다. # #

3.4. 주요 정착 지역

전반적으로 실향민은 수도권, 경상도 강원도, 대전광역시, 충청남도에 많이 정착한 반면 전라북도 충청북도에서는 소수, 전라남도, 제주도에서는 극소수이다. 물론 경상도에서도 부산광역시를 중심으로 한 동남부 해안지역에 많이 거주하고 있고, 전라도에도 일부 지역에는 황해도 출신 실향민들이 많이 거주한다고 알려져 있다.

전라도 지역의 경우 특히 군산시에 실향민들이 많이 거주한다. 1951년 1월 이후 황해도 해안에서 이루어진 국군의 피난민 소개 작전이 황해도 해안 - 서해 5도 - 군산시의 경로로 이루어진 바가 많기 때문이다. 여수시, 목포시 또한 전시에 황해도 피난민을 상륙시킨 곳이었기에 위 지역에도 소수나마 분포한다.

전쟁 기간 1.4 후퇴 당시 많은 실향민들이 부산광역시 경상남도까지 피난했고, 상당수가 부산에 정착했다. 조선 말기 개항을 거치면서 부산 경상도 제1의 도시가 된 것을 넘어 기존의 한반도 제2의 도시였던 평양과 엎치락뒤치락 하는 수준까지 성장했다. 이어서 부산은 6.25 전쟁으로 인해 피난민들이 몰린 것을 계기로 더욱 크게 성장하여 3위와 차이가 큰 대한민국 제2의 도시가 되었다. 현대 부산에서 대중적인 향토음식이 된 밀면이 실향민이 가져온 냉면의 영향을 크게 받은 음식이다.[20] 다양한 지방 출신의 실향민들이 부산과 경남 일대에 정착하였지만, 흥남 철수작전을 비롯해 동해안에서 해로를 통해 이루어진 피난민 소개 작전의 영향으로 함경도 미수복 강원도 출신 사람들의 비중이 높았다고 한다.

전쟁이 어느 정도 소강 상태에 이르자 멀리 부산까지 피난한 이들은 다시 중부 지방으로 북상하였다. 이촌향도의 행렬을 따라 일자리를 찾으러 상경하였거나, 고향과 가까운 곳에 거주함으로써 전쟁이 끝나면 가능한 빨리 고향에 돌아가겠다는 의지였다. 이들 중 많은 수가 서울에 정착하였는데, 전쟁 기간 월남한 사람들은 전쟁 이전 월남자들과 달리 주로 성저십리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1960년 인구통계에 따르면 234만 서울시민 중 27만 명이 이북 출신이었으니, 전후 서울에 정착한 실향민이 매우 많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21] 그 영향으로 1950~60년대 서울에서 출생한 인구 중에는 실향민의 후손이 굉장히 많다. 경기도에 정착한 이들은 파주시[22], 김포시[23] 등 접경지역이나 의정부시[24] 등 북부 지역, 수원시[25]와 같은 주요 도시에 정착하였다. 인천에도 적지 않은 수의 실향민들이 피란 및 정착하였다. 인천의 경우, 1953년 4월 인구조사에 따르면 총 인구 27만 8천 명 중 28%에 해당하는 7만 8천 명이 이북 출신이었다고 한다. 전반적으로 서울에는 평안도, 미수복 경기도[26] 출신 주민의 비율이 높고, 경인 지역에는 황해도, 미수복 경기도 출신 주민의 비율이 높다고 한다. 부산 북한 다양한 지방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이 많았다면, 인천은 특이하게 황해도, 미수복 경기도 출신의 실향민들이 유독 많이 내려왔는데 이는 두 지역이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웠기 때문이다. 실제로 강화도 교동도[27] 개성시 황해도 연안군과 매우 근접하며, 육안으로도 상대방이 매우 잘 보이는 지형이다.

남한 실향민[28]의 대표적 마을이나 지역은 주로 최북단 지역 등에 집중되어 있으며 강원도 속초시 청호동에 함경도 출신 실향민 집단촌인 아바이마을[29]이 있다. 그리고 속초 외에도 강릉이나 춘천 등에도 많이 거주한다. 춘천의 경우 구 철원이나 김화, 원산 등 북강원 출신도 많다. 코미디빅리그에서 이진호가 썼던 속초 말투가 이북 말투와 영동 말투가 섞여서 강릉 쪽 사람들이 듣기엔 약간 이질적이라고 한다. 정감록의 영향을 받아 실향민이 정착한 곳도 있다고 한다. 영주시 풍기읍, 공주시 유구읍이 거론된다. 그 외에도 포로수용소가 있었던 부울경 지역에 주로 분포하는데, 부산이나 창원 등지에는 '해방촌'이라는 이름이 붙은 동네가 한두 군데씩 꼭 있으며 이북식 정통 냉면을 하는 가게도 도시마다 찾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특히 부산 원도심 중구, 영도구, 동구, 서구 등 항만 지역에 많이 있다. 수도권의 경우 서울특별시 용산구 해방촌이나 중구 소공동, 오장동, 장충동 등지에 실향민이 많이 거주했었고, 여전히 해당 지역에는 이북식 음식점이 널리 분포하고 있다. 그리고 인천 중구, 동구, 미추홀구와 같은 원도심이나 강화군, 옹진군, 경기도 북부 지역에도 실향민들이 많이 거주한다. 인천 실향민은 황해도 출신이 많다. 대구에도 마찬가지로 실향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현재는 대부분 아파트단지로 재개발된 동구 신천동 일대가 과거에는 피난민촌으로 불리던 판자촌이었다.

여담으로 북미 등 해외로 이민간 비율이 남한 토박이[30]에 비해 상당히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족 단위로 월남한 집단보다 단신 월남한 집단, 수도인 서울에 정착한 집단이 특히 그렇다.[31] 이유는 남한이나 해외나 타향인 건 마찬가지라는 인식, 남한까지 적화될까봐 두려움 등등.

3.5. 실향민들의 성씨

간씨, 강씨(康), 계씨, 궁씨, 길씨, 독고씨, 동씨, 동방씨, 명씨, 선우씨, 승씨, 탁씨, 태씨, 현씨 등은 실향민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 이들 성씨가 북한 지역에 더 많이 살기 때문이다.[32]

김씨, 이씨, 박씨 등 주요 성씨 중에서도 본관에 따라 실향민 출신일 가능성이 높은 경우도 있기는 하다. 대표적인 경우가 해풍 김씨 신천 강씨이다.

4. 국내 실향민 및 2세 실존인물

실향민/대한민국, 실향민/북한 문서로.

실향민에 대해 알고 싶으면 5도민신문을 참조.

5. 타 국가의 실향민

20세기는 실향의 시대라 할 만큼 실향민들이 많이 발생했으며, 아래의 사례들은 일부에 불과하다.

5.1. 아프로유라시아

  • 오늘날 중국 동북 3성(만주)의 만주족들은 넓게 보면 실향민의 후손들이다. 만주 자체가 만주족의 고향인 지역이지만 청나라의 중원 입관 이래로 만주족 대부분이 중원이나 남방으로 이주하여 오랫동안 중원이나 남방에서 살아가면서 청나라 말기에는 사실상 중원이나 남방을 자신들의 고향으로 여기다가,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만주족이 학살당하는 바람에 혁명군을 피해 조상의 고향인 만주로 도망쳤기 때문이다. 당시 조상 대대로 만주에서 살고 있었던 만주족은 만주에 잔류한 만주족 하층민 및 청나라의 북동쪽 변방을 지키던 팔기군 소속 만주족이었는데 이들은 당시의 만주족 중에서는 그야말로 일부에 불과했다. 비록 지금은 만주, 중원, 남방이 다시 한 나라가 되었지만 이마저도 청나라의 피지배민족이었던 한족의 주도로 이루어진 통일인지라, 중원이나 남방에서 만주로 도망친 만주족은 단순한 실향민을 넘어 아예 나라 없는 민족이 되어버렸다. 현대 만주족은 중국 북부 지역에 비해 만주족 문화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은 중국 남부 지역에 남아있는 청나라 만주족의 유산(팔기군 군영 유적, 청나라의 중국 남부 정복 후에 세워진 티베트 불교[33] 사원 등)을 보존하는 일에 나서고 있다.
  • 독일, 베트남, 예멘의 경우 분단을 청산하고 통일이 완수되면서 자국 영토 내에서는 실향민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다만 동독 남예멘의 공산주의자들 및 남베트남의 반공주의자들은 통일 이후에도 각각 공산주의 성향과 반공주의 성향을 못 버린 경우 아예 각각 구 공산권과 서방 국가로 망명하여 실향민이 되기도 했다. 특히 예멘의 경우 공산주의와 반공주의를 떠나 통일국가 예멘의 혼란 자체를 피해 외국으로 망명하여 실향민이 된 이들도 많다.
  • 마찬가지로 폴란드에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에 넘어간 커즌 라인 이동의 구 동방 영토 출신 실향민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대부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폴란드로 넘어온 오데르-나이세 선 이동의 독일 측 구 동방 영토에 정착한 경우가 많다. 그 외에 폴란드 제2차 세계 대전을 피해 망명한 폴란드인의 후손들과 동유럽의 공산화 자체를 피해 서방 국가로 망명한 폴란드인의 후손들도 실향민에 해당하는데, 이들은 폴란드의 민주화 이후에 폴란드로 돌아가 실향민 신세에서 벗어난 경우도 있지만 폴란드가 민주화된 이후에도 경제난과 정치적 혼란을 겪는 모습에 실망하여 귀국을 포기하고 미국이나 캐나다 등 서방 국가의 국적을 받고 서방 국가들에서 사는 경우도 많았다.
  • 일본에서는 실향민을 히키아게샤라 부르는데 2차 대전 이전 조선, 대만, 남사할린, 쿠릴 열도 등 구 일본령 및 만주국, 몽강국, 왕징웨이 정권 등 일제의 괴뢰국 내에서 태어난 일본인들을 지칭한다. 2차 대전 패전 이후 해외의 일본 점령지에 있던 일본인들은 곧 미국, 중국, 영국, 소련 등에 의해 일본 본토로 추방되었다.
  • 세르비아 역시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전쟁으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크로아티아[39]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40] 에서 크로아티아군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군에게 쫓겨나와 세르비아 본국과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인 자치지역인 스릅스카 공화국으로 피난을 간 크로아티아/보스니아 출신의 세르비아계 실향민과 그 후손들이 있다.[41] 그러나 다만 이들은 유고 내전 당시에도 보스니아계 무슬림 집단들에 대한 인종청소 등 학살을 자행하던 이력이 있었기에 본가인 세르비아의 일부 극우파들을 제외하면 국제적으로도 큰 동정을 받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다만 이들은 유고 전쟁 발발 후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에서 전쟁을 피해서 세르비아 본국에서 와서도 세르비아 본토의 세르비아 사람들로부터 외국인 취급을 당하고 현지 기업이나 공장에서도 취업조차 거절당하는 등 엄청난 문전박대와 차별을 받아 현지에서도 적지 않은 논란이 되기도 했다. 물론 유고연방이 전쟁으로 해체되고, 이후 정세가 다소 안정되면서 세르비아 또는 스릅스카 공화국으로 도피했던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사람들 중 일부가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로 돌아오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전쟁과 학살의 트라우마로 인해 원래 고향으로 되돌아가기를 거부하고 세르비아 국적을 받고, 세르비아에서 살거나 아예 보스니아내 세르비아계 자치 지역인 보스니아 북동부의 스릅스카 공화국에 정착해서 사는 경우도 있었다.[42] 다만 전쟁 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은 세 민족이 잡거하던 지역이었기에 현재의 스릅스카 공화국 지역에서 살다가 쫓겨나온 크로아티아인, 보슈냐크인도 많다.[43]
  • 제1차 중동 전쟁을 거치며 발생한 팔레스타인의 실향민 문제는 현재진행형이며,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등 이웃 국가들에서도 팔레스타인인 난민촌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특히 요르단의 경우에는 팔레스타인 실향민이 토착 요르단 아랍인보다 오히려 더 많을 지경이다. 더군다나 팔레스타인 실향민들은 아랍인 정체성보다 이슬람교로 개종한 토착 이스라엘인의 후손이라는 정체성이 강해서 스스로를 토착 요르단 아랍인과 구별하기 때문에[44] 이런 점에서 양쪽 민족이 서로 간에 이질감을 느끼기도 한다.[45] 그러나 시리아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경우 2011년 시리아에서 시리아 내전이 터지면서 이들도 시리아 정부군과 시리아 반군, IS와의 싸움에서 교전, 폭격으로 죽거나, 전쟁을 피해 자국을 탈출하려는 시리아인 난민들의 틈새에 끼어서 터키나 요르단, 이라크, 레바논 같은 시리아 주변국들로 피난가는 등 시리아 내전 과정에서 발생한 시리아 난민들 못지않게 커다란 타격을 입고 있다.[46]
  • 이스라엘 미즈라힘, 세파르딤 또한 실향민이다. 이스라엘과 국교가 있는 이집트, 요르단을 제외하면 방문조차 안되고, 그나마도 이스라엘인이라고 표를 내면 린치당할 가능성이 높다.
  • 그리스 튀르키예의 경우에도 1923년 인구 교환으로 막대한 실향민이 존재한다. 특히 튀르키예에서 그리스로 교환되어 온 그리스계들은 자신들이 살던 지역 이름을 따서 새로운 마을을 건설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아테네 인근의 네아(새로운) 스미르니 같은 경우. 테살로니키의 축구팀인 PAOK FC도 정식 명칭에 콘스탄티노플이 들어가는데, 원래 뿌리가 이스탄불의 그리스인 축구팀이기 때문이다.
  • 키프로스는 터키계의 북부와 그리스계의 남부가 분단 상태를 유지하는 곳인지라 섬 내부에도 그리스계와 터키계 주민 간 실향민들이 존재한다. 터키군의 침공으로 분단되기 전 원래는 그리스계와 터키계가 북부와 남부 등 섬 여러 곳에서 잡거하고 있었는데 전쟁으로 분단이 되면서 북부 지역에서 살던 그리스계 주민들이 터키군과 터키계 키프로스인 민병대들에 의해 대거 남쪽으로 추방당하고, 섬 남부 지역에서 살던 터키계 주민들이 그리스계에 의해 추방당하면서 북부와 남부 간 인종 비율이 바뀌었다.
  • 프랑스에도 피에 누아르라는 프랑스판 히키아게샤들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과거 식민제국 당시 알제리로 건너가 그곳에서 터를 잡고 오랫동안 특권층으로 군림하였으나 알제리 전쟁 이후 토지와 재산 등을 잃고 프랑스 본토로 재이주한 자들이다.[49] 좀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알자스-로렌이 독일에 할양되었을 당시 이 지역에서 프랑스 영내로의 이주를 택한 실향민들이 존재했다. 물론 이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이 지역이 프랑스에 반환되면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 냉전 당시 제2세계의 경우 공산화를 피해 제1세계 국가로 망명한 반공 성향 주민들이 대표적인 실향민이다. 이들은 자국의 공산정권이 무너진 경우 실향민 신세를 벗어나 자국으로 돌아온 경우도 있다. 다만 냉전 종식 이후에는 반대로 제2세계의 보수적인 공산주의자들이 자국의 공산정권이 무너지는 것을 한탄하여 중국, 베트남, 라오스 같이 공산주의 정당의 독재체제가 건재한 국가로 망명하는 경우도 일부 존재했는데 특히 캄보디아 루마니아 같이 공산정권이 무력을 통해 처절하게 몰락한 국가의 공산주의자들이 이에 해당한다. 다만 폴란드, 체코 혹은 소련 출신 국가들과 같이 공산정권의 몰락이 평화적이거나 반(半)평화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국가들은 공산주의자들이 그냥 체념하고 자국에서 계속 살아간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반대로 냉전 당시 제1세계 국가의 공산주의자들이 제2세계로 망명하여 실향민이 된 경우도 많은데, 이들은 제2세계의 붕괴로 영원히 실향민이 되어버린 경우가 많다.
  • 앙골라, 르완다, 나이지리아, 소말리아, 모잠비크,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 남수단 등 한때 내전을 겪었거나 내전 중인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내전으로 개판이 된 조국과 살던 고향이 전쟁터가 되어 고향을 떠난 아프리카 나라들의 난민 또한 실향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나마 앙골라와 르완다, 모잠비크,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는 내전이 끝나고 정세가 나름 안정되는 등 난민들이 다시금 전쟁 이전에 살던 고국으로 되돌아왔지만 현재까지도 내전과 정세 혼란이 현재 진행 중인 소말리아와 남수단의 난민들은 여전히 답이 없는 상황이다.
  • 그리고 2011년부터 현재까지 진행 중인 시리아 내전의 시리아 주민들이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실향민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은 죽고 다치거나 피난 도중 팔려가는 등 모진 수모를 당했다. 오직 소수의 시리아 주민만이 서유럽에 도착하여 그들의 정착지를 찾는다.
  • 시리아 사람들이 만약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할 수 있으나,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 쿠르드족 민병대, 미군, 러시아군 이란군 또 최근에는 튀르키예군까지 개입된 가운데 그러한 생지옥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그러한 상황이기에 이들 또한 어찌보면 실향민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2016년 이후에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시리아 정부군이 반군과 IS들을 대거 토벌하면서 정세가 시리아 정부군에게 유리해져 고국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가까워지고 있다.
  • 1960년대부터 1970년대 당시 팔라비 왕조 당시에 공무원이나 정계의 고위 각료로 복무했다가 1979년에 일어난 이란 혁명으로 팔라비 왕정이 몰락하고 이후 수립된 이란 이슬람 공화국 정부로부터의 정치적 박해와 탄압을 피해 미국, 캐나다 등 서방 국가들로 망명, 이주해온 이란계 미국인 이란계 캐나다인의 1세대 이란 출생자들도 사실상 실향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게다가 이들 대부분은 혁명 이후 들어선 현 이란 정부로부터 궐석재판에서 정치범으로 분류되어 사형 판결을 받았는데 현재까지도 이란 정부에선 이들 대부분에게 내려진 사형판결을 취하하지 않고 있어 만약 이란으로 귀국할 경우 사형당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고국인 이란에 돌아가지 못하고 미국이나 캐나다 등지에서 끝이 없는 타향살이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50] 물론 혁명 직후 탈출에 성공한 사람들은 운 좋게나마 팔라비 왕정 시절에 모국에서 이루어 놓은 모든 재산과 부를 잃고 미국이나 캐나다 등지에서 새 삶을 시작했지만, 탈출을 하지 못했거나 호메이니, 하메네이, 라프산자니[51] 등 혁명을 주도한 신진 집권 세력들을 만만하게 여기는 등 오판을 하여[52] 이란 국내에 잔류한 사람들은 대부분 혁명 이후 수립된 이란 신정부로부터 모든 재산과 지위를 뺏기고 총살, 교수형을 당해 죽거나 주요 공직에서 퇴출되는 등 중앙 권력에서도 철저히 배제되어 몰락해버렸고[53], 혹은 뒤늦게 정신차리고 이란을 탈출해 주변국을 건너 미국, 캐나다, 유럽, 호주 등 서방 국가로 도주하려다가 이웃 나라 국경지대에서 탈출에 실패하여 이란군의 총격을 받아 죽거나, 발각 또는 체포되어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가거나 총살당하는 일들도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인지 이들 중에는 이란 혁명 이후 성립된 현 이란 정부에 대해서 굉장히 적대적이며 미국에 망명 중인 팔라비 구 왕가를 지지하며 팔라비 왕조의 왕정복고를 주장하거나, 이란 현 정권은 반드시 무너져야 한다고 강경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물론 팔라비 왕조 말기인 1970년대나 이란 혁명 이후인 1980년대에서 1990년대에 태어나 혁명 후 수립된 이란 현 정권에 대한 반감과 거부, 지속되는 미국 등 서방의 경제제재로 먹고 살길이 막막한 나머지 이란을 떠나 미국, 캐나다 등 서방으로 이민 간 이란인 이민자들도 있지만 이들은 거의 대부분이 자의로 떠난 것이기 때문에 팔라비 왕정 폐지 이후에 들어선 이슬람 신정 체제 정부에게서 정치적 박해와 탄압을 피해 국외로 도주, 정착해 자기나라에 돌아가지 못하는 혁명 이전 이란 출생의 해외 이란계 이민자 1세대들보다 사정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최소한 적어도 서방에서 살다가 모국인 이란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으니 말이다.
  • 우크라이나 아제르바이잔 등의 구 소련 출신 국가들에서도 1991년 소련 해체에 의한 독립 이후에 러시아에게 합병된 크림반도와 소련으로부터의 독립 이후 아르메니아와 벌인 전쟁에서 패해 아르메니아군에게 점령당한 아르차흐 같은 분쟁 지역에서 탈출하여 우크라이나와 아제르바이잔 본국으로 도주해나온 우크라이나인 실향민과 아제르바이잔인 실향민들이 일부 존재한다.[54] 다만 아르차흐의 경우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 아제르바이잔이 아르메니아에게 반격하여 아르메니아가 점령한 아르차흐 지방 영토 절반과 국경 지대 일부 영토들을 아제르바이잔이 다시 수복하면서 과거 해당 지역에서 거주하다 90년대 아르메니아와 전쟁 당시 아르메니아군으로부터 쫓겨나온 아제르바이잔인 실향민들이 다시 돌아갈 가능성이 생겼다.[55] 대신 아르차흐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아르메니아 본토로 실향민이 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 러시아의 경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러시아 제국 독일 제국 러시아령 폴란드 러시아령 발트 지역을 빼앗기면서 두 지역으로 이주해 살던 러시아인들이 러시아 본토로 도망쳤으며[56]. 러시아 내전에서 볼셰비키가 승리하자 백군에 가담했던 인사들이나 구 제국의 지배층이었던 귀족, 자본가 등이 미국, 만주, 서유럽, 중국, 일본, 호주 등으로 망명하며 곳곳에 러시아인 디아스포라를 형성했다. 훗날 소련 해체 이후에는 러시아 본토를 제외한 구 소련 국가의 러시아인들이 러시아 본토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후자의 경우 러시아 본토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해당 국가의 국민으로 살아간 이들도 많지만... 전자에 해당하는 실향민의 후손들과 후자에 해당하는 실향민들은 오늘날 폴란드와 구 소련 출신 국가에 남아 있는 러시아 제국과 소련의 유산을 보존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고, 백계 러시아인들은 망명한 나라에 정착해 살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 우크라이나 양측에도 소련 시절 상대 나라가 고향인 인물들이 상당히 많은데 이들도 일종의 실향민이라 할 수 있다.

5.2. 아메리카

  • 캐나다 미국 독립 전쟁으로 지금의 미국 땅에서 설 자리를 잃은 영국 왕실 충성파가 지금의 캐나다 땅으로 대거 이주하면서 지금처럼 영국계 백인이 대다수인 나라가 되었다. 결국 캐나다 백인들은 전부는 아니지만 미국 출신 영국계 실향민의 후손이 대다수인 셈이다.
  • 멕시코의 경우 미국-멕시코 전쟁으로 오늘날 미국의 구 멕시코령 지역이 지금처럼 미국 영토가 되면서 해당 지역에서 멕시코 본토로 망명한 멕시코인 실향민의 후손들이 존재하며[57], 남북 전쟁 종전 이후 미국을 떠나 멕시코로 망명한 남부연합 유민(민간인) 및 남부연합군 패잔병[58]의 후손들도 일부 존재한다.
  • 볼리비아의 경우 과거 볼리비아 영토였던 안토파가스타 지역에서 살다가 태평양 전쟁에서 칠레로 합병된 직후 칠레군과 이 지역으로 이주해오는 칠레인 이주민들의 보복과 텃세를 피해 안토파가스타를 떠나 볼리비아 본국으로 도피해 온 볼리비아인 실향민의 후손들이 일부 존재한다.[59]
  • 콜롬비아의 경우 파나마가 콜롬비아로부터 독립하고, 브라질에게 남부 아마존 밀림 지역을 강제 할양당한 이후에 각각 파나마의 분리독립과 브라질로의 합병에 반대하다가 콜롬비아 본토로 망명한 파나마/구 콜롬비아령 아마존 지역 태생의 콜롬비아인 후손들이 있다.
  • 에콰도르 역시 1941년 에콰도르-페루 전쟁에서 이전 에콰도르 땅이었던 동부 아마존 강 유역 지방의 영토들이 페루에 흡수된 이후에 해당 지역에서 거주하다가 에콰도르 본토로 도피한 에콰도르인 실향민의 후손들이 일부 존재한다.
  • 브라질의 경우 아르헨티나-브라질 전쟁에서 브라질이 패배함에 따라 브라질 치하 우루과이의 포르투갈어 사용자 및 스페인어가 모어이면서 브라질에 부역했던 사람들이 브라질 본토로 망명한 바 있고 현재까지도 그들의 후손들이 남아있다. 현재까지도 브라질 내 극우세력은 아르헨티나-브라질 전쟁으로 인한 브라질의 우루과이 상실을 마라카낭의 비극과 연관지으며 자국의 엄청난 치욕으로 여긴다. 한편 남북 전쟁 종전 이후 미국을 떠나 브라질로 망명한 남부연합 유민(민간인) 및 남부연합군 패잔병의 후손들도 있는데, 이들은 오늘날 미국계 브라질인의 기원이 되었다.
  • 1959년 쿠바 혁명 직후 공산 독재 정권이 수립된 쿠바를 떠나 미국으로 망명 혹은 이주해 온 쿠바계 미국인들 및 비슷한 시기나 그 이후에 미국을 떠나 공산화된 쿠바로 망명한 공산주의 성향 미국인들( 미국계 쿠바인)도 실향민에 가깝다.

5.3. 기타

  • 이외에도 미군, 영국군 기지가 들어서면서 강제로 축출된 차고스 제도의 원주민이나 핵실험장이 들어선 비키니 섬, 에니웨톡 섬의 원주민들, 이전부터 살던 영토에서 백인 이주민들과 영국과 스페인 등 유럽 열강으로부터 독립한 아메리카 각국 정부의 영토 확장 정책에 내밀려 원주민 보호구역으로 강제 소개된 미국, 캐나다, 칠레, 아르헨티나 등 아메리카 국가들의 아메리카 원주민[60], 그리고 2011년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당시 방사능 유출로 방사능 오염된 후쿠시마 지역을 떠나 큐슈, 시코쿠, 혼슈 남부, 홋카이도, 쓰시마 등 일본 여타 지역들로 이사를 간 후쿠시마현 출신 일본인들[61], 중국공산당의 탄압을 피해 중국을 떠나 인도와 미국 등 해외로 망명한 티베트인들과 위구르인들, 독재 정권 치하의 국가들에서 정치적 탄압을 받다 탈출해 유럽, 미국, 캐나다 등 서방권으로 망명한 해당 국가 출신의 정치적 망명자들도 넓은 범위에서 실향민이라 할 수 있다.

6. 외국의 실향민 실존인물

6.1. 중화권

6.2. 일본

6.3. 인도

인도와 파키스탄(+방글라데시)은 1947년 분리되기 전에는 다같이 영국령 인도 제국에 속해 있었다.

6.4. 파키스탄

현재의 인도 영토 출신 파키스탄 무슬림을 무하지르라고 부른다.

6.5. 프랑스

★는 알자스-로렌이 고향인 1871년 이전 출생자 중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에도 프랑스 국적을 유지한 인물. 별도의 표시가 없는 인물은 프랑스의 해외 식민지가 고향인 인물. ( 피에 누아르 포함)

6.6. 영국

6.7. 독일

★는 서독/ 동독에 거주했지만 동독/서독이 고향인 인물. 별도 표시가 없는 경우는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 주데텐란트 포함)이 고향인 인물.

6.8. 네덜란드

6.9. 루마니아

6.10. 구 유고슬라비아

6.11. 이탈리아

6.12. 핀란드

6.13. 폴란드

6.14. 헝가리

(이상 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영토)

6.15. 그리스

6.16. 튀르키예

6.17. 에티오피아

6.18. 소련

6.19. 러시아·우크라이나

※ 실향민 여부는 실효 통치 영역, 즉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전선에 따른다.
2014년 이전 사망한 인물은 추가하지 말 것.

7. 관련 항목

8. 실향민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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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국산 창작물

8.2. 가공의 세계의 실향민 캐릭터



[1] 북한이탈주민도 이에 해당한다. [2] 1980년대만 하더라도 청년 실향민이 있었으나 2020년대 현재는 모두 70세 이상인 노인이 되었다. [3] 북한이탈주민은 이와 반대로 함경북도가 가장 많다. [4] 개성시의 경우 당시 9만 명의 인구 중 3만 명만이 월남했다고 한다. 전쟁 전에도 대한민국 영토였기 때문에 북한의 점령이 일시적이라고 생각해 피난민이 많지 않았고, 피난을 가더라도 가족 중 일부만 간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출처: 박소영.(2016). 한국전쟁 이후 개성주민의 삶의 변화 연구. [5] 그러나 그렇다고 실향민 집안의 사람들에게 " 북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식의 질문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가뜩이나 조부모 내지 부모한테 고향 땅 못 가게 만든 김씨 일가들에 대한 각종 원망 - 증오 - 분노에 가까운 발언들을 들어온 이상 당연히 좋은 반응이 나오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 일부 정통주의가 강한 실향민 집안은 명절에도 북한식으로 조반상을 준비한다. 떡국 대신 만둣국, 면류로 명절 음식을 준비한다는 집안이 있다면 대부분 북한계 혈통이니 참고하는 것도 좋다. [6] 다만 이 경우는 어린 아이 때 내려온 것이라 어머니가 이북에 남겨지게 되어 스스로 실향민이라는 인식은 있겠지만 이북 지역에 자신의 정체성을 깊이 결부시키지는 않는다. 비슷한 사례로는 자신의 고향이 충청도라고 한 황해도에서 태어난 가수 조영남이 있다. 분단의 아픔을 깊게 느껴 지역갈등을 싫어하여 화개장터 같은 노래를 펴낸 정도다. 이회창은 더 심하여 아버지가 충청남도 사람이지만 자주 옮겨다니다가 황해도에서 태어난 것이라고 한다. [7] 아모레퍼시픽, OCI의 창업주가 개성 상인의 후손이다. [8] 윤여정 이상벽을 빼면 북한 땅이나 그곳 풍습에 대한 기억이 어느 정도 있다. 현미는 아예 여동생이 지금도 북한에 있고, 이순재 인간극장에서 탈북자인 배우 김아라 씨를 보고 동향 사람이라고 하기도 했다. 고인이 된 송해 역시 유명한 이산가족이자 실향민이었는데, 전국노래자랑 황해도에서 하고 싶다고도 했다. 그러나 송해는 안타깝게도 2022년 6월 8일 사망하면서 그 꿈을 이루지 못하게 됐다. [9] 그런 까닭에 실향민 2세인 문재인 경희대에 진학했다. [10] 장영희 교수의 부친과 모친 모두 평안남도 출신이다. [11] 이인희(1986). 8.15와 6.25를 전후한 북한 출신 피난민의 월남이동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지리학과 석사학위 논문 [12] 기간별 월남자 추정치는 연구에 따라 상이하다. 전쟁 이전 월남자의 수가 60만 규모이고, 전쟁 기간의 월남자가 80만 이상이라고 비정하는 연구도 있고, 전쟁 이전과 전쟁 기간의 월남자가 서로 비슷하다는 연구도 있다. [13] 대표적인 사례로 배우 임하룡이 있는데, 어린 시절 살던 동네가 충주댐 공사로 수몰되었다고 한다. [14] 워낙 교육이 되지 않는 내용이다보니 미국으로 피난을 간 실향민 대상의 소련 여군의 전쟁 범죄가 유머 컨텐츠로 소비될 지경이었다. # 보수적 유교 문화가 강하게 남아 있던 1940년대에는 부녀자 대상의 성범죄는 규탄되었어도, 남자가 소련 여군에게라도 성폭행을 당한다는 것은 수치였기에 거론조차 할 수 없었다. 정형돈 같은 여성의 성범죄를 당한 남성이 인권의식이 발달된 현대에도 트라우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훨씬 고통스럽고,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고통에 시달리는 중범죄를 당한 것이다. [15] 김일성의 세력이 정치적 세력을 적극적으로 빠르게 구축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사망자가 발생한 시위나 테러 시도가 있을 정도로 저항이 좀 있었지만 곧바로 이들이 한 눈을 판 사이 현재 '청년동맹'으로 불리는 민청 같은 것을 만들어 감시 체계가 구축되었다고 한다. 6.25 전쟁 당시에도 인민군이 점령하던 곳은 북한 당국의 행동이 아주 신속하여 머슴 같은 사람들이 출세했다는 만족감에 북한 정권에 충성하는 등 사회 계층이 아예 반대로 될 정도로 급격한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16] 김일성장군의 노래의 작곡자가 친일인명사전에 올라와 있다. 추후 아예 한국 정부에 충성하던 인물인 월북자 최덕신의 사례처럼 북한 정권은 공산주의자보다는 이런 보신이나 자신들이 충성시 주는 정치적 혜택을 택한 사람을 더 좋아했다. [17] 김선호.(2020). 「조선인민군: 북한 무력의 형성과 유일체제의 기원」. 『한양대학교 출판부』. 571-574. [18] 미소 군정기에 월남한 사람들은 육지는 소련 군정 관할이지만 바다는 미군정 관할인 해주 남쪽 반도지역에서 배를 타고 당시까지만 해도 미군정 관할이던 옹진이나 연백을 거쳐서 내려온 경우가 많았는데, 옹진이나 연백에서 다시 해로나 육로를 거쳐 처음 도착한 곳은 대부분 인천 아니면 서울이었을 것이다. 그 외에 동해안 쪽 양양에서 배를 타고 삼팔선을 넘어 강릉으로 넘어오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 경우는 당시 교통 사정상 영동지역에 정착하거나 아니면 아예 부산이나 포항 등 남부로 내려갔을 것이다. [19] 애초에 이북도민회에서 어림잡아 제시한 수치다. 북한 공산정권과의 체제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우리 정부도 이 수치를 그대로 채택했다. [20] 부산식으로 약간의 어레인지는 되었다. [21] 이 수치는 개성시 등 인공 치하 경기도와 강원도 일대의 실향민을 포함하지 않은 것이었으며, 이북 출신이면서도 의도적으로 고향을 제대로 밝히지 않은 경우가 당시에는 비일비재하였으니 실질적으로는 더 많은 인구가 실향민이었을 것이다. 특히 개성시의 경우 일제강점기 시절 북한 지역내 손꼽히는 도시지역이니 서울에 정착했을 확률이 상당히 높다. [22] 파주와 인접한 장단군이나 개풍, 개성 출신들이 많다고 한다. [23] 주로 경기도와 황해도 출신. [24] 주로 황해도와 평안도 출신. 2013년 의정부문화원 연구에 따르면 현재 의정부 인구의 15%가 실향민과 그 후손이며, 과거에는 전체 인구의 1/3 수준이었다고 한다. [25] 주로 강원도와 황해도 출신으로, 김화군 철원군 주민들이 전쟁 당시 대거 수원으로 소개된 영향이 있다. 이 지역에 정착한 실향민으로 김진표 국회의장이 있다. 그는 황해도 연백 출신이지만 1.4후퇴에 수원에 정착해 수원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26] 특히 대도시인 평양시 개성시 출신. [27] 현재 교동도 인구 3,000명 중 1,000명 정도가 실향민이거나 그 후손인 것으로 추정된다. [28] 북한으로 월북한 사람들이 있기는 한데 거주의 자유가 북한에 없어서 마을을 형성하지는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29] 속초에 가면 오징어를 피로 싼 순대를 많이 보는데, 이러한 오징어순대는 원래 함경도 토속 음식이다. 그리고 함흥냉면 아바이마을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30] 서울토박이는 제외. 이들은 초창기 때부터 인천항을 통해 하와이나 로스엔젤레스에 정착한 사람들이 대부분 이 지역 출신으로 상당히 많았다. [31] 미주 거주 실향민들 중 평안도 출신이 많은 이유도 이에 기인한 걸로 보여진다. [32] 다만 康씨나 현(玄)씨는 제주도에도 상당히 많다. 태(太)씨는 경북 경산이나 문경에도 집성촌이 있다. 길씨는 강원도 화천군 충청남도 금산, 동씨는 경기도 의정부, 양주에 집성촌이 있다. [33] 청나라의 국교였다. 근현대 중국에서 티베트 불교 신자들이 중국 남부 지역에도 존재하게 된 것은 티베트의 직접적인 영향보다는 청나라의 영향이 크다. [34] 제2차 세계 대전 발발의 구실이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폴란드에 넘어간 구 독일 제국 영토로 인한 분쟁이었다는 점을 내세워 연합군 측이 일부러 독일계 주민들을 추방했다. 그러나 양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령이 된 알자스-로렌의 경우는 독일계 주민들이 독일 본국으로 쫓겨나가기도 했으나 나치 독일 점령 당시 나치 부역 행위에 대해 반성하거나 1870년 이전에 프랑스 국적자였던 현지 주민과 그 자손 중 해당 지역에서 계속 거주하기를 희망하던 독일계 주민들에게는 프랑스 국적이 부여되거나 사면되었다. 반면 1870년 이후 독일 본토에서 알자스-로렌으로 이주한 독일 본토인 및 그 자손이나 알자스-로렌이 독일령으로 남아야 한다고 끝까지 주장한 독일계 주민들은 동구권의 구 독일령 지역 출신 독일인 실향민들처럼 끝내 독일 본토로 강제 추방당했다. [35] 이들은 쪽수를 바탕으로 추방민 연합회(Bund der Vertriebenen)를 만들어 1970년대까지 서독 정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나마 동서독 분단으로 인한 독일의 실향민 세대들은 1990년 동서독 통일이 되면서 자기가 태어난 구 동서독 지역의 고향으로 되돌아가거나 동서 분단으로 잃어버린 재산이나 집 등을 어느 정도 되찾는 등 양차 대전 이후 구 독일령 지역의 승전국 편입으로 고향을 잃은 실향민 세대들보다는 적어도 양호했다. [36] 각각 해안 지역( 부자크)은 우크라이나에 편입되었고 내륙 지역은 몰도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라는 소련의 괴뢰국으로 재편되어 내륙 지역은 1991년 소련이 해체될 때 몰도바로 독립했다. [37] 1991년에 소련 해체 이후 우크라이나 영토가 되었다. 현재의 체르니우치주 [38] 다만 여기는 역사적으로도 원래 불가리아 영토였다. [39] 일례로 세르비아의 천재적 발명가인 니콜라 테슬라도 크로아티아에서 출생했다. [40] 주권국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일부분임에 주의해야 한다. 크로아티아계와 보슈냐크계 지역이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부에서도 세르비아계 지역은 스릅스카 공화국이 지금도 보스니아 면적의 49%를 차지하여 존속 중이다. [41] 게다가 심지어 이들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탈리아 왕국 등 추축국의 유고 점령기에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와 보스니아의 SS 한트샤르 여단에게도 학살당한 이력이 있었다. [42] 이들 중에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스릅스카 공화국조차도 불안정하고, 위험하다며 외려 세르비아 본국에서 사는 게 더 안전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43] 가령 베드란 촐루카가 그런 경우로 아예 크로아티아로 이주했다. [44] 토착 요르단 아랍인은 이슬람 이전부터 존재하던 고대 아랍인의 후손이다. 서기원년 전후에는 아람어가 주류 언어였던 인근의 팔레스타인이나 시리아 등지와 달리, 요르단은 기원전부터 고대 아랍인이 주류 민족이었고 아랍어가 통용되던 지역이다. 지금도 요르단 아랍어는 시리아나 팔레스타인 아랍어보다는 인접한 사우디아라비아 내륙 지역의 네지드 아랍어와 좀 더 가깝다. [45] 이는 아랍권의 공통된 문제이기도 하다. 아라비아 반도 본토를 제외한 다른 아랍권의 아랍인들은 엄밀히 말하자면 아랍화된 비아랍계 토착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아랍어를 써도 표준아랍어를 쓰는 게 아니라 각각 자기 나라의 아랍어를 쓰면 스페인 본토의 스페인어 라틴아메리카권 국가의 스페인어, 포르투갈 본토의 포르투갈어 브라질의 포르투갈어처럼 엄청난 차이가 있다. [46] 그나마 시리아 출신의 시리아 난민들이야 전쟁이 끝나면 돌아갈 수 있는 고국이라도 있지만, 이들은 그런 것도 없다. [47] 다만 엄밀히 말하면 외성인은 대만에 호적이 있는 사람 중 타이완성이 아닌 지역에 본적을 둔 사람 전체를 의미하고, 때문에 국부천대 이전에 중국 본토에서 태어나 이주한 사람들의 2세대 이상 후손과 본래 대만 본토에 속하지 않는 지역인 진마 지구의 토박이들까지 포함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완전히 일치하는 개념은 아니다. 또한 출생지는 중국 본토이지만 본적지가 타이완성인 경우, 가령 본인은 중국 본토 시안시 태생이지만 아버지가 대만 태생인 롄잔과 같은 경우는 외성인이 아닌 본성인으로 분류된다. [48] 대부분 국민당의 대만 통치에 불만을 품은 본성인들이 중국 대륙으로 망명한 경우이다. [49] 일례로 피에 누아르 중 대표적인 인물인 알베르 카뮈의 연구에 참여한 김화영 교수는 알제리에 가서 카뮈에 대한 흔적이 철저하게 없어진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그가 보여준 알제리에 대한 인식을 똑같이 식민지를 겪은 한국인으로선 받아줄 수 없다고 선을 그은 바 있다고 하였다(김화영, 《알제리 기행》 참고). [50] 개중 대다수는 고향에 가지 못하고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 노환이나 병으로 사망하기도 했다. [51] 강경 시아파 이슬람 원리주의자였고, 집권 후 팔라비 왕조 정부가 취했던 세속적 정책들을 다 엎어버리며 최고 종교지도자의 권위를 앞세워 이슬람 극단주의 식 정치를 앞세워 반대자와 자국민들을 수없이 죽인 호메이니, 하메네이와 달리 이 사람은 그나마 정치적으로 온건했던 인물이었다. 심지어 살아생전에 후배 혹은 동생뻘이던 최고 지도자인 하메네이를 공개적으로 비판할 정도였을 정도로 이란 정계에서의 영향력과 지지세력들이 꽤 있었다. [52] 게다가 이들 중 일부는 혁명 이후 군주제에서 공화제로 정권 체제만 바뀌고 이란의 새 정부가 자신들의 직위를 보장하거나 새 정부 아래에서도 공직자 유임을 허락할 것이라는 생각까지 했다. [53] 게다가 현재 이란에서도 구 팔라비 왕정 체제에 복무했던 구 집권층 출신 인사와 그 일가들에 대한 정치적 탄압을 거두지 않고 있어 2세대 자식, 조카와 3세대 손주 같은 후손들조차도 냉전 시대 당시 이전 대한민국의 연좌제 정책과 비슷하게 이란 정부에게서 탄압과 불이익을 받고 있다. [54] 이 두 분쟁 지역들 모두 각각 러시아인과 아르메니아인의 인구 비율이 높다. [55] 다만 이들 중에서도 아르메니아의 아르차흐 재침공을 우려하여 사실상 영원히 실향민으로 살게 되는 이들이 존재할 것이다. 아르메니아가 강대국인 러시아를 우방국으로 두고 있어기 때문이다. [56] 이들은 훗날 소련이 러시아령 발트 지역을 수복하고 폴란드에 친러(친소련)국가인 폴란드 인민 공화국이 세워지면서 각 지역으로 돌아온 경우도 있다. [57] 다만 멕시코 본토로 망명하지 않고 그대로 미국인이 된 멕시코인들도 많았으며, 이들이 오늘날 멕시코계 미국인의 직계 기원이 된다. [58] 이쪽은 오늘날 미국계 멕시코인의 조상들 중 하나가 되었다. [59] 일부는 태어나고 살던 고장을 떠날 수 없어 칠레령이 된 안토파가스타에 남아 칠레 시민권을 받고 칠레 국민이 되기도 했다. [60] 페루, 볼리비아, 에콰도르, 콜롬비아, 과테말라, 니카라과 등은 식민지 독립 후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토지를 빼앗아 자국내 원주민을 원주민 보호구역에 강제소개시키지 않았으므로 제외. 다만 이들 나라들에서도 20세기까지 원주민들이 백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대접과 홀대를 겪었다. [61] 물론 위의 사례들보다는 그나마 자발적이다. [62] 카뮈의 사망 당시(1960년) 알제리는 프랑스 영토였기에 취소선 처리. 알제리 독립은 1962년이다. [63] 바덴-뷔르템베르크 [64] 구벤의 경우는 나이세강을 끼고 있던 도시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강 동쪽에 있는 절반이 폴란드에 귀속됨에 따라 지명 역시 폴란드어식 발음인 구빈으로 바뀌었는데 피크는 하필이면 강 동쪽, 즉 현재의 폴란드령 구빈 출신이었다. 이후 동독령으로나마 생존에 성공한 서부 구벤은 동서독 분단 당시 빌헬름 피크의 도시 구벤(Wilhelm-Pieck-Stadt Guben)이라 불렸다. [65] 동독 공산당 서기장 중에서는 유일하게 서독 지역 출신이었다. 가족들이 서독에 남아 있어 실향민임과 동시에 이산가족이었는데, 서독을 1987년에 방문하면서 고향인 노인키르헨에 들러, 가족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있던 여동생 게르트루트와 상봉하기도 했다. 동서독간 관광 목적 방문은 우리나라에 비하면 쉬운 편이었고, 노인키르헨은 서기장 고향 답사 목적으로 동독 학생들의 단체 방문 허가가 꽤 쉽게 난 곳이다. 여담으로 게르트루트는 1994년에 오빠 호네커가 사망한 지 수 년 뒤인 2010년에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66] 베딩은 '붉은 베딩'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베를린 내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강한 곳으로 유명한 동네였다. 밀케 본인도 그 영향으로 공산주의자로 성징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베딩은 분단 이후 서베를린으로 귀속되었으며, 바로 옆에 세워진 베를린 장벽을 넘어 수많은 동독 주민들이 탈출하는 자유의 최전선이 되었다. [67] 루마니아 왕국 영토 [68] 하지만 현재도 세르비아인이 주류인 스릅스카 공화국 지역인데다(샤마츠 지역은 지금도 (2013년 기준) 세르비아인이 77%을 차지하는 지역이다. 오히려 유고 내전 직전에는 보슈냐크인이 34%로 세르비아인 28%보다 더 많았다.) 게다가 유고슬라비아 해체도 한참 전인 십대 때 베오그라드로 이사를 간거라 강제로 쫓겨나온 것도 아니어서 실향민으로 봐야 할지 애매하다. [69] 보스니아계 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현재 세르비아 정교회 신자이고 세르비아 국적으로 세르비아에 살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여기에 기재. 참고로 본인은 자신의 민족 정체성을 유고슬라브인으로 간주한다고 언급하였다. [70]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1860년 토리노 조약으로 사보이아 가문의 고향 사보이아와 함께 프랑스 제2제국에 할양되었다. [71] 겨울전쟁 계속전쟁으로 소련에게 빼앗겼다. [72] 現 우크라이나 리비우 [73] 원작 한정. 애니메이션에서는 애니화 시기 자체가 상당히 늦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설정이 본의 아니게 북한이탈주민으로 변경되어야 했다. 20[age(2000-01-01)]년 기준 실향민의 최소 나이가 정전 협정일 기준으로 봐도 [age(1953-07-27)]살이므로 실향민 설정을 존치하는 것 자체가 무리가 매우 클 수밖에 없다. [74] 아들인 최호돌과는 달리 애니메이션에서도 실향민 설정이 존치되어 있을 가능성이 약간이나마 존재한다. [75] 고향이 묘향산 근처라고 한다. [76] 에피소드 216화 중 영삼이가 노구의 행적을 찬양하는 내용에 따르면 1950년 9월 17일 월남했다고 나오는데, 노구의 아들 노주현은 1949년생이다. [77] 올드 시즌에서는 단순히 원수 그 이상이나 이하도 아니었지만, 뉴 시즌에선 둘 다 고향인 갈리프레이를 상실했다는 점을 공유하면서 닥터가 마스터를 미워하면서도 동정하게 되었다. [78] 디아블로 2에서 세계석이 파괴되어 아리앗 산이 붕괴당한 이후. [79] 쿠라스트가 증오의 군주 메피스토의 영향에 의해 몰락당한 이후. [80] 둘 다 이케시아 출신으로 공허에 의해 나라를 잃었다. [81] 마오카이가 태어난 뒤틀린 숲은 원래 자운 근처의 리그 경기가 벌어지는 오염된 숲이었으나, 이후 그림자 군도 패치로 그림자 군도에 있는 숲으로 설정이 변경되었다. [82] 수도였던 헬리시움 [83] 생물은 물론 사이보그가 아닌 로봇이지만 바이오성이 피보가 제조된 행성으로 바이오성은 작 중으로 500년 전에 바이오 평화 연합과 반 바이오 동맹의 내전으로 멸망한데다 반 바이오 동맹의 일원인 바이오 헌터 실바를 제외하면 피보가 작 중에서 바이오성의 유일한 생존자다. [84] 아만가 행성의 주민 중 한명이자 공주였던 대성단 고즈마의 간부다. [85] 기라스 행성의 주민 중 한명이자 전사였던 대성단 고즈마의 간부다. [86] 아마조 행성의 주민 중 한명이자 여왕이었던 대성단 고즈마의 간부다. [87] 원래 이카루스 행성의 왕자로 이카루스성의 멸망 이후 성왕 바즈에게 거둬진 후 바즈의 양자이자 대성단 고즈마의 황태자로 있었다. [88] 원래 지구인이 아닌 히스 성인으로 본명은 유이 이부키다. 추가로 히스 성인의 유일한 생존자로 체인지맨이 소속된 지구수비대의 사령관이다. [89] 진을 비롯한 플래시맨 5명은 플래시 성인이 아닌 지구인이었지만 개조실험제국 메스에 의한 유괴를 당하다 플래시 성인들에게 구출되어 플래시성에서 자랐는 데 이로 인해 반플래시 현상을 겪어 20년만에 돌아온 지구에 정착하지 못하고 플래시성으로 가야 했기 때문에 실향민이라 할 수 있다. [90] 1편에서 초월체의 침공으로 수도성이자 고향별인 아이어를 잃었다가 공허의 유산에서 크나큰 희생을 여러 번 치른 끝에 간신히 탈환했다. [91] 아이어에 그다지 애착이 없는 탈다림이나 이한리는 해당되지 않는다. [92] 물론 네라짐도 아이어에 더 애착을 가지고 있으며, 샤쿠라스도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행성이라 샤쿠라스 출신은 매우 적을 것으로 보인다. [93] 지구 집정 연합의 전신으로 지구 집정 연합과 체제가 동일하다. [94] 다만 코프룰루 구역 정착민 2세대와 그들의 후손인 현 테란의 경우 태어날 때부터 코프룰루 구역에 거주하고 있는데다가 지구는 고향이 아니기 때문에 해당사항이 없다. [95] 태사다르가 차우 사라의 정화를 해 버리면서 생명이 살 수 없는 땅이 되어버렸다. 공허의 유산 에필로그 이후 시점인 스타크래프트 에볼루션에서도 이끼 정도만 자라고 있으며, 차우 사라 실향민 모임이 있는 묘사가 있다. [96] 원래는 사망했으나 감염으로 부활하면서 지구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인류의 순수성을 종교처럼 떠받들고 있는 UED의 지구로 돌아가서 처형당하거나 죽지 못해 돌연변이 실험체로 비참하게 살 바에 저그로서 사는게 꽤 나을 것이다. 스투코프 본인도 지구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고 [97] 원래는 사자자리의 눈동자에 해당되는 L-77성의 울트라 일족의 왕자 형제였으나, 사벨폭군 마그마 성인과 그의 수하 괴수인 기라스 형제에 의해 고향이 멸망했다. [98] 드레나이는 원래 에레다르라는 종족으로 모성은 아르거스였지만 드레나이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예언자 벨렌의 지도 아래 아르거스를 탈출한 에레다르들을 제외한 대부분이 타락하여 만아리 에레다르라는 악마가 되어버린 동시에 아르거스가 불타는 군단의 모성이 되어버렸다. [99] 두 종족 모두 대격변에 추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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