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8-11 21:28:56

한민족의 식사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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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김홍도의 그림 '새참'. 그림 속의 인물들이 수저로 퍼먹고 있는 밥그릇 크기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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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인 남자가 밥 먹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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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조선인들의 식사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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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별 밥그릇 비교사진
1. 개요2. 역사
2.1. 고대2.2. 중세2.3. 근현대2.4. 외국인의 평가2.5. 오늘날 한국의 상황
3. 원인에 대한 추측
3.1. 단백질과 지방의 부족 가설
3.1.1. 부정론3.1.2. 긍정론
3.1.2.1. 균형식사의 부재
3.2. 한민족의 체격 가설3.3. 기생충 가설3.4. 낮은 세율로 인해 남는 쌀
4. 동사 '먹다'의 다의성과의 관계설5. 전근대 대식 문화의 평범성6. 여담7. 둘러보기8. 관련 문서

1. 개요

한국인의 식사량이 예전부터 유난히 많았다는 이야기에 대한 문서이다.

이것이 놀라운 이유는, 똑같은 사람임이 분명한 전근대 한국인들이 어떻게 현대인들의 2~3배가 넘는 양의 대식을 했는가 하는 놀라움이라는 점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당대 기록에도 중국인, 일본인, 서양인 모두 '한민족은 식사량이 많다'는 기록이 자주 등장하는 점, 현대에도 주변국가에 비해 비교적 많이 먹고있다는 점 등, 한민족이 주변 국가들에 비해 식사량이 대체로 많은 것은 틀림 없어 보인다.

2. 역사

2.1. 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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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악 3호분(357 AD) 벽화의 일부. 무용총 접객도(5세기)의 일부.
현재 쓰는 일반적인 밥그릇의 크기는 350g이 들어갈 정도이지만, 조선 시대에는 690g, 고려 시대에는 1,040g, 고구려 시대에는 무려 1,300g의 밥그릇이 발굴되었다. 고구려 벽화를 통해서도 옛 선조들이 대식가였음을 알 수 있는데, 상단에 첨부된 표 중 좌측 벽화에 있는 여인이 밥을 짓는 시루의 크기와 우측 벽화 속 밥그릇에 수북히 쌓인 밥의 양만 보아도 고구려인들의 식사량이 상당했다는 사실을 이끌어낼 수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김춘추가 하루에 먹는 양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왕은 하루에 드시길 3말[1] 9마리를 젓수셨는데, 경신년에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는 점심은 그만두고 아침과 저녁만 하였다. 그래도 계산하여 보면 하루에 쌀이 6말, 술이 6말, 그리고 꿩이 10마리였다.[2] 성 안의 시장 물가는 베 1필에 가 30석 또는 50석이었으니 백성들은 성군의 시대라고 말하였다. ─ 삼국유사
실로 어마무시한 식사량이다. 다만 이건 혼자 다 먹는 것이 아니라, 먹을 만큼 먹고 남는 것은 아래의 신하들이 나눠먹는 방식이었다. 수라상 문서의 물림상(퇴선) 관련 내용이 있다.

아래에서 언급된 ''은 흰 쌀밥이 아니라 잡곡밥일 가능성이 높다. 쌀밥을 원없이 즐겨 먹는 건 주로 높은 신분에 한정되었다. 삼국시대 한반도의 귀족 계층은 쌀밥을 먹었지만, 평민들은 잡곡밥을 먹었다고 한다.

부여에 관한 중국 역사서의 기록을 보면 "부여는 오곡을 기르기 적합하다."고 적혀 있다. 참고로 중국의 오곡과 한국의 오곡은 다르며 위서 지리지에서 오곡과 쌀을 따로 기록한 만큼 이 오곡에 쌀이 포함되지는 않았다. 현대에는 만주 지역에선 이모작이 불가능하고 조선 사람들이 간도로 이주해 농사를 짓기 전까지는 벼농사가 오랫동안 되지 않았던 지역이었지만 고구려가 있었던 그 시절은 연 평균기온이 지금보다 3~5도 정도 더 높았다고 한다.[3] 그래서 북위 45도인 만주 중부 지역에서도 이모작이 가능했고 동토인 그린란드도 실제로는 풀이 뒤덮인 섬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서기 10세기에 소빙하기가 도래하면서 연 평균기온이 뚝 떨어져서 그린란드는 동토가 되었고 만주 지역은 벼농사가 힘든 땅이 되어버린 것이다. 1300년 전과 지금은 기후가 약간 달랐다.[4]

다만 이러한 대식이 전반적인 생애에 걸친 충분한 영양 공급을 보장했다고 보긴 어렵다. 그랬다면 조선시대에 이미 현 대한민국의 평균 신장에 이르렀을 것이다. 아래에서 보듯 탄수화물은 정말 원없이 먹었을지 몰라도 단백질이나 지방은 부족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실제 한민족의 식사량이 많은 것과는 별개로, 근대 이전의 기록의 경우 조금 고려해야 할 부분은 있다. 고대에는 인물의 신분과 능력을 과시할 때 실질적인 지식이나 능력 뿐만 아니라 그 개개인의 체구, 외모나 식사량, 주량 등도 그 '능력'에 포함해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의 유능한 무장들이 말술을 마시고 많은 양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도 결국은 '이렇게 술과 음식을 많이 먹을 수 있을 정도의 힘과 재력이 있다'는 점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자신의 근황을 살피는 왕에게 밥을 1말에 고기를 10근씩[5]이나 먹고, 한바탕 말을 타고 달렸다던 염파가 그 예.

또 그와 비슷한 의미로 작게는 개인의 부(富)나 권력, 지위, 크게는 국가 전체의 국력도 이런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현대의 뉴스나 신문기사도 사실과 과장하여 보도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며 근대 이전의 기록에서 인물이 대식을 했다고 해서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그 인물의 능력과 신분을 과시하기 위한 각색일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김춘추도 이런 해석이 나오고 있다. 이러한 사료 해석은 한국사뿐만 아니라 전근대 시대의 역사 전체의 보편적인 요소이다.

2.2. 중세

임진왜란 때 기록한 < 쇄미록>이란 책에는, 보다 구체적으로 조선 사람들의 식습관을 설명했다. 쇄미록에 "조선의 일반적인 성인 남자는 1끼에 7홉이 넘는 양의 쌀을 먹는다"고 적었는데, 이것은 현재 먹는 1공기의 2배의 양이다. [6]

임진왜란 당시에도 이것과 관련한 비화가 있었는데, 한양을 점령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량을 조선군의 식사량으로 계산하니 1달치 정도였다. 당연히 조정에서는 1달만 버티면 왜군들이 물러가리라 생각했는데 고니시 부대의 식사량을 본 밀정이 왜군들의 식사량이 조선군의 1/3정도임을 보고하자, 조정에서는 왜군들이 승리를 위해 일부러 식사량을 줄인다고 생각했다고. 물론 왜군들 입장에서는 평소 먹는대로 먹었을 뿐이였다.[7]

조선시대의 책인 용재총화에서는 그 당시 식습관을 잘 드러낸다. 책 내용에서 '가난뱅이는 빚을 내어서라도 실컷 먹어대고, 군사들은 행군시 군량짐이 반을 차지하며, 관료들은 수시로 모여 을 마신다'라고 비판한 부분이 있다.

조선 전기 훈구파의 대표주자인 이극돈은 조선 백성들의 식습관에 관련한 상소를 올려 '풍년이면 음식을 아끼지 않고, 중국인이 하루 먹을 분량을 한 번에 먹어치우니 그것이 문제입니다'라고 임금에게 간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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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먹는 건 신분의 차이가 없었다. 조선시대 왕의 일과를 보면, 하루 5~6끼씩은 먹은 것을 알 수 있다. 영조는 대표적으로 소식을 하고 덕분에 장수한 임금인데, 소식을 한 기준이 5끼에서 3끼로 줄이고, 고기 위주의 반찬에서 채식위주의 반찬과 고단백질 고기를 더한 현대기준으로 균형잡힌 식단이였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너무 소식한다고(...) 크게 우려했다.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는 ‘스스로 먹는 것이 너무 박하니, 늙으면 반드시 병이 생길 것'이라고 걱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실은 역대 조선 왕들 중 가장 장수했다[8]

이 많이 보급된 조선 후기에 와서도 서유구가 지은 " 임원경제지"의 기록에 '남쪽 사람은 쌀밥을 잘 짓고, 북쪽 사람은 조밥을 잘 짓는다.'고 적었다. 그나마 수전이 먼저 보급되고 기후 조건상 농사가 활성화된 남부 지방은 경제 조건만 되면 쌀밥을 먹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거꾸로 돌리면, 경제 사정이 안 되어서 쌀이 없으면 잡곡밥을 곁들여 지어 먹어야 했다는 소리다. 헌데 이런 잡곡밥은 먹어도 배가 금방 꺼지는 속성이 있다. 이걸 봤을 때, 큰 밥그릇에다가 엄청난 양의 밥을 먹는 것은 충분히 신빙성이 있다는 것이다. 힘이 많이 들어가는 고된 농사 일을 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현재도 운동선수들은 보통 사람보다 식사량이 많다. 고기뷔페에서는 운동선수 출입을 통제할 정도.

식사를 지칭하는 아침, 점심, 저녁 이 중에 유독 점심만 한자어다. 사실 점심이란 아침과 저녁 사이에 먹는 간단한 음식을 가리키는 중국어로, 우리가 흔히 쓰는 딤섬이 바로 점심을 뜻하는 광둥어다. 한국에서도 오래 전부터 아침과 저녁 2끼만 먹기가 평상시의 식습관이었다. 옛 기록에 따르면 고려 초 이후로부터 보통 사람들은 하루 2끼, 귀족 등의 부유층은 하루 3끼를 먹는다고 했고, 이 식습관은 조선 말까지 이었다. 그러나 말이 하루 2끼지 선조들은 그 사이에 소량의 음식을 자주 먹었다고 한다. 아래 항목에 조선으로 파견온 러시아군 기록에서도 조선인들은 하루 3끼를 먹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어디를 가거나 농사를 지을 때처럼 육체적으로 활동하는 때는 엄청난 참을 먹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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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이야기로는 농부 3~4명이서 점심에 잠시 쉴 때 간식거리로 복숭아 25개를 껍질째 우적우적 먹곤 했다고 한다.[9] 이러한 새참문화는 농사나 육체노동을 하는 곳에서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2.3. 근현대

조선시대까지 갈 것도 없이, 1960년대만 해도 일반인의 사기 밥그릇은 용량이 650cc가 조금 넘는 정도였는데 2010년대 현대의 공기밥 밥그릇은 300cc 정도로 2배보다 훨씬 크다. 게다가 그 당시는 밥그릇에 넘치게 고봉밥을 담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밥의 양이 2.5배 정도는 된다. 농부 등 육체노동자가 아닌 도시 사무직 일반인 어른 남자가 매일 사용한 밥그릇이다. 쌀로는 대략 200g 정도이다.

1970년의 한국인 1인당 연간 양곡소비량은 190kg이었고 그중 쌀이 136kg 정도였다. (농가 비농가 합계 평균) 현재는 연간 쌀 소비량이 1인당 60kg 정도로 줄어 들었다. 1일 쌀 소비량은 170g 정도. 공기밥 1그릇은 밥으로 210g, 쌀로는 90g. 칼로리로는 약 300kCal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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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밥상 차림과 밥그릇 크기
종가집이나 제사를 지내는 큰집에 가서 기제사상에 올리는 밥그릇을 보자. 그 크기가 옛날에는 어른용이었다. 요즘 식당에서 공기밥 1그릇 추가하면 주는 용량은 미취학 아이들용이나 돌맞이할 때쯤 되면 선물로 들어오는 아이용 용량과 비슷하다.

70~80년대에는 이러한 식사량을 조절하기 위해 기존의 고봉밥 형태에서 주식의 양이 훨씬 적은 공깃밥(약 200cc급)을 도입해 식당마다 이를 어길 시 단속하게 하는 등 정부에서 규제를 한 덕분에 주식의 양이 크게 줄었다.(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로.) 또한 경제의 발전으로 부식 섭취량이 늘어나 식사의 총량은 몰라도 주식 섭취량은 현대의 한민족이 가장 적게 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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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도 1인당 아시아 1위의 육류섭취, 세계 1위의 해산물 #섭취, 세계 1위 야채 섭취[10] 등으로 대식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70년대 1인당 쌀 소비량 136kg에서 현재는 75kg으로 반토막이 나버렸고, 심지어 이 수치는 아시아 평균 쌀 소비량(78kg)에 못 미치는 것이다. 대신 을 많이 먹어 1인당 면 소비량은 9.7kg으로 세계 1위이다.

2018년의 통계자료를 보면 한국의 연간 해산물 소비량은 78.1kg로 세계 1위를 유지하고 있다. 비교적 해산물을 많이 먹는 걸로 알려진 일본도 58㎏, 중국은 48.3kg 정도이다. 또 소 돼지 닭 등 육류 소비도 한국은 연간 육류소비량이 52.5kg으로 미국 96.8kg 등이나 OECD 평균 63.4kg에는 못 미치지만 중국 49.8kg보다 많고 일본 35.6kg보다는 훨씬 많다. 한국은 수산물 소비는 세계 1위, 육류도 아시아에선 상위권에 속한다는 것. 그리고 육류 소비는 꾸준히 늘고 있다.

2.4. 외국인의 평가

조선시대 실학자 성호 이익 성호사설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식에 힘쓰는 건 으뜸이다. 유구국[11]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고 '밥을 떠서 실컷 먹으니 어찌 가난하지 않겠는가?'라며 비웃었다."이라 기록했다.

임진왜란 당시 이여송은 조선인들이 먹는 양을 보고 놀라 "백성들이 이렇게 많이 먹으면 국가 운영은 어떻게 하냐"고 묻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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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한국에 진출한 베네딕토회 독일인 수도자들.

조선 말쯤에 한국에 머문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12]의 기록에서도 대식을 하는 조선인들의 일화를 확인할 수 있다.[13]
다식에 대해서는 대신과 평민의 구별이 없다. 조선 사람들은 많이 먹는 것이 곧 명예로운 것으로 여기며, 식사의 질보다는 양을 중시한다. 조선 사람들은 식사를 하면서 수다를 떠는 법이 없다. 노동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식사량은 1리터의 쌀밥으로, 이는 아주 큰 사발을 꽉 채운다. 각자가 한 사발씩을 다 먹어치워도 충분하지 않으며, 계속 먹을 준비가 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2~3인분 이상을 쉽게 먹어치운다. 우리 신자들 중의 한 사람은 나이가 30세에서 45세 가량 되는데, 그는 어떤 내기에서 7인분까지 먹었다. 이것은 그가 마신 막걸리 사발의 수는 계산하지 않은 것이다. 64세에서 65세가 된 어느 노인은 식욕이 없다 하면서도 5사발을 비웠다. 조선 사람들은 10사발을 감당하는 자를 장사라고 부른다.

를 잡을 일이 있어 쇠고기가 마음껏 제공되면 아무도 고기로 꽉찬 접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과일을 대접할 경우, 예를 들어 큰 복숭아를 내놓을 때에 가장 절제하는 사람도 10개 정도는 먹으며, 종종 30개, 40개, 50개까지 먹는 사람도 있다. 참외를 먹을 경우 보통 10개 정도 먹지만 때때로 20개나 30개를 먹어치우기도 한다.

조선의 어머니들은, 아이의 배를 손으로 두들겨 보면서 뱃속이 가득해지는 최후까지 밥을 채워 넣는다. 때때로 숟가락 자루로 아이의 배를 두드려 보다가 속이 꽉 찼을 때에 비로소 밥 먹이는 것을 중단한다. 누군가를 잘 대접해야 할 때는 1마리를 통째로 내놓는다. 아무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말할 필요도 없이 각자는 그것을 다 먹어치운다.[14] 쇠고기나 개고기도 큼직하게 썰어서 양껏 내놓는다. 그래야만 사람들은 고기를 먹었다고 여긴다. 특히 곱창 생선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요리이다. 하지만 조선인들이 이를 식탁에 올리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보자마자 먹어치운다. 왜냐하면 조선인들은 자제할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인들의 집에는 비축식량이 없으며, 손에 넣는 즉시 먹어치운다. 물론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찬장이나 식량 창고가 없으므로 음식을 보관할 수 없다. 게다가 이 나라는 기후가 매우 습하기 때문에 음식물이 금방 부패한다.

그리고 취할 정도로 을 마시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임금이나 영의정도 공공연히 폭음을 한다.[15] 술에 취하면 정신을 잃고 바닥에 뒹굴거나, 술을 깨기 위해 잠을 잔다. 그래도 아무도 놀라거나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고, 혼자 쉬도록 내버려둔다. 우리 눈으로 볼 때 이것은 큰 타락이다. 그러나 이 나라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관습이다. 그래서 허용되며 아주 고상한 일이 된다.

구한말 조선을 여행했던 오스트리아의 귀족 출신 여행가인 에른스트 폰 헤세 바르텍(1854~1918)도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조선인들이 대식가라는 점에서, 비교할 만한 대상이 없었다. 내가 일본에 갔었을 때, 일본인들은 자신의 이웃이 자신들보다 3배 가량 더 많이 먹는다고 내게 말했었는데, 나중에 제물포 개항장에 와 보니, 정말로 그랬다. 중국인과 일본인들은 일정한 시각에 식사를 하는 반면, 조선인들은 때를 가리지 않고 식사를 하는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의 밥이, 붉은 고추 한 줌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었다.
조선인들은 이웃나라 사람들보다 고기를 많이 먹는 편인데, 엄청나게 많은 고춧가루와 식초, 그리고 양념을 곁들인다.
에른스트 폰 헤세-바르텍 조선, 1894년 여름 中
영국 출신 여행가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 선교사 그리피스 존의 여행기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조선인들은 보통 한 끼에 3~4인분의 양을 먹어치우며, 3~4명이 앉아 있으면, 그 자리에서 20~25개의 복숭아 참외가 없어지는 것이 다반사이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조선인들은 보통 일본인들의 2배를 먹는다.
그리피스 존
1890년 한반도를 돌아본 러시아군 베벌리 중령은 이렇게 기록했다.
조선농민들은 평상시 식사때 밥과 채소로 만든 국, 건어물 등을 먹었는데 매번 대량의 막걸리와 함께 먹었다. 이를 아침, 정오, 자기전 저녁에 3끼를 먹었다.
베벌리 중령
릴리어스 호턴 언더우드(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부인)은 이렇게 기록했다.
조선인들은 잔치에 가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먹는다. 잔칫날 많이 먹으려고 전날 굶기도 한다. 반면 일본인들은 잔칫날에 근사한 접시를 늘여놓지만 정작 음식은 쥐꼬리만큼 준다.
릴리어스 호턴 언더우드
미국의 군인이자 외교관인 조지 클레이턴 포크 중위[16]는 이렇게 기록했다.
오전 10시에 아침상이 들어왔다. 가슴높이까지 올라온 수많은 음식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중략)
저녁이 되자 나를 위한 연회가 열렸다. 상을 채우고 있는 둥글고 작은 접시에는 10명도 먹을 수 있을 만큼 음식이 쌓여 있었다.
조지 클레이턴 포크, 은자의 왕국 中
다만 당시 그가 받은 반상은 음식이 17개나 기록되어 있었는데, 밥이나 국, 식초, 김치를 제외하면 11첩 반상으로 거의 수라상에 올라가는 12첩 반상 수준이어서 이 정도는 조선인 기준으로도 많은 수준임을 감안해야 한다.[17] 실제로 러시아의 외교관 다데슈칼리안 공후 또한 잔치 때 받은 많은 양의 음식을 이렇게 기록하면서 서울의 대신들 밥상보다 반찬수가 많았다고 기록했다.
15분 후 생선, 고깃국, 달걀, 붉은 고추를 넣은 생선, 수수와 완두로 만든 고기만두, 말린 쇠고기, 설익은 밤, 쌀, 꿀, 다시마, 꽃 모양으로 예쁘게 자른 문어 등 14가지의 갖가지 요리가 담긴 상을 두 개나 받았다. (중략) 곧 조선인 관리 일곱 명이 방에 들어와 대접이 변변치 못해 죄송하다고 절하며 사과했다.
다데슈칼리안, 내가 본 조선 中

2.5. 오늘날 한국의 상황

옛날에 비하면 오늘날 대한민국의 경우 국민의 식사량이 매우 크게 줄었다. 이유는 날씬한 몸매가 아름다움의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건강 관리에 신경을 쓰는 국민들도 매우 많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주식인 밥량이 줄어든거지 양과 칼로리 섭취량은 여전히 많다. 위 항목에 현대 통계에서 나와있듯 쌀 소비량은 아시아 평균 이하로 급속도로 떨어젔지만 육류 소비량은 아시아 1위, 어패류, 채소 소비량은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고 주식도 쌀 소비량은 줄었지만 인스턴트 라면이 득세하면서 면 소비량은 세계 1위로 부식 섭취량이 늘어 절대적인 음식양은 아직도 많다.

흥미로운 점은 식사량은 줄었어도 서구화된 식문화 등으로 한국인의 평균 몸무게는 과거와 비교할수 없을만큼 늘어났다. 당장 통계에서 현재 2~30대 청년들과 70대 이상 노인의 평균 몸무게 차이만 봐도.. 그럼에도 키빨에[18] 비만율은 고작 5%로 OECD 평균 비만율 20%에 비해 크게 낮고 중국, 러시아, 인도, 브라질등 OECD 비회원국 중 주요 국가를 포함해도 인도와 일본을 제외하면 가장 낮은 수준. 키를 숨긴 나라 #

학자들이 이를 근거로 들어 과거에 많이 먹었던 이유는 그만큼 먹어도 칼로리가 여전히 부족했을 것이라는 가설을 제기한다. 조선은 냉장기술이 사실상 없다시피했고 소는 농사에 쓰이기 때문에 웬만해선 도축을 잘 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채소류와 밥을 주식으로 삼았고, 이따금 간식으로 먹는 과일류를 따져봤을 때 도보 이동이 주였던 조선 사람들의 생활상으로 보아 칼로리가 금세 동났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는 그걸 감안해도 많이 먹었다는 점을 설명하지 못한다. 중국인이나 일본인은 무슨 기적의 효율을 지닌 우월한 인종이고 조선인들은 열등한 민족이라 에너지 효율이 낮았겠는가? 아니다. 중국인이나 일본인이 봤을때도 조선인은 그냥 많이 먹었다.(...)[19]

3. 원인에 대한 추측

3.1. 단백질과 지방의 부족 가설

한민족의 식단에서 단백질과 지방 등 고기류가 부족해서라는 가설이 있다.

3.1.1. 부정론

18세기 술집에서 술안주로 가장 인기있었던 음식이 생선 요리와 개장국이었으며, 일반적인 술집 손님의 대부분은 서민이었다 (출처). 또한 김동진 저, 조선 소고기 맛에 빠지다 같은 책과 조사만 봐도 조선 왕조 500년 내내 소를 많이 잡아먹었다. 연 4kg 가량인데 현대 한국인의 연 소고기 소비량이 15kg으로 1985년을 넘어서야 조선인의 연간 4kg을 넘겼다. 먹지 못한 때는 경신대기근 같은 국가적 재난상황 때뿐이었다.

밑의 긍정 항목에 한우 한 마리당 얻을 수 있는 고기를 600kg이라 잘못 대입한 후 계산을 해서 18세기 1인당 소고기 소비량이 연 4kg이라는 잘못된 결론을 내렸다는 서술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서술이다. 1775년 3월 24일 승정원일기 기사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18세기에 하루에 도축되는 소의 수는 약 천 마리,[20] 1년엔 38~39만마리였다. [21] 또한 1676년 1월 승정원일기에서도 당시 하루에 도축되던 소가 천 마리 이상이라는 사실이 언급되고 있다. 18세기 중반 조선의 인구는 1800만 수준으로 추정된다는 사실, 그리고 위의 기록들에 나온 소 도살량을 근거로 계산하면 평균적으로 조선인 한 사람이 1년에 소 약 1/40마리~1/50마리를 소비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여기에 당시 소 한 마리에서 얻는 고기가 평균적으로 160~170kg 수준이였다는 사실을 대입해서 당시 1인당 연평균 소고기 소비량이 약 4kg이였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 또한 당시 소의 사육 수를 보면 17세기 중반~18세기 후반엔 보수적으로 잡아도 사육되는 소의 수가 백만 마리는 넘어갔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 그리고 당시 한우의 크기는 주위 국가의 소들보다 더 컸다는 기록들이 남아 있으며 조선을 방문했던 선교사들의 기록을 보면 무게가 200kg이라 보긴 어려운데 무슨 근거로 일제강점기 전까지 한우의 무게가 200kg이라 하는지 의문이다.[22]

이익, 박제가, 정약용이 남긴 기록은 단순 감상평인데 박지원의 기록은 객관적인 사료라고 할 이유도 없으며 오히려 이익, 박제가, 정약용의 서술은 위에 나온 통계자료들을 통해 어느 정도 뒷받침이 되지만 박지원의 서술은 이를 뒷받침할 통계적 자료가 없어 신빙성은 박지원이 남긴 기록 쪽이 더 떨어진다.

무엇보다 조선시대 전 고대 기록으로도 건강한 시절엔 고기를 많이 먹었음이 기록되어있다. 또한 조선으로 여행온 오스트리아 여행가 에른스트 폰 헤세-바르텍 역시 조선인들은 주변 나라보다 고기를 많이 먹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영양섭취가 단군이래 가장 우수한 현대 한민족 역시 북한을[23] 제외하면 주변국보다 많이 먹고있음이 현대의 통계상에서 보여주고 있다.

또한 양반들의 밥공기 국그릇 크기도 평민들의 것과 같았으며, 양반들은 쌀과 고기 등으로 이루어진 영양식단을 주식으로 삼았음을 볼 때, 영양분 불균형 해소를 위해 평민들이 밥을 많이 먹었다는 설명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냥 습관적으로 많이 먹는 것이고, 신분차이와 가계소득의 차이에 따라 질적인 면만 달랐을 뿐, 무게로 따졌을 시의 양은 거의 차이가 없이 많이 먹었다는 것이다.

일반화시킬 수는 없지만, 양반 중에서도 원균과 같은 장수의 식사량이 현대 기준 건장한 남성의 3, 4인분치를 때려먹었음을 염두에 둘 때, 보통 양반들의 식사량도 원균보다야 적겠지만, 대부분 상당히 많은 식사량을 소비했음을 간접 추론할 수 있다.

3.1.2. 긍정론

조선은 농업 국가였고 주식도 특히 쌀이었기에 탄수화물 섭취는 그럭저럭 괜찮았을지 모르지만, 다른 영양소에 비해 단백질 섭취가 부족했다는 주장도 있다. 밀이 쌀보다 70% 정도 많은 단백질을 가지고 있기에 쌀 섭취 국가는 똑같이 주식인 곡물만 섭취하더라도 단백질 섭취에 불리하다. 이는 대식하는 식사 사진에서 유독 밥은 어마어마한 데 비해 반찬은 보잘 것 없다는 것이 근거가 된다.

다른 가설로는 미곡의 저장 방식이 발달하지 못해 저장기간이 길지 못하고, 유통망의 문제로 각 지역에 골고루 분배되지 못하므로 먹을 수 있을 때 먹어둬서 칼로리를 비축해두려는 풍조가 만연했었다는 가설과, 이 시기는 노동 및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못해 사소한 용무조차 육체노동을 수반할 수밖에 없으므로 저 정도 칼로리를 축적해둘 수 밖에 없다는 가설이 있다. 하지만, 농경사회였던 시절에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성별을 불문하고 고된 노동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금방 배가 고파지기 때문에 그만큼 많이 먹는 것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3면이 바다인 반도 국가이니 생선을 단백질 대체재로 쓸 수 있지만, 안그래도 평지가 별로 없고 산지가 많은데다가 조선시대에는 상공업을 천대했기 때문에 내륙 지방에서 생선값이 높았을 것이다. 오죽하면 박지원"생선 내장을 바닷가에선 거름으로 쓰는데 서울에선 한 줌에 한 푼이냐"라고 할 정도.[24] 그래서 나온 결과물이 간고등어, 건어물, 젓갈 등... 그러나 이런 것만으로 충분한 육식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조선시대가 500년임을 감안했을 때 한해 두해 푸짐하게 육류가 공급되었던 때는 작게나마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저술은 그런 시기에 남겨진 것일 수도 있다.

사실 유럽은 토지에 비해 낮은 인구 밀도, 발전한 도시와 상업망, 그리고 어업에 대한 강한 의존, 목축업과 농업의 복합적인 발전 덕분에 농업 생산성이 동아시아에 비해서 매우 처참했음에도 불구하고[25] 단백질 섭취량은 비교적 양호했다.

한민족은 동북아시아인( 몽골로이드) 중에서 몽골인과 함께 체격이 가장 큰편에 속해서 필요한 열량이 상대적으로 많았는데, 고기가 위주인 몽골 요리를 먹어 단백질과 지방이 풍부하게 공급되는 몽골인보다 많이 먹은것도 근거가 된다. 특히 억지로 열량을 체우기 위해 쌀을 퍼먹어 과도한 탄수화물 공급으로 조선시대에도 성인병인 당뇨(소갈병)을 앓는 사람이 속출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반면 몽골인들은 고기 위주의 식단으로 현대에도 한국인보다 적게 먹고 성인병도 적다. #[26] 실제로 육식 위주의 식단은 채식 위주의 식단보다 훨씬 효율이 좋아 조금만 먹어도 열량을 확보할 수 있다. #

정말로 조선시대 때 단백질 공급이 풍부했다면 동시대에서 신장이 전세계 다른 나라 사람들을 압도해야하는 것이 맞다. 최소한 그게 아니더라도 대한민국 국민의 유전적 평균 신장 한계점으로 평가되는 남 173~174cm, 여 160~161cm에 도달했어야만 한다. # 하지만 위에 나온 기사 자료를 보면 전세계적으로 비교했을 때 한국인의 신장은 매우 작은 축에 속했고 유전적 신장 한계점인 174cm, 161cm에는 택도 없이 부족한 키다. 유전적 차이를 가정하더라도 한국인들은 서양인들에 비해서 작은 편이다. 특히나 기사에 나온 포르투갈은 그 당시 키는 최소 우리보다 5cm가 더 컸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2020년대 한국인의 평균 키는 남자 기준으로 포르투갈보다 크다.

뿐만 아니라 여성 기준으로 볼 때 평균 키가 큰 최근 100년간 제일 많이 자란 국가 중에 하나가 대한민국이다. 이 시기의 평균 키라는 것은 일제의 수탈로 인하여 줄어든 시기라고 보기 어렵다. # 이제 막 일제의 수탈이 시작된 시기였다. 이 시기의 저신장 및 유전적 한계점 키까지 도달하지 못한 이유는 단백질 공급 및 영양 공급이 굉장히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전체를 통틀어 좋다고 할 수는 없어도 최소한 조선 말기에 있어서 대한민국의 단백질 공급은 굉장히 열악한 실정이었다.

조선 후기 농업사를 연구한 논문이나 학술서를 봐도 1인당 곡물 생산에서 특별히 주변국(중국(청), 일본)에 비해서 조선은 우위를 가지지 못했다. 이러한 학술서에서도 지적하는 것은 공통적으로 조선은 도시 산업 발전이 미비해서 농촌에 잉여인구가 지나치게 많았다는 점인데, 청, 일본은 그러한 부분에서는 조선보다 우월했다. 바꿔 말하자면, 청과 일본은 농촌에서 생산된 곡물이 도시 인구 부양을 위해서 흘러가느라 농촌 사람들이 먹을 식량이 줄었다면, 조선은 도시가 딱히 발전하지 않고 농촌에 백수가 많았기 때문에 그런 농촌의 하류층들이 쫄쫄 굶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의 <조선 중기의 경제> 혹은 <조선 후기의 경제>에서 서술한 당시 조선의 기근 및 유랑민의 발생은 큰 골칫거리였다. 해외 선교사들이 방문한 조선의 가호는 대부분 토지와 주택을 가진 최소한의 중산층이었기 때문에 식사량이 많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던거고, 그들보다 하류층인 조선 민중들은 기아에 시달린 것이다.

소고기 이외의 고기 섭취량이 적었음을 감안하면 전체 고기 섭취량은 적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내륙 지방에서 해산물 섭취량은 뻔했을거고, 조선은 돼지고기를 거의 먹지 않았다. 개를 잡는 것이 소를 잡는 것보다야 훨씬 만만하긴 했어도 개는 빨리 자라는 편도 아니고 고기가 많이 나오는 편도 아니다. 닭도 지금처럼 많이 기르지도 않았고 다 늙어서야 겨우 잡았다. 계란의 크기는 지금보다 조금 작았으며 지금처럼 매일 하나씩 낳지 않고 나흘에 하나 꼴로 낳았기에 계란도 흔하지 않았다.

게다가 조선시대의 소고기 섭취량에 대한 계산이 매우 이상하게도 소의 마릿수를 인구수로 나눈 추정값인데, 이 추정값에서 소의 마리 당 무게를 현대 한우랑 비슷한 600kg으로 잡고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까지 한우의 무게는 200kg 내외였으며 더 따져야 하는 것이 한우 중량이 200킬로 나간다 해서 이게 다 고기가 되는 게 아니라 뼈, 가죽 같은 못 먹는 부위를 제외하면 고기량은 무게의 3할밖에 안 된다.[27]승정원일기의 하루 도축량 천여마리를 인정한다 해도 평균 소비량이 400g 정도밖에 안된다.

또한 사람들이 소고기를 많이 먹어서 문제라는 조선시대 학자들의 기록은 말그대로 그냥 학자들이 자신의 감상을 남긴 것일뿐이지 아무런 통계적인 근거가 없는 말이다. 조선의 고위층 일부 혹은 몇몇 백성들이 많이 먹은 것을 가지고 본인의 감상을 남긴 것 따위를 근거로 많이 먹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비약이다. 그리고 당시 기준으로 주요 자산중에 하나인 소고기를 잡아먹는 것은 집안의 대들보를 팔아 굶주림을 면하겠다는 차원과 동일해 보였기 때문에 좀 더 비판적으로 말했을 가능성이 있다.[28]

혹여 만에 하나 풍족하게 먹었던 해가 있었을지언정 심지어 조선왕조는 500년이나 지속된 왕조다. 대한민국은 건국된지 고작 70여년정도 된 나라다. 500년간 서너해 풍족하게 먹은 것 가지고 조선 전체를 통틀어 잘먹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결정적으로 한반도 역사를 통틀어봐도 현대시대 이전에 고기가 풍족했던 적은 단 한번도 없다. 현대시대에 이르러 축산업의 발달 및 수입산 육류의 도입으로 인하여 육류의 섭취가 그나마 늘게 된 것이다.[29] 현대시대 이전의 사람들의 부족한 단백질의 섭취는 강이나 바다를 접하고 있다면 생선이나 조개 등으로 섭취가 가능하였지만 내륙지방의 경우 육류의 섭취가 지극히 제한적이였기에 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냉장시설과 유통시설이 없었던 시대에는 콩을 이용한 된장이 단백질의 섭취수단이였다.

만일 한반도에 고기가 풍족하였다면, 한국의 고기요리는 미국이나 남미처럼 바비큐요리가 발달하였을 것이다. 한국의 고기요리는 부족한 고기로 최대한 배를 채우기 위한 국이나 탕 위주의 국물요리가 대다수였다. 물론 한국 고기요리에 구이 문화가 없던 것은 아니지만 서구식 고기 요리에 비해 고기를 얇게 저미는 성향이 나타난다.
3.1.2.1. 균형식사의 부재
과거와 같은 자급자족 농경사회에선 영양학적으로 균형있는 식사를 매끼니 하는 것이 힘들었다. 농경 사회였던 만큼 고기는 외부에서 가져와야했기 때문이다. 허나 상설시장이 부재하고 유통망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과거엔 고기가 있다 하더라도 민간에까지 보급되고 소비되는 과정이 굉장히 오래 걸렸다. 심지어 소고기를 기껏 구했더라도, 보관 상의 문제로 인해 도축한 고기를 썩기 전에 빠르게 해치워야 했다. 결국 당시 식사의 대부분은 밥과 국, 그리고 절인 채소,김치와 간장이 전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족한 영양분을 채우기에 가장 유리한 것은 곡식이었다. 이 때문에 밥을 많이 먹는 것으로 그 영양을 대체 한 것.이는 단백질 지렛대 가설로 설명할 수 있다. 가설에 따르면,[30] 단백질이 부족한 식사를 이어가게 될 때, 우리 몸은 부족한 단백질 량을 다른 식사로라도 대체해 채우길 원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더 많은 음식을 먹게 된다고.

3.2. 한민족의 체격 가설

잘 알려진대로 한국인은 동아시아는 물론이고, 전세계적으로도 몽골로이드 가운데에서 몽골인과 함께 큰 평균체격을 지니고 있다. 이유는 한민족의 조상인 예맥족이 온 만주땅이 위도상 시베리아의 귀퉁이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며, 베르그만의 법칙에 따라 다른 온대에 사는 황인종들에 비해 평균 키, 덩치가 커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국제적인 기준으로 2019년 만 19세 한국 남성 평균 신장은 175.5cm이다. # 이는 동아시아에서 신체가 가장 크고 # 또한 아시아에서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전부 한국인보다 평균 신장이 작고, 한국인은 남유럽 국가들과 평균 신장이 비슷하며, 의외로 이탈리아(174.4cm), 포르투갈(174.4cm), 불가리아(174.2cm) 등의 일부 EU 국가들도 한국보다 작다. #

이처럼 큰 신체를 가지고 있어서 자연적으로 주변국보다 많이 먹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서양 선교사들은 공통적으로 한민족이 대식을 하지만 주변국보다 키가 크고 힘이 세다고 기록했다.

당연히 덩치가 크고 힘이 센 만큼 이에 걸맞는 규모의 영양분 섭취가 필요하다. 때문에 평균적으로 덩치가 큰 한국인종 자체가 상대적으로 몸집이 왜소한 주변 황인종들에 비해 평균 섭취량이 월등히 많아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많이 먹고 많이 일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 전근대사회적인 문화 풍조가 여기에 기름을 부어, 가뜩이나 많이 먹는 인종이 지나치게 많이 먹는 민족이 되어버렸다는 것. 이 가설대로라면 현대에도 한민족이 주변 아시아 국가보다 많이 먹는 점이 설명된다.

3.3. 기생충 가설

조선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먹게 된 원인이 기생충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를 끓여 마시는 문화는 불교와 연관이 큰데, 조선왕조의 적극적인 숭유억불 정책으로 물을 끓여 차로 달여먹는 문화가 사라졌다.[31]
식기들은 모두 도자기나 놋으로 만들어서 젓가락과 숫가락으로 먹었으며, 한상에 모두 둘러앉아 먹었다. 조선인들은 우리나라(러시아)나 중국, 일본과 달리 차를 많이 마시지 않았다.
V. P 파르네프 대령 1885년

이후 조선인들은 옆나라 중국, 일본과는 달리 우물물이나 계곡물 등을 별다른 처리 없이 그대로 마시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기생충에 크게 노출되었다는 연구가 그것이다.[32][33]

그러나 이런 주장은 다음과 같은 오류가 나타난다. 우선, 조선 전에도 많이 먹었다는 사료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삼국시대에 건설한 화장실을 발굴해보면 그 당시 사람들도 기생충에 크게 노출되었음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

또한 이 가설은 근대 이전에는 한반도 외에 세계 각지에도 기생충이 만연했음을 설명할 수 없다. 한민족보다 적게 먹었다는 중국과 일본도 다량의 기생충이 발견된다. 한민족만 특별히 기생충에 노출된것이 아니라 다른 민족들도 전근대에는 기생충에 크게 노출되어있고 이는 차 문화와 관련없이 구충제가 보급된 현대에 박멸되었다. 기생충이 박멸된 현대에도 한민족은 주변국보다 많이 먹고 있어 해당 이론만으로는 한민족의 대식을 설명하지 못한다.

3.4. 낮은 세율로 인해 남는 쌀

일년 내내 많이 먹는다는 건 그 만큼 평소에는 먹는게 남아돈다는 소리이기도 한데 조선은 일단 유교 사상을 중시하여 백성에게서 심하게 뜯어내면 나라 말아먹는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실천하였는데 조선 후기 철종 시절 세율은 대략 7.5%로 옆 나라 일본의 낮은 세율이 60%[34]는 쉽사리 넘나들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백성은 하루 한끼 먹을 것만 있으면 되고 그 이상 있으면 딴 생각을 품는다는, 잇키를 부를 발언을 한걸 생각하면 매우 낮은 세율이었다. 대식을 하고 싶어도 먹을게 있어야 대식을 하니 일본은 대식가가 조선보다 적은 편이었다. 당연히 먹고 싶어도 못 먹다 보니 체격도 왜소해진다. 조선은 옆 나라에 비하면 세율이 낮아 백성들도 나름 먹을게 많았고 쌀의 유통기한은 도정 후엔 2년 도정 전에는 5년으로 그 전에는 일본에 비해 2배는 남는 쌀을 다 먹어치워야하니 자연스레 많이 먹게 되었고 체격도 동아시아에서 가장 커졌고 체격이 커진만큼 더 먹게 되었다는 설이다. 낮은 세율에는 이처럼 좋은 점도 있지만 나쁜 점도 있는데 정부에 돈이 없어서 정부 주도의 대규모 사업을 하여 팽창하진 못한다.[35][36]

4. 동사 '먹다'의 다의성과의 관계설

'먹다'가 다양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이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특별히 구분하지 않고 혼용: ex) 물을 먹다/마시다
  • 어떠한 마음을 품다: ex) 마음을 먹다
  • 나이가 차다: ex) 나이를 먹다
  • 무언가를 획득하다: ex) 아이템을 먹다
  • 두려움을 느끼다: ex) 겁을 먹다 → 식겁
  • 욕을 듣다: ex) 욕을 먹다
  • 물품이나 돈을 받다, 수익을 차지하다: ex) 뇌물을 먹다, 먹튀
  • 물이나 습기 따위를 빨아들이다: ex) 먹물을 먹인 붓, 풀먹인 셔츠
  • 어떠한 경기에서 등급이나 점수를 얻다: ex)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 물리적 타격을 입히거나 당하다: ex) 주먹 한 방 먹여줘
  • 관계를 맺다: ex) 나 걔랑 친구 먹었어
  • 무엇과 같거나 동등하다: ex) 그의 야심은 고래와(과) 맞먹다
  • 상사나 윗사람을 동등하게 대하다: ex) 김일병이 최상병을 먹었다
  • 성관계를 하다: ex) 철수가 영희를 따먹었다.
  • 효과가 있다: ex) 이 방법이 잘 먹힌다.
  • 소리를 없애다: ex) 이 스피커는 고음을 먹는다.
  • 패배나 실패의 쓴맛을 보다: ex) A는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을 하고 B는 수강신청이 망해서 둘다 이렇게 고배를 마셨다.
  • 무엇인가에 빠져들거나 길들여지다: ex) 갑은 권력의 맛을 본 뒤 사람이 변했고, 을은 유흥에 맛을 들인 뒤 문란해졌다.

다만 먹는다는 표현을 다양하게 쓰는 건 한국만은 아니다. 먹다(eat)는 단어와 연관된 영어 숙어만 해도 eaten up(~를 사로잡다, ~를 써버리다), eaten into(~를 축내다), eat away/eat through(침식하다), eat at(~를 초조하게 하다), eat humble pie(실수를 인정하다), eat quiche(비열한 짓을 하다), eat the leek/eat dirt(치욕을 견디다), eat someone alive(누군가를 심하게 질타하다[37]) 등등 찾아보면 상당히 많다. 그외엔 한국어에선 마신다는 표현도 쓰인다. 고배를 마셨다는 표현이 그 예. 또한 역시 한국어에선 맛을 들이다, 맛을 봤다는 표현도 쓰인다.

5. 전근대 대식 문화의 평범성


사실 당대 기록을 보면 시장발달 및 산업화 이전 전 다른 나라에서도 대식에 대한 기록이 종종 있다.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와 기록했을 시점에선 한민족은 아직 식사를 많이 하는 편이였고 서양인들은 그 정도가 이미 많이 완화되어 조선인들이 대식한다고 기록했을 거라는 주장도 있다.

근대 서양인들이 남긴 한민족의 식사량에 대한 기록들을 다소 의아하게 만드는 기록들도 많다. 서양만 보더라도 아일랜드의 농민들이 하루에 약 8파운드(3.6kg)의 감자를 먹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하루에 고기를 5kg씩 먹어치워서 백인들이 놀라기도 했다.

특히 중세 영국의 농부는 하루 3,500칼로리에서 4,000칼로리의 음식을 먹었다고 한다. 출처 출처2 자료에 따라 하루에 1.3kg 에서 많게는 1.8kg 가량의 빵과 200그램 가량의 고기를 섭취했다고 하는데, 하루 두 끼를 먹었음을 감안하면 한 끼에 빵만 무려 600g에서 900g 가까이를 먹은 셈이다. 밥으로 치면 3-5공기를 먹은 것.

더불어 일본 에도시대 서민들의 밥상을 추측하고 재현한 결과에서도 밥 양만 무려 1kg다. 출처 출처2 위 중세 영국 농부의 한끼 빵 분량이나 한민족이 먹었다는 한 끼 밥 분량과 비슷한 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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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통계에서도, 현대 한중일 간의 섭취 칼로리 차이는 기록에서 언급한 수준의 2,3배 수준이 아닌, 30%이내의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즉 정리하자면, 과거 한민족이 주변국과 비교해 많이 먹었을지언정, 양에 대한 차이는 다소 과장되었을 수 있다.

6. 여담

  • 그 기록의 주체들은 관료들이나 선교사[38]거나 외국인들이었는데, 조선생활을 오래 한 외국인의 전문을 읽어볼 경우 '나는 처음에는 절제하지 못하고 방탕한 조선 사람들의 생활상에 학을 떼었으나, 러시아 등지로 진출한 조선 사람들은 매우 절제하고 아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조선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게으른 것이 아니라, 관료들로부터 심한 수탈을 당하기 때문에 당할 바에야 그냥 있을 때 먹어치운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와 같은 내용으로, 말하자면 선량한 조선 백성들에게는 구시대 정권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고 서구가 들어와 문명의 빛으로 이들을 고통에서 구해줄 필요가 있다고 하는 상당히 제국주의적인 주장이었다.[39]
  • 허나 이러한 조선 후기 수탈 강화와 기후 악화에 의해 가용식량이 줄어들어있을 때 한 방에 폭식해 버렸다는 설과 달리, 우리 민족은 쌀농사 위주의 고된 노동환경을[40] 고려하더라도 그냥 많이 먹은 듯하다. 그 근거로 위에 나와 있지만 비슷한 사회였던 주변국(중국, 일본 등)보다 많이 먹었다고, 선교사가 아닌 조선인 스스로의 기록과 중국, 일본 사람들의 기록을 교차검증해 보면 알 수 있다.
조선인들의 대식과 식탐은 빈부와 귀천에 관계 없이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조선인들의 가장 큰 결점은 대식이다.
프랑스 선교사, 샤를 달레 신부
  • 구한말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물론이거니와 실학자들도 "이러한 조선의 대식 풍습은 빈부차와 풍흉 유무,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는 일반적인 습관이다."라고 기록하거니와 되려 이에 대해 까고 있었다. 심지어 "가난한 사람들은 빚을 내어서라도 많이 먹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는 기록과 "쌀에 대한 지나친 탐식으로 소갈병( 당뇨병)을 앓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 흔히 대식풍습과 관련돼서 거론되건 하는 아랫사람에게 상 물리기라고 해서 왕 수랏상뿐만 아니라 양반들도 손님이 오면 상다리가 부러져라 내오는 게 주인의 예의였고 주인이나 손님이나 배가 터져라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잔뜩 먹고도 남도록 음식을 많이 차렸는데 주인과 주빈의 식사가 끝난 후 대궁과 잔반은 양반을 수행해 온 아랫사람들에게 그대로 내려가 그들도 배터지게 먹었다. 특히나 궁중이나 민간에서 큰 잔치를 열 때에는 며칠 동안 음식물을 엄청난 양으로 미리 준비하는데다 음식을 직접 맛보기보다는 보기 좋게 전시해놓는 데 더 치중했기 때문에 정작 잔칫날에는 준비해둔 음식이 모두 굳어버리거나 뻣뻣해져서 먹을 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 잔치에 온 하객들은 이 꾸드러진 음식을 넣어서 데운 전골[41]과 술 몇 잔을 먹고 돌아가는 것이 다반사였다.[42] 이렇게 남은 음식들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대신과 하객들의 집으로 옮겨와 집안 식구들과 하인들이 나누어 먹을 수 있게 했다. 나랏님의 은혜와 잔치 주최자의 감사를 고루고루 나누어 맛보는 의미였다.[43]
  • 이러한 사치스러운 식습관에 문제의식을 느낀 것은 조선 임금도 마찬가지여서 영조 또한 기존의 수랏상에서 반찬 가짓수를 두세 가지로 제한하였고 그마저도 장 종류[44]에 그치는 대단한 검소한 습관을 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그 덕인지 영조는 역대 국왕들은 물론이거니와 조선 평균을 놓고 봐도 상당히 장수했다.
  • 실제로 한국 음식이 유달리 염분 면에서 말이 많은 까닭은, 이것이 육체 노동에 종사하던 사람들을 위한 식문화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있다. 원래 전 세계를 막론하고 과거에는 음식의 염분 함유량이 상당했다. 식품을 장기 보존할 방도가 마땅치 않아서 소금에 절이는 게 그나마 가장 좋은 보존법이였기 때문.[45] 그나마 서양의 경우는 제국주의 시절 식민지를 개간하면서 식민지로부터 삥 뜯은 식자재를 잔뜩 들여와 식자재가 풍부해지자 장기보존의 필요성이 줄어들면서 점차 염분을 줄여나갔지만, 오랫동안 한반도라는 한정된 영토 안에서 식자재를 자급자족해야 했던 한반도는 그 시절 식문화가 그대로 유지되면서 아직도 근대 시절 염분 함유량을 유지해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이다. 다만 이는 현대 서구권의 고염분 식단을 설명하기 곤란한 면이 있는데, 당장 미국이나 유럽 패스트푸드(예를 들면 KFC, 파파이스 등)나 과자류(국내에 유통되는 것 포함)를 보면 염분이 상당히 높은 편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스팸도 일반적인 한국인 입맛에는 꽤나 짠 편인데,미국은 염분을 줄였다는 스팸 라이트가 한국의 일반 스팸과 염분 함유량이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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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쌀 3말은 삼국시대 기준 6kg [2] 식사를 줄였다 해놓고 오히려 양이 늘어났기 때문에 앞의 기록을 '1끼'에 쌀 3말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 번역은 이거다. [3] 그래서 현재 내륙 지방인 마한, 백제 영토들 상당수가 당시에는 해안가였다. [4] 4군 6진을 개척한 조선왕조 시절과 고구려 시절 만주의 자연환경의 차이는 너무 달랐기 때문에 조선 왕조는 고구려 시절과는 달리 농토로 이용하기 힘든 척박한 땅으로 변한 만주에 그렇게 큰 욕심을 내지 않았을 법하다. [5] 춘추전국시대 단위로 한 말은 3L로 현대기준 대략 밥 15공기 정도 정도 고기 10근은 2.2kg 현대 기준으로 15인분 정도 이 정도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다 [6] 오늘날의 홉을 생각하면 5배씩이나 될 것으로 오해할 수 있는데, 조선 시대의 한 홉은 지금 홉의 약 1/3에 불과했다. 조선 시대의 한 홉은 약 60ml, 지금의 한 홉은 대략 180ml인데, 지금 쓰는 홉은 1902년 일본의 것에 맞추어 개정된 단위인 것. 따라서 지금 한 공기인 210ml에 비교해 볼 때 당시의 7홉은 약 420ml가 된다. [7] 다만 현대 일본에서 재현한 에도시대 서민의 식사를 보면 일본인들도마냥 소식만한건 아니었다.출처: https://sputnik.kr/news/view/2749 [8] 틀린 말이 아닌게 영조는 오늘날에 봐도 장수했을 정도인 83세까지 살았다. 실제로 조선 왕들 평균 사망연령은 40~50대였는데 사인이 성인병이 특히 많았다 하지만 영조는 독보적으로 83세까지 살았다는 것이야말로 식습관이 나름 관여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9] 다만 이는 어느정도 걸러 들을 필요가 있는것이, 그 시대의 복숭아는 현재의 개량된 과육이 많은 복숭아가 아니라 대략 요즘의 자두 정도의 크기로 추정되는 개복숭아를 말하는 것이다. 그 정도 크기면 현대에도 잘 먹는 사람은 충분히 먹을 수 있다. [10] 1인당 마늘 섭취도 1위다. [11] 지금의 오키나와. [12] 천주교 조선대리감목구 제5대 대목. 1866년 병인박해 순교,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 한국 103위 순교성인 중 한 명이다. [13] <조선사 입문을 위한 노트 (Notes pour l`introduction a l`histoire de Coree, Daveluy, 1818-1866)> [14] 지금도 1인 1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닭의 사육이 산업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닭은 씨암탉이거나 노계, 즉 지금 치킨집에 납품되는 수준의 닭보다 육질이 질기고 큰 대형 닭이라고 봐야 한다. [15] 이 부분은 다블뤼 주교 본인이 직접 경험한 사실을 서술한 것은 아니다. 다블뤼는 당시 국왕이었던 고종이나 실권자였던 흥선대원군을 직접 만날 수 없었다. 다만 정조와 정약용, 세조와 한명회· 신숙주 등의 고사를 살펴보면 크게 틀린 소리는 아닌 듯(...) 참고로 정조가 정약용에게 내린 벌은 대나무 필통(오늘날의 연탄 굵기만한 것이다)에 독한 소주를 원샷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소주라는 것은 현대의 소주를 생각하면 안 된다! 기본 도수가 30도부터 시작이다. [16] 주한 미국공사관 대리공사로도 복무했다. [17] '음식이 쌓여 있었다.'라는 것은 아마도 고임음식일 것이다. 고임이 높을수록 받는 사람에게 더 예를 갖춘다는 의미이다. 고임음식이 어떤 것인지 보고 싶다면 환갑이나 칠순잔치를 보면 알 수 있다. 잔치상 맨 앞에 한과, 떡, 대추 등의 음식이 켜켜이 쌓여 올려져 있는 모습이 바로 고임음식이다. [18] 20대~40대 기준 한국인 평균 신장은 남성이 175cm 내외로, 아시아+아프리카 최상위권이며 동유럽 국가들보다도 큰 수준이다. 가령 남성 평균 신장이 165cm인 나라의 평균 체중이 한국남성 평균과 똑같이 70kg가 넘는다면 당연히 비만율은 훨씬 높아진다. [19] 위에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이전부터 가장 먼저 조선인들의 식사량에 기겁한 사람들은 저 사람들이다. [20] 공적으로 도살되는 소가 500여마리, 사적으로 도살되는 소가 500여마리가 넘고 다 합치면 천 마리가 넘는다고 기록되어져 있다. [21] 我國, 內有二十四懸房, 外有三百六十州, 二十六大營及諸小營·諸鎭堡·諸郵官所屠, 已過五百餘首, 京鄕私屠, 又過五百餘首, 則通計一日爲千餘首, 一月爲三萬餘首, 又竝四名日京鄕公私所屠二三萬首, 而一歲爲三十八九萬首矣 [22] https://m.blog.naver.com/brandkim/222239478535 [23] 물론 북한도 특권층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그로인해 극소수라도 비민이 있다고 한다. [24] 그나마 서울은 한강이라는 커다란 강도 있고 조금나가면 바닷가지만 중부내륙지방은 살면서 해산물을 구경도 못해봤을 가능성도 높다. [25] 17~18세기, 즉 조선 후기에 해당되는 시기에 유럽은 종자 하나를 심으면 7알 정도의 수확을 얻었고 동시대 동아시아는 50알이 넘는 수확이 가능했다. [26] 다만 몽골인들도 근대화로 인해 운동이 부족해져서 옛날보다 최근 성인병 발병이 빠르게 늘고있다. [27] 가축 한마리에서 나오는 체중 대 고기량을 도체수율이라 하는데 소는 체중 대비 효율이 돼지보다 더 떨어지는 걸 알 수 있으며 링크에 개제된 기준은 지속적인 품종개량으로 수율이높아져 21년도에 다시 변경된 것인 만큼 조선시대엔 30프로 내외였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28] 당장 조선은 농번기 시기 소 도축 금지령을 내린 적이 있는 나라다. 하지만 제대로 지켜지질 않았다. [29] 한국 요리 중에 나물 요리가 많은 이유는 부족한 식량을 보충하기 위한 반찬으로 다른 나라에서는 잡초로 취급하는 풀조차도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30] https://www.cctimes.kr/news/articleView.html?idxno=695406 [31] 차례도 원래는 이름대로 차를 올리는 제사였으나 숭유억불 정책으로 술을 올리는 제사로 바뀐다. 이름에만 차가 남아있는 셈. 곡차 [32] 조선후기 한양 도성 내 토양매개성 기생충 감염 원인에 대한 역사 문헌학적 고찰,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해부학교실, 대한의사학회, 2013. [33] 조선시대 무덤의 미라와 분변석에서 발견된 기생충알에 관한 연구, 전북대학교, 2009. [34] 임진왜란 당시 점령지는 세금을 할인하여 민심을 추스려야겠다고 생각하여 나온 세율이 이것과 비슷하다. 자기 딴엔 나름 생각해 준 것이겠지만 탐관오리가 작정하고 횡령해도 목숨이 아까워서 이것보단 적게 가져갔다. 당연히 의병이 들고일어날 세율이기에 일본에는 악재로 작용했으며 평소 조선을 싫어했어도 일본 세율을 보니 의병이 하고 싶어졌다고 한다. [35] 서민은 죽어나가는 세율이야말로 일본이 당시 세계최강이던 명나라나 오스만과 비슷한 체급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었던 원인이기도 하다. [36] 단, 전근대 시절은 행정이나 과학 기술의 한계로 현대처럼 세금을 매기고 거둘 수 없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현대에도 여러 사정과 이유로 세급 납부를 하지 않거나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전근대 시절은 오죽했으랴. 거기다 중간에 누수되는 비용도 감안해야 하니, 함부로 높은 세율을 정해 그것을 거두고 운용할 비대한(그리고 그만큼 효율적으로 운용되지 못하고 부패할 가능성이 높은) 조직을 활용하는 것보다 차라리 낮은 세율이라도 확실히 거둘 수 있는 것이 재정을 운용하고 통치하는 데 더 나았다. 그렇기에 전근대 시절은 중앙집권체제가 반드시 봉건제보다 우월할 수 없었다. 이를테면 덩치가 몇십배 큰 청나라가 동시대 에도 막부와 비슷한 규모의 재정을 운용할 수밖에 없었으며, 막부 체제하의 일본에서도 막상 일본 열도에서 노른자위 땅을 보유한 막부가 막상 변경으로 밀려난 도자마 다이묘들보다 효율적으로 재정을 운용할 수 없었다. 실제 막부 직할령인 천령은 다른 다이묘들이 관할하는 영역보다 세율이 낮았다고.(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도자마 다이묘 지역 주민들의 충성도나 애착도는 천령 주민들의 막부에 대한 그것보다 훨씬 높아 메이지 유신을 감당할 수 있었다 ) [37] 비슷하게 한국어에서도 '물어뜯다'라는 표현을 쓴다. [38] 기독교에서는 식탐을 포함한 탐욕을 죄로 여겼다. [39] 또한 러시아나 만주 등 한반도보다 비교적 습기가 덜하고 추운 지역이면 음식을 보관하기 용이한 점도 한몫했다. 실제 위에 선교사가 쓴 글을 알겠지만 한반도의 습한 기후 때문에 음식이 쉬이 상했기 때문에 음식을 보관하다 버리느니 그냥 먹어치운 것도 대식의 이유 중 하나였다. [40] 항목에도 나와 있듯, 쌀은 타 주식곡물에 비해 단위면적당 생산력이 높지만, 그만큼 물과 인력을 많이 갈아넣어야 한다. [41] 이 전골에서 유래한 음식이 열구자탕이다. [42]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속담이 여기서 나왔다는 설도 있다. [43] 물론 이러한 풍습은 한민족만의 독창적 풍습은 아니다. 서구에서도 궁중 연회 시 정량보다 좀 더 많이 준비해 연회가 끝난 뒤 참석한 귀빈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이로 인해 궁중의 식문화가 귀족사회에 전파될 수 있었다. [44] 영조는 고추장일화로 유명하기도 하다. [45] 대표적인 게 서양의 염장고기인데, 이건 그걸 만들어 먹던 서양 사람들 기준으로도 너무 짜서 바닷물에 헹구어서 먹을 정도였다. 그 짜디짠 바닷물로 '헹굴' 정도라면 얼마나 짠 건지는 안 봐도 비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