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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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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民國
Republic of Korea
미국
美合衆國
United States of America

1. 개요2. 단순 비교3. 정치, 군사
3.1. 한미(韓美)의 외교적 첫 만남3.2. 가쓰라 태프트 밀약과 외교단절3.3. 한국의 독립 운동 이후3.4. 미군정(1945년~1948년)3.5. 제1공화국~ 제2공화국(1948년~1962년)3.6. 제3공화국~ 제4공화국 (1963년~1980년)3.7. 제5공화국(1981년~1987년)3.8. 제6공화국(1988년~)
3.8.1. 이명박 정부(2008년~2013년)3.8.2. 박근혜 정부(2013년~2017년)3.8.3. 문재인 정부(2017년~2022년)
3.8.3.1. 트럼프의 방위비 분담금 인상 요구
3.9. 2020년대
3.9.1. 대북전단 금지법 관련 한미갈등
3.10. 한국과 미국의 정계 징크스
4. 문화예술 교류5. 한일관계에 대한 미국의 개입6. 다른 미 동맹국들과의 대비7. 경제 교류8. 교통 교류9. 대사관10. 참고/관련 문헌11. 관련 문서

1. 개요

한국어 한미관계(韓美關係)
영어 United States-Republic of Korea relations[1]
파일:9fca30ff3b53815274dac9f06b57613a.png
역대 대한민국과 미국의 정권[2]
We Go Together
같이 갑시다
한미관계 슬로건
대한민국 미국간의 교류 관계를 가리킨다.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48년-2022년 역대 한미정상회담 파일:미국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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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트루먼 한미정상회담 이승만-아이젠하워 한미정상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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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케네디 한미정상회담 박정희-존슨 한미정상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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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닉슨 한미정상회담 박정희-포드 한미정상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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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카터 한미정상회담 전두환-레이건 한미정상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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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레이건 한미정상회담 노태우-부시(부) 한미정상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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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클린턴 한미정상회담 김대중-클린턴 한미정상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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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부시(자) 한미정상회담 이명박-오바마 한미정상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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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오바마 한미정상회담 문재인-트럼프 한미정상회담
}}}}}} ||
파일:2022년 한미정상회담.jpg
윤석열-바이든 한미정상회담


미국은 대한민국의 공식적으로 유일한 동맹이다.

시대에 따라 여러가지 이슈가 맞물려 관계가 호전되거나 악화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전통적인 상호동맹관계이자 우호국으로 2018년 미국 갤럽 조사 결과 미국인들이 보는 한국 호감도는 77%로 높은 수준이고[3], 한국인들이 보는 미국 호감도 여론조사 역시 2019년 기준으로 77%[4]로 매우 높은 편이다.

아시아에서는 일본과 함께 미국에게 가장 중요한 동맹국으로 여겨진다.[5]

2. 단순 비교

항목 대한민국 미합중국
면적 100,412km² 9,833,517km²
인구 51,683,025명 332,915,074명
수도 서울 워싱턴 D.C.
최대도시 서울 뉴욕
언어 한국어 영어( 미국식)[6]
명목 GDP[7] $1조 5,868억 (10위) $20조 8,073억 (1위)
1인당 GDP $30,644 (26위) $63,051 (5위)
국방비 $422억 $7,500억
정치 대통령제 / 단원제 대통령제 / 양원제
국가원수 윤석열 대통령 조 바이든 대통령

3. 정치, 군사

미국 건국 초반에는 평범한 외교국가 취급을 받았다. 당시 중국의 공산정부 수립 이전까지는 미국과 가장 가까운 태평양 국가는 중화민국이었으니 조선이란 나라에 무관심하였으며,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이의 방증이다.

그러나 1953년 6.25 전쟁 직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한미동맹 관계를 구축했다.

3.1. 한미(韓美)의 외교적 첫 만남

미국이 외교적으로 한반도에 첫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조선시대 순조 재위 시기인 1834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당시 아시아 지역에 특파된 로비츠 미국 특사가 미국 정부로 보고한 내용에서 "동부 아시아 대륙에 조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반도(半島) 국가가 있는데 청나라 일본이라는 대륙 국가와 섬나라 사이에 위치해 있고 본국 정부가 조선과 경제 교역을 가지게 되었으면 싶다"는 의사를 밝히게 되면서부터였다. 1845년 헌종 때에 들어서 미국 국회의원 Z. 프래트가 조선 왕조에 조선 통상사절 파견안을 제안한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현되지는 못했다.

이후 1863년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 대원군 섭정을 시작하면서 " 서양 오랑캐들과는 모든 교역 및 통상을 거부하며 개방도 불허한다" 강경책을 내세웠고 이에 미국과 외교적으로 미묘해져 있었다. 특히 1866년 미국 상선 제네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통해서 평양에 입성해 통상을 요구하며 갖은 난동을 부리자 조선 관군과 분노한 평양 양민들에 의해서 상선이 화재로 전소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미국은 1871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대한 항의 및 조선의 개항을 요구하고자 미군을 이끌고 쳐들어와 신미양요를 일으킨다. 이 전투에서 미국이 압도적으로 이기긴 했으나 조선은 끝내 개항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미국은 아무런 소득을 올리지 못하고 철수함으로써 전략적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의 체결로 조선이 개항하자 1882년에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됐는데, 한미 관계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할 수 있다. 참고로 이 조약은 조선이 서구 열강세력과 수립한 최초의 조약이다. 청나라가 러시아 견제 및 조선에서의 영향력 강화 차원에서 이를 중개했다.

3.2. 가쓰라 태프트 밀약과 외교단절

그러나 1897년 대한제국이 수립되고 20세기의 격동기에 접어들게 되면서 한미 관계에도 변화가 생긴다.

그 당시 미국은 1898년 스페인 식민지 필리핀 문제로 전쟁을 하였던데다가 전쟁( 미서전쟁)을 통해서 필리핀을 차지하게 되자 1905년 미국 육군장관이자 후에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되는 윌리엄 태프트와 일본의 총리이자 이토 히로부미의 오른팔로 불리우는 가쓰라 다로 사이에 일본은 대한제국의 지배에 대해 우월권을 인정하며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한다는 명목으로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맺으며 사실상 대한제국을 외면하고 일본 편에 들게 된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고종의 대한제국을 구원해 달라는 요청에도 이를 무시하며 사실상 친일 성향을 드러냈고 미국은 일본을 지지하며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승인하였다는 입장을 밝혀서 결국 대한제국의 을사조약 체결을 방조하게 되었다.

1905년 결국 루스벨트의 중재에 따라 포츠머스 조약으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전하고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미국은 대한제국의 수교 국가 중 가장 먼저 한성부에 주재해있던 외교 공관을 철수하며 대한제국의 국가 승인도 취소한다는 입장을 밝히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한미 관계는 잠시 단교 관계에 이르렀으며 경제적 통상면에서도 일본에 비해서 대거 축소되는 영향도 받았다. 후에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후임 대통령이자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장본인이었던 윌리엄 태프트 역시 전임자 못지않게 일본을 두둔하고 지지하며 대한제국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1910년 한일병합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일본의 속령 식민지가 되었다.

3.3. 한국의 독립 운동 이후

1914년 윌리엄 태프트의 후임으로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우드로 윌슨[8] 민족자결주의를 통해서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고있던 한국인들에게 희망을 주었으며 그것이 바로 3.1 운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전임자였던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윌리엄 태프트 행정부의 친일 성향 및 정책 등으로 인해서 조선과 사이가 멀어졌던 미국 일각에서는 3.1 운동을 계기로 일본이 명백한 침략자이자 의회에까지 일본의 속령으로 있는 한국과 한국 국민들이 원하는 자치정부 수립을 하려는데 대해 공감을 나타낸다는 의견을 냈는데 이 한국의 독립 문제는 미국 의회에서도 3년간 논란거리에 오르기도 하였다. 의회 일부에서는 1905년 을사조약과 1910년 한일병합으로 멸망한 대한제국의 입장에 대해서 깊이 사과해야 하고 반성을 해야 하며 과거 양대 행정부의 친일 문제 등에도 반성하고 사과할 기회를 가지자는 주장도 있었다. 관련기사

그러나 일본과의 관계는 물론 필리핀을 속령지로 잡고있는 미국 행정부는 여전히 한국의 독립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으며 공식 태도에 있어서도 미국 정부는 일본과의 관계 등을 고려하여 한국의 독립에 대한 명백한 입장이나 과거사 행위에 대한 반성은 없다. 일본은 미국의 협력자이자 우호국으로서 현재까지는 일본과 관계 악화를 원하지 않는다. 의회나 언론사 등에게는 그에 대한 자제를 당부한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한국의 독립 운동가와 재미교포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미국의 신문들은 한국의 독립 운동을 자세히 소개하며 한국의 독립 운동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관련기사, 관련기사1

한국인에게 있어서 미국은 독립 자금 조달의 거점이자 독립 운동을 위한 선전 외교의 거점지이기도 하였으며 안창호, 서재필, 이승만 등이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 운동을 하거나 지원하였다. 민간에서는 한국과 미국은 친구이자 일본이라는 적성국을 물리쳐야 하는 관계에 있다는 명목하에 일제의 만행과 악행을 폭로하고 나가서는 국제사회에서도 일본의 야만적이고 인륜을 저버린 만행을 폭로하는 역할도 하였으며 양심적인 미국 선교사들 사이에서도 한국친구회라는 단체를 세우며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지하기도 하였다.

1941년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하며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그 동안 친일 성향이 짙었던 미국의 외교 노선을 바꿔놓게 되었으며 당시 대통령으로 취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1943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연합국 수뇌들과 회담을 갖고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고[9]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는 문제를 논하였던 카이로 회담을 채택하기도 하였지만 1945년 2월에 열렸던 얄타 회담에서는 한국의 신탁통치에 대한 건의를 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4월 노환으로 사망함에 따라 한국 문제는 후임 대통령인 트루먼에게 넘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트루먼 행정부는 종전을 위한 수단으로 1945년 8월 일본의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명령을 하달시키고 결국에는 미국을 승전으로 이끌어내 일본을 패망시켰다.

1945년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게 되면서 전임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포츠담 선언에 따라 미군 병력이 한반도 이남에 진주하게 되었고 이북에 소련군이 진주하게 되면서 해방과 동시에 남북 분단이 시작되기도 하였다.

3.4. 미군정(1945년~1948년)

1945년 9월 8일, 미국은 38선 이남의 점령지에 미군정을 세워 38선 이북의 소군정과 함께 한반도에서의 과도정부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소련 대표단이 철수하면서 미소 양국의 타협을 통한 신생국 수립은 불가능해졌고, 한반도 문제는 유엔으로 넘어갔다. 유엔은 UN한국임시위원단을 통해서 한반도에 수립할 정부 형태 등을 논의하였으나, 소련의 의도 아래 공산국가 설립을 준비하던 북한은 UN한국임시위원단의 이북 방문을 거부한다. 결국 1948년 5월 10일, 남한 지역에서만 단독선거가 열려 첫 제헌국회가 선출되었고, 동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다. 이후 미군정은 남한 지역의 통치기능을 대한민국 신정부에 이양하고 해산한다.

미군은 소련군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일제의 오랜 압제와 전쟁의 피로에 시달리던 한반도에서 해방자로서 환영받았으나, 곧이어 좌우 갈등과 신탁통치 등을 둘러싸고 온갖 오보가 난무하며 격심한 혼란이 이어진다.

특히 미국을 위시한 당대 선진국들은 한국 독립운동사에 '의열활동'으로 기록된 무장투쟁 대부분을 일종의 백색테러쯤으로 여겼으며, 국제법에 근거한 정당한 교전 대신 사석에서 요인들을 암살하는 따위를 야만적이라 간주했다.[10] 물론 한국인들의 입장에서는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서 남은 유일한 저항 수단이 그런 테러·게릴라 활동이었던 것이지만, 미국에게 이러한 입장을 적극적으로 설득할 수 있을 만큼 신뢰를 쌓은 독립운동가가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미군정의 현지정보 대부분은 상대적으로 고등 교육을 받았던 일본인 및 친일파들로부터 흘러나왔으며, 이승만처럼 미국과 연이 있던 독립운동가들도 무장투쟁을 부정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변호하지 않았다. 게다가 미국은 불과 수 개월 전까지 나치즘과 맞서싸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반공주의 극우는 몰라도 민족주의 극우는 극도로 경계했다. 또한, 대다수 독립운동가들의 주 무대였던 만주는 공산당의 본거지였기 때문에 사상적으로도 신뢰할 수 없었으며, 중화민국 역시 미국의 이해가 제대로 미치지 않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미군정은 중화민국 만주, 소련 등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대부분을 부정적으로 인식했으며, 공산주의자들은 물론 반공주의·민족주의 우파들마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했다.

게다가 미군정은 효율성을 이유로 일제 치하에서 근무했던 관료들을 대부분 재기용하였다. 소련이라는 강대국 세계 단위의 경쟁을 앞두고 있던 미군정 입장에서는, 한민족의 친일 청산보다는 일단 합리적이고 안정된 행정을 통해 정상적인 기능을 할 수 있는 현지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미군정의 이런 태도는 독립운동가들은 물론 오랜 일제강점기에 시달렸던 일반 시민들에게도 강한 반발을 샀고, 반미·친공 정서가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다시금 미국이 한국의 여론 전반을 '친공적'이라고 불신하게 만드는 악순환의 고리를 낳았다.

결론적으로 평하자면 미국은 일단 광복 직후엔 해방자로서 한국인들에게 환영받았고,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역시 기본적인 틀에서 ( 공산주의자를 제외한) 대다수 한국인들의 지지를 얻기는 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정무 수행 과정에서 한국인들의 신뢰를 얻는 데도 사회를 안정시키는 데도 실패했으며, 친일청산 문제와 이념 갈등의 상처만을 남긴 채 대한민국 제1공화국에 자리를 넘겨주게 된다.[11]

3.5. 제1공화국~ 제2공화국(1948년~1962년)

3.5.1. 이승만 정부

파일:Douglas Macarthur and Lee Seung Man.jpg

대한민국은 1948년의 정부수립 이후 가장 먼저 미국과 국교를 수립했고, 1882년에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승계하였다. 이로써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인해 단교되었던 한미 외교 관계가 43년 만에 복원되었으며,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을 가장 먼저 승인한 국가가 되었다. 서울 주한미국대사관이 설치되어 초대 주한대사로 무초가 파견되었고, 한국도 워싱턴 D.C.에 주 미국 대한민국 대사관을 설치하여 초대 주미대사로 장면을 파견하였다. 이후 한미 양국은 북한 소련을 위시한 공산권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군사적으로 협력했고, 미국은 한국에 막대한 경제 원조를 제공하였다.

한편, 본래 프랭클린 D. 루즈벨트가 구상했던 전후 질서는 미국· 소련· 영국· 중화민국이 이끄는 4자 안보체제였다. 이에 따라 해리 S. 트루먼 정부는 당대의 국제정세를 재검토하고, 세계대전을 거치며 과도하게 팽창한 미군을 축소 재배치한다. 비록 1949년 중화민국 국공내전에서 패퇴하고 중국이 공산화되었지만, 미국은 중화인민공화국 유고슬라비아처럼 전략적 중립을 견지하리라 기대[12]했기에 기존의 구상을 유지하고자 했다.[13] 이 과정에서 미국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중립국화나 유엔의 공동 안보보장을 통해 극단적인 위기는 피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으며[14], 미군의 직접 주둔이 오히려 신생 중화인민공화국을 자극할 수 있으리라고 우려했다.

때문에 1950년 1월, 미국의 딘 애치슨 국무장관은 한국을 대만 및 인도차이나 반도와 함께 핵심 방위선에서 제외하였다.[15] 이에 따라 1949년 6월이 되면 주한미군은 일부 군사 전문가나 보조 병력만을 남기고 대거 철군하였으며, 대신 미국은 한국의 탈식민화와 자립을 위해 대한부흥원조정책을 실시하고 수 억 원어치에 달하는 물자를 공여했다. 반면 일본의 경우 애치슨 라인에 포함되었는데, 이는 미국 내에서 일본을 미국에 종속된 반공 거점으로 육성할지 아니면 한국과 비슷하게 독자적 중립화를 허용할지 의견이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16] 또한 태평양 전쟁의 적성국인 일본에서 주일미군이 떠나고 독자적인 재무장이 시작되었을 때 무슨 일이 반복될지 모른다는 불신도 있었다. 문제는 김일성을 위시한 공산진영이 미국의 이런 행보를 보고 "미국은 유사시 일본은 지켜도 남한의 방위를 위해 피를 흘리지는 않을 것"이라 오판하였던 것이다.

결국 1950년 6월 25일 북한은 중국 소련의 묵인을 얻어 대규모 기습 남침으로 한국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김일성의 기대와는 달리 미국의 트루먼 행정부는 한반도에 즉각적으로 더글러스 맥아더를 위시한 대규모 전투병력을 파병하는 한편, 국제연합을 통해 국제 사회의 공조를 이끌어내며 한국의 전쟁 수행을 전폭적으로 지원한다. 비록 한국전쟁 자체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개입으로 결론지어지지 못한 채 끝났지만, 양국이 함께 흘린 피 위에 쌓인 신뢰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에 큰 도움이 되었고 오늘날까지 굳건한 한미동맹의 초석이 된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중국이 전격적으로 참전함에 따라 중국의 중립화에 대한 기대를 접을 수밖에 없었으며, 동시에 전쟁 수행과정에서 대륙을 겨누는 창으로써 한반도가 갖는 지정학적 가치를 재평가하여 주한미군 주둔에도 합의한다. 또한 한국에 1953년부터 1961년까지 31억 달러에 달하는 무상원조를 제공하여 전후 복구 및 교육 확충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승만은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는 우드로 윌슨에게 학위를 수여받았고, 이후에도 줄곧 미국에 기반을 두고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했던 친미주의자였다. 이승만은 이런 경력을 이용해 광복 이후 미국 정부와 개인적·정치적인 신뢰를 쌓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끌어냈으며, 한국전쟁기 한국에 파병된 더글러스 맥아더 등 미군 장성들과도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17]

그러나 이승만 정부가 미국과 항상 우호적인 관계였던 것은 아니다. 미국은 이승만 정부의 이념적 지향이나 정무감각은 고평가했지만 세부적인 정책들을 두고는 격하게 충돌하곤 했으며, 강경한 민족주의나 극심한 부정부패, 독단적인 태도에 반감을 갖고 있었다.

먼저 대북 정책에서의 이견이 격심했다. 이승만은 남북한의 별도 정부수립 직후부터 공공연히 북진통일을 주장할 정도로 강경한 반공주의자였으나, 미국은 이름모를 신생국의 야망을 위해 3차대전을 각오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때문에 미국은 북한군이 소련에게 막대한 무기를 지원받는 와중에도 한국군의 전력 강화에 온갖 제한을 걸었으며, 이는 한국전쟁 초기 한국군이 연전연패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게다가 이승만은 이승만대로 미국의 이런 방침에 반발하여 미국 사회 내부의 극렬 반공주의자들에게 지원을 타진했는데, 이는 냉전을 앞두고 공산권과의 관계를 관리하며 우발적인 충돌을 막고자 했던 미국 정부의 분노를 샀다.

한국전쟁 도중에도 북한 문제를 둘러싼 갈등은 봉합되기는커녕 격화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미국의 트루먼 정부가 한국전쟁에서 소극적으로 행동하며 코드가 맞았던 맥아더까지 경질한 것에 불만을 갖고 있었고, 1953년 미국의 전쟁영웅 출신인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새로운 미국의 대통령에 당선되자 반전을 기대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미국인들이 연속된 전쟁으로 지쳐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고, 1952년 10월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유세에서 “대통령에 당선되면 한국전쟁의 ‘명예로운 조기 종식’을 실현할 것이며 이를 위해 한국을 방문하겠다”고 공약했다. 이승만은 휴전반대와 북진통일을 요구했지만 아이젠하워는 제대로 상대조차 하지 않은 채 돌아갔고, 다음과 같은 부정적인 평가를 남긴다.[18]
"미국은 이승만이라는 또 다른 적을 만난 것 같다."
-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이승만 정부는 한국전쟁 도중에도 북진통일의 꿈을 버리지 못했고, 맥아더 등 미 군부 내의 강경파들과 연대하여 휴전협정에 결사 반대했다. 게다가 한국은 한반도에서 미군과 유엔군이 사라질 경우 중국과 소련이라는 공산권 강대국들에 독자적으로 맞설 수 없었기에 미국으로부터의 안보 보장을 강력히 요구했다. 반면 미국은 한국전쟁 자유 진영의 신뢰를 위해 참전했을 뿐 더 이상 자국민의 피를 흘리고 싶지 않았으며, 이승만 정부의 호전성으로 원치 않는 전쟁에 휘말릴 것을 우려하여 동맹 조약이나 방위 조약에도 부정적이었다.[19] 대신 미국은 향후 북한의 남침에 유엔 참전국들이 공동 대응하겠다는 ‘대제재선언(greater sanctions statement)’을 제안했으나, 이승만은 국제외교에서 선언은 믿을 수 없다며 반대했다.

이처럼 한미 양국이 좀처럼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자, 이승만은 '벼랑 끝 전술'을 통해 미국을 압박했다. 이승만은 한국이 최소한의 안보보장을 얻지 못한 채 휴전협정이 체결될 경우, 대한민국 국군유엔군의 휴전 여부와는 무관하게 독자적인 북진을 시도하겠다고 경고했다. 반공포로 석방 사건도 이때 있었던 일이다. 미국은 한국이 독자적으로 북한과 중국을 상대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승만 정부의 호전성으로 "남한이 자멸을 각오하고 미국을 대전쟁에 끌어들일 가능성"도 결코 경시하지 않았다. 결국 한국은 휴전협상을 방해하지 않고 휴전 전에 중공군이 철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철회하는 대신 한미상호방위조약과 주한미군 2개 사단의 상시 주둔을 이끌어냈고, 나아가 한국군을 20개 사단 규모로 증강하고 전력 현대화를 지원해주겠다는 약조를 얻어냈다. [20]

미국이 결과적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합의했던 것은 이중봉쇄정책(dual containment policy)[21]의 일환이었다. 이 시기 미국은 에버레디 계획으로 명명된 이승만 제거공작을 통해 한국의 정권교체까지도 고려했지만, 북진통일은 당대 한국의 보편적인 정서였던데다 이승만만큼 미국을 잘 이해하고 반공주의 성향을 공유하는 다른 정치인을 찾기도 힘들었기에 보류되었다. 때문에 일단 이승만 정부는 용인하되 한국이 독자적인 북진을 감행하지 못하도록 한국군을 통제하는 주한미군을 설치하고, 한미연합사령부의 수장으로 미국 장성을 앉힌 것이다.[22]

종전 이후에도 동북아시아에서 대한민국의 지위를 두고 한미 양국의 충돌은 계속되었다. 원래 미국은 일본을 철저한 비무장국가로 만들고 내전을 거치며 이미 군사국가화 대한민국이 일본의 방위까지 담당하게 하려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한민국의 경제력이 그만한 군사적 팽창을 감당하기 힘들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반면 일본은 경제우선노선과 한국전쟁을 통해 이미 경제적 안정기에 접어들고 있었고, 미국은 아시아에서 중국이라는 새로운 강적을 맞닥뜨린 상황에서 더 이상 안보위협을 방기할 수 없었다. 50년대 미국은 "정치적·경제적 안정을 이룬 역내 국가들의 연합을 바탕으로 지속 가능한 안보를 담보하겠다"는 뉴룩정책(New Look policy)을 추구했다. 때문에 미국은 '중심축과 바퀴살(hub and spoke)' 시스템으로 일본의 제한적인 재무장을 허용하고, 호주, 필리핀 등과 함께 지역 공동 안보의 기축으로 삼는다.[23] 나아가 미국은 소위 '극동조약'을 통해, "가맹국의 군대가 유엔의 행동에 종사할 때 일본이 일본 국내 및 그 부근에서 이를 지원"하도록 하였다.[24]

문제는 이 과정에서 후진국을 벗어나지 못하던 한국은 공동 안보 체제에서 배제되었음은 물론 산업구조에서도 새로운 기축인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수직적 통합의 한 객체로 인식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한일 양국이 모두 경제적으로 폐허이던 50년대 초엽까지는 한국에게 일본의 안보 부담마저 떠넘기며 경제성장을 늦춰놓고 막상 일본이 안정기에 접어들자 일본을 동북아의 기축으로 삼아 한국을 배제하려는 꼴이었으니 당연히 격분할 수밖에 없었다.[25] 게다가 이승만은 한국전쟁 와중에도 미국의 일본군 지원 타전에 반발하며 독도에 평화선을 선포하고, 퇴임하는 날까지도 미국의 한일 국교정상화 요구를 거부하는 등 개인적으로도 강경한 반일주의자였다.[26]
수십 년 전 우리는 미국에게 일본에 대해 경고했지만, 그 경고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미국은 진주만을 공격당했다. 오늘날 우리는 동일한 경고를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미국에는 일본을 이전보다 더 강력한 국가로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 이승만
나는 (미국 국무장관) 덜레스씨에게 미국이 일본과의 협조를 강요하여 일본의 주도 아래 놓인다고 믿게 되면 대부분의 아시아인들은 미국에게 등을 돌리고 공산주의자와 협력해 미국과 싸우게 될 수도 있다고 이야기했다.
- 1957년 12월 20일 이승만이 정치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에게 보낸 편지

1950년대 중반, 일본에서 재무장에 대한 반발 여론이 반미 시위로 확산되자, 미국은 한국을 다시 지역 안보의 대체자로 고려한다. 그러나 미국은 이승만 정부의 즉각적인 북진통일론이 비현실적임을 지적하며, "공동 안보에 기여할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건실한 경제가 필요하므로, 군대에 대한 과투자를 멈추고 경제를 우선시하며 먼저 산업화를 이룬 일본과도 재수교하여 협력할 것"을 요구했다. 반면 이승만은 집권 말기인 1957년에 이르러서도 "우리는 조국의 분단 상황을 내버려두고 살아갈 수 없으며, 휴전을 백지화시키는 것이 우리의 가장 시급한 요구사항"이라는 입장을 반복했고, 북진통일과 일본의 재침공 가능성을 들어 감군 요구를 묵살한 한편 한일 국교정상화도 재차 거부했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저런 요구사항은 박정희 정부에 이르러서야 관철되었다. 한일협정 체결로 미국을 안심시킨 박정희 정부는 정치적 공간을 넓혔고, 산업 육성에 매진하여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다. 한·일 협정과 청구권자금은 한국 경제 도약의 발판이 되었으며, 한ㆍ일 분업 체계 속에 일부 품목에선 일본 기업이 우리 대기업의 하청업체기도 하다.[27]

제2공화국까지 북진통일과 반공·반일 기조를 고수했으며, 시기별로 정도의 차이는 있었을지언정 국내정치적인 목적으로든 외교적인 목적으로든 그러한 입장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았다. 나아가 이승만은 일본이 아닌 대한민국이 미 동북아 외교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반면 미국은 동북아시아에서의 추가적인 충돌을 방지하고, 일본을 중심으로 한국과 대만 등을 이어 동북아시아 자유국가들의 연대를 만들고자 했다.[28] 이러한 한미의 정치적인 입장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미국의 한 관료는 "이승만이 현장에서 사라진 후에야(only after Rhee's departure from the scene) 해결될 수 있는 주요한 정치적 문제"라고 평했다. 게다가 이승만의 측근들은 일본의 성공 사례를 보면서도 미국의 뉴룩정책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기는커녕 군국주의적인 면모를 보였고, 온갖 부정부패와 정치적 극단주의로 미국의 혐오감을 샀다. 비록 이승만 정부가 총론에서는 확고한 친미[29]였다지만, 결과적으로 각론에서는 역대 어느 행정부보다도 험난한 한미관계를 보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던 셈이다.

3.6. 제3공화국~ 제4공화국 (1963년~1980년)

3.6.1. 박정희 정부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박정희를 위시한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실권을 장악했고, 대한민국의 급변사태는 곧바로 미국에도 알려졌다. 쿠데타 이후 부임한 주한미국대사 버거(Berger)는 미 정부가 군사정부에 "우호적인 유보(friendly reserve)"를 견지할 것을 제안하였다.[30] 군사정부의 쿠데타를 일단 묵인하되 거리를 두고 지켜보면서 실질적인 행보를 보고 승인 여부를 판단하겠다는 의도였다. 동해 8월 군사정부가 민정 이양을 약속하자,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박정희를 워싱턴으로 초청하여 정상회담을 가지고 승인한다. 1년 뒤 버거 대사는 본국 국무부에 보낸 전문에서 박정희가 "한국에서 요구되는 지도자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유일한 인물"이라고 평하며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가 전제된다면 박정희 또는 그 진영에 속한 사람이 한국의 지도자가 될 것을 수용해야 한다"[31]고 전했지만, 1963년 선거를 앞두고 박정희가 갈지자 행보[32]를 보이자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장준하를 위시한 시민봉기 시도에 대해서도 "민주적인 선거가 치러지는 한 야당은 갑작스러운 행동으로 정부 전복을 꿈꾸지 말고 박정희를 대체할 수 있는 세력으로 남아야 한다"며 거부했다.[33] 이처럼 미국은 역내 안정화를 최우선에 두고 박정희 정부에 대한 용인과 견제를 반복하며, 한국의 개혁·재건 노력을 지원하는 한편으로 민주 세력에 대한 최소한의 보호막을 제공했다.[34]

한편, 1961년, 박정희는 '혁명 공약'을 공표하고, '자유 우방과의 연대', '자주경제 재건', '실력 배양을 통한 공산주의와의 대결과 국토 통일', '국민 도의와 민족정기 수립' 등 군사정부가 추진할 정책 방향 네 가지를 제시하였다. 박정희는 또한 이전 정부들이 편성한 국가 예산의 절반 이상이 미국의 재정 지원에 의존하였음을 지적하면서, 민족경제의 타개와 자주경제 확립을 통해 "내 살림을 내가 맡아 해 나가자"고 강조했다.[35] 이미 미국· 대만과 끈끈한 우호관계가 형성된 상황에서 새삼스러운 "자유 우방과의 연대" 공약은 결국 한일관계 개선을 시사했으며, "자주 경제 재건"과 "실력 배양"은 곧 이승만 정부의 무력통일 노선을 포기하고 경제발전을 통한 국력의 우위 확보에 집중하겠다는 의도였다. 이는 미국이 이승만 정부에게 줄기차게 요구했으나 거부당했던 것으로, 당시에도 케네디 행정부의 버거 대사는 부임 직후 면담에서 "민정 복귀와 경제개혁이라는 두 가지 약속을 이행하면 박정희 정권을 지지하겠다"고 약조했으며, 린든 B. 존슨 행정부는 한일 국교정상화 과정에서 직접 한국의 야당 의원들을 설득했다.[36] 이처럼 한미 양국은 박정희 정권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반면, 적어도 정책적인 측면에서는 이전보다 한층 깊은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었다.

박정희 정부는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기 때문에 민중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서라도 경제 성장과 산업화에 집중했다. 경제 노선에 있어 미국 정부는 군사정부의 역량을 의심하고 경제 자문단을 파견해 미국의 방식을 설파하려 했으나, 박정희는 개중 필요한 부분들만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나머지 영역에서는 독자적인 창의성을 발휘해 성공을 이끌었다.[37] 미국은 이에 처음에는 부정적으로 반응했으나, 이후 한강의 기적을 통해 대한민국의 경제적 성과가 가시화되자 박정희 정권의 역량을 인정하고 협조적으로 돌아섰다. 또한 한국에 자국시장을 개방하고 초기 산업화에 필요한 기술과 자본을 지원하는 등 수출주도경제가 안정적으로 정착될 수 있도록 도움을 제공하기도 했다.

기타 한미관계에 영향을 미친 주요 변수들은 다음과 같다.

3.7. 제5공화국(1981년~1987년)

3.7.1. 전두환 정부

여기서 한국 내 반미 운동에 큰 영향을 준 것이 12.12 사태 5.18 민주화운동이다. 노태우 정권 이전까지 대한민국 국군의 전시, 평시 작전통제권 한미연합사 아래 있었다. 물론 북한의 대남도발에 대응하는 것과 같은 긴급사태에는 한국군이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지만 12.12, 5.18은 전혀 그런 사건이 아니었다. 북한의 개입이 없었음에도 신군부가 멋대로 전방 9사단의 병력을 쿠데타에 동원하였는데, 이는 한미연합사가 가진 작통권을 무시한 명백한 월권행위였다. 이후 5.18 때 미국이 20사단의 이동을 허가한 것이 알려지자 사태가 더욱 심각해졌다.

작통권의 최상위에 있는 한미연합사로 인해, 미국에서는 얼마든지 전두환과 신군부에 책임을 물을 수 있었고, 명백한 협정위반에 대응하는 것이기에 내정간섭에 속한다고 보기 어렵다. 5.18같은 경우, 외신으로 인해 서방권에서 사태의 진상을 알고 있어 명분 자체도 충분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냉전과 카터 정권 말기라는 상황 아래, 박정희 정권 당시 진행되었던 핵개발을 백지화하고 반공을 주장하며 미국에 저자세로 일관하던 전두환을 인정해버리고 만다.[46]

한국 문제에 있어 결국 미국은 자국의 국익을 타국보다 우선한 셈이 되었고,[47] 그 결과 한국인이 가지고 있던 '미국은 자유민주주의의 화신'이라는 인식이 크게 훼손되었다. 그 결과 유의미한 반미 기조가 발생하였고, 결국 6월 민주 항쟁에서 미국은 6.29 선언을 종용하고 노태우의 대통령 당선을 지지하기도 했다.[48] 직선제가 16년만에 처음으로 치뤄진 1987년 13대 대선에서 미국은 대놓고 노태우의 대통령 당선을 축하하는 논평을 내서 국내의 혐미감정을 자극하기도 했다.( KBS, MBC) 1990년대 초반까지 NL계 지식인들의 당시 견해를 들어 보자면, 4.19 때 이승만 하야 10.26 사태, 6.29 선언 등에서 보듯 한국 독재자 퇴진은 미국 CIA의 '타겟 바꿔치기 전술'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49]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시작으로 2011년 한미 FTA가 체결되어 2012년 3월을 기준으로 공식 발효가 됨에 따라 양국간 수출입 무역장벽 철폐는 물론 일부 상품에 대한 관세 부과 등도 철회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래 한국은 정치나 사회는 물론 문화에까지 대부분 미국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 많이 있었는데 양국 국민들 간의 현지 여행도 자유로운 편이며 미국의 기업 등도 한국에 대거 진출하여 한국 본부 및 지사를 두고 있다. 또 할리우드 영화 팝송, 그리고 영어 문화 및 교육을 통해서도 커다란 영향을 받게 하였으며 동시에 한국 영화 및 K-POP의 맞수 상대이면서 미국 진출을 꿈꾸게 하였던 영향도 있었다.

사회적인 면에서 한국의 일부 좌파 계열 인사[50][51]들은 대체적으로 반미 성향이 있으며 이들은 주한미군의 완전 철군 등을 주장하며 반대로 친미 성향이 짙은 보수 단체들과 대립하고 있는 편이다.

휴전 이후에도 미국이 한국의 정치나 사회에 개입을 하는 경우가 많았었다. 주한미군사령관 5.16 군사정변을 저지하려는 시도와 김대중 납치 사건이나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서 김대중을 살해하지 못하도록 전두환정권을 압박하고 6.10 민주 항쟁 당시 군대투입이나 강경진압에 반대를 표하며 대신에 6.29선언을 종용하며 노태우의 대통령 당선을 지지한 대표적인 사례들이다..[52] 이는 같은 친미국가인 이웃 국가 일본과 대조된다. 미국이 한국 전쟁 종전 후에 한국에만 개입을 하고 일본에는 딱히 개입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일본은 2차 대전 패전 직후에 미국이 일본을 친미 민주주의 국가로 완전히 뜯어고쳤고 거기서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통해 일본이 독립국이 되었기 때문이다.[53] 반면 한국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과 연합군이 압록강에 진출해 북진통일이 눈 앞에 들어오는 찰나에, 중공의 북한개입 때문에 실패로 돌아섰다. 이후에 어수선한 상태에서 휴전 협정을 했으며, 휴전 직후 전쟁 폐허로 심각하게 빈곤하였으며, 이로 인해 당시 한국 국민들에게 민주화 의식이 미약했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독립한 신생국들은 전부 해당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식민열강들은 의도적으로 교육을 하지않고 사회구조는 왕조시절이나 별다를 바 없던 전근대적으로 멈추어 있던 상태에서 출발하였다. 이러니 곧바로 서구식 민주주의를 도입한다 해도 거의 대부분 권위주의나 독재정치로 흘렀고, 국민의 정치자유 및 형식적 민주주의가 발달한 소수의 나라에서도 소수 엘리트가 움직이는 유사 민주주의로 흘러갔다.

일본은 무엇보다 근대화를 100년 이상 경험하였고 미약하게나마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경험하는 등 사회는 비교할 수 없을정도로 선진적이었다. 미국이 일본의 경우 GHQ 이후 완전한 민주주의가 정착했으니 너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고 한국은 관리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54] 한국의 군사독재가 종식된 80년대 이후부터는 미국에서도 이전처럼 한국의 정치나 사회에 과도한 개입은 자제하는 편이다.

3.8. 제6공화국(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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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6월 24일, MBC 뉴스데스크에서 한국 정치외교 사학회가 전국의 고등학생과 대학생을 천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4대 강국 가운데 한국의 안보에 가장 위협을 줄 수 있는 나라로는 응답자의 10명중 4명이나 미국을 꼽아 이 조사에서 90년대 들어 심해진 혐미 반미감정을 잘 나타내었다. 이 조사에선 미국다음으로 일본, 중국, 러시아를 꼽아 한국과 통상마찰이 잦은 미국과 일본에 더욱 반감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55]
현재까지도 관계를 지속하고 있으며 현재는 대한민국 정부가 최우선 우호국으로 손꼽고 있다.굵직 굵직한 사고 이후에 이뤄진 대민 외교에 성공하여 정부가 미국빠임에도 실각하지 않을수 있는 원인 오해가 있는 부분인데 의외로 한국 정부는 미국에 끌려다니기만 한게 아니라는 점을 모르는 이들은 한국 정부가 미국에 퍼주기만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기도 한다. 정확히는 서로 주고받는 것인데다가 정 안되는건 한국도 거절하는 편.

3.8.1. 이명박 정부(2008년~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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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동맹을 위해 노력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노무현 정부(2003년~2008년) 때의 한미관계는 권태기[56]라는 평가를 들었고 한미관계가 일부분 소원해졌기에 때문에 이명박 정부의 외교는 대미외교의 강화에 많은 초점을 두었다. 이를 통해 ''이제는 한국을 믿을 수 있으니 정보를 주겠다"라는 이야기까지 들을 정도였다. 기사

덕분에 한미관계의 강화와 함께 다시 밀월관계를 과시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대일외교에서도 한국이 주도를 하는 입장을 갖게 되었을뿐만 아니라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통한 미국의 전략에 편승의 형태의 합의를 이루게 된다. 특히 천안함 피격사건 연평도 포격전이라는 위기상황에서 한미관계의 협력은 가장 잘 두드러지는 모습이 되었다.

이명박 정부 재임기간은 부시 행정부(2008년~2009년)에서 오바마 행정부(2009년~2013년)로 넘어가는 과도기 시기로 이명박 정부는 부시 행정부와 오바마 행정부까지 두 명의 대통령을 동시에 접한 정부라고 보면 된다.

그 까다로운 사증 면제 프로그램 가입도 이명박 정부의 한미관계 핵심 업적이다.

한미관계가 급격히 개선된 원인은 물론 부시 행정부의 계산적인 의도와 한반도 주변 여건 변화를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이명박이 발휘했던 특유의 개인적 친화력도 중요한 요소였다. 한미 정상간의 관계는 2009년에 미국의 정권 교체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이 최상이었으며 이를 반영하듯 퇴임 이후 부시와 오바마 모두 이명박과 개인적인 교류를 지속하고 있다. 기사1 기사2

특히 오바마 대통령은 재임중 가장 절친한 외국 정상 5인중의 하나로 이명박을 꼽기도 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1/21/2012012100021.html

이명박 정부가 가장 중요한 외교적 과제 중 하나로 ‘창조적 한·미 동맹’을 설정한 것은 미국의 안보·군사전략 변화, 중국의 부상 등 동북아 안보환경 변화 속에서 단기적인 안보현안에 대한 대응뿐 아니라 미래 수요에 보다 능동적으로 대응하여 나갈 필요가 있다는 전략적 인식 때문이었다. 이명박정부는 21세기 도전에 능동적인 대응을 위하여는 한·미 양국이 동맹으로서 위협에 대한 공동 인식(‘무엇에 대한 동맹인지’)과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공동비전(‘무엇을 위한 동맹인지’)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보았고, 출범 직후부터 한·미관계의 창조적이며 미래지향적인 발전기반 구축을 위하여 노력하기 시작하였다.

이명박 정부는 이러한 한미 동맹의 미래 지향적인 발전이 한반도의 안정 및 북한·북핵문제 해결에 매우 긴요하다고 보았다. 또한 한·미 FTA 발효와 저탄소 녹색성장 협력 등을 통한 상호 공동번영 추구, 동북아 지역 내 평화와 안정에 대한 한·미 동맹의 건설적 역할과 입지 제고, 범세계적인 차원에서 제기되고 있는 다양한 도전에 대한 한·미 간 협력 강화는 양국공동이익의 확대·발전으로 직결된다고 보았다. 이와 함께 한·미 동맹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하여는 동맹의 효용성과 발전 필요성에 대한 양국 국민들의 인식과 체감도의 제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명박 정부는 이러한 인식 하에 한·미 동맹의 미래발전 방향을 동맹 미래비전으로 구현하는 동시에, 이를 구체화시기 위한 노력을 임기 내내 활발하게 전개하여 나갔으며, 미국의 정치적 환경변화를 고려하면서 단계별로 전략적으로 진행되었다.

우선 2008년 참여정부 임기 마지막 해와 이명박 정부 첫 임기로 두 사람의 임기가 겹치는 상당한 위화감이 있던 해였다. 2008년 3월, 노무현 대통령 후임으로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미국의 부시 행정부가 퇴임하는 2009년까지 임기를 1년 남겨둔 점을 감안, 한·미 간 신뢰관계를 공고히 회복하면서 21세기 한미 전략동맹 발전 추진에 대한 미국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등 새로운 미래지향적 발전기반을 구축하는 데 주력하였다. 또한 무기구매(FMS: Foreign Military Sale) 지위 격상, 미국 비자면제프로그램(Visa Waiver Program)가입, 대학생연수취업프로그램(WEST: Work, English Study and Travel) 신설 등을 조속히 완결지어 동맹 발전의 저변을 확대하는데 집중하였다.

이어 이명박 정부는 2009년 초 부시 행정부 퇴임 직후 신행정부인 오바마 행정부의 출범과정에서부터 차기 미 행정부와의 협력관계를 조기에 구축하고, 오바마 신행정부 출범과 함께 한·미 전략동맹 구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실현시켜 나가기 위한 노력을 적극 경주한 바, 2009년 6월 동맹미래비전 채택을 통하여 한·미 전략동맹의 미래 발전방향을 제시하는 한편 한·미 간 주요 현안과 상호 관심 사안에 대한 서로의 생각과 정책을 긴밀히 조율하여 나갔다.

이러한 한·미 간 긴밀한 공조와 협력은 대북 정책 측면에서 특히 두드러졌던 바, 한·미 양국은 2009년 중 북한의 미사일 실험과 핵실험에 대하여 찰떡공조로 평가받은 긴밀한 조율을 통하여 대처하는 한편 북한의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전 및 추가 미사일 발사 등 계속된 도발과 김정일 사망 및 3대 세습으로 야기된 한반도 정세변화에 대하여 원칙에 입각한 전략적 대응을 통하여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견인하여 나갔다.

또한 이명박 정부는 변화하는 안보 환경을 감안하여 한·미 연합방위태세를 확고히 하여나가는 노력도 지속 경주하여 나간 바, 양국 간의 제고된 신뢰와 공조를 기반으로 미측과 전작권 전환 시기 조정에 관한 협의를 통하여 2010년 6월 양국 정상은 토론토 G20 정상회의 계기 회담시 기존 2012년 4월 17일로 되어있던 전작권 전환 시기를 2015년 12월 1일로 조정하로 합의하였다.

아울러 새로운 전작권 전환 시기에 맞춘 포괄적인 동맹현안 점검 및 관리 계획(전략동맹 2015)을 채택·이행하여나감으로써 안보태세를 공고히 하는 가운데 전작권 전환이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하였으며, 동시에 동맹의 지속적 발전을 위한 물적 토대를 공고히 하였다. 또한 점증하는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한 대비와 전략적 억지 태세를 더욱 강화하여 한·미 간 공조 하에 북한의 핵 및 재래식 위협에 대하여 핵우산·재래식 전력 및 미사일 방어능력 등 여타수단으로 확장억지(extended deterrence)를 제도화하였으며, 2012년 10월에는 오랜 현안인 미사일 지침 개정 등을 통하여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실질적 대책을 마련하였다.

한편 한·미 간 4년에 걸친 공동의 노력을 통하여 2012년에는 지난 정부에서 서명된 한·미FTA의 발효를 실현시킴으로써 한·미 동맹을 기존의 군사안보 중심의 동맹에서 경제동맹으로 확대·발전시켜 나가는 한편 한·미 간 협력과 신뢰를 기반으로 2008년 11월 G20 정상회의와 2010년 4월 핵안보 정상회의에 1차 회의부터 참석하고, 2010년 11월 제5차 G20 정상회의와 2012년 3월 제2차 핵안보 정상회의를 서울에서 개최하였으며, 2011년 11월에는 부산에서 세계개발원조총회를 주최함으로써 국제경제·안보·개발 분야에서의 글로벌 거버넌스 발전에 있어 선도적 역할을 수행하고 우리의 입지를 명실상부하게 신장하였다.

이와 같은 이명박 정부의 전략적인 대미외교의 추진의 결과로 구축된 현재의 한·미관계는 역대 최상의 관계로 미측으로부터도 평가되고 있으며, 특히 11회에 걸친 한·미 정상회담은 한·미 정상 간 두터운 우의와 신뢰를 토대로 주요 현안과 관심사를 시의 적절하게 조율하여온 정상외교의 모범 사례로 회자되고 있다.

3.8.2. 박근혜 정부(2013년~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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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 당시 한국의 국제정책은 청와대 안보경제회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최순실의 머릿속에서 튀어나오고 문고리 3인방에 의해 문서로 정리되는 형태였다. 당연히 미국은 이명박 정부에 비해 매우 기초적인 외교력조차 갖추지 못한 박근혜 정부를 외면하고, 동북아 안보경제 파트너로 일본의 아베 정권을 선택했다. 이 시기 한국을 비롯한 미국의 동북아 대외정책은 위안부 합의 등 철저히 일본 입맛에 맞춘 형태로 돌아갔다. 미국은 이미 한나라당 경선 당시 이명박과 박근혜의 정책과 약점을 정리한 CIA 보고서를 백악관에 제출한 상태였으므로, 박근혜와 최태민의 관계, 막후에 있는 최순실의 존재 역시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이야기할 가치가 없을 정도로 답이 없는 집단과 판을 짜고싶지 않은 미국은 일본의 손을 들어준 것. 박근혜 정부 당시 한미관계는 겉으로 보기에는 온화했으나 이해 불가능하고 정신 오락가락한 박근혜 정부의 외교 탓에 한국이 완전히 없는 형태가 되어 있었다.[57]

박근혜정부 출범 이후 미국 정치권은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과 가깝게 지내는 것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으며, 일본은 그 틈을 타 동맹 내에서의 지분을 넓히고 한국과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는 상황. 더구나 박근혜 대통령이 2015년 9월 베이징에서 개최하는 항일전쟁 승리 70주년 기념식에 참석, 열병식까지 참석하였기 때문에 더욱 냉랭해질 것이 확실시 된다. 비록 미국이 이 문제에 대해 "한국의 주권 문제이고 존중한다"라는 입장을 발표했지만 이미 해리티지 재단은 박 대통령의 열병식 참석은 실수(현지에서 'Poor idea'라고 썼다고 한다.)라고 한 것은 미국 보수층 "박대통령 열병식 참석은 실수" 미국 역시 박근혜 대통령의 참석을 그다지 좋게 보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물론 미국도 한중 우호를 전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한미정상회담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한국이 미국과 좋은 관계를 갖는다고 해서 중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라는 말과 동시에, “가끔 박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과 만나면 그것이 미국에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나 한국이 중국과 좋은 관계를 갖기를 미국은 원한다”라며 한중 우호를 지지했다.[58] 그러나, 남중국해 문제에 대해서는 “박 대통령에게 유일하게 요청한 것은 중국이 국제 규범과 법을 준수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라며 “중국이 그런 면에서 실패한다면 한국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 관련기사 라고 말하며, 한국을 압박하였다.

최근에는 4차 핵실험 이후 한미 양국이 사드 배치 논란에서 배치 논의를 공식화 하였다.

4차 핵실험과 그에 대한 안보 정책의 일환으로 요격용 사드 배치 협의를 공식화 한 것을 계기로 박근혜 정부는 과거 3년 간의 친중 편향적 외교 정책이 실패하였음을 인정함과 동시에 한중 우호에서 탈피하여 전통적인 굳건한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한 미국과의 동조를 선택하면서 다시 한목소리를 내며 공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59] 물론 박근혜 정부는 실패를 경험한 이후 3년 간의 친중 편향적 외교 정책에서 탈피하였으나 현재도 중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지만, 과거부터 한국의 외교 우선순위는 대북 압박, 북한에 대한 중국 측의 일방적인 옹호 비판, 그리고 미국과의 공조이기 때문에 사드 배치 협의를 초고속으로 진전시키고 있다, 그에 대해 미국 역시 한국의 친중 편향 외교정책 여파로 인해 냉랭했던 관계를 회복하고 F-22, B-2 폭격기. 그리고 핵항모까지 한반도에 동시 다발적으로 파견함으로서 미국이야 말로 한국의 가장 완벽하고도 진정한 동맹임을 보여주기 위해 적극적인 제스쳐를 취했다.[60][61]

3.8.3. 문재인 정부(2017년~2022년)

  • 트럼프 행정부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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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의 다른 정부의 한미관계보다도 남북관계와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미국측 정상이 트럼프 대통령이기 때문에 여러 변수와 우여곡절이 많은 상황. 임기 전반부에는 평창동계올림픽 이후 연달은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으로 남북, 북미관계에 순풍이 불며 한미 양국 간에 공조가 잘 이루어졌다. 하지만 2차 북미정상회담이 성과 없이 끝나고, 북한이 다시 미사일 도발을 감행하자 미국은 섣부른 대북 화해, 대북 유화책에 신중해지기 시작했다. 연도별, 사건별 세부 사항은 아래와 같다.

2017년 3월, 렉스 틸러슨 당시 미 국무장관이 일본은 가장 중요한 동맹국, 한국은 중요한 파트너라고 하면서 논란이 됐다. 이후 틸러슨 장관은 일본과 중국에선 만찬을 하였지만 한국에서는 만찬을 가지지 않아 다시 논란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기자가 내용을 오역하고 편집한 것. 2017년 3월은 19대 대선이 열리기 두 달 전인 시기로, 문재인 정부 출범 전이다.

2017년 3월부터 북한 문제가 국제적인 이슈로 급부상하면서 한국을 완전히 배제하고 다른 아시아 국가간의 공조가 긴밀하다는 점을 국제사회에 부각시켰다. 트럼프, 아베와 35분 통화…"北 도발 대응 모든 선택지 검토" 심지어 (아무리 탄핵 정국인 점을 감안해도) 한국은 한반도 문제 당사자임에도 전화통화에서조차 배제되는 모습이었다. 트럼프, 日아베와만 통화…한국은 왜 뺐을까? 다만 당시 대통령 궐위 기간임을 고려해야 한다.

이후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대통령 궐위로 인한 외교 공백을 메꾸기 위해 문재인- 트럼프의 통화 및 한미 정상간의 만남을 발빠르게 추진하였고, 2017년 6월 29일, 워싱턴D.C에서 개최된 2017 한미정상회담을 가졌다.

2017년 11월 경 문재인 대통령이 한미일 정상 업무 오찬에서 “ 미국은 우리의 동맹이지만 일본은 동맹이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

2017년 11월 7일, 문재인 대통령이 한미 양국이 우리나라의 미사일 탄두 중량 제한을 완전히 철폐하는 쪽으로 최종 합의했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한국 자체 방위력 증강을 위한 협력을 전례 없는 수준으로 추진하기로 했다"며 이같이 밝혔고 트럼프 대통령도 "한국과 미국 전략 자산의 상당한 획득을 합의했다"면서 "한국이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미국산 장비 구입을 승인했다"고 말했다. *

2018년 4월 11일, 2018 제1차 남북정상회담 2018 북미정상회담을 조율하기 위해 주미대사관과 미국 국무부 간 핫라인을 구축하였다.

하지만 NYT가 5월 20일(현지시각) 보도한 바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김계관이 발표한 '일방적인 비핵화를 강요하면 북미 회담을 취소할 수 있다'는 내용의 담화를 듣고 놀라 화를 냈으며, 위험 부담을 떠안고 북미 회담을 계속 준비할지를 놓고 참모들에게 질문 공세를 했다고 한다. 또한 5월 19일 밤 문재인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왜 북한의 공식 담화 내용과 남북정상회담 이후 문 대통령이 자신에게 전달한 내용이 모순되는지 따져 물은 것으로 알려져 파문이 일고 있다. 기사1, 기사2, 기사3

만약에 이 기사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문재인 대통령은 판문점 선언에서 한국 국민들과 가장 중요한 동맹국인 미국의 대통령에게 거짓말을 한 꼴이 된다. 행여나 남북정상회담에서는 북한이 문 대통령에게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말한 대로 하고, 북한이 갑자기 그 약속을 깬 경우더라도 그렇다. 3월 8일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트럼프와 접견한 후 브리핑에서 북한의 비핵화를 본인 입으로 말했으므로 한국 정부가 북한의 비핵화를 호언장담한, 즉 보증 서 준 것인데 북한이 그걸 깬 셈이기 때문.
이후 5월 22일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을 1박 4일 일정으로 방문하여 트럼프를 만났으나, 정상 간 통역사를 배석한 단독 회담은 20분 만에 끝났고, 그외 다른 관계자들도 배석한 확대회담은 1시간 만에 끝났다. 아무리 사전에 전화를 통한 논의가 있었다 하더라도 단독 회담이 20분 만에 끝나는 것은 지나치게 짧다는 점[62]을 감안하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문재인과의 대화가 더 이상 별 의미 없다고 생각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러한 회담들이 줄어든 것은 단독 회담과 확대회담 전에 기자들에게 의례적인 말(모두발언)을 하고 질문을 받지 않은 상태로 비공개 회담으로 들어가는데, 이날은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 전에 기자들의 질문을 받기 시작했다. 최초의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기자들의 관심이 뜨거웠고 질문이 쏟아지며 회담 시간이 줄어든 것이다. 한미정상회담 시작전 모두발언 풀영상 #

여기서 트럼프의 외교 결례 논란이 일었는데 상황은 다음과 같다. 한 한국기자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질문을 하고 문재인 대통령이 듣는 와중에 트럼프는 "참 친절한 기자네요. 당신처럼 이들은 친구에요. 그런데 참 곤란하게 하네요. 친절한 기자가 날 아주 곤란하게 하네요.(He's a friendly reporter. They're friends - like you. Except he kills me . For a friendly reporter, he kills me.)"라고 말했고, 문대통령이 답변이 끝나자마자 이를 통역해 듣지 않고 ''그리고 전에 이미 들었던 말일테니 굳이 또 통역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모두 잘 가세요. 감사합니다.(And I don't have to hear the translation because I'm sure I've heard it before. Goodbye, everybody. Thank you.)”라고 말하며 끝내버린 것이었다. #

한미정상회담 이틀만인 24일에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정상회담 취소를 선언하자, 이번 회담의 성과가 크고 북미정상회담 개최 가능성도 99.9%라고 발표한 문재인 정부가 사실은 트럼프 대통령의 일부 립서비스를 침소봉대하면서 국민들을 호도한 것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점점 거세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담화 발표 이 후 “북한의 담화가 따뜻하고 생산적이었다”, '“이것이 우리를 어떤 상황으로 이끌고 갈지는 곧 알게 될 것”고 평가하면서 동시에 북미회담이 12일날 예정대로 열릴 수 있다고 다시 한 번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이에 대해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단순히 문재인 패싱을 공고히 했다기보다는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미치광이 전략'을 북한에 사용함으로써 미국이 북한과의 회담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외교적, 비핵화 관련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상당히 공격적인 수를 둔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상식적으로 이번 한반도 관련 비핵화 이슈에서 성공적인 성과를 거둔다면 얻는 이득은 말로 표현하기도 힘들만큼 큰 커리어임이 확실한데, 이런 기회를 시도해보기도 전에 걷어차버리는 것이 말이 안되기 때문.

북미회담 취소 서한에서도 ‘우리는 너희들을 쓸어버릴만한 위력을 지닌 핵무기를 이미 지니고 있다, 니들이 그에 대해서 뭐라 떠들건 간에 우린 그걸 안 쓰길 바랄 뿐이다.'라며 압박하는 동시에 '마음이 바뀌기만 하면 우리는 언제든 다시 한 번 대화할 의지가 있다.'라며 태도를 바꿀 기회를 주는 등의 전략을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6월 12일 제1차 북미정상회담은 싱가포르에서 열려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다시 낙관론이 고개를 들고 있는 줄 알았으나...

트럼프가 예정된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4차 방북을 하루 만에 갑자기 취소시킨 배경에 대해 북한의 김영철에게서 날아온 비밀 편지 때문이었으며, 그 비밀 편지는 트럼프가 방북 취소를 결정할 만큼 적대적인 내용으로 차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WP의 외교전문 칼럼니스트 조시 로긴은 ''문재인 정부가 백악관의 찬성 여부와 상관없이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시도하는 등 갈수록 독자적인 행동을 보이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으며, 또한 북미 회담에 관여하는 한 고위 관계자는 스탠퍼드대 아시아 태평양 연구소의 대니얼 스나이더에게 "한국이 단호하게 나아가려 결심한 상황에 이르렀다. 그들은 더는 우리와 나란히 발맞춰 대응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며 한국 정부와 함께하는 데 큰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고 언급했다. 기사

매티스 국방장관이 잠정 중단되었던 한미군사훈련을 재개할 수 있다는 발언을 했다. 한국 국방부와 협의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8월 28일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이 국회에 참석해 북미 간 대화 의지가 확실하며 파탄 전 상황이 아니라는 반박을 했다.

2018 제3차 남북정상회담에서 9월 평양공동선언이 나온 날 바로 트럼프는 핵 사찰, 2032년 남북 공동 올림픽 개최 노력 등에 대해 매우 흥분된다며 트윗을 날렸다. # 평양 공동선언이 나왔을 시각은 미국 밤 시간으로 트럼프 대통령이 바로 소식을 확인하고 트윗을 날리고 잠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2018년 9월 27일 트럼프 대통령은 미일 정상회담 아베 총리 앞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방미할 때 폭스 인터뷰에서 한 트럼프 대통령에 관한 칭찬에 관해 매우 감사하다고 전했다. 한미정상회담 이후로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지 못해 그가 이 이야기를 듣기 바란다고 말했다. #

또한 아베 총리 앞에서 김정은의 친서를 자랑하고 두 통 중 한 통을 아베 총리에에 보여주었다고 한다. 아베 총리는 대단한 편지라고 맞장구쳐주었다. 게다가 미일 관계가 한미 관계보다 밀착됐던 이 시점에서 누가 평화를 위해 정치적 위험을 무릅쓰고 북미간 중재를 했는지, 북한에 대한 최대한의 압박과 제재만 주장하며 누가 모기장 밖[63]이라는 평가를 들었는지 비교해보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트럼프는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없이는 제재를 풀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90년대 냉전이 해체되고 나서 한국은 미국과 동맹을 유지하며 나날이 경제력과 군사력이 커지는 중국과 일본, 러시아와의 적절한 관계를 맺어왔다. 또한 한국의 경제와 중국의 경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어 어느정도 중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미국과 일본은 겉으로는 평화스러운 관계를 유지하지만 중국을 잠재적 적국 취급하며 군사적으로 경계했다.

일본 외교는 미국 외교의 부록이라고 할 정도로 미국의 틀을 따라가며 크게 의존하는 편이다. 한편 미국은 같은 동아시아 동맹국이라도 동아시아 제1동맹을 일본으로 생각하며 일본에 가치를 두는 편이다. 2015년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 합의에서 미국이 누구의 손을 들어줬는지 생각해보자.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문재인 대통령의 칭찬에 감사하고, 아베 총리는 그저 미국, 한국, 북한이 주동적 역할을 끝나기 만을 기다리고 있다.

2018년 한 해를 돌아보면 북한 문제에 관해 미국 정부는 일본 정부보다 한국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대화하고 있다. 결국 일본의 입장에서는 그냥 가만히 있다가 미국이 뭔가를 결정하면 따라만 가면 된다는 입장이다. 협조적일 필요도, 적대적일 필요도 없이 그저 방관하면 된다는 것. 다만, 주한미군이 북미 회담의 판돈으로 올라가 있을 경우에 대해서는 매우 예민하고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혹여나 한국에서 주한미군이 사라지거나 한반도가 통일 국가가 되면 한반도는 통일 이후 대륙 세력을 막아주는 방파제에서 일본 중국 러시아와 영토 문제와 국가 이권으로 이들을 겨누는 칼끝으로 변하게 되며, 일본은 신냉전의 최전선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런데 2019년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 이후 한미 관계에서 마찰까지는 아니지만 목소리가 엇나가는 상황이 계속 발생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 문제에서 완벽한 비핵화 이전까지는 제재 해제는 없다는 원칙을 확고히 하고 있는 가운데, 문재인 정부에서 노골적으로 대북 유화책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에서 부풀린 측면이 있다해도 한미 간에 대북정책 이견이 있음은 확실해 보인다. 회담 이후 문재인 대통령의 중재자라는 표현에 있어서도 여러 얘기가 나왔다. 이 때문에 앞으로의 외교 정책에서도 한미간의 이견을 얼만큼 줄이거나 관리하는 데에 많은 수의 성과가 달려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여기에 4월 11일 진행된 3차 한미정상회담의 총 회담시간이 29분 간이었고 그 29분의 대부분이 작년 5월 한미정상회담 당시와 마찬가지로 언론과의 질의응답에 할애되면서 단독회담에 소비된 시간만 따지면 고작 2분(...)에 불과했다고 알려졌다. 이에 따라 현 정부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정치권 #과 언론 #1 #2 등에서는 이번 사례가 한미 간의 대북 정책 이견이 여전함을 보여준 요식행위에 불과했다고 평가하면서 미국 측의 코리아 패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외교적 참사가 아니냐고 우려가 나오고 있다.

다만 문 대통령이 빨리 남북 정상회담을 열겠다고 하자 트럼프가 “한국이 파악한 북한의 입장을 가급적 빨리 전해달라”고 밝힌 대목을 통해 남북 회담을 통한 수습 방안을 수용하는 동시에 문 대통령의 중재자 역할을 인정했다는 분석 #1 #2도 있어 코리아 패싱까지 갔다는 평가는 지나치다는 의견도 있다.

CNN 보도에 따르면 이날 한미 정상회담 때 트럼프 대통령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김정은 위원장에게 전달할 비밀 메시지를 쥐어줬다고 한다. 이 보도에 따르면 만약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될 경우 이 메시지가 김 위원장에게 전달될 것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현재의 방침(course of action)에 중요한 내용과 북미정상회담에 긍정적 상황으로 이어질 내용이라고 한다.

2019년 4월 10일, 미국 상하의원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대한민국 건국의 시초로 공식 인정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단순히 3.1운동을 기념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일본계 정치 세력과 우리나라 수구-보수 진영이 끊임없이 물고늘어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 논란을 종결지은 결의안으로, 미 의회가 한국 국민들에게 건네는 일종의 선물과도 같다. 이 결의안에서 "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 인권, 법치주의라는 공동의 약속에 바탕을 둔 한미 동맹은 역내에서 미국의 이익과 관여를 증진하는 데 있어 중심이라는 것을 재확인한다"며 한미 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2019년 5월에는 북한에 역대급 식량난이 불어닥친 것으로 파악되었고 이에 우리나라는 세계식량계획의 대북 식량 원조를 도우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런데 그 와중에 북한이 두 차례에 걸쳐 저강도 무력 도발 행위를 했다. '북한이 추가 도발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도 한국이 북한에 식량을 보내는 것을 트럼프 대통령이 괜찮다고 보느냐'는 언론의 질문에 세라 허커비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은 한국의 대북 인도적 지원엔 간섭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그리고 청와대도 트럼프 대통령이 5월 7일 문재인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한국이 인도적 차원에서 북한에 식량을 제공하는 것이 매우 시의적절하며 긍정적 조치가 될 것"이라며 지지했다고 밝혔다. *

2019년 5월 13일에는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났다. 이 자리에는 조윤제 주미대사와 롯데그룹 관계자들, 매슈 포틴저 미 국가안전보장회의 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이 함께했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트위터에 따르면 롯데그룹이 미국 루이지애나에 31억 달러(약 3조 6,000억 원) 규모의 투자를 하기로 했다고 전해진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 기업으로부터 받은 최대 규모의 대미 투자이며, 미국민을 위한 일자리 수천 개를 만들었다. 한국 같은 훌륭한 파트너들은 미국 경제가 그 어느 때보다 탄탄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강조했다. *

논객닷컴이라는 언론사의 보도에 따르면, 이번의 롯데 대미 투자는 롯데케미칼 에탄크래커 공장으로, 공사 기간 3년을 거쳐 축구장 152개를 세울 수 있는 부지에 들어섰다고 한다. 2016년 6월 기공식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건설에 착수했다고 한다. 그리고 약 3년 뒤인 2019년 5월 9일 미국에서 준공식이 열렸는데, 이 자리에는 신동빈 회장은 물론, 루이지애나 주지사, 이낙연 총리도 참석했으며 데이비스 백악관 정책조정 부차관보가 트럼프 대통령 대신 참석하여, “롯데케미칼 에틸렌 공장은 미국과 한국의 승리이고, 한미동맹의 굳건함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내용이 담긴 트럼프 대통령의 메시지를 대신 전달하였다고 한다. * 유튜브

2019년 5월 16일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6월 말 쯤 우리나라를 공식 방문할 것이라는 소식이 알려졌다.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은 이날 오전 서면 브리핑을 통해 "트럼프 미 대통령은 6월 하순(28일~29일) 개최되는 G20 정상회의 참석을 계기로 방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백악관도 같은 시각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 사실을 공식 발표했다.

6월 30일 한미 정상회담과 남북미 정상회담이 잇달아 펼쳐지면서 국제적인 관심이 집중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2019년 남북미정상회동 참고.

정부 관계자 중에서 대북유화론, 그리고 조건부 미군철수를 주장하는 문정인 특보를 주미대사에 내정했다 철회된 일이 있는데, 이것이 미국 정부의 불만 표시 때문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 대놓고 주미대사에 반대 표명은 할수 없으니 돌려서 압박했다는 식.

그러나 8월 22일 문재인 정부에서 지소미아를 연장하지 않기로 결정함에 따라 미국 내 정부 관료들은 실망감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바로 다음날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 장관은 실망스럽다는 표현을 드러냈다. 지소미아 폐기는 한미관계에 적잖은 마찰을 불러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8월 29일,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가 예정된 공식 일정에 불참하고 쉐이크 쉑을 먹으러 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 트위터 인증샷의 행복해 보이는 표정은 덤. 외교적 결례임에도 이런 조치를 취했다는 것은 그만큼 한미관계가 껄끄러운 것 아니냐는 반응이 나왔고, 연이어 이루어진 문재인 정부의 행보는 이를 잘 보여준다.

트럼프가 한국, 김정은에게 우습게 여겨지고 있어 김정은 한국 무시하고 있어 라고 발언했다.

트럼프는 뉴욕에서 (현지시간)9월 23일에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 한국과 매우 잘 협력하고 있다고 #발언했다. 이 날 트럼프는 특히 한국의 미국 군사장비 구매를 강조했다.
3.8.3.1. 트럼프의 방위비 분담금 인상 요구
2019년 10월 말 경부터 미국 정부는 거의 갈취수준으로 방위비 분담금 협정(SMA)에서 한국측 분담금을 1년에 약 3조 원수준으로 대폭 인상하였다. 그리고 노골적으로 한일 군사정보포괄협정 연장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에 더불어민주당 내에서는 해리스 대사가 대단히 무례하다는 수위높은 비판까지 나왔다. # 여권에서는 해리스 대사의 군 복무 경력 등 개인적인 성향 문제를 이야기하지만, 결국 대사라는 직업이 철저히 본국의 외교활동을 수행하는 역할임을 감안한다면 한미 사이에 마찰이 있음은 확연하다.

조선일보에서 방위금 역청구서 기획 시리즈를 내놓으며 "우리도 기브 앤 테이크를 해야 한다"는 기사를 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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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바이든 정부 출범 이후 처음 열린 한미 방위비분담금 협상에서 양국이 조속히 타결하기로 합의하여 방위비 문제가 트럼프 정부 시기에 비해 원만하게 풀릴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기사

3.9. 202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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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1. 대북전단 금지법 관련 한미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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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 한국과 미국의 정계 징크스

한국과 미국의 정계 개편을 보면, 묘하게도 민주화가 이루어진 제6공화국에 들어선 양국의 정치 성향이 유사하게 맞아 떨어진 적이 없다.[64] 미국의 양대 정당인 민주당/ 공화당이 번갈아 집권할 때마다 한국의 정권도 3당 합당 이후의 보수정당 민주당계 정당이 엇갈려서 집권하는 것. 쉽게 말해 미국 민주당 정권-한국 민주당계 정권, 미국 공화당 정권-한국 보수정권으로 일치한 적이 없다는 뜻이다. 그나마 일부 기간이 걸치는게 민주당 빌 클린턴 정권(1993년~2001년) 말기와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65](1998년~2003년)초기, 공화당 조지 W. 부시 정권(2001년~2009년) 말기와 이명박 정부(2008년~2013년) 초기, 그리고 민주당 조 바이든 정권(2021~) 초기와 문재인 정부(2017~2022) 말기가 겹치는 정도이다.[66][67] 그나마 이것도 당시 클린턴 정부와 부시 정부는 임기 말의 레임덕 상태[68]였고 조 바이든과 더불어민주당 정권이 잠시 겹쳤던 시기에는 미얀마 쿠데타, 아프간 사태, 우크라이나 전쟁 등 해외에서 대형사건이 연달아 터져서 북한 등 한반도 관련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서 크게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가 단임 대통령으로 물러나고 문재인 민주당 정부 또한 정권 재창출에 실패하면서 또다시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즉 클린턴 연임 - 노태우/김영삼 보수정부[69], 조지 W 부시 연임 - 김대중/노무현 민주당계 정부, 오바마 연임 - 이명박/박근혜 보수정부 이렇게 미국과 한국이 임기 2회씩 엇갈린 성향으로 집권하고 있었는데 트럼프가 단임 대통령이 되면서 이번에야말로 이 징크스가 깨지나 기대한 사람들이 많았으나 공교롭게도 2020년 미국 대선 얼마 후 치러진 20대 대선에서[70] 트럼프 정부와 엇갈린 성향의 문재인 민주당 정부 또한 6공화국 최초로 정권 재창출에 실패하고 또다시 민주당 조 바이든 정부와 엇갈린 보수주의 국민의힘 윤석열 정부가 집권하게 되면서 또다시 아주 절묘하게 징크스가 맞아들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미관계가 좋지 않았던 적은 박정희 정권때 잠시 있었던 것 외에는 드물고[71] 심지어 미 국무장관이 노무현은 반미주의자라고 낙인찍은 노무현 정부때(2003년~2008년) 조차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한미 FTA의 중요성을 국가적으로 설득했을 정도였다[72][73]. 민주당계 정당이 집권했을 때도 한미관계가 상대적으로 데면데면 하는 정도였을 뿐, 양국 관계를 끝내니 마니 할 정도로 악화가 된 일은 한번도 없었다. 또한 문재인 정부와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관계 역시 서로 삐걱대는 경우도 있지만 우려 하는만큼 양국관계가 틀어진 상황은 절대 아니다. 트럼프 재임시기 미국은 한국뿐 아니라 일본, 독일, 프랑스 등 다른 주요 동맹국들과 여러번 충돌했으며 심지어 5개의 눈에 속하는 혈맹인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와도 갈등을 빚었다. 이 부분은 트럼프의 외교 정책 문서에 나와 있다. 한미동맹 약화 우려에 대해서 오히려 여당이 목소리를 낼 정도이다. #

4. 문화예술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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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한국 영화계에서는 미국 영화가 한국 시장을 독식하는 체제가 극에 달했는데 당시 미국 영화는 한국 정부에게 스크린쿼터 축소를 주장할 정도로 막강한 영향을 가졌으며 이 때문에 한국 영화계와 첨예한 대립까지도 갔었다. 또한 의류 브랜드나 기타 생활용품 등도 미국산 상품이 많이 수입되기도 한 편.

영어( 미국식 영어)의 영향도 커서 영어 교육이 활발할 뿐 아니라 한국의 초, 중, 고등학교 정규 과목으로도 편성되기도 하였다. 1990년대 말기까지는 중학교 1학년부터 영어 과목이 적용되었으나 이 당시도 사교육상으로는 초등학생(국민학생) 때 부터 배웠던 편이 많았다. 현재는 초, 중, 고등학교 모두 영어를 정규 과목으로 편성하여 교육하고 있다.[74] 또한 한국에서 일하는 원어민 강사 상당수가 미국 출신이다. 인종별로는 백인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아시아계 (보통 한국계), 흑인, 히스패닉, 기타 인종[75] 순서이다.

한국의 운동선수들도 미국 리그로 많이 진출하고 있는데 보통 야구 선수들이 미국으로 많이 간다. 농구, 미식축구, 축구는 한 자릿수로 진출하는 형편이고[76] 아이스하키는 미국 리그로 진출한 선수가 없다. 미국에서는 야구 농구 선수들이 한국으로 많이 온다.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외래어로 쓰는 영어는 거의 미국식 영어가 대부분이다. 날짜 서술 방식도 미국 따라한다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한자문화권에서는 원래 월/일로 날짜를 썼다.

음악 또한 영미권, 특히 미국식 , 블루스, 재즈, 힙합 등의 장르를 받아들이고 한국식 감성으로 재해석하며 K-POP을 발전시키기도 하였다.

2020년 10월 6일에 한국국제교류재단은 미국 버몬트주 소재 미들베리칼리지에 '방탄소년단과 함께하는 한국어'(Learn! KOREAN with BTS) 교재를 활용한 '글로벌 e-스쿨' 강좌를 개설했다고 밝혔다. #

재미동포 강우성이 미국에서 한국 문화를 소개하는 책을 출간했다. #

SM엔터테인먼트가 미국의 방송 프로그램 제작사인 MGM 텔레비전과 손잡고 미국 기반 K팝 그룹을 만드는 오디션을 진행한다고 밝혔다. #

K-pop이 미국 주류 음악 시장에서 더 큰 활약을 펼칠 것이란 분석이 나왔다. #

한국어는 미국에서 많이 쓰이는 외국어 7위가 되었다. #

2021년 1월부터 11월까지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 중 미국인이 가장 많은 것으로 집계됐다. #

방탄소년단의 공연이 라스베이거스에서 개최됐다. # 그리고 걸그룹 에스파가 미국 코첼라 음악축제에 출연했다. #

한미수교 140주년을 맞아 양국간 활발한 문화교류가 이뤄질 전망을 보이고 있다. #

5. 한일관계에 대한 미국의 개입

미국은 멕시코에게는 '너무 가까워' 한이 되는 나라이지만 태평양을 사이에 둔 한국에게는 그렇지 않다. 미국은 한국을 상대로 영토적 야심이 없다. 인도·태평양 전략을 구사함에 있어 주요 거점 기지로서의 비지니스적 필요성은 있다. 이것이 대한민국에게는 로또 당첨처럼 기능했다. 미국은 멀리 있지만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의 열강들이 한국을 집적거리지 못하게 할 만큼 강하다. 한반도 역사상 처음 있는 역학관계였다.
'가여운 한국, 신은 너무 멀고 중국은 너무 가깝다' - 매일경제 노원명 기자 칼럼. #

한미 양국은 대부분의 정치 현안에서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만, 미국은 마찬가지로 자국의 우방국인 일본이 얽힌 독도 영유권 문제나 동해 표기 문제에 대해서는 중립 내지는 일본에 우호적인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 먼저 독도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는 중립적인 입장이라지만 현재 해당 섬을 한국이 실효지배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일본에 다소 치우쳐 있다고 볼 수 있고, 동해 역시 일본의 주장대로 일본해(Sea of Japan) 단독 표기를 고수하겠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상황. 다만 이는 미국이 딱히 일본을 편애해서라기보다는, 원래부터 우방국 간 분쟁은 관여하지 않음을 원칙[77]으로 하고 있으며, 정책 수립이나 정부, 군사에서 사용하는 수천 수만개의 지도에서 '일본해'를 전부 '동해'로 바꾸면서 발생할 행정적 비용과 손해를 감수하기 싫은 것이다.

2015년 3.1절이 끝나기 무섭게 미 국무부 셔먼 차관이 한•중이 과거사를 이용해 일본을 공격하여 값싼 박수를 받아내고 있으며 이는 일본에 대한 도발에 해당한다는 등의 아시아 과거사 문제에 대한 양비론을 꺼내고 나와 한국에서 셔먼 차관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미 국무부와 한국 외교부는 이에 대해 미국의 한일 과거사 문제에 대한 태도는 변함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으나, 미국이 최근 중국 쪽으로 기우는 한국 탓에 약해진 한미일 삼각 동맹을 공고히 하기 위해 셔먼 차관을 이용해 넌지시 한국에 압박을 넣고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완전한 과거사 해결 없이 한일 양국의 미래지향적 태도를 원하며 그를 통해 중러를 견제하려는 미국의 태도에 국민들의 반감 역시 증가했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가 어떤 극단주의자에 의해 피습당하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 한미동맹 강조 열풍이 불어 모든 반미 감정을 덮어버렸으며, 셔먼 차관의 발언에 대한 한국의 질책은 흐지부지 되어버렸다. 2015년 4월 8일에도 미국 국방장관이 일본 방문 당시 한중일이 과거보단 미래를 지향해야 한다며 일본을 감싸는 듯한 발언을 해서 논란이 되었다.

사실 1980~2000년대 사이 일본이 연이어 과거사 도발을 시전하고, 효순이 미선이 사건 등으로 반미 감정 역시 치솟으면서, 일각에서는 과거 구한말 일제강점기 당시 가쓰라-태프트 밀약 등으로 미국이 조선을 버리고 일본 손을 들어주었던 전적까지 들먹이며 미국을 못 믿을 동맹 취급하기도 하였다. 반면 미국이 일본 편을 들어주는 것은 일본 자민당 정권의 극단적인 친미 외교의 보답이라고 평가하며, 한국이 한미일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미국과의 공조를 강화해야 한다는 반론도 있었다. 그러나 외교란 결국 각국의 이해득실에 따라 적아가 갈리는 것이기 것이기 때문에, 특별히 미국에 더 달라붙거나 미국을 적대시하기보다는 세계적으로 결국 한국이 일본을 상대로 갖는 입지가 그 정도임을 인지하고 그에 맞게 전략을 짜나가는 편이 옳을 것이다. 실제로 미국은 자국이 직접적으로 교전 당사자가 되었던 태평양 전쟁과 관련해서는 일체의 역사왜곡을 허용하고 있지 않으며, 위안부 문제를 여성에 대한 범죄로 규정해 본토에 위안부 기림비를 세우는 것을 허용하였고 하와이를 방문하여 일본 극우파에게 경고 메시지를 보내는 등, 최소한의 도의적인 측면에서는 주판알을 튕기기보다는 피해자인 한국과 공조하는 편이다.

따라서 한국으로서는 현실을 인정하고 일단 일본 과거사 문제에 대한 해결을 차후로 미룰 것이냐, 아니면 한미관계의 손상을 감수하더라도 대일 압박 기조를 끝까지 밀어붙일 것이냐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 있다. 사실 후자는 현재로서는 쉽게 선택하기 어려운 상황이므로[78] 한미관계를 강화하고 한일관계를 개선함으로써 일본의 전향적 태도를 기대하는 것이 합리적이겠으나.. 한일관계 항목에서 보듯이 한국민들의 대일 감정은 일제강점기 전쟁, 그 외 기타 등등으로 최악을 향해 달려가고 있고, 일본 역시 한일관계의 현안들에서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쉽지 않은 상황이다. 섣불리 물러날 경우 정권이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의 대일 외교에 상당한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

게다가 섣부른 양보는 일본에게 "한국에는 대화나 타협보다 강경한 적대적 외교 노선이 더 잘 통한다"는 그릇된 편견을 줄 수 있다. 외교무대에서의 관계 개선은 한쪽의 의지만으로 가능하지 않으며, 심지어 쌍방이 모두 의지를 갖고 있더라도 정세에 따라 실패하기도 한다. 당장 아베 신조조차도 집권 초창기 한국에 나름 우호적인 제스쳐를 보였으나, 당시 대한민국은 친중 정책의 일환으로 일본과 거리를 두어야 했기에 관계개선이 실패했던 바 있다. 심지어 뒷날의 위안부 합의에서 입증되었듯 박근혜 정부 역시 딱히 반일이라 평하기 어려웠음에도. 문재인 정부에서 북한에 계속 저자세로 나가며 양보하는데도 관계개선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때문에 한국에서 먼저 한일관계를 개선하고자 한들 일본에서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79]하려는 움직임이 없다면[80] 일방의 짝사랑으로 끝날 뿐이다. 한국에서도 과거부터 줄곧 일본에 대해 우호적으로 접근하려던 움직임이 여러차례 있었으나 죄다 독도 영유권 주장이나 야스쿠니 신사 참배등 한국에서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사안에 대한 일본의 폭주로 허무하게 무너졌다. 게다가 지금까지 역대 정부에서 과거사 문제에 대해 해결을 차후 미룬다고 해서 상황이 개선되지 않고 쓸데없이 양국의 국민감정만 서로 악화된다는 것은 에전부터 계속 확인되어왔다.

사실 미국에겐 한국과 일본 모두 중요한 동맹국이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한쪽만 편을 들기는 결코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일부 사람들은 한국이 혹은 일본이 미국에게 있어 더 중요하다고 보지만 이는 개개인들의 의견일 뿐이다. 물론 상대적으로 미국의 유력 인사들이 일본에 대해 우호적 발언을 하긴 하지만 이는 일본의 경제력등을 감안해보면 자연스런 현상이다. 오히려 일본측에서는 겉으로만 일본에게 우호적이라면서 미국에 대해 불만을 표하는 경우가 많다[81]. 미국은 과거부터 일본에게는 명분을 살려주고 한국에게는 실리를 챙겨주는 전략을 유지하면서 나름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당연히 전문가들은 미국이 한국과 일본 모두 같은 수준의 동맹으로 보고있다.

물론 한국과 일본의 경우 다른 미국의 동맹국들과는 달리 5개의 눈 바로 밑에 등급 혹은 거의 동등하게 본다는 의견도 있긴 하지만 이 역시 한국과 일본을 동일 선상에서 저렇게 본다는 것이지 어느 한 국가만 편 드는건 아니다. 진정한 미국의 동맹은 오직 영국,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이다. 5개의 눈 참고. 현실적으로 한국과 일본은 미국과 언어도 다른데다가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도 고려해야되기 때문에 5개의 눈처럼 미국과 완전한 동맹국이 되기 어려운 상황이다. 과거 박근혜 대통령이 보수층의 반발을 무릅쓰고 천안문 망루에 올라간 것이나 최근 일본이 중국과의 관계에 공을 들이는 것도 그만큼 중국이 양국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경우에도 우리나라와 비자면제를 체결할 정도로 경제협력에 공을 들이고 있으며[82] 일본은 러시아와 아예 영토분쟁까지 진행중일정도로 깊숙이 연관되어있다.

미국은 일본과 한국의 과거사 갈등에서 어디까지나 중재자 입장에 서려하지 한쪽에 동조하지 않는다. 일본해 논란도 사실 일본의 주장에 동조하는 것으로 흔히 인식되지만 일본해 명칭을 사용하는 이유에는 미국에서 마냥 일본의 주장에 동조해주는 것이 절대 아니다. 나름의 합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동해/명칭 문제 참조. 때문에 미국에서 독도 표기문제에서는 일본의 반발을 감수하면서 한국측의 의견을 적어도 동조는 해주고 있다. 미국도 2차대전에서 일본제국과 전쟁을 하여 일본제국을 무너뜨린 연합국이기 때문에 과거사 문제에서 일본의 정도를 넘은 폭주에 대해선 강경하게 대처하며 분명하게 선을 긋는다.

6. 다른 미 동맹국들과의 대비

흔히 대한민국과 미국의 관계를 두고 혈맹이라고 표현한다. 이는 한미동맹이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을 비롯한 수많은 전쟁 속에서 흘린 양국 군인들의 피로 맺어진 관계임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의미이다. 특히 미군은 한국전쟁 당시에 파견된 유엔군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해 실제로 피를 흘렸다는 비유적인 의미이다.

미국은 한국을 자국과 인종적, 문화적 공통점을 가진 5개의 눈[83] 바로 다음으로 중시한다. 이를 두고 핵심 동맹국이라고 표현하며, 한국 이외에도 일본 EU의 핵심국가인 독일, 프랑스 등 4개국이 포함된다.[84] 반대로 한국이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지정하는 우호관계 등급에서도 미국은 글로벌 포괄적 전략적 동맹관계라고 표현하여, 다른 국가들에 비해 중시하고 있다.

다만 대국관계가 흔히 그러하듯 영원한 동맹관계란 없으며, 한국에게나 미국에게나 동맹을 유지함으로써 얻는 이익보다 '더 큰 이익'이 생긴다면 동맹을 파기할 수도 있다. 이는 5개의 눈이라 불리우는 국가들에게도 예외는 없으며, 20세기 초만 해도 미국은 대서양 패권을 두고 영국과의 전쟁을 상정한 적색작전(Operation Red)을 세우고, 2차대전 중에는 참전의 대가로 영국의 섬들을 얻어냈으며 수에즈 위기에선 소련과 손잡고 영프의 탈식민지화를 압박하는 등 이해관계 앞에서는 얄짤없는 행보를 보였다. 현대에도 미국은 한반도 외교가 중요하다고 판단되자 호주의 반발을 무릅쓰고 호주 대사 내정자를 한국으로 긴급배치하기도 하며, 5개의 눈에 속한 뉴질랜드가 5개의 눈에 속하지 않은 일본보다 더 친중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모든 국가는 국제정세의 변화와 동맹의 상황에 따라 가변적인 외교 행보를 취하는 편이다. 같은 맥락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 역시 일방이 끊기를 원한다면 1년의 유예를 두고 만료시킬 수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는 북중러 진영의 견제라는 한미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에 별 탈 없이 유지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미국이 양국간 상호방위조약을 완전히 파기한 사례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미국-대만 상호방위조약 되겠다.

즉, 한미관계는 혈맹관계가 맞으나, 그러한 혈맹관계는 거저 얻어지고 거저 유지되어온 것이 아니라 1953년 이래 한미 양국이 상대국과 자국의 이해관계를 최대한 일치시키고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벌여온 끊임없는 외교적 노력이 빚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7. 경제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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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한국의 무역 상대국 순위 2위이다. 미국의 무역 상대국 순위 6위가 한국(2018년 기준)으로 영국, 프랑스보다도 크다. 게다가 한미간의 무역은 계속 빠른 속도로 늘어나는 추세로, 2012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이 7위였지만 바뀐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우방 및 우호국인 한미 사이에도 경제 분야, 특히 경제적 통상 압력이라는 갈등의 불씨에서는 피해갈 수 없는 관계이다. 특히 1980년대 이후 한국의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노골적으로 한국 내수 시장 진출을 위한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고, 미국 시장에서의 무역 흑자가 없으면 경제에 치명타였던[85] 한국은 결국 어느 정도 양보를 택함으로써 어느 정도 성공했다.

특히 1996년에는 미국의 자동차 회사들이 한국 진출을 위한 발판과 한국 자동차 시장의 개방 목표를 바탕으로 미국 정부에서 한국 정부에게 자동차 시장의 조속한 개방을 통해서 통상 압력을 가한 적도 있었다. 자동차 외에 나머지 유통 개방 문제에 대해서도 통상적인 압력이 가해지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도 있었던 편이었다.

또한 영화계의 경우는 스크린쿼터 축소 문제로 한국 영화인들과 갈등을 빚기도 하였는데 미국 영화계는 미국산 영화의 한국 진출 활로 개척과 시장 개선을 위해서는 한국 영화관에서 시행하고 있는 스크린쿼터제를 축소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부분의 한국 영화계와 영화인들이 반발하였으며 이들은 스크린 쿼터가 축소되면 한국 극장가에는 한국 영화 상영은 줄어들고 미국 영화들이 대거 상영될 것이라는 우려를 나타내며 주한 미국 대사관에 항의서한을 보내거나 삭발 및 단식투쟁을 하며 스크린쿼터 사수에 나서기도 하였을 정도였다.

2015년에는 한국이 미국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국 주도의 AIIB에 가입하면서 경제적인 관점 만큼은 반드시 친미는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다만 유럽 국가들도 가입하는 상황이라 미국 입장에서 직접 가입하지 않더라도 중국을 어느 정도는 제어할 수 있다고 판단해서 묵인한 측면도 있다. 아울러 영국과 같은 유럽 국가들까지 가입하기로 결정한 이후에 나온 점이라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과 네덜란드 기업 3곳이 충남 아산에 생산공장을 신·증축하기로 합의했다. #

코로나19가 2020년부터 전세계로 퍼지면서 미국과 한국은 3월에 통화 스와프를 체결했다. 그리고 7월에 연장됐다. #

코로나19가 퍼져 있지만, 농림식품축산부는 한국산 배가 미국으로 수출됐다고 밝혔다[86]. #

11월 17일에 월스트리트저널은 한국 큰손들이 미국의 상업 부동산을 공격적으로 사들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

현대트랜시스가 조지아주 웨스트포인트에 2억4000만 달러(약 2652억원)가 넘는 자금을 투자해 678명의 직원을 고용하는 변속기 공장을 건설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2021년 5월 20일에 SK이노베이션이 미국의 포드사와 전기자동차용 배터리셀 생산을 위한 합작법인을 설립하기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

SK이노베이션은 조지아주에서 건설중인 배터리 공장에 연내 1,000명을 추가 채용한다고 밝혔다. #

2021년 6월 29일에 전국경제인연합회는 방문한 미국 전직 상·하원 의원들과 기업인 만찬간담회를 열고 한미 양국 간 경제협력을 위한 건의사항 등을 전달했다. #

코트라가 미국에서 K-라이프스타일 행사를 개최했다고 밝혔다. #

현대자동차가 11월 미국 시장에서 판매수가 20% 감소했다. #

2021년에는 한국이 일본을 제치고 미국산 쇠고기 최대 수입국이 됐다. #

2022년 1월 27일에 포브스는 한국은 미국의 무역 파트너 가운데 수출하는 비중이 더 높은 유일한 아시아 무역 파트너라면서 2월초에 2021년 무역 수치가 발표되면 한국은 미국 5대 수출국에 오를 수 있다고 전했다. # 4월 8일에 한국과 미국은 세탁기 세이프가드 분쟁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 3개월 더 논의하기로 했다. #

한국기업의 대미투자가 증가하고 있다. 미중 무역전쟁을 계기로 관세등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미국에 직접적으로 투자하는 분위기이다.
파일:한국기업의대미투자.jpg

8. 교통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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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국을 이어주는 항공노선이 존재한다. 한미간의 교통 교류는 일반적으로 항공노선을 통한 교류가 많은 편이며 양국 항공사들이 자주 왕래하고 있다. 인천국제공항 김해국제공항에는 한미간 노선이 존재하며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등 한국 항공사들이 미국으로 자주 가고 있다. 미국 항공사들도 한국을 자주 왕래하고 있다. 양국 국민들이 자주 관광, 유학, 취업 등의 이유로 왕래한다. 한국은 미국과 무비자협정을 체결했다.[87] 냉전 시절에는 한국이 미국노선을 통해 유럽 국가들로 갔다.

무비자의 경우, 한국인들의 미국 입국이 가능하지만, ESTA를 받아야 입국가능하다. 반면, 미국인들은 한국으로 무비자입국이 가능하다.

9. 대사관

워싱턴시에 주미 한국 대사관, 서울시에 주한 미국 대사관이 존재한다. 미국은 한국내 일부 도시에 영사관을 두고 있다. 한국도 미국내 일부 도시에 영사관을 두고 있다.

10. 참고/관련 문헌

  • 한미 갈등의 해부 - 문창극 저. 나남. 1994.
  • 한미동맹 50년: 법적 갈등과 미래의 전망 - 한국정치외교사학회, 심지연, 김일영 등 공저. 백산서당. 2004.
  •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8.15에서 5.18까지 - 박태균 저. 창비. 2006.
  • 영원한 동맹이라는 역설: 새로 읽는 한미관계사 - 김준형 저. 창비. 2021.

11. 관련 문서



[1] 나 먼저 원칙에 의해 미국에서의 표기는 미국이 앞서지만 종종 협정문 등에서는 약자로 KOR-US로 나타내기도 한다. 코러스, 즉 합창이라는 뜻의 영단어와 비슷하게 보이기 때문이라고. [2] 색 범례는 왼쪽부터 민주당계 정당(대한민국), 보수정당(대한민국), 민주당(미국), 공화당(미국) 순. [3] 출처 이스라엘(74%)보다 높은 수치이다. [4] 출처 [5] "北도발 억제 위해 '파이브아이즈+한국·일본·프랑스' 발족" [6] 사실상 [7] 2020년 IMF 추정치 [8] 대한민국 첫 박사 타이틀인 이승만에게 박사학위를 직접 준 장본인이다. [9]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자고 제일 먼저 안건을 낸 사람은 장제스였다. [10] 한국인의 입장에서 비유하자면 세르비아 사라예보 사건 정도일 것이다. 즉, " 세계대전을 불러올지도 모르는 작은 나라의 위험한 민족주의 테러" 정도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11] 여담이지만 미국의 이런 모습은 이후 세계 각지에서 반복된다. 미국이 개입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미국은 독재 정권을 몰락시킨 해방자이자 선진적인 이념의 전파자로서 동조를 얻기는 했지만, 대민범죄나 현지정서에 대한 몰이해로 불필요한 비용을 치르곤 했다. [12] 添谷芳秀, <日本ミドルパワー外交>(東京:ちくま新書, 2005) [13] 이러한 기대가 당대에는 일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에드거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을 보면, 마오쩌둥은 미국을 '반파시스트 투쟁의 동지'이자 '중국을 침탈하지 않은 유일한 열강'[88]이라며 상당히 호의적인 논조로 대했다. 또한 마오주의는 도시보다는 농촌 중심적이고 이성보다는 인간의 정신을 강조하는 등 스탈린주의와는 많은 면에서 지향점이 달랐으며, 실제로 중국 공산당 역시 코민테른의 간섭에 저항한 마오쩌둥의 독자노선을 통해 최후의 승리를 이뤄냈다. 게다가 미국은 중국의 항일전쟁에 엄청난 지원을 했으며, 심지어 국공내전에서도 중화민국의 발목을 잡았으면 잡았지 중국 공산당과 크게 감정이 상할 일은 없었다. 때문에 미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후에도 마오쩌둥이 티토처럼 소련과 데면데면한 관계를 유지하며 미국의 지원을 모색하리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14] 平山龍水, “朝鮮半島と日米安全保障条約", <国際政治> 115号 (1997) [15] 단, 흔히 알려진 오해와는 달리 이 시기에도 한국은 미국의 방위선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애치슨 라인은 단지 현지에 주둔하면서 방어하는 대신 일본 등 핵심방위선에 포함된 주변 동맹국에 대기하고 있다가 유사시엔 파병을 통해 방위하겠다는 의도였을 뿐이다. 애초에 애치슨 라인이 한국을 미국의 지원 목록에서 제외하는 것이었다면,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즉각적인 개입을 설명할 수 없다. [16] 조지 F. 케넌은 전자를, 더글러스 맥아더는 후자를 지지했다. [17] 당대 한국에게 유엔군 총사령관이자 미군의 아시아 정책을 결정하던 맥아더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것은 상당히 중요했다. 오늘날처럼 매스 미디어가 발달하지도 않았던 상황에서 미국 정가가 한반도 문제를 판단하는 근거는 대체로 현지에 파견된 미군의 보고를 통해서였는데, 만약 맥아더가 한국에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이를 미국 정계에 보고했다면 극단적인 경우 미국이 한국을 포기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중일전쟁에서 중화민국에 파견되었던 미군의 조지프 스틸웰 장제스가 격심하게 충돌하며 전쟁 수행에까지 지장을 주었던 사례도 있다. [18] "'이승만 제거작전'까지 세웠던 美···주한미군 탄생 비화", 중앙일보 [19] 최희식, "이승만 정부 시기의 한일관계: 한미일 냉전전략의 불협화음과 한일관계의 정체", 세계지역연구논총 (2009) [20] "'이승만 제거작전'까지 세웠던 美···주한미군 탄생 비화", 중앙일보 [21] 북한의 남침뿐 아니라 남한에 의한 합의되지 않은 북침 가능성에도 대비하여 남북한의 전쟁수행능력을 동시에 봉쇄한다는 정책. [22] 정일준, "한미관계의 역사사회학:국제관계, 국가정체성, 국가프로젝트", 한국사회사학회 (2009) [23] 中西寛, "戦後アジアㆍ太平洋の安全保障枠組みの模索と日本:1949ー51年", 近代日本研究会編 <年報ㆍ近代日本研究: 戦後外交の形成> (東京:山川出版社, 1994) [24] “Note Exchanged between Prime Minister Yoshida and Secretary of State Acheson at the Time of the Signing of the Security Treaty between Japan and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細谷千博他編 <日米関係資料集> (東京: 東京大学出版会, 1999) [25] 최희식, "이승만 정부 시기의 한일관계: 한미일 냉전전략의 불협화음과 한일관계의 정체", 세계지역연구논총 (2009) [26] 이승만 제거 4번 검토한 美···'반일 한국'에 원조 깎아버렸다 [27] 이승만 제거 4번 검토한 美···'반일 한국'에 원조 깎아버렸다 [28] 김일영, “이승만 정부에서의 외교정책과 국내정치: 북진반일정책과 국내 정치경제와의 연계성”, 국제정치논총 39집 3호 (1999) [29] 애초에 반미였다면 주한미군이나 미국의 안보보장을 얻어내기 위해 저런 벼랑 끝 전술을 펼쳤을 리도 없다. [30] "Telegram from the Embassy in Korea to the Department of State", June 13, 1961, Department of State, Foreign Relation of United States, 1961~1963, Volume XXII [31] "Telegram From the Embassy in Korea to the Department of State", August 5, 1962, FRUS 1961~1963. Volume XXII [32] 민주공화당 창당 과정에서 4대의혹 사건이 폭로되자, 박정희는 1963년 2월에는 대통령 선거에 불출마할 것처럼 말하다가, 3월에는 군정연장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는 미국과의 당초 약조를 어긴 꼴인지라 케네디 대통령마저 격분시켰고, 미국이 대한원조 중단을 압박하자 4월에는 다시 한 발자국 물러서 군정연장 여부를 국민투표에 붙이겠다고 했다. 이후 7월에는 연내 민정이양을, 8월 30일에는 정식 입당하고 다음날 대선 후보로 추대되었다. 이처럼 박정희의 행보는 당초 (민정이양 후 투표에서 이긴다는 전제로) 지지를 보냈던 미국 정가마저 혼란시킬 정도로 일관적이지 않았다. [33] "Telegram from the Embassy in Korea to the Department of State", July 15, 1963, Pol 15 Kor S, Subject-Numeric Files 1963 [34] 홍석률, "1960년대 한미관계와 박정희 군사정권", 역사와 현실 [35] 박영준, "한국외교와 한일안보 관계의 변용, 1965~2015", 일본비평 12호 [36] 정일준, "한미관계의 역사사회학:국제관계, 국가정체성, 국가프로젝트", 한국사회사학회 (2009) [37] "But the Park government proved both selective in accepting American tutelage and creative in finding ways to disregard unwanted advice.", Gregg Andrew Brazinsky, "From Pupil to Model: South Korea and American Development Policy during the Early Park Chung Hee Era", Diplomatic History [38] Lyong Choi, "The Foreign Policy of Park Chunghee: 1968- 1979" (Thesis paper) [39] 홍석률, "1960년대 한미관계와 박정희 군사정권", 역사와 현실 [40] 박영준, "한국외교와 한일안보 관계의 변용, 1965~2015", 일본비평 12호 [41] Fuji Kamiya, "The Korean Peninsula after Park Chung Hee", Asian Survey (1980) [42] 박선원, 우승지, 박건영, "제3공화국 시기 국제정치와 남북관계: 7·4 공동성명과 미국의 역할을 중심으로", 국가전략 제9권 제4호 (2003) [43] 홍석률, "유신체제와 한미관계", 역사와 현실 (2013) [44] 대한민국의 핵무장 [45] Sung Gul Hong, "Chapter Seventeen. The Search for Deterrence: Park’s Nuclear Option", Harvard University Press (2011) [46] 대신 구금된 김대중을 신군부가 처형하지 못하도록 압박을 가하고 미국 망명을 주선하기는 했다. [47] 박정희 정권, 전두환 정권에 대한 지미 카터 행정부의 온도차는 너무나도 컸다. 박정희에게는 독재, 핵개발을 사유로 들며 주한미군 뺀다는 소리까지 하던 카터가 정작 신군부의 만행은 방조하거나 심지어 도와주는 모습(20사단 이동 승인)까지 보였다. 결국 '인권, 민주화같이 좋은 말만 하더니 결국 제 이익 챙기려 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되었다. 정작 전두환에게 힘을 실어주며 전두환을 좋아하는 것 같더니 6월 민주항쟁에서 전두환을 완전 날려버린 레이건과는 정반대가 되어버린 셈이다. [48] KBS, MBC 자료 참고. [49] 참고 자료: <진단 제6공화국> - 이한열기념사업회 저. 두리. 1991. p226~229. 그 외에 이성광 저서 <민중의 역사> 하권에도 몇 번 언급됐다. [50] 주로 옛날 통합진보당 [51] 어디까지나 일부일 뿐이다. 진보 = 반미라고 단정지어서는 안된다. 진보측은 미국으로 편중되어있는 외교현안, 정책들과 사회적 분위기를 바꾸어야 한다라는 논리를 펴고 있는 것이지 완전하게 미국과 척을 지자란 의미가 아니다. [52] KBS, MBC 자료 참고. [53] 참고로 일본은 도조 히데키 정권을 끝으로 독재정권이 완전히 종식되었다. [5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은 일본과 독일을 비롯한 추축국을 단기간에 완전히 뜯어고쳤다. 다만 독일은 전쟁 직후 분단이 되었으니, 미국과 소련이 양분하여 개입이 있었긴 하지만, 한반도에 개입한 것보다는 상대적으로 약했다. [55] 한반도 전쟁 발발시 청소년 3명중 1명 피난가겠다 [56] 해당 항목 참고. 이러한 사건들로 인하여 미국과의 관계가 좋지 못했다. [57] 실제로 2014년, 워싱턴에서는 "박근혜 정부의 외교,안보팀은 지적 수준이 낮으며 전략적 세련미가 떨어지고, 미성숙하다."는 평가가 기사로 나왔다. 그 외교팀이 사실상 단 한 명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는 명약관화하다. [58] 그러나 미국이 동맹국의 정상에게 대놓고 내정 간섭을 하는 나라가 아닌만큼 미국이 진심으로 한중 우호를 지지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설사 불만이 있다고 하더라도 외교적 수사로 가능한 정중하게 입장을 밝히면 밝혔지 어디처럼 수교국에게 독립을 잃게 될 것이다는 헛소리를 하는 나라가 아니다. 트럼프 당선 이후에는 그 정중함도 잃었지만... [59] 대상은 북한 + 중국, 다만 한국은 중국에 대해 여전히 소극적인 반응을 견지하는 중이다. [60] 한미동맹의 굳건함 과시 + 북한과 중국에 대한 경고이다. [61] 실제로 환구시보는 '중국도 북한의 행동에 화가 나지만, 중국과 북한 사이의 국경선을 제2의 38선으로 만들 수는 없다.' 없다고 했는데 이 소리는 우리도 북한이 하는 꼬라지는 빡쳐도 북한은 우리의 영원한 친구라는 소리이다. 그냥 대놓고 북한은 우리의 동맹이며 땔 수 없다는 의사표현만 분명히 한 셈이다. 근데 이제는 북한 온갖 막장 스러운 짓거리를 일삼는 경우가 많아서, 차라리 북한을 포기하고 대미전선을 압록강- 두만강 유역으로 후퇴시키자는 소리까지 나오는 지경이다. 아무리 그 개새끼는 우리 개새끼한다고 해도 동맹국이 너무 막장이면, 국제사회의 여론만 자기들에게 불리해지기 때문이다. [62] 어떤 나라라도 방문하면 최소 30분의 회담 시간을 가진다. [63] 일본어의 관용구로 소외되었다는 뜻이다. [64] 노태우 정부때는 맞아떨어지긴 했지만, 문민정부때 부터 지금까지 쭉 엇갈려오고 있다. [65] 그나마 문민정부 이후 이 정부만 유일하게 맞아떨어진 기간이 더 길었다. [66] 만약 김영삼이 당을 보수정당으로 바꾸지 않았다면 문민정부때도 맞아 떨어질 뻔했다. 왜냐면 13대 대선때만 해도 김영삼은 보수정당 후보가 아닌 민주당계 정당(사실상 보수정당과 민주당계 정당의 세력이 합쳐짐) 후보로 나섰기 때문. [67] 큰 의미는 없지만, 2017년 초반에 4개월(1월 하순~5월 초순) 동안은 트럼프-황교안 권한대행 체제(당시 박근혜의 직무정지와 탄핵으로 인해 권한대행 행사)가 겹치긴 했다. [68] 당시 클린턴은 탄핵소추 관련, 부시는 세계금융위기 문제가 있었다. [69] 노태우 때는 로널드 레이건의 마지막 해 임기와 조지 H. W. 부시의 재임기 전부와 겹쳤으며, 김영삼 때가 클린턴의 재임기와 겹쳤다. [70] 한가지 이야기로는 20대 대선과 2020 미국 대선 양당 후보 4명( 조 바이든, 도널드 트럼프, 이재명, 윤석열) 모두 군대를 제대로 다녀오지 못하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바이든은 천식, 트럼프는 발뒤꿈치 문제로 병역면제, 이재명은 골절후유증, 윤석열은 부등시로 전시근로역 판정을 받았다. [71] 아이러니 하게도 당시 박정희 정권은 반공 노선을 취해 미국 정부와 합이 맞을 것 같음에도 미국으로부터 많은 압박을 받았다. 케네디 행정부는 원조 요청을 위해 방미한 박정희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며 지미 카터 행정부는 노골적으로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겠다며 노상 위협하던 때였다. [72] 심지어 자서전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에 좋지 않은 인상을 가졌던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도 노무현 추모식때 노무현의 손녀와 팔짱을 끼고 입장했던게 화제가 되었다. [73] 사실 미국의 개입이 아니었다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운명이 어떻게 됐었을지는 아무도 장담못한다. 6월 항쟁 역시 전두환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력진압을 시도하려 했을때 미국이 주한미국대사를 통해 "함부로 나대면 그날로 넌 끝장난 줄 알아!"라고 엄포를 놓자 전두환이 "알겠슴다, 죽어지내겠슴다"로 나온 것이다. 물론 미국이 다 잘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결정적인 상황에서 미국의 활약이 있었다는 것은 부인하지 못하는 점이다. [74] 단, 초등학교는 3학년부터 영어를 배운다. 3~4학년보다 5~6학년의 영어 시수가 더 많다. [75] 메스티소, 물라토, 아메리카 원주민 등. [76] 특히 축구는 유럽이라는 거대한 시장이 있기 때문에 미국으로 가는 일은 드물다. 축구선수들 사이에서 미국 리그는 은퇴 전에 잠시 들르는 리그라는 인식이 강하다. [77] 예컨대 버락 오바마는 아시아 순방 당시 일본의 센카쿠 열도에 대해서는 미군의 방어 의무를 천명했으나, 한국 외교부에서 독도 역시 미군의 방어 의무가 있다고 성명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독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미국의 친일외교라고 해석하기보다는, 센카쿠 열도는 동맹인 일본과 가상적국인 중국 간의 분쟁이지만 독도는 두 우방국 사이의 분쟁이기 때문에 중립을 지켰다고 해석하는 편이 옳다. 반대로 한국이 북한이나 중국과 대립하는 문제들에 있어서는 미국 역시 한국을 적극적으로 후원한다. [78] 반일에 가장 적극적인 국가는 중국이지만, 한국과 중국이 현재의 제휴관계를 넘어 동맹 수준으로 가까워지는 것은 북한이 끼인 지정학적 특성상 아직은 선택지가 될 수 없다. 게다가 사드 배치 논란, 미세먼지 문제 등으로 인해 한중관계 한일관계 이상으로 나빠진 상황이고, 미국 역시 중국을 차세대 패권 경쟁자로 판단, 집중견제하고 있기 때문에 자칫 혹 떼려다 혹 붙이는 꼴이 날 수 있다. 러시아의 경우 트럼프 정권 들어 상대적으로 미국과의 관계가 개선되고 있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별로 관심이 없다는 한계가 있다. 게다가 한국이 미국과의 마찰을 감수하며 러시아에 동조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러시아 역시 전략적 협력국가인 중국, 극동의 큰 손인 일본과의 마찰을 감수하면서까지 굳이 한국을 밀어줄 만한 동기가 없다. 애초에 러시아가 일본과 그리 적대적인 관계도 아니고. [79] 단순히 정치적 수사로서의 호응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치 생명을 걸고 관계개선에 올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 서독 콘라트 아데나워는 자국 공장 해체나 자국령 일부의 분할 감독을 허용하는 등 자국민들에게 매국노라는 소리까지 들어가면서 친서방 기조를 보였다. 빌리 브란트 폴란드에 가서 무릎을 꿇고 새로운 동방 국경을 수용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역시 매국노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동방정책을 수행했다. 하다못해 문재인 정부도 빨갱이 소리를 들어가면서까지 북한에 투자하는데, 반대로 친일파라는 조롱을 감내하고 일본과 관계개선을 하려는 주류 정치인이 있는가? 반대로 일본에서 자이니치 따위의 조롱을 감내하며 한국과의 과거사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 드는 주류 정치인이 있는가? 양국 모두 기껏해야 야당의 소수 목소리로나 존재할 뿐이다. 현 시점에서 한일관계가 표류하는 건 이처럼 국민정서에 저항하면서까지 소신을 갖고 양국 관계에 투자하려는 정치인이 없다는 것도 크다. [80] 혐한/일본 참조. 한국의 반일, 혐일만큼이나 일본의 반한, 혐한도 심각하다. [81] 미국 여러주에서 위안부 관련 결의안을 내거나 하면 일본 정계에서는 매우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하고 있다. [82] 물론 북한이라는 큰 장애물이 있어 적극적 협력은 어렵다. 이 때문에 과거 하노이 회담 전 김정은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푸틴과 정상회담을 했었는데 거기서 푸틴 김정은에게 핵 포기하고 협상에 적극적으로 응하라는 식으로 발언하면서 면박을 줬다는 후일담이 있다. [83]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모두 앵글로색슨계 기독교 국가들이며 대영제국의 문화적 유산을 나눠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84] 5개의 눈과 핵심 동맹국의 면면을 보면, 뉴질랜드 정도를 제외하고는 친미국가들 가운데 경제력 순위대로 나열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자국이 강성해져야 동맹으로서의 가치도 올라가는 것으로, 한국도 지금과 같은 대우를 받기 시작한 건 선진국 반열에 접어들고 나서부터였다. [85] 중국 무역 흑자와 급이 다르다. 물론 대중 무역도 없으면 위험한 건 마찬가지지만 미국과의 무역에 비교할 바가 되지 않으며, 오히려 대일 무역과 비교하는 것이 정확하다. [86] 당도가 서양배보다 더 높고 식감도 좋아서 인기가 많다고 한다. [87] 한국 여권의 경우, 미국과 러시아를 무비자로 가는 것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