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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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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
Albert Camus
이름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
국적 프랑스 파일:프랑스 국기.png
출생 1913년 11월 7일
프랑스령 알제리 몬도비
사망 1960년 1월 4일 (항년 46세)[1]
프랑스 부르고뉴 욘주 빌블루방
직업 소설가, 철학자, 저널리스트
수상 1957년 노벨문학상
신체 176cm
배우자
시몬 힐 (1934~1940) 
프랜신 파우어[2](1940~1960) 
대표작
이방인(1942) 
페스트(1947) 
서명 파일:1280px-Albert_Camus_signature.svg.png

1. 개요2. 생애
2.1. 알제리 전쟁2.2. 사망
3. 문학4. 어록5. 기타6. 대표작

1. 개요

프랑스의 철학자, 작가, 신문 기자.
그의 견해는 부조리주의라는 철학이 대두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그의 에세이 "TheReverse"에서 그의 전 생애가 여전히 개인의 자유를 깊이 파고드는 동시에 허무주의 철학에 반대하는데 헌신했다고 썼다. 그는 1957년 43세의 나이로 역사상 두번째로 어린 나이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카뮈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실존주의자로 분류함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실존주의자라고 불리는 것을 거부했다.

2. 생애

알제리 태생이라는 사실에 알제리 아랍계로 아는 사람도 있지만, 알제리 및 이슬람계와는 관련이 없다.[3] 프랑스는 알제리를 단순 식민지가 아닌, 프랑스의 확장된 영토로 여겼다. 그래서 당시 프랑스 본토로부터 새로운 땅에서의 기회를 노리고 이주한 프랑스인들이 많았으며, 카뮈의 아버지나 어머니[4]도 그중 일부였다. 카뮈가 태어날 당시의 알제리는 그저 프랑스라는 국가의 한 지역이었고, 따라서 그는 프랑스 태생이었다. 카뮈가 알제리 태생이라는 말은, 카뮈가 사망(1960)한 후 알제리가 프랑스로부터 독립(1962)한 현재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5] 그러니까 그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순수 프랑스인이었으며[6][7], 현재의 알제리 아랍인와는 거의 무관한 인물이다.

아버지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전사하는 바람에 어린 시절엔 가난에 시달려야 했고, 학생 시절에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지만 고질병인 결핵이 방해가 되어 대학 진학도 포기한 채 자동차 수리공 및 신문사 인턴 기자, 가정교사 같은 여러 일로 벌어먹으면서 철학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런 경험 때문인지 22살에 공산당에 가입하여 좌익사회운동을 했으며 프랑스측의 알제리 식민지배에 부정적인 글을 남기기도 했고, 베르베르족으로 흔히 알려진 이마지겐 부족에 대한 프랑스의 억압과 더불어 아랍계들의 차별도 고발하면서 깠다. 그 때문에 정부의 압력으로 일하던 신문사에서 해고당하자 이에 언론인 노조가 반발하면서 시위를 벌여 결국 복직한 일도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가 해방되자 과거를 잊고 관용과 용서를 베풀자는 주장에 맞서 반역자들을 가혹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8] 하지만 소위 나치 청산이란 구실로 무고한 사람들을 수만 명이나 죽이는 대학살극이 벌어지자 경악하여 이를 크게 규탄했다. 프랑스의 과거 청산은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필수적이었지만, 무리한 일도 많았다. 때문에 샤를 드 골이 허겁지겁 이를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했다.[9]

2.1. 알제리 전쟁

그랬던 카뮈가 알제리 전쟁 당시 알제리 해방 전선(FNL)과 프랑스 정부 가운데 프랑스 정부 편을 든 것은 주변인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일로 받아들여졌다. '이 전쟁은 반란이며 새로운 아랍 제국주의와 소련 공산 폭력주의가 만나 반프랑스 움직임을 만드는 폭력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프랑스 우익들과 비슷한 주장을 한 것.

카뮈는 알제리의 독립은 반대하되 자치권의 확대를 주장했다. '알제리의 독립은 인정할 수 없으나 프랑스인과 평등하게 살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카뮈의 옹호론자들은 당시 카뮈의 어머니가 알제리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신변을 염려하여 한 주장이라는 말도 한다. 하지만 카뮈의 제안은 프랑스측에서도 동의할 수 없는 것이었고 알제리도 마찬가지였다. 결론적으로 그는 양쪽에서 까였다. 알제리는 카뮈를 극렬 프랑스 우익으로 여겼으며 공산당 동료들과 알제리 독립을 지지하던 언론인이나 지식인들은 그를 배신자로 낙인찍고 무시했다.

그래서 알제리가 독립하자 알제리에서 그에 대한 모든 흔적은 철저하게 지워졌다. 이것은 그가 알제리를 고향으로 여겼다지만 정작 이방인 등 그의 여러 작품들 속에서는 프랑스인이 주축이지 알제리인들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점도 한 몫한 듯하다. 현재 그가 살던 집은 일반 가정집이며 노벨문학상 수상 당시 기념으로 만들어졌던 카뮈 문학기념비는 알제리에 용케 남아 있지만 카뮈의 이름은 끌로 지워진 채 방치되어 보존 상태가 엉망이라고 한다. 당연히 알제리인들은 카뮈가 누군지 모르는 경우가 많으며 알더라도 혐오감을 가지고 이름조차 잘 언급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10]

2.2. 사망


사고현장을 촬영한 흑백 영상.

1960년 1월 4일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요절했다. 카뮈의 코트에는 전철표가 있었는데 전날 아내와 같이 전철을 타려고 했다. 그런데 갈리마르 출판사 사장의 조카이자 친구였던 미셸 갈리마르(Michel Gallimard)가 몰던 차를(갈리마르가 타라고 설득했다고) 타고 가던 길에 차가 플라타너스 나무를 들이박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냥 전철을 타고 갔다면 이런 일을 피할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카뮈는 현장에서 목이 부러져 즉사했고, 갈리마르도 며칠 뒤 병원에서 사망했다. 생전에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인터뷰에서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것보다 더 의미 없는 죽음은 상상할 수 없다."란 말을 남겼다.

유작으로 다 완성하지 못한 《최초의 인간》을 남겼는데 세상을 떠날 당시 유품에 이 원고가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 전철표 및 지갑, 펜, 메모지같은 것들과 같이. 미완성임에도 카뮈의 마지막 소설이라 그런지 미완성인 채로 출판되었으며, 국내에서도 정식번역되어 출판되었다.

3. 문학

카뮈의 문학은 '부조리 문학'으로 잘 알려져 있다. '부조리 문학'이란, 세상에는 어떠한 불변의 정의나 법칙이 없다는, 아니 있다 하더라도 이해조차 할 수 없는 '부조리'를 보여주며 이에 주인공이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렇기에 허무주의적 혹은 불가지론적인 태도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 뿐만 아니라, 부조리 문학은 주로 블랙/다크 코미디가 대다수이다.

알베르는 사람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으며, 그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사람이 만든 것이야말로 부조리라고 생각했다. 또 사람의 윤리란 매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라고 믿었고, 타협하지 않고 부조리에 저항하면서 스스로에게 거짓되지 않고 솔직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4. 어록

자살이란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내 뒤에서 걷지 마라, 난 그대를 이끌지 않을 수도 있다.
내 앞에서 걷지 마라, 난 그대를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내 옆에서 걸으라, 벗이 될 수 있도록.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이 어리석은 짓이다.
비록 인간의 정의가 너무나 불완전하다고 해도, 인간의 정의를 완수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선택이다.
우리는 정직함을 필사적으로 견지함으로써 그 불완전함을 교정하고자 한다.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만으로도 인간의 마음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5. 기타

  • 원래 장래 희망은 축구선수였고 알제 대학 재학 시절 축구부에서 골키퍼로 맹활약했으나 결핵이 재발하면서 축구를 그만두게 되었다. 배우 활동에도 관심이 있었으나 여의치 않아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원래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도 없었고 소설은 그냥 자기 머리에서 나오는대로 썼다고 한다. 그러나 을 좋아하기는 했던 듯싶다.《작가수첩》이라고 이름붙인 메모장에다가 아이디어가 머리속에 떠오르면 그 즉시 메모했다고 . 《작가수첩》은 카뮈 사후에 출판되었고,[11] 한국에도 번역 출판되었다.
  • 카뮈의 공식 프로필 키는 176cm로 기록되어 있고,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 성인 남자 평균 키가 170cm 언저리였다는 걸 감안하면 작지 않은 키다. 그러나 허버트 R. 로트먼이 쓴 카뮈 평전에서 그가 만난 카뮈의 대학 시절 축구 친구들이 카뮈를 작은 체구였다고 회상하고 있는 걸 보면 역시 176cm는 프로필상의 키고, 르네 샤르 등의 주변 인물과 찍은 사진들로 보건대 실제 키는 170~173cm 정도였던 걸로 추정된다. 골키퍼로서는 상당히 불리한 피지컬로 맹활약했다는 걸 생각하면 축구 재능도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골키퍼조차 본인이 자신이 있어서 선택한 포지션이 아니라, 축구는 하고 싶은데 체구도 작고 어릴 때부터 몸도 허약한 편이라 필드 플레이어처럼 몸싸움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다.
  • 카뮈는 좌익운동가로 활동하다 아나키스트로 전향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그가 20대에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는 공산당에 가입은 하지만 결코 어떤 이념에 맹목적으로 세뇌당하진 않을 거라는 문구도 있다. 알제리 전쟁에서 보여준 애매모호한 회색분자 태도도 그의 성향이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는 괴물이 되어버린 자본주의든, 패배한 파시즘이든 이미 부작용을 드러내기 시작한 사회주의권력화한 집단은 부조리를 양산하기 마련이므로 아나키즘적인 태도를 추구했다. 즉 알제리가 독립해도 새로운 제국주의 집단의 탄생일 뿐이라는 인식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이 때문에 사르트르를 비롯한 당시 많은 사회주의자들에게 비판받았다.
  • 2009년 12월 프랑스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는 알베르 카뮈의 문학을 깊이 존중한다고 말했으나 프랑스 좌파와 카뮈의 딸은 이를 반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공산당에 가입하고 좌익 활동 사상가로 지냈던 카뮈의 문학을 우파 대통령인 사르코지가 존중한다는 것이니.

6. 대표작

작품명 뒤에 *이 붙어 있는 작품은 표준국어대사전에 표제어로 실려 있는 작품들이다. 즉, 진정한 의미의 대표작.
  • 이방인(1942)*
  • 페스트(1947)*
  • 전락*
  • 시지프 신화*[12]
  • 반항하는 인간*[13]
  • 결혼
  • 단두대에 대한 성찰
  • 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 여름
  • 오해
  • 작가수첩
  • 시사평론
  • 정의의 사람들
  • 칼리굴라

[1]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46세의 나이로 일찍이 요절했다 [2] 1914년생으로 수학교사와 피아니스트로 활동했다. [3] 알제리계 출신으로 유명한 프랑스 사람은 지네딘 지단이 있다. 아버지가 알제리 전쟁 당시 아르키(Harki)라고 불리던 친프랑스 알제리 민병대원 출신으로 용케 프랑스로 이민 온 항만 노동자였다. [4] 카뮈의 어머니는 1882년 알제에서 태어났는데 부모가 스페인 왕국 발레아레스 제도 출신의 스페인인이었다. 카뮈는 스페인을 혈통에 의한 자신의 제2의 조국이라 칭한 바 있다. [5] 알제리는 1962년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하기 전까지 하나의 독립 국가로 존재한 적이 없었고, 유사 이래 항상 특정 국가의 일부로 존재했던 지역이었다. 쉽게 말해 프랑스는 알제리라는 '국가'를 병합한 게 아니라, 바로 이전까지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알제리라는 '지역'을 자국 영토로 편입시킨 것이다. 알제리는 국가 상태에서 프랑스에 병합당한 게 아니고 국가였던 적도 없었기 때문에 카뮈가 살았던 당시 기준에서는 '프랑스령 알제리', '프랑스계 알제리인', '알제리계 프랑스인' 같은 말은 다 있을 수 없었다. 카뮈는 그냥 프랑스의 알제리 지방에서 태어난 프랑스 태생 피에누아르(Pied-Noir)였다. [6] 이러한 사실은 그의 작품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가령 그의 대표작인 이방인이나 페스트는 배경이 각각 현재 알제리의 도시인 알제 오랑인데, 작품 내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이방인에서 그냥 스쳐 지나가는 비중으로 나오는 아랍인들을 제외하고 전부 프랑스인이다. 카뮈가 인물 설정을 이렇게 한 이유는 결국 알제리도 프랑스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이다. 배경이 프랑스이니 등장 인물도 프랑스인인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게다가 당시 알제리의 대도시들은 전부 프랑스계, 유럽계가 주류였고 아랍계가 비주류였으니. 페스트에서는 첫 장부터 오랑 시는 프랑스의 한 도청 소재지에 불과하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7] 알베르 카뮈 전집을 번역한 김화영 교수에 의하면, 프랑스 현지에서 유학할 당시 프랑스어로 쓰인 프랑스어 사전(불불 사전)에 예문으로 카뮈의 문장이 다수 실려 있었다고 한다. 이는 카뮈가 사용한 프랑스어가 표준 프랑스어에 적합했다는 뜻이다. 알제리는 현재 아프리카에서 가장 넓은 대국이지만 지리적 연유로 도시들은 지중해 연안에 집중돼 프랑스 식민 지배의 영향으로 집중 개발되어 있었고 내륙에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데, 카뮈 역시 프랑스 본토와 가까운 연안 지역에서 태어난 인물이고 더군다나 부모가 프랑스인들이었으니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습득할 환경은 프랑스 본토인들과 차이가 없었다. 현재 알제리의 공용어인 아랍어 베르베르어는 당연히 할 줄 몰랐다. [8] 부역 지식인 처벌 수위를 놓고 프랑스 지식층은 논쟁으로 들끓었다. 레지스탕스 출신 지식층들 사이에 의견이 갈렸다. 대표적인 논전은 프랑수아 모리악의 관용론과 알베르 카뮈의 정의론의 격돌이었다. 모리악은 과도한 숙청을 우려하며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는 학살자와 희생자라는 쳇바퀴 보다 더 나은 것을 바란다. 그 어떤 대가를 치른다 해도 제4공화국이 게슈타포의 장화를 신어서는 안된다." 이에 카뮈는 이렇게 맞섰다. "비록 인간의 정의가 너무나 불완전하다고 해도, 인간의 정의를 완수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선택이다. 우리는 정직함을 필사적으로 견지함으로써 그 불완전함을 교정하고자 한다." [9] 카뮈는 이런 무분별한 폭력뿐만 아니라 드 골이 법적으로 나치 부역자를 처벌하는 일에도 일부 반대했다. 문학가이며 언론인인 로베르 브라지야크가 나치에 부역한 죄로 처형될 때 프랑스의 문학가들이 탄원서를 쓰며 브라지야크의 처형에 반대했고 카뮈도 이에 참여했지만 드 골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몬 드 보봐르 같은 지식인은 브라지야크의 사면 탄원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 [10] 카뮈 연구가이자 카뮈 전집을 번역하고 프랑스로 가서 카뮈 연구에 참여한 김화영 교수는 알제리에 가서 카뮈에 대한 흔적이 철저하게 없어진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그가 보여준 알제리에 대한 인식을 "똑같이 식민지를 겪은 한국인으로선 받아줄 수 없다."고 선을 그은 바 있다.(김화영, 《알제리 기행》 참고) [11] 방대한 양 때문에 나뉘어 출판되었다. [12] 국어사전에는 일본 번역 그대로 '시시포스의 신화'로 등재되어 있다. [13] 국어사전에는 일본 번역 그대로 '반항적 인간'으로 등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