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6 20:53:22

블라디미르 첼로메이

<colbgcolor=#CC0000><colcolor=gold> OKB-2 수석책임자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 첼로메이
Влади́мир Никола́евич Челоме́й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Vladimir_Chelomei.jpg
출생 1914년 6월 30일
러시아 제국 루블린 시에들체
사망 1984년 8월 12일 (향년 70세)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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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공학자
학력 키예프 공과대학교
서훈 내역 사회주의노력영웅 X2

1. 개요2. 생애
2.1. 로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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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 수학자, 물리학자, 항공 공학자, 로켓/ 미사일 공학자이다. OKB-52 설계국의 수석 책임자였다.

소련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 겸 위성 로켓인 UR-100, UR-200, UR-500( 프로톤 로켓), UR-700을 포함한 여러 발사체를 개발했다.

2. 생애

1914년 러시아 제국 루블린 시에들체의 우크라이나계 집안에서 태어났다. 출생 직후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인해 가족들이 폴타바로 피신했다.

그가 12세 때 가족들을 따라 키예프로 이주했다. 첼로메이는 1932년 키예프 폴리테크닉 대학교(Kiev Polytechnic Institute)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수재로 불리며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그는 키예프 대학교(Kiev University)에서 수학 물리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1936년 그는 벡터 해석학(Vector Analysis) 책을 출간했다.

1937년 그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과학 아카데미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에 그곳의 강사로 임명되었다가, 1939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모스크바에 있는 바라노프 중앙 항공자동차 연구소에서 근부했다. 나치 독일이 V-1 미사일을 영국에 발사하자, 첼로메이는 소련 최초의 미사일 설계, 개발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후 첼로메이는 10Kh 미사일 개발에 성공했고, 소련 OKB-52 설계국을 설립하여 수석 책임자가 되었다. 1951년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52년 바우만 모스크바 공과대학교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1950년대에는 첼로메이보다 선배였던 세르게이 코롤료프, 발렌틴 글루시코, 미하일 얀겔 등 쟁쟁한 선배들이 많아서 기회를 많이 받지 못했고, 그의 로켓 제안서는 선배들에 밀려 번번히 채택되지 못했다. 1958년 그가 야침차게 제안한 UR-100 로켓 제안서는 미하일 얀겔의 마스터피스 R-36에 밀려 탈락되는 등 한동안 선배들에 눌려 기회를 받지 못했다. 사실 코롤료프는 그렇다 치더라도 R-36는 정말 소련을 대표하는 희대의 ICBM이었기에 소련 당국이 R-200을 떨어뜨리고 R-36을 채택한 것은 잘못된 선택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후 코롤료프가 비군사 우주 개발에 전념하고, 글루시코는 로켓 엔진 설계를 전담하였으며, 특히 그와 직접적으로 경쟁하던 미하일 얀겔이 R-16 대폭발 참사로 좌천되면서 마침내 1960년 그에게도 기회가 돌아오게 되었다. 이 기회를 잘살려 그는 UR-500 등 UR-X00 로켓 시리즈를 성공적으로 개발했으며, 1960년대 이후 그는 소련에서 가장 중요한 로켓 개발자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가 UR 로켓 시리즈를 개발하면서 정립한 로켓 설계 방식은 이후 소련 로켓/미사일의 기본 설계 사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2.1. 로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