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7-24 16:02:12

변질된 유교적 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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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변질된 유교 전통도 유교인가
2.1. 변질된 유교적 전통도 유교이다2.2. 변질된 유교적 전통은 유교가 아니다
3. 과거(조선 시대)
3.1. 신고식(갑을문제)
3.1.1. 신방례3.1.2. 면신례
3.2. 선민사상
4. 연령차별5. 성차별
5.1. 남자는 음식을 하지 않는다5.2. 육아는 여자들의 전유물이다5.3. 남자는 밥상에서, 여자는 바닥에서 밥을 먹는 것5.4. 남편은 아내에게 반말, 아내는 남편에게 존댓말5.5. 여성은 재산상속을 받지 못한다
6. 사농공상7. 제사8. 오락에 대해 금기시9. 성(性)의 금기시10. 결론11. 관련 문서12. 둘러보기

1. 개요

본래 공자의 가르침으로 일컬어지는 유학에서 변질된 양상으로, 현대 한국에서 유학 및 유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유발하는 가장 핵심적인 원인에 해당한다.

조선이 성리학을 사회질서관념체계의 기본으로 삼은 뒤 사림파가 그 이론을 심화시켜 정리했다. 그 후,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으며 국가가 쑥대밭이 되었다가 재건하였는데 이러한 시기에 성리학이 교조주의, 원리주의로 가게 되며 사회가 경직되고 엄격해졌다. 이슬람 세력이 몽골의 침입 이후, 황금기가 끝나고 원리주의 세력이 커진 것과 비슷한 양상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조선말기의 세도 정치, 외세 침탈, 일제강점기, 6.25 전쟁 독재 을 거치면서 왜곡된 유교가 근현대 이후로도 쭉 전승된 탓에 현대의 유교 인식이 부정적으로 굳어지는데 일조한다.
유학의 내용과 유교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은 이 변질된 유교전통을 들어 유학과 유교의 가치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는 변질된 기독교 변질된 이슬람교를 이유로 해당 종교들이 가진 긍정적 영향과 가치를 싸잡아 비난하는 것과 같다. 무엇보다 유교나 기독교나 이슬람교나 변질된 부류가 현대 주류라는게 문제다.

오늘날 가장 원류이자 시초의 양상으로 꼽히는 유학의 모습은 단연 공자 및 맹자의 학설들로, 지배층의 논리에 완전 편입되기 전의 모습이다. 하지만, 공자가 주장한 대로 유학의 본래 모습은 주나라의 사회풍습이며, 유학이 만들어졌던 당시부터 이미 상당부분 기존 지배층이 허용하던 사회상이다.

다만 한나라 시절 유교가 국교로 받들어지며 권력의 입맛에 맞게 변질되어 나중에 가면 권력자의 억압을 정당화시켜주는 수단으로 악용된것은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한무제 시절 동중서가 천인감응사상[1]을 주창하여 유교적인 논리를 지배층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만드는데 사용한다.

다만 이는 유교만의 특징이라기 보다는 정치 권력과 결합한 사상이나 종교가 다들 가지고있는 공통의 문제이다. 로마 제국만 하더라도 예수 추종자들의 사상인 기독교를 부정하고 탄압하다가 훗날 오히려 자신들의 지배 이념으로 삼아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였고, 중세에는 왕권신수설을 통해 한층 더 권력기반을 강화하는데 사용하였다. 과거 중국 권력층의 유교 장려도 '유가의 탈을 쓴 법가'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사실 공자의 '정명사상'만 봐도 '위에서 똑바로 안 하면 그것도 당연히 지탄받아야 한다'는 생각이기에 권력층에서 좋아할 내용이 아니다. 게다가 맹자는 왕조 시대를 기준으로 할 때 상당히 급진적인 민본사상을 주창하는 구절이 많다. 그래서 철저한 황제 독재를 추진한 명나라의 주원장은 아예 맹자의 3할 가량을 덜어낸 맹자절문을 만들어 과거 교재로 쓰게 했을 정도였다.

이렇게 유교가 원래의 가르침이 적힌 원전교본을 두고 시대흐름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면서 '변질된 모습도 유교의 한 부분으로 인정할 것이냐'를 두고 각기 다른 입장이 존재하는데, 이 차이는 조선말기 정치상황에 의한 왕권의 붕괴와 신분제 변동 등 사회급변에 따른 풍습의 변화에서 나타난 '변질된 유교적 전통'을 유교의 일부로 보느냐, 그렇게 보지 않느냐로 가름한다. 근래에는 이와 같이 변질된 유교적 전통을 신봉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인 탈레반과 다를 바가 없다는 식으로 비하적 의미를 담아 '유교 탈레반'이라는 멸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조선시대, 민간의 생활사와 풍속에 관련된것들이 20~21세기에 들어 잘못 전해져서 오해하게 된 부분들은 조선/오해 문서를 유교에 대한 여러 비판과 반론들은 유교/비판과 반론 문서를 참고하면 좋다.

2. 변질된 유교 전통도 유교인가

2.1. 변질된 유교적 전통도 유교이다

종교가 권력과의 야합으로 원래와 다른 모습으로 변질되는 것은 서양을 가리지 않고 대부분의 종교들[2]이 보이는 보편적인 현상이며, 그러한 변질에도 불구하고 당대 사람들이 그 변질된 양상을 해당 종교의 것으로 인지하였다면 이미 '단순 변질'이라며 분리하기는 불가능한 해당 종교의 모습으로 보아야한다.

왜냐면 종교는 사회현상이자 문화의 일부분으로서 공동체 내부에서 지속적인 구성 과정상에 있다. 특히 종교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종교는 경전으로 지칭되는 특정한 문헌 기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하는 문헌 기록과 관련한 해석, 교리 등을 공유하고 재생산하는 공동체의 활동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즉, _경전을 전승한 공동체가 그 경전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과정과 결과 전반이 종교의 범주 안에 포괄될 수 있다_. 이 때문에 변질된 전통이라고 해서 유교가 아닌 것은 아니다. 각 시기에 이루어진 '변질'은 각 시기에 이루어진 유교의 구성과 재구성이라는 데에서 그 커다란 궤를 벗어나지 않는다. 경전이나 그 주석에 기술된 과거의 '유교'도 유교지만, 해당 종교 전승을 구성하는 공동체가 '유교'라고 생각하는 것 또한 유교다. 종교의 변질은 단지 종교의 구성과정이 야기한 현시점의 결과가 현대 사회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기술하는 표현일 수 있다.

이슬람, 기독교, 불교와 같은 거대 기성 종교들 역시 그들의 변질된 특성으로 인해 비판받고 있는데, 유독 유교만 콕 찝어서 '그것은 원래 유교의 모습이 아니었다'고 변호하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더군다나 이슬람과 아예 접점이 없는 한국인과 이슬람 학자들을 예시로 드는 것은 잘못된 비유에서 나오는 심각한 비형식적 오류이며 허수아비 치기일 뿐이다. 실제로 그런 학자들이 부정하는 가르침을 따르는 탈레반을 예시로 들자. 탈레반이 지배하는 지역에서는 탈레반의 잔혹함에 반발할지언정 다수가 그런 ‘잘못된’ 종교적 가르침에 동조하는데, 그러면 그 지역의 수백만에서 수천만명의 사람이 죄다 이슬람을 믿지 않는 이단이라는 주장인가?

또한 일제강점기부터 현대 한국까지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서삼경은 커녕 논어 한 글자도 읽어본 적 없다고 하는데, 그러면 일부 양반들만 글을 배워서 유교 경전을 읽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입신양명과 연관이 없어 혹은 아예 까막눈이라 경전을 읽어본 적 없는 조선 사회는 유교 공동체가 아니었다는 것인가? 20세기 중후반에 걸쳐 한국의 입법자들 중 상당수는 자신이 유교 경전을 읽고 공부한 지식인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었고, 2022년 현재도 상당수의 서구 국가, 심지어 이웃 동아시아 국가에서도 이상하게 여길만한 법률 조항들은 유교적 풍습에 기반하여 전해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중 몇몇 법이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 인정되면서도 유교적 국민감정에 맞지 않아 상급심에서 파기되는 소송들을 보면 (예를 들어 성폭력, 폭력, 사기 여부에 관계 없이 자식의 부모에 대한 대한 소송 무조건 금지 조항) 대한민국 사회는 여전히 강력한 유교적 영향이 내려오고 있는 유교 공동체라 할 수 있다.

결국 이 논지는 현재의 유교, 이슬람, 기독교의 모습이 해당 종교의 일부인지의 문제와 그 모습이 원래의 가르침과 상충하는지의 문제를 혼동하는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는 지속적으로 변하며, 종교의 현재의 모습이 사실상 해당 종교의 원래 교리적 형태에 부합하지 않으므로 그 종교가 아니라는 주장은 그저 일부 이단 논리의 한 갈래일 뿐이며, 현대의 변질된 종교의 모습도 분명히 그 종교의 일부이다. 중요한 점은 현대의 종교 형태에서 역사에 없었던 악습이 보인다면 어디서 어떤 부분이 변했는지, 또한 어째서 그런 부분이 원래의 교리와 부합하지 않는지를 명확히 해서, 현대의 형태도 과거의 형태도 동일한 종교이지만 원래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풍습이 생겨났다는 점과 과거에는 그런 잘못된 풍습이 없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현대의 형태가 잘못되었다 해서 과거의 형태마저 가치가 없다는 비약적 논리를 지양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겠다.

2.2. 변질된 유교적 전통은 유교가 아니다

한국은 일제강점기부터 해당 종교 전승을 구성하는 공동체가 아니다. 그 시기부터 현대 한국에 이르기까지 사회 구성원 대부분은 사서삼경은 고사하고 논어 한 글자도 읽어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현대 한국은 유교 공동체라 볼 수 없으며, 이러한 공동체가 유교라고 생각하는 '변질된 유교 양상'은 결코 유교가 될 수 없다.

한국이라는 공동체의 대부분이 이슬람교라고 생각하는 사회현상에 대해서 이슬람교의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그것을 이슬람교의 모습이 아니라고 한다면 누가 옳은 것인지는 자명하다. 그러므로 변질된 유교적 전통에 대해 _유교의 영향이 남아 있다_고 하면 옳은 진술이지만, _변질된 유교적 전통도 유교의 모습이다_라고 한다면 그것은 틀린 진술이다. 당장 '유교'는 서구적으로 정의된 종교로 보기 어렵기 때문에 서구적 시각으로 구성된 종교사회학으로 정의하기는 힘든 범주이며, 유교의 변화나 확산은 각 학자들의 논쟁이나 저작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유교가 그 지속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순간에, 유교에 크게 영향을 받은 어떤 사회가 다른 여러 문화나 역사적 사건과 만나서 변화한 모습을 가지고 유교라고 하기는 어렵다. 2000년을 훌쩍 넘는 유교의 역사 속에서 그러한 일은 없었는데 종교사회학이라는 범주 하나로서 그와 같은 현상 역시 유교라고 단언하는 것은 무리수다.

변질된 유교적 전통을 논하고자 한다면 최소한 현대 한국 악폐습의 유래를 명확히 밝히는 식으로 범위를 좁혀야 한다. 유교 국가가 아닌 현대 한국에서 유교의 잔재로 여겨지는 악폐습들이 _사실은 전통 유교의 가르침이나 실천 양상과 크게 다름_을 올바로 지적할 수 있어야 한다.

아래 서술되는 한국의 대부분의 모습이 변질된 유교적 전통이라고 하면서 막상 유교가 자리잡았던 조선시대에는 그러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면 그것을 유교적 전통이라고 할 수 없다. 다시말해 이름만 유교일뿐 유교랑은 거의 무관한 악습에 불과하다.

3. 과거(조선 시대)

간혹 유교는 현대에 들어와 변질되었고, 조선시대에는 괜찮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사실 조선시대부터 이미 유교는 다방면하게 변질돼서 수많은 병폐들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아래의 " 성차별"문단을 봐도 알겠지만, 20세기의 혼란들을 거치면서 더욱 보수적이고 왜곡되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긴 하다. 허나 모든 변질을 현대의 유산이라 여기는 것 또한 잘못된 사실이다.

3.1. 신고식(갑을문제)

신고식 등의 갑을관계( 갑질) 문제도 사실 삼국시대 때부터 확인이 되는 전세계적으로 오래되고 보편적인 현상이자 문제이다. 즉, '갑질문제'란 유교 때문에 탄생하거나 조선시대때 부터 시작된 고질적인 병폐가 아니라 신라· 고려·조선 등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아주 오래전 고대부터 되풀이되고 있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갑질은 학습된다…'갑질사회' 심지어 비유교 국가인 2021년 프랑스에서도 이런 신고식이 존재하여 여론의 비난을 받았다. 가혹한 신고식…사격장에 묶여 공포에 떨어야 했던 순간 당연하지만 이런 신고식들은 유교국가인 조선시기에도 만연한 문제거리였다. 얼마나 심각했는지 심지어 조선 임금도 이러한 병폐를 알고 있었고 이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논의하기도 했을 정도다.

3.1.1. 신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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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 면신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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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선비들이니깐 그래도 점잖았겠지 라는 환상을 단번에 깨준다. 이 면신례를 치르다 면신례로 불려온 기생이 죄도 없는데 매를 맞아 죽는가 하면, 조선시대에 도살이 금지된 를 잡아다 쇠고기를 포식하며[3], 사치스러운 유밀과까지 곁들어서 먹는 인간 말종을 보여준다.[4]

심지어 처음엔 봐주던 왕[5]조차도 면신례의 악폐습이 너무 도를 넘어 이에 대해 우려를 표했을 정도다. 그런데도 관리들은 정신차리지 못하고 되려 관습이라고 우기며 반발한것이다.

게다가 이것을 치르지 않으면 자신들의 동료로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것을 당한 피해자들도 이후엔 자신들이 가해자가 되어서 새로 들어온 신입들에게 이를 다시 행했다.

승문원에서 신고식을 치르다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한 정윤화(鄭允和)라는 신래가 죽자 유족들이 해당 관리들을 고발하고 사헌부에서도 문제를 제기한다. 다들 쉬쉬하던 사건이고 양반 관료들의 사건인지라 사헌부로서도 나서긴 그랬지만 관료가 사망한 사건인지라 마냥 덮어둘 사안이 아니었다.

결국 사헌부의 고발과 칼을 빼든 임금에 의해 관련자들에 대한 처벌이 결정되었다. 승문원 박사(정7품) 강폭(姜幅)·신자교(申子橋), 정자(정9품) 신의경(辛義卿)은 태(笞) 50대를 맞고 파직당하고, 저작(정8품) 윤필상(尹弼商), 부정자(종9품) 권제(權悌)는 공신의 아들이란 이유로 단지 파직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3.2. 선민사상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반포한 후에 충신·효자·열녀의 무리가 나옴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資質) 여하(如何)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것입니까.’
정창손[6]

유교의 원래 취지와 목적은 인본주의가 충만한, 사람이 배우기를 즐겨하고, 자신을 성찰하면 누구나 군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였다. 이처럼 유교는 오해와 달리 끝임없이 배울 것을 중요시 여겼다. 노론의 영수라고 하여 일부 유교까에게 자주 타겟이 되곤 하는 송시열조차도 자신의 딸에게 한글을 써가면서 훈육하였다.

하지만 조선시대 지배층을 중심으로 변질되었는데 유교의 본래 취지와 목적에서 크게 변질하여, 선민사상을 가지거나, 백성들의 교화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가지며 오히려 백성을 우습게 보는 삐뚤어진 엘리트주의가 싹튼다.

이러한 어리석은 신하들의 유교의 본질을 망각한 형편없는 반응들에 기가 막혀한 세종이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4. 연령차별

長幼 天倫之序 兄之所以爲兄 弟之所以爲弟 長幼之道 所自出也 蓋宗族鄕黨 皆有長幼 不可紊也
徐行後長者 謂之弟 疾行先長者를 謂之不弟 是故 年長以倍 則父事之 十年以長 則兄事之 五年以長則肩隨之 長慈幼 幼敬長然後 無侮少陵長之弊 而人道正矣
(...)天命歸于眞主 大明太祖高皇帝 賜改國號曰朝鮮 定鼎于漢陽 聖子神孫 繼繼繩繩 重熙累洽 式至于今 實萬世無疆之休
於戲 我國雖僻在海隅 壤地褊小 禮樂法度 衣冠文物 悉遵華制 人倫明於上 敎化行於下 風俗之美 侔擬中華 華人稱之曰小中華 玆豈非箕子之遺化耶 嗟爾小子 宜其觀感而興起哉
어른과 아이는 하늘이 차례 지어 준 관계이다. 형이 형 노릇하고 아우가 아우 노릇 하는 것 또한 어른과 어린이의 도리에서 비롯된 유래이다. 종족과 향당에는 모두 어른과 아이 간의 차이가 있으니, 절대 이를 문란하게 해서는 안 된다.
천천히 걸어서 어른보다 뒤에 쳐져 가는 것을 공손한 태도라고 이르고, 빨리 걸어서 어른보다 앞서 걸어가는 것을 공손하지 못한 태도라고 일컫는다. 그러므로 자신보다 나이가 두배로 많으면 어버이 섬기는 도리로 섬기고, 나이가 열 살이 많으면 형을 섬기는 도리로 섬기고, 나이가 다섯 살이 많으면 어깨폭 만큼 뒤쳐져 따라가니, 어른이 어린 사람을 기특히여기고 어린 사람은 어른을 공경하며 젊은이를 업신여기거나 어른을 능멸하는 폐단이 없어져야 사람의 도리가 바로 서는 것이다.
(...)천명(天命)이 진정한 군주에게 돌아가니 명(明)나라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께서 국호를 조선(朝鮮)이라고 고쳐 내려주시자 한양(漢陽)에 도읍을 정하여 그분의 성스럽고 신령스러운 자손들이 끊임없이 계승하여 거듭 빛내고 여러 차례 스며들어서 지금에 이르니 실로 만세토록 끝없을 아름다움이로다.
아! 우리나라는 가히 궁벽하게 바다 모퉁이에 자리잡고 있어서 영토가 편소(褊小)하지만 예악법도와 의관문물을 모두 위대한 중화의 제도를 따라 인륜이 위에서 밝혀지고 교화가 아래에서 시행되어 풍속의 아름다움이 중화(中華)를 방불하였다. 이에 중화인들이 우리를 소중화(小中華)라고 일컬으니 이 어찌 기자(箕子)께서 어리석은 우리에게 끼쳐준 교화 때문이 아니겠는가. 아! 너희 어린 유자들은 상기한 모든걸 의당 보고 느껴서 흥기(興起)할지어다.
- 동몽선습

이 또한 유교가 상당히 비판받는 요소 중 하나로 특히나 유교를 정치에 적극적으로 도입한 한중일[7] 삼국에서는 이러한 이야기가 많이 보인다.

게다가 실제로 한중일은 집단주의 상명하복의 논리가 강한 편이라, 유교의 영향을 받은 나라들이 이러한 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의혹이 짙긴 하다. 그나마 중국은 모두가 평등해야 한다는 공산주의 이념 하에 연령차별 문화를 적극적으로 청산했고, 일본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상당부분 청산되었다.

사실 이것은 유교의 본디 가르침이 아니다. 맹자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 만장이 물어 말하였다. "감히 교우하는 방법에 대하여 여쭈어 보겠습니다" 맹자가 대답하였다. "나이를 끼어 넣지 말고, 귀함을 끼어 넣지 말고, 형제를 끼어 넣지 말고 사귀어라. 사귀는 것이란, 그 사람의 덕(德)을 벗으로 하는 것이니, 그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이 있어서는 아니된다.[8]」 유교에서 절대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맹자가 나이와 상관없이 사귀어라고 말했는데, 아무리 장유유서라고해도 나이 한두살에 따라 서열을 매기고 상명하복하는 것은 본디 유교의 문화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황 기대승의 사단칠정 논쟁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여기에서 보면 당시 이황은 58세의 대사성이며 기대승은 갓 과거에 급제한 32살의 새내기였음에도 서로를 존중하는 가운데 치열한 철학적 논쟁을 전개했다고 되어 있다. 즉, 나이 하나만 갖고 무작정 하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성과 한음은 5살 차이였다. 또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친구를 사귈 때에도 나이를 크게 안 따져서, 아버지가 아들을 일찍 낳아 나이차가 20살 아래면 아버지의 친구가 아들과도 친구가 되는 사례도 종종 있었다. 8살 차이까지는 아예 동급으로 쳤다. 애초에 농경 사회에서는 같은 마을에 동갑내기가 별로 없으니 비슷한 또래끼리 격의 없이 지내는 것이 당연했다. 대신 장가를 먼저가면 나이에 상관 없이 어른 대접을 하는 것이 당연했다.

흔히 삼강오륜(三綱五倫) 중 오륜(五倫)에 속하는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예를 들어서 유교는 근본적으로 연소자를 깔보는 사상으로 오해하곤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장유유서를 말하기에 앞서서 가장 먼저 선행돼야 하는 것이 어른다운 행동이다. 이를 정명(正名)이라 한다.[9] 유교의 근간이 되는 사상으로 맹자는 이를 계승하여 역성혁명을 주창하게 된다.

즉, 장유유서를 거들먹거리며 연소자를 깔보는 순간 어른답지 못한 행동을 한 놈이니 유교적인 논리에서도 까일 만한 대상이다. 유교 경전들은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자기수양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발적인 존중을 이끌어내는 것이 진정한 권위의 형태라고 가르친다. 올바른 권위란 한 사람을 자발적으로 존중하고자 하는 다른 사람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이용하는 것이 아니다. 조선은 신분제 사회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신분제 사회에서는 나이보다 상대방의 신분, 격을 더 중요시 했다.

그리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은 유교에서 옳지 않은 행위였다 조선에서도 왕조차 신하들이 명분을 앞세워 대항을 하면 왕조차 거기에 감안해서 움직여야 했으며[10] 공자도 윗사람이 잘못된 행동을 하면 공손하고 예의를 바르게 하되 잘못에 대한 간언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유교에서 진정한 충신은 목숨을 무릅쓰고 왕에게 간언하는 것이라고 교육한다.

현대의 연소자와 하급자를 깔보는 문화는 하루만 일찍 들어와도 선임으로 군림하려고 했던 구 일본군의 악습이 일제 사회와 그 식민지였던 조선 사회에 급속도로 퍼진 것이라고 하는 견해가 있다. 그렇다고 해도 해방 전후 일본은 징병제가 폐지되고 문민 정부가 세워져 군국주의의 잔재가 빠르게 사라진 반면, 한국은 1980년대 후반까지 군사독재가 이어졌으며 현대에도 계속해서 징병제를 실시하고 있어 사라지지 않아 이로 인한 피해가 계속되고 상명하복의 군대문화가 사회에까지 남아있어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메이지 시대 일본은 유교적 가족국가 체제를 도입하면서 유교 가치관을 강조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은 여기저기에서 이것저것 따왔는데 여러가지에서 자기에게 맞는걸 택한다는 취지는 좋았지만 사무라이 정신을 왜곡되게 따온 결과 일본군 문제점의 원인의 상당수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나 항복을 못하게 한다는 것은 한중일에서 공통되게 나타나는 특징이었다.

나이만 봐도 그렇다. 실제로는 일제강점기 악습 기수제 문화와 주민등록 체계가 기묘한 콜라보를 이루며 고작 1살, 심한 경우에는 하루이틀 차이로도 계급화 되었는데, 이를 단순히 유교 문화의 잔재로만 오해하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 장유유서' 같은 것을 운운하며 유교 문화라는 식으로 퍼진 영향도 있다. 실제로는 나이 상관없이 친우로 사귀었지만, 조혼 풍습과 맞물리며 부모님 친구=내 친구인 경우가 생기다보니 조선시대에 위아래 8살까지 벗으로 사귄다는 '상팔하팔(上八下八)'로 정립되었다고 한다. # # #

물론 여기서 벗으로 지냈다는 건 서로 간에 말을 놓았다(해체를 썼다)는 의미는 아니다. 조선시대에는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성인에게는 절대 해체를 쓰지 않았다. 대부분 하오체 상호 존대가 기본이었다. 노비가 상대라면 또 모를까.

기본적으로 왕도 신하에게 자신을 낮추는 표현인 ' 과인'이나 '들은 어떻게 생각하시오'같이 하오체를 썼다. 물론 왕은 왕이기 때문에 기분 나쁘면 2, 30대 왕이 조부모뻘인 대신들에게 반말을 하고 욕설도 서슴치 않게 하곤 했다. 대표적으로 다혈질로 유명한 영조와 정조. 지금 생각하면 이상하지만 가까운 형제간에도 하오체를 사용했다. 아버지는 장성한 자식에게 공대를 했으며, 스승은 관직에 나간 제자에게 공대를 했다고 한다. 체면 때문이라도 상호존중의 문화를 지켰던 것이다. 외국인이 지적하는 잘못 알려진 유교 문화

5. 성차별

子曰
唯女子與小人 爲難養也
近之則不遜 遠之則怨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여자와 소인은 다루기 어렵다.
가까이하면 공손치 않고, 멀리하면 원망한다.
-논어, 양화 제25장-
哲夫成城 哲婦傾城
懿厥哲婦 爲梟爲鴟
婦有長舌 維厲之階
亂匪降自天 生自婦人
匪敎匪誨 時維婦寺
똑똑한 남자는 나라를 성대하게 하지만, 똑똑한 여자는 나라를 기울게 한다.
똑똑한 여자는, 올빼미처럼 간악한 짓만 한다.
여인의 긴 혀는(여자가 말이 많은 것은), 오로지 화의 근원이니라.
난리는 하늘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여인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다.
아무리 가르쳐도 효험이 없는 것을, 여자와 내시라고 한다.
-시경, 대아 제3 탕지십편(蕩之什篇) 첨앙(瞻卬)
牝雞之晨
惟家之索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서경 제4편 주서 목서(牧誓)
女子十年不出
姆敎婉娩聽從
執麻枲 治絲繭
織紝組紃 學女事
十有五年而笄 二十而嫁
有故二十三年而嫁
聘則爲妻 奔則爲妾
여자 아이는 열 살이 되면 밖에 나가서는 안된다.
어머니는 유순한 말씨와 태도, 그리고 남의 말을 잘 듣고 절대 순종하는 법을 가르치며
삼베와 길쌈을 하고 누에를 길러 실을 뽑으며
비단·명주를 직조하고 실을 땋는 등 여자의 업을 배워야 한다.
열다섯 살이 되면 비녀를 지르고 스무 살이 되면 시집을 가는데
유고하면 스물세 살에 시집을 보내라.
시집갈 때에 빙례의 절차를 갖추면 처로 하고, 급히 달려가면 그냥 으로 하라.
-예기 내칙편
맹자의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길 “대저 부인의 예(禮)란 남편을 모시며 하루 다섯 번의 먹거리에 신경을 쓴다거나, 술이나 장 담그는 일을 하며 시부모를 봉양하고 또 의복 짓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는 집안에서의 일만을 열심히 할 뿐 절대 집 밖에서의 일에 한치라도 마음을 써서는 안 된다. 주역에서는 여성이 집안의 음식을 장만하는 일(在中饋) 빼고는 달리 이루어야 할 일이 있지 않다(无攸遂)고 하였고, 시경 에서는 여자가 나쁜 일도 하지 말고 좋은 일도 하지 말며(無非無儀) 오로지 정성으로 남편의 술과 음식을 준비하는 일을 맡아야 한다(惟酒食是議)"고 하였다. 이는 여자가 자신의 마음대로 하지 말아야 만사가 형통한다는 것이다”고 하였다
-열녀편, 권1 鄒孟軻母
出乎大門而先 男帥女 女從男 夫婦之義由此始也 婦人 從人者也. 幼從父兄 嫁從夫 夫死從子
婦人伏于人也 是故無專制之道 故未嫁從父 適人從夫 夫死從子
대문을 나서면 남자가 여자를 인도하고 여자는 그 남자를 좇으니, 부부의 의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무릇 여자란 다른 사람을 좇아가는 사람이다. 어릴 때는 부형을 좇고 시집가면 남편을 좇고 남편이 죽으면 아들을 좇아야 하는 것이다.
부인은 항상 다른 사람에게 엎드려야 하는 존재이니 마음대로 하는 뜻이 있어서는 안 된다. 삼종지도가 있어서 집에 있을 때는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가서는 지아비를 따르고 지아비가 죽으면 자식을 따라야 한다.
1) 예기 교특생, 2) 대대례기 본명해
安氏家訓曰, 婦主中饋. 唯事酒食衣服之禮耳. 國不可使預政, 家不可使軒蠱. 如有聰明才智識達古今, 正當輔佐君子, 勸其不足. 必無牝鷄晨鳴, 以致禍也
안씨가훈에서 말하기를 ‘부인은 집안에서 음식을 받드는 일을 맡아서, 오직 술 밥 의복의 예법에 관해서 일할 것이요, 나라의 정치에 절대 간여해서는 안되고 집안에서도 큰일을 주장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총명하고 재주가 있으며 고금에 통달한 지식을 가진 여자일 경우 그저 남편을 보좌하며 남편의 부족한 점을 돕도록 권한다. 반드시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것처럼 여자가 하늘이 내려준 직분을 초월해서 재앙을 초래하는 일이 없게 해야 할 것이다’
- 소학, 가언
(여자란) 함부로 바깥을 훔쳐보거나 바깥 뜨락을 나다니지 말아야 한다. 나갈 때는 반드시 얼굴을 가리고 만일 무엇을 엿보아야 할 경우에는 반드시 자신의 모습을 감추어야 한다. (...) 여자는 항상 집안에 있어야지 절대 안마당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손님이 집안에 있으면 자신의 목소리를 노출시키지 말아야 한다.
-송약소(宋若昭)[11], 여논어(女論語)
광형(匡衡)이 말하기를, 시경에서 요조숙녀(窈窕淑女)는 군자의 좋은 짝이다.(君子好逑)라고 한 것은 현명한 여자란 군자를 위하여 기꺼이 여러 첩과 화목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첩이 많다고 하여 투기하는 것은 여러 죄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이다. 남자는 의를 만들거늘(夫子制義) 부인이 이를 좇으면 흉한 것이다(從婦凶也). 무릇 여자란 지극히 정숙하여 남자에 대한 지조를 변하지 않고 정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으며 남자 앞에서 말을 삼가고 사심을 행동에 나타내지 않아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강기(綱紀)의 으뜸이요 왕교(王敎)의 시초이다.
1) 列女傳 卷1 湯妃有㜪, 2) 士小節 卷7 婦儀2 人倫
論曰 臣聞之 古有女媧氏 非正是天子 佐伏羲理九州耳 至若呂雉武曌 値幼弱之主 臨朝稱制 史書不得公然稱王 但書高皇后呂氏則天皇后武氏者 以天言之 則陽剛而陰柔 以人言之 則男尊而女卑 豈可許姥嫗出閨房 斷國家之政事乎 新羅扶起女子 處之王位 誠亂世之事 國之不亡 幸也 書云 牝鷄之晨 易云 羸豕孚蹢躅 其可不爲之戒哉
사관이 논평한다. 나는 “옛날에 여와씨(女媧氏)가 있었는데, 이 여자는 올바른 천자(天子)가 아니므로 그저 복희(伏羲)를 도와 9주(九州)를 다스렸을 뿐이며, 이후 여치(呂雉)와 무조(武曌) 같은 여자들 또한 마침 어리고 나약한 임금을 만난 덕에 조정에 나와 마치 천자인 것마냥 정치를 행하였으나, 역사서에서는 이를 왕이라 일컫지 않고 단지 고황후(高皇后) 여씨(呂氏)나 측천황후(則天皇后) 무씨(武氏)라고만 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늘의 이치로 말하면 양(陽)은 굳세고 음(陰)은 유순하며, 사람의 경우로 말하자면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한 것이니 어찌 늙은 여자 따위가 규방에서 나와 국가의 정사를 처리한단 말인가? 신라는 여자를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진실로 어지러운 세상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로다. 이를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암탉이 새벽을 알린다.”고 하였고, 『역경(易經)』에서는 “ 암퇘지가 껑충껑충 뛰려 한다.”고 하였으니, 이 어찌 경계할 일이 아니겠는가.
- 삼국사기 제5권 신라본기 제5 선덕여왕
女有四德之譽하니 一曰婦德이요 二曰婦容이요 三曰婦言이요 四曰婦工也니라.
其婦德者 淸貞廉節하여 守分整齋하고 行止有恥하야 動靜有法이니 此爲婦德也요 婦容者 洗浣塵垢하여 衣服鮮潔하며 沐浴及時하여 一身無穢니 此爲婦容也요 婦言者는擇師而說하여 不談非禮하고 時然後言하여 人不厭其言 此爲婦言也요 婦工者는 專勤紡積하고 勿好暈酒하며 供具甘旨하여 以奉賓客이니 此爲婦工也니라.
此四德者 是婦人之所不可缺者라 爲之甚易하고 務之在正하니 依此而行이면 是爲婦節이니라.
太公이 曰 婦人之禮는 語必細니라.
賢婦는 令夫貴요 惡婦는 令夫賤이라.
여자에겐 네 가지 아름다운 덕이 있으니, 첫째는 부덕을 말하고, 둘째는 부용을 말하고, 세째는 부언을 말하며, 네째는 부공을 말하는 것이다.
부덕이라 함은 여자로써 절개와 분수를 지키고 몸 가짐을 고르게 하며 남편에게 한결같이 얌전하게 행하고 행동을 조심하며, 행실을 범도에 맞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부덕이 되는 것이요, 부용이라 함은 먼지나 때를 깨끗이 빨아 옷차림을 정결하게 하며, 목욕을 제때에 하여 몸에 항상 더러움이 없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부용이 되는 것이요, 부언이라 함은 남편 앞에서 감히 말을 하지 않고, 예의에 어긋나는 말을 하지 않고 사람들이 싫어하지 않게 꼭 해야 할 때에만 입을 여는 것이니 이것이 부언이 되는 것이요, 부공이라 함은 성심성의껏 길쌈을 부지런히 하며 술을 빚어 내어 좋은 맛을 갖추어 접대하는 것이니 이것이 부공이 되느니라.
이 네가지 덕은 여자로서 하나도 빠질 수 없는 것이니 행하기 매우 쉽고 힘씀이 바른데 있으니, 이를 의지하여 행하여 나간다면 곧 부녀자로서의 범절이 되느니라.
태공께서 이르시길, "여자의 말은 반드시 곱고 가늘어야 하느니라."고 하셨으니,
현처는 남편을 귀하게 하고, 악처는 남편을 경시하게 하느니라.
- 명심보감, 婦行篇
여자가 평생 앙망(仰望)하는 이는 오직 남편이라, 남편 섬기기란 뜻을 어기지 않는 일밖에는 없으니 제 남편이 대단히 그릇된 일을 하여 세상이 용납지 못할 일을 한 것 외에는 무조건 충성스럽게 그 뜻을 좇아 만분의 일이라도 미진한 일이 없게 하여 말 한마디와 일 하나라도 절대 어기지 말라. (...) 여자는 날이 어두워진 후에는 아무리 급한 일이라도 천하의 뜻에 따라 절대 대문 밖에 나가서 망아지처럼 함부로 외유해서는 안 되느니라. 옛 부인은 집에 화재를 당하여도 나가지 않고 타죽어 열녀전에 올랐으니 마땅히 모든 여성들이 그 높은 뜻에 따라야 하느니라.
- 송시열, 계녀서(戒女書)
남자란 그 뜻이 매우 크고 넓은 곳에 마음을 두고 노닐며 여러 미묘한 데서 뜻을 취해 스스로 옳고 그름을 잘 분별하여 능히 스스로 자기 몸을 유지하니 어찌 나 같은 보잘 것 없는 여자의 가르침이 필요하리오, 하지만 여자는 매우 어리석어 그렇지 아니하여 한갓 옷감 짜는 일에 있어 거칠고 세밀한 것만을 문제 삼지 높디높은 유학의 덕행을 가까이 해야 한다는 것은 알지조차 못하니 이것이 바로 내가 한스럽게 여기고 애태우는 바이다. (...) 아내는 남편을 하늘로 떠받들어 공경해야 하는 것이니, 남편을 섬기는 것이 곧 근본이다. (...) 아들은 부모께서 탐탁치 않게 여긴다면 바로 여자를 내쳐야 한다. 시부모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면 이는 의가 스스로 깨어진 것이다. 이러한 시부모의 마음을 어떻게 할 것인가? 여자는 이에 굽히고 따르는 것이 순리이다. (...) 여자는 가르쳐도 듣지 못한다면 철저히 매질해야 할 것이오, 때려도 고쳐지지 않는다면 바로 쫓아내야 하는 것이다.
- 인수대비, 내훈
유교 경전에 보이는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이나 논어에 담긴 공자의 "여자와 소인배는 기르기 힘든 존재"라는 등의 다양한 여성 비하적 언급은 그 본래의 뜻이 어떠했는가를 떠나서 결과적으로 수천년간 동양 사회 속에서의 여성의 처참한 위상을 결정짓는 잣대가 되고 말았다. 당장 중국은 물론 후대 조선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짓는데 가장 큰 영향을 준 법률에서조차 이는 예외가 아니었다. 중국 당나라 때 만들어져 훗날 대명률과 조선의 경국대전에까지 영향을 준 유교적 율령제도인 <당률>의 '남녀유별(男女有別)' 조항만 보아도 유교의 남존여비 사상이 어떠한 방식으로 사회에 침투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남자가 여자를 때리면 법으로 묻지 않는다.
여자가 남자를 때리면 징역 2년에 처한다.
남자가 여자를 죽일 경우 징역 3년에 처한다.
여자가 남자를 죽일 경우 즉시 참형에 처한다.(목을 벤다)
남자가 부모를 때릴 경우 곤장 100대를 친다.
여자가 부모를 때릴 경우 즉시 교형에 처한다.(목을 졸라 죽인다)

-김경일,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일반적인 견해로는 조선 전기, 임진왜란 전까지는 여성들의 지위가 고려시대처럼 좋았고, 왜란 후에 신분제의 동요가 있은 후에 가부장제가 심해짐에 따라 여성의 재혼이 억압받았고 시집살이가 심해졌다고 본다. 하지만 그것이 무조건 유교 때문이라고 하는 것도 어폐가 있다. 왜냐면 유교 성리학이 조선 후기부터 신분 질서를 강화하기 위한 지배층의 도구로 사용되면서 변질되고, 토착화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상류층과 달리 유교의 영향이 비교적 적던 평민층 이하에서는 이혼과 재혼의 경우 조선이 멸망하는 때까지 성행했었다.

한마디로 조선 후기부터 사회가 이러한 풍토로 변했다는 것이지, 결코 유교나 성리학에서 교리 자체에 성차별이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공자가 한 말중에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명분론이 있지만 그것은 서로 간의 역할이 나눠져 있어 그것을 따라야 한다는 의미이지, 남성이 여성보다 우위에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또 당시 조선의 유학자들은 호락논쟁이라고 사람과 사물의 본성이 같냐 다르냐로 논쟁을 벌였는데 그중에 낙론학자 이간은 사람과 사물이 근본적으로 같으니 양반과 상민도 근원적으로 보면 다를 게 없다는 식의 주장을 하기도 한다. 계급 사회가 당연시 되던 당시 사회에 계급의 가장 위에 있던 양반 성리학자가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면 성리학 그 자체가 차별을 조장해 남녀의 지위를 나눈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당시 사회의 지배층이던 조선의 양반 남성들이 자신의 지위를 세우고자 성리학의 기본 개념을 오용했다고 볼 수는 있다.

실제로 조선 후기에는 여성 성리학자들도 등장했다.[12] 강정일당도 그 중 하나였는데, 비록 남자처럼 활발한 사회 활동을 하지는 못했으나, 남편 윤광연은 아내를 학문적 스승으로 받들고 존경했고, 아내가 죽은 후 전 재산을 털어 문집을 간행했다. 링크 물론 당시에는 이를 비웃는 자들도 있었지만, 단순히 부부로서의 정을 떠나서 아내를 깊이 사랑하고 성리학자로서 존중한 것이다.

그리고 더 생각해 볼 것은 가부장제로 대표되는 성차별은 유교와 관계 없이 역사가 시작된 청동기 시대부터 전 세계적으로 존재했다는 것이다. 미국만 해도 여성 참정권이 실행되던 게 1920년도였다. 중국은 여자아이의 발 사이즈를 강제로 줄이는 전족을 착용했던 악습이 있고, 무슬림 히잡은 말할 것도 없다. 심지어 2020년대 현대에도 일부다처제를 시행하는 나라가 있다. 중요한 건 여성 인권이 높아진 것은 산업화 시민권 확대로 여성의 사회활동이 늘어난 덕분이지, 단지 유교나 성리학이 없어진다고 여성 인권이 좋아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여성의 인권이 낮은 국가는 여성의 사회활동이 상대적으로 적다. 즉 여성의 사회활동이 활발해져감에 따라 그에 걸맞는 권리를 주장한 것이며, 다 놔두고 생각해보면 자신이 사회에 기여하는 것에 비해 타당한 권리를 누리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면 당연히 열 받을 일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자신이 사회에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지,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는지 인식을 못하는 이들일 것이다.

사실 서인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성리학을 내세워서 여성의 지위가 하락한 시기조차 그래도 여성에 대한 인식이 아주 개판 수준 까지는 아니었다. 송시열은 여성들을 위한 서적을 남기기도 했으며 노론 어유봉은 남성보다 나은 여성도 있을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정조는 영조 앞에서 여성도 능력 되면 참정의 자격이 있다고 말했는데 정조의 사부는 노론의 김종수[13] 그러니까 여성에 대한 지위가 하락한건 사실이지만 여성은 배우면 안된다느니 등의 말도 안되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

그리고 저 위에서 나온 예시조차 논어란 책 자체가 공자 자신이 저술한 것이 아닌 공자의 제자 중 하나였던 증자의 제자가 중심이 되어 각자 적어두었던 문서들을 편집해서 만든 공동저술이었고 진나라 천하통일 진시황이 대대적으로 법가를 제외한 나머지 제자백가들을 탄압한 후유증으로 전한 때 사람들의 전승 및 몰래 숨겨두었다가 다시 찾은 문서들을 바탕으로 복원했던 역사 때문에 현존하는 논어는 전체적으로 앞뒤 문맥이 매끄럽지 못하며 비문이 꽤 있다. 즉, 위의 문장이 실제 성리학자들의 제대로 된 견해로서 받아들여졌다기보다는 기워붙여지는 과정에서 섞여들어갔다고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비난과 논란을 회피한다면 도대체 변질되지 않은 진짜 유교를 어디서 찾는지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논어에서 나은 부분만을, 그마저도 그나마 인본주의적인 면을 최대한 부각시켜 해석하며 이를 마치 전체인 양 호도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좋은 자세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유교도 시대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그것을 응호하거나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그 특수성을 인지하며 잘못된 사실들을 걸러내야 하고, 막연하게 현대의 윤리를 잣대로 가치 판단하는 것을 지양해야 하며, 동시에 그것을 다시 생기지 않게 바로 잡아야 한다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분명 유교도 공자도 한계점과 비판점이 있으며 변질된 유교적 전통을 고치기 위해서는 유교의 근본을 파헤쳐 바로 세워야 한다.

5.1. 남자는 음식을 하지 않는다

참고

'남자가 부엌데기에 들락거리면 성기가 떨어진다' 로 대표되는 레퍼토리이다. 현대에도 살림을 주로 어머니가 하는 것과 어느 정도 연관되기도 한다. 사실 저 말의 속뜻은 살림은 여자가, 돈벌이는 남자가 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궁중음식을 만드는 사람은 모두 남자인 숙수였으며[14], 궁녀들은 음식을 하지 않았다. 그 외에도 남자들도 요리를 만드는데 적극적이라 의안대군의 아들 이교는 워낙 음식을 잘 만들기로 유명해서 중국 사신이 올 때마다 오로지 대접할 음식을 만들기 위해 상경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홍길동전의 작가인 허균, 율곡 이이, 정약용, 서거정, 박지원, 박제가 등 이름난 사대부들도 스스럼없이 음식을 만들고 즐겼다는 것이 기록에 남아있다. 심지어 국왕인 영조가 직접 탕평채라는 음식을 만들어 신하들 앞에서 선보이고 후세에도 전해지게 하였다. 연암 박지원은 직접 밥을 짓고 반찬을 해서 제자들에게 먹였으며, 환갑이 넘어서도 장을 담그고 반찬을 만들어 자식들에게 전했다. 율곡 이이는 직접 온갖 나물을 캐서 음식을 만들기도 했으며, 정약용은 직접 장을 담그고 음식을 했다. 조선 후기에 베이징에 갔다가 카스테라[15]를 맛본 학자들이 직접 만들어봤지만 모두 실패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16] 박제가 대식가이면서 자신이 직접 음식을 만드는 것을 즐기기도 했는데, 친한 사이였던 정약용에게 자신의 개고기 조리법을 알려주기도 했고 그걸 다시 정약용이 형 정약전에게 알려주는 편지[17]가 남아있다. 문제는 정약전이 유배 간 곳에는 개고기조차 없었다

이러한 요리라는 행위는 일부 유별난 양반들의 행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것이었기에 사대부인 이들이 직접 음식을 즐겼다는 것이다.[18] 흔히 유교적 제사에 사용되는 모든 음식은 제사를 행하는 선비들에 의하여 제작되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제사도 가풍에 따라 천차만별의 행태를 보이는데 지금도 일부 종가집에서는 전통에 따라 남자식구들이 음식을 마련하고 오히려 여자들은 참여하지 않는 곳도 있다.

참고로 음식점이던 주막에서도 여성이 아닌 남성이 요리를 하기도 했는데, 일반적으론 회계였지만 일부는 직접 요리를 하며 대접하기도 했었고, 일반가정에서도 주로 집안일하는 마누라가 챙겨주겠지만, 요리를 즐기는 남자들이 더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인식이 존재하는 것은 사극 등의 대중매체에서 흔히 궁녀들이 음식을 만드는 것으로 묘사되기 때문인데, 대한제국 말기 왕실이 몰락하면서 궁중 요리를 담당했던 대령숙수들이 모두 떠났고[19], 어쩔 수 없이 궁녀들이 왕족들의 식사를 만들던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애초에 소주방이 왕족의 식사를 담당함에도 불구하고 하급 보직이었던 것은 음식은 숙수가 만들고 궁녀들은 잡일이나 상을 차리고 나르는 정도의 업무만 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궁녀들이 음식을 했다면 소주방은 궁녀들 사이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상위 부서였을 것이다.[20] 참고 기사 현실적으로도 그냥 한 가정에 불과하다면 모를까 궁궐에서는 여자만으로는 식사준비를 하는건 한계가 있는데 태반류 특유의기본적으로 여자는 남자보다 근력이나 체력이 딸린다. 반대로 궁궐에는 사는 사람이 많다. 왕을 포함해서 왕비, 세자, 세자빈, (있다면) 대왕대비 ,아직 결혼 안해서 출가 안한 왕족, 후궁 등등등 왕 식구에 궁녀에 내시까지 있다. 이 많은 사람들의 식사를 오로지 여자들로만 충당하는건 지나치게 비효율적이다. 음식 만드는건 그렇다고 쳐도 이걸 나르는 게 큰 문제다. 상에는 이거저거 올라갈텐데[21] 그걸 여러 궁녀들이 달라붙어 옮기는건 비효율적이다. 최악의 경우 상을 쏟아서 다시 요리해야 할 경우일테고 현실적인 문제를 봐도 일반 가정집 수준이면 모를까 궁궐쯤 되면 여자들로만 주방을 꾸리는건 한계가 있다.

그리고 1950~60년대에도 가정의 살림을 위해 직접 음식점을 차리고 주방장을 맡아 요리에 전념해야 했던 남성들도 엄연히 존재했다.

5.2. 육아는 여자들의 전유물이다

조선시대 사대부였던 이문건의 양아록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여자들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조선시대 풍속화를 보면 선비나 남자들이 아기를 업거나 자식을 데리고 장을 보는 등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남자도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특이한 점은 조선시대에는 부모들이 아니라 조부모들이 육아를 주로 맡았는데 부모가 양육을 맡으면 자식에게 과한 기대치를 내걸며 부담과 갈등을 가져올거라 우려했고, 이미 자식들을 키운 경험이 있는 데다부모는 양육을 안한다면서 그 경험은 어디서 쌓았지? 경력있는 신입 같은건가? 주로 맡았다고 했지 아예 안했다고는 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쌓인 지혜를 손자들에게 전수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지금에서야 전업주부라는 육아와 가사를 같이 하는 직업이 생겨났지, 당시에는 그런 개념이 없었다. 노동력이 중요한 농경사회에서 밭일은 지금도 그렇듯이 남녀가 같이 나가서 하고 혼자 남겨진 아이들은 형제자매중 맏이가 키우든지 마을 공동육아를 하든지 했다.

게다가 유교적으로 봐도 이는 불가능한데 사대부 남성은 아내가 죽으면 3년은 재혼을 할 수 없었다. 물론 예외사항이 없는건 아니었지만[22] 어쨌든 3년간 재혼을 할 수 없단데서 보듯 자식을 키우는데 전적으로 노비들에게만 맡기는 것도 대지주가 아니고서야 곤란할 테고, 그렇다고 노쇠한 부모님에게만 맡기자니 이 역시 유교적으로 도리가 아니다.[23] 특수한 경우라고 볼지도 모르나, 지금의 인식마냥 마냥 육아를 남성이 하는 걸 터부시했다면 앞뒤가 여러모로 맞지 않는 것이다. 결국 국가가 가난해짐에 따라 사회 의식이 전반적으로 변질되어가던 구한말에조차도 사대부 남성들이 육아를 하는 건 터부시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5.3. 남자는 밥상에서, 여자는 바닥에서 밥을 먹는 것

전통적으로는 양반이라면 밥을 먹을 때든 회의를 할 때든 연회를 열 때든 일단 상이 놓여야 하는 자리라면 거의 예외없이 독상을 받았다. 반대로 평민들은 겸상이 흔한 일이었다. 이 항목 자체가 수탈과 연이은 전쟁으로 집안 식기구가 모두 없어지고 사정이 어려운 시기에 생겼는지라, 실질적으론 얼마 되지 않은 문화다.

즉, 저러한 광경은 신분제가 사라져 너나 할 것 없이 양반을 자칭하게 되어서 독상은 받아야겠고, 전쟁으로 황폐하고 가난하던 시절에 주로 궂은 일을 한다고 인식되던 사람을 우선시하는 의식이 결합해서 생겨난 문화다.

5.4. 남편은 아내에게 반말, 아내는 남편에게 존댓말

이게 본래의 유교적 전통이라 착각되기 쉽지만, 조선시대 서간문들을 보면 전혀 근거가 없다.
자내 항상 내게 이르되 ‘둘이 머리가 세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 하시더니, 어찌하여 나는 두고 자내 먼저 가시는가? 나와 자식은 누구에게 기대어 어찌 살라 하고, 다 버리고 먼저 가시는가? 자내는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졌고, 나는 자내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졌던가? 함께 누우면 내 언제나 자내에게 이르되 ‘이보소! 남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 어찌 그런 일을 생각하지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가? 자내 여의고는 아무래도 나는 살 힘이 없네. 빨리 자내한테 가고자 하니 나를 데려 가소. 자내를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길이 없네. 아무래도 서러운 뜻이 그지 없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자내를 그리워하며 살려고 하겠는가. 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이르소. 내 꿈에 이 편지 보신 말 자세히 듣고자 하여 이리 써서 넣네. 자세히 보시고 내게 이르소. 자내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이 있다 하고서 그리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굴 아버지라 하라 하시는고.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을까.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에 또 있을까. 자내는 한갓 그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이 서러울까. 하고 싶은 말이 끝이 없어 다 못쓰고 대강만 적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 자세히 보이고, 자세히 이르소. 나는 꿈에 자내를 보려 믿고 있다네. 몰래 와서 보여 주소서. 하고 싶은 말이 끝이 없어 이만 적나이다.
1586년에 한 아낙이 죽은 남편 이응태에게 쓴 편지 출처

이 서간문을 보면 아내가 남편에게 '자내(= 자네)'라고 부르고[24], 마치 친구에게 말하듯 하오체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부부들은 서로를 하오체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리 성리학이 교조화 된 조선 후기라도 연상 아내가 연하 남편에게 존칭하고 남편이 아내에게 하대를 하는 일은 당시에도 막장 집안 취급 받았다. 부부간의 상호존중은 당시 양반 집안이라면 당연히 이루어지던 것이었다. 조선 후기보다 더 사회가 막장이던 일제 시대에도 부부가 서로를 자네라 부르며 존칭을 썼다. 거기다 부부간의 존칭 문제는 지도층이 권력으로 어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현대의 고부갈등 문제는 일제강점기의 권위적인 수직 문화와 6.25 전쟁 이후 신분 질서가 완전히 무너지면서 너도나도 양반 집안을 자처하면서 만들어낸 비뚤어진 문화에 가깝다.

시동생 문서를 보면 유교가 문제가 아니라 유교를 권력 강화에 악용한 가부장적인 사람들과 그걸 억지로 심화한 비뚤어진 유교적 적폐 탓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악습은 현대까지도 가끔 영향을 미치는데, 해외 영화를 번역할 때 남자와 여자 모두 서로에게 동등한 관계에서의 화법을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국내로 들여올 때 여자만 존댓말로 바뀌는 것이 그 예시이다.

5.5. 여성은 재산상속을 받지 못한다

<시사저널>유교의 최대 피해자는 여성
제사와 함께 현대에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인데, 인터넷 등을 뒤져보면 장녀인데도 상속을 전혀 받지 못하거나 남동생의 횡포에 시달리고 있다고 호소하는 것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심지어 아들, 딸 사이에 재산을 불공평하게 물려주는 집안에서 태어난 장녀들을 일컫는 ' 유교걸' 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이효리의 U-Go-Girl을 패러디한 유교걸이라는 노래가 나오기도 했다. #

그러나 이러한 풍습은 유교가 지나치게 경직화, 교조화된 조선 후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20세기에 신분제 폐지로 인해 민간에도 성리학이 심화되기 전까진 주로 양반층에서 이루어졌다.[25] 유교를 국교로 삼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였던 고려 시대나 유교를 국교로 지정했던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찾아볼 수 없었다. 족보의 경우에도 조선 전기에 편찬된 것은 아들과 딸 구분 없이 태어난 순서대로 기재되었으며, 딸의 자녀들까지 수록되었다.

사실 이부분도 엄밀히 따지면 여성뿐이 아니라 장자가 아니면 애초에 재산상속을 받지 못한다. 차남이후로는 남자건 여자건 상관없이 재산자체를 상속받지 못하며 그나마 남자는 독립을 할때나 일부 재산을 나눠 받을뿐이고, 여성은 결혼을 할때 혼수의 형태로 가져가게 된다. 딱히 남녀차별이 아닌 그냥 가부장제의 특징일뿐이다. 물론 결혼이나 독립이 아니라면 그냥 장자가 끝까지 형제 자매의 인생을 책임지게 된다.[26]

6. 사농공상

유교적인 관점에서는 상인 기술자를 유학자-관료나 농민보다 천하게[27] 여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기저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존재한다.

우선 사농공상(士農工商)에서 사(士)는 국가 행정을 유지하는 기반이 되는 관료 공권력을 실행할 수 있는 군대를 말한다. 이들이 없으면 국가 형태를 유지할 수 없으니 최우선적으로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음으로 농민 식량을 생산하는 주체이다. 먹을 것이 넘쳐나는 지금의 대한민국도 식량 안보와 관련해서 골머리를 앓는데, 화학 비료도 없고 모내기도 없고 콤바인도 없었던 과거라면 어땠겠는가? 반면에 공과 상은 사와 농이 안정된 뒤에야 원활하게 기능하는 계층이다. 그러다 보니 유교적인 관점에서 자연스레 공과 상의 우선 순위가 낮아진 것이다.

국부론에서는 국가 부의 원천을 노동으로 잡았는데 이는 프랑스의 유명 경제학자 프랑수아 케네의 국가 부의 원천은 농업이라는 중농주의사상에서 얻은 아이디어로 농업과 공업에 사용되는 모든 행위 즉 노동이 국가의 부를 측정하는 계기가 될 정도로 경제학상으로 볼 때 사농공상은 그 경제학상으로 짜여진 초창기 신분제로 보는 것이 맞다.

이 때, 유교 문화에서 상인을 최하위 계층으로 놓는 것은 "본인이 직접 생산 활동은 하지 않으면서, 남이 만들어놓은 물건을 그저 옮기기만 하면서 돈을 받는다"는 상업 자체의 성격을 가치의 도둑질 비슷한 것으로 보면서 천시한 것을 이유로 들 수 있다.[28] 그랬기 때문에 일단 뭔가를 자기 손으로 만들기는 하는 (수)공업이 상업보다 더 위에 놓인 것이다.

이것과 비교하면 재화의 생산 못지 않게 재화의 분배도 훨씬 더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현대 경제학의 관점이 훨씬 더 합당하게 보이며 사리에도 들어맞아 보이며 유교의 비판점으로도 보이지만, 사실 현대 경제학과 현대 문명의 발달을 막연하게 동치로 놓은 후 유교 이론을 엄밀하게 판별하지 못해 생긴 오류다. 현대 경제학이 재화의 분배를 훨씬 더 중요하다고 가르치건 어쩌건 현대 기업은 물론, 상인은 현대와 고대를 막론하고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예컨대 창렬, 혜자 같은 2010년대 초반의 인터넷 유행어나, 질소과자로 대표될 수 있는 수출품이 오히려 더 싼데 똑같은 제품의 국내 가격은 더 비싼 소비자 기만이 그렇다. 상인은 그 속성상 본질적으로 절대 분배를 중요시하지 않으며, 최대 이윤을 중시한다. 현대로 들어와서는 최대 효율이나 유연성과 같은 가치로 조금 말이 바뀌었을 뿐이지 본질적으로 이 말들도 최대 이윤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옛날을 보면 재화의 생산을 늘리자고 주장한 것은 타당성이 있다. 질소 비료가 개발되기 전까지 기근이란 인류에게 있어서 최악의 적이면서도 늘상 마주치는 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을 굶어죽게라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식량 생산의 증가는 사람들에게 큰 관심이었을 것이다. 특히 농경사회의 특성상 식량이 늘어난다는 것은 곧 나라의 곳간도 가득 찬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농경 국가에서 재화의 분배보다 재화의 생산을 염두에 둔 건 어찌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재화의 분배도 재화가 있고서야 나올 수 있는 얘기인데 재화가 부족한 상황이니 재화를 늘리는 것에 집중하는 건 이상한 건 아니다.

상인의 이와 같은 사회 전체를 바라보지 않고 자기 자신 혹은 내부 집단의 최대 이윤을 중요시하는 특징은 유교 뿐 아니라 서양에서도 널리 경계되었다. 그리스 정치철학을 거쳐 기독교 문화의 중세에 이르기까지 서양 역시 상업을 통제하려 열심이었다. 상업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금융 분야는 서양에서도 유대인이나 담당하는, 일종의 천역이었으며[29] 유대인도 행정력이 필요로 할 때마다 돈, 기술을 위해 쥐어짜이거나 심하면 추방당하거나 죽으며 고초를 겪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나치즘에서의 유대인 혐오가 단순히 소수집단 수준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 전국가적 흐름일 수 있었던 것. 또한 중세 유럽까지는 천한 일, 지옥에 떨어질 일이라며 유대인에게 금융업을 강제시켜놓고 근대로 발전하며 금융의 가치가 대두되자 피어난 시기와 질투를 나치에서 선동을 통해 적극적으로 '악마적인 것'이라 낙인찍고 혐오를 조장했기 때문이다. 즉, 산업발전 이전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상업은 천대받는 직종이었다. 유학만 상업을 천시했던 게 아니다.

서양에서 상공업이 꽃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특수한 역사적 배경, 봉건 영주와 국가와 자유민과 자유도시가 서로 통합되고 발전되어 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미묘한 알력, 더불어 구교와 신교 간의 알력이 역사적으로 진행되어가며 얻어진 결과에 가깝다. 토지의 생산력이 안정된 이후 상공업에 통제와 제재의 욕구를 드러낸 것은 서양도 동일하나[30] 상공업 세력은 네덜란드 벨기에 등지로 피신할 수 있었고, 또 이들 국가는 좁은 국토로 인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국력의 한계를 극복하고 자유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번영이 필요했으며, 상공업의 자유로운 발전은 국토가 좁고 해안을 넓게 끼고 있어 도시와 무역 위주로 행정력을 집중해 극대의 효율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들 국가에 잘 들어맞았다. 또 여기에 신대륙으로부터 넘어오는 막대한 재화가 제동장치를 무력화시켰으며 신교의 발흥과 인문철학의 발달이 도덕적 정당성을 가져다 주었다. 결국 서양의 상공업 세력은 이렇게 벌어들인 시간을 이용해 막대한 번영을 유럽 세계 전체에 과시할 수 있었고 그러자 서양 각국은 풍성한 열매로 맺힌 이 달콤한 번영을 굳이 거부할 이유도 없었으며, 오히려 이 달콤함을 거부했다간 끊임없이 거듭되는 쟁패에서 뒤처질 위험성이 있었다. 인문철학 역시 이 번영을 등에 업고 비합리적인 도덕적 낙인을 끈질기게 제거해 갔으며, 날로 번창하는 식민지 사업과 끊임없는 각국의 쟁패는 서양 각국의 정력이 내부 통제에만 몰두하기보다 외부로도 충분히 투사되고, 효율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재화의 분배는 본래가 국가, 행정력의 직무이며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상인의 역할로 넘어가게 된 것은 서양에서도 애덤 스미스로 대표될 수 있는 고전경제학의 대두, 그리고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희대의 슬로건이 상인과 유산계급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공자왈 맹자왈처럼 가가호호[31][32] 울려퍼진 덕분이다. 현대 경제학에서 재화의 분배가 재화의 생산을 넘어선 것은, 현대는 오히려 생산력이 지나치면 지나치지 모자라지는 않는다는 평을 받는 시대이다.

이 사농공상의 공상 천대 문화 때문에 동양에서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태동이 불가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그렇다면 상업을 제일직업으로 삼고, 아예 중개무역으로 존재하던 중동에서는[33] 어째서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나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또한, 이것을 정말 진지하게 대표적인 하나의 반례로 받아들이고 왜 중동에서는 산업혁명이 발생하지 않았는지, 유럽에서 발생했는지에 대해 논변하는 시도가 있을 수 있으나 큰 의미가 없다. 왜냐면 첫째로 규모적인 면에서, 유럽의 거대함이 특수한 요인이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견강부회이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은 영국 개중에서도 잉글랜드에서 발생했지 유럽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34] 또한, 중동뿐 아니라 터키, 인도, 중국 등 규모적인 면에서 산업혁명이 발생할 수 있는 경제적 역량, 기술 수준은 충족되는 곳이 많았다. 심지어 유럽의 다른 곳, 다른 시점이 아니라 왜 그 시기 잉글랜드에서 산업혁명이 발생했는지에 대해 어느 학설도 정설로 인정받는 것은 없다. 산업혁명처럼 많이 연구된 역사적 사건도 드문데, 이 산업혁명에 대한 정설은 도대체 왜 산업혁명이 다른 데가 아니라 잉글랜드에서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양명학을 받아들인 중국이나 일본도 서구의 개입 없이 산업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으니[35] 결국 헛발질이나 다름없는 주장이다.[36]

그리고 당시 유학자들의 시각에서 조선의 경제사정은 대외무역을 하기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한반도 자체가 농사짓기 썩 기름진 땅이 아닌데다 세종 시절 확보한 호구와 농지가 계유정난 이후 세조의 공신들에 대한 수조권 남발, 연산군의 폭정과 같은 여러 악재가 쌓여오다 임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붕괴되어 버린 상황이었다. 이후에 대동법과 같은 개혁도 나오기는 하나 전통적 시각에서 볼 때 조선의 경제체제는 다른 나라들과 교역하기에는 기반이 많이 부족해 보이는 것 또한 감안해야 했다. 북학파와 같은 이들이 나와 중국과의 교역이라도 늘리자고 주장하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 대세가 되지는 못했다. 이러한 유학자들의 시각은 최익현의 강화도 조약 반대 상소에서 "우리는 땅도 작고 귀한 자원도 없는데, 저들과 교역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식량과 같은 생필품은 다 빠져나가고 신기한 기물 같이 실생활에서는 쓸모 없는 것만 들어오게 될 것이다."라는 주장에서 드러나며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고려 때는 그나마 중개 무역이 번성했지만, 고려 말에 원나라가 무너지면서 많이 쓰이던 원나라 화폐가 유명무실해지는 바람에 고려 경제가 엄청나게 흔들렸고, 당연히 이 꼴을 지켜본 신진사대부 세력들은 국제 무역에 회의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상술된 조선의 사정을 바라보는 것과는 다른 시각으로, 조선의 사정이 좋았지만 단지 사상적 한계로 인해 산업혁명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건 그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소리다. 잉글랜드는 당시 유럽의 2진급 국가이자 조선보다 훨씬 보수적 가치관을 지닌 국가였다. 교육이라는 것이 구렸던 나머지 최고의 인재들은 스코틀랜드 대학 유학을 갔고 뭐만 했다 하면 종교 관련 문제로 박터지게 싸웠으며, 당시 잉글랜드 종교재판에 비하면 조선의 성리학은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 지경이다. 반면 프랑스는 당시 유럽 인구의 1/5를 차지할 정도고 예나 지금이나 공업자원과 농업자원이 풍부하고 남북으로 바다를 끼고 있다. 그리고 과학교육과 기술교육에 대한 투자도 잉글랜드와 비교하면 성실하게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잉글랜드가 특별히 상업을 밀어준 것도 아니며, 이미 땅을 차지하고 있어서 지대를 받아먹던 지주, 향신 계층은 상업, 공업 세력들을 엿먹이려고 반대 법령을 제정하곤 했다. 그렇다면 서민들의 지지를 받은 것도 아니다. 서민의 지지가 있었다면 못살겠다고 기계를 부수는 러다이트 운동이라는 게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상술된 신식 인문철학이 제대로 열매를 맺는 곳은 벨기에, 네덜란드와 같은 작은 규모의 해안을 낀 상공업과 교역 중심의 나라였고, 규모 있는 국가는 중농주의가 대부분 우세를 차지했다. 당시 부는 당연히 토지=농업에서 나왔다. 잉글랜드조차도 중농주의의 기세는 만만찮았다. 상술된 신식 인문철학이 대두되었다고 해서 구식 인문철학이 순식간에 죽어버리는 일은 없다. 어디까지나 구식 인문철학이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대세였고, 단지 신식 인문철학은 완전 고립무원이던 옛날과는 달리 비빌 만한 기둥이 하나 있었다 정도일 뿐으로 조선에서의 실학. 양명학의 위치와 크게 다른 것도 없다. 단지 우연적 요소로 상공업이 발달하게 되니까 사상도 같이 발전하고, 사람들 인식도 따라서 바뀌었을 뿐이다.

영국이 산업혁명으로 잘나가게 된 건 별 거 없고 우연적 요소다. 영국은 모직업이 이미 발달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인도에서 들어오는 완성품 면직물에 대해 모직업자들이 법령으로 깽판을 놓았다. 그래서 완성품이 아니라 인도에서 싼 값에 면이 들어왔고, 이 값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잡아다 치렀고, 영국 국내에서 이렇게 노예와 교환된 면으로 면 완성품을 만드는 시장이 어느 정도 생성되었다. 그리고 이제 이렇게 생성된 면제품이 국내에서 팔리는 것만으로 산업이나 상업의 발달을 이루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니,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노예 플랜테이션 농장에 면제품을 수출하고 이제는 인도가 아니라 노예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면을 받아먹는 무역이 완성되었던 것이 그 시작이다.

그런데 조선은 이 조건들 중 단 하나도 달성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디 대만이나 필리핀, 보르네오 같은 곳에다 대고 노예 무역 + 면이 아니라 그게 뭐든 간에 헐값에 원료를 들여와서 가공한 후 제법 값을 쳐서 팔 수 있으면서도 필수품급의 수요를 가져서 대량생산이 필요하면서도 최초 기계화에 필요한 난이도가 어렵지 않아야 하는 제품도 없고, 그러면서도 인건비보다 기계를 만드는 가격이 더 싼 환경이 아니었으며, 그리고 원료공급도 제품수출도 아프리카 아메리카 경영처럼 광대한 토지에 계속 노예를 돌리면서 끝도 없이 늘어날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다.[37]

게다가 잉글랜드의 식민지는 지속적으로 탄탄했으며 독립한 미국과도 그럭저럭 화해했는데 반해 라틴 아메리카 지역은 포르투갈, 스페인과 싸운 이후 영국과 교역을 하게 되면서 독점적으로 이득을 챙기게 되었다(이건 사상과 딱히 상관없다). 그리고 이렇게 늘어나는 상공업 수요를 인클로저 운동으로 서민 농민 계층들을 바싹 밀어버려서 공업지대에 합류시킨 것도 모자라 아일랜드 대기근이 터져서 몇십만 명이나 되는 아일랜드 사람들이 영국으로 밀려든 것도 큰 원인을 차지한다. 이런 우연적 요소들에 사상을 결부시키는 것 자체가 억지 주장이다.[38] 이런 동아시아 정치를 떠나서 상공업이 발달하는 데 필요한 원료도, 오직 조선만이 그것을 독점적으로 갖다가 팔 시장도 없다. 연간 몇백퍼센트에 달하는 성공률을 담보할 만큼 이윤이 높은 산업은 도대체 어떻게 마련할 것이며,[39] 그런 산업이 있다고 치더라도 노동력 수급 문제가 남는다. 잉글랜드처럼 대충 캐면 석탄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아예 농민들의 생활 기반을 부숴버려서 수많은 농민들을 빈곤상태로 만들어 고향에서 내쫓고 도시 빈민, 상공업자로 바꿔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농민반란 등의 사회적 혼란도 각오해야 한다. 가뜩이나 맹자의 역성혁명론이 대세인 동양 사회에선 위험부담이 더 컸고 조선은 역성혁명으로 세워진 나라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봤을 때도 조선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고대부터 이미 농사를 권장하려고 애를 썼다. 개간을 장려하거나 농번기에 잡역을 금지시키거나 농업기술을 발달시키고 간척지를 만들고 농업기술을 발달 시키는 등 굉장히 애를 썼는데도 투입하는 양과 다르게 생산량은 현저히 떨어졌고 심지어 흉년이 들어서 대기근이 생기면 봉기, 혁명 심하면 내전, 최악이면 그 나라 자체가 붕괴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21세기에도 기근이 세계정세를 쥐락펴락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아랍의 봄이 일어난 배경에는 독재, 종교적 억압 등이 있지만, 방아쇠를 당긴 것은 러시아의 흉작으로 인한 곡물 수출 동결로 곡물가격의 상승, 그로 인한 빈곤과 식량난이었다.[40] 인류의 역사는 기근과의 전쟁이라고 하는 말이 괜히 나온게 아니다. 이러니 전근대 시대에 농업을 상공업보다 중시한 것이다.

거기에 21세기에 상공업과 더불어 수많은 직업이 나오는 이유는 다양한 계층을 먹어 살리고 남은 식량과 농업의 기술 발달에 힘을 얻어 옛날에 비해 노동력이 크게 절감되었기 때문이다. 당장 예를 봐도 조선 뿐만 아니라 다른나라들도 전체 인구 중에서 가장 높은 비율로 차지한 계층이 농민이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농사에는 노동력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가장 높게 비율을 차지할 수밖에 없고,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렇게 일손을 많이 투입했는데도 생산량이 적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농민 일부가 상인으로 전업할 경우, 자연스럽게 농업에 투입되는 노동력이 줄어들고 결과적으로 식량이 줄어들게 된다. 당연히 국가 입장에는 가만히 볼 수 없고 상업을 통제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상업이 발달하려면 물자를 충당시키고 유통시켜야 하지만, 농사 짓기도 바쁜데 쉬운 일이 아니다. 실제 조선 전기만 해도 먹고 살만큼 생산해서 자급자족으로 생활 하다가 후기에 이양법이 발달하면서 잉여생산물이 생겨서 상업이 발전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즉 농업이 발전해야 상공업이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41]

유럽과 다른 나라들이 한국보다 상업이 발전했던 이유는 기후가 달랐거나 자원이 풍부했거나 다른 곳에서 물자를 충당한 동시에 먹는 입이 많은 인구를 분산시켰기 때문이다. 유럽같은 경우 식민지를 정복한 후 플렌테이션으로 수많은 곡물들을 자국으로 수입하는 동시에 수많은 이민자들을 식민지로 보내면서 식량사정이 나아졌고 중국 같은 경우 땅이 넓고 자원이 풍부해서 물자를 빠르게 충당하는 게 가능했고 일본 같은 경우 한국과 다르게 해양성 기후로 농사를 짓는데 더 적합한 기후였고[42], 실제로 전국시대가 끝난 후 일본은 에도 시대에 조선의 인구를 따라잡는 등 크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즉 사농공상을 무턱대고 비난할 게 아니라 그 시대에 배경을 파악하며 어떻게 변화에 왔는지 보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언급한 내용은 사농공상이라는 것이 산업혁명을 방해하는 요소인가에 대한 내용을 다뤘지만, 이와는 별개로 사농공상이라는 인식 자체는 직업의 귀천의식으로 이어져 대한민국 시대의 역사에서 상당 기간동안 사농공상 중 사로서 출세하는 걸 당연하게 여겼던 풍조로 이어졌다. (입시 난이도와는 별개로) 대학만 들어갔다 하면 국가기관의 주요 보직이 보장됨은 물론이고 하다못해 기업에 손쉽게 들어가는 게 가능했다.[43] 그런 사에 해당되는 부류는 99.9% 문과 출신들이었던 반면에 이공계는 대학 교육조차도 공장 인력 생산소에 불과한 실정이었고 이런 점 때문에 '문과(사)는 서울 소재 본사 사무실에서 떵떵거리고 이과(공)는 지방 공장에서 기계 돌린다'는 광의의 이공계 기피 현상이 90년대 중반까지 두드러지게 만연했다.

7. 제사

조선시대의 제사는 지금처럼 제사 음식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가정 형편에 맞게 음식을 올렸다. 즉, 제사 음식이라고 특별히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 먹던 반찬을 그대로 올려도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또한 우환이 있으면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상식적으로도 상다리 부러지게 제사상 차린다고 빚을 내는 바람에 집안 형편이 안 좋아지거나 우환 있는데 무리해서 제사 지내는 꼴을 보면 조상님들이 좋아하실까?

제사의 의의는 후손이 조상께 예를 다하는 것이기에 집안의 후손들이 직접 음식을 차려서 제사를 지냈다. 그 집안 후손이 아닌 며느리들은 원래 시가의 제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전까지는 딸도 제사에 참여했다. 시집 간 누나가 자신의 집에서 제사상 차리고 남동생이 누나의 집을 방문하여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조선시대 사대부 집안의 제사상을 차리는 건 노비들이 했지, 며느리가 하지 않았다. 심지어 여자가 자기 친정에 가서 제사를 지내거나, 딸이 제사를 지내고 다른 형제들이 그 집을 찾는 사례도 있었다. 조선 후기에 족보 매매로 인해 이름뿐인 양반이 급증했고, 이후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으로 인해 사실상 행정적 족보가 박살나면서 너도 나도 양반을 칭하고 다니면서 양반처럼 보이기 위해 허례허식이 늘어나던게 오늘 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즉, 제사상에는 신선로가 올라가든, 삼겹살이 올라가든, 피자, 치킨이 올라가든 아무 상관이 없다. 어동육서, 홍동백서, 조율이시 등 제사상 차리는 말들은 조선시대에도 없었던 창작된 가짜 전통이다. 실제로 제사와 성묘 등 대표되는 종가 중심의 문화도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설득력과 우월함, 정통성의 아이덴티티를 인정받기 위해서 당시 독재 정 권 체제 아래서 전통문화를 손대어 급조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한 마디로 양반 코스프레이면서 일종의 문화적 프로파간다라는 것. 옆동네 메이지 유신을 생각하면 납득하기 쉽다.[44] 종가들을 보면 집안마다,[45] 혹은 지역마다 제사 지내는 방식이나 올리는 음식이 다르다.[46]

또한 해방 이후의 제사는 허례허식의 측면도 있겠지만, 동시에 일종의 잔치 같은 측면도 존재했다. 이 시대에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증언하는 것은, 고기를 입에 댈 수 있었던 것은 추석, 설날, 제사, 가장의 생일 딱 이 정도였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타문화권에서 평범하게 하는 축제나 잔치의 성격을 마찬가지로 종교성을 띠고 있는 제사가 적절하게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8. 오락에 대해 금기시

유교 선현들의 가르침은 지나치게 놀이에 심취하지 말라는 것이었지, 놀이 자체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었다. 당장 바둑만 해도 요임금이 아들을 가르치기 위해 만들었다는 전설이 내려올 정도인데, 요 임금은 유교 문화권에서는 이상적 인간상으로 추앙받는 신화적 인물이다. 그런 신화적 인물이 아들에게 바둑을 권했던 것이다. 요 임금 이야기는 설화라 쳐도 공자는 직접적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놀고 먹느니, 차라리 바둑이라도 하는 것이 낫다." 고 말했다. 맹자는 바둑에 빠져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긴 했지만 바둑을 비판한 적은 없었다.

조선 선비들의 삼신기는 시, 서, 화였다. 즉 시를 읊고 글을 쓰며 그림을 그리는 일인데, 글쓰기를 제외하면 모두 잡기로서 풍류에 해당하는 놀이 문화였다. 유학자인 정약전 자산어보를 집필할 정도로 낚시의 달인이었고, 태조 태종은 사냥을 즐겼으며,그 운동하고는 담쌓고 책만 읽었다는 세종조차도 격방 이라는 현대의 골프와 흡사한 놀이를 즐길 줄 알았으며 성종은 매사냥과 그림을 즐겼다. 정종은 현대의 폴로와 비슷한 스포츠인 격구를 즐겼고[47], 숙종은 애묘가였으며, 정조는 활쏘기의 달인이었다. 즉 유학자나 왕이라 하더라도 취미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9. 성(性)의 금기시

대부분의 서구 선진국에서는 합법인[48] 포르노가 유교적 전통이 강한 한국이나 중국에서는 포르노를 규제하고 있다.[49] 포르노를 규제하는 국가들은 유교 문화가 강한 한국, 중국, 베트남 미얀마, 태국, 싱가포르 등의 비(非) 이슬람권 동남아 국가들, 구 공산권 국가들, 그리고 이슬람 국가들이 대부분이다. 또한 포르노 만큼은 아니지만 많은 국가들에서 합법인 매춘에 대해서도 합법화에 대한 토론조차 거의 논의되지 않고 있다. 특히 출산율 관련 문제가 심각한데도 미혼부모를 위한 복지 확충이나 인식 개선 프로그램 활용 등 전세계 최하위권 수준인 혼외출산(곧, 동거자들의 육아)을 위한 지원이나 인식 개선에 큰 노력을 보이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성교육은 서유럽이나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미국의 진보적인 주들에 비해 상당히 보수적이고 실제 대한민국의 현실을 못 따라잡는 경우가 많아 비난을 받는다. 심지어 UN에서도 이를 지적할 정도다. 실제로 대한민국의 첫 성관계 경험 평균 나이가 갈수록 낮아지고 있지만, 피임기구를 사용하는 등 임신을 예방하는 행위를 하는 경우가 불과 59.3%에 # 그친 이유도 바로 서유럽권이나 일본에선 콘돔 사용법 등 실제로 청소년들이 맞닥뜨릴만한 사례를 알려주는 것과 달리, 대한민국의 성교육은 형식적인 수준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 거기에다가 서유럽이나 영미권과 달리 미혼모/미혼부 관련 지원이 적고, 동거, 혼외 출산 등 소위 전통적인 가족 체계(소위 정상가족 체계)에서 벗어난 새로운 가족 체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고려사회는 유교적 가부장제 사회가 아니었다. 결혼 후 남성이 여성의 집에서 사는 처가살이가 보편적이었으며, 재산상속 역시 여성이 남성과 꼭 같은 재산을 분배받는 남녀균등상속제였다. 性的으로 고려사회는 조선에 비해 훨씬 개방적인 사회였다. 조선이 건국되자, 사대부들은 사회를 남성 우위의 가부장적 사회로 만들려고 하였고, 그 중요한 방법의 하나로 인간의 성적 욕망을 관리하고자 하였다. 이 방법의 특징은 여성의 성욕을 부도덕한 것으로 인식케 하는 담론을 유포하여 여성의 성욕을 억압하는 것이었다. 물론 남성에게도 성욕의 절제를 요구하였으나, 그것은 부부 사이에만 해당하는 것이었고, 남성들은 蓄妾制와 기생제도를 통해 일탈적 성욕을 충족시킬 수가 있었다.
...
율곡은 성욕을 억제하려 한다. 이때의 성욕의 배후에 있는 것은 쾌락으로서의 성이다. 성욕을 억제하는 것은 성리학의 수양론이다 퇴계와 율곡을 거치면서 성리학이 본격적으로 이해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수양론에 의한 성욕의 억제는 성리학자들 사이에는 보편화되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
강명관, 조선시대의 성담론과 性, 한국한문학연구 vol., no.42, 2008, pp. 9-43 (35 pages) #

성리학 이전의 유교에서는 성(性) 자체를 금기시하지는 않았다. 남녀의 합일을 음양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기도 하였으며, 유교에서의 가르침은 지나쳐서도 안되며, 부족하지도 않은 중용이었다. 중국의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가 모두 군주의 탐색으로 망했기에 공자를 비롯한 초기 유학자들이 성에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고 볼 수도 있는데, 그것도 지나치게 색(色)을 탐하지 말라는 얘기지 성 자체를 부정적으로 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유교 사회에서는 아들이 없어서 대를 잇지 못하는 것을 가장 큰 불효로 여겼다. 물론 이러한 관점은 현대 서구의 개방적인 성관념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성관계는 어디까지나 아이를 낳는 수단이자 일종의 의무로서만 본 것일 뿐이었으며, 아이러니하게도 자식 핑계를 대면서 첩을 들이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면서 자유 연애는 신문물로 생각한 것이다. 이는 마찬가지로 유학에서 비롯된 문제점인 유학 및 성리학과 같은 학문만 진짜 학문이고 과학 기술이나 실학과 같은 것들은 천대시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存天理去人欲
존천리거인욕
성리학
본래 이 세계에서 빼어난 기를 품수 받은 존재인 사람은 천리를 부여받아 그 존재본질로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덕성을 구비하고 있다. 그것이 천명지성(天命之性)이요, “성즉리(性卽理)”이다. 이에 덕성을 구비하고 있는 사람의 본성은 선(善)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사람마다 기품(氣稟)의 차이도 있고 식욕(食欲)과 성욕(性欲), 물욕(物欲), 그리고 희로애락의 감정들이 끊임없이 생겨난다. 식욕이나 성욕, 물욕 전체를 욕망, 즉 인욕(人欲)이란개념으로 귀속시켜 볼 수 있는데, 이 인욕 때문에 사람의 존재본질인 덕성이 가려져 온전히 실현해 내기가 어렵게 된다. 이점에서 인욕이 지나치면 천리의 실현을 막는다고 말한다. 인욕이 늘어나면 천리가 줄게 마련인 것이다. 말하자면 천리와 인욕은 사람의 의식이나 심리활동상 상호 소장(消長)의 관계에놓여 있다.
정상봉, 주자의 욕망관과 그 현대적 의의, 유교사상문화연구, vol., no.67, 2017, 통권 67호 pp. 53-88 (36 pages) #

성리학을 창시한 주희는 천리인욕론을 주장하였는데, # 인욕을 억제하여 천리를 따를 것을 주장하였다. 그에 따라서 존천리 거인욕이라는 구호가 등장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종묘제례에서 연주되던 고려가요가 남녀상열지사라는 비판을 받고 운율만 남은 채 가사는 부르지 않게 되거나, 다른 내용으로 가사가 바뀌어 불리면서, 많은 고려가요들이 실전되었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야외에서의 남녀 혼욕이 일상적이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혼욕은 사라지고, 목욕횟수가 줄어들었고, 목욕할 때도 타인에게 신체를 노출하지 않기 위하여 목욕전용 옷을 입고 목욕을 하게 된다. #1 #2

조선시대에는 내외법/내외 관습법이라는 형태의 남녀간의 접촉을 막기 위한 관습이 존재하였다. 이에 따라서 사대부의 집은 사랑채와 안채로 나뉘어 남녀가 서로 분리된 구조로 이루어졌다. #

한중일 동아시아 3국 중에서도 조선은 특히 성리학의 영향으로 춘화의 등장이 늦었고, 전해져 오는 것도 적은 편이다. 그리고 인조 때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인조에게 여인의 나체를 상아로 조각한 '춘의'를 예물로 보내자, 인조는 이를 가루를 내서 부셔 버리라는 전교를 내렸고, 조정 대신들 가운데 이것을 손으로 만져본 사람들은 벼슬길이 막힐까봐 조정에서 의론을 했을 정도로 심각할 정도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 조선시대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 '색욕' 편에서 성욕에 빠져 문란한 사람은 금수만도 못하다고 하며, 인간은 윤리를 가지므로, 성욕을 절제하여 잘 다스려야 한다고 말한다. #

춘향전과 같은 민속문화에서 성에 대한 노골적인 묘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근거로 성에 개방적이었다고 오해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민속문학들은 성리학적 사대부들과는 거리가 멀며, 당대의 사회상에 대하여 비판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가령 홍길동전에서는 서얼에 대한 차별을 비판하였고, 흥부전에서는 균등상속에서 장자상속으로 바뀌는 시대상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흥부전과 더불어 조선을 대표하는 춘향전은 ‘남녀관계와 성(gender relations and sexuality)의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이몽룡은 당시 결코 춘향을 부인으로 맞이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반전을 만들고 있다. 다만 이 속에서 인물들은 성(sexuality) 각기 다르게 교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춘향은 양반층의 성적 도덕관을 갈망했고, 사또는 양반의 도덕관을 버리고 정치적인 힘을 이용해서라도 한 여성을 성적으로 굴복시키려 했다는 사실이다. 이에 비해 이몽룡은 서경덕 황진이의 관계와 유사한 관계를 형성했을 것이다. 이것은 유교화 된 조선사회의 성에 대한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마크 피터슨, 한국의 성 ― 조선사회와 민속문학의 몇 가지 측면에 대한 간략한 검토, 국학연구, vol., no.14, 2009, pp. 151-182 (32 pages) #

조선이 폐쇄적으로 변한 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쳐 명나라의 멸망 이후 조선이 중화를 계승했다며 소중화 사상을 시작으로 성리학이 더욱 교조화되고, 강성해지면서 현대 한국인들이 알고 있는 남녀칠세부동석, 곧 남녀 간의 엄격한 분리가 일어났고, 조선의 성리학을 논하는 주류파가 심각하게 보수화되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융통성이 있었지만 점차 환국을 이유로 붕당을 우선시하는 성향이 강해지면서 성리학과 유교를 사이비 종교처럼 자신에게 유리하게만 해석하는데 집중되었기에 타 학문과의 융합은 물론 새로운 해석을 모조리 거부하는 폐쇄적인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당시 임진왜란과 두 차례의 호란으로 인해 남성 인구가 부족해지면서 자연스럽게 남성의 성적 지위권이 올라가면서 양반 이하 피지배 계층에까지 성리학적 엄숙한 예법과 관념이 정착되었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 맞추어 '남자와 여자는 서로 하는 일이 정해져 있다'는 의미일 뿐인 음양사상에 남존여비라는 근거없는 사상을 넣어서는 이를 아예 합리화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은 중기까지만 해도 드물지 않았던 여성의 재가와 이혼이 후기로 가면 금기시되었다. 양반층이 백성들에게 충효를 각인시키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칭송한 것이 바로 '열녀'인데 쉽게 말해서 어린 나이에 결혼해서 20대에 남편이 요절하더라도 다른 남자 찾을 생각도 하지 말고, 혼인을 안 했더라도 함부로 외간 남자와 관계를 맺으면 안 된다 하는 식으로 여자는 어찌 됐든 얌전하게 정조를 지키며 자신의 욕구를 숨기고 남자를 위해 희생할 것을 강요한 것이다.

이러한 요인들이 합쳐진 결과로, 현대 한국에서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성문화가 자유와 억압이 충돌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인터넷상의 도시전설로 사실 조선시대와 유교는 성에 개방적이었으며, 논어를 마치고 서당에서 보정이라는 성교육 과정이 있었으며, 춘화로 성교육을 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단국대 동양학 연구교수에 의하면 사실이 아니며, 조선시대에는 성에 대하여 억압하고 금기시하는 교육만이 존재했으며, 앞에서는 성을 금기시하면서도 뒤로는 성에 탐닉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고착화했다고 한다. #
절제하지 않은 성적 욕망의 분출은 유학의 예교로 보면 금기다. 하지만 양반 사대부들은 혈족을 유지하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한편으로는 쾌락과 유흥을 위해 성적 향유를 하였다. 사실 이는 유학적 예교가 제시한 금기의 위반이다. 양반사대부는 겉으로 ‘存天理(존천리), 滅人欲(거인욕)’의 거창한 명분과 예교의 외피를 뒤집어쓰고 절제된 성적 욕망을 강조하지만, 안으로 성적 욕망의 금기를 위반하는 시소게임을 하였다. 또한 양반 사대부들은 유학 이념과 현실생활에서의 욕망의 모순을 명분을 내세워 은폐하고, 한편에서는 유교적 예교를 허구화시켰다. 양반사대부들은 蓄妾制度(축첩제도)를 합리화하고, 官妓制度(관기제도)를 제도화하여 성적 욕망을 해소한 반면, 여성에게 오직 남녀 분별의 예교를 통해 성적 욕망을 가두어 두고 금기시한 것이 그 단적인예다. 이처럼 조선조 사회의 성문화는 모순을 보여주고 있었다.
진재교, 조선조 후기 문예공간에서 성적 욕망의 빛과 그늘 -예교, 금기와 위반의 拮抗과 그 辨證法-vol., no.42, 2008, pp. 87-126 (40 pages) #

또한 인터넷상에서 한국 사회가 성에 대하여 보수적인 게 기독교 때문이며, 기독교 신자인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초대 국회부터 기독교가 국회의원의 60%나 되어서 기독교에 입각하여 입법활동을 하였기 때문이라는 루머도 떠도는데, 기독교 역시 금욕주의적인 요소가 있지만, 한국은 기독교 문화권이 아니었으며, 이승만 정부 시기, 제헌의회 시절에도 기독교 국회의원은 24%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에, 기본적인 통계조차 틀린 주장이다. # 오히려 한국 법률은 유교적 문화전통에 근거하여 만들어졌다고 한다. # 또한 한국에 전래된 기독교는 당대 한국의 강력한 남녀칠세부동석 사상의 영향으로 초기교회를 ㄱ자 형태로 건축하여 남자와 여자를 분리되게 만들었는데, 이는 유교적 문화가 오히려 교회에까지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 한국은 세계적으로도 러시아와 함께 술에 관대하고 우호적인 나라이며, # 명절에는 전 국민이 조상신에게 제사를 지내러 민족 대이동을 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만약 한국사회를 기독교 문화가 지배했다면, 진작에 제사는 금기시되었을 것이며, 기독교 문화권인 미국처럼 길거리나 공개된 장소에서 술병을 보이게 들고 다니면 구치소에 끌려가고, 일반적인 마트에서는 술을 판매하지 않는 등, 음주문화에 매우 적대적이었을 것이다. 한국 문화에서 발견되는 성에 대한 금기시와, 술에 관대하고 우호적인 음주문화 #, 명절에 제사를 지내는 모습은 유교 성리학적 전통에서 기반한 것이 맞다.

비슷한 문화권으로 중국의 경우는 유교 문화 때문보다는[50] 일당 독재로 인한 중국 공산당의 극단화, 보수화의 영향이 훨씬 더 크다.

유교 문화가 어느 정도 남아있는 싱가포르의 경우도 문화 통제라는 부분에서는 중국에 지지 않을 정도로 심각하다.

이슬람 국가들의 경우에는 종교성에 기반한 탄압이 주를 이룬다. 사실 이슬람은 종교가 초기에는 현대처럼 억압적이지 않고 성문화에 비교적 개방적이었다. 그러나 후기로 가면서 이슬람 근본주의가 대두되고 성적 억압적 성향을 보이면서 대표적인 성문화 탄압 성향을 띄게 되었다. 이슬람이 주류 종교인 동남아 일부 국가들도 이러한 성향이 강하며 비이슬람 동남아 국가인 태국, 미얀마, 캄보디아, 동티모르도 성적 억압이 심각하다.

10. 결론

이 문서의 목적은 소위 말하는 유교의 영향 때문에 한국 사회가 문제다, 하는 부분이 과연 맞는지 아닌지 살피고, 그를 통해서 그 문제점을 더욱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다. 그를 통해서 개별적인 부분에서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말하는 어떤 주장의 논거를 검증하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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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양의 왕권신수설과 비슷한 면이 있다. [2]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국교로 공인되고나서 변질되었고, 불교 동양 군주들에 의해 중앙집권화, 권력정당화 수단으로 악용되었다. [3] 다만 이점에 대해 면신례에서 소고기를 먹은 관료들만 성토하기는 좀 그런게 조선시대는 위아래 할 것 없이 금지됐음에도 소고기를 먹었다. 물론 모범을 보여야할 양반 사대부들과 관료들이 대놓고 공식석상에서 소고기를 먹은건 결코 잘한게 아니다. [4] 지금이야 꿀하고 식용유는 싼 편이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5] 예문관 검열에 제수된 조위가 면신례 하다가 기생이 맞아죽는 살인이 발생하고 소까지 잡아서 소고기를 처먹으며 잔치 벌인걸 넘어갔다. [6] 정창손은 최만리와 함께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하는 상소를 세종에게 올린 인물이다. 위 문장의 ‘언문’은 옛날에 한글을 이르던 말이다. 즉, 저 말의 뜻은 “충신, 효자, 열녀(유교 교리를 훌륭히 이행하는 사람들)가 되는 것은 사람의 자질에 달려 있다. (훈민정음으로 번역한) 삼강행실을 보급한다고 해서 백성들이 다 유교를 본받고 충신, 효자, 열녀가 되지는 않는다.”이다. 유교를 따르는 게 사람의 자질에 달려 있다는 말은 “백성들은 자질이 부족하여 유교를 따르지 못하니 자질이 충만해서 유교에 충실한 우리 양반들이 백성들을 교화시켜야 한다.”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또한 유교의 교리는 언문으로는 배울 수 없고 유교의 본고장인 중국의 문자인 한자로만 배울 수 있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당시 양반들에게 만연했던 선민사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7] 일본의 경우 에도시대 전후. 유교 자체는 5~6세기에 들어왔지만, 일본 사회에 폭넓게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이후다. [8] 《맹자》만장 하3 : 萬章問曰 敢問友 孟子曰 不挾長 不挾貴 不挾兄弟而友 友也者 友其德也 不可以有挾也 [9] 대표적으로 군군신신부부자자가 있다. 뜻이 군주는 군주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즉 군주, 신하. 아버지, 자식 모두 그에 걸맞게 행동해야 그에 걸맞는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10] 하지만 문제는 애초부터 전제군주제이다보니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왕마다 달랐다. 영조도 조금만 잘못 간언하면 죽일듯이 화를 내어 위협하거나 유배를 보내기도 했으며 사도세자 살해하는것도 신하들의 반대에도 독단적으로 하였고 태종 사관을 처벌한 경우도 있었고 연산군과 광해군은 아예 막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연산군 광해군처럼 막나가면 이란 역풍을 맞지만 문제는 폐위당한 왕이 2명에 불과할 정도로 조선의 왕권이 강한터라 왕들이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11] 중국 당나라 시기 대표적인 여학사(女學士)로 일컬어졌던 여성 유학자. 당시 여계(女誡)와 함께 여자들의 기본 수신서로서 널리 읽혔던 여논어를 저술하였다. [12] 후기고 뭐고 할거 없이 인수대비, 문정왕후는 각종 유교 서적을 읽었던 데다가 특히 인수대비는 여성들을 위한 성리학 저작인 내훈을 지을정도였으니 성리학자라 할 만했다. 한 나라의 대비조차 성리학자가 될 수 있을 정도였다면 그걸로 설명 끝. [13] 그것도 노론의 명문가 [14] 참고로 현대의 요리사들도 프랜차이즈 정도의 기업 규모로 가면 종사자는 여전히 남성이 많다. [15] 가수저라 혹은 설고라고 한다. [16] 당시의 식료로 사용되는 곡물로서는 카스테라를 만들 수 없었다. 게다가 카스테라에 사용되는 우유, 설탕, 계란은 당시 매우 귀한 식재료였다. 이한의 저서인 '요리하는 조선 남자'에서는 다른 원인도 제시하였는데, 당시 카스테라를 만드는 것을 시도했다는 기록이나 방법 중 난백에 거품을 치는 공립법이나 별립법이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냥 재료들을 섞고 시루로 찌니 달디 단 계란떡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서술 했다. [17] 여기에 언급된 개고기 조리법은 다음과 같다.
호마(들깨) 한 말을 이 편에 부쳐드리니 볶아서 가루로 만드십시오. 채소밭에 파가 있고 방에 식초가 있으면 이제 를 잡을 차례입니다. 삶는 법을 말씀드리자면, 우선 삶기전에 티끌이 묻지 않도록 개를 기둥에 달아놓고 껍질을 벗깁니다. 창자 위장은 물에 씻습니다. 그러나 그 외에는 절대로 씻지 말고 곧장 가마솥 속에 넣어서 바로 맑은 물로 삶습니다. 그후 고기를 꺼내서 식초ㆍ장ㆍ 기름ㆍ파로 양념을 하고 취향에 따라 볶기도 하고 혹은 삶으면 됩니다. 이렇게 해야 훌륭한 맛이 납니다.
[18] 설령 유별난 양반들의 행적이라면 당연히 유별난 일이라는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그 식탐으로 맹비난을 산 허균조차 그런 소리는 안 들었다. 단지 탐식가라 욕먹었을 뿐 허균이 당시 시대 기준으로는 심각한 이단아임을 감안해보면 그를 철저히 까내리지 못해 안달이었을 텐데 정작 탐식가라고만 욕할 뿐 요리를 했네 마네의 욕은 없다. [19] 이렇게 떠난 대령숙수들은 대개 민간의 요정(음식점)에 취직하였다. [20] 왕족을 가까이 모시는 지밀, 침방, 수방의 대우가 어땠는지 생각해보자. 이 세 부서는 견습나인조차 생각시라 불리며 새앙머리를 하고 특정한 댕기를 드려 제 소속을 나타냈다. 대장금에서 나온 것과 달리 수라간(소주방)은 견습나인이 생각시라 불릴 수도, 제조상궁이 나올 수도 없는 부서였다. [21] 가뭄 등 특별한 사정이 생겨서 왕이 식사에 올라가는 반찬을 줄이는 일 등이 있긴 하지만 그것도 왕 한정 [22] 가령 아내가 대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었거나 연로한 부모님이 있는데 죽은 경우 [23] 부모에 대해 광신적이 아니더라도, 남성으로서 체면을 차리느라 부모를 고생시키는 것은 당대에서나 지금에서나 좋게 평가받지는 못한다. [24]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자네"라는 말은 부부가 서로를 부르는 말이기도 했다. [25] 그나마 이를 거부하던 양반가도 적지 않았고, 차등을 둔다 하더라도 자식 취급은 하는등 딸을 하대하는 기록이 있긴 하지만, 딸의 편을 들어주던 기록도 적지않다. [26] 즉,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흥부놀부 이야기는 놀부가 욕심이 많아 재산을 독차지 한 것이 아닌, 장자가 재산 상속을 받던 시대상에 대한 고증이다. [27] 공자의 수많은 제자 가운데 자공이 상인 출신이긴 했지만 어쨌든 그 본인도 상인의 급을 그리 높게 여기진 않았다. [28] 코미디 영화이기는 하지만 전우치에서 현대 사회에 깨어난 전우치와 3도사의 대화에서 이런 사상이 드러난다. 왕이 없는데 누가 백성을 먹여살리냐는 전우치의 질문에 막내 도사는 "기업... 그러니까 상인들이 먹여살립니다."라고 대답했고, 이때 전우치가 "상인들은 자기들 이익만 챙기는 족속들인데 그런 자들이 백성들을 먹여 살린다니 말세가 다 왔구나..."라는 식으로 독백한다. 흥미롭지만 유럽에도 적으나마 이런 관점이 있었는데, 클래런스 대로의 책 "Crime and Criminals: Address to the prisoners in the cook county jail" 이 대표적인 예다. [29] 공업 분야도 유대인의 비중이 상당히 높다. [30] 스페인, 프랑스 등. [31] 영국에서. 그리고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건 표어는 스미스는 지나가듯이 언급한 정도인데, 이 슬로건의 완벽한 함축성과, 이 표어의 은유에 내재하는 세계관이 지닌 미적인 아름다움, 그리고 이 제창이 자신들에게 가져다 줄 이로움에 감명을 받은 유산 계급들이 입이 닳듯이 언급했다. [32] 정작 애덤 스미스가 극도로 경계한 한 집단에 의한 재화 독점을 국가에서 유산 계급이 그 자리를 차지하여 보이지 않는 손이란 의미가 변질되었다. [33] 이쪽은 지형을 보면 알겠지만 농경으로 먹고 사는 거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 사우디의 경우 현대에 돈을 엄청나게 처발라가며 농업 생산에 나서고 있지만 그렇다고 만족할만한 양이 아니다. [34] 더욱이 유럽 끝 러시아에 당도하기까지 약 100년이 걸렸다. [35] 일본은 빨리 잡아도 19세기 후반이었고, 중국은 청말 민국초의 혼란과 국공내전, 공산화 직후의 혼란 때문에 공업화가 더 늦었다. 한국은 1960년대부터 산업화가 시작되었다. [36] 특히 이런 식으로 양명학 어쩌고 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은 조선을 비판하는 일군의 인터넷 사상가들이 있는데, 대개 그들이 주로 이용하는 커뮤니티의 주장, 즉 한반도에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였다는 공로를 지나칠 정도로 찬양하는 정치색과 통하는 바가 있어서 이런 주장을 많이 한다. 그러나 이들과 대화해 보면 왕양명의 책 한 글자도 읽어보지 않고 양명학을 받아들이지 않은 조선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37] 당장에 조선 주변국들은 조선이 상대할 수 없거나 중국의 조공국이었다. 여기에 지형적으로도 중국과 일본에 포위되어 있었다. 여기에 노예 문제는 노예가 늘어봐야 국가에 좋을게 없었다. [38] 면직물 말고 다른 산업, 공업, 상업이 잉글랜드에서 발달하지 않은건 아닌데 산업혁명에 있어서 면직업을 뺀 다른 산업이 고려할 만한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 이름있는 학자는 없다. [39] 그나마 중국이 자국의 도자기, 비단, 차로 영국과의 교역에서 엄청난 흑자를 올렸다. 그로 인해 엄청난 은이 중국으로 유입되자 영국이 아편을 팔아야 했다. 아편 판매는 좋지 않은 선택이었고 아편전쟁의 원인이 되었지만 만 달리 보면 당시 영국의 사정은 그거라도 팔아서 부의 유출을 막아야 할 상황이었다. [40] 독재와 종교적 억압은 견디면 된다지만 기근은 신체적 한계 때문에 견딘다고 견딜 수 있는게 아니다. [41] 당장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로 넘어갈 때를 생각하면 간단하다. 갓 농사를 지을 때는 완성도가 상대적으로 낮았던 첨저형 토기가 만들어지다, 농업이 발전하여 청동기로 넘어가면서 온갖 복잡한 구조의 첨저형 토기가 만들어지고, 청동기가 추가되기 시작하였다. [42] 여기에 한국보다 넒은 국토와 더 많은 자원을 가진 것도 있었다. [43] 1960~1970년대에는 대학만 들어가도 수준이었지만, 대학이 점차 늘어나 이후에는 명문대 한정이 되었다. 물론 현대에는 명문대 타이틀만으로도 안 되지만. [44] 당장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절대적인 기준이었던 주자가례에도 없다. 애시당초 주자는 제사 자체에도 부정적이었지만 정적들의 비난에 어쩔 수 없이 제사를 인정한 편에 가깝다. [45] 퇴계 이황 종가에서 차리는 설 차례상을 보면 과일 3~4종류를 1개씩 총 1접시, 전(두부부침) 1접시, 건어물포 하나, 떡국은 모시는 조상 1명당 1그릇이 끝이다. 민간에서는 상다리가 휘어지다못해 상차리는 사람들의 몸과 재정이 휘어지는데, 정작 한국 유교의 대표격인 이황 선생의 종가에서는 저렇게 간소하다. 애초에 저 떡국도 원래 차 한 잔이었던것을 떡국으로 대신한 것 뿐이니, 실제로는 더 간소하다는 걸 알 수 있다. [46] 단적인 예로, 제주도 지역에서는 제사상에 을 올린다. 제주도의 지리 특성상 쌀을 구하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47] 단, 군사훈련에 가까운 기마식 격구가 아니라 정구식 격구를 주로 했다. [48] 그러나 동양에서의 유교의 포지션을 서구에서는 기독교가 맡아왔기에, 서구에서도 문화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포르노와 동성애 등 개방적인 성문화를 옹호하지 않는다. 특히 성을 엄격하게 관리하는 건 기독교도 마찬가지며 절대 유교에 꿇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서구권 보수 기독교세력에서도 성인 포르노까지 금지하는데 찬성하는것은 극소수이며 이미 70 80년대에 안티포르노 운동세력과 함께 소멸했다. [49] 다만 중국은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유교적 요소가 많이 사라졌다. 이는 후술. [50] 문화대혁명으로 공자 묘를 파헤친 것을 생각해보자. [51] 단, 사회보수주의와 변질된 유교적 전통은 동의어가 아니다. 사회보수주의의 부정적 측면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A] 이 경우는 변질된 유교적 전통이 원인이 되는 사례다. [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