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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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령 동인도 Nederlands Oost-Indië[1] Hindia-Belanda | Indonesia[2] |
||
네덜란드의 식민지 | ||
<rowcolor=#fff> 국기 | 휘장 | |
1800년~1949년[3] | ||
성립 이전 | 독립 이후 | |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 인도네시아 합중공화국 | |
네덜란드령 뉴기니 | ||
<colbgcolor=#21468b><colcolor=#fff> 위치 | 인도네시아 제도 | |
수도 | 바타비아 | |
정치체제 | 네덜란드 식민지 | |
정부수반 | 네덜란드 총독[4] | |
언어 |
네덜란드어(공식어, 행정어) 말레이어(공용어[5]) 자바어, 순다어 등 지방어 민남어, 객가어(화인 공동체) |
|
인구 | 60,727,233명(1930) |
[clearfix]
1. 개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해체되고 네덜란드가 1800년[6]부터 인도네시아가 독립한 1949년까지 통치한 동인도 식민지를 말한다.[7]원래 17세기와 18세기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관리하는 아시아·아프리카 식민지는 동인도 외에 인도 해안 지대 일부와 스리랑카 서부( 네덜란드령 인도), 남아프리카의 케이프 식민지 등[8]이 있었으나,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영국과의 전쟁과 세력 경쟁, 나폴레옹 전쟁 등을 거치며 네덜란드령 인도와 케이프 식민지는 모두 영국령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세기 초부터 네덜란드령 동인도는 네덜란드가 유일하게 보유한 거대 식민지이자 가장 가치있는 식민지가 되었으며, 네덜란드의 식민지 관리 역량은 이곳으로 온전히 집중되었다. 이후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까지 향신료와 환금 작물 무역에서 네덜란드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2. 상징
2.1. 국호
대항해시대 이래 사용되던 '동인도'(네덜란드어: Oost-Indië, 영어: East Indies, 마인어: Hindia (Timur)[9])라는 개념은 좁은 의미로는 지리적으로 동남아시아 도서 지역 전체, 대표적으로 인도네시아 군도, 필리핀 군도 등을 포함하고 인도차이나 반도도 때로 포함하였고, 포함하지 않는 의미로 사용할 경우 이를 종종 '동인도 제도'라고도 했다. 한편 넓은 의미의 '동인도'는 카리브 지역의 '서인도'와 대비되어, 인도 자체와 인도 문화의 영향을 받은 앞서 열거한 동남아시아 지역을 포괄할 수도 있었다. 상기한 어떠한 경우에도 지리적으로 '동인도'에 멜라네시아에 속하는 뉴기니섬 지역은 포함하지 않았다.[10] 그러나 현대에 관용적으로 '네덜란드령 동인도'라고 하면 네덜란드가 영유한 동인도 식민지와 서뉴기니 지역을 공히 가리키고, '네덜란드령 뉴기니(니우하위네아)'는 대개 1949년 인도네시아의 독립으로 분리된 이후부터 1963년 뉴욕협정 이전까자의 서뉴기니를 뜻한다.3. 역사
자세한 내용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역사 문서 참고하십시오.4. 경제
19세기 말 자유주의 시대부터 네덜란드령 동인도 지역에서는 석유가 생산되기 시작하였다. 수마트라 북부의 랑캇(Langkat) 지역에서 1883년 네덜란드인 사업가 아일코 얀스 제일커르(Aeilko Jans Zijlker, 1840–1890)가 초보적인 원유 시추를 시작한 이래,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1880년대 말부터 수마트라 북부 지역에서 어느 정도 경제성이 있는 방식으로 원유가 생산되기 시작하였다. 제일커르의 선구적 시도를 바탕으로 동인도의 석유 사업을 위해 1890년 네덜란드 왕립 동인도 석유 탐사 회사(이하 KNMEP, Koninklijke Maatschappij tot Exploitatie van Petroleumbronnen in Nederlandsch-Indie)가 아우휘스트 케슬러르(August Kessler), 헨리 데테르딩(Henri Deterding), 휘호 라우돈(Hugo Loudon)에 의해 창립되었다.동인도에서 1890년대 케슬러르 등의 수완과 네덜란드 정부의 후원에 힘입어 KNMEP의 사업은 성공적으로 확장되었다. 초기에는 수마트라에서 사업을 진행하였는데, 1890년대에는 네덜란드령 보르네오(칼리만탄) 동부 발릭파판 등지에서도 석유가 발견되었으며, 1901년에는 KNMEP도 칼리만탄 지역에서 석유 탐사 및 시추를 시작하게 되었다. KNMEP는 1900년 전후 중국과 인도 각지로도 석유를 수출하게 되었다. KNMEP는 곧 더 큰 네덜란드 왕립 석유회사(Koninklijke Nederlandse Petroleum Maatschappij)의 일부가 되었다.
수마트라와 보르네오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탐사를 거쳐 상당한 규모로 원유가 매장된 곳으로 밝혀졌다. 20세기 초 서구 각국의 자동차 산업 발달에 힘입어 동인도의 석유에 대한 수요가 폭증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네덜란드 외에도 영국, 미국, 일본 등 다양한 나라의 석유 기업이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석유 산업에 진출하였다. 이 가운데 가장 성공적이고 규모가 컸던 것은 바로 네덜란드 왕립 석유회사와 영국의 셸(Shell)이 1907년에 합병하여 설립한 로열 더치 쉘(Royal Dutch Shell)이었다. 로열 더치 쉘 자체도 유럽과 북미에서 수많은 다국적 투자자를 끌어들였고, 동인도 석유 사업의 국제적 성격에 일조하였다. 석유 사업은 활황이었으며, 동인도 내 수마트라와 보르네오의 원유는 세계 각지로 수출되었다.
원유 외에 동인도에서는 동인도의 기후에 적합한 다양한 상품 작물도 재배되었고 여러 광물도 수출용으로 채굴되었다. 특히 수출 상품으로서 주요했던 것은 고무, 설탕, 담배, 주석, 커피 등이었다. 윤리정책 시대 특별히 상품 가치가 높은 광물이 채굴되지 않는 자바에서는 대신 수출용으로 설탕이 생산되었으며, 동인도에서 수출용 설탕과 카사바는 거의 자바와 마두라에서만 생산되었다. 윤리정책 시대 자바는 설탕 산업의 발달로 인해 1920년대 세계에서 가장 유력한 설탕 생산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자바 밖에서 생산되던 고무, 커피 등에 비해 자바의 설탕은 과잉 생산 상태였고, 생산 과잉으로 가격이 하락하여 1920년대와 1930년대를 거치면서 수출량이 감소하였다. 자바의 산업적 농업은 수마트라, 보르네오의 석유 사업이나 산업적 농업이 투자 면에서 국제적인 성격을 띠었던 것에 반하여 거의 네덜란드 본국에서 투자된 자본으로 발달하였다.
팜유는 오늘날 인도네시아의 대표 수출품 중 하나이며, 인도네시아는 말레이시아를 제친 2007년 이래로 세계 1위 팜유 생산국이자 2010년대 기준 세계 팜유 생산량의 약 절반가량을 담당한다. 원래 19세기까지 팜유는 주로 서아프리카에서 생산되었으며, 19세기 자바에 시험적으로 소규모 플랜테이션이 조성된 적은 있지만 경제성이 불확실해 당시 대규모 생산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대형 팜유 플랜테이션은 1911년에 벨기에 회사가 처음 수마트라 지역에 조성하였다. 동인도에서 팜유 생산은 식민지 시대에 수마트라에서 꾸준히 증가하였고, 비록 후발 주자였지만 동인도의 팜유 생산자들은 신기술을 적극 도입하여 서아프리카 플랜테이션보다 높은 생산성을 달성하였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는 윤리정책 시대가 끝나갈 때까지 석유나 토목 관련 산업을 제외하고는 공업화가 그다지 진척되지 못했고, 도시화율도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경제는 거의 농업과 광업 및 그 초보적 가공 산업으로 가동되었다. 전통 시대의 수공업은 대체로 식민지 시대에 보존되었으나 특성상 크게 융성하지 못했다. 윤리정책 시대 일부 대도시, 즉 바타비아, 수라바야, 반둥, 스마랑, 메단, 마카사르 등에서는 공장이 세워지고 공업이 어느 정도 발달하였으나, 동인도 경제의 전체적 구조에 미치는 효과는 크지 않았다.
앵거스 매디슨(Angus Maddison)의 추계[11]에 따르면, 1990년 국제 달러 구매력(PPP) 기준, 1900년 네덜란드령 동인도(인도네시아)의 합계 GDP 추정치는 약 317억 4800만 달러로, 331억 6400만 달러로 추정된 스페인과 비슷하고, 176억 400만 달러로 추정된 네덜란드 본토의 약 2배 규모에 해당하였다. 윤리정책 시대가 끝나갈 시점이자 나치의 네덜란드 침공(1940년 5월)이 있기 직전인 1939년,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GDP 추정치는 808억 6100만 달러, 네덜란드 본토는 486억 8700만 달러였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GDP는 상당히 증가한 것으로 1939년 스페인(488억 5600만 달러)을 훨씬 상회하였고, 단순 계산상으로는 네덜란드와 스웨덴을 합친 수준에 필적하였다. 그러나 여러 지표에 따르면 생활 수준의 향상은 윤리정책 시대 비록 19세기에 비해 어느 정도 이루어지긴 하였으나 완만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5. 행정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행정 제도와 행정 구역 분류는 19세기의 팽창기와 20세기 전반의 자치권 확대기를 거치며 여러 차례 개편되었다. 특히 1905년과 1922년의 법안을 통해 군 단위까지 지방 참사회가 생겨나기 시작하여 지방 자치권이 점점 향상되었다. 군 단위에서는 많은 경우 인민참사회에서와 유사하게 인종별로 세 집단(혼혈/유럽인, 토착민, 화인 및 기타 아시아인[12])에서 정해진 수의 대표자가 군 참사회에서 각각의 공동체를 대표하였다.20세기 전반 기준으로 네덜란드의 통치 체제는 기본적으로 상부 행정 단위는 식민 정부 관료가 직접 관리하고, 하부 행정 단위는 토착 동인도인에게 맡겨 자치를 수행하도록 하는 이중 구조였다. 자바에서는 중간 행정 단위까지 이러한 토착민 자치 체제가 진전되었고, 그 외의 지역에서는 토착민의 자치가 하부 단위에 국한되었다. 행정 체계에서 마지막으로 주요한 개편이 이루어진 것은 1938년인데, 이때 기준으로 자바의 행정 구역은 다음의 여섯 단계로 나뉘었다.
행정 단위 | 단위의 장 | 통치 형태 |
주 (Provincie, Gouvernement) | 주지사 (Gouverneur) | 식민 관료 통치 |
부(Residentie) / 지구 (Afdeling) | 부지사 (통감, Resident) | 식민 관료 통치 |
군 (Regentschap) | 군수 (Regent) | 토착민 자치 |
구 (District) | 구장 (Wedana) | 토착민 자치 |
소구 (Onderdistrict) | 구장보 (Assistent-wedana) | 토착민 자치 |
촌 (Desa) | 촌장 (Desahoofd) | 토착민 자치 |
자바 외 다른 섬(수마트라, 보르네오, 소순다 열도, 술라웨시, 말루쿠 제도, 서뉴기니)은 약간 다른 행정 구역으로 나뉘었다.
행정 단위 | 단위의 장 | 통치 형태 |
주 (Gouvernement) | 주지사 (Gouverneur) | 식민 관료 통치 |
부 (Residentie) | 부지사 (Resident) | 식민 관료 통치 |
지구 (Afdeling) | 부지사보 (Assistent-resident) | 식민 관료 통치 |
소지구 (Onderafdeling) | 식민 관료 통치 | |
구 (District) | 토착민 자치 |
대체로 주지사와 부지사는 유럽계 또는 혼혈이 차지하였는데, 주지사는 산하 각 부의 부지사들 외에 비서관과 행정 관료들의 보좌를 받았다. 군(말레이어로는 'kaboepaten') 단위에는 토착민 군수(말레이어로는 'boepati')이 있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들이 군의 각종 업무를 보고받고 군 참사회 의장으로서 부군수(patih)의 보좌를 받으며 군의 사무를 처리하였다.
이러한 행정 체계와 별도로 일부 도시는 독립적인 지방자치체로 취급받아 시 참사회(gemeenteraad)와 시장(burgemeester)[13]이 있었다. 최초로 1903년에 바타비아 시 참사회가 창설되었으며, 1916년부터는 바타비아 시장이 임명되었다. 바위텐조르흐(오늘날의 보고르), 반둥, 수라바야, 스마랑, 파당, 팔렘방, 메단, 마카사르, 마나도, 암보이나(오늘날의 암본) 등지에도 1910년대와 1920년대를 거쳐 시 참사회와 시장이 생겼다. 일부 도시는 시 참사회만 있고 시장은 없었다.
이처럼 하부 행정 단위에 어느 정도의 자치권이 주어지기는 하였으나, 윤리정책 시기 초기인 1910년대부터 네덜란드령 동인도 정부는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효율적이고 높은 수준의 중앙 집권을 달성한 정부로 평가받았다. 동인도 정부는 마음만 먹으면 다양한 역내 정파들을 감시하거나 정파들에 간섭할 수 있었고, 역내에서 출판되는 출판물 등 문화 역시 원하면 엄격하게 검열할 역량이 있었다. 동인도 총독은 18세기와 19세기 초까지 적어도 직할령에서는 전제적인 권한을 보유하였으며, 19세기와 20세기에 차츰 권한이 제한되었지만 여전히 오늘날 대통령제 국가의 대통령보다도 막강한 권한을 보유하였다. 예를 들면, 총독은 동인도 체제의 질서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는 어떤 인물이든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유배를 보낼 수 있었다.
독립 후 인도네시아에서는 식민지 시대 자바의 행정 단위 체계를 약간의 수정을 거쳐 그대로 수용되었다. 현행 인도네시아의 행정 단위에는 부/지구에 해당하는 것이 없고, 주(provinsi)는 바로 군(kabupaten) 혹은 이와 동등한 시(kota)로 분할되며, 자바와 자바외 지역은 동일한 행정 단위가 적용되어 있다.
5.1. 토착민 고위 관료
동인도에서 근대적인 관료제는 단덜스(Herman Willem Daendels) 총독이 19세기 초 처음 도입했다. 중등교육 절에서 다룬 것처럼 토착민이 관료로 임용되는 가장 보편적인 루트는 토착민 관료학교(OSVIA)에 입학하고 졸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으로 임용된 토착민 하급 관료는 마치 대학 졸업장도 없이(OSVIA는 오늘날로 치면 기껏해야 학부 교양 수준의 교육까지만 제공했음) 9급 공무원으로 관료 생활을 시작한 격이어서 식민 정부에서 고위직으로 진출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식민 정부의 고위 관료는 이와는 완전히 별도의 트랙으로 레이던 대학교 등에서 식민지(주로 자바)의 역사와 문화, 행정, 법률 등에 대해 공부한 후 식민 정부에 임용된 유럽인들의 차지였다.식민지에서 고위 관료가 된 극소수의 토착민은 OSVIA 출신이 아니라, 그보다 더욱 우수한 성취로 일반 인문계 학교를 졸업하고 네덜란드 본토로 유학을 가 석사나 박사 등을 따고 네덜란드인들과 비교해도 손색 없는 전문성을 증명한 사람들이었다.
가장 성공적인 토착 관료로 꼽히는 인물은 압둘카디르 위조요아트모조라는 사람인데, 자바인 출신으로 네덜란드식 교육을 받고 본토 레이던 대학교에서 공부한 후 네덜란드 본토의 외무부 관료로 임용된 그는 네덜란드의 메카 주재 사우디아라비아 부영사(1933)를 역임했지만,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과정에서 네덜란드의 대 인도네시아 협상 대표로 부역해 평가가 좋지 않다. 부키팅기 출신의 모하맛 나집(Mohamad Nazief, 1900~1942)은 바타비아 법률대학을 졸업하고 본토 레이던 대학교에서 법학석사(Meester in de Rechten) 학위를 취득한 후 동인도로 돌아와 1928년 법률대학에서 박사 학위까지 취득했다. 당시 동인도 최고의 법률 전문가 중 하나였던 그는 박사를 마치자마자 바로 동인도 정부 재무부 관료로 발탁되었으며, 1937년에는 네덜란드령 동인도 정부 총서기까지 올랐다. 압둘 하킴(Abdoel Hakim)은 북수마트라 출신으로 자바 의학교를 졸업해 의사가 되었으며 파당 시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정치 활동을 시작하고, 1931년에는 파당 부시장으로 임명되었으며 네덜란드가 파당을 잠시 점령한 1947년에는 파당 시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고위 토착 관료는 극소수에 불과했고, 특히 동인도 정부의 주지사, 부지사, 시장 등 고위 행정직에는 독립전쟁기에 네덜란드가 일부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기 전까지 토착민의 진입이 사실상 차단되어 있었다.
6. 법률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는 적용 대상에 따라 적용 법률이 다른 다원주의적 법 체계가 가동되고 있었다. 법률이 제정되는 경우에도 유럽인과 토착민에 대해 다른 대우를 규정한 경우가 많았다. 동인도의 법률을 연구한 코르넬리스 판폴렌호번(Cornelis van Vollenhoven, 1874–1933) 이래 동인도를 다루는 네덜란드의 법학자들과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법률가들은 사비니(Friedrich Carl von Savigny, 1779–1861)적 역사법학에 큰 영향을 받아, 현지 관습법(adat)을 크게 중시하였다.유럽인들(과 1918년 이래 동인도 화인들)에게는 기본적으로 네덜란드 본토의 법률이 약간의 수정을 거쳐 적용되었다. 그러나 네덜란드령 동인도는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토착 국가들과 민족들을 하나로 묶은 구성체였으므로 지역에 따라 토착 관습이 크게 달랐고, 토착민에 대해서는 하부 행정 단위에서 네덜란드가 도입한 법률과 크게 충돌하지 않는 한 일차적으로 관습법(adat)이 적용되었다. 가령 자바로 치면 군(regentschap, kaboepaten) 단위에서 토착민 군수가 자바의 관습 내지 토착 법률 체계에 따라 판결을 내릴 수 있었다. 만약 문제 당사자가 관습법에 따른 판결에 승복하지 못할 경우 식민 정부의 상위 기구에 탄원하여 고등법원 등에 해당하는 상위 법원에서 (거의 전부 네덜란드인으로 구성된) 식민 통치 기구에 복무하는 고위 재판관에게 재판받을 수는 있었다. 이러한 체계는 상당히 복잡한 방식으로 작동하였는데, 법령 자체가 적용 지역에 따라 나뉘기도 했다. 가령 동인도의 형사소송법은 지역별로 두 종류가 있었으며 자바와 마두라에서는 HIR(Herziene Inlandsch Reglement)[14], 기타 동인도 지역에서는 Rbg(Rechtsreglement Buitengewesten)가 적용되었다. 자바에서는 이원적 체계가 오래 지속되어 잘 정착되었지만 새로 정복된 지역에서는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동인도의 최고 법원인 대법원은 수도 바타비아에 소재하였다.
독립 이후 인도네시아에서는 네덜란드 법률을 기본으로 하여 어느 정도 관습법의 요소를 가미한 일원적 법률 제도를 정비하여 전국적으로 적용하였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자치가 인정되는 아체 지역에서는 독자적인 법률 체계가 작동한다.
6.1. '농장주의 권리'
동인도의 대표적인 악법으로 1880년 제정된 벌칙(Poenale sanctie)의 법률이 있다. 이에 따르면, 플랜테이션 농장주는 농장 노동자에게 자신이 적합하다고 판단하는 방식으로 벌을 줄 수 있었는데, 죽이는 등 아주 심각한 방식을 사용하지 않는 한 농장주는 마음대로 노동자를 체벌할 수 있었고, 노동자에게 벌금을 물릴 수도 있었다. 벌을 주는 사유는 노동자의 나태함이나 무례함 등이었는데, 이에 따라 농장주는 사실상 자신의 플랜테이션에서 경영주이면서도 합법적으로 일종의 경찰이자 치안 판사가 되었다. 윤리정책 시대 벌칙법은 반복적으로 비판받았고 여러 차례 벌칙법을 폐지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벌칙법을 포함했던 쿨리법이 1915년 폐지되었음에도 끈질기게 관행적으로 유지되다가 최종적으로 1930년 모하맛 후스니 탐린이 인민참사회에서 어렵사리 합의를 이끌어낸 시점에야 완전히 폐기되었다.[15]벌칙법에 따른 농장주의 체벌은 주로 채찍으로 때리는 정도가 가장 흔했으나, 매우 끔찍하고 비인간적일 수도 있었다. 1902년, 메단의 네덜란드인 사회주의자 법률가 판덴브란트(J. van den Brand)가 보고한 바에 따르면, 한 농장주는 자신의 성적 요구를 거부한 15–16세의 자바인 여자 노동자에게 심각한 고문에 해당하는 방식[잔혹함_주의]으로 벌을 주었다. 이 사례는 네덜란드에 널리 알려져 본토의 인권 운동가들이 벌칙법 폐지 운동을 벌이는 데 기폭제가 되었다.
7. 교육
동인도 지배 체제가 안정된 19세기 중반부터 식민 정부가 서구식 교육 제도를 동인도에 도입하고 인프라를 확장하기는 했지만, 그 수혜를 받을 수 있는 계층은 동인도의 전체 인구를 기준으로 하면 식민지 시대가 끝날 때까지도 매우 한정적이었다. 19세기의 사정에 대해서는 역사 문서의 동인도의 자유주의 시대 절에 서술되어 있고, 이하에는 20세기 윤리정책 시대 위주로 서술한다. 독립 이후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교육에 대해서는 인도네시아/교육 문서에 서술되어 있다.윤리정책 시대, 토착민 관료학교(OSVIA)나 보고르 농학교 등에서 전문화된 중등교육을 받을 기회가 있는 토착민, 나아가 인문계 중등교육이나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토착민은 최소한 여유 있는 중류층 이상뿐이었다. 초등교육 인프라는 20세기 전반에 빠르게 확대되었으나, 여러 자료에 따르면 식민지 시대 말인 1930년대, 1940년대 초까지도 인근 지역의 태국이나 필리핀, 영국령 말라야보다 취학률 등의 지표가 꽤 낮았다. 영국령 버마와는 비슷했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보다는 높은 수준이었다.
7.1. 초등교육
윤리정책 시대에는 동인도인을 대상으로 한 초등, 중등교육 문호가 기존에 비해서는 대폭 확대되었다. 동인도 교육 제도는 다양한 종족 집단에 맞추어 각종 교육 기관들이 혼재된 양상을 띠었다. 초등교육 과정에서 기본적으로 유럽계 동인도인과 타 집단 가운데 엘리트는 유럽식 초등학교(Europeesche Lagere School, ELS, 7년)를 다녔다. 19세기에는 ELS에 거의 유럽계만 입학이 허용되었지만 (타 집단 상류층은 제한적으로 허용) 1903년부터는 토착민과 화인도 입학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곧 이하의 HIS, HCS가 별도로 설치되고 나서는 다시 비유럽계의 입학이 어느 정도 제한(역시 상류층은 제한적으로 허용)되었다. 토착민은 두 단계로 이루어진 토착어 초등학교(초급 3년, 중급 2년)를 다녔고, 많은 토착민의 교육은 여기서 끝났다. 토착어 초등학교는 도시 지역과 촌락 지역에 설치된 학교의 학제가 달랐으며, 촌락 지역에서는 실용적인 교육에 보다 많은 시간이 할애되었다.상급 학교 진학을 희망하는 토착민은 토착어 초등학교에서 말레이어 등으로 진행된 교육이 상급 학교에서 그다지 인정되지 않았으므로 다시 네덜란드어로 교육하는 토착민 초등학교[17] 또는 네덜란드어 전환학교(Hollandsch-Schakelschool)를 4~5년간 다녀[18] ELS 졸업생에 준하는 학력을 인정받고 졸업한 후에야 유럽계와 동등한 중등학교 취학 자격이 주어졌다. 한편 화인들은 별도의 화인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ELS 졸업 수준에 준하는 네덜란드어 교육을 받은 후 중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토착민 대상의 네덜란드어 초등학교(Hollandsch-Inlandsche School, HIS. 1907년부터 운영), 네덜란드어로 교육하는 화인 초등학교(Hollandsch-Chinesche School, HCS. 1908년부터 운영)는 20세기 초에 정식으로 식민 정부가 개설하여 운영하였다. ELS, HIS 또는 네덜란드어 전환학교를 졸업하지 않고 토착어 초등학교 5년 과정만 이수한 토착민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중등교육 기회는 토착어 초등교사 과정으로 진학하는 것뿐이었다.
7.2. 중등교육
네덜란드어로 진행되는 중등교육 과정은 기본적으로 민족 집단에 무관하게 동일한 학제가 적용되었다. 학교로는 유럽식 인문계 중등학교(중학교MULO: 3년, 고등학교AMS: 3년), 유럽식 고등시민학교(Hogere Burgerschool, 5년. 중고등 학제를 통합해 운영했던 준인문계 학교로, 졸업 후 대학 진학 가능[19]), 또는 특성화고등학교(공업, 농업, 상업 등 분야) 등이 있었다. 인문계 중등학교나 고등시민학교에서도 외국어를 가르쳤는데, 이때 외국어는 학생들이 유럽식 교양을 쌓을 것을 염두에 두고 동인도 토착어보다는 네덜란드어 외의 유럽어(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위주로 교육되었다.그러나 중등교육 과정에서도 민족 집단에 따라 다른 학제와 입시 기회를 적용하는 두 가지 학교가 있었다. 첫째로 토착민 관료학교(OSVIA)라는 곳이 있었는데, 토착민 대상으로 기초 교양, 식민 정부의 행정 실무 등을 위주로 중등교육 및 약간의 전문 고등교육에 준하는 수준의 교육을 제공한 학교로, 졸업생은 오늘날 한국으로 치면 9급 공무원 정도 되는 식민 정부 하급 관료로 임용될 수 있었다. 비교적 양질의 교육이 제공되었고, 식민지 시대에는 중등교육 이수자 자체도 소수였으므로 관료학교 졸업생도 어느 정도 지식인 대접을 받았다. 교육 연한은 원래 5년이었다 1908년부터 7년으로 연장되었다. 1927년부터 관료학교는 3년제 중등 토착민 관료학교(Middelbare Opleidingschool voor Inlandsche Ambetenaren, MOSVIA)로 전환되어 3년제 중학교(MULO)에 준하는 수준의 학력을 입학 조건으로 요구하게 되었다.[20]
다른 하나는 사범학교였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사범학교는 네덜란드어 초등교사를 양성하는 중학교~고등학교 수준의 중등교육 기관이었다. 이는 학제에 따라 토착민 네덜란드어 초등학교(HIS) 교사를 양성하는 일반 사범학교(Hollandsche Indische Kweekschool, HIK. 보통 사범학교라고 하면 이것을 가리킴), 화인 네덜란드어 초등학교(HCS) 교사를 양성하는 화인 사범학교(Hollandsche Chineesche Kweekschool, HCK), ELS 교사[21]를 양성하는 유럽식 사범학교(Europeesche Kweekschool, EKS)로 나뉘었다. 식민지 시대 EKS는 단 1개교만 수라바야에 있었다. 윤리정책 시대에는 원칙적으로 EKS에도 유럽계 외에도 토착민과 화인의 입학이 허용되었지만, 특별히 우수한 네덜란드어 실력을 요구했으므로 2/3에서 3/4 정도의 EKS 학생은 유럽계였다.
한편, 토착어 초등학교 과정을 5년간 이수했지만 네덜란드어 초등학교 졸업 자격은 없는 토착민에게 정식으로 열린 유일한 중등교육 기회는 토착어 초등교사 양성학교였다. 이는 두 종류의 학교로 나뉘었는데, '인민학교 사범과정'(Opleiding voor Volksschool Onderwijzers)으로 진학하여 2년 교육과정을 이수하면 3년제 토착어 초급 초등학교(인민학교, 즉 Volksschool 또는 Sekolah Rakjat) 교사 자격을 얻을 수 있었고, 인민학교 사범과정이 아닌 '토착어 사범학교'(Normaalschool)로 진학하여 4년 교육과정을 이수하면 토착어 중급 초등학교(4~5학년) 교사 자격이 주어졌다.
중등교사가 되려면 어느 정도의 고등교육을 이수해야 했다. 중등교원 자격은 두 가지 등급으로 나뉘어 3년제 인문계 중학교(MULO) 또는 고등시민학교 1~3학년 교사 자격에 해당하는 A유형과 3년제 인문계 고등학교(AMS) 또는 고등시민학교 1~5학년 교사 자격에 해당하는 B유형이 있었다. 중등교원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전문화된 전공 이수가 필요했는데, 가령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중등 과학교사 자격을 얻으려면 반둥 기술대학(이하 절에서 서술)으로 진학해 과학교사 과정을 이수하고 엄격한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22]
7.3. 독립 학교
근대적 학제와 별도로, 이슬람 종교학교 프산트렌이나 기독교 선교사들이 세운 기독교 초급 미션스쿨(토착어 교육)이 곳곳에 있었으며 이들 학교를 졸업하면 토착어 초등학교 졸업에 준하는 학력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이슬람 교육 기관의 전통이 긴 자바에서는, 비록 정식 중등교육 이수로 식민 정부가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각급 프산트렌에서 기초 교육 이수 후 심화된 이슬람 학문(아랍어, 쿠란, 하디스, 피끄흐[샤리아 법학], 이슬람 신학, 이슬람 논리학, 이슬람 수사학, 이슬람 철학) 위주의 전통 교육을 계속 받을 수도 있었다. 프산트렌은 윤리정책 시대에 지속적으로 늘어났으며 인도네시아 이슬람의 근대화에 따라 일부 프산트렌은 근대 교육 과목을 도입하기도 했다. 프산트렌은 독립 이후에도 유지되었고, 오늘날 인도네시아에는 일부 종교학교가 정식 중등학교로 인정되어 이슬람 교육과 근대 교육이 혼합된 특수한 중등교육 과정을 운영하는 곳도 많다.한편, 자바인 독립 운동가 및 개혁가 키 하자르 데완타라(Ki Hadjar Dewantara)는 식민 정부의 토착민에 대한 교육적 차별에 대항하여 1922년 욕야카르타에 '타만 시스와'(Taman Siswa, 학생의 정원)라는, 마리아 몬테소리, 타고르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독립 교육기관을 세우고 독립적 사상을 갖춘 토착민 학생들을 길러냈다.
7.4. 고등교육
윤리정책 시대 동인도에는 약간의 고등교육기관도 설립되었는데, 우선 기존의 자바 의학교가 1902년 정식 시설과 캠퍼스를 갖춘 의대로 개편되었고, 1913년 동인도 의학교(STOVIA)로 개칭되었는데 이는 인도네시아 대학교의 전신이다. 이는 1927년 의학대학(Geneeskundige Hogeschool)으로 다시 개편되었다. 의학대학 개편 이전, 동인도 의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하급 중등교육 이수, 즉 식민지 시대의 네덜란드어 중학교 졸업에 준하는 10년간의 교육 이수에 해당하는 학력이 필요했다. 동인도 의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상급 중등교육에 해당하는 교육부터 기초 의학 교육, 그리고 의학 내 세부 전공 교육까지 도합 9~10년에 걸친 교육과정을 거치면 각 전공에 따른 의사가 될 수 있었다. 의학대학 개편 이후에는 오늘날과 유사하게 상급 중등교육 이수(네덜란드어 고등학교 또는 고등시민학교 졸업)를 입학 조건으로 요구하게 되었다.이를 시작으로 반둥의 기술대학(Technische Hogeschool[23], 1920년 설립, 반둥 공과대학교의 전신), 바타비아의 법률대학(Rechts Hogeschool, 1924년 설립, 독립 후 인도네시아 대학교로 흡수됨)[24], 수라바야의 네덜란드령 동인도 의과대학(NIAS, 1913년 설립, 아이를랑가 대학교의 전신)과 동인도치의과대학(STOVIT, 1928년 설립, 독립 후 아이를랑가 대학교로 흡수됨), 보고르의 농업대학(Landbouw Hogeschool, 1940년 설립, 보고르 농과대학교의 전신[25]) 등이 생겼다. 하지만 종합대학은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는 설치되지 않았다.[26]
유학 경비를 지불할 수 있을 경우에 한해서지만, 이제 동인도인의 자제가 비교적 자유롭게 네덜란드 본국으로 유학을 가서 중등, 고등교육을 받을 수도 있게 되었다. 이것을 상징하는 첫 사례가 1901년 10월 레이던 대학교 인문학부에 등록한 판지 소스로카르토노(Raden Mas Pandji Sosrokartono)인데, 19세기에 동인도 토착민이 네덜란드 대학 부설 특별 과정(관료 양성 과정 등)이나 폴리테크닉에 등록한 경우는 있어도, 이름 높은 레이던 정규 과정에 등록한 경우는 이것이 처음이었다. 소스로카르토노는 1908년 3월 문학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1910년대 네덜란드와 유럽, 미국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며 출중한 언어 실력을 살려 국제연맹 통역을 맡기도 했다.[27]
소스로카르토노 이후 윤리정책 시대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토착민의 고등교육 유학과 근대적 영역으로의 진출이 이루어졌다. 결과적으로 노토 수로토(Noto Soeroto, 1888–1951, 레이던 대학교에서 법학 학사학위 취득)처럼 네덜란드어로 문학 작품을 쓰는 토착 동인도인 작가가 출현하거나 후세인 자야디닝랏(Hoessein Djajadiningrat, 1886–1960, 1913년 레이던 대학교에서 동인도 어문학으로 박사학위 취득), 삼 라툴랑이(Sam Ratulangi, 1890–1949, 1919년 취리히 대학교에서 수학 박사학위 취득) 등을 필두로 토착 동인도인 박사가 생겨나기도 했다.[28]
토착민 여성은 토착민 남성과도 달리 20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전반적으로 중등교육 및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가 매우 한정적이었으나, 극히 좁은 문호나마 이들에게 개방되기는 하였다.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 가운데는 군인의 딸로 태어나 토착민 여성 최초로 바타비아의 동인도 의학교를 정식으로 졸업하고 의사가 된 북술라웨시 미나하사인 출신의 마리 토마스(Marie Thomas, 1896–1966, 산부인과 전공으로 1922년 졸업)가 특히 유명하다. 동인도 의학교는 1911년까지만 해도 여학생을 받지 않았는데, 페미니스트이자 여성참정권론자로 저명한 알레타 헨리에터 야콥스(Aletta Henriëtte Jacobs, 1854–1929, 네덜란드 최초의 여성 의사)와 샤를로터 야콥스(Charlotte Jacobs, 1847–1916, 알레타의 언니, 네덜란드 최초의 여성 약사)의 노력으로 여학생의 입학 승인이 이루어지고, 동인도의 의대 여학생을 위한 장학 재단이 생겨났다. 이에 따라 마리 토마스는 동인도 의학교에 최초의 여학생으로 1912년 9월에 입학할 수 있었다. 마리 토마스 이후 두 번째 토착민 여학생 의대생인 아나 바라우(Anna Warouw, 1898–1979)는 1914년 입학하고 이비인후과 전공으로 1924년에 졸업하였다.
8. 문화
8.1. 문학
자세한 내용은 인도네시아 문학 문서의
기원
부분을
참고하십시오.8.2. 회화
자바에는 독자적인 회화 전통이 오래 전부터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특히 여러 장의 화려한 그림을 연속적으로 교체하며 설명을 곁들이는 와양 베베르(wayang beber) 극은 판지 설화 등 다양한 자바 혹은 인도의 이야기를 테마로 자바에서 마자파힛 제국 시대부터 상연되었으며, 그 원형은 10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초기에는 흑백의 도판을 사용하다가 14세기 후반부터 채색되기 시작하였다.[29] 와양 베베르를 위해 제작된 많은 16–18세기의 그림들도 오늘날 남아 있다. 장식적인 서적 제작 양식이 발달함에 따라 삽화가 풍부한 책들도 제작되었는데, 가령 18세기 후반에 제작된 《다마르 울란》(Serat Damar Wulan)에 실린 삽화는 당대의 자바 사회를 매력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 힌두 문화가 근현대까지 존속하며 마자파힛 제국 시대에서 직접 이어져 내려오는 시각 예술 전통을 간직한 발리에서는 19세기에도 카마산(Kamasan) 지역 양식의 회화 작품 등이 활발하게 제작되었으며 일부 벽화는 18세기나 그 이전으로 제작 연도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전통 회화나 미술은 여기서 상세히 다루지 않으며, 이하는 서구적 의미에서의 회화에 국한해 서술한다.1800년 전에도 유럽인이 동인도에 방문하여 동인도의 인물이나 풍경, 식생 등을 주제로 그린 그림은 남아 있으나, 인도네시아 군도에서 비유럽계 화가가 근대적 회화 제도에 처음으로 참여하게 된 것은 19세기 네덜란드령 동인도 체제하에서였다. 최초의 동인도 근대 화가로 꼽히는 인물은 아랍계 혼혈 자바인 라덴 살레(Raden Saleh Sjarif Boestaman, 1807–1880)로, 자바에 체류하던 벨기에인 화가가 살레의 재능을 알아보고 네덜란드에서 유학할 수 있도록 지원하여 살레는 이십 대에 당대 네덜란드에서 미술 교육을 받고 유럽과 동인도에서 화가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현대 인도네시아 미술사에서 라덴 살레는 19세기의 예외에 해당하며, 라덴 살레 이외의 비유럽계 19세기 근대 화가는 19세기 말 이전까지 매우 적다.
한편, 19세기에 라덴 살레 및 네덜란드 화가 프레데리퀴스 뒤하털(Fredericus van Rossum du Chattel, 1856–1917; 덴하흐 화파), 카럴 로데베이크 다커(Carel Lodewijk Dake, 1857–1918), 이사크 이스라엘스(Isaac Israëls, 1865–1934; 덴하흐 화파), 베이난트 오토 얀 니우엥캄프(Wijnand Otto Jan Nieuwenkamp, 1874–1950), 빌럼 판데르두스(Willem van der Does, 1889–1966), 네덜란드계 동인도 화가 헨리 판펠트하위전(Henry van Velthuijzen, 1881–1954), 레오나르뒤스 엘란트(Leonardus Eland, 1884–1952), 샤를 사이어르스(Charles Sayers, 1901–1943) 등에 의해 '모이 인디어'(Mooi Indië, '아름다운 동인도')라는 미술 사조가 생겨났다. 모이 인디어 화가들은 네덜란드령 동인도 각지(주로 자바나 발리)의 계곡, 언덕, 산, 숲 등 자연 풍경이나 논밭, 토착민 마을 등 시골 정경을 아름답고 평화롭게 묘사하였다.
초기에는 화풍으로 낭만주의, 사실주의, 자연주의 등의 영향이 짙었으나 이사크 이스라엘스나 빌럼 판데르두스 등이 활동한 20세기 초부터는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인상주의(Amsterdams impressionisme) 등의 영향을 받아 인상주의적 또는 탈인상주의적으로 모이 인디어 회화가 전개되기도 하였으며, 니우엥캄프는 아르 누보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모이 인디어 회화에서 토착민은 주로 수동적인 묘사 대상으로 그려졌으며, 특히 토착민 여성은 남성 화가의 시선에 따라 수동적일 뿐더러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국적'이고 '동양적'인 묘사 대상이 되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 피른가디(Raden Mas Pirngadie, 1875–1936), 압둘라 수리오수브로토(Abdullah Suriosubroto, 1878–1941), 와키디(Wakidi, 1889–1979), 바수키 압둘라(Basuki Abdullah, 1915–1993) 등 새로 등장한 토착민 화가들도 모이 인디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스스로 모이 인디어 유형의 그림을 그렸다.
본격적으로 동인도에서 토착민 화가들의 집단이 두터운 층을 갖추어 화단이라고 할 만한 것이 생겨난 것은 20세기 전반 윤리정책 시대이다. 이때 비유럽계 중·상류층에 대한 유럽식 교육의 문호가 확대되어 비로소 그들이 유럽 근대 문물을 보다 깊게 이해하게 되고, 나아가 문화 향유 및 생산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넓은 의미에서 모이 인디어 회화는 1920년대까지도 동인도 회화의 주류였으나, 1930년대부터는 인도네시아 민족주의가 성숙함에 따라 식민지 민중의 현실을 사실주의적으로 묘사하는 신두다르소노 수조요노(Sindoedarsono Soedjojono, 1913–1985) 등의 화가들도 일군의 흐름을 형성하였다. 20세기 전반의 비유럽계 동인도 화가로는 피른가디, 압둘라 수리오수브로토, 와키디, 아판디(Affandi, 1907–1990), 신두다르소노 수조요노, 리 만 퐁(李曼峯, 이만봉, Lee Man Fong, 1913–1988), 바수키 압둘라, 헨드라 구나완(Hendra Gunawan, 1918–1983) 등이 고전적인 작품들을 남겼다. 한편 20세기 전반에 발리 회화는 이다 바구스 마데(Ida Bagus Made, 1915–1999) 등이 이끄는 우붓 화파가 생겨나는 등 급속히 발전하고 있었는데, 발리 회화의 영향을 받은 아낙 아궁 그데 소브랏(Anak Agung Gde Sobrat, 1912–1992) 등 일부는 전통적인 발리 회화의 요소와 근대 서구 미술을 결합하여 독창적인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20세기 전반 대부분의 화가는 남성이었고 여성들은 극히 제한된 미술 교육 기회만을 누릴 수 있었으나, 에미리아 수나사(Emiria Soenassa, 1891–1964) 등 여성 화가들도 엄연히 존재하였으며 이들은 오늘날까지도 남성 화가 위주의 미술사에서 간과되고 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 시대 전반적으로 근대 화단은 형성기에 있었으므로 당대 유럽의 최신 예술 사조를 흡수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고, 민족주의적, 지역적 배경이 가미된 사실주의· 자연주의· 낭만주의· 인상주의가 화가들의 주된 화풍이었다. 그러나 목타르 아핀(Mochtar Apin, 1923–1994), 아맛 사달리(Ahmad Sadali, 1924–1987) 등은 추상 회화를 시도하였으며 추상 회화는 인도네시아 독립 이후 반둥 공과대학교 예술학부에서 주류를 차지하며 인도네시아 아카데미즘 회화의 주요 흐름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인도네시아 독립 이후에는 미술 교육이 보다 제도화되고 인도네시아 화단이 성숙함에 따라 인도네시아 미술가들은 동시대 서구의 여러 예술 사조를 시차 없이 받아들이고 다양한 이론적·기법적 배경 위에서 예술적 실험을 전개하였고, 1980년대에는 욕야카르타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일견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수 있는 독특한 미술사적 흐름을 형성하기도 했다.
8.3. 음악
자세한 내용은 인도네시아 음악 문서 참고하십시오.자세한 내용은 인도네시아 음악 문서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인도네시아 음악 문서 참고하십시오.
8.4. 건축
윤리정책 시대, 건축 면에서는 신고전주의 건축의 동인도판인 19세기 동인도 제국 양식(Indische Empire Stijl)은 이미 적어도 바타비아에서는 구시대적인 것이 되었으며, 자바와 수마트라의 대도시에서는 네덜란드 합리주의 양식을 바탕으로 신동인도 양식(Nieuwe Indische Bouwstijl)이 성립하여 동인도에 모더니즘이 당도하게 되었다. 코스만 시트룬(Cosman Citroen, 1881–1935), 피터르 모연(Pieter Moojen, 1879–1955) 등이 대표적이다. 이를 기점으로 프란스 헤이설스(Frans Ghijsels, 1882–1947)와 볼프 스후마커르(Wolff Schoemaker, 1882–1949)[30]의 아르 데코, 알버르트 알버르스(Albert Aalbers, 1897–1961)와 한 흐루네베헌(Han Groenewegen, 1888–1980)[31]의 기능주의, 토마스 카르스턴(Thomas Karsten, 1884–1945)과 헨리 폰트(Henri Maclaine Pont, 1884–1971)의 신토착주의(Neo-Pribumi), 림 브완 치[32](Liem Bwan Tjie, 1891–1966)[33]의 열대적 표현주의, 심지어 드물지만 신즉물주의(Nieuwe Zakelijkheid) 건축[34]까지 동인도에서 시도되었다.토착민 근대 건축가들도 윤리정책 시대에 처음으로 고등 교육을 받고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대표적으로 반둥 기술대학을 졸업한 인도네시아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가 있었다. 수카르노는 스후마커르 등의 영향을 받아 건축에서 모더니즘과 합리주의를 선호하였다. 식민지 시대 말기의 다른 토착민 건축가로는 프리드릭 실라반(Friedrich Silaban, 1912–1984) 등이 유명하였다. 수카르노는 독립 후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도 건축에 종종 관여하였는데, 프리드릭 실라반이나 수다르소노(R.M. Soedarsono, 1933–2018) 등이 설계한 여러 건축물 설계와 건설을 직접 감독하였다. 네덜란드 치하에서 축적된 인도네시아의 건축적 역량은 독립전쟁 말기와 독립 직후 건설된 크바요란바루(Kebayoran Baru, 자카르타 남부) 등의 신도시 계획과 건설에서 잘 드러난다. 토마스 카르스턴의 학생이었던 모 수실로(Moh. Soesilo)는 1948–1949년 크바요란바루, 프좀퐁안(Pejompongan) 등의 신도시 마스터플랜을 수립하였다. 이는 식민지 시대를 포함하여 인도네시아 최초로 토착민이 설계한 근대적 도시 계획이었다.
8.5. 무용
네덜란드령 동인도는 각 지역별로 매우 풍부한 무용 전통을 갖추고 있었다. 대표적인 지역별 무용 예술 양식 자바 무용, 발리 무용, 순다 무용, 팔렘방 무용, 미낭카바우 무용 등은 오늘날 인도네시아로 단절 없이 계승되었으며, 특히 자바의 근세 궁정 무용이나 발리의 종교 무용은 근세 초기부터 고도로 양식화되며 발전해 왔다. 근세 자바 궁정 무용은 와양과 함께 근세 자바 문화를 관통하는 힌두–이슬람 혼성 종교 문화의 정수라고 할 만한 것으로, 인도의 《 마하바라타》, 《 라마야나》 등이나 판지 설화 등 자바 전통 설화나 역사적 사건을 테마로 하였으며 가믈란 음악을 배경으로 공연이 진행되었다. 순다 무용은 자바 무용의 큰 영향을 받았으며, 오래전부터 궁정 무용과 민중 무용이 양식상 구별되는 자바 무용과 달리 그러한 구분이 없다가 근세 자바 궁정 무용의 영향을 받아 순다식의 귀족 취향 무용이 발달하였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지역별 전통 무용은 여러 교육 기관에 의해 잘 보존되어 왔다.서구의 발레가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처음으로 공연된 것은 1845년으로 기록되어 있다.[35] 20세기 전반에는 동인도 문화계가 발달함에 따라 외국 무용수들도 가끔 동인도를 방문해 공연하였다. 1929년에는 러시아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바(Анна Павловна Павлова, 1881–1931)가 동인도를 방문해 공연하였으며, 1934년에는 당드레-레비토프 러시아 발레단(Dandrè-Levitoff Russian Ballet)이 동인도를 방문해 자바 각지(바타비아, 수라바야, 반둥, 스마랑)에서 순회 공연하기도 했다. 안나 파블로바 등 외국 발레 무용수들의 공연은 당대 동인도의 문화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36] 그러나 인도네시아 독립 이전까지 발레나 20세기 전반의 근대 무용은 동인도 토착민들 사이에서 폭넓은 저변을 확보하지는 못했으며, 거의 유럽계만이 향유하는 문화에 불과하였고, 비유럽계에 대한 서구 무용 교육은 사실상 윤리정책 시대 후기에나 시작된 수준이었다. 발레나 근대 무용이 어느 정도의 관람자층과 토착민 무용가, 안무가를 갖추어 나가기 시작한 것은 독립 이후였다. 1950년대 말, 전통 무용 교육을 받은 바공 쿠수디아르조(Bagong Kusudiarjo, 안무가, 화가)와 위스누 와르다나(Wisnu Wardhana, 안무가, 무용가)가 미국에서 근대 무용을 배우고 돌아와,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인도네시아에 근대 무용을 도입하였다.
9. 과학
9.1. 근대 과학
최초로 동인도에서 과학 연구를 수행한 유럽인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자바로 데려온 의사 야코프 더본트(Jacob de Bondt, 1592~1631)였으며, 그는 회사령 동인도 지역에서 열대의학 및 식물학 분야의 선구자가 되었다. 더본트가 1631년에 쓴 책 《동인도의 자연사와 의학》(Historiae naturalis et medicae Indiae orientalis)은 ' 오랑우탄'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유럽에 소개한 것으로 유명하다. 동인도의 자연을 탐구하는 데는 화가들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는데, 네덜란드 화가 필립스 앙얼(Philips Angel, 1616~1683)이 그린 자바코뿔소는 1630년대 유럽에 알려졌다.근대적 과학 연구가 동인도에서 본격적으로 꽃핀 것은 동인도 핵심 지역인 자바가 정치적으로 안정화된 19세기 중반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때부터 많은 유럽 과학자들이 동인도를 기반으로 식물학, 동물학, 미생물학, 의학, 약학, 농학, 화학, 천문학, 지리학, 인류학, 고고학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를 수행하게 되었다. 19~20세기 동인도에서 연구한 대표적인 과학자로는 동인도에서 각기병을 연구하다 비타민의 발견자 중 하나가 된 노벨생리학·의학상 수상자 크리스티안 에이크만(Christiaan Eijkman, 1858~1930), 생물지리학의 선구자이며 월리스선을 발표한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 1823~1913), 1891년 최초의 호모 에렉투스 화석인 자바 원인을 발견한 외젠 뒤부아(Eugène Dubois, 1858~1940), 동인도 식물학과 지리학 연구로 알려진 프란츠 빌헬름 융훈(Franz Wilhelm Junghuhn, 1809~1864), 코모도왕도마뱀을 1912년 처음으로 조사해 기술한 페터르 아우언스(Peter Ouwens, 1849~1922) 등이 있다. 과학 연구가 동인도 경제에 미친 파급 효과를 고려하면, 서아프리카에서 재배되던 기름야자를 동인도로 도입해 팜유 생산을 시험적으로 시작했고, 수마트라에서 재배되던 카사바를 구황작물로 좀 더 넓은 지역에 보급하였으며, 바닐라 인공 수분 기술을 도입해 관련 농업 생산성을 대폭 끌어올린 등의 업적을 남긴 요하네스 테이스만(Johannes Elias Teijsmann, 1808~1882)도 첫손에 꼽을 만하다.
특히 동인도에서는 열대 식물학이 발달해 광범위한 표본이 수집되고 연구되었는데, 그 중심에는 보고르의 보고르 식물원(Kebun Raya Bogor)이 있었다. 이 지역에는 원래 16세기에 순다 왕국에서 만들어진 인공림이 있었는데, 순다 왕국이 반튼 술탄국에 멸망한 후 방치되다 1744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정원을 조성했다. 보고르 식물원은 네덜란드 식물학자들의 건의로 이 정원이 확장되어 1817년 처음으로 조성되었다. 이 식물원은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적 식물원으로서, 요하네스 테이스만, 멜히오르 트뢰프(Melchior Treub), 뤼돌프 스헤퍼르(Rudolph Scheffer) 등 여러 식물학자들이 식물원장으로 재직하며 다양한 식물학 연구를 수행했다. 보고르 식물원은 인도네시아 독립 이후에는 인도네시아인 학자들의 손으로 운영되며 여전히 인도네시아 식물학의 연구 거점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식민 정부는 과학 연구를 종합적으로 관리하고 진흥하기 위해 네덜란드령 동인도 과학 위원회(Natuurwetenschappelijke Raad voor Nederlandsch-Indië)를 1928년에 설립하였다. 이 기관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주요 연구 기관으로 운영되었으며, 오늘날 인도네시아 과학원(Lembaga Ilmu Pengetahuan Indonesia)의 전신이다.
9.1.1. 토착민 과학자
동인도 토착민들은 19세기까지 근대 과학 실천에서 보조적인 토착 정보원의 역할에 머물렀지만, 일부는 20세기 윤리정책 시대가 되자 대학 제도에 편입되어 근대적 지식 생산자가 되기도 했다. 20세기 초부터 일부 토착민 과학자들은 유럽에서 유학해서 공부하고 연구하며 석사 이상의 학위를 받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일반 박사 학위를 취득한 토착 동인도인 학자는 고등교육 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1910년대부터 등장했다.윤리정책 시대 초기에 토착민 엘리트가 고급 과학 교육을 받고 연구한 장소는 거의 유럽의 대학이었지만, 동인도에 대학 제도가 본격 도입되기 시작한 1920년대부터는 동인도 자체가 토착민 과학자들의 과학 연구 거점이 되기도 했다. 수라바야의 네덜란드령 동인도 의과대학에 연구원으로 있었던 수하디 쿠수모하디푸트로(Raden Soehadi Koesoemohadipoetro)는 1929년 토착민 과학자 가운데 처음으로 현지에서 연구하며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했다. 바타비아의 의학대학에서 공부하고 연구한 일명 '인도네시아 병리학의 아버지' 수토모 초크로느고로(Sutomo Tjokronegoro)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졌던 학술지 "네덜란드령 동인도 의학 저널"(Geneeskundig Tijdschrift voor Nederlandsch-Indië)에 논문을 게재했고, 실력을 인정받아 의학대학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42년에는 동인도 의학 저널의 편집자가 되었다. 그 밖에도 수와르노(M. Soewarno)가 1930년 납 중독에 대한 중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처럼 동인도에서 식민지 시대에 연구한 토착민 과학자들은 대체로 의대를 졸업한 의사였고, 의학과 생리학 등 분야를 위주로 연구했다. 이는 동인도에서 가장 처음으로 발달했고 잘 제도화된 고등교육 분야가 의학이었기 때문이다.[37]
상기한 인물들 외에도, 본토 네덜란드에서 의학 박사를 받은 토착민 의학자 사르지토(Sardjito, 가자마다 의학부의 창립자)와 아크맛 목타르(Achmad Mochtar)는 각각 동인도 의학 저널에 29편, 25편에 달하는 논문을 게재하며 활발히 동인도 내외에서 연구를 수행했다.[38]
9.2. 전통 과학
인도네시아 가운데 자바 지역에서는 과학적, 기술적 관심사를 다루는 분야들이 전통적으로 발달해 온 바 있다. 예를 들어 마자파힛 제국 시대의 14세기 가자 마다 비문(Prasasti Gajah Mada, 1351)에는 당시 자바에서 관측한 천체의 위치가 기술되어 있었고, 드막 술탄국 시대인 16세기 초에는 항해술과 지리학이 발달하여 포르투갈 항해도를 입수한 익명의 자바인 지도 제작자는 브라질과 포르투갈이 그려진 세계지도를 1512년 4월 이전에 제작했다. 드막을 계승한 마타람 술탄국에서는 다양한 역법을 비교하고 새로운 자바력을 수립해 사용하기도 했다. 드막부터 마타람 시대, 그리고 네덜란드령 동인도 체제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19세기 중반 무렵까지 약 4세기 동안 자바에서는 전통 천문학, 지리학 외에도 자바 전통의 약초학, 의학, 언어학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문헌이 작성되어 왔다. 자바와 남술라웨시에서 16~17세기에 만들어진 선박들도 당시 국제적 기준으로 봐도 상당히 훌륭한 것이 많았다.그러나 인도네시아 지역에서 전통 학문의 지식은 철학, 신학, 종교학, 언어학, 역사학 등 인문학 분야들과 대체의학의 일종으로 문화 유산으로 취급되는 자바 전통 의학 자무(Jamu), 그리고 각 지방의 관습법 및 전통 정치 체제에 관한 지식 정도를 제외하면 오늘날 인도네시아로 직접 계승되지 않고 있다. 특히, 19~20세기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근대적 과학 교육 체제가 확립되어 감에 따라 발달한 유럽 자연과학, 사회과학 지식은 전통적인 대응 분야의 지식을 대체했다. 이 과정에서 식물학, 동물학, 약학, 의학 등이 동인도에서 발달하는 데 전통적 지식이 근대적 지식 생산에 일부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전통 지식은 기껏해야 보조적인 위치에 놓였다.
9.2.1. 이슬람 과학
일반적으로 인도네시아 과학사를 서술할 때는 주류 지역인 자바의 전통 과학과 서구 근대 과학의 이식에 주목하는 경우가 흔하지만, 수마트라 말레이어권을 중심으로 아랍-페르시아 이슬람 세계의 전통 과학도 지역의 이슬람화 이래 꾸준히 도입 수용되어 온 역사가 있다. 즉, 18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동인도는 적어도 다음 세 가지 과학적 전통이 공존하는 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네덜란드에 의해 도입된 서구 근대 과학.
- 자바에서 독자적인 힌두-불교 문화에 기초해 이슬람, 서구 문화를 선택적으로 수용해 형성한 자바 전통 과학. 넓은 의미에서 중세 자바 힌두 전통을 보존하는 데 집중한 발리의 지적 전통과도 함께 묶을 수 있다.
- 이슬람화된 말레이어권 수마트라 지역(특히 아체, 서수마트라) 및 자바 일부 지역에서 인도양 이슬람권과 교류해 받아들인 아랍-페르시아 과학 문헌을 자체적으로 번역, 종합하여 형성한 이슬람 과학. 아랍-페르시아 이슬람 과학 전통의 직접적인 연장선상에 있고, 2보다 지역 토착 관행에 덜 의존했다.
말레이어권의 전통 이슬람 과학 도입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같은 현대의 정치적 단위를 기준으로 하기보다는 수마트라, 말레이 반도, 보르네오를 아우르는 말레이어권 지역의 과학사, 넓게는 말레이 세계의 과학사라는 틀에서 다루는 경우가 많다. 이 절에서도 이러한 관점 아래 수마트라에 관해 집중한다.
말레이인 학자가 이슬람 과학 전통에서 작업을 남긴 것으로 확인된 최초의 사례는 1593년의 논리학 논문이 있다. 셰이크 다우드 알파타니(Sheikh Daud al-Fatani, 1720~?)는 이슬람 과학계에서 인정받은 최초의 말레이 학자 중 하나로 꼽힌다. 18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방대한 이슬람 과학 관련 저술이 말레이어권에서 아랍어 및 말레이어로 이루어졌다. 수마트라 출신에 국한한다면,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활동한 아맛 알미낭카바위(Ahmad bin Abdul Latif al-Khatib al-Minangkabawi, 1860~1915), 타히르 잘랄루딘(Syeikh Tahir Jalaluddin, 1867~1957) 정도를 대표적인 학자로 꼽을 수 있다.
알미낭카바위는 1890년대에 말레이어로 이슬람 전통의 수학을 종합한 책(‘Alam al-Hussāb, 1892)을 저술하며 산술, 대수학, 기하학, 삼각법, 근사 이론, 그리고 각종 일상적인 문제에 대한 응용을 다루었다. 알미낭카바위의 책은 이후 한동안 말레이 세계에서 이슬람 전통 수학 저술의 모범이 되었다. 타히르 잘랄루딘도 삼각법과 로그 등을 사용하는 천문학적 계산에 정통했고, 다수의 천문학 논문과 저서를 펴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이슬람학자였고, 이슬람학의 보조적인 학문으로 과학에 접근했다는 한계는 있지만, 당시 말레이 이슬람 세계에서 널리 읽힌 과학 저술을 남겼다는 의의가 있다.[39]
10. 군사
자세한 내용은 네덜란드령 동인도군 문서 참고하십시오.11. 인도네시아와 누산타라
'인도네시아'(Indonesia)라는 명칭은 네덜란드령 동인도 시대인 19세기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이 명칭은 1850년대 영국인 조지 얼과 제임스 로건이 동인도 제도를 지칭하기 위해 인도라는 뜻의 'Indo'와 섬이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nesos'를 합성하여 창안한 것이다. 이후 독일의 인류학자 아돌프 바스티안이 이 용어를 마다가스카르와 타이완섬 사이에 위치한 도서들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사용하면서 이 용어가 학술적으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20세기에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네덜란드령 동인도 전체를 지칭하는 명칭으로 '인도네시아'가 점차 대중화되었으며, 1920년대와 1930년대의 토착민 민족주의자들에게 민족주의적 표현으로 전유되어 1928년 10월 28일 선언된 〈 청년의 맹세〉에 쓰이기에 이르렀다. 이는 오늘날 인도네시아의 국명이 되었고 인도네시아인들의 정체성 및 민족 의식에 있어 중요한 명칭이 되었다.한편, 1920년 혼혈 민족주의 지도자 에르너스트 다우어스 데커르는 '인도네시아' 대신 14세기 마자파힛 제국의 중세 자바어 서사시 《 나가라크르타가마》에서 사용된 '누산타라'(Nusantara, 군도)라는 용어를 새로운 독립 동인도의 국명으로 제안하였는데, 원래 당시에 '누산타라'는 인도네시아 군도가 아니라 마자파힛 중심부와 대비되어 정복된 이질적인 속령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결과적으로 독립 동인도의 국명은 '인도네시아'가 되었지만, '누산타라' 역시 보다 토착적인 뉘앙스를 띤 '인도네시아'의 동의어로 현대까지도 널리 쓰이고 있다. 그리고 해당 명칭은 2024년 이후에 건설될 새로운 수도의 이름이 되었다.
12. 역대 총독
이하 괄호 안에 병기된 날짜 또는 숫자(연도)는 모두 총독 재임 기간이다. 대부분 한국에 알려져 있지 않으므로 이하의 인명 표기는 국립국어원의 네덜란드어 외래어 표기법을 일괄적으로 따른다.네덜란드어 위키백과 명단
12.1. 회사령 동인도
다음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임명한 총독의 목록이다.- 피터르 봇(Pieter Both, 1610~1614)
- 헤라르트 레인스트(Gerard Reynst, 1614~1615)
- 라우런스 레알(Laurens Reael, 1615~1619)
- 얀 피터르스존 쿤(Jan Pieterszoon Coen, 1619~1623)
- 피터르 더카르펜티르(Pieter de Carpentier, 1623~1627)
- 얀 피터르스존 쿤(Jan Pieterszoon Coen, 1627~1629)
- 자크 스펙스(Jacques Specx, 1629~1632)
- 헨드릭 브라우어르(Hendrik Brouwer, 1632~1636)
- 안토니 판디먼(Anthony van Diemen, 1636~1645)
- 코르넬리스 판데르레인(Cornelis van der Lijn, 1645~1650)
- 카럴 레이니르스(Carel Reyniersz, 1650~1653)
- 요안 마차위커르(Joan Maetsuycker, 1653~1678)
- 레이클로프 판훈스(Rijckloff van Goens, 1678~1681)
- 코르넬리스 스페일만(Cornelis Speelman, 1681~1684)
- 요하네스 캄파위스(Johannes Camphuys, 1684~1691)
- 빌럼 판아우트호른(Willem van Outhoorn, 1691~1704)
- 요안 판호른(Joan van Hoorn, 1704~1709)
- 아브라함 판리베이크(Abraham van Riebeeck, 1709~1713)
- 크리스토펄 판스볼(Christoffel van Swoll, 1713~1718)
- 헨드릭 즈바르데크론(Hendrick Zwaardecroon, 1718~1725)
- 맛회스 더한(Mattheus de Haan, 1725~1729)
- 디데릭 뒤르번(Diederik Durven, 1729~1732)
- 디르크 판클론(Dirck van Cloon, 1732~1735)
- 아브라함 파트라스(Abraham Patras, 1735~1737)
- 아드리안 팔케니르(Adriaan Valckenier, 1737~1741)
- 요하네스 테던스(Johannes Thedens, 1741~1743)
- 휘스타프 빌럼 판임호프(Gustaaf Willem van Imhoff, 1743~1750)
- 야코프 모설(Jacob Mossel, 1750~1761)
- 페트뤼스 알베르튀스 판데르파라(Petrus Albertus van der Parra, 1761~1775)
- 예레미아스 판림스데이크(Jeremias van Riemsdijk, 1775~1777)
- 레이니어르 더클레르크(Reinier de Klerk, 1777~1780)
- 빌럼 아르놀트 알팅(Willem Arnold Alting, 1780~1796)
12.2. 네덜란드령 동인도
다음은 바타비아 공화국이 임명한 총독의 목록이다.- 피터르 헤라르뒤스 판오버르스트라턴(Pieter Gerardus van Overstraten, 1796~1801)
- 요하네스 시베르흐(Johannes Siberg, 1801~1805)
- 알베르튀스 헨리퀴스 비서(Albertus Henricus Wiese, 1805~1806)
다음은 홀란트 왕국 및 프랑스 제1제국이 임명한 총독의 목록이다.
- 알베르튀스 헨리퀴스 비서(Albertus Henricus Wiese, 1806~1808): 유임됨.
- 헤르만 빌럼 단덜스(Herman Willem Daendels, 1808~1811)
- 얀 빌럼 얀선스(Jan Willem Janssens, 1811)
다음은 영국이 자바를 지배한 시기 임명된 영국령 자바 부총독(영국령 자바의 최고 행정권자)의 목록이다. 네덜란드인들이 17세기에 진입해 바타비아를 접수한 후, 일본 제국이 동인도를 점령하기 전까지 오직 이 둘만이 바타비아를 통치한 비네덜란드계 최고 행정권자였다.
- 토머스 스탬포드 래플스(Thomas Stamford Raffles, 1811~1816)
- 존 펜들 2세(John Fendall Jr., 1816)
영국이 동인도를 점령한 시기 래플스의 주도로 동인도의 제도와 행정 체계가 대폭 바뀌었으며, 네덜란드는 영국으로부터 동인도 식민지를 다시 이양받는 과정에서 세 명의 고등판무관(commissaris-generaal)을 파견해 1816년부터 1819년까지 동인도 정부의 인수 작업을 진행했다. 다음은 이때 활동한 세 고등판무관의 목록이다.
- 코르넬리스 테오도뤼스 엘라우트(Cornelis Theodorus Elout)
- 호더르트 판데르카펠런(Godert van der Capellen)
- 아르놀트 아드리안 바위스커스(Arnold Adriaan Buyskes)
이하는 1819년부터 네덜란드 왕국이 임명한 총독의 목록이다.
- 호더르트 판데르카펠런(Godert van der Capellen, 1819~1826)
- 레오나르트 뒤뷔스더히시흐니스(Leonard du Bus de Gisignies, 1826~1830): 이 총독의 재임기에 실질적 통치는 많은 부분 부총독이 수행했다.
- 부총독은 헨드릭 메르퀴스 더콕(Hendrik Merkus de Kock, 1826~1830)이었다.
- 요하네스 판덴보스(Johannes van den Bosch, 1830~1833)
- 장 크레티앵 바우트[보](Jean Chrétien Baud, 1833~1836)
- 도미니크 자크 더에이런스(Dominique Jacques de Eerens, 1836~1840)
- 카럴 시라르뒤스 빌럼 판호헨도르프(Carel Sirardus Willem van Hogendorp, 1840~1841): 더에이런스 총독이 사망한 후 총독 대행직 수행.
- 피터르 메르퀴스(Pieter Merkus, 1841~1844)
- 얀 코르넬리스 레인스트(Jan Cornelis Reijnst, 1844~1845): 메르퀴스 총독이 사망한 후 총독 대행직 수행.
- 얀 야코프 로휘선(Jan Jacob Rochussen, 1845~1851)
- 알베르튀스 야코뷔스 다위마르 판트비스트(Albertus Jacobus Duymaer van Twist, 1851~1856)
- 샤를 페르디난트 파휘트(Charles Ferdinand Pahud, 1856~1861)
- 뤼돌프 아너 얀 빌트 슬룻 판더베일러(Ludolph Anne Jan Wilt Sloet van de Beele, 1861~1866)
- 피터르 메이르(Pieter Mijer, 1866~1872)
- 제임스 라우돈(James Loudon, 1872~1875)
- 요한 빌헐름 판란스베르허(Johan Wilhelm van Lansberge, 1875~1881)
- 프레데릭 스야코프(Frederik s'Jacob, 1881~1884)
- 오토 판레이스(Otto van Rees, 1884~1888)
- 코르넬리스 페이나커르 호르데이크(Cornelis Pijnacker Hordijk, 1888~1893)
- 카럴 헤르만 아르트 판데르베이크(Carel Herman Aart van der Wijck, 1893~1899)
- 빌럼 로세봄(Willem Rooseboom, 1899~1904)
- 요하네스 베네딕튀스 판회츠(Johannes Benedictus van Heutsz, 1904~1909)
- 알렉산더르 빌럼 프레데릭 이덴뷔르흐(Alexander Willem Frederik Idenburg, 1909~1916)
- 요한 파울 판림뷔르흐스티륌(Johan Paul van Limburg Stirum, 1916~1921)
- 디르크 폭(Dirk Fock, 1921~1926)
- 안드리스 코르넬리스 디르크 더흐라프(Andries Cornelis Dirk de Graeff, 1926~1931)
- 보니파시위스 코르넬리스 더용어(Bonifacius Cornelis de Jonge, 1931~1936)
- 알리디위스 판스타르켄보르흐스타하우어르(Alidius Tjarda van Starkenborgh Stachouwer, 1936~1942)
12.3.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시기
태평양 전쟁 과정에서 일본 제국이 침공하고 판스타르켄보르흐스타하우어르 총독이 1942년 3월 9일 일본군에 항복하여 일본령 동인도가 수립되었다. 직전인 1941년 12월 29일 동인도의 경제 관료 휘베르튀스 판모크(Hubertus van Mook)가 국왕의 명으로 판스타르켄보르흐스타하우어르 총독의 후임으로 정해져 동인도 부총독으로 임명되었다. 판모크는 실질적으로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시기 동인도 부총독으로서 총독 대행직을 수행했지만, 공식적으로 총독에 임명되지는 않았다. 이하는 일본 점령기 이래 네덜란드령 동인도 총독 대행의 목록이다.1. 휘베르튀스 판모크(Hubertus van Mook, 1944~1948): 판모크는 네덜란드 망명 정부를 설득해 네덜란드령 동인도 망명 정부를 수립하고, 1944년 9월 14일 동인도 망명 정부에서 다시 부총독이 되었다. 일본이 패전한 후 네덜란드가 다시 동인도에 군사를 이끌고 진입했을 때 판모크는 동인도 부총독이자 총독 대행직을 수행했다. 그러나 판모크는 동인도 출신 유럽계로서 비교적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인도네시아 민족주의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인물이었고, 이 때문에 네덜란드 본국에서는 보수파들의 미움을 사 결코 정식으로 동인도 총독 직함을 받지 못했다.
독립전쟁 국면에서 판모크는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 양측을 중재하려고 상당히 노력했다. 1945년 11월 1일, 판모크는 독립파를 불인정하는 네덜란드 정부의 공식 방침을 깨고 인도네시아 공화국 대통령 수카르노를 포함한 공화국 대표단을 만났다. 네덜란드 내각은 판모크를 해임시키려 했지만 빌헬미나 여왕의 만류로 판모크는 간신히 총독 대행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판모크는 동인도를 연방 형태로 독립시키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었고, 1946년 3월 동인도 연방 독립안을 공식적으로 제안했으며, 1946년 4월부터 인도네시아 공화국과 협상을 시작했다. 이러한 판모크의 노력은 영국의 중재로 인도네시아 공화국과 네덜란드가 체결한 1946년 11월 15일의 링가르자티 협정으로 이어졌다. 이 협정에서는 인도네시아 공화국이 자바와 수마트라를 통치하고, 또 공화국과 그 밖의 동인도 지역을 포괄하며 네덜란드 군주를 상징적 국가원수로 하는 인도네시아 연방을 인도네시아와 네덜란드가 상호 합의하에 수립해 본토 네덜란드와 연합을 이룬다는 합의가 도출되었다.
그러나 링가르자티 협정은 네덜란드, 인도네시아 양측 모두에 인기 없는 협정이었다. 1947년 위태로운 정치적 줄타기를 이어가던 판모크는 결국 1947년 8월, 링가르자티 협정의 이행을 강제하기 위한 소위 '경찰 행동'(politionele actie), 즉 대대적인 네덜란드의 제1차 공세에 찬성해야 했다. 네덜란드 제1차 공세 도중인 1947년 8월 29일 판모크는 네덜란드가 당시까지 점령한 지역을 기준으로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 관할 지역을 구분하는 '판모크선'을 발표했고, 이에 기초해 미국의 중재로 1948년 1월 가까스로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 간 렌빌 협정이 체결되었다. 여기서도 인도네시아에 인도네시아 공화국을 포함한 연방 국가를 수립한다는 합의는 도출되었지만, 동인도 핵심 지역인 자바에서 공화국은 자바 중부 내륙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주요 도시 및 경제 지역을 상실하게 되었다.
1948년 8월 네덜란드 본국에서 중도좌파 노동당이 대연정으로 정권을 잡았지만, 노동당 당내 좌파는 인도네시아 공화국에 대한 군사 행동에 찬성한 판모크를 더 이상 지지하지 않았다. 네덜란드 우파는 우파대로 판모크가 우유부단하고 전향적인 인물이라는 데 계속 불만을 품은 채였다. 결국 1948년 8월 새로운 네덜란드 내각이 구성되는 과정에서 판모크의 해임이 내정되었고, 비공식적으로 판모크에게도 이 사실이 통보되었다. 완전한 환멸에 빠진 판모크는 10월 11일 공식적으로 해임되기 전 사직서를 제출했고, 11월 3일 총독 대행 권한을 루이 베일 고등판무관에게 넘겼다. 독립전쟁 종전 이후, 판모크는 인도네시아와 네덜란드 양측 모두와 관계를 끊고 유엔에서 일하다 프랑스에서 죽었다.
2. 루이 베일(Louis Beel, 1948년 10월 29일~1949년 6월 2일): 네덜란드의 저명한 정치가로 네덜란드령 동인도 고등판무관(Hoge Vertegenwoordiger van de Kroon in Nederlands Oost-Indië)으로서 동인도에 부임해 판모크의 후임으로 총독 대행직을 수행했다. 베일 부임 직후 네덜란드 세력은 렌빌 협정을 깨고 공화국 세력의 무력화를 목표로 한 네덜란드의 제2차 공세를 진행했지만, 미국을 포함한 국제 사회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했다. 베일은 마지못해 인도네시아 공화국과의 협상을 시작했지만, 그는 공화국이 새로운 연방 형태의 독립을 사실은 원하지 않는다고 의심했고 협상은 잘 진행되지 않았다. 결국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중심으로 하는 국제 사회의 압력으로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와 덴하흐(헤이그) 원탁회의를 개최하기로 한 후, 베일은 인도네시아로의 주권 이양을 방해하려 노력했지만 실패하고 고등판무관직에서 사임하여 1949년 5월 말 동인도를 떠나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3. 토니 로빙크(Tony Lovink, 1949년 6월 2일~12월 27일): 베일의 고등판무관직을 이어 동인도 총독 대행직을 수행했다. 이 시점에 동인도 고등판무관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고, 로빙크는 이 자리를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는 전후 처리에 대해 협상을 한 후 인도네시아 합중공화국으로 주권 이양이 이루어지고 나서 인도네시아를 떠났다.
13.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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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enale Sanctie dan Penyiksaan terhadap Buruh Perkebunan Deli." (Dec 11, 2020). tirto.id. last modified Nov 20, 2020, https://tirto.id/poenale-sanctie-dan-penyiksaan-terhadap-buruh-perkebunan-deli-f68F.
14. 관련 문서
[1]
네덜란드어
[2]
말레이어
[3]
1942년–1945년까진
일본 제국이 점령하였고, 1945년엔 네덜란드가 돌아오기 전에 인도네시아가 독립을 선포하여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이 일어나 실질적 통치는 1942년까지이다.
[4]
1848년까지는 네덜란드 군주에 의해 직접 임명되었고, 이후에는 네덜란드 본국 내각에 의해 임명되었다.
[5]
식민 정부도 말레이어의 공용어 지위를 인정하여 토착 동인도인 대상의 하급 학교에서는 말레이어를 교육어로 사용하였고, 20세기 전반에는 말레이어 언론이나 출판 영역도 번성하였다. 동인도에 장기 체류하거나 토착화된 유럽인(혼혈 포함),
화인(혼혈 포함)도 토착민과의 소통을 위해 말레이어를 배우는 경우가 많았고 특히 후자의 경우는 19세기부터 자생적인 말레이어 문학을 발전시킬 정도였다.
[6]
관점에 따라 1816년으로 보기도 한다.
[7]
간혹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통치한 1602년–1799년까지의 기간도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존속 기간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이 경우 네덜란드령 동인도는 약 350년 동안 존재한 것이 된다.
[8]
서아프리카의 네덜란드령 황금해안(
수리남 정도의 규모였으며, 영국–네덜란드 조약으로 1872년 영국에 매각됨)은 서인도 회사 관할이었다.
[9]
국가로서의 '인도'는 마인어로 'India'이다.
[10]
그러므로 '스페인령 동인도'는 대략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필리핀과 대응한다.
[11]
Historical Statistics of the World Economy: 1-2008 AD
[12]
주로
아랍계와
일본계가 많았으며 그 외에는
인도계 등이 약간 있었다. 이들은 토착민과 유럽인/유럽계 혼혈의 중간적인 위치로, 화인과 유사한 사회적 지위를 누렸다. 일본계의 경우, 본국인
일본 제국의 강성함에 위협을 느낀 네덜란드 식민 정부는 1890년대 말부터 일본인들을
명예 백인으로 인정하였다.
[13]
총독이 임면권을 가지지만 시장이 있는 경우 시 내정에 관한 총독의 행정권이 제약됨.
[14]
현대 인도네시아 형사소송법의 모태이다.
[15]
(tirto.id Dec 11, 2020)
[잔혹함_주의]
뜨거운 태양 아래 알몸으로
십자가에 몇 시간 동안 매달아 두었으며, 기절하지 않게 하려고
고추를 섞은
삼발을 생식기에 도포하였다.
[17]
경우에 따라 토착민 엘리트는 자녀를 토착어 교육을 시키지 않거나 적게 시키고 바로 네덜란드어 초등학교로 보낼 수도 있었다. 이는 가정이 학비와 생활비(기숙사제인 경우가 많았음)를 감당할 여력이 있는지, 또 네덜란드어 지식을 졸업 후 활용할 것으로 기대하는지의 문제였다. 말레이어 초등학교가 수적으로는 훨씬 많았고, 학비도 쌌다.
[18]
가령 3년 과정인 초급 토착어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네덜란드어 전환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는데, 이 경우 전환학교에서 5년 과정을 이수하면 ELS 또는 HIS 졸업에 준하는 학력을 인정받았다.
[19]
네덜란드 학제의 특성상 고등시민학교 졸업자는 중학교+인문계 고등학교 졸업자에 비해 조금 낮은 학력을 갖춘 것으로 취급되었다. 하지만 아예 실업학교는 아니었으므로 동인도에 설치된 반둥 기술대학, 보고르 농업대학 등의 지원은 무리 없이 가능했다.
[20]
(Suratminto 2013, 77-84)
[21]
네덜란드 본토의 초등학교 교사 자격과 동등하였음
[22]
(kompasiana, acc. Dec 14, 2021)
[23]
네덜란드, 벨기에, 네덜란드령 동인도 등 네덜란드어권에서 '호헤스홀'(hogeschool)은 독일어권의 '호흐슐레'(Hochschule)에 대응하는 '고등교육을 제공하는 단과대학'을 뜻하는 일반 용어이며, 고등학교(중등교육)를 의미하지 않는다. 영어의 '칼리지'(college)와도 유사하다.
[24]
1909년에 설치된 법률 특성화 고등학교인 동인도 법학교(School tot Opleiding voor Inlandsche Rechtskundigen, STOVIR)가 전신이다. 법학교를 졸업하면 동인도에서 법률 사무직이나 토착민 대상의 하급 법원(Landraad) 판사 등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법학교는 네덜란드 교육 체계상 고등학교여서 정식 법학사 학위는 나오지 않았고, 학위를 취득하려면 네덜란드 본토의 법대로 진학해야 했다.
[25]
기존의 보고르 농학교가 개편된 것으로, 그 이전 보고르 농학교는 농업 전문 고등학교(농업과, 임업과) 및 네덜란드령 동인도수의학교(Nederlandsch Indische Veeartsenschool, NIV)로 나뉘어 있었다.
[26]
일제 패망 후 돌아온 네덜란드 식민정부가 종합대학을 설치하기는 했으나 곧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으로 동인도에서 물러나야 했다.
[27]
"Sarjana Pertama Indonesia Lulus di Belanda, Begini Kisah Pahit Getir Kuliahnya," detikedu, October 2, 2022.
[28]
단, '글을 쓰고 연설하는 등의 지적 활동을 네덜란드어로 능란하게 수행하는 비유럽인'이 이때 처음으로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 18세기와 19세기를 거치며 바타비아, 수라바야, 암본, 마카사르 등 동인도 식민지의 여러 중심지에서 '유럽인'으로 통계에 잡힌 자유도시민(burgher) 가운데 상당수는 유럽인과 토착 동인도인의 혼혈이었고, 때로 메스티조(mestizo)라고도 불렸던 이들은 경제적 능력에 따라 식민 정부와 현지 사회에서 현지에 정착한 유럽인에 준하는 대우를 받기도 했고, 토착 동인도인과 비슷한 대우를 받기도 했다. 이들 가운데 생업 외에 투자할 시간적 여유가 있는 상위, 중위 계층은 네덜란드어로 동인도 식민지의 문화 활동에 참여하고 때로는 본국이나 식민지에서 정치적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동인도의 하급 관리나 상공업자, 농장주 가운데 상당수가 혼혈이었으며, 특히 동인도군 가운데 혼혈이 많았다.
[29]
(Independent Observer Dec 28, 2020)
[30]
1922년부터 반둥 기술대학(
반둥 공과대학교의 전신) 교수로서 부임하여 당시 학생이었던 초대 인도네시아 대통령
수카르노를 지도하였고, 수카르노가 반둥 기술대학 졸업 후 스후마커르 밑에서 건축 실무를 배운 것으로도 유명하다.
[31]
기능주의와 암스테르담 학파의 표현주의를 동인도에 맞게 토착화하여 바타비아와
메단에 수많은 건축물을 남겼다. 원래
덴하흐 태생의 네덜란드인이지만 인도네시아 독립 후 인도네시아로 귀화하여 이후에도 인도네시아 건축가로서 활발히 활동하다가 1980년 자카르타에서 사망하였다.
[32]
한자 이름을 찾을 수 없었으므로 일단 말레이인도네시아어 외래어표기법을 준용함. 특히 '브완'은 표기 세칙 제11항("...자음 뒤에 w가 올 때에는 두 음절로 갈라 적되")에 따른다.
[33]
스마랑 태생의 토착화된 화인(peranakan)으로,
네덜란드의
델프트 공과대학교와
프랑스의 국립고등미술학교(É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Beaux-Arts)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동인도로 돌아와 엘리트 건축가로서 커리어를 쌓았다. 인도네시아 독립 이후에도 인도네시아 건축가로서 작업을 계속하다 1965년 네덜란드로 자녀 교육을 위해 이주했다가 곧 병을 얻어 1966년 네덜란드 레이스베이크(Rijswijk)에서 죽었다.
[34]
동인도 신즉물주의 건축의 대표 사례로는 자카르타의 만디리 은행 박물관(Museum Bank Mandiri)이 있다. 원래는 네덜란드 무역협회(Nederlandsche Handel-Maatschappij) 건물로, 더브라윈(J. J. J. de Bruyn), 스미츠(A. P. Smits), 판더린더(C. van de Linde)의 합동 설계로 1929년 착공하여 1933년 1월 14일 개장하였다. 기타 사례로는 팔렘방 시장 집무실(Kantor Wali Kota Palembang), 자카르타 구시가지 우체국(Kantor Pos Kota) 등이 있다.
[35]
(Ballet.id Dec 8, 2020), (The Jakarta Post Dec 8, 2020)
[36]
(Historia Dec 8, 2020)
[37]
(Akbar and Handayani 2021, 122-125)
[38]
(The Conversation Nov 20, 2017)
[39]
(Ismail and Atan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