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01:49:02

하인츠 구데리안

파일:나치 독일 국장(화이트).svg 독일 국방군의 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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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66><colcolor=#fff> 제5대 독일 국방군 육군참모총장
하인츠 구데리안
Heinz Guderian
파일:하인츠 구데리안 (흑백).jpg
이름 Heinz Wilhelm Guderian
하인츠 빌헬름 구데리안
출생 1888년 6월 17일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독일 제국 서프로이센 쿨름
(現 폴란드 쿠야프스코포모르스키에 주 헤움노 군)[1]
사망 1954년 5월 14일 (향년 65세)
파일:독일 국기.svg 서독 바이에른주 슈방가우
복무 독일 제국군(1907년 ~ 1918년)
국가방위군(1918년 ~ 1933년)
독일 국방군(1933년 ~ 1945년)
최종
계급
파일:Si_4a.png 육군 상급대장(Generaloberst)
주요
참전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바르바로사 작전
모스크바 공방전
주요
서훈
백엽 기사십자 철십자장
신체 172cm[2]
서명 파일:구데리안서명.png

1. 개요2. 생애3. 평가 및 논란
3.1. 전차의 아버지3.2. 독창성3.3. 전략적 안목3.4. 만슈타인과의 인연3.5. 성격과 대인관계
3.5.1. 관련 일화
3.6. 히틀러, 나치즘과 전쟁 범죄3.7. 회고록
4. 기타5. 주요 보직 내역6. 진급 내역7. 주요 수훈 내역8. 등장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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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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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의 엔진은 그 주포만큼이나 강력한 무기이다.
Der Motor des Panzers ist ebenso seine Waffe wie die Kanone.
절망적인 상황은 없다. 단지 절망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Es gibt keine verzweifelten Lagen, es gibt nur verzweifelte Menschen.
나치 독일 군인, 정치가, 문필가.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독일 국방군의 지휘관으로 복무했다. 전간기에 전차부대의 독립적 운용과 기동전 개념에 주목하고 관련 개념을 정립한 세계적 선구자 중 하나이자,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기갑부대 지휘관과 참모총장으로서 대활약한 명장이다. 최종 계급은 상급대장이다.

2. 생애

2.1. 출생과 성장

파일:아기구데리안.jpg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있는 유년의 하인츠 구데리안 (왼쪽 위)
파일:1910년구데리안(가족사진).jpg
구데리안 가족사진 (좌측 끝)
1888년 서프로이센의 쿨름[3]에서 출생했다. 장교 아버지[4][5]의 영향을 받아 1901년부터 1907년까지 군사 교육 과정을 밟은 그는 1907년 아버지가 지휘하던 하노버 제10엽병대대에 견습 사관으로 배치받는다.[6] 이듬해 4월부터 12월까지 메츠 군사학교에서 공부하고 1908년 1월 27일 소위로 임관한다.
파일:Guderian_1908.jpg
1908년의 구데리안 소위
1909년 10월 로트링겐에 임시로 주둔했던 부대가 원래 위치인 고슬라어로 돌아감에 따라 구데리안도 한동안 그곳에서 머무른다. 그는 마르가레테(그레텔) 괴르네를 만나고, 1911년 12월 10일에 함께 산책하던 중 청혼한다. 하지만 그레텔의 아버지가 둘 다 결혼하기에 너무 어리다며 결혼을 미루도록 한다.[7] 한동안 고슬라에서 지내며 처가와 교류하던 구데리안은 자진해 전출을 요청하고 1911년부터 프로이센 왕국군 통신대 소속 제3무선통신대대에서 근무하게 된다. 이때 약혼녀와 떨어진 슬픔을 잊기 위해 프로이센 전쟁대학 입학을 준비한다.

1913년 그레텔과 결혼식을 올리고 전쟁대학에 기수 최연소 학생으로 입학한 구데리안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이전까지 일반참모 과정을 밟는다. 전쟁이 발발하자 학교가 문을 닫았고 학생들은 소속 부대로 돌려보내지는 바람에 3년 과정 중 1년치 수업밖에 듣지 못했다. 당시 그의 동기 중 한 명이 훗날 그와 함께 유럽을 뒤흔들어 놓을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었다.
파일:1914구데리안(가족사진).jpg
1914년의 하인츠, 마르가레테, 하인츠귄터 구데리안

2.2. 제1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 초기에 구데리안은 제5기병사단의 통신장교로 근무했다.[8] 그러나 제1차 마른 전투에서 부실한 통신 체계 때문에 상부에서 내려온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바람에 부대가 전멸하다시피 했고, 이에 분개한 구데리안은 사단장을 업무 태만으로 고발했다가 다른 부서로 전출당한다.[9] 이후 야전에는 거의 배치되지 않고 정보부를 비롯한 여러 부대와 부서를 전전하며 서부전선에 머무른다. 베르됭 전투 때는 병참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후 전쟁 발발로 중단된 참모 훈련을 마무리하기 위해 1918년 1월부터 2월까지 스당에서 진행된 4주짜리 단기 교육에 참가한다. 수업을 모두 이수하고 최종 시험에까지 합격한 구데리안은 마침내 꿈에 그리던 일반참모가 된다.
파일:1차대전구데리안(증사).png
1차 세계대전 중의 구데리안 대위
그러나 1918년 5월부터 야전에서 참모 근무를 시작한 그에게 던져진 것은 무한한 병참 업무였다. 부근에 주둔해 방어전을 치르던 제38예비군단의 군수참모가 되어 4개월 동안 병참만 죽어라 처리하게 된 것이었다. 전술 업무를 보고 싶다고 투덜거리던 그는 얼마 후 이탈리아에 파견된다. 빌라주스티 휴전 협정에 독일 대표단으로 참석하라는 명령이었다. 하지만 호텔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정전위원회는 이미 떠난 후였고, 그들을 찾으려고 헤맨 끝에 이탈리아 전선에 도착하지만 이탈리아군에게 쫓겨난다. 질서가 사라지고 적군 병사들이 난동을 부리는 이탈리아에서 다른 독일군 장교들과 함께 간신히 도망쳐 나와 뮌헨에 도착한 그는 독일 11월 혁명의 여파로 마찬가지로 난리가 난 도시를 보고 환멸에 빠진다. 특히 황제가 쫓겨나고 황제에게 충성하던 제국군이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에 크게 분개한다.

1918년 12월부터 각종 부대를 전전한 끝에 1919년 3월 북부 국경수비대 사령부로의 참모가 되어 라트비아에 주둔한다. 당시 사령부 참모장은 한스 폰 젝트 소장이었고, 젝트가 1919년 4월 베르사유 조약 대표단으로 파견을 가버리자 빌헬름 하이에 대령이 그 후임자가 된다. 구데리안은 하이에 대령이 무척 상냥하고 이해심 있고 친절하다며 좋아했고, 하이에 대령은 구데리안의 자질과 잠재력을 잘 꿰뚫어 보았다.

1919년 5월에는 리가에 주둔해 있던 자유군단 강철사단(Eiserne Division)의 참모가 된다. 신문도 안 나오는 깡촌이라 세상과 단절된 기분이라느니 어쩌니 궁시렁거리며 세태에 분노하던 구데리안은 그 해 여름 무렵에는 이 따위 나라와 국민을 위해 복무할 수는 없으니 군복을 벗겠다고 성질을 부린다.
더 이상 독일에서 장교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총참모본부는 평화 협정에 따라 해체될 거야. 새 정부가 보수적인 장교들이 계속 복무하게 둘지조차 의문이야. 게다가, 옛 프로이센 장교가 범죄자들 사이에서 복무를 할 수는 없는 법이지. 그러니까 전역해야 할 거야. 그럼 어디로 가야 하지? 받아 마땅한 연금은 받게 되나? 전부 커다란 의문뿐이야! 내가 프랑스의 통제 하에서 한없이 폭도 같은 경찰 '중대'를 이끌고 군모에 까맣고 빨갛고 노란 수치스러운 코케이드를 떡갈나무 잎과 함께 달아야 하나? 내가 그러길 바라선 안 돼, 적어도 다른 길이 전부 사라지지 않은, 내가 아직 끔찍하게 망가져버리지 않은 지금은.
1919년 7월 12일 아내한테 쓴 편지

7월 말에 작전참모장의 부재로 그 업무를 대행하던 구데리안은 사단장에게 제안서 한 부를 제출한다. 독일 군부의 방침에 반해 러시아 백군과 접촉하고 빨갱이들과의 전쟁을 계속하자는 제안이었다. 강철사단은 극단적인 정치 성향을 띤 군인들이 주를 이루었던 만큼 이에 동의했고, 8월 23일에 본국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이 내려오자 항명하고 서러시아 의용군에 합류해 리투아니아 독립 전쟁에 참전한다. 작전 발의자였던 구데리안은 이 사건에 휘말릴 뻔했지만 이전에 그의 재능을 알아차렸던 하이에 대령이 속한 독일 총참모본부의 개입으로 사태가 터지기 직전 다른 지역으로 보내진다.[10]

1920년 1월 16일에는 고슬라 제10 엽병대대 3중대장으로 배치받는다. 아직은 베르사유 조약에 따른 군축이 완료되지 않아 언제 잘릴지 모르는 위치였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제대를 하네 마네 성질을 부리던 구데리안은 평생을 군에 몸담아 온 그가 군복을 벗으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으리라는 현실을 드디어 인지하고 가능한 한 군에 남겠다고 얌전히 입장을 바꾼다.[11]

그때 카프 폭동이 터지자 구데리안은 명령에 따라 중대를 이끌고 폭동을 진압한다. 이때 철도 파업 때문에 고슬라에서 힐데스하임까지 걸어가야 했다. 2개월 동안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중대 피해는 거의 내지 않고 효과적으로 폭도들을 진압한 구데리안은 1920년 5월에 다시 걸어서 고슬라로 돌아가는 명령과 함께 바이마르 공화국의 4천 명의 장교로 이루어진 10만 명짜리 신생 국가방위군에 확실히 속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전해 듣는다. 제10엽병대대는 제17보병연대의 제3엽병대대로 재편되고, 구데리안은 11중대장이 된다.

2.3. 전간기

독일 제국군 총참모본부는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해체된 후 병무국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설립되었다. 구데리안은 교육을 마쳤으니 참모 근무 자격은 있었지만 10만 명짜리 군대에서는 하고 싶은 일을 많이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고슬라에 계속 붙어 있을 생각이었다. 그러던 1921년 가을, 연대장에게 병무국에서 일할 생각이 있냐는 물음을 받고 그렇다고 답했더니 얼마 후 뮌헨에 있는 제7차량수송대대로 보내진다.[12] 당시 대대장은 공병 장교 출신 오스발트 루츠 소령이었다.[13]

1922년 4월에는 에리히 폰 치슈비츠 소장의 수송총감부로 보내진다. 치슈비츠 장군은 그에게 차량화 부대 신설 업무를 맡기려고 했으나 인사 규정 때문에 정비, 보급, 도로 관리 업무를 주게 되었다. 이에 실망한 구데리안은 고슬라로 돌아가겠다고 전출을 신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처음에는 업무를 불만스러워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일에 재미를 붙여간다. 이 무렵부터 전차와 기동전에 관한 여러 연구와 저작을 읽고 그 저자들과 교류했다.[14] 수송차량을 가지고 이런저런 기동훈련을 실험해보기도 했는데, 치슈비츠가 중장으로 진급하고 다른 부대로 가버리자 후임자로 온 나츠머 대령은 구데리안이 뿌듯하게 훈련 결과를 보고하며 수송부대를 전투 병력으로 사용할 가능성을 시사하자 '전투 부대는 지랄! 밀가루나 수송하게!'라고 혼낸다.

1924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발터 폰 브라우히치 소령이 주관하는 워게임에 참가한 구데리안은 차량화부대와 공군을 합동으로 움직이고, 상부에 깊은 인상을 주었는지 얼마 후 슈테틴의 제2사단에서 전술 및 전쟁사 교관으로 근무하게 된다.[15] 공교롭게도 제2사단장은 중장으로 진급한 에리히 폰 치슈비츠였다. 구데리안은 이 시기부터 군사지에 여러 편의 글을 기고하며 기갑전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굳히기 시작한다.

1929년 루츠 대령은 구데리안에게 차량 수송 대대의 지휘관 자리를 권유한다. 드디어 휘하 병사가 생긴 구데리안은 수송대대의 자동차에 마분지를 대서 모형 전차를 만들고 오토바이에는 기관총을 달아 수송병들에게 기동전투 훈련과 실험을 시작한다(...). 부대원들은 구데리안의 이 요상한 훈련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고 한다.[16] 그러나 높으신 분들이 이 사실을 알아채고는 훈련을 금지해서 몰래몰래 훈련해야 했다고 한다. 또한 보병이나 어린이들이 이들이 훈련하는 광경을 보면 작대기로 구멍을 내거나 돌을 던지는 등 고생을 감당해야 했다. 같은 해 그는 스웨덴으로 가서 스웨덴군의 기갑부대 훈련을 참관한다.
파일:1929년스웨덴구데리안.jpg
1929년 스웨덴에서 스웨덴군 장교들과 사우나를 즐기는 구데리안 (우측 끝)
1931년 드디어 루츠 소장이 차량수송부대 총감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구데리안을 참모장으로 임명하며 함께 기갑부대의 창설에 착수한다. 물론 아직은 루츠의 권한이 그렇게 많은 건 아니었기에 구데리안 휘하의 수송부대를 차량수송전투대대로 공식 편성한다. 루츠와 구데리안은 번갈아 가며 주변국의 눈을 피해 소련 카잔에서 전차 전술을 연구한다. 1933년에는 대령으로 승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그가 고안한 전차를 중심으로 한 기갑 전술을 주창하게 된다.[17]

구데리안은 전차의 단독행동을 위해서는 전차장이 필요하다는 확고한 인식이 있었고 전차장의 사주경계와 (자신의 차량을 포함한) 전체 상황 파악을 위해 포탑 포수의 뒤에 자리해야 한다고 결론내렸다. 그는 스웨덴 등의 비밀 협력을 통해 20년대의 각국 전차들을 탑승하고 분석해본다. 실험 결과, 당시의 어떤 전차도 전차장에 적합한 환경은 제공되지 않음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런 분석 결과를 추후 독일군의 전차 개발에 적극 반영한다. 큐폴라와 인터폰, 무전기의 필요성도 확신하게 되었다.

또한 구데리안은 전간기의 시간을 통해 나폴레옹 전쟁사와 제1차 세계 대전을 철저하게 분석하였다. 나폴레옹 군대의 기동전술, 영국군의 Mk 전차와 프랑스의 르노 FT 전차가 독일군에 가져온 쇼크와 한계, 그리고 야심차게 준비한 독일 돌격대의 성공과 실패의 사례들을 주도면밀하게 분석하였다.

사실 제1차 세계 대전의 참호전은 참전했던 독일과 영국, 프랑스의 모든 장교와 장병들에겐 악몽 같은 기억이었다. 전에 없던 막대한 손실을 쏟아 붓고도, 그를 토대로 아무런 전술적 이득도 취하지 못하는 전쟁의 양상은 양측 모두에게 풀고 싶은 과제 거리였다. 그중 등장한 영국의 Mk 전차는 독일군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실제 Mk 전차가 효과적으로 참호전을 분쇄하진 못했지만 독일의 일반 사병 참전용사들은 그 충격에 Mk 전차 때문에 전쟁에서 졌다고 말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이 전훈에 맞추어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생각한 전술교리는 다음과 같았다. 보병과 함께 전선에 밀고 들어가는 보병전차는 육중한 장갑으로 기동력을 줄이고 강력한 방어력과 화력을 갖추어 보병을 보호하며 전선을 좁히고 적의 주공 방향을 정면에 집중시키거나 참호진지를 무력화시킨다. 동시에 전열보병 시절의 기병대처럼 대열이 무너지는 적에게 치명타를 가하거나 전선을 우회 공격 하기 위하여 장갑과 무장은 빈약하지만 경쾌한 기동력을 갖춘 기병전차를 편성하여 우회공격이나 양동공격을 수행한다.

반면 구데리안의 발상은 전혀 다른 부분에서 출발했다. 1차대전 돌격대는 적의 참호에 도달하기까지 너무 느려 돈좌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은밀한 기습을 통해 때때로 성공적으로 적의 참호를 점령하였다. 적은 일시적으로 혼란에 빠지지만 후속부대의 이동속도가 너무 느려 혼란에 빠진 적이 먼저 전선을 수습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주목했다. 구데리안은 바로 이 점을 기계의 동력을 이용해 풀면 참호전은 끝장낼 수 있을거라 확신했다. 따라서 구데리안은 "전선의 약한 지점을 빠른 기습으로 격파 및 돌파하고 이 교두보를 확대하기 위하여 차량화(motorized) 부대가 적이 혼란을 수습하기 전에 먼저 신속하게 돌파 지점으로 이동, 전개하여 교두보를 확보하고 전과를 확대한다."는 아이디어를 착안한다.

이 모든 것의 제1 조건은 어디까지나 신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적의 방어선을 공략하기 위해 방어력을 높인 느린 전차가 보병을 지켜주기 위해 속도를 맞추어선 안되고 기동력과 방어력이 조화된 전차가 전속으로 돌진하여 적의 방어선 중 한 점을 공격하여 돌파하고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장갑차, 자동차 및 오토바이 등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동력을 이용하여 기계화 부대가 돌파지점으로 이동, 교두보를 구축, 저속의 보병 사단 도착을 기다리고, 선행 전차부대는 다시 제2 방어선을 같은 방법으로 공략, 기계화 부대 역시 뒤따라 신속하게 전개 후 교두보를 구축을 반복하는 것이 그가 고안한 기동전의 주요 골자이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조건이 따르는데 이는 바로 유연함이다. 이렇게 고속으로 기동하며 군사 작전이 실행될 경우 군의 사령부로부터 시시각각 정보를 보고하고 명령을 하달받는 것은 신속함은 물론이요 정확성과도 거리가 멀어진다. 따라서 가장 상황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일선 지휘관이고 이 하급제대의 지휘관들은 직접 전차를 타고 진두 지휘해야 하며 각자 전선의 상황을 스스로 판단하고 의사결정을 내리도록 한다. 구데리안은 사령부에서 전차에 명령이 전달되는 것이 아닌 전차가 움직이는 작은 사령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18]

그 목표를 위해,
1) 모든 전차는 충분한 기동력을 확보해야 하며,
2) 시시각각 변하는 전장 상황을 인지하고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전차장이 탑승하고 지휘에 전념할 수 있어야 한다.
3) 상황인식과 파악이 용이하도록 보병의 도움을 받던 기존 전차와 다르게 승무원들의 관측이 자유로워야 하며
4) 발이 느린 전통적인 포병대는 그 규모를 줄이고 움직이는 포병대, 즉 공군 전술 폭격기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5) 전차 부대는 충격과 기습의 효과를 극대화 하기 위하여 보병부대에 편성하지 않고 전차부대로 집중해서 편성해야 하며
6) 전차 부대의 진격과 속도를 맞추기 위하여 후속하는 보병부대는 차량화(motorized)되어야 하고[19]
7) 전차 부대와 긴밀히 연계할 수 있도록 같은 사단의 휘하에 두어야 한다.
8) 또한 그동안 보병과 같이 움직이며 전술 목표를 지시받던 전차와 달리 전차만으로 편성된 전차군이 단독으로 작전을 수행해야 했기에 이들이 하나처럼 연계해서 기동과 전투를 수행할 수 있도록 무선 통신과 협동 훈련이 이루어져야 한다.

2.4. 히틀러의 등장

이런 구데리안의 파격적인 전쟁이론은 보수집단인 프로이센 엘리트 장교들에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부분이 터무니 없는 이론으로 취급했거나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며 부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이 평생 본 전차는 육중하고 느려터진 Mk 같은 전차나 비커스 같은 연약한 탱켓들이었다.

이해관계에 있어서도 반발은 엄청났다. 보병장교들은 보병의 역할이 전쟁의 주연에서 조연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에 반발했고 기병장교들은 수송부대에서 출발한 기갑사단이 전차 운용의 주도권을 갖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했다.[20] 포병장교들 또한 포병의 역할 축소에 대해 극렬한 거부감을 보였다. 그보다도 더 큰 문제는 원로급 고위 장교들이 자신의 통제를 무시하고 하급제대에서 전투 수행은 물론 전략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의사결정 권한을 마음대로 내릴 수 있도록 부여해야 한다는 점이었다.[21] 그리고 훗날 이 점이 큰 부메랑이 되어 1941년 구데리안을 전쟁터에서 강판시키게 된다.

구데리안은 군사이론을 연구하는 시간만큼이나 머리가 굳은 프로이센 장교들을 납득시키고 설득하는 데에 그의 전력을 쏟아야만 했다. 진보적인 장교들조차도 구데리안의 기동전의 패러다임은 받아들이더라도 구데리안의 방법보다는 영국과 프랑스가 생각하는 방향이 맞다는 대립이 적지 않았다. 소련에 유학을 다녀오고 구데리안의 이론에 동의하던 소장파 장교들은 요제프 하르페,[22] 게오르크-한스 라인하르트,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 한스 위르겐 폰 아르님, 발터 모델, 빌헬름 리터 폰 토마 등 소수였다.[23] 이들 중 토마와 모델은 스페인 내전에 파견되어 전차의 실전 운용 데이터를 확보하고 공군과 지상 병력의 합동 전술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러던 와중에 구데리안의 군사이론에 매료된 인물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아돌프 히틀러이다. 히틀러는 적어도 2가지 이유에서 구데리안에 대해 열렬하게 지지를 보내게 되었다.
  1. 정치적 위협요소인 프로이센 원로 군인들에 대한 견제였다. 상술했다시피 새로 창설하는 부대를 주력부대로 만들어 강한 전투력을 부여하고 기존 원로 장교들이 지휘하는 부대의 힘을 빼야 했는데 구데리안의 이론은 거기에 완전히 부합되는 명분을 제공했다.
    2. 바로 구데리안의 이론이 참호전을 극복하기 위한 대책에서 출발했다는 점이다. 히틀러 자신부터가 말단 병사로 참호전의 지옥을 직접 경험하였으므로, 기존의 방식에 회의를 품고 있던 것은 당연하다 볼 수 있다. 물론 훗날의 됭케르크 정지명령이나 아르덴 공세을 통해 히틀러는 구데리안의 이론에 대한 정확한 이해나 확신이 결여됐다는 점이 드러나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상 독일 군부의 그 누구도 참호전을 확실히 타개할만한 믿음직한 대책을 내놓고 있지 못했다. 반면 히틀러가 구데리안이 제시한 견해와 그 가능성을 완전히 이해하진 못했더라도 주목했다는 것 만큼은 확실하다.

1933년 집권한 히틀러는 그 동안의 노력에 보답하며 루츠 장군에게 기갑사단의 창설 준비와 전차 개발을 명령했다. 전차 보유는 베르사유 조약을 위반하는 행위였기에 구데리안은 궤도차량의 전술을 고안하고 실험하는 과정을 농기구나 트랙터로 대신하거나 소련의 협조를 통해 은밀하게 진행했다.

한편으로 독일군은 경트랙터를 가장하여 우선 비커스 전차를 급조 모방한 1호 전차를 개발했다. 구데리안의 회고록에 의하면 처음 나온 1호 전차의 시제품을 보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원하던 것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1호 전차의 경우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에는 "이런 물건이 전방으로 나가냐?"며 본인도 실전에서 쓸만한 물건이 아님은 짐작하고 있던 듯 하다. 1호 전차에서부터 구데리안의 이론이 적극 반영되어 모든 전차에는 무전기가 장착되지만 비좁았던 탓에 전차장이 장전이나 전투를 수행해야 했다. 그는 몇차례의 기갑훈련과 워게임을 통해 일사불란한 전차 기동술을 선보이며 자신의 성과를 히틀러와 다른 장교들에게 과시했다.

1935년 드디어 아돌프 히틀러가 베르사유 조약의 폐기와 독일군의 재무장을 선언하면서 3개의 기갑사단을 창설했다. 이 때 구데리안을 새로 창설된 제2기갑사단의 사단장으로 임명하고 이듬해 다시 중장으로 승진시켰다. 본격적으로 숨길게 없었던 이 시점부터 루츠 장군과 구데리안은 현실적으로 빨리 양산할 수 있는 전차, 그가 본래 구상한 주력전차, 이동 포병 전차의 개발을 진행하고, 기갑사단의 편성, 교리, 보급 방법, 훈련 방법 등 기갑 사단에 필요한 제반 사항을 정립했다.

구데리안은 루츠 장군의 지시로 자신이 고안한 완전히 새로운 기갑 병과와 작전술을 군전체에게 이해시키기 위하여, 또 관철하기 위하여 1937년 그의 저작 <전차를 주목하라!(Achtung - Panzer!)>를 발간하게 됐다.

이러한 히틀러의 지원과 그의 눈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 군인 집단은 구데리안을 철저하게 불신했다. 따라서 구데리안과 히틀러는 자신들이 준비한 신병기와 새로운 전쟁 전술이 유효하고 위력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기회가 찾아왔다. 오스트리아가 투표를 통해 독일과의 병합을 결정한 것이다. 히틀러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더 다지기 위해 위세를 보일 깜짝쇼가 필요했고 구데리안의 기갑부대는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독일군 장교들에게 1차대전때 보던 전차와 지금의 전차는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야 할 필요가 있었다. 히틀러는 구데리안에게 그의 제2기갑사단과 LSSAH를 이끌고 빈으로 입성하라고 명령한다.

구데리안은 제2기갑사단을 독일 남부의 뷔르츠부르크에서 670km, LSSAH 연대를 베를린에서 1000km를 이끌고 48시간만에 주파하여 에 입성했다. 이 작전은 오늘날 보기엔 별거 아닌 그저 군대의 행군일지 모르겠지만 당시의 전차들의 항속거리라고 해봐야 잘해봐야 50~200km를 이동할 수 있는 게 고작이었고 신뢰성은 오늘과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여기서 구데리안에 의해 전차의 항속거리를 극대화하기 위해 민간 주유소를 적극 활용하는 한편, 제리캔을 활용하여 달리면서 급유하고 빈 캔은 그대로 길가에 던져버리며 후속부대가 캔을 회수하는 기발한 아이디어도 처음 활용된다. 그래서 이후의 독일군 전차들을 보면 대부분 제리캔을 꼽을 수 있는 수납 트레이들이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시 전차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고작 수백에서 수천 미터를 굼뜨게 이동하다가 멈춰버리는 고철덩어리였다. 구데리안은 수 백대의 전차와 장갑차를 보유한 사단 규모 이상의 부대가(비록 낙오차량도 상당수 존재했지만) 성공적으로 천여 킬로미터를 고속으로 기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의 반대자들에게 당당하게 입증한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그토록 노력해 왔던 구데리안의 기동전 이론이 독일군에게 조금씩 수용되어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와 같은 고위급 장교들 중 일부도 드디어 전차의 잠재력에 대해 눈을 뜨고 기갑부대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구데리안은 후일 프랑스 침공의 승리보다 이때의 작전이 더 어려웠고 힘든 도전이며 감격스러웠다고 회고한다.

그리고 해임된 루츠를 대신에 1938년 2월 4일부터 2개의 기갑사단을 포함한 제16기갑군단의 군단장이 된 구데리안은 다시 한번 독일의 주데텐란트 병합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 지방에 신속히 진군하는 데 성공했다.

오스트리아와 주데텐란트 진군 작전은 기갑 군단이 연습이 아닌 실제로 장거리를 고속기동을 할 때 나타날 수 있는 대열, 정비, 수리, 보급, 통신 등 다양한 실전적 문제들을 실전을 치르기도 전에 경험하고 고민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때 얻은 노하우는 그대로 프랑스 침공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구데리안 휘하 출신의 부대들이 다른 부대들보다 압도적인 속도로 진격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된다. 그리고 후일 여기에 충격을 받은 연합군은 이들의 놀라운 진군에 대하여 전격전이라 이름 붙이게 된다.

2.5. 제2차 세계 대전

2.5.1. 폴란드 침공

1939년 급작스럽게 구데리안은 3기갑사단을 휘하로 둔 체 19군단 군단장으로 임명된다. 19군단은 폴란드의 침공을 대비하는 부대였으나 그의 부임 이유는 폴란드 침공 때문임을 뒤늦게 알게 된다. 그의 임무는 폴란드 회랑에 전개된 폴란드군을 섬멸하고 폴란드의 바닷길을 막은 뒤 바르샤바로 향하는 것이었다. 그는 여기서 세계 최초로 지휘차량을 타고 전선을 뛰어다니며 현장을 통제하는 야전 사령관이 된다. 첫 실전은 혼란과 실수, 공황의 연속이었고 구데리안은 자신의 군단 곳곳을 지휘차량으로 뛰어다니며 직접 상황을 확인하며 혼란을 수습해야 했다. 특히 비츠나 전투에서 구데리안의 부대는 크게 애를 먹는다. 어쨌거나 그의 군단은 강력한 3기갑사단 등의 활약으로 부여받은 전략 목표들을 순조롭게 달성한다. 막판에 코브린에서 강력한 저항을 받았지만 소련군이 폴란드의 뒤를 치며 상황은 종료되었다.[24] 이 때 구데리안의 군단은 동쪽에서 다가오던 소련군과 브레스트에서 조우했고 합동 퍼레이드를 하는 등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낸다.

폴란드 전역을 거치며 독일군은 구데리안이 만든 기갑사단이 매우 효과적이었음을 확인하였고 기병장교들의 요구 관철로 만들어진 경사단(leichte Division)[25] 전차부대들이 무쓸모라는 사실을 체감하여 흩어진 사단을 해체하고 구데리안 방식의 기갑사단으로 6개를 추가 재편하도록 조치한다. 또한 1, 2호 전차의 실전 전투 능력은 형편없음을 확인하였다. 구데리안은 3, 4호전차의 조속한 전력화를 주장하였다. 또한 그의 지론이었던 공세 전투에 있어 견인식 화포의 비효율성을 확인하였다. 한편 구데리안은 폴란드 전역 막판에 귄터 폰 클루게 상급대장과 다툰다.

폴란드 전역에서 19군단은 참전 부대 중 독보적인 진군 거리와 교환비를 기록했으며, 그 결과 구데리안은 기사철십자훈장을 수여받는다. 한편 히틀러는 기대하던 기갑사단의 실전모습을 직접 보기 위해 19군단의 전투를 참관하는데, 이때 히틀러의 경호 책임자였던 에르빈 롬멜은 생전 처음 보는 기갑병과로 무장한 19군단과 지휘차량을 타고 뛰어다니는 구데리안의 기동전 광경을 보고는 충격을 받는다.[26] 보병장교이자 1차 대전 영웅이었던 그는 치명적인 새로운 병과와 작전술이 완성되었음을 직감하고 구데리안의 저술들을 정독한 뒤 기갑사단장으로의 전출을 요청한다.
파일:구데리안(폴란드).jpg
1939년 9월 23일 폴란드 브레스트에서 열린 합동 퍼레이드의 장교들. 왼쪽부터 독일 제20차량화보병사단장 마우리츠 폰 빅토린 중장, 하인츠 구데리안 대장, 소련 제29경전차여단장 세묜 크리보셰인 여단지휘관.

2.5.2. 프랑스 침공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를 침략한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였으나 실질적인 움직임은 없었다. 그 덕택에 독일은 위기를 넘길 수 있었으나 세계 최대의 해군국 영국과 유럽 최대의 육군국 프랑스와의 대결은 피할 수 없었다. 이 상황에서 1939년 11월, 전쟁대학 동기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코블렌츠에 주둔해 있던 구데리안을 베를린으로 불러낸다. 만슈타인은 새로운 부대인 기갑사단을 활용하면 프랑스와 벨기에의 경계 아르덴을 돌파하고 프랑스 내륙으로 진격할 수 있는지 기술적, 전술적 자문을 얻으려 했다. 구데리안은 그간 프랑스군이 보인 행동으로 파악한 작전 교리, 돌파지점에 대한 지형과 항공사진 등을 면밀히 검토한 뒤 하나의 조건을 충족한다면 무조건 성공한다는 답을 주었다. 그 조건은 독일군이 보유한 9개 기갑사단을 모두 스당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슈타인은 구데리안의 대답에서 확신을 얻고 곧바로 낫질 작전을 입안해 총참모본부에 올린다.[27]

여러 우여곡절 끝에 낫질 작전은 채택되었다. 만슈타인이 구데리안과 그의 제19 기갑군단을 스당 공격의 선봉에 세울 것을 상정하고 작전을 짰기에, 구데리안은 코블렌츠에서 수차례 이루어진 워게임에 참여했다. 집단군 사령부는 대부분 작전의 도박성을 우려하며 보다 안전하고 소극적인 방식을 채택하려고 했다. 구데리안은 성공을 믿어 의심치 않는 만슈타인의 원래 계획을 최대한 지키기 위해 상관들 및 동료들과 수도 없이 싸워야 했다. 어찌나 분란을 일으켜댔는지 이듬해 2월, 구데리안이 휴가를 내고 만슈타인을 보러 베를린에 간다는 소식을 들은 만슈타인의 후임자가 만슈타인에게 편지로 제발 구데리안을 설득해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 결국 만슈타인과 구데리안이 구상했던 원본에 비해 불완전한 낫질 작전의 실행이 결정된다.

어쨌든 구데리안은 스당 공격을 맡았지만, 이후의 전략에 대해서는 총참모본부에게 하달받지 못했다. 그가 소속된 A집단군의 계획은 스당에 강력한 교두보를 만든 뒤 파리 방면으로부터의 반격에 대비하거나 적의 주력을 측면에서 공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구데리안은 총참모본부의 전략에 따르는 대신 만슈타인과 논의한 대로 대서양을 향해 쉴 틈 없이 달려 벨기에에 집결한 적의 주력을 고립시킬 마음을 먹고 있었다. 총참모본부는 작전 성공 가능성을 확신하지 못했으므로 공세가 돈좌되면 다시 기갑사단을 물려 보병부대를 도와야 한다는 단서를 걸기까지 했다. 구데리안은 이 명령을 지킬 생각이 전혀 없었으며 돌파가 실패할 가능성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작전이 시작되자 구데리안의 3개 기갑사단은 서로를 보조하며 스당을 공격했다. 초기 혼란, 스톤 고지에서 격렬한 저항이 있었으나 결국 계획보다 빠르게 스당을 함락시켰다. 기갑사단들은 이미 구데리안으로부터 상부의 명령을 모두 무시하고 대서양까지 달리라고 지시받은 상태였다. 그의 부대들은 북서쪽으로 쉴 틈 없이 진군하며 실탄조차 준비하지 않은 적의 후방부대들을 닥치는 대로 사로잡기 시작했다. 집단군 사령부, 총참모본부, 히틀러는 구데리안에게 수차례 정지명령을 내렸으나 기갑부대들은 무전기를 꺼가며 당당하게 명령을 무시하고 내달렸다.[28] 구데리안의 진격은 지난 10년간 그가 준비한 대로 완벽하게 이루어졌으며 프랑스군의 지나치게 신중한 대처와 공황 때문에 샤를 드 골에 의한 프랑스 제4 흉갑기병사단의 반격을 제외하고는 치명적인 위협에 노출되지 않았다.

여담으로 드골이 지휘한 프랑스군의 이 반격은 의외로 날카로워서, 구데리안의 군단 사령부에 단 2km 남짓한 거리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19군단 군수참모 요한 폰 킬만스에크(Johann von Kielmansegg) 대위가 병력을 재편성하고 대전차 전력을 긴급 배치하는 등 재빠른 대처를 펼쳐서 프랑스군의 반격은 좌절되었다. 전후 구데리안의 회고록에서 뿐만 아니라 킬만스에크 본인도 당시 드골의 공세를 "시간적, 공간적으로 완벽한 역습"이라고 극찬했다.

결국 3개 기갑사단은 대서양까지 돌파에 성공하고 서부 연합군의 주력을 벨기에 프랑스 국경지역에 고립시켜 버린다. 낫질작전이 성공한 것이다. 이제 구데리안은 대서양의 요새와 항구인 칼레, 볼로뉴, 됭케르크를 공략 목표로 삼았다. 구데리안은 3개의 기갑사단이 각각 목표를 공략할 수 있었지만 정지명령에 의해 됭케르크 공략을 포기해야 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 정지명령이 기갑사단에게 전공이 모두 넘어가는 것을 시기한 괴링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공군은 됭케르크를 열심히 공격했으나 서부연합군의 주력은 이 정지명령을 통해 귀중한 시간을 벌고 도버 해협을 건넌다.

폴란드 전역에 이어 프랑스 전역에서도 구데리안은 무전기가 설치된 지휘차량을 타고 전선을 직접 뛰어다니며 신속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문제에 빠진 예하 부대들을 지원했다. 그가 군단 사령부를 최전방으로 8번이나 옮겨가며 부대를 전진시키는 동안, 프랑스군 총사령관 모리스 가믈랭은 전선에서 50km 떨어진 곳에 사령부를 놓고 오토바이 전보로 반나절 전의 전황을 전달받으며 지휘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신출귀몰하게 나타나 전선을 통제하는 그에게 '재빠른 하인츠'라는 별명을 붙였다.

프랑스 전역에서의 활약으로 그는 상급대장으로 진급한다. 그러나 프로이센의 원로 장성들에게는 히틀러의 신임을 믿고 자신들의 명령에 신경조차 쓰지 않는 이단아로 찍히게 되었다.

2.5.3. 바르바로사 작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01I-139-1112-17,_Heinz_Guderian.jpg
1941년 7월의 하인츠 구데리안
소련 침공이 결정되고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이 실행되자 그는 구데리안 기갑집단이 증강된 제2기갑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출격한다.

구데리안은 같은 중부집단군 소속 헤르만 호트의 제3기갑군과 서로 경쟁하듯 함께 진격한다. 첫 번째 전략 목표인 민스크에는 개전 10일만에 하루 차이로 호트가 먼저 도착한다. 구데리안은 쉬지 않고 전속으로 기동해 드네프르 강까지 전진했다. 그는 중부집단군의 최우선 전략목표인 스몰렌스크를 하루빨리 점령하고 교두보를 구축해야 한다고 판단했지만, 클루게는 기갑군이 선회해 적의 잔존병력을 포위공격하길 바랐다. 클루게는 구데리안의 독단 행동에 군사재판까지 언급하며 엄중히 경고한다. 구데리안은 상급부대의 주장과 타협해 일부 부대를 돌리는 동시에 드네프르 강 서안까지 진출한다. 약 일주일을 지체한 뒤 드네프르 강을 도하하고 두 번째 전략 목표인 스몰렌스크를 손쉽게 점령해 33만 명의 포로를 사로잡는다. 총참모본부의 계획보다 무려 한 달이나 빨랐던 이 공적으로 그는 백엽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받는다. 그의 마지막 훈장이었다.

구데리안의 기갑군은 기동전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그는 전쟁영웅이 되었으며 구데리안 휘하 기갑차량에 붙은 G 마크는 병사들의 자랑거리였다. 불과 개전 한 달만인 7월 17일, 구데리안의 부대는 이제 무방비 상태의 모스크바까지 고작 400km만을 남긴 채였다. 다음 목표인 모스크바를 향하려면 이제 돈 강을 넘어야 했다. 적이 돈 강 동쪽 기슭에 전개되기 전에 도하를 시도했으나 클루게는 이를 허가하지 않았다. 클루게와 구데리안은 또 한 번 욕설까지 주고받으며 언쟁을 일으킨다.

이때 히틀러가 구데리안에게 제2 기갑군을 남쪽으로 돌려 남부집단군과 함께 키예프를 함락하라고 명령한다. 키예프는 스몰렌스크로부터 무려 600km나 떨어져 있었고, 키예프에서 다시 모스크바로 가려면 무려 900km를 다시 달려야 했다.[29] 육군 최고사령부는 히틀러의 마음을 모스크바로 향하도록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육군 참모총장 프란츠 할더는 국민 영웅이자 히틀러에게 신임받는 구데리안에게 히틀러를 직접 설득하게 했다. 구데리안은 모스크바의 전략 목표로서의 중요도와 기동 및 보급의 비효율성을 이유로 들며 항의했다.[30] 구데리안의 항의는 기각되고, 그가 적극적으로 항의하는 대신 전공과 승진에 눈이 멀어 키예프 진군에 동의함으로써 자신을 기만했다고 생각한 할더는 구데리안에게 저주를 퍼붓는다.[31]

전선으로 돌아온 구데리안은 최대한 빠르게 작전을 완수할 궁리를 한다. 그는 남쪽으로 전개된 소련군의 두터운 방어선을 격파하며 키예프에 당도하고, 키예프 도시의 뒤쪽을 파고 들었다. 8월말 남동쪽에서 돌파를 시도한 남부집단군의 제 1기갑군과 사슬고리를 완성하며 80만명의 군대를 포위 섬멸한 인류 역사상 최대의 포위섬멸전이 불리는 키예프 전투의 승리를 이끌었다. 약간의 재정비 후 9월부터 다시 바르바로사 작전을 완수하기 위해 질풍처럼 북쪽의 모스크바를 향해 달려간다. 하지만 9월부터 시작된 비가 10월에는 폭우로 이어지며 라스푸티차가 시작된다. 진격 속도가 심각하게 느려지자 구데리안은 겨울 전투를 준비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긴급하게 사령부에 동계장비를 요청한다. 그의 기갑군은 진흙밭을 헤치고 모스크바 남부의 오룔을 점령한다.

하지만 이미 11월에 접어들었고 11월부터 소련에겐 기적적이라 할 수 있는 역대급 한파가 찾아온다. 전차들은 약간의 경사에도 미끄러져 전진하지 못했다. 엔진이 추위에 얼어붙었으며 엔진을 녹이는 동안 궤도가 얼어붙었다. 제2 기갑집단은 동장군을 헤치고 툴라를 제외한 모스크바 남부 일대를 점령한다. 이제 그의 선봉부대는 모스크바에서 30km밖에 남기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구데리안에게는 더 이상의 예비대가 없었으며, 시간을 지체하는 사이 소련의 극동부대가 재배치되었고 모스크바는 요새화 공사를 마쳤다. 그리고 소련군 최고의 명장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이 방어군 사령관으로 도착했다.

1941년의 기록적인 폭설은 그간 견인포 대신 구데리안의 기동전을 보조해준 Ju-87 슈투카 전술폭격기를 무력화시켰다. 반면 날씨의 영향을 덜 받는 소련군의 중야포가 빛을 발했다. 그가 설계한 기동전의 주인공, 3호 전차는 이런 환경에서 동작을 보장하지 않았다. 프랑스와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 대승을 이끌던 3호 전차의 협궤는 설원에서 엉망으로 움직이며 한계를 드러냈다. 반면 광궤를 장착한 T-34 전차들은 설원에서 독일군을 유린하기 시작한다. 독일 기갑군은 대부분 프랑스에서 노획한 차량을 사용했으며 프랑스군의 장비는 이런 혹한기를 견디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았다. 서유럽 출신의 말들이 모두 얼어 죽었기에 급조한 썰매로 보급을 받아야 했다. 가장 큰 문제는 이들이 주군한 모스크바 남부는 한파를 피할 가옥도 거의 없는 황무지였다는 점이다. 9월에 요청한 혹한용 동계 장비는 도착하지 않았으며 장병들의 방한 피복인 코트 서유럽 겨울에나 적합했지 러시아에선 이걸론 어림도 없었다. 동사자가 속출했고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다. 구데리안은 엉망진창이 된 작전에 극심하게 우울해졌으며 건강도 악화되었다.[32][33]

결국 구데리안은 히틀러가 있는 동프로이센으로 날아가 현재 모스크바의 상황을 설명하며 장병들은 얼어죽고 있으며 공세는커녕 살아남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히틀러의 대답은 간결했다. "병사들은 언제나 대의를 위해 희생당할 수 있어야 하네. 자네는 항상 전선 가까이에 붙어 있어서 일개 병사에게 연민을 느끼고 전략적 판단을 그르치고 있네." 격분한 구데리안은 동계 피복과 장화조차 없다고 따졌고, 그제서야 히틀러는 보급 담당자를 불러 구데리안에게 갔어야 할 방한 장비들이 바르샤바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민감하고 부정적인 정보는 보고되지 않았던 것이다. 육군 최고사령부는 전쟁을 엉터리로 수행하고 있었다. 충격받은 구데리안은 식사 자리에서 히틀러에게 참모들을 바꾸라고 직언했다. 히틀러는 이를 정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분노했다.

그 사이 주코프는 국지적 반격을 시작했고 구데리안과 호트의 기갑군은 막대한 손실을 내며 밀려난다. 구데리안과 호트는 히틀러의 위치 사수 명령을 개죽음이라 판단하고 브라우히치와 보크의 동의하에 철군을 시작한다. 이때 귄터 폰 클루게는 구데리안이 위치 사수 명령을 어기고 철군을 명령하였다며 히틀러에게 고발했고, 결국 구데리안은 1941년 12월 25일부로 지휘권을 박탈당하고 강제로 예편된다.[34] 동시에 히틀러와 군 사이의 강력한 조율자였던 육군 총사령관 브라우히치와 중부집단군 사령관 보크도 해임당한다.

군부 유명인사였던 구데리안은 예편 이후 베를린에서 지내는 동안 그가 왜 전선이 아닌 이곳에 있냐고 묻는 듯한 사람들의 시선을 부담스러워했다. 심해진 협심증을 치료할 겸 요양을 다녀온 그는 사령부에 복귀 요청을 보내지만 카이텔로부터 어렵다는 답장을 받는다. 이후 한동안 패혈증에 걸린 아내를 간병하던 그는 11월 말에 심근경색으로 쓰러진다. 현역 복귀가 불가능해 보이는 데다 건강까지 악화되자, 그는 아예 퇴역하고 아내와 함께 시골에 내려가 지낼 생각을 하며 오스트리아 북부 지방에서 집을 알아본다.

2.5.4. 기갑총감

청색 작전의 실패로 1942년에 다시 소련을 끝장낸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히틀러는 소련의 진보된 공업력의 위력을 실감하고 있었고 미국이 유럽을 되돌리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전간기 착실하게 만들었던 독일의 기갑부대는 거의 증발해 버렸다. 상황을 타개할 구세주가 필요했고 그는 구데리안의 능력이 다시 필요했다. 히틀러는 구데리안을 호출해 자신이 과거 그에 대해 오해가 있었음을 시인하며 사과하고 1943년 3월 1일 기갑 총감에 임명했다. 그는 기갑부대 편성과 훈련을 총괄하는 동시에 전차의 설계와 생산을 감독했다. 구데리안은 알베르트 슈페어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독일 전차들의 생산성과 효율성 향상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그는 4호 전차의 생산을 중요하게 보고 4호 전차를 이용한 각종 마이너한 돌격포와 바리에이션 장비들의 생산을 막았다. 동시에 포병병과에 배속된 각종 자주포들을 기갑병과로 통합 재편성하고자 했으나 포병장교단의 반발로 실패했다.[35] 그가 개발에 참여하지 않았던 5호 전차 판터의 개발 상황을 점검하고는 이 차량의 실전 투입은 아직 멀었음을 주장한다. 포르셰 박사에 의해 추진되던 페르디난트 마우스 전차 계획을 보고는 당혹감을 드러낸다.

그는 성채 작전에 대해 극렬히 반대하였으나 히틀러는 구데리안의 전략적 안목을 불신하였다. 성채 작전은 어린 아이가 보더라도 예측할 수 있는 뻔한 계획으로 구데리안의 이론의 첫번째 조건, 적의 약한 방어선에 기습의 효과를 노린다는 대전제를 완전히 어기는 작전이었다. 한편 성채 작전을 밀어붙이던 귄터 폰 클루게는 기어이 돌아오자마자 또 자신을 반대하는 구데리안에게 완전히 꼭지가 돌아버렸다. 그가 구데리안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사태까지 발생했지만 히틀러가 반대해 실제로 일어나진 않았다.[36][37]

구데리안은 또 신병기를 투입할 때는 충분한 검증이 필요함을 강조하였으나, 히틀러는 신병기 판터가 전쟁을 뒤바꿔 줄 것이라는 망상에 빠져 판터의 양산일정에 공세일을 미루는 삽질을 저지른다. 이런 구데리안의 예견은 불운하게도 정확했으며 히틀러의 삽질은 작전을 말아먹는데 일조한다.[38]

쿠르스크 전투 당시 그는 에리히 폰 만슈타인 발터 모델이 지휘하는 각 집단군을 방문했다. 기갑총감 자격으로 방문한 것이었으므로 현장 지휘는 할 수 없었고, 만슈타인은 지휘권도 없는 사람이 왜 전투가 한창인 전선에 나오냐고 짜증을 내며 부관을 보내 군용 열차 앞에서 대기하던 그를 상대하게 했다.

이 시기에 다른 국방군 장성들과 마찬가지로 히틀러에게서 뇌물로 폴란드의 영지와 저택을 수수했다.[39] 이에 대해서는 만슈타인의 부관 알렉산더 슈탈베르크의 회고록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40]
"구데리안, 자네가 포젠에 영지를 얻었다는 얘길 들었네. 어떻게 구했나?" 구데리안은 폴란드 소재의 고급 저택 목록을 받아 며칠 동안 살펴보고 가장 적합한 것으로 결정했다고 거리낌 없이 말했다. 놀란 만슈타인은 폴란드인 주인 일가가 당시 그곳에 살고 있었냐고 물었다. 구데리안이 그렇다고 답하자 그는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물었다. 구데리안은 자신이 영지를 받았을 무렵 폴란드인들은 이미 없었으며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모른다고 답했다.
만슈타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의 얼굴이 두어 차례 움찔했다. 나는 만슈타인을 잘 아는 만큼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알았다. 그는 그런 영지 취득 방식을 선호하지 않았다.

전후 구데리안이 작성한 문서에는 저택과 영지의 전 주인이었던 폴란드 장교 일가가 죽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거주하게 되었다고 적혀 있다.

2.5.5. 1944년 7월 20일

1943년 3월 말, 폰 라베나우 장군이 구데리안에게 괴르델러 박사를 소개한다. 괴르델러는 히틀러를 당장 실각시켜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암살 계획은 언급되지 않았지만 구데리안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고 쿠데타에 참여하기를 거부한다. 그는 괴르델러에게 계획을 포기하라고 충고하고, 조만간에 전선을 방문해 다른 사령관들이 쿠데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겠다고 약속한다.

거의 직후인 3월 29일, 내내 후방에서 업무에 매진하던 구데리안은 만슈타인이 지휘하는 동부전선의 남부집단군을 방문한다.[41] 2박 3일간 만슈타인의 사령부에서 머무르며 전선을 시찰한 그는 독일로 돌아와 괴르델러에게 현장 사령관들은 쿠데타를 달갑지 않게 여기니 시도를 포기하는 게 좋게다고 통지한다.

이렇듯 쿠데타 참여를 거부하기는 했지만, 구데리안은 관련자들을 고발하거나 계획을 방해하는 대신 당일까지 방관한다. 전후 진술과 회고록의 본인 주장에 의하면 그들을 충분히 신뢰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특히 주모자 중 한 명인 베크의 우유부단함을 우려했다.

사건 당일 구데리안은 호엔잘차에 주둔한 기갑부대를 감찰하기 위해 출장을 떠난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온 그는 산책을 나섰고, 그날 저녁 전화로 암살 시도와 반역 모의가 있었다고 연락을 받는다. 구데리안은 회고록에서 작전이 그날 예정되어 있었음을 몰랐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1943년 3월 만슈타인과 쿠데타 모의에 대해 논의한 것으로 추정되고, 당일 만슈타인도 그와 비슷하게 연락이 닿지 않는 별장으로 떠나 있었음을 생각하면 계획 날짜를 알았을 가능성이 높다. 사건에 연관된 인사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했었으므로 내부 정보를 전달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사건 직후 장군들 사이에서는 반역을 일어나면 주모자가 구데리안일 줄 알았지, 저런 인간들일 줄을 누가 알았겠냐는 반응이 나왔다.

2.5.6. 육군 참모총장

사건 다음날인 1944년 7월 21일, 구데리안은 7월 1일 신경쇠약으로 물러난 쿠르트 차이츨러(Kurt Zeitzler)와 암살 미수사건으로 부상을 입은 참모총장 대리 아돌프 호이징거 중장의 뒤를 이어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히틀러의 육군 장성들에 대한 불신은 이 사건으로 극에 치닿는데 그들과 으르렁거리며 사사건건 치고박고 싸웠던 구데리안은 적어도 히틀러 입장에선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42] 구데리안은 이후 국방군의 나치화를[43] 주도하는 등 히틀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한다. 우선 그는 발터 모델을 중심으로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무너진 동부전선을 재정비한다. 소련은 1944년 전쟁을 끝내려 했지만 그 계획은 보기좋게 실패하고 만다.

구데리안은 이후 소련의 공세를 막고 국경을 안정화시킬 수단으로 오데르 강, 바르타 강을 연결하는 동부 방벽 건설을 구상하고 실행한다. 많은 장성들이 요구한 동부전선의 축소-후퇴한 견고한 방어선 구축이라는 이 계획은 오늘날 구데리안 계획으로 불리고 있다. 기동전의 선구자가 시도한 이 장벽 계획은, 준비 기간도 짧았고, 결정적으로 구데리안이 확보한 병력의 80%가 히틀러에 의해 서부전선으로 차출되며 오직 20%의 병력과 소년들로 유지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 방벽은 소련의 진격을 막지 못하고 단지 늦추는 효과가 있었을 뿐이었다. 다만, 의도와는 전혀 다른 효과가 있었다. 방벽으로 붉은 군대의 침공이 지연되는 동안 수 많은 독일 동부지역 피난민이 독일 서부로 탈출할 수 있게 되었다.[44]

1944년 12월 히틀러가 마지막 기갑전력을 긁어모아 서부에서 공세를 준비하자, 서부전선은 후퇴해서 견고하게 방어선을 짜고 휴전을 유도하고, 모든 기갑부대는 이젠 괴물이 되어버린 소련군을 상대하도록 해야한다고 주장하며 히틀러와 대판 싸웠다. 결국 서부전선에서 히틀러의 도박은 실패했고, 전력이 불충분했던 동부전선의 독일군도 비스와-오데르 공세에서 소련군에 유린당하면서 베를린까지의 길을 활짝 열어주었다.[45] 이후 테오도어 부세가 지휘하던 제9군이 퀴스트린에서 반격 작전을 거하게 말아먹자 히틀러와 언쟁을 벌였으며 여기서 단단히 뚜껑이 열린 히틀러는 1945년 3월 28일 구데리안에게 "그동안 수고 많이 했는데 몸도 안 좋다 하니 6주만 쉬시게"라고 통보한다. 사실상의 해임이었다. 그리고 6주 뒤 독일은 항복한다.[46]

히틀러의 참모 중 그에게 직언을 날릴 수 있는 사람은 구데리안이 마지막이었다. 구데리안이 짤리고 난 이후 편성도 안된 부대에 명령을 날린 다음 수행하지도 않은 작전을 실패했다고 보고하는 참모부의 아름다운 모습은 패러디와 밈으로 자리잡은 영화 몰락 명장면에서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47]

2.6. 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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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1월 5일 뉘른베르크에서 취조받는 구데리안. 장식물을 모두 제거한 국방군 군복 상의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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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1월 24일 증인으로 대기하며 후고 슈페를레, 에르하르트 밀히, 한스 위르겐 슈툼프와 카드를 치는 구데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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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1월 24일 재판 중 식사 시간에 급식을 위해 줄을 선 구데리안 (우측 끝)
구데리안은 1945년 5월 10일 그의 기갑 참모들과 함께 미군에 항복하였으며 1948년 6월 17일 무혐의 석방될 때까지 수감 생활을 하였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는 구데리안의 기소 혐의에 대해서 군인으로서 정당한 자세에 입각했다는 판결을 내렸다. 폴란드는 비츠나 전투 당시 구데리안이 폴란드군 사령관에게 항복하지 않으면 포로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했다는 내용으로 고발하였지만 이는 교전 중인 부대 간에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허풍으로 판단되었고, 폴란드에서 유용했다는 저택 또한 원래 독일의 영토였던 지점에 위치했던 것을 이유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소련은 구데리안의 혐의에 대한 기소를 중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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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뮌헨의 하인츠 구데리안
석방 후 구데리안은 디트람젤 소재의 한 교회에 단칸방을 얻어 아내와 생활한다. 종전까지 유용하던 저택과 사용인을 여럿 쓸 만큼 넉넉했던 재산을 몰수당했으며 연금은 당연히 나오지 않았고 군사 저널 기고로 나오는 변변찮은 고료 외에는 마땅한 수입도 없었기에 한동안 매우 궁핍하게 지내야 했다. 그의 사정을 들은 지인들과 옛 부하들이 식량을 들고 찾아오거나 돈을 보내기도 했다.

1951년 그는 포로 수용소 시절에 집필을 시작한 회고록 <한 군인의 회상(Erinnerungen eines Soldaten)>을 출간한다. 1952년에 <Panzer Leader>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영역판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며 그는 유명세를 얻는다. 당시 리델 하트가 영미권 출판 작업을 도왔는데, 최초로 접근한 영국 출판사는 '자기연민, 국수주의, 군국주의 냄새로 진동하는 책'이라며 원고를 돌려보냈다. 회고록이 어찌나 큰 인기를 끌었는지 독일 안에서도 인쇄 부수가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 1954년 마크 트웨인 협회장이 자서전 분야에 크게 기여한 공로로 그에게 명예 회원 자격을 부여한다.[48]

미국육군사관학교, 영국육군사관학교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후일 독일로 돌아가 서독 연방군 창설에 참여한다. 1950년 리델 하트가 구 국방군 인사들과 접촉하며 새로 창설될 연방군 총사령관 자리의 적임자가 누구인지 조사했을 때 지크프리트 베스트팔 장군이 구데리안을 추천했다. 하트의 편지에서 그 소식을 전해 들은 구데리안은 총사령관 자리에 당시 전범재판에서 갓 18년형을 선고받은 에리히 폰 만슈타인을 참모총장에 베스트팔이나 발터 벵크를 앉히라고 답신했다.

그는 회고록 수익과 아내가 물려받은 고슬라르의 주택을 판 돈으로 퓌센 소재의 새 집을 매입한다. 하지만 얼마 뒤인 1951년 1월과 8월에 급성 담낭염으로 쓰러진다. 1952년 5월에는 식도정맥류 파열로 인한 출혈 때문에 집에서 치료를 받다 뮌헨 대학교 병원에 입원한다. 입원 기간에 문맥 색전증으로 인한 복수 때문에 고생하기도 한다. 항생제로 반복적인 고열과 염증이 잡히지 않자 의사는 담낭 제거술을 권하고, 그는 수술을 받기 전 집에 다녀오고 싶다고 말하며 10월 말에 퇴원한다. 하지만 실제로 수술을 받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건강은 차츰 악화되었고, 1954년에 또 한 번 식도정맥류가 파열한다. 하지만 그는 수혈을 받기를 거부하고 1954년 5월 14일에 65세를 일기로 사망한다.[49]

그는 부인 마르가레테와의 사이에서 아들 둘을 두었다. 장남 하인츠귄터 구데리안(Heinz-Günther Guderian)은 전후 서독의 신생 연방군에서 육군 소장까지 진급, 그 역시 기갑 부대 감찰관으로 활동하였고, 2004년에 9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마찬가지로 기갑병과 군인이었떤 차남 쿠르트 구데리안(Kurt Guderian)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동부전선과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활동했으며 전후에는 연방 정보국에서 일하다 1984년에 6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하인츠귄터 구데리안은 1973년 4월 11일부터 13일까지 포트 녹스를 방문해 당시 미군 준장이던 패튼의 아들을 만났다. 일정에는 패튼 박물관 관람이 포함되었으며, 구데리안 소장은 이곳에 아버지가 동부전선에서 사용하던 지도를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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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츠귄터 구데리안 소장(밝은색 독일군복)과 만난 조지 패튼 준장(모자). 두 번째 사진은 박물관에 전시된 패튼의 콜트.45를 보는 모습이다.

3. 평가 및 논란

3.1. 전차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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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장갑차 안의 구데리안 장군과 에니그마로 통신하는 전차 승무원복 차림의 통신병 및 통신부사관들. 구데리안은 지휘 방법을 전술지도+유선전화에서 쌍안경+무선통신기로 바꾼 장본인이다.

그는 전쟁을 기동전으로 돌려놓았다. 진보된 전차기술을 이용해 전차를 집중 편성 운용해야 한다는 주장은 다른 이들에게도 이미 나왔지만 구데리안은 이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차의 집중운용을 실행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모든 제반과 전차의 개발, 편성, 훈련, 보급, 기동법, 정비 모든 것을 세세한 부분까지 설계하였다. 그리고 화력이 기동력보다 중요하다고 믿는 원로 장성들과 대놓고 대립하며 10여 년간 차근차근 그의 이론을 실현하였다. 동시기, 기동전을 주장한 다른 이론가들은 그 누구도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하였다. 프랑스 전역에서의 대승은 그런 구데리안의 준비와 판단이 없었으면 실현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그는 쌍안경을 매고 직접 전차나 지휘차량을 타 내달리며 두 눈으로 전장의 상황을 파악하고 지휘를 수행한 최초의 야전 사령관이었다. 그는 기동전은 속도가 생명이라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으며, 그 속도의 장점을 극대화 하기 위해 현장의 상황을 두 눈으로 보고 즉각 판단하는 것을 중시하였다. 무선통신이라는 기술이 대중화되어 전화선을 두고 후방의 사령부에 앉아 있어야만 모든 예하부대와 연락이 가능한 시대가 아니었던 것이다.[50] 놀라운 속도에 의해 이름 지어진 전격전이라는 표현의 이유는 전차의 빠르기 뿐만이 아니라 이런 그의 지휘 방법론에서도 찾아야 할 것이다. 이런 그의 지휘 방식은 많은 기갑 지휘관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기갑 부대원들에게 가히 구데리안은 우상[51]과도 같았다.

구데리안은 전차의 발달에도 상당히 기여했다.
1) 구데리안은 모든 전차에 무전기가 필요함을 역설했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독일 전차가 보유한 우수한 무전기는 구데리안과 그의 동료 에리히 펠기벨이 십년 넘게 공들여 개발과 실패를 거듭해 완성한 결과물이었다.
2) 엔진과 포성, 진동으로 소음이 심한 전차 승무원은 모두 헤드폰과 인터컴으로 자유롭게 대화하도록 하였다.
3) 전차장의 역할 정의를 명확하게 내렸고 전차장은 지휘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4) 전차장의 위치는 전차의 가장 높은 곳이자 가장 뒤로 정하고 포탑에 360도의 시계 확보가 가능한 전차장 전용 큐폴라를 설치하여 전차장이 안전하고도 쉽게 전장 전체의 상황을 파악하고 동시에 전차를 통제하여 일사불란한 작전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5) 전차병의 수를 5명, 전차장, 포수, 조종수, 탄약수, 무전수로 고정했다.
6) 전차에 여유 공간을 두게끔 함으로써 추후 업그레이드가 가능하게 하였다.
7) 전차의 포탑은 무조건 보병보다 높은 높이를 확보에 보병이 공격하기 어려운 참호를 내려다보며 공략 할 수 있도록 하였다.
8) 우수한 광학 조준기를 개발하였다. 구데리안은 전차의 효율성을 높이려면 광학조준기의 개발은 필수라고 일찍부터 확신하고 있었다.
9) 전차의 무게 범위를 조정했다. 전차의 3대 요소가 화력, 방어력, 기동력인데 그중 방어력과 기동력은 서로 반비례하는 요소다. 때문에 이런 모순 관계를 극복하고자 전체의 무게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교량을 통과할 수 있는 무게까지 전차를 개발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특히 무전기를 이용한 전차간의 협동전술이나 운용술은 전쟁사를 바꾼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구데리안에 의해 개발된 독일전차 표준 장비 FuG 5 라디오 세트는 1936년부터 보급된 물건으로 격리된 엔진룸, 골전도 마이크와 헤드폰으로 승무원은 자유분방하게 통신이 가능했으며, 125개 프리셋 채널이 제공되어 전차간 통신을 수행했다.
"훗날 됭케르크에서 필사적으로 탈출한 영국대륙원정군 소장 G. LeQ. 마르텔은 아라스에서 반격을 시도했다. 영국군의 전차에는 명령을 위해 무선형 No.7 라디오 세트가 장착되어 있었다. (...) 그는 마틸다 전차와 순항 전차가 의사소통을 위해 수신호와 불빛을 주고받고 보병과 대화를 위해 승하차를 반복하는 동안 에르빈 롬멜은 그의 차량에서 무전기만으로 모든 지휘를 수행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무선형 No.11은 습기에 의해 고장나는 불량이 발견되었다. 양산은 중단됐고 재고는 아프리카 전장으로 보내졌다.
4개의 프리셋 채널은 매뉴얼 주파수 검색을 강요했다. 7기병여단의 그랜트 A. 윌리엄스(Grant A. Williams) 대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물건은 200파운드의 중량을 증가시키고 거의 무조건 빈자리가 없는 주파수를 찾아 매뉴얼 튜닝을 해야했다. 미군 전차 통신병은 전차 트레드의 마찰과 통신기의 노이즈가 서로 상쇄되는 현상을 발견하기 전까지 SCR-193의 노이즈로 인해 고통받았다."

이 좁은 주파수 대역폭은 미국의 포병, 보병, 기갑사단이 다 같이 사용하고 맙니다. 심지어는 미 육군 항공대가 출범하며 주파수 상당수를 차지해버린다.
"미 1기갑 사단은 최소 100개의 채널이 필요했지만 45개의 채널만 쓸 수 있었다. 기갑부대 내에서의 혼란은 극에 달했다." 워슬리 T. 게스트(Wesley T. Guest) 소령.

"새로운 라디오 세트는 기존 SCR-189의 작동에 문제가 되는 두 가지 주요 문제, 즉 제한된 작동 반경과 주파수 범위를 해결했습니다."[52]
인터컴 등이 추가되는 등, 이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radio set을 마련한 시점은 영국 1942년[53] 밸런타인 전차 MK.VII(Wireless Set No.19 mk II), 미군 1942년 셔먼 전차(SCR-508) 소련 44년 T-34-85(9-RS)이다. 물론 소련은 모든 전차에 지급하지 못했으며 만성적인 무전기 부족으로 송신기의 경우 최대 3대당 1대 꼴로 장착했다고 추정된다. 소련은 냉전기까지도 전차간의 통신에 깃발 신호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군의 SCR-5XX 시리즈는 전자통신 기술의 창시자이자 끝판왕인 벨 연구소가 영국으로부터 공여받은 당시 최첨단 진공관을 적용하고 독일 무전기 기능과 사용성을 모방해 구현한 물건으로 셔먼 전차는 별도의 통신수 보직이 필요 없게 만들었다.[54]

3인 포탑의 개념도 구데리안에 의해서 재정립되었다.[55] 먼저 회전 포탑의 개념을 도입했던 프랑스는 포탑에 많은 사람을 수용하려면 할수록 포탑 사이즈가 커져야 하므로 피탄 면적과 은폐의 불리함은 물론이고 중량을 크게 늘리는 바보짓으로 생각하고 있었다.[56] 그런 관점에서 샤르 B1 bis는 극단적으로 모든 승무원을 차체로 옮기고 전차장만 포탑에 배치하여 방어력 대비 기동성을 극대화한 이론상 최강의 디자인이었다.

하지만 구데리안에 의해 독일 전차는 포탑에 많은 인원이 배치됨으로써 전혀 다른 부분에서 비교가 불가능한 이점이 생겼다.
1) 각 승무원이 관측, 조준, 장전을 전담하며 차량의 이론적인 최대 연사속도를 실전에서 유지할 수 있게 된다.
2) 1의 부수적인 효과로 목표물의 추적과 조준은 언제나 유지되므로 연사속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전투 효율이 증대된다. 이해하기 쉽게 반대로 생각해보면 1인 포탑 전차는 주포를 쏘면 관측, 포탑 회전, 조준을, 2인 포탑 전차는 그중 2가지 업무를 처음부터 전부 다시 해야 한다는 소리이다.
3) 또한 주변 관측을 여러 사람이 함께 수행하므로 색적 및 관측 능력이 비교할 수 없이 증대된다.
르노 B1 전차와 3호 전차가 실전에서 조우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쉽게 설명한 영상. 바쁜 사람은 11:00부터 보길 바란다.
한편 그는 전차의 중요한 구성 요소로 공, 수, 주의 밸런스를 주장하였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셋 중 한가지 요소는 버리는 것이 효과적이라 보고 있었다.[57] 그는 이를 3호 전차에 반영하고 이 전차를 통해 엄청난 업적을 새우지만, 그의 이상을 완벽하게 실현한 전차는 아이러니하게도 소련에서 튀어나왔다. 구데리안은 T-34를 당시는 물론이고 전후에도 극찬했다.

3.2. 독창성

리델 하트는 구데리안과 독일 전차 및 기갑전술이 영국과 프랑스 연구자들, 특히 자기 자신에게 매우 큰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전후 그의 치졸한 수작질 때문에 이 낭설이 아직까지도 정설처럼 퍼져 있다.[58] 1948년부터 구데리안에게 접근해 편지를 주고받았던 리델 하트는 회고록 영문 번역판을 출간하고 싶어하는 그에게 '원래는 번역과 감수 작업에 참여하고 서문도 써 주는 대가로 수익의 3분의 1을 받지만, 당신에게는 무료로 해 주겠다'는 말로 꼬드기더니 영문판에 자신의 영향을 받았다는 내용을 추가하라고 요구했다. 전후 고정 수입도 연금도 없이 재정난에 시달리던 구데리안은 그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고, <기갑사령관>이라는 제목으로 영역되어 출간된 책에는 원본에 없던 다음과 같은 단락이 추가된다.
나는 그들(풀러, 리델 하트, 마텔)에게 캉브레 전투 때의 투입 양상과 유사한 전차의 집중을 배웠다. 특히, 기갑 전력을 장거리 타격과 적군 통신교란작전에 쓸 것을 강조하고 전차와 보병전차 부대를 합친 형태의 기갑사단을 제안한 사람은 리델 하트였다. 나는 이를 우리 육군에 적용 가능하도록 발전시키고자 노력했다. 따라서 내가 훗날 우리 쪽 개발을 위해 내놓은 여러 제안은 리델 하트 대위 덕분이었다.[59]
리델 하트가 주창한 간접접근전략은 정면대결로 인한 소모전을 피하기 위해 주전선이 아닌 다른 곳에서 적극적으로 싸워야 한다는 이론으로, 다른 곳으로 안전하고 신속하게 부대를 옮기기 위해 전차나 장갑차를 집중 운용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는 차량을 이용해 기동부대를 만든다는 점 외에는 독일군의 전술과 공통점이 없다. 구데리안과 독일 장교들이 제창한 기갑 교리는 기갑을 주 전력으로 사용하고 무전으로 각 전차가 야전군 사령부까지 유기적으로 연결되도록 하자는 내용이었다.

또한 구데리안이 리델 하트와 주고받은 편지들을 보면, 구데리안은 자신이 1922년에 관련 업무를 맡기 시작하며 전차에 관심이 생겼다고 분명히 해 둔다. 리델 하트의 저서는 1924년에 읽었지만, 그 즈음에는 폴크하임과 협업하고 여러 편의 글을 기고하며 자신만의 교리를 이미 확립해 둔 상태였다. 1934년에 나온 샤를 드골의 책에 영향을 받지는 않았냐는 물음에는 1937년에 독일어 번역판이 나왔을 때 읽었으며, 그때는 이미 독일만의 기갑교리가 확실히 자리 잡은 상태였다고 말한다. 적어도 드골의 책은 1937년에 출간된 <차렷 - 전차!>에 아이만스베르거, 풀러 등의 이론가들의 책과 함께 언급이라도 되지, 리델 하트의 책은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문제는 영미권 연구자들이 구데리안 회고록의 영역본만을 읽고 이 내용을 계속해서 인용하며 수많은 역사서에 '구데리안이 리델 하트와 풀러의 영향을 받았다'는 내용이 정설처럼 쓰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반박하는 연구와 서적이 1970년대부터 계속해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오늘날까지 리델 하트의 억지가 주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구데리안이 영국 군사학자 풀러의 이론을 철저히 벤치마킹했다는 주장도 있었다. 풀러는 1918년 출간한 책에서 항공기와 중전차로 적의 참호선을 분쇄하고 이 구멍으로 다른 고속기동 부대가 들어와 적의 전투 수행 능력을 마비시켜야 한다고 말했고, 2차대전 분석 저술에서는 이것이 1940년 프랑스에서 전격전이라는 전술의 형태로 실현되었다고 주장했다. 물론 전격전은 독일군의 새로운 전술이 아니라 프랑스 전역의 결과에 충격받은 서방 세계가 만들어낸 단어였다. 자세한 내용은 < 전격전의 전설> 참조. 구데리안 평전을 쓴 영국인 케네스 맥시 역시 이 날조가 주류로 받아들여지는 데에 크게 기여한다. 전간기에 구데리안과 풀러가 사적으로 한번 만난 일화를 과장해서 구데리안이 풀러의 제자였다고 주장하고, 구데리안의 <차렷 - 전차!>의 내용이 풀러의 저술과 일치한다고도 주장한다. 구데리안은 참호전이 반복되지 않도록 방어선을 돌파하고 제2방어선이 수립되기 전에 빠르게 전략목표를 선취하기 위해 기동전을 주창했다. 차라리 구데리안에게 크게 영향을 준 동시대의 연구자들을 꼽으라면 그와 전간기에 협업했던 독일의 에른스트 폴크하임 중위, 또는 오스트리아 포병장교 루트비히 폰 아이만스베르거가 있을 것이다.

물론 구데리안이 독일 기갑의 아버지라고 해서 모든 교리와 기술을 혼자 개발해 낸 것은 아니었으며, 리델 하트를 제외한 동시대 연구자들의 선구안적 이론이 그가 훗날 독일만의 기갑교리를 완성하는 과정에 전혀 기여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구데리안이 기동전의 필요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런 기동전을 수행하기 위한 안정적인 통신 체계의 필요성을 느낀 것은 그 자신의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이 시작이었다. 따라서 알려진 바와 같이 그의 기갑교리가 다른 연구자의 발상에서 착안해 독창성 없다는 주장은 틀렸다고 보아야 한다.

3.3. 전략적 안목

후대의 사가 중 일부는 구데리안에 대하여 전술적으로는 탁월했으나 전략적 안목이 부족하다고 혹평한다. 허나 그는 분명 만슈타인의 낫질 작전의 본질을 알고 이를 이행하였으며, 됭케르크의 중요성 또한 인지한 증거들이 보인다.

프랑스 침공 직후 독일 총참모부의 프랑스 전역 전훈 보고서에서 독일군의 압도적 승리의 결정적 이유는, 스당에 도달한 구데리안이 GD보병연대는 교두보를 구축하고 10기갑사단은 스톤 고지에서 역공에 대비시킨 뒤 나머지 부대는 전부 상부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즉시 진격시킨 결정에서 비롯되었다고 분석했다.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7월에 돈강을 도하하고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것에 대한 구데리안의 판단에는 특히 논란이 많다.

구데리안의 판단이 비현실적이고 히틀러의 판단이 옳았다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남동부에 강력한 티모셴코 원수의 소련군 주력부대가 온전한 전력을 유지하고 있어 겨울에 보급로가 위협받게 되고 최악의 경우 샌드위치 신세가 될 수 있으며
2) 우크라이나의 원자재와 식량 자원은 소련의 전쟁 수행 능력의 밑바탕이 되며
3) 모스크바는 고작 2개의 기갑군이 순식간에 함락시킬 수 있는 수준의 도시가 아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그 반증이다.

하지만 위의 3가지 근거는 결과론적으로 모두 무용지물이 된다.
1) 시간을 지체하는 동안 일본의 삽질로 극동지역의 안전함이 확인되어 티모셴코의 부대보다 몇 배 규모의 병력이 모스크바로 넘어오게 된다.
2) 우크라이나 곡창지대와 무관하게 렌드리스 법이 통과되면서 소련은 무한에 가까운 물자를 공급받게 된다.
3) 모스크바는 당시 충분한 기습의 충격을 노릴 정도로 극도의 공황상태였고 이는 10월경 간신히 수습된다.

그의 부대가 보급과 정비의 한계로 공세종말점에 왔다는 주장도 있지만 스몰렌스크의 점령에는 거의 손실이 없었으며, 그 부대를 이끌고 모스크바보다 먼 키예프를 달려가 함락시킨다.[60] 구데리안의 주장이 맞았는지 틀렸는지는 확인할 수 없는 가정이지만,[61] 히틀러의 판단대로 굴러간 결과 지체된 모스크바 공략은 동장군에 의해 처절히 실패함으로써 전쟁은 장기화되고 독일군은 파멸한다. 오히려 구데리안이 전후에도 할더에게 미움받은 부분에서 구데리안의 주장의 진위성 자체를 의심해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물론 히틀러는 바르바로사 작전 계획 당시 모스크바보다 우크라이나 전역과 레닌그라드에 더 관심이 있었고,[62] 이러한 히틀러의 처음 구상대로 밀어붙였다면 중부집단군에 할당했을 병력과 자원으로 남부집단군이 세바스토폴을 더 강하게 압박하여 소련 공군이 세바스토폴 비행장을 통해 독일 석유줄의 핵심이었던 루마니아 유전지대를 타격하는 일을 차단함으로써 독일은 귀중한 석유 자원을 더 보존할 수 있었을 것이고, 중부집단군이 라스푸티차를 무릅쓰고 무리하게 기동하며 비전투 손실이 나며 추위를 피할 곳도 없는 평야에서 공세적으로 기동하다 겨울 폭풍에 장비들이 얼어버리고 코앞의 따뜻한 모스크바에서 튀어나와 반격하는 소련군을 맞아 대량의 장비를 버리고 비전투 손실과 전투 손실의 시너지로 중부집단군에 대재앙이 닥칠 일도 없었을 터였다. 레닌그라드 공격의 경우 동계장비 보급이 원활하지 못해도 북부전선 특성상 라도가 호수에 소련군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포위망만 철저히 지키며 레닌그라드를 완벽하게 고립시켜 약화시키다가 진입해서 점령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고[63] 천천히 안전하게 소련의 전쟁수행능력을 박살내는 면에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이러한 면에서 비교하여 구데리안의 모스크바 올인 전략보다 히틀러의 자원 싸움 전략이 결과적으로 독일을 더 오래 버티게 만들고 승률을 상승시켰을 것이다.

바르바로사 작전 계획 당시부터 제1차 키예프 공방전까지는 구데리안보다 히틀러가 더 옳았지만 구데리안이 좌천되고 난 후 구데리안은 전략적 시각이 점점 최고의 폼으로 올라온 반면 히틀러는 마약 중독이 점점 심해지고 마약 부작용으로 점전 판단력이 흐려지고 있었다.

성채 작전은 구데리안의 기동전 이론에 명백히 위반된다. 적의 주력이 아닌 약한 지점을 돌파해야 하며, 기습의 효과를 노릴 수 있어야 한다. 그는 성채 작전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고 그 결과는 정확했다. 반면 아르덴 대공세의 경우 약점돌파와 기습의 조건은 충분히 충족했으나 노획을 기반으로 한 정신나간 보급계획과 부족한 병력, 제공권 문제로 반대했고 역시나 정확하게 예측대로 말아먹는다.

에르빈 롬멜은 구데리안의 군사이론을 영혼 깊숙히 실천한 인물로 롬멜에 대한 근래의 재평가 중 군 사령부와 합의되지 않은 무절제한 진격 논란은 구데리안도 같이 비판받을 수 있다. 구데리안은 이 문제로 끊임없이 상관들과 싸워 군의 기강을 흔들었고, 병과간에 갈등과 반목을 증가시켰으며, 그들의 전략 수립을 어렵게 만들었다. 단, 대체로 구데리안은 참모부에 오래 근무했으며 전쟁사 연구자로써 롬멜보다는 몇 수 위의 전략적 통찰을 보였다고 평가받는 편이고 본인 스스로도 롬멜의 전략전 안목이 부족함을 여러차례 깠다. 구데리안은 회고록을 통해 1941년 몰타 점령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를 경시한 롬멜의 실수를 질타한다.

구데리안의 군사이론은 적의 주력 군세를 빠른 시간 안에 섬멸하는 전략목표가 전부라는 점에서 그 한계를 나타낸다. 2차 세계대전의 양상은 총력전, 소모전으로 변화했고 이 패러다임에선 그의 기갑군단이 할 수 있는 역할은 크지 않았다. 또한 구데리안의 주창에 의해 독일군은 전술폭격기와 급강하폭격기를 중심으로 양산했지만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영국의 전쟁 수행능력을 파괴하는 데 실패해버렸고, 적대국인 미국과 영국은 막대한 자원력과 자본력을 바탕으로 장거리 전략폭격기를 대규모로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전쟁 수행 능력 자체를 공략하는 쪽으로 전쟁은 변하고 있었다. 결국 제3제국은 주요 대도시와 공업지대들이 무차별적으로 폭격당하며 패망하게 된다.

3.4. 만슈타인과의 인연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히틀러, 육군 총사령관 발터 폰 브라우히치 원수, 참모총장 프란츠 할더 장군 사이의 관계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 소통조차 제대로 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히틀러는 외교 정책상의 이유로 육군 총사령관을 교체할 수 없었다. 구데리안을 육군 총사령관으로, 만슈타인을 참모총장으로 임명하는 것도 하나의 해결책이었겠지만 히틀러 같은 정치가는 이를 결코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빌헬름 황제가 체면을 이유로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의 임명을 미뤘듯, 히틀러도 결코 ' 카스토르와 폴뤼데우케스' 같은 한 쌍을 제 아래에 둘 생각이 없었다.
헤르만 발크 대장, <혼돈 속의 질서(Ordnung im Chaos)>
구데리안은 함께 낫질 작전을 계획하고 프랑스를 점령하는 데에 성공한 에리히 폰 만슈타인과 오랜 시간을 알고 지냈다. 1913년 전쟁대학에서 동기로 처음 만난 이래로 각 장군의 보직을 살펴 보면 그들의 행적이 꾸준히 겹쳤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군생활 초기부터 진급한 시기가 장성을 달기 전까지는 매번 겹친다.[64]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구데리안은 서부전선에, 만슈타인은 동부전선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마주칠 일이 없었겠지만 전간기에는 여러 차례 만난다. 우선 두 사람은 같은 시기에 슈테틴에서 교관으로 근무하며 군사사와 전술을 가르친 전적이 있다. 만슈타인이 먼저 부임하고 구데리안이 더 나중까지 일하기는 했지만, 1924년 8월부터 1925년 7월까지의 근무 기간은 겹친다. 이후 1927년에 소령으로 진급한 후에는 두 사람 모두 베를린 국방부 병무국에서 근무했다. 물론 만슈타인은 작전과에서, 구데리안은 차량수송과에서 근무하기는 했지만 국가방위군은 베르사유 조약 때문에 대규모 군축이 이루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해당 기간에 여러 번 마주쳤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만슈타인은 1931년과 1932년에, 구데리안은 1932년에 군사 교류를 위해 소련을 방문한다.

1932년 중순에 만슈타인은 폴란드 북부의 콜베르크로 보직 이동을 명령받지만, 1934년 2월부터는 베를린 군관구에서 에르빈 폰 비츨레벤의 참모장으로 근무한다. 그리고 1935년 6월에는 총참모본부 참모차장이 된다. 구데리안은 1931년 10월부터 1935년 10월 15일까지 차량수송 총감부와 차량화전투부대 총감부, 기갑부대 사령부 참모장을 역임하며 베를린에서 근무했다. 이후 오스트리아 합병 당시에도 함께 참여한다. 폴란드 전역 때는 각각 남부집단군과 북부집단군에 속했기 때문에 만나지 못했지만 1939년 10월에 남부집단군이 A집단군으로 개명되고 구데리안의 제19기갑군단이 A집단군에 속하게 되어 함께 코블렌츠에 주둔한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대망의 낫질 작전을 고안한다. 프랑스 전역 이후의 행적은 크게 겹치지 않지만, 이후에도 둘은 꾸준히 교류를 이어나간다.

만슈타인과 구데리안이 교류를 이어나간 흔적은 두 사람의 회고록과 주변인의 증언에서 수없이 확인할 수 있다. 먼저 구데리안은 회고록 <한 군인의 회상>에서 만슈타인을 '잘 아는 참모장'이라고 묘사하며 그를 찾아갔다고 서술한다. 폴란드 전역 이후 히틀러가 연설에서 육군 장교들을 모욕했다고 생각한 그는 만슈타인을 찾아가 불평하며 이 문제를 같이 해결해보자고 제안했고, 만슈타인은 그에게 동의하며 같이 룬트슈테트를 찾아가 총통과 면담하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또한 1943년 구데리안은 만슈타인에게 직접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의 진행에 대해 듣기 위해 기갑총감 업무로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 자포로제에 있는 만슈타인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2박 3일간 만슈타인의 사령부에 머무르며 기갑부대를 시찰한 구데리안은 만슈타인의 군사적 재능에 다시 한 번 감탄하며 히틀러가 '만슈타인처럼 유능하고 군인다운 인물을 자기 곁에 두지 않는 상황이 애석하다'고 기록했다. 그는 만슈타인을 '뛰어난 군인 자질에 냉철한 판단력을 지녔고, 독일군 총참모본부의 훈련까지 거친 독일 최고의 전략가였다.'라고 묘사했다.

만슈타인은 회고록 <잃어버린 승리>에서 낫질 작전은 구데리안이 굉장한 열정으로 계획뿐이던 작전을 실행했던 덕분에 성공했다고 썼다. 또한 처음 작전을 설명받은 구데리안이 대규모 병력으로 아르덴 숲을 통과할 수 있다고 판단해주었을 때 깊이 안도했다고도 적었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군인인 만큼 자신의 군사적 능력에 큰 자부심을 가졌던 만슈타인은 어지간해서는 회고록 내내 그가 관여한 모든 작전의 성공을 온전히 자기 덕분이라고 주장하며 자화자찬하는 경향을 보인다.[65] 그렇기에 만슈타인이 그의 군인 커리어 최고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였던 낫질 작전 성공의 공로를 다른 사람과 나눴음은 매우 이례적이다.

두 사람의 회고록에서 보이듯 만슈타인과 구데리안은 서로의 군사적 능력을 몹시 존경했다. 만슈타인은 구데리안의 기갑 교리, 특히 기갑 전력을 한곳으로 집중한다는 핵심 전술을 받아들여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훌륭하게 실행했다.[66] 전후 구데리안은 만슈타인을 군인다운 인물이라고 평가했고,[67] 군사적 재능을 따졌을 때 당연히 만슈타인만이 서독군 총사령관을 맡을 수 있다며 갓 징역 18년형을 선고받아 감옥에 있는 그를 추천했다.

일각에서는 두 사람이 서로의 능력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업무상의 친분을 유지했고 사적으로는 그리 가깝지 않은 사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이 사적으로도 가까웠음을 보여주는 사례도 많다. 1942년부터 종전까지 만슈타인의 부관을 지낸 알렉산더 슈탈베르크의 회고록 <저주스러운 의무: 1932년부터 1945년까지의 회상(Die verdammte Pflicht: Erinnerungen 1932 bis 1945)>에는 1944년 만슈타인이 구데리안과 단둘이 만나 식사를 했던 날이 기록되어 있다. 책에 따르면 만슈타인은 구데리안과 식사를 할 예정이니 기차 식당칸을 잡으라고 말했고, 슈탈베르크는 곧장 상관이 시키는 대로 했다. 회고록의 다른 부분을 보면 슈탈베르크는 만슈타인의 부관으로서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나는 상황에 놓이면 꼬박꼬박 사족을 달아 놓는다.[68] 그러나 구데리안에 대해서는 별 말을 적어 놓지 않는다. 게다가 둘은 술을 마시며 전황을 논하다가 자연스럽게 총통을 험담하기도 한다. 1938년에도 이미 두 사람이 사적으로 만나 히틀러를 뒤에서 욕하는 일이 있었다.[69]

1944년 초에 해임당해 한동안 백수 신세였던 만슈타인은 구데리안에게 '자네라면 할 일 없이 가만히 앉아만 있는 게 얼마나 견디기 힘든지는 잘 알겠지.'라며 신세한탄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만슈타인의 자존심을 생각하면 어지간히 친한 사이가 아니고서야 그런 편지를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70][71]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의 공모자들에게 동참 제의를 받은 구데리안이 가장 먼저 만슈타인에게 이 문제를 상의하고 그와 같은 방식으로 사태에 대처하기로 했던 점, 전후 구데리안과 교류했던 인사들이 그에게 꾸준히 만슈타인의 근황을 전했다는 점[72]을 생각하면 그냥 사무적인 동료 관계는 아니었다고 보아야 한다.

전쟁대학 동기 출신이며 함께 낫질 작전을 고안해 내서 성공시켰다는 임팩트 때문인지 대체역사물에서도 두 사람이 매우 친밀했다는 설정으로 자주 등장한다. 카르카손 작가의 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에서는 출세 욕심에 눈이 돌아가 모두를 견제하고[73] 모두에게 인간말종 취급을 받는 만슈타인이 구데리안에게만큼은 전폭적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심지어는 전공을 세우라며 롬멜의 부대에 있던 신형 전차를 뺏어다 그에게 주기까지 한다. 명원 작가의 이 독일은 총통이 필요해요에서도 만슈타인이 구데리안의 군사적 능력을 인정하는 모습이 보이고,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에서는 사이좋게 감방메이트가 되는 결말을 맞는다. 골드슈타인 작가의 '퓌러라이히: 총통의 제국'에는 베를린으로 잠시 출장을 나왔다 만슈타인과 술을 먹고 그의 집에서 이틀이나 묵는 구데리안이 등장하고, 쿠틀리쿠어 작가의 '페트로그라드의 한국인'에서는 보직 변경을 두고 만나서 대화를 나눌 때 서로를 아예 이름으로 부르며 애틋하게 농담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3.5. 성격과 대인관계

남아 있는 사진 속에서는 위엄 있는 표정이나 귀여운 웃음을 짓고 있지만, 실제 구데리안은 독일 육군의 지랄견이라 불러도 무방한 성격이었다.

프랑스 전역 당시 상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진격을 외친 것은 결코 일회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자유군단 시절부터 사단 참모장 업무를 수행하던 중, 그만 베를린으로 돌아오라는 상부의 명령에 불복종하고 전선에서 버티다가 강제로 송환되었던 전적이 있었다. 병무국 수송과로 배치되었던 데에는 불만을 품고 이전 부대로 다시 보내 달라며 인사과에 전출 신청서를 들고 들락날락거리다 상관에게 혼나기도 했다. 반대하는 상급자가 많았을 기갑병과 창설 과정에서 그가 얼마나 많은 연장자들과 충돌했을지도 빤히 보인다.[74] 앞뒤 다른 행동이나 아첨과도 거리가 지나치게 먼 인간이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솔직하다못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신랄하게 막말을 해대는 지경이었다.

타 병과 장교들과도 사이가 나빴다. 특히 귄터 폰 클루게를 위시한 보병 장교들과 사이가 몹시 나빴다. 클루게와는 1939년 폴란드 전역부터 마찰을 빚은 끝에 1941년에 해임당했고, 1943년에는 결투 신청까지 받을 뻔했다. 바르바로사 작전 때 두 사람을 부하로 두었던 페도어 폰 보크 원수는 둘의 갈등을 중재하느라 작전 내내 애먹었고, 헤르만 발크는 클루게가 모스크바에서 철수하는 구데리안을 고발한 건을 두고 두 사람이 사이가 안 좋은 걸 알면서도 같은 집단군에 넣어버린 인사처의 실책이었다고 할 정도였다.[75]

상급자들은 그의 솔직하고 자기주장 강한 태도를 싫어했지만 하급자들은 이를 굉장한 매력으로 여기며 구데리안을 좋아했다. 부하들과 거리를 두거나 권위적으로 행동하는 다른 장군들과 달리 구데리안은 부하들과 가깝게 지냈다. 야전에서 사령관으로 활동하던 시절에는 휘하 장교들부터 사병들에게까지도 신경을 썼고 하급자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그들의 고충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덕분에 독일 기갑병들은 안 그래도 '기갑전의 아버지'라고 불리던 구데리안을 더욱 사랑하며 그에게 '전선에 계신 또 한 분의 아버지' 등의 칭호를 붙이기도 했다. 남아 있는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영상들을 보면 구데리안이 다가오자 싱글벙글 웃으며 경례하는 군인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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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러시아의 하인츠 구데리안. 제4기갑사단 소속 중대장 헬무트 크라우체 중위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다.

희한할 정도로 타국 장교들에게도 사랑받았다. 1947년 한 프랑스 장군은 구데리안에 대해 "그의 가장 큰 특징은 잘 잡힌 균형이다. 강인한 신체, 활기찬 움직임, 생동감 넘치는 표정. 그의 밝은 푸른색 눈은 장난기 섞인 선량함으로 빛난다. 교양 있고 상식적이며 철저하면서도 융통성 있게 섬세하다. 계산되지 않은 대담함을 지닌 행동파임이 분명하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장교는 이에 "때로는 웃음을, 때로는 단단하게 관통하는 듯한 생동감과 날카로움을 띠며 뛰어난 지성을 내비치는 눈빛이 아니었다면 결코 그만큼 눈에 띄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전후 구데리안이 구금되어 있던 미군 포로수용소의 심문관들은 그를 마음에 들어했다. 육군성 심문위원회의 조지 슈스터 박사는 구데리안을 미국으로 보내고 여름 동안 코네티컷에 있는 집에서 그와 자유롭게 대화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3.5.1. 관련 일화

  • 할더는 1940년 초 일지에 ' 펠기벨에게 구데리안이 우리 통신을 도청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도록 할 것.'이라고 적어 두었다. 구데리안이 통신을 엿듣다가 단어 하나하나에 꼬투리를 잡고 난리를 쳐대는 바람에 애초에 듣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한 것이다.
  • 폴란드 전역 때 구데리안은 처음에는 보병 예비군단을 배정받았다. 부하 헤르만 발크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당연하게도 엄청난 소동을 일으켰고' 그 결과 기갑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 기갑총감으로 있던 당시 한 하급장교에 대해 '총참모본부 새끼들처럼 무능하다'고 욕설을 한 적이 있었다. 이를 전해들은 육군 참모총장 쿠르트 차이츨러는 구데리안에게 실제로 그런 발언을 했냐며 해명해 보라고 편지를 보냈다. 구데리안은 이 편지에 답장도 하지 않았고, 차이츨러는 이 사실을 히틀러에게 말해 구데리안에게 편지에 답장하라고 연락해 달라고 부탁해야 했다.
  • 헤르만 발크는 당초 구데리안은 기갑으로만 구성된 군대를 만들고 싶어했고, 너무 급진적이었던 그의 이론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에도 미친 사람처럼 그 이론을 지키기 위해 싸워댔다고 증언했다. '상급자가 눈에 띄기가 무섭게 그의 목을 조르고 탈탈 흔들기에 바빴다'고.
  • 전간기 육군 최고사령부에서는 육군 군수물자 생산부장 아돌프 셸 대령을 구데리안과 같은 부서에 배치해 놓고 견제용으로 활용했다. 셸은 출세에 목말라 있던 인물이었기에 그 역할을 효과적으로 해냈고, 구데리안과 사사건건 충돌하며 부하들을 괴롭게 만들었다. 이하는 당시 두 사람 사이에 끼어 고통받았던 헤르만 발크의 전후 인터뷰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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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셸과 구데리안의 갈등이 얼마나 심했던지 무슨 일이라도 처리하려면 항상 상대가 반대한다고 말해야 했다. 그러니까, 구데리안에게 가서 '이 일을 처리해야 하는데, 셸이 반대합니다.' 라고 말하면 구데리안이 즉시 '셸이 반대한다고! 당장 처리해버리자.' 라고 말했다. 그 다음 셸에게 가서 반대로 구데리안이 반대한다고 말했고, 셸은 '이런, 그럼 무조건 해야겠군!'이라고 말했다.


    이런 일이 여러 번 반복된 후 나는 구데리안에게 가서 '장군님, 저희는 가까운 사이니까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와 셸의 갈등 때문에 기갑 장비 생산이 진전되지를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런 다음 그와 셸 사이에서 벌였던 일에 대해 설명했다. 구데리안은 웃고 웃고 웃어대며 '좋아. 셸한테 가서 방금 내용을 그대로 말하고, 내가 일의 진전을 위해 갈등을 해결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전하게.'라고 했다.


    내가 셸에게 가서 똑같은 말을 하자 셸은 크게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 '자네 말고는 누구도 나한테 그런 말을 못 했을 걸세.' 결국 셸과 구데리안의 갈등은 해결되지 않았고 나는 그 어이없는 짓을 계속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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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클루게의 제4기갑군이 사라지자 기가 살아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며 매우 기뻐했다.
  • 클루게의 음모 때문에 자신이 제2기갑군 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다고 굳게 믿고, 1943년 5월 뮌헨에서 성채 작전의 논의를 위한 회의가 열렸을 때 클루게와 약 17개월만에 재회해서는 악수를 거부했다. 클루게는 즉시 구데리안을 밖으로 불러내 해명해 보라고 했고, 구데리안은 그 때문에 심각한 피해를 입어 건강이 나빠졌으니 보상받아야겠다고 대답했다. 클루게는 대화를 포기했고, 두 사람은 회의 내내 서로와 상종하지 않았다. 이후 클루게가 구데리안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싶다고 히틀러에게 요청하자, 히틀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구데리안에게 사과 편지를 보내라고 했다. 구데리안은 클루게에게 뮌헨에서 모욕한 것은 사과하지만 1941년의 부당한 처우는 잊지도 용서하지도 않겠다고 마지못해 편지를 썼다. 아래는 이와 관련해 구데리안의 회고록 초고에 쓰여 있었으나 교정 과정에서 통째로 지워진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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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뮌헨에서 열린 회의는 군사적 요소 외에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개인적인 경험이 있었다. 1941년 12월의 사건들 이후 이곳에서 처음으로 폰 클루게 원수를 만나게 된 것이다. 나는 그가 회의장에 들어설 때 손을 들어 원수 계급장에 경례했지만, 나를 향해 뻗은 그의 오른손 두 손가락은 무시했다. 폰 클루게 씨는 '그렇단 말이지.'라고 대답했고, 회의가 끝난 후 나를 옆방으로 불러서 내 행동의 이유를 물었다. 나는 그가 1941년 총통에게 고의로 나에 대한 허위 보고를 함으로 인해 내 군경력을 부당하게 짓밟았으며, 병사들이 어려운 상황에서 사령관을 잃게 만들었고, 당시의 흥분 때문에 내 건강이 심하게 손상됐다고 말했다. 그러자 폰 클루게는 '그럼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겠군.'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의견에 동감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 슈문트 장군이 베를린에서 나를 불러 폰 클루게 씨가 히틀러에게 쓴, 내게 결투를 신청한다는 편지를 주자 나는 더욱 놀랐다. 원수가 장군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히틀러를 입회인으로 선택하다니! 폰 클루게 씨는 결투가 금지되어 있으며 히틀러가 전시에 장군들이 결투를 벌이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히틀러를 입회인으로 선택했다면 거기엔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이 사실은 이 문제에 심각성을 더했다. 슈문트는 히틀러를 대신해 내게 총통이 결투를 원하지 않으며, 이런 심각한 시기에 고위 장군들 간의 충돌을 원치도 않으니 적절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라고 요청했다고 말했다. 나는 총통의 뜻에 따르고 슈문트에게 내 대처를 보고하겠다고 답했다. 나는 폰 클루게 씨에게 뮌헨 회의에서의 나의 행동으로 그를 불쾌하게 한 것을 유감스럽게 여기지만 1941년에 그가 나에게 가한 심각한, 처벌받지 않은 범죄를 고려하면 다른 방도가 없었다고 편지를 썼다. 그런 다음 그에게 높은 계급을 이용해 군 전체의 이익을 위한 나의 실용적인 기갑부대 업무나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 폰 클루게는 전쟁이 끝난 후에 추진해보겠다고 답장했다. 그 후 몇 달간 폰 클루게 씨에게선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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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년 초에 소련 침공이 확정되었음을 회의에 다녀온 참모장과 부참모장이 전달하자 그 자리에서 욕을 쏟아내 부하들을 당황시켰다.
  • 1941년 내내 구데리안의 직속 상관이었던 보크는 일기에 수차례 구데리안이 전화를 걸어 투덜거리고 짜증을 내는 것을 달래느라 애먹었다는 내용을 기록해 놓았다.
  • 1941년 8월 키예프 진군 명령을 받고 히틀러에게 따지러 갔다가 전선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동승한 부관에게 히틀러를 마구 욕해댔다.
  • 1943년 기갑총감부에서 대위로 근무하던 한 병사의 전후 증언에 따르면, 히틀러가 군비에 관해 내린 새 명령에 반발하며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그놈은 총 맞아야 해!(Der Kerl müsste erschossen werden!)"라고 고함쳤다.
  • 바르바로사 작전 때 구데리안의 부하였던 하인리히 에버바흐 기갑대장은 구데리안이 "총통은 미쳤어!"라고 말하며 히틀러를 붙잡아 감금하되 목숨은 붙여 놓고 측근 전체를 청산하자고 주장했고, 그렇기 때문에 구데리안이 총통을 비롯한 고위층을 모조리 총살하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 참모총장으로 있던 전쟁 말에는 오시마 일본 대사와 대사관에서 점심을 먹으며 반주를 하고 와서는 술에 취한 채 회의에 들어와서 히틀러에게 소리를 질러댔다. 쿠를란트의 독일군을 철수시켜 발트 해로 이동시켜야 한다는 주장에 히틀러가 반대하자 언쟁을 시작한 것이다. 그날 회의에 참석했던 알베르트 슈페어는 그날의 사건을 두고 히틀러의 권위가 해체되기 시작하는 신호탄이었을지도 모른다고 회고했다.
  • 막말하는 성질머리는 군 외적인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였기에, 독실한 루터교 신자였음에도 라스푸티차가 닥쳐와 빠른 진격이 어려워지자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러운 장난질을 치고 있다'고 불평하기도 했다.
  • 전후 리델 하트와 주고받은 편지에서는 트루먼 대통령이 변덕으로 정치를 하는 도박꾼이라고 적었다.[76]
  • 1950년에 그를 관찰하려고 찾아간 CIA 요원은 구데리안이 지나치게 솔직해서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 문제 삼을 수 있는 발언을 많이 한다고 평가했다.

3.6. 히틀러, 나치즘과 전쟁 범죄

구데리안은 기갑부대의 창설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준 히틀러에게 호감을 가졌었다. 히틀러 역시 그를 꽤 신뢰했으며 사적으로 몇 차례 식사를 하는 등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1941년에는 히틀러가 구데리안의 말을 잘 들어준다고 생각한 프로이센 원로 장성들이 키예프 진군 계획 수정 요청을 구데리안을 통해 시킨 적도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정식 군사 교육을 거쳐 온 다른 장교들과 마찬가지로 히틀러를 무시했다. 회고록에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의 승리를 보고는 히틀러가 만슈타인을 기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하며 만슈타인 같은 천재 엘리트 장교는 히틀러 같은 출신이 변변찮으며 고집만 세지 현실은 볼 줄도 모르는 군사 아마추어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적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후 육군 참모총장 업무까지 도맡게 된 구데리안은 끊임없이 히틀러와 군사적 견해로 충돌을 일으켰다.

히틀러와의 관계와 별개로 그가 열렬한 나치였는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그는 전쟁에 필요하다면 괴벨스, 힘러, 리벤트로프와 같은 고위 나치 인사들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했지만 동시에 그들을 개인적으로 가까이하지 않았다. 특히 그는 SS 장교들을 사상 덕분에 한자리나 차지해서 전쟁 진행을 방해하는 아마추어 취급하며 힘러를 무시했으며 공공연하게 자우허와 보어만을 혐오했다. 구데리안이 개인적 친분을 유지한 것은 전범행위에 비교적 덜 적극적이었던 슈페어와 디트리히 정도였다. 또한 야전사령관 시절 그의 휘하에 있던 군인들은 그가 현장에서 정치적 언급을 일절 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후 관련자들에 대한 명예재판에 참석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무고하게 엮여들어간 동료들과 부하들을 구하기도 했다. 그가 히틀러의 신임을 얻기 위해 재판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한때 동료였던 군인들을 잡아넣었다는 증언[77]도 있지만 그보다는 구데리안이 수용소에 끌려갈 뻔한 지인들을 변호하고 보증했다는 증언이 더 많다. 가령, 계획에 참여했다 처형당한 에리히 펠기벨 육군 통신대장의 가족이 연좌제로 수용소에 끌려가자 그들을 구해냈다. 당시 동부전선 정보국장이자 훗날 CIA의 승인 하에서 정보조직 '겔렌 조직'을 만든 것으로 유명해진 라인하르트 겔렌 장군은 평소 나치에 그다지 충성스럽게 굴지 않았으며 암살계획에 관여한 지인이 많았던 데다, 정보 조직을 전부 독점하려는 SS의 계획에 따라 체포당할 뻔했으나 구데리안 덕분에 직책과 목숨을 모두 보전할 수 있었다. 또한, 당시 주요 포섭 대상에 구데리안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에서 암살 계획의 주모자들이 그를 히틀러에 충성하는 나치로 여기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다.[78]

그러나 그는 나치의 인종주의적 사상에도, 전범 행위에도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육군 참모총장 취임 이후인 1944년 8월 25일에 참모장교들에게 내린 명령서에는 "귀관들보다 더 열광적으로 승리를 믿고 믿음을 발산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된다. (중략) 나치즘 없이 제국의 미래는 없다. 그러니 국가사회주의의 제국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라."[79]라고 적혀 있었다. 영국 정보부에 따르면 전쟁 이후 1950년에 나치 추종자들의 후조직이었던 브루더샤프트(Bruderschaft)라는 단체에 속했다.[80] 전쟁범죄에 대해 재판받지 않았다는 사실도 마냥 받아들일 수는 없다. 전후 폴란드에서 바르샤바 봉기 무력진압과 관련해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그를 재판정에 세우려고 했지만 미군의 개입으로 무산되었다.[81]

또한 그는 다른 국방군 장교들과 마찬가지로 전쟁범죄에 반발하지 않고 명령을 그대로 하달했다. 구데리안은 뉘른베르크 군사재판 당시 취조 및 진술 기록과 회고록에서 전쟁범죄 명령은 윗선이나 자신의 선에서 반려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당시에는 명료한 반박 증언이나 증거물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군사재판을 피할 수 있었다. 포로 석방 이후 독일 남부에 거주할 때도 뮌헨 시에서 그를 전범재판에 회부하려 했지만 증거가 부족한 데다 전쟁 동안 구데리안 밑에서 일했던 군인들 수십 명이 그가 무고함을 두둔하는 진술서를 보냈던 탓에 결국 재판은 무산되었다.[82] 대학 동기이자 비슷한 군사 커리어를 밟아온 동료 만슈타인이 학살에 대한 적극적인 협조로 18년형을 선고받은 것과는 대조적이었다.[83]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그의 주장에 반하는 진술과 증거물이 차차 나오고 있다.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그의 제2기갑집단 소속 제47기갑군단장이었던 요아힘 레멜센 장군은 공산주의자로 보이는 포로는 장교가 명령하는 대로 집행부대에서 즉시 따로 총살했다고 증언했다. 해당 군단 소속 제17기갑사단 참모장은 '정치장교 명령'이 구데리안의 직접 지시로 전달되었다고 증언했다. 또한 제2기갑집단은 1941년 6월 22일부터 10월 31일까지 공식적으로 196명의 정치장교를 총살했다. 전후에 제24군단 휘하 제3기갑사단 소속의 야코프 카펠 상병이 포로 수용소에서 '러시아에서 포로를 잡으면 정치장교들을 곧장 총살했다.'라고 말하는 것이 도청되기도 했다.[84] 즉, 구데리안은 그의 전후 증언과 달리 부하들에게 정치장교 명령을 하달해 충실하게 이행하도록 했다.

무엇보다도 확실한 것은 그가 열렬한 국수주의자이자 인종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 구데리안은 1919년 아내에게 보낸 편지 여러 장에서 볼셰비키들을 연쇄 살인마로, 슬라브인들을 야만인으로 묘사하며 혐오감을 숨기지 않는다.[85] 또한 그는 히틀러가 갓 집권했을 무렵 독일을 위대하게 만들어줄 인물이 나타났다고 즐거워했으며 전쟁 기간에는 나치 당원이었던 아내의 정치적 조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전후 뉘른베르크에서 다른 장교들에게 '나치즘의 본질적 이념에는 문제가 없었다.'고 발언한 것을 도청당하기도 했다. 이런 사실에서 미루어 보았을 때 그가 나치즘에 당대의 보통 군인들만큼 동의하고 독일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어줄 히틀러를 따랐을 가능성이 높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조리와 부차적 피해, 특히 '하등한 인종'에 대한 노역 동원과 대량 학살에는 별 문제 의식을 느끼지 못한 채 말이다. 후방 보직임에도 끊임없이 현장을 파악하기 위해 전선을 시찰하던 기갑총감 시절이나 육군 참모총장의 지위에서 전선에서 들어온 대부분의 정보에 접근할 수 있던 시절에 전쟁범죄의 발생 자체를 몰랐을 가능성은 적다. 서류로 올라오는 정보 외에도 아들 하인츠 귄터가 직접 목격한 전쟁범죄 사건들을 전달했기에 충분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전혀 반성하지 않았다. 바르샤바 봉기 무력진압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을 회피했고, 민간인에 대한 폭력과 학살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국방군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몰랐다는 논리로 일관했다. 회고록이나 전후 여러 사람과 주고받은 편지에서 반성하는 기색을 보이기는커녕 전쟁범죄를 언급하지도 않았다. 그의 입장에서는 국가에 충성하는 순수한 군인으로서 전쟁에 임했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전쟁범죄에 협조했으며 나치즘의 인종주의 이념을 토대로 한 인종범죄를 방조했다는 점에서 결코 깨끗할 수 없다.

3.7. 회고록

구데리안의 회고록은 전쟁 직후에 쓰여 2차 대전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매우 중요한 1차 사료이다. 전쟁과 각 전역의 진행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으며 히틀러를 비롯한 제3제국의 주요 인사들에 대한 묘사가 섬세하고 사실적인 편이라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자기 변호적으로 쓰이기 마련인 회고록의 특성상 그 내용을 완전히 신뢰하기는 어렵다. 세세한 전투에 대한 묘사는 신뢰할 만한 반면, 정치장교 명령을 비롯한 전쟁 범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전쟁 말기에 관한 그의 행적은 회고록에 서술된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특히 구 국방군 인사들의 회고록이 대부분 그렇듯 전장에서의 실책은 히틀러나 다른 장군들에게, 학살과 전쟁 범죄에 대한 책임은 힘러에게 떠넘기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기갑 병과를 탄생시키는데 들어간 여러 사람들의 공적이나 업적을 지나치게 본인과 몇 사람 위주의 업적으로 기술했다는 문제도 있다.

무엇보다도 전쟁 직후에 쓰인 책인 만큼 전후의 이해관계에 따른 요소들이 반영되어 있다. 국방군의 밝은 면만을 조명하고 전쟁 범죄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외부에게 떠넘기며 국방군은 그저 군인의 본분을 다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덕분에, 만슈타인의 회고록 <잃어버린 승리>와 마찬가지로 깨끗한 국방군 신화를 기반으로 한 팬덤을 형성하는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친다고 지적받는다. 게다가 책이 당대의 베스트셀러가 되어 불티나게 팔리는 동안 냉전과 동서독 분열의 영향으로 이러한 문제들이 수십 년 동안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4. 기타

  • 군사 업무에 대한 열정과 별개로 전시를 관람하거나 음악을 감상하기를 즐기기도 했다. 하지만 본인은 음치였던 탓에 사관학교 재학 시절 생도 합창단에서 퇴출당했다.
  • 사냥을 즐겼다. 일기에 첫 숫사슴을 잡았던 때의 이야기를 비롯한 각종 경험을 남겨 두었으며, 나이를 먹고는 사냥을 가겠다고 정식 휴가를 신청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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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사냥한 사슴을 앞에 두고 찍은 사진
  • 사관학교 시절 썼던 일기가 남아 있는데, 이때부터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던 모양이다. 동료들에게 내향적으로 굴지 말고 무리에 좀 끼라는 핀잔을 듣고는 일기에 '어차피 내 말을 반절도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과 왜 대화를 나눠야 하냐'며 불만을 토로했다.
  • 베를린에서 이틀 동안 친 사관후보생 시험 때 첫날은 라틴어, 수학, 영어와 프랑스어 시험을, 둘째날은 제도, 물리학, 역사학, 지리학, 독일어 시험을 봤다. 다른 과목은 모두 잘 봤지만 첫 시험이었던 라틴어는 제대로 말아먹었다.
  • 공식 문서 기준 모국어인 독일어 외에 프랑스어와 영어를 구사한다. 프랑스어에는 1920년대에 통역사 자격증을 딸 만큼 능숙했고 영어는 무리 없이 책을 읽고 글을 쓸 만큼의 실력이었다. 이 훌륭한 프랑스어 실력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그가 프랑스 군인들에게 존경과 애정을 받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 전쟁대학 신입생 시절에 결혼식을 올리는 바람에 신혼여행을 5일밖에 다녀오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당시 전쟁대학 1학년에게 허락된 휴가는 최대 5일뿐이었다.
  • 굉장한 사랑꾼으로, 아내와 금슬이 아주 좋았다. 약혼 시절부터 주고받았던 편지들이 모두 남아 있는데, '나의 작은 아가씨', '그레텔' 등의 애칭을 써 가며 사흘에 한 번 꼴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편지가 오간 빈도는 러시아 한복판에서 머무르던 바르바로사 작전 때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 아내 마르가레테는 정치적 감각이 좋았다. 진급 욕심은 있지만 정치감각이나 성격상의 문제(...)로 다양한 곤경에 처할 것이 분명했을 남편을 여러모로 도왔다. 마르가레테는 구데리안이 참모총장으로 초센의 육군 최고사령부 건물에서 근무하던 시절, 평소라면 베를린으로 향했을 폭격기가 남쪽으로 가는 것을 보고 남편에게 곧장 연락해 폭격을 예고했으며,[86] 전후 바르샤바 봉기 무력진압 건으로 폴란드군 측에서 구데리안을 송환하려고 할 때, 미군 사령부와 연락하며 그를 전사과로 빼내 강제 송환을 막기도 했다. 장남 하인츠귄터는 훗날 그의 어머니가 아버지의 참모장이나 다름없었다고 말했다.
  • 롬멜이 총애했던 군인인 한스 폰 루크의 회고록 '롬멜과 함께 전선에서'의 내용에서 1943년 한스 폰 루크가 북아프리카의 군대를 후퇴시키려는 작전의 승인을 위해 구데리안을 포함해 알베르트 케셀링, 루돌프 슈문트 등 여러 장성의 사인을 받으려 돌아다닐 당시 구데리안의 제안으로 퓌어 야레스자이텐 호텔에서 롬멜과 구데리안의 회동이 있었다고 한다.
  • 닮은꼴로 가장 자주 꼽히는 동물은 수달이다.
  • 웃을 때 보조개가 진하게 파이는 모습이 특징적이다.
    파일:폴란드전역웃는짤.gif
  • 다른 나라 군인들에게 기동전 이론과 경험을 직접 강의한 적이 세 번 있다. 한 번은 1941년 연수를 온 일본 육군의 장교들이었으며,[87] 종전 후 1948년에는 미국과 영국의 육군사관학교에서 강의를 진행했다.
  • 서방국들의 6.25 전쟁 참전에 회의적이었다. 극동 전선에 병력을 투입하면 서독의 방어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며 맥아더 브래들리가 반대하지는 않았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 기갑총감이 되고 티거를 여성화한 '엘비라 티거'라는 여성과 친해지는 법을 배움으로써 티거를 능숙하게 조종할 수 있게 되는 만화로 제작된 매뉴얼 티거 피벨 판터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역시 만화로 제작된 매뉴얼 판터 피벨도 정식 교범으로 인가했다.
  • 전후 집필한 회고록 <한 군인의 회상>이 2014년 12월에 대한민국에도 정발되었다. 출판사는 이미지프레임( 길찾기), 번역은 이수영. 많은 이들의 우려와 달리 이동훈 발번역도, 영문판 중역본도 아니라 독어판 원서 직역을 했다.[88]
  • 2017년 좋은땅출판사에서 케네스 맥시의 구데리안 평전을 <히틀러의 장군들 2 : 구데리안 평전>으로 한국에 출판했다. 오늘날의 전격전과 구데리안에 대한 통념을 많이 정립시킨 책으로 정주용씨의 번역으로 번역 퀄리티는 수준급이며, 원저가 1975년작인 점을 감안 중간 중간에 후대에 이 책에 대한 반박이나 오류에 대해 균형감 있게 읽을 수 있도록 참고 주석을 달아 놓는 배려도 훌륭한 포인트이다. 다만 이 책을 반박한 저서로 주로 러셀 하트의 책을 많이 인용하는데, 러셀 하트의 구데리안 평전은 케네스 맥시의 평전을 절반 이상 베껴 온 데다 그마저도 인용 장난질을 하고 말도 안 되는 억측을 늘어놓는 등 문제가 많은 책이므로 읽을 때 참고할 필요가 있다.
  • 아마추어 밀덕들 사이에 논란이 되는 독일 전차의 기동사격 능력에 대해, 구데리안은 명확하게 이미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전인 1930년대부터 전차의 핵심 요소로 기동사격 능력을 강조하고 있었다. 돌격대는 참호로 돌격하며 전투할 수 없지만 전차는 엔진이 탑재되고 사람은 전투를 할 수 있다는 점을 주목했다.[89] 그래서 그는 전차를 개발하고 전술 교리를 만들때 기동사격을 매우 중시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아마추어 군사무기 매니아들이 관심을 갖는, 무슨 마상 활쏘기 같은 게임속 전차전을 상정한 것이 아니라 고정된 방어선을 고속으로 근접하며 빠르게 제압하는 현실을 상정한 것이었다.

5. 주요 보직 내역

  • 1907.2.28 : 육군 입대
  • 1907.2.28 ~ 1907.4.10 : 10 엽병대대 장교훈련과정 수료
  • 1907.4.10 ~ 1907.12.14 : 메츠 사관학교 배속
  • 1910.6.28 ~ 1910.7.28 : 10수색대대 배속
  • 1912.10.1 ~ 1913.10.1 : 코블렌츠 주둔 3무선통신대대 배속
  • 1913.10.1 ~ 1914.8.2 : 베를린 육군대학 파견
  • 1914.8.2 ~ 1914.10.4 : 5기병사단 직할 3무선통신기지장
  • 1914.10.4 ~ 1915.5.17 : 4야전군 직할 4무선통신기지장
  • 1917.4.3 ~ 1917.4.27 : 4사단 참모부 선임보급장교
  • 1920.1.16 ~ 1920.5.16 : 고슬라르 주둔 10엽병대대 3중대장
  • 1920.5.16 ~ 1920.9.8 : 20보병연대 독립중대장
  • 1920.9.8 ~ 1922.1.16 : 17보병연대 제3대대 중대장
  • 1922.1.16 ~ 1922.4.1 : 7차량수송대대 배속
  • 1924.10.1 ~ 1927.10.1 : 슈테틴 주둔 2사단 일반참모장교, 보조 지휘과정 훈련교관
  • 1927.10.1 ~ 1930.2.1 : 국방부 병력동원국 육군실 배속
  • 1928.10.1 ~ 1930.1.31 : 차량수송 전술교관
  • 1930.2.1 ~ 1931.10.1 : 3차량수송대대장
  • 1931.10.1 ~ 1934.7.1 : 차량수송총감부 참모장
  • 1934.7.1 ~ 1935.6.27 : 차량화전투부대 총감부 참모장
  • 1935.9.27 ~ 1935.10.15 : 기갑부대 사령부 참모장
  • 1935.10.15 ~ 1938.2.4 : 뷔르츠부르크 주둔 2기갑사단장
  • 1938.2.4 ~ 1938.4.1 : 기갑부대 사령관
  • 1938.4.1 ~ 1938.11.24 : 16군단장
  • 1938.11.24 ~ 1939.8.26 : 고속기동부대 사령관
  • 1939.8.26 ~ 1940.6.1 : 19군단장
  • 1940.6.1 ~ 1940.6.30 : 구데리안 기갑집단장
  • 1940.7.1 ~ 1940.11.16 : 19군단장
  • 1940.11.16 ~ 1941.7.28 : 2기갑집단장
  • 1941.7.28 ~ 1941.8.3 : 구데리안 군집단 사령관(2기갑군 지휘권 인수)
  • 1941.8.3 ~ 1941.10.5 : 2기갑집단장
  • 1941.10.5 ~ 1941.12.26 : 2기갑군 사령관
  • 1941.12.26 ~ 1942.1.16 : 2기갑군 지휘권 박탈, 지휘관 예비 대기발령
  • 1943.2.28 ~ 1945.3.28 : 기갑총감
  • 1944.7.21 ~ 1945.3.28 : 육군참모총장
  • 1945.3.28 ~ 1945.5.1 : 휴양 조치
  • 1945.5.1 ~ 1945.5.10 : 티롤 지역 기갑부대 감찰관(제국 대통령 카를 되니츠 제독 특별지시)

6. 진급 내역

  • 1907.2.28. : 육군 사관후보생(Fähnrich)
  • 1908.1.27. : 파일:Si_12c.jpg 소위(Leutnant)
  • 1914.11.18. : 파일:Si_11c.jpg 중위(Oberleutnant)
  • 1915.12.18. : 파일:Si_10c.jpg 대위(Hauptmann)
  • 1927.2.1. : 파일:Si_9b.jpg 소령(Major)
  • 1931.2.1. : 파일:Si_8b.jpg 중령(Oberstleutnant)
  • 1933.10.1. : 파일:Si_7b.jpg 대령(Oberst)
  • 1936.8.1. : 파일:Si_6a.png 소장(Generalmajor)
  • 1938.2.10. : 파일:Si_5a.png 중장(Generalleutnant)
  • 1938.11.23. : 파일:Si_4b.png 기갑대장(General der Panzertruppe)
  • 1940.7.19. : 파일:Si_4a.png 상급대장(Generaloberst)

7. 주요 수훈 내역

  • 1914.9.17. : 1914년 제정 2급 철십자 훈장
  • 1914.11.8. : 1914년 제정 1급 철십자 훈장
  • 1938.3.13. : 오스트리아 점령 기념장
  • 1939.9.5. : 1939년 제정 2급 철십자 훈장 보장
  • 1939.9.13. : 1939년 제정 1급 철십자 훈장 보장
  • 1939.10.27. : 기사 철십자 훈장(3번째 수훈)
  • 1940.(날짜 미상) : 전차 출격 휘장 은장[90][91]
  • 1941.7.17. : 곡엽 기사 철십자 훈장(24번째 수훈)

8. 등장 매체

  • T-34(영화)에 기갑장교인 주인공 클라우스 예거를 아끼는 상관으로 등장한다. 기갑총감을 맡았던 시기로 추정된다.
  • 1985년 소련에서 유리 오제로프 감독이 제작한 '모스크바 전투'(Битва за Москву) 4부작에 출연한다.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하는 1941년 6월 시점과 툴라에 진입했다 퇴각을 명령하는 1941년 말 시점에 등장한다. 배우는 에릭 벨드레. 소련 영화답게 실제 인물과 싱크로율이 매우 높다.[93]
  • 1940년에 제작된 독일의 선전 다큐멘터리 <Panzer Greifen An!>의 오프닝 멘트를 맡았다. 유튜브에서 다큐멘터리 전체를 볼 수 있다. [94]
  • 문명 5에서 위대한 장군으로 등장한다. 국가/시대를 불문하고 무작위로 위인의 이름이 정해지는 게임 특성상, 독일로 플레이하다 구데리안이 적성 국가의 위대한 장군으로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 Easy Tech의 게임에서는 기갑 최고 티어 장군으로 등장한다. 만슈타인, 롬멜과 함께 독일군 3대장으로 여겨지며, 사람들이 많이 애용한다.
  • 하츠 오브 아이언 4에서는 기갑 지휘관 트레잇을 바로 활성시킬 수 있는 육군 장군으로 등장해서 기갑 부대 쥐어주고 플레이가 가능하며, 기동전 전문가로 고용하여 독일 기본 교리인 기동전/전격전 교리를 진행하는데 도움을 준다.
  • 3R사에서 피규어로 제작되었다.
  • 히틀러가 되었다에서는 기갑총감으로써 히틀러와 협력하며 뛰어난 성과를 올리게 된다. 원 역사와 달리 원수까지 진급했으며, 히틀러가 효율에만 집중하며 생산 라인을 최대한 단순화시키려 하고 반대로 구데리안이 어느 정도의 다각화를 주장하며 입장이 뒤바뀌게 된다. 그리고 70톤에 육박하는 중량 탓에 신뢰성이 문제가 됐던 티거 2를 50톤대의 크기와 판터급의 기동력을 갖춘 MBT로 만드는 업적을 세웠다.

[1] 사회민주당의 주요 지도자이던 쿠르트 슈마허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2] 1907년 사관학교 졸업 때 받은 증서에 1.715m라고 쓰여 있다. [3] 오늘날 폴란드 헤움노 [4] 프리드리히 구데리안(1858~1914). 평생을 군에 몸담았으며, 지병으로 인해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최종계급 중장으로 예편된다. [5] 하인츠 구데리안의 동생 프리츠 루트비히 구데리안(1890~1941)도 사관학교에서 유년을 보내며 군인으로 자란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에서 심하게 부상을 입은 후 제대하고 베를린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해 박사 학위를 딴다. 전간기에는 병무국의 신무기 개발 담당 부서에서 근무했는데, 당시 부하 중 하나가 발터 모델이었다. 성격은 소심했지만 '일벌'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성실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국방군 최고사령부 군비국에서 근무했으며 1941년 베를린에서 사망했다. [6] 흔히 구데리안이 평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융커로 가득했던 군대에서 배척당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잘못된 사실이다. 귀족만으로 구성되었던 프로이센 군대의 규모는 19세기 내내 점차 불어나며 '상위 중산층'까지 받아들이기 시작했으므로 구데리안이 장교로 복무하기 시작할 무렵에는 성에 폰 자가 붙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배척당할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구데리안의 아버지는 인정받는 유능한 장교였고, 할머니는 융커 가문 출신이었으며, 마찬가지로 장교였던 할아버지 대까지는 서프로이센에서 영지를 굴리던 집안이었다. 족보를 타고 올라가면 한스 폰 레발트 원수도 나온다. 구데리안이 동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수많은 장교들과 마찰한 것은 출신이 아니라 본인 성격 때문이다. 아래의 '성격과 대인관계' 항목 참조. [7] 독일 제국군 장교들은 대위를 달고 서른을 넘기고 나서야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8] 당시에는 기병장교였던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이 같은 시기 같은 사단에 속해 있었다. [9] 당시 통신총감으로 구데리안의 상관이었던 헤르만 발크의 아버지 빌리암 발크 장군은 전혀 정제되지 않은 어투로 쓰인 이 보고서를 보고 충격받았고, 구데리안이 전출당하지 않았더라면 군사재판에 회부되고도 남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10] 이는 구데리안의 군 경력에 있어 천만다행이었다. 서러시아 의용군에 들어갔던 자유군단 군인들은 사건 종료 후 처벌받지는 않았으나 국가방위군에 남을 수도, 민간 산업계에 취직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대부분 포메른 일대에서 농업에 종사해야 했고, 상당수는 이후 벌어진 카프 폭동에 몸을 던진다. [11] 당연하지만, 대규모 군축으로 인한 장교들의 취업난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예컨대 동프로이센에서는 마부 한 명을 구인한다는 광고에 26명이 지원했는데 그 중 16명이 장교 출신이었고, 오스트리아에서는 공동주택 경비원 자리 하나에 장교 30명이 지원했는데 그 중 둘이 장군이었다고. [12] 뮌헨에서 짧게 머무르는 동안 같은 지역의 보병학교에 재학하던 발터 벵크와의 오랜 인연이 시작된다. 벵크는 구데리안을 보자마자 홀딱 빠져버려 인상적인 만남이었다고 회상했지만, 구데리안은 그 첫만남을 기억하지 못하고 1928년에 처음 만났다고 기록했다. [13] 독일 기갑부대의 창설을 주도한 인물은 구데리안보다는 루츠라고 보아야 한다. 그는 훗날 전차부대 창설을 감독 관리하는 동시에 독일 최초의 기갑 부대의 첫 사령관직을 맡게 된다. 하지만 1938년, 나치의 군부 장악 음모에 휘말려 강제 예편당하고 만다. 그가 이때 말려든 이유는 기갑 병과를 시기한 기병 장교들의 음해라는 추측이 있다. [14] 당시 전차에 대한 책을 쓴 오스트리아의 공학자 프리츠 하이글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전술적인 조언을 제공하기도 했다. 얼마 후 윗선에서 또 그런 편지를 주고받으면 반역죄로 군사재판에 보내버리겠다고 혼났다. [15]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총참모본부가 해체되며 참모장교를 육성하는 프로이센 전쟁대학 역시 폐교되었다. 이에 따라 국가방위군에서는 유망한 젊은 장교들을 각 군관구에서 따로 교육시키고 시험으로 선발해 병무국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했다. 전쟁대학 출신의 유능한 장교들이 수업을 맡았다. 구데리안의 전쟁대학 동기 만슈타인 역시 1920년대의 대부분을 슈테틴과 드레스덴에서 교관으로 젊은 장교들을 가르치며 보냈다. [16] 하는 일이라곤 짐 나르기와 운전밖에 할 게 없는 수송병들 입장에선 이만한 흥미거리가 없었을 것이다(...). [17] 구데리안이 떠나고 루츠의 참모장 자리를 물려받은 장교는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였다. [18] 구데리안의 주장은 기존의 임무형지휘를 뛰어넘어 하급제대에서 더 옳은 판단을 확신한다면 지체없이 자신은 물론 사령부의 명령도 쌩까고 실행하라는 것으로 임무형지휘를 극단까지 밀고 나간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또한 장점과 단점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정답이라기 보다는 지휘의 특징으로 보는 게 적절하다. [19] 이때는 아직 기계화보병이라는 개념은 명확히 잡히지 않은 상태였다. [20] 다만 전차의 역할에 대한 인식의 전환은 기병장교들이 가장 빨랐으며 지지를 보낸 것도 기병장교가 가장 많았다. 말에서 전차로 전환되었을 뿐 기병과 기갑의 역할은 거의 비슷했기 때문. 실제로 기병 사단의 이름을 가지고 기갑을 운용하는 부대도 많다. [21] 임무형지휘가 분명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근대 이후의 군대가 강한 군기와 체계성이 중시한 이유 또한 분명하다. 후일 이 장점과 단점을 극단적으로 드러낸 인물이 바로 에르빈 롬멜일 것이다. 단 구데리안의 회고록에 따르면 노령의 장성 중 게르트 폰 룬드슈테트 발터 폰 브라우히치 원수는 구데리안의 새로운 시도에 대해 응원해주는 편이었다고 한다. [22] 르제프 전역 당시 9군 휘하 하르페 전투단의 지휘관으로 당시 9군 최정예 부대였다. [23] 군부 내 영향력이 그리 높지 않았던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일찌감치 기갑 부대 육성을 주장하던 이들은 정작 프랑스 침공에서 일선 기갑 지휘관이 되지 못하고 참모나 기갑학교장 등으로 2선에 물러나 있었다.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비로소 구데리안 기갑군 예하 기갑 지휘관이 되어 엄청난 진격 속도를 과시했다. [24] 정치적 필요 때문에 공세 실패를 연기하고 결정적인 한방을 소련군이 먹이는 것처럼 보이도록 상황을 연출해줬다는 분석도 있다. [25] 전통적인 기병의 역할에 기반하여 편성된 기병대에 가까운 부대이다. 폴란드 전역 이후 프랑스 전투 전까지 구데리안은 3개의 기갑사단(Panzer Division)을 추가로 훈련시켰고 3개의 경사단을 기갑사단으로 재편성 하여 9개의 기갑사단을 확보하게 된다. [26] 이때까지만 해도 롬멜은 항공 전력만이 전쟁을 판가름할 것이라고 주장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때를 기점으로 그는 기갑 전력 중심주의자로 급선회하였다. 그리고 아이러니하지만, 이후 그는 항공 전력에게 인생 최대의 패배를 맛본다. [27] 훗날 만슈타인은 구데리안이 자신의 작전을 검증해주었을 때 깊이 안도했다고 회고했다. [28] 결국 구데리안은 상관인 제1 기갑집단 사령관 클라이스트와 심각한 갈등을 빚는다. 이는 룬트슈테트에 의하 가까스로 해소된다. [29] 혹자는 구데리안의 부대가 더 이상의 공세가 불가능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고 평가하지만 그의 부대는 남쪽으로 600km를 달려 키예프에서도 무쌍을 찍는다. 다만 키예프를 함락하는 동안 큰 손실을 입는다. [30] 하지만 독일 국방군 장성들의 주장과 달리 더 많은 사료가 공개된 오늘날의 학자들은 키예프를 점령하라는 히틀러의 판단이 옳았다고 본다. 이곳을 점령해야 우크라이나의 유전 지대를 얻을 수 있으며 이후 코카서스나 볼가 강 일대로 진군하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키예프를 점령하지 못했다면 만슈타인의 세바스토폴 공방전 또한 일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훗날 발터 모델이 모스크바 공방전과 르제프에서 대활약했음에도 휘하 선두 척후병들이 겨우겨우 모스크바에서 20km 지점까지 들어가 크렘린 첨탑을 망원경으로 본 것이 전부였고, 르제프에서는 우주방어로 몰려오는 소련군을 모조리 갈아버렸음에도 모스크바까지는 진군하지 못하고 퇴각해야 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모스크바 진군은 몰라도 점령은 무리였을 것이다. 점령했더라도 나폴레옹을 답습했을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도 키예프에 배치된 남서 전선군은 소련군의 동원 가능한 가장 강력한 부대였다. 게오르기 주코프가 직접 훈련시켜 질적으로도 우수했던 44개 사단, 60만 명 규모의 병력을 무시하고 모스크바로 달려갔다면 중부집단군의 측면을 강타당할 만한 상황이었다. 즉, 히틀러의 판단 때문에 모스크바 공략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그의 판단이 모스크바 공략을 시도라도 할 수 있게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31] 일부 사가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구데리안이 전공을 세우는 꼴을 보기 싫어한 할더가 구데리안의 부대에 대한 보급과 증원을 의도적으로 지연시키지 않았나 추측한다. 전후에 함께 미군 전사과에서 일할 때 구데리안은 할더에게 다가가지만 할더는 구데리안을 용서하지 않는다. [32] 같은 전선에서 활동하며 마찬가지로 우울에 빠진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은 작전을 논의할 겸 위로받기 위해 구데리안을 찾았다가 그의 상태를 보고 역으로 위로해준 뒤 일기에 '겉으로만 단단해보이지 속은 젤리 같았다'라고 기록하며 씁쓸해했다. [33] 원래 앓았던 좌골신경통과 협심증에 더해 만성적인 피로와 수면장애에 시달렸다. 감기로 심하게 앓아누울 때도 있었다. 적지 않은 나이에 야전에서 병사들과 어울리며 짚더미에서 함께 자는 등 몸을 함부로 굴렸으며 페르비틴을 남용해댔던 탓으로 추정된다. [34] 모스크바 철수 고발 사건에 대해서는 구데리안 기갑집단이 당초 중부집단군에서 합의하기로는 클루게의 4군 방면으로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구데리안이 임의로 2군 방면으로 철수했기에 분개한 클루게가 고발했다는 설도 있다. 이 시점에서 히틀러는 어떠한 희생이 있더라도 모스크바 포위망을 완성하라는 명령을 반복하고 있었기에 부하들을 죽일 수 없다고 주장한 장교들은 모두 찾아내 군복을 벗겨버리고 만다. 구데리안은 1차 대전식 전쟁을 대단히 혐오했고 부하 병사들의 목숨을 아껴 그들을 갈아넣는 것을 혐오했다. 히틀러는 항상 전투지역에 나가서 병사들과 스킨쉽을 하며 아끼는 구데리안의 이런 모습을 비판해 왔으며 결국 자신의 군대를 이끌 재목감이 안된다고 판단했다. [35] 영관급이나 장성급이 아닌 이상 포병들은 돌격포를 제외하면 기사철십자훈장을 얻기가 힘든 것도 한몫하였다. [36] 1941년 강판 이후 결투를 신청했다는 이야기는 이곳 위키로부터 퍼진 잘못된 기술이다. [37] 물론 결과론적이지만 성채작전은 거하게 실패하고 3차 하르코프 공방전 이후 만슈타인이 간신히 복구해낸 남부집단군은 소련군의 공세에 추풍낙엽으로 밀려나며 중앙집단군의 우측면을 노출시키게 된다. [38] 판터를 대거 보충받았던 10기갑여단을 배정받은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의 경우 판터의 잦은 고장이 목표 지점까지 돌파하지 못한 매우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39] 구데리안은 1943년 9월에 폭격으로 베를린 자택에서 더 이상 거주할 수 없어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주장한다. [40] 슈탈베르크는 1942년부터 종전까지 만슈타인의 부관으로 근무했다. 그에 의하면 1944년 10월에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서 입은 부상으로 사망한 히틀러의 수석부관 슈문트의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기차에서 만슈타인과 구데리안이 부관들과 함께 식사했다. [41] 실 방문 목적은 전투에서 기갑군을 어떻게 운용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당시 만슈타인은 직전에 하르코프를 탈환해냈다. [42] 아이러니지만 히틀러는 자신에게 직언할 수 있는 참모들을 더 높이 평가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클루게와 발터 모델이다. [43] 흔히 잘 알려진 국방군의 거수 경례를 나치식 경례로 바꾼 것이 바로 이때 구데리안의 작품이다. 하지만 독일군 선전영상에 그냥 거수 경례를 하는 장면이 많은 것을 보면 실패한 셈. [44] 이들은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었던 것이 미처 피신하지 못한 독일계 주민들은 전후 소련군의 강간 대상이 되거나 강제 추방되었다. [45] 물론 이 당시 독일군의 전력은 상당히 약화된 상태였다. 이미 서부전선으로 상당수 전력이 차출당했고 1944년 겨울 시점부터는 연합군의 전략폭격에 의해 독일 군수 체계가 박살난 상태였다. 일례로 리투아니아 메멜 교두보를 지키던 대독일사단의 경우 소련군의 공세가 닥쳤을 때 그 전력이 1944년 가을에 비해 한참 모자랐다고 한다. [46] 나치 정계에서 '건강 문제'는 정치적으로 거세되었다는 뜻과 같은 말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구데리안의 회고에 따르면 이때 정말 몸이 안 좋기도 했다고 한다. 한편 항복이나 강화를 주장하거나 실행한 인물이 대부분 반역자로 몰려 자살을 강요당한 것을 생각하면 구데리안의 처분은 상당히 이례적인 것이었다. [47] 저 장면 이후 참모들이 언쟁하다가 카이텔의 대사로 "(진실을 말하다가) 구데리안과 룬트슈테트처럼 모가지 당할거냐"고 언급된다. [48] 편지는 다른 명예 회원으로 해리 트루먼, 조지 버나드 쇼, 엘리너 루스벨트를 언급한다. [49] 대부분의 웹사이트에서 구데리안의 사망 원인을 심장 질환, 혹은 심장마비라고 주장하지만 남아 있는 기록을 기준으로 식도정맥류 파열로 인한 출혈을 사인으로 보는 것이 맞다. [50] 그래서 문서 상단의 사진들은 매우 의미있는 사진들이다. 오늘날엔 놀랍지 않은 모습이지만 당시에는 전화선을 하급 제대에 모두 연결해 지도로 넓은 전장을 한번에 보는 것이 그냥 당연한 부대지휘의 상식이었다. [51] 2007년, ZDF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Die Wehrmacht> 1화 The Blitzkrieg [52] 출처1 : 논문 RADIO TO FREE EUROPE: ARMORED FORCE RADIO DEVELOPMENT, GREAT BRITAIN AND THE UNITED STATES 1919-1941 Chad G. Clark, M. A. University of Nebraska, 1998. 출처2 :도서 The Signal Corps: the emergency [53] 이전에도 영국은 모든 전차에 무전기를 달기는 했지만 인터컴은 단방향이고 무전기 성능은 부족했다. [54] 통신수가 없어진건 6인승 M3리/그랜트부터이며 영국은 장전수, 전차장이 상황에 따라서 사용하고 미국은 운전수가 사용하게 했다. [55] 1930년대 말 시점에서 오직 영국 육군만이 전차 시제품에 3인 포탑의 요구사항을 집요하게 요청한 사실들이 확인된다. 출처 영국 육군은 분명하게 장전, 사격, 지휘의 분리가 가져오는 이점을 프랑스 침공 시점 이전에 파악하고 있었다. [56] 실제로 당시 프랑스 전차들은 1인 포탑을 채용하는 대신에 평균적으로 장갑이 두꺼웠다. [57] 이는 해군의 건함 사상의 영향, 즉 배수량의 제한 안에서 공수주를 배분하는 경우, 밸런스형은 이도저도 아니라는 경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투함과 전차는 서로 간의 경험을 공유하기에는 판이하게 달랐다. 같은 이유로, 육상에서 대 성공을 거둔 8,8cm FlaK의 컨셉이 해상에서는 넬슨급 전함 비스마르크급 전함의 주포에서 대실패로 끝난다. 넬슨급의 경우 컨셉의 실패+포 자체의 결함까지 겹친 것이기는 하지만. [58] 리델 하트는 '간접접근전략'의 창시자로 유명해졌으나, 2차 세계대전의 전황을 몇 번이고 잘못 예측하며 명성이 땅에 떨어진 상태였다. 전후 그는 영국 정부가 아르덴 숲이 위험하다는 자신의 예견을 묵살해서 패배했다고 떠들며 유명 기갑 사령관들과 긴밀한 관계를 쌓아 평판을 회복하려 했지만, 패튼 같은 연합군 장교들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던 중 독일의 기갑 사령관들이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류한수 교수의 논문 '결백한 독일국방군' 신화의 산파 바실 리델 하트: 한 군사학 구루의 명예와 제2차 세계대전의 진실 (2018) 참조. [59] 부탁을 받은 구데리안이 수정 원고에 이 내용을 직접 추가하기는 했지만, 1951년 4월에 리델 하트가 구데리안에게 쓴 편지에 삽입해 달라고 요구한 내용을 거의 그대로 베껴 쓴 수준이다. 사실상 리델 하트 본인이 직접 추가한 셈. 게다가 그 내용이 자신의 공로를 더 강력하게 조명할 수 있도록 수정하라고 요구하기까지 한다. [60] 다만 당시 소련의 정예 병력은 모스크바 전면으로 재배치되고 있었고 키예프와 모스크바 사이의 브란스크 전선군은 상대적으로 약체였다. 손실이 거의 없었다는 것도 상대적인 것으로 9월 경에 호트의 3기갑집단은 보유 차량의 30%를 손실한 상태였고 보충은 손실분의 10%도 되지 않았다. 독일군은 손실분이 생기면 보충하는 방식이 아니라 후방으로 빼내 재편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작전이 지속될 시 전력이 약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61] 주코프의 경우 구데리안의 주장처럼 키예프 포위전이 모스크바 공방전을 패배로 이끌었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서방 기자들의 의견에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62] 애초에 히틀러는 나폴레옹의 실패를 굉장히 의식하고 있었고, 적 야전군 섬멸 및 적국의 산업 기반 점령을 우선시하는 등 총력전에 대한 상당한 이해를 지니고 있었다. 모스크바를 점령하더라도 수비군의 후퇴를 허용하게 된다면 결국 깊은 종심의 이점을 살려 재편성된 병력에 의해 거센 반격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기에 모스크바의 우선도를 떨어뜨린 것이다. [63]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실제로 북부집단군도 마찬가지로 겨울에 공격을 계속했는데 예상을 뛰어넘는 극심한 동장군이 닥치자 레닌그라드 포위망에 미리 파 놓은 참호를 이용하여 별다른 추위 손실 없이 겨울을 버틸 수 있게 되어 중부집단군보다 피해가 적었고 역으로 이를 뚫어야 하는 소련군이 동장군의 피해를 입었다. [64] 만슈타인의 진급일자는 여기를 , 구데리안의 진급일자는 이 문서의 7문단을 참조. [65] 물론 총사령관인 그가 전장을 훌륭하게 통솔했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음은 사실이겠지만, 승리는 휘하 부대나 하급 사령관과 참모들이 잘 따라 주는지에도 달려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공이 돌아가야 한다. [66] 구데리안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분산하지 말고 집중하라(Klotzen — nicht Kleckern!'를 그대로 회고록에 인용해 적을 정도였다. [67] 이는 군인 아버지 아래에서 자라서 군인 이외의 진로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고, 군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평생을 살았던 구데리안이 할 수 있는 최고이자 최선의 찬사나 다름없다. [68] 첫인상, 상대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정보 등을 기술했다. 롬멜과의 첫만남이라거나, 히틀러와의 통화를 옆에서 처음으로 듣는 상황이라거나…. [69] 물론 구데리안은 계급과 직위를 막론하고 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는 막말을 하는 성격이었지만, 직전에 히틀러의 심기를 거스른 군부 인사들이 대규모로 숙청되는 사건이 발생했음을 생각하면 이는 꽤 무모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만슈타인은 장검의 밤 당시에 권총을 상시 소지하며 주위를 경계하고 다녔을 만큼 군인이 잘못했을 때 어떤 일이 발생할 수 있는지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70] 실제로 만슈타인은 게오르기 주코프가 훌륭한 사령관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를 죽을 때까지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아들에게만 한 번 말했다. 전쟁 말에 벙커에 숨은 히틀러를 찾아가 상황을 수습해볼 테니 지휘권을 달라고 애원했던 일도 죽는 날까지 언급하지 않았다. [71] 구데리안도 히틀러의 심기를 거슬러 해임당한 후 1941년 말부터 1943년 초까지 1년이 넘는 기간을 날백수로 지내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만슈타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72]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국방군최고사령부와 여러 독일인들의 변호를 맡았고 만슈타인과 구데리안의 변호사로도 일했던 한스 라테른저(Hans Laternser)는 구데리안에게 편지로 만슈타인의 재판 상황을 꾸준히 전해 주었다. 그 밖에도, 한 번은 독일에 주둔해 있던 한 미국인 장군이 구데리안에게 최근에 나온 회고록을 잘 읽었다는 말과 함께 지난번에 다른 지역을 여행하다 만슈타인을 만났다고 편지하기도 했다. 두 사람이 친하지 않았다면 이런 내용을 적었을까 싶다. [73] 후배지만 주인공의 라인을 잘 탄 덕분에 빠르게 진급한 발터 모델이나 쿠데타 당시의 행보로 대중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에르빈 롬멜 등의 동료 장군들을 한없이 견제한다. [74]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이었으며 다른 장교들과 쉽게 다투지 않았던 오스발트 루츠가 그를 부하로 잘 부렸던 데에는 이런 이유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루츠는 파울루스가 구데리안의 후임으로 새 참모장이 되었을 때 불만스러워했다. 파울루스는 군생활 내내 참모로서는 훌륭했다는 평가를 받아 왔는데도 말이다. [75] 두 사람의 갈등은 클루게가 무능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성향과 입장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구데리안의 전차들이 미친 듯한 속도로 전진하는 동안 클루게의 보병들은 발맞춰 뒤따라가며 포위섬멸전을 치르랴 역포위를 막아주랴 고생해야 했다. 또한 구데리안은 전공 욕심이 많은 데다 독선적이고 제 기갑부대들이 가장 잘나야 한다는 주의로 전쟁을 치렀으니 갈등이 발생하지 않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76] 낫질 작전이 입안되었을 적에 도박성이 짙다고 욕을 먹었음을 생각하면 구데리안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는 사실에 웃을 만하다. [77] 영국군 포로 수용소에서 심문받은 한 장교의 증언이었다. 폰 슐라브렌도르프의 저서에도 유사한 내용이 적혀 있었으나, 구데리안은 1940년대에 그를 명예 훼손으로 고소해 승소했다. [78] 구데리안과 마찬가지로 히틀러와 싸워댔던 발터 모델에게는 전혀 포섭 제의가 가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이 점이 더욱 두드러진다. [79] “Niemand darf fanatischer an den Sieg glauben und mehr Glauben ausstrahlen als Du. … Es gibt keine Zukunft des Reiches ohne den Nationalsozialismus. Deshalb stelle Dich bedingungslos vor das nationalsozialistische Reich.” [80] 이 조직의 수장은 나치당 지구장이었던 카를 카우프만(Karl Kaufmann)이었다. 카우프만은 전후 베르너 나우만을 중심으로 한 나치 조직의 일원으로서 조직원들과 FDP 등의 여러 정당 내로 정치적 잠입 및 전복을 시도하다가 영국 정보부에 걸려 2개월간 수감된 전적이 있다. [81] 폴란드 측에서 구데리안을 재판에 회부할 것을 염려한 미군은 그를 전사과로 보낸 뒤 그를 쓸 일이 있으니 소환 요구는 나중에 다시 하라고 폴란드에 통보했다. [82] 장군부터 사병까지 계급을 막론한 기갑군인들이 옛 상관이 재판정에 설지도 모른다는 소식에 아무도 요구하지 않은 진술서를 보내댔다. 그 중에는 구데리안의 첫 근무지 동료와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부관도 있었다. [83] 최전선 부대의 전쟁범죄는 기갑총감 시절인 1943년에 본격화되었고 구데리안이 마지막으로 야전에서 활동한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하달된 전쟁범죄 명령들은 그가 속했던 중부집단군 사령관 보크가 자신의 직권으로 묵살해버렸다. 따라서 1943년에 야전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만슈타인과 달리 애초에 전쟁범죄에 엮일 상황 자체가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84]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제3기갑사단장은 발터 모델이었다. [85] 그는 1919년 5월 24일자 편지에서 폴란드인, 리투아니아인, 라트비아인들을 가난하고 더럽고 무능하고 멍청하고 사악하고 퇴폐적이고 교활한 미개 종자로 칭한다. [86] 덕분에 공습 경보를 일찍 울리고 대부분이 피신할 수 있었다. 다만 제때 피하지 못한 작전과 장교들은 여럿이 다쳤다. 한스 크렙스 또한 이때 부상을 입어 한동안 보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87] 물론 일본 육군은 이 강연을 개뿔로 듣고 대전차 총검술이나 반자이 돌격 같은 구시대적 전술을 고수하다 미군에게 1:10으로 갈려나갔다. 독일군이 1:1.4 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일본 육군 수뇌부의 구시대 전술 고집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수 있다. [88] 원래는 영문판 중역본으로 공동 번역 중이었으나 출판사에서 일어판, 원서, 영문판을 비교한 결과 영문판에서 삭제된 원서 내용이 많아 영문 번역을 취소시키고 원서 직역으로 진행했다. 그래서 정발이 늦어진 것이다. 오토 카리우스의 자서전 <진흙 속의 호랑이> 오역 사건 이후, 많은 이들이 이동훈이라는 이름에 경기를 일으키고 있다. 길찾기 측에서 "혹시 이 책도 이동훈을 쓴 중역본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이동훈도 아니고, 원서 직역이니 안심하라."고 답해 주느라 진땀 뺐다고 한다. [89] 이는 애시당초 풀러의 이론 핵심 중 하나이기도 하다. [90] 프랑스 전역 이후 촬영된 <Panzer Greifen An!>에서 해당 훈장이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프랑스 전역이 끝나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난 후 수훈한 것으로 추정한다. [91] 은장은 전차, 동장은 기타 장갑차 승무원에게 수여된다. [92] 3부 01:59:12, 4부 00:15:58 / 00:51:32 지점. [93] 1부 33:30 지점과 36:26 지점, 4부 08:51 지점과 1:19:47 지점에 나온다. [94] 구데리안이 출연하는 부분은 https://www.youtube.com/watch?v=i2BTrfBmvxM&pp=ygUTUGFuemVyIEdyZWlmZW4gQeOFnA%3D%3D 1분 00초 지점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