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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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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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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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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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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랸스크 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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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데카니사 전투 파일: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국기.svg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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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pad> 194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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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VIP
프라하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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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999
<colbgcolor=#536349> 연표 사건
1936년
3월
라인란트 재무장 |
7월
스페인 내전 발발 |
12월
방공 협정
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 루거우차오 사건) · 제2차 국공합작 |
8월
상하이 전투 |
12월
난징 전투( 난징 대학살) · 파나이 호 사건
1938년
3월
오스트리아 병합 |
6월
1938년 황허 홍수 |
7월
하산 호 전투 |
9월
뮌헨 협정
1939년
4월
스페인 내전 종결 |
5월
할힌골 전투 |
8월
독소 불가침조약 |
9월
폴란드 침공(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 가짜 전쟁 |
11월
겨울전쟁
1940년
4월
노르웨이 침공 |
5월
프랑스 침공 · 됭케르크 철수작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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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본토 항공전 |
9월
삼국 동맹 조약 |
10월
그리스 침공
1941년
5월
비스마르크 추격전 |
6월
바르바로사 작전( 독소전쟁 발발) · 계속전쟁 |
9월
레닌그라드 공방전 |
10월
모스크바 공방전 |
12월
진주만 공습( 태평양 전쟁 발발) · 말레이 해전 · 남방작전
1942년
4월
둘리틀 특공대 |
6월
청색 작전 · 미드웨이 해전 |
7월
엘 알라메인 전투 |
8월
스탈린그라드 전투 · 과달카날 전역 |
11월
과달카날 해전 · 횃불 작전 · 노르웨이 중수 사건
1943년
1월
카사블랑카 회담 |
2월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
4월
바르샤바 게토 봉기 |
7월
쿠르스크 전투 ·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
9월
이탈리아 왕국의 항복( 이탈리아 내전 발발) |
11월
카이로 회담 · 테헤란 회담
1944년
4월
대륙타통작전 |
6월
바그라티온 작전 · 노르망디 상륙 작전 · 필리핀해 해전 · 사이판 전투 |
7월
브레턴우즈 회의 ·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
8월
바르샤바 봉기 |
9월
마켓 가든 작전 |
10월
레이테 만 해전 |
12월
벌지 전투
1945년
2월
얄타 회담 · 드레스덴 폭격 · 이오지마 전투 |
3월
연합군의 일본 본토 공습( 도쿄 대공습) · 연합군의 독일 본토 침공 |
4월
베를린 공방전 · 오키나와 전투 |
5월
나치 독일의 항복 |
7월
포츠담 회담 |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만주 전략 공세 작전 · 일본 제국의 항복( 옥음방송) |
9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
독소전쟁

독일어: Ostfront (동부전선), Deutsch-Sowjetischer Krieg (독일-소련 전쟁)
러시아어: Великая 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 (대조국전쟁)[1]
영어: Eastern Front (동부전선), Great Patriotic War (대조국전쟁)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
파일:Moscow-Battle.gif
모스크바 공방전 -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로 다가오는 독일군과 반격하는 소련군[2]
파일:Battle-Stalingrad.gif
스탈린그라드 전투 -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을 포위하는 소련군[3]
날짜
1941년 6월 22일 ~ 1945년 5월 9일
장소
동유럽, 중유럽, 북유럽의 동부 지역
원인
아돌프 히틀러 레벤스라움 확보 야욕
교전국
파일:연합국 명예기.svg 연합국 파일:20211220_072106.jpg 추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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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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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페르디난트 쇠르너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발터 폰 라이헤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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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헤르만 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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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헤르만 페겔라인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빌헬름 몽케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쿠르트 마이어
파일:루마니아 국기.svg 이온 안토네스쿠
파일:루마니아 국기.svg 페트레 두미트레스쿠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915-1918, 1919-1946).svg 호르티 미클로시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915-1918, 1919-1946).svg 살러시 페렌츠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베니토 무솔리니
파일:불가리아 국기.svg 보리스 3세
파일:불가리아 국기.svg 시메온 2세
파일: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국기.svg 페르디난트 차틀로시
파일:크로아티아 독립국 국기.svg 안테 파벨리치
파일:로코트 자치국 국기.png 브로니슬라프 카민스키
파일:러시아 해군기.svg 안드레이 블라소프
파일:핀란드 국기.svg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병력
34,500,000 명[11] 18,200,000 명
군인 피해[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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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 소련
- 총 사망 870~1,060만 명
- 부상자 1800만 명[13]
- 전사 및 실종 680~760만 명
- 포로 520만 명[14]
- 수감 중 사망한 포로 260만 ~ 360만 명
파일:폴란드 국기(1928–1980).svg 폴란드 망명 정부
- 총 사망 2만 4천 명
- 전사 및 실종 2만 4천 명
- 포로 수 미확인
파일:루마니아 국기.svg 루마니아 왕국
- 총 사망 1만 7천 명
- 전사 및 실종 1만 7천 명
- 포로 8만 명
- 수감 중 사망한 포로 미확인
파일:불가리아 국기.svg 불가리아 왕국
- 총 사망 1만 명
- 전사 및 실종 1만 명
- 포로 수 미확인
[ 펼치기 · 접기 ]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 총 사망 410만 명
- 전사 및 실종 360만 명
- 포로 330만 명
- 수감 중 사망한 포로 50만 명 추산
파일:러시아 해군기.svg 러시아 해방운동[15]
- 총 사망 21만 5천 명
- 전사 및 실종 21만 5천 명
- 포로 100만 명
- 수감 중 사망한 포로 미확인
파일:루마니아 국기.svg 루마니아 왕국
- 총 사망 28만 1천 명
- 전사 및 실종 8만 1천 명
- 포로 50만 명
- 수감 중 사망한 포로 20만 명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915-1918, 1919-1946).svg 헝가리 왕국
- 총 사망 30만 명
- 전사 및 실종 10만 명
- 포로 50만 명
- 수감 중 사망한 포로 20만 명
민간인 피해
소련 민간인 1700~2,000만 명 사망
독일 민간인 50~200만 명 사망
결과
소련의 승리
영향
나치 독일의 멸망 및
소련 초강대국 등극
동유럽의 공산화 및 공산주의 세력의 성장
[16]
1. 개요2. 배경
2.1. 4자 안보 체제2.2. 독소 불가침조약2.3. 전쟁의 징조2.4. 히틀러의 판단과 의도2.5. 이오시프 스탈린
2.5.1. 스탈린은 전쟁 징후를 알고도 무시했다2.5.2. 그러나 스탈린에겐 나름 이유가 있었다
3. 규모와 의의
3.1. 특징
4. 경과
4.1. 연표
4.1.1. 1941년4.1.2. 1942년4.1.3. 1943년4.1.4. 1944년4.1.5. 1945년
5. 전쟁이 남긴 것
5.1. 잿더미가 된 두 나라
5.1.1. 소련5.1.2. 독일
5.2. 초토화 동유럽
5.2.1. 동유럽 유대인 사회 파괴
5.3. 초강대국에 등극한 소련과 스탈린 신격화5.4. 독일의 분단과 영구적 영토 상실5.5. 소련의 기술적 성장5.6. 종전 이후의 유럽 국가들5.7. 전쟁범죄와 피의 보복
5.7.1. 독일5.7.2. 소련5.7.3. 목록
5.8. 번외: 독소전쟁 시기의 동물들5.9. 결과
6. 독소전쟁 관련 자료 및 연구
6.1. 관련 자료6.2. 독소전쟁 연구의 변화
6.2.1. 냉전 종식 이전의 소련 측 연구6.2.2. 냉전 종식 이전의 서방 측 연구6.2.3. 냉전 이후
7. 대중매체에서
7.1. 영화7.2. 게임7.3. 만화7.4. 기타
8. 어록9.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독소전쟁의 전개[17]
Внимание, говорит Москва! Передаем важное правительственное сообщение, граждане и гражданки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сегодня в 4 часа утра без всякого объявления войны германские вооруженные силы атаковали границы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Началась Великая 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 советского народа против немецко-фашистских захватчиков. Наше дело правое! Враг будет разбит! Победа будет за нами!

주목하십시오, 주목하십시오. 모스크바에서 전해드립니다. 정부의 중요한 성명을 알려 드립니다. 소비에트 연방의 시민들이여! 오늘 오전 4시에 선전포고도 하지 않은 채 독일군이 소비에트 연방의 국토를 침범해왔습니다. 파시스트 침략자들에 대한 소련 인민들의 대조국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대의는 정당하며, 적들은 괴멸할 것이고,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1941년 6월 22일 독소전쟁 개전 당일 소련 아나운서 유리 레비탄의 긴급 라디오 안내 방송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인 1941년 6월 22일부터 1945년 5월 9일까지 나치 독일 소련 사이에 발발한 전쟁으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단일 전쟁이다.[18] 나치 독일이 독소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바르바로사 작전을 전개해 일어난 이 전쟁에서 양측간 3000만 명이 넘는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으며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전체 인명 피해의 약 절반 가량에 해당한다. 인종과 이념 문제가 겹치며 매우 참혹하고 비인륜적인 전개가 이루어진 것으로 유명하다.

그 원인으로는 독일의 석유 자원 부족, 공산주의 경쟁자 제거, 미국과의 전쟁 대비[19] 등 여러 가지 배경이 꼽히나 공통적으로 레벤스라움의 확보와 이를 통해 영국의 굴복을 이끌어내기 위한 아돌프 히틀러의 강력한 의지가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었다는 것이 지배적이다.

2. 배경

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아돌프 히틀러 게르만- 아리아인 인종의 '동방생존권'인 레벤스라움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 유대-볼셰비즘(Judeo-Bolshevism)을 제거하고 열등인종 슬라브족을 정복한 후 추방, 노예화시켜 버림으로서 최종적인 '천 년 제국'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라는 이데올로기적 목적과 소련을 격파하여 굴복시킴으로서 끈질기게 저항하는 영국을 굴복시킨다는 히틀러 특유의 전략적 사고방식이 동시에 작용한 것으로 보이며 히틀러의 의중에서 어느 쪽이 더 비중이 컸는지는 알 도리가 없고 자료가 밝혀질수록 논란만 가중되고 있다.

히틀러는 집권 전부터 공공연히 공산주의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 원인 중의 하나라고 주장했으며,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에 대해서 대단히 적대적이었다.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막판에 궁지에 몰린 독일 제국은 '오히려' 공산주의자인 블라디미르 레닌 러시아로 가도록 도와주는 대가로 레닌이 정권을 잡으면 전쟁에서 발을 빼기로 약속했고 진짜로 레닌은 전쟁에서 발을 뺐다는 거다. 그 덕에 독일은 그나마 남아 있던 여력을 서부로 집중시킬 수 있었다. 히틀러의 주장과 다르게 제1차 세계 대전 때의 소련은 도리어 다 죽어가던 독일이 조금이라도 더 버틸 수 있던 단초를 제공해 준 셈이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독일과 소련의 밀월 관계가 있었다. 러시아 혁명 당시 소련 인사들은 독일의 도움을 받아 혁명을 성공시킨 적이 있으며, 레닌도 독일 제국 측이 제공한 열차를 타고 스위스에서 러시아 밀입국했다. 그들도 독일 공산주의자들 봉기를 지원하려 하기도 했다. 리처드 오버리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에서도 말하듯 제1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전범 국가이자 베르사유 조약으로 군사력 확장을 크게 제한받고 국제 사회에서 평판이 추락한 독일과 세계 각국의 집권층이 전혀 환영할 수 없는 이념인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은 어느 면에서는 동질성을 지녔던 것이다.

하지만 히틀러가 집권한 나치 독일이 군비를 증강하며 유럽에 전운이 감돌자 위협을 느낀 소련은 소련 - 영국 - 프랑스 - 폴란드 4자 안보 체제를 구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소련의 의도를 의심한 서방 측의 불신에 의해 이는 난관에 봉착했다. 소련은 겨우 체코슬로바키아와 군사 협정을 체결하였으나, 체코슬로바키아는 그 전인 1938년, 나치 독일에 의해 합병돼버렸다. 소련은 이로써 체코슬로바키아라는 동맹국을 상실해 버렸고, 유럽에는 전운만이 감돌고 있었다.

2.1. 4자 안보 체제

소련 외무장관 막심 리트비노프는 영국- 프랑스- 폴란드- 소련으로 이어지는 4자 안보 체제 구축을 위해 여러모로 노력했으나, 영국과 프랑스는 이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1939년 5월 3일 리트비노프는 해임되었고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외무장관이 되었다. 리트비노프 해임의 표면적 이유는 외교적 실패였으나, 유대인이었던 리트비노프가 해임된 것은 독일에 우호적인 제스쳐를 보낸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20]

1939년 4월 17일, 소련은 ' 발트해- 지중해까지 모든 나라의 영토 보전을 보장하고, 그 나라 중 어느 한 나라라도 독일의 공격을 받을 경우 영국, 프랑스, 소련이 모두 전쟁에 돌입한다'는 내용의 동맹 관계를 제안하는 내용을 적은 문서를 영국, 프랑스에 전달했다. 그러나 6주가 지나서야 영국에서 답신이 왔으며, 그나마도 동맹 관계를 구축하자는 것이 아니라 예비 회담을 열자는 데 동의하는 것이었다. 몰로토프는 7월 17일, 영-불-소 외교 회담에서 군사 협약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8월 10일이 되어서야 영국, 프랑스 협상단은 비행기가 아니라 여객선 시티 오브 엑서터(City of Exeter) 호를 타고 레닌그라드에 입항하여 소련 측에 매우 나쁜 인상을 심어 주고 말았다.

8월 12일이 되어 겨우 협상이 시작되었는데, 소련 측 협상단장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최측근이자 친구,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원수였다. 스탈린의 최측근을 협상단장으로 임명한 데서 소련이 이 협상에 얼마나 진지하게 임했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협상 자리에는 당시 육군참모총장 보리스 샤포슈니코프 원수 등 소련군 고위 사령관들이 다수 참석하였다.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에게 보고할 필요 없이 바로 군사 협정에 서명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를 증명하는 문서를 영불 협상단에게 보여주었다.

반면 영불 협상단장의 자격은 소련에 비해 상당히 떨어졌다. 프랑스 협상단장은 프랑스 제1군관구 사령관 조제프 두망(Joseph Doumenc) 장군이었는데 보로실로프와 마찬가지로 협상 서명권을 지니고 있었기는 하나 당시 프랑스군 내 서열 40위 정도밖에 차지하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뭐 일단 서명권을 지니고 있는 만큼 소련보다는 못해도 큰 문제될 것이 없었으나, 문제는 영국. 영국 협상단장은 조지 6세 직속 해군 장교인 레지널드 드락스 경(Reginald Drax)[21]이었는데, 그는 일개 함장 출신인 데다 영국 정부에 보고만 할 수 있을 뿐 협상 권한이 없었다. 자국의 쟁쟁한 거물급들을 협상단으로 내세운 소련으로서는 매우 불쾌할 것이 당연했다.

소련 협상단은 매우 당황했으나 계속 협상을 이어나갔는데, 소련군이 독일로 진군할 수 있도록 동유럽 국가, 특히 당시 영-프와 동맹국이었던 폴란드가 길을 내 줄 수 있는지에 대한 협약을 양국 정부와 맺었는가를 질문했다. 그러나 폴란드는 독일과의 갈등이 끝나더라도 자국 내로 진주한 소련군이 절대로 순순히 철군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절대로 소련군을 영토에 들일 수 없다고 강경한 자세를 굽히지 않음에 따라 그런 협약은 존재할 수가 없었고, 그게 밝혀진 시점에서 이미 다자 안보 체제는 결렬된 상태였다.

참고로 냉전 당시 같은 동구권 국가였으며 민족 구성도 슬라브족으로 비슷한 면 때문에 가끔 오해하지만 폴란드와 러시아는 영국-아일랜드 관계 이란-이라크 관계와 동급일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으며 그 역사도 유구하다. 1772년, 1793년, 1795년 프로이센-러시아-오스트리아 3국에 의해 영토가 3번이나 강제 분할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러시아 또한 국가적 대혼란 시기를 노리고 침략한 폴란드에 모스크바 입성까지 허락하며 땅을 떼어준 역사가 있다. 여기에 1919년과 1921년 사이 동유럽의 신생국들을 모두 재점령하기 위해 동유럽을 침략한 볼셰비키 러시아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재건을 시도하던 폴란드 사이에 소비에트-폴란드 전쟁까지 벌어졌다. 때문에 폴란드와 소련은 1932년 불가침조약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이가 극도로 좋지 않았다. 이러니 당시 폴란드가 독일과 홀로 싸울지언정 러시아와는 손 안 잡는다는 반응이 나올 만했다.

전쟁이 발발할 시 각국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 수치를 밝힐 때 소련 협상단은 120개 사단, 야포 5천여 문, 전차 9천여 대, 항공기 5천여 대를 투입할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소련은 독소전쟁 때 수백 개의 사단을 동원했으니 120개 사단을 동원할 수 있다고 한 소련의 호언장담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참고로 독일 국방군은 독소전쟁을 개시할 당시 소련군이 유럽 전선에 동원 가능한 병력을 180개 사단 정도로 추정했다. 그러나 180개 사단을 모조리 전멸시킨 독일군 앞에는 새로운 소련군 360개 사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프랑스는 110개 사단, 전차 4천여 대를 파병한다고 답했다. 그런데 영국 협상단은 16개 사단이라고 밝혀 보로실로프가 " 통역을 잘못한 것 아닌가?"라는 반응을 보였다. 황당한 소련이 세부 사항을 캐묻자 영국은 사실은 단 4개 사단만이 전투 가능하다고 실토했다. 회담 종료 후 스탈린이 영국 대사에게 구체적으로 더 묻자, 사실 4개 사단 중에서도 2개 사단만이 제대로 된 사단이었고 나머지 2개 사단은 좀 더 시간이 지난 뒤에야 완편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영국도 이렇게 반응한 이유가 있다. 독소 불가침조약 항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는 독일과의 전쟁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며 영국은 1907년 맺은 삼국 협상이 영국의 참전을 강제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동맹국인 프랑스가 두들겨 맞고 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참전하게 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은 유럽 본토전에 대규모 파병을 굉장히 꺼릴 수밖에 없으며, 1939년은 세계 대공황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은 때여서 영국이나 프랑스 둘 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처지도 아니었다.

뮌헨 협정을 맺은 것에도 알 수 있듯 영-프는 독일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아픔을 기억하고 있는 두 나라로서는 소련의 다자 안보 체제를 소련만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물론 소련으로서는 '독일이랑 싸움 붙이고 니들은 손 떼려고?'라고 강하게 의심하기에 충분했다. 자세한 건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의 협상 과정 문서 참조.

어쨌거나 영국-프랑스가 이런 식으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소련은 자신들이 계획한 대 독일 4자동맹 안보체제가 성립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며, 독일의 침략에 홀로 맞설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 몰리게 되었다.

2.2. 독소 불가침조약

이때 스탈린의 마음을 흔든 것은 다름 아닌 독일이었다. 독일 또한 침략 전쟁에 소련이 개입할 것을 우려하고 있었으며[22], 계획의 스타트를 끊게 될 폴란드 침공에 소련이 개입하면 초장부터 만사를 그르칠 수 있으므로 소련에게 추파를 보내기 시작했다. 8월 2일,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소련에게 발트해에서 흑해까지의 지역의 결산을 제안했다.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에서는 이를 유럽에서 옛 차르 제국을 재건할 가능성이라고 표현했으며, 스탈린은 리벤트로프를 만날 때 어린애같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1939년 8월 17일 몰로토프는 리벤트로프와의 회담에 동의했고, 같은 해 8월 19일 양국은 독소 신용 협정(German-Soviet Credit Agreement)를 체결하였다. 히틀러와 스탈린이 전보를 교환한 후, 8월 23일 리벤트로프를 위시한 독일 외교단이 소련으로 비행기를 타고 갔다. 당시 모스크바 공항에는 하켄크로이츠 깃발들이 장식되어 있었고 크렘린에서는 스탈린이 직접 외교단을 맞이했다.

이로써 1939년 8월 23일, 독일과 소련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독소 불가침조약과 독소 신용 협정에 의해 소련은 폴란드를 독일과 나눠먹고, 독일과 소련은 상대방이 약소국( 발트 3국, 루마니아 등)을 침략하는 것을 묵인했으며, 독일은 소련에 기계류를, 소련은 독일에 자원을 공급해 주기로 약속했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인해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고 9월 17일부터는 소련이 참전해 폴란드 동쪽을 침략함으로써 폴란드 제2공화국은 멸망하고,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를 분할 통치하게 되었다. 1940년 6월에는 소련이 발트 3국을 강제 합병하였다. 이후 독일이 프랑스 침공에서 승리하자 축전을 보내는 등 독일과 화기 애애한 분위기를 이어나갔다.

2.3. 전쟁의 징조

그러나 1940년 7월부터 독일과 소련의 발칸 반도 방면에서 충돌이 일어나기 시작하며 전운이 드리우고 있었다. 이안 커쇼의 '아돌프 히틀러 2권'에 따르면 소련군이 루마니아 방면으로 남하하기 시작하자 독일 군부에서 이를 경계하여 히틀러 명령없이 전쟁 계획을 검토하기도 하였다. 이후 독일은 소련과 바로 얼마전까지 전쟁을 벌이던 핀란드와 상호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고 독일군을 진주시켰고, 이어 루마니아의 총리 이온 안토네스쿠가 9월 14일 '국민군단국가' 선언을 하면서 독일군의 진주를 허용하며 소련과 독일의 사이가 미묘해지기 시작했다. 앞서 독소 불가침조약을 성사시킨 폰 리벤트로프는 소련을 반영국 동맹에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지만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감으로 불타던 히틀러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1940년 11월 독일을 방문한 몰로토프에게 리벤트로프는 영국의 중동 영토를 소련에게 넘겨주겠다는 제안을 하였지만 몰로토프는 동맹 참여의 조건으로 '터키 내 소련군 주둔 허용, 핀란드에서의 독일 철수, 불가리아에 대한 소련의 우위권 인정, 일본의 남사할린 반환, 스웨덴에 대한 독일 입장 정리'를 요구하였다. 즉 소련은 자신들의 관심사가 중동 영토가 아닌 발트해와 발칸 반도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며 거부한 것이다. 이 협상의 결렬로 리벤트로프는 더 이상 히틀러가 전쟁을 결심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23] 1940년 12월 18일 히틀러는 국방군에 소련에 대한 공격 계획을 작성할 것을 명령하였다.

1941년부터 독일의 소련에 대한 침공 징조 서방 세계와 추축국의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는 독일측 암호 해독해 내서 당시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 스탈린에게 직접 경고하기도 했고, 1941년 봄에만 180건이 넘는 독일 항공기의 소련 영공 침범 사례도 있었으며, 일본 제국에 상주하던 전설적인 간첩 리하르트 조르게가 구체적인 수치까지 들어 가며 독일의 침공이 곧 개시될 것을 소련에 알렸지만, 스탈린과 소련 방첩국, 정보국은 그것들을 모두 무시했다. 전쟁 반대파였던 주소련 독일 대사 프리드리히 베르너 폰 데어 슐렌베르크 백작이 수차례 전쟁을 경고했음에도 결과는 같았다. 그리고 공산주의자였던 독일의 한 인쇄업자가 독일군에 납품한 숙어집을 소련 영사관에 보냈는데, 여기에는 "항복하라", "손들어", "집단농장 의장이 어디 있나", "공산주의자냐?", "발포한다" 따위의 러시아어 표현이 실려 있었다.[24]

6월 16일 베를린에 파견된 소련 측 간첩들도 독일의 공격이 임박했음을 지속해서 알리고, 심지어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하루 전인 6월 21일 독일군 탈영 병사였던 알프레트 리스코프(Alfred Liskov)는 독일군 내 숨어 있던 공산주의자였는데, 그가 "독일이 내일 공격할 것이다"라고 털어놓기도 할 정도로 징후는 있었다.[25]

영공을 침범하는 독일 항공기에 대해서도 공격하지 말고 특별한 지시가 있기 전까지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말라고 강력히 명령했으며, 이는 전쟁 초기 소련 공군이 루프트바페의 공습이 임박했음에도 손 놓고 있다가 이륙조차 해 보지 못한 채 대거 궤멸되는 참극을 초래했다.

물론 스탈린도 히틀러가 쳐들어 올 것에 대비를 하긴 했는지, 폴란드 점령 후 스탈린 선을 뜯어서 앞에 몰로토프 선을 짓기도 했다. 하지만 1937년쯤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많은 장군들이 숙청되었고, 미하일 투하쳅스키 등 유능한 장군들도 숙청의 칼날은 피하지 못했다. 이는 안 그래도 부족한 장교진의 인력난을 부추겼고, 살아남은 이들도 스탈린이 무서워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등 유무형의 피해는 독소전쟁 초기 소련의 발목을 잡는 요소였다.

참고로 소련은 독일이 서부에서 영국과 전쟁을 치르는 내내 독일에 물자를 제공했는데, 전쟁이 시작되기 불과 하루 전에도 물자를 가득 실은 열차가 독일 국경을 넘었다.

여담으로 물자를 실은 기차와 또 하나의 기차가 베를린-모스크바 선로를 왕복했는데 그 기차에는 독일, 소련 민간인이 타고 있었다. 이걸 보고 안토니 비버는 '평화와 전쟁은 정말 한 끗 차이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2.4. 히틀러의 판단과 의도

1940년 12월 18일 소련에 쳐들어가기로 결정을 내리고 전쟁령을 승인하면서 히틀러는 돌이킬 수 없는 전략적 선택을 했다. 전쟁의 주도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조바심에서 히틀러는 몇 달 안에 소련을 무력으로 완전히 궤멸하고 소련이라는 정치 체제를 없애버리는 쪽에 목표를 두고 독일의 전쟁력을 온통 거기에 쏟아부었다. 군 지휘관들도 사석에서는 딴소리를 했을지 모르지만 히틀러의 제안에 정색을 하고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군부의 지지도 얻은 셈이었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어리석다. 당시 독일의 장성들이 반론을 제기하지 않은 것은 히틀러처럼 소련의 군사력과 역량을 턱없이 얕잡아보았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도대체 왜 그랬을까 싶지만, 그들이 정말로 염려한 것은 소련이 아니라 영국이었다. 세계의 패권국 영국 미국이 무한한 자원으로 지원할 가능성이 점점 높아져서였다. 이런 도박을 대부분의 군사 전문가들이 군소리 없이 따랐다.

레더는 예외였지만 괴링도 처음에는 의구심을 보이다가 금세 돌아섰다. 도박이 성공하려면 넉 달에서 다섯 달 안에 소련을 때려눕혀 유럽의 패권을 잡아야 했다. 영국은 동남아시아에서 영국 영토를 노리는 일본에게 발이 묶여 있으므로 소련만 무너뜨리면 독일에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는 계산이었다. 미국도 태평양에서 일본을 상대해야 할 테니 유럽까지 넘볼 여력이 없을 것이라고 히틀러는 내다보았다. 독일은 전쟁에서 이겨서 유럽을 장악할 것이다. 미국과는 어차피 나중에 한번 붙겠지만, 그렇게 되면 한결 유리한 입장에서 미국을 상대할 수 있다.
- 이언 커쇼, 히틀러 2권 (p. 426)
1940년 말에서 초, 소련 나치 독일은 유럽 대륙 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양대 강대국이었지만, 좀더 넓은 차원에서까지 그랬던 것은 아니다. 확실히 그때까지 두 국가는 유럽의 판을 새롭게 짜오고 있었다. 그러나 대영제국은 이미 전 세계의 판을 짜오던 세력이었다. 소련과 나치 독일은 특정한 방식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았지만, 양쪽 다 자신들의 동맹에 저항하던 대영제국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단기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대영제국과 그들의 해군력이 만들어놓은 세계 체제는 나치든 소련이든 당장에 뒤엎을 대상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들은 이 길을 택하는 대신 다른 길, 즉 비록 대영제국과 영국 해군이 위용을 떨치고는 있지만 일단은 자신들 눈 앞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혁명 과업을 완수하며, 제국을 만들어 가는 길을 택했다. 서로 동맹이든 아니면 적이든, 또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소련과 나치 지도부 앞에는 강력한 영국이라는 존재라는 현실이 던지는 근본적인 문제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바로 현대 세계에서 거대한 대륙 제국이 세계 시장으로의 안정된 연결 통로 없이, 그리고 막강한 해군력 없이, 어떻게 번영을 누리며 자신의 지배력을 확보해낼 수 있을까라는 문제였다.

이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스탈린과 히틀러가 내놓은 기본 답안은 똑같았다. 그런 국가는 반드시 넓은 땅을 보유하고 경제적 자급자족을 일궈낼 수 있어야 하며, 체제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따라서 스탈린주의의 내부적 산업화 혹은 나치의 식민지 토지개혁과 같은 이른바 자신들의 역사적 과업을 달성할 수 있는 시민들을 보유해야만 한다. 히틀러와 스탈린 두 사람은 풍부한 식량, 원자재, 광물자원으로 뒷받침되는 거대 규모의 제국주의적 경제 자립 국가를 지향했다.

아울러 스탈린의 이름이 철을 의미하는 스틸(steel)에서 따온 것이라는 점, 그리고 히틀러 또한 철 생산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데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은 현대에 특정 자원이 갖는 중요한 의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스탈린 히틀러 모두 농업을 자신들의 혁명 완수를 위한 핵심 요소로 파악했다. 두 사람 눈에, 자신들의 체제는 식량 생산을 통해 나머지 세계로부터 좌우되지 않는 경제적 자립을 일궈낼 것이며, 타락한 자본주의 체제보다 들이 우월하다는 사실을 드러내줄 것이었다.

1940년 말과 1941년 초를 기점으로, 전쟁이라는 카드는 이 거대한 경제적 기획을 추진하려던 소련과 나치 서로에게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스탈린은 이미 지켜내야 할 경제 혁명의 성과물이 있었던 반면, 히틀러는 자신의 경제 체제를 바꾸기 위한 전쟁이 필요했다. 스탈린이 자신의 "일국사회주의"를 가지고 있었다면, 히틀러의 마음속에는 여러 국가에 걸친 국가사회주의, 즉 다른이들의 희생을 발판 삼아 독일인들의 번영을 보장할 광대한 독일 제국이라는 그림이 자리하고 있었다. 스탈린이 내세운 집단화 그 자체는 국가 내부적 계급투쟁이자 앞으로 다가올 외부와의 전쟁에 대비하는 작업이었다. 이와 달리 히틀러의 경제적 비전은 오직 실질적인 군사적 충돌을 통해서만, 실로 소련과의 전쟁에서 완전한 승리를 일궈낸 후에야 비로소 실현될 수 있었다. 집단화가 감추고 있는 비밀은 그것이 바로 팽창적 식민지 건설의 대체물, 다시 말해 내부로의 식민화 작업에 해당됐다는 사실이다. 히틀러는 여전히 외부로의 팽창을 통해서만 식민지를 손에 넣을 수 있다고 봤으며, 그의 머릿속에는 소련 서부의 거대한 농업지대에 더해 캅카스 지역의 석유 매장 지역까지 그려지고 있었다. 그 스스로 이야기했듯이 히틀러는 독일이 "세계에서 가장 경제 자립도가 높은 국가"가 되기를 원했다. 이를 위해 영국을 쓰러뜨려야 할 필요성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소련은 반드시 쓰려뜨려야만 하는 대상이었다. 1941년 1월 히틀러는 소련의 "어마어마한 자원"이 독일을 그 누구든 넘볼 수 없는 국가로 만들어줄 것이라고 군 지휘부에게 말했다.
- 티머시 스나이더, 피에 젖은 땅 (5장 파멸의 경제학 p.282~284)

히틀러가 영국이라는 강적을 앞에 두고 소련 침공을 개시해 독일의 전쟁 수행 양상을 양면전쟁 구도로 만든 것은 전략적으로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러나 히틀러도 바보가 아닌 이상 나름대로 이유는 가지고 있었고 경제적, 이념적 이유 외에도 군사적인 이유도 나름대로 있었다.

육군 강국인 프랑스가 버텨 서부전선을 형성했던 제1차 세계 대전 때와는 달리 프랑스가 무너진 상황인 데다가, 영국은 섬나라라는 특성상 육군이 약했으며 그나마 보유하고 있던 장비의 상당수를 영국 원정군으로 파병했다가 프랑스 침공 날려먹고 그 이후 영국 본토 항공전이 벌어지면서 자원을 대부분 공군 강화에 투자해야 했던 상황이라 영국 혼자서는 유럽 대륙에 상륙해 독일 육군을 상대하기는 역부족이었다. 물론 독일이 육군을 아예 다른 곳에 투입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는데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의 폭주로 어거지로 발칸반도에 빨려들어갔지만 압도적인 전력을 바탕으로 조기에 종결시켰고 독일이 전쟁을 속개하려면 소련의 예상과 달리 독일군은 작전을 고작 2달 미루는 정도였다. 또한 웨이벌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에게 북아프리카와 지중해 전역이 밀려나자 독일은 에르빈 롬멜이 이끄는 북아프리카 군단을 보냈지만 이들의 규모는 어디까지나 군단의 규모였고 결국 지중해-북아프리카의 전역의 주력은 이탈리아군이었다. 즉 독일은 이미 서쪽과 남쪽에서 전선을 운영하고 있었음에도 육군 전력 대다수를 소련 침공에 동원할 수 있었다.[26] 비록 1944년에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미국과 더불어 서유럽의 양대 주력이 되었지만 당장은 육군의 장비조차도 부족한 형편이었다. 영국은 오버로드 작전 이후에도 장비 보급 상당수를 미국에게 의존했다.

그러나 영국이 건재했기에 독일은 안 그래도 부족한 전력을 분산해야 했으며,[27] 이 때문에 미국에서 소련으로 보내는 항로에 대한 견제가 어려워졌다. 반대로 독일이 영국을 확실히 제압해 놓았더라면 미국이 유럽에 전선을 전개하는 것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물론 당장 영국 본토를 제압할 능력이 없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바다에서의 U-보트 작전과 북아프리카 중동에서의 작전에 시간을 들여가며 공을 들였다면 중기적으로 영국을 굴복시키거나 협상을 이끌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채 후방에서의 생산과 보급이 전세를 결정짓는 현대전에서 상대방의 보급 능력을 두 배 이상 향상시키고, 아군의 후방 생산 기지를 상대의 항공 세력으로 위협할 수 있는 영향권 내에 남겨둔 것만으로도 전력 약화를 야기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미 북아프리카 전역이 진행 중이었던 데다가, 바다에서의 싸움도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양면전쟁이 아니라는 건 말도 안 된다.

전해에 독일군은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패했는데, 그 결과 영국의 정복을 위해서는 보다 훨씬 강력한 해군이나 공군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28] 히틀러는 수십 개 사단을 해체하고 그 돈으로 해군과 공군을 증강할 계획을 세웠지만, 당장 400만의 상비군을 보유하고 유사시 천만 이상의 병력[29]을 동원할 수 있는 소련을 앞에 둔 상황에서 육군을 줄이기는 너무나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당시 독일과 소련의 인구비는 1937년 기준으로 1:3이었고 1941년에는 독일의 확장에도 불구하고 1:2.2 수준으로 유사시 동원 능력도 큰 차이가 났다.

물론 독소전쟁 발발 직후인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독일군과 소련군의 병력 전투손실 차이는 1:5로 압도적이긴 했지만 기습을 감안하면 이해할 만한 수준이었으나 스탈린의 후퇴 금지로 3백만 명이 포위되어 섬멸되거나 항복해 전체 병력 손실비는 1:20의 재앙적 수준이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소련군의 회복력을 과소평가했고 소련군은 전쟁이 길어질수록 물량뿐만 아니라 전략과 전술의 성공과 같은 많은 측면에서 독일군을 따라잡으면서 1944년 바그라티온 작전 이후에는 오히려 일방적 공격으로 독일군을 포위섬멸하고 십만 단위의 포로를 획득하며 회복 불가능한 병력 손실비에서 경합우세가 되었다. 바그라티온 작전 이후에는 독일군이 전투 손실비에서는 경합~경합우세이더라도 포로까지 포함하면 회복할 수 없는 병력 손실비 기준으로는 확실히 열세해졌고 소련군은 결국 우세한 교환비로 베를린까지 점령하면서 독소전 양측의 총 병력 손실 비율을 1:2.2, 전투 손실비는 1:1.4 정도까지 줄여 버린다. 독일군 무장 친위대가 점령지에서 벌인 학살로 민간인+포로 등의 소련의 비전투 사망자는 독일의 몇 배에 달했지만...

독소 불가침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전 세계가 놀랐던 이유가 절대 손을 잡을 것 같지 않았던 두 나라가 손을 잡은 데 있었을 만큼 독일과 소련은 결코 서로 간에 믿을 만한 국가가 아니었고 언젠가는 서로를 침공할 것이라는 예측을 이미 상호간에 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사실 스탈린은 독일과 서유럽이 서로 소모전을 벌여 만신창이가 되었을 때 독일을 침략하고 유럽을 거의 공짜로 먹을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이 참전하기 전에 소련이라는 폭탄을 제거해 두지 못한다면 영미를 막느라 상당히 약화된 상태에서 소련의 침공을 받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봉착할 가능성이 농후했기에, 이는 어느 정도 필연적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제1차 세계 대전 동부전선에서 독일에 쭉쭉 밀리다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거대한 땅덩어리를 떼주고 전쟁에서 이탈해 사실상 패배한 거나 다름없었던 제정 러시아의 무능함도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 성공을 확신했다. 제정 러시아만큼 무능해보였던 소련을 침공해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뛰어넘는 성과를 얻어 소련을 없애면, 추후 있을 대 미국전에서 배후를 노릴 수도 있는 소련이라는 폭탄을 제거함과 동시에 독일의 고질적 문제였던 자원 문제도 해결할 수 있으리란 기대감도 있었다. 동시에 이념, 정치적 목표인 레벤스라움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었으니 히틀러 입장에서는 참기 어려운 유혹, 아니 도박이었을 것이다.

이중 자원 문제는 중요한 것으로 특히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석유가 독일엔 항상 부족했다. 미국이 1941년~1945년까지 유럽과 북아프리카 전선 연합국에 제공한 석유는 60억 배럴이었는데, 이탈리아와 독일은 13억 배럴도 채 되지 않았다. 이 부족한 석유를 동부 지역을 침공함으로써 얻어내고 싶었던 것이다.

폴란드와 프랑스를 기갑 부대를 이용한 최소한의 희생으로 1달 정도의 단기간에 정복했듯이 한창 물이 오를 대로 올라 있는 육군을 동원하여 기습 공격을 한다면 소련을 쉽게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도 있다. 당시 독일군 육군 참모본부도 소련은 10주의 작전(!)으로 정복할 수 있다는 작전을 내놨는데 이는 히틀러의 결심을 더욱 확고하게 했다. 브렌하르트 폰 로스부르크(Bernhard von Lossberg) 중령 알프레트 요들 포병대장이 이른바 로스부르크 연구(Lossberg study)를 통해 작전을 입안했다.

물론 에리히 폰 만슈타인, 프란츠 할더, 하인츠 구데리안,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등 독일군의 주요 상급 지휘관 및 참모들은 "영국과 전쟁 중인 마당에 굳이 우리를 건드리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되는 소련을 상대로 불필요한 전쟁을 벌여서 군을 소모시킬 필요는 없다"는 의견이었지만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다. 물론 잘못될 경우 1차 대전의 악몽이 재현될 수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그 누구도 실제로 전쟁이 개시되면 소련이 길게 버티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독일군 장성들은 소련군의 역량을 얕잡아 봤다. # 모스크바 공방전 당시 독일군의 동계장비가 허술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의 악몽이 재현됨과 동시에 한 술 더 떠서 본토까지 탈탈 털려 버렸다.

설령 영국이 협상에 나섰다 한들 소련과의 전쟁은 어느 시점에 가서는 히틀러가 염원하던 조건으로 이뤄졌을 것이다. 히틀러가 정치에 입문하고 20년 가까이 히틀러의 머리를 지배한 것은 전쟁이였고 전쟁의 중심 입안자는 누가 뭐래도 히틀러였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히틀러는 전쟁을 상상하는 단계가 아니라 결전 계획을 구체적으로 짜는 단계에서도 상당히 개입하였고, 소련 공격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육군 지도부를 비롯한 국방군 수뇌부는 히틀러가 하자는 대로 했다. 그들은 히틀러를 말린 적이 없었고 말리긴커녕, 이미 독일 내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이 워낙 큰 데다가 소련의 군사력을 턱없이 얕잡아보는 바람에 군 수뇌부는 소련을 무너뜨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히틀러와 똑같이 낙관했다.[30][31]

그리고 퀴힐러, 회프너를 비롯하여 수많은 장군이 히틀러가 독소전쟁 개전하자는 주장을 묵인한 것은 순종하는 버릇이 몸과 머리에 밴 점과 이념에서도 나치 지도부와 겹치는 점이 상당히 많았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장군들 또한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동방에 제국을 세우자는 공감대가 있었고 소련과 볼셰비즘을 쳐부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는 이념적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독소전쟁은 히틀러가 억지로 국민에게 강요한 전쟁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나치건 나치가 아니건 독일의 모든 엘리트가 수긍했고 심지어 정도와 이유는 저마다 달랐지만 환영한 전쟁이었다. 나중에 전선에서 하급 병사로 싸우는 수백만 명의 군인을 비롯하여 대다수의 독일 국민도 이것을 '볼셰비즘과 겨루는 성전'이라는 나치 선전기관이 주입한 논리를 받아들였으며 광적인 나치당원들은 더 나가 볼셰비키 무리가 서양 문화를 파괴하는 것을 막으려는 예방전쟁이라는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유대 볼셰비즘'을 발본색원하지 않는 한 유럽의 해방은 기대할 수 없다고 철석같이 믿었으며, 이러한 믿음은 나치와 나치 지지자들에게 볼셰비즘을 제거하기 위한 절멸 계획 홀로코스트의 시작이었다.[32]

히틀러는 일단 쳐들어가기만 하면 강압적인 공산 통치에 염증을 느낀 소련 국민들이 독일군을 환영하여 소련 체제는 공격하는 즉시 붕괴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는 히틀러가 소련을 두고 한 말에서도 알 수 있다.
" 우리 문을 박차고 들어가기만 하면, 저 엉터리 건물 스스로 무너진다." #
(We have only to kick in the door and the whole rotten structure will come crashing down.)
하지만 결국 무리하게 공격해서 자멸하게 된 것은 나치 독일이었다.

히틀러가 생각한 것처럼 직접 소련과의 전면전을 겪은 일본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는 소련이 금방 망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사실 우크라이나, 발트 3국 등지의 일부는 처음에는 독일군을 스탈린의 학살, 숙청, 공포 정치에서 해방시켜 준 군대로 환영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독일군의 보답은 학살, 파괴, 약탈뿐이었다. 독일이 이러한 행위들을 저지른 것은 열등한 슬라브족을 멸살시키기 위해 취한 학살이며 문제는 전쟁이 장기화되고 본토 방어전으로 밀려서 학살 대상자들이 자신들의 영역에서 벗어난 이후에야 이런 끔찍한 전쟁범죄 행위가 멈췄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독일군의 잠재적 협력자가 될 뻔했던 우크라이나인이나 발트 3국도 모두 독일군에 등을 돌렸고 후방에서 빨치산을 하든지 소련군에 앞장서 입대했다. 히틀러와 독일군은 이 침공 작전에 대해 낙관적이었는데, 소련이 비록 거대한 육군을 보유하고 있지만 서방에서 육군력이 강했던 프랑스도 수도인 파리가 함락되자 바로 무너졌던 전례가 있는 만큼 소련도 그렇게 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또 대숙청으로 소련군이 반신불수가 된 상태인 데다가 소련 체제가 막장이기 때문에 소련군이 군사 작전을 펼쳐 봤자 그 범위만 컸지 결과는 프랑스와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듯 당시의 독일은 소련을 매우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사실 독일만이 아니라 다른 국가들도 소련의 역량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영국과 미국 등 많은 나라에서도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에 소련군이 막대한 병력을 잃자 소련은 얼마 못 가서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왜냐하면 스탈린만이 군대에 대한 정보와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정보에 대한 보안을 철저하게 유지한 결과 외부에서 소련이 정확히 어느 정도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고, 정보의 부족 때문에 소련 정복은 쉬울 것이라고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후방에 배치된 공업 시설의 생산능력이 제대로 증명되고 극동에 남아있던 정예 병력이 대규모로 집결하기 전까지는 소련군이 연전연패했다. 독일은 후방 병력 견제는 일본 해 줄 거라고 생각했지만 기대와는 달리 일본은 소련을 공격하지 않았다. 일본도 소련과 상호 간에 불가침 조약까지 체결하고 있었으며 조약의 체결 시점이 불과 독소전쟁 발발 2개월 전이기 때문이었다.

독일의 태도가 이러한 일본이 독일을 돕지 않고 대소 중립을 유지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는데, 일전에 독소 불가침조약 당시 방공협정 동맹인 일본과 아무런 의논 없이 체결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군은 할힌골 전투에서 소련군과 교전 중이었는데 독일이 일본의 뒤통수를 제대로 치게 되자 일본 정부는 외교무능에 대한 책임을 지고 히라누마 기이치로 총리대신과 그 내각이 일제히 총사퇴를 할 정도로 충격이 엄청났다. 그런데도 2년 후 바르바로사 작전에 대해서도 히틀러가 일본에 알리지 말라고 지시해 아무런 언질이 없었다. 일본 외무장관이 조약을 맺기 한 달 전에 베를린을 방문해 독일을 따라 일본도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을 추진 중이라는 상황을 알리기까지 했는데도 말이다. 이러니 일본 입장에서도 언제 또 바뀔지 모르는 히틀러의 장단에 맞추어 만 2달 정도밖에 안 된 대소 중립 조약을 파기하고 독일을 도울 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초반에 전투 한번 했다 하면 수십만씩 죽거나 포로로 잡히는 무지막지한 대패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상상을 초월하는 저력으로 결사적으로 저항하여 무너지지 않았다. 게다가 1941년 12월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독일은 미국에도 선전포고를 해 버렸는데 독일과 일본의 3국 동맹이 있었다지만 진주만 공습은 일본이 먼저 시작한 공격이기 때문에 독일이 굳이 미국에 선전포고를 할 의무조차 없었다. 하지만 히틀러의 노림수와 달리 독일의 대미 선전포고가 일본의 대소전쟁으로 이어지지 않았으며 일본은 독일이 패망한 후까지 대소 중립을 고수했다.[33]

물론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선전포고를 안 했다고 가정해도 아마 미국이 먼저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에 착수했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은 이미 유럽 전선에 참전하기로 영국에 비밀리에 약속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 경우에는 진주만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높은 상황에서 정부가 유럽 전선에 우선적으로 전력을 집중하는 상황을 국민들에게 납득시키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 미국 내의 여론은 2차 대전을 유럽 내에서 일어나는 즉 이웃 동네 싸움 정도로만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지 않는 한 참전할 이유가 없다는 식이었고 이는 먼로 독트린을 바탕으로 한 방임주의에 한 세기 넘도록 익숙했던 당시 미국인의 국민성 때문이었다. 즉 히틀러의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는 미국 정부의 정치적 부담을 덜어줬고 나아가 미국이 일치단결해서 전쟁을 수행하는데 큰 도움을 준 셈이다.

사실 이 선전포고에는 일본이 중국을 그만 공격하고 소련으로 공격을 돌리길 요구하는 의미도 섞여있었다. 어쨌든 불과 6개월 전까지만 해도 해상 보급에 연명하는 영국이 독일의 유일한 상대였으나 이젠 양면전쟁을 하게 되었으며 게다가 동쪽에선 소련, 서쪽에선 미국으로 훗날 냉전시대의 양강을 상대하게 되었으니, 소련 침공은 독일의 멸망 신호탄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독일 경제의 문제점이었다. MEFO(메포) 어음으로 대표되는 나치 독일의 부채 경제는 이미 1938년부터 190억 국가마르크에 이를 정도로 감당할 수 없었고 독일은 이를 흔히 말하는 따서 갚기, 즉 따갚되로 갚으려 했다. 그렇기에 이들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이후부터 을 악착같이 긁어모았다. 흔히 약탈경제로 말해지는 이들의 경제는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안슐루스, 뮌헨 협정, 프랑스 침공, 유고슬라비아 침공 등에서 수많은 금을 갈취할 정도로 커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친 듯이 오르는 국가의 부채를 한순간에 갚을 수 없었다. 특히 영국을 무너뜨리고 바다사자 작전을 통해서 영국 본토를 정복하고 배상금으로써 메포 어음을 갚으려는 이들의 계획은 영국 본토 항공전으로 좌절되었고 이대로 전선을 유지하다가는 독일 경제가 무너질 위기였다. 즉 소련 침공은 이러한 독일의 부채경제를 끝내기 위한 거대한 약탈 전쟁의 일종이었으며 이는 동일하게 약탈 경제로 굴러갔던 일본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던 것과 동일하게 진행된다.

2.5. 이오시프 스탈린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의 독일군의 공격이 어떻게 그처럼 놀라운 정치적, 군사적 기습의 효과를 달성했는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의문이 남는다. 사실 공격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조짐은 상술하였듯이 충분히 많았다. 스웨덴에 있는 공산주의자 철도 노동자나 폴란드 저항군, 그리고 많은 정보원들이 동쪽에서 독일군이 독-소 국경 지방에 대규모로 집결하고 있음을 알려 왔다.

그리고 독일군이 고도 정찰 비행 중에 소련 영공을 침범한 사례가 300회를 넘었고, 외교적인 항의가 반복되었으나 독일 측은 별다른 대응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또한 독일 정보원과 독일의 후원을 받는 우크라이나의 반데라주의 게릴라들이 여름에 이뤄질 바르바로사 작전에 앞서 1941년 봄에 소련 서부를 교란시켰으며, 모스크바 주재 독일 대사관은 6월 16일에 필수 인원을 제외한 모든 인력을 본국으로 후송했으며, 6월 21일에는 소련이 지배하는 항구에 독일 상선이 단 1척도 정박하지 않았다.

일단 이러한 파멸적인 상황이 스탈린의 완고하면서도 맹목적 사고 때문이었다는 일반적인 해석을 받아들이기는 쉽다. 그가 종종 적의 공격 의도에 의심을 품었기 때문에 스탈린은 적의 공격 능력을 보여주는 증거들을 무시하는 지도자의 전형으로 언급되었다.

2.5.1. 스탈린은 전쟁 징후를 알고도 무시했다

후대의 많은 연구자들은 스탈린은 '진심으로' 히틀러가 ' 양면전쟁'을 벌이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영국 공군이 소련의 바쿠 유전에 대해 폭격을 검토할 정도로 소련은 독일에게 많은 전쟁 자원을 공급했다. 아마도 스탈린은 소련이 독일에 전쟁 물자를 계속 공급하는 한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던 모양이다. 또한 스탈린은 히틀러에게 독일 경제에 없어서는 안 될 희귀 광물을 제공하면서 소련과의 전쟁이 임박하면 독일에게 중요한 인센티브를 박탈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소련은 1939년부터 독일이 침공한 1941년 6월까지 94만여 톤의 석유 및 석유 제품을 보냈고, 16만 톤의 망간 단괴와 2만 3천 톤의 크로뮴 광석과 여타 대량의 자원을 독일에 제공했다. 2차 출처 실제로 최후의 화물 열차는 독일이 공격을 개시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국경을 넘어갔다. 독일 점령 하의 유럽과 일본에 산재한 소련 간첩들은 독일의 공격 징후를 1년 전부터 계속 보고했지만, 스탈린은 이런 정보가 오히려 독일의 역공작이 아닐까 하고 의심했다.[34] 게다가 무솔리니의 삽질로 독일의 공세가 이집트, 그리스 - 유고슬라비아 쪽으로 확대되자 스탈린은 히틀러의 의중은 소련 공격이 아니라 수에즈 운하 확보라고 잘못 확신하고 말았다. 이때는 히틀러가 대놓고 소련에 대한 증오를 드러내면서 유고슬라비아의 쿠데타도 유대 - 볼셰비키들이 수작을 부린 것이라 주장하고 있었는데도 그러했다.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킬 결심을 하기 이전의 일이지만, 히틀러는 외무장관이었던 폰 리벤트로프의 제안대로 소련을 반영동맹으로 참가시켜보려고 불타는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를 억누르고 시도를 해보긴 했다. 이미 앞선 1939년 독소 불가침조약 체결 당시 반공조약이 실질적으로 소련을 향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 영국을 겨냥한 것이라고 말한 것과 같은 논리를 내세운 것이다. 1940년 11월 12일 소련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베를린을 방문했을 때 히틀러는 몰로토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영제국은 이미 망했소. 소련 독일/이탈리아/일본 3국 동맹에 가입하면 인도 제국을 나눠 주겠소.
이렇게 제안했다. 하지만 몰로토프는 앞서 전술한 것처럼 자신들의 관심사는 영국의 중동과 아시아 식민지가 아니라 발트해와 발칸 반도라는 것을 전하며 오히려 독일의 동유럽 동맹 세력 확장에 대해서 항의했다. 특히 당시 막 끝난 겨울전쟁으로 소련에 영토를 빼앗긴 핀란드[35] 베사라비아를 빼앗긴 루마니아가 독일 편에 붙었다. 또한 하필이면 그날 영국 공군 베를린 폭격하여 몰로토프는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와 함께 방공호로 대피했다. 그때 몰로토프가 한 말이 걸작이다.
" 대영제국이 망했다고 한다면 지금 떨어지고 있는 폭탄은 누구의 것이오?"[36]
당연히 이러한 행동을 보이는 히틀러와 나치 독일을 보며 스탈린은 독일이 동유럽으로 세력을 확장 중이지만 자신들과 충돌을 할 의도는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러한 스탈린의 판단은 히틀러를 너무나 '정상'으로 생각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것이 문제였다. 게다가 사실 영국에 남은 마지막 희망을 꺾어버릴 의도에서 소련을 굴복시킨다는 아돌프 히틀러 자신만의 논리는 사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믿기 힘들 만큼 복잡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37] 평범한 사람이라면 영국을 공격하는 편을 택하지 소련을 공격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굉장히 적기 때문이다.[38] 그래서 스탈린은 단지 독일에게 자원을 공급해 주고 독일 정찰기가 소련 위를 날아다녀도 자극하지만 않으면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스탈린은 독일이 전쟁을 일으킬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서 굉장히 고심했고, 그래서 전쟁의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서 전쟁 1달 전부터는 독일의 침공 징후가 확실했는데도 소련군에 경계 경보를 내리는 것을 주저했다. 게오르기 주코프의 회고록을 보면 당시 국방장관 세묜 티모셴코 원수 총참모장 자신은 계속 경계령 발동을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그게 오히려 전쟁의 빌미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결국 하루 전인 6월 21일에야 뒤늦게 경계령을 내렸으나, 그때는 이미 독일군 특공대들이 소련군 제1선 부대들의 통신망을 절단해놓은 상태라 명령이 전달조차 되지 않았다. 이것만 봐도 스탈린은 히틀러가 정상적이라는 기본 전제에 너무나 집착한 나머지,[39] 전쟁의 빌미가 될 수 있는 명분이나 우발적 충돌만 억제하면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는 위에서 말했던 대로 월경해서 정찰 활동을 하는 독일의 정찰기나 정찰 부대에 대한 대응도 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독일군은 마음대로 국경을 넘나들며 소련군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정찰할 수 있었고, 이는 소련군의 초반 참패를 초래했다.

물론 스탈린처럼 히틀러가 양면전쟁을 벌이는 일에 도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정상이다. 애초에 히틀러는 양면전쟁을 피하기 위해 스탈린한테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자고 제안했으니 지금 와서 갑자기 양면전쟁을 벌인다고 생각하기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40] 혹자는 바르바로사 작전 직전엔 육상전선이 없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당시에는 이미 지중해 북아프리카 전선이 진행 중이었기에 이는 사실이 아니다. 비록 2차 대전 초반에 프랑스를 항복시키면서 적어도 육군은 소련 쪽으로 집중할 수 있을 듯이 보였지만 이탈리아 왕국 덕분에 북아프리카 전역이 개전했고 이탈리아군을 보조하면서 영국군을 격퇴하라고 보낸 에르빈 롬멜은 독일군을 주력으로 몰아쳐 영국군 제8군을 격퇴하고 토브룩을 향해 공세를 펼치고 있었고 바르바로사 작전 바로 한달 전까지 독일군은 크레타섬과 발칸 반도를 공략하였고 이들 지역에 대한 잔존 영국군과 현지 게릴라 소탕작전은 6월 초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다들 알다시피 히틀러는 인류 역사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희대의 또라이였다는 것인데, 스탈린은 그걸 모르고 있었거나 혹은 이를 알면서도 믿지 않으려 했다. 사실 비단 스탈린 뿐만 아니라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이나 프랑스의 에두아르 달라디에도 앞서 있었던 오스트리아 병합이나 뮌헨 협정 주데텐란트 강탈 등에서 옛날의 1차 대전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게 최대한 독일 측의 요구사항을 받아주듯이 진행했으나, 상상을 초월한 히틀러의 전쟁광 기질 때문에 단치히를 비롯한 영유권 분쟁에 이어 폴란드까지 침공하게 되면서 비로소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스탈린은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럴 리가 없다며 현실부정을 하는 모습을 보였을 정도였다.[41] 나중에 가서는 정신을 부여잡고 소련을 지휘하긴 하지만 노발대발 화를 내기도 하고 독일이 왜 침공하겠냐며 전전긍긍한 것을 보면 이전까지는 정말로 히틀러가 소련과 전쟁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2.5.2. 그러나 스탈린에겐 나름 이유가 있었다

스탈린은 절대로 히틀러를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그는 히틀러가 단시간에 독일 민족들을 통합하고, 독일 내에서 상당한 세력을 유지하던 독일 공산당을 완전히 전멸시킴과 더불어 유럽의 거의 대부분을 순식간에 정복하는 광경을 보면서 히틀러를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게다가 히틀러도 자신과 비슷해서 남의 뒤통수를 후려갈겨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인물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원래 동족이 서로를 잘 파악하는 법,[42] 스탈린도 정치판에서 구르고 구르다 못해 대숙청을 비롯한 각종 학살을 저지른 인간인 만큼, 히틀러에 대한 대비를 하긴 했다. 위에서 말한 ' 스탈린 선'이 바로 그것. 바르바로사 작전 직전까지만 해도 (그리고 그 이후도 잠시 동안이나마) 독일에 대항할 만한 강력한 육군력을 보유한 적수는 없었으며[43],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패배했다고 해도 영국이 딱히 상륙할 것도 아닌 이상 독일의 패권을 위협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즉, 독소전이 개시되어도 딱히 양면전쟁이라고 말하기 뭣하다.[44]

게다가 소련과 겨울전쟁으로 맞붙은 다음 이를 빠득빠득 갈고 있는 핀란드 나치 독일한테 협력하면서[45] 장기적으로 뭔 생각인지 아주 뻔히 보이는 상황. 유럽의 최강국이자 패권 국가가 된 독일을 앞에 두고, 또한 보여준 전쟁 실력을 보고, 거기에 핀란드 등의 움직임을 보고 그 의심 많은 스탈린이 전쟁이 터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나 전쟁에 대한 준비를 안 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그래서 스탈린은 자신의 이름을 직접 딴 스탈린 선을 독일 앞에다 구축하려 했다.

그런데 ' 스탈린 선'은 독소전 최대의 오산 중 하나로 꼽힌다. 일단 폴란드 함락 이후에 만들어졌으니 만들 시간이 부족해서 미완성이었다. 또한 원래 폴란드 국경에 짓고 있는 방어선을 포기하고 새로 만들게 되면서 대숙청 이후의 빈약한 장교단으로 새로운 방어 작전을 짜야 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주둔하게 된 소련군들은 그동안 훈련하던 지역이 아니라 새로운 곳으로 오게 되었으니 당연히 역량이 감소했다.

만약 스탈린 선이 계획대로 완성되었다면 독일이 맞닥뜨릴 소련은 대숙청 이후로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복구된 군대와 스탈린 자신의 이름을 딴 강력한 방어선과 그곳에 있는 패권 국가인 독일에 대응할 만한 (나름 정예) 병력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원래 짓던 폴란드의 방어선까지 탄탄하게 2중으로 갖추었을 수도 있다. 스탈린 또한 전쟁을 싫어하는 인물도 아니며, 독소 불가침 조약은 누구나 있을 수 없는 조약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학자들 중에서는 독소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오히려 '준비된 소련의 선제 공격'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이 경우에는 서부전선에서 미국과 영국에 털리는 와중에 양면전쟁이 개시된다.[46]

당연히 소련 입장에선 대 독일 전쟁 계획이 없다고 하면 약화된 군과 없다시피 한 방어벽을 세운 채 떠오르는 태양인 독일과의 전쟁은 극구 피해야 할 것이다. 대 독일 전쟁 계획이 있다면 이쪽도 당연히 시간을 끌어야 한다. 이건 많은 시간도 아니고, 겨우 3~5년 정도만 있으면 대숙청의 여파에서 벗어나 안정을 찾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몰로토프가 회상한 바에 따르면 스탈린은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1943년에는 전쟁을 할 준비가 마련된다"그리고 정확히 맞았다는 스탈린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스탈린이 독일에 선제 공격 가능성을 내 주는 한이 있더라도 최대한 전쟁을 피한 것은 이러한 까닭일 것이다. 소련에게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전쟁을 피하고 어떻게든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가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 스탈린 입장에서도 별 수 없었다. 물론 이런 상황 자체가 대숙청을 벌여서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말 그대로 소련은 군수산업이 1943년부터 정점을 찍기 시작하면서 독일군을 압도적인 물량으로 분쇄하기 시작한다.[47] 다만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는데 독일군이 동유럽에서 저지른 학살로 그 장비들을 이용할 군인 수 자체가 감소해버렸다.

스탈린이 보여준 우유부단함에 대해서는 또 다른 이유들도 있다. 우선 스탈린은 독일과 서유럽의 전쟁을 부추겨서 둘 다 기진맥진한 상태로 만든 뒤 독일의 뒤통수를 쳐서 고꾸라진 유럽의 과실을 공짜로 챙기려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48] 때문에 독일의 침략 징후에 대한 보고가 들어오자 스탈린은 독일의 다른 적인 영국과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그 외에 폴란드 저항세력들 같은 저항 조직들이 소련을 전쟁에 끌어들이려 거짓된 정보를 제공한다고 우려했다. 게다가 대숙청으로 인해서 소련의 중요 인재들이 쓸려나가서 소련의 정보 작전 능력은 굉장히 축소되었으며, 소련의 정보 장교들은 만약에 스탈린의 생각에 거슬리는 보고를 하게 될 경우에는 죽을 것이 빤히 보였다. 거기다 보고가 스탈린이나 히틀러를 자극할 것을 지나치게 우려했기 때문에 전쟁 발발 가능성을 담은 보고서들을 주작질로 왜곡하여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한마디로 스탈린이 원하는 보고서만을 보낸 것이다. 이는 독재정권의 고질적인 문제로 스탈린뿐만 아니라 히틀러와 역사적인 독재자들이 모두 그랬으며, 중요한 상황에서 패착을 내는 요인이 된다.

게다가 독일 측의 기만책도 스탈린의 결정을 주저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우선 바다사자 작전이라는 영국 침공 계획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가리는 바람잡이 역할로 사용되었는데, 독일 국방군 총사령부가 동부에서 창설한 부대는 사실은 영국의 정보부를 기만하기 위한 것이며, 독일은 바다사자 작전을 실행하기 위해 영국 폭격기와 정찰기가 닿지 않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정보를 소련 측에 보란 듯이 알렸다. 특히 1941년 6월의 신문 기사에는 선전 장관이었던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영국 침공이 임박했다는 거짓 정보를 흘렸다. 물론 괴벨스는 배포된 신문을 바로 마치 소련이 보란 듯이 회수해 버렸는데, 이 행동의 목적은 이것으로 자신들이 정말로 영국을 공격하려 한다는 역정보를 흘리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괴벨스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중요 군사 정보를 실수로 흘린 것처럼 위장하여 나치당 내에서 불명예를 얻은 것처럼 행동하였다.

한편 유고슬라비아 침공 그리스 침공 또한 스탈린의 오판에 기여했다. 그리스의 경우, 히틀러도 의도치 않은 이탈리아의 트롤링이므로[49] 이를 교란이라 생각할 수 없었다. 이는 그 동안 동부에서 독일의 새로운 부대가 편성된 이유를 그럴 듯하게 설명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바르바로사 작전 자체를 연기시킨 원인이 되었다. 그래서 원래 독일의 계획이었던 1941년 5월 15일에 독일이 침공할 것이라는 올바른 정보를 제공했던 정보원들이 이야기했던 날에 공격을 감지할 만한 어떤 낌새도 없이 그냥 지나가 버렸다. 그러자 스탈린은 제대로 낚여서 정보원들을 신뢰하지 못하였다. 이전부터 스탈린은 크고 작은 독일 침공 징후 보고가 계속되자 히틀러한테 전보를 보냈다. 대표적으로 1941년 3월 8일 "귀국이 소련을 친다고 하는 첩보가 들어오고 있고, 귀국 군대가 자꾸 동쪽으로 오는데 우리가 뭘 잘못했습니까?"하고 스탈린이 히틀러한테 전보를 보냈다. 히틀러는 3월 10일 보낸 답신에서 "우리가 동쪽으로 군대를 보내는 것은 그리스 및 유고슬라비아 쪽을 '정리'하기 위함이며 소련이 우리의 계획을 도와준다면 발칸 반도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될만한 장소를 제공하겠다"며 역으로 스탈린 입이 귀에 걸릴 페이크를 쳤다.[50] 그리고 4월에 히틀러가 유고슬라비아-그리스 침공을 감행했고, 문제의 5월 15일은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갔다. 그러자 스탈린은 히틀러의 말을 믿어버리게 됐다.

게다가 스탈린이 받은 모든 독일 침공 징후 보고서들에서 독일군의 동계 준비에 대한 어떤 내용도 찾아볼 수 없는 것도 스탈린의 오판에 큰 기여를 했다. 희대의 군사천재 무리하게 러시아를 공격했다가 동장군 때문에 망했는데 월동준비를 안하고 러시아 땅에 쳐들어가는 것은 애들도 다 아는 자살행위다. 스탈린의 입장에서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런 자살행위 6주만에 프랑스를 굴복시킨 독일의 유능한 지도자인 히틀러가 할 리가 없었고[51] 동유럽에 집결한 독일군은 유고슬라비아-그리스 침공을 위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설령 그 자살행위를 할 거면 어떻게든 겨울이 오기 전 드넓은 소련 땅을 먹을 최대한의 시간을 벌기 위해 위에 반드시 라스푸티차가 끝나자마자 바로 쳐들어와야만 했다. 히틀러도 바보가 아니라 당연히 이를 알고 있어서 독일군은 그 때 쳐들어가려 했는데 이탈리아의 트롤링(...)으로 그러지 못했다. 이러니 '독일군이 이번 해에 쳐들어오지 않는다'는 스탈린의 판단은 '지금 그 상태로 쳐들어오면 반드시 패망한다'는 진실에 기반한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었으나 히틀러는 스탈린의 생각과 달리 희대의 군사천재가 아닌 희대의 또라이였고 상식적으로 하면 안되는 자살행위를 진짜로 저질러버렸다.그리고 저 자살행위를 저지른 히틀러는 진짜 저것이 원인이 되어 자살했다.

굳이 유고슬라비아 침공이나 그리스 침공이 아니더라도 전황이 스탈린이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게끔 흘러갔다. 프랑스 점령 후에 각성한 영국군과 자유 프랑스 연합군은 빠르게 비시 프랑스의 아프리카 식민지를 점령하기 시작했고 이탈리아군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영국군에게 그야말로 영혼까지 깨지며 참패하고 있었다. 또한 역시 비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지중해의 시리아-레바논까지 잃어버리는 상황까지 처한다. 물론 비시 프랑스의 아프리카 식민지는 독일군이 피땀 흘려 점령한 정복지도 아니고, 북아프리카 전선은 독일군이 전혀 관심도 두지 않은 전선이었고, 지중해 전선도 그리스를 점령한 이후에는 연합국의 위협이 크게 도사리고 있지는 않았지만 이탈리아 왕국이 이탈 내지는 연합국에 항복할 가능성, 지중해 전선에서도 열세에 놓이게 되어 연합군에게 반격을 당할 상황이 되니 독일군은 결국 아프리카와 지중해에도 군대를 파견하기 시작한다.[52] 이탈리아 왕국군 지원을 나간 에르빈 롬멜은 상부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53] 빠른 기동전을 펼쳐 이탈리아군의 실지를 회복하기 시작하며 영국의 이집트까지 압박하기 시작했고, 영국군도 이에 맞서는 등 치열하고 팽팽한 공방전이 지속되었다. 다 죽어가는 중인 줄만 알았던 영국군은 영국 본토항공전에서 완승하고 오히려 역으로 독일을 폭격하고, 비스마르크함을 홈 네이비 전체를 투입하여 침몰시키는 등 본토 방어전에서 승기를 잡았고 북아프리카에서도 롬멜의 공세 종말점을 활용해 역공을 가하기도 하여 롬멜을 밀어내기도 하였다. 지중해 전역에서는 5월 치러진 크레타 섬 전투에서 영국은 끝내 패배하였지만 프랑스 침공 당시 벨기에와 네덜란드 일대에서 성공적인 공수 작전을 펼친 7항공사단에 무려 47%에 달하는 손실을 입히고 유럽 추축국의 서열 2위 이탈리아 왕국을 무참히 패퇴시키며 독일군을 상대로 밀리지 않는 선전을 하게 되자 스탈린의 입장에서는 1941년 4~5월 시점에서 대영제국은 아직까지 죽지 않았고 본격적인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고 실제로 그랬다.

6월 하순이 되자 그 동안 보고되었던 수많은 위험 징후가 거짓으로 판명되면서 정보원들은 더 이상 스탈린과 그의 참모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정황을 보면 스탈린이 전략적 관점에서 허를 찔렸다는 사실이 보다 확실하게 이해가 된다. 그리고 1년 전부터 리하르트 조르게를 비롯한 스파이들이 정보를 보내왔기 때문에 스탈린이 고집이 세고 무식한 지도자로 보이지만 저 말은 다르게 생각해보면 스파이들이 1년 동안 보내왔던 정보들은 거의 대부분 틀렸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실 엄청나게 많고 어지러운 징후들 사이에서 눈앞에 닥친 위험을 가려내는 것은 말이 쉽지 실제로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나폴레옹 러시아 원정에서 알 수 있듯이, 러시아는 광활한 영토와 막장스런 기후 덕분에 공격자에게 매우 불리하다. 물론 안하는 게 최고지만, 어쩔 수 없이 침공하려고 했을 때에는 러시아의 라스푸티차 동장군을 피해 봄, 아니면 아무리 늦어도 초여름에 침공해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독일군이 유고슬라비아 침공으로 발칸반도에서 이미 시간을 허비해서 봄과 초여름이 지나 한여름이 되어 버리면 독일군이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으로 스탈린은 판단하였다. 마침 1941년 이 해의 봄에는 유난히 비가 많이 오는 등 라스푸티차가 오래 지속되었다. 이 때문에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군도 '만약 독일이 침공한다면 라스푸티차가 끝나는 즉시 공격을 행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앞서 말한 유고슬라비아-그리스 침공 등으로 인해 소련 침공 자체가 연기되고, 곧바로 여름이 되자 스탈린은 "적어도 이번 해에는 들어오지 않겠지" 라는 생각으로 독일군의 침공에 대해 마음을 놓아 버렸다.

게다가 1941년의 소련의 육군과 공군은 이제 막 전환기를 맞고 있었다. 조직과 지휘부, 장비, 훈련 병력 배치, 방어 계획 모두가 바뀌던 중이었다. 특히 대숙청을 통해서 기존 군부중에서 흔히 말하는 똥별, 횡령범, 혹은 군 내 사조직 등의 군대 내부에 있는 '인민의 적'들을 잡아내는 과정에서 교리 그 자체가 바뀌는 시기였다. 특히 이미 할힌골 전투나 흔히 대숙청으로 인해 빈약해진 소련군을 보여줬다고 말하는 겨울 전쟁 등의 여러 전쟁들에서 소련은 대숙청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내렸고, 군부의 체계를 더 확실하게 바꿔야 함을 느꼈다. 하지만 문제는 이 바꾸는 작업이란게 시간이 매우 오래 걸리는 것이었고, 독일은 딱 그 시기에 쳐들어왔다.

이런 점들을 생각하면 오히려 독일의 선제공격은 비교적 탁월한 선견지명이었다. 언젠가 한 판 붙어야 할 적이 최고의 상황을 스스로 마련해 준 것이다.

요약하자면 스탈린이 대숙청이라는 희대의 뻘짓으로 소련의 군사력 역량을 잔뜩 날려먹긴 했지만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린 스탈린은 언젠가 한판 붙을 것을 예상은 했고 나름 대응하려 했다.[54] 그러나 독일의 노련한 교란 작전에 속아넘어갔고 독일군이 라스푸티차 동장군을 우려하여 겨울에는 오지 못할 것이라 여겼기에[55] 1941년 가을에 쳐들어올 것을 예상하는 데 실패했다. 또한 대숙청의 여파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탈린은 시간이 필요했고 이 때문에 독일에게 최대한 배려하는 길을 택했으나 이는 커다란 재앙이 되었다. 만약 전쟁이 터지지 않거나 몇 년 늦게 터졌다면 스탈린의 도박은 성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독소전쟁을 일찍 1941년에 시작해 버렸고, 스탈린에게 시간이 필요했다는 약점을 놓치지 않았다.

전쟁 초기 소련의 도박은 실패했고, 독일의 도박은 성공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소련은 한 방에 나가떨어지게 만들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결국 모스크바 앞에서 전투가 지지부진 늘어졌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겨울을 맞이하게 되었다.

3. 규모와 의의

서구권에서는 단순히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선 중 하나로 보아 '동부전선'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지만 하나의 '전선'으로 치기에는 그 규모가 어마어마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단일 전쟁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의 대부분의 군인들이 독소전쟁에 동원되었으며 사상자의 비중도 독소전쟁이 대부분이다. 전투 목록에 포함된 유사 이래 모든 전투들의 규모[56] 순위를 매기면 상위 10개 중 7개, 특히 1위부터 5위가 전부 독소전쟁에서 일어난 전투들이다. 승자인 소련 냉전 시기에 공산권의 수장 국가였다는 점과 서구권 위주의 전쟁관, 그리고 여기에 영향을 받은 각종 매체들의 파급력으로 인해 서부전선 등이 조명받는 경우가 많으며 호칭도 단순히 '동부전선' 정도로 일컬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실질적으로 투입된 규모와 인력을 고려하면 결코 일개 '전선'으로 불리기 힘들 정도의 대규모이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따로 '독소전쟁'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점차 늘고 있다. 당장 서유럽, 북아프리카 방면은 물론 태평양 방면과 중국, 동남아 전선까지 포함한 전체 2차 대전의 총 인명피해 중 절반 가량이 여기에서 나왔다.

만약 독소전쟁이 없었더라면 독일이 대(對) 소련 전선에 퍼부었던 400만 대군이 오롯이 서부에 집중되었을 것이고 영국과 미국의 베를린까지의 진격은 더 많은 물자를 소모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재앙적인 인명 피해를 냈을 것이다.[57] 그만큼 2차 대전의 판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전쟁이다.

독소전쟁 직전까지는 중일전쟁이 가장 넓은 판도에서 치러진 전쟁이었고 실제 인명 피해도 그나마 독소전에 준하는 수준이지만 당시 중화민국은 지방 군벌이 여전히 강력하던 시기로 중앙 집권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병력 동원력이 영 좋지 않아 거대한 인구에 비해 의외로 전체 병력이 얼마 안 되었다. 또한 일본 제국도 중국군과 싸우는 동시에 미국과의 태평양 전쟁이 개전되면서 태평양은 물론 동남아시아 전선에까지 병력을 투입했기 때문에 중국 본토로 생각보다 많은 병력을 동원하지 못한 관계로 중일전쟁에서 일어난 양군 간 교전의 규모는 비교적 작았다. 제2차 상하이 사변, 우한 방어전 등 가장 큰 전투들도 양군 합쳐서 100만 명도 동원되지 않았다. 그 전투들의 규모가 결코 작다는 건 아니지만. 게다가 중국군은 대규모 회전을 치를 능력이 부족했고 일본군도 중국 본토의 거점을 점령하는 데에만 집중했지 주력을 포위 섬멸하는 것에는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각각의 전투에서 큰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가장 거대한 인명 피해가 나왔던 대륙타통작전이 양군 합쳐 60만 정도의 전사자가 나왔는데 일반적인 전쟁과 비교하면 매우 큰 수치지만 독소전쟁과 비교하면 그다지 많은 수치가 아니다. 이러다 보니 중국의 희생은 대부분이 중일전쟁의 여파로 기아 한파, 전염병, 일본군의 학살로 죽은 민간인이었고 군 병력의 손실은 그래도 군인인지라 일본군의 3배가 조금 안 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소련은 당시 중화민국보다 훨씬 강력한 중앙 집권화된 열강이었고[58], 적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포병 전력에서 한참 앞서 있었다. 일본도 독일보다 경제력, 군사력을 비롯한 국력에서 열세였던 것은 마찬가지이다.[59] 이렇듯 국가의 기본 체력부터 독일과 소련이 일본과 중국보다 훨씬 튼튼했는데 당시 독일, 소련 이 둘이 미국 아래 GDP 2, 3위를 다투는 국가들이었다.

서부전선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 침공 당시만 하더라도 양 측은 총 300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했으나 이 모든 병력들이 동원된 전투는 없었으며 주요 전투마다 사단-군단급 위주의 규모로 교전이 벌어졌다. 독일군의 전광석화 같은 전격전에 의해 연합군의 다른 전투 병력들이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파리가 함락되었고 노르웨이 침공에서도 1개 군단급 병력이 맞붙었으며 북아프리카 전역에서도 양 측은 군단급에서 야전군급 병력 정도만 동원했다. 그 이상 대규모로 병력이 동원되는 전투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에도 아르덴 대공세 정도 외에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독소전쟁은 양 국가, 나아가 고대 이후로 동부 유럽에서 세력 다툼을 해오던 게르만족 슬라브족, 그리고 아돌프 히틀러 이오시프 스탈린이라는 두 악명 높은 독재자, 나치 독일을 대표로 하는 파시즘과 소련을 대표로 하는 공산주의라는 거대 이데올로기의 흥망을 건 총력전이었으며 양 측 모두 집단군 단위의 수천 만에 달하는 병력이 동원되어 전투가 끊임없이 벌어졌다. 매우 잔인하고 극도로 치열한 전쟁이었던 만큼 어지간한 강대국의 총 병력 숫자에 맞먹을 정도인 100만 명 정도의 군인들이 전투 하나의 사상자인 경우도 있었다.[60] 그리고 총력전이라는 말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이 전쟁의 패전으로 인해 독일은 민족 중흥의 발흥지라고 볼 수 있는 동프로이센 지역을 통째로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독일어권이나 범게르만 계열로 표현되는 언어·민족적 그룹 자체가 동유럽에서 소멸하게 되었으며 히틀러와 파시즘, 그리고 동게르만 민족과 프로이센주의 전통들이 완전히 도태되고 스탈린과 공산주의가 지구의 절반을 정복하고 지배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독일, 소련은 물론이고 당시 두 나라 사이에 낀 2차대전 동부, 중부 유럽 전체가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으며 쑥대밭이 된다. 사실 나치 독일은 서부전선에서는 나름 이미지 관리를 했는데 서/북유럽과 미국이 나치 사상 상 서열 높은 인종에 해당되는 나라들이었기에 그들 기준에서 나름 전쟁포로들을 대우해준 데에 비해 운터멘쉬(하등인간)로 규정한 동부전선의 슬라브족들에게는 아주 잔인하게 굴었다. 소련도 독일보다는 덜했지만 카틴 학살 등만 봐도 결코 자비로운 통치를 하던 나라는 아니었으며 절멸전을 치르며 더욱 포악해졌으니 그 사이에 낀 국가들은 제대로 고통받았다. 대표적인 예가 카틴 학살, 바르샤바 봉기 등 양쪽으로 고통받았던 폴란드. 그리고 다른 동유럽 국가들의 운명도 순탄치 않아 독일군에게 대량 학살을 당하거나 소련군에 의해 굴라그에 끌려갔다. 게다가 전쟁 이후까지 소련이 연합국의 아주 중요한 축으로 자리잡으면서 사실상 소련의 전리품으로 취급되어 독일에게 고통받은 것은 완벽히 밟혀지기라도 했으나, 소련에게는 대항 세력도 없게 되었다. 이로 인해 폴란드는 연합국으로 싸우고도 버림받으며 동부 유럽 방면의 정세를 실시간으로 본 핀란드는 아예 추축군에 붙었었다가 배신하는 등 개판 5분 전이 되었다. 학살도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괜히 전선 하나의 민간인 인명피해가 몇 천만에 달하는 것이 아닌 셈.

이 전쟁이 소련의 승리로 끝남에 따라 냉전이 시작되고 바르샤바 조약 기구를 필두로 한 제2세계라는 동맹 블럭이 성립되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후의 현재의 세계 판도를 결정한 현대 세계사의 결정적인 전쟁 중 하나이다.

3.1. 특징

  • 유례 없는 대규모 병력 동원 - 서부전선의 경우 가장 유명한 노르망디 상륙 작전만 하더라도 연합군과 독일군 양측에서 야전군 병력들을 동원했고 아르덴 대공세 때가 되어서야 1개 집단군 규모의 병력들이 서로 맞붙었다. 그 유명한 사막의 여우 에르빈 롬멜도 몇 개 사단 규모의 아프리카 군단을 지휘한 수준이었다. 반면, 독소전쟁은 집단군 단위의 군 병력들이 총동원되었으며 특히 소련군은 어마어마한 피해에도 끊임없이 사단을 편성해 10개 전선군(집단군)을 투입했을 정도였다. 조공이나 기만 작전만 하더라도 몇 개 야전군 단위에서 1개 집단군 병력들이 동원되어 전투를 치렀을 정도로 독소전쟁의 규모는 차원이 달랐다.
  • 대규모 기동전 - 독일군은 대부분의 전차와 항공기들을 동부전선 방면에 투입했으며 소련은 어마어마한 공업 생산력 그리고 랜드리스로 마련한 수 많은 전차와 항공기들을 전부 독일 전선 방면으로 투입했다. 이러한 상황이다보니 중일전쟁이나 서부전선에선 꿈도 못 꿀 수천 대 단위의 전차들이 동원되는 대규모 전차전이 여러 번 벌어졌으며 기동 전력들이 총동원되다보니 병력의 기동 범위도 크게 넓어졌다. 그 덕에 독일군이 독소전쟁 이전에 보여주었던 전격전과는 차원이 다른 기동전이 벌여졌다.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독일군은 400만 명의 소련군을 섬멸하며 1,500km의 거리를 진격해 모스크바 코앞까지 도달했으며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소련군은 단 2개월 만에 집단군 단위의 독일군 병력들을 갈아버리며 700km를 주파했다. 이러다 보니 지휘관들의 작전 역량도 크게 발달했다. 독일군은 임무형지휘를 통해 하위 지휘관들이 자유롭고 창의적인 전술을 구사하게 하여 소련군의 반격을 격퇴했으며[61], 소련군은 대숙청과 체계 개편의 성과가 보이는 대로 곧장 작전술 전투 체계를 통해 독일군을 패퇴시키며 독일로 진입했다.
  • 대규모 화력 - 소련의 경우 포병을 중시한 덕에 수많은 카츄샤 다연장로켓과 곡사포들이 공세 이전에 독일군 방어선에 준비 포격을 가했고 포병사단까지 편제되어 각 제대에 연대급 단위 하위부대가 배속되는 형태로 운용되기도 했다. 이러다 보니 독일군은 소련군의 어마어마한 포격에 큰 피해를 입어야 했다. 독일의 경우도 소련의 주요 대도시를 점령하기 위해 전투 시 가용 항공기들을 총동원해 초토화시켰고, 그래서 레닌그라드 스탈린그라드를 비롯한 소련의 주요 도시들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또한 구스타프 열차포 칼 자주박격포를 비롯한 수천 개의 화포를 동원해 세바스토폴 요새를 공략하기도 했다. 또한 부족한 화력을 보강하기 위해 독일군은 여러 포대에서 동시에 목표를 타격 할 수 있도록 하는 TOT을 발전시켰다. 서부전선과 차원이 다른 고화력 전투가 벌어지다보니 주요 전장이었던 독일 동부 도시와 폴란드, 소련의 주요 도시들은 완전히 쑥대밭으로 전락했다.
  • 역사상 유례 없는 총력전 - 독소 양측의 지도자들은 전체주의적인 독재자였고 국가를 위해서든, 자신의 정권을 위해서든 간에 승리 이외의 다른 선택지는 없었고 그 상황에서 그야말로 국가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소련은 '어머니 러시아'와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모든 인민들이 나서야 한다고 선전했고 자기 가족과 자기 땅을 침범한 적은 막아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던 데다 독일군이 저지른 전쟁범죄를 마주한 소련인들은 너도 나도 조국을 지키기 위해 나섰다. 대도시에서 벌어진 주요 전투마다 소련 인민들이 나서서 방어진지 공사를 도와주었으며 시골의 경우 청야전술을 실시해 그동안 정신적 지주로서 수백 년을 버텨왔었던 고향 마을들을 스스로 불태워 없애버려 독일군이 물자를 현지 조달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소련군 패잔병과 일부 민간인들은 총기를 들고 빨치산이 되어 독일군을 괴롭히고 다녔다. 우랄로 이전된 군수공업단지에선 모든 노동자들이 총동원되어 군수무기들을 생산했고 여군들도 100만 이상이 동원되어 단순히 지원 부대뿐만 아니라 저격수, 전차병, 조종사 등 일선 전투병과에 배치되어 맹활약했다. 심지어 범죄자들도 형벌부대에 배치되어 독일군의 총알받이가 되었다. 독일의 공습을 피하고자 서부의 공업지대를 통째로 뜯어가 우랄 산맥 동쪽으로 이전시킨 것은 물론이고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전부 군수 공장에 소집되어 전쟁물자 생산에 모든 것을 걸었고, 주요 교통망과 철도도 전부 소련군의 보급로 및 렌드리스 공급망으로 전환되었으며 다른 인민들도 방어선 구축과 소련군에 대한 비군사적 지원에 그야말로 총동원되었다. 독일의 경우 강탈한 프랑스의 열차 3분의 2를 동부전선 방면에 투입했고 비시 프랑스로부터 막대한 전쟁자금을 뜯어냈다. 다른 점령지에서도 해당 점령지의 자원과 국부를 몽땅 동부전선에 투입했고 그 과정에서 점령지들은 경제적 타격을 입었다. 독일 역시, 전쟁의 정당성을 끊임없이 선전했는데 볼셰비키와 스탈린의 철권통치로부터 광활한 영토를 수복하고 러시아인들을 해방하러 간다는 프로파간다를 내세웠으며 일단 겉으로는 단순히 불법 침략을 자행한 점령군 행세를 선전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소련이 반격하여 독일이 방어하는 입장이 되었을 때는 초기 독소전 당시 소련 인민들이 그러했듯이 대다수의 독일 국민들도 기꺼이 협력했다. 결국 전쟁 막바지가 되자 장애인과 노인, 심지어 어린이까지 몽땅 동원해 히틀러 유겐트, 국민돌격대에 집어넣어 소련군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했다.
  • 절멸전쟁과 피의 보복 - 독소전쟁은 게르만족 슬라브족이 사는 동유럽 지역을 정복하고 그들을 노예로 삼는 정복전쟁 수준을 넘어, 상대 민족을 말살하여 아예 지구상에서 지워버리려는 절멸전쟁이었기에 온갖 잔혹한 일들이 벌어졌다. 독일군은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포로로 잡은 수백만 명의 소련군 병사들을 그대로 굶겨 죽이거나 강제수용소로 보내 가스실에서 죽이거나 작은 건물에 포로를 무더기로 집어넣고 입구를 막은 뒤 산 채로 불태워죽이거나 쪄 죽였고 이에 그치지 않고 야전 중 붙잡은 소련군이나 빨치산 포로에게 분풀이로 산 채로 내장을 뽑거나 으로 사지를 자르고 신체를 훼손하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고 친위대와 국방군 모두 이러한 행위를 저질렀다.[62] 독일군의 전쟁범죄에 분노한 현지 민간인들이 파르티잔 운동을 벌이자 민간인을 상대로도 광범위한 보복학살을 수행했다.[63] 이러한 독일군의 만행에 분노한 소련군 빨치산들은 독일군 포로를 잡으면, 똑같이 성기와 같은 신체 중요부위를 잘라내거나 십자가에 팔다리를 못박거나 안구를 녹여버리고 망치로 이빨이나 턱을 박살을 낸 뒤에 죽이는 등 보복성의 여러 잔혹한 행위를 저질렀다. 또 독일군 포로들은 전쟁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혹독한 환경 속에 강제 노동에 동원되어야 했고 그렇기에 소련군에 붙잡힌 독일군 포로의 생존율은 서부전선의 독일군 포로보다 훨씬 적었다. 그리고 상부 차원의 지시는 아니었지만 일부 소련군 병사들은 독일 본토에 진주한 뒤로 독일 민간인에 대한 약탈, 학살, 강간을 저지르기도 했다.[64] 이러한 상호보복의 특성을 띈 전쟁이었기에 여러 문화 매체들에서 독소전쟁은 잔혹함과 비극의 극치를 달리는 전쟁으로 묘사된다.

4. 경과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202fef11435b31cd36722047d81bab2c.jpg 파일:external/lh3.googleusercontent.com/ww2-cartoons-illingworth-stalin-spanks-hitler.jpg
아돌프 히틀러 : "용서하시게, 동무. 하지만 놓치긴 너무 아까운 기회인걸 어쩌겠나!"
(스탈린이 독소 불가침조약 조약 문서를 떨어뜨리고 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합동 공세"라 쓰인 몽둥이를 들고 오며) " 눈물 좀 아끼라고, 아돌프, 그건 그냥 맛보기니까 말이야."
아돌프 히틀러 : ( 스탈린에게 얻어터지며) " 아악! 이 살인마야! 아악!!"

독소전쟁/경과 문서 참조.

4.1. 연표

4.1.1. 1941년

4.1.2. 1942년

4.1.3. 1943년

4.1.4. 1944년

4.1.5. 1945년

5. 전쟁이 남긴 것

5.1. 잿더미가 된 두 나라

거의 60년 동안 전 세계에 참사들이 더 쌓인 뒤에도 여전히 소련인들이 겪었던 고통을 그저 듣기만 해도 상상력이 마비되어 보잘것없게 된다.
- 리처드 오버리,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p.385

개전 시점 독일과 소련은 세계 2~3위를 다투는 경제대국이자 공업강국이었다.[90] 이들 국가는 이렇게 강력한 열강이었고, 이 두 국가가 치른 독소전쟁은 단순히 파시즘과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 싸움을 넘어 상대 민족을 세상에서 지워버릴 목적의 절멸전쟁이었다. 더욱이 당시 양국 지도자 모두 인명경시 사상이 강한 상태에서 총력전이 벌어졌으니 당연히 막대한 인명 피해가 발생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매년 독일의 한 위원회는 구 동독 지역과 서부 러시아를 방문하여 매년 3~4만 명 가량의 독일군 유해 발굴을 하고 있다. 관련기사 독소전에서 독일군은 300만 명이나 죽었지만 아직도 그 1/4도 안 되는 71만 명의 유해밖에 돌아오지 못했다.

러시아에선 민간 봉사자를 중심으로 소련군 유해를 발굴 중인데, 2014년에 600개의 발굴 그룹이 참여하여 50만 명의 병사를 찾아 다시 이장했다. 관련기사 하지만 아직까지 13.7%밖에 되지 않는 유해밖에 돌아오지 못했다.

5.1.1. 소련

  • 소련 측 피해
A: 군인 피해
동원군인 총수 29,574,900
동원군인 총수(기타 정부부처 포함) 34,476,700
총 손실(사망/전쟁포로/행방불명) 11,444,100
전사, 부상으로 인한 총 사망자 수 6,885,100
행방불명/전쟁포로 총수 4,559,000
1941~1945년 사이의 사망자 총 수 8,688,400
의학상 사상자 총수 18,344,148
부상/심리장애 15,205,692
질병 3,047,675
동상 90,880
B: 민간인 인명 손실 추산
소콜로프(Sokolov) 민간인 사망자 총 수 16,900,000
코롤(Korol) 민간인 사망자 총 수 24,000,000
코즐로프(kozlov) 인구학적 총 손실 40,000,000
쿠르가노프(Kurganov) 인구학적 총 손실 35,500,000

소련은 전쟁 중 공식적인 수치로 2,700만 여명이 사망했으며[91], 이는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2차 세계 대전 사망자 5,000만 명의 60%에 달하는 수치다.[92][93] 학자마다 추정하는 수치는 제각각이나 2700만명 설은 소련의 인구 통계를 토대로 1941년 인구에서 1946년 인구를 빼고 태어난 신생아 수를 보정했으며, 고르바쵸프가 글라스노스트 때 발표했던 숫자와 맞기 때문에 저 수치가 제일 신뢰할만 하다고 볼 수 있다. 인구가 적지 않았던 40년대 일제강점기 하의 한반도 인구가 2,500만 명, 세계 인구는 25억 명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일반적인 인구를 가진 국가가 소멸할 정도의 인적 피해를 입은 것이다.

소련에서 동원된 남녀 3,450만 명 중 약 84%가 숨지거나 다치거나 사로잡혔다. 민간인 약 2천만 명, 군인 약 1,128만 명이라고 하는데[94] 이 수치라면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된 1941년 6월 22일부터 베를린이 함락되어 사실상 독일이 끝난 45년 4월 30일까지 하루 평균 민간인 약 14,000명,[95] 군인 6,500명이 사망했다. 하루 평균 2만 명이 넘는 수치다.

역사학자 제프리 A. 호스킹(Geoffrey A. Hosking)에 따르면 소련인은 높은 사망률로 인해 1940년대 말의 젊은이는 적었고, 1939년 이후 소련이 예측한 인구인 4,500만-5,000만 명보다 적을 정도로 전체 손실은 높았다. 또한 전쟁으로 인해 여초 현상이 대단히 심각하게 발생했는데, 종전 후 소련 인구 중 10대 후반~40대 남녀 성비가 4:7이었다. 인구 손실은 그나마 1950년대 베이비붐으로 대강 해결했지만[96] 영향이 꽤나 오래 갔으며, 1930년대-40년대 중반에 출생한 사람 가운데서 한창 자랐을 때 부친 없이 자란 경우도 상당히 많다. 물론 1960년대 이후에는 산업계의 여초 현상은 해결되었지만 음주 문화의 영향으로 현재도 러시아는 상당히 심각한 수준의 여초 국가이다.

게다가 소련은 전쟁으로 모스크바 서쪽의 거의 모든 기간 설비와 공업 시설이 파괴되었으며 농지와 마을, 인프라의 파괴도 여간 심각한 게 아니었다. 도시 1,710개, 촌락 70,000여 개, 2,508개 교회, 31,850개 산업 시설, 4만 마일(64,373.76km)의 철도, 4,100개 철도역, 4만 개의 병원, 8만 4,000개 학교, 4만 3,000개 도서관이 초토화되었다. 집을 잃은 인원은 2,500만 명 정도였고, 국부의 약 1/3 이상이 손실되었다. 가히 멸망되지 않은 것이 정말로 기적이었다.

이처럼 나치 독일은 소련에서 종래의 민간인 학살, 강간을 넘어 아예 슬라브인과 유대인을 열등 민족으로 낙인찍어 자국인의 노예로 삼거나 절멸하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자행된 전쟁 범죄는 상상을 초월하여 독소전쟁 동안 소련 민간인 사망자만 하루 평균 1만 4천명, 도합 2천만명 이상 발생했고, 심지어는 학살된 사람들이 한 곳에 묻혀서 해골과 시체로 지층이 만들어질 정도였다.[97]

또한 수많은 소련의 여성과 여군 포로들이 독일군에게 강간을 당했고 대부분은 강간 후 잔혹한 성고문을 당한 뒤 살해당했다. 독일측 기록에 의하면 무려 1,000만 건에 달하는 강간 사례가 보고되었다고 하며, 독일군과 소련인 여성 사이에 최소 75만에서 100만명에 달하는 사생아가 태어났다. 이런 독일군의 범죄를 다룬 독일 영화 베를린의 여인에는 "독일군이 소련에서 한 일의 1/10만 소련군이 해도 독일인은 다 죽는다"는 대사가 있을 정도다.

소련군의 군사적 피해도 실로 막대했다. 전차, 돌격포, 자주포만 9만 6,500대를 손실했으며 3만 7,000여대의 기타 기갑 차량도 손실했다. 항공기도 10만 2,600대를 손실하는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다. 그럼에도 소련은 어마어마한 생산력으로 무기들을 계속 생산하고 거기다가 미국과 영국의 랜드리스를 통해 군사력과 전투력을 금방 회복할 수 있었다. 특히 우랄로의 산업 이전을 통해 소련 군수공장들은 안전하게 대규모의 전쟁 장비들을 생산할 수 있었고 연합군에게 전략 폭격을 두들겨 맞아 초토화되던 독일의 군수 공업 역량보다 당연히 우위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러한 역량 및 미영의 지원을 기반으로 소련군은 나치 독일에 대한 반격을 성공하다 못해 나치의 심장부 베를린까지 점령할 수 있었다.

다만 이 경험이 너무 강력한 트라우마였던 탓인지 소련은 미국보다 경제력이 부족했음에도 미국과 벌이는 군비 경쟁에 과하게 많은 비용을 쏟아부어 남은 50년의 자국 경제에 크나큰 부담을 주었다. 일명 포위 심리( Siege Mentality)라고 하는 소련의 심리 상태는 러시아 내전과 함께 본국의 외교 정책에도 큰 악영향을 끼쳐 몇 번의 치명적인 과오와 패권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말았다.

5.1.2. 독일

  • 독일 측 피해
독일 국방군 인명 손실(1939년~1945년)
영구 손실(사망, 실종, 영구 장애)
1939년 9월 ~ 1942년 9월 1일 922,000(총 인원 중 14%)
1942년 9월 1일 ~ 1943년 11월 20일 2,077,000(총 인원 중 30%)
1943년 11월 20일 ~ 1944년 6월 1,500,000(추정 인원)
1944년 6월 ~ 11월 1,457,000
1944년 12월 ~ 1945년 11월 2,000,000
총 손실
1945년 4월 30일까지 총 손실 11,135,800
(부상자 포함,
동원된 총 병력의 75%,
1939년 당시 남성 인구의 46%)[98]
나치 독일에게 이 전쟁은 말 그대로 자멸로의 행진이었다. 아돌프 히틀러 벙커에서 자살하고 베를린 공방전이 끝날 때까지 전체적으로 보면 약 450만 명으로 추산되는 독일군 전사자 및 기타 사망자 중에 370만여 명이 독소전쟁에서 전사하거나 포로 수용소에서 죽었다.

후술되는 전쟁범죄 항목의 소련군의 만행도 독일이 까발린 게 아니라 나중에 역사학자들이 밝혀낸 것들이며, 소련의 만행은 정작 독일도 굳이 꺼내려고 하지 못했던 만큼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로 묻혔기에 조사하면 더 나올 가능성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은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고 수많은 사람을 학살하면서 생긴 비극이라 당시 연합군 측에서도 소련군의 범죄에 동조적이었다. 나치가 패망하기 얼마 전에 휴전 특사로 간 하인리히 힘러가 소련군의 만행을 연합군에게 알리며 소련군의 통제를 부탁했지만, 영국군의 버나드 로 몽고메리가 독일이 소련 및 동유럽에서 저지른 만행을 언급하며 힘러의 제안을 비웃으면서 거절했을 정도.

서독 정부 통계청에선 1958년 조사 결과 222만의 독일 민간인이 소련군의 군사작전, 전쟁범죄, 강제노동으로 인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다른 공식 통계 자료에서도 최소 200만 이상의 독일 민간인이 소련군에 의해 살상당한 것으로 추산되었다. 이는 연합군이 독일 본토 항공전으로 살상한 독일 민간인 63만 명보다 훨씬 많은 수치이다. 이외에도 전후 NKVD가 운영한 정치범 수용소에서 4만 3000명의 독일인이 사망했다. 거기다가 연합군의 전략 폭격으로 인해 이미 초토화되었던 베를린을 비롯한 동부의 주요 독일 대도시들은 소련군의 어마어마한 준비 포격 세례와 공습, 그리고 소탕 작전에 의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쾨니히스베르크는 도시의 90%가 파괴되었고 소련군에 의해 독일 주민들이 쫒겨나야 했다. 베를린은 도시의 80%가 파괴되고 인구도 반토막나야 했다. 이외에도 슈테틴은 도시의 65%, 산업 시설의 95%가 파괴되고 다른 동부 독일 도시들도 연합군의 폭격과 소련군의 군홧발 아래에 전체 도시의 50~80%가 초토화되었다.

군사적 손실도 막대했다. 소련 측 통계 자료에 의하면 독일군은 전차 4만 2000대와 자주포/대전차포/박격포 37만 9400문, 항공기는 7만 5000대를 상실해야 했다. 독일 측의 공식 자료에서도 1941년부터 1944년까지 3만 3000대의 기갑 차량이 손실되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 장비 손실량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이러다 보니 안 그래도 비효율적이고 소련에 비해 다품종 소량 생산 일색이었던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에 일격을 가했으며, 거기다가 연합군의 전략 폭격으로 군수공업 단지가 초토화되면서 수많은 장비를 잃어도 또 그만큼 생산해 회복하는 소련과 달리 독일의 장비 손실은 결코 회복되지 않았다. 결국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성공하고 서부전선이 형성되자 독일은 양면 전쟁을 감당하지 못하고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 후 소련은 폐허가 된 본토의 전후 복구에 필요한 노동력 확보를 위해서 포로로 잡은 수백만의 독일군 포로들을 소련의 강제수용소로 끌고 가서 공사 현장이나 광산에 보내어 강제 노동을 시켰다. 이들 대부분은 10년 넘게 강제 노역에 시달리다가 서독의 노력으로 귀국하게 된다.

5.2. 초토화 동유럽

살아있는 인간들의 생지옥이라는 독소전쟁은 독일과 소련뿐만 아니라 양대 강대국 사이 주 전장이었던 동유럽 지역 일대에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특히 폴란드의 경우 주로 독일에 의해 500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99] 카틴 학살 외에도 바그라티온 작전 바르샤바 봉기, 비스와-오데르 대공세로 인해 전 국토가 전쟁터로 전락했다. 폴란드 최대 도시이자 수도인 바르샤바는 도시의 85%가 파괴되었고 다른 대도시들도 철저히 파괴되었다. 주요 공업지대들도 독일의 공습과 소련군의 공격으로 초토화되었다. 현대 미화로 환산할 시 8,500억 달러(한화로 928조 원)의 경제적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체코슬로바키아도 32만의 민간인이 살해당했다. 에스토니아는 12만 명의 사망자, 라트비아는 13만 명의 사망자, 리투아니아는 24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유고슬라비아에선 크로아티아 독립국 우스타샤 그리고 세르비아계 체트니크에 의해 벌여진 조직적인 인종 학살로 인해 50만에서 최대 100만이 넘는 민간이 살상당했다. 독소전쟁의 주요 전장 중 하나였기에 마찬가지로 전 국토가 전쟁터로 전락했으며 소련군이 점령한 이후엔 소련군이 현지 주민들을 마구잡이로 약탈하거나 강간, 학살을 자행하기도 했다. 경제적 피해도 470억 달러(1938년 미화 기준)으로 막대했다.

이 때문에 서유럽과 달리 동유럽은 지금도 독소전쟁 이전의 유산은 찾기 어렵고 소련 시대의 양식이 지배적인 풍경을 확인할 수 있다.[100] 중근세 유적이 남아있는 곳은 독소전쟁의 참화를 피한 운 좋은 몇몇 곳에 한정될 뿐이다.

5.2.1. 동유럽 유대인 사회 파괴

에스토니아를 제외한 나머지 나라들 모두 독일의 홀로코스트로 인한 유대인 사망자가 민간인 사망자의 과반수를 차지했다. 그 결과 동유럽의 도시문화와 상업, 엘리트층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자랑하던 유대인 공동체가 거의 완벽하게 소멸되었다.[101]
동유럽 유대인 사망자의 국적별 분류(1939년~1945년)[102]
국적 전쟁 전 인구 사망자 수 인구 대비 사망자(%)
폴란드 3,500,000 3,000,000 86%
체코슬로바키아 254,310 180,000 71%
헝가리 725,000 569,000 78%
루마니아 756,000[103] 287,000 38%
유고슬라비아 82,242 67,438 82%
소련 3,020,000[104] 700,000 23%
에스토니아 4,500 2,000 44%
라트비아 95,000 85,000 89%
리투아니아 168,000 130,000 77%
불가리아 50,000 7,335 15%
총계 8,655,052[105][106] 5,027,773 58%
1939년 전 유대인은 대부분 동유럽에 거주했다. 독일과 그 동맹국은 1939년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 전역을, 1941년 유고슬라비아 전역과 소련 서부의 상당부분을 점령하여 이 지역에 거주하던 유대인 최소 650만 명의 생사여탈권을 쥐게 되었다.[107] 독일군을 뒤따르는 기동학살부대 아인자츠그루펜은 마치 군사작전을 벌이듯이 유대인을 닥치는 대로 사살하였다. 1943년 봄까지 유대인 최소 100만 명이 이들에게 학살당했다.[108] 독일 당국은 유대인을 직접 살육할 뿐만 아니라 각지에 설치한 게토로 몰아넣었다. 독일의 폴란드 및 소련 점령지에 설치된 게토만 1,000개가 넘었다. 여기서 유대인들은 노예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생존이 불가능할 정도로 적은 식량을 배급받았고, 수십만 명이 굶주림과 질병 또는 독일 관헌의 자의적인 학대와 살해로 죽어갔다.

전쟁 초 기동학살부대의 학살과 게토 수립에 초점을 맞추었던 독일의 유대인 정책은 1942년 1월 반제 회의에서 유대인의 절멸로 방향이 바뀌었다. 독일은 폴란드 지역에 절멸수용소 6개소를 설치하고 그곳으로 게토 안에 가둬 놓았던 희생자들을 이송했다. 이곳에서만 270만 명이 학살당했는데 절대다수는 유대인이었다. 절멸수용소가 아닌 강제수용소에서도 수십만 명이 학대로 사망했다. 유대인 학살은 독소전쟁의 패색이 짙어져도 계속되었는데, 바그라티온 작전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전쟁의 결판이 뻔히 보이는 1944년에도 헝가리를 사실상 괴뢰화하고 헝가리에 남아있던 유대인들을 대부분 죽였다. 이렇듯 독일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는 그날까지 유대인 학살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진행했다. 혹자는 홀로코스트가 다른 학살과 결을 달리하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 있다고 본다. 프랑스 철학자 베르나르 앙리 레비[109]에 따르면 군수품을 싣고 전선으로 달려야 할 기차가 유대인을 싣고 절멸수용소로 향했다. 즉 패색이 짙어져도 독일은 전세를 뒤집는 것보다 유대인 학살하는데 열중했다는 것이다.

패배가 가까워지자 독일은 절멸수용소와 강제수용소의 증거를 인멸하고 아직 남아있던 유대인들을 서쪽으로 강제이주했다. 이 과정에서 또다시 유대인 수십만 명이 길거리에서 죽어갔다.

1945년까지 홀로코스트로 발생한 유대인 사망자 600만 중 500만 명이 동유럽 유대인이었다. 이것은 소련에 거주하여 살아남은 유대인들을 제외한 숫자로, 독일 점령지에서 유대인의 생존률은 극악에 가까웠다. 특히 폴란드와 발트 3국에서 유대인의 사망률은 80~90%에 달했다. 루마니아는 의외로 사망자가 낮은데, 루마니아는 자국 내의 유대인은 보호했지만 대신 대소전쟁에서 얻은 동유럽 점령지역에서 거주하던 유대인들은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불가리아 역시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유고슬라비아와 루마니아, 그리스 점령지의 유대인들을 나치독일군에게 인계하여 아우슈비츠나 트레블링카 등 절멸수용소로 끌고가거나 탄압하기도 했으나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디미터르 페셰프와 동방정교회 등 종교계에서 반유대주의 정책에 대해 철회할 것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당시 불가리아의 보리스 3세 국왕에게 보내어 이에 보리스 3세 국왕이 이를 승인하면서 이후 유대인들을 보호하는 입장으로 선회하여 나치 독일과 대립각을 세웠다.

동유럽의 홀로코스트는 독일에 의해서만 저질러진 것은 아니었다. 동유럽 친독국가의 국가기관과 현지인 부역자들도 유대인 학살을 저질렀다. 가장 가혹한 학살을 벌인 루마니아와 헝가리는 독소전쟁 초부터 독일이 나설것도 없이 진군로 주변의 유대인들을 잔혹하게 학살했고, 특히 루마니아군에 의한 피학살자는 적어도 20만에 달한다. 독일의 점령지를 제외하면 루마니아의 점령지만큼 유대인의 생존률이 낮은 곳은 없었다. 헝가리는 루마니아보단 자제하는 편이었지만, 1944년 독일이 호르티 미클로시를 내쫓고 헝가리를 점령한 후에는 독일과 헝가리 관헌[110]에 의해 헝가리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다. 여기서는 헝가리 유대인뿐만 아니라 헝가리만큼은 독일의 마수로부터 안전하다고 믿어 피신한 다른 국가의 유대인들도 학살되었다.

우크라이나와 발트 3국에서는 현지인 부역자들이 자원하여 독일의 유대인 학살을 돕거나 아예 직접 학살하는 경우도 보였다. 예를 들어 우크라이나에서는 독일이 진군하기 전에도 현지인이 들고 일어나 르비우 등지에서 유대인 수천여 명을 학살했고, 독일이 점령한 후에는 보조경찰을 구성하여 유대인 학살을 보조했다. 게토 이송 도중에 또는 게토에서 탈출한 유대인들도 현지인 부역자들의 집요한 추적을 받아 학살당했으며, 그 결과 서우크라이나에 거주하던 유대인 80만명 중 불과 1만 5천명 만이 생존하였다. 즉 생존률이 2%도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비슷하게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서도 각각 보조경찰이 구성되어 유대인 수만여 명을 직접 학살했다.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벨라루스에서는 부역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덜하긴 했지만 여기서도 보조경찰[111]에 자원하여 유대인 학살에 가담한 사람들이 있었고 유대인의 재산을 약탈하거나 원래 주인을 입막음하기 위해 살해한 경우도 있었다. 폴란드에서는 게토에서 탈출하여 피난처를 찾은 유대인이 폴란드인에 의해 독일 당국에 넘겨지거나 아예 살해된 경우도 많았다. 독일이 괴뢰국으로 세운 슬로바키아 공화국은 독일의 의중에 따라 엄격한 반유대주의 정책을 펼쳤고 나중에는 유대인을 돈을 받고 독일에 팔아넘겨 학살당하게 만들었다.

5.3. 초강대국에 등극한 소련과 스탈린 신격화

종전 후 소련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지대한 전공과 동유럽의 위성국화를 발판으로 미국과 대등한 위치에 올라서며 세계를 양분한 초강대국의 지위를 확보했다. 또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을 거치며 상실한 옛 러시아 제국의 영토를 대부분 수복한 것은 물론, 추축국인 독일과 일본, 그리고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핀란드의 영토를 병합했다. 그리고 주요 승전국의 위치로 인해 국제연합에서 상임이사국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

스탈린은 승전을 이용해 자신을 완벽히 신격화하는 데 성공했다. 심지어 전쟁 초반의 대패도 "스탈린 동지께서 저 얍삽한 나치 놈들을 함정에 빠뜨린 것"으로 포장할 정도. 스탈린의 공과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의견이 갈린다. 스탈린 격하 운동을 주도한 니키타 흐루쇼프는 "스탈린이 있었음에도 우리는 승리했다." 고 주장하며 스탈린의 역할을 매우 축소했다. 스탈린의 독재 체제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이런 식으로 말할 때가 많다.

그러나 대체로 러시아인들은 스탈린이 초반에 여러가지 심각한 실책들을 저지르기는 했으나 소련의 승리에 기여했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게오르기 주코프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스탈린의 고집으로 인한 대표적인 실책들인 대독 경계령 발동 금지, 키예프 후퇴 불허, 모스크바 공세 이후 무리한 반격 작전을 지시하여 전력 낭비를 야기한 것들을 나열하기는 했지만 여러모로 볼 때 스탈린이 독소전쟁의 승리에 크게 기여한 것은 틀림없다고 밝혔다. 예로 농업 집단화와 5개년 계획을 통해 인민을 무지막지하게 갈아넣어 이룩한 공업화로 가난한 후진국 소련을 독일과 맞서 싸울 만한 체급까지 키워냈다던가, 전쟁이 일어나자 우크라이나와 모스크바 서쪽에 산재한 수천 개에 달하는 공장들을 전부 통째로 뜯어서 우랄 산맥 근처로 옮겨버린다던가, 단순한 대규모 징병 뿐만 아니라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재빠르게 총력전 태세로 전환해 전 인민으로 하여금 군수물자를 생산하게 하는 등, 전투 이외의 분야에서 승리의 밑바탕이 되었다.

특히 전후 처리에서 영미와 유리하게 흥정을 하여 소련이 초강대국으로 나설 수 있게 된 것은 스탈린의 공이 분명했다. 물론 실제로 전쟁에 참전한 장성들에게 돌아가야 할 공들을 스탈린이 가로챈 것은 사실이며, 정치적 야심을 의심받은 주코프는 한직을 맴돌았다.[112] 전쟁 전부터 우상화가 진행되고 있었던 스탈린은 전쟁 후에는 여기에 군사 업적까지 더한 완벽하고도 위대한 영도자로 숭배받았으며 그의 이름은 소련에서 신과 다름없게 되었다.

5.4. 독일의 분단과 영구적 영토 상실

파일:커즌 라인(폴란드어).svg
분홍색 부분이 폴란드 영토로 귀속된 독일 영토이다. 반면 회색은 소련으로 넘어가면서 손실한 폴란드 영토.[113]

파일:external/agrotourism.narod.ru/kkr3.jpg
전후 소련의 구성국이던 러시아 영토로 신규 합병된 쾨니히스베르크를 비롯한 동프로이센 북부. 칼리닌그라드로 개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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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 협정 이전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와 냉전 시기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 카르파티아와 루테니아를 소련에 뺏겼다.

파일:연합군 점령하 오스트리아 지도.svg
연합군 점령하 오스트리아

나치는 비단 자신들만의 정권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독일이 중, 동유럽권에 가지고 있던 넓은 강역 및 인적 자산, 그리고 문화 유산마저 날려버렸다. 예를 들어, 과거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후에도 유지했던 동프로이센 전역과 슐레지엔, 포메른의 대부분, 브란덴부르크의 일부와 작센의 극히 일부를 일제히 상실했다. 전승 국가인 소련은 독일과 공동으로 벌인 폴란드 침공 당시 집어삼킨 커즌 선 이동의 폴란드의 동쪽 영토를 그대로 차지했고, 대신 폴란드를 달래기 위해서 오데르-나이세 선을 국경으로 설정하여, 독일의 동부 영토 대부분을 폴란드에 넘겨 주었다. 이에 따라 오데르 강 동쪽의 독일 영토 슐레지엔, 포메른의 대부분과 브란덴부르크의 동부, 작센의 동남부 일부 및 동프로이센 남부 지역들이 폴란드 영토에 귀속되었고, 이 과정에서 대다수의 독일인들은 추방당했으며 남은 소수의 독일인들은 폴란드인으로 동화, 흡수되었다. 그리고 동프로이센의 주도(州都)이자 옛 프로이센의 고도인 쾨니히스베르크가 위치한 동프로이센 북부 지역은 소련에 합병되어 칼리닌그라드로 개칭되었다. 쾨니히스베르크, 슈테틴, 슈톨프, 브레슬라우와 같은 도시들이 위치한 동프로이센, 포메른, 슐레지엔 지방은 역사적으로 중세부터 독일계 국가의 땅이었으며, 단치히 같이 딱히 한 나라가 독점적으로 역사적 연고권을 주장하기 힘든 지방도 적어도 독일계 상인, 지식인들이 큰 영향력을 발휘하던 곳이었으나 전후 이 일대에 대한 독일의 영향력이 완전히 상실되었다.

직접적으로 주변국에게 영토를 할양한 것뿐만 아니라 애초에 2차 대전 자체의 서곡을 장식한 현대 체코 주데텐란트 지방, 중세 튜튼 기사단 시절부터 독일계 국가들이 지배하거나, 적어도 독일계가 사회-경제적 엘리트로 군림했던 쿠를란트 등 발트 3국, 역시 수백 년 동안 독일인들의 집중 이민으로 큰 독일계 영향력이 있던 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독일인들이 동방으로 진출하며 일구어 왔고 문화적, 사회적 영향력을 짙게 발휘했던 지역 모두에서 일괄적으로 독일인들이 싸그리 추방당하는 손실을 겪었다.

전후 독일은 철저히 나뉘어, 상당한 수의 독일계가 살고 있고 나치 독일에 통합까지 한 오스트리아는 나치 패망 이후에 아예 다른 살림을 차리면서 1938년 독오합병 이전으로 다시금 독립국가가 되었고 독일 본토도 동독 서독으로 분단되었다. 온 유럽을 만신창이로 만든 대가로 자신들의 조국도 갈기갈기 찢기게 된 것이다. 동서독 분단 이후 할슈타인 독트린을 확립하여 동구권에 강경한 태도를 취하던 서독은 마찬가지로 오데르-나이세 선도 인정하지 않고 바이마르 공화국 당시의 국경선을 주장했으나, 1970년대 동방정책 과정에서 폴란드와 체코, 헝가리, 불가리아 등 구 공산권 동유럽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 및 재수교를 하면서 이 주장을 외교 석상에서 철회하였고 결국 1990년 독일 재통일 당시 구 동방 영토들을 법적으로 포기하고 폴란드의 정식 영토로 인정하면서 이 지역을 영구 상실하였다.

결국 독일은 패전 이후 소련, 미국에 의해 국가가 분단되어 서독과 동독이 45년간 냉전의 최전선에서 대립하는 초유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 20세기까지만 하더라도 나치와 전혀 관계 없는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프로이센 왕국의 군사적, 역사적 전통마저 굉장히 껄끄러워했던 독일의 내셔널리즘에 대한 컴플렉스는 결국 나치에 의한 역사적 경험이 근간에 자리잡고 있다.

5.5. 소련의 기술적 성장


독일은 이러한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 외에도 그동안 우수하던 과학적 기반도 상당수 상실하였다. 미국과 소련은 V2 로켓을 위시로 한 독일의 우수한 로켓 기술력에 군침을 흘리며 경쟁적으로 독일의 과학자들을 자기네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소련으로 넘어간 독일의 과학자만 2,200여 명이 넘었으며 특히 소련은 단순히 과학자들을 영입하는 것을 넘어서 연구 시설과 설비를 통째로 뜯어가 버렸다. 과학자들의 연구기반까지 통째로 뜯어버린 결과 소련으로 영입된 독일 과학자들은 효율적이고 능동적으로 연구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소련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까지 힘입어 소련의 과학은 한 차원 도약을 하게 되어버린다.[114]

대표적으로 만프레드 폰 아르덴을 비롯한 수백 명의 독일 과학자들이 소련의 핵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해 큰 공로를 했고 폰 아르덴의 경우 아예 스탈린상과 막대한 거금까지 받을 정도로 소련으로부터 대단한 우대를 받았다. V2 로켓의 연구진 중 하나였던 헬무트 그뢰트룹의 영입으로 소련의 로켓 유도장치 기술도 한 차원 도약하게 되었으며 세르게이 코롤료프의 우주 개발과 소련군의 탄도미사일 개발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전자공학자였던 프리츠 카를 프라이크슈아트도 소련의 로켓과 우주 개발에 큰 족적을 남겼다. 즉, 소련이 영입한 나치의 과학자들은 대숙청과 전쟁의 포화로 인해 폐허가 된 소련의 과학 기반을 복구시키다 못해 크게 발전시켰다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이 과학자들은 소련에 정착한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이 동독으로 귀국했고 그뢰트룹은 서독으로 송환되었지만 그 때에는 이미 소련이 단물이란 단물은 다 빨아버린 상태였으므로 별다른 영향은 없었다.

5.6. 종전 이후의 유럽 국가들

비단 나치 독일 뿐만 아니라 독일 편에 섰던 헝가리 왕국, 루마니아 왕국, 불가리아 왕국, 핀란드는 물론[115] 소련과 독일 양측 모두에게 협공을 당한 폴란드 제2공화국, 친소련 국가였던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왕국마저도 소련군한테 점령당한 중-동유럽 국가들도 영 좋지 못한 처지가 되었다.
  • 불가리아 왕국도 위성국으로 전락해 전후 왕정이 폐지되고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이 되었다. 그나마 군병력 1만 8000여 명 전사, 민간인 3000여 명 사망으로 피해가 제일 적었다. 또한 아예 영토를 빼앗겨버린 다른 동유럽 국가들보다는 사정이 나은 편인데, 독일의 지원으로 점령한 남부 도브루자 지역이 그대로 불가리아의 영토로 인정되어 전쟁 전보다 영토가 늘어나게 되었고, 비록 추축국이긴 했지만 이마저도 나치 독일의 강압에 의해 사실상 나치의 총알받이처럼 끌려가다시피했던 거고, 홀로코스트나 독소전쟁 참전 등을 거부하기도 했으며 소련이 불가리아 중재로 대독 협상을 시도했을 만큼 사이가 좋아서 그렇게 온건한 전후 처리를 받은 측면도 없지는 않았다. 애초에 1944년에 있었던 불가리아에 대한 소련군의 침공도 소련의 예방전쟁의 성격이 더 강했다.
  • 핀란드는 그나마 위성국 신세는 면했지만 겨울전쟁 때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지 못한 것은 물론 페첸가 일대의 영토를 소련에게 추가 할양하면서 겨울 전쟁 이후보다 영토가 작아지게 된다. 그리고 냉전 시절엔 친소 중립국으로 소련의 눈치를 보며 지내야 했다. 군병력 9만 4000여 명 전사, 민간인 2100명 사망으로 겨울전쟁부터 5년 넘게 전쟁을 치러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추축국[116]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명피해가 적어서 독자적 체제로서의 주권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370만 명에 불과한 당시 핀란드의 인구를 생각하면 인명피해가 적은 것은 절대 아니다.
  • 이탈리아 왕국의 경우 애초 소련과 거리가 멀기도 했고 서부전선에 포함되어 소련은 이탈리아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전후엔 당당한 NATO의 한 일원이 되었다. 그래도 이탈리아의 독소전쟁 참전 과정에서 이탈리아 군병력 3만 명 전사, 5만 4000여명의 포로가 수감 중 사망 등으로 이탈리아군 전체 사망자의 4분의 1 수준의 군 병력 사망자와 부상자, 포로 등이 발생하면서 결국 이탈리아 전선 붕괴에 적지 않게 이바지되었다.

5.7. 전쟁범죄와 피의 보복

독일군이 수없이 자행했던 전쟁범죄와 그에 따른 소련군의 보복 측면에서도 독소전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역들 중 태평양 전쟁과 함께 최악을 달린다.

5.7.1. 독일

수백만의 국방군 병사들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범죄에 연루되었습니다. 친위대와 비교하자면, 25만 명의 친위대원들이 홀로코스트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죠. 독일에서는 모든 논의가 홀로코스트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동부전선에서 소련인 2,600만 명 이상을 죽인 1,000만 명의 국방군 병사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훨씬 꺼립니다. 모든 독일인들의 친지 중 서너 또는 너덧 명은 바로 이 일에 연관되어 있습니다.

Millions of Wehrmacht soldiers took part in the crimes of World War II, compared to about 250,000 members of the SS, who were directly responsible for the Holocaust. In Germany, all the discourse tends to revolve around the Holocaust. But the public has been far more reluctant to address the 10 million soldiers on the eastern front who killed more than 26 million Soviets. Every German has three, four, five relatives who participated in that.
- 독일 사학자 한네스 헤어(Hannes Heer), 도이체 벨레와의 2020년 인터뷰에서. #
나치 독일은 점령 지역에서 소련군 포로와 소련 영토에서 살고 있던 주민들을 대상으로 끊임없이 학살, 약탈, 강간을 자행하고 마을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전쟁 당시 소련군 포로의 사망률은 무려 30%~58%로 추산된다. 중국 쪽에서는 70%라고 주장한다고 하는데 이쪽은 신빙성이 높지 않으므로 논외. 일단 58%로 잡은 건 영국 학자 니얼 퍼거슨인데 이쪽은 아무래도 높게 잡힌 편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소련에게 잡힌 포로는 15~30% 정도로 추산되며 30%는 마찬가지로 니얼 퍼거슨의 추산이다. 참고로 일본군에 잡힌 미군 포로의 사망률은 27%이고 중국군까지 집계하면 최대 40% 수준이니 저게 결코 낮은 수치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전쟁 목적은 모스크바의 통치자로 대변되는 하등 인간 빨갱이 족속을 쓸어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독일인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명 앞에 서 있다. 세상은 이 사명이 어떻게 완수되는지 목도할 것이다."
- 국방군 선전국 소식지인 "부대 소식(Mitteilungen für die Truppe)"의 기사 중 하나. 소련 침공 직후인 1941년 6월 발간된 J 12호에 수록된 문구이다. 볼프람 베테의 《독일국방군》 138p에서 발췌.
"모든 장교는 유대인들이 첫째 독일인의 삶의 터전에 대한 권리와 세계에서의 독일인 위상을 침해한다는 사실을, 둘째 우리 민족을 부추겨 세계의 적들과 싸우게 하며 가장 훌륭한 우리 젊은이들이 피를 흘리게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장교는 유대인 문제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 '고귀한'유대인과 그렇지 않은 유대인 사이에 근본적 차이란 없다. 독일인들이 유대인의 위협을 감지하기 이전에 맺은 관계는,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상관없이, 정리되어야 한다. 국제적인 유대 볼셰비즘에 대한 우리의 단호한 투쟁을 통해 유대인의 진면목이 분명히 드러났다. 모든 장교는 반유대주의를 내면화하고 유대인과의 어떤 관계도 거부해야 한다. 이를 위반할 시 그 장교는 '장교로서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육군에서 퇴출될 것이다. 귀하의 부하 장교들이 이 지침을 숙지하기 바란다."
- 1942년, 육군 인사부장 루돌프 슈문트 대장[118] 의 명령. 볼프람 베테의 《독일국방군》 179 ~ 180p에서 발췌.
독일군 지휘부는 이러한 노골적인 전쟁범죄 행위를 처벌하기는커녕 대놓고 방관하거나 조장했다. 독일군에 의해 체계적으로 행해진 소련 영토 내의 초토화 작전 또한 대표적인데 빨치산 토벌, 소련 내 저항 세력 약화라는 전략적 목적으로만 알려졌으나 이후 연구가 진행되면서 슬라브인 말살이라는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적인 목적도 있었음이 밝혀진다. 한마디로 나치 독일은 슬라브인을 제거해야 하는 말살 대상으로 본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독일의 전쟁범죄 문서와 독일 국방군의 홀로코스트 관여 문서를 참고 바란다.

지역의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홀로코스트 역시 꾸준히 자행되었다. 비단 아인자츠그루펜뿐만 아니라, 그들을 더럽다고 욕하던 국방군 병사들과 친위대 장병들 역시 학살에 깊게 관여되어 있다. 아인자츠그루펜은 전부 합해 봤자 3,000명 규모에 불과했으므로, 그들이 1000만에 달하는 소련인 희생자들을 전부 죽일 수는 없다. 그들의 학살에는 다른 독일 무장세력과 현지 협력자들이 빠지지 않았다.

5.7.2. 소련

소련군은 전쟁 초반부터 독일군 포로들에 대한 잔혹한 보복을 행했으며[119][120] 소련이 주도권을 잡고 독일 국내에 진입한 후에는 지휘부의 통제도 소용없이 아예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한 다수의 약탈 및 강간과 같은 보복성 범죄 행위가 발생하였다. 베를린 공방전 당시 모든 희망을 잃고 항복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독일군이 저항한 원인 중 하나가 이것이다. 소련군의 보복을 피해 민간인들과 잔존 병력이 상대적으로 훨씬 안전한 서방 연합군 점령 지역으로 탈출할 때까지 쾨니히스티거 5대와 국민돌격대와 같이 한 줌도 안 되는 병력과 장비만으로 승리가 아닌 탈출의 시간을 벌기 위해 싸워야만 했던 것이다.

실제로 소련에 포로로 잡힌 독일군의 사망률은 서방 연합군에 잡힌 포로의 사망률보다 훨씬 높았다. 민간인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점령 초기에 제대로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21세기에도 소련의 포로 대우가 굉장히 나빴다는 내용의 주장이 미국, 영국, 독일 등의 학자들로부터 제기되고 있다. 어느 정도의 논란도 있지만 그래도 한 번은 참고할 만하다. 러시아에서도 가혹한 포로 대우를 인정하기도 하지만 대신 독일이 러시아에서 벌인 학살과 약탈을 이유로 들어 소련의 포로 대우가 상대적으로 좋았다고 주장하거나 독일처럼 의도적으로 모조리 죽이려고 하지는 않았다고 반발하기도 한다. 사실 전쟁 기간에도 독일 민간인들이 전쟁의 고통을 호소할 때 영미 연합군은 어느 정도 죄책감을 느꼈다는 묘사도 있는 반면[121], 소련군은 독일이 선제공격을 한 데다 훨씬 잔혹한 전쟁범죄를 저질렀으므로 개소리한다는 식의 반응이 많았다.

그럼에도 소련군의 전쟁범죄는 나치에 비해 거의 조명되지 않았는데, 이것은 양자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치 독일은 동유럽 지역의 슬라브인을 말살하겠다는 목표로 공식적인 명령체계 아래 조직적으로 학살과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였다. 이런 전쟁범죄를 부추기고 옹호하는 군 상층부의 공식적인 명령도 반복적으로 내려졌다. 때문에 소련 측 감청자료에서는 이들이 입으로도 말하기 어려운 끔찍한 전쟁범죄를 즐거웠던 일처럼 추억하는 내용도 있다. 그리고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에 속하기에 소련 또는 현대 러시아가 더더욱 은폐하기에 유리해졌다.

반면에 소련군의 전쟁범죄는 복수심에 불타는 병사들, 혹은 하급 장교들에 의해서 우발적으로 저질러진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최소한 군 상층부는 약탈과 강간, 민간인 살해 등은 군법에 따라 엄중히 다스리겠다는 의지를 계속 보여주었고, 정치장교들 같은 병사들의 통제 의무가 있는 이들은 전쟁범죄자들을 꾸준히 처벌했다. 물론 독일 진입 초기에는 상층부 역시 '자업자득'이자 '정당한 복수'라는 생각을 하였는지 전쟁범죄를 사실상 방관하였지만, 독일 점령 후 후술하는 전쟁범죄가 도를 넘었다고 판단하자 가해 병사들을 즉결처형하는 등 강경한 태도로 군기를 확립하였다.[122]

그럼에도 스탈린그라드 전역에서 항복한 9만 명 가량의 독일군 포로들은 수용소로 끌려갔으며 포위 도중 질병, 굶주림에 시달리고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부상병들이 많았다. 상처 악화, 악화된 전시경제로 인한 배급 부실, 학대, 특히 1943년 봄 유행한 티푸스로 대부분이 사망했다. 이 포로들 가운데 살아서 독일로 돌아온 자는 6,000여 명에 불과했다.[123]

이외에도 독일 여성 200만 명이 소련군에 의해 강간당했다. 베를린에서만 10만 명이 넘는 독일 여성들이 소련군에 강간당했고 동부 유럽 일대에서도 100만 이상의 독일 여성들이 소련군에 의한 조직적인 성폭행을 당했다. 1945년~1946년 사이 전시강간으로 태어난 독일-러시아 혼혈 신생아가 3.7% 수준일 정도였다.

5.7.3. 목록

  • 바르샤바 봉기 당시의 학살
    • 볼라 학살 - 독일군이 폴란드인 4만 - 10만여 명 학살한 사건
    • 오호타 학살 - 독일군이 폴란드인 1만여 명 학살한 사건
  • 리디체 학살 -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암살에 대한 보복으로 체코슬로바키아 리디체에서 체코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
  •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벨라루스 점령
    • 코트부스 작전 - 1943년 당시 벨라루스 북부 비텝스크에서 독일군이 파르티잔 활동을 이유로 민간인 2만여 명을 학살한 사건
  • 슬로바키아 민족봉기 당시의 학살
  • 볼히니아 학살 - 1943-45년에 걸쳐 친독 우크라이나계 조직이 폴란드계 민간인 10만여 명을 학살한 사건
  • 정치장교 지령 - 독일군에 붙잡힌 모든 소련군 정치장교들의 즉결 처형 명령
  • 집시 대학살 - 포라이모스(Porajmos)라고 불리며, 유럽 전 지역에서 진행된 집시인 대량학살로, 약 30만 명[124]의 집시가 나치 독일과 그 동맹국( 우스타샤, 루마니아 등)에 의해 학살된 사건. 유대인들은 학살 직후 관심이라도 받았지[125], 집시는 전후에도 사회적 위치도 낮은데다 규모도 상대적으로 작아서 묻혀버렸다.
  • 나치 독일의 소련군 포로 학대 - 서방연합군 장병이 포로가 된 경우 제네바 조약에 따라 보호와 대우를 받았지만 소련군 포로는 소련 정부가 제네바 조약을 비준하지 않은 것을 명목으로 학대가 행해졌다. 러시아인용 수용소(Russenlager)의 대부분은 수용 시설 자체가 존재하지 않고 평야 철조망과 감시탑으로 분할한 것이 전부였다. 비바람과 혹서, 혹한에 노출된 포로들은 구멍을 파고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경비병에 의한 폭력, 학대는 다반사였고, 하루 식량은 수백 칼로리에 불과했으며 모두 영양실조로 고통받았다. 최악의 경우 아예 학살되거나 강제 수용소와 절멸 수용소(특히 유대계)로 끌려갔다. 아직까지도 그 수치는 미상으로 남아 있지만 기본적으로 백만 단위 이상이 희생당한 것은 확실하다. 그 참상을 옆에서 보다 못한 미군 포로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몰래 이들을 돕기도 했다.
  • 홀로코스트
  • 페오도시야 학살 - 1941년 12월 29일 소련 해군 보병대가 크림 반도 페오도시야에 상륙해 독일군 병원을 점령, 포로 160명을 죽인 사건. 저체온증으로 죽을 때까지 중상자들에게 물을 쏟아붓거나, 창문으로 내던지고 심지어 성기를 훼손시키는 등 끔찍하게 죽였다. 1983년 서독 라디오에서 이 사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방영하였다. 헤르베르트 브루네거의 자서전에서도 이 사건을 목격한 장병의 증언담이 서술된다.
  • 네멜스도르프 학살 - 소련군이 독일로 진입하면서 동프로이센 국경에 있던 굼비넨 남서쪽의 네멜스도르프 마을 주민 72명, 프랑스 및 벨기에 포로 50명을 학살한 사건. 나중에 독일군이 마을을 탈환하면서 발견됐고, 괴벨스가 소련군의 악랄함을 선전하기 위해 프로파간다로 사용했다.[126]
  • 폴란드 주민 학살과 강간 - 독일과 소련 양국이 저지른 전쟁범죄. 독일이 점령기간 동안 적지 않은 수의 폴란드 주민들을 동원·학살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으나, 소련 역시 초기 폴란드 침공 당시 카틴 학살이라는 만행을 벌였으며 독소전쟁 후반기 폴란드에 진주한 소련군이 현지 주민들을 강간하거나 약탈한 사건들도 많았다. 당연히 폴란드의 역사 교과서에서는 양측 모두의 범죄를 자세히 기술하며 규탄하고 있으나, 나치 관련 과거사를 철저히 청산한 독일과 달리 구 소련 및 현 러시아는 군인들의 일탈이라는 이유로 이에 침묵하는 중이다.
  • 부다페스트 약탈 - 부다페스트 공방전이 끝나고 소련군과 루마니아군이 저지른 약탈, 강간 사건.
  • 프라하 학살 - 1945년 5월 10일 프라하에서 체코인들이 독일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벌인 보복 학살.

5.8. 번외: 독소전쟁 시기의 동물들

독소전쟁은 동물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사람만 죽은 것이 아니었다. 말 700만 마리, 염소 1700만 마리, 돼지 2000만 마리, 양 2700만 마리도 식량 용도로 도살되었고, 중앙유럽 ~ 러시아권의 침엽수림 등지에서 서식하던 수많은 야생 동물들도 영향을 받았다. 독일군과 소련군의 공세에 앞선 포격에 수 많은 나무들과 동물들이 휩쓸려나갔고 이를 피해서 수 많은 동물들은 그나마 분쟁이 덜한 중앙 아시아 지역과 유럽의 안 쪽 지역으로 도망갔다. 1939년부터 시작된 소련의 서부 진출부터 시작하여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부터 시작된 소련의 서부 공세로 인해 러시아와 동유럽의 '킬링 존' 지역에 있던 늑대 무리들은 유럽 내로 도망을 갔고, 1968년 도버 해협까지 진출하면서 점차적으로 서유럽으로 이주하였다.[127]

전후 소련에서는 독일군이 군견으로 기르다가 브리더가 전사, 도주, 포로화 등 여러가지 이유로 유기된 저먼 셰퍼드들이 야생화 되어 시체를 뜯어먹거나 사람을 습격하는 등의 일이 종종 벌어지고는 했었다. 이 때문에 숲이나 들에 갈때는 십수명씩 무리를 지어 다녀야만 했다. [128]

5.9. 결과

파일:54s6uihiocx41.jpg
<rowcolor=white> 2차 세계대전 이전과 이후의 소련 영토 변화[129]
독소전쟁 초 윈스턴 처칠을 포함한 연합국 지도자와 추축국 지도자는 소련이 기껏해야 3개월 안에 나치 독일에게 패배한다고 예상했다. 사실, 나치 독일은 폴란드 침공 이후 승승장구했으며 특히 전통의 육군 강국 프랑스를 6주만에 굴복시켰기 때문에 독일군의 군사적 역량에 대한 평가가 매우 높았다. 그러나 쉽게 무너질 것처럼 보였던 소련은 나치 독일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하였고 급기야 반격에 나서 유럽전선의 마침표를 찍으며 소련의 국력이 러시아 제국 시절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특히 이 전쟁은 국가의 모든 기능을 투입한 총력전이라는 단어를 현실화한 전쟁이다. 그리고 냉전 시기 내내 미국과 서유럽은 소련의 불굴의 투쟁 정신과 무지막지한 기갑 웨이브에 공포심을 느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전까지 한동안 유럽 본토에서는 서부전선은 섬에서 버티는 영국과 스위스 등의 중립국을 제외하고 추축군이 다 장악해 버렸고 북아프리카를 제외하면 동부전선만이 유일하게 지상전이 벌어지는 장소였다.

그래서 러시아인들은 일개 야전군 수준의 수만 명이 맞붙었던 서방의 엘 알라메인 전투 승리나 동부전선의 승패가 거의 결정된 후 벌어진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환점이었다는 서방 연합국 측 주장에 대해 코웃음을 친다.[130] 주코프 회고록에도 전후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연합국 지도자 간 회동에서 버나드 로 몽고메리가 소련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엘 알라메인 전투가 전쟁의 전환점이었다고 말하자 자기는 화가 나서 그것을 반박했다고 적혀 있다.

1980년대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전쟁사를 연구하는 거의 유일한 기관인 육군사관학교가 펴낸 '세계전쟁사'에서는 냉전을 의식해 소련군을 의도적으로 깎아내리는 서술이 많이 보인다. 예를 들어 소련군의 승리는 추운 겨울이나 히틀러의 전략적 오판, 소련군의 인해전술 때문에 어부지리로 얻어졌다는 식이다. 물론 추운 겨울은 병력의 운용에 지장을 주지만 독일군만 추위를 타는 게 아니라는 걸 간과하고 있다. 결국 추위 때문에 졌다는 건 상대는 거기에 대비했지만 자신들은 거기에 대비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리고 히틀러의 오판은 맞는 말이지만 독일군 내에서 히틀러만 오판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그런 식으로 따지면 독일의 초반 승전의 공로를 스탈린과 소련군의 트롤링으로 돌려야 한다. 이런 설명은 소련군의 기량 상승이나 3천만에 달하는 희생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131]

다만 무조건 그렇지만도 않은 게 소련군의 손실 부분은 오히려 현대 사가들이 주장하는 1천만 명 사상보다 좀 더 낮춰서 잡았고 1944년 이후로는 소련군에 대해 칭찬 일색이다.[132] 다만 독소전쟁 초반부에는 아무래도 소련군을 폄하하는 서술이 많다. 그러나 최근 조사에 따르면 나치 독일 전력 70%를 증발시킨 소련군의 기여를 인정하는 추세다. 어쨌든 제2차 세계 대전, 특히 유럽 전선 내 연합국의 승리에 소련이 큰 기여를 했다는 사실 자체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기나긴 역사 동안 있었던 영국의 세력과 러시아 세력의 상호 견제가 종국에는 러시아 세력(소련)의 우세 및 영국의 국력 약화로 영국에서 미국으로의 바톤 터치로 이어지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전간기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의 대독 유화정책 배경의 주 요인에는 소련 견제가 있었을 정도로 20세기 이후에도 영국은 소련의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각별히 신경썼다. 영국의 보수파 각료들은 나치 독일을 키움으로써 소련의 부상을 저지하고 대영제국으로서의 자국의 위신을 지키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들의 바람과 달리 나치 독일은 비이성적으로 호전적이고 잔인했으며 결국 그 화살은 영국에게도 돌아가게 되었다.

영국이 비록 해상전과 공중전에서 나치를 꺾어 버리고 다수의 지상군들을 독일 본토로 진격시키는 데 성공한 엄연한 승전국이었지만, 경제가 파탄나서 많은 사람들이 배급을 받아야 했고 대영제국의 식민지 체제들도 미국 소련의 공통적인 외교 전략이었던 식민지 블록 경제의 해체로 인해 영국과 프랑스 양대 식민제국 모두 식민지들 중 그나마 호의적이었던 국가들을 추스리고 나머지 20세기를 보내야 했다, 특히 프랑스는 구 식민지들 절대 다수를 잃고 안 그래도 프랑스 침공으로 무너진 국가적 위신이 베트남 전쟁 알제리 전쟁의 연이은 졸전과 깽판으로 완전히 추락했다.

반면 소련은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서구의 상상을 뛰어넘는 생산량과 동원력, 미국의 전폭적인 렌드리스에 힘입어 독일 동부를 포함한 동유럽 전부를 자국의 세력권 안으로 편입하는 데 성공한 상황이었다. 전쟁 말기 영국은 언싱커블 작전을 구상하는 등 여전히 소련을 몰아내고 싶어했지만 이 시기의 소련군은 크림 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의 허약한 구 러시아 제국군이 아니라 전선군 단위의 막대한 기갑군과 독소 전쟁 기간 중 습득한 경험을 바탕으로 체계적으로 짜인 제병합동술에 기반한 작전술, 그리고 대대 단위의 희생마저도 감수하는 정신전력으로 무장한, 거대한 스팀 롤러가 되었다.

더군다나 영국 인도를 비롯한 여러 식민지들의 동요를 컨트롤하는 것마저도 힘들어진 상태였다. 만약 언싱커블 작전이 실행되었더라도 이미 미국 소련은 각별한 사이였고,[133] 미국은 영국이 제멋대로 날뛰어서 또다시 유럽에 피가 흐르게 만드는 꼴을 결코 곱게 보지 않았을 것이며, 소련군은 더 이상 옛날의 약골이 아니었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는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국가는 더 이상 본인들이 아니라 미국 소련임을 인정하고 파이브 아이즈, NATO에 가맹한 뒤 미국 및 유럽, 영연방 국가들과 협력해 제각기 자국들의 안보를 지키는 방향으로 선회해야 했다.

5.9.1. 승리의 날

이후 소련과 소련에서 분리된 러시아, 우크라이나 CIS 국가들은 매년 승리의 날(День Победы: 뎬 빠볘듸)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승리를 기념하며 수십 만 명의 군사와 신형 무기들을 공개하고 국력을 과시하는 기념일로 자리 잡았다.

1990년대부터는 독일의 정상들까지 초청받고 있다. 일단 현대 독일인들도 나치와 히틀러를 아주 부정적으로 평가하기에 나치를 물리친 것을 함께 기념한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이 날에 대한 자세한 것은 승리의 날 문서 참조.

"소련군이 전쟁에서 승리한 이 날은,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의 말에 따르면, 소련 인민의 삶에서 '영광의 순간'이 되었다. 이는 소련 역사상 사람들이 조국의 승리와 자유를 위해 감당한 상실의 의미가 명약관화했던 유일한 시기다." 역사학자이자 라디오 방송 '베스티 FM'의 정치 평론가인 안드레이 스베텐코의 말이다.

사실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가 소련 시절보다 더 성대히 기념하는 기념일이다. 단순한 기념일을 넘어 현대 러시아인들의 국가적 자긍심, 긍지의 원천이다. 러시아 민족주의로 과거의 승리를 되새김질하는 추억팔이라며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피할 수 없는 적과 생사를 건 결전에서 크나큰 희생을 치르며 승리하여 초강대국으로 등극했기 때문이다. 독일군의 조직적인 학살에 의해 끔찍한 피해를 입었고 모스크바 공방전 당시에는 거의 패배 직전까지 갔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 레닌그라드 공방전의 어마어마한 피해에도 무너지지 않고 쿠르스크 전투 등에서 반격하여 결국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대반격에 나서 베를린 공방전을 끝으로 적의 수도를 함락시키며 기적적인 승리로 이어지게 되었으니 그들의 입장에선 더없이 감격스러운 날이었을 것이다.

이 날은 많은 러시아인들에게 특별한 날이다. 독소전쟁은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른 총력전이었기에 상실의 아픔을 겪지 않은 가족은 러시아에서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며, 전쟁에 참가한 사람들도 아직까지 일부 살아있다.[134] 5월 9일이 조국 러시아에 자긍심을 느끼는 계기가 된다고 인정하는 러시아 사람들이 많이 있다.

세계적으로 봐도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쟁이었고 이는 러시아의 역사를 통틀어도 비견할 예가 없는 가장 찬란한 승리였다. 러시아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침공을 막기는 했지만 완벽한 승리는 아니었고 크림 전쟁부터 열강에게 얻어맞기만 했기에 세계의 주류에서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독소전쟁 이후 소련은 세계만방에 자신들이 얼마나 강대한 힘을 떨쳐보일 수 있는지 깨닫고 미국과 세계 질서를 양분하는 축으로 성장했으니 이 때문에 러시아인들은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이 언제냐는 질문에 압도적으로 대조국전쟁 승리라고 답한다.[135][136]

소련 시절 붉은 광장을 지나는 군사 퍼레이드 10월 혁명 기념일(11월 7일)에만 매년 실시되었고 승리의 날에는 1965년, 1985년, 1990년에만 실시되었다. 스탈린 시대와 흐루쇼프 시대에는 공휴일도 아니었다. 역사학자인 데니스 바비첸코에 따르면, 이오시프 스탈린과 그 사후 소련을 이끈 니키타 흐루쇼프는 대조국전쟁을 승리로 이끈 군사령관들이 정치적으로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때문에 군사령관들과 참전용사들의 공적을 치하하는 일에 인색했다. 1965년에야 승전기념일은 공휴일로 지정되었고 군사 퍼레이드가 실시되었다. 승전기념일을 국가적 차원에서 전국적 규모로 성대하게 기념할 수 있도록 한 최초의 소련 지도자는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였지만 그의 재임기에도 군사 퍼레이드는 혁명 기념일에만 매년 실시되었고 승리의 날에는 1965년에만 치러졌다. 소련 붕괴 이후 10월 혁명 기념일은 없어졌고 1995년 승리 50주년 퍼레이드 이후 매년 5월 9일에만 군사 퍼레이드를 실시한다.[137]

다만, 이는 명확히 소련만의 관점으로 소련 주위 동유럽 국가 중 일부는 이 날을 반기지 않는 경우도 있다. 가령 발트 3국은 이 날을 소련에 먹힌 날로 기억한다고 한다. 쉽게 생각해 보면 청일전쟁도 일본 제국의 위상을 드높이고 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해 준 뜻깊은 승리이지만 그 전쟁을 계기로 국권상실의 비극에 더욱 가까워진 대한제국의 후손인 한국인들에겐 마냥 반가운 소식은 아닐 것이다.

6. 독소전쟁 관련 자료 및 연구

6.1. 관련 자료

  •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리처드 오버리)
  •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 전투(안토니 비버)
  • 독소전쟁사( 데이비드 글랜츠)
  • pobediteli - 러시아에서 독소전쟁 승전 60주년을 기획해 만든 프로젝트로, 생존자들의 육성을 포함한 방대한 자료와 한눈에 보이는 자세한 지도로 설명하고 있으며, 2005년 UN 'e-Culture and Heritage'를 수상하였다. flash 허용 필요

6.2. 독소전쟁 연구의 변화

이 부분은 소련군 전문 이글루스인 РККА Ставка 이글루스 지부에서 상당 부분 발췌한 것으로 보인다.

냉전 체제의 특수성으로 인해 독소전쟁에 대해 진실에 근접한 연구는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전쟁 당사자인 소련은 대외적인 독소전쟁 자료와 연구를 선전에 알맞거나 검열을 통과한 것만 공개했고 주요한 1차 사료들은 문서 보관소에 꼭꼭 숨겨 놓았다. 심지어 후일 신빙성 있는 사료로 밝혀진 자료들마저도 2차대전의 주요 연구자들인 서양의 관점과 공산주의적 강박증이 큰 서술 방식 때문에 믿기 힘든 자료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6.2.1. 냉전 종식 이전의 소련 측 연구

1945~58년 사이 소수의 소련 자료들만이 작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자료들마저 너무 정치색을 강하게 띄었고 독자나 학자의 관심을 끌만한 작전 적으로 자세한 자료가 아니었다.

1958년까지의 소련 군사 저작들은 너무 정치적이었고 모든 부분에서 스탈린의 업적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부합하여 작전술 적, 전술적 자세함은 없었다. 1958년 이후 개인 숭배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며 군사 저작들에는 작전술적, 전술적 정보가 자세히 실렸다.

1958년 이후 소련에서도 정확하고 유용한 자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자료들을 받아들이며 소련군 군사사 저널에서는 모든 수준의 전투 경험을 다룬 뛰어난 연구 자료들을 방출했다. 군사사 저널은 1958년 직후부터 전쟁의, 최초 시기에 대한 괄목할 만할 연구들을 내놓았고 이전의 정치성이 강한 연구들은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군사사 저널은 이론적 상황에서의 실제적이고 사실적인 문제점에 초점을 맞췄다. 이는 소련의 군사 문제를 보는 경향이 구체성을 띄게 했고 각자의 화제를 역사적 문맥에서 보게 했다.

1958년, 소련 최초의 2차 세계 대전사 통사인 플라토노프의 <제2차 세계대전사>가 발간되었다. 이 책에서는 최초로 소련의 전쟁 초기 실패를 언급했으며 전쟁 초기를 전체적으로 설명했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는 소련군이 실패한 1942년의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을 다루고 있는데 이 전투는 지금도 소련 내에서 논하기에는 너무 쓰라린 주제로 남아 있다. 플라토노프는 2차 하르코프 공방전에 대해 자세히 다루지는 않았지만 패배한 전투를 솔직하게 말하는 최초의 소련 측 자료가 되었다. 같은 시기 소련 역사학자들은 전후 사례를 가르치는 전쟁기 경향으로 복귀했다. 콜가노프의 <대 조국 전쟁기의 전술 발전>은 1958년에 나왔고 전투 사례를 통한 전쟁기 전술을 다뤘다. 이 교훈적인 저작은 장교들의 교육을 위해 만들어졌고 성공한 사례와 실패한 사례를 동등한 비중으로 담았다. 콜가노프의 자료들은 다소 단편적이지만 실패 사례와 성공 사례를 동등하게 다루고 있으며 어떠한 경우에도 정확, 마르크스주의적 표현으로는 '과학적으로' 대처하는 교육 사례로서 최대한 자세해야 했다.

1958년 이후 회고록, 부대사, 그리고 작전 자료들이 전보다 지속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소련 학계는 당시 군사 지휘관들과 참모들의 기록들을 대거 끌어 모았다. 이 기록들은 스타브카 수준의 인물들( 주코프, 바실렙스키, 시테멘코), 전선군 사령관 수준의 인물들( 로코솝스키, 코네프, 메레츠코프, 예료멘코, 바그라먄), 야전군 사령관 수준의 인물들( 모스칼렌코, 추이코프, 크릴로프, 바토프, 갈리츠키, 그레치코, 카투코프, 렐류셴코, 로트미스트로프), 군단장 수준의 인물들과 그 이하 지휘관들의 회고록들이 출간되었다. 소련 군사사가들은 제병 협동 군, 전차군, 군단, 사단, 그리고 여단이나 연대 수준까지의 부대 사를 저술했다. 회고록은 지원 부대 지휘관들의 책까지 포함했다.

이후 뛰어난 작전 연구들이 주요 작전( 모스크바,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 벨라루스)이나 조금 덜 중요한 작전(노보고로드-루가, 동포메리아, 돈바스), 그리고 기타 수행했던 작전들을 다룬 연구서들이 나왔다. 대학의 역사학자(삼소노프)나 군사학자(질린, 갈리츠키, 시도렌코) 등이 대규모 사료를 동원하고 자세한 서술을 사용해 1등급 연구 자료들을 내놓았다. 회고록, 부대 사, 작전 연구는 총체적인 전훈을 담고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이 연구들은 전쟁사 전체를 연구하는 학자들과 작전술 발달사를 연구하는 인물들(세메노프, 스트로코프, 바그라먄, 크라브첸코)과 전투 사례를 전술적, 작전술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 라지옙스키, 쿠로치킨), 기갑 부대와 기계화 부대를 다루는 인물들(로트미스트로프, 바바자냔, 라지옙스키, 로시크), 작전술과 전술을 연구하는 인물들(시도렌코, 사브킨, 레즈니첸코), 그리고 막대한 전투 지원을 주제로 하는 연구들을 포함한다.

대조국 전쟁사와 제2차 세계 대전사를 총체적으로 다룬 저작들이 1960년대 이후에 나타났다. 6권의 <동부전선사>는 이전의 학자들이 다루기 꺼린 정치적으로 민감한 소재들을 솔직하게 다뤘으며 작전적 자세함도 증가했다. 하지만 분량의 한계 때문의 작은 규모의 작전이나 전투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다. 11권짜리 <제2차 세계대전사>는 정치적으로는 덜 솔직하지만 작전술적, 전략적 수준의 분석에서 더 자세했다.

그리하여 동부전선의 작전들에 대해 소련이 막대한 양의 자료를 가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게다가 에릭슨이 설명했듯이 이러한 자료들의 종합은 동부전선 작전의 인상적인 그림이다. 하지만 이 자료들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는데 독일 측 사료와 똑같은 문제로 독일 측의 편견과 같은 소련 측의 편견이다. 첫째로 소련 저작들은 너무 정치적이거나 이념적이다. 요점은 소련 저작들은 전투 사레를 가르치고 주입하기 위한 것이다.

이론적으로 전쟁은 정치적, 이념적 맥락 내에서도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다. 그리하여 정치적 편향성도 이해받을 수 있으며 비판적인 독자들은 무엇이 정치적인 것이고 무엇이 비정치적인 것인지를 판단할 능력을 가져야 한다. 독자들은 읽기 편하고 대중적인 책일수록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하여 소련 내에서 만든 작전술적, 전술적 사실은 개인이나 부대의 희생과 영웅주의를 장려하는 용도가 되었다.

군사 저작이 정치적 맥락에 휘둘리던 이래로 군사 저작 발행 환경은 독자(=공산당)의 입맛에 맞출 수밖에 없었다. 문맥이 간략하고 세련됨이 부족한 저작은 정치성이 강한 것이었다. 제일 중요한 작전과 전술은 계획 수립과 수행에서 당의 역할을 강조하느라 비교적 제한된 연구 소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소련 군사 저술가들은 성공적인 작전에 강세를 두고 자세히 쓰며 실패한 작전은 자세하게 쓰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하여 최근까지 전쟁 극 초반인 1941년 6~7월의 전투나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 세바스토폴 공방전,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기타 성공적인 작전들에서도 위험했던 국면들은 잘 나오지 않았다. 비슷하게, 1943~45년 사이에도 중요하지 않은 작전에 참가한 부대의 역사도 얼마 나오지 않았다.

60년대 초의 소련군은 실패한 작전들을 논하기 시작했는데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을 예로 들 수 있다. 2차 하르코프 공방전에 대한 당의 기술은 정확했지만 실패에서 배우려는 사람들을 만족시키기에는 부족했다. 시간이 흐르고 더 많은 자료가 나타나자 이 패배를 바로 볼 수 있게 되어 하르코프의 재앙에 대해 더 자세한 연구가 나올 수 있었다.(예를 들면 모스칼렌코의 <남서부 축선>의 한 장이 있다.)

비슷한 경향이 소련 공수부대를 다룬 문건에서도 나타난다. 당시의 소련 공수 작전들은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1964년 전에는 소련 공수 부대를 다룬 자료가 거의 없었다. 1976년까지도 공수 부대 활동에 대한 자료들은 자세하지 않았고 낭만적인 문장들로 포장되었다.

매우 자연스럽게 소련군의 작전 해석은 독일의 해석과 매우 달랐다. 사실 소련 학자들의 작전 해석 시기에 따라 해석이 달라졌다. 장군들의 회고록이 작전 경과에 대해 합리적이지 못하게 적었다면, 학자들은 이에 대한 토론을 통해 공식 역사를 시정했다.

소련 자료와 독일 자료가 가장 상충되는 부분은 서로 대적한 병력의 숫자였다. 양측 자료를 평가하면 이러한 경향을 볼 수 있다. 첫째로 소련 자료는 소련군의 병력에 대해서는 정확하고 독일 정보부 자료와도 일치한다. 대조적으로 소련 자료는 독일군의 전력을 과장한다. 게다가 소련 자료는 독일군의 포병과 기갑 전력을 인력보다 더 과장한다. 부분적으로 이는 소련군이 독일 동맹국 병력과 경찰 병력, 그리고 민병대( 국민돌격대) 병력도 합쳐 추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기준을 사용한다 해도 소련군은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 기록과 대조해 봤을 때 너무 높은 적 전투력 측정을 했다. 독일군 또한 상대하는 소련군의 전력을 과장했다. 독일 측은 전력 차를 8:1에서 17:1까지 과장했고 소련군은 전력 차를 3:1에서 2:1로 낮췄다.[138]

소련 사료들은 전쟁의 사상자 문제 때문에 신뢰성을 스스로 떨어트렸다. 초기의 소련군 저작들은 아군 사상자에 대한 기술을 완전히 무시했고 그 이후에도 사상자 도표도 나타나지 않아 현대 소련군 저술가들의 민감한 문제로 남아 있다. 거대 작전에서의 손실 도표나 사단 사에 수록된 중대들의 전투 전후 전력 비교 도표 정도가 간간히 남아 있는 정도였다. 아마 소련 저자들이 숨기거나 왜곡 윤색하고 있는 것도 있었을 것이다.

6.2.2. 냉전 종식 이전의 서방 측 연구

소련 사료에의 접근성 부족과 냉전의 영향으로 영미권 학자들은 쉽게 구할 수 있는 독일 측 사료들 위주로 독소전쟁을 연구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독소전 연구의 편향성을 가져왔다.[139]

주요한 사료로 쓰인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회고록 <잃어버린 승리>나 하인츠 구데리안의 <기계화부대장>, 프리드리히 폰 멜렌틴의 <기갑 전투>는 회고록의 특성상 자신의 실수나 병크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 안 하고 공적만 늘어 놓은지라 신중한 교차검증이 필요했으나, 소련 측 자료가 거의 입수 불가능했기 때문에 이를 검증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거기에다가 미 육군에서 독소전쟁에 관해 편찬 책임자를 맡은 전 독일군 총참모장 프란츠 할더[140]는 오로지 독일의 입장에서 서술하였다.

또한 수 많은 독일 국방군 출신 장성들이 서방 NATO 군대에 편입되었으며, 이는 소련군이 진지하게 NATO군과의 전쟁이 벌어질 경우 바르샤바 조약기구 군대와 함께 움직이며 전선을 하나하나 격파해나감과 동시에 전례 없는 거대 규모로 편성된 공수부대로 서유럽의 전략적 능력을 완전히 마비시키는 전략을 구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전략을 짜는 동안, NATO 군대는 1980년대 초까지 강력한 신화적 영향력을 쌓아놓은 독일군 출신 장성들의 또 다른 국방군이 되어 전쟁 연습을 해야했다.

단적으로 1981년 백악관 국가안보실이 주도로 주체한 워게임에서는 2차 대전 당시 독일 내로 진주한 소련군이 움직인 방식으로 가상적군의 움직임을 짜놓았고, 그러한 상황에서 NATO군은 냉전 때에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군대를 막는 역할이 아니라 독일 출신 장성들의 정신승리용 장난감처럼 굴려졌다. 만슈타인이 2차 대전 당시 시도했으나 실패한 기동 방어 전술을 행했고 이를 통해서 소련군을 물리친단 계획이었으나 현실적으로 서유럽은 기동방어가 완벽히 들어먹힐 정도로 넓지 않았고 도리어 이를 사용했을 시에 소련군은 방어진을 돌파해 방어군들을 포위섬멸했을 것이었다. 그래서 베를린이 함락당한 것이었고, 그래서 독일의 절반이 공산국가가 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를 계획한 서독군 기갑부대 지휘관 헤르만 발크(1893~1982)는 "만약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되는 것이지?"라는 동료 지휘관의 물음에 " 러시아인들은 그렇게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라고 단언했다.

결국 독일군 출신 장성들은 자신들의 패배가 경험이 쌓인 소련군 장성들의 능동적이고 과감한 전략전술과 압도적인 공업 역량에 의해 패배한 것을 인정하지 않고, 히틀러를 비롯한 전략적 식견이 전무한 독일 나치당 고위 인사들의 군에 대한 영향력과 소련군 '이반'들의 피와 살로 이뤄진 공세로 인해 패배했다는 것이라고만 인종차별적인 편견으로만 생각했다. 이러한 인물들이 개입하는 상황에서 독소전쟁사 해석은 철저히 정신승리에 가까운 형식으로 이뤄져있었고, 가장 큰 적인 소련군이 어찌 움직이고 이들을 어찌 요격하여 최종적으로 승리할지는 결국 NATO군의 진지한 전략이 아닌 독일군 장성들의 대체역사 시나리오에 불과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1950년대 독일군에 의해 만들어진 저작들은 소련군의 작전 자료 부재라는 결점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독일 집단군, 야전군, 군단, 사단 소속의 독일군들은 수요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의 수적 우위와 끝없는 포격 하에 행해지는 인해전술, 그리고 전쟁 말기에는 무수한 소련군 기갑 부대와 대적했다고 주장했다. 소련군 규모에 대한 부정확한 서술에는 적 부대 각각의 작전술 적 역할에 대한 고려가 전무하여 독일 저작들이 소련군에 대해 공통적으로 말하는, 상상력 없이 단순한 정면 공격밖에 모르지만 막대한 물량을 가진 소련군이 뛰어난 능력과 기교 넘치는 기동을 구사하는 독일군을 이겼다는 주장을 깔아 놓았다. 소련군의 '스팀롤러'는 동유럽에 그들의 시체와 부상자를 끝없이 쌓았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독일 자료들이 전해 준 소련군에 대한 심리적 인상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더 나아가 작전들에 대한 이러한 개관은 소련군의 규모를 제대로 알지 못하게 해 독자들에게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독일군이 항상 압도적인 수의 소련군과 대치했다고 믿게 했다. 이런 회고록들과 팸플릿들은 독일의 원 사료들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도 그랬고 지금까지 소련군에 대한 작전 자료의 부재를 보여 준다.

1960년대 나온 앨런 클락의 동부전선에 대한 자료인 <바르바로사(Barbarossa)>는 작전술적으로 소련 자료를 부족하게 담고 있었다. 게다가 클락은 다른 학자들이 쉽게 받아들인 수법인 전쟁 첫 2년을 자세히 쓰고 마지막 2년은 간단히 쓰는 서술 방법을 사용했다. 사실 총 506쪽의 책 중 400쪽 이상이 전쟁 초기에 할애되어 있다. 이러한 서술은 독일 저작들에도 잘 나타나는데 그들의 패배를 히틀러의 오판으로만 몰아세움으로서 그 때의 작전들에 대해 자세히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 육군 군사사 연구소는 이 불균형을 어느 정도 해결할 얼 짐케의 두 저작인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그라드까지(Moscow to Stalingrad)>와 <스탈린그라드에서 베를린까지(Stalingrad to Berlin)>을 내놓았다. 이 저작은 유효한 자료로 학술적인 것이다. 짐케는 1942년 11월부터의 전쟁을 조명하고 전략과 고차원적인 작전적 관점에서 분석했다. 독일 사료에 많이 의존하고 있지만 짐케는 독일 기록 자료를 연구했고 그곳에서 소련군의 작전 자료들을 찾아냈다. 그리하여 짐케는 동부전선에 대한 미국인들의 시각을 넓혀 주었으며 기존 자료들의 문제점들을 교정했다. 짐케와 그를 따르는 저자들은 동부전선을 서술하며 1950년대 말부터 시작되어 1960년대에 가속화된 소련 역사학자들의 대전사 연구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 새로운 소련의 연구들은 나중에 더 말하겠지만 질이 천차만별이었음에도 전쟁사 연구에 새롭고 핵심적인 차원을 열었다. 대부분의 뛰어난 학자들은 소련군 연구를 흡수했다. 1970년대까지 소련 측 저작들은 동부전선사를 보는 시각에 균형을 제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짐케 또한 독일 자료에 상당히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 초, 독일 저자인 폴 카렐은 동부전선에 대한 2개의 책인 <히틀러, 동쪽으로 움직이다(Hitler Moves to East)>와 <조각난 대지(Scored Earth)>를 썼다. 이 책들은 기사 형식의 매력으로 독일군의 작전술적 작전을 자세히 조명했고 참전 장교들에 대한 막대한 인터뷰를 실었다. 카렐의 저작은 독일 관점에 무게를 두고 있지만 소련군 사료에 대한 참고 비중은 짐케의 저작보다 많다. 카렐의 책은 그 생생함으로 독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지금 보면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을 통해 독일이 승리할 수 있었다는 걸 진지하게 주장하는 등 문제가 많다. 무엇보다도 폴 카렐의 본명은 파울 칼 슈미트로 신분세탁한 나치독일 외무부 언론과장이자 알게마이네SS 상급돌격대지도자( 중령)이다. 그는 헝가리 유대인 아우슈비츠로 이송할 때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을 날조하자는 제안을 한 게 밝혀지는 등, 기본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나치 선동꾼이기 때문에 지금은 학술적 가치를 완전히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인용하는 것 자체가 '나는 극우 네오나치요' 라고 선언하는 행위나 다름없이 취급받고 있다.

카렐 식의 서술에서 더 학문적인 저작으로는 알버트 시튼의 2권의 책인 <러시아-독일 전쟁(Russo-German Conflict)>와 <모스크바 전투(Battle of Moscow)>로 짐케의 연구를 전술적 수준으로 분석한 것이다. 독일 사단들의 공식 기록을 통해 시튼은 전술적 수준에서의 전쟁사 서술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카렐처럼 시튼은 소련 자료의 부족 때문에 독일 측 관점에서 전쟁을 보는 경향을 보였다.

이런 서방권의 저술에는 나치 인종주의적인 기술도 많이 눈에 띤다. 가령 러시아인들은 "중세부터 억압과 순종에 길들여져 왔기 때문에 희대의 독재자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독일과의 전쟁에서도 맹목적인 희생을 바쳐 승리할 수 있었다."[141]는 식의 기술이다. 이런 기술은 러시아인을 자기 목숨도 전제자에 바치는 노예 정도로 묘사하는 것이고, 나치 침략자들이 바라본 러시아 관과 똑같다. 그러나 만약 전쟁에 패하면 자신과 자기의 가족, 나아가 자기 국가의 모든 사람들이 확실하게 능욕되고 학살된다고 하면 싸우지 않을 병사가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당장 소련이란 나라 자체가 러시아 혁명이라는 20세기의 새로운 시대를 시작한 가장 거대한 대중 봉기와 항쟁을 통해 생긴 정권이고, 꼭 숙청이나 굴라그 같은 강압적 방법이 아니라 진심으로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의 이상에 믿음을 가지고 투신한 사람들도 많았고 공산주의자가 아니거나 비록 공산주의에 대해 회의감을 느낄지언정 러시아 민족주의와 애국심, 가족과 종교에 의지하기도 하면서 싸운 병사도 많았다.

실제로 독일군이 대승을 할 때( 바르바로사 작전~ 청색 작전)는 개별 전장에 투입된 인원은 독일군이 더 많았다. 바르바로사 작전의 참패는 소련군의 졸렬한 지휘도 한몫했지만, 애당초 투입된 독일군 병력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142][143] 그러나 소련군이 우세한 시기가 되면 소련군은 대체로 1.4 ~ 2배 정도의 전체 병력을 투입했으며, 독일군과 마찬가지로 독일군의 방어의 취약점을 찾아 집중 공격했다. 이 때문에 공세의 중심에 서 있는 독일군 지휘관이 느끼는 적의 병력 수는 수십 배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공세를 펼 때 적보다 많은 병력을 동원한다는 점은 독일군이든 소련군이든 마찬가지다.

이러한 독일 편향적인 냉전기 서방의 연구 저작에서 존 에릭슨의 저작은 단연 독보적이었다. 에릭슨의 연구는 1960년대 이후부터 그가 작고한 2001년까지 독소전쟁 연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에릭슨의 책들은 기존의 독일 관점 동부전선 서술을 극복하고 소련 측 관점을 대거 차용해 동부전선 사를 서술했다. 그의 첫 번째 책인 <소련군 최고 사령부(Soviet High Command)>는 1941년 여름의 상황을 최초로 조명했다. 그의 뒤따른 두 책인 <스탈린그라드로 가는 길(The Road to Stalingrad)>와 <베를린으로 가는 길(The Road to Berlin)>은 전쟁 전체를 자세하게 기술했다. 이 책들의 원칙적인 가치는 수백 개의 소련 자료에서 가치 있는 자료를 뽑아 동부전선에 대한 상세한 기술을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에릭슨 같은 저자도 있고 베트남 전쟁 이후 대두된 미군의 개혁 바람에서 소련군의 기동전과 작전술을 연구하는 경향이 생겨나긴 했지만 사실 대부분 학술적인 것이라 대중이 접하기 힘들었고, 특히 에릭슨의 저작들은 영미권에서도 어렵기로 소문나 있던 지라 대중의 인식을 바꿔놓기는 힘들었다. 무엇보다 서구권의 창작물 및 가볍게 볼 수 있는 서적들이 독소전쟁을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는 것도 큰 문제였다.

6.2.3. 냉전 이후

냉전이 해빙기를 맞이하고 소련 측의 자료 공개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독소전 연구가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존 에릭슨을 비롯한 서방 학자들은 동서독 역사학자들의 교류 중에서 유출된 소련의 내부 연구 자료들과 1, 2차 사료들을 구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존 에릭슨은 기념비적인 독소전쟁 3부작인 <소련군 최고사령부(Soviet High Command)>, <스탈린그라드로 가는 길(The Road to Stalingrad)>, <베를린으로 가는 길(The Road to Berlin)>을 출판할 수 있었다.

이후 소련이 붕괴되고 문서 보관고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자 독소전쟁 연구는 전성기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존 에릭슨은 물론이고 데이비드 글랜츠를 비롯한 새로운 연구자들이 개방된 소련측 자료들을 대거 연구에 수용함에 따라 독소전쟁 연구는 크게 활기를 띄었다. 글랜츠는 이 시기 조너선 하우스와의 공저를 통해 체계적인 독소전쟁 개괄서인 <거인들이 충돌했을 때(When Titans Clashed-국내 번역명 '독소전쟁사')>를 출판했다.

<When Titans Clashed> 이후 글랜츠와 니입 부자(父子), 스웨덴의 군사사학자 니콜라스 채터링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독소전 연구에 뛰어들어 명저들을 출판했고 공산주의 체제의 강박증에서 풀려난 러시아 학자들 또한 갈수록 가치 있는 연구 성과들과 출판물들을 내고 있다.

그리하여 여러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는데, 데이비드 글란츠가 발굴한 " 르제프 전투"가 대표적이다. 이 공세는 글란츠의 저서 Zhukov's greatest defeat page(1999)가 나오면서 알려졌다. 요약하면 1942년 11월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천왕성 작전은 사실 주공세가 아니었고, 실제 주 공세는 게오르기 주코프가 그 북쪽인 르제프에서 맡았던 "화성 작전"이었는데, 여기서 주코프가 대패를 당했다는 것이다. 현재 영미권에서 화성 작전으로 대표되는 르제프 전역과, 그 동안 남부집단군에 비해 주목도가 낮았던 중부집단군의 전투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연구가 진행되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러시아 군사학자들은 화성 작전으로 독일 중부집단군의 발이 묶여서 스탈린그라드의 위기를 지원할 수 없게 했다는 주코프의 일기 등을 기반으로 하여 이 작전이 글란츠의 말대로 꼭 실패라고 볼 수 없다는 반론을 제기하고 있지만, 글란츠는 7년여 만에 발매된 러시아어 저서에서 부록으로 당시 소련군 군사 문서를 다량 수록하여 재반론하고 있다.

또 한 가지 사례는 니콜라스 채터링이 발굴한 프로호프로카 전투의 손실 분석이다. 이 사람의 책 《Kursk 1943: A Statistical Analysis, London: Frank Cass》(2000)에서는 소련 제5전차군이 SS 기갑사단과 격돌해서 대등하게 싸웠다고 선전되었던 프로호프로카 전투에서 사실 소련군이 전술적으로는 대패했다는 것을 독일군 작전 일지를 분석하여 밝혔다.(독소의 손실 비는 약 1:6) 그러나 이런 전술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 전투에 참가한 독일 기갑 부대는 그 전투에서 입은 손실 또는 지연 때문에 더 이상의 진격을 중단, 소련군의 돌출부를 잘라 버리는 데 실패했고, 결과적으로 이 전투가 전략적으로 소련의 승리라는 점은 부인되지 않는다. 최근에는 성채 작전의 북부 방면을 담당한 독일 중부집단군과 오룔 탈환 전투인 소련군의 쿠투조프 작전에서의 손실 또한 1:7에 가까웠다는 연구가 제기되고 있다.

어찌되었든 소련군의 문서들이 많이 공개되면서 기존 독일군에 편중되었던 시각이 사라지는 중이다. 특히 미군은 독소전쟁 시기를 거치면서 완성된 소련군의 작전술을 본격적으로 본받고 배웠고 걸프 전쟁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144] 미군은 1982년 이전 까지만 해도 작전술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 야전군, 집단군을 통솔할 작전술이 부제한 상황이었고 거기다가 독일 국방군 출신 장교들이 서독군과 나토군에 대거 편입되면서 미군 장교 상당수들도 인종주의적 시각에도 편승해서 소련군을 무시하는 시각이 자리잡았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 제4차 중동전쟁을 거치면서 장차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대규모 재래식 기갑 공세에 맞서서 대규모 야전 부대들을 통솔할 새로운 작전 개념이 필요했다. 데이비드 글랜츠를 비롯한 연구자들이 소련군의 작전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결과 1985년, 소련군사연구소가 창설되는 것을 시작으로 미육군지휘참모대학의 고등군사연구원에서 소련군 군사 서적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1986년 판 야전근무 요무령에도 작전술이 본격적으로 명시되면서 미군은 소련군의 작전술 체계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결정은 걸프 전쟁의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서방 전사가들이 편견 없이 소련군의 작전 체계들을 연구하고, 실제로 적용하는 행보에 대해 소련 측에서도 만족감을 표명했다고 한다. 다만 소련 시절과 달리 현재의 러시아군이 보급 및 통신, 전술 등의 능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반대로 작용하고 있다.

7. 대중매체에서

그 제2차 세계대전 내에서도 가장 유명한 전쟁이다 보니, 매체에서도 그 만큼이나 많이 쓰이고 있다.

7.1. 영화

  • 고양 - 컴 앤 씨 감독인 엘렘 클리모프의 아내기도 한, 라리사 셰피트코가 찍은 유작. 독소전쟁 벨라루스를 배경으로 소련 저항군 병사 두 명이 독일군의 포로로 잡히면서 벌어지는 순교극을 다루고 있다.
  • 베를린 함락 - 1949년, 소련. 물론 시대에 걸맞은 스탈린을 영웅화한 영화다. 베를린 전투만을 다루진 않고, 독소전의 시작과 끝까지 다루었다. 그래도 소련군의 복식이나 무기들은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어서 제대로 고증되어 있다. 잘 관찰하면 대전 기간 중의 소련군 제복의 변천사[145]를 볼 수 있다. 거기다가 수백 대의 T-34 전차, SU-76M, SU-152 자주포, 카츄샤 로켓포를 실은 트럭들이 소련군 병사와 함께 행진하는 CG 없이 찍은 실사판 장관을 볼 수 있다.
  • 인간의 운명 - 1959년 소련. 전쟁의 참혹함과 전쟁 고아 등 피해자들의 고통, 그리고 가족애와 인간애를 다룬 영화. 미하일 숄로호프의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숄로호프는 인간의 운명으로 레닌 상을 받았고, 여러 소설들을 저술해 196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 철십자 훈장 - 1977년 미국.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잘 다루지 않는 독소전을 다루었다. 이미 전황이 기울어진 1944년 산전수전을 다 겪고 철십자 훈장을 탄 독일군 고참 부사관 슈타이너 중사가 훈장을 위한 공명심에 들뜬 귀족 장교 슈트란스키 대위를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전쟁의 허무함을 나타낸다. 당시 유고슬라비아 현지에서 로케를 해서 T-34 수백 대와 함께 몰려나오는 우라 돌격이 이 영화의 백미. 슈타이너가 실전에서 탄창도 제대로 교환하지 못하며 허둥대는 상관을 보고 미친 듯이 웃어대는 모습 또한 명장면이다.
  • 벙커 - 1981년, 프랑스. 2부작 TV영화로, 훗날의 다운폴과 마찬가지로 벙커에 갇힌 히틀러와 주변 인물들을 다뤘다. 히틀러 역할을 맡은 안소니 홉킨스의 명연기를 감상할 수 있다.
  • 즈베즈다 - 2002년, 러시아. 1944년 독일군 후방으로 침투한 소련군 정찰대 이야기. 즈베즈다는 영화에 등장하는 소련군 정예 정찰 부대명이자 암호명이다.
  • 피아니스트 - 2003년, 프랑스, 영국, 독일, 폴란드. 독소전쟁 자체보다는 독일군 점령 하의 바르샤바가 배경이다. 마지막 부분에서 소련군과 패배한 독일군이 나오기는 한다.
  • 탈리-이한탈라 1944 - 2007년 핀란드. 1944년 6월 25일~7월 9일까지 벌어진 핀란드와 소련의 탈리-이한탈라 전투를 배경으로 한다. 이 전투 자체는 핀란드군이 소련군의 공세를 막고 격퇴하는 데 성공했고 최종 사상자수 차이도 2.5배 가까이 차이 났지만, 전체 전력 차이 때문에 핀란드는 GG 치고 정전 협정을 체결한다. 그리고 핀란드는 소련과 함께 독일을 공격한다.
  • 베를린의 여인 - 2008년, 독일, 폴란드 합작. 베를린 전투가 배경. 점령군으로서의 소련군과 독일인의 복잡한 감정을 다루었다. 이 영화에서 초반부에 소련군의 범죄(약탈, 강간) 및 독일 여성들의 치부( 성상납) 같은 이야기가 나오긴 하지만,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소련군 병사들의 인간적 모습이 잘 나타난다. 다큐멘터리나 전쟁물 같지만 실제로는 점령군 장교와 피점령국 여인 사이의 복잡 미묘한 감정을 그린 멜로물(!?)이다.
  • 디파이언스 - 독일군 점령 하의 벨라루스에서 지역 농부들이었던 비엘스키 형제들이 이끈 유대인 게릴라가 주 소재. 이들은 천 명이 넘는 유대인들을 보호했고, 소련군 유격대와 협력해 독일군을 공격하기도 했다. 소련군 유격대 사령관도 이들의 전략적 중요성을 알아서 많이 도와줬다.
  • 레닌그라드 - 2009년, 러시아, 영국 합작. 레닌그라드 포위전이 배경이다. NKVD에 의해 스파이로 오인받아 붙잡힌 영국인 기자( 미라 소르비노)가 여자 민병대원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독일군에 포위된 레닌그라드에서 추위, 굶주림 속에서 생존의 투쟁을 하는 내용.
  • 브레스트 요새 - 2010년, 러시아. 1941년 6월 22일~29일 브레스트 요새 전투가 배경이다. 처절한 우라돌격 신으로 유명하다. 불시에 기습당해 무기조차 들지 못한 상태에서 창틀, 의자, 도끼 등 손에 잡히는 대로 들고 독일군에게 돌격한다. 실제 브레스트 요새 전투에서 독일 45사단은 후퇴를 명령받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요새는 하인츠 구데리안이 폴란드에게 뺏어서 소련에 넘겨준 것이었다. 따라서 영화 초기에 민간인들과 희희낙락하게 평화로운 삶을 사는 소련군의 모습 따윈 다 뻥이다. 실제로 소련 점령 치하 폴란드는 나치 치하 지역처럼 살벌한 군정이 이루어졌으니, 폴란드인들 말마따나 이건 역사 왜곡이 굉장히 심한 편이다. 한국에선 개봉도 제대로 안 되고 다운로드 서비스만 하는 영화지만, 의외로 한국 영화 채널에서 자주 틀어 주었다.
  • 화이트 타이거 - 2012년, 러시아. 제85회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노미네이트. 1943년부터 종전까지의 기간 동안, 정체를 알 수 없는 독일 전차와 이에 대적하는 소련군 전차 승무원들의 모습을 담았다. 전쟁으로 나타난 인간 심리를 이야기하는 전차병 나이데노프, 그런 그와 적 전차를 전쟁에 맞추어 새롭게 태어난 존재로 여기는 상관 페토도프, 베를린의 항복 식전에 등장한 독일군 고관들, 그리고 마지막 히틀러와 누군가의 대화 등을 보면 단순히 전차전만을 그린 영화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Unsere Mütter, Unsere Väter - 2013년, 독일. 1941년 6월부터 1945년 5월까지를 5명의 시점에서 다룬다. BoB와는 다르게 '승리의 영광'이 아닌 ' 처절한 패배'를 다루는 것이 특징. 초반에는 "모스크바까지 OOkm"였지만 독일이 밀리기 시작하는 중반부부터는 "베를린까지 OOkm"로 바뀐다. 전쟁을 지속하며 결국 인간성이 마비되어 가는 인물들, 전쟁에 광기에 휩쓸린 사람들과 처절하게 죽어 가는 병사들을 주로 보여 준다.
  • 스탈린그라드(2013) - 2013년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 1993년 독일에서 만든 원조 스탈린그라드를 패러디해서 만든 영화이다. 1993년작 스탈린그라드와는 달리 소련군 시점이며,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군인들과 함께 생활했던 한 러시아 여인의 회상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이다. 1993년 작품과는 내용도 전혀 다르고 등장인물도 전혀 다르다.
  • 1944 - 2015년, 에스토니아. 독일과 소련 사이에 있어서 2차 세계 대전에 휘말려 버린 에스토니아를 배경으로 같은 민족의 인물들이 한쪽은 독일 무장친위대에, 다른 쪽은 소련군에 소속되어 동족상잔의 비극을 벌이는 이야기. 나바 전투(Battle of Narva)에서 일어난 실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제20무장척탄병 사단[147]이 소련군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는 도중, 상대방으로부터 에스토니아어가 들리기에 싸움을 멈추고 확인해 보니 비록 군복과 장비는 달랐지만 같은 에스토니아인으로 구성된 소련군 제8 '에스토니아' 소총병 군단[148]이었다.영화로 유명한 국가에서 만든 것은 아니지만, 의외로 전투 장면의 퀄리티가 굉장히 높다. 다양한 독일군 총기와 보존 상태가 좋은 다수의 T-34-85를 볼 수 있다.
  • 여기의 여명은 고요하리라 - 1969년 소설 원작의 영화로 1972년과 2015년 2차례에 걸처 영화화 되었다. 1942년 키예프 철도를 파괴하려는 독일군 16명을 상대로 싸우는 소련 여군 병사들과 지휘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 T-34(영화) - 2018년 러시아 영화. 독일군에 포로로 잡힌 T-34 승무원들이 탈출을 감행하는 스토리의 영화이다. 전차 포탄을 슬로 모션으로 보여준다.
  • 디어 엘자(한국어 개봉명: 위대한 전진) - 독소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대 동부전선에 투입된 헝가리군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보통 동부전선의 이야기는 독일군 아니면 소련군이 주인공이 되어서 이야기를 그려나가는 것이 특징이지만, 이 영화는 거의 유일하게 헝가리군을 다루고 있다. 교사 출신이었던 한 남자가 헝가리군에 징집되어 소련군에 대항해 싸우지만 공세에서 패배,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잡히면서 발생하는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다. 중간중간 이탈리아군의 이야기도 나와, 독일 소련 위주의 독소전이 아닌 그 외 추축국들의 이야기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꽤 흥미로운 영화.

7.2. 게임

7.3. 만화

  • 수리부엉이 - 독소전의 공중전을 다루고 있다. 프랑스 만화 특유의 정밀한 묘사가 일품.
  • 요한의 타이거 - DC 코믹스 산하의 버티고 코믹스의 워스토리의 단편 중 하나. 정확히는 독소전 말기인 1945년 4월의 시점으로 전차장 요한이 부하들을 살리기 위하여 고생하는 이야기이다. 고증이 다소 좋지 못하지만 작품이 나온 시점을 감안하면[149]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의 전쟁범죄를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애초에 주인공 요한부터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7.4. 기타

  • 록그룹 sabaton - Panzerkampf, Attero dominatus 등 독소전쟁을 포함해 2차 대전을 소재로 한 노래들을 불렀다.
  • 러-일 합작 애니메이션 제1 부대: 진실의 순간'[150]
  • 버프소녀 오오라 - 88화에서 '인류역사상 ㅄ같은 결정을 하면 항상 나타나 우는 새' 븟새가 등장하는데, 그때 나온 컷이 히틀러가 소련을 공격한다.라고 말하자 창가에서 븟새가 울었다.
  • 일본의 만화가 고바야시 모토후미의 작품들
  • 잊혀진 병사 (Le soldat oublié) : 프랑스-독일 혼혈로서 동부전선에 참전했던 독일군 병사 ‘ 기 사예르’(처음에는 수송부대로 참전하지만 나중에는 독일의 정예사단이자 전략예비대로 동부전선의 소방수 역할을 한 그로스 도이칠란트 사단으로 들어감)의 수필이다. 당시 동부전선의 처절함이 최악 중의 최악의 상황을 묘사하며 나타낸다.[151] 화자는 영국군에게 포로로 잡히는데 다행히도 아버지가 프랑스인이어서 프랑스 재건이라는 암묵적인 명목으로 별다른 재판 없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아버지가 프랑스인이라는 혼혈, 작품 시작 부분에는 머리가 검고 곱슬이라는 외모까지 더해져, 독일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동료들에게 무시당하는 모습도 나온다. 하지만 바로 이 점 때문에 기 사예르는 평범한 독일 병사들과 달리 포로로 잡히어 나름의 파격적인 대우를 받게 된다. 여담으로 2차 대전 후 프랑스 군에서 나름의 지옥 훈련을 받는다고 했지만 자신의 입장에서는 동부전선에서 겪은 것들에 비하면 아이들 장난 수준이었다라는 정도로 시니컬하게 쓴다.)
  •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 전쟁에 참여했던 소련 여군을 중심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풀어낸 '이야기 소설'. 1985년 작품이나 소련 당국이 대조국전쟁의 미화에 거슬린데다 여군에 대한 편견으로 "이 책을 읽고 조국을 위해 싸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저열한 사실주의에 물든 더러운 속옷 같은 책"이라 비판하며 압박하는 바람에 내용 일부를 잘라내고 출판할 수 있었다. 그 후 소련이 무너지고 2002년에 검열당한 내용을 복구하여 재출간했다. 독소전쟁의 지옥도를 있는 그대로 풀어낸 수작이다. 2015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 폭풍속의 씨앗 - 실제 무장친위대 참전 병사인 헤르베르트 브루네거의 회고록. 그가 소속된 3 SS 토텐코프 사단 옹호, 자원 입대 여부 등 문제가 있으나 동부전선의 처절함과 당시 독일군의 상황 등을 훌륭하게 묘사하였다.
  • 랜드리스 이외에도 스탈린은 서방 연합군이 동부전선에 병력을 파견하여 싸워줄것을 수차례 요청했지만 미 영은 여러가지 이유를 대며 파병을 하지 않았다. M.J. 니콜라스(M.J. nicholas) 같은 개인 단위의 자원병이나 자유 프랑스 공군의 파병이 있었지만 그외의 파견은 없었는데 이는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하여 국내의 전쟁 여론이 나락으로 치닫을 것을 우려한 미 영의 우려탓이었다.[152]

8. 어록

그대의 이름은 무명이나 그대의 행동은 불멸이다.
Имя твоё неизвестно, подвиг твой бессмертен
- 모스크바 무명 용사 비에 적혀있는 문구
Wollt ihr den totalen Krieg? Wollt ihr ihn, wenn nötig, totaler und radikaler, als wir ihn uns heute überhaupt erst vorstellen können? #
여러분은 총력전을 원하십니까? 만약 필요하다면, 오늘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더 급진적이고 총력적인 전쟁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 파울 요제프 괴벨스[153]
" 만약 독일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면 우리는 러시아를 지원하고, 러시아가 이기는 것처럼 보이면 우리는 독일을 지원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가능한 서로 더 많이 죽이게 할 수 있다"
"If we see that Germany is winning the war, we ought to help Russia; and if that Russia is winning, we ought to help Germany, and in that way let them kill as many as possible."
1941년 6월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것을 보고, 해리 트루먼 당시 상원의원이 한 발언 #
국민 여러분! 우리 정부와 그 수반이신 스탈린 동지께선 저에게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도록 위임하셨습니다. 오늘 오전 네 시를 기하여 단 한 마디의 요구 사항이나 선전포고도 없이 독일 군대가 우리 소련을 공격하여 국경선의 여러 곳을 넘어왔으며, 항공기를 이용해 지토미르 키예프, 세바스토폴, 카우나스와 기타 도시들을 폭격함으로써 2백 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루마니아와 핀란드 영토로부터 공습과 포격까지 자행했습니다. 우리나라에 대한 이 같은 공격은 문명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배신 행위입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과 독일 사이엔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어 있었고, 우리 정부에선 이 조약의 모든 규정들을 성실하게 이행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공격 행위를 저지른 것입니다. 불가침 조약이 유효한 전체 기간에 걸쳐 우리 소련의 조약 준수 여부와 관련해 단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던 독일 정부가 우리에 대하여 이처럼 그릇된 공격 행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소련에 대한 이런 약탈성 침공과 관련해 전적인 책임은 독일의 파시스트 지도자들이 감당해야 합니다. 오전 다섯 시 반, 다시 말해서 '범죄적 침략 행위'가 저질러진 연후에 모스크바 주재 독일 대사 슐렌부르크는 자신의 정부를 대신하여 우리 붉은 군대가 독일의 동부 국경 지대에 집결했다는 이유로 우리에 대해 전쟁을 개시한다는 독일 정부의 결심을 외무인민위원인 저에게 통보해 왔습니다. 이러한 통보문에 대해 저는 소비에트 정부를 대신하여 즉각 다음과 같이 대응했습니다. 마지막까지 독일 정부는 우리측에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았다는 점, 독일은 소련의 평화적인 입장과 태도에도 불구하고 소련을 공격했다는 점, 그래서 파시스트 독일은 침략자라는 점을 밝혔습니다. 정부의 훈령으로 저는 성명을 발표해 우리 육군과 공군이 국경선 어느 곳도 침범하지 않았다는 것을 밝히고, 소련 항공기가 루마니아 비행장들을 폭격했다는 라디오 방송 내용은 새빨간 거짓이며, 우리에 대한 도전임을 명시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측이 소비에트와 독일 간의 조약을 준수해 오지 않았다며 히틀러가 오늘 뒤늦게 꾸며 대서 우리를 비난한 것 역시 거짓이고, 우리에 대한 도발입니다. 우리 연방에 대한 공격은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에, 우리 정부는 아군에 이 약탈자들의 공격을 격멸하고, 우리 영토로부터 독일군을 몰아내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우리가 알기로 고통을 겪고 있는 독일의 국민들이나, 독일의 노동자, 농민, 지식인들이 이번 싸움을 우리한테 걸어온 것이 아니라, 이미 프랑스 체코, 폴란드, 세르비아, 노르웨이, 벨기에, 덴마크, 네덜란드, 그리스 및 기타 민족들을 노예로 만든 피에 굶주린 소수의 독일 파시스트 지배자 도당이 걸어온 것입니다. 소비에트 정부는 용감한 우리 육해군과 독수리 같은 우리 공군이 조국과 인민을 위해 명예롭게 의무를 다해 침략자에게 막대한 타격을 가해 주리라 굳게 믿습니다. 우리 인민들이 오만방자한 적들의 공격을 받아 본 것은 이번이 처음만은 아닙니다.

나폴레옹 공격해 왔을 적에도 우리는 조국을 위해 싸웠으며, 나폴레옹은 패배를 맛보았고 그의 최후를 맞이했던 것입니다. 오만스럽게 우리 조국을 침범한 히틀러도 똑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붉은 군대와 전체 인민은 다시금 조국을 위해, 우리나라와 명예, 자유를 위해 성공적인 전쟁을 이끌어 나갈 것입니다. 소비에트 정부는 우리 인민 모두가 노동자와 농민, 지식인, 남녀 모두가 자신들의 의무와 직무를 충실히 수행해 주시리라 확신하는 바입니다. 우리 인민들은 그 어느 때보다 굳건히 단결하여 일어서야 합니다. 우리 인민 각자는 자신과 모든 사람들의 규율과 조직적인 행동으로 극기심의 참다운 애국자가 됨으로써 반드시 적들을 무찌르도록, 붉은 군대 육해공군이 필요할 모든 걸 지원해야 합니다. 정부는 소비에트 인민 모두에게 영광스러운 볼셰비키 당과 정부, 그리고 위대한 지도자 스탈린 주위에 더욱 굳건하게 뭉쳐 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우리의 목적은 정당한 것입니다.

적들은 반드시 패배하고 말 것입니다.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1941년 6월 22일, 대조국전쟁 개전(開戰) 사실과 항전을 촉구하는 담화문을 발표하면서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22 июня 1941 года"
"1941년 6월 22일"
Внимание, внимание.
주목, 주목.
Говорит Москва. Передаём важное правитель ственное сообщение.
모스크바에서 알려 드립니다. 중요한 정부의 메시지를 전해 드립니다.

Граждане и гражданки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소비에트 연방의 인민들이여.

Сегодня в 4 часа утра без всякого объявления войны Германские вооруженные силы атаковали границы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금일 새벽 네 시 선전포고도 없이 독일의 군대가 소련의 국경을 넘어 공격해 왔습니다.

Началась великая 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 советского народа против немецко-фашистских захватчиков.
파시스트 침략자들에 대항하는 소련 인민의 대조국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Наше дело правое, враг будет разбит, Победа будет за нами!
우리의 대의는 옳으며, 적은 패배할 것이고,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1941년 6월 22일, 유리 레비탄 아나운서, 소련 라디오 방송. 원음 영상
Неужели немецко-фашистские войска в самом деле являются непобедимыми войсками, как об этом трубят неустанно фашистские хвастливые пропагандисты?
허풍쟁이 파시스트 선동꾼들이 끊임없이 요란하게 알린 것처럼, 파시스트 독일의 군대는 정말 무적인가?
Конечно, нет! История показывает, что непобедимых армий нет и не бывало.
물론, 아니다! 역사는 무적의 군대란 없으며 존재한 적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1941년 7월 3일, 소련 국가 방위 위원회(GKO) 위원장, 이오시프 스탈린의 라디오 연설 中. 연설 대본, 녹음 영상
우리 정보국은 나에게 소련에는 160개 사단과 3,000대의 전차가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400개 사단과 2만 대의 전차를 파괴했으며, 이제 우리 앞에는 500개의 사단과 3만 대의 전차가 있다.
- 아돌프 히틀러
내가 유일하게 배우지 못한 말, 그것은 바로 항복이라는 말이다.
우리 도이칠란트 역사에 항복이라는 단어가 적히지 않을 것을 온 세계에 선언하노라.
- 아돌프 히틀러
신병들은 이곳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그들은 어머니를 찾다가 결국 미쳐서 죽게 된다. 8월 8일, 6중대의 총 사망자 쉰 명 중 우리는 그렇게 서른다섯 명을 잃었다.
- 독일 제18보병연대 '호케' 소령[154]
히틀러의 독일이 우리를 공격하고 있다. 그들의 공격은 냉혹하고 무자비하다. 이 나라에 암운이 드리워졌다.
- 이오시프 스탈린
Я умираю, но не сдаюсь! Прощай Родина
나는 여기서 죽지만, 항복하진 않는다! 잘 있거라 조국이여.
- 브레스트 요새 방어전 당시 이름 없는 소련군 병사가 남긴 문구[155][156]
나를 기다려 줘요. 나는 돌아올 거예요.
온 힘을 다해 기다려 줘요.
황색 비와 함께,
슬픔이 밀려오더라도 기다려 줘요.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기다려 줘요.
타는 듯 뜨거운 열기 속에서 기다려 줘요.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길 포기하고
그와 함께 지난 날을 잊더라도 기다려 줘요.
먼 곳에서 쓴 편지가
오지 않을 때도 기다려 줘요.
함께 기다린 사람들이 모두
기다림에 지치더라도 기다려 줘요.

나를 기다려 줘요. 나는 돌아올 거예요.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당신에게 잊어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지 말아요.
비록 내 아들과 어머니가
내가 벌써 죽었다고 믿고 있더라도,
내 친구들이 기다림에 지쳐서
모닥불 옆에 앉아 내 영혼이 편히 잠들기를 빌며
쓴 술을 한 잔 마시더라도...
기다려 줘요. 나를 위해 건배하는
그들과 성급하게 함께하지 말아줘요.

나를 기다려 줘요. 나는 돌아올 거예요.
모든 죽음을 능멸하기 위해.
기다리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는 운이 좋았군."이라고 말하게 해요.
그들은, 기다리지 않은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지요.
바로 그 불의 열기 속에서
여기서 나를 기다림으로써,
나를 구원한 이는 바로 당신이라는 것을.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오직 당신과 나만이 알 거예요.
당신이 다른 사람과는 달리
기다리는 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157]
놈들을 죽여라! 만약 그대에게 그대의 집이 조금이라도 소중하다면, 그대가 놈들을 죽이지 않으면 아무도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아라! 그러니 최소한 한 놈이라도 죽여라! 그리고 더 빨리 죽여라! 보이는 족족 죽여라!
1942년, 콘스탄틴 시모노프.
졔냐가 1941년 12월 28일 아침 열두 시에 죽었다.
할머니가 1942년 1월 25일 낮 세 시에 죽었다.
레카가 1942년 3월 17일 새벽 세 시에 죽었다.
엄마가 1942년 5월 13일 아침 일곱 시 삼십 분에 죽었다.
사비체프 집안 식구가 죽었다.
'모두 다 죽었다.'
- 레닌그라드 공방전 당시, 열한 살 소녀 타냐 사비체바의 일기장. 일기장의 주인도 1942년 말 병으로 사망했다.[158]
죽이고 또 죽여라, 적들의 시체는 예술이며 혁명이다.
- 프라우다
그때 1학년 학생이 세 반 있었는데, 이웃 마을에 두 반, 가예보에 한 반이 더 있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잘 알고 지냈죠. 그래서 나는 전쟁에서 몇 명이 죽었는지 압니다. 우리는 백 명쯤 됐는데, 전선에서 죽은 사람이 분명히 아흔두 명이에요. 나머지는 모두 불구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고요. 사지 멀쩡히 돌아온 사람은 저 한 명뿐이었습니다.
- 소련군 참전 용사의 증언
러시아의 광대함은 헤아릴 수가 없다... 사단 열두 개를 처부술 때마다 또 다른 사단 열두 개가 나타난다.
- 프란츠 할더
그리고 나는 외치고 싶었다. 러시아, 벨라루스, 폴란드의 땅 속에 누워 있는 이들. 우리가 거쳐 온 땅에서 영원히 잠든 이들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동무들, 우리가 해냈소!
- 바실리 그로스만 (소련 종군기자), "전쟁의 해들(Годы войны, Years of the war)" 중
모스크바에서 전해드립니다. 소비에트 정부의 발표를 전해드립니다. 제1 벨라루스 전선군의 사령관인 소련의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가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인 소련의 이반 코네프 원수의 도움을 받아 치열하게 진행된 시가전 끝에 베를린을 지키던 독일군을 모조리 궤멸시키고 전투를 종료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5월 2일, 독일의 도시이자 수도인 베를린을 완전히 점령했습니다! #
- 모스크바 라디오 아나운서 유리 레비탄 [160], 1945년 5월 2일, 독소전쟁 종전 선언
우리 소련의 승리는 내가 이뤄 낸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소련 인민들의 피와 땀이 이룩해 낸 것입니다.
- 이오시프 스탈린

9. 둘러보기

파일:소련 국장.svg 소련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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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d700> 전쟁 교전국
1924년 에스토니아 쿠데타 시도
,1924,
<colbgcolor=#f5f5f5,#191919>
봉소전쟁
1929
스페인 내전
1936 ~ 1939
에스토니아-소련 국경분쟁
,1938,
파일:에스토니아 국기.svg
에스토니아 공화국
소련-일본 국경분쟁
1938 ~ 1939
<colcolor=#ffd700> 하산 호 전투
1938
할힌골 전투
1939
제2차 세계 대전
1939 ~ 1945
폴란드 침공
1939
겨울전쟁
1939 ~ 1940
베사라비아-북부코비나 침공
1940
발트 3국 점령
1940
대조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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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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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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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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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1979 ~ 1989
나고르노 카라바흐 전쟁
1988 ~ 1994
리투아니아 독립 무력 진압 시도
1991
라트비아 독립 무력 진압 시도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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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 ~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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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내전
,1918 ~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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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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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슬로바키아 점령
,1938 ~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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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1939 ~ 1945,
<colbgcolor=#fff> 폴란드 침공
,1939,
파일:폴란드 국기(1928–1980).svg 폴란드 제2공화국
태평양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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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프리카 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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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전쟁
,1941 ~ 1945,
파일:소련 국기.svg 소련 파일:폴란드 국기(1928–1980).svg 폴란드 동부군
이탈리아 전선
,1944 ~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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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플란드 전쟁
,1944 ~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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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화단의 난
,1900 ~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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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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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1935 ~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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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
,1936 ~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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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니아 침공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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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1940 ~ 1945,
<colbgcolor=#ED2939> 프랑스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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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프리카 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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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프리카 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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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침공
,1940 ~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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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 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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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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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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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프 전쟁
,1990 ~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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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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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리비아 내전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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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피데스 작전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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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폴란드 국장.svg 폴란드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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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분쟁 교전국
<colbgcolor=#dd0c39> 코즈민 숲 전투
,1497,
파일:몰다비아 국기.svg 몰다비아 공국
폴란드-우크라이나 전쟁
,1918 ~ 1919,
파일:우크라이나 국기.svg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파일:우크라이나 국기.svg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전쟁
,1919,
파일:체코 국기.svg 체코슬로바키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1919 ~ 1920,
파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18–1937).svg 소비에트 러시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Flag_of_Ukrainian_SSR_%281919-1929%29.svg.png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폴란드-리투아니아 분쟁
,1919 ~ 1920,
파일:리투아니아 국기.svg 리투아니아
자올지에 점령
,1938,
파일:체코 국기.svg 체코슬로바키아
제2차 세계 대전
,1939 ~ 1945,
폴란드 침공
,1939,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소련 국기.svg 소련 파일:단치히 자유시 국기.svg 단치히 자유시 파일: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국기.svg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서부전선
,1939 ~ 1945,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이탈리아 왕국 파일:비시 프랑스 대통령기.svg 비시 프랑스
독소전쟁
,1941 ~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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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봄
,1968,
파일:체코 국기.svg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
걸프 전쟁
,1990 ~ 1991,
파일:320px-Flag_of_Iraq_(1991-2004)_svg.png 이라크 파일:쿠웨이트 국기.svg 쿠웨이트 공화국
민주주의 유지 작전
,1994 ~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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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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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전쟁
,2003 ~ 2011,
파일:320px-Flag_of_Iraq_(1991-2004)_svg.png 이라크 }}}}}}}}}

파일:헝가리 국장.svg 헝가리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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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년 헝가리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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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 ~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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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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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헝가리 혁명
,1956,
프라하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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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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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루마니아 국장.svg 루마니아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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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5,
파일:오스만 제국 국기.svg 오스만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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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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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불가리아 국장.svg 불가리아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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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스페인 국장.svg 스페인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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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리오데라플라타연합주국기.png 리오데라플라타 파일:볼리비아 국기.svg 볼리비아 파일:칠레 국기.svg 칠레 파일:그란 콜롬비아 국기.svg 그란콜롬비아 파일:멕시코 국기(1821-1823).png 멕시코 파일:페루 국기.svg 페루 파일:파라과이 국기.svg 파라과이
멕시코 재정복 시도
,1821 ~ 1829,
파일:Bandera_Histórica_de_la_República_Mexicana_(1824-1918).svg.png 멕시코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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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모로코 국기.svg 모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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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도미니카 공화국 국기.svg 도미니카 공화국
친차 제도 전쟁
,1865 ~ 1866,
파일:칠레 국기.svg 칠레 파일:페루 국기.svg 페루 파일:에콰도르 국기.svg 에콰도르 파일:볼리비아 국기.svg 볼리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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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쿠바 국기(1902-1906, 1909-1959).svg 쿠바 반군 파일:미국 국기(1896-1908).svg 미국
필리핀 혁명
,1896 ~ 1899,
파일:Flag_of_the_Tagalog_people.svg 카티푸난 파일:필리핀 국기(1898-1901).svg.png 필리핀 혁명군 파일:미국 국기(1896-1908).svg 미국
미국-스페인 전쟁
,1898,
파일:미국 국기(1896-1908).svg 미국
리프 전쟁
,1921 ~ 1926,
파일:Flag_of_the_Republic_of_the_Rif.svg 리프 공화국
독소전쟁
,1941 ~ 1944,
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 소련
이프니 전쟁
,1957 ~ 1958,
파일:모로코 국기.svg 모로코
녹색행군
,1975,
파일:모로코 국기.svg 모로코
걸프 전쟁
,1990 ~ 1991,
파일:320px-Flag_of_Iraq_(1991-2004)_svg.png 이라크 파일:쿠웨이트 국기.svg 쿠웨이트
보스니아 전쟁
,1992 ~ 1996,
파일: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국기.svg 유고슬라비아
코소보 전쟁
,1999,
파일: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국기.svg 유고슬라비아
이라크 전쟁
,2003 ~ 2017,
파일:320px-Flag_of_Iraq_(1991-2004)_svg.png 이라크
제1차 리비아 내전
,2011,
파일: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 국기.svg 리비아 }}}}}}}}}

[1] 빌리까야(위한) 아쩨취스뜨빈나야(조국) 바이나(전쟁), 영어로는 The Great Patriotic War이다. 참고로 조국전쟁은 프랑스 나폴레옹과 치른 전쟁이며 그 앞에 대(大)를 붙여서 대조국전쟁이라는 명칭이 만들어졌다. 한국에서는 보통 독소전쟁이라는 표기를 쓰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러시아 방문 중 국가두마 연설에서 상대국 존중 차원으로 러시아측 용어를 사용한 바 있다. 영상에서 32초 이후부터 의외로 대조국전쟁이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된 시점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아니라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러시아 제국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맞선 동부전선을 의미했다. 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이런 대규모의 전쟁은 다시는 안 일어날 것이라 생각해 1차 세계대전을 비공식적으로 대전쟁(Great War)이라고 불렀던 것과 비슷하다. [2] 서쪽은 독일군, 동쪽은 소련군 [3] 서쪽은 독일군, 동쪽은 소련군. 독일군과는 다른 추축국의 국기가 보이는데, 각각 루마니아군, 이탈리아군 등이다. [4] 해당 국가들은 전쟁 초중반 독일의 편이었으나 후반에 전세가 연합국 편으로 기울자 소련과 동맹을 맺고 나치 독일에 대항했다. [5] 노르망디-니에멘 참고. [6] 무기대여법 참고. [7] 소련 영토에 착륙한 미 육군 항공대 전력 일부가 연합작전으로 독일군 폭격에 참여 및 무기 지원. [8] 기병 부대를 비롯한 군대를 파병해 지원했다. [9] 핀란드는 삼국 동맹 조약을 맺은 적이 없어 추축국은 아니고 겨울전쟁 당시 소련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위해 나치 독일 편에 섰다. [10] 제2차 세계 대전/관련 인물 참고. [11] 군인 2957만명 포함, 동원인력 총수 [12] 출처: 뤼디거 오버마스, 2000. ISBN 3-486-56531-1; 바딤 에리크만, 2004. ISBN 5-93165-107-1; Mark Axworthy, 1995, ISBN 1-85409-267-7 및 기타 서독 정부 보고서 [13] 질병 300만 포함 [14] 군인 포로 400만 [15] 추축국에 부역한 소련인들 및 러시아 내전 이후 망명한 백군들의 자칭 명칭. 러시아 해방군, 카민스키 여단 [16] 독일민주공화국, 폴란드 인민 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 헝가리 인민 공화국,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알바니아 사회주의 인민공화국,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건국. [17] 4분 10초부터. 사용된 음악은 Hearts of Iron III Storming Omaha Beach이다. [18] 독일은 당시 인구의 30%(전쟁 말기 75%), 소련은 40% 이상을 오로지 이 전쟁에 동원했다. 세계사 이래 인구 동원을 40% 이상 한 전쟁은 독소전쟁이 유일하다. [19] 히틀러는 영국 미국과의 지속적인 군수물자 수출 및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파시즘에 대한 경계 성명으로 미국과의 전쟁을 항상 우려하고 있었으며 결국 미국의 재무장 정책으로 미국의 연합국 합류 가능성이 높아지자 자신의 보좌관에게 미국 같은 나라와 싸우기 위해서는 막대한 식량과 자원이 필요하므로 우린 동쪽, 즉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와 러시아의 유전지대를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 히틀러는 몰랐겠지만, 몰로토프의 부인은 유대인이었다. [21] 본명은 레지널드 에일머 랜펄리 플렁켓언리얼드락스(Reginald Aylmer Ranfurly Plunkett-Ernle-Erle-Drax, 1880-1967). 최종 계급은 해군 대장(계급)이다. [22] 사실 이는 1차대전 전부터 이어져온 전통(?)이다. 독일은 독일 제국 시절에도 서쪽의 프랑스와 동쪽의 러시아로부터 양쪽에서 동시에 공격받는 걸 우려했고 그래서 슐리펜 계획을 세웠다. 비록 이 계획은 원래부터 있던 문제에 그나마 장점도 없애버린 채 고쳐버린 데다가 판단 미스 등등의 이유로 실패했고 결국 독일은 양면전선에 빠져 독일 패망에 기여하다시피 했으니(정작 러시아는 러시아 혁명으로 먼저 망했다.) 나치 독일으로서는 양면전선을 만들지 않는 게 제1의 목표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나치 독일도 결국 양면전선이 형성되는 바람에 망했으니 그 판단은 틀린 건 아니었다. [23] 리벤트로프는 자신이 성사시킨 불가침 조약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고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된 이후 선전포고문을 전달하며 리벤트로프가 몰로토프에게 '서기장에게 나는 어떻게든 이 전쟁을 막아보려했다고 전해주시오'라고 말한 것을 보면 진심으로 소련과 동맹을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수천만명의 인명을 잃은 소련의 눈에 그딴 변명이 먹혀들리가 없었고 리벤트로프는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소련과 미국, 영국, 프랑스 재판관 전원 만장일치로 사형이 언도되었다. [24] 안토니 비버/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 31~32 [25] 리스코프는 독소전 개전 이후 대독 프로파간다에 동원되다 코민테른 조직에 배정되어 코민테른 요원으로서 활동하게 된다. 하지만 리스코프는 코민테른 지도자들과 지속적으로 충돌하였고 <코민테른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등의 글을 게시하며 코민테른 지도자들을 배신자라고 비판한 끝에 1942년 1월 NKVD에 체포된다. 다행히 수사는 6개월만에 종결되었지만 리스코프는 당국에 의해 노보시비리스크로 옮겨졌고 이후 리스코프는 소련 붕괴 이후 공개된 기밀 문서에조차 43년 후반에서 44년 초 사이에 실종된 것이 마지막 기록으로 나오는 등 그의 이후 운명은 알려져있지 않다. [26] 처칠이 집필한 2차대전 책에서 독소전쟁이 터지자 뒤 스탈린이 북아프리카 전역이 멀쩡히 있음에도 끊임없이 제2전선을 요구한 내용이 나온다. [27] 아무리 독일군이 북아프리카에서 군단 규모였다고는 하지만 7~8만명 규모의 병력을 투입했고 해군에서 압도적 우세인 영국이 뒤치기 할 가능성을 대비해야 했고 이러한 독일의 우려는 디에프 상륙작전으로 증명되었다. [28] 애초에 당시 독일 전력으로는 영국 정복이 불가능했다. 영국 해군은 수백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군 대표 전력인 반면 독일 해군은 육군과 공군에 밀려 구색만 갖춘 상태였다. 히틀러도 이걸 모를 리가 없었기에 항공전에 걸었으나, 항공전 자체가 전력이 비등한 이상 방어측이 유리한데다 현재도 항공전만으로 전쟁의 판도를 바꾸기엔 한계가 있어서 육군이나 해군이 주력을 맡고 공군이 지원하는 형태가 주를 이루는데, 공군이 등장한 지 30년도 안 된 당시에는 공군을 주력으로 쓴다는 전략 자체가 더욱 무리였다. 미국도 태평양 전쟁에서 여러 번 일본 본토를 공습했으나, 애초에 미국은 전력과 산업 규모에서 일본을 월등히 앞선데다 당시 일본의 상황은 영국은 물론 독일과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막장이었다. 게다가 그 미국도 개전 초기엔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해군 전력에서 일본에 밀렸고, 이 때문에 둘리틀 공습을 성공시키기 위해 당시 중국 본토를 통치하던 중화민국의 협력을 받아내야 했다. [29] 실제로도 1942년 시점부터 이미 소련의 현역 병력은 천만명을 돌파했다. [30] 이언 커쇼, 히틀러 2권 383~384 페이지 [31] 프랑스와의 전쟁에서는 그 누구보다 쫄아있던 국방군 수뇌부가 소련과의 전쟁에서 낙관한 데에는 1차 대전의 경험도 크게 작용했다. 러시아 제국과의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은 러시아군을 상대로 압도적인 전과를 올렸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엄청난 영토를 뜯어내기도 했다. 물론 당시 막 건국한 소련이 내부 혼란을 정리해야 했기에 조약에 서명한 것일 뿐 내부 문제만 해결되면 언제든지 독일의 뒤통수를 후려갈길 생각을 하고 있었다. [32] 이언 커쇼, 히틀러 2권 484페이지 [33] 일본은 독소전쟁에서 동맹인 나치 독일의 편을 들지 않았으며 심지어 독일의 항복 이후 소련에 대독 승전을 축하하는 서신까지 보냈을 정도였다. 참고로 소일 불가침조약을 잠재적 동맹과 같은 의미로 착각한 당시 일본은 서로 절멸전을 벌이는 독일과 소련 모두를 일본의 동맹으로 여기는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이탈리아-일본-소련의 4국 동맹을 생각하기도 했을 정도. 전술했듯이 이 4국 동맹은 리벤트로프 역시 구상하기도 했지만 러일 전쟁에서 뜯긴 영토를 소련이 요구한 만큼 리벤트로프안의 동맹을 일본이 받아들일리가 없었다. [34] 실제로 독일에 의한 역공작이 없지는 않았다. [35] 핀란드는 독일 편에 붙었지만 추축국에 가입하지는 않았다. [36] 당시에 프랑스는 점령당했고 미국은 아직 참전하지 않았다. [37] 굳이 분석해보자면 이렇다. 당시 유럽은 이미 영국과 소련만이 남아 있는 상황이었고, 나머지 국가들은 중립을 선언하거나 독일에 의해 모두 점령당한 상태였다. 만일 여기서 소련마저 독일에 의해 점령된다면 사실상 유럽에서 고립되어버린 영국이 스스로 항복하고 나오거나 설령 영국이 끝까지 저항하더라도 소련의 막대한 자원과 인구를 바탕으로 군대를 재정비해 영국을 치면 전유럽의 통일이 완성된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생각의 바탕에는 ' 게르만족은 세계에서 제일 우월한 민족이니 노예 슬라브족들을 상대로 결코 지지 않는다.'라는 히틀러 특유의 게르만 우월주의가 깔려 있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소련군은 겨울전쟁에서 이미 한심한 작태를 보였기 때문에 더욱 기고만장할 수 있었다. 문제는 전선이 양면으로 형성되면서 안 그래도 부족한 군이 둘로 양분되었다는 거고, 부디 소련의 뒤를 쳐주길 바랬던 일본은 이미 소련의 진가를 알고 있었으며, 아리아인은 당연히도 세계에서 제일 우월한 민족이 아니었다. [38] 이미 독일은 한 차례 양면전선을 만들었다가 크게 말아먹은 적이 있었다. 히틀러도 이 때 교훈을 얻고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어 후방을 안정시킨 후 프랑스 침공을 감행해 대박을 터트렸고 소련을 침공할 때도 영국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평화협정을 맺자고 제안하거나 영국 본토 항공전을 벌였으나 실패해 소련 침공 시 양면전선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니 스탈린은 지극히 현실주의적 입장에서 정국을 분석한 것이었고 히틀러가 양면전쟁을 피하려 한다는 것도 파악했지만, 문제는 히틀러가 희대의 광인이었다는 거다. 이미 20여년 전에 대실패한 걸 뻔히 보고도 히틀러는 프랑스에서의 성공으로 과하게 자만한 나머지 1차대전의 교훈을 알고 있음에도 그냥 꼴아박았다. [39] 사실 이것이 스탈린의 큰 단점이기도 했는데, 강철인간이란 별칭답게 기계 같은 사고를 가진 스탈린은 자신의 상대도 기계적이고 냉혹한 판단을 내릴 것이라 생각하고 행동했기에 히틀러의 광기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이후 냉전기에 서방국가들이 자국의 이권을 일부 희생하면서 타국의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행동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40] 사실 히틀러도 양면전쟁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어 양면전쟁을 피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고 양면전선이 형성될 때를 대비해 상대방도 양면전선을 형성하게 해 리스크를 최소화하려 했다. 독소 불가침조약이 그 예시이며, 지구 반대편에 있어 서로 돕기 힘든 일본 제국과 동맹을 맺은 가장 큰 이유가 독일이 양면전쟁을 치를 때 동쪽에서 오는 소련을 양면전선에 빠뜨려 양면전쟁의 리스크를 줄여줄 수 있는 열강이기 때문이다. 소련을 침공하기 전에도 히틀러는 양면전선을 피하기 위해 영국과 평화 협정을 맺자고 제안하거나 영국 본토 항공전을 벌이는 등 갖은 수를 다 썼으나 전부 실패로 돌아가 히틀러는 소련을 침공하려면 양면전선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상태에 빠져버렸다. 거기다가 양면전선의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동맹을 맺은 일본은 이미 앞서 치른 소련과의 국경 분쟁에서 호되게 얻어맞은 이후 소련을 공격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독일이 감히 전쟁을 생각하지도 않았던 미국을 건들여버린다. [41] 일본군 만주사변처럼 일부 과격한 독일 장교들이 히틀러의 승인 없이 자의적 도발을 감행한 것일 뿐일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42] 사실 스탈린도 독일과 서유럽이 서로 전쟁을 벌여 둘 다 만신창이가 되었을 때 독일의 뒤통수를 쳐서 멸망시킨 뒤 그대로 유럽을 어부지리로 공산화할 계책을 고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가 독일한테 6주만에 털리고(...) 히틀러가 먼저 소련의 뒤통수를 갈겨버려 스탈린의 계책은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43] 사실은 육군력이고 나발이고 당시 유럽상에 남아서 독일과 싸우던 국가 자체가 몇 없었다. [44] 그러나 이건 바다를 못건너는 육군에만 해당되는 사항이었고 바다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공군에겐 그딴 거 없이 양면전선이었다. 해군은 어차피 독일이나 소련 수상함대 모두 보잘 것 없었다. 독일은 양질의 공군으로 소련 해군을 충분히 견제했고 독일 잠수함 함대는 대서양에서 활동함으로써 충분히 소련으로 들어가는 미국과 영국의 보급선을 차단할 수 있었다. [45] 핀란드가 나치 독일과 협력은 했지만 나치 독일의 추축국 가입 요구에 핀란드는 거절했다. [46] 이 경우 독일이 다시 연합군을 바다로 몰아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도 있는 모양이지만 결과는 원래의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연합군이 머저리가 아닌 이상에야 소련이 독일과 언제든 한 판 붙으려고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을 것이고, 소련이 독일로 진공하는 것과 발맞춰서 상륙을 개시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연합군 측에서 손실이 좀 더 나왔을 가능성은 크지만 본격적으로 미국의 군수공장 라인이 돌아가면서 확충되는/영국 스스로도 덩케르크 철수 이후 수년의 시간 동안 전시 체제로 찍어낼 물량은 영국이 유럽에 방기하고 철수한 물자의 양 정도는 우습게 쌈싸먹을 정도였기 때문에 고작 그 정도 노획했다고 해서 독일군이 연합군의 상륙을 막았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47] 독일 또한 원래 계획대로라면 1945년에 모든 군수산업 시설이 완공되어서 총력전을 충분히 수행할 환경이 되는데 문제는 히틀러의 장대한 플랜에 없던 폴란드 침공에 영국과 프랑스가 폴란드 편을 들며 독일에 선전포고를 날린 것이다. 이 덕에 실질적으로 나치 독일이 가장 많은 군수물자를 생산한 해는 1944년이다. [48] 즉 스탈린과 히틀러 둘 다 서로 배신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놈이 그놈 [49] 독일은 헝가리와 루마니아를 통해 석유를 공급받고 있어서 굳이 발칸 반도를 칠 이유가 없었고, 실제로 히틀러는 무솔리니가 발칸 반도를 공격했다가 역으로 독일에게 도움을 청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역정을 냈다. [50] 앞서 언급했듯이 스탈린은 몰로토프를 통해 발칸반도에서 소련의 이권을 요구했다. 처음엔 긍정적인 답을 주지 않던 히틀러가 소련이 원했던 튀르키예 이상인 발칸반도에 소련군 주둔지를 제의했으니 스탈린이 좋아할 수밖에. [51] 물론 히틀러는 군사적으로 유능한 인물이 절대 아니었고 그간의 전공은 만슈타인이나 구데리안 등의 명장들의 성과였으나, 당시에는 저 6주 업적 덕에 모든 이들은 물론 히틀러 본인도 히틀러를 군사천재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52] 모두가 알다시피 이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활약한 독일군 장군이 그 유명한 에르빈 롬멜이다. [53] 정확하게 말하면 북아프리카 군단이 완전히 도착할 때까지 공격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지만 롬멜은 선두부대만 이끌고 영국군을 농락해버렸다.(...) [54] 하지만 반대로 이러한 대숙청 소련이 이후에 대규모 반격전을 실행할 힘을 넣어줬다. 제멋대로 움직이며 마치 장교들의 사병화가 되었던 군인들을 확실히 국가의 군대 아래로 넣었고 흔히 붉은 보나파르트로 대표되는 군부내의 군국주의, 독선적 장교들의 해임과 신임장교들의 채용은 소련이 다시 체계를 잡고 공격을 감행할 동기가 되었다. [55] 이미 나폴레옹의 러시아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러시아의 겨울 위력이 입증되었기 때문에, 과거의 선례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여름을 노리는 게 일반적인 전략이다. [56] 주로 투입 인원 및 사상자 규모 기준으로, 육상 전투 중 순위를 매긴 것은 참고해야 한다. 비슷한 시기의 함대 결전은 물론 투입 인원 규모로 따지면 육전보다 훨씬 적겠지만, 투입 자본력의 규모로 따지면 지는 쪽에서 국가의 뿌리가 뒤흔들릴 정도로 육전 이상의 규모인 경우가 많다. [57]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독일이 주력군을 서유럽에 집중했을 때 서방 연합국과 독일 사이에 벌어졌던 지옥도가 1차 세계대전의 서부 전선이다. 그래도 그 때는 프랑스가 굳건히 버티고 있었지만, 2차 세계대전에선 프랑스 본토가 독일에 점령 당하여 바다에서 해안으로 적전 상륙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58] 당시 중화민국은 중국 공산당도 토벌하지 못해 영토도 통일하지 못한 상황인 데다 현재 중국 영토인 티베트, 홍콩을 점유하지 못하고 있었다. [59] 당시 독일의 경제력은 일본의 3배였으며 기술력 역시 상당히 차이가 났다. 까놓고 전차 설계도를 독일이 대놓고 줬는데도 못 만들 정도였다. 독일은 미국 아래 영국, 소련과 자웅을 다투던 국력이었던 반면 일본은 열강 말석인 이탈리아와도 국력 차이가 크지 않았다. [60] 참고로 2022년 기준으로 대한민국 국군의 병력 숫자는 약 60만 명이다. [61] 예외적으로 발터 모델은 명령형 지휘체계를 선호했다. [62] 일례로 끈질기게 독일군에게 저항하다가 붙잡힌 여군 포로 타티야나 바람지나(Tatyana Baramzina)는 독일군에게 잔인하게 구타당하고 산 채로 눈이 파내졌으며 개머리판으로 가격당해 온몸에 골절상을 입었고 총검으로 난도질당한 뒤 대전차소총으로 처형당했다. 이외에도 증언에 따르면 성기와 눈에 총검이 박힌 채 살해당한 여군 포로의 시신을 목격했다는 증언이 있는 등 독일군은 모든 소련군 포로에게 잔인했으나 특히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여군에게 더더욱 잔혹했으며 애초부터 여군 포로를 잡으려 하지 않고 남김없이 학살했다. [63] 예를 들어 벨라루스에서 독일의 파르티잔 토벌전으로 발생한 사망자의 90%가 비무장 민간인이었다. 소련 영화 컴 앤 씨를 보면 독일군이 수행한 무자비한 학살이 잘 드러난다. [64] 소련군은 이러한 보복행위를 상대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자행하여 독일인뿐만 아니라 동유럽인들도 엄청난 피해를 보았으며 심지어 원수를 진 적도 없는 같은 연합군 소속이었던 프랑스군 포로와 벨기에인 인부를 무차별 학살한 사건도 있었다. [65] 태풍 작전 [66] 베사라비아 공세 [67] 프레데리쿠스 I 작전 [68] 브라운슈바이크 작전 [69] 클라우제비츠 작전 [70] 뎀프시해머 작전 [71] 피슈라이허 작전 [72] 제3차 시냐비노 공세 [73] 돈강 중류 공세 [74] 제2차 르제프-시쵸브카 공세 [75] 하리코프 공세 [76] 보로실로프그라드 공세 [77] 제4차 시냐비노 공세 [78] 오룔 공세 [79] 루미안체프 작전 [80] 수보로프 작전 [81] 제5차 시냐비노 공세 [82] 제6차 시냐비노 공세 [83] 노보로시스크-타만 공세 [84] 비보르크-페트로자포츠크 공세 [85] 루마니아 작전 [86] 동지 작전 [87] 라우반 전투 [88] 발라톤 호수 공세 [89] 유럽 전선의 사실상 마지막 전투. [90] 2차 대전 후반 소련이 독일을 역전하며 2위의 경제대국으로 올라선다. [91] 흐루쇼프 때 스탈린 격하 운동을 하며 2,000만이라고 주장하였고, 현재 역사가들은 종전 이후 인구 성장률과 남녀 비율을 살펴 볼 때 최대 4,000만의 인명 손실을 주장하기도 한다. 주요 전장이었던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에는 아직도 사람의 시체로만 이루어진 지층이 존재한다. [92] 그러나 이 자료에 의하면 소련인 사망자는 2,000만명이란다. [93] 중국의 피해는 당시 중국 행정력이 헬게이트라서 정확히 집계되지 않았으며, 최대치는 중국만 해도 3천만 이상이 교전, 학살, 기근으로 인해 죽었다. 모든 국가의 사상자를 최대치로 계산하면 1억 2,000만 명이 2차 세계대전에서 죽었다. 물론 이 숫자는 행정적 과장, 기아와 전염병, 미등록 인구, 그리고 어차피 전쟁이 아니었어도 발생할 수밖에 없는 자연사, 병사 등 비전쟁 요인도 포괄하는 소수설임을 고려해야 하며, 가장 통설은 7,000만 명 안팎으로 파악한다. [94] 러시아에서는 다년생 검사 기준으로 3,700만 명까지 추산하고 있다. [95] 이걸 계산하면 분당 약 10명이 죽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96] 다만 청년 남성의 절대적 부족의 영향으로 베이비붐 수준은 미국에 비해서 그리 강하지는 않았다. 1950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3명대 중반을 기록할 동안 소련은 고작 출산율 3명대 초반 정도를 기록하던 수준이었다. 전쟁 전 1937년의 5명대 출산율, 1940년의 4.4명 출산율도 회복하지 못했다. 다만 전후 소련의 출산율이 1950년부터 1971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미국보다 낮았음에도 인구 증가율 자체는 미국과 그리 차이는 안났는데, 미국이 경제대공황기와 1940년대 초반기까지 약 15년 동안 2명대 초반대 수준에 머물렀기 때문에 이 당시 가임기 여성인구 비율은 소련이 훨씬 더 높았기 때문이었다. [97] 발트 3국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주 민족이 말살 대상인 슬라브족이 아니라 아리아인으로 간주했던 발트족 - 핀족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들은 독일 이전에 자신들을 공격해 강제로 합병한 소련을 침략자로 봤고 소련군을 몰아낸 독일을 해방자로 봤기 때문에 독일 당국에 협력했다. 소련에서 나치 부역자들이 제일 많았던 곳도 이 나라들이었다. 그렇지만 이 나라들도 레벤스라움의 일원이었으므로 말살까지는 아니더라도 탄압과 강제 동화의 칼날은 피할 수가 없었다. [98] 이 수치는 이 문서 맨 위에 있는 수치와 맞지 않는다. 정확한 검토 요망. [99] 독일에게 학살된 유대인 300만 명, 폴란드인 200만 명. 소련에게 학살된 폴란드인 및 독일에게 학살된 비유대 슬라브인(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 제외. [100] 그래서 특히 한국인 관광객들은 동유럽 소련 양식의 도시를 보면서 한국의 아파트 위주의 도시를 연상하곤 한다. 이전 건물들이 모두 파괴된 후 모더니즘에 입각해 건축물을 대량 생산한 역사는 동유럽이나 한국이나 비슷하기 때문에 생겨난 일이다. [101] 예를 들어 전전에 335만에 달하던 폴란드 유대인은 오늘날 많이 잡아도 2만 명에 불과하다. 30만에 달하는 생존자 대부분은 전후 외국으로 이주했다. [102] 데이비드 크로우(David M. Crowe)의 The Holocaust: Roots, History, and Aftermath(2008)를 따름. [103] 1930년 기준. [104] 독소 불가침 조약으로 획득한 발트 3국 및 폴란드 동부, 베사라비아 제외. 중앙아시아 및 카프카스 유대인을 포함함. 소련 서부에 거주하던 유대인 150만 명은 동쪽으로 피난하는데 성공했다. [105] 총계에 나타난 유대인 인구는 약간 중복집계되거나 과장되었다. 1938년 헝가리 유대인은 40만명이지만(유대인 기독교도 제외) 1941년까지 이웃국가들의 영토를 병합하는 과정에서 32만명 증가했다. 폴란드 유대인은 집계 기준에 따라 330만 명으로 줄어들기도 한다. 이것을 감안하면 전쟁 전 동유럽 유대인은 최소 800만에 달한다고 볼 수 있다. [106] 오늘날 동유럽으로 간주되는 독일의 오데르-나이세 선 이동지역의 유대인은 포함되지 않았다. 독일 유대인은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자 대거 이주하여 50만 명에서 1939년 20만 명까지 줄어들었다. 그 중 18만 명이 홀로코스트에서 학살당했다. [107] 위의 총계에 나타난 유대인 인구 중 중복집계되거나 약간 과장된 유대인 50만명과 소련군을 따라 동쪽으로 피난한 유대인 150만 명을 제외함. [108] 바비야르 학살은 수많은 학살 중 하나일 뿐이다. 이외에도 파르티잔이나 파르티잔으로 의심되는 주민들도 수십만이나 학살당했다. [109] 1948년 프랑스령 알제리에서 출생한지 몇달 후 유럽으로 이주한 세파르딤 유대인이다. 1970년대 프랑스 신철학자(Nouveaux Philosophes)들의 기수로 유명하다. 현실참여적 지식인으로 유명하며 동시에 비슷한 유형의 지식인이 듣는 욕도 먹는 논쟁적 인물이다(...) [110] 살러시 페렌츠 화살십자당 정권. [111] 벨라루스의 백루테니아인 보조경찰, 폴란드의 청색 경찰. [112] 이 점은 미국 더글러스 맥아더와 비슷하다. 주코프와 마찬가지로 맥아더도 성격이 매우 오만했으며 정치적 야심을 의심받았고, 문민통제를 거스르려 했기에 정치계에서 견제가 심했다. [113] 그래서 폴란드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국토가 전반적으로 서쪽으로 당겨졌다. 또한 기존에는 비교적 서쪽에 치우쳐 있던 수도 바르샤바가 졸지에 동쪽으로 치우친 곳에 위치하게 되었다. [114] 나치 독일의 로켓 기술, 시설, 인력을 인수한 소련이 이를 테스트하는 과정에서 큰 소동이 벌어지게 된다. 유령 로켓 참조. [115] 단, 불가리아는 본인들의 의지와 전혀 관련 없이 반강제적으로 독일 편에 선 거고, 핀란드는 애초에 추축국이 아니라서 조금 애매한 측면이 있다. 자세한 건 추축국 문서 참조. [116] 핀란드는 추축국이 아니라 공동교전국이다. [117]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사이 국경의 작은 지역으로, 역사적으로 주민 대부분은 폴란드인들이 다수였지만 지배 세력은 체코-독일계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양측이 서로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영토 분쟁이 발생했다. [118] 슈문트 대장은 국방군 내에서 나치즘 사상에 취해 있던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다. 1944년의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당시 폭탄 바로 앞에 있었고, 중상을 입어 사망했다. [119]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보면 포로로 잡힌 독일군의 내장과 갈비뼈를 볼 때까지 고문하고 죽였다는 증언들이 있으며, 나치 병사들의 도청 기록에는 전쟁 초반에 포로로 잡힌 독일군들이 푸줏간에서 도살되거나 혓바닥이 못에 박힌 채 잔혹하게 처형된 사례들이 다수 보고되었다. 이를 안 독일군은 똑같이 소련군이나 빨치산 포로들을 산 채로 눈알을 파내고 성기를 훼손하고 배를 갈라 온갖 잡동사니를 쑤셔넣거나 불태워죽이는 등의 잔악 행위를 저질렀다. 그 밖에도 독일군이 소련군 야전 병원을 접수한 후 미처 피신하지 못한 소련군 부상병들을 끌어내어 잔인하게 오체분시하여 죽이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훼손된 시체를 무더기로 쌓아놓은 채 떠난 적도 있었고 이후 그 광경을 마주한 소련군이 경악하며 독일군을 포로로 잡지 않고 모조리 죽이겠다고 분노에 떨었다는 증언도 나온다. 이와 같이 극에 달한 증오와 복수심으로 일련의 잔악 행위를 양쪽에서 계속 되로 주고 말로 받는 참혹한 인외마경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120] 물론 독소전쟁에서는 포로 포획이 이루어질 시 다수의 인원이 한꺼번에 포획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항상 이런 개인적인 보복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의외로 소련 공산당의 공식지침은 "전후 재건을 위한 노동력 확충을 위해 최대한 많은 포로를 산채로 붙잡을 것"이었므로 비록 복수심에 불타는 소련군에 의해 이러한 지침이 항상 지켜지지는 않았으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어마어마한 수의 독일군 포로들이 붙잡혔다. 그러나 포로들에 대한 대우는 이 문서에 언급된 것처럼 최악이었고 환경도 매우 열악했으며 대부분의 포로가 수감중 사망했다. 따라서 독소전쟁에서의 포로 학살 행위 대부분은 수감 중의 학대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121] 영국과 미국도 반독 정서의 결이 달랐는데 영국은 소련과 같이 한 세대가 통으로 사라진 수준은 아니었지만 런던을 비롯한 본토가 루프트바페의 공습을 받으며 대전 초기 상당한 민간인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반독 정서가 상당했다. 반면 미국은 물론 일선 병사들이야 독일군과 교전하고 때로는 유대인 수용소와 같은 악질적인 전쟁범죄를 목격하였기 때문에 반독 정서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U보트가 상선을 격침한 정도 외에는 독일에 의한 본토 위협 및 민간인 피해가 전무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정도가 약했다. 따라서 드레스덴 폭격을 비롯한 독일 본토 무차별 공습 당시 영국인들의 다수는 이를 정당하게 여겼으나 미국인들은 자국군의 민간인 폭격에 상당히 반감을 느꼈다. 반면 일본은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 본토의 민간인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준 만큼 미국인들은 독일 본토 폭격과 달리 도쿄 대공습을 비롯한 일본 본토 폭격에 대해서는 감정적으로 찬성하는 여론이 높았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영국도 소련과 같이 궤멸적인 피해를 입은 정도는 아니었으며 영국군이 소련군에 비해 기강이 잡힌 민주주의 국가의 군대였기 때문에 점령지에서의 뚜렷한 악행은 없었다. [122] 물론 소련이 착해서만은 아니고 아무리 적국이었다 하더라도 훗날 위성국으로 만들 필요가 있는 동부 독일인들에게 지나친 증오심을 심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련군의 보복 행위가 극심했던 나머지 많은 동독인들이 미국, 영국, 프랑스의 점령지로 탈출하였다. [123] 2003년 독일 영화 베른의 기적에서 주인공 꼬마 아버지도 이때 징집되어 소련 전선에 갔다가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에서 10년 동안 강제노동을 하고 겨우 살아돌아왔지만 광부였던 아버지는 10년 동안의 트라우마로 독일에서 광부 일을 하려고 하자 발작을 일으켜 일도 그만두어야 했다. [124] 최대 추정치는 150만 명 [125] 희생자가 대충 500-600만 선으로 윤곽이라도 잡힌 홀로코스트와 달리 포라이모스의 사망자가 30만에서 150만까지 널뛰기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126] 단, 후일 재조사에 따르면 네멜스도르프라고 선전된 학살 사진 상당수는 다른 동프로이센 마을에서 촬영됐다고 한다. [127] 출처 : Bellamy, Chris Absolute War: Soviet Russia in the Second World War. Macmillan, 2007. ISBN 978-0-375-41086-4 p.1~7 [128]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저 '마지막 목격자들' [129] 세계대전 이전에도 소련은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였지만 전쟁 이후 아시아와 유럽 모두에서 영토를 더욱 확장하고(원래 만주도 전쟁 직후에는 소련이 점령했으나 이후 중국에 반환했다. 다만 다롄은 1950년 까지 계속 소련이 점유하고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여러 위성 국가들을 확보하며 명실상부 초강대국으로 성장했다. [130] 단, 소련군이 승기를 잡을 수 있었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미국이 지원한 막대한 랜드리스였으며, 이는 훗날 니키타 흐루쇼프도 인정한 바 있다. [131] 독소전쟁의 인식이 특히 한국에서 영 안 좋을 수밖에 없는 게, 일본 제국의 동맹인 추축국 나치 독일과 남북분단을 획책해 북한의 독재정권을 탄생시킨 공산권의 수장 소련 사이의 전쟁이었고 또한 양국의 우두머리 히틀러와 스탈린 모두 인간쓰레기 학살자였기 때문이다. 괜히 '악과 악의 대결'이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독소전은 헝가리, 루마니아, 핀란드, 이탈리아 등 제2선급으로 소련에 타격을 준 나라가 있을 정도로 단순히 독일 VS 소련으로만 나눌 수는 없는 노릇이다. 헝가리, 루마니아는 추축국에 가입하여 소련에서 나치 독일 못지 않은 학살을 했다. [132] 소련이 자주 승리를 얻어낸 대전 후반부에도 소련의 손실은 연패를 거듭한 독일보다도 오히려 많은 편이였다. 전쟁 초반에 독일군과 소련군의 교환비는 무려 20 : 1이었다. 소련군은 바그라티온 작전 이후에 가서야 겨우 1.5 : 1 남짓으로 교환비를 좁힌다. 하지만 소련의 희생이 더 적었던 대전투는 바그라티온 작전과 베를린 전투밖에 없다. 다만 넷상에는 1944년에도 소련군의 사망자가 독일군 사망자보다 2배나 많았다는 주장이 있으나 해당 주장은 전사자뿐만 아니라 포로 사망자까지 포함한 통계를 근거로 한 주장으로, 포로를 제외한 전사자 수만 비교하면 1944년부터는 독일이 방어자 입장이었는데도 소련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바그라티온 작전부터는 독일이 전투 사상자 교전비로도 경합~경합우세 수준이었을 뿐 확실한 우세를 점하지 못했고, 독일군도 대규모로 항복하기 시작하면서 포로까지 포함한 회복할 수 없는 병력 손실비에서는 소련보다 오히려 열세해졌다. [133] 물론 미국이 소련과의 직접 충돌을 극도로 경계한 것과 별개로 2차 대전 말기에 특히 친소 성향의 루스벨트가 급사하고 반공 성향의 트루먼이 집권하면서 미소 간의 관계도 급변하게 되며 이는 2차 대전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냉전에 돌입하는 원인이 되었다. [134] 정말 골때리게도 독소전쟁의 참전용사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휘말려 사망한 사례가 있으며, 우크라이나에 거주 중이던 또 다른 독소전쟁 참전용사는 러시아군의 포격으로 부모님 대부터 살아온 집이 다 박살나 삶의 터전을 잃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소련 시절 수훈한 훈장과 메달들을 모두 패용하고 인터뷰에 응했으며, 도대체 누구의 조국을 지키기 위한 전쟁인지, 현 상황에 대해 크게 슬프고 부끄러움을 느꼈으며, 블라디미르 푸틴의 집권 후 모든 것이 최악이 되어버렸다고 답했다. [135] 그런데 대한민국의 기성세대 사이에는 냉전기의 잘못된 교육 탓에 "독소전은 러시아가 독일을 두려워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잘못된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러시아인이 들으면 실소를 금치 못할 듯. [136] 사실 한국이 오랫동안 강력한 반공주의 국가였던 데다 철의 장막으로 인해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에 대해 1990년 수교 이전까지는 거의 악마시했고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독소전쟁에 대해서도 잘못 알려진 편견들이 매우 많다. 심지어 나치 독일의 수도인 베를린을 함락시킨 군대가 소련군이 아니라 연합군이라고 두루뭉실하게 알고 있거나 아니면 아예 2차 대전 때 소련이 아예 참전하지 않았다는 터무니없는 인식조차 있을 정도. 물론 현재 대한민국의 교육과정 상 세계사 교육에서는 동부전선을 다루고 있고, 독소전쟁에서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시험 단골 소재로 등장하기 때문에 예전보다는 모르는 사람이 많이 줄긴 했다. 한편으로 이는 단순히 반공 교육의 영향 때문은 아니고 미군 중심의 할리우드 역사관에 익숙한 탓도 있는데, 대체적으로 국내에서는 한소 수교 이전까지는 소련의 매체들이 국내에 들어올 수 없었고, 현대까지도 개봉하는 세계 대전 배경의 영화들은 대부분 미군 중심의 서부전선에서의 활약을 많이 다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동부전선에 대한 사실들이 많이 묻힌 감이 있다. [137] 다만 모스크바에서는 10월 혁명 기념일이 아니라 1941년의 모스크바 전투 기념일로 기념행진을 하는 경우는 있다. [138] 예를 들어 소련군은 일본 관동군이 1,500대의 전차를 보유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1,500대의 전차 대부분은 소련군의 전차들이랑 맞싸우기 힘든 중형전차라고 부르기 힘든 경전차들이었다. [139] 이 때문에 소련군을 중심으로 독소전쟁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냉전 당시 서방 세계의 독소전 연구를 패자의 손으로 쓴 역사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140] 이 공적으로 할더는 미국 훈장까지 받았다! [141] 육군사관학교가 펴낸 세계전쟁사가 이런 기술을 하고 있다. 아마도 본이 되었을만한 영문 자료에서 따온 듯. [142] 바르바로사 작전 독일군 부대는 300만이 투입되었고, 소련군은 400만이 있었지만, 그것이 모두 분산되어 있었다. 특히 최전선에 배치된 290만은 독일군에 수적으로 적었을 뿐만 아니라, 방어 진지에 대대 단위로 분산되어 있어서 곧 날카롭게 동진하기 시작한 독일군 부대들에게 각개 격파당했다. [143] 아주 예외적으로 독일군이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소련군을 격파한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이나 르제프 전투같은 사례들이 있긴 하지만, 이러한 사례들이 매번 벌어졌다고 보긴 힘들다. [144] 류한수, “8월의 폭풍”에서 “사막의 폭풍”으로:냉전 시기 미육군의 소련군 작전술 이론의 연구와 수용 과정,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17년 [145] 1943년 초에 급격하게 커진 군대의 규모에 맞게 새로운 군복과 계급장을 도입. 기존에는 계급장이 칼라 끝에 있었으나, 어깨에 견장을 다는 것으로 변경. [146] 무장친위대 소속 오스카 디를레방어 여단을 모티프로 삼은 듯 [147] 에스토니아 1사단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리기도 했으며 제3 SS 의용 에스토니아 여단을 기반으로 확대 개편한 것이다. [148] 에스토니아 동부에서 지원 혹은 강제 징집된 에스토니아인을 근간으로 편성되었다. 산하에 제7 '에스토니아' 소총병 사단과 제249 '에스토니아' 소총병 사단을 두었으며, 이들은 전후 각각 제118근위소총병 사단과 제122근위소총병 사단으로 발전했다. 군단 자체도 마찬가지로 '근위'와 에스토니아의 수도인 '탈린'의 칭호를 수여받아 제41 '에스토니아 탈린' 근위소총병 군단으로 개편되었다. [149] 2001년에 출판되었다. 당시에는 깨끗한 국방군 이론이 주류였을 때였다. [150] '러시아를 침공하다가 격퇴로 전사했던 유령 기사단'을 부활시켜 써먹으려는 SS 친위대의 음모와, 이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소련군 비밀기관의 소녀인 나댜의 이야기를 다룬다. 트레일러 영상을 보면 독일군의 이족 보행병기도 나오는 등 여러 편을 기획한 모양인데, 1편의 흥행 성적이 나빠서인지 유령 기사단을 다룬 1편이 나온 지 3년이 지난 2015년 현재까지 후속작 소식은 없다. 사실 스토리나 작화 등은 괜찮은데, 다큐멘터리처럼 실사 인터뷰 내용 등을 집어넣는 등 연출이 나쁘다. [151] 수송 트럭을 타고 가다가 소련 공군의 기총 소사로 바로 옆에 탄 친구를 잃는다든가 분대원이 너무 굶주려서 소련군이 먹다가 남기고 간 삶은 감자를 먹느라 소련군을 놓치기도 한다. 전선에서 겪는 질병은 덤이다. [152] 그에 더해서 영국은 동부전선에 25-30개 사단씩이나 되는 엄청난 병력을 파병할 여건이 되지도 않았다. [153]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이 패배한 직후, 마지막 카드인 1,000만 징병 직전 군중들을 다시 선동하기 위해서 베를린 스포츠 궁전에서 행한 연설. 괴벨스는 이 연설로 인해 권력이 더 강화되었다고 한다.(출처:안토니 비버,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 [154]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 제2차 세계 대전 4부 [155] 브레스트는 당시 폴란드 제2공화국의 도시였으나 독일의 폴란드 침공 당시 독일의 침공에 호응해 동쪽에서 쳐들어온 소련군에게 점령당해 이곳을 기준으로 양국은 폴란드를 동서로 분할했다. 분할선의 기준점이 된 이상 이곳은 당연히 소련의 가장 최전방에 위치한 도시가 되었고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독일군의 첫 번째 희생양이 되었다. 요새는 1주일 간 저항하다 결국 함락당했고 요새 내 병력 9천여 명 중 2천여 명이 전사했다. 이 문구를 쓴 병사가 생존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정황상 사망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문구대로 4년 후 이 병사의 조국 조국을 유린한 침략자들에게 복수하는 데 성공한다. [156] 지나토프 티메랸 하불로비치라는 병사가 썼다는 설도 있는데, 해당 병사는 연대사관학교(44 소총사단 42소총연대) 생도였던 타타르인 출신 병사였다. 방어전 첫날 부상으로 포로로 잡혔으나, 두어번의 탈출시도를 감행하여 2차에 성공하고 종전까지 소속부대에서 전쟁 초기와 같은 직급인 일반사병으로 복무했다. 이후 브레스트 요새 방어전에 참여한 공훈을 인정받아 조국전쟁 2등급 훈장을 수여받는다. 소련 붕괴 이후 참전용사의 대우가 차가워진 것에 모욕감을 느끼고, 1992년 9월에 77세의 나이로 브레스트에서 열차에 투신자살한다. 출처는 '러시아 연방 공산당 <체계적인 시선> No.5호, <프라브다>지 사이트, 1997년 [157] 소련의 시인 콘스탄틴 시모노프의 "날 기다려줘요". 번역은 올랜도 파이지스의 "속삭이는 사회" 참고. [158] 출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Russia's War, 리처드 오버리 저, 류한수 역) [159] 단 해당 기사에서 소련이 나치 독일 전투기의 70%를 파괴했다는 등의 의심스러운 서술이 있으니 주의. 실제로 소련이 파괴한 비율은 높게 잡아도 20%다. [160] 유리 레비탄은 독일의 침공 사실을 알리며 독소전쟁 개전 선언을 알렸던 바로 그 당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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