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26 01:32:59

페샤와르

파일:gcPgxOV.jpg 파일:페샤와르 파키스탄.jpg
두라니 왕조의 황궁으로 쓰이던 발라 히사르 성채 시내 중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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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에 세워진 이슬라미아 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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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샤와르 박물관 내부 페샤와르의 구시가지 모습
1. 개요2. 역사
2.1. 고대2.2. 중세2.3. 혼란과 번영2.4. 두라니 제국2.5. 아프간-시크 전쟁2.6. 영국의 지배2.7. 가파르 칸 (바차 칸)2.8. 현대
3. 기타4. 갤러리
4.1. 세티 모할라4.2. 고르카트리4.3. 대학들4.4. 길거리

1. 개요

우르두어: پشاور‬‎
파슈토어: پېښور‎
영어: Peshawar

파키스탄 제6의 도시로, 인구는 약 200만명이다. 카이베르파크툰크와 주의 주도이며, 한때 연방 직할 부족 지역의 주도이기도 했다. 아프간의 주민족 파슈툰족의 주요 도시로써 아프가니스탄 국경에서 40km 정도밖에 떨어져있지 않다. 역사적으로는 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를 연결하는 카이베르 고개 길목에 위치하여 쿠샨 왕조, 두라니 왕조 등의 수도로써 번영을 누렸던 도시이기도 하다. 현대에는 아프간 전쟁 이후 50만이 넘는 파슈툰 난민이 유입되어 인구가 급증하였고 파키스탄 내 중국 자본이 투자한 4대 경제 특구 중 하나가 설치되어 가구, 식품, 대리석 등의 2차 산업이 발달하였다.

서쪽의 카이베르 고개와 동쪽의 카불 강 사이의 평원에 자리한 시가지는 중발라 히사르를 중심으로 동남쪽의 구도심과 서북쪽의 신도심으로 나뉜다. 구도심은 복잡한 골목과 바자르 (시장)으로 얽혀 있고, 모하바트 칸 모스크와 고르카트리 카라반사라이 등의 유적이 있다. 서부 페샤와르의 신도심은 일명 대학도시로 유명하다. 1912년에 세워진 이슬라미아 대학을 시작으로 페샤와르 대학, 아바스얀 대학, 간다라 대학, 쿠루투바 대학, 카이베르 의대, 사르하드 과기대 등 7개의 공립대와 10개의 사립대학이 있다. 2005년에는 여성의 고등 교육을 위한 샤히드 베나지르 부토 여대가 개교하였다.

2. 역사

카슈미르에서 서북쪽으로 산을 넘어 한 달을 가면 건타라국에 이른다. 왕과 군사는 모두 돌궐(에프탈?)인이고 토착민은 소그드인과 같으며 바라문도 있다. (카슈미르와 다르게) 포도는 없고 사탕수수는 있다. 왕은 코끼리 5마리를 가지고 있으며, 양과 말은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낙타와 노새, 당나귀 등도 많다.

혜초 왕오천축국전

2.1. 고대

파일:페샤와르 파키스탄 카니슈카.jpg 파일:파키스탄 페샤와르 카니슈카.jpg
카니슈카 사리함 카니슈카 스투파 (샤 지 키 데리) 기단부의 부조. 1909년 발굴 당시 사진이다

페샤와르는 기원전 5세기 무렵 산스크리트어의 푸루샤푸라라는 이름으로 세워졌었는데, 오래된 역사만큼 많은 제국과 왕국의 지배를 거쳐왔다. 다만 그 유구한 역사 동안 대도시로 번영했음에도 왕국의 단일 수도가 되지는 못하였고 보통 계절 수도 정도로 쓰였다. 기원전 326년 경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점령당해 마케도니아 제국의 일부가 되었는데, 대왕의 사후 셀레우코스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때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간다라 양식이 발달하기도 한다. 셀레우코스 조를 격파하고 일대를 장악한 마우리아 제국은 푸루샤푸라에서 수도 파탈리푸트라 ( 파트나)까지 이어지는 왕의 길을 놓았고, 이는 현대의 그랜드 트렁크 로드로 이어지며 페샤와르 협곡은 2천년간 간다라 지방의 교통 중심지로 남았다.

마우리아 조가 쇠퇴하자, 기원전 190년 박트리아에 이어 인도-그리스 왕국이 지배하였다. 다시 서기 1세기에는 수레나스 가문의 인도-파르티아 왕국령이 되었고, 그 초대 군주인 곤도파레스는 46년에 타크 이 바티 사원을 건립하였다. 다만 반세기 후에는 쿠샨 제국의 초대 군주 쿠줄라 카드피세스가 점령하였다. 그의 손자인 카니슈카 1세의 치세인 128년경에는 여름 수도 카피사 (바그람)와 함께 겨울 수도가 되었고, 전자보다 중요하게 여겨졌다. 당시 푸루샤푸라의 인구는 12만에 이르렀고, 세계 10대 도시들 중 하나였다고 한다. 독실한 불교도였던 카니슈카 대왕은 시내에 카니슈카 마하비하라 사원을 세웠고, 사후에는 역대 최대 규모의 불탑 중 하나인 카니슈카 스투파가 건립되었다.

다만 232년 바수데바 1세의 사후 쿠샨 조는 쇠퇴하였고, 260년경 페샤와르 협곡을 침공한 사산 제국 샤푸르 1세는 마히비하라 사원과 카니슈카 스투파를 비롯한 불교 건축물을 대대적으로 파괴하였다. 그후 카니슈카 3세가 일대를 수복했으나 점령당하고 또 점령당하는 기구한 운명은 끝나지 않아 5세기 초엽, 이번에는 백흉노 (에프탈)가 침공하여 재건되던 도시를 다시 파괴하였다. 연이은 전란으로 아프간 방면으로의 교역로가 막히며 푸루샤푸라를 비롯한 간다라 지역은 경제적으로 크게 쇠퇴하였다. 다만 카니슈카 스투파는 에프탈 군주에 의해 석조 기단 위에 목조로 재건되어 5세기 중국의 구법승 법현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탑이라 칭송되었다. 법현에 의하면 그 높이는 무려 170m였다고 하나 조금 과장된 것으로 여겨진다.

2.2. 중세

520년경 간다라를 방문한 구법승 송운은 에프탈이 카피사의 군주와 대립하고 있다 저술하였다. 한세기 지나 630년, 카피사의 승리 이후 푸루샤푸라를 방문한 현장은 위대한 도시와 불교 기념물들이 유적으로 변한 것을 개탄하였다. 그가 저술한 대당서역기에 의하면 당시 폐허가 된 도시에는 오직 1천 가구만이 거주하였고 소수의 승려들이 사원의 유적에 남았다고 한다. 한편 푸루샤푸라는 중국측 기록에서 불루사 (弗樓沙) 혹은 포루사포루 (布路沙布邏)로 비교적 정확히 표기되었다. 7세기 중반 카불의 힌두 샤히가 일대를 지배하였고, 10세기 아랍의 지리가 알 마수디는 파라샤와르라 기록하였다. 이는 축약되어 페샤와르가 되었다. 한편 그 무렵부터 딜라자크 파슈툰인들이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987년 가즈니 왕조의 세북테킨이 카불 협곡을 장악한 후 힌두 샤히는 페샤와르로 천도하였는데, 가즈니의 술탄 마흐무드는 1001년 남하하여 페샤와르 전투에서 힌두 샤히의 자야팔라를 격파하고 일대를 정복하였다. 그후 마흐무드는 페샤와르를 지나 16차례 인도를 원정하여 이슬람 정복 북인도 전역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다만 가즈니 조의 지배에도 이슬람화는 천천히 진행되었고, 12세기까지만 해도 페샤와르는 힌두 나트 판티 요기들의 거점으로써 그들은 이슬람 신비주의인 수피즘에 영향을 주었다. 1179년경 구르 제국 무함마드 고리가 페샤와르를 점령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1186년 라호르까지 함락하여 가즈나 조를 멸하였다. 다만 구르 제국은 곧 호라즘 왕조에 멸망하였고, 후자는 다시 몽골 제국에게 정복되었다.

2.3. 혼란과 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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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0년에 세워진 모하바트 칸 모스크

13세기 전반 아프간 지역의 도시들과 함께 몽골에 의해 파괴되었던 도시는 14세기 들어 델리 술탄 왕조에 의해 재건되었다. 15-16세기에는 파슈툰 인들이 대거 유입되어 현재까지 인구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1515년에는 파슈툰 부족들 중 고랴켈과 카쉬켈이 페샤와르 인근 마르단에서 기존 딜라자크 부족을 인더스 동안으로 몰아내었다. 1526년 바부르 로디 왕조를 격파하며 일대는 무굴 제국령이 되었다. 바부르는 도시를 베그람이라 명명하였고 옛 성채를 재건하여 발라 히사르라 불렀다. 또한 그는 이곳을 바탕으로 인근 파슈툰 부족들을 공격해 복속시켰다. 그후 16세기 중반 무굴 제국 하에 교역이 안정화되며 일대는 경제적으로 번영하였다. 1586년 발라 히사르의 화재 시에 낙타 천마리 분량의 물품이 소실되었던 것이 이를 반증한다.

같은해 바야지드 피르 로샨이 파슈툰 인들을 조직하여 벌인 로샤니 반란 시에 도시는 1587년까지 포위당하였고, 이를 진압한 악바르 대제는 베그람을 다시 페샤와르로 명명하였다. 그후 일대는 안정을 되찾았고, 여러 건축 사업이 이어졌다. 17세기 샤 자한의 치세에 카불 초독을 지낸 모하바트 칸 빈 알리 마르단 칸은 페샤와르에 샬리마르 정원에 이어 1630년에는 자신의 이름을 붙힌 모스크를 세웠다. 1667년 이번에는 유수프자이 부족이 봉기하여 인더스 동안의 아톡에서 무굴 군과 맞섰고, 1672년에는 아프리디 부족이 봉기하여 카이베르 고개의 무굴 주둔군을 학살하고 통행을 막아버렸다. 분노한 아우랑제브 황제는 1674년 데칸 전선에서 돌아와 친히 반란을 진압하고 일대를 평정하였다.

2.4. 두라니 제국

1707년 아우랑제브가 사망하자 카불과 페샤와르의 총독이던 아들 바하두르 샤 1세가 계승하였으나 제국의 쇠퇴를 막지 못하였다. 1738년 11월 18일에는 호타키 왕조를 멸한 나디르 샤가 무굴 총독 나와브 나시르 칸을 축출하고 페샤와르를 장악하여 한 5세기 만에 이란 방면 세력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747년 나디르 샤가 사망하자 페샤와르는 아프간을 중심으로 자립한 아흐마드 샤의 두라니 제국령이 되었다. 아흐마드 샤의 후계자인 티무르 샤는 쿠샨 조와 바부르처럼 카불을 여름 수도, 페샤와르를 겨울 수도로 삼는 양도 체제를 부활시켰다. 18세기 후반 재차 안정기를 맞은 페샤와르는 북쪽의 부하라와 인도 대륙을 잇는 무역 도시로써 북인도에 말린 과일을 제공하고 향신료와 비단을 거래하며 번영하였다. 1800년을 전후로 현재는 도심 공원인 와지르 바그 정원이 세워졌고, 영국인 탐험가 윌리엄 무르크로프트가 방문하기도 하였다.

반세기 가량 안정을 누리던 페샤와르는 티무르 샤의 사후 그의 아들들 간에 벌어진 내분으로 재차 혼란을 겪었다. 1801년에 즉위한 마흐무드 샤는 이복동생 샤 슈자로부터 페샤와르를 빼앗았으나 후자는 1803년 도시를 되찾고 되려 전자를 발라 히사르에 감금하였다. 그러나 마흐무드 샤는 발라 히사르에서 탈출하여 1809년 바라크자이 샤 슈자를 축출하고 복위하였다. 한편 그해 아직 샤 슈자가 집권할 무렵 영국은 그의 페샤와르 궁정에 사신을 보내며 아프간과의 첫 국교를 수립하였다. 바라크자이 숙청에 나섰다가 오히려 그들의 반란에 압도당한 마흐무드 샤는 1818년 헤라트를 제외한 영토를 상실하였다. 그리고 페샤와르에선 바라크자이 부족의 총독 도스트 무함마드 칸이 자립하였다.

2.5. 아프간-시크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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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 자한의 딸 자한 아라 베굼이 옛 궁전을 카라반사라이로 개조, 사라이 자하나바드라 명명, 1838년 파올로의 총독궁이 됨

두라니 조가 쇠퇴하던 1813년, 무굴 제국의 쇠퇴 후 펀자브를 장악한 시크 왕국은 아프간 군을 격파하고 페샤와르의 관문인 아톡을 점령하였다. 1818년 시크 군이 북상하자 페샤와르의 도스트 무함마드 칸은 연공 납부를 약속하며 그에 복속하였다. 그러나 1822년 도스트 무함마드 칸의 형 아젬 칸이 도시를 점령하고 시크 왕국에 대한 복속을 철회하자 마하라자 란지트 싱은 2만 3천 대군을 이끌고 북상하였다. 이에 아젬 칸은 4만 대군과 함께 남하하였고, 1823년 4월 14일 페샤와르 동쪽의 노세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양측은 격돌하였다. 결과는 화력을 앞세운 시크 군의 대승이었고, 상심한 아젬 칸은 얼마 후 사망한다. 란지트 싱은 페샤와르를 점령한 후 두라니 조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궁전 등의 시가지를 파괴함은 물론 농경지까지 초토화시켰다. 또한 그는 카이베르 고개를 봉쇄하여 아프간과의 교류를 차단하였고, 상인들에게 과한 벌금을 물렸다.

이로써 페샤와르는 13세기 이래 최악의 시기를 보냈고, 도시를 방문한 스코트인 탐험가 알렉산더 번즈는 경제력의 쇠락을 기록하였다. 한편 1826년 아프간을 통일한 도스트 무함마드 칸은 폐허가 된 도시를 수복했으나 1834년 샤 슈자의 두라니 부흥 운동에 맞서던 중 란지트 싱에게 재차 상실하였다. 후자는 이탈리아인 신하 파올로 아비타빌레를 페샤와르 총독으로 봉하였고, 그는 적들을 모하바트 칸 모스크의 미나렛에서 떨어뜨려 죽이는 등 공포 정치를 행하였다. 1835년 도스트 무함마드 칸은 재차 페샤와르 수복을 시도했으나 그 서쪽 관문인 잠루드 요새 전투에서 격퇴되었다. 그에 대한 복수로 란지트 싱은 1838년 영국 동인도 회사의 아프간 원정을 승인, 영국군은 파올로 총독의 지원과 함께 카불을 점령하고 샤 슈자를 복위시켰다.

2.6. 영국의 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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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현지 자본가들이 세운 이슬라미아 대학

10여년간 이어진 파올로 아비타빌레의 지배는 페샤와르 주민들에게 악몽과도 같았다. 현지인들에게 '아부 타벨라'로 불린 그는 현재까지도 아이들의 울음을 뚝 그치게 하는 공포의 전설로 남아있다. 시크 지배기에 페샤와르에는 노세라 전투의 승장 하리 싱 날와가 시크교 사원인 구르드와라를 세웠고, 발라 히사르가 재건되었다. 하지만 시크 왕국의 전성기는 반세기도 되지 않아 끝났다. 1837년 하리 싱 날와, 1838년 마하라자 란지트 싱이 차례대로 사망한 후 시크 왕국은 제위 계승 분쟁에서 촉발된 내전으로 치닫았다. 1842년 영국의 2차 아프간 원정을 도운 파올로 총독은 이듬해 내전이 심화되자 막대한 부를 챙겨 고향 나폴리로 돌아가 여생을 누리다 7년 후 죽는다. 한편 1845년 펀자브의 국경 분쟁으로 인해 촉발된 두 차례의 영국-시크 전쟁의 결과 1849년 페샤와르는 영국령이 되었다. 시크 왕국의 폭정에서 벗어난 주민들은 영국의 지배 하에 다시 안정을 누리며 순응하였다.

따라서 1857년 세포이 항쟁 시에도 4천의 현지인 수비대는 유혈 충돌 없이 순순히 무장해제되었다. 1869년 영국 당국은 기존 도시의 서쪽에 군대 주둔지를 세워 대아프간 전초기지로 활용하였다. 동시에 시크 지배기에 훼손된 모하바트 칸 모스크의 재건과 인도 주요부와의 철도 건설이 이루어졌다. 한편 과거 세포이 항쟁 당시 영국은 아프간에게 개입하지 않는다면 페샤와르를 할양하겠다 제안하기도 하였으나 아프간 측이 무력 침공을 택하며 무산되었고, 결국 1893년에는 인도 제국의 외무상 모티머 듀런드가 주도한 듀랜드 라인이 그어져 페샤와르와 카이베르 고개는 아프간과 완전히 분리되었다. 한편 1887년 빅토리아 여왕의 쥬빌리 (즉위 60주년)을 기념하여 페샤와르에는 커닝험 시계탑이 세워졌고, 1906년에는 그녀를 기리는 빅토리아 홀이 세워져 현재 페샤와르 박물관으로 활용 중이다. 그외에 1901년 에드워즈 칼리지, 1913년의 이슬라미아 칼리지 등의 고등 교육 기관이 세워졌다.

2.7. 가파르 칸 (바차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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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둘 가파르 칸. 별명인 바차 칸은 '족장들의 왕'이란 뜻이다 / 1938년 페샤와르의 독립 시위에 동참한 간디와 가파르 칸

1901년 페샤와르는 펀자브에서 분리되어 신설된 북서 변경주의 주도가 되었고, 높은 학문 수준을 자랑하였다. 영국의 지배에 협조하던 페샤와르 역시 20세기 들어 다른 인도 지역들처럼 비폭력 저항 운동이 전파되었다. 그 지도자이자 마하트마 간디의 제자였던 가파르 칸 (바차 칸)은 1920년경 칼리파트 운동[1]을 거쳐 1929년 독립 운동 단체인 쿠다이 키드맛가르 (신의 종복들)를 창설하여 10만의 회원을 모았다. 1930년 4월 23일, 그는 지지자들과 함께 폐샤와르 구도심의 키사 카와니 바자르에서 차별법에 저항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에 영국군이 발포하며 수백명이 사상하였고, 당시 발포를 거부한 찬드라 싱 가르왈리 휘하의 소총 부대는 후일 군사 재판을 받고 종신형 등의 처벌을 받았다. 다만 찬드라 싱은 후일 사건 수습에 나선 조지 6세에 의해 복권되어 기사 서훈까지 받는다. 키사 카와니 바자르 시위는 인도 독립 운동의 중대 사건 중 하나였다.

독립 전야인 1946년부터 페샤와르 일대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간디와 함께 힌두-무슬림 단일 국가를 주장하다 테러를 당하기도 했던 가파르 칸은 인도-파키스탄 분할이 현실로 다가오자 그 7주 전인 1947년 6월, 반누에서 쿠다이 키드맛가르를 포함한 지방 의회를 소집하여 파슈툰 민족국가인 파슈투니스탄 수립을 결의하였다. 하지만 이는 영국 당국에 의해 거부되었고, 가파르 칸은 인도와 파키스탄 양측 모두에서 비난을 받았다. 결국 가파르 칸과 인도 통합파 및 파슈툰 분리파의 부재 하에 다시 열린 지방 의회에서 북서 변경주는 파키스탄에 가입하였고, 1948년 2월 독립 후 제헌의회에서 가파르 칸은 충성 서약을 하며 모하마드 알리 진나와 화해를 모색했으나 각종 이간질로 결렬되었다. 그해 5월, 가파르 칸은 첫 야당인 파키스탄 아자드 당을 조직하였으나 이내 혐의도 없이 가택 연금에 처해졌고 그의 지지자들은 밥바라 학살 등의 탄압을 당하였다.

1962년 국제 앰네스티에 의해 '올해의 죄수'로 선정될 정도로 투옥과 석방을 반복하던 가파르 칸은 1962년 치료차 영국행을 허가받은 후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1972년 귀환하였다. 하지만 이듬해 줄피카르 알리 부토의 독재를 비판하다 다시 체포되어 1988년 1월 페샤와르에서 가택연금 중 사망하였다. 페샤와르에서 잘랄라바드의 그의 집까지 이어진 운구 행렬에는 아프간 대통령 모하마드 나지불라를 비롯한 20만이 결집하였고, 장례를 위해 아프간 내전이 일시 휴전될 만큼[2] 그의 영향력은 지대하였다. 그외에 인도 정부는 5일 간 애도 기간을 선포하였고, 총리 라지브 간디가 지아 울 하크의 반대에도 페샤와르를 찾아 조문하였다. 카이베르 고개를 넘어 이어진 장례 행렬은 지금까지도 파슈툰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2.8. 현대

인도-파키스탄 분할 후 폐샤와르의 힌디어 사용자이자 경제권을 쥐고 있던 힌두교도와 시크교도 주민들 대부분이 떠나버렸다. 1950년대까지 페샤와르 구도심에는 16개의 문을 지닌 성벽이 남아있었다. 1960년대 페샤와르는 소련을 감시하기 위한 미국 첩보기구 CIA의 기지로 활용되었고, 페샤와르에서 발진한 미국 정찰기가 소련에 의해 격추되기도 하였다. 60-70년대에는 이국적인 문화를 갈구하던 히피들이 방문하기도 하였다. 이어진 소련-아프간 전쟁 시에 페샤와르를 포함한 북서 변경주에는 매달 10만의 아프간 난민이 유입되었고, 그중 1/4가 페샤와르 일대에 정착하였다. 이러한 난민촌을 중심으로 CIA가 지원한 무자헤딘 훈련소가 세워졌다. 한편 지나친 난민 수용으로 페샤와르는 기간 시설의 붕괴를 겪는다.

21세기 들어 페샤와르는 다른 북서부 도시들과 함께 파키스탄 탈레반 (TTP)의 테러에 시달리게 되었다. 2010년에만 111건의 테러가 벌어졌고, 2013년에는 시내 교회에 대한 자살 폭탄 테러가 있었다. 비록 파키스탄 정부의 자르브 에 아즈브 작전으로 테러의 숫자 자체는 2014년 18건으로 줄었지만, 그해 12월 군 부설 사립학교에 대한 테러로 153명의 학생들이 사망하는 비극이 있었다. 또한 쉬아 모스크에 대한 공격으로 수십명이 사망하고 2백여명이 부상당하며 사망자 수 자체는 2014년에 최대였다. 이후로 큰 사건이 없다가 2022년 3월 쉬아 모스크에서 테러가 터져 60여명이 사망하였다. 2023년 1월 30일, 경찰본부 주변에 위치한 모스크에서 자살 폭탄 테러가 발생해 101명이 사망하고 22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3. 기타

독립 후 페샤와르는 아프가니스탄으로 가는 길인 카이베르 고개[3]의 관문이었기 때문에 아프간의 고토 회복 주장 및 아프간-파키스탄의 파슈툰족이 하나로 통일해야 한다는 대아프간주의, 통칭 파슈파니스탄 분리주의가 횡행하면서 현재는 소련, 미국, 무자헤딘, 탈레반, 파키스탄 등등 서로서로 치고받는 도시가 되고 말았다. 탈레반의 폭정과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인한 아프간 난민들이 쏟아져들어와 도시의 인구 중 약 20%가 아프간인이 되었다. 현재도 테러단체의 활동과 키베르 패스를 통한 마약과 조직 범죄의 온상이 되고 있다.

이 도시가 발전한 이유 자체가 예전부터 주변국의 복잡한 사정으로 얽혀있는 카이베르 고개에 있다. 이 지역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이동하는 길목으로 되었기 때문에 상업이 번창한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지금은 파키스탄 정부에서 교역을 위한 경제자유지역으로 산업단지를 유치하는 중인 듯 하다. 교통의 중심지 중 한 곳이기도 하기 때문에 물류적 중심지로 발전할 가능성도 있다. 아프간 내전만 멈춘다면 말이다. 다만 그럼에도 인구가 200만명으로 파키스탄 기준으로도 대도시에 속하기는 하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서방과 중국, 파키스탄이 이 지역을 통해 무자헤딘을 지원했기 때문에 서방권(특히 CIA)으로부터 주로 지원받는 주요 7파벌을 '페샤와르 7' 이라고 불렀는데, 그 중에는 아흐마드 샤 마수드 의 파벌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4]

이 지역의 카이베르 고개 부근에 다수의 사제총포 제조업자와 총포개조상 등 무기상인들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중 현재명 khyber ammunition arms company 라는 회사는 TT-33을 MG42급 연사력을 지닌 괴물 기관권총으로 마개조하는 무시무시한 놈들이다.

그리고 이 도시의 중심 철도역엔 파키스탄군이 주둔하고 있다. 철도역 구내에 주둔하는 것으로 보아 파키스탄 육군일 가능성이 높다. 주둔지 면적 규모는 최소로 잡아도 보급 전문부대나 사단본부급이다.

서측에는 바샤 칸 국제공항이 있는데, 파키스탄 공군 전투비행단과 전투기, 헬기가 주둔하고 있다. F-16 비슷한 외형의 전투기와 구형 후퇴익 전투기/요격기로 보이는 항공기 다수, 소정의 연락기 혹은 훈련기나 정찰기로 쓰이는 것으로 추정되는 프로펠러기가 확인된다. 카이베르 고개 동쪽 리살푸르에는 공군 대학과 부속 비행장이 주둔하고 있다.

4. 갤러리

파일:파키스탄 페샤와르 16.jpg 파일:수네리 파키스탄 페샤와르.jpg
커닝햄 시계탑 (간타 가르) 무굴 양식으로 지어진 수네리 모스크
파일:페샤와르 파키스탄 박물관1.jpg 파일:파키스탄 페샤와르 박물관.jpg
페샤와르 박물관

4.1. 세티 모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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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티 모할라. 19세기 말엽 부하라 등지와 국제 무역에 종사하던 세티 가문이 중앙아시아 양식으로 지은 저택이다.

4.2. 고르카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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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반사라이. 시크 지배기에 내부에 힌두 사원, 1917년 영국 당국이 소방서를 더함. 1992-93년과 2007년 발굴이 이루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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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카트리 힌두 사원

4.3. 대학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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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라미아 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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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샤와르 대학교

4.4. 길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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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샤와르 기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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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하바트 칸 모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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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라미아 대학교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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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가의 상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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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불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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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카트리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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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카트리의 옛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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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티 하우스

[1] 1차 대전 이후 벌어진 오스만 칼리파 재건 운동. 당시 페샤와르에서 카불까지 행진이 있었다 [2] 그럼에도 기어코 폭탄 테러가 일어나 15인이 사망하기도 하였다 [3] 영어 발음은 '카이버 패스'. 이 길을 통해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도중 수많은 무자헤딘들이 서방 세력들로부터 지원 받았다. [4] 다만 중국은 주로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중국과의 접경지대에 있는 '' 와칸 회랑"을 통해 무자헤딘들을 지원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