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5 14:21:37

세파르딤

유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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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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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hardim'의 '-im'은 예후딤(유대인)처럼 그 자체가 ~인의 뜻을 갖고 있으므로 '세파르딤 유대인'과 같은 표기는 동어반복이 된다.


1. 개요2. 분포3. 역사
3.1. 중세 이베리아반도의 유대인3.2. 네덜란드의 유대인3.3. 오스만 제국의 유대인
4. 타 교파가 포함된 경우/분류가 불분명한 경우5. 현황6. 출신 인물

1. 개요

세파르딤(세파르드·스파라드 유대인)은 디아스포라 이후 이베리아반도에 정착한 유대인들의 후손을 가르킨다. 아슈케나짐, 미즈라힘과 함께 유대인 혈통의 주류를 이룬다.

2. 분포

파일:Jewish_Ethnic_Divisions_map.png
전 세계 유대인 분파 권역
아슈케나짐
세파르딤
독자적 분파
미즈라힘
후(後)아슈케나짐
후(後)세파르딤

현재는 전세계적으로 인구가 220만 명, 이스라엘 내 인구는 140만명 정도다.

프랑스 유대인들은 대부분 세파르딤이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추방당한 후 알제리에 살던 세파르딤들이 다시 프랑스로 이주한 것이다. 아슈케나즈 유대인들과는 유대교 의례가 다르며 의례 방법이 상동한 미즈라힘들이 세파르딤으로 분류될 때도 있다. 하지만 현대 이스라엘에서는 세파르딤과 미즈라힘도 서로 구별하고 있다. 출신 지역이 아랍어권이면 미즈라힘, 아랍어권이 아니면 세파르딤으로 분류하는 추세다.

3. 역사

3.1. 중세 이베리아반도의 유대인

중세 초 유대인들이 처한 상황은 끔찍했다. 로마 제국의 기독교 공인 이후에도 팔레스티나 속주와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근근히 생명을 유지해 오던 유대인들은 동로마 제국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유대인 탄압으로 강제로 기독교로 개종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추방을 당하는 위기를 겪었다. 한 술 더떠서 동로마 제국이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이슬람 세력과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많은 유대인들이 전쟁에 엮여서 목숨을 잃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 유대인들은 도대체 어디로 도망가야 하냐 발을 동동 구르게 되었다.

8세기 경 이베리아반도가 아랍인과 베르베르인 무슬림에 의해 정복되고 후우마이야 왕조가 세워지면서 고립된 지역의 무슬림 지주들이 기독교인 농민들 위에 군림하는 사회 구조가 형성되었다. 이 상황에서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기독교도 농민 통치를 안정화시키기 위해서 유대인들의 이민을 적극적으로 권장했는데 유대인들은 무슬림 지주와 기독교도 농민 사이에서 마름 역할을 하였다. 이를 기회로 동로마 제국 영토에 있던 유대인들 상당수는 이베리아 반도로 이주하였다. 같은 시기 동로마 제국 영토에서 오늘날의 베네룩스 인근으로 피난간 유대인들은 아슈케나짐의 기원 중 하나가 되었다.

중세 이베리아반도는 무슬림 군인과 지주, 기독교인 농민, 그리고 무슬림 지주 앞잡이 노릇을 하는 유대인 마름과 상공업자들이 공존하는 상태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안달루시아에 정착한 라디노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이 세파르드 유대인의 기원이 되었다. 후우마이야 왕조의 주요 도시마다 유대인 공동체가 자리잡아 상공업을 발전시키면서 코르도바, 세비야, 톨레도 같은 도시들이 중세 초 유럽 유수의 대도시가 되면서 후우마이야 왕조의 번영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베리아반도의 기독교인 모사라베들은 유대인들을 무어인의 앞잡이라며 생각하며 싫어했다. 시대가 지나면서 분열되고 약화된 이베리아반도의 이슬람 타이파(طائفة) 국가들은 힘이 약해지고 쪼개지면서 점점 기독교 세력에게 밀려났다. 기독교인들이 레콩키스타를 통해서 무슬림 영토를 정복할 때마다 유대인들이 약탈당하고 살육당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무슬림들은 항복과 협상을 통해서 학살은 면하고 일정부분 예전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2등신민이었던 유대인들은 이러한 협상 과정에서 배제되었고 그 결과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레콩키스타가 계속 진행되면서 무어인들의 영토가 줄어드는 만큼 세파르드 유대인들의 입지마저 약해졌다. 레콩키스타 당시 정복된 도시에서는 마스지드와 시나고그가 폐허가 된 채로 버려지거나 성당으로 개축되기 일쑤였다. 위기의식을 느낀 이베리아반도의 무슬림들은 북아프리카에서 무라비트 왕조를 끌어들이기도 하고 나중에는 무와히드 왕조가 이베리아반도로 들어와서 레콩키스타를 저지하려고 했으나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과격한 이슬람 신앙을 가지고 있던 알 무와히드 왕조와 알 무라비툰 왕조는 자신들의 기독교도와 유대교도 신민들에게도 엄격한 샤리아를 강요하였고[1] 기독교도 신민들은 더욱 더 적극적으로 레콩키스타와 협력하고 유대인들은 차라리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로 피난을 가는 상황도 벌어졌다.

1492년 나스르 왕조 그라나다마저 정복당하고 레콩키스타가 완료된 후 스페인에서는 레콘키스타를 마무리짓는다는 미명 하에 유대인들에게 더욱 가혹한 탄압을 가했다. 많은 세파르드 유대인들은 반강제로 기독교로 개종을 당한 후에도 분이 안 풀린다는 이유만으로 살해당했다.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조차도 "혈통이 안좋다.". "너 무늬만 기독교지?"하면서 괴롭히는 현상이 심해지자 기독교로 개종했던 유대인들 중 상당수가 이베리아반도를 떠나 네덜란드나 프랑스, 이탈리아를 통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일대로 이주했다. 처음부터 개종을 거부했던 사람들은 대개 북아프리카 일대의 이슬람 국가로 추방당했고 오스만 제국에 정착하게 된 사람들도 적지는 않았다. 레콩키스타 이후의 세파르드 유대인들의 처우는 이베리아반도의 무슬림들의 처지보다 훨씬 더 안 좋았는데 무슬림들은 항복 과정에서 항복 조건을 거래하면서 어느 정도 선에서 안전을 지키는 게 가능했지만[2] 유대인들은 항복 조건 협상에서 제외되었던 데다 유대인들의 재산을 노리고 성직자들이 반유대주의를 부채질하는 경우가 흔했기 때문이다.

도시 상공업 인구와 전문직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유대인들을 꾸준히 인종청소하면서 스페인의 여러 도시는 인구가 급감하였고 공업 기반이 상당히 취약해졌다. 당시 유대인들의 주 생계수단은 도회지 내 상공업자들로 레온-카스티야 연합왕국의 기록에 따르면 레콩키스타 과정에서 톨레도가 정복될 당시 도시 주민 중에 기독교인은 거의 없고 시민들이 거의 다 유대인과 무슬림이었다고 한다.[3] 스페인은 나중에 아즈텍과 잉카를 정복, 식민화하면서 많은 귀금속을 스페인 본국으로 거둬들였지만 본국의 산업 기반이 취약한 나머지 식민지에서 유입된 자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이웃 국가들로부터 사치품들을 비싸게 구입하는 데 자본을 낭비해 버리고 발았다.

스페인의 세파르드 유대인들이 처참한 상황에 처했던 것과는 다르게 포르투갈의 유대인들은 눈치껏 대거 브라질 식민지로 이주해서 특권층이 되어 잘 먹고 잘 살았다고 한다. 당시 신대륙에서는 포르투갈인 인력이 너무 부족했기 때문에[4] 종교재판으로 이들을 숙청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유대교 신앙을 숨기며 기독교를 믿는 척 했지만 나중에는 그냥 기독교인으로 동화되었다.[5]

3.2. 네덜란드의 유대인

8세기 무렵 플랑드르 지역으로 이주한 유대인들은 당시 서유럽의 반유대주의가 약했기 때문에 비유대인들과 통혼하여 오늘날의 아슈케나짐의 초기 기원 중 하나를 형성했으나 봉건제 발달, 흑사병 십자군 전쟁 과정에서 점차 서유럽에서 반유대주의가 강화되면서 플랑드르 지역의 유대인 공동체의 규모는 일정 수준 이상으로 증가하지는 못했다.

근세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와 네덜란드 공화국 시대가 되면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세파르딤 난민들이 대거 정착한 것을 기점으로 네덜란드의 유대인 사회는 세파르딤이 주도하게 되었다. 1581년부로 스페인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네덜란드 공화국은 가톨릭 교조주의에 탄압당했던 역사를 공유한 동병상련 때문에 세파르딤 난민들에게 관대한 편이었기 때문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역을 포함한 상공업이 발달한 암스테르담을 중심으로 일자리가 비교적 풍부했던 점이나 청어 어획량이 풍부해서 식자재 값이 비교적 저렴했던 등 여러가지 이유로 세파르딤 난민들은 폴란드 왕국이나 오스만 제국 외에도 네덜란드로 대거 이민했다.

당시 폴란드에서는 독일인들이 교역을 어느 정도 장악했던 이유로 이베리아반도에서 폴란드 왕국으로 이민간 세파르딤 유대인들의 후손들이 결국 이디시어를 사용하며 아슈케나짐에 동화되었던 것과 다르게 네덜란드로 이민간 세파르딤들은 네덜란드의 지중해 교역[6]과 연계된 경우가 많았고 네덜란드 공화국이 누에바에스파냐 식민지와의 교역에서 암스테르담의 세파르딤 유대인들은 통역 업무를 담당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이베리아에서 기원한 라디노어를 비롯한 세파르딤 문화를 상당히 오랫동안 보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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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세기 네덜란드의 유대인 바뤼흐 스피노자. 포르투갈어를 모어로 쓰고 네덜란드어는 비교적 서툴렀으나 라틴어로도 저술 활동을 했다.

오늘날 미국 유대인 인구의 절대다수는 아슈케나짐 유대인이지만 북미에 최초로 정착한 유대인들은 바로 네덜란드 출신 세파르드 유대인들이었다. 네덜란드 해상 제국이 몰락한 후 세파르딤들이 영국이나 프랑스로 이주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나폴레옹 전쟁 이후 프랑스로 이주한 네덜란드 출신 세파르딤들은 북아프리카 알제리 식민지 출신 유대인들과 함께 오늘날 프랑스 세파르딤 사회를 구성했다. 영국으로 이민한 세파르딤의 후손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벤저민 디즈레일리를 들 수 있다.

3.3. 오스만 제국의 유대인

1492년 스페인에서는 레콩키스타 완료를 기념하여 알함브라 칙령을 내려 스페인 내 유대인들에게 4개월 간의 기간을 주고 가톨릭으로 개종하거나 스페인을 떠날 것을 강요했다. 이 과정에서 오스만 제국 일대로 이주한 세파르딤들도 상당히 많았는데, 이들 중 구 오스만 제국의 유럽 영토[7]에 거주하던 세파르드 유대인들의 후손들은 이베리아반도에서 사멸되었던 라디노어를 20세기 초반까지 보존하였다.[8]

로마니오테스라고 해서 그리스어를 사용하고 세파르딤/미즈리힘과 구분되던 고유의 예법을 유지하던 유대인 집단은 동로마 제국의 유대교 탄압을 이유로 인구가 얼마 되지 않았고 오스만 제국 시절 대거 이민해온 세파르딤들과 급속도로 동화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연유로 중세 로마니오테스들의 예법 등이 실전되어 오늘날 해당 분야의 연구가 지지부진해졌다고도 한다.

오스만 제국의 유대인들은 주로 의사나 통역으로 활약했다. 유대인들이 오스만 제국에서 의사로 활약했던 이유가 걸작인데 몽골의 침략 이후 이슬람 세계가 수구화되면서 '무슬림이 이슬람 율법 대신 의학을 공부하는 것은 신앙심이 부족한 것이다.\' 같은 모함이 흔해졌기 때문이다.[9] 같은 맥락에서 '무슬림이 여러가지 언어를 공부하는 것은 몰래 불신앙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라는 모함이 흔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통역 일을 맡기 쉬웠다.[10] 사실 공식적으로 외교 통역으로 일하는 유대인들은 소수에 불과했으며 대부분의 세파르딤 유대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발칸반도의 농촌 지역에서 세금을 징수하는 인기 없고 위험한 일을 맡았다.이것도 나름 통역의 일종이다. 이러한 이유로 발칸반도의 도회지 주민 중 유대인 인구가 일정 비율 이상을 차지했다.

오스만 제국 쇠퇴기에 아르메니아인, 쿠르드인, 아시리아인, 베두인 등 소수 민족들을 상대로 인종 청소가 벌어지던 순간에도 유대인들은 통역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무사할 수 있었다. 오히려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이었던 바르바리 토후국에 정착했던 유대인들은 프랑스가 알제리를 침략하자 바르바리 토후국에서 별다른 탄압을 받지 않았음에도 프랑스의 식민지배에 적극적으로 부역하였고 이들 중 상당수가 프랑스로 건너가 프랑스의 세파르드 유대인의 기원을 이루었다. 한 때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그리스,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등에 거주하던 세파르드 유대인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와중에 홀로코스트에 휘말리기도 했다. 유대인 인종청소에 협조하는 현지인들이 적었던 덕분에[11][12] 이곳의 유대인 공동체들은 전멸당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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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튀니지 유대인. 오늘날 대다수가 프랑스로 이주하여 프랑스의 세파르딤 유대인에 포함되었다. 북아프리카 마그레브 지방의 유대인들은 상당수는 이베리아반도에서 추방된 라디노어 사용자들이었으나 북아프리카는 오스만 제국 유럽 영토[13]에 비해 아랍어가 일방적으로 우세한 상황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세대가 지나면서 라디노어를 잊어버렸다. 북아프리카 유대인들은 프랑스가 모로코와 알제리, 튀니지를 식민화하는 과정에서 프랑스 측에 협조하고 대거 프랑스로 이주했는데 자신들을 아랍인들과 구분하고 싶어했기 때문에 프랑스 사회에서 자신들을 미즈라힘이 아닌 세파르딤으로 분류했다.

4. 타 교파가 포함된 경우/분류가 불분명한 경우

  • 이탈킴(이탈리아 유대인): 고대 이래 이탈리아에 거주했던 유대인들은 세파르딤과 전례가 유사했는데 이들은 따로 이탈킴이라고 불렸다. 이탈킴의 전례는 북이탈리아 롬바르디아에 정착한 아슈케나짐, 그리스의 로마니오테스 유대인, 이베리아 반도의 세파르딤 유대인의 전례가 절충된 형태인 데다 자체적인 인구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은 이유로 오늘날에는 주요 유대인 집단으로 분류되지는 않고 있다. 유대인 분리 거주지역인 게토의 시초는 중세~근세 운하 도시국가였던 베네치아에서 유대인들이 거주구역을 따로 배정한 것이라고 한다.
  • 미즈라힘과 세파르딤 분류의 모호성(모로코 유대인): 근세 모로코도 사드 왕조 시절 이베리아반도에서 레콩키스타를 피해 망명해 온 유대인 인구가 늘어나자 유대인 자치구역을 따로 배정했는데 # 말 그대로 자치권이 주어지고 자유가 제한되는 것이 아니므로 중세 유럽의 격리 수용시설로서의 유대인 게토와는 다른 개념이다. 17세기 모로코의 알라위 왕조는 자국 내 세파르드 유대인들과 네덜란드의 세파르드 유대인의 친교 관계를 이용하여 네덜란드와 우호적인 외교관계 수립을 시도하기도 했다. 모로코 유대인들이 세파르딤에 속하는지 미즈라힘에 속하는지는 입장에 따라 견해가 갈린다. 모로코 유대인들의 직계 기원은 이베리아반도의 라디노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이므로 세파르딤이 맞다고 주장하는 측과 오늘날 이들의 모어가 아랍어이므로 미즈라힘으로 분류하려는 입장 등등이 나뉘어진다. 근대 북아프리카 각지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는 과정에서 모로코뿐만 아니라[14] 오스만 제국의 번국이었던 알제리와 튀니지의 유대인들은 프랑스 식민 지배에 협력하며 부를 축적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피에 누아르 문서 참조. 이들의 대다수는 알제리나 튀니지가 독립하는 과정에서 현지 아랍인들의 보복을 피해 프랑스로 이주하였다.
  • 베르베르 유대인: 이들은 상술한 이베리아반도에서 모로코로 남하한 세파르딤 유대인들과도 관련이 없고 그렇다고 아랍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것도 아니며 베르베르어 계열 언어를 사용하는 별개의 유대인 집단이다. 모로코 남부를 중심으로 거주하던 베르베르 유대인들은 1950년에서 60년대에 이르는 기간동안 대부분 프랑스나 이스라엘, 미국 등으로 이주하였고, 오늘날 이스라엘에서는 상술한 세파르딤/미즈라힘/아랍계 관련한 차별 논란에 겹쳐서[15] 구체적으로 따로 이들의 언어나 문화 등을 보존하려는 노력이 잘 이루어지지 못하는 형편이다.
  • 로마니오테스(그리스 유대인): 그리스의 유대인 공동체는 사실상 유럽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유대인 공동체 집단으로 동로마 제국 시대까지는 카라임 교리에 영향을 받은 로마니오테스(Rhomaniotes) 교파가 번성하였으나 오스만 제국 시절 스페인에서 추방된 세파르딤 유대인들이 오스만 제국 각지로 이주해오면서 상당수가 세파르딤과 합치게 되었다. 오늘날 그리스와 튀르키예에서 카라임 전례를 준수하는 유대인 인구는 80여 명 정도에 불과하며 예바니어(유대-그리스어) 구사가 가능한 인구는 50여 명 정도에 불과하다.

5. 현황

현재 프랑스 유대인의 상당수, 튀르키예 (출신) 유대인의 대다수는 세파르딤에 속한다. 이스라엘의 건국 이후 오스만 제국에 있던 유대인의 대부분은 이스라엘로 이주하였고 프랑스령 알제리에 살던 유대인들은 알제리 전쟁 때까지 프랑스령 알제리 영토에 남아있다가 1962년 알제리 독립 후 유럽계 알제리인들인 피에 누아르와 함께 거의 다 프랑스로 피난가서 재정착하였다.

세파르드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말고도 프랑스에 30~40만명, 미국에 20~30만명, 브라질에 4만명, 터키에는 2만 6천명이 남아있으며 유명 관광지인 그리스 로도스 섬 구시가지에는 오늘날에도 오스만 지배 시절 이주하고 유대인 구역이 잘 보존되어 있고 홀로코스트가 벌어지던 와중에도[16] 무사히 살아남았던 현지 유대인들의 후손들이 지금도 거주하고 있다. 스페인에서는 과거에 세파르드 유대인의 후손이었다는 게 증명된다면 스페인에 이민와서 정착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으며 코르도바 세비야를 중심으로 다시금 세파르드 유대인들이 조금씩 이민와서 유대인 관광객들을 위한 박물관과 편의 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현재 스페인에 거주하는 세파르드 유대인 인구는 4만명 안팎이지만 DNA 연구 조사 결과 스페인 인구의 20%는 기독교로 개종한 세파르드 유대인 조상을 두고 있다고 한다. #[17] 유대인의 후손들이 스페인 국적을 얻으려는 신청이 늘고 있다고 한다. #

이스라엘로 이주한 세파르드 유대인들은 주로 오스만 제국 영토에 살던 유대인들의 후손이며 아슈케나짐을 우대하고 중동계 유대인들을 차별하는 이스라엘 사회 특성상 미즈라힘들과 같이 안 엮이려 든다.[18]

6. 출신 인물



[1] 이슬람 황금기를 공유했던 후우마이야 왕조는 타종교에 대해서는 세금만 잘내면 된다는 전제 하에 관대했다. [2] 이렇게 기독교 왕국들과의 항복 과정에서 신앙의 자유를 제한적으로나마 보장받았던 무슬림들을 무데하르라고 부른다. [3] 레콩키스타 이전 스페인의 유대인들의 주 생계수단이 고리대금업이라고 잘못 알려진 경우도 있는데 당시 스페인은 이미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기독교권에서 금융업이 상당히 발달했고 정작 안달루시아 남부의 유대인들의 돈놀이는 이탈리아 북부나 카탈루냐 지방에 비교하면 초보적인 수준에 불과하였다. [4] 한때는 인도양 전역을 장악했던 포르투갈의 대항해시대 전성기의 종말도 인적 자원의 고갈로 인한 것이었다. 포르투갈 자체부터가 인구가 별로 많지 않은 나라이기도 했고... [5] 자세한 내용은 포르투갈계 브라질, 브라질 유대인 문서 참조 [6] 주로 베네치아 공화국이나 모로코의 무슬림 왕조 등이 대상이었다. [7] 아나톨리아 반도 서부에서 이스탄불 일대, 그리스 도데카니사 제도, 불가리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알바니아에 이르는 지역 [8] 반면 오스만 제국의 중동 영토였던 시리아와 알레포 다마스쿠스 일대의 유대인들은 아람어 아랍어를 모어로 사용하였는데 이들은 모어가 라디노어가 아니라 아람어이기 때문에 미즈라힘으로 분류된다. [9] 이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1577년 오스만 제국에서 천문대를 설치하자 이슬람 근본주의 율법학자들이 천문학은 점성술과 연계된 사악한 학문이라고 반대하여 천문대를 허물어 버린 케이스를 들 수 있다. [10] 의학을 공부하는 사람을 신앙심이 부족한 사람으로 의심하는 현상은 이븐 할둔의 역사 서설에서도 지적되었으며 아랍어 이외에 다른 언어를 배우는 것은 위선이라는 말은 한발리파가 실제로 했던 주장이다. [11] 중부유럽과 동유럽에서는 도시에 빈민으로 유입된 농민과 중소지주층을 중심으로 민족주의와 결합한 반유대주의가 횡행했지만 세파르드 유대인들이 거주했던 남동유럽 국가들은 도시화율이 낮았기 때문에 반유대주의가 약했다. [12] 불가리아는 아예 자국의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나 다하우 등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에 인계하지 않고 보호했다. [13] 상술한 아나톨리아 반도 서부에서 이스탄불 일대와 그리스 도데카니사 제도, 불가리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이르는 지역 [14] 프랑스 식민지배 시절 모로코 자치의회의 현지인 의원 절반 가까이가 유대인이었다. [15] 쉽게 말하자면 북아프리카 마그레브 지역에서는 전통적으로 아랍어 사용자들이 베르베르어 사용자들을 차별하는 사회 구조가 있는데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아랍어권 출신들이 차별을 받는다. 이들이 이스라엘에서 베르베르계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내세운다면 사회적으로 좋은 대우를 받는 것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16] 당시 로도스 섬은 추축국 중의 하나였던 이탈리아의 영토였다. [17] 같은 조사에서 스페인 인구의 11%는 기독교로 개종한 아랍인 혹은 베르베르인 조상을 두고 있는 걸로 나와있다. 물론 근세 스페인에서 종교재판이 하도 엄격하게 벌어진 나머지 개종자들이 자신들의 족보를 대대적으로 손보았기 때문에 오늘날의 스페인인들은 자신들의 가문이 유대계였던 무슬림계였던 신경쓰지 않는 듯하다. 물론 수백년 전 일이기도 하고 [18] 이를테면 북아프리카의 알제리 사람이 자신을 "북"아프리카 사람이라고 강조하는 것과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