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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디 머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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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ddie Merc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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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pilatio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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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의 콜라보레이션 앨범에 관한 내용은 퀸(밴드)/+ 폴 로저스, 퀸(밴드)/+ 아담 램버트 문서의 '디스코그래피' 문단을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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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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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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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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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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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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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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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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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00> 프레디 머큐리
Freddie Mercury
파일:Freddie Mercury (Music Life).jpg
출생 1946년 9월 5일
잔지바르 술탄국 스톤타운
(現 탄자니아 잔지바르 스톤타운)
사망 1991년 11월 24일 (향년 45세)
잉글랜드 런던 켄싱턴
국적
[[인도|]][[틀:국기|]][[틀:국기|]] →
[[영국|]][[틀:국기|]][[틀:국기|]][1]
직업 싱어송라이터, 프로듀서
소속 (1970 - 1991)
서명 파일:프레디 머큐리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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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fff><colcolor=#000> 부모님 아버지 : 보미 불사라
(1908년 12월 14일 - 2003년 12월 26일)
어머니 : 제르 불사라
(1922년 10월 16일 - 2016년 11월 13일)[2]
형제자매 여동생 : 카쉬미라 쿡 (1953년 - )[3]
파트너 메리 오스틴 (1970 - 1976)[4]
바바라 발렌틴 (1984 - 1985)[5]
짐 허튼 (1985 - 1991)[6]
학력 세인트 피터스 스쿨 (졸업)
아이즐워스 공예 대학교 (졸업)
일링 미술 대학교 (졸업)[7]
종교 조로아스터교[8]
신체 178cm, 72kg[9], B형
활동 기간 1969년 - 1991년
장르 ,
악기 보컬, 피아노
레이블 팔로폰 레코드, 할리우드 레코드, EMI 레코드, 컬럼비아 레코드, 폴리도르 레코드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 ||
1. 개요2. 생애3. 뮤지션으로서의 재능
3.1. 보컬리스트로서3.2. 프론트맨으로서3.3. 작곡가로서3.4. 연주자로서
4. 디스코그래피
4.1. 스튜디오 앨범4.2. 컴필레이션 앨범
5. 여담6.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nopad> 파일:230426101346-freddie-mercury-file-1986-restricted.jpg
영국 싱어송라이터로, 영국의 록 밴드 보컬리스트이자 키보디스트[10]이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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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뮤지션으로서의 재능

프레디 머큐리가 생전 소속되어 있던 퀸은 리스너와 평론가의 평가가 갈리는 밴드이지만, 프레디 머큐리의 재능만큼은 평론가든 청자든 모두가 인정하며, 보컬부터 키보드 연주와 작곡까지 모든 부분을 소화한 불세출의 천재라는 평가를 받는다. 야누스적인 보컬과 폭발적인 무대 매너, 그리고 특유의 오페라틱하고 멜로딕한 작곡력으로 퀸이 세계구급 밴드가 되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레이디 가가, 커트 코베인, 케이티 페리 등 후대의 여러 보컬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이러한 보컬계에서의 영향력뿐만 아니라 록 음악과 대중음악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보컬리스트이자 프론트맨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3.1. 보컬리스트로서

1981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의 Bohemian Rhapsody 라이브
프레디는 상냥한 사람이었고, 훌륭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성격과 그의 모든 열정은 우리가 포착할 수도 없다. 오늘날의 진짜 문제는 그가 여기에 없다는 것이다.
He was a sweet guy, great voice. His personality vocally and his whole projection we can't capture. The real thing about today is that he is not here.


폭발적인 가창력의 소유자이자 록 음악 역사상 최고의 보컬리스트 중 한 명이다. 물론 록 보컬계에서는 여러 밴드들의 보컬리스트들이 높은 평가를 받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프레디 머큐리는 로버트 플랜트, 로니 제임스 디오 등과 더불어 가창력 부문에서 본좌급에 위치해 있는 아티스트이다. 특히나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프레디 머큐리가 록 음악의 역사에서 가장 폭넓은 소화 능력을 보유한 보컬이라는 사실이다. 당연히 기라성 같은 재능의 소유자들이 즐비한 록 음악사에는 '프레디보다 큰 성량과 넓은 음역대를 가진 보컬'도 있고 특정 스타일의 노래에서는 프레디를 능가하는 소화력을 지닌 '전문성이 프레디보다 투철한 보컬'도 있었다. 하지만 프레디 머큐리처럼 록 음악 외의 다양한 음악 장르[12]의 감성을 록의 영역 안으로 끌고 들어와 자연스럽게 소화해낸 보컬은 그 외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퀸의 음악이 당대의 전문가들에게 '슈퍼마켓 음악'이라고 폄하당한 것도 역설적으로 이런 다양함에 있었는데, 이토록 폭넓은 퀸의 음악 세계를 이음매나 빈틈 없이 완전무결한 형태로 표현해낸 프레디 머큐리의 다채로운 보컬은 그야말로 불세출의 경지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13] 애초에 드럼 리듬뿐인 " We Will Rock You"나 기타 사운드가 거의 없이 베이스 리프로 진행되는 " Another One Bites the Dust"와 같은 곡을 빈틈없이 완벽한 노래로 만들었던 건 프레디의 보컬과 라임, 리듬 감각 없이는 불가능했다.[14]

대중들에게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테너 성종의 보컬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테너가 아닌 바리톤 성종일 가능성이 높다. #[15] 솔로 앨범 < Barcelona>를 같이 작업한 적이 있던 성악가 몽셰라 카바예는 이를 간파하고 프레디 머큐리에게 "당신의 성부는 바리톤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니 굳이 고음을 부르지는 말아요. 고음역대는 소프라노인 내가 할게요."라고 했고, 이에 프레디는 "하지만 테너가 아닌 바리톤 성부로 부르면 사람들이 저인지 모를 것 같다."며 걱정했다고 한다. 또한 대표적인 테너 보컬 중 한명인 로버트 플랜트가 전성기 시절 컨디션이 좋지 않은 공연에서도 3옥타브 초중반의 고음을 쉽게 뽑아내었던 것과 달리[16] 프레디 머큐리는 컨디션이 최상인 공연에서도 3옥타브 초반의 곡들은 대부분 2옥타브 후반대로 낮추어 불렀는데, 이것의 이유가 프레디 머큐리의 성부가 바리톤이기에 여러 번 녹음할 수 있는 스튜디오가 아닌 라이브에서는 3옥타브 대의 초고음을 한 번에 깔끔하게 내지르긴 쉽지 않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가능하다. 다만 성부라는 것이 칼로 무 자르듯 정확하게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고, 프레디 머큐리처럼 성부가 애매한 사람들은 그날의 컨디션마다 테너일수도 바리톤일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프레디 머큐리는 바리톤이라기엔 음색이 얇기에, 흔히 말하는 '테리톤'일 가능성이 높다.[17][18]

보컬로서 역량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20대 초의 대학 시절부터였다. 단, 그 당시에는 천하의 프레디 머큐리도 실력이 다듬어지기 전이라, 목소리 기복이 심하고 다소 거친 면을 보였다고 한다.[19] 주위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무척이나 예쁜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목소리를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다"라고 말했다. 그 뒤로 스스로 수많은 연습을 통해 퀸이 결성될 즈음에는 이미 테크닉적으로 거의 안정된 보컬이었다.

프레디 머큐리는 어릴 적 합창부 시절을 제외하고 누군가에게 정식으로 노래를 배운 적이 없었다. 이는 대다수의 록 보컬리스트들의 특징으로, 이들은 정석적인 발성이 아닌 자신만의 개성을 살린 창법을 썼기 때문에 금방 목이 상하고 컨디션의 기복이 큰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에 본인이 존경한 보컬리스트들에게 영향을 받았는데, 대표적으로 엘비스 프레슬리, 존 레논, 로버트 플랜트, 로저 달트리 등에게 영향을 받았다. 특히 "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에서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느낌으로 곡을 소화하며, " It's Late"에서는 로버트 플랜트의 느낌으로 곡을 소화해낸다. 가끔씩 맑은 가성으로 성량이 풍부한 오페라적 창법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만큼 엘비스 프레슬리 풍의 로큰롤부터 로버트 플랜트 풍의 하드 록, 심지어 오페라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그에 걸맞은 보컬을 소화할 수 있었기에, 대중들과 평론가들 모두 프레디를 보고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폭넓은 소화 능력을 보유한 보컬이라고 부르는 것이다.[20]
1974년 런던 레인보우 극장에서의 Seven Seas of Rhye 라이브
프레디 머큐리는 젊을 적에 엄청난 미성이었다가, 나이가 들자 창법을 바꾸어 그 특성을 많이 잃은 케이스이기도 하다. 1980년 이후로 성대 질환이 생기고 담배를 피워 피치가 조금 떨어지고 음색이 변한 감이 있지만 그보단 창법의 변화로 내츄럴 보이스를 내지 않고 먹는 소리를 사용하게 된 것이 차이점을 도드라지게 한 이유이다. 주로 연대별로 그 차이가 크게 드러나는데, 1970년대 보컬은 자신의 미성을 매우 활용해 모험적인 발성은 최대한 삼가며, 성대가 벌어지지 않게 노력한 상태에서 고음이 되면 후두가 크게 올라가는 형식의 벨팅 창법을 주로 사용했다. 고음에서는 맑고 힘차며, 종종 오페라틱한 요소가 느껴질 만큼 극적인 표현을 사용했고, 중저음은 풍부하고 따뜻하면서도 그 자신만의 독특한 텍스처를 가지고 있어 곡의 감정적 깊이를 더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전체적으로 인골라에 빠져서 노래했으며, 성대가 벌어지고 갈라지는 탁성을 주로 썼다. 소리도 조심스럽게 가리던 취향에서 가성이든 쥐어짜는 탁성이든 되는 대로 뽑아내는 스타일로 바뀌었다. 사실 프레디 머큐리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나 목소리는 다수가 1980년대 스타일이다. 미성이었던 시절에는 그야말로 굉장히 중성적인, 야누스적인 미성이었다. 남성의 목소리와 여성의 목소리가 혼재된 듯한 그 마성의 목소리는 경탄의 대상이기도 하다.

프레디 머큐리의 목소리의 전성기는 대체로 1979년 후반 ~1982년 중반 정도로 규정된다.[21] 1982년 후반으로 접어들수록 계속되는 공연으로 점점 목상태가 안 좋아지기 시작했고 프레디의 지속적인 흡연으로 인해 목소리가 두터워지기 시작했다.[22]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시 발매한 퀸의 10집 앨범 < Hot Space>가 크게 성공하지 못했으며, 1983년에는 밴드에서의 공연을 하지 않고 휴식기를 가졌다. 1984년 퀸의 11집 앨범 < The Works>와 함께 다시 라이브 투어를 시작했으나 이 시기는 프레디의 컨디션 기복이 엄청나게 심했던 시기였다. 목 상태는 지난 투어로 인해 나빠져 있었고 흡연으로 목소리도 두터워져 본 고장 런던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상당히 많은 삑사리를 냈다.[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변화된 목소리에 적응된 프레디는 컨디션이 좋았던 날에는 두터워진 목소리로 고음을 지르는데 전성기만큼 올라가는 건 아니지만 오히려 그 두터운 고음이 전성기 고음보다 매력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24]

1984년의 마지막 공연은 남아프리카 공화국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의해 만들어진 반투스탄들 중의 하나인 보푸사츠와나의 선 시티[25][26]에서 가졌는데,[27] 변화된 목소리에 완벽히 적응된 듯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총 9일간의 공연이 진행되었는데, 10월 7일의 공연에서 4번째 세트리스트의 " Somebody to Love"를 부르다 목에 생긴 혹으로 인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프레디가 백스테이지로 퇴장하고 조명이 전부 꺼진 후에, 프레디가 나오길 기대하던 관중들이 특유의 리듬을 만들며 " We Will Rock You"를 떼창하던 도중, 선 시티 라이브 기획자인 헤이즐 펠드먼이 라이브가 취소되었다고 관중들에게 이야기했다. 이때 프레디는 목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심각했다고 한다.

1985년은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13만 1천명이라는 역대급 관중을 데리고 공연을 한 적이 있는데, 이는 유로 공연 최다 관중 콘서트로 알려져 있다. 첫째 날 콘서트에서는 " Somebody to Love"를 매우 잘 소화했다.[28] 일본에서 가진 콘서트에서도 2옥타브 라#(A#4) 고음을 5초 동안 흔들림 없이 부르는 등 상당히 좋은 컨디션을 보여주었다.[29] 그리고 찾아온 라이브 에이드에서는 2옥타브 후반대의 고음을 너무나도 편하게 내지르며 역대급 무대를 생중계로 보여주어 퀸의 전성기를 다시 한 번 이끌기도 하였다.[30]

계속되는 투어로 1980년대 중-후반의 공연에서는 목을 좀 사리는 모습이 종종 보이지만 보컬을 잘 소화하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1986년의 웸블리 공연의 둘째 날의 공연에서 프레디의 가창력이 좋지 않은 부분이 여럿 보이는데, 첫째 날 공연에서 갑작스럽게 비가 내려 그대로 그 비를 맞으며 불러서 둘째 날의 공연은 최악의 컨디션이었다는 것을 감안해야한다.[31] 보통의 라이브에서는 3옥타브 대의 진성 고음을 잘 보여주진 않지만[32][33], 가성 고음은 의외로 많은 편이다. 3옥타브 후반대 ~ 4옥타브 초반대의 고음을 자유자재[34]로 낼 수 있다. 로버트 플랜트의 가성이 날카롭다면, 프레디 머큐리의 가성은 굉장히 부드러운 느낌이다.[35]

굳이 단점을 꼽자면 라이브 기복이 있다는 것이다.[36] 다만 이는 로버트 플랜트, 이안 길런 등 당시 고음형 록 보컬리스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단점이었다. 이는 정석적인 발성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닌 본인들만의 고유한 창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훈련받지 않은 목을 혹사시키는 창법을 사용한 이들이 세계 투어를 다니면서 성대에 피로가 쌓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컨디션이 좋을 때의 라이브는 어마어마한 수준이며, 라이브 기복이 있다는 이유로 이들이 위대한 보컬리스트임을 절대 부정할 수 없다.

프레디 머큐리의 성대가 약했다는 추측도 있는데 이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 프레디 머큐리는 라이브에서 순간적으로 성대 근육을 조으고 타고난 체력을 바탕으로 호흡을 폭발시켜 벤딩없이 피치를 높이는 창법을 자주 사용했는데, 이는 음성학이 발달하고 보컬 트레이닝이 보편화된 지금은 절대 권장되는 창법이 아니다. 일반인은 비슷하게 따라하기도 힘들며 숙련된 보컬리스트도 몇곡 부르고 나가 떨어질 정도로 목에 무리가 간다. 그런데 프레디 머큐리는 이런 창법으로 거의 대부분의 곡을 소화하며 끝까지 기복 없이 공연을 마친 사례가 다수 존재했다. 프레디의 성대가 유난히 약했다기보다는 다른 가수에 비해 성대에 무리가 가는 창법을 써야하다보니 기복이 심해질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프레디 머큐리가 음악 활동을 하던 시기는 컴퓨터 기술이 그렇게 발전했던 때가 아니었고, 이를 감안하면 스튜디오에서 그의 가창력은 왜 그가 록 역사상 최고 중 한 명으로 불리는지를 느낄 수 있는데, 라이브에서는 나오지 않는 고음을 마구 난사하기도 하고, 저음도 굉장히 안정적이며, 발음도 정확하다.[37] 그리고 프레디 머큐리는 가성을 라이브에서 많이 사용하지 않았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진성에서 가성으로 넘어가면서 부르면 템포가 처질 것을 고려했을 가능성이 있다. 대표적으로 " Bohemian Rhapsody"나 " Somebody to Love"가 그렇다. 원곡엔 가성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나, 거의 모든 부분을 진성으로 처리했다. 거의 모든 곡을 진성으로 처리하다 보니 컨디션 좋은 날과 안 좋은 날의 차이가 더욱 더 크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프레디가 가성을 못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에도 가성 고음을 뽐내는 경우가 많아 이유를 추정하기 힘들 뿐이다.

자신을 포함한 퀸 멤버들 모두의 곡을 앨범에 싣다 보니 장르도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부족함이 없다. 퀸은 발라드[38], 디스코[39], 성악[40] 등 다양한 장르의 곡들을 선보였다. 1970년대에는 미성 위주였지만, 1970년대 후반부터 탁성까지 쓰면서 80년대 중후반부터는 미성과 탁성을 자유자재로 쓴다.[41] 가성도 자유자재로 쓸 줄 아는데, 아름다운 가성[42]을 보여줄 때가 있는가 하면, 샤우팅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가는 부분[43]을 보여줄 때도 있는데, 이게 다 곡에 있어서 어색함이 없다.

1990년대 들어서는 1970년대보다도 더 가볍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바뀌었다. 1980년대의 폭발적인 성량과 노련한 발성 테크닉에 흡연 이전의 1970년대의 음색이 더해지며 소리가 더욱 날카롭고 명확하게 들린다.

퀸의 곡은 그렇게 어려운 곡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막상 약 2~3시간 진행된 프레디 머큐리 추모 콘서트에서 많은 유명 가수들이 퀸의 곡을 불렀지만, 원곡만큼 해냈다고 평가받는 무대는 조지 마이클의 " Somebody to Love", 씰(Seal)[44]이 부른 " Who Wants to Live Forever", 익스트림의 퀸 메들리 정도뿐이다. 사실 이는 절대적인 난이도 자체가 엄청 높은 게 아니라 프레디만큼 올라가는 보컬은 찾아보면 많지만 프레디처럼 올라가는 보컬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레드 제플린이 보급했던[45] 보컬과 기타를 완전히 분리시키는 방식을 퀸 또한 받아들여서 프레디 머큐리는 보컬과 피아노만 담당했다.[46] 그래서 퀸이 처음 데뷔했을 때, 보컬과 기타가 철저하게 분리된 퀸을 보고 평론가들이 레드 제플린의 짝퉁이라고 많이 비판했다고 한다. 물론 프레디는 애초에 밴드의 시작점부터 다르다며, 평론가들의 억지 주장을 반박했다.

3.1.1. 음역대

Exercises In Free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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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에 낸 솔로 싱글에는 자신의 음역을 과시하는 "Exercises In Free Love"란 곡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노래에서는 그야말로 여성과 남성의 음역을 넘나드는 마성의 음역을 보여준다. 최고음은 3옥타브 파(F5). 여성의 두성을 구사했다.

프레디 머큐리의 진성 음역대는 0옥타브 파(F2)[47]에서 3옥타브 파(F5)[48], 가성 음역대는 5옥타브 미(E7)[49][50][51]까지 선보인 적이 있다. 곡 중에서는 아니지만 0옥타브 도♯(C♯2)까지 내린 적도 있다. 그리고 프레디 머큐리의 이러한 가성 실력으로 완성된 앨범이 < Barcelona>이기도 하다. 한 인터뷰에서 로저 테일러가 말하길, "난 프레디의 최고음을 들어본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이에 범접하는 음역대를 가진 남자 보컬리스트는 레드 제플린 로버트 플랜트,[52] 건즈 앤 로지스 액슬 로즈[53]밖에 없다.

3.2. 프론트맨으로서

파일:LIVE AID RADIO GAGA.gif
파일:KNEBWORTH RADIO GAGA.gif
대표적인 퍼포먼스인 Radio Ga Ga 코러스 파트[54]
로큰롤 역사에 프레디 머큐리를 능가하는 쇼맨이 있었는가?
Did rock and roll ever have a better showman than Freddie Mercury?

빌보드, <The 25 Best Rock Frontmen of All Time>
더욱 연극적인 모든 공연자 중에서, 프레디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멀리 나아갔다. 그는 그것을 한계를 넘어섰다.
Of all the more theatrical performers, Freddie took it further than the rest. He took it over the edge.


프레디는 단순한 가창력 좋은 보컬리스트란 평가를 넘어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프론트맨중 한 명이자 라이브 공연계의 본좌로 평가받는다.[55] 퀸이 같은 록 밴드, 아니 대중음악계 전체를 통틀어서도 역사상 최고의 라이브 뮤지션 가운데 하나라는 평을 받는데는 프레디의 폭발적인 무대 장악력이 가장 큰 기여를 했다. 프레디는 더 후의 어마어마한 팬이었기에, 더 후가 추구하던 파괴적인 무대 매너에 영향을 받아 무대 위에서 온갖 폭발적인 퍼포먼스를 하면서 관중들을 조련하였다.[56] 또한 프레디 머큐리는 레드 제플린, 특히 로버트 플랜트의 광팬이었기에, 프레디 사후 브라이언 메이의 인터뷰에 따르면 프레디는 라이브 공연에서 언제나 로버트 플랜트처럼 행동하려고 했다고 한다.[57] 그 외에도 롤링 스톤스의 프론트맨인 믹 재거의 영향 또한 받았다고 한다. 특유의 연극적이고 화려한 동작들과 관객 유도 기술을 바탕으로 퀸이 수만의 관객을 아우르는 스타디움 공연을 해나가는 데에 매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프레디 머큐리의 무대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연은 1985년 라이브 에이드로, 그는 전세계의 내로라하는 뮤지션들이 총출동한 자리에서 최고의 퍼포먼스로 단연 두각을 드러냈다. 기획자인 밥 겔도프[58]는 '그날 공연한 밴드 중에서 그냥 퀸이 최고였다'라고 평했고[59], 같은 공연에 출연한 엘튼 존이 퀸의 공연 이후, 프레디의 트레일러로 가서 'You bastards, you stole the show[60]'라고 항의 아닌 항의를 하며 농담했다.[61] 당시 라이브 에이드 공연 특성상 모든 아티스트에게 20분의 시간만 주어졌고 퀸의 콘서트에 평소 사용하는 조명, 특수효과 장치 같은 것은 전혀 쓸 수 없었기에, 이 날의 공연은 오직 프론트맨인 프레디의 무대매너로 관객들을 매료해야만 했다. 그리고 실제로 프레디는 그걸 해냈다. 당시 U2 듀란 듀란과 같은 신진 세력들에 밀려 슬슬 동력이 떨어진 듯 보이던 퀸을 다시금 정상으로 올려놓은 공연이었다.

특히 밴드의 피아니스트[62]라는 특성 때문에 세션 피아니스트를 고용하기 전인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프레디는 공연 거의 대부분을 피아노 앞에 앉아 있어야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을 휘어잡고 조련하는 능력이 출중했다는 것은 얼마나 그가 비범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편 프레디의 트레이드 마크 중 하나인 받침대 없는 마이크[63][64]는 무대 위에서 지휘봉이나 에어 기타 등등 다양한 용도로 쓰이며 프레디의 퍼포먼스에 볼거리를 더해주었다.

오늘날 그를 존경하는 많은 후배 뮤지션들은 서있는 것 조차 부담백배인 10만명 청중 앞에서 쫄기는 커녕 확 제압해버리는 무게감과 그 열정적인 무대 매너를 존경의 요인으로 뽑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라이브 에이드 공연은 그 임팩트 때문에 대형 공연의 교과서처럼 여러 뮤지션들에게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다. 퀸에 뒤늦게 빠진 팬들은 무대에서 마치 거인과 같은, 강렬한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다.

프레디가 그처럼 인상적인 무대 매너와 쇼맨쉽을 보일 수 있었던 건, 단지 퍼포먼스 면에서의 기교와 재능 때문만이 아니라 관객의 환호를 이끌어내는 걸 좋아하고 그들과 같이 호흡하는 걸 즐길 줄 아는 타고난 무대체질이었다는 점이 근본적인 요인이었다. 뛰어난 록 뮤지션이라 해서 모두가 청중앞에서의 공연을 좋아하는 무대체질인 건 아니다. 프레디와는 정반대로, 관객들의 열렬한 환호를 오히려 부담스러워 하고 많은 청중 앞에서의 공연에 스트레스를 받았던 록 보컬리스트의 대표적인 예로 커트 코베인이 있다. 그는 유서에서 자기는 프레디 머큐리처럼 공연에서 관객들의 열렬한 반응을 즐길 수 없으며, 그렇다고 해서 즐기는 것처럼 연기하며 사람들을 속이는 것도 싫으니 어찌하면 좋냐는 내용의 비통함을 적어 놓기도 하였다.[65][66]

프레디는 공연이란 하나의 '쇼'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퀸 초기 때부터 적자를 보더라도 공연 조명과 의상에 예산을 가장 많이 쏟아부었다고 한다. 1970년대 후반부터 등장하는 알록달록한 조명부터 후기에 사용하던 거대한 조명 장치 등 화려한 조명이 퀸 공연의 또다른 트레이드 마크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1970년대 초반에 멤버들이 입고 있는 화려한 날개옷과 강렬한 화장도 모두 프레디의 취향이며, 다른 멤버들이 밝히길 프레디가 계속 화려한 옷들을 입으라고 강요해서 어쩔 수 없이 입게 되었다고 한다.
1985년 라이브 에이드에서의 관중 조련
공연 중간에 목을 풀 겸 독특한 소리[67]를 낸다. 이 부분에서 관객들은 공연의 '적극적인 참여자'가 되어 프레디 머큐리가 외치면 관객들이 즉각적으로 호응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특히 라이브 에이드 공연에서의 'Ay-Oh'는 전체 공연 중 가장 최고의 순간 중 하나로 손꼽히며, 라이브 공연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이 장면은 프레디 머큐리의 무대 장악력과 퀸의 라이브 퍼포먼스가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중 조련의 역사를 살펴보자면, 1975년 일본 나고야에서의 공연에서부터 관중과의 보컬 교류가 존재했었고, 이후 1978년~1982년부터 본격적으로 형태가 잡혀갔다. 그리고 1985년 리우데자네이루에서의 공연부터는 'Ay-Oh'라는 단어가 생겨났다. 특히 1986년 웸블리 공연의 관중 조련 영상은 2012 런던 올림픽 폐막식에서 당당히 한 부분을 차지하기도 했다. #

3.3. 작곡가로서

1985년 발매한 One Vision의 제작 과정[68]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선율을 마음대로 만들어 낼까 감탄하게 만드는 천재 작곡가로, 퀸의 히트곡들 중에서도 프레디 머큐리의 작품이 많다. 퀸 결성 때부터 브라이언 메이와 더불어 많은 곡을 작곡했으며, " Bohemian Rhapsody"나 " Don't Stop Me Now", "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69], " We Are the Champions", " Somebody to Love", " Killer Queen"[70], " I Was Born to Love You", " Love of My Life" 등 퀸의 수많은 대표곡들이 프레디의 작품이다.

다양한 장르의 시도 및 혼합이 싱어송라이터로서의 프레디 머큐리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이다. 초창기 1, 2집 시절에는 블루스의 향기가 나는 헤비한 하드 록 작곡에 치중했고, 그 이후 각종 발라드를 통해 피아노 발라드 스페셜리스트로도 자리매김했다. 그 외에도 프로그레시브 록, 가스펠, 팝, 디스코, 로커빌리, 오페라 등 다양한 음악을 시도했다. 디스코 쪽은 기존의 퀸 스타일과는 거리가 있었던 < Hot Space>나 솔로 앨범 1집인 < Mr. Bad Guy>에서 두드러진다. 다양한 장르가 융합된 노래의 가장 대표적 예시가 바로 대표작 " Bohemian Rhapsody"로, 이 노래는 여러 장르를 합쳐 프로그레시브 록과 비슷한 전개를 주어서 1970년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71]

대중적이고 기억하기 쉬운 멜로디를 뽑아내는 솜씨 또한 아주 일품이며,[72] 그러면서도 흔히 들을 수 있는 대중음악에 비해 특이한 전개, 수 차례의 조바꿈 등 복잡한 구성을 음악에 녹여내곤 했다.[73] 반면 폴 매카트니, 지미 페이지 등의 선배 록스타들이 그러하듯 프레디 머큐리 또한 음악을 정식적으로 배우지 않았기에 악보를 거의 볼 줄 몰랐다.[74] 퀸 멤버 및 관계자들의 말에 의하면 프레디는 자신이 만든 곡을 일반적인 악보 형식이 아닌 그만이 알아볼 수 있을 법한 이상한 기호로 종이 여러 장에 적어 스튜디오에 가져왔다. 대부분의 노래는 피아노로 작곡했는데[75], 작곡하는 것도 좀 특이한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오랫동안 피아노 앞에 앉아 머리를 싸매거나 고뇌하는 게 아니라, 멜로디가 떠오르면 녹음하지 않고 머릿속에 넣어둔 후 나중에도 그 선율이 남아있으면 그제야 녹음하고 작곡을 시작한다. 선율이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는 건 그 선율이 허접해서 기억할 가치가 없어서라고 한다.

작곡가로선 1970년대 중후반기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 음악 작업에 매우 소홀해졌고, 게이 클럽의 음악에 영향을 받은 가벼운 댄스 음악으로 일관하다 보니 < Hot Space>와 같은 앨범이 등장했고, 1970년대 곡들의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가 많았다.[76] 하지만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1980년대 후반기부터 다시 창작열을 불태워 < Barcelona>나 < The Miracle>, < Innuendo>와 같은 명반들을 써냈다.

본인이 작곡을 하고 나서도 로저 테일러 존 디콘이 작곡을 할 때면 곁에서 기꺼이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77] 다만 브라이언 메이는 작곡에 관한 본인만의 확고한 신념과 방식이 있어서 프레디의 도움이 굳이 필요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서로 같이 의견을 통일시키려고 하다 보면 꼭 싸움이 터졌다고 한다.

3.4. 연주자로서

1986년 웸블리 스타디움에서의 Seven Seas of Rhye 라이브
퀸에서 리드 보컬 포지션 외에 피아니스트로도 활약했는데, 정확한 리듬감이 그의 연주에서 가장 차별적인 특징이다. 브라이언 메이에 따르면 프레디 머큐리가 작곡 후 녹음을 할 때 피아노 연주를 처음 깔고 시작하는데 메트로놈도 없이 그냥 자기 맘대로 한큐에 녹음하는데 그 박자가 메트로놈을 놓고 친 듯이 한 치도 틀리지 않고 정확해서 마치 드러머가 피아노를 치는 듯했다고 설명하였다.[78]

건반악기 신디사이저를 주로 활용하는 록 밴드에서 그랜드 피아노는 그다지 흔한 물건은 아니었지만 프레디는 그랜드 피아노의 사운드를 선호해서 스타인웨이앤드선스를 스튜디오나 공연에서 활용했다. 존 디콘이 " You're My Best Friend"를 작곡했을 때 프레디에게 월리처 일렉트릭 피아노의 연주를 부탁했지만 프레디는 그랜드 피아노를 놔두고 왜 그런 악기를 쓰냐고 거절해서 결국 존 디콘이 직접 연주해 녹음하기도 했다.[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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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디 머큐리가 사용했던 Yamaha G2 Grand Piano
한편, 개인적으로 특히 야마하의 G-2 베이비 그랜드 피아노를 애용했다고 한다. 해당 그랜드 피아노는 머큐리가 1975년 자신의 음악을 위해 이상적인 악기를 찾겠다며 약 6개월 간의 철저한 조사 후 구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해당 피아노로 " Bohemian Rhapsody"의 오페라 파트와 피아노 파트를 작곡하기도 했다.[80]

하지만 프레디 머큐리 본인은 스스로의 연주 실력을 그다지 맘에 들어하지 않았고, 1982년 Hot Space Tour부터는 직접 연주하는 대신 프레드 멘델, 마이크 모란과 같은 세션 뮤지션들을 적극 활용하게 되었다. 또한 후기 라이브에서도 피아노에 앉아있는 대신 무대를 돌아다니며 관객을 이끌어가는 방식을 택함에 따라 공연에서의 건반 연주도 라이브 한정 세션맨이었던 스파이크 에드니에게 거의 떠넘겨지다시피 하게 되었다.[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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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 연주 中
악기는 주로 피아노를 다뤘으나, 기타도 자주 연주했다. "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 때만 연주하는데 6개의 코드를 연주했다.[82][83] 참고로 1982년의 Hot Space Tour까진 12현 통기타[84]로 연주했으나, 84년 The Works 투어부터 펜더 텔레캐스터로 변경했다.[85] 기타 실력은 본인 스스로 밝혔듯이 수준급과는 거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브라이언 메이의 말에 따르면, 프레디 머큐리가 머릿속에서 떠오른 기타 아이디어를 그에게 설명할 때 기타를 붙잡고 안되는 연주를 시도하다가 피아노로 뛰어가곤 했다고 전해진다.

4. 디스코그래피

4.1. 스튜디오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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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앨범
발매일 제목 리드 싱글 UK Charts Billboard 200 총 판매량
1985.04.29. Mr. Bad Guy I Was Born to Love You 6위 159위 500,000 ~ 1,000,000장
1988.10.10. Barcelona Barcelona 25위[86] - 1,000,000 ~ 2,000,000장

4.2. 컴필레이션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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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필레이션 앨범
발매일 제목
1992.11.16. The Freddie Mercury Album
2000.10.23. The Solo Collection
2006.09.04. Lover of Life, Singer of Songs
2016.09.02. Messenger of the Gods: The Singles
2019.10.11. Never Boring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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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 & 프레디 머큐리 & 존 디콘[87]
2014년 마이클 잭슨과의 듀엣 리믹스로 발매된 There Must Be More To Life Than This
  •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과 친분이 있어서 여러 번 조우했다. 마이클이 프레디의 팬임을 자처해서 80~82년 퀸의 공연에 여러 차례 찾아오기도 했다. 참조 같이 세 곡[88]을 작업하기도 했으나 스케줄 조정에 실패하여 생전에 완성곡이 발매되지는 않았다. 마이클 잭슨이 녹음 스튜디오에 애완 라마를 계속 데려와서라고 한다.[89]이후 두 사람은 소원해진 것으로 보이는데, 프레디는 인터뷰를 통해 마이클 잭슨 Thriller로 큰 성공을 거둔 이후 매우 바빠졌고 프레디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조금 소원해졌다고 말했다. 프레디의 퍼스널 어시스턴트였던 피터 프리스톤에 의하면 프레디도 마이클에게 경외심을 가졌을 정도로 마이클을 좋아했다고 한다. 퀸 결성 전부터 이미 하드록을 좋아하는 룸메이트들에게 잭슨 파이브의 "I Want You Back"의 굉장함을 소리 높여 설명했다고. 한편, "Another One Bites The Dust"가 빌보드 싱글차트 1위를 달성하는 데에 마이클 잭슨의 조언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로저 테일러가 밝힌 바에 의하면 본래 퀸은 해당곡의 히트 가능성을 낮게 보며 싱글 발매 계획을 세우지 않았으나 마이클 잭슨이 반드시 크게 히트할 것이라고 자신들을 설득하여 결국 내놓게 된 것이라고 한다. 현재 이 둘은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뛰어난 단일 인물이 누구인가?' 논쟁에서 여러 아티스트들과 더불어 자주 언급되는 인물들이 되었다.
  • 밴드가 성공궤도에 오르면서 멤버들끼리 자잘한 트러블도 잦았는데, 그중에서 프레디는 브라이언 메이와 제일 마찰이 잦았다고 한다. 프레디와 브라이언이 싸우는 방식은 좀 웃겼다고 전해진다. 프레디와 브라이언이 사소한 말다툼으로 시작해서 점점 서로 목소리가 커지다가 브라이언이 냉소적으로 프레디가 상처 받을만한 말을 하면 프레디는 빡쳐서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그러다가 몇시간 뒤에 다시 프레디가 돌아와서 어영부영 화해를 하고 다시 하던 일에 집중했다고 하는데, 그렇게 싸우고 있으면 주위 대부분의 반응이 '브라이언이 심한 말 할만 했네'였다고. 프레디가 주위 사람들이 납득하지 못하게 감정적으로 화냈던 적이 많았던 걸로 여겨진다.[90] 반면 로저 테일러와는 성격이 비슷하고 사적으로도 친구라서 로저가 프레디에게 작곡 관련으로 도움을 많이 받았고, 존 디콘과는 음악 쪽으로 성향이 비슷해서 마찰이 거의 없었다.[9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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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플랜트 & 프레디 머큐리
  • 해외에서는 레드 제플린의 보컬리스트이자, 프레디 머큐리의 롤모델과 다름없는 로버트 플랜트와 자주 비교당한다.[93][94] 두 명 다 록 보컬리스트 역사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실력자들이며, 활동 시기가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않고,[95] 당시 기타와 보컬의 완전한 분리를 시도했던 아티스트들이기에 그런 듯하다. 그러나 프레디와 로버트의 보컬 스타일은 완전히 다르기에 비교할 수가 없으며[96], 애초에 양쪽 다 서로의 자질과 실력을 인정하는 마당에 극성 팬들의 비교는 성립될 수가 없다. 또한 이 정도 수준이면 비교는 사실상 무의미하며,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준이다. 또한 이 두 보컬은 로니 제임스 디오와도 비교되기도 한다.
    • 두 아티스트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레드 제플린과 퀸이 모두 현역이던 때, 프레디 머큐리와 로버트 플랜트는 어느 공원의 벤치에 둘이 앉아서 ”우리가 보컬리스트로서의 생명이 끝나면 뭘 하면서 살아가야 할까?”라는 주제로 토론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암울한(?) 주제와 별개로 프레디 머큐리는 죽기 직전까지 최정상급의 가창력을 유지했고, 로버트 플랜트는 70대 중반인 현재까지 4옥타브 대의 음역을 유지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한다는 점[97] 때문에 그의 요절을 더욱 안타까워하는 팬들이 많다.
  • 내성적인 성격과는 별개로 행동하는 면에 있어서는 무척 적극적이고 활발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침대에 누워서 두 눈만 똘망똘망 뜨고 있는 그런 게으른 짓은 용납을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고. 가만히 앉아 있거나 누워 있는 걸 싫어해서 책 읽는 것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몸을 움직이든 무슨 일이든 항상 해야 스스로에게 만족감을 느꼈다고. (프레디 머큐리 언톨드스토리 다큐 참조)
  • 1977년에 퀸이 Wessex 스튜디오에서 We Will Rock You 녹음을 하고 있을 때 펑크 록 밴드 섹스 피스톨즈 시드 비셔스가 프레디에게 시비를 건 적이 있다. 화려한 음악 스타일과 대중적 성공을 거둔 스타밴드들을 싫어했던 펑크 록 밴드 섹스 피스톨즈에서 베이스를 담당했던 시드 비셔스에게 톱스타 프레디 머큐리가 좋게 보일 리는 없었을듯. 스튜디오에서 프레디와 마주친 시드 비셔스는 "어이. 네가 관객들 앞에서 발레나 춰야하는 프레디라는 놈이군"[100] 이라며 괜히 시비를 걸었는데[101], 프레디는 "이봐, 사나운 친구여. 우리는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라네."[102]라고 말하며 유들유들하게 넘어갔다. 앞뒤 안 가리고 덤벼드는 또라이같은 시드 비셔스의 성격상, 만약 프레디가 그때 공격적으로 응수했다면 폭력적인 상황으로 악화될 수도 있었는데, 프레디가 굳이 같은 수준으로 맞대응하기보단 부드럽게 넘긴 것.[103] 퀸과 섹스피스톨즈는 애초부터 서로 추구하는 음악성이 완전히 다른데다가, 섹피 멤버들과 달리 퀸 멤버들은 영국 중산층 집안 출신이었고, 다들 대학도 나온 사람들이다. 전형적인 영국 뒷골목 양아치 스타일이었던 섹스 피스톨즈 멤버들 눈에 퀸은 완전히 대척점에 서 있는 밴드였으니 좋게 보였을 리가 만무하다. 그러나 이는 시드 비셔스 한정이며, 시드 이외의 다른 섹피 멤버들은 퀸과 나쁘지 않은 관계였고, 서로의 음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브라이언 메이는 훗날(2017년) 섹스 피스톨즈의 기타리스트 스티브 존스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인 <Jonesy's Jukebox>에 출연하여 스티브와 함께 웃으며 옛 기억을 회상하기도 했다.
  • 세간엔 게이 양성애자라고 알려져 있지만 본인은 정확히 밝힌 적이 없다.[104] 다수의 팬들이나 언론들은 그의 연애경력을 보아 그냥 양성애자라고 흔히들 보고 있는 듯하다.[105] 프레디 머큐리는 대학의 명물이었고 그의 성적 지향을 친구들 대부분이 알고 있었다고 한다. 잔지바르에서 태어난 특이한 인종의 그가 화려한 옷과 장신구를 걸치고 다니며, 매일같이 깔깔거리며 웃고 '달링' 같은 말들을 남자들에게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다녔었다. 대학에 다닐 때는 무척 화려하고 밝은 성격이었다고 한다. 또한 언론이나 외부에 자신의 성적 지향이나 개인사를 밝히는 걸 극도로 꺼렸다. 원래 언론과 친한 상황도 아니었거니와 프레디 본인이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하는 성격이었던 걸로 전해진다. 특히 성적 지향 쪽은 주위에 밝히길 굉장히 꺼렸으며, 평전에 의하면 죽을 때까지도 부모님에게까지 자신의 성적 지향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부모님이 프레디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같이 살고 있는 애인 짐에 대해 어떻게 둘러대야 할지 곤란해했다. 물론 프레디의 부모님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대충은 프레디의 성적 지향에 대해 눈치채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1987년 자신의 매니저 폴 프렌터가 더 선에 프레디의 사생활과 에이즈로 인해 전 애인이 죽었다는 것을 거액을 받고 팔아넘겼을 때 극도로 분노했으며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때 이후로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지도 않았다고 한다. 폴 프렌터 역시 프레디가 죽기 3달 전인 1991년 8월 에이즈로 인해 사망했다.
  • 1970년대 브라이언과 메리 오스틴은 몇 번 데이트를 했는데 프레디가 메리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고 브라이언은 진지한 관계는 아니었던 메리를 수줍음이 많던 프레디에게 흔쾌히 소개해준다. 소개로 알게 된 여성 메리 오스틴과 사귀며 동거까지 하였으나 프레디가 다른 남성과 불륜을 가졌고 그 사실을 1976년 메리에게 알리며 헤어졌다.[106] 그렇지만 메리와는 헤어지고 나서도 좋은 사이를 유지했고 프레디가 본인의 유일한 '친구'라며 깊이 신뢰했다.[107] 프레디와 사귀던 애인들 중에 메리를 질투해서 그걸 항의하다가 프레디와 헤어진 사람들도 꽤 있을 정도. 프레디 역시 누구도 메리를 대신할 수 없다고 늘 입버릇처럼 말했고 가족 이상으로 신뢰하는 전 애인이자 친구였기 때문에 프레디가 죽고 나서 런던의 대저택을 상속받았다. A Night at the Opera에 실린 "Love of My Life"라는 유명한 발라드곡 역시 메리 오스틴에게 바치는 노래였다. 한 평전에 따르면[108] 후일 1980년대 중반에는 오스트리아 출신 여배우 바바라 발렌틴과 잠시 사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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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허튼
  • 프레디가 가장 오랫동안 애인 관계를 유지하며 동거했던 사람은 짐 허튼으로 1983년에 만나 사랑에 빠졌으며, 1985년부터 1991년 프레디가 죽을 때 까지 함께 했다.[109] 그들의 관계는 대중에서 숨겨졌기 때문에 종종 프레디의 정원사 내지 이발사로 소개되었으나 투어마다 같이 따라 갔었다고 한다. 그 이외에 프레디 생일파티 영상에서도 자주 보인다. 프레디의 40세 생일 때 법적으로는 인정 못받았지만 부부의 연을 맺었고, 오른손 약지에 커플링을 끼기 시작하였다. 독일 방문 중엔 시장 한복판에서 짐 허튼 품으로 뛰어든 프레디 때문에 그는 잠시 주변을 살펴보며 식은 땀을 흘려야 했었다고. 짐은 1987년 프레디의 HIV 감염 사실을 알았으나 계속 함께했고 결국 그도 1990년에 HIV 감염사실을 알게되었지만 이미 투병생활로 피폐해진 프레디에게 그 사실을 숨겼다. 하지만 두번째 검사 결과는 프레디에게 알렸고 소파에 누워있던 프레디는 'The Bastards'(이 개자식들)라고 중얼거렸다고. 프레디는 짐 허튼에게 50만 달러의 상속을 남기고, 짐 허튼과 살고 있던 자신의 런던 대저택을 메리 오스틴에게 상속하며 짐 허튼이 집에 계속 머물 수 있도록 하였으나 그의 사망 이후 짐 허튼은 메리에 의해 강제로 집에서 쫓겨나야 했다.[110][111]짐 허튼은 2010년에 폐암으로 사망하였다. 참고로 짐 허튼은 1995년 자신과 프레디의 삶에 대한 회고록 <Mercury and Me>를 출판했다. 아무래도 프레디 머큐리를 우상화 하는 경향의 사람들이 읽기엔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면모가 드러나는 부분이기 때문에 호불호가 갈리는 모양.[112]
  • 강렬한 콧수염과 독특한 무대 매너 때문에 굉장히 호쾌하고 터프했을 것처럼 보이지만, 짐 허튼에 따르면 무척 수줍음이 많고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었으며, 또한 굉장히 감성적이었다고 한다. 한번은 크게 싸움을 하고 하루종일 침묵으로 일관하던 프레디에게 36개의 블루 문 장미를 가져다 주자 그제서야 마지못해 풀었다고 한다. 파파라치식으로 달려드는 언론을 피해 많은 연인들에게 의지하곤 했지만 돈을 받고 사생활을 언론에 넘긴다든가 하는 식으로 배신당하면서 상처를 많이 받았다.
  • 퀸의 드러머인 로저 테일러와 작은 옷, 장신구 가게를 하기도 했다. 어느 정도 생활비를 벌려고 여기저기 손을 써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프레디는 장사를 할 만한 타입은 아니었다고 한다. 이때의 일화가 있는데, 가게를 보던 도중 프레디 머큐리가 입던 재킷을 벽에 걸어놓았는데, 한 손님이 프레디의 재킷을 맘에 들어했다. 마침 프레디는 잠깐 외출 중이어서 로저만 있었는데 손님에 재킷을 맘에 들어하자 푼돈을 받고 그것을 팔아버렸다. 잠시 뒤에 돌아온 프레디는 로저가 자신의 재킷을 팔아버린 걸 알고 펄쩍 뛰면서 화를 냈고 직접 재킷을 되찾아왔다고 한다. 어쨌든 장사는 시원치 않았고, 오래 지나지 않아 가게를 접게 된다.
  • 오페라와 발레 등 고전 예술 장르를 좋아했으며, 성악에도 관심이 많았다. 파바로티도 좋아했었다. 다큐 '프레디 머큐리, 가려진 삶'에 의하면 특히 프레디는 파바로티의 공연을 직접 듣고난 뒤 자신과 동행한 스태프에게 '세계 최고의 목소리를 들었다'라고 쉴새없이 흥분했었다고 한다. 또한 같은 다큐에서 언급하기를, 프레디가 바르셀로나가 발표될 당시에 파바로티는 이 곡이 ''오페라를 단순화시킨 곡"이라며 탐탁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하지만 프레디 사후에는 이래저래 잘 풀린 모양인지 파바로티는 퀸 멤버들과 공연을 했었다. 노래는 " Too Much Love Will Kill You". 브라이언이 영어로 부르고 파바로티가 이탈리아어로 불렀다. 고음역대의 창법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이런 프레디의 취향은 그가 작곡한 노래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 워낙 열정적이고 강렬한 이미지 때문에 덩치가 큰 걸로 기억되지만, 실제로는 177cm로 퀸 멤버 중 키가 제일 작다.[113] 하지만 전신 사진을 보면 상체와 다리의 비율이 3:7로 보일 정도로 다리가 매우 길어서 신장이 커보였다고 한다. 더군다나 트레이드마크 수준으로 유명한 복장인 민소매와 하얀색 배바지를 입으면 기이할 정도로 다리가 더 길어보였다.
  • 2011년 9월 5일에 탄생 65주년을 기념하는 구글 두들이 만들어졌다. 로고의 재생 버튼을 누르면 " Don't Stop Me Now"의 1절이 영상과 함께 나오며 영문 자막으로 가사도 함께 볼 수 있다.
  • 튀어나온 입과 뻐드렁니에 대한 상당한 컴플렉스가 있어서[114] 웃을 때도 입을 가리고 웃고 수염도 그것을 가리기 위한 일환으로 길렀다고 한다.[115] 1980년대 말엔 면도를 했는데[116] 그러나 1989년부터는 콧수염뿐만 아니라 턱수염까지 길렀었다.
  • 퀸 평전에 따르면 잔지바르 시절의 과거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공연 직후 프레디의 동창들이 찾아왔는데 "죄송하지만 저는 귀하가 누군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잔지바르 시절이나 인도에서 유학하던 시절 이야기를 절대 스스로 입에 담지 않았을 뿐더러 본명도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퀸의 홍보담당으로 일했던 직원은 십 년 넘게 퀸의 멤버들과 같이 일했는데 프레디가 죽고 나서야 프레디의 본명이 파로크 불사라였다는 걸 알았다고. 상술했다시피 프레디는 퀸으로 데뷔하고 나서야 본인의 이름을 프레디 머큐리로 개명하는데, 대학시절에는 "프레디 불사라'라는 이름으로 그냥 썼다고 한다. 근데 동창들의 증언에 의하면 '불사라'라는 성을 밝히는 걸 매우 꺼렸다고 한다. 풀네임이 뭐냐고 물어보면 그냥 어물쩍 넘어가는 일이 많았다고.. 이쯤 되면 본인이 고향에서 지내던 시절이나 인도에서 지내던 그 시절을 그냥 흑역사라고 생각했던 듯. 인도야 그렇다 쳐도 잔지바르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건 1964년에 잔지바르의 아랍왕조가 흑인에 의해 뒤엎어지면서 아랍인들과 인도인들이 대거 재산을 몰수당하고 쫓겨났는데 프레디 머큐리의 가족들도 인도계였기 때문에 덩달아서 쫓겨났던 경험 때문이었다는 게 정설. 그래서 그런지 시사인에 따르면 잔지바르에는 프레디 동상 하나 없고 추모열기도 거의 없다고 한다. 몇몇 백인과 팬들만 생가터를 기웃거린다고. 덕분에 그의 출생신고서라든지 여러 문서도 흔적이 없다. 이렇게 묻혀지던 잔지바르이긴 한데 그가 죽으면서 생가를 찾으러 온 관광객이 많아서인지 엉터리로 생가라고 뻥치는 현지인도 많다고 한다. 그가 태어난 생가는 실제로 남아있지 않다. 어릴 적에 살던 다른 집이 남아 일본계 사업가가 사서 호텔로 만들어 프레디 머큐리 어릴 적 살던 집으로 홍보하지만 오래 전에 이미 개조되어 어릴 적 흔적은 전혀 없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reddie_Bronzestatue_rueckansicht.jpg
몽트뢰 레만호의 동상
  • 1984년 9월 22일의 독일 하노버 공연에서는 " Hammer to Fall"을 부르던 중,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노래를 중단하고 관계자들의 부축으로 피아노에 겨우 앉은 뒤, " Bohemian Rhapsody", " We Will Rock You", " We Are the Champions"만을 부르고 공연을 중단해버렸다. 이때 브라이언이 당황하였는지 "We Will Rock You"의 기타 솔로 파트를 조금 더 일찍 연주해 버렸다.
  • 라이브에서 고음을 조금씩 낮춰 부르는 모습이 자주 등장하는 편이다. 역대 최고를 다툴 음색과 목청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성대의 내구성을 약하게 타고난 데다 정석적인 트레이닝을 전혀 거치지 않은 프레디의 목소리는 투어 후반으로 갈수록, 또 커리어 후반으로 갈수록 쉽게 피로가 누적되고 빠르게 지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84년 전후로는 자기관리 역시 좋지 않았다고 알려지고 있다. 때문에 좋은 컨디션을 투어나 공연 내내 유지하는 데 무리가 오면서 점차 스스로 목을 사리게 된 것이지, 고음을 부르는 것 자체를 즐기지 않았던 가수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실제로 고음에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던 77-78년의 News of the World 투어와 최전성기인 1979년의 Crazy Tour, 1980년부터 1982년 여름까지의 투어[121]를 보면 프레디가 원곡에도 없는 고음 애드립들을 섞어가며 노래를 더 빡세게 불러대는 모습을 자주 관찰할 수 있다.
  • 고음을 피하는 경향이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곡은 발표 이후 대부분의 공연에서 마지막 곡으로 등장했던 " We Are the Champions"이다. 1절의 'But I've come through'(B♭4)는 컨디션이 좋지 않았을 때도 성공할 때가 있었지만, 'And we'll keep on fighting till the end'에서 'Fighting-'부분은 3옥타브 도(C5)로 라이브에선 대부분 2옥타브 솔(G4)에서 라(A4)까지만 올렸다. 그리고 하이라이트인 매 코러스마다 등장하는 "We are the champions, we are the champions(Bb4)!" 를 부를 때면 프레디는 한 옥타브 아래를, 드러머인 로저 테일러와 기타리스트인 브라이언 메이가 원음을 내는 경우가 많다. 코러스를 모두 원음으로 부른 라이브는 현존하는 음원들 중에서는 1985년 라이브 에이드 공연 뿐이다.[122] 목을 험하게 사용하는 프레디의 가창 방식 상 마지막에 부르는 곡에 가장 취약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노래의 하이라이트인 만큼 팬 입장에서 상당히 아쉬운 대목임은 분명하다. # 일례로 컨디션이 좋기로 유명한 1981년의 몬트리올 라이브에서도 1분 즈음에 등장하는 해당 파트를 저음으로 깔아부르고 있다. 아무래도 같은 곡에서 등장하는 같은 높이(Bb4)의 다른 고음들을 무난하게 처리할 만큼 상태가 좋은 공연들에서도 한결같이 낮춰 부르기를 고수하는 것을 보면 못한다기보다 일부러 사린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팬들 입장에서는 아쉬운 부분. # 이름높은 라이브 에이드 공연에서는 목소리 최전성기가 살짝 지났고, 목에 혹이 있어 의사가 말렸음에도 공연 당일 유난히도 좋았던 컨디션과 짧은 공연시간, 투어 휴식기라는 이점을 살려 첫 코러스의 C5와 위에 언급한 3차례의 Bb4s 노트를 모두 불러낸 바 있다. 사실 두 번째와 마지막 코러스에서 약간의 음정 불안이 드러나긴 하는데, 이는 부틀렉의 사운드로 들을 때나 확연하지 방송에서는 로저 테일러의 완벽한 고음 하모니에 거의 묻혀 버린다.
  • 1984년부터 1986년까지의 투어 동안에는 대미지의 누적과 미흡한 자기관리로 인해 성부가 바리톤에 가깝게 내려갔고, 투어 초반이 지나면 고음이 점차 버거워져 로저 테일러의 도움을 자주 받곤 했다.[123] 거꾸로 이야기하면 낮아진 성부로도 고음역이 대부분 커버되는 투어 초반의 공연들은 정말 귀가 즐겁다는 뜻도 된다. 어쨌거나 라이브 에이드 공연의 경우 위에 서술한 것처럼 20분 남짓한 짧은 공연 시간과 The Works Tour을 마치고 가진 2달 가량의 휴식 덕에 당시 공연들의 평균치를 아득하게 뛰어넘는 화려한 퍼포먼스를 들려주지만, 대체로 당시, 특히 1984년도 9월 즈음의 콘서트들 중에는 커리어 최악의 기량을 선보인 적도 적지 않다. 다행히도 1985년으로 접어들면서 조금씩 목소리 관리에 신경을 기울인 것인지 상태가 호전되기 시작하고[124], 1986년의 Magic Tour에서는 긴 셋리스트와 빡빡한 일정[125]이라는 난관에도 오히려 투어 막판에 상태가 반등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기대 이상의 공연을 여럿 남기기도 했다.
  • 생전 일본에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정확히는 프레디뿐만 아니라 퀸 멤버 전체가 일본에 상당히 호의적이었는데 3집 전까지 그리 큰 인기가 없었던 퀸을 영국을 제외한 유일하게 호의적이었던 나라가 바로 일본이었고 머나먼 이국의 자신들을 좋아해주는 그런 일본 팬들의 마음에 감동 받아 5집의 마지막 트랙을 " Teo Torriatte (Let Us Cling Together)" 라는 일본어 가사가 포함된 일본풍 노래를 넣어 팬들의 사랑을 감사로 보답했다. 또 훗날 1987년에는 " La Japonaise"라는 일본어로 부르는 곡을 < Barcelona> 앨범에 수록하기도 했고 애인인 짐 허튼과 일본여행도 자주 갔으며 1976년 일본 투어 때는 기모노를 입고 공연을 하기도 하였다.[126] 또한, 저택의 100평 규모의 정원을 일본식으로 꾸미고는 정원 가운데에 만든 다실(茶室)에서 곡을 썼다. #
  • 각 투어 때 마다 복장이 꽤나 달라지는데 1970년대 초중반에는 날개옷과 유니타드를 입었고, 1977년, 1978년 뉴스 투어에서는 레오타드 위에 가죽옷을 걸치다가 5월 6일 영국 스태퍼드부터 재즈 투어까지 멜빵이 달린 가죽바지에 검은 가죽 재킷을 걸친다.[127] 1979년 크레이지 투어에서는 재즈 투어와 다른 가죽 재킷에 가죽 바지[128], 빨간 넥타이[129]와 무릎 보호대[130]착용했다. 1980년 게임 투어에서는 크레이지 투어처럼 검은 가죽 재킷, 빨간 넥타이, 빨간 가죽바지에 파란 무릎 보호대를 차다가, 1980년 말 ~ 1981년 플래시 고든 투어에서는 가죽 옷에서 조금씩 벗어나 나시티에 빨간 가죽 바지 또는 백바지를 입었고[131], 1982년 핫 스페이스 투어에서도 나시티에 백바지를 입었다.[132] 그리고 웍스 투어에서는 레슬링복스러운 타이트한 트레이닝복을 입었고, 라이브 에이드에서는 흰 런닝셔츠와 색바랜 청바지를 입었다. 그리고 프레디의 마지막 투어인 매직 투어에선 재킷을 걸치고,[133] 빨간줄과[134] 금색줄이 있는 백바지를 입었다. 또 매직 투어 끝에서는 왕관과 빨간 망토를 걸친다.
  • 신발은 하이탑을 자주 신었는데 레슬링화나 복싱화 혹은 농구화를 신었다.[135] 퀸의 초창기였던 197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진 굽이 높은 부츠나 덧신을 착용하였으나 패션이 조금 바뀌기 시작한 1970년대 후반부터는 오니츠카타이거 하이탑을 자주 신기 시작했고 패션이 완전히 바뀐 1980년대 초반에는 나이키를 신었는데 레슬링화나 농구화를 자주 신었다.[136] 1980년대 중후반부터는 아디다스를 자주 신었으며 라이브 에이드에서 신은 아디다스 헤라클레스 하이탑이 유명하고 Magic Tour에서도 그대로 착용했었다. 후엔 공연을 진행하지 않고 등장했던 공식 석상이나 방송에선 뾰족 구두나 로퍼를 자주 착용했다. 1990년대 초반부터는 에이즈 증상이 발바닥에도 번져 딱딱한 신발을 신을수 없게 되어 운동화를 신었고 그가 등장한 마지막 공식 영상인 These Are the Days of Our Lives의 뮤직비디오에서는 다시 아디다스 하이탑을 착용하였다.
  • 1985년부터 타국에서의 라이브는 마무리 곡인 We Are the Champions직전 We Will Rock You를 부를 때에는 항상 유니언 잭을 펼치는데[137]그 뒷면에는 공연하는 국가의 국기도 펼쳐져 있다.덕분에 타국 관객들의 환호성은 덤. 독일 공연 사진도 자세히보면 흑적황 독일국기가 희미하게 비춰진다.
  • 그의 이름을 딴 소행성이 있다. 프레디가 사망한 1991년에 화성과 목성 사이의 소행성대에서 발견된 '소행성 17473'이 그것이다. 퀸의 기타리스트이지만 천체물리학 박사이기도 한 브라이언 메이가 2016년 9월 4일 프레디의 탄생 70주년 하루 전에 해당 소행성의 이름을 '프레디 머큐리'라고 명명했으며 국제천문연맹(IAU)이 이를 승인하였다. # 이 소행성의 잠정 번호는 1991 FM3. 프레디의 이니셜과 같다.
  • 2022년 4월 제주 애월에 프레디 머큐리 동상이 세워졌다. #
  • 2024년, 프레디 머큐리가 " Bohemian Rhapsody"를 작곡할 때 사용하던 피아노, 그리고 자신의 말기까지 머물러 있었던 저택인 가든 로지가 메리 오스틴에 의해 전부 경매에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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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디 머큐리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songwriters-hall-of-fame-logo_770_441_90_s.jpg 작곡가 명예의 전당 헌액자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이름 프레디 머큐리
FREDDIE MERCURY
입성 연도 2003년 출처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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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5px"
※ 2023년 빌보드 직원들이 록 밴드의 리드 싱어 50위를 선정했다. 따라서 솔로 아티스트는 포함되지 않았다.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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믹 재거 스티비 닉스 프레디 머큐리 로버트 플랜트 커트 코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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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번 데비 해리 조지 클린턴 보노 액슬 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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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스미스 로저 달트리 헤일리 윌리엄스 스티븐 타일러 크리시 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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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스타이프 크리스 코넬 잭 화이트 캐슬린 한나 데이비드 리 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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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모리슨 에디 베더 캐런 오 롭 핼포드 재니스 조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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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요크 루 리드 앤서니 키디스 앤 윌슨 스티브 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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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 제인 그레이스 오지 오스본 구스타보 세라티 체스터 베닝턴 그레이스 슬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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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스트러머 그웬 스테파니 이기 팝 폴 매카트니 브리트니 하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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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암 갤러거 세르이 탄키안 코트니 러브 제리 가르시아 코리 글로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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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스티렌 폴 웨스터버그 데이브 그롤 루벤 알바란 잭 데 라 로차
같이 보기: 가장 위대한 프론트맨 · 가장 위대한 록 가수 · 가장 위대한 알앤비 가수 · 가장 위대한 래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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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빌보드 직원들이 차트 성적이나 판매량 기준이 아닌 영향력, 음악적 유산 등을 고려하여 Top 25를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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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스프링스틴 프레디 머큐리 지미 헨드릭스 엘비스 프레슬리 재니스 조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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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매카트니 믹 재거 척 베리 데이비드 보위 패티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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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트 코베인 스티비 닉스 짐 모리슨 조니 미첼 로버트 플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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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 오스본 액슬 로즈 밥 딜런 보노 데비 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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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 제인 그레이스 조 스트러머 캐슬린 한나 스티븐 타일러 존 본 조비
같이 보기: 가장 위대한 프론트맨 · 가장 위대한 록 가수 · 가장 위대한 알앤비 가수 · 가장 위대한 래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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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Voices of the Century
※ 2001년 영국 BBC 방송이 약 44,756명의 대중들과, 현직 가수들, 음악 전문가를 상대로 조사한 투표를 바탕으로 '20세기의 목소리'를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프랭크 시나트라 엘비스 프레슬리 냇 킹 콜 엘라 피츠제럴드 빙 크로스비
6위 7위 8위 9위 10위
존 레논 아레사 프랭클린 빌리 홀리데이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프레디 머큐리
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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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Greatest Britons
※ 2002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명'을 선정
TOP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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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스턴 처칠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 다이애나 스펜서 찰스 다윈 윌리엄 셰익스피어
<rowcolor=#ffe> 6위 7위 8위 9위 10위
아이작 뉴턴 엘리자베스 1세 존 레논 호레이쇼 넬슨 올리버 크롬웰
11위~100위
<rowcolor=#ffe>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어니스트 섀클턴 제임스 쿡 로버트 베이든 파월 알프레드 대왕 아서 웰즐리
<rowcolor=#ffe>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마거릿 대처 마이클 크로포드 빅토리아 여왕 폴 매카트니 알렉산더 플레밍
<rowcolor=#ffe>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앨런 튜링 마이클 패러데이 오와인 글린두르 엘리자베스 2세 스티븐 호킹
<rowcolor=#ffe>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윌리엄 틴들 에멀린 팽크허스트 윌리엄 윌버포스 데이비드 보위 가이 포크스
<rowcolor=#ffe>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레오나르드 체셔 에릭 모어캠브 데이비드 베컴 토머스 페인 부디카
<rowcolor=#ffe>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스티브 레드그레이브 토머스 모어 윌리엄 블레이크 존 해리슨 헨리 8세
<rowcolor=#ffe>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찰스 디킨스 프랭크 휘틀 존 필 존 로지 베어드 어나이린 베번
<rowcolor=#ffe>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보이 조지 더글러스 베이더 윌리엄 월레스 프랜시스 드레이크 존 웨슬리
<rowcolor=#ffe>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아서 왕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로버트 스콧 이넉 파월
<rowcolor=#ffe>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클리프 리처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프레디 머큐리 줄리 앤드류스 에드워드 엘가
<rowcolor=#ffe>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조지 해리슨 데이비드 애튼버러 제임스 코널리 조지 스티븐슨
<rowcolor=#ffe>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찰리 채플린 토니 블레어 윌리엄 캑스턴 바비 무어 제인 오스틴
<rowcolor=#ffe>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윌리엄 부스 헨리 5세 알레이스터 크로울리 로버트 1세 밥 겔도프 ( 아일랜드인)
<rowcolor=#ffe>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무명용사 로비 윌리엄스 에드워드 제너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찰스 배비지
<rowcolor=#ffe>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제프리 초서 리처드 3세 J. K. 롤링 제임스 와트 리처드 브랜슨
<rowcolor=#ffe>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보노 ( 아일랜드인) 존 라이든 버나드 로 몽고메리 도날드 캠벨 헨리 2세
<rowcolor=#ffe>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J. R. R. 톨킨 월터 롤리 에드워드 1세 반스 월리스
<rowcolor=#ffe>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리처드 버튼 토니 벤 데이비드 리빙스턴 팀 버너스리 마리 스톱스
출처
같이 보기: BBC 선정 최악의 영국인, 위대한 인물 시리즈 }}}}}}}}}

파일:NME 로고.svg 선정 가장 위대한 가수(보컬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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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6px"
※ 2011년 영국의 대중음악 전문지 NME에서 대중들을 상대로 '가장 위대한 가수 Top 20' 투표를 진행. 1,000만 표 이상이 모여 순위를 정했다.
<rowcolor=#fff> 1위 2위 3위 4위 5위
마이클 잭슨 프레디 머큐리 엘비스 프레슬리 액슬 로즈 존 레논
<rowcolor=#fff> 6위 7위 8위 9위 10위
데이비드 보위 로버트 플랜트 폴 매카트니 스티비 원더 아레사 프랭클린
<rowcolor=#fff>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매튜 벨라미 레이 찰스 짐 모리슨 밥 말리 엘튼 존
<rowcolor=#fff>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커트 코베인 스티븐 타일러 믹 재거 마빈 게이 티나 터너
출처 }}}}}}}}}

파일:cos 로고.jpg 파일:cos_로고_다크.png 선정 가장 위대한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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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6px -1px -11px"
※2016년 영화/음악/TV를 주제로 다루는 컨시퀀스 잡지 스태프들이 '가장 위대한 가수 Top 100'을 선정했다.
<rowcolor=#fff> 1위 2위 3위 4위 5위
마이클 잭슨 빌리 홀리데이 프레디 머큐리 아레사 프랭클린 제임스 브라운
<rowcolor=#fff> 6위 7위 8위 9위 10위
휘트니 휴스턴 로이 오비슨 에이미 와인하우스 로버트 플랜트 비요크
11위부터는 문서 참조.
같이보기: 사운드트랙, 힙합, 이모, 인더스트리얼 }}}}}}}}}

파일:롤링 스톤 로고.svg 선정 가장 위대한 보컬리스트 (2008년)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2px"
{{{#000,#ddd ※ 롤링 스톤이 2008년 가장 위대한 보컬리스트를 선정한 순위다.
<rowcolor=#fff> 1위 2위 3위 4위 5위
아레사 프랭클린 레이 찰스 엘비스 프레슬리 샘 쿡 존 레논
<rowcolor=#fff> 6위 7위 8위 9위 10위
마빈 게이 밥 딜런 오티스 레딩 스티비 원더 제임스 브라운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11 - 50위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fff>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폴 매카트니 리틀 리처드 로이 오비슨 알 그린 로버트 플랜트
<rowcolor=#fff>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믹 재거 티나 터너 프레디 머큐리 밥 말리 스모키 로빈슨
<rowcolor=#fff>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조니 캐시 에타 제임스 데이비드 보위 밴 모리슨 마이클 잭슨
<rowcolor=#fff>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재키 윌슨 행크 윌리엄스 재니스 조플린 니나 시몬 프린스
<rowcolor=#fff>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하울링 울프 보노 스티브 윈우드 휘트니 휴스턴 더스티 스프링필드
<rowcolor=#fff>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브루스 스프링스틴 닐 영 엘튼 존 제프 버클리 커티스 메이필드
<rowcolor=#fff>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척 베리 조니 미첼 조지 존스 보비 밴드 커트 코베인
<rowcolor=#fff>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팻시 클라인 짐 모리슨 버디 홀리 도니 해서웨이 보니 레이트
51위부터는 문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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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명반, 명곡, 앨범 커버, 아티스트, 송라이터, 기타리스트, 보컬리스트1/ 2, 베이시스트, 드러머, 듀오 }}}}}}}}}

파일:롤링 스톤 로고.svg 선정 가장 위대한 보컬리스트 (20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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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ddd ※ 롤링 스톤 2023년 새해를 맞아 2008년에 발표됐던 위대한 가수 리스트를 리뉴얼했다.
<rowcolor=#fff> 1위 2위 3위 4위 5위
아레사 프랭클린 휘트니 휴스턴 샘 쿡 빌리 홀리데이 머라이어 캐리
<rowcolor=#fff> 6위 7위 8위 9위 10위
레이 찰스 스티비 원더 비욘세 오티스 레딩 알 그린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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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fff>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리틀 리처드 존 레논 팻시 클라인 프레디 머큐리 밥 딜런
<rowcolor=#fff>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프린스 엘비스 프레슬리 셀리아 크루즈 프랭크 시나트라 마빈 게이
<rowcolor=#fff>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니나 시몬 아델 스모키 로빈슨 조지 존스 메리 제이 블라이즈
<rowcolor=#fff>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폴 매카트니 돌리 파튼 마할리아 잭슨 샤카 칸 행크 윌리엄스
<rowcolor=#fff>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루서 밴드로스 데이비드 보위 베시 스미스 톰 요크 더스티 스프링필드
<rowcolor=#fff>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커트 코베인 밴 모리슨 커티스 메이필드 루이 암스트롱 알리야
<rowcolor=#fff>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에타 제임스 테디 펜더그래스 아리아나 그란데 제임스 브라운 엘라 피츠제럴드
<rowcolor=#fff>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마비스 스테이플스 린다 론스태드 토니 브랙스턴 로드 스튜어트 조니 미첼
51위부터는 링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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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명반, 명곡, 앨범 커버, 아티스트, 송라이터, 기타리스트, 보컬리스트1/ 2, 베이시스트, 드러머, 듀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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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링 스톤이 2011년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투표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록 리드 싱어 10인"을 선정한 것이다.
록 음악이 아닌 재즈, 소울 등 다른 분야의 가수들은 투표에서 제외되었다.
1위 2위 3위 4위 5위
로버트 플랜트 프레디 머큐리 보노 믹 재거 짐 모리슨
6위 7위 8위 9위 10위
로저 달트리 에디 베더 존 레논 크리스 코넬 커트 코베인
같이 보기: 롤링 스톤 선정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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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투표 사이트 The top tens가 투표를 통해 선정한 가장 섹시한 남성 록 가수 순위다.
1위 2위 3위 4위 5위
커트 코베인 액슬 로즈 크리스 코넬 자레드 레토 브루스 디킨슨
6위 7위 8위 9위 10위
존 본 조비 짐 모리슨 프레디 머큐리 M. 섀도우스 빌 발로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엘비스 프레슬리 빌리 조 암스트롱 코리 테일러 제리 캔트렐 데이비드 리 로스
16위 부터는 출처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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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64년 영국으로 이민을 가며 영국 시민권을 취득하였다. 탄자니아에서 태어났으므로 탄자니아 국적도 있어야 하나 복수국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2] 프레디 본인이 에이즈 감염으로 인해 단명한 것과 반대로, 부모님은 두 사람 모두 90대까지 장수하였다. [3] 로저 쿡과 결혼하였으나 이혼하였고, 현재 자말 주크, 나탈리 쿠크 두 명의 자녀가 있다. [4] 1951년 3월 6일 ~ [5] 1940년 12월 15일 ~ 2002년 2월 22일. 오스트리아의 여배우. 프레디의 두번째이자 마지막 이성 파트너로 알려져 있다. [6] 1949년 1월 4일 ~ 2010년 1월 1일. 마지막까지 프레디와 함께했던 동성 연인으로 프레디와 마찬가지로 에이즈에 감염됐으나 이후 완치되어 사인은 폐암이였다. [7] 전설적인 기타리스트인 피트 타운젠드도 이 학교를 나왔다. [8] 부모가 독실한 조로아스터교 신도였다. 프레디 본인은 크게 종교적인 삶을 살지 않았으나 신앙 자체를 버리지는 않은 듯하다. [9] 이 수치는 1984-85년의 건강한 체격일 때였으며, 1980년대 후반에는 90kg까지 증량, 이후 지병으로 인해 다시 감량되었다. [10] 보컬과 키보드 외에도 <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와 같은 곡에서는 세컨 기타로 무대에 서기도 했다. [11] 프레디 머큐리의 롤모델이나 다름 없는 로버트 플랜트가 한 평가이니, 그야말로 할 말은 다 한 셈이다. [12] 오페라틱, 소울, 디스코, 흑인 음악 등. [13] 당장 퀸이 평론가들에게 한창 까일 때에도 멤버들의 세션 실력으로 까인 적은 없었다. [14] 이 노래의 작곡가인 존 디콘은 프레디에게 흑인 음악의 느낌을 담아주기를 원했고, 실제로 발매 후 이 노래를 들은 미국 흑인들은 퀸이 흑인 밴드인 줄 알았다고 한다. [15] 프레디 머큐리와 마찬가지로 하드 록 계열에서 바리톤 성종인 보컬리스트로는 로저 달트리, 액슬 로즈, 데이비드 커버데일 등이 있다. [16] 1970년 로열 앨버트 홀 라이브가 대표적인데, 이 공연 당시 로버트 플랜트는 컨디션이 매우 나쁜 상태였음에도 원키 그대로 곡을 무리없이 소화했다. 여담으로 로버트 플랜트가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안 그래도 높은 원곡보다 더욱 더 높게 부르기도 한다. [17] 이와 비슷한 보컬로는 프레디 머큐리가 영향을 받은 가수인 로저 달트리가 있다. 로저 달트리 또한 성부는 바리톤이지만 음색이 다소 얇은 편이었으며, 당대 기준 매우 안정된 발성을 바탕으로 라이브에서도 3옥타브 대의 고음과 샤우팅, 스크리밍을 원키로 구사하였다. [18] 사실 바리톤이나 테너란 용어 자체가 성악에서 나온 용어인데, 성악가들은 소화하는 음역에 따라 저음은 굵은 음, 고음은 얇은 음으로 나뉘지만 대중 가수들은 발성법이 각자 천차만별로 다르기에 이런 식으로 딱 나뉘지 않는다. [19] 로저 테일러는 "양이 시끄럽게 우는 것 같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 [20] 보통 로저 달트리, 로버트 플랜트와 같이 " 카멜레온같은 보컬"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21] 라이브 투어로는 Crazy Tour부터 유럽 Hot Space Tour까지이다. [22] 사실 이런건 록, 특히 고음 위주로 노래를 부르는 하드 록, 헤비 메탈 보컬리스트들이 예외 없이 겪는 현상이다. 대표적으로 목 관리를 잘 하지 않고 전성기 시절 역량을 다 소화해서 현재는 제대로 된 보컬조차 보여주지 못하는 이안 길런, 액슬 로즈 등이 있다. 굳이 하드 록으로만 국한시키지 않더라도 리암 갤러거 역시 목을 갈아마시는 창법으로 인해 목이 많이 상해서 한때는 액슬 로즈 급으로 보컬을 소화하지 못하다가, 꾸준한 관리와 창법 변경을 통해 현재에는 제2의 전성기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회복하였다. 오히려 프레디 머큐리는 기복은 있었어도 커리어 말기까지 보컬 기량 자체는 거의 떨어지지 않은 케이스다. [23] 반면에 1984년 9월 5일 런던 공연에서는 " Under Pressure"의 3옥타브 라(A5) 파트를 4옥타브 파(F6)로 올려 부른 적도 있다. [24] 선시티 라이브나 슈가르트 공연에서 느낄 수 있다. [25] Sun City (선 시티), 현 남아공 노스웨스트 주에 있는 대규모 콘도, 카지노 시설이다. [26] 참고로 공연은 선 시티 내부의 공연장인 슈퍼 볼에서 진행했다. 실내 공연장으로는 규모가 큰 편이어서 현재까지도 많은 뮤지션들이 공연을 하는 곳이다. [27] 하지만 그때 당시의 뮤지션들은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발하여 남아공에는 공연을 하러 가지 않았는데, 퀸은 아파르트헤이트의 최대 병크인 반투스탄까지 가서 공연을 했기에 언론에서 인종차별 밴드라고 지탄을 받게 되기도 했다. [28] 지역 방송국에서 유출된 화질과 음질이 나쁜 영상은 존재하지만, 공식 발매된 앨범에서는 이 부분이 포함되지 않았다. [29] 여담으로 퀸은 일본 투어에서는 Sheer Heart Attack Tour와 대부분 일본 투어의 첫 날을 제외하면 컨디션이 늘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 때는 퀸의 마지막 일본 공연인 오사카 공연만 제외하면 아주 컨디션이 좋았다. 그런데 하필 도쿄에서는 3차례의 공연을 가졌는데 그 중 가장 컨디션이 좋지 않은 마지막 날 공연만 영상 자료가 남아있다.(물론 도쿄 공연 중 에서지, 실제로는 최악의 컨디션을 자랑하는 다른 The Works 투어에 비하면 꽤나 좋은 컨디션이다.) [30] 라이브 에이드는 사실 프레디가 의사와 상담한 결과 프레디의 목에서 혹이 발견돼서 의사조차 공연을 말렸으나, 프레디가 강행한 것이다. 그럼에도 목에 혹이 난 상태로 3옥타브 도(C5)를 소화한 것은 경이롭다. [31] 이렇다보니 목소리를 덧붙이는 오버더빙이 많은 부분에서 사용되었다. [32] 뉴캐슬에서의 "Bohemian Rhapsody", 영상에서 3분 21초에 3옥타브 도를 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33] 컨디션이 매우 좋은 공연에서도 원곡의 3옥타브 대의 고음을 대부분 2옥타브 후반대로 처리하는 편인데, 못 낼 것 같아서 못 내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체로 컨디션 조절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34] 컨디션이 상당히 안 좋았던 웸블리 공연의 둘째 날 공연에서도 3옥타브 라#(A#5)의 엄청난 고음을 냈다. [35] 다만 프레디 머큐리도 로버트 플랜트처럼 샤우팅스러운 가성을 못 냈던 것은 아니다. It's Late에서의 가성을 들어보면 바로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로버트 플랜트 또한 부드러운 가성을 못 냈던 것은 아니었다. " Kashmir"같은 곡들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 [36] 1986년 웸블리 공연 첫째 날과 둘째 날의 차이에서 볼 수 있다. 첫째 날도 최상의 컨디션은 아닌지라 목소리 갈라짐이 꽤 있었지만 둘째 날처럼 탈진된 목소리는 아니었고 파워풀한 고음을 뿜어내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37] 이는 퀸의 7집 앨범 < Jazz>에 수록된 " Dead on Time"을 들어보면 알 수 있는데, 속도가 거의 랩 수준인데도 발음이 완벽하다. [38] 대표적으로 " Love of My Life", 프레디 머큐리의 감성적인 보컬이 돋보이는 곡으로 유명한 곡이기도 하다. [39] < Hot Space>에 수록된 몇몇 트랙들. [40] 솔로 앨범 < Barcelona> 등 [41] 퀸의 14집 앨범 < Innuendo>에 수록된 " Don't Try So Hard"에서는 1970년대의 보컬이 되돌아왔다고 봐도 될 정도의 미성을 내며, A Kind of Magic에 수록된 " Gimme the Prize"에서는 굉장히 강한 하드 록 분위기에 맞는 탁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42] " Under Pressure" 등. [43] " One Vision"에서의 3옥타브 솔(G5) 부분, " It's Late"에서의 4옥타브 미(E6) 부분 등. [44] 흑인 팝 가수로, 항상 대머리 헤어스타일을 유지하는 걸로 유명한데 프레디 머큐리 추모 콘서트에선 레게 스타일을 하고 나왔다. 히트곡으론 Crazy, Kiss from a Rose, Fly Like an Eagle 등이 있다. [45] 레드 제플린 이전에도 더 후 로저 달트리 피트 타운젠드라는 보컬-기타 듀오가 있긴 했지만, 이를 대중화시킨 것은 플랜트-페이지였다. 또한 애초에 피트 타운젠드는 거의 서브 보컬에 가까울 정도로 보컬에 많이 참가했다. [46] 그 외에 다룬 악기는 "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에서 기타를 연주하거나 일부 곡에서 (대표적으로 " Keep Yourself Alive", " Liar") 탬버린을 두들기는 게 전부이다. 하지만 둘 다 그의 주 악기는 아니었다. [47] " All Dead, All Dead", " Somebody to Love", " Don't Try Suicide", " Bijou". [48] " All God's People". [49] 도나 소토 모레티니의 대중가요 도서 < Popular Singing: A Practical Guide To: Pop, Jazz, Blues, Rock, Country and Gospel, A & C Black>에는 4옥타브 파 (F6)으로 기록되어 있다. [50] 5옥타브 미(E7)은 1981년 2월 16일 공연 <Get Down, Make Love> 부분에서 나온 것이다. 이 노래에서만 4옥타브 솔# (G#6), 4옥타브 레(D6)를 추가로 선보였다. [51] 반면에, 최대 D8까지 선보였다는 정보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프레디 머큐리/음역대 문서를 참고. [52] 0옥타브 도 ~ 4옥타브 시 [53] -1옥타브 파 ~ 4옥타브 라#으로 음역대가 알려진 모든 가수들 중에서 가장 넓다. 하지만 이는 전성기 기준이며, 현재는 목이 엄청 상하고 살이 엄청 쪄서 정글에 있는 것을 다 쳐먹은 것 같은 보컬, 미키마우스가 뀍뀍대는 소리 같다는 혹평을 들으며 팬들에게 폭풍 까임을 당한다. [54] 위의 공연은 라이브 에이드, 아래의 공연은 퀸 완전체 마지막 라이브 공연 Queen Live at Knebworth Park이다. [55] 보통 ‘최고의 프론트맨’을 꼽지면 믹 재거, 로저 달트리, 재니스 조플린, 브루스 스프링스틴, 짐 모리슨, 지미 헨드릭스, 로버트 플랜트, 리암 갤러거 등과 함께 절대 빠지지 않는다. [56] 그래도 더 후처럼 악기를 부수거나 하지는 않았다. " Sheer Heart Attack"을 연주할 때 스피커를 쓰러뜨리는 정도였다. [57] 다만 프레디의 실제 성격은 소심하고 수줍음이 많았기에, 브라이언 메이는 프레디가 로버트 플랜트처럼 행동하더라도 그 이면에는 불안감과 수줍음이 묻어나오는 것이 보였다고 한다. [58] 라이브 에이드의 기획자로, 핑크 플로이드의 벽에서 주인공 핑크를 연기한 사람이기도 하며, 사실 이 사람도 그리 히트를 치지 못했지만 엄연한 뮤지션이다. 아일랜드의 펑크 밴드 Boomtown Rats의 보컬리스트로 활동했었다. [59] 관련 업계인의 증언에 따르면 밥 겔도프는 퀸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퀸의 라이브 에이드 섭외도 공연을 며칠 앞둔 나중에서야 이루어졌다고 한다. 실제로 프레디 머큐리는 퀸 휴식기에 TV 방송으로 라이브 에이드 광고를 보고 자기가 섭외되지 않았다는 사실로 인해 자괴감을 느꼈을 정도였다고. [60] 한국식으로 번역하자면 '이 자식들아, 니들끼리 다 해먹냐?' 정도. [61] Queen’s Live Aid Performance: How Rock’s Royalty Stole The Show [62] 키보드가 아닌 그랜드 피아노로 연주하므로 키보디스트로 서술하지 아니하였다. [63] 이 마이크의 유래는 다분히 우연적이었다. 프레디의 퀸 이전 소속 아마추어 밴드였던 Wreckage 공연에서 마이크를 스탠드에서 분리하던 중 스탠드가 부서지며 마이크에 막대기가 달린 채 분리되어 버렸고, 프레디는 얼떨결에 생겨난 이 새 유형의 마이크를 마음에 들어해 이후 공연에서도 계속 쓰게 된 것이다. [64] 이는 후대에도 전승되어 후배 밴드인 건즈 앤 로지스의 보컬 겸 프론트맨 액슬 로즈가 받침대 없는 특이한 형태의 마이크 스탠드를 쓰기도 했다. [65] 유서 중 해당 부분: "나는 당신들 누구도 속이기 싫다. 내가 공연할 때 100% 즐기는 척하며 속이는 건 (뮤지션으로서) 최악의 범죄라고 생각한다. 무대 위로 올라가기 전에 난 그것이 억지로 가야만 하는 직장 출근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다." "I can't fool you, any one of you. The worst crime I can think of would be to rip people off by faking it and pretending as if I'm having 100% fun. Sometimes I feel as if I should have a punch-in time clock before I walk out on stage." [66] 본인도 빌보드 선정 가장 위대한 프론트맨 순위에 이름을 올리긴 했지만 이건 사실 너바나라는 이름값으로 올라간 것이고 커트 코베인은 유능한 프론트맨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67] 통상적으로는 'Ay-oh' 또는 'Vocal Improvisation'이라고 표기되며, 부틀렉 등에선 'Day-oh'로 표기된다. [68] 본 영상은 로저 테일러의 드럼 트랙과 자신의 보컬 트랙의 화음을 작업하는 상세한 과정을 담고 있는 다큐멘터리 영상이다. [69] 이 곡은 독일의 호텔에서 목욕하다가 악상이 떠올라서 만들었다고 한다. [70] 피아노에 앉은 뒤 약 5분 만에 만들었다고 한다. [71] 이 노래를 구상한 것은 1960년대, 즉 20대 초반부터라고 한다. [72] "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는 프레디의 노래 중 가장 대중적이고 단순한 노래로 꼽힌다. [73] 대표적으로 " Bohemian Rhapsody"나 " Bicycle Race", < Queen II>에 수록된 곡들이 그러하다. [74] 관련 인터뷰. 끝부분에 자신은 악보를 거의 읽을 줄 모른다고 밝힌다. [75] 후기에는 방식이 조금 달라져 80년대 한 인터뷰에서 피아노와 기타 중 무엇으로 작곡하냐는 질문에 '요즘은 머릿속으로 작곡한다'고 대답했다. [76] " It's A Hard Life" 같은 곡들이 이례적으로 1980년대 중반에서 작곡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마저도 70년대에 비해서는 약하다는 반응이 주를 이룬다. [77] 퀸의 대 히트곡 중 하나인 " Radio Ga Ga"도 아이디어와 시작, 그리고 진행은 로저 테일러가 했기에 크레딧으로 올라가 있으나, 후반부에 정식 발매 전에 로저 테일러 몰래 곡을 변형시켰고, 로저 테일러가 그 편집본을 마음에 들어해서 낸 것이 최종본이다. [78] Bohemian Rhapsody 메이킹필름 참조. [79] 이후 인터뷰에서 프레디는 그 전기 피아노를 꺼리는 수준을 넘어서서 이름을 말하는 것도 질색하는 수준의, 거의 경멸에 가까운 반응(전기 피아노라고 부르지도 않고 "그 망할 것"(That damn thing)이라고 그냥 뭉뚱그려 말했다.)을 보였다. 해당 곡은 라이브에서는 프레디가 그랜드 피아노로 연주한다. [80] 2023년, 이 피아노는 메리 오스틴에 의해 경매에서 174만 2000파운드(약 30억 원)에 낙찰되었다. # [81] 가령, 1970년대의 투어에서는 거의 공연의 절반을 피아노에 앉아 보냈지만 마지막 투어였던 Magic Tour의 경우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는 곡은 In the Lap of the Gods...Revisited", " Seven Seas of Rhye", " Bohemian Rhapsody", " We Are the Champions", 단 4곡 뿐이었다. 다만 이는 후반부로 갈수록 공연의 세트 리스트에서 피아노 연주곡이 점점 적어진 탓도 있다. 매직 투어에서는 위의 곡들도 포함해서 피아노 연주곡이 <Tutti Frutti>,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까지, 여섯 곡이었다. [82] 라이브에서 브라이언 메이가 아니라 프레디가 직접 친 이유는 스튜디오 버전의 해당 파트를 녹음한 사람이 자신이기 때문이다. 프레디 머큐리 사후 공연들에선 브라이언이 프레디 파트까지 모두 연주한다. [83] 1982년의 Hot Space Tour의 밀턴 케인스 공연에서 "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를 연주하기 전, 프레디는 "10년 전 내가 기타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코드 3개밖에 없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내가 기타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코드 3개뿐이다."라고 말한 일화가 있다. [84] Ovation 사의 Pacemaker 12-Strings 기타. [85] 텔레캐스터는 본인 소유의 기타로 추정된다. 그런데 프레디 머큐리 사후에 분실되었다고 한다. [86] 1992년 재발매 15위 [87] 1982년 9월 15일, 퀸의 마지막 북미 공연인 로스엔젤레스 잉글우드 공연에서의 모습이다. [88] <Victory>, <State of shock>, < There Must Be More To Life Than This>. 이 중 <State of shock>은 마이클이 프레디의 권유로 롤링 스톤스 믹 재거와 마무리 작업을 거쳐 공개되었다. [89] 2014년 발매된 컴필레이션 앨범 Queen Forever에는 프레디 머큐리와 마이클 잭슨의 데모곡을 합친 There Must Be More To Life Than This를 담아 발매했다. [90] Lesley-Ann Jones가 쓴 프레디 머큐리 바이오그래피 참조. [91] 존이 Another One Bites the Dust를 만들 때 다른 멤버들은 반신반의 했으나 프레디만 유독 좋아했었다. [92] 마찰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존이 You're My Best Friend를 만들 때 프레디에게 일렉트릭 피아노를 연주해 달라고 했는데, 프레디가 멀쩡한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데 왜 저딴 물건을 연주해야 하냐고 극렬히 반대해서 존이 피아노를 연주했다. [93] 로버트 플랜트는 프레디 머큐리를 향해 Great Voice라며 칭찬했으며, 한창 퀸이 평론가들에게 대차게 까이고 있을 때 본인은 퀸을 좋아한다고 했다. 또한 로버트 플랜트와 프레디 머큐리에 따르면 이 둘은 꽤나 친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레드 제플린의 리더인 지미 페이지와 퀸의 기타리스트인 브라이언 메이는 같은 동네에서 같은 초등학교를 나온 동향이기에 이를 통해 친분을 맺었을 수도 있다. [94] 그러나 밴드 대 밴드로서 레드 제플린과 퀸이 비교되는 사례는 거의 없다. 레드 제플린의 음악적 영향력이 워낙 거대하며 퀸 또한 레드 제플린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밴드이기 때문이다. 레드 제플린은 동시대의 거대한 밴드이자 똑같이 영향력이 막대한 밴드인 핑크 플로이드와 자주 비교되며, 그 외 동시대 밴드로는 딥 퍼플, 블랙 사바스와 자주 엮이는 편. [95] 퀸이 데뷔한 1973년 당시 레드 제플린은 5집 Houses of the Holy를 발매하며 당시 The Dark Side of the Moon을 발매한 핑크 플로이드와 함께 최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또한 미국 진출에 성공한 The Game 시기를 퀸의 전성기로 본다면, 퀸이 한창 전 세계에서 인기를 끌고 있을 당시 레드 제플린은 드러머 존 본햄의 죽음으로 인해 해체했을 때였다. 그러나 A Night at the Opera 시기로 따지면 당시 레드 제플린은 Physical Graffiti로 정점을 찍고 서서히 내려가던 시기였다. 즉 주 활동 시기는 고작 5년 정도밖에 차이가 안 나는 셈. [96] 두 보컬 모두 넓은 음역대를 바탕으로 저음과 고음에서 탄탄한 보컬을 보여준 것은 맞다. 그러나 로버트 플랜트는 주로 3옥타브 초중반대의 고음역대에서 허스키하면서도 중성적인 미성 샤우팅을 구사하는 하이 테너의 대명사로 꼽히는 반면, 프레디 머큐리는 주로 2옥타브 중후반대의 중고음에서 폭발적인 두꺼운 미성을 구사하는 로우 테너 혹은 하이 바리톤에 가깝다. [97] 물론 나이 때문에 전성기 시절의 폭발적인 가창력은 거의 볼 수 없으나, 현재의 가창력도 어마어마한 것은 사실이다. [98] 의외로 당시 영국 음악 씬은 굉장히 좁았기에,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뮤지션들이 알고보면 상당히 친한 사이인 경우가 많다. [99] 다만 이런 프레디에게도 절친한 음악가가 있었으니 바로 엘튼 존 로드 스튜어트. 엘튼의 콘서트에 프레디가 게스트로 참여한 적도 있다. [100] "So you're this Freddie Platinum bloke that's supposed to be bringing ballet to the masses." [101] 뜬금없이 발레 이야기를 하는 건 프레디가 초기에 콘서트에서 입었던 발레의상같은 의상들을 비꼰 것이다. [102] "Ah, Mr. Ferocious, we're trying our best, dear.'' [103] 사실 프레디 머큐리도 만만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만약 거기서 치고 받으며 싸웠다면 이기든 지든 결국 손해보는 건 잃을 게 없는 시드 비셔스가 아닌, 이미 톱스타인 프레디 머큐리쪽이다. [104] 언론들의 질문 공세에 자기는 그냥 자신일 뿐이라고 일갈했었다. [105] 메리 오스틴과의 연애가 대표적인 사례이며 80년대 중반에도 바바라 발렌틴이라는 여배우와 사귄 전적이 있다. [106] 남녀 상관없이 애인 관계가 복잡했던만큼 바람 핀 애인들도 많다. 프레디 동성애인 중 한명인 '토니 바스틴'이 프레디가 미국투어를 하고 있을 때 바람피고 있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그를 미국으로 오라며 비행기표를 보냈고 도착해서 프레디를 만나자마자 헤어지자고 한뒤 바로 영국으로 돌려보냈다. [107] 메리 오스틴 역시 나중에 결혼을 했지만 이혼을 했다. 남편과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프레디는 그 아들들의 대부가 되어주었다. [108] 국내에 정식 출판되지는 않았다. 인터넷에 비공식적으로 번역된 평전이 있으니 흥미가 있는 사람은 읽어보는 것도 좋다. [109] 짐 허튼은 아일랜드계이다. 아일랜드에서 빵집을 운영하는 아버지 밑에서 일곱째로 태어났다. 그의 형제는 9명이다. [110] 쫓겨났지만 자신보다 메리를 더 믿은 프레디나 메리를 그다지 원망하지 않았고 상속받은 50만 달러로 아일랜드로 돌아가 편히 살다가 사망했다. [111] 메리는 프레디 전재산의 절반과 모든 저작권, 집 등을 상속받았다. [112] 로저 테일러가 책에 대해서 '짐 허튼을 잘 알고 출판계가 어떤 곳인지 알기에 이 책을 반대하진 않지만, 프레디라면 이런 책의 출판을 반대했을 것.'이라고 입장을 밝힌 적이 있다. [113] 공식적으로 로저가 179cm, 존이 180cm, 브라이언이 188cm다. 그러나 사진만 보면 로저나 디콘과 비슷하거나 커 보이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114] 아직 수염을 기르지 않았을 때 동료 뮤지션이 프레디의 이를 보고 드라큘라 같다고 농담삼아 말했는데 프레디가 정색하면서 욕을 해서 주변 분위기가 싸해진 적도 있었다고 한다. [115] 프레디는 뻐드렁니가 심했다. 특히 어린 시절 사진은 튀어나온 앞니만 보일 정도이다. 치의학적으로는 상악이 과다 발달한 2급 부정교합에 해당한다. 거기에다 아랫니들의 치열은 덧니가 울퉁불퉁하게 나있기도 했다. 그러나 프레디는 치아 교정을 권유하는 지인들에게 혹시라도 발성에 지장이 있을까봐 교정하지 않겠다고 했다고 한다. [116] 정확히는 1987년 " The Great Pretender" 커버 당시 밀었는데 위선자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밀었다 한다. [117] 솔로 앨범 1집 < Mr. Bad Guy>도 자신의 고양이와 전 세계의 애묘인에게 바쳤다. [118] 이곳에는 퀸의 옛 녹음 스튜디오이자 퀸 박물관이 있다. 퀸의 매니저 짐 비치(Jim Beach)가 여기에 거주하고 있다. 카지노 안에 위치해있기 때문에 처음 방문하는 경우 입구를 찾기 어려운 편이다. [119] 위에서 세번째 사진 속 모습. [120] 다만 브라이언 메이는 이 동상에 대해 탐탁지 않아했다고 한다. 프레디는 단순히 기념 동상 하나로 끝낼 수 있는 인물이 아닌데, 라는 생각이었다. [121] The Game Tour, Hot Space Tour [122] 다만 평소에 원음으로 부르던 'No time for losers cause We are the champions'파트는 낮춰불렀다. [123] 로저 테일러는 중년이 넘어갈 때까지도 괜찮은 목상태를 유지했고, 선천적으로 높은 성부에 창법 상의 이점이 더해져 고음에서는 불안한 느낌이 거의 없었다. 물론 목소리의 전체적인 완성도나 파워는 프레디에 비하면 다소 부족한 경향이 있다. [124] 1984년의 Sun City에서의 공연은 몹시 유려한 가창을 들려준다. [125] 공연마다 20곡을 넘게 연주했고 그나마 쉰다해도 이동하고 2~4일 만에 공연을 다시 진행해 때마다 2시간이 넘는 공연을 진행했다. [126] 기모노를 꽤 좋아하는지 이후 1976년 9월 Summer Gigs 공연들과 1977년 북미 A Day at the Races Tour에서도 입었다. [127] 그렇다고 레오타드를 그만 입은 것은 아니었다. 1978년 영국 공연, 북미 재즈 투어 일부 공연, 1979년 일본 공연이나 몇몇 크레이지 투어 공연에서도 공연 후반에 반짝이 레오타드를 입었다. [128] 빨강과 검정을 번갈아 가며 입었다. [129] 12월 4일 뉴캐슬 공연 때는 흰색이었다. [130] 바지가 빨강일 때는 파랑, 검정일 때는 빨강 무릎 보호대를 찼었다 다만 리버풀 12월 7일 공연에서는 리버풀과 에버튼 축구팬들을 위해 두색의 무릎 보호대를 각각 두 개 다 찼다. [131] 가끔 맨발 핫팬츠도 입었었는데 영상으로서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공연 후반부와 81 몬트리올 공연 후반부에서 볼 수있다. [132] 나시티의 디자인이나 백바지는 플래시 고든 투어에서 입던 것들과 다르긴 하다. [133] 주로 노란 재킷이었으나 완전 하얀색이거나 흰색과 빨간색이 섞인 경우도 있었다. [134] 노란줄이거나 하얀줄인 경우도 있다. [135] 공식 석상에서는 로우탑도 많이 신기는 했는데, 오니츠카타이거나 아디다스 삼바 등을 주로 신었다. 그러나 공연에서는 대부분 하이탑을 신었다. [136] 공연에서 신었던 레슬링화는 나이키 블레이저 미드 '77과 디자인이 비슷했다. [137] 다만 1985년 호주는 예외였다. [138] 1980년 12월 9일 런던 공연부터 12월 18일 뮌헨 공연까지만 불렀는데, 1980년 12월 8일 마크 채프먼의 총격으로 세상을 떠난 존 레논을 추모하기 위함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