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9 08:27:19

1.4 후퇴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6.25 전쟁 의 전투 및 작전 목록 파일:북한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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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후퇴 당시 남으로 피난하는 피난민들의 행렬

Third Battle of Seoul
第三次汉城战役 /

1. 개요2. 진행
2.1. 멸망 직전에 몰린 북한2.2. 소련의 외면2.3. 중국의 참전2.4. UN군의 방심2.5. 중공군과 북한군의 공세
3. 결과4. 여담

[clearfix]

1. 개요

6.25 전쟁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을 등에 업고 수도 서울을 탈환하고 역으로 북한 지역으로 진격해 대한민국 국군 유엔군 중국 인민지원군의 개입으로 인해 1951년 1월 4일 다시 서울을 포기하고 대대적으로 퇴각한 사건.

2. 진행

2.1. 멸망 직전에 몰린 북한

파일:inchon_sangryuk_3.jpg
[1]
인천 상륙 작전 이후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내리던 북한군은 삽시간에 거의 모든 북한 지역을 내주게 되었다. 북한 임시정부는 압록강변에 있는 임시수도 강계시에 틀어박혔고, 지도부는 자녀를 중국으로 망명시켜야 했다. 한국군 평양시를 함락하고 압록강에 도달했으며, 미군 장진호에 집결하여 북한의 임시수도 강계를 향한 마지막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김일성 박헌영은 단시간에 남한 지역을 공산권의 영향하에 둘 셈으로 전쟁을 일으켰다가 거꾸로 자신들이 완전히 망해버릴 지경에 이르렀다.

이미 대부분의 병력을 상실하고, 인구밀집지역을 모조리 국제연합군과 국군에 점령당해 병력을 더 모을 영토조차 남지 않은 북한은 자력으로 점령지를 방어할 능력을 상실하였다. 1951년부터 인민군 장교들을 만주 조선족 농촌지역으로 보내 인민군을 모집할 정도였고, 남은 병력은 영원 이북에 1개사단, 숙천에 1개 사단, 박천에 1개 전차 여단, 장진 부근에 1개 공병연대와 전차연대가 있었다고 한다. 북한 정권이 궤멸당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으며, 이미 임시사령부를 만주에 꾸려놨고 외부의 도움이 없으면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2.2. 소련의 외면

북한은 소련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긴급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소련군이 참전한다면 6.25 전쟁이 제3차 세계 대전으로 확전될 것을 우려한 스탈린은 이를 거절하였고, 소련군 전투부대의 직접적인 참전은 제한되었다. 소련은 공군 압록강, 두만강 국경지대에서 활동하게 하는 것 외에는 북한에 대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도 않았으며, 사실상 중국 혼자 북한을 지원했다.

스탈린은 미국과 직접 맞붙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북한을 포기할 궁리까지 했다. 2차대전에서도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쟁인 독소전쟁으로부터 5년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을 꺼렸다. 1950년 9월 28일에 유엔군 서울을 수복하자 스탈린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를 열어 북한군을 남한에서 철수시키고 북한군의 향후 임무를 북한 본토 방어에 한정시키기로 결정했으며,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자 10월 5일에 다시 정치국 회의를 열어 설사 소련이 북한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미국과 직접 대결하는 것은 어떤 대가를 치르든 회피하기로 모든 정치국 위원들과 합의했을 정도다. 대신에 연변을 포함한 간도 지역에 북한 임시정부 같은 것을 만들어 북한을 돕겠다는 뜻을 전하긴 했다. 또 스탈린은 직접 개입하기 껄끄러웠는지 여러 차례 중국 측에 참전을 종용했고 정작 중국 측은 이런저런 이유로 결정을 미루고 있었다.

2.3. 중국의 참전

당시 마오쩌둥은 중국 최대 권력자였지만 아직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한반도 파병 문제는 마오쩌둥 한 사람이 내리기엔 너무나도 중대한 결정이었기 때문에 여러 차례 회의를 거쳐 결국 중공군 파병이 결정됐다.

동북아시아의 정세상 북한 존속은 중국에 필요했다. 일단 북한 정권이 무너지면, 미국의 영향이 미치는 대한민국과 소련이 당장 국경을 맞대게 된다. 소련은 한반도가 남한에 의해 통일된다 해도 국가의 중심인 수도 모스크바와는 거리가 먼 구석 극동 지역이라서 조금 맞대도 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2] 중국은 수도 베이징시가 한반도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경계심을 심하게 느낀 것이다. 한국이야 어차피 최빈국이지만 이미 미국이 한반도에 개입할 의지를 분명히 드러낸 이상 통일한국의 미래가 어찌 될지는 몰라도 최소한 한국을 기반으로 미국과 직접 대치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생기는 것은 확실했기 때문이었다.[3]

또한 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해 신생 공산정권이 창출된 중국으로서는 파병할 경우 국가의 안정을 달성할 수 있었다. 당시 중국 지도부 내에서는 국공내전으로 황폐화된 상황에서 미국과 전쟁을 벌이는 것은 무모하다는 반론이 압도적이었지만 펑더화이가 한반도 출병을 '중국 공산혁명의 연장'으로 보자고 주장하면서 찬성표를 던짐으로써 지도부의 마음을 찬성 쪽으로 돌려놓았다. 중국은 소련의 원조를 획득할 수도 있었으며, 아시아 내에서 중국의 역할이 증대되는데 이는 곧 국제사회에서의 지위 향상을 뜻하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입술( 북한)이 없으면 이(중국)가 시리다'는 순망치한 이론을 내세워 한반도 파병을 결정한다.

사실 중국이 한반도 파병을 한 또 다른 원인으로는 미국에 대한 중국의 적개심을 꼽을 수도 있다. 국공내전 때부터 장제스를 열심히 지원했던 미국에 대해 중국 지도부가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을 리 없었다. 특히 미국은 1950년 1월 트루먼의 새해담화를 통해 타이완 문제에 대한 중립론을 주창했음에도 6개월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즉각적으로 타이완 해협을 봉쇄한 데 이어 타이완의 일본 귀속을 검토하기까지 했다. 이를 통해 중공에 대한 미국의 '중립' 공약은 공수표로 전락했고, 중공과 미국의 관계는 틀어져 단시간 내에 회복이 쉽지 않았고, 이 상황에서 중공의 국가이익을 찾을 방향으로 한반도가 선택된 것이다.

1950년 5월 하이난섬이 공산군에게 점령된 이후 중국 공산당의 마지막 목표는 국민당 정부가 버티고 있는 타이완 섬이었는데,[4] 하이난까지는 기습적인 물량공세로 어떻게 점령에 성공했지만 타이완은 국부군의 밀도도 밀도거니와 미국의 해협봉쇄까지 겹쳐 답이 없었다.[5] 이 상황에서 대만 진공을 강행하는 것도, 포기하는 것도 마오의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운 일이었고, 항미원조는 타이완 진공을 영광스럽게 포기할 수 있는 좋은 패였다.

파병 지휘관은 펑더화이 쑹스룬이 임명되었다.

2.4. UN군의 방심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중국의 위협을 과소평가하였다. 이미 전쟁 전인 1949년 3월 18일 북한과 중국은 상호방위협정을 체결했으며, 유엔군이 삼팔선을 넘어 북진하자 중국이 5차례나 전쟁 개입 선언을 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유엔군사령부와 미국 정부는 중국의 경고를 모조리 무시하고 북진했다.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은 1950년 10월에 웨이크섬에서 열린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중국의 참전을 우려하는 트루먼의 질문에 중공군 따위 미군만 보면 도망칠거라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당시 미군을 위시한 유엔군은 쇼미더머니 치고 첨단 장비들을 들여와 북진통일 직전까지 도달했다. 반면 국공내전 이전인 중일전쟁 때 부터 중국공산당의 무력은 이미 견적이 나온 상태였고, [6] 기껏 업그레이드 해 봤자 일본군이나 국부군에게서 주운 무기들 정도였다. 무기로만 전쟁하는 걸 생각했다면 당연히 중공군은 상대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웨이크섬 회담이 열리고 있던 바로 그때 중국은 한반도에 대규모 병력을 파병하고 있었다. 나중에 미군이 중공군에게 큰 피해를 입자 트루먼은 맥아더에게 속았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중공군은 1차 공세시 6개 군 18개 사단, 2차 공세시 3개 군 12개 사단이라는 엄청난 물량의 군 부대를 남하시켰다. 단순히 ' 꽹과리, 나팔 부대'의 물량빨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중일전쟁 국공내전을 치르면서 많은 경험을 쌓은 팔로군 출신 병사와 장교들이 요소에 배치된 중공 정규군도 다수 섞여 있었고 이들이 펼친 전술을 보통 우리가 아는 인해전술만으로 치부하면 곤란하다. 실제로 양 측의 병력차이는 한쪽이 단순한 물량으로 밀어붙여 이길만큼 압도적이지 못했다. 중공군은 한반도에서 유엔군을 축출할 목적으로 군사활동을 개시하였다.

이 무렵 유엔군은 북위 39도( 평양- 원산)선을 넘었다. 39도선은 한반도 북부에서 동서(東西) 간의 폭이 가장 좁은 지역이고[7], 통일 신라의 국경이기도 했다. 하지만 39도선을 넘은 뒤로는 한반도 북부의 지형이 급격하게 동서(東西)로 넓어지고, 개마고원 같은 높은 산악지대가 나타나면서 이미 북한은 끝났고 패잔병의 섬멸만 끝내면 된다는 맥아더의 욕심으로 인해 추격전처럼 유엔군을 전진시키는 바람에, 전선에 빈틈이 많이 생겨났다. 전력의 대부분을 상실한 북한의 반격은 지리멸렬했고 패잔병들은 도망치기에 바빴기 때문에 유엔군사령부는 방심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부대는 중공군의 침투를 막기는커녕 중공군이 한반도에 침투한 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실 중공군은 유엔군이 최대 39도선까지만 전진할 줄 알고, 여기서 고지전 등 격전을 준비하려고 계획을 세웠는데, 막상 유엔군이 너무 빨리 압록강까지 접근하자 후방 확보를 위해 원래 목표를 수정해 공세에 나섰고, 아무런 대비 없이 전진만 하다가 보급선 늘어지고 병력까지 분산된 상태로 각개격파를 당하면서 전선이 붕괴된 유엔군은 생각보다 빨리 후퇴했고, 예상보다 빨리 북한 지역을 장악한다. 말 그대로 맥아더의 방심을 정확히 찌르면서 예상보다 더 크게 횡재한 셈이다.

다만 이는 단순히 유엔군사령부의 잘못만은 아니다. 중공군은 침투 사실을 최대한 숨기기 위해 설상위장을 철저하게 실시하고, 최대한 밤을 틈타서 이동하는 등의 전술적으로 뛰어난 부대기동을 보여주었다. 특히 중공군에는 장제스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치면서 이러한 위장과 은밀기동에는 이골이 난 병사들과 지휘관들이 매우 많았다. 유엔군도 중공군의 참전 가능성 자체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항공정찰을 실시하였지만, 이 당시의 항공정찰은 지금처럼 프레데터 같은 무인기를 날려서 정밀 카메라로 찍는 것이 아니라 그냥 정찰기 조종사가 육안으로 관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산악지형으로 위장한 채 이동하는 병력을 발견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2.5. 중공군과 북한군의 공세

제1차 공세로 간을 본 중공군과 북한군은 제2차 공세를 펼쳐 청천강 전투에서 미군과 한국군을 격파하는 한편 미 해병대 제1사단을 포위하고 장진호 전투를 치렀으며, 그 결과 12월 4일에 국군과 유엔군은 평양 다시 내주면서 삼팔선까지 대대적인 후퇴를 하게 되었다. 그 뒤 12월 6일에는 북한군과 중공군이 평양을 재점령하였다. 서부전선에서 이렇게 물러나는 동안 12월 14일부터 24일 사이에 동부 전선에서는 유엔군 12만과 피난민 10만이 흥남 부두에서 배를 타고 해상으로 철수해야만 했다. 장진호 전투에서 중국군의 공격을 피해 간신히 빠져나온 미 해병 1사단 역시 12월 24일에 흥남을 통해 후퇴했다.

1, 2차 공세에서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하게 된 유엔군을 보고 서방 국가들은 지레 겁을 먹고 중국과 협상하려 했다. 이때까지 서방 국가들이 주축이 된 유엔에서는 중국의 한국전 참전목적이 단순히 '자국의 국경선 방어 또는 북한을 도와 전쟁 전의 영토인 38선 근처 영토까지의 회복'에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중국과 휴전협상을 하려 했으나, 중국이 유엔 측의 휴전협상을 거부하고 제3차 공세를 시작함으로써 전술(前述)했다시피 중국의 진정한 참전 목적이 유엔군의 한반도 축출에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미국 및 서방 국가들은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이 과정중, 교통사고로 1950년 12월 23일 순직한 월튼 워커 미 8군 사령관의 후임으로 급하게 한국에 온 매튜 B. 리지웨이 중장은 최전방 전장을 시찰해보고 경악한다. 서부전선 미 8군의 상태가 예상보다 훨씬 심각하고 최전방은 아무런 방어진지나 병력이 준비되어있지 않고 연전연패를 거듭한 유엔군은 모랄빵 맞은 수준으로 사기가 바닥에 떨어졌으며, 유엔군과 공동작전을 해야 할 국군의 피해는 더 심각해서 이대로는 한강조차 지키기 힘들다는 냉정한 현실에 부딪혔다. 맥아더와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 사수를 외쳤지만 현장 지휘관의 판단으로는 중공군의 공세를 서울 북단에서 막는 것은 현재의 전력과 군의 상태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중공군은 1950년 12월 31일부터 제3차 공세를 펼쳤으며 이 공격에 미군과 한국군은 맥없이 밀려났다. 유엔군의 경우, 38선에 방어선을 펼치긴 했지만 전선이 망가진데다가 워낙 병력이 부족해서 1개 대대가 10km 정도를 담당해야 할 정도로 중공군에 비해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결국 방어선 곳곳이 대규모의 중공군 부대가 펼치는 공세에 뻥뻥 뚫리면서 무너지게 된다. 미8군사령관인 매튜 B. 리지웨이 중장은 이대로 있다간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이 중공군에 의해 동서로 분단될 우려가 있다고 판단, 1월 3일에 서울을 포기하라는 명령을 미8군에 내린다. 여기서 중공군에 포위당해서 전멸한 부대도 있다고한다.

결국 1월 4일에는 수도 서울이 다시 공산군에 함락되었고,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한 번 37도선( 평택- 원주- 삼척 방어선)을 향해 대대적인 후퇴를 하게 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이동했고, 미8군사령부도 대구로 후퇴하게 된다.

3. 결과

중공군의 2~3차 공세 동안 북한군과 중공군을 피해 피난민들의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졌고 그 대혼란 속에서 수많은 이산가족이 생겨나게 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피난민들이 이 후퇴가 전략상 후퇴이며 다시 국군과 UN군이 전열을 정비하여 북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며칠 몸만 피하다 온다"는 생각으로 가장과 몇몇 자식들만 간단하게 피난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아니면 피난하기 힘든 어린 자식들을 친가 또는 외가에 맡겨두고 피난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데, 이 때의 이별이 평생의 이별이 되어버렸다. 이 분단으로 인한 이별 외에도, 이 피난으로 인한 혼란 상황에서 남한 내에서도 평생 만나지 못하고 이산가족으로 살게 된 사례가 의외로 많았다. 특히 1983년 방영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보면 1.4 후퇴에서 가족과 이별하게 된 사례가 제일 많다.

엄청난 추위로 인하여 많은 피난민들이 고통받았지만, 역설적이게도 한강이 차가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얼어붙었기 때문에 전쟁 초기와 달리 다리를 건너지 못해 피난하지 못하고 발이 묶이는 경우는 드물었다. 정부 또한 개전 초기의 교훈을 통해 신속하게 소개령을 내려, 서울시민들은 혼란스러웠던 개전 초기와는 다르게 그나마 미리미리 피난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신석기 시대 이래 줄곧 사람이 모여 살던 서울텅 비어버렸다. 1949년 제1회 인구주택총조사 기준으로도 140만의 인구가 살던 한반도 최대의 대도시가 텅 비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앞서 있었던 9.28 서울 수복 이후, 전쟁 초기에 피난을 가지 못했던 사람들이 정작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했을 때 자신들이 북한군 부역자로 학대받은''' 기억이 남아 있었던 바람에, 너나 할 것 없이 '가라 할 때 가자'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피난을 권장한 것도 있었고. 서울에 남은 것은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노인들과 환자들, 그리고 그 가족 극소수뿐이었다. 그 극소수 안에 작가 박완서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의 자전적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속편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를 보면 빈집을 털어 입에 풀칠하는 등 텅 빈 서울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중공군의 공격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1951년에 끝날 뻔했던 전쟁은 정전협정 체결까지 33개월간 연장되었고,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심리전과 인해전술에 막대한 공포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유엔군은 이때의 충격으로 인해 지휘부부터 사병들에 이르기까지 부대 전체에 패배주의와 절망감이 만연하게 되었다. 1951년 1월 말부터 매튜 B. 리지웨이 중장의 지휘하에 유엔군이 재반격을 시작하여 2월 중순에 벌어진 지평리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승리를 거두기 전까지는, 워싱턴 D.C. 도쿄도 극동군사령부에서 유엔군의 한반도 철수에 관한 논의가 진지하게 진행되는 상황에까지 치달았다. 당시 미 합동참모본부와 미 극동군사령부에서는 중공군이 37도선의 평택-원주-삼척 방어선을 돌파한다면 유엔군과 국군을 다음 방어선인 금강 방어선과 소백산맥 방어선으로 후퇴시켜 항전하기로 계획해 놓았다.

하지만 중국이 노렸던 국제사회에서의 위상 제고와 이미지 개선은 늦게 진행되었다. 사실 중공군의 참전 이전까지 미국을 제외한 서방에서는 대륙의 진정한 주인을 중화인민공화국으로 간주했다. 영국의 경우, 중국공산당의 베이징 점령 후 바로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했고 영연방을 중심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유엔 가입을 추진할 정도였다. 영국은 중국을 정식국가로 승인함으로써 중국 영토에 있는 자국의 식민지 홍콩의 안전을 보장받고자 했다.

문제는 1.4 후퇴 직후에 유엔에서 제시한 정전요구를 중국이 보기 좋게 거부한 것이었다. 유엔군을 38선 아래로 밀어내 기세등등해진 중국은 서방 국가에 무리한 요구, 즉 한반도에서 모든 외국 군대를 철수시킬 것, 대만에서 미군이 철수할 것,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할 것을 주장했다. 이는 미국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항복 종용에 가까운 굴욕적인 요구였기 때문에 미국 등 서방 국가는 1951년 2월 1일,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항전하기로 결의한다. 결국 휴전 없이 전쟁은 계속 이어지게 되었고, 전선이 37도선 부근까지 내려오면서 중공군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보급 문제가 중공군의 발목을 잡은 와중에, 초기 패전의 충격을 극복하고 전열을 수습한 유엔군이 보병전을 피하고 막강한 화력으로 중공군을 제압하는 파훼법을 개발하게 되어 전세는 다시 유엔군 쪽으로 뒤집혔다. 성난 파도처럼 한반도를 휩쓸며 남하하던 중공군은 공세종말점의 도달과 유엔군의 본격적인 반격으로 인해 기껏 점령한 서울을 다시 빼앗기고 38선 일대로 후퇴하면서 서방 국가에 무리한 요구를 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쳐나는 원천이었던 유리한 전황 역시 날려먹고 만다.

그리하여 중국은 적어도 1950년대 중반까지 유엔의 상임이사국 자리를 차지할 기회를 놓쳐버리고 1971년에 가서야 그 자리를 대만에게서 빼앗아 획득하게 된다. 더군다나 미 국무부 내의 일부 친중파들의 전략, 즉 대만과 중국이 분리된 상태에서 대륙의 공산정권을 미국이 승인하여 미국과 교류하고 소련과 대립시키는 중국의 제3세계화 전략도 무위로 돌아간다.

박명림은 1.4 후퇴 당시 중국 지도부의 결정을 2달전 일어난 ' 더글러스 맥아더 VS 해리 S. 트루먼'의 중국판이라고 분석한다. 다만 이 경우에는 한반도에서 미국의 완전한 축출을 주장하는 행정부( 마오쩌둥+ 김일성)와 전략적 목표 달성(미군을 삼팔선 이남으로 몰아내기) 후 정전을 달성하자는 참전 야전군( 펑더화이)의 대립으로 미국과 정반대의 입장이었고, 결과는 정부 수반인 마오쩌둥의 지시대로 역시 완전한 남북통일을 주장하여 무리한 진격을 했다가 결국 중공군이 공세종말점에 도달했고, 유엔군의 반격에 된통당하고 물러난 것이다.

4. 여담

  • 1.4 후퇴로 생겨난 피란민들이 가장 안전한 최후방 임시수도 부산으로 계속 몰려드는 바람에[8], 1951년 3월 부산의 인구가 120만 명을 넘어서게 된다. 그리고 이들을 수용하기엔 비어있는 집과 땅이 부족했기 때문에 피란민들은 산자락 아무데나 판자집을 지었다. 예를 들면 일본인 공동묘지 위에 생긴 아미동 비석마을. 1945년 광복으로 살아있는 일본인은 모두 떠나고 남은 일본 무덤들을 당연히 부산 토박이들은 그런 데서 살지 않았지만 피란민들은 몸을 뉘일 자리도 없다보니 비석을 뽑아다 계단을 만들고 집의 부재로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당연히 피란민들도 여기가 무덤이라는 걸 모를 리가 없었지만 이들이 훗날 회고하기를 귀신보다 배고픔과 추위가 더 무서웠다고 한다. 이때는 부산부터 동래까지 거리, 골목 구석마다 사람이 빼곡히 차 있어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정부는 전국 곳곳에 피란민 수용소를 만들어 피란민들을 수용하려 했으나 이도 역부족이었다.
  • 이 당시 피란민들은 가족 친지들에게 부산 영도다리에서 만나자고 약속하고 뿔뿔이 흩어졌는데, 이로 인해 오랫동안 영도대교 주변이 북적거렸다고 한다. 영도다리는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다리가 들어올려지는 도개교로 이미 일제 때부터 뉴스에서도 많이 나오고 해서 당시 외지인들도 잘 아는 부산의 랜드마크 하면 영도다리였기 때문에, 부산을 전혀 모르면서 일단 부산 방향으로 걸어가는 피란민들은 영도다리를 약속 장소로 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영도다리 아래에는 점집골목이 형성되었는데, 피란민들이 막상 찾아오니 가족 친지를 찾을 수 없어서 헤어진 가족들의 생사를 알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점을 본 것이다. 지금은 일부 점집만 남아있다.
  • 윌리엄 R. 포르스첸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 < 1초 후>에 등장하는 인물 중 한 명인 돈 바버가 6.25 전쟁 당시 공군 비행기 조종사로 참전하여 1.4 후퇴를 경험했다. 당시 그는 서울 상공을 비행한 적이 있는데, 나중에 작중에서 일어난 전자기 펄스 공격 이후 헬게이트가 열린 블랙마운틴 주변 도시의 상공을 비행하면서 목격한 상황들을 설명하면서 마치 1951년의 한반도 같았다는 얘기를 하기도 한다.

[1] 단순 점령 영역 표시로 실제 영역이 이랬던 적은 없다. 청진을 수복할 당시 초산은 이미 중공군에게 다시 점령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2] 비슷한 예로 소련은 NATO 회원국인 노르웨이 튀르키예와도 각각 북극권과 캅카스에서 국경을 조금 맞대고 있다. [3] 게다가 미국 지원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던 1950년대와 달리 지금은 한국의 국력이 중국에 비해 크게 열세라도 한판 붙을 능력은 되는 수준이니 더욱 통일을 바라지 않을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 배를 타 상륙을 거쳐 이동하는 것과 처음부터 한국에서 이동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이다. [4] 티베트가 아직 중공에 편입되지 않았지만 티베트는 이때까진 중국과는 따로 놀고 있었다. 국민정부 시절부터 은근슬쩍 중화민국에 편입시키려고 했다. [5] 인민해방군의 전력이 과거와는 비교도 안 되는 수준으로 급격히 성장한 2020년대 시점에서도 중국이 미국의 봉쇄를 뚫고 대만에 상륙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지는데, 하물며 중국의 해군력과 공군력이 전무하던 이 당시에는 타이완 상륙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6] 비록 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했지만 이건 공산당이 강해서가 아니라 국민당이 너무 약해서 졌다는 견해가 다수였다. [7] 실제로 한반도에서 동서 구간의 폭이 가장 좁은 지역은 39도선보다 조금 북쪽에 위치한 평안남도 평원군과 함경남도 문천군을 잇는 선이다. [8] 사실 1.4 후퇴 이후 중국군은 경기 남부에서 저지 성공했기 때문에 피란을 가도 부산까지 내려갈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당시엔 어디까지 밀릴지 알 수 없었고 뒤통수 경험도 있으니 가능하면 최대한 멀리 피란 가는 게 당연한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