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10-09 16:05:49

국민의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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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2001년 재보궐선거 · 제7호 태창호 사건 · 2001 한일 컨페더레이션스컵 · 이용호 게이트 · 여성부 출범 · 인권위 출범 · 테러방지법 파동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발족 · 육군 CH-47 올림픽대교 추락 사고 · 인천국제공항 개항 · 예지학원 화재 사고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2002년 재보궐선거 · 제16대 대통령 선거 · 2002 한일 월드컵 · 제2연평해전 · 이석기 검거 · 홍삼 게이트 · 최규선 게이트 · 미군 여중생 압사 사고 · 2002 부산 아시안게임
2003년 1.25 인터넷 대란 · 대구 지하철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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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aa78> 제6공화국
국민의 정부
國民의政府 | Government of the People
1998년 2월 25일 ~ 2003년 2월 24일
<rowcolor=#fff> 출범 이전 출범 이후
문민정부 참여정부
대통령 김대중 ,/ 제15대,
국무총리 김종필 ,/ 제31대 (1998.8.18.~2000.1.12.),
박태준 ,/ 제32대 (2000.1.13.~2000.5.18.),
이한동 ,/ 제33대 (2000.6.29.~2002.7.10.),
김석수 ,/ 제34대 (2002.10.5.~2003.2.26.),
여당 새정치국민회의 ,(1998.2.25.~2000.1.20.),
새천년민주당 ,(2000.1.20.~2002.5.6.),
연립여당 자유민주연합 ,(1998.2.25.~2001.9.3.),
민주국민당 ,(2001.4.16.~2001.9.3.),
▲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김대중 취임 선서
1. 개요2. 국정지표3. 외교/국방4. 정치/사회5. 경제6. 평가7. 국정 수행 평가
7.1. 여론조사
7.1.1. 한국갤럽
8. 주요 사건9. 인사10. 문화대통령11. 관련 문헌12.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국민의 정부 또는 김대중 정부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김대중이 이끌었던 정부이며, 대한민국 헌정 역사상 최초로 선거에 의한 평화적 여·야 정권교체로 출범한 정부다.[1] 제6공화국 세 번째 정부로 1998년 2월 25일 출범해 2003년 2월 24일까지 존속했다. 참고로, 공식 명칭인 '국민의 정부'의 의미는, 새로운 정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뜻을 강조[2]하기 위해서 채택된 것이며 인수위원회에 있었던 문희상 전 정무수석 내정자가 이를 제안하였다고 한다.

일부에서는 DJP연합에 의한 정권교체였기 때문에 불완전한 정권교체라는 비판을 하기도 한다.

대한민국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하게 호남권 출신 대통령이 이끌었던 정부이다.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황해도 출신이고 후임 윤보선은 충청도 출신[3]이고 최규하는 강원도 출신, 이명박은 일본 오사카 출신인 것[4], 윤석열은 서울 출신인 것을 제외하면 박정희 & 전두환 & 노태우 & 김영삼 & 노무현 & 박근혜 & 문재인까지 7인이 영남 출신인데 처음이자 지금까지 유일한 호남 정부는 김대중 정부이다. 그리고 이 정부는 나름 탕평책을 편 정부인데 일단 초대 국무총리가 박정희의 후계자 대접을 받았던 김종필이고[5] 민주당 내에서 비호남권 노베이스 아웃사이더였던 노무현도 국민의 정부에서 장관을 역임하는 등의 커리어를 쌓아 거물 정치인으로 발돋움하여 김대중의 후임 대통령이 된다.

또한 이승만, 박정희 정부에 이어 새정치국민회의 자유민주연합 연립정권을 이룬 세 번째 정부이기도 하다.[6] 대한민국 역사상 진정한 의미로는 유일한 연립정권이란 평가도 있다.

국민의 정부는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일상을 대한민국 국민에게 제공을 했다. 김대중은 취임사의 도입부부터 ‘정보화혁명’의 중요성을 강조할 정도로 정보통신강국을 지향했고 집권 후 초고속 인터넷 인프라를 구축하고 소프트웨어 산업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후임 대통령 노무현도 '인터넷 강국' 덕을 본다. #

2. 국정지표

  • 국민적 화합정치
  • 민주적 경제발전
  • 자율적 시민사회
  • 포괄적 안보체계
  • 창의적 문화국가

3. 외교/국방

국민의 정부에서 가장 핵심적인 대외정책은 바로 햇볕정책이다. 이 정책은 광복 이후 분단과 한국전쟁, 그리고 냉전으로 악화된 북한과의 관계를 녹이는 정책이었다. 북한과의 대화를 통한 직접 외교로 전쟁 위협을 낮추고 인도적인 지원 및 경제적 교류를 통해 두 나라의 관계를 호전시키려고 시도한 투 트랙 차원의 접근 방식으로, 상호의존도를 높여 전쟁의 위험을 방지하고자 했던 신자유주의적 구조론[7]에 입각한 외교 정책이다.[8]

햇볕정책의 가동으로 한국 정부는 휴민트 사건 자해와 가까울 정도의 고행을 통해 남북관계를 전례없이 호전시키는데 성공했고, 마침내 2000년에는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어 6.15 남북 공동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는 분단 50여년만에 처음으로 남북의 최고 지도자들이 평화통일의 당위와 그 구현 방식에 있어 같은 목소리를 낸 남북 역사상 가장 큰 금자탑 중 하나로 남은 업적이었다. 다만 2002년 연평해전이 발발했다는 사실을 들어 이 정책의 효과가 미미했다고 주장하는 의견도 존재하며, 일부에서는 햇볕정책의 지원금이 북한의 핵개발 목적으로도 사용되었다는 주장을 제기한다. 이러한 평화적 제스쳐와는 별개로 북한 유사시, 기존 북한 지도 세력을 무력화하고 지지세력을 숙청한 후 개혁세력을 지원하여 통일을 주도하려는 계획도 세워놨다는 것이 밝혀졌다.

4. 정치/사회

새정치국민회의는 출범 당시 역사상 가장 적은 의석 수의 여당이었다. 공동 여당인 자민련과 합해도 130석이 채 되지 않았다.[9] 반면에 야당인 한나라당은 단독 의석으로만 과반을 훌쩍 넘기는 상황이었다.[10] 따라서 책임총리제를 약속하여 DJP연합 김종필과 같이 이끌어낸 김대중 전 대통령은 실제로 김종필 국무총리에 내정, 임명하였으나 워낙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의 반대가 너무 심해서 서리로 무려 5개월 정도 있었다. 김종필은 총리가 중심이 된 내각책임제를 원했으나 한나라당의 반대가 너무 심했으며 김대중 전 대통령도 내심 그 정도까지는 허용해주지 않았고 이는 그들의 연합은 끝까지 지속되지 못한 계기가 되게 된다.

정권 출범 3개월 이후에 있었던 2회 지방선거에서는 DJP연합과 허니문 효과의 위력으로 16개 광역단체 중 공동 여당이 10개를 휩쓸었다( 새정치국민회의 6곳, 자유민주연합 4곳). 이후 경제 상황이 호조되고 안정적인 국정 운영으로 1999년 초반까지 줄곧 5~60%의 지지율을 이어갔다. 그러나 1999년 중반에 터진 옷로비 파문으로 인하여 지지율이 50% 아래로 처음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이후 사건이 수습되고 다시 지지율 50%를 이어나가자 김대중은 새정치국민회의를 새천년민주당으로 개편한다. 이후 꾸준히 지지율이 유지되자 2000년에 있을 16대 총선에서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이 원내 1당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였으나 결과는 전체 273석 중 야당인 한나라당이 133석,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이 115석, 자유민주연합이 17석으로 총선에서 승리하지 못하였다.[11] 그리하여 지지율이 최초로 30%대로 주저 앉기도 하였다. 그러나 역사적인 2000년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다시 국정지지율이 60%를 돌파하였다. 하지만 이마저도 잠시, 의약분업 사태를 거치며 다시 지지율이 하향곡선을 그렸고 결정적으로 8월 말, 한빛은행 불법대출 사건이 터지면서 지지율이 30%로 폭락하였다. 이때 국민의 정부는 최초로 레임덕 초기에 진입하게 된다. 2001년 들어서도 진승현 게이트, 이용호 게이트 등 비리 사건이 연이어 터지면서 정권의 인기가 많이 시들었으며, 2000년 롯데호텔 및 사회보험노조 파업, 2001년 대우자동차 총파업 등지에 공권력을 투입해 폭력진압한 것 때문에 재야세력과 노동자 계층에게도 안 좋은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IMF에서 완전히 졸업하고 계속되는 남북화해 무드 덕분에 그래도 30% 초중반대 지지율을 지키며 국정 운영에 큰 문제는 없는 수준의 지지율을 지켜나갔다. 그러나 2001년 8월, 한나라당이 제출한 임동원 통일부장관 해임결의안[12]에 자유민주연합이 동조하면서[13]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자 16대 총선 이후 의원꿔주기[14]로 간신히 유지되던 DJP연합이 결국 붕괴되고 만다.[15]

DJP연합 붕괴 이후 새천년민주당은 국회에서 다시 수적 우위를 상실하였고[16] 이후부터 사실상 국회에서 한나라당에 이리저리 끌려다니게 된다. 2002년 초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세 아들이 비리 사건에 연루된 이른바 홍삼게이트가 터지자 지지율은 20%대로 추락하여 사실상 레임덕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 여파로 2002년 6월 13일에 있었던 지방선거에서 야당인 한나라당에게 16개 광역단체 중 11개를 내주며 참패하게 된다.[17] 이후 계속 20%대 중반의 지지율을 이어나가다가 여당 노무현 후보의 대통령 당선으로 정권 연장에 성공하게 되자 말년에 지지율이 30%대로 다시 급등했지만 홍삼게이트 판결이 나오자 24%로 내려갔다. 이후 임기 막바지였던 2003년에 대규모 인명피해 사고인 대구 지하철 참사가 발생하면서 사회 분위기가 암울한 분위기에서 임기를 마쳤다.

5. 경제

IMF의 구제금융 조건 때문에 신자유주의가 시작된 정권이기도 하다. 물론 더 엄밀히 말하자면 신자유주의가 처음으로 시작된 건 김영삼 정부에서 였기는 했지만.. IMF는 당시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 가능성이 있던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모두에게 신자유주의 성향을 띤 강력한 구조조정 정책을 수행한다는 각서를 받았으며, 동아일보에서는 김대중의 취임 다음날 사설에 "IMF 위기만 극복해도 성공한 대통령으로 기억될 것"이란 내용을 싣는 현실에 당면한 상황이었다.

김영삼 정부, 문민정부 임기말에 터진 1997년 외환 위기로 인해서 국민의 정부는 어쩔 수 없이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채택해야만 했다. IMF의 원조 조건이었던 구조조정(Structural Adjustment Programmes)의 핵심 내용은 당시 다음과 같았다.

1) 시장의 자유 강화
2) 규제완화 및 철폐
3) 국유화 된 사업체에 대한 민영화
4) 정부지출(보건복지 등) 축소
5) 고금리(29.5%)

이 과정 속에서 대한민국은 박정희 전 대통령 이후 유지되어온 국가주도의 경제정책 노선을 많이 상실했으며, 이후 나오는 FTA, 비정규직 문제 등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이것이 이미 박정희 시절부터 IMF 사태 직전까지 유지되었던 대한민국 경제의 기반으로 인한 일이었으며, 국민의 정부가 원해서 진행된 정책이 아니라는 점은 확실히 해야 할 것이다. IMF에서 최대 피해자는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이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정부 시절 1998년 2분기 ~ 2003년 1분기까지의 평균 1인당 연간 경제성장률은 6.15%에 달했다. 전임 정부인 문민정부 시절 1993년 2분기 ~ 1998년 1분기의 평균 1인당 연간 경제성장률인 4.79%보다도 1.46% 높은 수치였으며, 후임 정부인 참여정부 시절 2003년 2분기 ~ 2008년 1분기의 평균 1인당 연간 경제성장률인 4.34%보다는 1.81% 높은 수치였다. 이는 국민의 정부 시절 뛰어난 외교 성과 및 남북관계의 획기적인 개선으로 인한 대외 신인도의 급격한 회복세와 원화 저평가로 인한 경상수지 대폭 확대, 대기업 간 업종 빅딜을 통한 기업의 국가경쟁력 향상, IT 및 벤처기업( 스타트업)에 대한 정부의 전폭적 지지, 기초생활보장법 통과로 인한 기본적 복지로 인한 결과로 볼 수 있다.

또한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가 주장한 제3의 길처럼 시장과 국민 복지가 극단적인 양자택일 사항이 아니고, 조화를 추구할 수 있다는 믿음하에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실업자와 노숙자, 극빈층에 대한 지원 및 구제정책을 실시한 시기이기도 하였다.[18]

하지만 이렇게 높은 거시 경제지표 결과에도 불구하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진행된 1/4분기 초고금리와[19] 사회적 안전장치가 덜 마련된[20] 상황에서 실시된 대규모 구조조정 여파로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기 시작, 이는 곧이어 출범한 민주 개혁 성향의 정부인 참여정부 숙제로 남겨진다.

6. 평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국민의 정부/평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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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을
참고하십시오.

7. 국정 수행 평가

7.1. 여론조사

7.1.1. 한국갤럽

파일:대한민국 대통령기.svg 김대중 전 대통령 국정 수행 평가
한국갤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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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전체 선거인 대비 득표율
제15대 대통령 선거
32.0%
조사 기간 긍정 부정
1998년 2월-1998년 5월
71%
7%
1998년 5월-1998년 8월
62%
11%
1998년 8월-1998년 11월
56%
17%
1998년 11월-1999년 2월
63%
14%
이 자료는 한국갤럽에서 조사한 국민의 정부 국정수행 지지도 분기집계 결과임. 각 분기 내 여러 조사 결과의 중위수를 토대로 하였음.
조사 방법을 비롯한 자세한 내용은 한국갤럽 홈페이지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고할 것.
}}}}}}
{{{#!folding [ 2년차 ]
{{{#!wiki style="margin:-10px;margin-top:-5px;margin-bottom:-5px"
조사 기간 긍정 부정
1999년 2월-1999년 5월
60%
16%
1999년 5월-1999년 8월
52%
22%
1999년 8월-1999년 11월
46%
29%
1999년 11월-2000년 2월
50%
24%
이 자료는 한국갤럽에서 조사한 국민의 정부 국정수행 지지도 분기집계 결과임. 각 분기 내 여러 조사 결과의 중위수를 토대로 하였음.
조사 방법을 비롯한 자세한 내용은 한국갤럽 홈페이지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고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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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3년차 ]
{{{#!wiki style="margin:-10px;margin-top:-5px;margin-bottom:-5px"
조사 기간 긍정 부정
2000년 2월-2000년 5월
49%
20%
2000년 5월-2000년 8월
38%
26%
2000년 8월-2000년 11월
54%
18%
2000년 11월-2001년 2월
30%
51%
이 자료는 한국갤럽에서 조사한 국민의 정부 국정수행 지지도 분기집계 결과임. 각 분기 내 여러 조사 결과의 중위수를 토대로 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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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4년차 ]
{{{#!wiki style="margin:-10px;margin-top:-5px;margin-bottom:-5px"
조사 기간 긍정 부정
2001년 2월-2001년 5월
27%
55%
2001년 5월-2001년 8월
29%
52%
2001년 8월-2001년 11월
28%
49%
2001년 11월-2002년 2월
31%
49%
이 자료는 한국갤럽에서 조사한 국민의 정부 국정수행 지지도 분기집계 결과임. 각 분기 내 여러 조사 결과의 중위수를 토대로 하였음.
조사 방법을 비롯한 자세한 내용은 한국갤럽 홈페이지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고할 것.
}}}}}}
{{{#!folding [ 5년차 ]
{{{#!wiki style="margin:-10px;margin-top:-5px;margin-bottom:-5px"
조사 기간 긍정 부정
2002년 2월-2002년 5월
33%
41%
2002년 5월-2002년 8월
26%
53%
2002년 8월-2002년 11월
28%
52%
2002년 11월-2003년 2월
24%
56%
이 자료는 한국갤럽에서 조사한 국민의 정부 국정수행 지지도 분기집계 결과임. 각 분기 내 여러 조사 결과의 중위수를 토대로 하였음.
조사 방법을 비롯한 자세한 내용은 한국갤럽 홈페이지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고할 것.
}}}}}}


8. 주요 사건

8.1. 1998년

8.2. 1999년

8.3. 2000년

8.4. 2001년

8.5. 2002년

8.6. 2003년

9.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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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0 -16px -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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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위 명단
재정경제부장관 →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장관 <colbgcolor=#ffffff,#1f2024><colcolor=#00aa7b> 이규성 강봉균 이헌재 진념 전윤철
교육인적자원부장관 →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장관 이해찬 김덕중 문용린 송자 이돈희 한완상 이상주
통일부장관 강인덕 임동원 박재규 임동원 홍순영 정세현
외교통상부장관 박정수 홍순영 이정빈 한승수 최성홍
법무부장관 박상천 김태정 김정길 안동수 최경원 송정호 김정길 심상명
국방부장관 천용택 조성태 김동신 이준
행정자치부장관 김정길 김기재 최인기 이근식
과학기술부장관 강창희 서정욱 김영환 채영복
문화관광부장관 신낙균 박지원 김한길 남궁진 김성재
농림부장관 김성훈 한갑수 김동태
산업자원부장관 박태영 정덕구 김영호 신국환 장재식 신국환
정보통신부장관 배순훈 남궁석 안병엽 양승택 이상철
보건복지부장관 주양자 김모임 차흥봉 최선정 김원길 이태복 김성호
환경부장관 최재욱 손숙 김명자
노동부장관 이기호 이상룡 최선정 김호진 유용태 방용석
여성부장관 한명숙
건설교통부장관 이정무 이건춘 김윤기 오장섭 김용채 안정남 임인택
해양수산부장관 김선길 정상천 이항규 노무현 정우택 유삼남 김호식
기획예산처장관 진념 전윤철 장승우 }}}
}}}}}}}}}


10. 문화대통령

국민의 정부 시절 5년은 그야말로 1세대 아이돌들의 활동 기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22][23] 이는 지금과 달리 아이돌은 '청춘스타'라는 이미지가 강했고 5년이나 되는 긴 활동을 하면 멤버들이 20대 중반 이후 30대까지도 넘어가버려서 청춘스타라고 하기 애매해지기 때문이다.

또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별명이 문화대통령이었던 만큼 문화계 인사들이나 가요계가 활발하게 돌아갈 수 있던 상황이었던데다가, 문화 검열을 하는 폐단이 많이 사라졌던 것도[24] 김대중 정부 때였고, 한국영화계도 쉬리가 엄청난 흥행을 기록한 1999년부터 점유율 36%를 기록한 이래로 르네상스기를 맞게 되었고 이전까지 대다수를 수입에 의존했던 계임계도 온라인 게임을 중심으로 호황을 누리기 시작하여 해외로까지 게임을 수출할 정도에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이 생기고 e스포츠라는 용어가 생기는 등의 변화가 있었으며, 만화계도 90년대 만화계를 이끌던 잡지만화가 쇠락했지만 한편으로 학습만화가 한국만화 시장을 주도한 장르로 떠오르고 웹툰이 크게 인기를 끄는 큰 변화를 겪었다.[25] 한류 열풍도 김대중 정부 때부터 본격적으로 일어난 현상으로[26] 영화, 드라마, 게임, 만화 등 한국의 문화컨텐츠들이 해외로 대규모로 수출되기 시작한 시기였다는 점에서 문화사적으로 뜻이 깊은 시기였기도 했다. 그리고 2002년 한일 월드컵이 개최되어 아시아 최초로 4강에 진출했던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던 시기 역시 김대중 정부 시절이다. 당시 16강 진출이 확정되자 당시 축구 감독인 거스 히딩크와 만나 고맙다고 말하며 악수를 하기도 했다. 16강전때는 청와대에서 경기를 직접 관람하기도 했으며 4강전에는 월드컵 경기장에 직접 나타나 경기를 관람하기도 했다. 이때 골이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4강 진출이 확정되자 기뻐하기도 했다. 해당 영상

또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시절은 대한민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 그레고리력 기준, 천년에 한번씩 전 세계 모든 인류에게 찾아오는 밀레니엄의 대격변이 일어났던 매우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천년에서 새천년으로 바뀌고, 20세기에서 21세기로 바뀌고, 제2천년기에서 제3천년기로 바뀌는 것까지 천년에 한번 찾아오는 이 모든 영광스러운 순간이 김대중 정부 시절에 일어났다. 이 시절을 겪은 국민들은 앞으로의 21세기의 희망찬 기대를 가득 품었으며[27] 이 시기에 태어난 1999년생부터 2001년생은 천년에 한번씩 찾아오는 영광스러운 순간에 태어나 생존했던 마지막 세대가 되었다. 이들도 어느덧 20대 청년이 되었다.[28][29]

11. 관련 문헌

  • 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3당 합당에서 스타벅스까지 3권 - 강준만 저.
  • 한국 현대사 산책 2000년대편: 노무현 시대의 명암 1~2권 - 이하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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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공화국부터 이 이전까지의 모든 정권교체는 쿠데타 또는 시민혁명으로 이전 정권이 무너지면서 이루어졌다. [2] 대한민국헌법 제1조 2항인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와도 꽤 들어맞는다고 할 수 있다. [3] 하지만 제2공화국은 의원내각제여서 대통령은 그냥 얼굴마담이고 실권은 총리가 가지고 있어 5.16 때도 윤보선 대신 장면을 노렸다. 하지만 어쨌든 대통령은 윤보선이었으니. 참고로 제2공화국의 실권자이던 장면은 서울시 출신이다. [4] 다만 광복 후 포항으로 이사오긴 하였다. [5] 다만 이는 DJP 연합 당시 합의사항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6] 다만 이승만 정권은 제 이승만 지지정당의 연립이며 결국 자유당으로 통합되었고, 박정희 정권은 유신 치하 민주공화당과 비정상적 교섭단체 유신정우회의 연립이므로 진정한 의미의 연립정권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리고 후에 문재인 정부 더불어시민당이 있지만 더불어시민당은 어디까지나 민주당의 비례정당이었기 때문에 연립정부로 보기 힘들다. [7] 국제정치경제적 신자유주의와는 구별되는 국제정치학적 개념으로 이해에 주의를 요한다. [8] 대화를 통한 외교정책은 일본과의 전면적 문화 개방 등을 고려할 때, 국민의 정부의 외교정책 기조였던 것으로 보인다. [9]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은 160석을 넘는 과반 의석 수를 가졌으나 당시 공동 여당이었던 새정치국민회의 자유민주연합은 당시 79석, 45석 정도에 불과하였다. [10] 1996년, 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이 얻은 의석 수는 139석이었으나 통합민주당을 흡수하고 국민회의와 자민련으로부터 의원 빼오기를 강행해 1997년 157석, 1998년 165석까지 늘어났다. [11] 하지만 완전한 패배라고 보기도 어려운 게 애초에 인구 500만의 호남을 기반으로 한 정당이 인구 1300만의 영남을 기반으로 한 정당을 상대로 과반을 저지하고 총 의석의 42%에 달하는 쾌거를 이루어냈고 공동 여당인 자유민주연합과 합하면 사실상 여반야반의 구도를 절묘하게 이루어냈기 때문에 결과가 비슷했던 19대 총선과 견주어보았을 때 내용상 더 좋은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12] 8.15 평양축전에 남측 방문단의 방북을 허용했다는 이유였다. [13] 새천년민주당과 연정 상태였으나 대북관에 관해선 의견차이가 컸다. 기본적으로 자민련은 한나라당보다도 더 오른쪽으로 치우친 보수정당이라 햇볕정책에 회의적으로 대북강경책을 주장하였다. [14] 사실 16대 총선에서 자민련이 교섭단체(20석)가 되지 못한 것은 새천년민주당이 이인제를 내세워 충청권에서 자유민주연합 말살을 시도한게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이 때문에 자민련은 총선 이후 연합을 유지하지 않으려 했지만 김대중이 자민련에 의원 4명을 빌려주어 자민련이 교섭단체가 되도록 하였고 김종필이 화답하면서 연합이 지속되게 되었다. [15] 새천년민주당-자유민주연합-민주국민당 3당 연합의 의석 합이 과반을 넘어서자 새천년민주당과 자유민주연합의 연합을 붕괴시켜 관계를 끊어내 의석 수를 늘리고 충청권 기반을 흡수하려던 한나라당의 전략이었단 설도 있다. 당시 한겨레21 참조. [16] 15대 국회 말, 한나라당에서 의원 역빼오기를 통해 국민회의 101석, 자민련 52석으로 과반을 안정적으로 확보했으나 16대 국회에서는 새천년 115석, 자민련 17석으로 과반인 137석에 5석 모자랐고 민주국민당(2석)과 탈당파 의원(3석)까지 설득에 성공한 후에야 과반을 차지하게 된다. [17] 나머지 5곳 중 4곳은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이 가져갔지만 4곳은 광주, 전남, 전북, 제주. 즉 모두 호남이었다.(나머지 1곳은 자민련의 충남) [18] 유시민 보건복지부장관에 따르면, 국민의 정부를 거쳐 참여정부 출범 무렵에는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노숙인들 수가 눈에 띄게 줄었는데, 정부에서 이분들이 동사무소에 지원을 요청 시, 소정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게끔 조처한 덕분이었다고 한다. [19] "제도권 금융기관의 금리"가 저랬다는 말이다. IMF측이 제시한 명분(시중의 자금을 금융기관으로 끌어들인다)은 그럴 듯 했지만, 실제로는 실직 후 자영업자로 다시 시작해야 하는 실직자분들을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들어대는 악재 중의 악재였다. 막대한 이자를 감당하지 못한 어느 가장이 어린 아들의 손가락을 자르는 자작극으로 보험금을 타내려다 적발된 사건까지 일어나는 상황에서, 결국 3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금융시장 개방을(= 국내 금융기관을 외국투자자들이 인수가능하도록) 조건으로 IMF와 재협상 한 끝에 겨우 이율을 낮추게 된다. [20] 실업수당제도와 정부 지원을 받는 직업전문학교들이 주축이 되어 실직자, 구직자분들께 소액의 지원금을 지급하고 직업 훈련을 돕는 제도가 국민의 정부 시절부터 차츰 활성화되기 시작한다. [21] 쉽게 말해서 대우 부도 [22]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시기는 김대중 정부 임기 말이였던 2002년이 마지막 해였지만 참여정부 출범 이후인 2003년~2004년 초까지는 일부 1세대 아이돌이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기는 2세대 아이돌인 동방신기의 데뷔 이후인데다가 버즈 민경훈의 솔로 가수들이 인기를 끌었던 시기였고, 무엇보다 소몰이창법이 한참 인기를 끌던 시기라서 1세대 아이돌의 마지막 전성기는 사실상 2002년이다. [23] 1세대 걸그룹을 대표하는 핑클 S.E.S 모두 김대중 정부 임기말인 2002년까지 활동하다가 해체했고, 핑클은 공식적인 해체는 아니지만 2002년을 마지막으로 활동을 잠정 중단했다. [24] 물론 제도상의 문화검열은 1987년 민주화 이후 완화되거나 사라졌지만 1997년 청보법 파동에서 볼 수 있었듯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25] 당시부터 웹툰 인기작들이 출간되어서 파페포포 메모리즈같은 일부 작품들은 수십만 부가 넘는 판매부수를 보였지만 이 당시까지만 해도 옴니버스 형식의 웹툰이나 에세이툰 위주였기 때문에 잡지만화가 쇠락하는 와중에도 웹툰의 미래에 대해 회의하는 시각이 많았기는 했다. [26] 다만 김영삼 정부 말기에 사랑이 뭐길래, 의가형제 등 한국 인기 드라마가 중국과 베트남에서 열광적인 인기를 끌어서 한류열풍의 싹이 보이고 있었다. 아직 한류 열풍으로 발전되었다고 보기는 미약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평가절하할 이유까지는 없고 사실 한류열풍의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무시할만한 것은 아니다. [27] 해당 영상, 2000년 대통령 신년사, 2001년 대통령 신년사 [28] 이들 중, 1999년생과 2000년생은 20세기에 태어났으며 2001년생은 태어나는 과정에 밀레니엄의 대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20세기와 제2천년기, 21세기의 제3천년기 모두 존재했던 마지막 세대이다. 그리고 1999년생부터 2001년생 모두 1997년 말 김영삼 정부 시절, 한국의 경제주권이 국제통화기금 IMF로 완전히 넘어간 IMF 외환위기 시절에 태어난 끝물 세대이며 김대중 정부 임기 말에 개최된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에 가장 어렸던 세대이기도 하다. [29] 이 시기 이후의 다음 밀레니엄은 천년후인 2999년~3001년에 찾아오기 때문에 현재 생존하는 모든 사람들은 당연히 겪지 못하고, 천년 후에 생존하는 미래의 인류가 경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