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letter-spacing: -0.9px; word-break: keep-all" {{{#000,#999 |
<colbgcolor=#536349> 연표 | 사건 |
1936년 |
3월
라인란트 재무장 | 7월
스페인 내전 발발 | 12월
방공 협정
|
|
1937년 |
7월
중일전쟁 발발(
루거우차오 사건) ·
제2차 국공합작 | 8월
상하이 전투 | 12월
난징 전투(
난징 대학살) ·
파나이 호 사건
|
|
1938년 |
3월
오스트리아 병합 | 6월
1938년 황허 홍수 | 7월
하산 호 전투 | 9월
뮌헨 협정
|
|
1939년 |
4월
스페인 내전 종결 | 5월
할힌골 전투 | 8월
독소 불가침조약 | 9월
폴란드 침공(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
가짜 전쟁 | 11월
겨울전쟁
|
|
1940년 |
4월
노르웨이 침공 | 5월
프랑스 침공 ·
됭케르크 철수작전 | 7월
영국 본토 항공전 | 9월
삼국 동맹 조약 | 10월
그리스 침공
|
|
1941년 |
5월
비스마르크 추격전 | 6월
바르바로사 작전(
독소전쟁 발발) ·
계속전쟁 | 9월
레닌그라드 공방전 | 10월
모스크바 공방전 | 12월
진주만 공습(
태평양 전쟁 발발) ·
말레이 해전 ·
남방작전
|
|
1942년 |
4월
둘리틀 특공대 | 6월
청색 작전 ·
미드웨이 해전 | 7월
엘 알라메인 전투 | 8월
스탈린그라드 전투 ·
과달카날 전역 | 11월
과달카날 해전 ·
횃불 작전 ·
노르웨이 중수 사건
|
|
1943년 |
1월
카사블랑카 회담 | 2월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 4월
바르샤바 게토 봉기 | 7월
쿠르스크 전투 ·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 9월
이탈리아 왕국의 항복(
이탈리아 내전 발발) | 11월
카이로 회담 ·
테헤란 회담
|
|
1944년 |
4월
대륙타통작전 | 6월
바그라티온 작전 ·
노르망디 상륙 작전 ·
필리핀해 해전 ·
사이판 전투 | 7월
브레턴우즈 회의 ·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 8월
바르샤바 봉기 | 9월
마켓 가든 작전 | 10월
레이테 만 해전 | 12월
벌지 전투
|
|
1945년 |
2월
얄타 회담 ·
드레스덴 폭격 ·
이오지마 전투 | 3월
도쿄 대공습 ·
연합군의 독일 본토 침공 | 4월
베를린 공방전 ·
오키나와 전투 | 5월
나치 독일의 항복 | 7월
포츠담 회담 |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만주 전략 공세 작전 ·
일본 제국의 항복 | 9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
|
※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 }}}}}}}}}}}} |
중일전쟁 中日戰爭[1] | Second Sino-Japanese War[2] |
|||||||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 | |||||||
▲ 대륙타통작전[3] 직후의 전황 | |||||||
날짜 |
<colbgcolor=#fff,#191919>
1937년
7월 7일 ~
1945년
9월 2일[4] 종전으로부터 [dday(1945-09-09)]일. |
||||||
장소 | 티베트를 제외한 중국 대륙 전역, 영국령 버마 | ||||||
원인 | 일본 제국의 중국 침략 야욕 | ||||||
교전 국가 및 세력 | |||||||
[[틀:깃발|[5] [[틀:깃발| ]][[틀:깃발| ]][[중국공산당| ]][6] |
]][[틀:깃발| ]][[중화민국 국민정부| ]]
[[일본 제국| ]][[틀:국기| ]][[틀:국기| ]] [[만주국| ]][[틀:국기| ]][[틀:국기| ]] [[몽강연합자치정부| ]][[틀:국기| ]][[틀:국기| ]] [[틀:깃발| ]][[틀:깃발| ]][[지둥방공자치정부| ]](~1938)[7] [[틀:깃발| ]][[틀:깃발| ]][[중화민국 임시정부(괴뢰정부)| ]](~1940)[A] [[중화민국 유신정부| ]][[틀:국기| ]][[틀:국기| ]](~1940)[A] 왕징웨이 정권(19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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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 국가 | |||||||
[[영국| ]][[틀:국기| ]][[틀:국기| ]][10] [[틀:깃발| ]][[틀:깃발| ]][[미국| ]][11] [[틀:깃발| ]][[틀:깃발| ]][[소련| ]][12] [[틀:깃발| ]][[틀:깃발| ]][[몽골 인민공화국| ]][13] [[나치 독일| ]][[틀:국기| ]][[틀:국기| ]](~1938)[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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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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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틀:깃발| ]][[틀:깃발| ]][[중화민국 국민정부| ]] 린썬† [[틀:깃발| ]][[틀:깃발| ]][[중화민국 국민정부| ]] 허잉친 [[틀:깃발| ]][[틀:깃발| ]][[중화민국 국민정부| ]] 옌시산 [[틀:깃발| ]][[틀:깃발| ]][[중화민국 국민정부| ]] 펑위샹 [[틀:깃발| ]][[틀:깃발| ]][[중화민국 국민정부| ]] 리쭝런 [[틀:깃발| ]][[틀:깃발| ]][[중화민국 국민정부| ]] 바이충시 [[틀:깃발| ]][[틀:깃발| ]][[중화민국 국민정부| ]] 마부팡 [[틀:깃발| ]][[틀:깃발| ]][[중화민국 국민정부| ]] 성스차이 [[틀:깃발| ]][[틀:깃발| ]][[중화민국 국민정부| ]] 천청 [[틀:깃발| ]][[틀:깃발| ]][[중화민국 국민정부| ]] 두위밍 [[틀:깃발| ]][[틀:깃발| ]][[중화민국 국민정부| ]] 쉐웨 [[틀:깃발| ]][[틀:깃발| ]][[중화민국 국민정부| ]] 푸쭤이 [[틀:깃발| ]][[틀:깃발| ]][[중화민국 국민정부| ]] 쑨리런 [[틀:깃발| ]][[틀:깃발| ]][[중국공산당| ]] 마오쩌둥 [[틀:깃발| ]][[틀:깃발| ]][[중국공산당| ]] 펑더화이 [[틀:깃발| ]][[틀:깃발| ]][[중국공산당| ]] 린뱌오 [[틀:깃발| ]][[틀:깃발| ]][[중국공산당| ]] 주더 [[영국| ]][[틀:국기| ]][[틀:국기| ]] 루이 마운트배튼 [[틀:깃발| ]][[틀:깃발| ]][[미국| ]] 조지프 스틸웰 [[틀:깃발| ]][[틀:깃발| ]][[미국| ]] 클레어 셔놀트 [[틀:깃발| ]][[틀:깃발| ]][[미국| ]] 앨버트 웨드마이어 [[틀:깃발| ]][[틀:깃발| ]][[소련| ]] 바실리 추이코프 [[틀:깃발| ]][[틀:깃발| ]][[소련| ]]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틀:깃발| ]][[틀:깃발| ]][[몽골 인민공화국| ]] 허를러깅 처이발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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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결과 | |||||||
중화민국의 승리와 일본 제국의 항복[16] | |||||||
영향 | |||||||
태평양 전쟁 발발 중국의 UN 상임이사국 지위 획득[17] 중국공산당 세력 확대 및 국공내전 재발발 |
|||||||
병력 | |||||||
6,270,000명 |
500,000명(1937년) 860,000명(1939년) 610,000명(1941년) 600,000명(1943년) 1,088,500명 + 괴뢰군 1,006,086(1945년) |
||||||
피해규모 | |||||||
3,320,000-10,000,000명 전사 1,597,000명 부상 |
455,000-700,000여 명 전사 1,172,200여 명 부상 |
||||||
중국인 총 사망자 | |||||||
약 22,000,000명[18] |
[clearfix]
1. 개요
1937년 7월 7일부터 1945년 9월 2일까지 중화민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1931년의 만주사변 이래로 일본이 개시한 중국 침략의 절정이었으며, 폭주하는 일본 군부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1939년 이전까지는 나치 독일의 확장, 스페인 내전 등과 함께 고조되는 세계적 긴장을 불러온 사례였고,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전쟁이 이어지며 중요한 전역 중 하나로 격상되었다. 중일관계는 물론이고 이후 일어날 국공내전과 함께 양안관계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 그야말로 중국의 역사를 뒤바꾼 대사건이다.
2. 서론
중일전쟁의 1분 전개[19] |
전쟁이 시작된 1937년부터 1941년까지는 이렇게 중화민국 홀로 일본 제국과 격렬한 전쟁을 하는 양상이 이어졌으나, 전쟁이 장기화되자 일본 제국이 진주만 공습을 행하면서 중일전쟁은 제2차 세계 대전에 포함되었다. 이후 일본 제국이 서방 연합국과의 전투에서 패착을 거듭하면서 일본군의 전력은 급속도로 쇠퇴했으며, 1944년 즈음에 일본은 대륙타통작전을 개시하면서 반격을 꾀했으나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일본 제국이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와 만주 전략 공세 작전으로 1945년 9월 2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자 중일전쟁 또한 종결되었다. 사상자는 무려 2,000만 명에 달했으며, 이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소전쟁에 이어 두 번째로 가장 많이 발생한 인명피해였다.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피가 흐른 곳은 중국이었다. 일본군은 1945년 8월까지 중국에 대규모 육군 병력을 투입했다. 일본군과 중국간 간에 벌어진 전투는 지속적으로 벌어졌다기보다는 간간이 발작적으로 일어났고, 사용한 전략이나 전술도 원시적이었다. 미국은 계속해서 중국 국민당 지도자였던 장제스를 연합국 회의의 일원으로 대우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이는 정치적 제스처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상 중국은 군사적으로 연합국의 승리에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중국 일부 지역을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은 직접적인 살해나 기아 유발을 통해 수백만 명의 중국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탐욕의 끝, 사상 최악의 전쟁
소련이 독일을 완전히 밀어낸
독소전쟁과는 달리 중국은 일제를 밀어내지 못한 상태에서 종전이 되었기에, 과거에는 무능한
중국군과 폭주하는 일본군의 일방적인 전쟁으로 인식되었다.오늘날에는 빈약한 공업력에 낙후된 농촌사회[20]를 이끌고
무기대여법의 이득조차 거의 보지 못한 상태에서 중국이 수백만명에 달하는 일본군을 대륙에 묶어두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 전사자의 30%를 담당했다는 점에서 재평가되고 있는 추세이다.제2차 세계 대전, 탐욕의 끝, 사상 최악의 전쟁
지난 수십 년간 우리는 거대한 투쟁에서 중국이 맡았던 역할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내리지 못했다. 미국, 소련, 영국이 전쟁의 주역을 차지한 것에 비해 중국은 고작 이류 선수나 단역 배우로 여겨졌다. 그러나 중국은 1937년 추축국의 맹공격에 직면한 첫 번째 국가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2년 뒤, 미국은 5년이 지난 뒤에야 같은 상황에 맞닥뜨렸다. 진주만 공격 이후 미국의 목표 중 하나는 "중국으로 하여금 그 전쟁을 지속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수많은 일본군을 중국 본토에 묶어놓음으로써 중국은 전반적인 동맹 전략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중국은 다른 동맹국들에 비해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거의 없었다. 이 전쟁은 그러나 중국이 제국 식민주의 피해자에서 벗어나지만, 폭넓은 지역적·세계적 책임을 지닌 잠정적인 패권 국가로 도약하게 될 중요한 과정이기도 했다.
중국은 일본에 대항하는 '최후의 항전'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중국이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며 되풀이하여 말했던 기자와 외교관들의 예측이 보기 좋게 빗나갔음을 증명했다. 진주만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4년 동안 중국은 사실상 혼자 힘으로 일본과 싸웠다. 이 기간에 가난한 후진국 중국은 세계에서 군사화가 가장 진전되고 고도의 기술력을 갖춘 일본군 80여 만 명을 묶어두었다. 그 뒤 4년에 걸쳐 유럽과 아시아의 두 전선에서 동시에 싸웠던 연합국의 승리에는 중국의 투쟁이 큰 역할을 했다.
중일전쟁 역사가 망각한 그들 1937~1945
중국은 일본에 대항하는 '최후의 항전'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중국이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며 되풀이하여 말했던 기자와 외교관들의 예측이 보기 좋게 빗나갔음을 증명했다. 진주만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4년 동안 중국은 사실상 혼자 힘으로 일본과 싸웠다. 이 기간에 가난한 후진국 중국은 세계에서 군사화가 가장 진전되고 고도의 기술력을 갖춘 일본군 80여 만 명을 묶어두었다. 그 뒤 4년에 걸쳐 유럽과 아시아의 두 전선에서 동시에 싸웠던 연합국의 승리에는 중국의 투쟁이 큰 역할을 했다.
중일전쟁 역사가 망각한 그들 1937~1945
3. 전개
자세한 내용은 중일전쟁/전개 문서 참고하십시오.4. 전후 처리
"8년간의 항전은 양국 모두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우리 양국 형제들은 머리를 싸받고 비통하게 울어야 한다. 오늘 우리는 무기를 버리고 여러분을 고향으로 돌려보낸다. 언젠가는 우리는 양 손에 옥과 수놓은 비단을 들고 당신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환영할 것이다."
탕언보
탕언보
8월 27일 난징에 중국군 100명과 탕언보 장군이 탄 비행기가 착륙했다. 이어 중국군 부대들이 속속 도착했다. 9월 8일 중화민국 국군 총참모장 허잉친이 난징에 도착, 난징의 중앙군관학교 강당에서 오카무라 야스지의 항복을 받아냈다. 중국, 타이완, 북베트남에 주둔한 전 일본군과 일본인은 이제 국민당에게 접수되었는데 그 수가 지나파견군 105만과 해군 7만 등 기타 관동군을 비롯한 중국에 주둔한 총병력 128만, 민간인 142만명을 더해 311만에 달했다. 미군의 협조를 얻어 이들을 일본에 송환하기 시작했지만 1946년 12월 일본 정부의 송환 완료 발표에도 불구하고, 민간인 중 돌아온 사람은 100만에 지나지 않았고, 향후 1980년대까지 송환 문제가 거론되었으며 귀환한 일본인들은 본토에서 차별을 당했다. 이들을 히키아게샤라 한다.
이후 11만 명의 미군이 중국에 상륙했으며 중국군은 서둘러 점령지를 탈환했으나 너무도 갑작스러운 승리는 웨드마이어의 경고대로 대혼란을 초래했다. 이는 미국이 중국에 정보 공유를 하지 않아 중국이 자신들의 승리를 예상하지 못한 것도 컸지만 전근대적인 중국의 행정력과 부패 자체도 문제였다. 국민당은 점령지의 질서 유지를 위해 한동안 한간들을 일시 등용했는데 이후 장제스가 고위 한간들의 대부분을 총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국민당이 한간들과 결탁했다는 악의적 선전이 곳곳에서 나돌게 된다. 일본인의 재산, 즉 적산가옥 등은 국고가 아닌 개인의 주머니에 들어가는 일이 많았고, 전쟁 종료 이후 다시 촉발된 초인플레이션은 중국의 경제와 민심을 크게 동요시켜 향후 국민당이 제2차 국공내전에서 패배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특히 타이완에서 국민당이 현지 주민들과 충돌한 2.28 사건은 수많은 무고한 희생자들을 낳았으며 오늘날까지 장제스와 국민당의 흑역사로 남게 된다.
한편 세력을 100만명으로 키운 공산당은 국민당에 복종하겠다는 맹세를 걷어차고 황허 이북, 그리고 전 중국의 영토를 통제하려고 시도했다. 곳곳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이 충돌하기 시작했고, 장제스는 중국 중공업의 90%를 차지하는 공업지역인 만주를 확보할 것을 명령했지만 중국의 무리한 전과 확대와 부실한 병참 능력으로 인하여 애로사항이 꽃피었다. 웨드마이어는 만리장성 이남의 교통망과 통신망을 먼저 회복하고 만주는 미국, 영국, 소련의 3국 신탁통치를 맡긴 다음에 나중에 찾으라고 제안했지만 장제스는 이를 또 다시 만주를 외세에 넘기는 행위라고 거부했다. 장제스는 충칭에 있었던 반면 공산당은 진작부터 화베이, 만주에 지하조직을 침투시켜 민심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중심지가 옌안이었던데다 소련의 후원을 얻었던터라 훨씬 만주에 접근하기 용이했다. 결국 공산당은 만주의 90%를 장악했다. 장제스는 쑨리런 산하의 신1군을 만주에 파견했으나 병참능력의 부족과 소련의 비협조로 일부 대도시만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소련은 여기서 막대한 일본군 무기를 노획하여 이것으로 린뱌오의 동북인민자치군을 무장시켰는데 실제로 린뱌오는 제2차 국공내전 발발 이후 만주의 요양-심양 회전에서 중국군을 크게 격파했다.
결국 전쟁이 끝난 지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아 제2차 국공내전이 발발했고 중일전쟁에서 크게 타격을 입은 국민당은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할 겨를도 없이 다시 전국구 규모의 내전에 돌입했다가 허망하게 패배하여 대만으로 밀려나 오늘날의 중화민국-중화인민공화국의 관계가 성립되었다.
4.1. 사상자 논란
8년간의 대전쟁에서 중국은 1950년 발표한 《중국백감》을 통해 전사자 103만을 포함한 321만 명의 군인 사상자를 발표했으며 일본군의 경우, 후생성 통계를 통해 공식 전사자가 40만 5,000명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러한 공식 수치는 너무 축소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며 현재는 이 수치가 인용되지 않는다.우선 중국의 경우, 학계의 추가연구 결과 최소 2,000만 명을 상회하는 민간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공산당의 공식 역사서인 중화인민공화국 중앙당사연구실에서 편찬한 《중국공산당 역사》에서는 총 3,500만 명의 군인과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공식적인 입장이다. 극단적인 경우, 군인만 최대 1,00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주장도 있다. 중국에서는 최대 사망자 5,000만 설까지도 제기된다.
한편 서구권에서는 1940~50년대 백만 단위의 수치는 전쟁의 여파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하였으나 반대로 중국 공산당에 의해 제기된 3,500만~5,000만 설 역시 과장되었다고 추측하며 주로 1,500~2,000만 명 범위의 수치를 자주 인용한다. 일례로 라나 미터의 《Forgotten Ally》에 따르면, 서구 학계의 정설은 중국의 군민 총 사망자는 최소 1,400만 명이며, 최대 2,000만 명에 이른다. 한편 기아, 전염병, 자연재해 등 부수적 피해 규모까지 고려하면 주로 2,200만 명의 수치가 언급되는데 이는 중일전쟁 직전(1936년)과 직후(1947년) 중화민국 인구 통계의 차이이다. #
한편 군인 사상자의 경우 국민정부 관방이 처음 발표한 321만 명 설은 지나치게 축소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며 1959년 하버드 대학교 출판부에서 내놓은 《Studies on the Population of China(1396~1951)》에서는 군인 사망자가 124만 명, 부상자가 167만 명, 실종자가 13만 명에 달한다는 추정을 내놓기도 했으며 민간인 사상자의 경우에도 중화민국 행정원배상위원회는 처음에 총 사상자 913만 명을 발표했지만 1988년, 이를 훨씬 상회하는, 사망자 930만 명, 부상자 950만 명 등 2,000만 명 이상이라는 추론이 나왔다. 이후 중화민국 군사작전국은 전사자를 131만 224명, 부상자를 175만 2,591명, 행방불명자를 11만 5,158명으로 발표하여 총 피해가 317만 명이라고 주장했다.
일본 역시 공식적 전사자는 40만 5,000명 수준이지만 일본 후생성이 지나치게 많은 수의 행방불명자를 기록했으며 전후에 일본이 중일전쟁 관련 기밀문서를 많이 폐기한 것 등이 지적된다. 이시카와 요시히로는 일본군 전사자를 47만 명 정도로 봤으며, 허잉친도 《8년항전사》에서 일본군 전사자가 48만 3,000명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허잉친은 부상자까지 합치면 일본군이 241만명의 피해를 입었다고 보았지만 이것도 지나치게 과장된 수치라는게 대세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공산당이 섬멸한 일본군만 52만 7,000명, 왕징웨이 정권의 괴뢰군을 합치면 171만 4,000명에 달한다고 주장하지만 이건 명백한 거짓이다.[21] 애초에 중일전쟁 기간 동안 전사한 일본군이 50만 선인데 전선에서 직접 크게 싸운 국민당도 아닌 뒤에서 일본군을 피해 다닌 중국공산당이 50만 명의 일본군을 섬멸했을 가능성은 없다.
한국 국방대학교의 기세찬 교수의 경우, 일본군 전사자가 172만명에 달하여 일본군 전체 전사자의 55%를 차지한다는 수치를 인용했고,[22] 중국사회과학원의 류다녠 교수는 일본군 전사자가 198만 4,000명이라 주장했다. 하지만 일본군 전사자가 100만이 넘는다는 주장 역시도 중국군 전사자가 1,000만 명을 넘긴다는 주장처럼 상당히 급진적인 주장이다.
5. 중일전쟁의 편견에 대한 고찰과 반박
자세한 내용은 중일전쟁/오해와 편견 문서 참고하십시오.6. 기존의 인식
중일전쟁은 엄청난 역경을 감당했던 정부와 중국 민중의 영웅적인 저항의 역사이기도 하다. 중국은 일본에 대항하는 '최후의 항전'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중국이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며 되풀이하여 말했던 기자와 외교관들의 예측이 보기 좋게 빗나갔음을 증명했다. 진주만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4년 동안 중국은 사실상 혼자 힘으로 일본과 싸웠다. 이 기간에 가난한 후진국 중국은 세계에서 군사화가 가장 진전되고 고도의 기술력을 갖춘 일본군 80여 만 명을 묶어두었다. 그 뒤 4년에 걸쳐 유럽과 아시아의 두 전선에서 동시에 싸웠던 연합국의 승리에는 중국의 투쟁이 어느정도 역할을 했다.
《중일전쟁: 역사가 망각한 그들 1937~1945》, 래너 미터(Rana Mitter, 하버드 대학교 케네디 스쿨 교수), 2020(기세찬, 권성욱 역), 서문 14p.
194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전 세계의 진보적 지식인들과 예술가, 정치가, 혁명가들에게 파시즘에 맞서는 영웅적인 항쟁으로 기록되면서 찬사를 받고,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전쟁이었지만 정작 중일전쟁이 종결된 다음에는 역사에서 완전히 잊혀지다시피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을 다룬 전쟁사 연구에서도 대부분 누락되어, 1980년대에 나온 타임라이프사의 《제2차 세계 대전사》의 경우는 아예 중일전쟁을 2차 대전의 배경 중 하나로 간주해 중국 - 버마 - 인도 전역만을 다루고 있고, 충칭 대공습과 대륙타통 작전을 제외하고는 버마 전선만 다루고 있다. 이렇게 된 것은 전쟁 당사자인 중화민국이 패배하여 대륙에서 쫓겨났고 그 뒤를 이은 중화인민공화국은 중일전쟁에 대한 담론을 깨끗이 무시했으며, 냉전의 결과로 서방에서는 제2차 국공내전에서 중국 대륙을 잃었던 이유를 추궁하기에 바빴던 탓이다.《중일전쟁: 역사가 망각한 그들 1937~1945》, 래너 미터(Rana Mitter, 하버드 대학교 케네디 스쿨 교수), 2020(기세찬, 권성욱 역), 서문 14p.
연구에도 오랫동안 난황을 겪었는데 기본적인 사료가 그렇게 빈약하지는 않으나 객관성의 문제가 있어서 검증이 어려운 탓이 크다. 일단 일본군의 1차 자료는 1945년 일본 제국 패망 이후 자신들에게 불리한 자료를 조직적으로 파기한데다가 전쟁을 합리화하기 위해 사상자를 누락하는 등 왜곡이 가해졌기 때문이다.
중국군의 경우, 중화민국측 자료의 양은 많으나 이 또한 객관적이지 못하다. 게다가 제2차 국공내전의 승자인 중화인민공화국의 프로파간다에 묻혀버렸고[23] 장제스가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어용학자들을 고용해서 조작한 자료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았다.
훗날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세력이 되는 공산군의 경우, 중일전쟁 극초기와 백단대전을 빼면 거의 싸우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집권의 정당성을 위해 이를 숨기고 전쟁의 주역인 국민당을 깔아뭉갰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으며 공산주의 국가 특유의 과장성으로 인해 사료에 기재된 전황의 정확성에 문제가 많고[24] 애초에 중국 공산정부는 20세기 말까지 중일전쟁 자체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25] 1980년대 이후로 중일전쟁 관련 자료를 공개하고 유격전과 전면전을 분리해 국민당의 역할도 조명했으나 장제스 비하 등이 사라지는덴 시간이 걸렸다. 이제는 상당히 전향적으로 재평가하는 편이지만 공산당 독재 치하의 연구라는 점에서 한계가 명확하다.
미국 등 기타 연합국의 자료는 애초에 버마 전선이나 대륙타통작전 정도만 빼면 관심도 없고[26] 스틸웰과 장제스 사이의 불화에 집중한 데다가 당시 미국의 중국통이 패트릭 헐리나 앨버트 웨드마이어, 조지프 앨솝 정도만 빼면 마오빠가 되어서[27] 공산당을 '농촌 민주주의자' 정도로 인식한 낙관적 옹호와 국민당을 항일을 회피하는 부패정당으로 묘사하는 악의적인 보고를 많이 올렸으며 제2차 국공내전 이후 중국 대륙을 공산주의자들에게 잃은 것에 대한 미국 정부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화살을 국민당에게 돌리는 통에 이후 미국 쪽의 기록들은 국민당 정권 비난 일색에다가 역시 제3자라 자료가 적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의외로 일본에서 전후에 발간된 자료들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었다.[28] 게다가 전투가 크게 벌어지고 사상자도 많은데 실제 전쟁에 미친 영향이 거의 없다는 인식 또한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7. 역사에서의 비중
상대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서술에서 나치 독일이 중심이 된 유럽전선의 비중이 크고 일본 제국으로 한정해도 중일전쟁의 서술 비중은 미국과의 태평양 전쟁에 밀리는 편이다. 이러한 이유로 중국을 제외하면 중일전쟁의 역사 서술 비중은 2차대전사에서 상당히 적다.하지만 일본이 중국을 치지 않았으면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은 중국을 정복할 꿈에 가득 차 있었으나, 어마어마한 규모의 인구와 크기를 자랑하는 중국은 끝까지 버티면서 일본에 맞섰고, 일본이 결국 이 수렁에 빠져 피해가 커지자 더욱 군국주의를 밀어붙이고, 손해를 메꾸기 위해 동남아시아를 치기로 결정, 본격적으로 연합국, 그리고 미국과 마찰이 일어났다. 중일전쟁이 없었다면 이후 동아시아 역사는 매우 크게 달라졌을 것이 뻔하다.
중일전쟁은 태평양 전쟁 발발에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고, 발발 이후에도 태평양 전쟁의 일부이자, 일본 제국 육군의 절대 다수를 붙잡아둔 중요 전선으로 기능했다. 일본군,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중일전쟁은 일본 육군이 주도하여 일으킨 전쟁이었고, 태평양 전쟁은 일본 해군이 주도한 전쟁이었다. 당연히 일본 육군의 주 관심은 중원, 만주 일대였지, 듣도 보도 못한 머나먼 태평양 망망대해에 떠 있는 섬들이 아니었다. 따라서 태평양 전쟁 초•중반에 지상군 병력을 필요로 하는 전장에 대해 일본 육군은 그다지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고, 태평양 방면의 병력 파견 규모도 작전 구역의 면적을 생각해 보면 중원과 만주에 투입한 것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당장 과달카날 전투의 진행 경과만 봐도 이러한 점은 여실히 드러난다. 때문에 태평양 전쟁 개전 직후를 제외하고 연합군 지상군과 맞붙은 전장에서 일본군의 지상병력이 연합군 지상병력을 능가한 적은 없었으며[29], 이로 인해 태평양 전쟁에서의 지상전 양상은 대부분 '밀어붙이는 연합군(사실상 미군) vs 밀리는 일본군'이라는 구도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지상전의 패배는 그 일대의 제해권, 제공권 영구 상실[30]로 이어지면서 일본 제국의 패망으로 이어지는 데 한몫했다. 그리고, 전개 항목에 언급된 바와 같이 태평양 전쟁의 주요 전투들 중 일부는 중국 전역의 경과에 적게나마 영향을 받아 일어난 것도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의 시발점을 폴란드 침공이 아닌 중일전쟁 발발로 봐야한다는 주장이 2000년대 들어서 제기된다.[31][32] 하지만 중일전쟁이 처음부터 국제적으로 번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의 개전과 중일전쟁의 개전은 별개의 사건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이 전쟁의 결과로 중화민국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 중 하나가 되어 유엔 상임이사국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그 직후 발발한 제2차 국공내전에서 패배해 타이완으로 이동하고 대륙을 중국공산당이 접수하면서 극동 질서를 담당할 상임이사국, 즉 정통 중국이 누구냐에 대한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결국 1971년 중화민국이 형식적으로 자진 탈퇴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상임이사국 권리를 확보했다. 그러나 중국이 일본에게 어찌어찌 승리하긴 했으나 일본이 점령지에서 저지른 생체실험, 신멸작전(특히 난징 대학살) 등의 전쟁범죄로 인해 지금도 갈등의 요인이 되고 있다.
7.1. 독소전쟁과의 비교
중일전쟁은 사상자 규모 및 전면전이라는 측면에서 독소전쟁과 자주 비교된다. 실제 소련과 중국은 2,000만대라는 압도적인 인명 피해를 치르면서 각각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을 상대로 물량공세를 펼쳤고 이는 추축국 패망에 크게 기여했다.하지만 그럼에도 독소전쟁의 중요성이 중일전쟁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이 세계사학계의 중론이다. 이는 단순히 물리적 피해규모 뿐 아니라 독소전쟁의 결과 소련은 세계 양강으로 떠올랐고 동독을 포함한 동유럽 전체가 공산화되어 향후 46년 간 전개될 냉전의 구도에 독소전쟁이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서사적으로 보아도 중일전쟁은 흔한 침략 전쟁의 연장선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지만 독소전쟁은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의 충돌, 게르만족과 슬라브족의 전면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중일전쟁은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단이 되어 비교적 우발적으로 일어난 측면이 강한 반면,[33] 독소전쟁은 아돌프 히틀러를 위시한 나치 정권의 상부가 치밀하게 계획한 유례없는 전면전이었다. 게다가 소련군은 나치즘의 본거지인 베를린을 끝내 점령하면서 서사적인 마무리를 직접 이행한 반면, 일본 제국은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에 항복하였기에 중화민국은 일본의 항복 과정에서 독소전쟁의 소련만큼 존재감을 보이진 못했다.
교전국들의 위상 역시 차이가 크다. 일본 제국은 열강 중 말석이었고 중화민국은 중앙집권력이 붕괴된 군벌들의 이합집산 집단에 불과했던 반면, 나치 독일과 소련은 개전 당시 세계 GDP 2, 3위를 다투는, 구 대륙의 초강대국들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세계사적인 파장 역시 독소전쟁이 압도적이었다. 특히 나치와 일제를 비교할 경우 일제 역시 난징 대학살을 비롯한 십만 단위의 학살을 수도 없이 자행하며 극악무도한 전쟁범죄를 일삼았지만 나치는 중앙정부 차원에서 특정 민족의 몰살을 목적으로 기계적인 학살 시스템을 강구하였기에 세계인들에게 선사한 충격이 더욱 컸다.
물론 중일전쟁도 분명 중요한 건 사실이다. 전역 규모로는 태평양 전쟁에도 결코 뒤지지 않고, 태평양 전역은 인류가 전쟁을 벌인 전역 중 가장 넓은 지역이었다. 중일전쟁 사상자 숫자 또한 그때 당시 중국의 행정력 부족과 일본 측의 자료 폐기 등의 사료 인멸로 인해 적게 집계되었을 뿐이지, 실제론 중국에서 군민 포함 약 2,20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여 독소전쟁 당시 소련이 입은 피해 규모(2,600만 명)에 버금간다. 게다가 교전 기간은 8년으로 2차 대전 전역 중 가장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8. 관련 문장 혹은 발언
"...우리의 피와 살로 우리의 국방을 대체하고 우리의 피와 살로 적의 총포에 저항한다면, 비록 모든 전투에서 패할지라도 나는 최후에는 반드시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종류의 혁명전술을 사용한다면 그들이 중국의 1개 성을 점령하는데 최소한 1개월이 걸릴 것이고 통계적으로 그들이 중국의 18개 성을 점령하자면 최소한 18개월이 걸릴 것이다. 이 18개월의 시간 동안에 국제 정세의 변화가 (일본에게) 이익으로 돌아가겠는가? 하물며 그들은 1개월에 결코 우리의 1개 성을 신속하게 점령할 수도 없을 것인데..."
1934년 7월, 루산 군관훈련단에서의 장제스의 강연.
1934년 7월, 루산 군관훈련단에서의 장제스의 강연.
"일본이 얻고자 하는 것은 전 태평양의 패권이지 일본과 중국의 양 국가의 문제가 아니다. (중략) 우리가 능히 자강할 수 있다면 천하가 모두 우리의 우방이 될 것이기 때문에 일본의 무력이 얼마나 강대하던가에 관계없이 사실상 그들은 이미 고립의 위치에 처해 있으며 전 세계의 비난의 대상이 될 것이다."
장제스.
장제스.
"
이번 사건은 완전히 중국 측의 계획적인 무력항일인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정부는 일본의 각의에서 중대결의를 행하여 북중국출병에 관해 정부로서 취해야 할 필요조치를 내릴 것을 결정한다."
1937년 7월 11일, 일본 제국 정부의 성명.
1937년 7월 11일, 일본 제국 정부의 성명.
"우리가 일개 약소국이긴 하나 만일 '최후의 관두'에 달했을 때에는 전 민족의 생명을 희생해서라도 국가의 생존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전쟁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약소국이므로 더 이상 타협의 기회란 없으며, 만약 한 치의 땅과 주권이라도 포기하게 된다면 곧 중화민족 천고의 죄인이 되는 것이다!"
"萬一真到了無可避免的最後關頭,我們當然只有犧牲,只有抗戰"
"만일 정말로 회피할 수 없는 운명의 갈림길에 이른다면, 우리에게는 당연히 희생과 항전만이 있을 뿐이다!"
1937년 7월 17일, 장제스의 루산성명.
"전쟁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약소국이므로 더 이상 타협의 기회란 없으며, 만약 한 치의 땅과 주권이라도 포기하게 된다면 곧 중화민족 천고의 죄인이 되는 것이다!"
"萬一真到了無可避免的最後關頭,我們當然只有犧牲,只有抗戰"
"만일 정말로 회피할 수 없는 운명의 갈림길에 이른다면, 우리에게는 당연히 희생과 항전만이 있을 뿐이다!"
1937년 7월 17일, 장제스의 루산성명.
"제가 어디로 가든지 간에 그곳이 바로 정부이자 저항의 중심지입니다.
제가 곧 국가입니다."
장제스.
장제스.
"현재 상황은 제국이 경험해 온 것과 전혀 다르다. 우리는 이 전쟁이 전면전으로 이행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1937년 9월 4일, 스기야마 하지메 일본제국 육군대신.
1937년 9월 4일, 스기야마 하지메 일본제국 육군대신.
"중화민국과의 제휴 협력에 의지하여 동아시아의 안정을 확보하느라 불철주야 애썼으나 중화민국은 제국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분별하게 일을 크게 만들어 결국 이번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짐은 이를 개탄하는 바이다. 이제 군인은 온갖 어려움을 물리치고 충성을 다해달라. 이로써 중화민국의 반성을 촉구하고 동아시아의 평화를 빨리 확립할 수 있으니 그 외에는 방법이 없다."
1937년 9월 4일, 쇼와 천황의 제국의회 개회식 칙어.
1937년 9월 4일, 쇼와 천황의 제국의회 개회식 칙어.
"중일의 싸움은 본당 발전의 절호의 기회이며 우리 공산당의 기본정책은 전력의 70%를 자기 세력 확대에,
20%를 국민정부와의 대응에, 나머지
10% 항일에 사용한다."
1937년 9월 26일, 8로군 중대장 이상 모든 간부들을 모아서 실시한 마오쩌둥의 훈시.
1937년 9월 26일, 8로군 중대장 이상 모든 간부들을 모아서 실시한 마오쩌둥의 훈시.
"상하이에서 내신을 통해
난징에서 보인 아군의 잔학상을 자세히 전해왔다. 약탈, 강간은 눈 뜨고는 못 볼 참상이다. 아아, 이것이 황군이란 말인가."
외무성 동아국장 이시이 이타로.
외무성 동아국장 이시이 이타로.
"우리는 승리할 때까지, 우리의 두 다리가 정말로 부러질 때까지, 설령 우리의 아름다운 땅과 유구한 역사 그리고 중화의 갈망이 피로 물들고 화염에 삼켜져 멸망할지라도 계속 싸울 것입니다."
1937년 11월, 쑹메이링.
1937년 11월, 쑹메이링.
"...굴복해서 멸망당하느니 차라리 전쟁을 벌이다 패배해서 멸망하는 편이 낫겠다."
1938년 1월 2일, 장제스.
1938년 1월 2일, 장제스.
"...국민정부를 부인하며 이를 말살하는 것이다."
일본 정부의 1938년 1월 18일 공식 성명.
일본 정부의 1938년 1월 18일 공식 성명.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비록 우리가 18개 성 중에서 15개를 잃는다손 치더라도 오로지 쓰촨, 윈난, 구이저우를 지킬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적일지라도 물리칠 수 있으며 잃어버린 땅을 수복하고 국가를 재건하고 우리의 혁명을 이룰 수 있다.
1938년, 장제스의 난웨 군사회의에서의 발언.
1938년, 장제스의 난웨 군사회의에서의 발언.
"나는 일부 도시들을 잃었다고 동요하지 않소. 만약 너무 많은 것을 잃는다면 우리는 훨씬 더 많은 것을 일으켜 세울 참이오."
장제스.
장제스.
"차라리 산산이 부서진 옥이 될 망정 온전한 기와가 되지는 않겠다."
장제스, 우한 함락 이후의 발언.
장제스, 우한 함락 이후의 발언.
"중국과 같은 대국이 나 따위에 팔릴 나라는 아니다. 비록 내가 조인하더라도 그것은 내 몸을 파는 계약에 지나지 않는다."
1939년 12월 30일, 친일정권을 수립하기 직전의 왕징웨이.
1939년 12월 30일, 친일정권을 수립하기 직전의 왕징웨이.
"(중국에서의 최종 목적은) 군사적인 승리를 얻는 것 뿐 아니라 중국의 재생과
일본, 만주국, 중국의 상호협력을 기초로 하여 동아시아의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것이다. 이 목표가 실현되지 않는 한 충돌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1940년 1월, 히라누마 기이치로.
1940년 1월, 히라누마 기이치로.
"우리는 항복하지 않고 앞으로, 반드시 앞으로 진군해야만 한다. 항복은 틀림없이 전 국가적인 참화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1940년, 장제스.
1940년, 장제스.
"적의 전의를 파괴하고 쇠망시키라."
1941년 12월 3일, 쇼와 천황의 대륙명 575호.
1941년 12월 3일, 쇼와 천황의 대륙명 575호.
"옌안은 끓어올랐다. 붉은 깃발이 곳곳에 내걸렸다. 중심가는 물론 주변의 산악도 마찬가지였다. 북이 울리고 폭죽이 터졌으며 사람들은 모자를 하늘로 던졌다. 농민들은 사과와 배를 내놓았고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도 얼싸 안고 춤을 추었다. 그날 밤 산과 들은 불이 바다를 이루었고 기쁨이 흘러넘쳤다. 8년에 걸친 일본과의 힘든 싸움은 마침내 승리로 끝났다. 축제는 사흘 동안 계속되었다."
마오쩌둥의 러시아어 통역 스저의 회고.
마오쩌둥의 러시아어 통역 스저의 회고.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공무원, 학생, 상인과 이른바 상류층이란 사람들은 환락의 소용돌이로 몸을 던졌다."
수필가 겸 극작가 루링.
수필가 겸 극작가 루링.
"이 100년에 가까운 굴욕의 역사는 마침내 끝났다. 신화일보 전 직원은 열광했다. 사실상 충칭의 모든 주민, 중국의 모든 국민이 열광했다."
신화일보 설립자이자 좌익작가연맹 작가 샤엔.
신화일보 설립자이자 좌익작가연맹 작가 샤엔.
"모든 사람은 오늘을 영광스러운 날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나는 홀로 커다란 부끄러움과 슬픔을 느낀다."
일본의 항복 직후, 장제스.
일본의 항복 직후, 장제스.
"전국 군민 동포 여러분, 전세계의 평화를 사랑하는 인사 여러분, 오늘 우리는 승리했습니다. 정의는 필연적으로 강권에 승리한다는 진리는 마침내 최후의 증명을 얻어냈습니다."
장제스의 승전 연설. <항전 승리를 전국 군민과 전세계 인사들에게 고함/抗戰勝利告全國軍民及全世界人士書(항전승리고전국군민급전세계인사서)> 중.
장제스의 승전 연설. <항전 승리를 전국 군민과 전세계 인사들에게 고함/抗戰勝利告全國軍民及全世界人士書(항전승리고전국군민급전세계인사서)> 중.
9. 기타
- 중일전쟁 초기인 1938년 5월에는 중국 공군이 일본 본토 공격을 감행한 적이 있다. 중국 공군의 소련제 SB-2 폭격기 2대[36]가 일본 규슈의 구마모토현 상공까지 온 것이다. 이 때 중국군 폭격기가 투하한 것은 폭탄이 아니라 일본군의 만행을 비난하는 선전물( 삐라)들이었다. 작전을 수행한 폭격기들은 아무런 공격을 받지 않고 무사히 귀환했다. 작전으로 인한 실질적인 효과는 거의 없었고 이후에도 중국 공군은 더 이상의 일본 본토에 대한 폭격 작전을 시행하지 않았다. 다만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일본의 대공 방어 체계가 엉망이었다는 것이다. 일본군 수뇌부는 이 사건을 단순 해프닝으로만 생각하고 대공 방어의 증강 등 대응책을 전혀 세우지 않았던 것이다.
- 지도만 놓고 보면 죄다 평지로 보여서 일본군이 중국에서 발목 잡힐만한 이유를 모를수도 있지만, 이 지도를 삼국지로 가져다 놓으면 답이 나온다. 더럽게 험난한 지형을 가진 지역들이 보일것이다. 정말 저런 곳들 제외하면 일본 육군이 나름 최선을 다한 셈이었다.
- 항일을 한 외국인들도 있으며 미국인은 2천590명이 있었다고 밝혔다. #
9.1. 기념일
자세한 내용은 전승절(중국) 문서 참고하십시오.9.2. 전쟁 시작의 성격
일제는 선전포고도 하지 않고 침공해왔는데 이는 루거우차오 사건이 확대되어 교전이 발생했다는 일본측 시각에 의한 것으로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중사변' 또는 '지나사변'으로 낮추어 부르기도 했다.[38] 이렇게 명칭을 낮춘 이유는 꽤 여러가지 추론이 있다. 당시 제1차 세계 대전 이후로 전쟁이 국제법상 금지되었기에 "나 전쟁 안했소" 하여 국제적 추궁과 일본 국민의 신뢰추락 회피, 중국을 인정치 않았던 일제의 정책 등이 있다. 결국엔 제국주의 침공을 면피하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일제의 행각은 계속 유지되어 할힌골 전투를 노몬한 사건으로 축소했다.여기서 일제가 나중에 선전포고를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언급한 것이 있다. 일단 선전포고 문제는 의외로 나라 간의 이해타산이 엮여들어간 문제였다. 전쟁 내내 중국은 선전포고를 안했다는 것으로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초기에는 일제가 하더라도 선전포고로서 받아들이지 말아달라고 미국에 타진하기도 했었다. 여기서 문제가 되었던게 미국의 중립법이었는데, 국내 기업이 전쟁을 벌이는 쌍방과 경제적 활동을 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법률이었다. 따라서 선전포고가 공식으로 받아들여져 공식적인 전쟁이 되면 중국은 미국에게 물자원조를 전혀 받을 수 없고, 오히려 몰래하려다가 일제에게 나포당할 수도 있으며 미국이 이 나포문제와 한창 노리고 있던 중국과의 경제교류를 통한 이득에 손해를 볼 것 같다는 이유 등으로 피해가 우려되어 껄끄러워 했고 일제도 당시 경제의 태반을 미국에 의지하던 상황에서 미국과의 경제교류가 전쟁기간 동안 정지되던 상황이었다. 전후는 어쨌든 전쟁 시작 시에는 공식적인 전쟁으로 만들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다. 오히려 일제의 침공군 중 고참급 인사들은 선전포고를 하고 싶었던 부류가 꽤 많아 비선전포고파와 아웅다웅했는데, 경제문제 따위가 뭔 상관이냐며 경시하는 시각과 함께 선전포고를 하는 편이 전후 패전국에게서 영토와 물자를 더 뜯어내고 점령시의 절차가 간단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비선전포고파의 경우는 손해없이 이득을 끌어내자, 즉 어떤 방식으로 중국을 침탈하는가에 대한 방법론 문제였다.
그러나 이런 일본의 입장을 100% 인정해주더라도 엄연하게 선전포고를 하지도 않고 기습적으로 개전한 것은 국제법상으로 변명할 수 없는 전범행위다. 특히 일본에서 중국이 선전포고에 관련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랍시고 대는데, 가해자들이 흔히 하는 변명중 하나다. 피해자가 이론을 제기하던 안하건 간에 범죄로 엄연하게 성립되는 내용을 가지고 정당화를 시도하는 것이니 전혀 의미가 없다. 일본은 청일전쟁, 러일전쟁, 태평양 전쟁 등 앞서 언급했듯이 선전포고 안하고 기습을 해서 개전하는 것을 당연시여기는 행적들을 보인데다가 그러나 그렇게까지 선전포고를 하고 싶었다면 나중에라도 하면 되는데 끝까지 안했다. 그 때문에 1941년 12월 9일 장제스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기 전까지 중일전쟁은 공식적으로는 사변, 영토 분쟁이었다.
9.3.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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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
중국항일전쟁(中國抗日戰爭 정체자/中国抗日战爭 간화자/zhōngguó kàngrìzhànzhēng 한어병음)이나 간단하게 항일전쟁(抗日戰爭/抗日战爭/kàngrìzhànzhēng)이라 부르며[39] 혹은 8년간의 항전이라는 뜻의 팔년항전(八年抗戰/八年抗战/bā nián kàngzhàn)이라 칭하기도 한다.[40] 중일전쟁(中日戰爭/中日战爭/zhōngrìzhànzhēng)이라는 용어도 쓰이나 청일전쟁을 뜻하기도 한다.[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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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일본 주류 학계에서는 일중전쟁([ruby(日中, ruby=にっちゅう)][ruby(戦争, ruby=せんそう)])이라 칭하며 당대에는 지나사변([ruby(支那, ruby=しな)][ruby(事変, ruby=じへん)])[42]이라고 불렀다. 위키백과 일어판 지나사변 문서[43]에 따르면 종전 후 중화민국 정부의 항의로 ' 지나'라는 단어를 뺀 일화사변(日華事変)을 거쳐 일중전쟁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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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Second Sino-Japanese War라고 부른다. 청일전쟁도 Sino-Japanese War라고 부르기 때문에 앞에 First, Second를 붙이거나 뒤에 연도를 달아서 구분한다. 그 전에도 중국과 일본의 정규군이 맞붙은 전쟁이 백촌강 전투, 임진왜란 등 몇 있지만 두 나라가 주역으로서 전면적으로 맞붙은 전쟁은 청일전쟁과 중일전쟁이라 이런 표현이 정착했다.
10. 관련 문서
10.1. 배경 관련
- 봉소전쟁
- 중원대전(1930.4.5~1930.11.4)
- 창사 폭동(1930.6.11~1930.9.13)
- 제1차 초공작전(1930.12.19~1931.1.3)
- 탕산 사건(1931.2.28)
- 제2차 초공작전(1931.4.1~1931.5.31)
- 1차 양광사변(1931.5.27~1932.1.1)
- 나카무라 사건(1931.6.27)
- 만보산 사건(1931.7.1)
- 제3차 초공작전(1931.7.1~1931.9.20)
- 만주사변(1931.9.18)
- 제1차 상하이 사변(1932.1.28)
- 장왕합작(1932.1)
- 제4차 초공작전(1932~1933)
- 열하사변(1933)
- 폐량개원(1933.4.5)
- 제5차 초공작전(1933.10.16~1934.11.10)
- 복건사변(1933.11.20)
- 대장정(1934~1935)
- 하매 협정(1935.6.10)
- 진토 협정(1935.6.27)
- 왕징웨이 저격 사건(1935.11.1)
- 법폐개혁(1935.11.4)
- 중미은협정(1935.11.13)
- 기동사변(1935.11.25)
- 12.9 운동(1935.12.9)
- 동정항일(1936)
- 2차 양광사변(1936.6.1)
- 수동사변(1936.11.14)
- 7군자 체포 사건(1936.11.23)
- 서안 사건(1936.12.12)
10.2. 전투, 사건
10.2.1. 화북전역
- 루거우차오 사건(1937.7.7)
- 베이핑-톈진 전투(1937.7.25~1937.7.30)
- 베이핑 탈환전(1937.8.6~1937.8.26)
- 평형관 전투(1937.9.25)
- 신커우전-타이위안 전투(1937.10.2~1937.11.8)
10.2.2. 주요 전투
- 제2차 상하이 사변(1937.8.13~1937.11.12)
- 훙차오 공항 사건(1937.8.9)
- 장인 전투(1937.8.16~1937.12.2)
- 우쑹 전투(1937.8.23~1937.8.31)
- 트라우트만 공작(1937.11.5~1938.1.13)
- 난징 전투(1937.12.3~1937.12.13)
- 왕징웨이 공작(1938.2~1940.3.30)
- 동 공작
- 쉬저우 전투(1938.1~1938.5.19)
- 타이얼좡 전투(1938.3.17~1938.4.19)
- 1938년 황허 홍수(1938.6.9)
- 우한 전투(1938.6~1938.10)
- 광저우 전투(1938.10.12~1938.10.23)
- 쑤이셴-짜오양 전투(1939.5.1~1939.5.24)
- 제1차 창사 전투(1939.9~1939.10)
- 1939년 동계공세작전(1939.12~1940.2)
- 짜오양-이청 전투(1940.5.1~1940.6.18)
- 백단대전
- 제2차 창사 전투(1941.9~1941.10)
- 제3차 창사 전투(1941.12~1942.1)
- 남방작전 버마전역(1942.1~1942.3)
- 신멸작전(1941.12~1944?)
- 태평양 전쟁(1941.12.7~1945.8.15)
- 신강성 공산당원 숙청 사건(1942)
- 카이로 회담(1943.11)
- 창더 전투(1943.11.1~1943.12.20)
- 임팔 작전(1944.3.8~1944.5.3)
- 대륙타통작전(1944.4.14~1944.12)
- 제4차 창사 전투(1944.5.27~1944.6.19)
- 헝양 공방전(1944.6.22~1944.8.8)
- 위시-어베이 전투(1945.3.21~1945.5.11)
- 샹시 전투(1945.4.9~1945.6.7)
10.3. 관련 인물
자세한 내용은 중일전쟁/관련 인물 문서 참고하십시오.10.4. 관련 단체
11. 대중매체
중국에서는 당연히 근현대 사극으로도 많이 제작되지만, 2010년대 전반기에 같은 중일전쟁을 우려먹으면서 시청률을 잡으려다 보니 항일신극(抗日 神剧)이라는 비아냥까지 들을 정도의 초 막장 드라마가 양판소처럼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이들 드라마는 중국내에서도 고증이 막장인건 물론이고, 내용 전개도 무협지나 판타지로 전개되냐며 엄청나게 까이다보니 광전총국[44]에서조차 막장 고증으로 유명한 드라마에 대해서 과징금이나 방영 중지같은 제재 조치를 취했기 때문에 이 정도로 맛이 간 드라마는 줄어들었다. 이때 막장 고증이 어느 정도였는지 바이두 백과 항일신극 항목에서 화살로 일본군을 때려잡을려고 한다거나 맨손으로 일본군을 반으로 갈라낸다거나 일본군의 전쟁범죄 등 방영시간대에 걸맞지 않게 폭력적이고 자극적이며 선정적인 장면들이 줄줄히 나올 정도였다.그리고 정작 중일전쟁 당시 연안에만 있다시피한 중국공산당을 의롭고 일본을 상대로 열심히 싸운 항일열사로 묘사하는 반면, 실제 역사대로 일본을 상대로 싸웠던 중국국민당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능력도 없는 모지리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45] 심지어 극 중 원래 국민당 소속이었던 주인공이 진정한 애국자인 공산당에 감화되어 당적을 옮긴다던지, 아예 공산당 소속의 스파이인 주인공이 중국국민당의 정보기관에 침투해서 오랫동안 국민당 관료 노릇을 하다가 마지막에 공산당으로 되돌아간다는 식의 묘사도 많이 나온다.
그나마 최근들어 < 800> 등 중국국민당의 항일투쟁을 재조명하는 매체도 늘어나고는 있지만 사실 이 < 800>만 하더라도 국민당군을 재조명했단 이유로 시진핑의 심기를 거스른 모양인지 개봉이 수차례 연기된 적이 있었고, 의도 자체도 국민당을 재평가하려는 의도이기보단 중국 인민의 민족주의를 강조하기 위한 성향이 크다. 게다가 2019년을 기점으로 국가광파전시총국에서 아예 국민당을 공산당보다 더 유능하게 그리면 방영 허가를 내리지 않겠다고 못을 박은 상태이기도 하다.
11.1. 영상물
- < 태양의 제국>(미국)
- < 색계>(미국, 홍콩 합작)
- < 존 라베>(중국, 독일, 프랑스 합작)
- < 난징! 난징!>(중국)
- < 흑태양 시리즈>(중국) 4편
- <황시>(중국, 호주, 독일 합작)
- < 진링의 13소녀>(중국)
- <백단대전>(중국): 2015년 8월 23일에 개봉한 전승 70주년 기념 영화.
- <첩혈고성>(중국) 전투신 일부
- <귀신이 온다>(중국) - 카가와 테루유키가 조연으로 등장했다. 이후 카가와 테루유키는 <존 라베>에서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친왕으로 등장했다.
- < 엽문>(홍콩)
- <플라잉 타이거즈>(미국)
- < 진주만>(미국): 막판에 중국 전선과 중국군이 일부 등장한다.
- <붉은 수수밭> - 장예모 감독의 작품. 공리 주연.
- < 패왕별희>(중국): 전투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중국인들이 항일을 외치고 일본군이 침략해오는 장면이 나온다.
- < 대폭격>(중국/미국 합작): 충칭 대공습이 나온다.
- < 미드웨이>(미국)
- < 800>(중국)
- <태평륜>(중국): 제2차 국공내전이 일어나기 이전 항일 전투 장면이 나온다. 전투신 일부
11.2. 게임
- < 광영사명> - 항전용사, 몽회항전 모드. 각각 상하이 전투와 루거우차오 사건, 쓰싱 창고 전투[46]를 배경으로 하는 모드다.
- <팔년항전> - 2001년 대만에서 제작된 게임, 장르는 SLG.
- <팔년항전 2> - 2012년에 제작된 <팔년항전>의 후속작인데 장르가 RTS로 바뀌었고, 무난한 전작에 비해 별로 호평도 듣지 못했다.
- <항일: 혈전상해탄> - 2003년 대륙에서 제작된 FPS 게임. 퀄리티나 완성도가 좋다고는 말 못하지만 의외로 중국에서 인지도는 있는 듯 하다.
- <항일: 혈전면전> - 2004년 제작된 후속작으로 이번에는 미얀마 원정이 주무대가 된다. 역시 호평은 받지 못했다. 제작사는 야심차게 후속작을 기획했으나 망해버렸다.
- < Hearts of Iron IV>: 일본이 루거우차오 사건 국가중점을 완료하면 중국에게 화북을 할양하고 전쟁을 늦추냐, 혹은 바로 전쟁에 돌입하냐 양자택일을 강요하게 된다. 혹은 중국 공산당이 일본도발 결정을 통해 선전포고를 유도하거나, 일본이 그냥 쌩짜로 중국에게 전쟁명분 정당화를 통해 선전포고를 하는 경우도 있다. 루거우차오 사건을 통하지 않고 선전포고시 일본에게 디버프가 생기지 않는다.
- 유저모드 < Eight Years' War of Resistance>: 동아시아 국가들의 국가 중점을 뜯어고치고 당시 중국의 지도를 훨씬 세밀하게 내놓은 모드이다. 초반에는 일본의 국가 중점만 손봤으나 이젠 중국의 국가 중점과 국민 정신 등이 대폭 추가되어서 고증에 맞는 플레이가 가능하다. 실제 역사대로 중국 국민정부로 플레이하여 쓰촨 군벌들의 권력을 해체한다거나 1936년 2차 양광사변을 통해 광둥의 지배권을 확보하는 등 중화민국 입장에서 더 다채로운 정치적 이벤트를 겪으며 플레이할 수 있으며 오로지 일본 제국의 괴뢰국이 되느냐, 일본 제국과 전쟁하느냐만의 선택지가 있었던 원작과 달리 만주국 인정을 담보로 한 중일동맹 체결도 가능하다. 당시 중공업이 부재하고 정치적으로 혼란했던 중화민국 상황을 고려하여 기갑 관련 기술 연구에 1,000%이상 시간 연장을 하는 국가 정신 페널티를 부여하는 등 중화민국의 정치, 경제적 상황 등도 고증이 되었으며[47] 일본 쪽도 다양한 정치 이벤트가 가능하다.
-
유저모드 <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 미국이 대공황을 현실보다 늦게 해결했기에 당연히 현실보다 약했고[48], 그마저도
우란프로옉트의 성공으로 독일산 핵폭탄 맞고 항복하면서 연합의 물주가 사라졌으며 일본은 이 결과 태평양 군도 할양과 샌트란시스코항을 조차를 받았다. 설상가상
무다구치 렌야가
임팔 작전을 성공시키면서[49] 버마 로드가 차단된다. 중화민국은 유일한 연합국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47년까지 항전했고, 결국 충칭에서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함께 전사했으며 일본제국이 백제성에서 '아시아와 우리 시대의 평화'를 선포한 이후 전쟁이 끝났다. 이후 일본은 중국을 만주국, 몽강[50], 왕징웨이 정부[51]로 나뉘었으며 그 외에도 이용 가치가 있는 동부, 남부의 경우 해당 지역를 지배하던
옌시산,
룽윈 등 대부분의 개별 군벌들에게 항복을 받아냈으며 푸쭤이, 루한[52], 허잉친 등 항복한 구 국민당 인사를 앞세워 쪼개진 중국을 통치 중이다.[53] 마지위안과 장징궈, 류원후이 등이 저항을 계속하고 있고 일본은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츠지 마사노부 휘하의 서북방면군을 편성했다. 그 외에도 구 광동성 지역은
자이바츠들에게 넘겨져[54] 공영권의 실험실 처지인 금권주의 기업국가 광동국이 설치되었다. 게임 시작 시점인 63년에는 광동국 주도층 중에는 대전기 자이바츠는 야스다가 야스다 은행으로 남아있고 그 외에는
소니,
마츠시타,
후지쯔가 있다. 야스다는 버블가지고 장난질하다가 터지고 남은 세 기업이 대결하게 된다.
플레이어는 중화민국을 골라 산업화를 완료하고 일본에 저항하거나(다만 본격적인 반일 독립운동 컨텐츠는 아직 미구현 상태), 운남성에 룽윈을 복귀시키고 호국군을 결성하여 일본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벌이거나, 광동국을 골라 다양한 엔딩을 경험할 수 있다. - < Order Of Battle : World War II> - The Morning Sun 캠페인에서 1937년부터 1940년까지의 중일전쟁을 다루고 있으며 플레이어는 일본군을 맡게 된다. 아마 중일전쟁 초반 전투를 가장 자세히 다룬 게임 중 하나일 것이다. 상대가 많이 약하기 때문에 여러 캠페인 중에서 난이도가 가장 낮은 편이다. The Rising Sun 캠페인에서 미군 상대로 밥솥처럼 터져나가는 치하도 이 캠페인에서는 최강의 전차이다. 1937년 베이핑-톈진 전투를 시작으로 1939년 동계공세작전까지 10개 시나리오를 역사적 전투에 따라가고 있으며, 마지막 가상 시나리오에서 국민당의 수도인 충칭을 점령하는 걸로 캠페인이 끝나게 된다. 이 캠페인이 끝나면 일본군의 승리로 중일전쟁이 마무리되며 이어지는 The Rising Sun 캠페인에서는 미군을 상대로 싸우게 된다.
12. 참고 자료
중일전쟁과 그 하위문서들은 다음과 같은 저서, 논문들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12.1. 기세찬 교수의 중일전쟁 논저들
기세찬(국방대. 육군 장교) 교수는 한국 학계에서 중일전쟁 시기의 중국 국민혁명군에 대한 대표적인 전문가이자 선구자이다. 그동안 중일전쟁 시절, 국민혁명군에 대한 연구가 매우 부진했던 실정에서 중국의 연구를 인용, 연구하며 해외에서 재평가된 국민혁명군을 국내 학계에 본격적으로 소개했다. 또한 조지프 스틸웰의 실체를 분석해서 국내 학계에 비판적으로 소개하기도 했다.그러나 국민혁명군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이나 제대로 된 중일전쟁 통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논문으로서, 그것도 한국인의 입장에서 단편적인 시각을 담고 있으며, 교수들이 흔히 그러하듯 필력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라서 접근성과 가독성 면에서 쉽게 접근하기 어렵고, 설명이 상당히 불친절하다는 단점이 있다.
- 단행본)《중일전쟁과 중국의 대일군사전략(1937-1945)》, 경인문화사(2013)[55]
- 논문) <中日戰爭 中期(1939~1941) 國民政府의 抗戰戰略과 實踐>, 《역사와 담론》 第56輯, 2010.8
- 논문) <남경국민정부의 국방건설 재검토(1928-1937)>, 《中國近現代史硏究》 第 46輯, 2010.6
- 논문) <中日戰爭 初期 國民政府軍의 抗戰戰略과 戰術 再檢討(1937~1938)>, 《군사지》 제78호, 2011.3
- 논문) <태평양전쟁 초기 연합국의 동맹전략과 대일작전>, 《사총》, 72권 0호, 2011
- 논문) <인도-버마전역과 중국원정군>, 《군사지》 제88호, 2013.9,
- 논문) <태평양전쟁시기 미국의 종결전략과 중국>, 《中國近現代史硏究》 第 57輯, 2013.3
- 논문) <국민정부의 항일유격전에 관한 연구>, 《사총》, 82권 0호, 2014
- 논문) <중일전쟁시기 국민정부의 전시동원에 관한 연구>, 《사총》, 85권 0호, 2015
12.2. 평전, 회고록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2014년)
- 《히로히토 평전》, 허버트 빅스, 삼인(2010년)
- 《히로히토 평전》, 에드워드 베르, 을유문화사(2002년)
- 《마오쩌둥 평전》, 로스 테릴, 이룸(2008년)
- 《마오쩌둥 평전》, 알렉산드르 판초프, 스티븐 러빈, 민음사(2016년)
- 《왕징웨이 연구》, 배경한, 일조각(2012년)
- 《The Generalissimo》, Jay Taylor, Belknap Press(2009년)
-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저, 푸른역사(2009년)
- 《웨드마이어 회고록과 논평》, 이종학 저, 충남대학교출판문화원(2014년)
- 《제2차 세계대전》 상•하권, 윈스턴 처칠, 까치(2016년): 윈스턴 처칠의 2차 세계대전 회고록을 상•하권으로 축약한 버전이다. 중일전쟁에 대해 많이 다루지는 않았으나 카이로 회담에서 장제스와 만난 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12.3. 전쟁사 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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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용, 사무라이를 꺾다 1928~1945)》, 권성욱, 미지북스(2015) -
인기있는 블로거가 쓴 대중서적이다.
부흥 카페,
네이버 밀리터리, 군사무기 카페 등에서 활동하는 역덕이 연재한 중일전쟁사 시리즈를 편집, 수정하여 내놓은 단행본이다. 2014년에 문화관광부 산하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서 우수출판콘텐츠로 선정되었다. 연재 때부터 역덕계에서 상당한 관심과 호응을 받아왔고, 출판 이후에 여러 역덕들에게서 인식을 바꾼 전환점이 되었다는 호평을 받았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정당화하는 혁명사관이나 제2차 국공내전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면피하려는 미국식 사관이 주류이던 시점에서 장제스와 국민정부에 대한 재평가 경향을 소개한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중국 근현대사를 파는 역덕들은 손에 꼽을 정도이고, 다른 분야에서 박식한 역덕들도 중일전쟁과 근현대 중국 전쟁사에 대해선 피상적으로 알거나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국민정부군에 대한 실체는 한국 인터넷에선
블루 오션이었던 점이 크겠다.
하지만 해당 블로거는 오로지 본인이 개인적으로 공부한 것을 바탕으로 쓴 작가이지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고[56], 저서인 《중일전쟁》에서도 여러 오류나 주관적 해석이 많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수용할 만한 물건은 아니며 역으로 지나치게 국민당의 실책에 대해서 면피한다는 등의 여러 비판도 있다. 입문을 넘어서 중일전쟁 시절 국민정부군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알고싶다면 위의 기세찬 박사의 글을 읽어보아야 한다.
그러나 위 비판은 반박이 가능한데, 비교 대상 자체가 없는 현실에서 명확한 근거의 제시없이 학계 교수가 썼으니 당연히 전문성을 갖추었을 것이고, 일반인이 쓴 글은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식의 이분법적인 논리는 전형적인 '그릇된 권위에 호소하기'에 지나지 않는다. 오류와 주관적인 시각 운운한다면 당장 이 나무위키의 글부터 고스란히 해당된다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9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단순히 학계 밖에 있는 사람이 썼다는 이유만으로 '입문용' 운운하면서 폄하하기에는 시중의 여느 작가들마냥 기존에 나온 책을 재구성하는 수준이 아니라는 점, 전쟁 전반의 과정은 물론이고 단순히 중국, 일본의 테두리를 넘어서 세계사적인 흐름과 당시 중국에서 활동했던 임정과 광복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각에서 폭넓게 다루고 있다. 또한 풍부한 지도와 사진, 체계적인 구성으로 누구나 전쟁의 흐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다. 또한 당장 이대영씨의 《알기쉬운 2차대전사》가 《라이프 2차대전사》의 표절작이라는 점이나, 심지어 태평양전쟁을 다룬 어느 작가는 참고문헌에 '나무위키'를 버젓이 적어놓은 것과 비교하여 이 책 《중일전쟁》은 100권이 넘는 해외 자료와 국내외 논문을 참고하고 있다. 디테일한 부분에서 오류는 있겠지만,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국내 중국통으로 알려진 학계 전문가들조차 중국 근현대사를 중국의 공산주의 정치사관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한 채 몇몇 정치적 사건만 간략하게 언급했다는 점, 출간된지 7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도 이 책을 제외하고 시중에는 제대로 된 중일전쟁 통사가 나오지 않았으며, 심지어 전쟁 당사국이면서도 자국 중심의 정치사관에만 갇혀 있는 중국이나 일본쪽 서적들이 중일전쟁을 태평양전쟁의 일부로만 바라볼 뿐이라 이만한 중일전쟁 통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인문학 불모지인 국내 여건을 고려했을 때 학계 바깥에서 이러한 도전 자체가 놀라운 일이기도 하다. '블루오션' 운운하기 앞서서 왜 블루오션인가를 먼저 생각해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물론 존 키건의 《제2차 세계대전사》와 같은 명저라고 할 수야 없지만[57] 정통사학을 전공한 순수혈통이 아니라는 이유로 폄하하는 것은 결국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학벌지상주의와 비주류가 주류 세계에 도전하기가 얼마나 어려우며 나무위키를 이용하는 역덕들부터 색안경을 끼고 보는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 《중일전쟁(역사가 망각한 그들 1937~1945)》, 레너 미터, 글항아리(2013년) - 원제는 《잃어버린 동맹》(《Forgotten Ally: China‘s War with Japan, 1937~1945》) 그동안 국내만큼이나 중일전쟁에 대해 무관심했던 서구 학계에서 중일전쟁에 대해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한 가장 최신 서적이다. 상술한 기세찬 교수와 권성욱씨가 공동번역하여 인문학 전문 출판서인 글항아리 출판사에서 2020년 3월에 정식 출간되었다. 제목대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중요한 한축이었음에도 중일전쟁 말기, 제2차 국공내전을 거치면서 미•중의 갈등과 장제스의 몰락 속에서 사실상 역사가 잊어버린 중국의 대일 항전사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권성욱씨의 《중일전쟁》처럼 중일전쟁 전반을 다룬 전쟁사라기보다는 장제스를 중심으로 그의 성공과 실패, 스틸웰과의 갈등 등 정치사 중심이라는 점에서 아래의 리처드 번스타인의 저서와 유사하며 중일전쟁 전반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는 일반인에게는 다소 장벽이 높은 점도 있다. 저자 레너미터가 인도 출신이다보니 항전 당시 중국의 3대 재난 중 하나이자 장제스가 가장 욕 먹는 사건 중 하나인 허난 대기근을 같은 시기에 있었던 인도 벵갈 대기근과 비교하면서 진정으로 욕을 먹어야 할 쪽은 장제스가 아니라 처칠이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 《군벌 2(장개석의 군대 VS 모택동의 군대)》, 이건일, 삼화(2019) - 국방대학교 이건일 교수가 출간한 서적. 만주사변부터 국공내전기까지 국민정부군을 다루고 있다.
- 《2차 세계대전사》 1~3권, 제러드 와인버그, 길찾기(2016)
- 《제2차 세계대전》, 앤터니 비버, 글항아리(2017년): 스탈린그라드, 디데이, 스페인 내전으로 유명한 2차 세계대전 연구가 앤터니 비버의 저작이다. 엄청난 분량 가운데서 지금까지 출판된 제2차 세계대전 관련 서구 학계의 저서들 중에서 중일전쟁의 비중을 가장 많이 할애한 저서로, 개전부터 종전까지 꽤나 자세히 다루었으며 국민정부와 장제스의 분투 및 정책에 대해서도 재평가 담론을 실었다. 다만 집필 과정에서 《마오: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로 유명한 장융과 교류하면서 장융이 제기한 공산당 음모론 역시 상당히 인용했는데 이는 다른 사료와 교차검증해서 주의해서 읽어볼 부분이다.
12.4. 배경 및 체제 설명
- 《중국근현대사 3권 (1925-1945, 혁명과 내셔널리즘)》, 이시카와 요시히로 저, 삼천리(2013년)
- 《일본 근현대사 시리즈 5권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가토 요코, 어문학사(2012년)
- 《중국의 당과 국가(정치체제의 궤적)》, 니시마루 시게오, 고쿠분 료세이 저, 한울(2012년)
- 《쇼와 육군》, 호사카 마사야스, 글항아리(2016년)
- 《쇼와사 1 전전편》, 한도 가즈토시, 루비박스(2010년)
- 《일본군사사-전전편》, 후지와라 아키라, 제이앤씨(2013년)
- 《다큐멘터리 중국 근현대사 3권》, 서문당 편집실(2014년)
- 《중국인민해방군사》, 국방군사연구소(1998년)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12.5. 기타
- 《역사는 누구 편에 서는가(난징의 강간)》, 아이리스 장, 미다스북스(2014): 난징 대학살을 다룬 기념비적인 저서이다.
- 《1945 중국, 미국의 치명적 선택》, 리처드 번스타인, 책과함께(2016): 미국의 언론인 리처드 번스타인이 중일전쟁~국공내전 시기 중국에서의 미국 외교 활동과 국•공 갈등에 대해 써낸 책이다. 중국공산당의 미국 접근 정책과 미국의 중국통들이 어떻게 마오에게 기울었는지, 그리고 제2차 국공내전 직전의 중국의 사회상에 대해서 매우 자세하게 다룬 역작이다.
- 《남경사건》, 가사하라 도쿠시, 어문학사(2017)
1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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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타 한자어 명칭은 명칭문단 참조.
[2]
First Sino-Japanese War는
청일전쟁이다.
[3]
일본명: 1호작전(一號作戰) 중국명: 예상계 회전(豫湘桂會戰)
[4]
9월 2일 일본 제국은 연합국에게 항복했지만, 9월 9일 중국군의
허잉친은 최고 통수권을 대표하여 오전 9시, 난징에서 만주를 제외한 전 지역의 지나파견군과 동남아시아 지역의 남방군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만주는 소련군이 담당했고, 중국 공산당이 만주에서 소련의 협조를 얻어내며 국공내전에서의 기반 지역을 확보하게 된다.
[5]
시안 사건으로 인한
2차 국공합작 이후
초공작전을 중단하고 본격적인 항일전을 시작함.
[6]
1932년 4월에 일제에 형식적인 선전포고를 함,
2차 국공합작 후 중국군 산하
팔로군으로 참전.
[7]
이후
임시정부에 병합.
[A]
이후
왕징웨이 정권에 흡수.
[A]
[10]
차관 제공과
태평양 전쟁 당시의 공동전선.
[11]
차관과 군수물자 지원,
태평양 전쟁 당시의 공동전선.
[12]
차관과 군수물자 지원,
비행의용군 파견 및 불가침조약 체결,
만주 전략 공세 작전으로
관동군과
만주국,
몽강연합자치정부를 붕괴시킴.
[13]
소련과 함께
만주 전략 공세 작전에 가담.
[14]
공산당 파괴를 위한 군수물자, 고문관 및 군수산업 건설을 위한 대규모의 차관 및 무기 제공.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 문서 참조.
[15]
나치 독일은 일본 제국의 동맹국이었지만 동시에 거대한 시장 중 일부인 중화민국에 대한 군사적 고문 및 장비 지원을 했다. 이후 일본의 항의로 독일로 송환당했다.
[16]
단, 비슷한 규모의
독소전쟁에서 소련군이 자국 영토에서 몰아내고 독일 베를린까지 입성한데 반해 달리 중화민국군은 일본군을 몰아내지 못했고, 오히려 미국과 소련이 일본 제국의 항복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특히 소련의 만주 침공은 이후 전개되는
국공내전에서 중요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허나 중화민국군은 유럽 전선에서의 소련처럼 일본 제국을 사실상 탱킹하고 있었기에 그 평가가 절하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17]
1971년에
중화인민공화국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18]
중화민국의 전쟁 전 인구(1936년 기준 4억 7,900만 명)과 전후 인구(1947년 4억 5,700만 명) 차이에서 발생한 수치로 가장 직관적이며 객관적인 수치이기에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
# 그러나 인구 자연증가율까지 고려해서 계산하자면 더욱 복잡해지긴 한다. 또한 이는 중국군, 민간인이 모두 포함된 수치이다.
[19]
만주 전략 공세 작전은 생략되었다.
[20]
전황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일본군은 그냥 만주에서부터 밀고 내려오는게 아니라 동부의 쓸만한 해안가나 항만들은 다 찔러보면서 점령했고, 남방작전으로 인도 일부와 버마까지 장악하며 중국의 뒤까지 틀어막았다. 그래서 중국군은 서쪽으로 밀려난 상태에서 항전을 해야 했다.
[21]
중국공산당이 직접적으로 섬멸한 일본군은 10만 명도 안된다는 것이 중론이다.
백단대전 참고.
[22]
283페이지 참조.
[23]
이러한 경향은 국공내전이 재개되기 전인 중일전쟁 시절부터 심했다. 자기들이 민주적이고 혼자 싸우고 있다는 마오쩌둥의 낚시질에 미국 언론인, 외교관, 군인까지 속았는데다가 중국의 학생과 지식인들도 낚여 국민당은 싸우지 않는단 인식이 파다했다.
[24]
당장 사상자 논란에서 보았듯이 자체 일본군 사살이 50만 명이 넘는다고 주장하는데 국민당과 싸우다 전사한 공식 전사자가 40만 명이다.
[25]
그 유명한 난징 대학살이나 충칭 대공습조차도 중국에서는 한때 신경을 안썼다.
[26]
미 육군을 중심으로 미국 참전 이전인 1937년에서 1941년까지의 무관심과 편견이 당시부터 심각했다. 참전 이후 이전까지의 국민당군의 승리한 전투들을 모조리 조작이라고 치부할 정도였다.
[27]
주중 미국 대사 클레런스 가우스가 대놓고 국민당을 멸망시켜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28]
일본 우익들 중에서도 만주사변까진 찬양해도 중일전쟁까지 찬양하는건 많이 답없는 자들이라 수가 적은 것도 있고, 중일전쟁의 당사자인 일본에선 중화인민공화국의 자화자찬 혁명사관을 진작부터 비판적으로 보아 중화민국 중심의 민국사관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움직임의 일환으로 나온 것이 산케이 신문에서 연재한 후, 출판된 《장개석비록》이다.
[29]
이는 지상병력의 신속한 기동이 불가능한 해상/섬 지역이라는 특성과, 요새화된 곳은 가급적 건너뛰고 상대적으로 취약한 곳만 골라서 찔러대는 미군의 전략에 의한 영향도 크다.
[30]
물론 전쟁 후반에 가면 압도적인 질적, 양적 차이에 의해 지상 점령 전부터 제해/제공권이 일방적으로 기울어진 상태에서 전투가 시작되었지만, 지상에 안정된 기지를 확보한 상태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땅을 딛고 사는 존재이다.
[31]
다만 대부분이 중국 연구에 관련된 학자나 중국 국적의 학자들이라는 특성이 있다.
[32]
사실 자국사를 중심으로 세계사를 보는 현상은 흔한 일이다. 일례로 스페인에서는
스페인 내전이 제2차 세계 대전의 시작이라고 주장하고, 아프리카에서는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략 전쟁이 시발점이라고 주장하며, 반공학자의 일부의
러시아 내전 기원설까지 존재한다.
[33]
중일전쟁은 일본 정부가 아닌
관동군이 독단적으로 벌인 전쟁이었고 사후 보고를 받은 정부는 후에 이러한 관동군의 독단 행위를 묵인하고 보조하였다. 당시 일본 제국이 관동군 및 군부를 컨트롤하지 못 하는 무능한 집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34]
대륙타통작전 당시 엄청난 피해를 입은 중화민국은 그때까지 병역이 면제되어 있었던(1935년부터 중화민국은 징병제를 실시했다.) 중학교 졸업생 이상에게도 자원 입대를 호소했다. 이에 10만명의 목표는 12만 5천명으로 초과 달성을 이루는데 성공했고, 이들로 구성된 8만 6천명의 지식청년군은 빠른 전쟁 종결로 실전에는 투입되지 못했으나 당시의 높은 내셔널리즘을 짐작할만한 일화이다.
[35]
1928년경부터 일본군이 중국에 출병할 당시의 구호.
[36]
단, 자료에 따라선 마틴
B-10 폭격기인 것도 있다.
[37]
1964 도쿄 올림픽(예정으로부터 20여년 뒤),
1972 삿포로 동계올림픽(예정으로부터 32년 뒤)
[38]
한국에서도 1920~30년대생 상당수가 중일전쟁을 '지나사변'이라고 부른다.
[39]
각각
위키백과 중어판
#과
바이두 백과
#에서 사용하는 표기이다.
[40]
위키백과 중어판과 바이두 백과 모두 팔년항전을 리다이렉트시켜준다.
[41]
웨이보 中日战爭 검색 결과
위키백과 중어판 中日战爭 문서
[42]
일본의 극우 인사들이 현재 이 단어를 쓰는 경우가 많다.
[43]
일어판에만 있는 문서로 중일전쟁 문서와 별개로 작성되어있다.
[44]
한국
방심위에 상응하는 기관
[45]
그래도 2020년대를 기점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중국국민당의 본거지인
대만 드라마에서보다 중국 본토에서 제작되는 시대극에서의 국민당 묘사가 훨씬 나은 편이긴 하다.
대만에서는
2.28 사건의 만악의 근원으로 그려져서 오히려 국민당 치세의 대만이 일본 식민지 시절보다 더 암울하게 묘사되는 반면(그래도 1980년대 아직
계엄령이 떨어지고
중국국민당이 장기 독재하던 시절에는 오늘날 중국 본토에서 자주 제작되는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항일 영화나 드라마들이
대만에서 많이 제작되기는 했다.), 어쨌든 중국 드라마에서는 나름 열심히 싸우고 항일 영웅으로 묘사되는 편이다. 아무래도 국민당이 공산당보다 패션에서는 압도적으로 우월하다보니 극 중 원래 공산당 스파이인 주인공이 오랫동안 국민당 관료처럼 멋있고 옷 맵시가 좋은 군복이나 중산복을 입는 걸로도 묘사되기도 한다.
[46]
상하이 전투의 일부. 자세한 것은 상하이 전투 문서 참조.
[47]
이러한 페널티들은 산업 국유화,
법폐개혁 등의 일련의 국가 집중을 완성시킨다면 없앨 수 있다. 다만 혼란한 상황을 다 고증해서 아예 일본 제국에 동맹국으로 붙지 않는 이상은 없애기가 더럽게 어렵다. 그리고
천리푸,
다이리 등이 반일파였다는 것을 고증하여 만약 일본 제국과 동맹을 맺는다면 이들을 고용할 수 없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국민당 강화 루트를 못 타서 정치적으로 망한다.
[48]
여기 세계관에서 소련에
부하린이
스탈린을 이기고 집권했는데 그 때문에 FDR의 뉴딜 정책이 부하린의 NEP와 뭐가 다르냐며 퇴짜 맞았기에 대공황의 여파가 늦게 해결되었고, 진주만 공습도 현실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두면서 미 해군 전력도 약화되었다.
[49]
제작진도 추축의 승리를 위해 여러 무리수를 어쩔 수 없이 집어 넣었다고 인정했다.
[50]
데므치그돈로브의 바람대로 외몽골까지 통일했다
[51]
왕징웨이의 자리는 사후 천궁보를 거쳐
가오쭝우에게 넘어갔다.
[52]
룽윈의 사촌. 룽윈은 과거 왕징웨이의 배신을 장제스에게 보고했기에 찍혔고 항복 후 권력을 뺏기고 한직을 전전했다.
[53]
장즈중 세력은 신강성으로 도망쳤는데 대동아공영권이랑은 그냥저냥 지내는 중
[54]
스즈키 데이이치를 행정장관으로 파견하고 이것저것 요구에 뭔가 하려면 일본의 승인도 지속적으로 필요하기에 풀어준게 아니라 정말 실험실 처지이다.
[55]
본인의 고려대 박사학위 논문(2010)을 중심으로 보완, 개정한 책이다. 학사, 석사는 각각 육군사관학교와 국방대에서 취득했다.
[56]
애초에 본업은 공무원이다.
[57]
그러나 본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공부를 통해 책을 쓴 일반인을 20세기를 대표하는 전쟁사 연구가 중 한 사람이자 영국의 귀족 칭호까지 받은 사람과 비교하는 것부터
어불성설이다. 또한 이 서적은 구소련 및 동유럽권 자료가 뚫리기 전에 나온 책이라 서부전선에 대한 내용은 필요 이상으로 많지만
동부전선이나
태평양 전쟁에 관련한 내용은
서부전선에 비해 많이 부족한 면이 있다. 게다가 중일전쟁 관련 서술은 거의 의미없는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