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국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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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0313f,#ce4e5c 대일본제국[1]대일본 제국이라고 쓰는 경우도 가끔 있다.] [ruby(大, ruby=だい)][ruby(日, ruby=にっ)][ruby(本, ruby=ぽん)][ruby(帝, ruby=てい)][ruby(國, ruby=こく)][2] | Empire of Japan}}}[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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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4] | 국장 | ||||||
八紘一宇 팔굉일우[5] (1940-19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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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 | |||||||
국가 | 기미가요 | ||||||
위치 | |||||||
■ 본토 | ■ 식민지 및 위임통치령 | ■ 괴뢰국 및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점령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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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1월 3일 ~ 1947년 5월 2일[6] | |||||||
성립 이전 | 종전 이후 | ||||||
에도 막부 | 연합군 점령하 일본 | ||||||
에조 공화국 | |||||||
류큐 왕국 | 미국 통치기 류큐 열도 | ||||||
역사 | |||||||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 1867년
대정봉환 • 1868년 왕정복고의 대호령, 메이지 유신 • 1879년 류큐왕국 강제 병합 • 1889년 대일본제국 헌법 공포 • 1890년 대일본제국 헌법 시행 • 1894년 청일전쟁 개전(~1895년) • 1904년 러일전쟁 개전(~1905년) • 1910년 대한제국 강제 병합 •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 1918년 일본의 시베리아 개입(~1925년) • 1923년 관동 대지진 • 1929년 대공황 • 1931년 만주사변 • 1932년 만주국 건국 • 1936년 2.26 군사반란 발생 • 1937년 중일전쟁 개전(~1945년) •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1945년) • 1945년 연합국에 항복, 연합군의 본토 점령 • 1946년 일본국 헌법 공포 • 1947년 일본국 헌법 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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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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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 위치 | 아시아, 오세아니아, 북아메리카[7] | |||||
영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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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헤이안쿄 (
1868년)[8] 교토부 ( 1868년~ 1869년)[9][10] 도쿄부 ( 1869년~ 1894년)[11][12][13] 히로시마현 ( 1894년~ 1895년)[14][15][16][17] 도쿄부 ( 1895년~ 1943년) 도쿄도 ( 1943년~ 1947년)[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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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 |
675,114km² (
1933년) 8,510,000km² ( 1942년)[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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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환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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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 인구 | 105,200,000명 ( 1940년)[20] | |||||
민족 | 야마토족, 한민족, 한족, 류큐족, 아이누족, 윌타족, 니브흐족, 대만 원주민 등 | ||||||
언어 | <colbgcolor=#fff> 공용어 | 일본어 | |||||
지역어[21] | 대만어, 관화, 객가어, 한국어 | ||||||
문자 | 한자, 가나 문자 | ||||||
국교 | 국가신토 (사실상)[22] | ||||||
군대 | 일본군 | }}}}}}}}} | |||||
정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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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 (1868~1889) 신권 정치 (1868~1945) [23] → 입헌군주제 · 과두정 (1889~1918) → 입헌군주제 · 의원내각제 (1918~1932) → 군사독재 (1932) → 입헌군주제 · 의원내각제 (1932~1940) → 군사독재 · 익찬 체제 (1940~1945) → 연합군 점령하 군정 체제 (1945~19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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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원수 | 천황 | ||||||
역대 천황 |
메이지 천황 (1868~1912) 다이쇼 천황 (1912~1926) 쇼와 천황 (1926~19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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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수반 | 태정대신[24] → 내무경 → 내각총리대신 | ||||||
행정부 | 태정관 → 내각 | ||||||
입법부 | 일본 국회( 귀족원, 중의원) | ||||||
주요 내각 총리대신 |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사이온지 긴모치 오쿠마 시게노부 가쓰라 타로 고노에 후미마로 도조 히데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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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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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일본제국, 일본 제국 또는 일제는 메이지 유신 이래 일본 열도와 그 식민지를 통치했던 국가이다. 1868년 1월 3일부터 1947년 5월 2일까지 존속했다. 동양에서 최초로 근대화에 성공한 뒤 아시아 각국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패전으로 인한 연합군의 점령 이후 일본국 헌법이 제정됨으로써 그 체제가 붕괴되었다.[26]
2. 상징
2.1. 국호
이름 '일본'의 유래에 대한 내용은 일본/국호 문서 참고하십시오.
국호인 '대일본제국([ruby(大, ruby=だい)][ruby(日, ruby=にっ)][ruby(本, ruby=ぽん)][ruby(帝, ruby=てい)][ruby(国, ruby=こく)])'[27]은 1889년에 공포된 대일본제국 헌법에서 법적 근거를 찾을 수 있으며, 이 헌법에 따라 시행년도인 1890년부터 국호를 대일본제국으로 정하였다.
1871년(메이지 4년)에 주조된 국새에는 '대일본국새(大日本國璽)'라고 새겨져 있었고 1874년(메이지 7년)에 개주될 때도 변경되지 않아서 일본국 헌법(신헌법)으로의 개정된 현대에도 사용되고 있다. 1889년(메이지 22년) 2월 11일에 대일본제국 헌법(구헌법)이 발포되어 1890년(메이지 23년) 11월 29일, 이 헌법이 시행되면서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이라는 국호를 칭하였다.
처음 이토 히로부미가 메이지 천황에게 제출한 헌법안에서는 '일본제국(日本帝國)'으로 표기되어 있었지만 헌법안을 심의하는 추밀원회의의 석상인 테라시마 무네노리(寺島宗則) 부의장이 황실전범에 '대일본(大日本)'이라 되어 있으므로 문체를 통일하기 위해 헌법에서의 표기를 이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헌법 기초자인 이노우에 코와시(井上毅) 서기관장은 국명에 '대(大)'를 붙이는 것은 스스로를 존대하는 경향이 있어 대내외에 발표하는 헌법에 '대(大)를 써서는 안된다고 반대했으나 결국 추밀원 의장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의 재정에 의해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으로 결정되었다.
대일본제국이라는 국호가 제국의 존속 기간인 대정봉환 때부터 1947년 일본국 헌법 시행 이전까지만 쓰인 것은 아니다. 일례로 대정봉환 이전인 1854년, 에도 막부도 미일화친조약을 맺을 때 제국일본(帝國日本)이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다. 다만 에도 막부가 자국에 대한 국호를 공식적으로 통일한 것은 아니어서 일본(日本), 일본국(日本国), 대일본국(大日本国), 제국일본(帝国日本), 제국대일본(帝国大日本), 일본제국(日本帝国), 혹은 그냥 간단히 제국(帝国)[28] 등의 국호를 모두 사용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대정봉환으로 천황에게 권력이 넘어갔을 때에도 달라지지 않아, 여전히 정식 국호에 대해서는 애매모호한 상태로 넘어가고 저 위의 여러 호칭들이 외국에 보내는 국서에 모두 쓰였다. 그러다가 1936년이 되어서야 모든 공문서에서 국호를 대일본제국으로 통일하였고, 항복 이후에 일본국 헌법이 공포, 시행되기 전까지 내부 공문서나 외국과의 조약에서 대일본제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한다.
당시 일본 제국은 국호 앞에 '대(大)'자를 붙여서 대일본제국(大日本帝国)이라고 칭했으나 현대 한국에서는 '일본제국'[29]이나 ' 일제' 또는 '제국주의기 일본'[30]라는 표기를 많이 쓴다. 사실 일제는 대일본제국의 줄임말이 아니라 일본의 제국주의 혹은 제국주의 세력을 일컫는 단어에서 비롯되었지만 한국에서는 이 당시 일본 정치체제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한국에서는 자주 등장하는 용어로 <일제 강점하 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에 관한 특별법>에서처럼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일본 내에서는 주로 좌익들이 일제라는 말을 쓰고 우익들은 이 말에 반감이 있으며, 많은 일본인들은 이 시기의 일본도 그냥 일본이라고 한다.[31]
일본 국내에서는 메이지 시대의 판례나 규정 및 법령이 지금까지도 효력이 있는 경우가 많으며, 이토 히로부미가 처음 지낸 내각총리대신의 직책도 현재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고 의원내각제나 양원제, 정당제 또한 19세기에 신설된 것들이 지금까지 이어져 왔기 때문에 별개의 국체로 취급하지 않는다. 현지에서는 이때의 일본을 그냥 근대기의 일본 또는 메이지 ~ 쇼와 전전(戰前) 시기의 일본으로 취급한다.
현대 일본에서는 에도 시대 이후의 시대들은 연호+시대로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이기도 하고,[32] 이때의 일본을 "이전의 일본이나 이후의 일본과는 차별적으로 존재한 대일본제국이라는 독자적인 국가"로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좀 애매하다.[33]
한국에서 당시 정식국호인 '대일본제국'이 아닌 통칭인 '일본 제국'을 사용하는 이유는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먼저 고대 로마의 경우 왕정이었을 때를 로마 왕국, 공화정일 때를 로마 공화국, 제정이면 로마 제국이라고 하듯 국체로서 'Empire of Japan' 혹은 'Japanese Empire'[34]를 '일본 제국'이라고 칭하는 것이 틀린 표기는 아니다. 일본 뿐만 아니라 당대 제국 또는 식민제국의 이름을 '국호(약칭)' + '제국'으로 부르는 용례는 많다. 당장 ' 오스만 제국'의 경우에도 정식 국호는 '숭고한 오스만 국(Devlet-i ʿAlīye-i ʿOsmānīye, Sublime Ottoman State)'에 가깝지만 오늘날에는 튀르키예 내부에서도 '오스만 제국(Osmanlı İmparatorluğu, Ottoman Empire)', 일본에서도 '오스만 제국(オスマン帝国)' 이라고만 부르며 '숭고한 오스만(崇高なるオスマン)'이라든지 '대 오스만(大オスマン)'이라는 명칭은 아예 사용하지 않거나 그 연원을 자세하게 밝힐 때에만 쓴다.
아울러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의 고유명사를 어떻게 표기할 지는 언어의 사회성에 근거하여 도의적 합의를 찾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마치 아돌프 히틀러 집권기 나치 독일을 당시의 정식 명칭인 ' 대독일국(Großdeutsches Reich)'으로 부르지 않는 것과 같다.[35] 일본에서도 '일본 제국'이라는 용어는 종종 쓰였으니 역사성이 없는 명칭인 것도 아니다. 정 반대로 한국어에서도 '대-' 자를 붙여서 부르는 예시로는 ' 대영제국'이 있는데, 이 경우는 한자어 명칭 문단 참조.
2.2. 국기
자세한 내용은 일장기 문서 참고하십시오.일장기 | |
공식 명칭 |
일장기 [ruby(日, ruby=にっ)][ruby(章, ruby=しょう)][ruby(旗, ruby=き)] |
속칭 |
히노마루 [ruby(日, ruby=ひ)]の[ruby(丸, ruby=まる)] |
채택일 | 1870(메이지 3)년 2월 27일 (관습상[36]) |
2.3. 국가
자세한 내용은 기미가요 문서 참고하십시오.3. 역사
1867년 대정봉환을 통해 천황에게 권력과 정권이 이양되고, 1868년 1월 3일에는 '왕정복고의 대호령'의 발표를 통해 500여 년 전의 겐무 신정 때처럼 에도 막부와 함께 막부의 구시대적 직책인 정이대장군, 섭정, 관백 등을 싸그리 폐지하면서 성립되었다. 메이지 유신이라 불리는 개혁개방을 통해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 동양에서는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했다.[37] 1889년에는 대일본제국 헌법이 제정되고 이듬해인 1890년 제국의회가 개설되어, 입헌군주제의 기틀이 완전히 마련되었다.
일본 제국은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를 표방하여, 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고자 청나라, 러시아 제국 등 주변국과 전쟁을 거듭하며, 그 과정에서 러일전쟁의 승전을 통해 비유럽권 국가가 최초로 근대 유럽 열강을 상대로한 전면전에서 승리하는 역사적 의의를 남겼다. 결과적으로 일본 제국은 타이완섬, 남사할린, 만주의 조차지 다수의 식민지를 할양받았으며 뒤이어 한반도까지 강제로 병합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협상국 측에 가담하여 승전하고, 전후 국제 연맹의 상임 이사국이 되었으나, 대공황을 계기로 총리가 암살되는 등 정치적 혼란이 일어나 결국에는 군부가 권력을 잡는 군사독재 및 천황제 익찬 국가로 전락하였다.[38] 이후 국방 및 전쟁 업무의 수행이 국가의 최우선 목표가 되는 군국주의의 길로 들어선 일본 제국은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같은 파시즘 국가와 손을 잡고 추축국의 일원이 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켜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이때 자행된 전쟁 범죄는 현재의 외교 관계까지 영향을 미친다.
이후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에 패배하여, 포츠담 선언을 기초로 한 무조건 항복 후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황실과 정부가 종속되었고, 1946년 11월 3일에 일본국 헌법이 공포, 1947년 5월 3일에 시행됨으로써 체제가 붕괴되었다.
3.1. 대정봉환 이전
자세한 내용은 대정봉환 문서 참고하십시오.1868년(게이오 4년) 왕정복고의 대호령[39] |
에도 막부는 청나라, 조선, 류큐 왕국 등을 비롯하여 역사적으로 알고 지냈던 주변 극소수의 국가와 네덜란드를 빼면 통상 교역을 금지한 해금(海禁) 정책을 폈다. 이는 도쿠가와 막부의 영향력 강화에 기여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러시아,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이 지속적으로 밀고 들어오자 점차 해금 정책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나왔다.
당시 일본 특유의 정치 체제인 幕藩体制(막번 체제)를 먼저 알아야 한다. 에도 막부는 다이묘가 다스리는 번(藩)들의 자치를 제한적으로 인정하면서 이들을 참근교대 제도 등을 통해 막부에 철저하게 종속시키고 번들의 경쟁을 이끌어 효과적으로 견제하는 중앙 집권적 효과를 노리는 정도에 그쳤다.
시간이 흐르며 점차 에도 막부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반대로 지방 번들의 세력들이 성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력이 강해진 번을 웅번이라고 하는데 이 웅번들 가운데서도 특히 사쓰마, 조슈, 도사, 히젠 4개 번이 그 기세가 가장 강대하였다. 이들은 막부가 금지한 서구 열강과의 밀무역으로 근대적인 산업 시설이나 무기들을 도입하였고, 재정적인 부를 축적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에도 막부는 다시금 왕년의 전성기를 회복하고자 3대 개혁을 폈지만 모두 실패했다. 경제의 혼란, 무사(특히 하급 무사)의 잉여화, 새로운 문물과 학문에 따른 정치적 각성, 페리 제독의 함포 외교, 조슈 정벌 실패 등 여러 사건이 이어진 끝에 에도 막부는 그 정치력을 잃었다. 위에 말한 웅번들이 막부의 몰락에 한몫을 담당했다. 졸지에 사면초가 신세가 된 에도 막부는 도사 번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정봉환을 단행하였으나, 사쓰마 번 등 급진파는 이후로 에도 막부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내대신 사직과 막부령 반납을 지속적으로 강요했다. 동시에 쿠데타를 일으켜, 구 막부파가 지키던 교토어소를 점거하고 내대신 요시노부가 없는 상태에서 신정부를 출범한다. 이윽고 메이지 천황에게 왕정복고의 대호령을 선언하게 하면서 요시노부를 정치권에서 완전히 내쫓는 데 성공한다.
이후 1868~1869년 사이에 벌어진 보신전쟁을 통해 구 막부 잔당들을 완전히 몰아내어, 새롭게 정치판의 강자로 떠오른 웅번들은 판적봉환[40]과 폐번치현[41]을 단행( 메이지 유신)했다. 그리고 지방 영주가 스스로 중앙 귀족에 올랐다.
3.2. 제국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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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 영국 런던에서 이와쿠라 사절단을 찍은 사진 |
새로운 웅번들은 자신들의 정치 권력을 강화하려고 천황을 이용했다. 이는 명분적으로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막부의 최고 권위자는 일본어로 장군을 뜻하는 쇼군인데, 형식적으로는 일본의 주인은 천황이었고 쇼군은 그저 천황의 대리인으로서 천황에게 권력을 위임받아 일본을 다스릴 뿐이었다. 그리고 700년 사이 7만 평[42] 남짓한 땅을 받고 살아가던 천황은 순식간에 일본 최고 정치 권력의 정점에 등극했다. 이 뒤에는 엄청난 정치 공작이 있었다. 철저한 중앙집권체제, 이른바 만세일계(万世一系)의 사상이 일어서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메이지 유신이 일어났다.
메이지 유신을 전후하여 이들은 서구 열강을 보고 배워야 한다는 필요성을 크게 느꼈고, 이와쿠라 사절단을 꾸려 유럽으로 보냈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목표는 2가지였다. 하나는 서구 열강들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다시 교섭하여 평등 조약으로 바꾸기, 다른 하나는 서구 열강들의 정치 체제를 공부하여 일본에 도입하기. 그러나 일본 자체의 정치 역량이 모자랐던 까닭에 1번째 임무는 실패한다. 대신 그들은 2번째 임무를 성공적으로 하였는데, 이러한 정치 핵심부의 해외 사절 경험은 일본 정치에 그대로 넘어왔다. 예컨데 이토 히로부미는 독일로 넘어가서 헌법을 공부하고 온 바 있다.
그래서 헌법은 독일 프로이센 법을 채용하고, 민법은 프랑스인 보아 소나드를 법률 고문으로 초빙하여 프랑스 법을 채용하여 만들었다.[43] 다만 서구 법률을 받아들이면서 시민의 권리나 권익에 관한 사항 중 일부는 지배 계층의 편의에 맞게 취사선택 및 변형 채택되었고[44] 천황의 권한을 확고히 하는 등 온전한 민주주의적 헌법이라 보기는 힘들었으며 선거권도 1889년 중의원 선거가 처음 치러졌을때부터 1920년대 내지에 살던 25세 이상 남성에게[45] 보통 선거권이 주어질때까지 소수의 상류층 내지 중산층이나 가졌던 것이고, 다수의 하층민들은 중의원 투표권을 가질수조차 없었다. 그러하니 식민지 주민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질 껀떡지도 없었던 것이다. 다만 식민지인들도 일본 내지에 거류하게 되면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선거 포스터에 보면 한글이 같이 표기된 포스터들이 발견되는데 내지의 재일 조선인들의 투표 안내를 위한 것이다.[46] 일제강점기 당시 식민지 조선 출신의 제국의회 의원으로 친일파 박춘금이 있다.
그러나 일본 제국은 비민주적인 정부다보니 그 과정에서 지역 중심 인사가 횡행하였고 부정부패가 심했다. 특히 이들이 시도한 위로부터의 개혁은 서구 문물의 도입과 국민 의무 교육의 시행으로 정치 제도와 시민 문화를 바꾸는데는 성공했으나, 그 대가로 지역주의가 사라지고[47] 전 국민이 황국신민으로 일체화하면서 아래의 비판 능력을 철저하게 탄압하고 봉쇄했다. 또한 지극히 혼란한 상황인지라 상층부의 권력 다툼도 늘 일어났고, 금방 내각을 개편했다. 자국의 상황에 맞는 성찰 없이 외부로부터 그대로 이식한 서양식 정치가 보수적인 일본에서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3.3.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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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당시 정치풍자 그림엽서 |
또한 러일전쟁 승리 후 한반도를 기반을 군사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철도와 교통망을 개설하고 동시에 식민지가 된 조선에서 합법적으로 약탈하며 국력을 쌓으면서도 만주 군벌 장쭤린과 밀착[48]하며 만주를 먹기 위해 후원국으로 도와주면서도 관동군을 창설해 중국 대륙을 야금야금 먹기 시작한다. 일본의 식민지 대상이었던 대한제국과 같은 국가들은 당시 일본군에 비해 한 주먹거리도 아닐 만큼 군사력이 빈약하였고, 점령하는데 별 다른 어려움이 없었으며 일본과 그나마 붙을 수 있는 아시아의 군대는 무장력을 지닌 장제스의 국민당군 뿐이었다.
그러던 와중 사라예보 사건을 기점으로 발발하여 유럽전역에 펼쳐진 제1차 세계 대전과 이후의 짧은 전간기 사이, 모든 유럽이 전쟁물자 생산에 차질이 생기는 바람에 일본에 발주를 넣었고 군수물자를 수출하던 일본은 호황을 맞이했다. 일본은 이로써 러일전쟁에서 입은 손실을 어느정도 만회했고, 그동안 외국에 진 모든 채무를 갚은 것과 동시에 수십억 엔의 순채권국이 되어 장차 긴 전쟁을 치를만한 국력도 쌓을 수 있었다.
이후 중일전쟁 이전까지는 호황의 부가 효과로 서민 경제도 어느 정도 나아지는 효과를 얻었는데 이때가 일제의 전성기였고 문화적으로도 번성하던 시기였다.
이 다이쇼 시대는 아무래도 '그래도 그 때는 우리가 잘나갔지'라는 향수가 있어서 그런지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와 함께 일본 서브컬처 등에서 꽤나 낭만적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관련해 나오는 제국 시대 일본의 풍경화나 그림들도 대부분 이 때를 묘사했다. 이런 경향을 일컬어 다이쇼 로망이라고도 한다. 1925년, 보통선거법 도입을 통해 중의원 선거권을 모든 25세 이상 신민(외지인 포함)으로 확대했다. 다만 외지 조선, 대만에는 선거구가 설정되지 않아서 엄밀히는 조선인과 대만인에게 참정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있어도 행사를 못 했다. 내지에 살면 재산 여하나 본적에 관계없이 선거에 참여했다. 이후 1945년 3월에 조선 및 대만 중의원 선거구를 각 23석, 5석을 할당하려 했었고, 실행 직전까지 갔으나 종전으로 인해 지배권을 잃어 무산된다.
3.4. 군국주의의 대두와 군부의 폭주
러일전쟁을 치르고 열강대열에 오른 후 이때 생긴 채무도 제1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전부 상환하고 흑자를 남기며 일본의 성장이 가시화되자 종전까지 일본을 밀어주던 서구 열강들이 일본을 점차 견제하기 시작했다. 일례로 세계대전의 되풀이를 막자는 취지 하에 체결된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 일본도 열강들의 압박으로 조인하였다. 하지만 몇몆 제약이 있었어도 일본은 계속된 군비 확장을 시행했고 이 과정에서 농민들에게서 걷는 세금이 점점 높아졌다. 이러자 가계가 위험해진 농민들은 가문을 이을 후계자를 제외하고는 공장에서 일자리를 얻기 위해 도쿄와 같은 대도시로 몰려가 하층민을 이루기 시작했다. 1923년 관동 대지진 당시 마구 나눠준 채권의 가치가 폭락할 것이란 소문이 돌면서 1927년 초에 전국적 대공황[49]이 발생했는데 이것을 시작으로 하층민의 대부분인 청년 세대가 "부패한 정권을 무너뜨릴 혁명"을 요구하기 시작했지만, 연이어 1929년에 발생한 세계 대공황으로 2연타를 맞으며 일본 경제가 보이지 않는 수렁에 침식하였다. 이런 상황에 군부가 정치에 관여하며 폭주하기 시작하였다.
일본 군부가 폭주한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의 부국강병 정책의 부작용이었다. 부국강병의 정석은 본래 외세에 맞설 국방력만 있다면 선경제, 후군대이지만 막 문을 열었을때는 이미 서양 열강이 일본군대보다 강했기에 일본은 선군대, 후경제에 가까운 선군정치가 먼저였고 개화시기 군 장교들은 국가가 직접 양성하고 외국인 강사에게 직접적으로 배운 신 엘리트 계층에 가까운 존재들이었으며 당시 일본 제국의 육사와 해사는 일본내 제국대학과 맞먹는 위상을 지녔을 정도다. 이러다 보니 도조 히데키와 같은 사관생도 출신들은 황족에 대한 비뚤어진 충성심과 자신들은 일본제국의 엘리트 계층인 만큼 나라를 이끌어야 한다는 의식이 팽배한 상황이었다.
미국은 공공 건설, 일자리를 늘려 고용률을 높이는 뉴딜 정책으로, 영국과 프랑스를 위시한 서유럽 강대국들은 자국 식민지를 이용한 블록 경제를 통해 어느 정도 극복하는데 성공했지만, 일본은 그럴 만한 나라가 주변에 별로 없었을 뿐더러 처음부터 경제 체제가 미약했다.[50] 이런 상황에 분노하기 시작한 군부 내 급진층은 조금이라도 온건적 혹은 중도적인 것으로 판단되는 총리와 고위 공무원들을 암살하며 폭주하기 시작, 일본 제국 육군과 일본 제국 해군이 엮여 두번에 걸친 쿠데타를 시도하게 된다. 1932년에 거국내각이 조직되면서 일본을 움직일 통합된 통치구조가 형성되었고 두 차례의 쿠데타 미수로 일본의 밑으로부터의 파시즘은 분쇄되고 기타 잇키 등이 처형되었으나 1937년 고노에 후미마로가 집권하여 정당정치를 부정하고 군대에 굴복하게 된 일본 제국 정계는 결국 중일전쟁으로 폭주, 일본의 경제력으로는 감당할 수도 없는 몰락의 시발점인 총력전을 선택하게 된다. 관련해서 천황제 파시즘 문서 참조.
1931년 이시와라 간지를 비롯한 일부 장교들이 천황의 재가 없이 멋대로 일으킨 만주사변을 막지 않은 일본 제국은 고작 연대장에 불과한 무타구치 렌야가 루거우차오 사건을 일으킨 전범 행위도 처벌하기는커녕 기회로 여기고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는 꼴도 묵인했고 결국 폭주하는 군부를 제어하지 못해 문민통제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나라가 군부에 먹히고 말았다. 이후 군부를 대표하는 도조 히데키가 내각총리대신이 되어 정권을 잡기에 이르렀다.
일본 제국은 만주사변을 통해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를 내세워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우고 전쟁준비를 위해 1934년 워싱턴 군축조약을 탈퇴하며 폭주 드라이브를 전격적으로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을 발단으로 중국과의 전쟁에 돌입했다. 전쟁 초기 해/공군 부문에서 일본에게 열세였던 중국 국민당군은 일본군에게 제해권, 제공권 둘 다 잃어버렸고 특히 제공권을 잃어버렸기에 국민당 육군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일본군은 밀어붙이며 지속적인 확장 정책노선을 밟았지만, 중국 국민당 정부는 항복은커녕 충칭으로 정부를 옮겨 끝까지 항전한다.
한편 중일전쟁이 발발한지 꽤 된 시점에서, 충칭을 임시수도로 할 만큼 몰리자 미국은 최대시장이기도 한 중화민국이 패망하여 사라지기를 바라지 않았기에 중국을 지원하며 일본에게 철광석 수출을 제한한다. 그러나 일본은 전쟁을 멈추지 않았고, 일본이 선을 넘었다고 판단한 미국은 일본에게 만주 지역을 제외한 중국 내 모든 곳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고 이를 이행을 하기 전까지 석유 등 군수물품에 쓰이는 주요 자원 수출을 금지하겠다고 선포했다. 이때 일본은 석유 수출의 90% 이상을 미국에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의 자원 옥죄기를 통한 최후통첩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막대한 돈과 인력을 들여 영토를 확장한 일본이 미국이 경제제재를 한다고 "예 바로 만주지역까지 후퇴하겠습니다." 라며 들을 리가 만무했다. 그래도 석유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기에 석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은 동남아시아의 브루나이와 인도네시아에 있는 유전에 관심을 가졌는데, 문제는 이 지역으로 가려면 미국 식민지였던 필리핀을 통과해야 했다. 일본은 내부 회의 끝에 동남아 유전도 먹고 단기적으로 미국 태평양 함대를 괴멸시켜 향후 미국과의 강화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목표 하에 남방작전과 진주만 공습을 준비한다. 일본군은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에게 연합함대 사령관장을 맡겼고 이소로쿠는 일단 맡게된 작전이니 일격필승을 다짐하며 일본계 미국인들 중 일본에 협조적인 이들을 포섭하여 하와이 진주만에 대한 정보를 철저히 모으면서 지형 미니어쳐까지 만들며 그 유명한 진주만 습격을 준비했다. 그리고 1941년 12월 7일, 일본제국 해군 연합함대가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여 수많은 군함들을 격침시켜 미 태평양함대에 일격을 먹이는 데에 성공했고 이때 일본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하고 미국에서 원자폭탄을 맞기 전까진 말 그대로 폭주했다.
그런데 일본은 모종의 이유로 선전포고문 전달이 늦어지는 바람에 선전포고 없이 전쟁을 걸게 되었다. 정확히는 일본 제국은 진주만 공습 전 일본 제국정부 대미통첩각서를 주미일본대사관에 보냈지만 이 문서는 선전포고문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애매한 문서였고, 그나마도 쓸데없이 너무 긴데다가 암호문이라서 주미일본대사관이 해독, 번역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느닷없이 기습을 당한 미국은 국민들의 대대적인 반일, 참전 여론을 등에 업고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다. 한편 일본은 진주만 공습과 동시에 남방작전을 개시한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할 때쯤 동남아시아를 지배하던 유럽 열강은 프랑스, 네덜란드처럼 나치 독일에게 본토가 아예 점령당했거나, 독일에게 점령당하지 않은 영국도 나치 독일에 항전하고 있던 상태였다. 그 때문에 유럽 열강들은 동남아시아에 상대적으로 소홀할 수 밖에 없었고, 배치된 장비도 M2A4 경전차, M3 스튜어트, 마몬-헤링턴 경전차들, 유니버설 캐리어 등이 주력 전차, 장갑차일 정도로 2선급 장비였기에 사실상 빈 집에 가까웠다. 일본은 동남아시아 주재 영국군의 삽질과 야마시타 도모유키의 전략적인 전격전으로 영국령 동남아 식민지를 점령했으며, 이후 필리핀 주둔 미군도 패배하며 기세를 탄 일본 제국은 중국의 절반 뿐 아니라 동남아 전역까지 휩쓸었다. 서구 열강들의 2선급 전력들을 상대로 이긴 일본 제국은 대동아공영권을 외치며 내친 김에 인도와 남태평양까지 쭉쭉 진출했다. 1942년, 일본 제국은 동북아에서 동남아, 남태평양까지 이르는 최대판도를 형성하였다. 태평양 전쟁 개시 뒤 귀축영미라는 단어가 유행했는데, 귀신과 짐승같은 영국과 미국이라는 뜻이다.
3.5. 몰락
사실 일본 제국의 야마모토 이소로쿠 등 미국에 유학하거나 공무를 본 자들은 미국의 산업 능력과 그 잠재력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군사력상 차이가 있더라도 하와이에 주둔한 미 태평양함대와 같이 주요 전력에 선제 공격을 취해 전투불능으로 만든다면 미국은 함대재건에 오래 걸리며 함대를 재건하는 동안 일본은 확보한 제해권으로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본토 공격카드를 내기가 가능하기에 항공모함과 전함을 궤멸시키고 나면 미국 측이 적극적으로 평화 협상 테이블에 나올 것이라 오판하였다.이는 러일전쟁 당시 얻은 교훈이기도 했다. 문제는 이 당시 일본군이 러일전쟁의 진상을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는 것이다. 아니면 알면서도 애써 정신승리 했거나.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협상장으로 나온 진짜 이유는 쓰시마 해전과 같은 일본군의 전력 우세 때문이 아니었다. 이 당시 상황이 더 안 좋은 것은 러시아가 아니라 일본이었다. 쓰시마 해전에서의 승리를 통해 사기를 높이긴 했지만, 전쟁 치른다고 영국과 미국에게 빌린 차관이 이미 국가재정으로 갚기에도 벅찰 정도로 한계에 치닫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러시아는 전쟁 자체는 계속 치를 수 있었지만, 피의 일요일 사건이 터지면서 외국과의 전쟁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 내부 혼란부터 해결해야 될 지경이 되었다. 그리고 당시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건설은 간신히 완료만 된 상황이고 기타 인프라는 아직 완공되지 않았기 때문에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한 유럽에서의 보급에도 차질이 심각했다. 즉 러시아의 국력이 100, 일본의 국력이 60이었다고 해도, 러시아는 유럽 쪽에 70, 아시아 쪽에 30으로 나뉘어 있고, 유럽에서 30을 더 끌고 와서 일본을 대적할 여건이 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거기다 이미 러시아는 일본의 배후에 자신들의 태평양 진출을 고깝게 보는 영국과 미국이 일본이 밀리려고 한다면 지원할 의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협상장에 나온 것이다.
다만 일본 제국이 전쟁을 시작한 시점에도 미국 태평양의 해군력은 일본 제국 해군력에 크게 뒤지지 않았다. 오히려 일각에 알려진 것과 달리 일본 제국 해군력은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으로 인해 당시 시대상 주 전력인 전함 보유수를 제한받았기에 어떻게 해야 군축조약에 걸리지 않고 전력을 상승시켜야 하나 라는 깊은 고민 끝에 당시 영국, 미국 등이 잃어도 개의치 않던 항모를 이소로쿠 제독을 포함한 일부 제독들이 눈여겨보기 시작, 집단운용과 구축함의 화력을 높이기 위한 산소어뢰 같은 연구를 하였다. 물론 일본은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서 나와 제약이 사라지자 바로 야마토급 전함을 건조하는 큰 삽질을 한다. 게다가 전함도 당시 영일동맹을 통해 영국으로 부터 편의를 받은지라 공고급 순양전함, 나가토급 전함을 자력으로 만들 정도의 건조기술 덕에 연합함대는 당시 미 태평양함대의 해군과 나름 비빌만한 정도였고 미드웨이 해전에서 참패를 했어도 압도적 우세에서 비교적 우세로 낮춰졌을 정도였다.
게다가 F2A 버팔로, F4F 와일드캣으로 구성된 미국의 주력 함재기들은 제로센에 비하면 속도와 선회력 면에서 뒤떨어졌고 F4F만 상대가 가능했다.[51] 게다가 일본군은 중일전쟁과 말레이 해전을 통해 나름 실전경험이 풍부한 베테랑급 조종사들까지 있었기에 이들은 침착하게 진주만 습격 때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강화협상에 나오기는커녕 매우 분노한 미국은 압도적인 공업기반과 미국 본토에서 나오는 막대한 자원을 이용하여 1년간 시간을 들인 뒤 전시공업 체제로 넘어간 이후로는 함선과 함재기 등 엄청난 물량을 찍어내며 양적인 열세는 물론 질적인 열세를 극복하였다.[52] 한편 선전포고 없이 공격을 당한 미국은 전국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으나 이내 분노[53]로 바뀌었으며 정치권도 이 여론을 의식하여 일본 제국에게 항복 제스쳐나 다름없는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는 것을 거부한다. 일본이 선전포고를 하자 나치 독일도 선전포고함에 따라 미국은 자연스럽게 연합군에 가입하여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을 포함한 추축국을 무너뜨리기로 결정[54]한다. 미국의 국가기반은 넘쳐나는 자원을 바탕으로 한 공업력으로 인해 세계 초강대국인 영국을 넘어서 세계 최고 수준의 초강대국으로 넘어갈 잠재적인 기반이 큰 나라였고 계기만 있다면 초강대국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던 상황이었다.
반면 일본 제국의 정권을 잡은 군부는 육군/해군으로 파벌이 더 심화되어 서로 이득이라는 파이를 더 차지하기 위해 육군/해군과의 대립이 심화되었고 같이 싸워도 모자랄 판에 반목하며 정보조차 공유를 안 하고 육군이 보급용 잠수함을 건조하는 등 사사건건 서로 견제하느라 바쁜 개판인 상황이었다. 내지에서 나오는 자원은 전혀 없었고 당시 아시아 중에서는 가장 발전한 공업국가였으나 미영 열강과 비교한다면 공업기술은 매우 뒤떨어졌다. 오죽하면 자국에서 개발 및 양산한 치하 중전차마저 스튜어트 경전차에 비해 성능이 열등했을 정도였다. 더욱이 1937년부터 발발한 중일전쟁의 장기화로 인해 미국과의 장기전은 필패뿐이었다.
물론 진주만 공습으로 선제공격을 한 상태였으며 전쟁 초기에는 나름 해군 주력함대가 나름 열강들에게 비빌수 있던 일본 제국 해군이 우세를 점했다. 그러나 일본 제국 해군의 자만과 미군이 승률을 높이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한 끝에 미드웨이 해전에서 정규항모 4척을 전부 소실하는 대실패와 파일럿과 같은 고급인력 1회용 취급, 대책없는 확장으로 인해 방어전력이 너무 분산된 나머지 과달카날 전역의 패배를 시작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반면 미국은 1년간 전시공업 체제 전환이 마치자 미국 본토의 막강한 산업력을 기반으로 세를 불려가기 시작하여 뉴기니, 괌, 필리핀, 사이판 등의 점령지를 차례로 되찾고, 우수한 무기로 인해 개개인 전투력마저 압도되다 보니 수세에 몰린 일본 제국은 이오지마 섬과 내지의 일부인 오키나와마저 뺏겨 수도권을 포함한 전 국토가 미 육군항공대 폭격기들의 사정권에 들어 공습으로 도쿄가 불바다가 되는 등 전황이 갈수록 불리해졌다.[55] 그렇다고 미군의 전략폭격기 B-29를 격추하고 싶어도 갈 수 있는 고도제한의 격차가 심해서 B-29가 고도를 높이는 순간 제로센들은 쫓다가 돌아올 수 밖에 없었으며, B-29 자체의 보호 무장과 이를 호위하는 제공기들의 존재로 인해 B-29는 일본 본토 공습 당시 추락하는 일이 엄청 적었다. 이는 독일 본토 항공전 당시 미국, 영국의 공군에게 여전히 위협적이었던 독일의 공군력, 방공 능력과 크게 대조되는 부분이다.
이렇게 본토 상황도 나쁜데 동맹국 나치 독일이 패망하고 연합군의 주역인 미영중은 포츠담 선언을 통해 무조건 항복이라는 최후통첩을 권고한다.[56] 그러나 일본 제국은 천황제 유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전쟁 이전 식민지 유지, 천황제 유지, 자국에 의한 무장해제, 전범을 자신들이 재판 등등 연합국으로서는 납득하기 힘든 조건을 걸며 조건 있는 항복을 끌어내기 위해 끝까지 1억 총옥쇄를 주장하며 결호작전을 짜며 항복을 거부한다. 한편 이오지마, 오키나와 전투에서 너무 큰 피해를 입은 미국은 이런 일본 제국의 모습에 몰락작전 내용을 구상하면서도 상륙군의 안전을 위해 원자폭탄을 떨군다라는 발상을 한다. 결국 미국은 몰락작전 시행 전 새로 개발한 원자폭탄의 위력을 보기 위해 맨해튼 프로젝트를 통해 개발한 원자폭탄을 일본 본토에 떨구기로 결정했고, 일본은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원자탄 폭격을 한 발도 아니고 무려 두 발이나 맞았으며, 설상가상으로 동맹국 간 회의에서의 약속에 따라 아시아에 영향력을 만들기 위해 소련이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대일 전쟁에 참가하자 쇼와 천황과 항복파 장교들은 반대파의 저항을 무릅쓰고, 천황의 옥음을 녹음하고 우익 청년장교들의 방해를 해친 끝에 마침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며 전쟁은 1945년 8월 15일 부로 끝나고 미국 전함 미주리 함교에서 일본 대표단이 무조건 항복문서에 공식 서명함으로써 일본의 항복이 이루어져 일본 제국은 패전을 맞이하였다. 이후 모든 식민지는 연합국에 의해 강제적으로 독립하였고, 타이완과 남사할린 등 제국주의 시기에 강탈한 영토는 중화민국, 소련에, 제2차 세계 대전기의 점령지 역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구 열강에 다시 반환되었다. 그 중 류큐 제도, 오가사와라 제도, 쿠릴 열도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점령되었고 미국은 미일동맹의 개선에 따라 이들 점령지를 일본에 돌려주었으나 소련은 이들 지역을 모조리 자국령으로 삼아 현재까지 일본과 갈등을 빚고 있다.
GHQ의 통치를 받던 1946년 11월 3일에 일본국 헌법이 공포, 1947년 5월 3일에 시행되었다. 일본의 주권은 GHQ에 완전히 종속되어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될 때까지 연합국의 관리체제에 있던 보호국이었지 주권국이 아니었다.
GHQ는 전쟁을 최종 승인한 쇼와 천황에게 전쟁 책임을 직접 묻지는 않았으며, 천황과 황실이 일본 국민에 대해 가지는 상징성을 인정하였다. 미국의 상층부에서는 천황제의 폐지가 일본에게 엄청난 반미 반서방 감정을 양성할 것이라 판단하였다. 당시 미국등 연합군측에서는 패전의 책임을 이유로 쇼와 천황을 전범재판에 올려 폐위시키고 천황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고 천황을 법정에 세우거나 천황제를 폐지하진 않되 쇼와 천황을 폐위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태평양 육군 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가 이를 제지했다. 결과적으로 천황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전전의 권한이 대폭 축소된, 입헌군주로서의 상징적 존재로 만들기로 방침을 결정하여, 맥아더가 쇼와 천황을 만나 인간선언을 요구한 끝에[57] 천황은 '국민 통합의 상징'일 뿐 아무런 정치적 권력이 없고 정치적 논란을 불러올 발언을 하는 것이 금기시되었다. 또한 쇼와 천황 사후 즉위한 아키히토는 어릴 때 전쟁을 겪었기에 전쟁이라면 진절머리 나서 정계와는 거리를 많이 두며 이러한 기조는 현 천황인 나루히토도 유지한다. 심지어 천황을 정치적 논란에 끌어들이려는 사람들이 암살 위협을 받으며 때문에 천황 본인의 행동 하나하나를 궁내청이 제한한다.
4. 대일본제국 헌법
자세한 내용은 대일본제국 헌법 문서 참고하십시오.1889년(메이지 22년) 헌법 반포 약도 |
새 황거에서의 헌법 발포식 그림(아다치 깅코 安達吟光 그림)[58] |
대일본제국 헌법(大日本帝國憲法)은 1889년(메이지 22년) 2월 11일[59]에 공포되어 1890년(메이지 23년) 11월 29일에 시행된 근대 입헌주의에 기초한 일본 최초의 근대적인 헌법이다. 현대에는 공포 당시의 천황인 메이지 천황의 이름을 따서 메이지 헌법(明治憲法)이라 부르거나 단순히 제국 헌법(帝国憲法)이라고도 부르며, 현행 일본국 헌법과 대비해서 구 헌법(旧憲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는 1876년 제정되어 1878년 정지된 오스만 제국 헌법을 제외하면 아시아 최초의 근대 헌법이다. 제73조 개헌 절차를 거쳐 1947년(쇼와 22년) 5월 3일 일본국 헌법이 시행되었다.
헌법 발포의 칙어에서 "불마(불멸)의 대전"(不磨ノ大典)이라고 명시했기 때문인지 일본국 헌법으로 개정될 때까지 한번도 수정이나 개정된 일은 없었다. 또한 청나라의 흠정 헌법 대강, 대한제국의 대한국 국제에도 영향을 주었다. 상세 내용은 대일본제국 헌법 문서 참조.
5. 군사
자세한 내용은 일본군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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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 소남도 | |
인도네시아 | 네덜란드령 동인도 군정청 | |
필리핀 군도 | 비도행정부 | |
홍콩섬 | 영국령 홍콩 군정청 | |
버마(미얀마) | 버마 군정청 | |
티모르 섬 | 티모르 점령지 | |
괌 | 대궁도 | |
식민지 · 괴뢰국 | }}}}}}}}} |
1942년 일본 제국 최대 영토 지도[60][61] |
"(일본은) 금융자본주의 국가로서의 제국주의 실행자라는 실질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이데올로기 면에서는 이미 훌륭한 제국주의 국가였다."
- 강상중,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95p
- 강상중,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95p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식민제국으로 성장하여 제국주의 열강 중 하나가 되었다.
위 이미지는 1942년 과달카날 전투 직전의 판도로, 서쪽으로는 버마 (현 미얀마) 일대를 대부분 점령했고, 동쪽으로는 알류산 열도[62] 남쪽으로는 솔로몬제도 일부를 점령했다. 중국전선에서는 구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수도였던 남경을 비롯한 대부분의 중국해안을 점령하고 있던 상태였다. 하지만 1942년 말부터 시작된 연합국의 반격에 이 판도는 붕괴되었다.
탄생 직후부터 계산하면 일본 제국의 판도는 수십 년(78년)이다. 하지만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자신들이 침략하는 국가와 다를 바 없는 전형적인 아시아 국가였다.[63] 열강이 된 이후에도 일본은 체급[64][65]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고 최대 패권을 갖추기까지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다만 어디까지나 서구 열강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지 아시아에서는 이미 그때 독보적 역량을 가진 국가였다. 최대 영토를 갖춘 것은 1942년 중엽 남방작전이 끝난 이후이다.
일본의 식민지와 점령지를 아우르는 일본 식민제국은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면서 해체되었다.
아래는 일본 식민지들과 점령지를 획득한 순서로 나열.
6.1. 타이완 섬
자세한 내용은 대만일치시기 문서 참고하십시오.1894년 일본 제국은 청나라와 조선의 종주권을 두고 청일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뒀다. 그리고 승전의 대가로 타이완 섬을 할양받았다. 대만인들은 타이완 민주국을 세워 저항했으나, 일본군에 의해 진압당한다.
6.2. 한반도
자세한 내용은 일제강점기 문서 참고하십시오.자세한 내용은 조선총독부 문서 참고하십시오.
대한제국의 국권 피탈 과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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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9월 20일 | 운요호 사건 | 일본의 근대적 군사 도발 |
1876년 2월 27일 | 강화도 조약 | 최초의 근대적, 불평등 조약 체결 | |
1882년 7월 23일 | 임오군란 | 군란을 제압한 청군 주둔 | |
1882년 8월 30일 | 제물포 조약 | 군란을 이유로 일본공사관 경비 병력 주둔 | |
1884년 12월 4일 | 갑신정변 | 일본의 지원을 받은 급진개화파의 정변, 청군에 의해 진압 | |
1885년 1월 9일 | 한성조약 |
갑신정변으로 입은 피해에 대한 사과 및 배상을 요구하는 일본의 함대 무력 시위. 이로 인한 조선과 일본의 협상 제물포 조약에 의거한 경비 병력 주둔 재확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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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4월 18일 | 톈진 조약 |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 대한 청일 양국의 논의 파병된 청일 양국 군대 철수 및 향후 조선 출병시 상호 통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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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7월 23일 | 갑오사변 |
동학 농민 운동 진압을 위해 청나라에 파병 요청,
제물포 조약과
톈진 조약을 빌미로 일본이 파병 전주 화약 후 조선의 양국 군대 철수 요청 이를 무시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친일내각을 구성하고 갑오개혁 추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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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7월 25일 | 청일전쟁 |
서해 아산만 풍도에서 일본군이 청군을 기습하며 전쟁 발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에 반발한 동학의 2차 봉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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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4월 17일 | 시모노세키 조약 |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로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 상실 | |
1895년 4월 23일 | 삼국간섭 |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압력으로 일본이 요동반도 반환 친일내각의 붕괴와 친러파의 대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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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10월 8일 | 을미사변 | 일본이 명성황후 살해 후 친일내각을 재구성 하고 을미개혁 추진, 이에 항거한 을미의병의 발발 | |
1896년 2월 11일 | 아관파천 |
고종이 감금돼 있던 경복궁을 탈출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 친일 내각 몰락, 친러 내각이 구성되고 근대화 추진과 대한제국 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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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5월 14일 | 베베르-고무라 각서 |
일본제국이 한반도 세력권은 러시아 제국에 포함됨을 공인함. 러일 양국이 각국의 군대를 조선에 파견하는 것을 동의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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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6월 9일 |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 | 일본제국과 러시아제국은 조선이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차관을 도입하고자 한다면 합의하에 제공하고, 러시아와 일본에 한반도 내 전신선의 보호권이 있음을 명시. 양국은 한반도에서 소요사태 발생시 군대를 투입할 권한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함. | |
1897년 10월 12일 | 대한제국 선포 | 경운궁으로 환궁했던 고종이 황제에 오르고 제국을 선포, 광무개혁 추진 | |
1898년 4월 25일 | 니시-로젠 협정 | 러시아와 일본 간 협정. 대한제국에 대한 내정 불간섭, 대한제국의 군사적 지원 요청 시 상호협상 없이는 응하지 않을 것, 한일 양국 간 경제적 교류에 대해 러시아가 저해치 않을 것을 약속 | |
1902년 1월 30일 | 1차 영일동맹 | 일본이 대한제국에 특별한 이익이 있다고 영국이 승인 | |
1904년 1월 21일 | 대한제국 중립선언 | 대한제국은 러·일간 전쟁 시 중립임을 세계 각국에 선언 | |
1904년 2월 8일 | 러일전쟁 | 일본군의 러시아군 기습 공격으로 전쟁 발발. 일본군의 인천, 부산, 마산, 원산 상륙과 서울 및 경운궁 점령 | |
1904년 2월 23일 | 한일의정서 | 일본군의 대한제국 거점 주둔 | |
1904년 5월 31일 | 대한시설강령 발표 |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이권 강화 | |
1904년 8월 22일 |
한일 외국인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 (제1차 한일협약) |
외국인 고문을 두어 일본이 국정에 간섭(고문정치) | |
1905년 4월 1일 | 한일통신기관협정서 | 대한제국의 통신 주권 침해 | |
1905년 4월 16일 | 대한제국군 감축 | 일본의 강요로 친위대 해산, 시위대와 진위대 감축 | |
1905년 7월 29일 | 가쓰라-태프트 밀약 |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종주권, 외교권을 대행할 것을 미국이 승인 | |
1905년 8월 12일 | 2차 영일동맹 |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정치상⋅군사상⋅경제상 특별한 이익이 있다고 영국이 승인 | |
1905년 8월 13일 | 한국 연해 및 내하의 항행에 관한 약정서 | 대한제국의 연근해 주권 침해 | |
1905년 9월 5일 | 포츠머스 조약 |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관리, 감독, 보호할 것을 러시아가 승인 | |
1905년 11월 17일 |
을사조약 (제2차 한일협약) |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 일본인 통감이 외교권 행사(통감정치), 한국의
보호국화 을사의병 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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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7월 20일 | 고종 황제 퇴위 |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고종 황제가 이토 히로부미의 협박으로 강제 퇴위, 순종 황제 즉위 | |
1907년 7월 24일 |
정미 7조약 (제3차 한일협약) |
일본인 차관의 내정 간섭(차관정치) 부속각서에 대한제국군 해산 명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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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8월 1일 | 대한제국군 해산 |
시위대 해산을 시작으로 8~9월 진위대 해산 남대문 전투, 정미의병 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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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7월 12일 | 기유각서 |
대한제국의 사법권⋅교도 행정권 박탈, 일본이 대행 한국의 속령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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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9월 1일 | 남한대토벌 | 10월 말까지 두달에 걸친 일제의 남한 내 모든 의병 소탕, 항일의병의 만주 이동 | |
1909년 9월 4일 | 간도협약 | 조선과 대한제국의 간도영유권 시도 전면 수포화, 일본의 만주 철도부설권 확보 | |
1910년 6월 24일 | 한일약정각서 | 대한제국의 경찰권 박탈, 일본이 대행 | |
1910년
8월 29일 (체결일 8월 22일) |
경술국치 ( 한일병합조약) |
대한제국 멸망, 한반도의 식민지화 | |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2조 (a)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비롯한 한국에 대한 일체의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 제2조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
일본 제국은 운요호 사건과 그로 인한 강화도 조약(1876. 조일 수호 조규) 체결로 조선을 상대로 처음 제국주의적 모습을 드러냈으며, 조선 침략의 발판을 마련한다. 이후 조선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톈진 조약[66]을 명분으로 들며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였고, 이후 벌어진 청일전쟁(1894)의 승리를 계기로 조선에서 청의 영향권을 밀어내고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쥐기 시작한다. 이후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잠시 상실하지만, 러일전쟁의 승리와 을사조약 체결(1905. 대한제국의 외교권 강탈)로 결국 한반도를 손아귀에 쥐게 된다. 이윽고 1910년 대한제국을 병합하기 이른다.
6.3. 관동주
자세한 내용은 관동주 문서 참고하십시오.일본 제국은 청일전쟁 직후 청나라로부터 대만과 같이 랴오둥 반도를 할양받았다. 그러나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으로 인해 철수한다. 이후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계기로 러시아 제국의 조차지인 뤼순 및 다롄을 점령하고, 관동주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이후 이곳은 일본군의 중국 대륙 침략의 거점으로 사용된다. 이 지역의 발해해 인근 보하이만에 엄청난 석유가 나오기에 과거 일본제국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굳이 미국과 전쟁할 일도 없어 역사가 바뀔 수도 있었다.
6.4. 톈진시
자세한 내용은 톈진 조계 문서의
일본령 톈진 (1898 ~ 1945)
부분을
참고하십시오.청일전쟁 이후 조차하게 된 현 중국 톈진시 일부의 조계이다.
6.5. 사할린 남부
자세한 내용은 일본령 가라후토 문서 참고하십시오.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할양받았다. 1943년 이후 내지에 편입된다. 원래 거주하던 인구가 작아 일본이 지배한 식민지 중 거의 유일하게 일본인 인구가 원주민을 압도했다.
6.6. 미크로네시아
자세한 내용은 남양 군도 문서 참고하십시오.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영일동맹을 근거로 협상국 측으로 참전해 독일 제국의 식민지인 미크로네시아와 교주만을 점령하였다. 이후 교주만은 중화민국에 반환하지만, 미크로네시아는 남양제도라는 이름으로 위임통치령으로 삼았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의 전진기지로 활용되었다.
6.7. 중국 대륙
자세한 내용은 일치시기(중화민국) 문서 참고하십시오.자세한 내용은 왕징웨이 정권 문서 참고하십시오.
6.7.1. 만주
자세한 내용은 만주국 문서 참고하십시오.1931년, 일본의 관동군은 천황의 재가와 정부의 허가도 없이 류탸오후 사건을 이유로 들어 중화민국의 영토인 만주를 점령했다.( 만주사변) 그러나 뒤늦게 알아차린 일본 정부는 '어쩔 수 없다'라는 걸로 애써 무시했다. 그 결과 이미 축출당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를 초대 황제로 하여 1932년 괴뢰국인 만주국이 설립되었으며, 일본은 군국주의의 길로 치닫게 된다.
6.8. 동남아시아
1941년 9월 비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군대 주둔을 허가받아 일본군은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를 자신들의 영향권 하에 두고, 그해 12월 7일 진주만 공습을 감행함으로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은 괌, 버마,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동티모르 등 서구 열강들의 동남아시아 식민지나 해외 영토를 전부 손에 넣었다.일본은 동남아시아를 크게 두 권역으로 나누어 통치했다. 먼저 추축국의 적국인 영국, 미국 등이 지배하던 필리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버마, 홍콩은 완전히 빼앗아 군정을 실시하고 일본 마음대로 조종하는 괴뢰국을 세웠다.
반면,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는 이 당시 프랑스가 일본의 동맹인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기 때문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도 따지자면 일본의 우군에 해당하므로 통치권을 완전히 빼앗진 않고, 기존의 프랑스식 지배체계와 프랑스인 관료 시스템을 인정하는 식으로 간접 통치했다.
그러다 프랑스 본토를 연합국이 탈환하면서 일본도 더 이상 이런 이중적인 통치를 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전쟁 말기인 1945년 3월 명호작전을 통해 일본 제국은 형식적으로 남아있던 프랑스를 완전히 몰아내고 베트남 제국, 캄보디아 왕국, 라오스 왕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웠다.
7. 교육
일본 제국의 교육 제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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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제도(新制) | 구제(舊制) | ||||
소학교 | 심상소학교(~1941) · 국민학교의 초등과(1941~) | |||||
중학교 | 고등소학교(2년제, ~1941) · 국민학교의 고등과(1941~) · 구제중학교[C] · 구제고등여학교[A] · 구제고등학교 심상과(1919~)[B] · 체신강습소 보통과 · 청년학교 보통과 · 실업보습학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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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대학 · 고등전문학교 | 고등중학교 전문부(1896~1894) · 구제고등학교 고등과(1918~) · 구제전문학교 · 대학예과 · 사범학교 본과[D] · 고등사범학교 · 청년학교 교원양성소 · 도서관직원양성소 · 고등체신강습소 본과 | |||||
대학 | 대학 | |||||
대학원 | 대학원 (연구과) | |||||
당시
구제전문학교는 단기대학 · 고등전문학교 과정에 상당하지만 공식 학위가 나오지 않는
고등교육기관. 구제대학 학부를 누적 수학 연령으로 따지면 신제 석사와 동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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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일반적으로 구제중학교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통합해서 운영했다.
[A]
구제중학교가 남자학교이니 고등여학교는 구제중학교의 여학교 버전이다. 교육과정은 동일하다
[B]
소학교 졸업자들 대상으로 중학교 과정에 해당하는 교육을 제공함. 재정 문제로 일반화되지는 못했다.
[B]
소학교 졸업자들 대상으로 중학교 과정에 해당하는 교육을 제공함. 재정 문제로 일반화되지는 못했다.
[C]
[A]
구제중학교가 남자학교이니 고등여학교는 구제중학교의 여학교 버전이다. 교육과정은 동일하다
[D]
1943년 사범학교령을 통해 모든 사범학교에 대하여 전문학교급으로 승격하고 본과와 예과를 만듦.
[D]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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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에는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 예과, 전문학교, 대학 등을 그런 이름으로 불렀지만 패전 이후의 제도 ('신제 고등학교')와 구분하는 의미에서 구제고등학교 등 '구제'를 붙여서 칭한다.
일본제국 학제(左) - 현대 일본 학제(右) 비교 |
일본 제국의 학제는 오늘날처럼 소-중-고-대 방식의 단선형 학제가 아니었고 학교의 종류에 따라 차이가 많았다. 또 이름도 자주 바뀌었다.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상급학교 진학코스는 초등교육( 소학교) 6년, 중등교육( 구제중학교) 5년, 고등교육( 구제고등학교) 또는 구제대학 예과 3년, 구제대학 학부 3년이었다. 이외에 의학부 등 특정 학부는 4년 코스였으며, 1920년대 이후 수학연한 단축을 위해 구제중학교와 구제고등학교를 합친 7년제 고등학교를 만들면서 구제중학교 4학년 수료자에게도 기존의 3년제 구제고등학교 또는 구제대학 예과 합격시 조기졸업이 가능한 것 등 몇 가지 예외가 존재했다.[67] 사립대학의 경우 예과를 거쳐 진학하는 학부와 별도로 구제중학교 졸업생이 바로 진학할 수 있는, 구제전문학교격에 해당하는 부속 전문부가 있었다. 또한, 구제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제국대학과 관립의과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구제대학에 이르기까지 상급학교 진학을 목표로 하는 엘리트 코스 외에도 개별 단계에서 실업 교육을 실시하는 학교를 선택할 수 있었다. 의무교육격인 소학교( 보통학교) 졸업 후 구제중학교로 진학하는 대신에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초등교사가 되거나, 실업학교(공업학교, 농업학교, 상업학교 등등)로 가서 직업교육을 받을 수도 있었다. 이 실업학교도 구제중학교와 동일한 5년제 '갑종'실업학교가 있었고, 그보다 수학연한이 짧은 을종(3년제) 학교 과정도 병존했다.[68] 또한, 구제중학교 과정의 하위버전인 2년제 고등소학교도 존재했다.
그리고 사범학교의 상위 단계인 고등사범학교와 실업학교의 상위에 고등실업학교 등의 구제전문학교가 존재했다. 고등사범학교는 기본적으로는 사범학교 졸업생을 대상으로 선발하여 중등교원( 구제중학교 교사 등)을 양성하는 학교였으며, 고등실업학교는 농업학교, 공업학교, 상업학교 등 갑종 실업학교 졸업자를 대상으로 선발해 해당 분야의 실무 전문가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었다. 또한 구제전문학교에는 고등실업학교를 제외하고도 의학전문학교나 법학전문학교 등 구제중학교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입시를 실시해 의학, 법학 등을 교수해 의사, 변호사[69] 등을 길러내는 학교도 있었으며 이러한 코스들이 분리 정립되어있는 것이 아니고 중학교 졸업 후에 고등상업학교와 같은 고등실업학교로 진학하기도 하고, 실업학교 졸업 후에 구제고등학교로 진학하기도 하는 등 이동이 가능했다.
그 위에는 구제대학이 있었는데, 관립 종합대학인 제국대학과 관립단과대학들이 있었고, 기타 공립 사립 대학들도 혼재되어있었다. 구제대학( 학부)은 구제고등학교 또는 대학예과를 졸업한 자가 입학하는 곳이었으나 특히 관립단과대학의 경우는 고등실업학교가 승격되는 식으로 설립된 곳들이고, 그에 따라 고등실업학교 졸업생에게 문호가 개방되어있는 정도가 컸으며 TO가 구제고교 졸업생과 동일한 수준으로 부여되는 관립대학도 존재했는데, 모든 학교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학교마다 다르고 또 때에 따라 달라졌다. 심지어 제국대학의 경우도 구제고교 졸업생인 지원자 수가 모집정원에 미달하는 경우 구제전문학교 졸업자나 그에 상당하는 학력 보유한 자 중에서 전검시험을 통과한 자에게 입시자격을 부여하는 등 지금의 시선에서 보면 매우 복잡한, 유럽식 복선 학제를 취하고 있었다. 현재 제도로 봤을 때는 6-5-2-3의 영국식 학제에 독일의 김나지움, 레알슐레, 하웁트슐레 등의 복선식 시스템이 섞여있었다고 보면 되겠다.
주의할 점은 초등교육, 중등교육, 고등교육의 학교 구분도 미국식 시스템이 이식된 현대 한국이나 일본과 다르다. 현대 한국이나 일본의 신제 고등학교는 중등교육기관이지만 일제의 구제고등학교는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사실 신제 고등학교는 원래 구 학제에서 중등교육을 담당하고 있던 5년제 구제중학교를 반으로 잘라 초기중등교육(신제 중학교)과 후기중등교육(신제 고등학교) 기관으로 분리시킨 것이고, 구제고등학교는 오늘날 의과대학의 의예과처럼 구제대학의 전공교육 이전에 교양과목을 이수하는, 현재 신제대학의 1~2학년에 해당되는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오늘날 한국 일본에서는 미국식 4년제 이상 대학으로 일원화되어있는 고등교육을 구학제에서 담당한 고등교육기관으로는 구제고등학교/ 대학예과 및 구제대학 그리고 구제전문학교(구제대학 부속 전문부 포함), 고등사범학교 등이 있었다. 기타 고등체신강습소 본과 등 이에 상당하는 특수교육기관도 존재했다.
육해군 장교의 경우 육군은 일본육군유년학교, 일본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교 출신을 성골로 보았다. 육군유년학교는 응시자격이 만 13~15세, 수험시 학력 불문이었다. 따라서 요구되는 학력 자체는 구제중학교 2학년 1학기 수료 정도였지만 소수의 고등소학교 출신도 합격했다. 전국 각지에 설치되어있던 시기에는 동경의 중앙유년학교를 나오는 것을 최고로 쳤다. 유년학교 출신이 아닌 경우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구제고등학교와 마찬가지로 구제중학교 4학년 수료가 필요했는데 대부분은 5년 졸업 후 응시, 합격했다. 채병덕이 4년 수료 후 합격한 케이스이고 같은 중학교 동기인 이용문은 구제중학교 졸업 후 입학한 케이스이다. 조선인의 경우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재학 중 일본에 관비유학생으로 파견된 이응준 등 일본육사 26~27기까지만 유년학교를 거쳤고, 이후 44기 이형석부터 49기 채병덕, 이종찬 이하 기수는 구제중학교 졸업 후 바로 육사로 진학했다. 왕족인 영친왕 이은은 가쿠슈인에서 육군중앙유년학교를 거쳐 육사로 진학했다. 해군에서는 해군예비교, 일본해군병학교, 해군대학 출신이 성골이었으나, 육군에 비해 그 수가 적었고 주요 보직을 독점했기 때문에 해군병학교 출신간의 경쟁이 이뤄졌다. 여기에는 해군병학교 졸업성적이 주요 결정요인으로 작용했다.
7.1.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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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제3차 조선교육령을 통해 내지와 조선의 학제가 완전히 통일되기 전까지 조선의 교육 제도는 일본 내지와 차이가 있었다. 우선 1922년 제2차 조선교육령 공포 이전까지는 조선에 있는 각급 초등/중등 학교의 수학연한 자체가 본토와 달랐다.
제1차 조선교육령 1910~1922년 |
제2차 조선교육령 1922~193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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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교육 | 보통학교 4년 | 보통학교 6년 |
중등교육 | 고등보통학교 4년 | 고등보통학교 5년 |
고등교육 | 구제전문학교 3~4년 |
구제전문학교 3~4년 경성제국대학 6~7년 |
1915년 조선총독부의 전문학교 규칙 제정 이전까지 보성전문학교, 연희전문학교 등 조선의 사립 전문학교는 인가를 받지 못해 명칭만 전문학교였을 뿐이었고, 본토의 와세다대학, 게이오기주쿠대학과 같은 구제전문학교로 대우받지 못했다. 구제대학 진학을 희망시에는 구제중학교 졸업 상당의 학력으로 인정받아야 구제고등학교, 대학예과 입시자격을 얻을 수 있었는데 당시 조선의 보통학교(4년)와 고등보통학교(4년)의 수학연한이 일본 소학교(6년)와 구제중학교(5년)를 합한 것보다 3년이나 짧았기 때문에 고등보통학교 졸업자는 구제중학교 졸업자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고등보통학교 졸업자가 일본의 상급학교에 진학하고 싶으면 구제중학교 3학년에 편입학해 졸업해야다. 평양고보를 중퇴한 다음 일본 본토의 중학교에 편입하여 제6고등학교, 도쿄제국대학을 거친 정광현[70]이 그 예다.
경성중학교(현재의 서울고등학교), 용산중학교(현재의 용산고등학교) 같은 조선 내의 일본인들이 수학하는 구제중학교의 경우 일본 내지와 동일한 학제를 취했지만, 일본어를 상용했기 때문에 조선인 가정의 자녀는 취학 자체를 보통학교가 아니라 소학교로 해서 졸업한 경우가 아니면 입학은 거의 불가능했다. 소학교에서부터 일본인 학생들과 일본어로 입시를 치러야했기 때문이다. 이런 차별이 조선인들의 불만을 초래했고, 지속적인 반발이 제기되었으며 내지연장주의/동화주의에 입각한 제2차 조선교육령에 가면 수학연한이 통일되는 방향으로 학제가 개편되었다.
1922년 조선교육령의 개정(제2차 조선교육령) 공포와 시행 이후 조선총독부의 전문학교 규칙이 내지의 전문학교령을 준용함에 따라 조선의 사립 전문학교도 요건을 갖추어 인가를 받았다면 정식 구제전문학교로 인정되었다. 조선 내 전문학교 졸업생은 경성제국대학 본과에 결원이 있을 경우 편입이 가능했으나, 경성제대 예과 출신 학부생과 동등한 취급을 해준 것은 아니었고, 대학예과가 존재한 경성제대 특성상 결원이 많지 않아서[71] 일제강점기 조선 내에서 학사와 박사[72]를 취득할 수 있던 곳은 조선의 유일한 구제대학인 경성제국대학뿐이었다.
조선의 구제전문학교들과 달리 내지의 구제고등학교들은 1920년대에도 고등보통학교 졸업을 구제중학교 졸업과 동등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단순히 수학 연한이 짧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조선의 고등보통학교들은 내지의 구제중학교와 달리 농업, 부기, 주산 등 직업교육(手工)을 가르쳤고, 수업 내용도 훨씬 쉬웠다. 영어는 성적이 좋은 학생에게만 가르치거나 알파벳만 가르쳤다. 예를 들어 화학자 이태규는 고등보통학교까지는 조선에서 나왔는데, 거의 매 학기 수석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알파벳을 다 알지 못 했다고 한다. 이렇게 정규 교과 과목은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에 그쳤다.
와세다대학, 게이오기주쿠대학 등 사립 구제대학의 경우에는 조선에서 구제전문학교를 졸업했으면 대학예과를 생략하고 학부(본과)로 입학하게 해주는 경우가 많았다. 많은 조선인 학생들이 관공립대학이 아니라 사립대학으로 유학한 이유였다. 뿐만 아니라 사립대학들은 구제대학 승격 후에도 승격 이전 시절의 기존 구제전문학교 과정을 부속 전문부라는 소속기관으로 두고 있어서, 고등보통학교 졸업 학력만 있어도 해당 부속 전문부로 진학할 수 있었다.[73] 전문부는 구제전문학교격으로 구제대학 예과를 거쳐 학부(본과)를 졸업한 자와 달리 학사를 받지는 못했지만, 오늘날 신제대학과 동격의 학교로서 졸업생은 엘리트 대우를 받았다. 구제고등학교/ 대학예과 3년과 학부 3~4년까지 총 6~7년 이상을 재학해야하는 구제대학 학부까지 다니는 경우는 고등문관시험을 통해 고위관료로 출세를 원하거나 학자가 되고 싶은 극소수 경우였다. 그래서 조선인 유학생이 일본에 유학한 경우는 대부분 사립대학 전문부에서 마쳤다. 'XX대학 전문부 졸업' 같은 식이다.]
그러나 제2차 조선교육령 공포 후 내지동화주의로 전환됨에 따라 고보의 교과 과정 역시 중학교와 맞춰졌고, 보통학교에 취학할 때부터 일본 내지와 동일하게 교육 받은 1910년대 후반 출생 세대부터는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일본 본토의 구제고등학교로 진학하는 예가 많이 늘어났다. 일례로 서울대학교 교수를 역임한 서돈각은 대구에서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다음 마쓰야마 고등학교에 입학하였고, 역시 서울대 교수를 역임한 민석홍은 서울에서 경기고등보통학교(현재의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제8고등학교로 진학하였다.
1930년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등으로 만주, 중국 침략에 나선 일제는 조선을 내지화하였고, 1930년대 후반에 가면 조선의 학제를 완전한 내지연장주의에 입각하여 학교 명칭까지 보통학교→소학교, 고등보통학교→중학교로 내지와 통일시키는 제3차 조선교육령(1938)을 공포하였다.
제2차 조선교육령 1922~1937년 |
제3차 조선교육령 1938~1945년 |
|
초등교육 | 보통학교 6년 | 소학교 6년 |
중등교육 | 고등보통학교 5년 | 구제중학교 5년 |
고등교육 | 구제전문학교 3~4년 |
구제전문학교 3~4년 경성제국대학 6~7년 |
1940년대 태평양전쟁 개전 후 일제 말기에는 전시 총력전 체제로 이행하면서 국민학교 6년, 국민학교 고등과 2년으로 초등교육이 개편되었는데, 국민학교 고등과 졸업자의 절반 이상이 취업하거나 가업을 이었고 나머지만 상급학교에 진학했다. 그래서 고등보통학교만 졸업해도 먹물 취급을 받았다.
8. 일본국 헌법 체제로의 전환
1945년 9월 2일 일본 제국이 항복문서에 서명하면서 천황과 내각은 SCAP에 종속되어 실정적으로는 독립국이라고 볼 수 없게 되었지만, 국제법적 절차를 위해 최소한의 주권이 허락된 명목상의 정부만이 1952년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될 때까지 유지되었다.포츠담 선언에 명시된 대로 GHQ는 민주화와 인권이 보장되는 헌법으로의 개정을 일본 정부에게 요구했다. 형식상으로는 대일본제국 헌법의 개헌 절차를 따르고 초안 공표 후에 총선거를 실시했지만 일본에게 명목상의 주권만 있고 사실상의 주권은 없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의회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았다. 물론 타의성과는 상관없이 민주화와 전시체제 종식을 원하는 일본 민중들의 신헌법 지지율은 압도적이었다. 일본국 헌법이 시행된 1947년 5월 3일에 일본 제국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그러나 GHQ의 간접 통치는 계속 이어젔으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된 1952년 4월 28일까지 일본국의 주권은 제한되었다. 조약이 발효되어 주권이 완전히 회복되고 이후 이러한 절차 덕분에 일본국과 일본 제국은 동일한 국가로 취급되고 있다.[74]
9. 역대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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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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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나라 | 오기마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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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마치 | 고요제이 | ||||||||
[[에도 시대| 에도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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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쇼 | 고코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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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이 | 레이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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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조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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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카쿠 | 닌코 | 고메이 | 메이지 | ||||||
근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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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DCA600> 제122대 | 제123대 | 제124대 | 제125대 | ||||||
메이지 | 다이쇼 | 쇼와 | 아키히토 | ||||||
<rowcolor=#DCA600> 제126대 | |||||||||
나루히토 | |||||||||
}}}}}}}}} |
<rowcolor=#DCA600> 시호 | 휘 | 즉위년일 | 퇴위년일 |
(↑ 고메이 천황) | |||
메이지 천황 |
무쓰히토 睦仁 |
1867.2.13 | 1912.7.30 |
다이쇼 천황 |
요시히토 義仁 |
1912.7.30 | 1926.12.25 |
쇼와 천황 |
히로히토 裕仁 |
1926.12.25 | 1989.1.7 |
(↓ 아키히토) |
10. 역대 대장경 및 내무경
내각총리대신 제도 출범 전의 명목상 일인지하 만인지상은 태정대신이었으나, 태정대신은 상징적 명예직이었을 뿐 실권은 대장경과 내무경이 갖고 있었다.대장경은 일본 재무대신의 전전신격 관직으로 현 재무성의 전신인 대장성의 장관[75]이었다. 또한 당시 대장성과 민부성의 합병과 분리가 반복되었고 대장경이 민부경을 겸하기도 하였기에 내무경 이전 사실상의 정부수반이었다. 훗날 내무성이 설립되자 실권은 내무성의 장관인 내무경에 넘어가게 된다.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000,#e5e5e5 |
민부·대장경 (1869~1885) | ||||
초대 마츠다이라 슌가쿠 |
2대 다테 무네나리 |
- 오키 다카토 |
3대 오쿠보 도시미치 |
4대 오쿠마 시게노부 |
|
5대 사노 쓰네타미 |
6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
||||
전전 대장대신 (1885~1947) | |||||
1·3·5·8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
|||||
1·3·5·8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
2·4·9대 와타나베 구니타케 |
1·3·5·8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
2·4·9대 와타나베 구니타케 |
1·3·5·8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
|
6대 이노우에 가오루 |
7·12대 마츠다 마사히사 |
1·3·5·8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
2·4·9대 와타나베 구니타케 |
- 사이온지 긴모치 |
|
10대 소네 아라스케 |
11대 사카타니 요시로 |
7·12대 마츠다 마사히사 |
13대 가쓰라 다로 |
14대 야마모토 타츠오 |
|
15·17대 와카쓰키 레이지로 |
16·21·28·31·33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
15·17대 와카쓰키 레이지로 |
18대 다케토미 도키토시 |
19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
|
20·24대 쇼다 카즈에 |
16·21·28·31·33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
22대 이치키 오토히코 |
23·30대 이노우에 준노스케 |
||
20·24대 쇼다 카즈에 |
25대 하마구치 오사치 |
26대 하야미 세이지 |
27대 가타오카 나오하루 |
||
16·21·28·31·33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
29대 미츠치 추조 |
23·30대 이노우에 준노스케 |
16·21·28·31·33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
||
16·21·28·31·33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
32대 후지이 사다노부 |
16·21·28·31·33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
34대 마치다 추지 |
35대 바바 에이이치 |
|
36대 유우키 토요타로 |
37·44대 가야 오키노리 |
38대 이케다 시케아키 |
39·45대 이시와타 소타로 |
40대 아오키 카즈오 |
|
41대 사쿠라우치 유키오 |
42대 가와다 이사오 |
43대 오구라 마사츠네 |
37·44대 가야 오키노리 |
39·45대 이시와타 소타로 |
|
46·48대 쓰시마 준이치 |
47대 히로세 토요사쿠 |
46·48대 쓰시마 준이치 |
49대 시부사와 케이조 |
50대 이시바시 단잔 |
|
전후 대장대신 (1947~2001) | |||||
- 가타야마 데쓰 |
51대 야노 쇼타로 |
52대 구루스 다케오 |
53대 기타무라 도쿠타로 |
- 요시다 시게루 |
|
54대 이즈미야마 산로쿠 |
- 오야 신조 |
55·61-62대 이케다 하야토 |
56대 무카이 다다하루 |
57대 오가사와라 산쿠로 |
|
58-60·63대 이치마다 히사토 |
55·61-62대 이케다 하야토 |
||||
58-60·63대 이치마다 히사토 |
64대 사토 에이사쿠 |
65-66·71-72·75대 미즈타 미키오 |
|||
67-69대 다나카 가쿠에이 |
|||||
70·73-74·78대 후쿠다 다케오 |
65-66·71-72·75대 미즈타 미키오 |
||||
70·73-74·78대 후쿠다 다케오 |
65-66·71-72·75대 미즈타 미키오 |
76대 우에키 코시로 |
|||
77대 아이치 기이치 |
- 다나카 가쿠에이 |
70·73-74·78대 후쿠다 다케오 |
79-80대 오히라 마사요시 |
||
81대 보 히데오 |
82·91-92대 무라야마 다쓰오 |
83대 가네코 잇페이 |
84·86-87·90대 다케시타 노보루 |
85대 와타나베 미치오 |
|
84·86-87·90대 다케시타 노보루 |
88-89·105-107대 미야자와 기이치 |
||||
84·86-87·90대 다케시타 노보루 |
82·91-92대 무라야마 다쓰오 |
||||
93-94·103대 하시모토 류타로 |
95대 가이후 도시키 |
96대 하타 쓰토무 |
97대 하야시 요시로 |
||
98-99대 후지이 히로히사 |
임시대리 하타 쓰토무 |
98-99대 후지이 히로히사 |
100대 다케무라 마사요시 |
||
101대 구보 와타루 |
102대 미쓰즈카 히로시 |
93-94·103대 하시모토 류타로 |
104대 마쓰나가 히카루 |
||
88-89·105-107대 미야자와 기이치 |
|||||
재무대신 (2001~) | |||||
초대 미야자와 기이치 |
2대 시오카와 마사주로 |
3-5대 다니가키 사다카즈 |
|||
6대 오미 고지 |
7·8대 누카가 후쿠시로 |
9대 이부키 분메이 |
10대 나카가와 쇼이치 |
||
11대 요사노 가오루 |
12대 후지이 히로히사 |
13대 간 나오토 |
14대 노다 요시히코 |
15대 아즈미 준 |
|
16대 조지마 고리키 |
17-20대 아소 다로 |
||||
21·22대 스즈키 슌이치 |
23·24대 가토 가쓰노부 |
}}}}}}}}}}}} |
<rowcolor=#ffffff> 대수 | 이름 | 임기시작 | 임기종료 |
1대 |
마쓰다이라 슌가쿠 松平春嶽 |
1869.9.16[76] | 1869.9.29 |
2대 |
다테 무네나리 伊達宗城 |
1869.10.16 | 1871.6.14[77] |
민부경 |
오키 다카토 大木喬任 |
1870.7.10 | 1871.9.11[78] |
3대 |
오쿠보 도시미치 大久保利通 |
1871.8.13 | 1873.10.12 |
4대 |
오쿠마 시게노부 大隈重信 |
1873.10.25 | 1880.2.28[79] |
5대 |
사노 쓰네타미 佐野常民 |
1880.2.28 | 1881.10.21 |
6대 |
마쓰카타 마사요시 松方正義 |
1881.10.21 | 1885.12.22 |
내무경은 내무성의 수장으로 근대적 내각제가 성립되기 전 일본의 실권자 기능을 했다. 참고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0px" |
<rowcolor=#ffffff> 내무경 (1873년~1885년) | |||||||
초대 오쿠보 도시미치 |
2대 기도 다카요시 |
3대 오쿠보 도시미치 |
||||||
4대 이토 히로부미 |
5대 오쿠보 도시미치 |
6대 이토 히로부미 |
||||||
7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
8대 야마다 아키요시 |
9대 야마가타 아리토모 |
}}}{{{#!wiki style="margin: -6px -1px -10px" | <rowcolor=#ffffff> 내무대신 (1885년~1947년) | ||||
초대 야마가타 아리토모 |
임시대리·5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
초대 야마가타 아리토모 |
||||||
2·14대 사이고 주도 |
3대 시나가와 야지로 |
4대 소에지마 다네오미 |
임시대리·5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
6대 고노 도가마 |
||||
7대 이노우에 가오루 |
8대 노무랴 야스시 |
9·12·19대 요시카와 아키마사 |
10·13대 이타가키 다이스케 |
11대 가바야마 스케노리 |
||||
9·12·19대 요시카와 아키마사 |
10·13대 이타가키 다이스케 |
2·14대 사이고 주도 |
15대 스에마쓰 겐초 |
16대 우츠미 타다카츠 |
||||
17대 고다마 겐타로 |
18대 가쓰라 다로 |
9·12·19대 요시카와 아키마사 |
20대 기요우라 게이고 |
21·23·25대 하라 다카시 |
||||
22대 히라타 도스케 |
21·23·25대 하라 다카시 |
24·27대 오우라 가네타케 |
21·23·25대 하라 다카시 |
26·28대 오쿠마 시게노부 |
||||
24·27대 오우라 가네타케 |
26·28대 오쿠마 시게노부 |
29대 이치키 기토쿠로 |
30·34대 고토 신페이 |
31·33·35대 미즈노 렌타로 |
||||
32대 도코나미 다케지로 |
31·33·35대 미즈노 렌타로 |
30·34대 고토 신페이 |
31·33·35대 미즈노 렌타로 |
|||||
36대 와카쓰키 레이지로 |
37대 하마구치 오사치 |
38·44대 스즈키 기사부로 |
39대 다나카 기이치 |
|||||
40대 모치즈키 게이스케 |
41대 아다치 겐조 |
42대 나카하시 토쿠고로 |
43대 이누카이 쓰요시 |
|||||
38·44대 스즈키 기사부로 |
45대 야마모토 타츠오 |
46대 고토 후미오 |
47대 우시오 시게노스케 |
48대 카와라다 카키치 |
||||
49대 바바 에이이치 |
50대 스에츠구 노부마사 |
51대 기도 고이치 |
52대 오하라 나오시 |
53대 코다마 히데오 |
||||
54대 야스이 에이지 |
55대 히라누마 기이치로 |
56대 타나베 하루미치 |
57대 도조 히데키 |
58대 우자와 미치오 |
||||
59대 안도 기사부로 |
60대 오다치 시게오 |
61대 아베 겐키 |
62대 야마자키 이와오 |
63대 호리키리 젠지로 |
||||
64대 미츠치 추조 |
65대 오무라 세이이치 |
66대 우에하라 에츠지로 |
임시대리 가타야마 데쓰 |
67대 키무라 코자에몬 |
||||
폐지 | ||||||||
섭관 ·
원정 ·
헤이케 ·
가마쿠라 ·
무로마치 오다 · 도요토미 · 에도 · 내무경 · 총리 |
}}}}}}}}} |
<rowcolor=#ffffff> 대수 | 이름 | 임기시작 | 임기종료 |
1대 |
오쿠보 도시미치 大久保利通 |
1873.11.29 | 1874.2.14 |
2대 |
기도 다카요시 木戸孝允 |
1874.2.14 | 1874.4.27 |
3대 |
오쿠보 도시미치 大久保利通 |
1874.4.27 | 1874.8.2 |
4대 |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
1874.8.2 | 1874.11.28 |
5대 |
오쿠보 도시미치 大久保利通 |
1874.11.28 | 1878.5.15 |
6대 |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
1878.5.15 | 1880.2.28 |
7대 |
마쓰카타 마사요시 松方正義 |
1880.2.28 | 1881.10.21 |
8대 |
야마다 아키요시 山田顕義 |
1881.10.21 | 1883.12.12 |
9대 |
야마가타 아리토모 山縣有朋 |
1883.12.12 | 1885.12.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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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시대| 메이지 시대 ]]
|
|||
<rowcolor=#C3C965>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
이토 히로부미 | 구로다 기요타카 | 야마가타 아리토모 | 마쓰카타 마사요시 | |
<rowcolor=#c3c965> 제5대 | 제6대 | 제7대 | 제8대 | |
이토 히로부미 | 마쓰카타 마사요시 | 이토 히로부미 | 오쿠마 시게노부 | |
<rowcolor=#C3C965> 제9대 | 제10대 | 제11대 | 제12대 | |
야마가타 아리토모 | 이토 히로부미 | 가쓰라 다로 | 사이온지 긴모치 | |
<rowcolor=#C3C965> 제13대 | 제14대 | |||
가쓰라 다로 | 사이온지 긴모치 | |||
[[다이쇼 시대| 다이쇼 시대 ]]
|
||||
<rowcolor=#C3C965> 제14대 | 제15대 | 제16대 | 제17대 | |
사이온지 긴모치 | 가쓰라 다로 | 야마모토 곤노효에 | 오쿠마 시게노부 | |
<rowcolor=#C3C965> 제18대 | 제19대 | 제20대 | 제21대 | |
데라우치 마사타케 | 하라 다카시 | 다카하시 고레키요 | 가토 도모사부로 | |
<rowcolor=#C3C965> 제22대 | 제23대 | 제24대 | 제25대 | |
야마모토 곤노효에 | 기요우라 게이고 | 가토 다카아키 | 와카쓰키 레이지로 | |
[[쇼와 시대| 쇼와 시대
전전 ]]
|
||||
<rowcolor=#C3C965> 제25대 | 제26대 | 제27대 | 제28대 | |
와카쓰키 레이지로 | 다나카 기이치 | 하마구치 오사치 | 와카쓰키 레이지로 | |
<rowcolor=#C3C965> 제29대 | 제30대 | 제31대 | 제32대 | |
이누카이 쓰요시 | 사이토 마코토 | 오카다 게이스케 | 히로타 고키 | |
<rowcolor=#C3C965> 제33대 | 제34대 | |||
하야시 센주로 | 고노에 후미마로 | |||
[[쇼와 시대| 쇼와 시대
전시 ]]
|
||||
<rowcolor=#C3C965> 제34대 | 제35대 | 제36대 | 제37대 | |
고노에 후미마로 | 히라누마 기이치로 | 아베 노부유키 | 요나이 미쓰마사 | |
<rowcolor=#C3C965> 제38·39대 | 제40대 | 제41대 | 제42대 | |
고노에 후미마로 | 도조 히데키 | 고이소 구니아키 | 스즈키 간타로 | |
[[쇼와 시대| 쇼와 시대
전후 ]]
|
||||
<rowcolor=#C3C965> 제42대 | 제43대 | 제44대 | 제45대 | |
스즈키 간타로 | 시데하라 기주로 | 요시다 시게루 | ||
<rowcolor=#C3C965> 제46대 | 제47대 | 제48-51대 | 제52-54대 | |
가타야마 데쓰 | 아시다 히토시 | 요시다 시게루 | 하토야마 이치로 | |
<rowcolor=#C3C965> 제55대 | 제56·57대 | 제58-60대 | 제61-63대 | |
이시바시 단잔 | 기시 노부스케 | 이케다 하야토 | 사토 에이사쿠 | |
<rowcolor=#C3C965> 제64·65대 | 제66대 | 제67대 | 제68·69대 | |
다나카 가쿠에이 | 미키 다케오 | 후쿠다 다케오 | 오히라 마사요시 | |
<rowcolor=#C3C965> 제70대 | 제71-73대 | 제74대 | ||
스즈키 젠코 | 나카소네 야스히로 | 다케시타 노보루 | ||
[[헤이세이 시대| 헤이세이 시대 ]]
|
||||
<rowcolor=#C3C965> 제74대 | 제75대 | 제76·77대 | 제78대 | |
다케시타 노보루 | 우노 소스케 | 가이후 도시키 | 미야자와 기이치 | |
<rowcolor=#C3C965> 제79대 | 제80대 | 제81대 | 제82·83대 | |
호소카와 모리히로 | 하타 쓰토무 | 무라야마 도미이치 | 하시모토 류타로 | |
<rowcolor=#C3C965> 제84대 | 제85·86대 | 제87-89대 | 제90대 | |
오부치 게이조 | 모리 요시로 | 고이즈미 준이치로 | 아베 신조 | |
<rowcolor=#C3C965> 제91대 | 제92대 | 제93대 | 제94대 | |
후쿠다 야스오 | 아소 다로 | 하토야마 유키오 | 간 나오토 | |
<rowcolor=#C3C965> 제95대 | 제96-98대 | |||
노다 요시히코 | 아베 신조 | |||
[[레이와 시대| 레이와 시대 ]]
|
||||
<rowcolor=#C3C965> 제98대 | 제99대 | 제100·101대 | 제102·103대 | |
아베 신조 | 스가 요시히데 | 기시다 후미오 | 이시바 시게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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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c3c965> 대수 | 이름 | 임기 시작 | 임기 종료 | 재임기간 | 비고 |
메이지 시대 | |||||
1대 |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1차) |
1885.12.22. | 1888.4.30. | 2년 130일 |
역대 최연소 총리 (44세/1841년생) 역대 최장 재임 4위[80] |
2대 |
구로다 기요타카 黒田清隆 |
1888.4.30. | 1889.10.25. | 1년 178일 | |
권한대행 |
산조 사네토미 三條實美 |
1889.10.25. | 1889.12.24. | 내대신으로서 총리 권한대행 | |
3대 |
야마가타 아리토모 山縣有朋 (1차) |
1889.12.24. | 1891.5.6. | 1년 133일 | 육군 출신 |
4대 |
마쓰카타 마사요시 松方正義 (1차) |
1891.5.6. | 1892.8.8. | 1년 95일 | |
5대 |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2차) |
1892.8.8. | 1896.8.31. | 4년 23일 | |
권한대행 |
구로다 기요타카 黒田清隆 (2차) |
1896. 8.31. | 1896.9.18. | 추밀원 의장으로서 총리 권한대행 | |
6대 |
마쓰카타 마사요시 松方正義 (2차) |
1896.9.18. | 1898.1.12. | 1년 116일 | |
7대 |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3차) |
1898.1.12. | 1898.6.30. | 169일 | |
8대 |
오쿠마 시게노부 大隈重信 (1차) |
1898.6.30. | 1898.11.8. | 131일 | |
9대 |
야마가타 아리토모 山縣有朋 (2차) |
1898.11.8. | 1900.10.19. | 1년 345일 | 육군 출신 |
10대 |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4차) |
1900.10.19. | 1901.5.10. | 203일 | |
권한대행 |
사이온지 긴모치 西園寺公望 |
1901.5.10. | 1901.6.2. |
추밀원 의장으로서 총리 권한대행 공작 출신 |
|
11대 |
가쓰라 다로 桂太郎 (1차) |
1901.6.2. | 1906.1.7. | 4년 220일 |
육군 출신 역대 최장 재임 2위[81] |
12대 |
사이온지 긴모치 西園寺公望 (1차) |
1906.1.7. | 1908.7.14. | 2년 189일 | 공작 출신 |
13대 |
가쓰라 다로 桂太郎 (2차) |
1908.7.14. | 1911.8.30. | 3년 47일 | 육군 출신 |
14대 |
사이온지 긴모치 西園寺公望 (2차) |
1911.8.30. | 1912.12.21. | 1년 114일 | 공작 출신 |
다이쇼 시대 | |||||
14대 |
사이온지 긴모치 西園寺公望 (2차) |
1911.8.30. | 1912.12.21. | 1년 114일 | 공작 출신 |
15대 |
가쓰라 다로 桂太郎 (3차) |
1912.12.21. | 1913.2.20. | 61일 | 육군 출신 |
16대 |
야마모토 곤노효에 山本権兵衛 (1차) |
1913.2.20. | 1914.4.16. | 1년 55일 | 해군 출신 |
17대 |
오쿠마 시게노부 大隈重信 (2차) |
1914.4.16. | 1916.10.9. | 2년 177일 | 제1차 세계 대전 |
18대 |
데라우치 마사타케 寺内正毅 |
1916.10.9. | 1918.9.29. | 1년 355일 |
육군 출신 초대 조선 총독 |
19대 |
하라 다카시 原敬 |
1918.9.29. | 1921.11.4. | 3년 37일 |
첫
입헌정우회 정당내각 구성 암살됨 |
권한대행 |
우치다 고사이 内田康哉 (1차) |
1921.11.4. | 1921.11.13. | 외무대신으로서 총리 권한대행 | |
20대 |
다카하시 고레키요 高橋是清 |
1921.11.13. | 1922.6.12. | 211일 |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
21대 |
가토 도모사부로 加藤友三郎 |
1922.6.12. | 1923.8.24. | 1년 73일 | 해군 출신 |
권한대행 |
우치다 고사이 内田康哉 (2차) |
1923.8.25. | 1923.9.2. | 외무대신으로서 총리 권한대행 | |
22대 |
야마모토 곤노효에 山本権兵衛 (2차) |
1923.9.2. | 1924.1.7. | 127일 | 해군 출신 |
23대 |
기요우라 게이고 清浦奎吾 |
1924.1.7. | 1924.6.11. | 156일 | 2차 호헌운동 |
24대 |
가토 다카아키 加藤高明 |
1924.6.11. | 1926.1.28. | 1년 231일 | 다이쇼 데모크라시 |
25대 |
와카쓰키 레이지로 若槻禮次郎 (1차) |
1926.1.30. | 1927.4.20. | 1년 80일 |
1월 28일부터 동월 30일까지는 내무대신으로서 총리 권한대행 장제스의 북벌 |
쇼와 시대 | |||||
25대 |
와카쓰키 레이지로 若槻禮次郎 (1차) |
1926.1.30. | 1927.4.20. | 1년 80일 |
1월 28일부터 동월 30일까지는 내무대신으로서 총리 권한대행 장제스의 북벌 |
26대 |
다나카 기이치 田中義一 |
1927.4.20. | 1929.7.2. | 2년 74일 |
입헌정우회 정권 육군 출신 장작림 폭살사건으로 인한 불명예 사임 |
27대 |
하마구치 오사치 濱口雄幸 |
1929.7.2. | 1930.11.14. | 1년 235일 |
입헌민정당 정권 암살 미수로 부상을 입어 1930년 11월 14일부터 1931년 3월 10일까지 외무대신 시데하라 기주로가 총리 권한대행 |
권한대행 |
시데하라 기주로 幣原 喜重郎 |
1930.11.14. | 1931.3.10. | 외무대신으로서 116일간 총리 권한대행 | |
27대 |
하마구치 오사치 濱口雄幸 |
1930.3.10. | 1931.4.14. | 35일[82] |
입헌민정당 정권 암살 미수로 부상을 입어 1930년 11월 14일부터 1931년 3월 10일까지 외무대신 시데하라 기주로가 총리 권한대행 |
28대 |
와카쓰키 레이지로 若槻禮次郎 (2차) |
1931.4.14. | 1931.12.13. | 243일 |
입헌민정당 정권 만주사변으로 인한 사임 |
29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