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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 ([ruby(執權, ruby=しっけん)])
1. 개요
가마쿠라 시대에 정이대장군(쇼군)을 대신하여 막부의 정무를 총괄하던 직책. 한마디로 가마쿠라 막부의 실권자. 헤이안 시기 조정의 관백, 무로마치의 간레이, 에도의 다이로처럼 막부의 재상직이지만, 후술하듯 본래 무관직으로 시작했다 군주가 된 쇼군처럼 특정 가문이 독점하고 중앙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인 권력을 확립하게 되면서 사실상의 전제군주화 되었다.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사후 요리토모의 장인 호조 토키마사가 임명된 것이 시초로 이후 호조씨에서 대대로 계승했으며, 요시토키의 대에는 싯켄이 실권을 장악하여 실질적인 막부의 수장이 되었다. 이때의 호조씨 가문은 센코쿠 시대의 호조 가문( 후호조씨)과는 다른 가문이다.
즉, 일본의 기존 국가원수인 천황을 대신해 통치하는 쇼군을 대신해 통치하는 싯켄이 일본을 대대로 다스리게 된 셈. 가마쿠라 막부 초중기까지는 그래도 호조씨가 쇼군의 직속가신인 어가인의 1인자로서 정무 총괄직인 싯켄직을 세습해 막부를 지도하는 정도였지만, 호조 도키무네가 몽고 습래를 막은 후부터는 호조씨의 위상이 크게 올라가 사실상 다른 어가인 위에 군림하는 모양새로 변모하였다. 그러나 호조씨의 위상이 공고해진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싯켄이라는 지위 자체의 힘은 유명무실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호조씨가 몽골의 침공을 막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전후 처리에서 심각한 문제점이 있었다. 먼저 막부는(실질적으로 호조씨) 방어를 위해 많은 돈을 썼고 이 돈은 무사들에게 빌려 조달했지만 문제는 돈을 빌려주거나 참전한 무사들에게 보상을 못해줬다는 것이다. 땅을 주든 돈을 주든 어떻게 보상을 해야 했는데 방어전이다 보니 새로 얻은 땅은 없었고 다른 대체 보상마저 못해주면서 전쟁에 참여한 무사들은 막부에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신뢰를 잃은 무사들이 더이상 막부의 은상을 기대하지 않게 되자 호조씨 역시 싯켄이라는 막부의 역직에 기댈 이유가 사라진 셈이다...라고 보통 설명되는데, 현 일본사학계에서 은상 문제로 불만을 가졌다는 설은 이미 논파되었다. 은상 문제가 있었던 것은 맞으나, 이 은상 문제 및 정이대장군과 싯켄 간의 권위 문제로 인해 충돌한 시모츠키 소동(霜月騷動, 1285)의 결과 정이대장군 측 인물이였던 아다치 야스모리 및 그 일파가 모두 숙청되고 그들이 가진 영지를 무사들에게 분배되면서 은상 문제는 실질적으로 일단락되었고, 이후 무사들이 은상 문제로 인해 불만을 품었다거나 하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어쨌든 이 이후로 호죠씨의 위세가 실질적으로 막부를 대표할 정도로 성장한 것은 사실이기에, 이후부터는 싯켄이라는 막부의 공적 지위를 차지한 사람이 아니라, 호조씨 종가의 가주인 도쿠소(得宗)가 사실상 최고권력자가 되었다. 호조씨의 권위가 공고해진 후부터는 싯켄이 퇴임하고 아들이나 친척에게 싯켄직을 넘겨준 후 자신이 상왕정치를 하는 경우가 반복된 것이다.
다만 호조 도키무네 사후 어린 도쿠소의 즉위 반복으로 호조씨의 가신인 어내인들의 영향력이 더 커지기도 했다. 하지만 도쿠소가 가신들에게 모든 권력을 빼앗긴 것은 아니며, 가신을 숙청하고 주도권을 되찾기도 하였다.
130년 내외에 싯켄이 16명이나 있었는데, 이는 상당히 특이한 것으로 종가에서 가주가 요절하는 경우가 많아 후계자가 성년이 될때까지의 공백을 친척들이 채우는 일이 자주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도키무네 이후에는 이런 현상이 반복되어, 호조씨의 약화로 이어졌다.
고다이고 천황이 가마쿠라 막부를 무너트리고, 고대 시절처럼 천황이 직접 통치하는 나라로 바꾸기 위해 겐무 신정을 시행하면서 싯켄직은 쇼군, 막부, 관백 등 천황의 권력을 제한하는 관직과 기구를 죄다 폐지하는 바람에 끊겼다.
2. 역대 싯켄
가마쿠라 막부 싯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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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군 ( 미야쇼군 계보) · 싯켄 | }}}}}}}}} |
가마쿠라 막부의 역대 싯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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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재임기간 | 비고 | |
1대 | 호조 도키마사 (北条 時政) | 1203 ~ 1205 |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장인 |
2대 | 호조 요시토키 (北条 義時) | 1205 ~ 1224 | 요리토모의 처남. 조큐의 난 제압으로 전권 장악 |
3대 | 호조 야스토키 (北条 泰時) | 1224 ~ 1242 | 일본 최초의 무가법(武家法)인 고세이바이시키모쿠(御成敗式目)를 제정 |
4대 | 호조 쓰네토키 (北条 経時) | 1242 ~ 1246 | |
5대 | 호조 도키요리 (北条 時頼) | 1246 ~ 1256 | 1256년 출가. 실권은 계속 장악.[1] 회국 전설[2] |
6대 | 호조 나가토키 (北条 長時) | 1256 ~ 1264 | 고쿠라쿠지류 호조씨 출신. |
7대 | 호죠 마사무라 (北条 政村) | 1264 ~ 1268 | 마사무라류 호조씨 출신. |
8대 | 호조 도키무네 (北条 時宗) | 1268 ~ 1284 |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
9대 | 호조 사다토키 (北条 貞時) | 1284 ~ 1301 | 도키무네의 아들, 다카토키의 아버지.[3] |
10대 | 호조 모로토키 (北条 師時) | 1301 ~ 1311 | 무네마사류 호조씨 출신. |
11대 | 호조 무네노부 (北条 宗宣) | 1311 ~ 1312 | 오사라기류 호조씨 출신. |
12대 | 호조 히로토키 (北条 煕時) | 1312 ~ 1315 | 마사무라류 호조씨 출신. |
13대 | 호조 모토토키 (北条 基時) | 1315 | 고쿠라쿠지류 호조씨 출신. |
14대 | 호조 다카토키 (北条 高時) | 1316 ~ 1326 | 1326년 자리에서 물러나고 출가하나 실권은 계속 보유.[4] 실질적 최후 싯켄.[5] |
15대 | 호조 사다아키 (北条 貞顕) | 1326 | 가나자와류 호조씨 출신. 10일간 재임.[6][7] |
16대 | 호조 모리토키 (北条 守時) | 1327 ~ 1333 | 아카하시류 호조씨 출신. 호조가 멸망 며칠 전에 사망.[8] |
도쿠소 겸임은 볼드체로 표시.
3. 같이보기
[1]
1263년에 죽었다. 8대 집권 도키무네의 아버지로 도키무네를 다룬 NHK 사극에서
와타나베 켄이 이 인물 역을 맡았다.
[2]
廻国伝説. 도키요리는 후대의
미토 고몬 비슷하게 백성의 생활을 살피기 위해 나라를 돌며 암행했다는 전설이 있다.
[3]
도키무네가 34세로 죽어 12세로 싯켄이 되었고 이때 권력 대부분이 가신들에게 넘어갔다. 성년이 된 후 초기에는 주도적인 정치를 시도했으나 여러 악재로 정치적 실패를 거듭하자 결국 실의에 빠져 정사에 관여하지 않았다. 할아버지 도키요리처럼 회국전설이 있기는 하나 이미 막부의 권위가 떨어져서 큰 효과는 없었던 듯하다. 그래도 호조씨를 끝낸 아들 다카토키만큼은 평이 나쁘진 않다.
[4]
뒤의 두 사람은 바지사장이고, 다카토키가 1333년 패하여 자살하면서 가마쿠라 막부도 호조가문도 끝이 난다. 기존에는 나가사키 엔키(長崎円喜)가 실질적으로 실권을 가지고 있었다 보는 시각이 우세했으나, 나가사키 가문이 어내인들의 수장격으로서 막부 중요 요직에 배치되어 큰 힘을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어찌 되었건 그 직위의 세습도 도쿠소의 권한으로 임명되는 것이기에 현재는 다카토키가 바지사장은 아니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진다.
[5]
그의 차남이 호조 가문 재흥을 위해
나카센다이의 난을 일으킨
호조 도키유키이다.
[6]
다카토키가 갑작스래 출가하자 차석직이었던 렌쇼였기에 자연스래 싯켄직을 계승했다. 허나 반대파에서 극단적인 위협을 가한 탓에(다카토키의 어머니 카쿠카이니는 아예 살해 위협을 가했다.) 버티지 못하고 10일만에 사퇴와 출가를 선언했다.
[7]
사다아키 자신은 별로 특기할 게 없지만, 그 아들인 호조 사다유키는 특기할 만한 인물이다. 멸망해가는 호조가를 지키기 위해 제법 잘 싸웠으며, 호조가가 끝난 1333년 음력 5월 22일 다카토키는 그를 로쿠하라[六波羅, ろくはら\] 탐제(探題, たんだい)로 임명했는데 일설에는 싯켄으로 임명했다고도 한다. 어쨌든 그날 사다아키는 싸우다 죽고 다카토키 등은 자살해서 의미는 없으나, 사다유키가 17대 싯켄이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8]
여동생이
아시카가 타카우지의 아내였으나 그녀는 오빠를 배신하고 남편에게 붙었다. 호조가가 망하기 며칠 전 전사 또는 자결했다. 그래서 위의 사다아키의 아들 사다유키가 죽기 얼마 전 싯켄직을 수행했을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