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소비에트 연방 제4대 프라우다 편집장
니콜라이 부하린 Никола́й Буха́рин | Nikolai Bukhar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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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부하린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Буха́рин Nikolai Ivanovich Bukhar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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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8년 10월 9일 | ||
러시아 제국
모스크바현 모스크바 (現 러시아 중앙 연방관구 모스크바 연방시) |
|||
사망 | 1938년 3월 15일 (향년 49세) | ||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콤무나르카 사격장 | |||
묘소 | 모스크바 콤무나르카 사격장 묘지 | ||
재임기간 | 초대 프라우다 편집장 | ||
1917년 ~ 1929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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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부모 |
아버지 이반 가브릴로비치 부하린 어머니 류보피 이바노브나 부하리나[1] |
|
배우자 | 안나 미하일로브나 부하리나[2] | ||
자녀 | 2명 | ||
학력 | 모스크바 황립대학교 법학부 (경제학 / 제적) | ||
종교 | 무종교 ( 무신론) | ||
소속 정당 |
[[소련 공산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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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의 마르크스주의 혁명가, 정치인, 경제학자이자 공산주의자 중에는 드물게 기계론자이고 볼셰비키의 일원으로 블라디미르 레닌과 함께 러시아 혁명을 이끌었으나, 이오시프 스탈린 집권 이후 대숙청에 휘말려 처형당했다.2. 생애
2.1. 혁명 이전
초등학교 교사였던 부모 아래 출생했고 러시아 최고의 대학이었던 모스크바 대학에 진학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신을 믿지 않았다. 1911년 부하린은 잠시 투옥된 뒤 아르한겔스크의 오네가로 추방되었으나 곧 하노버로 탈출했다 . 그는 1년 동안 독일에 머물다가 1912년 크라쿠프를 방문하여 블라디미르 레닌을 처음 만났다. 망명 기간 동안 그는 교육을 계속했으며 20대에 주요 볼셰비키 이론가로 자리매김하는 데 한몫을 할 여러 권의 책을 썼다. 그의 저작 <제국주의와 세계경제>는 레닌에게 영향을 주었고, 레닌은 그의 더 잘 알려진 저작인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에서 그 내용을 차용했다. 그와 레닌은 이론적 문제뿐만 아니라 유럽 좌파와 부하린의 친밀함, 반국가주의에 대해서도 종종 뜨거운 논쟁을 벌였다. 부하린은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자들 과 레닌주의 입장 에서 벗어난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Aleksandr Bogdanov)와 같은 이단적 마르크스주의 경제 이론가들의 저작에 관심을 가졌다. 또한 1913년 빈에 있는 동안 그는 레닌의 요청에 따라 조지아 볼셰비키 이오시프 스탈린이 "마르크스주의와 민족 문제" 라는 기사를 쓰는 것을 도왔다.1916년 10월 뉴욕시에 거주하는 동안 부하린은 레프 트로츠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와 함께 신문<새로운 세상>을 편집했다. 1917년 1월 트로츠키가 뉴욕에 도착했을 때 부하린은 그를 맞이한 첫 번째 이민자였다.
2.2. 혁명 이후
1917년 2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세계 각국에서 망명한 혁명가들이 조국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트로츠키는 1917년 3월 27일 뉴욕을 떠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갔다. 부하린은 4월 초 뉴욕을 떠나 일본을 거쳐 러시아로 돌아와 1917년 5월 초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발을 빼서 평화를 가져오겠다는 레닌의 약속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볼셰비키의 당원 수는 1917년 2월 2만 4천 명에서 1917년 10월 20만 명으로 극적으로 증가했다. 모스크바로 돌아온 부하린은 모스크바 시위원회 위원직을 다시 맡았으며 당의 모스크바 지역국 위원이 되었다.1917년 10월 10일, 부하린은 다른 모스크바 볼셰비키인 안드레이 부브노프와 그리고리 소콜니코프와 함께 중앙위원회에 선출되었다. 볼셰비키는 이전에 모스크바에서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에 비헤 소수였으나, 1917년 9월에는 볼셰비키가 모스크바에서 다수를 차지했다. 모스크바 지역국은 모스크바 주변 13개 중앙 지방 각각의 당 조직을 책임졌다. 이 지방은 러시아 전체 인구의 37%, 볼셰비키 당원의 20%를 차지했다.
10월 혁명 동안 페트로그라드에서의 트로츠키처럼 모스크바의 혁명적 정치를 장악한 사람은 없었지만, 부하린은 확실히 모스크바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였다. 10월 혁명 동안 부하린은 모스크바 소비에트의 혁명 법령 초안을 작성하고, 도입하고, 옹호했다. 부하린은 그 후 페트로그라드의 혁명 정부에 보낸 보고서에서 모스크바 소비에트를 대표했다. 10월 혁명 이후 부하린은 당 신문인 프라우다의 편집자가 되었다.
이 시기 부하린은 좌파공산주의자로써 세계혁명의 도래를 열렬히 믿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러시아의 혼란 속에서 동맹국과의 평화 협상이 임박했을 때 그는 외국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무장하도록 선동하랴고 하면서 전쟁의 지속을 요구했다. 그는 동맹국들에 대해 비타협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방 협상국과의 우애 관계도 거부했다. 부하린은 레닌이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서명하기로한 결정에 격렬하게 반대하면서 좌파공산주의자들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이 전시 권력 투쟁에서 레닌의 체포는 1918년 그들과 좌파 사회주의 혁명가들 에 의해 심각하게 논의되기도 했다. 부하린은 1924년 프라우다 기사에서 이 사실을 폭로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분열되어 온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
1921년에 그는 자신의 입장을 바꾸고 소련 국가의 생존과 강화를 미래 세계 혁명의 보루로 삼는 레닌의 강조를 받아들였다. 그는 신경제정책의 가장 중요한 지지자가 되었다. 좌익 공산주의자들이 사회주의로부터의 후퇴로 간주한 NEP는 화폐 경제를 다시 도입하고 농업, 소매업, 경공업에서 개인 소유와 자본주의 관행을 허용하는 한편 국가는 중공업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했다.
2.2.1. 스탈린을 돕다
민족위원이었던 이오시프 스탈린의 "마르크스주의와 민족문제"의 저술을 돕기도 하였다.2.2.2. 신경제정책
Всему крестьянству, всем его слоям нужно сказать: Обогащайтесь, накапливайте, развивайте своё хозяйство!
(모든 농민들은 이 말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부자 되시오, 재산을 많이 쌓으시오, 경제를 발전시키시오!)
1925년 부하린의 발언. 흔히 "농민 여러분, 부자 되시오!"로 알려져 있다.
부하린의 완전한 창작은 아니고, 그 유명한 공산당 선언 서두에서 마르크스에게 "구 유럽의 세력"의 대표 인물로 지목당한 것으로 유명한 프랑수아 기조가 1843년 국회에서 한 대중 연설의 일부에서 가져왔다.[3][4]
(모든 농민들은 이 말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부자 되시오, 재산을 많이 쌓으시오, 경제를 발전시키시오!)
1925년 부하린의 발언. 흔히 "농민 여러분, 부자 되시오!"로 알려져 있다.
부하린의 완전한 창작은 아니고, 그 유명한 공산당 선언 서두에서 마르크스에게 "구 유럽의 세력"의 대표 인물로 지목당한 것으로 유명한 프랑수아 기조가 1843년 국회에서 한 대중 연설의 일부에서 가져왔다.[3][4]
레프 트로츠키가 중국에서의 대참사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1927년의 정점으로 아예 출당된 후에는 트로츠키, 레프 카메네프와 손잡았다가 마찬가지로 몰락한 그리고리 지노비예프의 뒤를 이어 1926년 코민테른 서기장이 되어 세계 공산주의 운동에서 큰 입김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때 스탈린과 맹우로써 이두정치를 지휘하였으나, 스탈린을 비판하면서 농업집단화와 중화학공업화의 급격한 추진 대신 중화학공업의 점진적 추진 및 농업과 경공업 성장과 연계한 경제개발을 당내에서 강하게 주장했다.[5]
트로츠키의 세계혁명론, 즉 사회주의 열강이 동맹으로 존재하지 않는 한 소련은 결국 붕괴할 것이란 자기실현적 예언만큼이나 부하린의 식견도 사후 해석으로는 그리 틀리지는 않았다. 실제로 소련에서는 1930년대 대기근으로 엄청난 인명피해를 입었고 농촌사회의 빠른 붕괴로 인한 과도한 도시 인구유입으로 노동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상황 또한 발생했다. 스탈린, 트로츠키, 부하린 3인방 모두 각자의 근거를 가지고 나름대로의 비전을 제시한 셈이었고 그 비전을 추진하기 위해 친구들까지 냉혹하게 내치는 스탈린의 정치력이 빛을 발했던 것.
많은 트로츠키파들이 스탈린의 급진적 중공업화를 지지하여 전향한 뒤 부하린의 주장은 당내에서 큰 힘을 얻지 못했고, 결국 부하린은 권력을 빼앗겨 1929년 정치국에서 축출되고 자아비판을 하게 된다.
1934년에 복권되었으나 체포당하기 전까지 실권 없는 한직만을 전전했다. 이즈베스티아(Izvestia) 의 편집자로 있는 기간 동안은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정치력을 동원해 오시프 만델시탐을 보호하거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글을 게시하며 그와 우정을 쌓기도 하였다.
2.3. 죽음
1937년 1월에 국가전복혐의로 체포되었다. 이후 겐리흐 야고다, 알렉세이 리코프, 니콜라이 크레스틴스키, 크리스티안 라콥스키[6]와 함께 우익행위 및 트로츠키주의자로 사형판결이 내려진다.[7] 혐의는 "레닌과 스탈린을 암살하려 했고, 막심 고리키를 독살했으며, 소련의 영토를 제국주의 국가에게 할양하려 하였다"는 누명이었다.[8]사실 부하린에겐 목숨을 건질 기회가 있었다. 1936년 2월 즈음부터 부하린은 마르크스의 원고를 얻기 위해 프랑스에 있었는데 이미 그때부터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고 있었다고 한다. 주위 사람들에게 아마 스탈린이 날 처형할 거라며 공공연하게 이야기하고 다녔다고. 그래서 해외의 공산주의자들이 부하린에게 소련으로 돌아가지 말고 망명 생활을 할 것을 강력하게 권유했지만 부하린 본인이 "나는 소련이 아닌 국가에서는 살 수 없다"는 식으로 그 권유를 거절해 버린다. 다만 부하린의 프랑스 출장은 스탈린의 명령으로 이루어진 일이었기에 그 상황 자체가 스탈린이 쳐놓은 함정이라는 말도 있다. 스탈린은 결국 부하린이 소련으로 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고 부하린이 처형당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 프랑스로 보냈다는 뜻.
몰로토프 소련 외무장관은 "부하린은 고문당한 적이 없고 스스로 모든 죄목을 자백했다"고 말했으나 후에 밝혀진 내용으로는 부인과 아들에 대한 위협과 "신체적 영향력 행사"를 3개월 동안 버텨낸 끝에 정신적으로 무너져 허위사실이 적시된 진술서에 서명을 했다고 한다.[9] 부하린의 죄목과 재판에 대한 신빙성으로 인해 해외의 공산주의자들이 재심을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부하린은 수감된 이후, 스탈린에게 지속적으로 편지를 보내며 협상을 시도하였다. 자신을 결백을 주장하는 편지에서 시작하여 추방시켜주면 반트로츠키 공작을 도와주겠다는 제안에 못 믿겠으면 굴라크로라도 보내면 그곳에서라도 자신의 능력으로 국가에 봉사하겠다는 제안, 마지막에 이르어서는 죽일거면 최소한 쏴죽이는 대신에 모르핀으로 자살하게 해달라고 애원하기에 이르었으나 스탈린은 이 모두를 무시하였다. 결국 1938년 3월 15일 부하린은 스탈린에게 마지막으로 스탈린이 왜 자신의 죽음을 필요로 하는지 의문을 표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으며, 모스크바 인근 콤무나르카 사격장에서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
스탈린은 부하린의 아들과 아내를 처벌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이후 약속을 깨고 아들과 아내는 물론 이혼한 전아내들까지도 굴라크로 보내버렸다. 첫번째 아내는 굴라크에서 사망하였으며 두번째 아내는 살아남았으나 평생 PTSD에 시달려야 했다. 아들과 셋째 아내는 살아남는데 성공했고 부하린의 아내는 당시에는 문서로 남길 수 없어서 암기한 부하린의 유언을 이후 흐루쇼프 집권기에 공개하기도 했다.
부하린이 혁명동지이자 친우였던 스탈린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코바, 왜 나의 죽음을 필요로 하지?"(«Коба, зачем тебе нужна моя смерть?»)[출처]였다. 코바는 스탈린의 애칭 중 하나이다. 스탈린이 죽고서 그의 집무실에서 발견된 3개의 편지 중에 하나라고 한다. 나머지 편지는 레닌의 아내인 나데즈다 크룹스카야과 스탈린이 전화로 심한 다툼을 벌이자 레닌이 스탈린에게 격렬히 화를 낸 내용의 편지와, 티토가 '스탈린 당신이 나 죽이려고 암살자 보내는거 족족 잡아뒀소. 자꾸 그러면 나도 암살자를 보내도록 할 건데, 난 딱 한 명만 보내면 끝날 거요.'라고 저항한 내용의 편지였다.
이에 대해 스탈린과 부하린이 개인적으로 계파 투쟁 이전까지는 친한 친구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부하린의 편지 내용 역시 "내 인생의 가장 큰 실수는 트로츠키와 손을 잡지 않은 것"이라는 지노비예프의 유언이나 "날조하는 스탈린 학파" 등의 저서에서 스탈린을 매독 환자, 강도 등으로 묘사하며 조롱한 트로츠키와는 달리 자신을 왜 굳이 죽이려고 하는지 당혹스러워하는 반응에 가깝다는 점[11], 스탈린이 저 유언장과 별개로 부하린이 옥중에서 집필한 회고록 "늙은 볼셰비키의 편지"의 원고 또한 잘 보관해 놓고 있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스탈린에게 부하린에 대한 어떤 감정이 남았기에 이 편지를 간직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존재한다.[12]
반면 이혼한 가족에게까지 연좌제를 적용했던 점이나 자살하게 해달라는 부하린의 마지막 요청마저 매몰차게 거부했던 점, 처형 방식의 잔혹성에 대한 기록[13]이 존재하는 등 모순이 존재한다. 레닌과 스탈린 등 혁명가에 관한 연구자로 영미에서 일반 독자 사이에서도 유명한 로버트 서비스는 스탈린이 그 편지를 다시 읽고 떨리는 만족을 얻으려 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남겼다.
결국 본심은 스탈린만이 알 것이다.[14]
소련이 망하기 전까지 복권되지 못한 트로츠키[15]와는 다르게 부하린은 1988년 복권되었다. 부하린의 부인 안나 라리나는 88년까지 살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3. 기타
- 소련 내 일반인들에게는 가장 인기가 많은 사람이었다. 레닌이 그에게 너무 자만하지 말라고 지적을 할 정도. 해외에서도 매우 명망이 높아서 대숙청 당시 사형 선고를 받자 많은 해외 지식인들이 "부하린을 사면해달라." 하고 스탈린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높고 말빨도 좋아 레닌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부하린의 출중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항상 레닌에게 깨졌다. 이와 같은 레닌과의 논쟁은 이후 숙청의 빌미가 되었다.
- 레닌은 부하린의 식견을 상당히 높게 평가했으며, 유서에서 차기 지도자 후보 5명 중에 하나로 언급하기도 했다.[16] 하지만 부하린은 기계론적 마르크스주의자였고 레닌은 이에 대해 "당내 최고의 이론가이지만 변증법 이해가 부족하다."라고 비판했다(...). 실제로도 변증법자라기보단 기계론자였다. 심지어 레닌주의의 대원칙인 전위당 중심의 혁명을 부정한 적도 있고, 이로 인해 훗날 부하린주의는 좌파공산주의와 같은 계통으로 분류되기도 했다.[17]
- 부하린은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대한 많은 기여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식물학에도 조예가 깊어서 소련 학술원의 창립 회원이기도 하였다.
- 소련에서 최고의 경제학자였는데, "제국주의와 세계경제"라는 저술을 남겼다.[18] 이후 신경제정책(NEP)의 최고 이론가였다. 허나 스탈린과 중화학 공업에 대한 이견을 보였고 결국 부하린이 자아비판하면서 물러났다. 이와 같은 논쟁은 이후 부하린을 숙청하는 빌미 중 하나로 쓰였다.
- 만화에도 소질이 있어서 혁명 동지들의 캐리커처를 그리기도 했다.
- 부하린은 총 3번 결혼했는데 첫 번째는 사촌 여동생과, 두 번째는 동료 혁명가와 결혼했으나 이혼했다. 세 번째 결혼은 45살에 했는데 19살 여인과 결혼했다. 심지어 먼저 대시한 쪽은 부하린이 아니라 아내였던 안나 쪽이었다! 먼저 러브레터를 건넸다고(...). 스탈린도 재혼 경력이 있었지만 어린 신부와 결혼하는 부하린에게 핀잔을 하기도 했다.
- 부하린의 아내가 기억했던 부하린이 남긴 유언 중 하나는 "동지여 명심하라. 혁명 성공의 그날 동지들이 치켜들 깃발 위엔 나의 피 한 방울도 묻어 있을 것이다."
-
니콜라이 예조프를 끔찍하게도 싫어했다. 부하린은 예조프를 아래와 같이 평했다.
내가 살아온 평생에 예조프만큼 혐오스러운 작자는 보지 못했다. 내가 그를 쳐다볼 때면 난 항상 라스테라예바 거리 광장에서 파라핀에 적신 종이를 고양이의 꼬리에 묶고 불을 붙여놓은 뒤 겁먹은 동물을 보며 즐거워하는 악동을 떠올리게 된다. 나는 예조프 역시 그런 어린 시절을 보냈음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하며 그 외양만 틀릴 뿐 지금 역시 그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니콜라이 부하린이 쓴 "늙은 볼셰비키의 편지(Letter of an Old Bolshevik, 1936)"라는 회고록 중[19]
4. 매체에서
- 헝가리계 영국 소설가 아서 쾨슬러는 부하린의 죽음에서 모티브를 얻어 '한낮의 어둠'을 집필했고 이후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퐁티가 '휴머니즘과 폭력'을 집필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 조지 오웰이 집필한 디스토피아 소설 1984의 등장인물 러더퍼드는 부하린에서 모티브를 얻은 캐릭터이다.[20] 오웰의 다른 소설 동물농장에 등장하는 돼지 스노우볼은 레프 트로츠키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이지만, 부하린도 어느 정도 모티브로 삼았다.
- 게임 Hearts of Iron IV에서는 No Step Back DLC가 있다면 반스탈린 공산주의 노선을 채택할 수 있는데, 이 때 스탈린주의자들과의 내전을 벌이게 된다. 좌익 반대파인 트로츠키 파벌을 선택하면 내전을 피할 수 없지만 부하린이 속한 우익 반대파는 내전 없이 스탈린 암살로 집권할 수도 있으며, 그 경우 국기가 내전기 깃발이 아니라 기존 낫과 망치 국기로 유지된다. 지도자 특성이 기본 스탈린보다는 좋지만 호이 최강 지도자인 풀업 스탈린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선택할 수 있는 우익반대파 지도자 중 알렉세이 리코프가 더 좋은 편이기 때문에 부하린은 플레이어들이 선호하지 않는다. 그리고 운이 따르지 않는다면 장군진도 궤멸 상태가 된다. 대신 어느정도 익숙해지면 장군과 필요한 실무진을 원하는대로 선택해서 살리고[21] 소비재 0프로로 만든 뒤 뿜어져나오는 막강한 생산력으로 공군, 기갑도 남아돌 정도의 산업강국 소련을 전두 지휘할 수도 있으니 호불호의 영역이긴 하다.
- 위 게임의 대체역사 모드인 카이저라이히[22]에선 러시아가 생디칼리슴 국가가 된다면 지도자인 리코프의 뒤를 이어 러시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지도자가 될수있다.[23]
- 또다른 대체역사 모드인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에선 부하린이 권력투쟁에서 승리해서 집권하고 부하린주의가 주류 공산주의가 되었다.[24] 부하린은 농업과 경공업까진 발전시켰으나 스탈린처럼 중공업을 발달시키는데는 실패했고, 이에 따라 중공업이 필요한 군수공업도 망했다. 또 대숙청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당과 군대의 극심한 파벌주의와 기강해이를 해소하지도 못했다. 나치 독일은 불가침 조약없이 유럽을 정복하고 소련을 침공해 분열되고 물자도 부족한 나약한 붉은 군대를 손쉽게 격파했다. 모스크바 함락 이후 아르한겔스크에서 일어난 쿠데타 후 부하린은 행방불명되고 장크트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아스트라한까지 대게르만국의 국가판무관부들이 들어선다. 나머지 구 소련 지역은 쪼개지고 쪼개져 1962년 게임 시작 시점에는 현실역사로 치면 전간기부터 중일전쟁기의 중국대륙마냥 수십개의 군벌들이 할거하며 이런 군벌의 영역들이 독일의 동유럽(+구소련 일부) 점령지와 뒤엉켜있다. 있다. 많은 공산당 잔당들은 부하린주의를 내세우고 있고 딸 부하리나는 코미 공산당 간부로 있으며 지도자가 되어 러시아를 통일할 수 있다.[A]
- 해당 모드의 서브 모드인 The Red Order에선 역으로 인생의 승리자가 되었다. 부하린이 적절하게 위기를 극복하고, 영국과의 교류로 산업 발전을 유지해서 경제가 파멸적인 붕괴를 겪진 않은 상태에서 쿠데타로 집권한 힘러가 통치하는 독일[26]과 독소전을 맞이한다.[27] 비록 고립주의 노선이었던 미국의 지원이 없고, 중공업을 발전시키지 않아서 반격은 지지부진했지만 마찬가지로 고립주의 미국의 지원을 못받은 영국과 프랑스를 제압한 독일을 상대로 선전하며 실제 역사보다 1년 늦게 베를린을 점령하고 히틀러를 법정에 세우면서 승리한다. 이후 미국과 전쟁 중이던 일본을 공격하였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동독과 북유럽 지방을 비롯한 서유럽 일부 ~ 만주까지 이르는 거대한 소비에트 조약인 바이마르 조약을 설립하고 패권진영의 지도자가 되는 쾌거를 이룬다.
- 대체역사 소설 트로츠키와 우리 조선 빨갛게 빨갛게에서는 조선에 공산주의가 종교형태로 퍼지자 농민들을 배부르게 하고 부를 부르는 부하린 도령이라고 숭배받는다. 참고로 트로츠키는 군신, 스탈린은 마귀 엔카베데를 부리는 재앙신이다.
- 대체역사 소설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는 역사의 변화로 삼균주의를 바탕으로한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을 인상적으로 생각하고 안중근과 친하게 지내며 삼균주의 방법론을 도입하여 성과를 거둔다. 그러나 이 때문에 기존 공산주의자들과 갈등을 겪는다.
- 대체역사 소설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한국을 통해 귀국하려다가 한국경찰에 잡히나 부하린의 온건한 성향을 아는 이선의 배려로 황실열차를 타고 귀환하는 대우를 받는다. 그러면서 같이 러시아로 간 여운형과도 만나 서로의 사상에 대해 교류한다.
[1]
혼전성은 이즈마일로바
[2]
세 번째 부인으로, 혼전성은 라리나
[3]
원문은 "enrichissez-vous"(부자 되시오)
[4]
이 발언은 스탈린한테서 "우리 것이 아니다"라는 비난을 받는 등 전체적으로도 좋은 소리를 못 들었고, 결국 부하린 스스로도 발언을 철회하게 된다.
[5]
부하린이 한때 좌파공산주의자였던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변화인데, 부하린은 이때까지도 좌파공산주의적 요소 몇가지(전위당 부정, 노동조합 부정 등)는 유지하고 있었으며 국제 사회주의 진영에서도 부하린의 사상은 좌파공산주의와 '넓게 보면 같은 계통'으로 취급했다.
[6]
유일하게 40년대까지 살아 있었지만 1941년
독소전쟁 발발과 함께 NKVD에 의해 처형되었다.
[7]
함께 기소된 미하일 톰스키는 체포 전에 자살하였다.
[8]
노동사회과학연구소에서 쓴 부하린의 재판 전후에 대한 글
#
[9]
몰로토프의 주장과는 달리 후일, 심문관에게 구타를 허용하는 명령이 내려진 것으로 밝혀졌다.
[출처]
:Медве́дев Алекса́ндрович(메드베데프 알랙산드로비치). Unknown Stalin)
[11]
다만 스탈린이 절대 권력자로 등극하고 가혹한 집산화와 산업화 정책을 몰아붙인 이후로는 부하린은 스탈린을 두고서 '사람이 아닌 악마'라고 말하는 등 스탈린에 대해 완전히 질려버린듯한 발언을 여러번 하였다.
[12]
실제로 부하린은 재판이 끝나고도 완전히 숙청당하기까지 1년 정도 시간이 걸렸으며 그의 유언이나 회고록이 다른 사람도 아닌 스탈린 본인에 의해 잘 보관되어서 후세까지 전해지는 등, 스탈린이 그를 죽이기로 마음먹기까지 상당한 심적 갈등이 있었으리라고 추측할 만한 정황증거가 충분히 남아 있다. 당장 레닌의 유언장에 같이 언급된 나머지 인물들과 비교해 봐도 재판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처형당한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 국외로 추방하고 나서도 기어이 직접 암살자를 보내서 담가버린 트로츠키를 보아, 원한과 위협은 절대 잊지 않는 스탈린이 호시탐탐 킬각을 재고 있다가 기회가 나오자마자 망설임 없이 보내버린(...) 셋과 달리, 체포하여 언제든지 처형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년동안 시간을 끈 것은 그간 스탈린의 행보와 비교하면 확실히 이질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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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 의하면 같이 사형된 16명 중 가장 마지막으로 처형하라는 명령과 함께 다른 이들의 처형을 지켜볼 수 있는 의자가 제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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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둘 다였을 수도 있다. 스탈린이 젊은 시절 뛰어난 시인이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 스탈린은 의외로 예술가 특유의 섬세한 면이 있었기 때문에 부하린에게
양가감정을 가진 것이 그리 특이한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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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트로츠키는 소련은 노동자 국가가 아니라고 소련 국가 자체를 부정했기 때문에 스탈린 시대 이후에도 복권해줄 수 없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는 부적절한 해석이다. 소련에 대한 트로츠키의 입장은 "퇴보한 노동자 국가", 즉 노동자 국가는 맞지만 좀 망가졌다는 것으로 소련 국가 자체를 부정했다고 볼 수는 없다. 이 점은 트로츠키 사후 자생적으로 등장한 IST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소련을 "(공산주의 국가가 아닌) 국가자본주의 국가"로 간주한 것과 비교해도 명확하며, 또한 소련에서 추방당하기 이전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 붉은 군대 내 측근들의 쿠데타 제안을 거절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는것처럼 '서기장' 스탈린의 정통성은 철저히 부정하고 조롱하지만 (자신이 그 건설에서 가장 중요한 일익을 담당한) 소련이라는 국가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 트로츠키의 일관적 입장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고참 볼셰비키들이 복권된 1988년, 소련 말기-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 &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도 트로츠키가 복권되지 못한 것은 아무리 개혁파인 고르바초프라고 해도 (
서기장으로 집권한 것에서 알 수 있듯) 결국은 스탈린으로부터 이어온 소련 전통의 계승자이기에 그 시초인 스탈린의 집권 정당성 자체를 부정하는 트로츠키를 용인할 수는 없었던 것이라고 보는 쪽이 더 적절할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트로츠키는 소련 국가 자체는 전혀 부정하지 않았지만, 그 국가를 통치하는 소련 정부의 정당성을 부인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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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4명은
레프 트로츠키,
이오시프 스탈린,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레프 카메네프. 하지만 이 유서의 내용을 정밀하게 분석해보면 스탈린에 대해선 잔인하다고 비판하면서 서기장에서 해임할 것을 요구했으며, 반면에 트로츠키를 굉장히 추켜세우면서 단지 몇몇 부족한 면이 있으니 주변에서 도와줘야 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하린은 각자 장점을 적시하면서도 최고 지도자로선 치명적인 단점들도 함께 언급하고 있다. 아마 레닌은 자신이 직접 어느 한명을 지도자로 세우기보다 당이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길 원했던 것 같다.
[17]
당시 세계 사회주의 운동에서 좌파공산주의는 크게 두 부류로 '더 좌파'인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 계통(이쪽이 '트로츠키를 지지한' 그 좌파공산주의자들이다)과, 룩셈부르크주의 계열 정도로 나뉘었는데 부하린은 후자였다.
[18]
레닌은 서문을 써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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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이 회고록은 부하린이 실각한 후 감옥에서 작성한 문서이고 부하린이 죽자 스탈린이 보관하고 있던 것을 스탈린 사후 비공개로 보관하다가 1988년 복권이 되고 나서야 출간했다.
[20]
작중 서술되는 외모도 그렇고, 특히 뛰어난 만화가였다는 서술에서 확인사살.
[21]
심지어 지방조직 통합이라는 고유 중점을 통하여 고문비용이 단 37밖에 들지 않는다!!
[22]
동맹국이 1차대전에서 승리하고
러시아 혁명이 실패한 세계
[23]
2차
적백내전이 삭제되었지만
보리스 사빈코프 대통령을 암살하고 장군들의 쿠데타를 선택하면 러시아 인민들이 쿠데타군을 물리치고 사회주의 루트로 진행할 수 있다.
[24]
스탈린은 구 설정에는 공장 시찰 중 의문스런 사고사를 당했으나 현재는 단순히 권력투쟁에서 패배했을 뿐 1955년 까지 생존한 것으로 변경됐다. 스탈린이 소련 붕괴 후 세운 서시베리아 인민공화국의 스탈린주의자들은 비주류 수정주의자로 취급받고 있다.
[A]
핵전쟁 이후 이벤트를 보면 부하린은 살아 있다.
[26]
TRO는 TNO에서 발간된 소설의 형식을 빌려 히틀러의 영도력이 아니었다면 독일이 망했을 것이란 가정을 한 대체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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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경제 대공황으로 영국이 교역을 중단하자 수천단위의 아사자가 발생하기도 했지만 영국의 선진 기술을 사전에 수입이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