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8 05:43:30

정관정요

貞觀政要

1. 개요2. 특징3. 비판4. 외부 링크

1. 개요

당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당태종(626-649 재위)이 23년에 걸친 치세 동안 위징 등 신하들과 나눈 대화를 정리한 책이다. ' 정관(貞觀)' 자체가 당태종 시기의 연호다.[1] 8세기 초에 오긍(670-749)이라는 역사가가 정리, 편찬했다.
동으로 거울을 만들면 의관을 단정히 할 수 있고, 고대 역사를 거울삼으면 천하의 흥망과 왕조 교체의 원인을 알 수 있으며,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자기의 득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제왕학 서적이지만, 당나라 초기의 사회 제도와 문화를 이해하는 사료도 된다.

2. 특징

오긍이 8세기 초에 정관정요를 썼음은 분명하지만 정확히 언제인지는 논란이 있다. 현재의 통설은 오긍이 709년 당중종에게 한 번 정관정요를 바쳤고, 729년 당현종에게 약간 다르게 다듬은 판본을 다시 한 번 바쳤다는 것이다. 당송 시대에 이미 서로 다른 판본들이 돌아다녔다. 현재 유통되는 것은 대체로 15세기 명나라 때 정리한 판본에 근거하는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정관정요 판본이 1370년(홍무 3)에 나온 것일 정도라 어쩔 수가 없다.

등장인물들이 명신들인 데다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주로 다루므로 동아시아 제왕학 바이블이자 끝판왕이라고 불린다. 덕분에 동양 세계에서는 국왕과 신하들의 필독서였고 그만큼 애독한 사람들도 많다. 간단히 예를 들어 보자면

사실 제대로 된 동아시아 국가의 군주치고 읽어 보지 않은 이가 드물다고 할 수 있다.

3. 비판

국가주의적 요소가 제법 들어있고 유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이에 유학자들 가운데에서는 대학연의가 차라리 낫다는 주장도 나왔다. 정관정요에선 신하의 말에 귀기울이는 성군 당태종의 모습만 쭉 나오는데, 청나라 고증학자 조익(趙翼 1727-1814)은 대놓고 "태종이 신하들 간언 들은 건 즉위 최초 때밖에 없다."라고 비판했다. 즉 정관정요는 실제 태종의 모습을 기록한 책이 아니라 당나라 시기에 당황실이 내세운 프로파간다 성향이 강함을 전근대 학자들도 알았고, 이 때문에 바람직한 책이 아니라고 보았던 것이다.

4. 외부 링크



[1] '정요(政要)'는 '정(政)치의 요(要)체'를 의미한다. [2] 평소 책읽기를 좋아하고 어느 책이든 닥치는 대로 읽지만 왕통을 계승할 수 없는 충녕대군에게 태종은 안쓰러움을 느꼈다. 태종은 왕실의 후계를 자신처럼 유혈사태를 겪을 일 없이 적장자인 양녕대군에게 곱게 물려주고자 책벌레 충녕을 최대한 정치와 먼 분야에 관심하도록 유도했는데, 대표적 일환이 바로 정관정요를 압수하고 금지하는 것이었다. 동아시아에서 정관정요가 제왕학의 교과서이다 보니 가장 대표적인 정치서적인 정관정요만큼은 못 읽게 했던 것. 하지만 결국 큰형이 폐세자되어 새 세자로 책봉되고 왕이 되면서는 세종 역시 정관정요를 읽고 교육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