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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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 제3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중화인민공화국 초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덩샤오핑 邓小平(DèngXiǎopíng) | 鄧小平(등소평) | Deng Xiaop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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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1c25><colcolor=#ffff00> 출생 | 1904년[1] 8월 22일 | ||
청
사천성 광안현 협흥향 패방촌 (現 중화인민공화국 쓰촨성 광안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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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97년 2월 19일 (향년 92세) | ||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하이뎬구 301의원[2] | |||
재임기간 |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부총리 | ||
1954년
3월 ~
1968년
10월 1973년 2월 ~ 1976년 4월 1977년 8월 ~ 1980년 9월 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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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 |||
1956년 9월 28일 ~ 1969년 4월 28일[3] | |||
제10ᆞ11기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 |||
1975년
1월 5일 ~
1976년
4월 7일 1977년 7월 7일 ~ 1981년 6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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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대 중화인민공화국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 |||
1975년
1월 5일 ~
1976년
4월 7일 1977년 7월 7일 ~ 1980년 3월 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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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기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 | |||
1975년 1월 10일 ~ 1976년 4월 7일 | |||
제3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주석 | |||
1978년 3월 8일 ~ 1983년 6월 22일 | |||
제3대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 |||
1981년 6월 28일 ~ 1989년 11월 9일 | |||
제12기 중국공산당 중앙고문위원회 주임(제1대)[4] | |||
1982년 9월 13일 ~ 1987년 11월 2일 | |||
초대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 |||
1983년 6월 6일 ~ 1990년 3월 19일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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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1c25><colcolor=#ffff00> 이름 |
간체자: 邓小平 /
정체자: 鄧小平 ( 병음: Dèng Xiǎopíng) 한국 한자음: 등소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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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명 | 덩셴성 (鄧先聖, 등선성, 1904년 - 1908년) | ||
자 | 희현(希賢) | ||
부모 |
아버지 덩사오창 (邓绍昌, 1886년 - 1936년) 어머니 덩단스[5] (邓淡氏, 1884년 - 192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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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장시위안 (张锡媛, 1928년 - 1929년) 진웨이잉 (金维映, 1931년 - 1933년) 줘린 (卓琳, 1939년 - 199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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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덩린 (邓林, 1941년 - ) 덩푸팡 (邓朴方, 1944년 4월 16일 - ) 덩난 (邓楠, 1945년 10월 - ) 덩룽 (邓榕, 1950년 - ) 덩즈팡 (邓质方, 1952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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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모스크바 손중산대학 ( 정치경제학 / 학사) | ||
종교 | 무종교 ( 무신론) | ||
신체 | 157cm[6], 60kg | ||
소속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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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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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국경절 열병식에 등장한 초상화 ''' |
不管黑猫白猫,能捉到老鼠就是好猫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 독재자.
중국공산당의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함께한 인물이다. 초공작전에 의해 대장정을할때에는 정치국 회의에서 서기를 맡는 등 마오쩌둥과 함께 동고공락을 하였다. 중국공산당 2세대 지도부를 대표하는 인물로[7] 1978년 화궈펑을 실각시킨 후 1989년까지 중국의 제3대 최고지도자로서 군림했고,[8] 이후 일선에서 물러나긴 했으나 1997년 사망할 때까지 정계에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후계자인 장쩌민과 후진타오를 직접 지명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사실상 2010년대 초반까지 그 영향력이 살아있었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유일하게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최고지도자가 되고 당 총서기직[9]과 국가주석직을 맡지 않고 중앙고문위원회[10] 주임 겸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의 주석직을 통해 실권을 휘둘렀다.[11]
20세기 후반 중국의 개혁 • 개방 정책을 진두지휘했으며 현재 중국 언론에서는 그를 개혁 • 개방의 총설계사로 칭한다. 흑묘백묘론으로 대표되는 실용주의적 태도를 취하며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융합을 시도했고, 그가 정립한 중국특색 사회주의는 중국이 세계 2위 강대국으로 올라서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고 평가받는다. 중국공산당에선 덩샤오핑을 20세기 중국을 살려낸 거인, 일명 백년소평(百年小平)으로 칭송한다. 일부 중국인들은 그를 부도옹(不倒翁)[12] 또는 작은 거인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의 집권 이후에는 어둠도 있는데 여전히 공산당의 일당독재를 지속했으며[13][14] 경제개발의 부작용으로 양극화와 부정부패가 크게 일어났고, 학생들의 자유화 요구가 거세져 공산당의 통치기반이 흔들리자 1989년 천안문 6.4 항쟁을 무력 진압해 수많은 인명을 희생시키기도 했다.
요컨대 마오쩌둥이 사회주의 중국을 건설한 창업자라고 한다면,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이 이룩한 국가 토대 위에서 과감한 개혁을 단행해 중국을 부강의 길로 이끈 번영의 지도자가 된다. 명나라의 영락제나 청나라의 강희제에 비견되는 경우가 많으며,[15] 대한민국의 박정희 대통령과도 자주 비교된다.[16]
대한민국에선 한국 한자음인 등소평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90년대까지는 이런 명칭으로 불렸고, 최근에도 이렇게 부르는 사람이 많다.
2. 생애
자세한 내용은 덩샤오핑/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3. 어록
자본주의에도 계획이 있으며, 사회주의에도 시장이 있다.
일부가 먼저 부자가 되는 것을 인정해 가난한 사람이 따라 배우게 해야 한다.
선부론(先富論)
선부론(先富論)
如果中国有朝一日变了颜色,变成一个超级大国,也在世界上称王称霸,到处欺负人家,侵略人家,剥削人家,那么,世界人民就应当给中国戴上一顶社会帝国主义的帽子,就应当揭露它,反对它,并且同中国人民一道,打倒它。
만일 어느 날 중국이 안면몰수하고 초강대국이 되어 패권을 주장하고, 여기저기 남을 괴롭히며, 남을 침략하는 한편, 남의 것을 착취한다면, 세계의 모든 인민들은 응당 들고일어나 중국을 '사회제국주의'[18]로 규정하고 반대하여 중국 인민들과 함께 무너뜨려야 할 것이다.
1974년 UN 연설 中 #
만일 어느 날 중국이 안면몰수하고 초강대국이 되어 패권을 주장하고, 여기저기 남을 괴롭히며, 남을 침략하는 한편, 남의 것을 착취한다면, 세계의 모든 인민들은 응당 들고일어나 중국을 '사회제국주의'[18]로 규정하고 반대하여 중국 인민들과 함께 무너뜨려야 할 것이다.
1974년 UN 연설 中 #
3.1. 28자 방침
천안문 사건과 소련 붕괴 등 내외의 시련을 맞아 덩샤오핑이 1992년 설파한 어록으로 이후 중국외교의 핵심적 방침으로 채택되었다. 능력을 과시하거나 앞장서지 않고 전반적으로 낮은 외교자세를 유지하면서 중국의 내부 안정과 국력을 조용히 키우는 신중한 외교정책을 말한다. 보통 도광양회와 유소작위로 요약되는데 이는 삼국지연의에서 유비가 조조의 의심을 피하기 위한 전략으로 일컬여져 왔다.- 冷靜觀察/冷静观察 (냉정관찰) - (외교적 행동을 하기 전에) 국제정세를 먼저 냉정하게 관찰하라.
- 穩主陣脚/稳住阵脚 (온주진각) - 내치에 집중하여 국내의 질서와 안정을 공고히 하라.
- 沈着應付/沉着应付 (침착응부) - 상황과 능력을 고려해 침착하게 대처하라.
- 韜光養晦/韬光养晦 ( 도광양회) - 밖으로 능력을 드러내지 않고 안으로 실력을 기른다.
- 善于藏拙/善于藏拙 (선우장졸) - 어리석은 척 낮은 자세를 유지하고 조용하고 겸손해야 한다.
- 決不當頭/决不当头 (결부당두) - 절대로 앞에 나서거나 우두머리가 되려하지 말라.
- 有所作爲/有所作为 (유소작위) -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을 때만 나서서 한다.
4. 가족
결혼을 세 번 했다. 첫번째 부인은 장시위안(张锡媛:1907~1930)으로 노동자집안에서 태어난 여성이었다. 바오딩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공산당원으로 활동하다가 당의 추천으로 모스크바 유학을 떠났다. 1927년 상하이에서 덩샤오핑을 만난 인연으로 1928년 결혼을 했다. 1930년 산욕열로 사산하고 사망했다.두번째 부인은 진웨이잉(金维映: 1904-1941)으로 저장성 사람이다. 1926년 공산당에 입당하고 혁명운동에 뛰어들었으며, 1931년 첫번째 아내와 사별했던 덩샤오핑과 결혼했다. 하지만 1933년 덩샤오핑과 2년만에 덩샤오핑이 연루된 당내 모종의 사건으로 이혼했고, 다시 고위 당직자였던 리웨이한(李维汉:1896-1984)과 결혼했고, 대장정까지 마쳤다. 국공합작이 체결되자 소련으로 요양을 갔으나, 독소전쟁 당시 간호사로 근무하다가 독일군의 모스크바 폭격때 사망했다. 덩샤오핑은 이 두번째 결혼을 언급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는데, 일설에 의하면 당의 강요에 의한 이혼이었다고 한다. 진웨이잉의 재혼남편인 리웨이한은 문혁때 덩샤오핑처럼 숙청되었지만 덩샤오핑 집권하에서 복권되어 고위 관리로 활약했다.
세번째 부인은 줘린(卓琳:1916-2009)으로 베이징 대학 물리학과의 학생이었으나, 중공 본거지 옌안으로 갔다. 1939년 옌안에서 마오쩌둥의 주례로 덩샤오핑과 결혼했다. 덩샤오핑의 2남 3녀는 줘린과 사이에서 낳았다.
덩샤오핑의 장남인 덩푸팡(1944)은 베이징 대학 시절 홍위병의 습격을 받아 투신자살을 기도했다가 장애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중국 장애인 협회의 주석을 지내기도 했다. 장쩌민 시절 부정부패 사건에 연루되어 감방에 갈뻔 했으나, 장쩌민은 은인의 아들을 구해주었고, 자리를 사직하는 것으로 유야무야했다. 15차 당대회와 1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시진핑 시기에는 정부에 쓴소리를 했으며, 2020년 시진핑이 홍콩의 일국양제를 무너뜨리는 행보를 보이자 이를 비난하기도 했다. 현재 중국 내 시진핑의 권력은 절대적이라 보통 사람 같으면 쥐도새도 모르게 어디론가 끌려가겠지만 덩샤오핑의 맏아들이라 어찌 건드리지 못하는 모양. 막내 아들 덩즈팡(1952)은 미국 로체스터 대학교에서 양자물리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물리학자이다. 이후 귀국하여 중국 통신회사에서 근무했다.
장녀 덩린(1941)은 화가이고, 아버지의 전기를 펴내기도 했다. 이녀 덩난(1945)과 삼녀 덩룽(1950)은 의사로 활동하고 있다. 덩난은 중국공산당 19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5. 사진 이야기
" 저우언라이의 뒤를 이은 덩샤오핑: 중국, 적이냐? 친구냐?"란 제목의 당시 타임지 표지.[19] |
방미 시 지미 카터 대통령 내외와 함께. |
방일 시 일본의 쇼와 덴노, 나가코 황후 내외와 함께. |
방북 시 김일성과 함께. |
6. 여담
- 생전에 주로 쓰촨성 광안 방언을 사용했고 항상 통역관을 데리고 다녔다.[20] 그러나 공식 석상에서의 연설은 중국의 관료들이 그렇듯 보통화로 했다. 대표적으로 천안문 진압 후 기자 간담회에서 학생운동을 "난동"이라고 비난하는 발언.
- 핑퐁 외교로 대표되는 미국의 친중 정책에 따라 닉슨 대통령이 방중한 이후, 이에 보답하여 1979년에 방미를 했는데 우주 비행 훈련소에 방문을 했다고 한다. 무중력 상태를 훈련하는 기기를 탔을 때는 '어린 아이처럼' 기뻐하며 떠나길 주저했다.[21]
- 김용의 열렬한 팬이였다. 기사. 문화비평가 올리버 차우의 증언에 따르면 덩샤오핑은 비밀요원을 홍콩에 보내 김용의 소설을 구해 오게 했다. 김용은 저장성의 거부의 아들로, 그 아버지는 공산당 집권후 지주-반동 계급 숙청 당시 처형된 바 있는데, 덩샤오핑은 이에 대해 김용에게 사과했다. 1981년 김용을 직접 만난 덩샤오핑은 “우린 이미 오랜 친구와 같다. 당신의 책을 대부분 읽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문화대혁명기에 금서로 지정됐던 김용의 작품은 덩샤오핑이 실권을 장악한 1981년에야 중국 대륙에서 해금됐다.
- 프랑스 유학의 영향인지 크루아상과 콘트락트 브리지 게임을 몹시 좋아했다고 한다. 1970년대 부총리로 복권된 이후 해외에 파견되었는데, 귀국시 외국 공항에서 크루아상을 사와 중국에서 부하들과 나눠먹었다고 한다. 또한 마작과 포커를 매우 좋아해서 충칭 시장으로 재임시에 집무실에 사람을 불러 자주 했는데 이것이 문혁 때 비판되어 실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한편, 주더나 펑더화이는 장기를 좋아했고, 워커홀릭인 저우언라이는 이런 놀이에 관심이 없었으며,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에는 잡기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 엄청난 골초였고 외국 정상들을 접견할 때조차 재떨이를 앞에 두고 항상 줄담배를 피웠다.[22] 요즘 같으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본인도 이게 좀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알았는지 정상회담 시 사진 찍을 때는 치웠다가 끝난 후 다시 내왔다. 이렇게 골초였음에도 불구하고 흡연자들이 자주 걸리는 폐암이나 후두암에 걸리지 않고 92세까지 장수하였다. 또한 음주도 담배만큼은 아니지만 즐기긴 하였는데 마오타이주를 좋아했으며, 4인방을 숙청하고 마오타이주를 20잔을 연거푸 들이키며 "이제 노후는 편하게 보내겠다."라고 기뻐한 에피소드가 있다. 그리고 최고지도자가 되고 매일 저녁 해바라기씨와 함께 마오타이주 2잔씩 마셨으나 주치의 권고로 황주(술) 2잔으로 바꿔 마셨다.
- 매운요리를 즐겨먹었는데 이 점에 있어서 마오쩌둥과 비슷했다. 젊었을 적 프랑스에서의 자취 경험으로 요리 실력도 썩 괜찮았다고. 대장정 시기 종종 매운 양념을 곁들인 개고기 볶음을 선보였는데, 반응이 몹시 좋았다고 전해진다. 식생활에 있어서는 식사시간을 꼬박꼬박 지켰고 과식을 피하고 소식을 했는데 이것이 장수비결이라고 평가받는다.
- 살아생전 장쩌민- 리펑- 주룽지의 2세대 지도부, 후진타오- 원자바오의 3세대 지도부 승계를 계획하기도 했는데, 이게 사후에도 그대로 실현되면서 과장 좀 보태자면 2012년까지 30여년간 덩샤오핑이 중국을 다스렸다고 볼 수도 있다. 이렇게 치면 30년 동안 중국을 통치했던 마오쩌둥보다도 더 오래 영향력을 휘두른 셈이 된다. 물론 후세대들이 다 그의 말대로 행동한 것도 아니긴 하다만. 이 중 원자바오를 점 찍었다는 점에선 좀 흥미롭기도 하다.
-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처형 비디오를 입수한 후 중국 공산당 간부들과 같이 봤었다. 처형 비디오를 보고 나서 덩샤오핑이 한참 만에 "어쩌다 저 꼴이 되었는가?"라고 간부들에게 물었고, 이에 한 공산당 간부가 "반동 분자들을 때려잡지 않아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으나, 덩샤오핑은 오히려 "틀렸다. 우리도 개혁하지 않고 인민들에게 베풀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고 대답하였다. 덩샤오핑이 불과 수개월 전 천안문 사태의 유혈 진압을 주도한 장본인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의외로 여겨질 수 있지만, 이후의 남순 강화를 통해 개혁 개방에 가속도를 붙인 점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요컨대 "천안문 사태 진압에 대한 국내외의 비판을 불식시키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길은 대외 개방 확대와 이를 통한 경제 성장 성과의 극대화 뿐"이라는, 나름대로 절박한 인식의 반영이었던 셈이다. 물론 현실은 개혁 · 개방 와중에 반동분자 색출까지 둘 다 했으므로 일종의 말장난일 뿐이지만, 그래도 반동분자만 때려잡기 급급했던 김일성보다는 훨씬 나았다고 볼 수 있다.
- 1991년 아무런 직위 없이 있을 때 김일성과 비밀리에 만나 개혁 · 개방에 대해 조언했다고 한다. 이에 자극을 받은 김일성은 1994년까지 나진 개방, 비핵화 딜, 김영삼 대통령과의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정상회담을 며칠 앞두고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김정일에게도 이 조언을 해줬는데 김정일은 그를 수정주의자라고 하며 거절하였다. 다만 김정일도 2000년대에 들어 신의주특별행정구처럼 비슷한 노선을 모색하긴 했었다. 허나 전권을 주려고까지 했던 중국인 장관 후보가 오기 직전 탈세 혐의로 중공에 체포되고[23] 이후 북미 외교 등이 잘 안 풀리자 2000년대 중반 핵실험으로 자폭해 끝이 안 좋았을 뿐. 헌데 정작 마오쩌둥이 반대했던 북한의 권력 세습은[24] 찬성하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국가마다 맞는 게 있다는 게 일단은 표면적인 찬성 이유. 김일성의 남침을 반대하기도 했다. #
- 1994년 중국 시간으로 새벽에 열리던 월드컵 전 경기를 위성으로 시청할 정도로 축구광이었다고 한다. 실제 덩샤오핑 집권 시기에 처음으로 CCTV에 유럽 축구가 방송되기 시작했다.[25] 1994년 갑을 리그라고 부르던 프로 축구 리그를 창설하는데 기여했으며[26] 살아생전 국가 대표팀이 월드컵에 나가는 것도 보고 싶어했으나, 중국의 월드컵 본선 진출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 이르러서야 가능했고, 덩샤오핑 본인도 중국이 월드컵 본선은 출전한 것은 보지도 못한 채 1997년에 사망했다.[27] 그런데 정작 관중 우려 등으로 축구장에 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 신해혁명 100주년을 앞둔 2010년 대만 총통부 직속의 역사편찬기관 국사관(國史館. 한국의 국사편찬위원회에 해당)이 인터넷으로 '중화민국 100대 인물'의 선정 투표를 실시했는데, 덩샤오핑이 중간 집계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당황한 대만 정부는 덩샤오핑, 마오쩌둥 등을 후보에서 제외했고 결국 조사 자체를 취소했다. #
- 마오쩌둥은 개인적으로는 덩샤오핑을 많이 좋아했다고 한다. 덩샤오핑이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다가 문화대혁명으로 실각한 이후에 다른 정적들과 마찬가지로 박해를 가했으면서도 마오쩌둥은 한편으론 그의 안위를 염려했을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두 번이나 실각하여 공장 노동자로 일하게 됐지만 몇 년 후 마오쩌둥의 부름을 다시 받았다. 문화대혁명으로 실각당한 대부분의 중국 정치가와 공직자들은 실각 후에 홍위병에게 구타당하거나, 강제 노동소나 정치범 수용소에서 죽을 때까지 노동을 하거나 혹은 감옥에서 복역 중 사망하거나, 혹은 마오쩌둥이 사망할 때까지 정치범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 보통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꽤나 신임을 받은 셈이다. 당장 문화대혁명이 시작될 때 덩샤오핑은 류사오치와 함께 자본주의파 1호, 2호로 찍혀 공격 받았는데 류사오치는 결국 살아남지 못했지만, 덩샤오핑은 살아남을 수 있었고, 린뱌오가 1971년 린뱌오 사건 당시 비행기 추락사고로 폭사하자 마오쩌둥이 다시 복권시켜주었다.
- 단신으로 유명하다. 1904년생임을 감안해도 대체적으로 쓰촨성 출신들은 타지역 출신 중국인들에 비해서도 신장이 유독 작다. 그래서 타 지역 출신 중국인들은 쓰촨성 출신들을 먀오쯔(苗子, 땅콩보다 훨씬 더 작은 종자)라고 놀린다고 한다. 그 반대는 산둥성 출신들이다.
- 작은 키 때문에 일어난 에피소드가 있다. 마오쩌둥이 공산당 권력을 장악했을 당시 한 회의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곤 '내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시오'라고 하자 당연히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마오는 '그럼 모두 내 의견에 찬성한 것으로 알고 그대로 실행하겠소.'라고 했는데 실제론 덩샤오핑 혼자 일어서 있었다. 하지만 너무 키가 작아서 눈에 띄지 않았다고 한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실제론 마오쩌둥이 자리에서 일어선 덩샤오핑을 발견했지만, 덩샤오핑을 아낀 마오쩌둥이 '덩샤오핑 동지는 어차피 키가 작아서 앉아 있으나 서 있으나 똑같아 보이니, 그냥 앉아 있는 것으로 알고 있겠소'라며 그냥 넘어갔다는 말과 이 말을 듣자마자 덩샤오핑이 아예 책상 위에 올라서서 자신의 의견을 알렸다는 말도 있다.
- 동국무역그룹 창업주 헌암 백욱기(1919~2003)는 덩샤오핑과 외모가 비슷해서 1990년대 당시 별명이 '등소평'이었으며( 참고), 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 이순진과 외모가 굉장히 닮기도 했다.
- 2024년 현재 중국 공산당 내에서도 홍콩 문제를 비난하는 의견이 강하다. "도대체 왜 통제가 잘 되어가던 홍콩을 굳이 건드려 사생결단 상태를 내냐?" 라면서 시진핑에 대한 비난을 하는 공산당 당원이 있는데, 그 중 한 명이 일국양제를 시행한 덩샤오핑의 아들 덩푸방이 있다. 덩푸방은 시진핑이 아버지의 업적을 망치고 있다고 비난을 가했다. 경제학자들 역시 홍콩은 중국이 국제사회와 소통하는 데 중요한 창구인데다가, 중국 경제력의 절반을 책임지는 도시 중의 하나로 굳이 가만있는 홍콩을 건드려 미국, 영국 같은 서방 강대국들과 대결하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반응이 많고, 게다가 "지금 중국의 경제도 어려운 마당인데다가 코로나19로 인해 전세계가 안 그래도 반중정서가 강한데 홍콩까지 건드려서 서방이 중국을 향한 경제제재를 때리는 원인을 제공했다" 라며 비판을 가하고 있다.
- 최근 들어 한국 애니메이션인 티니핑이 사랑의 하츄핑 개봉으로 유행한 이후 시진핑과 함께 덩샤오+ 핑 별명이 생겨나고 있다. 해병문학에서는 이 별명을 활용하여 포항 해병대원들이 황근출의 여동생에게 선물할 티니핑을 찾겠답시고, 덩샤오핑을 똥싸요핑이라는 괴상한 명칭으로 부르고 덩샤오핑의 시체를 도굴하기 위해 아예 중국에 쳐들어가기도 하는 문학이 등장했다.[28]
7. 대중매체에서
- 1995년 일본에서 발매된 < 홍콩97>이라는 게임에서 최종 보스로 등장한다. 해당 작품 내에서는 죽은 상태였다가[29] 궁극의 병기로 개조당한다.[30] 참고로 이 게임은 우연의 일치로 덩샤오핑이 사망한 년도를 맞추었다. 자세한건 항목 참조.
- < Hearts of Iron IV>에서 중화민국 산업장관으로 등장하는 희대의 막장 고증을 보여주었지만 1.5 패치와 Waking the Tiger DLC가 나온 다음에는 중국공산당 산업장관으로 변경되었다.
- 덩샤오핑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 <등소평>(원제 : 历史转折中的邓小平)이 2014년 중국에서 방영했다. 국내에서는 2015년 1월 CNTV에서 방영했다
- 《영상의 세기 PREMIUM 제20부 - 중국 · "혁명"의 피와 눈물》 - 일본 NHK의 유명한 영상의 세기 다큐 시리즈중 기존 95년판의 틀에서 새로운 영상을 추가하고 교체하여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에 맞추어 2021년에 방영한 다큐이다.
- 1995년 일본에서 발매된 < 홍콩97>이라는 게임에서 최종 보스로 등장한다. 해당 작품 내에서는 죽은 상태였다가[31] 궁극의 병기로 개조당한다.[32] 참고로 이 게임은 우연의 일치로 덩샤오핑이 사망한 년도를 맞추었다. 자세한건 항목 참조.
- < Hearts of Iron IV>에서 중화민국 산업장관으로 등장하는 희대의 막장 고증을 보여주었지만 1.5 패치와 Waking the Tiger DLC가 나온 다음에는 중국공산당 산업장관으로 변경되었다.
- 《영상의 세기 PREMIUM 제20부 - 중국 · "혁명"의 피와 눈물》 - 일본 NHK의 유명한 영상의 세기 다큐 시리즈중 기존 95년판의 틀에서 새로운 영상을 추가하고 교체하여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에 맞추어 2021년에 방영한 다큐이다, 시간 순서상 문화대혁명과 개혁 개방, 천안문 6.4 항쟁을 다루면서 덩샤오핑의 행적과 발언도 다루고 있다
[navertv(65952071)] |
[다큐] 영상의 세기 PREMIUM 제20부 - 중국 · "혁명"의 피와 눈물中[33][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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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보 | 엄타,(1983 ~ 1986), · 남순,(1992), · 4대 현대화 | ||
사건사고 | 중국-베트남 전쟁,(1979), · 중공 여객기 불시착 사건,(1983), · 중국 해군 어뢰정 망명사건,(1985), · 중영공동선언,(1985), | ||
천안문 항쟁,(1989), | 각종 매체 · 사건 진행 · 탱크맨 |
[1]
출생 당시
광서
30년.
대한민국에선 처음엔
1903년 출생으로 소개하였고, 차후
1904년 출생으로 소개하고 있으나, 일부에서는
1902년 출생을 덤으로 소개하고 있다.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것은
1904년. 참고로
1903년은 덩샤오핑 친누나인 덩시옌리(鄧先烈, 등선렬)의 공식적인 생년이다.
[2]
정식명칭은
중국 인민해방군 총의원으로 병상만 4,000개에 하루 외래환자가 2만명에 달한다는 초거대 병원으로, 공산당 최고위층을 위한 전용 병동이 따로 있다고 알려져 있다.
[3]
1956년부터 1965년까지 집무를 집행하였고 1966년 문화대혁명 발생 이후부터 1969년 하방될 때까지는 사실상 집무가 정지된 상태였다.
[4]
중국공산당 중앙고문위원회는 제12차 당대회에서 신설된 조직이다.
[5]
제대로 된 이름이 아니라 친정의 단(淡)씨에 시가의 덩(邓)씨를 얹은 것이다. 한국도 마찬가지였지만 옛날에는 딸의 이름을 아예 짓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6]
말년엔 152cm.
[7]
마오쩌둥이 1세대, 덩샤오핑이 2세대,
장쩌민이 3세대,
후진타오가 4세대를 대표했으며 2012년 당 대회를 통해
시진핑을 중심으로 한 5세대가 출범하였다.
[8]
여기서 말하는
최고지도자란
국가원수(예:
대한민국 대통령)나
정부수반(예: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재임한 자를 의미한다. 중국 정치에서 최고실권자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나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이 아닌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마오쩌둥도
대약진 운동과 같은 심각한 정책적 실패를 저질렀음에도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만은 계속 유지하며 실권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중국처럼 아직 민주화가 이뤄지지 않은 국가에선 군권이 곧 정치적 실권으로 직결되는 경우가 흔한데,
대한민국도
문민정부 들어
하나회가 해체되기 전까진 군 인사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막강했었다.
[9]
1956년부터 1969년까지 중국공산당 총서기를 맡은적이 있다. 다만 이 시기는 최고실권자였던 마오쩌둥이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군권을 움켜지고 있았지만, 당 내부에서는
대약진운동 실패로 실질적 권한이 별로없는 명목상으로 당내 서열 1위인 당 주석직이라는 위치로 물러나 있었다. 그리하여 덩샤오핑은 지금의 중국공산당 1인자 위치인 총서기와는 조금 다른 당의 모든 실무 총 책임자로서 중국공산당 내 서열 2위의 자리를 맡게 되었다. 물론 지금의 총서기와는 완벽하게 같은 집무를 하는건 아니지만 당시 1인자였으나 일시적으로 뒤로 물러나 있던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겸 중국공산당 주석인 마오쩌둥에 당 활동과 권한을 모두 대리하여 당 내 일상적인 실무를 총 책임지는 막중한 자리였다.
[10]
중국공산당 중앙고문위원회는 은퇴한 중국 공산당 원로 8인(덩샤오핑,
천윈,
보이보,
양상쿤 등)의 모임이다. 덩샤오핑이 이 위원회의 주임을 맡던 시절엔 법치보다 '인치(人治)', 즉 권력자의 권위가 법과 제도보다 현실 정치에 끼치는 영향력이 더 강한 정치가 행해지는 시기였다. 일종의 중국식
원로원,
상황 정치를 8인 원로가 합의하여 구성한 것이며
마오쩌둥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이 8인 원로들의 발언들 하나하나에 실린 힘은 중국 공산당의 수뇌부인 상무위원회를 이들의 의견을 처리하는 실무진 급으로 조종하는 역할을 했다. 이 특수기구는 중국공산당 중앙지도층의 신구교체를 처리하고, 젊은 관리들을 뽑아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에 진입시켜 실무를 보게하는 역할을 부여했다.
물론 바람직한 모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11]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는
중국공산당
총서기로서 당 서열 2위로 실세였고, 1970년대 중반 2차 복권시
중국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겸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국무원 부총리라는 군부 내 실질적 지배자로서 실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중국 최고지도자인 1980년대부터 은퇴시기까지는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서 군권을 통해 실권자로 군림하였다.
[12]
직역하자면 쓰러지지 않는 늙은이라는 뜻이다.
마오쩌둥 시대에
문화대혁명 등 수많은 시련을 겪고도 끝내 정치적 재기에 성공해 권좌에 오른 것에서 유래했다.
[13]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식의 1인 독재는 원치 않았는지, 임기제 확립이나 65세 이상 공직 금지 같은 몇몇 원칙들을 세웠고 제도화했다. 어쨌든 이는 본인 생전 및 사후 20년 정도까지는 그럭저럭 지켜졌다.
시진핑 시대에 이것이 깨지긴 하지만 시진핑 조차 덩샤오핑이 마련한 여러 장치를 제거하고 장기집권을 하기 위해 10여년간 여러 번의 개헌 및 숙청을 실시해야 했을 정도였다.
[14]
실제로는 당내에 여러 반대파들이 남아 있어서 덩샤오핑 본인 혼자 마음대로 하기는 힘들었다. 화궈펑을 축출하고 사실상 실권을 쥔 8인 원로회의에서
천윈,
리셴녠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에 사사건건 제동을 걸려고 했다.
시중쉰은 개혁적 성향은 비슷했지만, 개인적으로 덩샤오핑과 사이가 나빠서 이견이 많았다.
양상쿤은 덩샤오핑과 사이는 좋았지만, 군내에서 자기세력을 심고 있었다. 1989년 천안문 사태를 전후해서는 직속 부하였던
후야오방,
자오쯔양도 덩샤오핑에 반기를 들었다. 1994년 사실상 은퇴선언인 남순강화때까지도 덩샤오핑은 당내에 확실히 견제 세력이 존재했으니, 마오쩌둥이나 김일성식 1인 독재와는 좀 상황이 달랐다.
[15]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로 이어지는 35여 년을
청나라의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치세에 비유하는 이도 있다.
[16]
마오쩌둥이 건설한
사회주의 국가의 틀에서 대권을 넘겨받은 덩샤오핑처럼 박정희도
이승만이 건설한
친미 ·
자본주의 국가라는 토대 위에서 강력한 국가 주도 경제 정책을 시행해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또한 덩샤오핑과 마찬가지로
인권을 탄압하고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독재자라는 평가를 피할 수 없다. 전임자로부터
6.25 전쟁과
문화대혁명으로 전국이 초토화된 나라를 넘겨받았다는 점도 겹친다. 게다가 이 둘은 전임자가 만든 체제 하에서 국가를 발전시켰음에도 전임자와는 정치적으로 대척점에 있었다.
미국의 중국전문가인 월리엄 오버홀트
하버드 대학교 아시아센터 선임연구원은 "나는 덩샤오핑이 한국의 발전 전략, 즉 '박정희 모델'을 그대로 모방(copy)했다고 생각한다."라는 견해를 내비치며 덩샤오핑이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 정책을 롤 모델로 삼았을 것으로 평가했다.
[17]
그런데 정작 BBC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등소평이 실제로 했던 말은 "검은 고양이든 얼룩 고양이든"이었다고 한다. 이걸 증언한 사람은 덩의 최측근이었던 총참비서(
비서실장). 그리고 앞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이 말은
저우언라이가 한 말을 덩샤오핑이 인용한 것이다.
[18]
이 용어는 1960년대
중소결렬 상태에서 1968년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자 중국이 소련을 비판하며 나온 말이다.
[19]
사족으로 이례적으로 TIME 글자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 몇 안되는 표지이기도 하다.
TIME 참조.
[20]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어 교육기관이 정비되기 이전까지는 일상 생활은 물론 학교에서도 해당 지역의 방언만 사용했다. (요즘은 아무리 오지라도 소수민족 학교가 아닌 이상은 거의
표준 중국어를 사용한다.) 그래서 당시 덩샤오핑이 저랬던 건 특이하다고 볼 수 없다.
쑨원,
장제스,
마오쩌둥 또한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다. 현재도
문화대혁명 시절 학교를 못 다닌 60대 이상에서는 이런 사람이 있다.
[21]
사실 중국의 우주 계획은 나름 장기 추진된 계획이었다. 과학 기술 개혁 항목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22]
유튜브에 올라온 기록 영상을 보면
김일성이 방중해서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과 담소하면서 맞담배를 피는 장면이 나온다.
[23]
때문에 당시 중국이 북한의 개혁 · 개방을 꺼린다는 식의 음모론이 나돌기도 했다.
[24]
김일성이 김정일에게 권력 세습을 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그렇다면 우리가 전제 군주와 다를 게 뭐냐고 반대했었다고 한다. 참고로 공산당은 전제주의를 봉건제도의 유산으로 보기에 싫어한다.
[25]
이때 주로 방송하던 리그가 이탈리아
세리에 A였다. 때마침 이 때는 세리에 A 최고의 전성기 시절의 이른바 "칠공주", "세븐 시스터즈" 시대였고, 이때를 계기로 중국에서 세리에 A
인기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26]
나중에는
중국 슈퍼 리그로 명칭이 변경된다.
[27]
참고로 중국은 그해 열린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예선에서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에게 밀려 최종 3위로 탈락하였다.
[28]
실제 덩샤오핑의 유골은 화장되어 뿌려졌기 때문에 시신이 없다.
[29]
그런데 게임 발매 당시 덩샤오핑은 살아있었다.
[30]
이 게임을 리뷰한
AVGN의
제임스 롤프는 자신의 실력대로 하기보다는 여러 이유로 일부러
발컨 수준의 플레이를 하는데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5분 내에 끝판왕이 등장해 클리어했다고 말할 정도면 정말 못 만든
게임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것도 난이도와 내용 등 모든 점에서 말이다.
[31]
그런데 게임 발매 당시 덩샤오핑은 살아있었다.
[32]
이 게임을 리뷰한
AVGN의
제임스 롤프는 자신의 실력대로 하기보다는 여러 이유로 일부러
발컨 수준의 플레이를 하는데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5분 내에 끝판왕이 등장해 클리어했다고 말할 정도면 정말 못 만든
게임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것도 난이도와 내용 등 모든 점에서 말이다.
[33]
2021년 8월 14일 방송
[34]
중국공산당 창당 100년에 맞춰 20세기 영상 매체 발명 후 중국의 "혁명"의 피와 눈물의 역사를 기록 보관소에 저장된 발굴 영상으로 시간순으로 다룬 다큐멘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