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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36349> 연표 | 사건 |
1936년 |
3월
라인란트 재무장 | 7월
스페인 내전 발발 | 12월
방공 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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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
7월
중일전쟁 발발(
루거우차오 사건) ·
제2차 국공합작 | 8월
상하이 전투 | 12월
난징 전투(
난징 대학살) ·
파나이 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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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
3월
오스트리아 병합 | 6월
1938년 황허 홍수 | 7월
하산 호 전투 | 9월
뮌헨 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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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
4월
스페인 내전 종결 | 5월
할힌골 전투 | 8월
독소 불가침조약 | 9월
폴란드 침공(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
가짜 전쟁 | 11월
겨울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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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
4월
노르웨이 침공 | 5월
프랑스 침공 ·
됭케르크 철수작전 | 7월
영국 본토 항공전 | 9월
삼국 동맹 조약 | 10월
그리스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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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
5월
비스마르크 추격전 | 6월
바르바로사 작전(
독소전쟁 발발) ·
계속전쟁 | 9월
레닌그라드 공방전 | 10월
모스크바 공방전 | 12월
진주만 공습(
태평양 전쟁 발발) ·
말레이 해전 ·
남방작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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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
4월
둘리틀 특공대 | 6월
청색 작전 ·
미드웨이 해전 | 7월
엘 알라메인 전투 | 8월
스탈린그라드 전투 ·
과달카날 전역 | 11월
과달카날 해전 ·
횃불 작전 ·
노르웨이 중수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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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
1월
카사블랑카 회담 | 2월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 4월
바르샤바 게토 봉기 | 7월
쿠르스크 전투 ·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 9월
이탈리아 왕국의 항복(
이탈리아 내전 발발) | 11월
카이로 회담 ·
테헤란 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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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
4월
대륙타통작전 | 6월
바그라티온 작전 ·
노르망디 상륙 작전 ·
필리핀해 해전 ·
사이판 전투 | 7월
브레턴우즈 회의 ·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 8월
바르샤바 봉기 | 9월
마켓 가든 작전 | 10월
레이테 만 해전 | 12월
벌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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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
2월
얄타 회담 ·
드레스덴 폭격 ·
이오지마 전투 | 3월
도쿄 대공습 ·
연합군의 독일 본토 침공 | 4월
베를린 공방전 ·
오키나와 전투 | 5월
나치 독일의 항복 | 7월
포츠담 회담 |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만주 전략 공세 작전 ·
일본 제국의 항복 | 9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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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 }}}}}}}}}}}} |
영국 본토 항공전 Battle of Britain(The Blitz)[영] Die Luftschlacht um England[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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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중 서부전선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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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상공을 통과하는 He 111 폭격기[3] | ||
날짜 | ||
1940년 7월 10일 ~ 10월 31일 | ||
장소 | ||
영국 영공 및 해협 | ||
교전 국가 및 세력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틀:깃발| ]][[틀:깃발| ]][[캐나다 자치령| ]] [[틀:깃발| ]][[틀:깃발| ]][[폴란드 망명정부| ]] |
[[나치 독일| ]][[틀:국기| ]][[틀:국기| ]] [[이탈리아 왕국| ]][[틀:국기| ]][[틀:국기| ]] |
지휘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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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조지 6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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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아돌프 히틀러| ]]
전력 | 항공기 1,963대 | 항공기 2,550대 |
피해 규모 |
스핏파이어 403대 허리케인 631대 기타 항공기 513대[4] 총 1,547대 손실 전사 1,542명 민간인 23,002명 사망 |
Bf 109 610대 Bf 110 235대 폭격기 982대 총 1,887대 손실 전사 2,585명 |
결과 | ||
영국의 승리 | ||
영향 | ||
바다사자 작전 무산, 히틀러의 영국 침공 단념 |
[clearfix]
1. 개요
|
<rowcolor=white> 히틀러의 영국 침공 계획 |
영어명을 그대로 직역하면 '브리튼 전투' 또는 '영국 전투'이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공군끼리 치러진 전투였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관례적으로 '영국 본토 항공전' 또는 '영국 본토 방공전' 등으로 번역하는 편이며, 간혹 '배틀 오브 브리튼'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5] 비슷한 맥락으로 Siege of Malta도 ' 몰타 항공전'으로 번역되고, 독일에 대한 연합군의 공습과 방공작전도 ' 독일 본토 항공전'이라고 부른다.
존 키건 등 군사사가들에게 영국 본토 항공전은 군사작전에 앞서 본격적으로 제공권 장악 자체를 목표로 치러진 첫 대규모 공중전으로, 1차대전, 전간기 이래 육군을 부차적으로 지원하며 "하늘의 보병" 역할을 하던 항공기 역할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제공권 우위를 통한 국가방어 전략의 핵심역량을 보여준 전투이다.
2. 드리우는 전운
|
<rowcolor=white>
프랑스 침공 이후의 유럽 전황 초록색의 추축국 세력이 유럽 대륙을 상당수 장악한 모습이다.[6] |
이후 독일군은 영국을 견제할 정도의 부대만을 남겨두고 남쪽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고 결국 6월 25일 프랑스는 독일에 항복했다. 그리고 히틀러는 프랑스의 1차 대전 승전비를 공병을 동원해서 박살내고 항복문서 조인식에 쓰였던 차량도 다시 끌어내 그 차량 안에서 휴전협정을 맺게 했다.[9] 하지만 영국은 영상 편집을 동원해서 그런 히틀러의 행보를 비꼬면서 전의만 다지고 있었고, 희대의 선동가인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미국에서 구입한 톰슨 기관단총을 들고 있는 윈스턴 처칠의 사진을 가지고서 "갱 같은 처칠이 여러분을 사지로 내몰고 있습니다. 이 살인마를 쫓아내고 제3제국과 대영제국의 평화를 지켜냅시다 여러분!" 이라고 선전했지만 오히려 영국 사람들은 이러한 처칠의 거칠고 터프한 모습에 열광하기만 했다.[10]
이 기간동안 독일은 다양한 외교 경로를 통해 다양한 조건을 제시하면서 영국과의 강화조약을 요구하고 있었으나, 영국은 시큰둥한 태도로 일관하였다. 영국이 항복할 생각이 없다는 사실만 확인한 히틀러는 7월 4일 영국을 공격한다고 선언한다. 이는 됭케르크 철수작전 뒤 거진 한 달이나 지난 시점이었다. 만약, 프랑스를 항복시킨 직후에 쳐들어갔다면 영국이 궁지에 몰렸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의견도 있고 에르하르트 밀히 등은 그 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해권이 영국에게 있는 상황에 영국 본토를 공격하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의 상관인 헤르만 괴링도 자기의 영광이 최대로 빛날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지만, 히틀러는 영국의 항복 욕구를 과대평가하며 한 달 동안 각종 경로를 통해서 영국에 항복하라고 제안했다. 영국 정부도 고려는 해 보았지만 전쟁 이전부터 휴 다우딩 공군 대장의 지휘 아래 체계적인 방공망을 구축한 상태였으며[11] 국가적으로 완고한 태도로 독일에 맞서고 있었다. 따라서 영국은 얼마 안되는 시간이지만 항공기를 비롯한 전쟁 물자를 다량으로 생산하여 비축하고 방공 체계도 보강하는 등 필사적으로 대비하고 있었다.
어쨌든 총통이 영국 공격을 선언했고, 영국은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에 있긴 하였으나 일단 섬이었으니 수송선이 필수였다. 하지만 여기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나치 독일의 서자[12] 독일 해군 수상함대였다. 당시 독일 수상함대 전력이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이었는지 개전 직후 레더 제독은 "제군,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다. 용감하게 싸우고, 장렬하게 전사하라."라는 전투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원래 독일 해군에서도 히틀러가 집권하기 전부터 재무장 계획의 일환으로 Z계획이라는 해군 재건 작업이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긴 했지만 원래 해군 육성은 아무리 짧게 잡아도 10~20년은 걸리는 사업이다. 예정대로라면 1945년도에 1차 완료될 예정이었으나 1939년도에 폴란드를 때리자마자 영, 프가 바로 선전포고를 하면서 개전과 동시에 물자와 자금의 부족으로 사실상 폐기상태가 되었으며 남은 여력은 U보트 생산에 집중된 상태였다. 그리고 어떻게든 유지하고 찍어낸 수상함 세력은 노르웨이 전역에서 독일 육군을 드랍하는 것까지는 성공하였으나, 이후 영국 함대가 몰려오는 바람에 구축함과 순양함 다수가 털려버렸고, 기대를 모았던 신예함 비스마르크도 비스마르크 추격전에서 격침당한다. 이 때문에 강력한 영국 해군의 방어를 뚫고 상륙작전을 펼칠만한 여력이 없었다. 상륙작전을 준비하기는 했는데, 라인강에서 쓰던 민간 선박까지 차출하여 상륙정으로 마개조하는 게 보통이었고, 독일 해군 육전대 출신 참전자[13]의 증언에 따르면 이런 물건들로는 애초에 도해(渡海)는 무리였다고 한다. 즉, 영국 해군이 없어도 파도에 휩쓸려서 몽땅 물귀신 신세가 될 판이었다.
이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공군 원수 헤르만 괴링. 일단 됭케르크 철수작전에서 약간 체면을 구긴 괴링은 공군이 영국 공군과 해군을 청소해줄테니 해군은 그냥 수송만 하면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영국 공격의 작전지휘권을 부여받았다. 이로 인해 오로지 공군끼리 맞붙는 전투가 시작되었다. 물론 괴링은 해군을 들러리 취급하면서 "공군이 다 해결해줄 테니 해군 너님들은 육군만 실어주면 됨." 이라고 했지만, 레더는 쾌히 승낙했다. 왜냐하면 이제 무슨 일이 벌어져도 해군한테는 불똥이 튀지 않을 테니까 잘 되면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고, 안 되더라도 손해볼 건 없었기 때문이다.
전투를 앞둔 시점에서 영국군은 공군의 질적인 부분은 비등했지만 양에서 독일군에 뒤쳐져 있었다.[14] 하지만 영국군은 두 가지 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우선 첫 번째로 영국은 레이더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독일 공군의 움직임을 사전에 포착할 수 있었고, 독일 공군의 예상경로에 전투기들을 미리 배치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영국은 독일의 암호체계였던 에니그마를 해독해내고 있었다. 그 때문에 독일 공군의 작전을 미리 파악할 수 있었다. 게다가 레이다는 암호가 새어 나간다는 걸 가려주는 부수적인 효과도 있었다. 암호 해독으로 영국군이 사전에 대비해도 정작 독일군은 '암호가 뚫렸을 리는 없고, 레이더에 들켰으니 어쩔 수 없지'란 식으로 생각해버렸기 때문이다.
반면 독일군은 Bf 109가 영국 본토까지 갔다가 돌아오기에는 연료가 아슬아슬하다는 문제점이 있었지만 런던 남동부에서 싸울때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고 쌍발전투기 Bf110이 폭격기 호위를 할 수 있으며 폭격기가 스스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었다.
3. 전초전
사실 히틀러가 영국 공격을 금지하였지만 영국 본토 공격을 금지한 것일 뿐, 영국군을 공격하지 말라고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도버 해협에 영국 공군이나 선박이 보이면 모조리 개발살내라는 명령까지 내린 상황이었다. 이에 됭케르크에서 연합군이 철수하고 영국 본토 항공전이 시작되기 전까지 영불해협 상공에서는 거의 매일 산발적인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템즈강 하구는 '지옥불 모퉁이'라고 불리게 된다.당시 독일은 도버 해협을 봉쇄하겠다고 선언한 상황이었는데, 영국은 여기에 맞불을 놓듯 굳이 육로로 수송해도 상관없는 물자들까지도 반드시 도버해협을 경유하여 바다로 수송하도록 지시를 내린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영국의 수송선단을 공격하기 위하여 슈투카와 이를 호위하기 위한 전투기들이 출동하였고, 이러한 독일공군의 출격을 레이더 또는 수송선단의 무전으로 파악하면 "뭐? 독일 공군이 쳐들어왔다고?!"라면서 호커 허리케인과 슈퍼마린 스핏파이어가 출동하는 형태였다.
1940년 7월 10일, 독일 공군은 우리가 제대로 공격하면 영국 공군이 어떻게 나올 것인지 간보기 위하여 평소 10기 전후에 불과하던 공격부대를 확 늘려서 70기나 파견하였다. 이를 확인한 영국 공군은 그 즉시 54기의 전투기를 날려 보내 응수하였다. 도버 상공에서 맞붙은 양국 전투기들은 격렬한 공중전을 펼쳤으며, 영국이 3기의 허리케인과 1척의 수송선을 상실하였고, 독일은 4기의 Bf109E를 손실하는 결과를 보였다.
다음날 독일은 30기를 동원하여 영국의 수송선단을 공격하였고, 영국도 9기의 전투기를 동원하여 응수하였다. 이 전투에서 스핏파이어 2기를 상실하였지만, 그 사이 허리케인이 슈투카들을 성공적으로 요격하면서 선단공격은 좌절되었다. 같은 날 오후에는 독일이 55기를 동원하여 재차 공격하였고, 영국이 잘못 대처하는 바람에 고작 6기의 허리케인으로 요격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독일의 공격부대에는 Bf109가 없었고 그 덕분에 허리케인은 2기의 슈투카를 격추시킨 후에 유유히 귀환하였다.
이후 8월 11일까지 위와 같은 유형의 전투가 반복되었는데 이 기간동안 영국은 45대의 스핏파이어와 64대의 허리케인을 포함하여 115대의 전투기를 손실했고 독일은 53대의 bf 109를 포함하여 80대의 전투기, 22대의 급강하 폭격기, 100대의 중형 폭격기를 손실했다. 손실 항공기 자체는 독일이 많았지만 본토 방공에 필요한 전투기의 손실은 영국측이 많았기에 독일로서는 상당히 재미를 본 상황이었고 본격적인 결투를 앞두고 이런식으로 영국공군의 전력을 깎아내면 결과적으로 득이 되기 때문에 조종사들의 출격을 형식적으로 제지를 했어도 크게 간섭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영국공군은 이런 식의 전투를 달갑지 않게 생각했으며, 휴 다우딩 대장과 11 전투비행단 단장 키스 파크 소장은 가급적이면 전투기를 보존하려 하였다. 이로 인해 손실되는 영국 전투기와 조종사의 수가 점점 늘어나자 파크 소장은 혼자서 해협상공을 비행하고, 적기를 추적하는 것을 금지하는 엄명을 내렸다. 또한 다우딩 대장은 아예 선단 호위 못해준다며 배째라 식으로 나갔다. 당연히 해군의 원성과 내각(특히 처칠)의 압박이 있었으나 다우딩 대장은 전에도 그랬듯이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렇게 영국 공군이 해협에서 물러나면서 해협 전투는 독일의 판정승으로 끝나게 된다.
4. 영국 본토 항공전
하지만 영국은 이 기간동안 많은 교훈을 얻게 되었는데, 폭격기 요격에 초점을 맞춘 VIC 대형이[15] 전투기간의 전투에서는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고 독일 공군의 전술에 대해서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VIC대형이 비효율적인 것은 확인하였으나 시간이 촉박한 관계로 편제를 완전히 뜯어고치지는 못했고 여러가지 실험적인 대형들도 사용되게 되었다.더불어 이 기간동안 전투기 조종사들이 격추시키지 못한 전투기도 격추시켰다고 주장하였고, 군에서는 더 과장하여 홍보함으로써 사기를 높이려 하였다. 하지만 영국은 "그래, 적이 줄어들긴 들었겠지. 그래서 달라지는 게 뭔데?"란 태도로 받아들인 반면, 독일은 "이제 영국은 망했다"며 매우 즐거워하고 있었다. 이는 독일 공군 정보부를 책임진 베포 슈미트 대령의 작품(?)이었는데 그는 능력이 아니라 줄을 잘 타서 출세한 전형적인 낙하산 인사로, 비위를 맞추기 위한 엉터리 보고만을 계속 올림으로써 괴링에게 터무니없는 자신감만을 심어주었다.
물론 영국이 이 기간에 입은 손실이 적은 건 아니었으나 항공기 생산량은 이를 보충하고도 한참 남는 수준이었다. 더군다나 격추되어 전사한 조종사들도 많았지만 영국공군의 경우는 본토에 불시착해서 구조된 조종사도 많았던 반면, 적지에서 교전을 벌이던 독일군 조종사들은 격추되지 않더라도 기체에 이상이 생겨 적지 한가운데 불시착하거나 바다 한가운데 추락하는 경우도 있었고 연료부족에 시달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조종사들은 살아남아도 그대로 포로수용소행. 기체는 보충되지만 이렇게 잃은 조종사는 충원이 더디었으므로 영국 본토 항공전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독일에게는 손해였다. 하지만 독일은 이런 과장된 정보를 바탕으로 작전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는 건카메라의 부재로 정확한 격추수 집계에 한계가 있었던 루프트바페의 한계로 나중에도 쭉 문제가 되었기에 괴링은 전과집계를 포함한 정보 수집을 더 철저하게 하라고 지시하게 된다.
어쨌든 영국공군이 수송선단 호위를 중단하고 물러났지만 도버 해협을 통한 수송은 계속되고 있었으며, 독일 공군이 활개를 치고 있음에도 빈틈을 노려 물자를 수송하는 등 독일의 해협봉쇄 선언 자체를 무시했다.
또한 독일의 항공전 교리는 1차적으로 제공권 획득이였고, 제공권 획득을 위해 쌍발 폭격기에 집중투자했다. 쌍발폭격기가 적의 공군기지를 공격하고, Bf110이 폭격기를 호위하며, Bf109가 공중에 떠있는 적 항공기를 격추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공군기지와 방공시설 공격이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았다. 폭격기를 호위해야 할 Bf110은 변화된 전술적 환경에서는 영국 전투기의 상대가 되지 못했으며 영국의 전투기 그룹 기지와 연안 항공대 그룹 기지조차 구분 못 할 정도로 영국 방공망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결정적으로 영국의 전투기 생산에 대한 정보 부족 등 핵심적인 정보들이 부족했다. 막상 공격은 시작했는데 끝이 안 보이는 것이었다. 여기에 영국이 전투기 생산에 사활을 걸었기에 영국의 전투기 생산량이 독일의 생산량을 두 배 이상 압도하고 있었으나, 슈미트 대령의 독일 공군 정보부는 이 정보 역시 수집하지 못했거나 무시한 것도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4.1. 영국 남부 방공전의 시작
1940년 8월 1일, 히틀러는 괴링에게 바다사자 작전에 앞서 영국공군을 완전히 괴멸시킬 것을 주문하였다. 이에 따라 방공망, 비행장, 항공기 공장, 상륙목표 지점을 제외한 항구를 공격목표로 설정하였다. 그리고 추신으로 " 런던은 공격하지 않는다."를 명시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제2항공군을 지휘하던 알베르트 케셀링이 불만을 터뜨리면서 "런던에 불지옥을 보여주면 영국이 항복할 것."이라면서 강력하게 런던 폭격을 주장하였다. 심지어 히틀러 앞에서도 런던을 공격하자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지만, "자네 같으면 베를린이 폭격당했다고 항복하겠나?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영국 전투기나 쓸어버리게!"라는 핀잔만 들고 기각당했다. 이후로도 케셀링은 런던을 공습해야 한다고 계속해서 주장하였으나, 괴링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독일군은 독수리의 날이라는 작전명으로 8월 10일 영국 본토를 본격적으로 공습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당일날 날씨가 개판이었는 통에 8월 13일로 연기하였다. 그리고 8월 13일 아침에도 날씨 문제로 인하여 오후에 공격한다는 명령을 내린 상황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요하네스 핑크 대령 휘하의 공격부대에게는 이 명령이 전달되지 못하여 고대로 이륙을 해버렸다. 케셀링이 다급히 귀환 명령을 내렸지만, 호위전투기들에게만 전달되어 폭격기 74기는 그대로 영국을 향해 날아갔다. 폭격기들이 무전을 수신하지 못한 이유는 보급된 무전기의 불량이 원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핑크 대령이 명령을 들었음에도 상관없다면서 공격을 감행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영국 역시 폭격기 편대의 수를 잘못 파악하여 고작 6기의 전투기만이 요격에 나섰고, 당연히 작전 실패. 4기의 폭격기를 잃은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어쨌든 목표였던 비행장 폭격에는 성공하였으며,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있던 독일군 역시 놀라운 성공에 환호하였다. 한 가지 흠이 있었다면 비행장 무력화, 전투기 10기 지상 격파라는 보고를 올렸고 그걸 곧이 곧대로 믿었다는 점이다. 실제 비행장은 10시간만에 말끔하게 복구되었고, 격파했다고 보고한 전투기는 정작 전투기가 아니라 브리스톨 블렌헤임 폭격기였다. 그리고 이것이 독일의 첫 영국 본토 공습이었다.
그리고 오후가 되자 진짜 폭격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번엔 영국이 실수하지 않았다. 레이더에 나타난 정보를 바탕으로 각 지역을 담당하는 부대에 비상출격 명령을 내렸다. 특히 레이더를 통해 정확히 적의 위치와 수효를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군은 적재적소에 적당한 수의 편대를 배치할 수 있었으며, 거의 모든 독일 편대가 요격당했다. 일부 운이 좋았던 부대만이 요격을 피해서 성공적인 폭격을 할 수 있었다. 독일 조종사들은 귀환하여 영국 전투기 90기 가량을 파괴하였고, 비행장 6개를 무력화시켰다고 보고하였다. 하지만 실제 영국은 13기의 전투기만 격추되었고, 지상에서 파괴된 항공기들은 역시 대부분 폭격기였다. 그리고 무력화됐다는 비행장은 다음날 모두 복구 완료. 이 뻥튀기 보고를 별 여과없이 믿고 다음 공격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날 영국은 13대의 전투기를 포함하여 24대의 항공기가 격추되었고 독일은 48대의 항공기를 손실하였다. 폭격의 성과도 대단하지 않았기에 독일의 첫 본토 공습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여기에 베포 슈미트 대령의 엉터리 보고에 따르면 영국 남동부를 담당하는 11비행단 전력이 반으로 줄어들어 영국은 북부와 중부에서 병력을 이동시켰을 것으로 예측하였고, 남동부에서 11 비행단을 상대하는 동안 스칸디나비아에서 놀고 있는 제5 항공군을 동원하여 취약한 북부와 중부 지역을 공격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단다. 하지만 이것은 독일군의 치명적인 오판이었고, 영국 측은 울트라를 통해 무선감청까지 해서 이 사실을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여기에다가 거리의 문제로 Bf109는 올 수 없는 상황까지 겹쳤다.
좋군, 아주 좋아! 낭보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공중과 지상에서 영국 전투기를 다수 격파했습니다!
고맙네, 슈미트. 거기 놔두고 가도록.
괴링 원수 각하께서는 매우 기꺼워하실겁니다. 오늘까지 우리는 300기 이상의 항공기를 격파했습니다. 이건 영국 항공기의 절반에 해당하는 숫자입니다 여러분.
정보부에서는 기분좋은 보고를 올릴 수 있겠군. 하지만 문제는 우리 폭격기들이 계속 요격당한다는 거야.
영국 놈들이 북쪽의 예비병력까지 투입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 다음부터는 해안에 공습을 집중시키도록 하지. 그런 다음 노르웨이의 제5항공군으로 북쪽을 두들기는 거야.
그렇지만 장군님, 우리 전투기는 거기까지 호위로 붙을 수가 없습니다만……?
하지만 영국 전투기의 작전반경도 벗어난 곳이지. 제아무리 스핏파이어가 빨라봤자 남쪽에서 북쪽까지 순식간에 날아올 순 없을 거 아닌가!
공군 대전략 中[16]
고맙네, 슈미트. 거기 놔두고 가도록.
괴링 원수 각하께서는 매우 기꺼워하실겁니다. 오늘까지 우리는 300기 이상의 항공기를 격파했습니다. 이건 영국 항공기의 절반에 해당하는 숫자입니다 여러분.
정보부에서는 기분좋은 보고를 올릴 수 있겠군. 하지만 문제는 우리 폭격기들이 계속 요격당한다는 거야.
영국 놈들이 북쪽의 예비병력까지 투입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 다음부터는 해안에 공습을 집중시키도록 하지. 그런 다음 노르웨이의 제5항공군으로 북쪽을 두들기는 거야.
그렇지만 장군님, 우리 전투기는 거기까지 호위로 붙을 수가 없습니다만……?
하지만 영국 전투기의 작전반경도 벗어난 곳이지. 제아무리 스핏파이어가 빨라봤자 남쪽에서 북쪽까지 순식간에 날아올 순 없을 거 아닌가!
공군 대전략 中[16]
악천후로 인해 출격이 하루 연기되어 8월 15일 제2항공군, 제3항공군이 1,500기 이상의 항공기를 동원하여 남부를 공격하는 동안 제5항공군은 북해를 가로질렀으나, 당연히 영국 공군 13전투비행단의 요격을 받고 20%가 격추당했으며, 대파된 기체만 30%가 넘었다. 물론 조종사 손실도 엄청났다. 결국 너무 큰 피해를 입은 제5항공군은 영국 작전에서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독일은 영국이 자국 영토에 온통 레이더를 깔아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8월 18일에 독일은 영국 공군을 파괴하기 위하여 대규모 공격을 감행한다. 이날 영국은 지상파괴 8대를 포함하여 35 ~ 42대의 전투기를 손실했고 독일은 69 ~ 71대의 항공기가 격추되었다. 비록 손실비는 영국에게 유리한 상황이었으나 양쪽 다 이런 식의 손실이 계속되는 상황은 감당할 수 없었다. 이날 양쪽이 입은 손실은 영국 본토 항공전 기간 중 가장 큰 규모였으며, 영국 항공전의 결정적인 날인 배틀 오브 브리튼 데이보다 더 큰 규모였다. 이러한 이유로 영국에서 이 날은 '가장 힘든 하루(The Hardest Day)'라고 알려져 있다.
4.2. 비행장, 레이더 기지 공습
독일군은 상황을 분석하기 시작하였는데 우선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슈투카가 제 역할을 못한다는 사실을 파악하였으며 그대로 전선에서 퇴출되었다. 그리고 폭격기를 보호해줄 것으로 예상했던 Bf110이 변화된 전술적 상황에서 자신의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지 못한다는 문제점을 확인하고 폭격기 호위에서도 제외시켰다. 대신 Bf109E가 호위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폭격기 조종사들은 손실이 커지자 좀 더 잘 호위해줄 것을 요구하였고, 이에 괴링은 Bf109E에게 근접 호위를 명령했다. 이에 전투기 조종사들은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괴링은 이런 불평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을 겁쟁이라고 매도했다. 그리곤 노기를 가라앉히면서 이 정도면 견책은 충분히 했으니, 이제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지 지원해줄테니까 한번 말해보라고 했는데...정말 말도 안되는 명령이었어요. 전투기 조종사는 자신의 속도와 고도를 마음대로 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쪽에서는 스핏파이어가 날아오는데 폭격기에 바싹 붙어서 비행하는 건 전투기는 물론이고 폭격기한테도 별 도움이 안됐어요. 결국 우리 쪽 인명손실만 더 커졌죠.
귄터 랄, 히스토리 채널 <2차 대전 최대의 공중전>의 인터뷰에서
귄터 랄, 히스토리 채널 <2차 대전 최대의 공중전>의 인터뷰에서
그전 8월 20일, 영국군은 돌연 군부 내의 모든 통신을 두절 시키고 코드와 암호를 바꿔버렸다. 더 이상 독일군은 영국군이 있는 있는 위치를 알아내서 공격할 수가 없게 되었다. 바다사자 작전은 열기를 잃어갔다. 8월 24일 괴링은 다시 한번 영국 공군 기지, 레이더 기지, 항공기 생산 시설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또한 그동안 수집한 무선상황과 전황을 분석하여 주요 공군기지를 목표물로 설정하였다. 그리고 일부러 해협상공에서 오락가락하면서 레이더를 통해 예상위치를 파악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랄 등의 반발과는 달리[18] 근접 호위로 인하여 영국 측의 '스핏파이어가 독일 전투기를 상대하는(=끌어내는) 사이에 허리케인이 폭격기만 요격하는' 전술의 효율도 떨어졌고 상대적으로 안전해진 폭격기는 안심하고 목표물에 폭탄을 떨어뜨릴 수 있었다. 그리고 호위에서 제외된 Bf110에도 폭탄을 달아서 목표지점에 폭탄만 떨어뜨리고 잽싸게 돌아오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그리하여 2주간 33회의 대규모 공격 중 24회가 영국 공군 기지에 이루어지게 된다. 주로 공격받은 기지는 비긴 힐, 호른처치로 각각 4회의 공격을 받았고 데번과 노스 웰드가 각각 2회의 공격을 받았고 다른 기지들도 공격을 받았다. 그리고 이 무렵 독일은 본격적으로 야간공습을 시도하였으며 영국은 아직 야간 방공 체계가 완성되지 못했던지라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였고 스코틀랜드 인근지역까지 얻어맞고 있었다.
캔필드: 일 한번 잘 돼가는구만! 우린 날마다 날아서 독일놈들하고 싸우는데 올 때마다 구멍만 잔뜩 늘어나고 말이야!
트래퍼드 리맬러리: 더 많은 적을 잡으려는 겁니다! 목표물에 폭격하기 전의 폭격기 10대보다 폭격을 끝낸 폭격기 50대를 잡는 게 훨씬 낫지요!
키스 파크: 그 목표물이 내 비행장이란 것을 잊지 말게, 리맬러리! 그리고 자넨 50대는 커녕 10대도 못잡을걸?
휴 다우딩 : 그만 두시오! 지금 두 분은 중요한 걸 잊고 있소. 지금 있는 이들은 죽거나, 다치거나, 그렇지 않으면 쉴새없이 격무에 시달리고 있소. 지금 우리한테 필요한 건 소편대니 대편대니 하는 게 아니오! 우리에겐 조종사가 필요하오. ...그리고 주님의 가호도.
공군 대전략 중
키스 파크: 그 목표물이 내 비행장이란 것을 잊지 말게, 리맬러리! 그리고 자넨 50대는 커녕 10대도 못잡을걸?
휴 다우딩 : 그만 두시오! 지금 두 분은 중요한 걸 잊고 있소. 지금 있는 이들은 죽거나, 다치거나, 그렇지 않으면 쉴새없이 격무에 시달리고 있소. 지금 우리한테 필요한 건 소편대니 대편대니 하는 게 아니오! 우리에겐 조종사가 필요하오. ...그리고 주님의 가호도.
공군 대전략 중
원래 영국측의 작전계획으로는 남동부에서 제11비행단이 독일 공군과 싸우는 사이 트래퍼드 리맬러리의 제12비행단이 제11항공단의 비행장을 지켜주기로 되어 있었는데, 리맬러리는 전공을 세우기 위한 독일기 요격에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파크는 여러번 리맬러리에게 자신의 기지를 지켜달라고 요구하였으나 리맬러리는 이를 무시했고 이를 보다 못한 다우딩이 리맬러리에게 파크에게 협조하여 기지를 지키라고 명령하였으나 이에 반발하였다. 나중에는 마지 못해서 이를 받아들였으나 직속부하였던 더글러스 베이더가 제안한 대편대 전술을 수용하고 있었는데, 20 ~ 30기 이상의 전투기가 상공에서 편대를 이루는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 때문에 일분일초가 급한 상황에 독이 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11비행단의 본진방어가 취약하여 방어망이 뚫리면 그대로 폭탄세례를 얻어맞는 상황이었다. 이 문제로 인해 키스 파크와 리맬러리는 회의에서 만나면 서로 디스질하고 싸우는 게 일상이었고 다우딩은 이 두 사람을 중재하느라 바빴다.
11비행단은 28개의 비행대대로 구성되어 15개의 비행대대로 구성된 12비행단보다 훨씬 큰 전력을 보유했으니 그만큼 기지를 잘 지켜줘야 하는 상황인데 저러고 있었다. 12비행단은 15개의 비행대대중 7개가 허리케인으로, 6개가 스핏파이어로 구성되어 있으니 질적으로는 11비행단에 뒤쳐지지 않는데도 대편대 전술을 고집하고 있었다. 파크는 됭케르크 철수작전의 전훈으로 대편대 전술이 시간이 오래 걸리고 제어하기 어려워서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리맬러리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던 것.[19] 이로 인하여 11비행단의 조종사들은 독일 전투기하고 죽도록 싸우고 오니 독일 폭격기가 구멍을 뻥뻥 뚫어놓은 비행장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 상황에 질려버린 파크는 12비행단에 엄호 요청을 할 때는 반드시 전투기 사령부를 거치도록 지시한다.
이 무렵 독일군은 제대로 잘못된 정보를 근거로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영국 전투기가 200기 전후만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영국이 보유한 전투기는 850대가 넘어가는 상황이었다. 이 기간동안 독일이 거센 공격을 퍼부었음은 명백하지만 이러한 공격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가 않다.
통설은 9월 4일까지 지속된 독일의 공격에 11비행단의 전력은 궤멸 위기에 몰렸고 이 기간 동안 470여기의 전투기가 상실되었는데, 독일의 효과적인 전술로 인해 항공기 공장도 파괴되어 손실을 보충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수많은 조종사 요원이 상실되어 훈련병이나 다른 기종을 조종하던 조종사들을 동원하여 땜빵하였고, 더 나아가 당시 언어 소통문제로 동원하지 않았던 외국인 조종사들까지 끌어다 써야할 정도로 처절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 이러한 통설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영국의 전투기 조종사 인원이 7월부터 계속 증가하였는데 7월에 1,200명이었으나 8월에는 1,400명으로 오히려 200명이 늘어났으며 9월 중순까지 100여명의 조종사가 더 늘어나서 조종사의 숫자는 결코 감소한 적이 없으며 전투기 또한 매월 450대 이상을 생산하고 있어서 전력의 감소가 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동안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독일 조종사의 손실 또한 만만하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오히려 전투기 조종사의 숫자만을 따지면 영국의 조종사가 1,500명이고 독일의 조종사가 1,200명으로 오히려 루프트바페의 조종사가 더 부족했다는 것. 리처드 오버리는 이 결과를 두고 '만약 전투기 사령부가 소수라면, 독일 조종사는 더 소수이다.'(If Fighter Command were 'the few', the German fighter pilots were fewer.)라고 평가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양측의 전투기 조종사들이 극심한 격무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당시를 회상하던 양국 공군 조종사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피곤했을 때가 없었다"고 말했다. 영국 쪽은 전투기에서 내려와서 눕기만 하면 세상 모르고 곯아떨어지기 일쑤였는데 숙소 바로 옆에 폭탄이 떨어진 것도 모르고 잤으며 독일 쪽은 하루에 10번씩 출격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터널 증후군을 얻은 사람도 있었지만 군의관의 진단도 무시하고 계속 출격했다고 한다.[20] 다우딩은 이런 상황을 두고 "보충된 조종사들은 경험이 부족하며, 이미 있는 이들은 죽고, 다치고, 휴식할 시간 없이 격무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4.3. 런던 대공습
8월 24일 야간 폭격이 이루어지던 어느 날, 독일군 폭격기 두 대가 길을 잃어 영국 상공에서 헤매다가 대공포화를 받게 되자 이런 상황에 처하면 언제나 그래왔듯이 급히 폭탄을 버리고 기지로 복귀했다. 문제는 이 눈먼 폭탄이 떨어진 곳이 런던 시가지였다는 거고, 이것을 맞은 런던의 피해는 여간 막심한 게 아니었다. 양측 수뇌부 모두 이는 야간작전중에 벌어진 사고 정도로나 안일하게 생각했고, 실제로 8월 24일 이후로 런던에 대한 폭격은 더 이상은 없었다. 윈스턴 처칠 역시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전부터 벼르고 있던 차에 "더러운 제리[21]들이 민간인을 공격했다!"라고 주장하면서 베를린 폭격을 주장하였고, 이는 그대로 실현된다.
그동안 별다른 임무가 없었던 존 옥슬리 장군이 지휘하는 폭격기 사령부[22]는 8월 25일 밤 베를린에 암스트롱-휘트워스 휘틀리 폭격기[23]로 야간 폭격을 시작하였다. 괴링은 두 번 다시 베를린이 폭격당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호언장담하였으나 다음날 또다시 폭격을 당했다. 여기에 대한 아주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괴링은 평상시에 베를린의 방공망이 완벽하다고 호언장담하며 "베를린 상공에 적 항공기가 하나라도 나타난다면 나를 마이어[24]라고 불러도 좋다.", 즉 베를린에 적군 비행기가 하나라도 보이면 내 성을 간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러다가 뜻밖에도 저 일이 일어나버렸으니 사람들은 그를 기꺼이(?) '마이어 씨'라고 불러주었고 히틀러한테도 질책당하는 망신을 당하게 된다.
한편으로 독일군 지휘부는 작전의 진행 상황이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선에서는 한참 전부터 조만간 영국 공군은 전멸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속해서 영국 공군의 요격이 계속되고 있었고 이로 인한 피해도 상당한 수준이었기 때문. 또한 이전부터 케셀링은 런던 때리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었고 한스 에쇼넥 또한 영국 공군은 망하기 직전이니 런던을 공격하면 남은 영국 공군 전력을 전부 끌어내서 소탕할 수 있으며 사기 또한 확실히 죽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어젯밤, 영국 놈들은 베를린에 폭탄을 떨어뜨렸습니다. 하지만 이는 비겁한 영국 놈들은 감히 대낮의 독일 상공에 기어들어올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을 뿐입니다. 그들이 폭탄을 떨어뜨린다면, 우리는 그 열 배, 백 배, 천 배의 폭탄을 떨어뜨릴 것입니다. 그들의 도시를 하나도 남기지않고 잿더미로 만들어버릴 것입니다! 이제 둘 중 하나가 참혹한 패배자가 될 때가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사회주의 국가 제3제국이 아닙니다! 영국인들은 궁금해합니다. 왜 안 오지? 왜 독일이 오지 않지? 기다리라고 하세요. 기다리라고 하십시오. 그는 옵니다. 그는 옵니다!
― 영화 《 공군 대전략》, 아돌프 히틀러의 연설
― 영화 《 공군 대전략》, 아돌프 히틀러의 연설
결국 독일군은 런던을 공격하기로 결정하게 되었고 히틀러는 런던을 공격하되 테러 폭격이 아닌 산업시설, 통신 시설 등 주요 시설을 우선적으로 공격해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일단 런던 공격이 결정되자 예전부터 런던을 공격하자고 주장했던 케셀링은 이 결정에 열렬히 환영하였으나 제3항공군 사령관 후고 슈페를레 장군은 잔존 영국기가 900기는 될 것이고 Bf 109의 항속거리가 짧아서 위험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소수의 의견이었고 런던을 폭격하면 자연스레 영국 전투기가 런던으로 몰려들 것이고 오히려 독일 전투기들이 영국 전투기를 일소할 수 있는 기회이고, 9월 21일로 예정된 바다사자 작전에도 큰 도움이 된다는 의견에 따라 9월 7일 런던 폭격이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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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폭격을 위해 동부 런던 상공을 지나가는 He 111 9월 7일 당일의 사진이다. |
파크 : 또 런던이군요...
다우딩 : 그래. 하지만 지금으로선 어쩔 도리가 없네. 하지만 이대로 괴링이 런던을 계속 공격한다면... 우린 전력을 회복할 시간을 벌 수 있어.
파크 : 놈들이 우리 비행장을 노리는 게 아니니까 불만을 가질 수만도 없지요.
다우딩 : 더 중요한 건 말이야, 파크... 저들의 전투기 연료가 런던 위에서 10분 정도밖에 버틸 양만 남게 된다는 거야. 그렇게 되면 폭격기도 제대로 엄호를 받지 못할테고 말이야. 공격 방향을 런던으로 돌린 건 독일의 가장 큰 실수가 되겠지!
-영화 《 공군 대전략》
다우딩 : 그래. 하지만 지금으로선 어쩔 도리가 없네. 하지만 이대로 괴링이 런던을 계속 공격한다면... 우린 전력을 회복할 시간을 벌 수 있어.
파크 : 놈들이 우리 비행장을 노리는 게 아니니까 불만을 가질 수만도 없지요.
다우딩 : 더 중요한 건 말이야, 파크... 저들의 전투기 연료가 런던 위에서 10분 정도밖에 버틸 양만 남게 된다는 거야. 그렇게 되면 폭격기도 제대로 엄호를 받지 못할테고 말이야. 공격 방향을 런던으로 돌린 건 독일의 가장 큰 실수가 되겠지!
-영화 《 공군 대전략》
첫 런던 폭격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동안 독일 공군이 런던을 공격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남동부로 오는 줄 알고 있었기에 영국 공군이 전혀 예상을 못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독일 폭격기 편대는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런던으로 유유히 갈 수 있었으며, 당시 방공시설들이 남동부에 주로 배치되어 있었기에 대공포의 위협도 거의 없었다. 그 결과 런던 곳곳이 불바다로 변하였다. 뒤늦게 도착한 영국 전투기들이 47기 정도의 독일기를 격추시킨 정도였다. 이를 영국군의 방공 능력이 사실상 상실되었다고 판단한 괴링과 독일 공군은 크게 만족하였다. 9월 8일에도 역시 별다른 피해 없이 런던을 폭격할 수 있었다. 한편 11비행단은 그동안 격전을 치르면서 입은 손실을 회복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한편 독일군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 폭격 작전으로 영국 육군 및 홈가드에겐 큰 혼란이 벌어졌다. 독일이 런던 폭격을 가하기 직전, 독일군의 움직임이 뭔가 심상치 않음을 안 영국군은 본토 방위 작전인 '크롬웰'의 1단계를 발령했다. 여기서 1단계는 "독일군이 침공할 가능성이 높아졌으므로 경계 태세를 최고 단계로 잡을 것"이었다. 그런데 이 세부 내용이 홈가드에게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홈가드 대원들은 이 명령을 "독일군이 지금 공격해오고 있다"라는 것으로 엉터리로 해석해버렸다. 이 때문에 열의가 지나치게 넘친 홈가드 대원들이 경비하고 있던 다리나 주요 시설물들을 파괴하려 하고, 야간에 움직이던 가축 등을 독일군으로 오인하고 총을 쏘고 경보를 알린다며 마을의 종들을 울리는 등 큰 소란이 벌어졌다. 게다가 "독일군이 공격하고 있다"라는 홈가드의 보고를 받고 정규 육군부대도 덩달아 움직이는 등 큰 혼선을 빚었다. 이런 혼란은 다음날에야 진정되었다.
9월 9일, 마침내 어느 정도 전력을 복구한 11비행단이 출격하여 해협상공에서 런던 직전까지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피해를 입은 폭격기들은 폭탄을 아무 곳에나 막 투하하고 그냥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겨우 런던에 도착하고 보니 이번에는 엄청난 수의 영국 전투기들이 달려들고 있었다. 런던까지 날아오는 동안 남동부로 오는 것보다 시간이 더 많이 걸렸기 때문에 12비행단이 대편대를 구성할 시간이 충분했던 것이다. 영국 남동부를 방어할 때에는 쓸모없던 더글라스 베이더의 대편대 전술이 그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여기에 영국 공군 레이더 기지는 독일 공군이 퇴각하는 순간에 한번 더 전투기를 내보내곤 했으며, 제10비행단마저 이 공격에 가세하곤 했다.
그날은 제가 겪은 가장 끔찍한 날이었습니다. 우리는 런던 상공에서 기수를 돌렸어요. 그러다가 영국 전투기의 공격을 받았죠. 계기판에는 곧 빨간 연료 경고등이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무전으로 이런 말이 들려왔죠. "엔진 정지! 반복한다, 엔진 정지!" 그리고 21대의 전투기에서 낙하산이 펴졌죠. 저와 다른 한 명은 다행히 구조되어 목숨을 건졌지만 다른 이들은 모두 익사했어요.
― 울리히 슈타인호퍼, 히스토리 채널 《2차 대전 최대의 공중전》
― 울리히 슈타인호퍼, 히스토리 채널 《2차 대전 최대의 공중전》
이 상황에서 Bf 109E 전투기의 부담은 더욱 커졌다. 이들은 런던까지 가는 동안 11비행단의 집요한 공격을 상대해야 했고, 런던에서는 12비행단의 대편대를 상대해야 했다. 게다가 항속거리 문제로 인해 런던 상공에서의 체공시간은 5~10분에 불과했다. 그 사이에 영국 전투기를 제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고 게다가 연료까지 다 바닥을 드러내가면서 눈물을 머금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지체를 했다가는 해협이나 프랑스 해협에 불시착해야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또다시 11비행단이 물고 늘어졌다. 결국 전투기 부대와 폭격기 부대의 손실이 날로 증가하자[25] 독일 공군은 9월 11일 주간 폭격을 전격 중단하고 야간 공습으로 전환한다. 그래서 손실은 줄었으나 영국 전투기의 씨를 말린다는 계획 자체가 틀어져버렸다. 이후 런던에 대한 야간 공습은 70일 가량 계속되었다.
4.4. 배틀 오브 브리튼 데이
한편 히틀러는 9월 21일 바다사자 작전 수행을 앞두고 9월 17일까지 영국 공군을 완전히 괴멸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특히 예상과는 다르게 전개되는 전황에 다급해진 괴링은 9월 14일 다시 주간폭격 재개를 선언하고, 9월 15일 다시 1,100 여대의 항공기를 동원하여 런던 공습을 감행하였다. 영국은 레이더를 통해 폭격기의 접근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630여기의 전투기를 날려보내 응전하였다.먼저 요격에 나선 것은 11항공단으로 영국 본토 항공전 내내 영국의 기본적인 전술이었던 스핏파이어가 Bf109E를 상대하고 그 사이 상대적으로 비행성능이 떨어지는 허리케인들이 폭격기들을 탈탈 털어먹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그 결과 상당수의 폭격기가 피해를 입고 격추당하거나 폭탄을 버리고 귀환했다. 간신히 런던상공으로 접어든 공격부대는 100기 이상의 전투기로 구성된 12항공단의 대편대와 맞닥뜨려야 했다. 그 결과 많은 수의 폭격기들이 격추당했으며, 독일군은 별다른 성과없이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날 독일 공군은 폭격기 56대, 전투기 12대가 격추당하는 피해를 입은 반면 영국 공군의 피해는 항공기 29대를 손실하는데 그쳤다. 9월 15일은 배틀 오브 브리튼 데이라 하여 영국 공군에겐 가장 자랑스러운 전투로 꼽힌다.
이 날의 전투가 얼마나 격심했는지는 당시 처칠과 키스 파크와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다. 11항공단 사령부에서 상황을 주시하던 처칠이 키스 파크에게 출격하지 않은 예비 전력이 얼마나 있는지 물어 보자 키스 파크는 "단 한 대도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모든 전투기를 이륙시켰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4.5. 영국 공격의 실패
괴링은 이와 같은 참담한 결과에 큰 충격을 받았고, 9월 17일까지 계속되는 공격에서 더 큰 피해를 주어 만회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9월 16일과 17일 날씨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항공작전이 불가능해졌고 그 사이 영국 공군은 꿀맛같은 휴식을 취하면서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결국 히틀러는 공군의 실패로 인해 9월 21일에 바다사자 작전을 시행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보고를 받게 되었고, 작전의 연기를 선언하였다. 전면적인 공격은 일단 접어두기로 하였지만 그래도 영국에 대한 공습을 계속하도록 주문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독일군에게 구체적인 작전지침 따위 없이 런던을 폭격하라는 명령만이 계속 반복될 뿐이었다. 이로 인해 9월 27일까지 주간 폭격은 계속되었으나 피해가 계속되자 다시 야간 폭격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히틀러는 10월 13일 영국침공은 1941년 봄에나 하게 될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영국 침공이 연기되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공인하였다. 그럼에도 독일 공군의 야간 폭격은 계속되었지만 10월 31일을 기점으로 공식적으로 영국 공군의 전력을 소멸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항공작전은 중지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5. 계속되는 전투
독일은 산발적인 야간 공습을 계속했다. 그리고 영국은 아직 이에 대한 대응체계가 미완성인 상태였던 까닭에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예로 11월 14일 코번트리 대참사를 꼽을 수 있다. 군수공장이 몰려있던 코번트리에 독일 공군은 야간 공습을 감행하였고 사실상 지도에서 지워질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 이 폭격에 대해 독일군은 지도에서 도시를 지워버린다는 의미로 코번트리화라는 단어를 붙였으며, 이런 식의 야간 공습이 계속되었고 그런대로 재미를 보던 독일 공군은 12월 29일, 런던에 대대적인 야간 폭격을 감행하였다. 그 결과 런던 역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영국은 여전히 굳건하게 버텨내고 있었다.이런 식의 독일 공군의 산발적인 야간 폭격은 1941년 3월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히틀러가 소련 침공을 준비하면서 프랑스 북서부 해안에 있는 공군을 서서히 동부전선으로 옮겨야 했으므로 공습의 빈도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영국 공군을 상대할 정도의 전력만 남겨둬야 했는데 이 경우 영국 공군이 오히려 기세등등하여 역공을 가할 수 있었다. 특히 1941년에 접어들면서 영국 폭격기 사령부가 독일 도시에 대한 보복 공습을 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뜨거운 맛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5월 10일 500여기 이상의 폭격기를 동원한 런던 야간 공습을 감행하였다. 그 결과 런던이 다시 불바다가 되었지만 독일군의 야간 공습을 상대하면서 실력이 늘어난 영국 공군과 런던의 대공포대의 활약으로 20여기 정도를 격추시킬 수 있었다. 이 공습을 마지막으로 독일 공군은 런던에 대한 야간공습을 중지하였다.
1941년 중반에 접어들어 항공전이 막을 내리게 되었을 때, 독일의 항공기 손실은 독일이 감당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의 120%~180%를 초월했고 탄약, 항공유, 항공폭탄, 정비 부품 등의 공급도 독일의 역량을 1.5배 가까이 뛰어넘어 버렸다. 더욱 치명적인 손실은 바로 조종사들이었다. 1939년부터 경혐을 쌓은 수많은 베테랑들이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소멸되었다.[26] 이 손실 때문에 독일 공군은 소련 침공 당시 중국 공군 수준의[27] 역량밖에 없는 소련 공군 상대로 고전하는 등 망신을 면치 못한다.
21세기 들어서 지속적으로 당시 독일의 전력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독일의 총력전 역량에 대한 의문이 여러 차례 제기되었고, 최근 학계에서는 사실상 영국 본토 항공전이 끝난 시점에 독일은 전쟁을 수행할 능력을 다 써 버렸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서 1940년 후반부터 이미 독일의 패전이 시작되었다고 보며, 루프트바페는 1940년 이후로 몰락해 버렸다고 여긴다. 실제로 소련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고 여겨져 왔던 바르바로사 작전에서도 독일군의 진격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고, 물자 공급선이고 방어선이고 하나같이 개판이었으나 소련이 군구제를 도입했다가 겨울전쟁으로 쓴맛을 보며 빠르게 철회하는 전술 공백의 시기였던 동시에 대숙청으로 지휘부가 다 쓸려나갔던 여러 가지의 악재가 겹쳐서 밀렸던 것 뿐이라는 것이다.
레닌그라드 전투와 키예프 전투를 보면 독일군의 전쟁 수행 역량에 대한 근본적인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전까지는 독일군이 곧바로 모스크바로 밀어닥치지 않고 레닌그라드와 키예프로 꺾은 것이 패착이라고 여겼지만[28] 최근 연구가 진행되면서 '그랬다간 우크라이나 군구의 병력에게 포위섬멸됐을 것이다'라는 평가가 많이 나오고 있다. 즉 하인츠 구데리안이 "모스크바로 병력을 더 보냈으면 모스크바를 함락시킬 수 있었다"고 한 것은 사실이지만, 모스크바를 함락시켜도 우크라이나 병력이 북상하여 보급로를 끊어 버리면 모스크바의 독일군은 꼼짝없이 포위섬멸되었으리라는 것이다. 병력을 모스크바로 다 몰아서 보내면 우크라이나에서 포위섬멸되고, 병력을 우크라이나와 모스크바로 나눠 보내면 모스크바를 함락할 전력이 부족해지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던 것이 당시의 독일이었고, 히틀러는 그나마 가능성이 보이는 후자를 선택한 것 뿐이었다는 평가도 많이 나온다. 다시 말해서 바르바로사 작전은 독일의 역량으로 어림없는 작전이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독일의 산업공학 수준[29], 병력의 질[30], 무기 보급 체계[31][32] 등에 있어서[33] 독일은 끔찍함의 극치였다. 그런데도 이런 독일군이 유럽 최강의 육군을 가진 프랑스를 이길 수 있던 것은 장교와 부사관들이 매우 우수했기 때문이었으며 독일의 파일럿들은 세계 최강의 능력을 갖고 있었다. 막장일로를 달리는 독일군을 멱살 잡고 프랑스 함락까지 끌고 갔던 건 우수한 장교와 부사관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장교 중에서도 가장 귀중한 인적 자원인 파일럿들이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녹아버렸다.
독일군이 물량에서 앞서 있었음에도 영국군의 효과적인 작전으로 영국을 끝내 점령하지 못했기 때문에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처럼 서부, 동부 양쪽 전선에서 싸우다가 패배한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아돌프 히틀러의 계획을 틀어지게 만들었다.
이후의 전역은 독일 본토 항공전으로 이어진다.
독일도 이를 인식했는지 1942년 4월과 5월에 바데커 공습(Baedeker Blitz)이라 하여 엑세터와 바스, 노리치, 요크 등 영국의 주요 도시를 폭격했다. 이 작전에서 총 1,637명의 영국 민간인 사망자가 나왔고, 총 5만 채 이상의 집이 불에 탔다. 그 외에도 독일 공군이 영국을 타겟으로 한 대규모 폭격은 1944년에 있었다. 그게 바로 스타인복 작전(Operation Steinbock)이다. 1944년 1월부터 5월까지 전개된 작전으로 총 500대 이상의 독일군 항공기가 동원되었다. 수도 런던과 브리스톨, 헐 그리고 카디프에 총 14번의 공습이 있었다. 당시 런던 사람들은 이를 작은 공습이라 불렀는데, 총 1,500명의 민간인이 사망하고 3,000명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독일 본토 항공전에서 나온 것과 같이, 이미 1942년부터 공습을 당했고, 1943년과 1944년에는 그 공습이 독일 전역으로 퍼져서 수도 베를린을 포함하여 그 피해가 극심했다. 여기서 독일은 영국을 상대로 또 다른 공습을 시도 했는데, 그게 바로 미사일을 이용한 공습이었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독일은 V-1 로켓 미사일을 수도 런던에 발사했다. 1944년 6월과 8월 사이에 대략 1만 개의 V-1 미사일이 영국에 발사되었다. 효율성은 그리 좋지 않았다. 발사된 1만 발 중에 2,500발만 명중했다. 1944년 9월부터 독일은 V-1 대신 새로운 로켓 미사일을 발사했는데, 그 미사일이 바로 V-2 로켓 미사일이었다. 1944년 9월 8일부터 1945년 3월 27일까지 총 1,400개의 V-2 로켓 미사일이 수도 런던과 노리치에 발사되었고, 총 3,000명이 사망했으며 6,500명이 부상당했다.
6. 어록
우리(영국)는 약해지거나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프랑스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바다와 대양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감과 힘을 길러 하늘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영국을 지켜낼 것입니다.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입니다(We shall fight on the beaches). 우리는 비행장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들판과 거리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언덕에서도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we shall never surrender)!
윈스턴 처칠[34][35]
윈스턴 처칠[34][35]
베이강 장군이
프랑스의 싸움이라고 칭한 전쟁(Battle of France)은 끝났습니다. 이제 곧 영국의 싸움(Battle of Britain)이 시작될 것입니다.
이 싸움에는 우리 기독교 문명의 존망이 걸려 있습니다. 우리 영국인들의 삶, 그리고 우리 제도와 제국의 영속이 걸려 있습니다. 이제 적의 노도와 같은 분노가 우리를 향할 것입니다. 히틀러는 이 섬에서 우리를 패배시키지 못한다면 전쟁에 질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에 맞설 수 있다면 전 유럽이 해방되고 온 세계가 빛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패배한다면,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가... 우리가 알고 사랑해온 모든 것이 뒤틀린 과학의 힘 아래 타락하여 새로운 암흑시대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아 버릴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각자 의무를 다할 준비를 합시다. 그리고 각자 각오를 다집시다.
대영제국과 그 연방이 천년을 더 계속된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이 이 순간을 돌아보며 '이 때야말로 그들 최고의 순간이었노라(This was their finest hour.)'고 말할 수 있도록!
윈스턴 처칠, 1940.6.18, This was their finest hour 연설에서.
이 싸움에는 우리 기독교 문명의 존망이 걸려 있습니다. 우리 영국인들의 삶, 그리고 우리 제도와 제국의 영속이 걸려 있습니다. 이제 적의 노도와 같은 분노가 우리를 향할 것입니다. 히틀러는 이 섬에서 우리를 패배시키지 못한다면 전쟁에 질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에 맞설 수 있다면 전 유럽이 해방되고 온 세계가 빛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패배한다면,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가... 우리가 알고 사랑해온 모든 것이 뒤틀린 과학의 힘 아래 타락하여 새로운 암흑시대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아 버릴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각자 의무를 다할 준비를 합시다. 그리고 각자 각오를 다집시다.
대영제국과 그 연방이 천년을 더 계속된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이 이 순간을 돌아보며 '이 때야말로 그들 최고의 순간이었노라(This was their finest hour.)'고 말할 수 있도록!
윈스턴 처칠, 1940.6.18, This was their finest hour 연설에서.
만약 내가 죽는다면 독일군은 내 시체를 집무실의 의자에서 끌어내려야 할 것이다.
영국 본토 항공전이 있었을 당시에, 윈스턴 처칠이 캐나다로 피난할 것을 거부하고 런던 집무실과 지하벙커에 남았고, 전시내각으로 공무를 수행하면서 했던 발언이다. 그리고, 영국 국민들에게 전시상황에도 절대로 동요하지 말것을 부탁하면서 그 유명한 "국민 여러분. 진정하시고 평상시처럼 하던 일을 하십시오." 슬로건을 발표한다.
영국 본토 항공전이 있었을 당시에, 윈스턴 처칠이 캐나다로 피난할 것을 거부하고 런던 집무실과 지하벙커에 남았고, 전시내각으로 공무를 수행하면서 했던 발언이다. 그리고, 영국 국민들에게 전시상황에도 절대로 동요하지 말것을 부탁하면서 그 유명한 "국민 여러분. 진정하시고 평상시처럼 하던 일을 하십시오." 슬로건을 발표한다.
7. 일화
- 현대에도 인터넷 밈/짤방으로 유명한 Keep calm and carry on 포스터가 바로 이 당시에 만들어진 것이다. "국민 여러분. 동요하지 마시고, 평상시처럼 행동하십시오."라는 뜻이다.
- 독일의 동맹이던 이탈리아 왕국 역시 본 전투에 참여하였다. 7월 10일 파병부대를 결성하여 10월 19일에 배치를 완료하였는데, 별다른 활약도 못했고 독일군 지휘부도 이탈리아 공군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허리케인보다 못한 수준의 G.50과 복엽기 CR. 42, 구식 폭격기인 BR.20을 가져왔으니 CR. 42는 복엽기 수준으로서는 우수한 속도와 상승력을 가지고 복엽기 최후의 역사를 기록했지만 결국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2선으로 물러났다.
- 사실 독일 공군은 Bf109보다 앞선 세대의 복엽기 시절부터 외부연료탱크를 사용하고 있었다. 다만 Bf109E가 워낙 먼치킨스러운 포스를 보여주고, 유럽 작전을 하는 동안 항속거리가 문제가 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외부연료탱크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Bf110이면 충분히 호위를 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뒤늦게 실수를 깨닫고 개량에 들어갔지만 배치가 되었을 무렵에는 이미 영국 본토 항공전이 끝났다.
- 독일군은 쌍발전투기 Bf110이 충분히 영국공군을 상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오히려 자기 자신을 지키기에 급급했다.[36] 결국 이 전투를 계기로 제트기 시대가 도래할 때까지 몇년동안 쌍발 제공전투기에 대한 환상이 깨졌다.[37] 그리고 영국 공군도 브리스톨 보파이터라는 뛰어난 쌍발 전투기를 공대공 임무에 투입하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는 훗날 미군이 P-38 라이트닝을 투입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서부 유럽 전선에서 마주쳤던 독일군 기체는 Bf109와 Fw190이었는데 이들에 대해 속도/고도 우위를 점하지 못 해 선회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고,[38] 항속거리도 P-51에 뒤쳐졌기에 결국 지상 공격용으로 전환되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Bf110의 경우도 야간 전투기, 정찰기, 동부 전선에선 지상공격기로 전용되기도 했다.
- 런던 대공습 당시 폭격기 근접 호위를 명령하자 많은 전투기 조종사들이 반발하였다. 이에 괴링은 화를 내면서 전투기 조종사들을 무능한 겁쟁이로 매도하였고 조종사들에게 "자,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지 말해봐! 내가 뭐든지 지원해 주겠네!" 란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아돌프 갈란트는 "스핏파이어를 주십시오!" 라고 대답했다. 즉, 영국의 스핏파이어처럼 폭격기 호위가 아닌 적 전투기와의 전투를 전담할 전대가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본래라면 110이 호위를 전담하고 109가 전투기와 전투를 전담하는 계획이었으나 작전 환경의 변화로 이 계획이 틀어진 것이다.
- 도버 해협 상공에서도 전투가 자주 벌어졌고 격추당하여 조종사들이 탈출한 경우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영국과 독일 모두 구조작전에 나섰다. 영국해안 근처에는 민간인 자원자들도 활동하였고 처음에는 영국군, 독일군 할 것 없이 모두 구조해 주었는데, 런던 폭격이 시작되고 계속되는 피해에 화가 난 민간인 자원자들은 만약 물에 빠진 사람이 독일어를 하면 그냥 익사하게 내버려 두기도 했다.
- 런던 폭격이 한참 달아올랐던 시기에 낙하산을 타고 탈출한 조종사가 영국 조종사인 경우 시민들이 차와 먹거리를 제공하고 따뜻한 격려와 함께 비행장까지 태워다주기까지 하였다. 반면 내려온 사람이 독일 조종사라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오죽하면 경찰과 헌병들이 돌아다니면서 "시민들에게 걸리면 맞아 죽을지 모르니 빨리 나와서 항복하라." 는 방송을 하고 다녔을 정도였다. 반대로 연합군이 독일 점령지를 공습할 때에는 격추된 승무원들이 독일군이나 민간인들한테 살해당하는 사례들이 있었다.[39] 독일의 에이스 귄터 랄도 그가 미국식 항공 재킷을 입은 것을 보고 미국인으로 오해한 농부들한테 죽을 뻔했다가 그가 랄임을 알아본 농부 덕분에 살아남은 사례도 있다. 랄의 회고에 따르면 다짜고짜 쇠스랑을 들이밀었다고.
- 영국 수뇌부가 사실 울트라를 통해서 코벤트리 공습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독일에서 자신들의 암호가 노출되었다는 사실을 파악하게 될까봐 그냥 내버려뒀다는 음모론이 있다. 이 사실을 잘 보여주는 음모론이 이미테이션 게임(영화)에서 나온다.
- 당시 폴란드 조종사들은 영국에 폴란드 서부군 소속으로 망명해서 전투에 참가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독일군 조종사로 오해받는 일이 왕왕 있었다고 한다. 탈출한 폴란드 조종사들이 "안뇽하세요?" 하고 어설픈 영어로 인사하면 "안녕하지 못하다 이 독일놈아!" 하는 반응이 돌아왔다는 이야기다. 이들은 영어 사용을 교육받았지만, 급박한 공중전이 되면 흥분한 나머지 본능적으로 폴란드어를 사용했기에 영국 공군 교관 조종사들은 "이놈들아, 제발 진정해! 그리고 영어로 말하란 말이야, 영어로! 폴란드 말로 떠들지 마!" 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고 한다.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가장 높은 전과를 올린 편대는 폴란드 조종사들로 이루어진 제303전대이다. 한 영국 참전용사는 이를 두고 "폴란드인들은 정말 독일인들을 미워했어요. 그래서 전투에 나서면 정말 죽도록 싸웠죠. 우리도 열심히 싸웠지만 그 사람들만큼은 아니었어요."라고 증언했으며 영화 《 공군 대전략》의 한 장면: #. Repeat Please!!로 불리는 매우 유명한 장면이다. 기지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무시하고 독일군과 교전을 강행하는데, 아무리 봐도 정말 영어를 알아먹지 못했다기 보다는 알아먹긴 했는데 모르는 척 무시하고 달려드는 모양새다. 실제로 폴란드 조종사들은 전투 의지가 너무 높아서 마구 달려드는 통에 영국 공군 지휘관들이 뒷목을 잡을 일도 많았다. 공군대전략의 이 장면에서 독일군을 맨 처음 발견한 폴란드 조종사 옥스는 런던 상공에서 격추당해서 탈출했고, 결국 농부들한테 잡혀가는 식으로 구조된다. 마지막에는 영어 교재를 보면서 영어 공부 중이다.
- 미국 육군 항공대에서도 8명의 조종사들을 파견해서 참전했다. 이들은 슈퍼마린 스핏파이어를 지급받고 영국 왕립공군 제337전투비행대로 편성되었으며, 그 중 1명이 전사했다. 영화 진주만에서 주인공의 친구가 영불해협 전투에서 실종되었다 돌아오는 부분은 이 이야기에서 아이디어를 따온 것. 자원참가한 미국 조종사들과 다른 지원 인원은 영국군에 의해 독수리비행대대라고 명명되었다. 자세한건 Eagle Squadron 문서 참조.
- 런던 전체가 불바다가 되다시피 했지만, 런던의 명물 중 하나인 세인트 폴 대성당은 대폭격에도 불구하고 멀쩡히 살아남았다. 독일군 조종사들이 방향을 가늠하기 위해 일부러 남겨두었다는 설이 있다. 이를 소재로 다룬 SF로 코니 윌리스의 <화재 감시원>이라는 소설이 있다.
- 위와는 반대의 상황으로, 워낙 치열한 공중전이 벌어지다 보니 왕궁인 버킹엄 궁전의 정원에 폭탄이 떨어진 일도 있었다. 단순 오폭이 아니라 대미지를 제법 받았다. 그 광경을 보고 심란해 하던 조지 6세에게 아내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왕비는 "이제 폭격에 희생된 국민들에게 떳떳하게 나설 수 있게 됐어요."[40] 라며 위로했다. 사실 왕궁이 폭격을 맞은 것을 두고 영국 당국은 처음엔 국민들의 사기 저하를 우려해서 언론에 대한 보도 통제를 시도했었다. 하지만 처칠이 "오히려 이걸 알려야 국민들이 단합할 수 있다." 며 보도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해서 알려지게 된 것. 그리고 결과는 처칠이 바라던 그대로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반될 뻔한 민심이 다시 결집했는데, 이전까지는 런던이 공습당해도 나치의 제1타겟이 군수공장이다 보니 공업 지대 위주로 집중 공습당했기 때문에 공업지대와 가까운 노동자들의 주거 지역이 폭격 피해를 심하게 입었고, 이런 폭격 피해에 대해 노동자층에서는 영국군이 부자와 귀족만 보호하니 우리만 피해를 본다는 피해의식이 있었으며 실제로 상류 인사들이 주로 사용하는 고급 호텔을 소규모 시위대들이 습격한 사례도 존재했다. 이런 호텔들은 고객들이 폭격을 피할 수 있도록 자체 피난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군중들이 자신들도 이용할 수 있게 해달라며 시위를 벌인 것. 이 때 호텔 지배인이 진압을 요구하자 경찰 측에서는 "호텔에 손님이 왔으면 마땅히 대접을 해야죠. 호텔의 집기 등을 파손하지 않는 이상 우린 간섭 안 합니다." 라고 말했다. 결국 호텔 측에서 시위대들에게 차를 대접했고, 분위기가 수그러든 군중은 자발적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날 폭격으로 버킹엄 왕궁까지 피해를 입어 왕실도 똑같이 집이 날아간 상태가 되었으므로 국민들의 피해의식이 희석되었다. 당시 시위를 주도한 사람 중 한 명도 "이제는 왕이나 귀족이나 자기 집이 날아간 건 똑같다. 우리만 집을 잃은 게 아니다. 저들도 우리와 똑같아졌다." 라며 시위를 거두었다. 이후 버킹엄 궁전은 다음해인 41년 한번 더 폭격 피해를 받았으며, 영국 국민들은 단결하여 버텼다. 한편 당시 윈저 성에 머무르며 공주들을 담당하던 시녀의 기록에 의하면 릴리벳 공주(훗날 엘리자베스 2세로 즉위)와 마거릿 공주와 관련해 두 공주와 같이 외출을 하다 초병에게 검문을 받은 일화, 윈저 성 거주자 전원이 가스 마스크 훈련을 받아야 했던 일화 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당시 공습이 심해서 비행기 소리만 들어도 RAF인지 루프트바페인지 혹은 V1인지 구별할 수 있았다는 일화도 있다.
- 대한민국 웹상에서는 영국 본토 항공전이 독일의 실패로 귀결된 원인 중 하나로 대륙내 공격 위주로 편성되었던 독일 공군에게 대륙간 공격이라는 임무를, 그것도 영국과의 전쟁이 시작된 이후에 말이 반 년이지, 실질적으로는 한 달만 주고 계획을 짜서 실행해야 할 정도로 황당한 일정으로 들고 있다.
- 영국 본토 항공전엔 세계 각국의 파일럿들이 참전하였는데 영국과 우호적인 국가 및 영국의 식민지, 그리고 독일에게 점령당한 국가의 파일럿들이 자발적으로 참전하였다. 영화 다크 블루 월드는 조국을 되찾기 위해 분전한 체코슬로바키아 조종사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다음은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참전한 각국의 순수 파일럿들의 숫자이다. 영국-2,334명, 폴란드-145명, 뉴질랜드-126명, 캐나다-98명, 체코슬로바키아-88명, 호주-33명, 벨기에-29명, 남아공-25명, 프랑스-13명, 아일랜드-10명, 미국-11명, 로디지아-3명, 뉴펀들랜드-1명, 자메이카-1명, 그리고 한 명은 이름이 중동계라 팔레스타인 지방 출신의 영국인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구글을 검색해 보면 터번을 쓰고 있는 조종사들이나 유색인종 조종사들이 스핏파이어나 호커 허리케인 조종석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도 볼 수 있다(!). 출처는 영국 공군 박물관 홈페이지. 현재는 개편되어 페이지가 사라졌으나 위키피디아에 가보면 남아 있다.
- 체코슬로바키아 파일럿들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조국으로 돌아갔다가 강제 노동수용소에 끌려갔다는 말이 있으나 실제로 RAF의 체코슬로바키아인 편대(310, 311, 312, 313 편대)는 모두 신생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 공군에 합류하였다. 반면 RAF 소속의 폴란드인 조종사들은 당시 폴란드 망명 정부가 반소였기 때문에 돌아가면 진짜로 수용소행이 분명했고, 결국 대부분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폴란드 조종사들은 이 당시의 공을 인정받아서 자유 폴란드군 장병 중 유일하게[41] 전승 기념행사에 참석이 가능했다. 하지만 조종사들은 다른 폴란드군 전우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불참했다.
- 당시 네덜란드의 빌헬미나 여왕은 나치를 피해 영국에 망명정부를 세우고 215,000파운드를 기부해서 스핏파이어 43대를 구입하였다. 그리고 라디오 오라녜(Radio Oranje)[42]라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히틀러는 개XX라고 비방하고 지속적으로 나치에 대한 저항을 촉구하였다. 처칠은 여왕에 대해 '런던에 있는 망명정부 인간들 중에 유일하게 제대로 된 사람'이라고 평하였다고 한다.
-
영국 파일럿들의 활약을 두고
윈스턴 처칠은 다음과 같은 칭송을 남겼다.
인류의 분쟁의 영역에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토록 적은 사람들에게 이토록 큰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
Never in the field of human conflict have so many owed so much to so few.
-
이때 영국에서 활약한 전투기 조종사들을 추모하는 곡으로
아이언 메이든의
Aces High라는 곡과
Sabaton의 Aces in exile이라는 곡이 있다.
후자는 좀 더 자세하게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캐나다 파일럿들을 가사에서 언급한다.
- 웨스트민스터 사원에는 영국 본토 항공전의 주역이었던 스핏파이어, 허리케인 비행대를 기리기 위해 바쳐진 스테인드 글라스가 있다. 각 비행대의 문장과 이름을 리본으로 그려놓은 것이 장관. 이렇게 생겼다.
- 미국 CBS 방송의 유럽 특파원이었던 에드워드 머로는 런던 대공습을 현장에서 목숨을 걸고 중계해 미국 내부의 여론이 돌아서는 데 기여했다.
- 독일군 전투기들의 무전기 주파수가 영국군 전투기들의 주파수하고 비슷하다 보니 폭격기하고 연락한다고 주파수 돌리다가 영국군 전투기와 연결되어서 양국 조종사들이 트래시 토크를 주고받은 사례도 상당히 자주 있었다고 한다.
- 당시 영국 전역에서 운행하던 야간열차는 운행이 중지되거나 차량 내부는 소등과 함께 커튼을 치고, 외적으로는 기관차와 객차 할 것 없이 동체와 창문을 까맣게 칠하고 운행했다. 독일 항공기의 대지공습과 기총사격을 피하기 위한 등화관제였다.
- 당시 영국 정부는 도시 지역의 아이들을 시골로 피난시키는 캠페인을 벌였다. 이 캠페인이 시작된 것은 1939년 9월 1일로, 2차대전이 발발한 직후의 일이었다. 3일 동안 150만명의 어린이들이 시골로 피난했다. 영국 정부는 시골 농가들에게 어린이들을 맡아달라고 했고, 그래도 부족한 부분은 큰 건물을 징발하여 임시 보육원을 만들어 어린이들이 머물게 했다. 이들은 1940년 1월까지 약 절반 정도가 도시로 돌아왔는데, 추축국이 그동안 영국을 공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영국 본토 항공전이 시작되자 다시 아이들의 피난이 시작되었고, 이들은 1945년 전쟁이 끝난 뒤에 돌아올 수 있었다. # 나니아 연대기 중 사자와 마녀와 옷장에서 페번시 가의 네 남매들이 시골에 있었던 이유다.
8. 창작물에서
- 영화
- 공군 대전략(Battle Of Britain, 1968)
- 런던 상공 독수리( Eagle over London, 1968): 이탈리아 영화로 덩케르크 철수 당시 죽은 영국군의 신분을 훔쳐 영국에 잠입한 독일 스파이들이 항공전 도중 영국 공군 지휘센터와 레이더 시설들에 테러를 벌이려는 음모를 막는 내용. 일본과 한국에서는 '공폭대작전'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
- 베를린 항공전(1943)
- 다크 블루 월드(Dark Blue World.2001): 체코 영화로, 영국 본토 항공전에 참전했던 체코 출신 망명 조종사들의 이야기.
-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 파웰과 프레스버거 영화. 간접적인 배경으로 다뤄진다.
- 희망과 영광(1987): 존 부어맨 영화
- 진주만 (2001): 벤 애플렉 주연의 진주만 공습을 다룬 그 영화 맞다. 초중반에 주인공들 중 1명이 영국으로 파견되어 본 항공전에 참가하다가 죽었...던 줄 알았으나 극적으로 살아돌아왔다.
- 허리케인: 배틀 오브 브리튼(2018) 영국, 폴란드 합작 영화
- 303 전투비행단(2018) 폴란드 영화
- 게임 - 항공전이었으므로 비행 시뮬, 슈팅 계열의 게임들이 주를 이룬다.
- 배틀 오브 브리튼, 배틀 오브 브리튼 2: 로언 사의 비행 시뮬레이션으로 다이내믹 캠페인을 지원했다.
- Their Finest Hour: 루커스아츠의 초기작. 역시 비행시뮬로 90년도 작품. 이후 이 게임 엔진에 기반해 여러 비행 게임을 제작한다.
- Cliffs of Dover: 프롭 비행 시뮬의 명작 IL-2의 후속작. 말려버리기는 했지만 영국 항공전에 등장한 전투기들을 매우 자세히 구현했다.
- MS Combat Flight Simulator: 2000년 작품으로, 마이크로소프트의 플라이트 시뮬레이터 엔진을 이용한 비행 시뮬. 원본이 전 세계 지형을 그대로 구현한 물건이니만큼 실제 사이즈 지도 상에서 전투를 벌일 수 있었다.
- European Air War (EAW): Falcon 4.0으로 유명한 MicroProse사의 1998년 작품으로, 1940년의 영국 본토 항공전부터 유럽 전역의 막바지인 1945년까지 영국, 미국, 독일 소속 전투기와 공격기의 선택이 가능한 커리어 모드 플레이와, PVP, Online Co-op 멀티플레이가 가능했다.
- 이외에도 각종 콘솔용 비행 슈팅 게임들이 이 영국 항공전을 최초로 다루는 경우가 많다.
- 라이즈 오브 네이션즈에서 튜토리얼 미션으로 등장한다.
- SD 세계대전의 연합군 첫 번째 임무로 나온다. 튜토리얼이라 전투의 규모는 꽤 작다.
- 울펜슈타인 더 뉴 오더에서 2차 영국 본토 항공전이 신문에 나오는데 미.영 연합군이 처참하게 박살났다. 애초에 오프닝에 나오는 미.영국군 비행기는 현실 2차 세계대전에서 쓰던 물건 그대로지만[43]독일군측은 제트 전투기를 쓰는 세계관인지라....
- 책
-
영국 전투: 소설가 마이클 코다가 이 전투를 소재로 쓴 역사서. 국내에도
정발되었으나,
번역가가 그 분이라많이 팔리진 않았다. - 나니아 연대기 중 사자와 마녀와 옷장: 영국 본토 항공전으로 인해 시골에 피난을 간 페번시 가의 네 남매들이 마법의 옷장을 통해 나니아로 건너가 겪는 이야기다. 영화판에서는 영화 초반부에 직접 묘사되고, 남매들이 기차를 타고 피난을 떠나는 장면으로 오프닝이 시작된다.
- 화재 감시원 - SF 작가 코니 윌리스의 작품. SF소설계의 대표 명예인 휴고, 네뷸러 동시수상작이다. 먼 미래의 역사학도가 과제로 이 시기의 세인트 폴 대성당에 잠시 머무르는 내용.
- 블랙아웃, 올클리어 - 코니 윌리스 작품, 화재감시원의 후속작. 화재감시원이 세인트 폴에 집중했다면, 블랙아웃과 올클리어는 당시 런던 전체의 모습을 다룬다. 코니 윌리스는 화재 감시원과 블랙 아웃 사이에 발표한 '개는 말할 것도 없고' 라는 시간여행물에서도 이 소재를 약간 써먹었다.
9. 관련 문서
[영]
영어
[독]
독일어
[3]
폭격기가 지나고 있는 지역은 로터히스(Rotherhithe)지역과 데프포드(Deptford)지역 바로 위이다. 그리고 템스강 위쪽에 위치한 직사각형 모습의 호수는 캐너리 워프(Canary Wharf)와 아일 오브 도그스(Isle of Dogs)라는 지역으로, 이 당시에는 런던 최대의 항구였다. 이후 1960년대부터 서서히 쇠락하다가
마거릿 대처 총리 시절인 1980년대 신도시로 재개발되어, 현재는
시티 오브 런던에 이은 런던 제2의 금융 중심지가 되었다. 사진 맨 왼쪽 템스강 북쪽 지역은
런던탑이며 오른쪽 끝의 또다른 직사각형 모양 호수는 현재의
런던 시티 공항이고, 템스강 남쪽 맨 오른쪽은
그리니치 천문대가 있는 그리니치(Greenwich) 지역, 템스강 남쪽 맨 왼쪽은 기차역이 위치한 페컴(Peckham) 지역이다.
[4]
폭격기 사령부 및 연안 방어 사령부의 손실
[5]
아예 완전히 줄여서 BOB라고도 한다.
[6]
추축국 세력을 제외한 중립국들의 상황도 비슷했다.
소련은
독소 불가침조약 이래 독일에 우호적인 중립국이었으며,
스페인은
스페인 내전 이후로 역시 추축에 우호적이었다. 발칸 반도 남부의
그리스도 실권자인
요안니스 메탁사스가 친독파.
핀란드는
겨울전쟁 이후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 독일과 접촉 중이었고,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당시 섭정이 역시 친독 성향이었다. 스웨덴 역시 추축국에 물자를 지원하며 달래기 바빴다. 이 시점에서 유럽의 중립국들 중 진짜 중립이라 할만한 나라는
스위스.
아일랜드가 전부였고, 영국에 우호적인 나라는, 전통적인 영국의 동맹국
포르투갈 정도였다. 이처럼 암울한 유럽의 상황은 영국 본토 항공전 이후
추축국이 제 발로 걷어차면서 조금씩 개선된다.
[7]
2차 대전 내내 독일 해군은 영국 해군보다 압도적으로 열세였다. 전력을 집중할 수 있었던 독일과 달리 영국은 이탈리아 해군을 상대하기 위해서 지중해로 상당한 전력을 차출해야 했는데도 독일 해군은 영국 해군을 피해 숨어다녀야 했다.
[8]
과거에는 히틀러의 독단으로 됭케르크 철수작전이 성공했다는 주장이 많았으나 이후 독일 군부 내에서도 두 무리로 갈려진 상태였고 히틀러는 그중 신중파의 손을 들어줬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9]
이 차량(열차칸)은 독일 베를린으로 이송되어 전시되나 1945년
베를린 전투 때 폭약으로 파괴
[10]
다만 처칠 본인은 이 선전에 뒷목을 잡았다. 영국인들은 윈스턴 처칠의 터프한 모습을 좋아했을지언정 귀족적인 성품의 처칠 본인은 평생의 흑역사로 생각했다고 하니 괴벨스가 영국인들의 사기를 꺾는 데는 실패했어도 처칠의 멘탈을 공격하는 데는 성공한 셈. 별 의미는 없었지만.
[11]
다우딩 시스템 이라고 불리는 이 방공 체계는 세계에서 최초로 완성된 지상방공 체계이다.
[12]
독일 국방군 중 나치당원의 비중이 가장 낮았다고 한다.
[13]
상륙전 선봉 병력으로 육군 산약사단과 해군 육전대가 동원될 예정이었다.
[14]
질적인 면을 먼저 보면, 스핏파이어와 Bf109는 서로 일장일단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대등한 성능을 가졌고 2선급인 허리케인은 역시 2선급 Bf110을 상대로 비슷하게 싸울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물량은 확실하게 영국이 열세였다.
[15]
1차 대전부터 사용되던 형태의 대형으로 폭격기 요격에는 효과적이지만 전투기간의 전투에서는 비효율적이라 2차 대전기에는 핑거포 대형에 자리를 넘겨준다. 그러나 폭격기 요격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에는 여전히 사용되었다.
[16]
공군 참모총장 한스 예쇼넥 상급대장(카를 오토 알베르티)이 전투기 편대 지휘관 및 참모들과 회의 중인 장면이다. 슈미트는 물론 베포 슈미트 대령.
[17]
스핏파이어가 Bf109보다 좋다는 말이 아니라, 공세적으로 운용해야 진가가 발휘되는 Bf109로 수세적으로 작전하라는 괴링을 디스하는 말이다.
# 당연히 이 말을 들은 괴링은 더 화가 났고, 이때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한다. 반면에 전쟁 후반기 연합국 공군, 특히 미 육공항공대의 경우 전투기에 의한 선제압 방식이 먹혀들었는데, 이는 장거리 호위 전투기를 대량으로 투입하여 독일 전투기들의 발을 묶어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Me262의 투입으로 인해 기존 전투기에 의한 선제압이 어려워지자 다시 근접호위를 채택하긴 한다.
[18]
폭격기가 이동해야 하는 거리가 길어지고 제공권을 확실하게 장악하지 못한다면 선제압 방식의 호위만으로는 폭격기 부대의 안전을 충분히 확보하기 어렵다.
[19]
이 두 사람의 악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아서 다우딩이 해임된 이후 다우딩이 신임하던 파크 또한 좌천되고 그 자리를 넘겨받은 게 리맬러리다. 그리고 후에 리맬러리가 동남아시아 연합 공군 사령관으로 부임하였으나 이동 중 비행기 사고로 죽자 그 자리를 이어받은 게 파크다.
[20]
히스토리 채널 <2차 대전 최대의 공중전>
[21]
독일군의 멸칭이다. 미국군을 양키, 영국군을 토미, 소련군을 이반이라고 불렀던 것과 같은 맥락.
[22]
물론 있기는 있었다. 선전물 살포, 즉
삐라 뿌리기. 다만 나치당에 대한 독일인들의 지지도가 하늘을 찌를 때라 별 의미가 없었다. 당시 폭격기 승무원들도 자신들의 임무에 회의감을 가져서 때로는 이게 어느
게슈타포 머리에 맞기라도 하면 그거라도 어디냐면서 뭉치의 끈을 풀지 않고 그냥 떨어뜨리기도 했단다. 그러나 이들이 선전물을 살포하기 위해 독일 상공을 비행하면서 얻은 경험들은 이후 독일에 대한 폭격 작전에 귀중한 도움이 되었으니 참으로
새옹지마.
[23]
폭장랑도 적고 속도도 370km/h로 상당히 느려서 여러모로 야간 삐라 살포 이외에는 쓸모가 없는 구닥다리였다.
[24]
에곤 마이어가 아니다. 마이어라는 성씨는 독일에서 가장 흔한 성씨다.
[25]
영화 《
공군 대전략》에서 이 상황을 묘사했는데, 초반에는 휀, 팔케, 한스 등이 농담 따먹기도 하고 낙하산 챙기고 내기 한번 떠보자면서 화기애애하던 독일측이 후반에는 휀이 겨우 살아돌아온 폭격기 승무원들을 보며 망연자실하거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전사한 동료들(특히 팔케와 한스)의 빈 자리를 침통하게 바라보는 장면이 나오는 등 거진 초상집 분위기가 돼버렸다.
[26]
100기씩 떨어뜨릴 수 있는 에이스 수십 명보다는 10기 정도 떨어뜨릴 수 있는 베테랑 수천 명이 훨씬 더 중요하다. 격추 수도 그렇거니와, 후자가 지속적으로 훈련과 경험을 쌓으면 100기씩 떨어뜨릴 수 있는 파일럿 수천 명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
[27]
사실 중국 공군은 물량이 딸렸을 뿐, 파일럿 수준은 압도적인 수의 일본군 앞에
상하이 전투에서 하루이틀 정도는 제공권을 잡고 있었을 정도로 괜찮은 편이었다. 독일과 영국, 미국에서 보낸 의용군과 교관들이 많이 가르쳐주고 알려줬기 때문. 오히려 소련 공군에는 이만도 못한 파일럿들이 들끓었다.
[28]
에리히 폰 만슈타인,
하인츠 구데리안 등의 회고록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전후의 회고록에서
히틀러의 군사적 판단을 매우 강하게 비판했다. 일개 전투나 전역에서만 활동하는 장군 입장에서는 전선 전체와 국가의 경영까지 봐야 하는 최고 지휘관의 판단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29]
산업공학이라는 것은 무기 혹은 상품을 빠르게, 튼튼하게, 그리고 정비성이 좋게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설계를 하는 공학적 역량을 말한다.
티거나
판터만 봐도 고장나기 쉽고 많이 만들기 어려운 정밀부품을 쓰며, 보닛이 없어 엔진을 뜯으려면 포탑을 들어내야 하는 등 정비성은 개나 줘버린 디자인을 가지고 있다. 독일은
기계공학만 발달했지 산업공학 능력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30]
베르사유 조약에서 육군 규모를 10만 명으로 제한받게 되자 독일군은 최대한 전투 역량을 보존하기 위해 장교, 부사관 위주로 군을 육성했는데 그 덕분에 장교, 부사관의 역량은 우수했으나 그 대신 일반병의 역량이 떨어졌다.
[31]
단일화된 무기를 사용함으로서 탄약, 포탄, 바퀴, 유류의 보급을 쉽게 하는 건 군사의 기본이다. 가령 어떤 국가가 1개월 석유 생산량이 200톤인데 디젤엔진과 가솔린엔진을 쓰는 두 종류의 전차를 모두 사용하고 있다면 디젤을 100톤, 가솔린을 100톤 준비해야 하며, 디젤엔진을 쓰는 전차가 전멸해버리면 디젤 100톤은 쓰지도 못하고 버려야 한다. 반면 가솔린엔진의 장점이 좀 아쉽더라도 디젤엔진을 쓰는 전차만을 생산하면 쓸데없이 가솔린을 생산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200톤의 생산량을 오롯이 디젤에 투자할 수 있다. 실제로 현대 미국은 전차 등 전투병기는 물론이고 험비 등 전술차량, 심지어 야전사령부 등에 쓰이는 이동식 발전기까지 모두 디젤도 가솔린도 아닌 그 비싼
항공유(JP8)를 사용한다.
[32]
예시일 뿐으로 가솔린엔진은 디젤엔진보다 연비가 안 좋아서 비율을 동등하게 만든다는 건 가솔린 안 쓰겠단 소리다.
[33]
심지어 더 막장인 건
만능포라고 불리는 대전차포, 대공포, 곡사포, 함포 모두를 커버칠 수 있는 명품 대공포를 만들어낸 것이 바로 독일이었다는 것이다. 독일은 이 좋은 무기를 600문도 안 뽑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22,000문 가까이를 뽑았지만 그 중 지상전투를 상정한 41모델은 556문 뿐이었고, 그 밖의 모델들은 지상용으로 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공포 차체를 달고 움직여서 지상용으로 쓰려면 차를 뜯어야 했다.
[34]
1940년 6월 4일 당시의 실제 육성 연설, 일명 "We shall fight on the beaches"로 알려져있으며 전체 12분짜리 연설이다.
텍스트 전문,
연설문 녹화 음성
[35]
오토 스코르체니의 회고록에 따르면, 처칠은 연설 중간에 독일군이 바다를 건너온다면 그들의 얼굴에 맥주잔이라도 집어던질 것이라고 중얼거렸다 한다. 스코르체니 회고록 자체가 자신의 관점에서 본 2차 세계 대전 전반과 자신의 경험을 섞어서 말하는지라...
[36]
사실 Bf110이 이런 추태를 보인 건 폭격기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호위하기 위하여 기존에 사용하던 공세적 호위 대신 근접 호위를 시켰기 때문이다. 거리가 짧으면 근접 호위가 필요없지만 영국을 공격하기에는 근접 호위가 필요했기 때문인데 이러한 호위 방식은 110의 장점을 살리기 힘든 조치였던 것이다.
[37]
다만 아주 멸종한 건 아니어서 이후 개발된 쌍발 전투기들인
드 해빌랜드 모스키토,
Ta 154,
Me 410,
DH-103 호넷 등은 전폭기나 다목적 전투기, 지상공격기, 야간전투기 등으로 쓰였다.
[38]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P-38이 독일 전투기를 상대하며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일반적인 속도나 고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수평비행 기준으로의 속도는 전혀 뒤쳐지지 않았고, 상승력은 도리어 더 좋았다. 독일 조종사들도 '자기들처럼 급강하로 속도를 붙이지 않아도, 수평비행을 하다가도 급상승할 수 있는' P-38의 상승력만큼은 인정했다. 라이트닝이 겪은 실제 문제는 하나는 라이트닝 초기형들은 '압축성 문제'로 인해 시속 833km 이상에서 수평미익이 기능을 잃는 문제 때문에 (900km/h 이상으로 가속할 수 있던 독일 전투기들에 비해) 급강하 가속에서 뒤쳐진다는 것과, 보통 더 멀리서 눈에 띄는 탓에 특히 아군 조기경계망에 지원받으며 활동하는 독일 조종사들은 미리 고도의 우세를 점하고 공격해 들어갈 기회를 잡기 쉬웠다는 문제였다. 조종사들 자체의 전술적 기량에서도 독일 측이 미군보다 아직 우세한 시점이었으니 이 정도의 불리함이면 전과가 벌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점이 개선되었을 즈음에는 P-47, P-51이 등장해 있었고 말이다. 그래도 태평양 전선에서는 충분히 깡패짓을 하고 날아다녔고, 지중해에서의 해상, 공중보급 차단에서는 매우 잘 써먹었기 때문에, Bf110 수준으로 실패작이 되지는 않았다.
[39]
인도적인 면도 있지만 장교, 그것도 조종사 정도 되는 엘리트 군인이라면 포로로 잡는 게 훨씬 이득이다.
[40]
혹은 "이제야 피해를 입은 국민들의 집을 볼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혹은 더 대담하게 '폭격 때문에 담벼락이 무너지니 국민들의 부서진 집들이 더 잘 보이네요.'라는 식으로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41]
나머지
자유 폴란드군은 영국 등 서방에게
토사구팽 당해서 제대로 공을 인정받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전승 행사조차 참석할 수 없었다.
[42]
오렌지색은 네덜란드의 상징색이다.
[43]
수송기는 기간트 뺨치게 크고 방어 총좌도 M2를 12정 달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