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7 18:38:40

니브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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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기원 및 역사3. 생업4. 의식주
4.1. 의복4.2. 음식4.3. 주거
5. 신앙
5.1. 장례5.2. 제례
6. 현황7. 기타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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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Nivkh_People.jpg

니브흐 사할린 북부와 아무르 강 하구에 사는 민족으로 예전에는 고립어에 속하는 고유 언어인 니브흐어를 썼으나 현재 니브흐인들은 러시아어를 쓰고 있다. 참고로 니브흐어는 아무르 방언과 동사할린 방언으로 나뉜다.

니브흐 남자의 평균 신장은 160cm, 여자는 150cm였으며 전반적으로 땅딸막하고 짧은 목에 발달한 가슴, 어두운색 피부, 검은 직모의 전형적인 고아시아인의 모습이었다. 남자들은 한 갈래로, 여자들은 두 갈래로 머리를 묶었고 문신은 하지 않았다.[4] 여자들은 반지도 코걸이도 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할린 탐사와 타타르 해협 발견으로 유명한 일본 에도 시대 탐험가 '마미야 린조(間宮林蔵)'의 발자취를 따라 사할린을 탐사한 1966년생 탐험가 '타카하시 다이스케(髙橋大輔)'의 기록에 따르면 니브흐 사회는 여존남비 사회이며, 여성이 어떤 과실을 저지르더라도 여성을 죽이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니브흐는 수가 적었기 때문에 여성을 소중히 여겼으며, 특히 바느질을 잘하는 여성은 더더욱 소중히 여겨지기 때문에 여성들은 열심히 바느질에 힘썼다고 하며, 바느질을 하지 않는 여성은 친정으로 돌아가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주변 민족들과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진 탓인지 다정하고 사교적인 성향을 띄었으며, 결혼 상대가 설령 이민족이라 하더라도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5]

2010년 러시아 인구 조사 결과 4,652명이 남아 있다.

니브흐는 니브흐어로 사람이라는 뜻이다.

2. 기원 및 역사

니브흐의 역사 및 문화를 소개하는 애니메이션
니브흐는 지금으로부터 약 12,000년 전에 자바이칼 지역에서 지금의 본거지로 이주해온 신석기인들의 후손으로 추정되며, 옛부터 만주-퉁구스계 종족, 아이누 계열 종족 등과 교류하였다고 한다. 2016년 유전자 분석에 따르면 니브흐는 아이누 또는 그들의 직계 조상으로 추정되는 조몬인과 관련 있거나 영향을 받았다고 하며, 유전적 기여도는 27.2%라고 한다. 그러나 사할린 아이누와는 적대적인 관계였다고 한다. 또한 이후의 연구에 의하면, 6세기 경에 동유럽에 유입된 유목 민족인 아바르와도 유전적으로 동계임이 확인되어서, 이들과 동일한 민족으로 유력하게 추정되는 유연과도 동계일 가능성이 커졌다. 대한민국 언어학자 김방한은 몇몇 니브흐어 단어에서 한국어와의 유사성을 확인하고, 니브흐어가 한국어와 동계 언어거나 최소한 언어동조대를 이룰 가능성을 제안했다.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니브흐족과 한민족이 같은 계통이거나, 어느 정도 문물 교류를 하던 관계였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이 설은 백제어와 신라어가 한국어족이 아니며 고구려어만이 한국어족이라는 가정 하에 나온 가설인데, 이 가설이 반도 일본어설의 일종이기는 하나 백제어와 신라어를 한국어족으로 보지 않는 가설은 현재는 거의 부정되는 추세기에 현재로서는 후속 연구를 지켜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고구려라고 해서 특별히 퉁구스계 유목민 유전자를 많이 받은 것도 아니고[6]

니브흐가 처음 역사 속에 언급된 것은 13세기 몽골 제국 시절이었다. 당시 니브흐의 영역은 하바롭스크 북쪽 해안을 따라 투구르스키 만에서 아무르 강 하구에 위치한 니콜라이옙스크까지였고, 더 나아가 타타르 해협까지 꽤 넓은 지역에 분포해 있었으나, 국가를 세우지 못한 탓에 여진족을 비롯한 퉁구스계 민족들과 러시아인들에게 밀려나야 했다.

러시아 사할린 정복을 했을 때, 카자크 러시아인들에게 야삭과 식료를 징발당하고 이에 불복하다가 살해당하는 등 심하게 시달렸는데, 때문에 그들을 니브흐어 악마를 의미하는 kinrsh라는 멸칭으로 불렀을 정도였다. 이후 러시아에서 범죄자나 정치범들을 시베리아와 사할린 등지로 유배보낼 때, 이들이 의도치 않게 몰고온 천연두, 페스트, 인플루엔자 등의 전염병으로 인해 면역력이 없던 니브흐인들은 또 한번 고통을 당해야했다. 당시 러시아 식민당국은 이 범죄자들을 사할린 카토르가(형벌 수용소)로 이송했을 때, 니브흐인들을 교도관으로 고용하여 탈옥수들을 추적하는 일을 주로 맡겼다고 한다.

제정 러시아가 망하고 소련이 건국되면서 이때부터 민족명은 상술된 길략(Gilyak) 대신 니브흐(Nivkh)로 바뀌었으며 이들을 위한 자치구가 생기고, 1960년대까지 어업권을 허가받았다. 하지만 소련 시절에 콜호즈로 강제로 동원되고 제대로 된 농업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왜냐하면 니브흐 어부들은 땅에 쟁기질하는 것을 죄악이라 여기는 믿음 때문에 농업으로 전환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2류 소수집단으로 생활해야 했다.

그 결과, 전통적인 수렵채집 방식의 생활은 빠르게 사라졌으며, 학교 공공장소 등에서 니브흐어 사용을 금지당했고, 러시아어 사용을 강요당해야 했다. 그래서 현재 아이누어처럼 사용하는 인구는 노년층 중에서도 몇 사람밖에 없으며 중년층은 그나마 알아듣지만 쓰지를 못하고 젋은이들은 아예 알아듣지도 쓰지도 못한다고 한다.

한편 1905년 이후 일본 제국이 남사할린( 가라후토청: 樺太廳)을 영유하게 됐지만 남사할린은 원래 니브흐족의 거주지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이라, 일본 제국에 거주하던 니브흐족은 100명 안팎이었다.[7] 가라후토청 치하의 니브흐인들은 일본식 성씨를 쓰는 걸 강요받는 등의 탄압을 받다가 일본 패망 이후 사할린 아이누처럼 일본인으로 간주되어 고향에서 쫓겨나야 했다. 패전 후 일본에서는 1966년 菅原幸助가 조사한 바 아바시리에 3가구, 하코다테에 2가구, 삿포로에 3가구 이렇게 30여 명이 거주했다. 50년 이상 지난 현재는 일본인으로의 동화가 완료되었을 것이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니브흐족 빈민층들은 급속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고 현재 사할린 북부에 사는 이들은 Sakhalin-1 Sakhalin-2라는 거대한 해양 석유 추출 프로젝트로 인해 미래가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다.

3. 생업

파일:Nivkh_village.jpg
니브흐인은 오래전부터 정착 생활을 했으며, 주 생업은 어로와 수렵, 채집, 그리고 개 사육이었다. 그들은 1년 내내 어로 활동을 했는데 봄부터 가을까지는 그물을 사용해 주로 산란을 위해 이동하는 송어 연어를 잡았다. 그리고 얼음이 어는 겨울에는 개를 풀어 얼음 구멍을 찾아 물고기를 잡았다.

작살이나 몽둥이로 물개 바다표범 같은 바다 동물을 잡기도 했다. 이렇게 잡은 물고기는 소금에 절여 말려 음식으로 먹었고, 물고기 뼈는 말려서 저장해 두고 개의 먹이로 사용했다. 또한, 물고기 내장에서는 기름을 추출해 사용했고, 물고기 껍질로는 신발과 옷을 만들어 입었다.

어로에 비해 사냥이나 채집은 니브흐인의 생활에서 부차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올가미나 구식 총을 사용하여 이나 순록, 모피 동물을 사냥했고, 19세기부터는 소총을 사용했다. 작은 동물은 보통 혼자서 사냥했으나, 굴속의 곰을 사냥할 때에는 여러 사냥꾼이 함께 했다.

특히 을 사냥할 때에는 정해진 의식을 엄격하게 지켰다. 곰을 숲의 신령의 아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니브흐인은 사냥해서 얻은 동물의 모피를 주변 민족의 섬유, 밀가루 등과 교환했다. 여자와 아이들은 열매나 식용식물, 연체동물이나 해초, 조개 등을 채집했다.

니브흐인은 마을마다 수백 마리의 를 키웠다. 개는 썰매를 끄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사냥을 할 때도 도움이 되었다. 또한, 화폐처럼 물물교환의 수단이 되기도 했고 주요한 식량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주인이 죽으면 함께 매장되기도 했고 신에게 바치는 공물로도 사용되었다.

4. 의식주

4.1. 의복

파일:Tøj_til_kvinde_fra_Nivkh_i_Østsibirien_-_Woman’s_clothing_from_Nivkh_in_eastern_Siberia_(15308580666).jpg
니브흐인 전통 의상은 남녀 모두 물고기 껍질이나 바다 동물의 가죽, 개나 모피 동물의 털가죽으로 만든 바지와 두루마기였다. 두루마기는 ‘라르시크(ларшк)’라고 불리며, 몸통 왼쪽 폭이 오른쪽보다 두 배 넓게 재단되어 오른쪽을 덮는 스타일이었다. 여성용 라르시크는 아플리케나 자수로 장식되었으며 남성용보다 더 길었다.

추운 겨울에는 이 두루마기 위에 소매나 모자가 달리지 않은 모피 코트를 걸치기도 했다. 남성들은 사냥 등 먼 길을 떠날 때 모피 코트 위에 ‘호스크(хоск)’라 불리는 물개 가죽으로 만든 짧은 치마를 걸쳤다. 그리고 팔과 무릎에는 반드시 토시를 착용했다. 겨울에는 귀마개가 달린 모피 모자를, 여름에는 자작나무껍질이나 천으로 만든 모자를 썼다. 신발은 형태가 다양했으며 주로 물개 가죽이나 물고기 껍질로 만들었고 안쪽에는 특수한 풀로 엮은 깔창을 깔았다. 니브흐인의 의상과 신발 등에는 아무르 스타일의 세밀한 곡선 문양이 특징적으로 장식되어 있다. 현재 대부분의 니브흐인은 전통 민속 문양이 장식된 현대식 옷을 즐겨 입는다.

옷을 자세히 보면 우데게족, 울치족, 윌타족, 나나이족, 오로치족, 만주족과 비슷한 것을 알수 있는데 이는 숙신이라고 불린 퉁구스 집단과 혼혈되면서 일부 니브흐인들이 퉁구스에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4.2. 음식

파일:Nivkh_dish-mos.jpg
니브흐인은 전통적으로 물고기를 주식으로 먹고 살았다. 물고기는 날것으로 먹거나 말려서 먹었고, 때로는 굽거나 쪄서 먹기도 했다. 물고기가 많이 잡힐 때는 물고기를 햇볕이나 바람에 반건조 시킨 유콜라(юкола)를 만들어 저장해 두었다. 물고기의 머리와 몸통은 약한 물에 여러 시간 가열하여 기름을 다 빼내는 방법으로 가공하여 오랫동안 보관했다.

유콜라나 싱싱한 물고기 또는 고기와 각종 식물을 넣어 수프를 끓여 먹기도 했다. 19세기 말부터는 감자를 먹었고, 밀가루와 곡물도 사서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밀가루에 많은 양의 생선 기름, 물개 기름을 넣어 전병을 굽거나 카샤(죽과 같은 음식)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니브흐인은 물고기 이외에 개고기도 먹었다. 그리고 물개, 돌고래와 같은 바다 동물 고기를 삶아 먹기도 했다. 특히 바다 동물의 심장과 신장, 앞지느러미는 뛰어난 진미로 여겨 날것으로 먹었다. 곰고기도 먹었는데, 곰고기를 먹을 때는 고대의 관습을 준수해서 심장, 등은 가장 큰 사위에게 주었다. 그 밖에도 오리, 거위, 들새도 구워 먹었으며, 비교적 최근에야 , 돼지, 염소 등 가축의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요리로는 유콜라, 바다 동물 고기, 물개 기름 외에도 생선 껍질에 각종 열매와 물개 기름을 섞어 만든 젤리인 ‘모스(мос)’는 지금까지도 가장 맛있는 음식으로 취급된다. 니브흐인은 갯배추를 햇볕에 말린 후 필요에 따라 소금물에 삶아 먹었다. 그리고 다양한 식물 뿌리를 말려 빻아서 조미료로 사용하기도 했다. 차가버섯, 월귤나무 잎사귀, 진달래 싹 등 각종 열매와 풀은 달여서 차로 마셨다. 남부 사할린의 포로나이스크 시에는 오랫동안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은 니브흐인이 살고 있는데, 그들은 채소, 가리비 죽, 그리고 양배추 김치와 유사하게 발효시켜 만든 샐러드를 먹는다.

4.3. 주거

파일:V.M._Doroshevich-Sakhalin._Part_II._Nivkh_Yurt-1.png
블라스 도로쉐비치(Влас Дороше́вич)의 «사할린(카트로가)» 157쪽 니브흐 주거 사진.
마을은 보통 1~10가구로 이루어졌으며, 장소는 생업에 유리한 지리적 조건에 따라 결정되었다. 겨울에는 아무르 강 부근 숲이 많은 높은 곳, 강어귀, 또는 바다 동물을 사냥할 수 있는 해변 가까운 곳에 주로 살았다. 그러다가 4월이 되면 호숫가나 실개천 근처의 여름 주거지로 이동하여 늦가을까지 지냈다. 그러나 20세기 초부터는 한 장소에 여름용 주거와 겨울용 주거를 별도로 지어 계절에 따라 옮겨가며 살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겨울용 주거는 티프(тыф)[8]라 불리며, 깊이 약 1~1.5m의 사각형 반지하 구조에 반원형 지붕을 덮은 형태였다. 집 한가운데에 화덕을 놓고 벽을 따라 침상을 배치했다. 한 집에는 보통 2~3가족이 침상 위에서 거주했고, 추운 날에는 썰매 끄는 개들이 집 중앙에 설치해 놓은 평상 위에서 지내도록 했다. 19세기 중반부터는 땅 위에 네 개의 기둥을 세우고 완만한 경사의 맞배지붕을 올린 구조의 가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여름용 주거는 말뚝 위에 통나무로 벽을 올리고 자작나무껍질로 맞배지붕을 덮은 구조였다. 원통형으로 벽을 쌓아 올리고 맞배지붕을 얹은 임시 주거도 있었다. 여름용 주거의 내부 공간은 비좁았고, 아궁이 위에 장대를 걸어놓고 갈고리를 이용하여 솥이나 온갖 잡동사니를 매달아 놓거나 옷을 널어 말렸다. 여름용 주거는 보통 생활하는 공간과 낚시도구나 물고기를 말리는 공간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5. 신앙

공식적으로는 러시아 정교이지만 전통적인 세계관은 곰 숭배( 토테미즘)나 샤머니즘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하늘과 땅, 물과 숲 등 모든 사물은 살아있는 것이며, 거기에는 신령이 깃들어 있다고 여겼다.

따라서 모든 신령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제물을 바치고 사냥의 성공을 빌었다. 니브흐인은 거대한 으로 나타나는 숲의 신령 ‘팔 으즈(Пал Ыз)’,  범고래로 상징되는 바다의 신령 ‘톨 으즈(Тол Ыз)’, 바다 제비의 모습을 한 ‘타이라아즈드(Тайраазд)’, 의 신령 ‘투우르 으틱(Туур Ытик)’, 그리고 의 신령 ‘미프 으즈(Миф Ыз)’ 등을 믿었다. 니브흐인은 특히 곰을 숲의 신령인 팔 으즈의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곰을 사냥하는 것은 신령이 보내주는 선물을 받는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곰을 사냥할 때에는 수많은 의례와 금기를 철저하게 지켰다. 곰을 사냥한 후에는 수컷이라면 3번, 암컷이라면 4번 “오!” 하고 소리쳤다. 그러면 숲의 신령이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낮에 곰을 사냥하고 “오!” 하고 고함을 지르면 멀리 사는 친척이 밤에 이 소식을 듣게 된다고 생각했다. 사냥한 곰을 마을로 가져갈 때는 먼저 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제거한 후 곰의 머리를 앞쪽으로 가도록 하여 운반했다. 이때 여자들은 통나무로 만든 악기를 연주하며 행렬을 맞이했다.

니브흐인의 신앙에서 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람이 죽으면 그가 좋아하던 개를 희생 제물로 삼기도 했다. 또 아기가 태어나면 아기의 팔다리 관절에 개의 털로 짠 실을 매어주었다. 그리고 나중에 그 아기의 젖니가 빠지면 그것을 털을 제공했던 개에게 먹였다. 그렇게 하면 그 개가 늙어 죽을 때까지 그 아이의 동반자가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또한, 니브흐인은 일 년에 한두 번씩 집에서 하늘의 신령에게 기도를 올렸으며, 숲 속의 신성한 나무 옆에서 땅의 신령에게 기도를 올려 건강과 행운을 빌었다. 집안에는 집을 수호하는 신령의 목상을 특별한 장소에 보관하고 음식을 바쳤다.

니브흐인은 신생아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의식에도 큰 의미를 부여했다. 때로는 조상이 환생했다고도 생각하여 조상의 이름을 붙여 부르기도 했다.[9] 그리고 이름과 사람은 끊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해서 타인에게 이름을 알려주는 것을 두려워했다.[10]

이름을 아는 사람이 해를 끼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브흐인은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으며, 가족 간에도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큰아들’, ‘막내’ 등과 같은 친족 명칭을 사용하거나 가명을 만들어 불렀다.

5.1. 장례

니브흐인은 불과 관련된 모든 의식도 엄격하게 준수하였다. 니브흐인 장례 문화는 아무르 강 유역의 다른 민족들과 달랐다. 니브흐인은 죽은 사람을 주로 화장했다. 화장은 숲에서 이루어졌으며, 시신과 함께 죽은 이 소유의 개인 사물을 거대한 장작불에 태웠다. 이때 모인 사람들은 의례적인 곡을 했다.

화장 후 남은 재는 가운데로 모으고 주변에 통나무로 담을 쌓아 두었다. 그리고 그 옆에 라프(раф)라고 불리는 약 1m 높이의 나무집을 만들고 나무인형에 옷을 입히고 신발을 신기고 죽은 자의 두개골 뼈 일부를 묶어 그 안에 넣어 두었다. 그 후 그 주위에서 장례 후 첫 한 달은 자주, 일 년간은 한 달에 한 번, 그 후에는 일 년에 한 번씩 제사를 지냈다.

제사를 지낼 때는 죽은 자를 위한 모닥불을 피우고 거기에 음식을 던져 넣었다. 물에 빠져 죽었거나 실종된 사람, 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해 시신이 없는 경우에는 나뭇가지와 풀로 사람 크기의 인형을 만들고 죽은 자의 옷을 입혀 매장하거나 화장을 했다. 이때에도 동일한 의식을 행했다.

5.2. 제례

파일:V.M._Doroshevich-Sakhalin._Part_II._Nivkh_Amusement.png
블라스 도로쉐비치(Влас Дороше́вич)의 «사할린(카트로가)» 165쪽 니브흐 곰 제의 사진.
니브흐인의 대표적인 민족 제례는 물에 대한 헌제와 오호츠크 문화에서 온 곰 제의다.[11] 물에 대한 헌제 의식은 바다와 강의 얼음이 녹는 봄과 얼기 시작하는 늦가을에 이루어졌다. 이때 유콜라와 같은 의례용 음식을 나무로 만든 특별한 그릇에 담아 물속에 던져 넣는 방식으로 물의 신령에게 제물을 바쳤다. 물에 대한 헌제 의식에 사용하는 그릇은 다양한 모습의 물고기나 바다 동물 모양으로 나무를 깎아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은 일상생활에서는 사용하지 않고 이 헌제 때에만 사용할 수 있었다. 봄에는 물고기 오리 모양으로 깎아 만든 나무배에 갖가지 장식을 하고 음식을 담아 물에 띄워 보냈다. 그리고 겨울에는 의례용 그릇에 음식을 담아 얼음 구멍에 집어넣었다. 강에서 배를 타고 다닐 때도 담배나 음식을 물속에 던져 넣고 아프지 않고 잘 살게 해 달라고 빌었다. 물에 대한 헌제는 물고기와 바다 동물을 보내 준 물의 신령에 대한 일종의 답례였다.

곰 제의는 자연을 숭배하고 죽은 조상을 기리는 니브흐인의 전통이 가장 잘 반영된 민속 축제다. 이것은 부족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1~2월의 만월 기에 약 2주 동안 이루어진다. 이 제의를 위해 니브흐인은 직접 잡거나 또는 주변 퉁구스계 민족인  네기달족이나  나나이족에게서 사들인 새끼 곰을 나무로 만든 특별한 우리에 가두어 3~4년간 키운다.[12] 새끼 곰을 키우는 동안에 여자들은 곰 우리에 접근하는 것이 금지되는 등 다양한 규칙과 금기를 지켜야 했다.

곰 제의가 시작되면 곰의 주인은 집을 보호하는 신령에게 더 이상 곰을 기를 수 없는 것에 대해 용서를 빌고, 곰 우리로 가 곰에게 먹이를 주었다. 그리고 곰에게 특별한 옷을 입혀 집집마다 데리고 돌아다녔다. 그때 각 집에서는 장식이 조각된 나무 식기에 먹이를 담아 곰에게 주었다. 그래야 집안에 평안함이 찾아온다고 믿었다.

곰과의 작별 의식은 마지막으로 방문하는 집 옆에서 이루어졌다. 죽은 사람에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곰에게 풀로 짠 두 개의 허리띠에 식물 뿌리와 열매, 담배 주머니 등 ‘여행 식량’과 ‘여행 물품’을 둘러 매 주었다. 그리고 나서 곰을 기둥에 묶고 곰에게 말을 걸었다.

곰을 사육하고 제의를 수행하는 것은 명예로운 일로 여겼으며, 이웃과 친척들이 곰의 주인을 도와주었다. 제의는 지역별로 약간의 차이가 있었지만, 모두 운동 경기와 게임, 악기 연주, 춤이 동반되었다. 죽은 곰의 머리 옆에는 곰을 ‘대접하기 위한’ 음식을 놓아두었다. 그 후 절차에 따라 곰의 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제거했다.

곰의 고기는 씨족의 부싯돌로 피운 불에 삶아서 특별한 나무 냄비에 넣고 곰의 모습이 조각된 국자로 떠서 나누어 먹었다. 제의 마지막 밤에 노인들은 밤새도록 곰의 두개골 근처에 앉아서 제의 음식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후 음악 소리에 맞춰 곰의 두개골이 보관된 창고 또는 나무 위로 곰의 머리를 옮겼다. 그리고 그 앞에 음식을 놓고 작별의 말을 한 뒤에 그 옆에 전나무를 심었다. 심어 놓은 전나무의 숫자는 제의를 위해 죽인 곰의 숫자와 일치하도록 했다.

6. 현황

1990년대 초부터 니브흐인은 전통 산업 부흥을 위한 씨족 경제 공동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부로부터 전통 산업 구역과 쿼터를 할당받아 어로, 바다 동물 사냥 등 전통 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러나 시장 경제 체제의 경쟁에 익숙하지 않아 많은 공동체가 적자에 허덕이거나 활동을 중단하는 등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오호츠크 해 대륙붕 개발도 환경을 비롯한 많은 문제점을 발생시키고 있다. 이에 대해 니브흐인은 전통 산업 구역에서의 자원개발에 따른 손해 배상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만, 러시아 정부 등은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실정이다.

그러나 니브흐인은 어려운 경제 사회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곰 제의를 부활시키거나 전통 경기 대회 개최, ‘에리(Эри)’라는 민속 가무단 창립, 전통 공예 센터 설립 등 전통 정신문화 복원을 위한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

7. 기타

한국의 언어학자인 강길운 교수가 한국어는 길략어, 곧 니브흐어와 동계어라는 주장을 했다. 그리고 문화인류학자들도 단군 신화를 니브흐족의 곰 토템과 연결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학계의 정설은 아니다.

니브흐 고유의 악기로 " 팅링(T'yngryng)"이라는 호금 계열의 찰현악기가 있는데, 중국에서 전해진 것으로 보이며 아이누 전통악기인 "톤코리(トンコリ)"와 명칭은 유사하지만 서로 생김새는 전혀 다르다. 특이한 것은 발칸 반도 구슬레처럼 현이 하나만 있으며 연주할 때 로 현을 가볍게 건드려 진동을 유발시킨다고 한다.

과거 판노니아 일대에 존재하던 유목민족인 아바르와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운 민족임이 밝혀졌다. 현재 아바르는 유연과 같은 민족으로 추정되므로 니브흐족이 유연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8. 관련 문서



[1] Nʼivxgu, 아무르 방언. [2] Nʼiɣvŋgun, 동사할린 방언. [3] '큰 배'를 의미하며, 1930년대까지  러시아인을 비롯한 주변 민족들은 이들을 해당 명칭에서 유래한 ‘길략(гиляк)’이라 부르기도 했다. [4] 입과 팔에 문신을 하는 아이누 여성들과 대비된다. [5] 이는 순록 목축에 종사하며, 이민족과의 결혼 및 를 키우는 민족과 접촉하지 않으려는 배타적인 성향의 윌타족과 현격한 대조를 보인다. [6] 고구려를 포함한 한민족의 조상은 집단유전학 연구에 따르면 요하 농경민으로, 북방 퉁구스-몽골계 유목민의 비중은 미미하다. 한국인과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운 일본인이 다수의 요하 농경민의 후예인 야마토계와 소수의 조몬계로 이루어졌다는 걸 보면 명백하다. [7] 1935년 109명, 1940년 71명. 출처: 일본어 위키백과 ニヴフ [8] 디프(дыф), 타프(таф) 등으로도 불리었다. [9] 이는 캄차카 지방 추코트카 등지에 살던 케레크 민족하고 같다. [10] 이름에 대한 금기가 많은 점은 아이누족과도 유사하다. [11] 홋카이도 아이누족 또한 이요만테라 불리는 곰 축제가 있는데 니브흐의 곰 제의와 기원은 같다. [12] 아이누족은 1~2년 정도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