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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즈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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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성정부 주석
한문 張治中
한국식 독음 장치중
영문 Zhang Zhizhong
본명 장본요(張本堯)
경백(警魄), 문백(文白)[1]
출생 1890년 10월 27일 청나라 안후이성 성소현
사망 1969년 4월 6일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svg
학력 보정군교 3기 보과 졸업
직업 군인, 정치가

1. 개요2. 생애
2.1. 초기 경력2.2. 국민혁명군의 지휘관2.3. 중일전쟁 시기2.4. 신장 위구르족과의 평화협상2.5. 국공내전 시기2.6.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3. 가족관계4. 평가5. 참고문헌

1. 개요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가. 1916년 보정군교를 졸업한 이래 여러 군벌의 배하에서 복무하다가 황푸군관학교 입영생 대대장이 되면서 장제스와 인연을 맺고 그의 부하가 되었다. 이후 장제스 휘하에서 국민혁명군을 지휘해 리쭝런, 펑위샹, 옌시산 등 여러 군벌과 맞붙었고 공산당 토벌작전에도 참여했지만 개인적으로 공산당에게 호의를 보였다. 중일전쟁시기 일본군과 여러 전투를 치뤘고 전쟁 후 충침 회담을 주선해 국공합작이 유지되도록 노력했으나 끝내 실패했다. 이후 국공내전 때 공산군과 맞붙었으나 끝내전세를 뒤집지 못하자 1949년 화평을 논의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갔다가 그대로 눌러앉아 국민당을 탈퇴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여러 직책을 맡았으나 반우파 투쟁 때 우파로 몰렸고 문화대혁명 중에 재산을 몰수당했다.

2. 생애

2.1. 초기 경력

장즈중은 1890년 10월 27일 안후이성 성소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농민이었고 아버지는 수공업자였다. 장즈중은 여섯살 때 서당에 들어가 10년간 공부했다. 하지만 이후 가난 때문에 6년 동안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각지를 떠돌다가 안후이성 풍락진에서 여위재(呂爲才)라는 사람이 경영하던 '여덕승호(呂德勝號)' 가게에서 견습생으로 일했다. 이후 그는 양저우의 염무소(鹽務緝) 사설 보병으로 근무했다가 안칭(安慶) 경찰서에서 보충 경찰원으로 배속되었고, 뒤이어 양저우 순경훈련을 이수해 3개월만에 합격하고 정식 경찰이 되었다.

그러던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했다. 이때 장즈중은 양저우에서 반청 봉기를 일으킨 군대에 합류해 북양군벌과 전투를 치렀다. 이후 청나라가 망하고 중화민국이 수립된 뒤인 1912년, 장즈중은 육군 제2차 예비합교에 입학했고 4년간 공부해 1916년 보정군교 3기 보과를 졸업했다. 그후 광둥성에서 복무하던 장즈중은 1917년 호법전쟁에 참가하여, 광둥, 제남, 영창, 광시군 본부 참모, 사단 참모, 계계군벌 군교 참모장 등을 역임했다.

2.2. 국민혁명군의 지휘관

1924년 초, 장즈중은 쑨원의 삼민주의를 옹호하여 국민당에 가담했고 그해 12월에 황푸군관학교 3기 입영생의 대대장교단장을 역임했으며 국민혁명군 제2사단 참모장, 광주참사를 겸임했다. 이때 그는 당시 황푸군관학교 정치위원이었던 저우언라이와 깊은 친분을 맺었다. 1926년 7월, 그는 국민혁명군의 북벌에 참가해 국민혁명군 총사령부 부관장, 황푸군교 우한분교 교육장 등을 역임했다. 그러다가 1927년 장제스 4.12 상하이 쿠데타를 단행한 후 난징에 가서 장제스의 부관으로 활동하다가 장제스가 일시적으로 사임한 뒤 해외에 나가 유럽과 미국을 시찰했다.

1928년, 황푸군관학교는 난징으로 이전하여 중앙 육군사관학교로 개칭했다. 장즈중은 1928년부터 1937년까지 중앙 육군사관학교 교육장을 역임했다. 이 기간동안 그는 장제스의 전쟁에 동참했다. 1928년 우한에서 대대장을 맡아 펑위샹의 군대와 맞서 싸웠고 중원대전 때 2사단장을 맡아 펑위샹, 옌시산에 대한 공격을 지휘했다. 1932년 1월 28일, 일본군이 제1차 상하이 사변을 일으켰을때, 그는 상하이 수비에 참가해 일본군에게 심한 타격을 입히는 데 일조했다. 또한 1933년 12월엔 국민당 제4군 총지휘를 맡아 복건사변을 진압했다.

다른 국민당 장령들과는 달리, 장즈중은 매번 전쟁이 끝난 후 적극적으로 병권을 내놓고 군교로 돌아가곤 했다. 그러다가 1936년에 정식으로 베이징과 상하이의 경비 사령관을 맡았다. 그는 이 시기에 국민들의 '연공항일' 주장에 공감하여 공산당과 타협하여 내전을 종식하기를 희망했으며 서안 사건이 벌어졌을 때 장제스가 죽더라도 강경진압해야 한다는 장성들의 주장에 반대해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주장했다.

2.3. 중일전쟁 시기

1937년 4월 6일, 장즈중은 중앙 육군사관학교 교육장에서 사직했고 장제스가 교육장에 부임했다. 이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장즈중은 제9 집단군 사령관을 맡았다. 1937년 8월 13일, 제2차 상하이 사변이 벌어졌다. 이에 장즈중은 상하이에 투입되어 일본군의 공세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상황이 여의치 않자, 국민혁명군은 어쩔 수 없이 전선에서 철수했고, 장즈중은 후난성 정부 주석겸 보안사령관을 맡았다.

그러나 장제스는 장즈중이 상하이에서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고 여겼다. 그는 상하이 전투를 처음 치렀을 때 일본해군 특수 해병대를 10일안에 파괴할 계획이었다. 당시 일본 특수해 해병대는 불과 수천명에 불과해 독일장비를 갖춘 수만 명의 엘리트 군대로 포위공격에 나섰으니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장즈중은 10대 1의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을 물리치지 못했다. 장제스는 이 일로 격분해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장문백을 치워야겠다."

이에 장제스는 주샤오랑(朱紹良)으로 하여금 장즈중을 대신하게 했다. 게다가 1938년 후난성 군사 최고지휘자로서 '초토화 정책'을 시행하던 장즈중은 창사에서 300리 떨어진 신장하(新墙河)을 5리 떨어진 신허(新河)와 오인하는 잘못을 범했다. 이 바람에 본래 창사에서 300리 떨어진 곳에서 붙이려 했던 불을 5리 인근지역에 붙여버렸고 산불은 11월 13일부터 17일까지 닷새동안 계속되어 창사에게 엄청난 손실을 입혔다. 이로서 창사는 중일전쟁 시기에 가장 큰 손실을 입었던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장즈중은 이 책임을 지고 11월 20일 해직되었다.

하지만 그는 곧 장제스의 신임을 회복해 1939년 2월 충칭에서 군사위원회 위원장 시종실 제1처 주임을 맡아 군사 기밀을 다루면서 장제스를 옆에서 모시는 중요한 비서가 되었다. 그리고 1940년, 장즈중은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장겸 삼민주의 청년단 서기장을 맡았다. 그는 이 직책을 맡아 "기밀을 엄수한다", "말수를 적게 하고 주장도 적게 하자"는 모토를 세우고 신중한 자세로 열심히 일해 장제스의 호감을 샀다.

1941년 환남사변 이후, 장즈중은 중국 국민당을 대표해 중국 공산당과 담판했다. 이후 국공 쌍방의 담판은 중일전쟁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었는데, 장즈중은 여러차례 중국 국민당을 대표했다. 그는 국민혁명군 내 온건파로서 국공합작을 지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4. 신장 위구르족과의 평화협상

1944년, 소련의 지시로 신장에서 '3구 혁명'이 발생하여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이 수립되었다.장즈중은 국민 정부의 명령을 받들어 신장으로 가서 담판했다. 그는 신장 위구르족의 자치에 동의하고 신장성 참의회를 수립했다. 그러면서도 위구르족에게 국민정부에 대항하여 독립 운동을 벌이는 것을 지양할 것을 권고했다. 이후 1944년부터 1946년 6월까지, 장즈중은 여러차례 우루무치에 가서 소련 영사의 중재하에 위구르족 지도자들과 신강 문제를 담판했다.

1946년 3월, 장즈중은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했고 5월엔 신장성 정부 주석이 되었다. 그해 3월 25일, 그는 주석의 자격으로 '민중서한'을 발표하여 평화 조항과 시정 강령을 철저히 실행하고 민죽 평등과 단결 원칙을 준수할 것임을 재확인했다. 그해 5월, 몽골 인민공화국 군대가 북탑산을 공격하자, 장즈중은 다시 신장으로 가서 이 문제를 처리했다. 7월 8일, 외교부는 외몽골군의 신장 침공에 대해 소련 주재 주중 대사에게 항의했다.

이때 장즈중이 이끄는 신장 정부가 임명한 주요 임원은 대부분 공산당원이었고, 이 때문에 곽기교(郭寄嶠) 등은 중앙 정부에게 장즈중이 중국 공산당의 스파이라는 고발장을 제출했다. 그러나 장제스는 그를 다른 곳으로 옮기면서도 별다른 징계를 내리지 않았다.

2.5. 국공내전 시기

중일전쟁이 끝난 직후인 1945년 9월,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등 중국 공산당 대표단은 패트릭 헐리 대사와 함께 충칭으로 가서 장제스와 회담했다. 이때 장즈중은 사전에 헬리 대사와 함께 옌안으로 가서 마오쩌둥과 대면하여 회의 절차를 논의하고 충칭에서는 중국 국민당을 대표하여 회담에 9차례 차여했다. 국공 쌍방이 쌍십협정에 서명한 후, 장즈중은 다시 옌안으로 가서 마오쩌둥과 회담했다.

장즈중은 이 시기에 국민혁명군 지휘관이었지만 공산당에게 지극히 우호적인 성향을 보였다. 1945년 5월 국민당 6대 대회에서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위원과 상무위원에 당선된 직후, 장즈중은 저우언라이의 부탁을 받고 신장에 가서 여러 해동안 감금되어 있던 100여 명의 공산당 간부들을 옌안으로 돌아가게 했다. 또한 중일전쟁이 끝난 후 신장성정부 주석을 역임하면서 신장에 구금되었된 공산당원들을 지속적으로 풀어줬다. 그후 그는 국공내전 시기에 공산당과 싸운 적이 없는 유일한 국민혁명군 장성으로서, 사람들에게 "평화장군"으로 불렸다. 그는 여러 차례 국민당을 대표하여 옌안으로 가서 공산당과 담판했다.

1947년 1월 1일, 신장성 정부주석 장즈중은 특별기를 타고난징에 도착하고 다음날 장제스를 만내 국공 쌍방간의 대립을 타개하는 문제를 얘기했다. 장제스는 군대를 재구성하고 교통량을 복권하고 지역 정치력을 회복하는 시간을 벌기 위해 1월 16일 장즈중을 파견해 공산당과 평화회담을 갖기로 했다. 장즈중은 옌안으로 가서 평화통일을 논의했지만 공산당은 거부했다.

1947년 2월 1일, 장제스는 황포로 관저에서 장즈중, 쑨커, 위유런, 다이지타오, 사오리쯔(邵力子) 등을 불러모아 신헌법을 논의했다. 이후 장즈중은 1948년 8월 서북 군장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중국 국민당은 군사적으로는 공산군에게 연전연패하며 속절없이 패주했고 경제적으로는 심각한 공황을 맞이해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위기에 직면했다.

1949년 1월 장제스가 연이은 패배의 책임을 지고 하야하고 국민정부의 신임 총통이 된 리쭝런은 즉시 공산당과 회담을 가졌다. 1월 4일, 난징신문은 장즈중이 미국 및 소련 양국 대사관과 접촉하여 중국 공산당과의 협상을 안배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2월 1일 오후, 장즈중 서북군정장관은 린저우에 도착해 기자들에게 평화의 가능성은 아직 남아있다며 정부 평화대표를 임명해 평화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그해 3월 3월, 장즈중은 리쭝런의 편지를 가지고 장제스를 방문했다. 그는 장제스의 '평화의 조건과 한계에 대한 의견에 대해 "중공은 이미 평화의 문을 조금 열어 놓았지만 전도가 곤란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3월 29일, 장제스를 다시 찾아가 공산당과의 평화회담 문제에 관해 논의했다. 이때 장제스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내가 은퇴한 것은 나 자신이 평화를 제창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불편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화평 대계는 리 총통 권한대행과 허응흠 행정원장이 맡아야 한다. 나는 야당으로서 리 총통 권한대행이 하루빨리 평화를 실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지지할 것이다."

1949년 4월, 장즈중은 국민정부의 평화회담 대표단 수석대표로서 베이징에 가서 중국 공산당 담표와 담판을 지어 '국내 평화협정 8조 24항'을 제정했다. 그러나 이 협정은 국민정부의 거부로 무산되었고, 장즈중은 저우언라이의 간곡한 권유를 받아들여 베이징에 남아 '시국에 대한 성명'을 발표한 후 국민당을 탈퇴했다. 그해 9월, 그는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제1차 전체회의에 참석했고 뒤이어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식에 참가했다.

2.6.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후, 장즈중은 서북군정위원회 부주석,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 중화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부주석, 정협 전국위원회 위원, 중국국민당 혁명위원회 중앙부주석 등을 역임했다. 그러던 1957년 3월, 장즈중은 정치협상회의에서 당과 당외인사의 문제에 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1. 유직유권유책(有職有權有責): 당원과 당외인사는 같은 지위에 있어도 당원이 알고 있는 것을 당외 인사에게는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 또한 일부 당원 간부는 항상 당외 인사에 대한 배려를 단순하게 생각하거나 국가가 그들을 배치하는 것은 외관을 꾸미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결국 당외인사는 직위는 있으나 권리가 없고, 책임도 없다.
2. 통일전선정책의 인식과 실행방법 문제: 당원들은 당외인사와의 대화에서 협의를 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지시를 하고, 좌담회는 형식일 뿐 자신이 좋아하는 말을 들을 뿐으로 다른 사람에 대해서만 말하고 자기비판은 하지 않는다. 때문에 당외인사는 의견을 내지 않고 특히 반대 의견은 내지 않지만, 회의를 마친 후에는 많은 의견이 나온다.
3. 당원과 당외인사의 우호협력 문제: 당원들은 당외인사와 생활을 함께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유람이나 오락조차 따로 한다. 당원들은 말을 주고받다가도 당외인사가 오면 대화를 그치고, 거꾸로 당외인사들은 대화를 하다가 당원이 오면 대화를 그만둔다. 또 당외인사는 일부 관계하는 회의에 참가할 수 없고, 관계되는 문건도 볼 수 없으며, 정책이나 정강이 적시에 전달되지 않아서 책임있는 당외인사도 상세하게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규칙을 위반하기 쉽다. 당과 대중의 관계는 피부와 뼈인데 살이 없는 형편으로, 많은 지식분자들이 당에 접근하려고 해도 높은 담에 의해서 차단되어 접근이 불가능하다.

1957년 6월, 마오쩌둥은 반우파 투쟁을 단행해 우파로 규정된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이때 장즈중 역시 우파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마오쩌둥이 특별히 그를 비호해준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1958년 9월 10일부터 29일까지 마오쩌둥과 함께 허베이, 안후이, 난징, 상하이, 항저우 등지를 조사하고 돌아온 후 "인민을 사랑하는 마오 주석-마오주석의 비밀 조사"라는 기사를 써 인민일보에 개재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시기, 그는 위기를 맞이했다. 홍위병들은 가죽채찍을 들고 장즈중의 집을 여러차례 습격해 재산을 약탈했다. 이에 저우언라이가 그를 보호할 것을 마오쩌둥에게 제의했고, 마오쩌둥은 이를 수락해 '보호해야 할 간부 명단'에 그의 이름을 넣어줘 그를 보호하게 해줬다. 그래서 그는 더이상 박해를 받지 않았다.

1969년 4월 6일, 장즈중은 베이징에서 병사했다. 그의 시신은 화장 후 바바오산 혁명공묘에 매장되었다.

3. 가족관계

  • 장녀 장소아(張素我)는 전국정협 상무위원과 전국여성연합회 부주석을 역임했다. 2011년 12월 초에 9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장자 장일진(張一真)은 미국에 유학갔고 결혼 후 상하이에서 살다가 장인과 부인을 따라 대만으로 이주했다. 이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베이징으로 돌아가 장례를 치르고 미국으로이주하여 2014년 1월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차녀 장소앙(張素央)은 미국에서 유학한 뒤 중국 국가체육위원회에서 여러 해 동안 근무했고, 중국기술협회 주석과 국제기예연합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했으며, 국가체육위원회와 국제기예연합회로부터 여러 차례 표창을 받았다.
  • 삼녀 장소초(張素初)는 베이징 외문출판사에서 일하다가 미국으로 유학하여 하버드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뒤 미국 정부에서 일했다. 2011년 1월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차남 장일순(張一純)은 베이징시 정치협상회의 부비서장 출신으로, 퇴직 후 베이징시 홍콩마카오대만사무판공실에서 근무했다. 2015년 10월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사녀 장소구(張素久)는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며 미국 국적의 중국인 공익사업 활동을 조직하여, 자주 국무원 교민 사무소의 조직 활동에 참가하였다.

4. 평가

장즈중은 중국 대륙 내에선 대체로 호평을 받는다. 중국 공산당은 장즈중이 공산당 군대와 대적하지 않은 국민당 고위 장교 중 한 명으로 '평화장군'으로 불리며 해방군의 신장 진주에 큰 공헌을 하고,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에 적극 참여하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중일전쟁 시기 그의 실책으로 인해 발생한 대화재로 참혹한 피해를 입었던 창사 주민들은 그를 비꼬는 대련(對聯)과 편액(匾額)을 만들어 민간에 널리 알렸다. 한편 중화민국은 장즈중이 국민당을 떠나 중화인민공화국 진영에 가입했기 때문에, 그를 반역자로 규정하고 있다.

5. 참고문헌


[1] 개명 후의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