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21 11:31:11

조선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조선'의 다른 뜻에 대한 내용은 조선(동음이의어) 문서를, 조선의 역사에 대한 내용은 조선시대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파일:나무위키프로젝트.png
이 문서는 나무위키 한국사 프로젝트에서 다루는 문서입니다.
해당 프로젝트 문서를 방문하여 도움이 필요한 문서에 기여하여 주세요!

한국사 韓國史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11px; margin-top:-6px; margin-bottom:-5px"
상고시대 고조선
위만조선
예맥 한사군 삼한
원삼국시대 부여 임둔군 진번군 현도군 낙랑군 마한 변한 진한 우산 주호
옥저 동예 대방군
삼국시대 고구려 낙랑국 백제 목지국 가야 신라 탐라
고구려 백제 신라
고구려부흥운동 안동도호부 보덕국 백제부흥운동
남북국시대 발해 신라
후삼국시대 태봉 후백제 신라
고려
고려시대 발해부흥운동 고려
고려
동녕부 쌍성총관부 고려 탐라총관부
고려
조선시대 조선
구한말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조선 대한 광복군 정부
대한 국민 의회 한성 정부 상해임시정부
상해임시정부
남북분단 조선인민공화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련군정 미군정
북조선인민위원회 대한민국 1공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2공
군정
3공
4공
5공
6공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oat_of_Arms_of_Joseon_Korea.png 조선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1px"
관련 문서
역사 · 왕사 · 궁궐 · 행정구역 · 평가 · 인물( 왕비/ 후궁/ 왕세자빈) · 창작물 · 기타 관련 문서
관련 틀
틀:역대 조선 국왕 · 틀:역대 조선 왕비 · 틀:역대 조선 대비 · 틀:역대 조선 왕대비 · 틀:역대 조선 대왕대비 · 틀:조선의 중앙 정치 기구 · 틀:조선 4대 명필 · 틀:조선 시대의 반정 · 틀:조선 왕궁의 정문 · 틀:조선 왕궁의 정전 · 틀:문묘 배향 18현 · 틀:조선왕조실록 · 틀:조선의 4대 사화 · 틀:조선의 5대 궁 · 틀:조선의 무기 · 틀:조선의 별궁과 궁가 · 틀:조선의 붕당 · 틀:조선의 수영 · 틀:조선의 중앙 정치 기구 · 틀:조선의 천주교 박해 · 틀:조선의 대외 전쟁 · 틀:조선 시대의 실패한 내란 · 틀:조선 시대의 환국 }}}}}}
대조선국
大朝鮮國
파일:1280px-Flag_of_the_King_of_Joseon_(fringeless).svg.pn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oat_of_Arms_of_Joseon_Korea.png
어기[1]
파일:Korea_(orthographic_projection).png
1392. 8. 5.[음력][3] ~ 1897. 10. 12. (505년 68일)[4]
성립 이전 칭제건원 이후
고려 대한제국
위치 한반도와 부속 도서[5]
역사
[ 펼치기 · 접기 ]
개국 1392년 8월 13일
훈민정음 반포 1446년
경국대전 반포 1474년
임진왜란 1592년 ~ 1598년
병자호란 1636년 ~ 1637년
강화도 조약 1876년
갑오개혁 1894년 ~ 1896년
대한제국 수립( 칭제건원) 1897년
수도 개경(開京)[6] ,(1392 - 1394, 1399 - 1405),
한성부(漢城府)[7] ,(1394 - 1399, 1405 - 1897),
민족 한민족, 여진족[8]
언어 중세 한국어 ,(16세기 이전),
근대 한국어 ,(17세기 이후),
문자 한자, 훈민정음( 한글 · 옛한글)
국교 유교( 성리학)[9]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중앙 정치 제도 조선 조정
(의정부서사제, 육조 직계제, 내각제)[10]
국가원수 국왕 ,(1392년 ~ 1894년),
대군주 ,(1894년 ~ 1897년),
주요 군주
(군주 묘호년도)
[ 펼치기 · 접기 ]
초대 태조 ,(1392년 ~ 1398년),
3대 태종 ,(1400년 ~ 1418년),
4대 세종 ,(1418년 ~ 1450년),
7대 세조 ,(1455년 ~ 1468년),
9대 성종 ,(1469년 ~ 1494년)[11],
10대 연산군 ,(1494년 ~ 1506년),
11대 중종 ,(1506년 ~ 1544년),
14대 선조 ,(1567년 ~ 1608년),
15대 광해군 ,(1608년 ~ 1623년),
16대 인조 ,(1623년 ~ 1649년),
19대 숙종 ,(1674년 ~ 1720년),
21대 영조 ,(1724년 ~ 1776년),
22대 정조 ,(1776년 ~ 1800년),
26대 고종 ,(1863년 ~ 1897년)[12],
국성 전주 이씨(李)
연호 개국[13] ,(1894년 ~ 1896년),
건양 ,(1896년 ~ 1897년),
통화 문(文) ,(푼, 닢, 1633년 ~ 1892년),
양(兩) ,(냥, 1892년 ~ 1902년),
(圓) ,(1902년 ~ 1910년),
법통 승계 국가 대한제국
현재 국가 대한민국, 북한
1. 개요2. 국호3. 역사4. 평가5. 왕사6. 정치 체제7. 경제8. 생활 수준9. 계급10. 군사
10.1. 조선 전기10.2. 조선 중기10.3. 조선 후기
11. 인구12. 외교13. 기타14. 연표15. '조선'이 들어간 별명이 붙은 것들16. 관련 문서

1. 개요

조선은 고려의 뒤를 이어 1392년부터 1897년까지 505년[14]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를 지배했던 왕조 국가이다. 일반적으로 조선 이후 12년간 존속한 대한제국까지 포함해 분류하며, 이에 따르면 한국사의 마지막 왕조 국가이자 2019년 현재까지 한반도의 마지막 통일국가이다.

고려 말 황산대첩 등의 활약으로 군인으로서 명성을 얻은 이성계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옛 고조선의 이름을 물려받아 건국하였다.[15]

1897년, 고종 대한제국을 선포하여 조선이라는 국호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국호를 조선으로 한 날은 1393년 음력 2월 15일이었으며, 양력 1897년 10월 12일에는 대한제국이 선포되었고, 1910년 8월 29일에는 일본 경술국치에 의해 강점이 시작된다.

후삼국시대를 재통일한 고려와 달리, 이성계의 쿠데타로 만들어진 왕조이기에 고려를 그대로 계승한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다만 고려 말 원나라의 몽골 황실이 내정을 간섭하던 시기의 영향과 성리학의 유입이 고려와 조선의 차이를 크게 결정지었다.[16]

고려와의 가장 큰 차이는 숭유억불. 조선 이전의 국가들은 중원에서 유래된 종교적 색채의 학문인 유교를 정치적인 학문 정도로 봤지 종교로 보진 않았으며, 삼국사기 중기 이래 천 년간 우세했던 전통적인 불교가 국교로 대접받았다. 그러나 고려 말 중원에서 성리학[17]이 들어오면서 여기에 크게 감화된 사대부들이 조선을 개국하면서 유교를 원리로 삼고 이후 조선 멸망 때까지 국가교학(國家敎學)[18]으로 삼았다. 이전 한반도 내 국가들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이다.

또한 고려보다 한층 더 세련된 중앙 집권화 관료제 국가를 완성했다. 이런 강력한 중앙의 힘은 "유교적 이상에 따라 통치되는 이상적 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삼아 건국 100년 만에 나라 곳곳을 유교로 체득시키는 데 거의 성공한다. 그런 유교화가 가장 정점이었던 것은 17세기의 조선 중기. 이는 다시 후기에 접어들면서 서학의 전파, 실학의 발흥 등과 함께 그 색채가 차츰 옅어져 갔으나, 산업화와 근대화가 진행된 현재의 남북한 모두에 그 잔재가 어느 정도 남아있다. 현재 "전통 문화"라고 부르는 거의 대부분이 조선시대(특히 18세기 이후의 중후기)에 형성된 것들이다.

현대 한국인들에게 가장 친숙한 왕조 국가이나, 외세에 의해 멸망한 가장 가까운 시기의 국가라는 점에서 조선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좋지 못하다. 심지어 일각에서는 전통과 역사를 따로 분류하자는 주장까지 존재할 정도다.

대한민국은 조선의 영토와 민족, 문화 등을 그대로 계승하긴 하였으나, 이와 국가의 정체(政體)는 완전히 별개이다.[19]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에서 통용되는 화폐에 도안된 인물들이 100% 조선 시대 사람이고,[20] 광화문 등 전국 곳곳에서 조선 시대 위인들이 기념되고 있는 것은 조선적 요소가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깊이 뿌리내려 있음을 보여 준다.[21] 또한 현재 외국의 중국, 일본, 베트남 같은 한자문화권 국가에서는 조선반도, 조선어, 조선 등으로 한국을 호칭하는 경우도 많다.

간혹 역사 인식이 빈약한 중국인들은 조선을 제후국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조선은 단순히 조공 외교를 했던, 500년간 유지된 독립 왕조다. 어느 단순 속국이 본 왕조보다 2배 이상 오래 갈까?

2. 국호

태조 이성계는 즉위 후 즉위 교서를 통해 '나라 이름은 이전대로 고려(高麗)라 한다'고 밝히고, 명나라에 새 나라의 개국과 태조의 즉위를 알리는 내용의 사절을 보낸다. 이때 명은 새 나라의 국호는 무엇으로 고쳤는지를 되묻는데, 이에 조선은 백관을 도당에 모아두고 국호를 논의해 고려라는 국호를 고집하는 대신 이성계의 고향인 " 화령(和寧)"과 고대에 존재하였던 국가명인 "조선(朝鮮)" 중에 하나를 택하여 달라고 청하고, 명이 조선을 택하여[22] 국호가 확정되었다.

이 점은 두고두고 민족주의자들에게 까이고 있지만, 반드시 이상한 일만은 아니다.[23] 조선으로서도 역성 혁명으로 새로운 나라를 건국한 만큼 왕씨의 고려 대신 새로운 국호를 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고, 조선이 내정한 '이름 후보' 중 하나를 명이 선택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얻는 외교적 이익까지 계산하지 않았겠냐는 해석도 있다.[24] 일단 "화령"이란 국호는 지역명에 불과해 국호로서의 정통성이나 당위성이 부족한 데다 요동 정벌을 불러왔던 접경 지역인 철령 지역의 이름을 명이 국호를 허락하기는 힘들다는 것[25]이라는 점을 조선 정부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기에 조선 정부는 조선이라는 국호을 내정하고 곁가지 후보로서 화령을 함께 제시한 것이 아니냐는 가설도 있다. 즉, 처음부터 조선으로 새 국호를 낙점하고 명에 사실상 보기가 하나밖에 없는 '선택지'를 제안했다는 것이다.

명의 "조선 낙점"은 그렇다 치고, 왜 고려시대에는 거의 잊혀진 나라였던[26] "조선"이란 명칭을 가져온 것일까? 여기에는 고려의 정통성에 대항하려는 신 왕조 개창 세력의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들 알다시피, 왕건의 고려 왕조는 옛 고구려의 정통을 이었음을 표방했다. 조선은 그 고려를 무너뜨리고 건설된 만큼, 고려의 정통성에 대항하기 위해 고구려와는 다른 "정통성"을 찾을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비슷한 예로 고려시대의 반란자들은 자주 고구려,[27] 신라, 백제의 "정통성"을 끌어다 붙여서 고려에 대항하려 했었다. 하지만 신라나 백제는 이미 그 왕조가 자리잡았던 "연고지"에서나 상징성을 가질 뿐, 이들이 멸망한 지 수백년이 지난 1392년 시점에서 전국적인 정통성으로 끌어올리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그래서 그보다 더 오래된 고조선을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사실 고조선 역시 요녕성 지역과 한반도 북부지역만 지배하고 한반도 남반부는 영향권 밖이었다는 점 때문에 특정 지방에 한정된 나라였다는 점은 백제나 신라와 별반 다르지 않지만, 준왕이 남천해서 목지국을 세웠다는 기록이 전해져서 한반도 남부지역도 포괄할수 있는데다가 한민족이 각 지방에서 일어난 나라들로 분화되기 이전 가장 처음으로 국가 형태를 갖춘 나라로서 민족 통합성[28]의 상징 성격이 있는 나라였던 것이다. 마치 중국 역사에서 주나라 역시 실제로는 중국 대륙의 극히 일부만을 지배했을 뿐인 나라이고 주나라의 나머지 영역을 실제로 제후들이 통치했음에도 중국 전체를 아울렀던 '단일 왕조'로서 상징성을 갖는 것과 비슷하다.

명이 화령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대단히 재미있는 가설이 있다. 화령(和寧)은 함경남도 영흥의 지명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몽골 원나라의 옛 수도인 카라코룸의 한명(漢名)인 화림(和林)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라는 것.[29] 화령부는 공민왕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면서 붙인 이름이니 그 자체가 친원적인 성향을 띤 것은 아니었지만.[30]

화령과 몽골이 관련되었다는 설은 이미 조선 시대 실학자인 이익이 "설마 선대 왕께서 몽고 오랑캐 놈들 땅 이름으로 국호 정해달라고 했겠어? 헛소리겠지." 라고 '성호사설'에서 한 단락을 할애해가며 따로 언급해서 깐 것을 볼 수 있다.
성조(聖朝, 이성계)께서 천명을 받아 화령과 조선으로써 명나라에 주청하니 이에 황제가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였다. 무릇 화령의 뜻은 일찍이 듣지 못하였다. 영락제가 북방을 정벌한 것은 아로태의 반란을 평정하기 위한 것이니, 화령은 원나라의 옛 땅이다. 원나라의 위소(危素)는 "원 태조(칭기즈칸)가 창업한 땅이라 하여 《화령지(和寧誌)》를 지었으니, 족히 그 증거를 삼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 나라가 오랑캐의 지명으로 국호를 주청할 리는 없을 듯하다. 《동사(東史)》를 상고하건대, 고려 우왕(禑王) 9년에 태조가 변방을 안정시킬 계책을 올린 가운데, "동쪽 경계에 있는 화령의 땅은 도내(道內)에서 가장 땅이 넓고 풍요합니다."라고 한 말이 있다. 그 다음 해에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화령부(和寧府)에 오매, 임언충(任彥忠)을 파견하여 간곡히 효유하여 보냈는데, 길이 막혀 반년을 머물렀으니, 대개 화령은 쌍성(雙城)에서 요동(遼東)의 개원부(開原府)로 직통하는 요충지이다. 그러니 그 땅은 실로 성조가 창업한 땅으로서 이른바 '적전(赤田)'이 이곳이니, 국호를 화령으로 주청한 것은 혹 이 연유가 아니겠는가? - 성호사설 권15, 화령.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 화령, 조선 간택 요청 사건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기도 하였다. 이익의 의견대로 태조와 백관들이 일개 지명에 불과한 화령을 국호로 삼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며, 이미 조선으로 하기로 결정은 났는데 명나라에게 그대로 '통보'해 버리면 명나라 입장에선 불쾌할 수 있기 때문에 일부러 버리는 카드로 화령을 넣었다는 것. 앞서 말한 대로 화령은 카라코룸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명나라에선 절대 선택할 리가 없는 국호였고 말하자면 일종의 결재용 2안 내지는 버리는 카드가 아니었을까 하고 이야기한다.[31]

조선 외에 청구(靑丘/靑邱 - 푸른 언덕), 소방(小邦 - 소국이란 의미)이란 표현을 쓰기도 했지만 이것들은 일종의 별명으로 공식 명칭은 엄연히 조선이었다. 하지만 외국에서는 고려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32]

2.1. 이씨 조선(이조)

일본이나 북한, 중국에서는 이조(李朝)[33]라고 부른다. '이씨(李氏)의 조선' 또는 '이씨 왕조'라는 뜻. 대체로 일제강점기에 한반도 역사가 왕조가 바뀌어도 시대 변혁이 없었다는 정체성론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말로서 조선을 비하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일단 동양사에서 같은 국명을 가진 다른 나라를 구분하기 위해 이러한 명칭을 쓰는 예는 종종 있다. 예를 들어 남북조시대 유유 송나라 조광윤이 세운 송나라를 구분하기 위해 유송(劉宋)/조송(趙宋)이라고 한다든가, 조조의 위나라를 춘추 전국 시대의 위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조위라고 부르는 것 등이 있다.

또, 현재 국내에서도 세계사 교과서에서 베트남/역사를 다룰 때 역대 왕조를 '대월국'이라는 정식 국호 대신 왕가의 성을 따서 '레 왕조', '리 왕조', '쩐 왕조'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구분의 용이성 때문이다.. 이렇듯 성씨를 통한 왕조 구분을 비하적 표현이라 생각할 여지는 없다. 당장 한국에서도 쓰는 방법이다.

한국에서 중국의 몇몇 국가를 왕조의 성씨를 들어 구분하듯 중국 역시 이조라는 표현을 통해 조선을 구분한다. 중국에게 조선도 Korea, 고려도 Korea다. 그래서 남북한을 포함한 모든 Korean을 조선국이라 부른다. 재중 동포의 중국 공식 명칭은 정확히 '중국' 조선족으로 앞에 중국이 꼭 붙는다. 그냥 조선족이라 하면 한국 사람도 포함한 지구상의 모든 Korean. 중국이 우리를 가리키는 욕인 가오리방쯔의 가오리 역시 고려 왕조가 아닌 Korea. 그래서 중국에서는 정확히 구분하기 위해 조선 왕조를 이씨 조선, 고려 왕조를 왕씨 고려로 구분하기도 한다. 역시 이를 비하적 표현이라 주장하는 이는 없다.

한국 (조선) 내에서도 이조라는 표현은 널리 쓰인 바 있다. 당장 동학 창시자인 최제우나 열렬한 민족주의 사학자였던 단재 신채호도 그들의 저서에서 조선 왕조를 가리켜 '이조'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이는 이때까지는 고조선이라는 표현이 지금처럼 쓰이지 않은 것에 연유한다. 일례로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할 당시에는 정감록의 영향으로 성씨에 따른 왕조 구분이 영향을 끼쳐 이조라는 표현을 사용하였고 신채호는 본인의 연구가 고대사에 집중되어 있어 단군 - 기자 - 위만 조선과의 구분하기 위해 이조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도 사용하였는데,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바꾼 이후에도 임정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은 당대의 한반도를 조선으로 불렀기 때문에 왕조 국가 조선과 당대의 조선을 구분할 방법이 필요했던 것 역시 이조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가 된다.

이렇게 이조라는 표현은 비하적 용어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왕조와 국가를 구분하기 위해 쓰인 용어에 불과하다. 다만 한국에서는 고조선이라는 단어는 정책적으로 잘 사용되지 않는다. 굳이 쓰겠다면 단군조선 / 기자조선 / 위만조선 등과 구분하기 위해 쓴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상술했듯 국내에서는 보통 단군 조선을 고조선이라 하고, 이후의 조선에 기자와 위만의 이름을 붙여서 구분한다. 참고로 현재 일본 사학계의 경우를 보자면, 단씨 조선 / 기씨 조선 / 위씨 조선과 그 약칭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다.

북한에서 조선을 구태여 이조(리조)라고 부르는 것은 현재 북한의 약식 국명이 '조선'이기에 자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조선 왕조를 구분하기 위한 사정이 있으며, 중국의 경우는 성씨로 전, 후대의 국가를 구분하는 습관 때문이다. 그러면 저 윗동네는 .[34]

따라서 이조라는 표현의 사용이 딱히 금기시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다만 고조선이라는 표현이 널리 정착된 이후로 이 용어를 굳이 고집하는 것은 혼란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가급적이면 조선이라 표현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3. 역사

4. 평가

5. 왕사

6. 정치 체제

파일:Joseon_little_white_minimal.png 조선 중앙정치기구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1px"
국왕
의금부 승정원 삼사 의정부
육조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비변사
}}}}}}||


조선의 정체(정치 체제)는 국왕 중심제의 전제군주제 국가이며 이는 바뀐 적이 없었다.[35] 이는 1910년 대한제국 멸망까지 계속되어왔으나 1905년 을사조약 이후로 한국통감부의 간섭과 개입이 있었다.[36]

국왕에 대한 경칭은 전하(殿下)로 불려왔다가 1894년 12월 17일 갑오개혁 이후부터는 대군주폐하(大君主陛下)로 바뀌어 불려졌으며, 1897년 대한제국 개국 이후에는 황제폐하(皇帝陛下)로 불렸다. 그러나 1910년 대한제국의 멸망 후 이러한 경칭도 일제강점기 때 다시 전하로 격하되었다.

관료는 수상(首相)격으로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37]의 3 정승 직위가 있으며 갑오개혁 이후로는 영의정이 총리대신 등으로 호칭이 바뀌었다.

조선조정의 정치 조직은 국왕과 최고 의결 기관인 의정부 3상, 그리고 각 분야의 일을 담당하는 부서와 같은 기관인 육조 판서로 구성되어 있다.

7. 경제


조선은 건국 이래 통화(通貨)를 정착시키려 하였으나 중기까지 지속적으로 실패했었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화폐로 삼을만한 귀금속, 그러니까 금과 은의 수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실제 조선은 중국과의 무역시 사용할 은을 당대의 은 공급지였던 일본에서 구해다 썼었다. 일반적으로 상품화폐는 귀금속 화폐를 거쳐 이것이 일반화된 금화 은화 등의 주조화폐가 되었다가 명목화폐로 넘어가는 과정을 거쳐 오늘날의 화폐가 된다. 그런데 고려나 조선의 경우 화폐로 삼을만한 금이나 은 등의 귀금속이 부족했기에 이런 과정을 거칠 수 없었고, 중국을 따라한다고 철전이나 동전을 찍어내긴 하였으나 금, 은을 사용하는 중간 과정을 거치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실질적 가치가 없는 화폐들은 대중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서구의 경우 중남미로부터 막대한 양의 은과 금을 얻은 이후 가격혁명이 일어나 화폐가 발전했다. 참고로 구한 말이 되면 김옥균 등이 금본위제를 주장하기도 했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도 금이 없어서 금본위제를 실시할 수 없었다는걸 감안하면 공염불에 불과했다. 일본이 금본위제로 이행할 수 있었던건 청일전쟁에 승리해서 청나라로부터 막대한 배상금을 뜯어낸 덕분이었다. 이후 17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상평통보로 불리우는 엽전이 통용되기 시작한다. 이전까지 조선에서 통화 역할을 대신했던 주요 상품은 베[38]이었으며, 포화(布貨)로서의 베는 다섯 새 굵기의 섬유로 짠 중등품인 오승포(五升布)가 기준이었다. 조선에서 화폐가 정착하는 과정은 상평통보 문서에 잘 설명되어 있으니 참고할 것.

이후 조선 후기에 정착된 상평통보의 통화 단위는 이었다. 그러나 대동법이 유지된 결과 세금 납부를 위해서라도 미곡 중심의 경제가 유지되었으며, 지방에서는 여전히 물물교환이 행해졌다. 또 조선 후기에는 대외적으로 청, 일본과 은 거래를 활발히 하였으나, 거의 멸망할 때까지 이것이 경제 체질의 변화로 이어지진 못했다. 후에 대한제국기에 전환국이 설치되어 백동화가 주조됨에 따라 통화 단위는 냥에서 (圓)으로 바뀌게 되었으나, 화폐의 가치가 지속적으로 폭락하여 일본 화폐가 더 많이 유통되었다.

사실 조선의 경제 성장을 지체시킨 데는 상공업의 미진한 발달이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에서도 원나라부터 점차 소멸된 벼 농사 위주 농본주의 경제가 무려 20세기 초까지 유지되었다. 조선이 17세기에 들어서 상업이 발달하였다곤 하나 당대 중국과 서양 국가들을 보면 그다지 발달되었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수준이다. 강화도 조약 직후 조선 시장을 털어간 상인들이 유럽 상인들이 아니라 산업 혁명을 거치지 못한 청나라와 일본 상인들이었을 정도로 조선의 상업 발전은 인근 국가들에 비해서 매우 미진했다. 심지어 17세기에 과학 혁명이 일어나고 조선이 경제적 정치적으로 헬게이트였던 19세기는 산업혁명으로 서구권 전체가 호황이던 시기였다. 19세기 당시에는 인구도 주는 등 대체로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고 보이나, 개항 후에는 근대화에 따른 기술 혁신, 인구 증가 등 그나마 플러스로 돌아섰다고 평가받는다.

조선의 상업이 발전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 기반 시설이 엉망이어서 그랬다는 설명과 상업 자본 발전이 구려서 그랬다는 설명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말과 같다.

먼저 조선은 경제의 밑바탕이 되는 유통 및 수송을 위한 기반 시설이 엉망이었다. 뱃길과 도로, 철도 같은 시설이 제대로 없다보니 늘 봄만 되면 진창이 된 땅으로 인하여 식량 수송이 늦어서 보릿고개를 겪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조선의 주식인 쌀은 인구 부양력이 좋은 대신 상당한 노동력을 소모하고 더구나 무겁기까지해서 유통 경제의 발달을 저해하는 문제가 있다. 그로 인하여 2차 산업의 발달이 되질 않았다. 한반도의 부족한 농토로 인해서 점점 논과 밭의 확장 등으로 인해 길이 좁아지기 때문에 수레가 다닐 수 없다는 견해가 조선 후기에도 존재했으나, 꼭 논농사 때문에 교통이 낙후되었다고 보긴 어렵다. 현대 농촌에서 트랙터 사용을 감안해서 논길을 내듯이 수레 사용을 감안해서 길을 내면 된다. 연암 박지원도 길이야 닦으면 되지 길이 험하니까 수레를 도입하지 말자는건 무슨 소리냐고 비판했다.

다만 고대 로마의 도로 발전을 끌고와서 비교하는 경우도 있으나, 일반적 인식과 달리 로마는 어디까지나 농업 위주의 경제였고 상업은 매우 천시된 사회였으며, 상업은 대부분 수로를 통해 발전했다. 더 정확히는 철도 개발 이전 전근대 시대는 항상 수운의 수송력이 육상 수송보다 훨씬 우월했다. 중국이 무리해서 대운하를 뚫은 이유도 이것이다. 18세기 서유럽도 또한 북유럽 평원, 특히 라인강 하구에 매우 많은 운하를 뚫었다. 기차의 발명 직전까지 상업 유통을 위해 운하 개발에 많은 비용을 투자했다.

하여간 조선은 유럽이나 중국과 달리 평야가 적고 산이 매우 매우 많다. 구한 말이 되기까지 조선의 길은 매우 좁았는데 큰 길을 만들 수 없던 지형적인 장애가 한 몫했다. 이러한 지형적 장애 때문에 조선은 도로 자체를 쉽게 뚫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산만 많으면 모르겠는데, 호랑이와 표범 같은 맹수도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에 기껏 산길을 뚫어봐야 잘 지나가려고 하질 않았다. 그래서 나온 결론은 '"이젠 정말 수운 뿐이야.(…)" 조선이 한성에 수도를 둔 이유도 임진강, 예성강, 그리고 중부 지방 전체를 포함하는 하계망을 지닌 한강과의 접근성이 우수한 곳이 한성이었기 때문이다. 산이 많아 도로를 건설할 수 없던 조선 입장에서 한성은 중부 지방 전체 의 세금 를 포괄할 수 있던 명당이었던 것이다. 조선은 도로 대신에 수운에 주력해서 수레 '따위'보다 몇 배나 더많은 양을 몇 배나 빨리 운송할 수 있었다. 현대 대한민국 정부가 교통 인프라에 온 힘을 쏟는 이유도 상공업과 제조업의 발전을 위한 기반인 교통의 중요성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런 교통의 요지에서 주막 객주, 여각등이 숙박시설 겸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고대 로마에서 한 여행자가 런던에서 예루살렘까지 25일 정도가 걸렸고 로마에서 타란토까지 말 타고 3일 보통 5일이면 갔다. 걸어서도 10일 내외였던 걸로 알려져있다( 출처필요). 서울에서 부산까지 걸어가면 거의 15일 ~ 20일이 걸렸다고 하는데 비슷한 거리임에도 시간은 두 배 수준이니 조선의 도로 환경이 얼마나 낙후되었는지 알 수 있다. 박정희 정부 시절 도로 건설과 철도, 항만을 적극적으로 건설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라고 할 수 있다[39].

반면에 조선의 인프라 발전이 미진한 것에 대해서 상업 발전이 미진했기 때문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중국은 아편 전쟁 이후 바로 몰락했을 것 같지만, 중국 농민은 매년 6억 필의 면포를 생산했고 이건 산업 혁명의 발상지라고 일컬어지는 영국도 산업 혁명이 완전히 자리잡았을 즈음인 1860년에 가야 따라잡는다. 고운 영국산 면포가 들어오자 인도에서 기계 면포를 수입해 그것으로 옷을 만든 것도 중국이 왜 아편 전쟁을 패전한 이후에도 중화 특유의 우월감을 버리지 않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민본주의 사상으로 인해 무리한 공사로 백성들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에 매우 부정적이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40] 또 농업 생산력 부족으로 인해 자급자족 경제를 벗어나지 못한 것과 유교식 농본주의로 인해 상업 진흥과 유통 경제를 확립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것도 조선의 재정이 열악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기도 하다.

하지만 조선도 개항 직후에 상황은 비슷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대중들은 흔히 개항 이후 곧바로 조선의 상공업 경제가 몰락했다고 착각한다. 실제로는 개항 초기에 조선의 면포가 수입산보다 우수했고 일부지역에만 개항이 됐기 때문에 전통 산업이 강하게 저항하였다. 이후 1880년대 외국인이 조선 내륙 상권을 침투하고, 일본이 1890년대 본격적으로 산업화를 시작하며, 갑오 개혁 이후 일본이 경제적으로 조선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조선의 자급자족 경제가 급속도로 붕괴되기 시작했다. 의외로 조선의 상업은 대중들의 생각보단 발달한 편이었다. 일반적으로 조선은 도시가 작았고 농민이 많았지만 개항 기면업을 통해 확인한 조선의 면업은 1780년대 영국과 비슷했다. <개항기 면업 유통을 통해본 볼수있는 조선의 시장 구조의 사회 과학적 함의 > 조선은 기본적으로 농민 중심이고 그에 따른 시장이 발달했으며 오히려 길드 같은 조직도 강고하지 않아 각지의 산물이 도를 넘어 유통되었다는 게 이 논문의 논지다. 그 내실에 대한 평가야 어쨌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이후 조선 후기, 특히 영조 정조 즈음부터는 농본 국가였던 조선에서도 자생적으로 상업과 시장이 (동시기 타국보다 부족할지언정) 이전보다 발전하는 현상이 발견되는 것은 사실이다.[41]

17세기 후반 이후 조선 시대 후반기에는 대토지를 소유한 지주가 늘어 소작(농업)제가 일반화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에 따라 농본주의 사회에서 국가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농민은 세금에다 소작료까지 내야하는 이중고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에 실학 같은 양민의 생활 형편을 개선시키려는 노력도 등장한다. 특히 정약용, 이익, 박지원, 반계수록의 저자 유형원 등은 지주를 축소하고 자영농을 육성하기 위해 토지를 지주로부터 농민에게로 분배하는 토지 개혁을 주장했다. 그러나 실학 자체가 조선에서 주류가 아니었던 것도 있고 해서 이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참고로 결국 한반도에서 소작이 사라지는건 8.15 광복 이후다. 북한에서는 농지를 무상으로 몰수하여 무상으로 분배해버렸고, 이후엔 공산주의 국가들이 으레 그러하듯 협동 농장 또는 집단 농장의 형태로 바뀐다. 반대로 자본주의 국가였던 남한에서는 지주로부터 농지를 구입한 뒤[42] 농민에게 장기 분할 납부의 방식으로 팔아서 분배했다. 거기다가 6.25 전쟁으로 지주고 뭐고 평등하게 박살나서 소작도 아작났다. 그리고 현재 대한민국에서 소작은 불법이라..지만 현실은 아직도 소작은 존재하고 있다.

8. 생활 수준

근세 일본과 중국(명과 청)의 경제적 발전과 비교했을 때 전자의 발전은 상당한 정도이나, 이것이 생활 수준을 비교할 수 있는 절대적인 지표가 되지는 못 할 것이다. 조선의 서민 문화가 동시대 다른 지역들에 비해 그다지 발달하지 못 했다는 시각이 있지만, 단순히 서민 문화가 상대적으로 발달하지 못 했다는 것으로 백성들의 삶의 수준 또한 문제가 있었을 거라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한국사 연구 <조선시대의 끼니>를 보면 조선 사람들이 가난뱅이도 빚을 내어서라도 실컷 먹고 류큐 사람들에게 너희 나라 풍속에 늘 큰 사밭에 쇠숟갈로 밥을 떠서 잔뜩 먹으니 어찌 가난해지지 않겠느냐? 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식탐이 심해서 많이 먹었음을 알 수 있다. 근대에 쓰인 외국인들 전문기에서도 조선 사람들의 큰 결점은 대식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자세한 사항은 한민족의 식사량 문서를 참조. 그렇지만 근세 조선의 일인당 곡물 소비량이 과연 우월하였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이영훈의 <한국경제사>를 참조하면 조선의 곡물 생산량 증가는 일본과 중국 선진지대를 따라가지 못했다.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의 <조선 중기의 경제> 혹은 <조선 후기의 경제>에서 서술한 당시 조선의 기근 및 유랑민의 발생은 큰 골칫거리였다. <두 얼굴의 조선사>는 많은 식사를 할 수 있었던 조선인은 일부 운 좋은 사람에 불과하였다고 말한다. 단, 곡물 소비량과 별개로 당대 조선인들의 영양 섭취량 자체는 주변국들과 비교 했을 때 특별히 부족한 편은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자료마다 차이가 있지만 당대 조선인들의 평균 키는 당시 일본인들 보다 최소 약 3cm에서 최대 약 6cm 정도 더 컸는데 이는 현재 한국인과 일본인들의 평균 키 차이와 별 차이가 없는 수준이었다. 기사 자료

다만 식사량과는 별개로 조선이 이웃 국가들에 비해 상공업의 발달이 지나치게 미진했음은 엄연한 사실이라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단적인 예로 국내 학계에서도 조선이 합병된 1910년도 당시의 GDP는 1인당 40달러 수준으로 보며 굳이 미화하지 않고 있다. # 반면 앵거스 매디슨 통계를 언급하여 이를 다시 반박하는 # 의견도 있는데 이것 또한 논쟁을 결정짓기에는 역부족이다. 앵거스 매디슨의 경우 통계학적으로 봤을 때 추론의 오류(Error of Extrapolation)를 저지르고 있는데, 언뜻 찾아서 봐도 "각국의 경제는 급작스런 변화상 없이 일정한 패턴 하에 전개되어 왔다"라는 전제를 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령 이 사람 자료를 곧대로 받아들이자면 대한민국의 경제도 한강의 기적으로 고속 성장한 게 아니라 대한제국 시기와 그 이전부터 꾸준히 발달했다는 결론이 나와버린다.[43]

정작 당시에 쓰인 기록으로 살펴볼 경우, 남한에선 산업화 과정에서도 굶주리던 일부 국민이 생선 내장을 얻어와서 먹다가 복어 독으로 사망하는 일이 간간히 있어 언론에서 이를 예방하자는 취지의 기사를 쓰는 일까지 있었다. # 게다가 앵거스 매디슨 통계는 통계 수집의 일관성에 있어서도 비판을 받는데, 이 사람 통계에서 이탈리아 반도의 GDP가 유독 높게 나오는 것은, 애초에 이탈리아 반도는 로마 제국 시절 당했던 반달리즘의 역사[44] 때문에 그 이후로도 대규모 파괴가 있을 때마다 그 피해액 등을 정확하게 기록하는 문화가 생겼는데 앵거스 매디슨은 이 기록 내역들을 자기 통계에 그대로 반영해버렸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사실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이거 자체만으로는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기록 문화가 생기지 않은 다른 문화권들에 대해서는 이 요소 자체를 생략했기 때문에 "통계 수집에 일관성이 없다"는 비판을 피할 수가 없다.(…)

9. 계급

파일:52512339.1.jpg

일반적으로 조선의 지배 계급으로 생각되는 양반은 건국 초엔 계급이나 계층이 아닌 조정에 녹을 받고 일하는 관료를 지칭하는 용어에 불과했다.[45] 사실 조선 초기의 계급은 전대 고려와 유사한 양천제(양인 + 천민)였다. 초기만 놓고 보면, 전대 고려의 귀족적 요소들[46]이 상당부분 제거되었기에 고려를 포함한 전대 어느 시대보다도 신분간 편차와 차별이 많이 완화된 사회로 볼 수 있다.[47]

그리고 신분간의 상하 이동도 전대에 비해 한층 '개방적'이었다. 양반이 아니더라도 양인인 경우, 과거 응시 자격이 주어졌고 과거에 합격만 하면 양반이 되어 출세를 할 수 있었다.[48] 과거 제도는 결국 양반층의 계급 세습을 합법화시킨 것이라는 통념과 다르게 조선대의 상민 출신 문과 급제자 비율은 초기 40% ~ 50%, 이런 초기 과거 급제자 출신들이 문벌을 짓기 시작한 중기에는 점차 낮아져 10% 후반대까지 이르렀으나, 양란 이후 다시 비율을 회복해 후기에는 다시 40% ~ 50% 비율을 유지했으며, 말기에는 60%에 육박했다는 최근 연구 결과도 있다.[49] (한영우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겸 서울대 명예교수 연구) 출처 기사1 기사2 추가로 한영우 교수는 ‘과거, 출세의 사다리’(지식산업사)를 4권으로 완결지은 뒤, 4권 말미에 남긴 글 '나가면서'에서 "조선왕조가 500년 이상 장수한 비결은 지배 엘리트인 관료를 세습으로 보장하지 않고 능력을 존중하는 과거시험 제도로 부단히 하층 사회에서 충원했기 때문"이라며 "공부를 열심히 하면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탄력적 사회를 유지하려 했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사

물론 이들의 상당수가 명예직이나 하급직에 머물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으나 과거에 급제한 것만으로도 출신 지역에서는 명사로 대우받을 수 있는 데다,[50] 여타 문명권에서 이런 법으로 규정된 신분 상승의 사다리를 놓아주는 것은 설령 보여주기용일 지라도 드물었다. 다만 문과 합격자를 배출한 750개 가문 중에서 36개 가문이 합격자의 53%를 차지하는 등 소수의 가문에 과거 급제자가 몰려있었으며 1789년 당시 전 인구의 2%를 차지하던 서울에서 43%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는 등 지역과 가문의 쏠림 현상이 발생하였다.[51] 이것은 교육 평등을 법으로 보장하는 사회인 현대와 달리 과거 합격을 위해선 필요한 경전을 구입하기 위한 재산과 이를 공부하기 위한 시간 그리고 출제 경향을 위한 정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물론 현대도 이러한 법률 가문이나 정치 가문등의 명문가들이 있기는 하나 과거 급제자가 수도권에서만 발생한다는 점은 조선이 오히려 지금보다도 격심했던 게 사실이다.

또한 상민이 문과를 급제하여 바로 양반이 되는 매우 힘들었던 것에 반해 무과라는, 좀 더 입관하기 쉬운 시험이 있었다. 무과에서도 유교 경전 시험이 있긴 했는데 문과처럼 깊게 파는 걸 요구하진 않았고, 그나마 문과에 존재하는 서얼 차별도 없었다. 다만 승마 시험이 있었기에 시간까지는 아니더라도 재산은 꽤 있어야 한다는 실질적인 제약이 있던 건 사실이다.[52] 이렇듯 과거 제도를 통해 소수의 귀족 가문이 관직을 독점하기도 하였지만 새롭게 인재가 등용되는 측면 또한 분명 존재하였다. 에드워드 W 와그너 교수는 이러한 과거 제도의 폐쇄성과 개방성을 조선 왕조의 장기 지속성의 주요 원인으로 꼽기도 하였다.

한편, 조선의 국가 체제가 어느 정도 잡혀가자, 신분 체계에 변화가 생긴다. 조선 중기에 들어서면서 관료를 의미했던 양반이 차츰 세습 계급에 가깝게 변모해 간 것. 과거 응시에 있어 재산과 관직이 있는 양반 가문들 및 지주층이 매우 유리했기 때문에 과거 합격과 관직은 세습적 성격을 띄기 시작했으며, 찍어내다시피 한 공신들을 축으로 이루어진 훈구파 성립은 이런 "양반의 계급화"를 고착화시켰다. 관직이 없어도 공신들에게는 토지가 주어졌기 때문. 그 결과 양반의 자손은 관직이 없어도 양반과 다름없는 대접을 받게 되고, 이것이 과거를 보기 위해 유학을 공부하는 지방의 사족들에게 확대 적용되면서 양반은 점차 하나의 지배계층으로써 고착화되어 간다. 이로 인해 조선은 제도적으로는 고려와 마찬가지로 양인, 천민이라는 2계급의 양천제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이라는 4계급의 반상제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양반'이 지배 계급으로의 위치가 형성되고, 더 나아가 양반과 상민 사이의 중간 계층인 '중인'의 폭이 넓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반상제 체제는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무너진다. 재정 확보가 절실했던 조정이 공명첩 등을 발행하면서 중인, 상민들도 재산만 있다면 양반으로 신분 상승이 이루어졌고, 더욱이 18세기 농업 생산력의 증진과 상업의 발달로 상민들 중 부농들이 나타나면서 이들이 돈을 이용, 편법으로 양반 족보를 사들이면서 양반 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일단 어떤 방식으로든 양반이 되기만 하면 어느 정도 조세 압박을 회피할 수 있었으니[53] 상민들이 부자건 아니건 양반으로 신분 상승을 꾀한 것. 이런 양반 수의 급증은 결과적으로 국가 재정의 부족을 초래, 이후 19세기 삼정의 문란을 야기하는 근본 원인이 된다.[54]

애초 관료를 일컫던 용어였던 양반은 세습 계급화되어 상민 위의 지배 계급으로 고착화되었으며[55], 조선 전기에는 총인구의 5%에 불과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철종 시대에는 전 국민의 70%가 양반이 될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일본 학자 사카타 히로시가 유학이라는 품계를 양반으로 잘못 기재한 통계적 오류이며, 실제 양반 비율은 1910년의 전국 호구 조사에서 확인이 되는데, 총 가구(家口) 수 289만 4,777호 가운데 양반이 5만 4,217호로 전체 인구의 겨우 1.9%에 불과했다. 그나마 충청남도가 전체 가구 수의 10.3%로 가장 양반이 많았고, 충청북도(4.5%), 경상북도(3.8%), 한성(2.1%) 그리고, 전라북도(1%) 순이었다. 여타 도는 모두 1% 미만이고 양반이 많았던 고을은 경북 경주군(2,599호), 충남 목천군, 경북 풍기군(지금의 영주), 충남 공주군 순이었다. 경상북도와 충청도, 한성(서울)에 양반들이 집중되어 있고 그나마도 전 인구의 5%를 넘지 못했다. 조선 후기의 화가 김득신(金得臣, 1754년~ 1822년)의 풍속도를 보아도 전형적인 양반 - 평민 - 노비의 모습이 보이는등 실제 양반이라 할 수 있는 대가세족(大家世族)은 큰 변동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단성 호적을 살펴봤을 때 서얼, 잔반 등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양반층은 1910년의 호적보다는 많은 10% ~ 20% 내외로 추정한다.[56]
조선 시대는 서얼 계층이 양반으로 편입되고 부유한 상민들이 서원과 향교에 출입하는 양반의 폭이 넓어지는 등 신분간 편차와 차별이 완화되는 조짐을 보였으나 한편으로는 노비의 비중이 크게 증가하기도 했다. 삼국 시대에 전 인구의 10%에 지나지않던 노비는 고려 말을 거치면서 전인구의 30%가 넘게 되었는데 양란을 겪은 17세기에 이르러서는 노비 비율이 전 인구의 최대 30% - 40%에 달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이후 조선 후기로 들어가면서 상공업의 발달과 조정의 양인 증가 정책 등으로 신분제에 변화가 일어나면서 노비의 비중은 극적으로 줄어드는데 이는 단성 호적에서 잘 드러난다.[57]

노비가 이렇게 많았던 것은 대토지를 보유한 양반 관료 계층이 농사에 필요한 노비를 늘리기 위해 경국대전에 종천법을 명시화하였고 갖은 꼼수를 부려 상민을 노비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양반들이 얼마나 노비에 집착이 심했는지 (다른 지배층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조선 초의 소송은 대부분 노비 송사였고 족보를 조작해 상민을 자신의 노비를 만드는 사례까지 발견된다. 특히 가뭄과 같은 재해로 농사를 망치면 굶주린 상민들은 자발적으로 양반집 노비로 들어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는데(협호), 문제는 한 번 노비가 되면 그 신분을 벗어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임진왜란 후에는 그나마 납속책으로 노비 신분을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 이전에는 노비가 상민이 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같은 일이였다.

상민의 감소와 노비의 증가로 조선은 만성적인 세금 부족과 병역자 감소에 시달렸고 왕실도 바보는 아닌지라 이를 타개하기 위해 종천법을 종모법이나 종부법으로 바꾸어 어떻게서든 노비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지배 계층인 사대부들의 반발로 실패에 그첬고 일천즉천법이 주류를 이루었었다. 당시 사대부들은 많게는 수천 명에서 적게는 수십 명까지 노비를 가지고 있었는데 세종의 8번째 아들인 영응대군은 무려 만 명에 가까운 노비를 거느리기도 했다. 다만, 이것은 금계필담의 내용이라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야사집을 제외한 상속 문서를 살펴본다면 홍문관 부제학이었던 이맹현은 노비 757명, 퇴계 이황이 367명의 노비를 자녀에게 상속했으며 중소가문인 전의 이씨 가문이 18세기 중반까지 노비를 100명 이상을 보유한 것으로 추론할 때, 유력한 사대부가는 천여 명 정도의 노비를 소유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도 조선 후기로 갈수록 변하게 된다. 조정에서 점차 양인 증가책을 펼치기 시작했는데 영조 때는 노비종모법을 확정하고 속대전에 납속책을 규정했으며, 이후 정조 때의 노비추쇄관의 혁파, 순조 때의 공노비 혁파, 고종 때의 노비사가절목(노비 세습 금지)으로 이어졌다. 사회적으로도 도망 노비가 증가하고 소작제와 상공업의 발달로 노비가 점차 소작농, 장기고용자(고공)로 대체되면서 노비가 급격히 줄어든다.[58] 결과적으로 갑오개혁 때 노비 제도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완전히 없어진다.

간혹 노비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으며 사람이 아닌 사고 팔리는 물건 취급받았다고 오해, 혹은 곡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정확히는 사고 팔리는 인간 취급이었다. 애초에 사고 팔릴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물건 뿐이라는 생각 자체가 지극히 현대적인 것이며 근대 이전에는 대부분 인간도 사고 팔릴 수 있다고 보았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보는 것은 현대에 와서나 보편적이게 된 거고 조선 시대에는 모든 사람은 뿌리는 같지만 가지고 있는 성품에 따라 귀하고 천함이 정해진다고 보았다.[59] 비록 신분 제도가 있었고 노비의 인권이 낮긴 했지만 노비도 역시 사람이라는 기본적인 생각은 있었다. # 선상 노비의 폐단을 구제하게 하다 중종때 노비 출신의 반석평의 출세를 못마땅하게 여긴 대간들도 반석평을 천한 출신이라고만 비난했지 그 이상 나가진 않았다. 오히려 이를 기록한 사관이 '천한 가문이라고 멸시하지 말고 능력보고 사람뽑자' 라고 한데서 보듯 노비를 인간 이하 존재로 본것은 아니다.

어쨋든 조선시대는 신분 사회였고 법적으로는 양인-천민의 양천제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양인에서 많이 세분화되어 있었고 신분 상승을 위한 방법은 이랬다.[60]
  • 전쟁에서 군공 세우기 : 주로 임진왜란에 벌어진 일, 하도 당시 상황이 개판이었는지라 노비도 단 한명의 일본군 병사의 목을 따오면 면천되었다. 하지만 관리는 개판이었는지 선조도 "지금까지 올라온 보고대로면 일본군은 다 죽고 없어야 하는 거 아니냐? 근데 왜 이렇게 많이 남아있지?" 라고 하기도 했다. 사실 또 첨언하자면 이 1명의 목만 베어오면 그냥 면천이지만 갯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보상에 쩔어줘서 벼슬도 할 수 있었다.
  • 역모 고변 : 이것도 좋은 신분 상승의 수단, 고려때에는 외침이 잦았다면 조선때에는 역모사건이 잦았다. 그런데 당연히 역모가 성공하면 안 되었기에 당연히 역모를 고변한 사람에게는 상이 뒤따랐다.[61] 그런데 중종떄의 정막개, 숙종때의 정원로, 경종떄의 목호룡 등의 사례를 보면 벼슬도 주면서 자연스레 면천도 이뤄진 모양이다.
  • 맘씨 좋은 사람 만나기(?) : 이 부류의 대표적인 사례가 반석평인데 반석평은 원래 노비였다. 그런데 운 좋게도 반석평의 주인이 반석평의 재능을 알아보고 면천시켜줘서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확률이 낮긴 하지만 자신에게 능력이 있고 그걸 알아봐주는 사람이 있다면 불가능한건 아니다. 자신의 노비라면 자신이 직접 면천시켜주면 되고 자신의 노비가 아니더라도 공노비가 아닌 이상은 노비 주인에게서 사들인 뒤 면천시켜주면 그만이니까

일단 여기까지는 자신에게 운빨이 주어지고 그걸 잘 잡는다면 가능하다. 하지만 아래에 있는 것들은 대게 재력이 뒤따라야 한다.
  • 납속 : 정부나 국가에 쌀 등을 바치고 받는 것, 조선 성종때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네 아들을 면천시킨 노비가 나온다. 물론 신분이 높은 경우에는 벼슬을 받겠지만
  • 공명첩 : 유럽에서 작위를 돈 주고 사는 것이랑 비슷하다. 현대로 보면 국채와 가장 유사하다.
  • 투탁 : 이것은 양반 가문과 '합의'해서 신분세탁을 하는 것 좀 간단히 말하자면 양반 가문과 접촉해서 "나 이러이러한 사람인데 나 혹은 내 아들을 당신네 가문에 끼워넣어 준다면 내가 OOO을 해 주겠다" 라는 식으로 협상을 시도하는 것 이것을 양반 가문에서 "콜" 이라고 하면 이뤄지는거다. 이것은 명백히 합법이었기에 꿇릴건 없었다. 이 경우엔 주로 후사가 끊어진 쪽을 잇는 방식으로 했다.
  • 족보 위조 : 말 그대로 족보를 위조하는 것 물론 조선 초기에는 인쇄술이 그리 발달하지 않아 어려웠고 족보 자체도 양이 방대해서 어려운 일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인쇄술이 발달하다보니 가능해진 것 물론 불법이다. 이것은 일제강점기에도 이어졌는지 태평천하를 보면 윤 직원이 자신의 족보를 위조한 경력이 있다고 나온다.
  • 인맥(?) : 박문수 관련 일화에서 박 좌수 이야기를 보면 박 좌수는 백정 출신으로 돈은 많았으나 천시를 받아 결국 이방을 통해서 좌수 자리를 얻었다고 한다.[62] 물론 곧 동네 양반들이 들고 일어나 곧 좌수 자리를 잃었지만 직첩이 회수되지 않아 재산 챙겨서 멀리멀리 떨어진 곳에서 왕년에 좌수 했다며 양반 행세를 했다고 하는데 이를 보면 이런 짓을 하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니었나보다.

10. 군사

조선군 문서 참조.

10.1. 조선 전기

조선 전기의 군사 제도는 오위(五衛)·금군(禁軍)으로 대표되는 중앙군과 익군체제(翼軍體制)·진관체제(鎭管體制)로 대표되는 지방군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중앙군은 고려의 제도를 대부분 받아들여 십위체제(十衛體制)를 유지하다가, 두 차례 왕자의 난을 겪으면서 사병을 혁파하고 군사 제도를 정비하여 1457년(세조 3년)에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지휘하의 오위제도(五衛制度)로 정착되었다. 오위는의홍위(義興衛) - 중위, 용양위(龍驤衛) - 좌위, 호분위(虎賁衛) - 우위, 충좌위(忠佐衛) - 전위, 충무위(忠武衛) - 후위로 구성되어 있고, 각 위마다 5부(部)로 편성되고, 부마다 서울의 5부와 각 도의 진관군사가 소속되었다. 오위는 졸(卒) - 오(伍) - 대(隊) - 여(旅)의 조직으로, 1오는 5졸, 1대는 5오, 1여는 5대로 하는 5진법에 의하여 편성되었다.

또 다른 중앙군의 하나인 금군은 국왕을 직접 호위하는 군대로 오위에 속하지 않았고, 내금위(內禁衛)·겸사복(兼司僕)·우림위(羽林衛) 등으로 인원수는 적었으나 왕권 강화와 직결되어 필요에 의해 설치되고 법제화되었다.

지방군은 평안도·함경도를 제외한 곳에서 대체로 육수군(陸守軍)과 기선군(騎船軍)의 두 가지 형태가 있었다. 육수군은 다시 번상(番上)하여 시위하는 시위패(侍衛牌)와 지방의 여러 영(營)이나 진(鎭)에 부방하는 영진군(營鎭軍)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영진군은 각 도의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63]와 그 밑의 절제사(節制使)·첨절제사(僉節制使)가 지휘했다.

다른 지방군의 하나인 잡색군(雜色軍)은 영·진이 주로 해안 지대를 중심으로 설치되어 내륙 지방에 방어할 군사가 없어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향리·관노·무역백성(無役百姓)·공사천(公私賤) 등을 망라하여 편성한 것이다. 잡색군은 마병(馬兵)과 보병(步兵)으로 나누어 25인을 1대(隊)로 편성하여 수령이 지휘하도록 하였으나, 평상 시 군사 훈련에도 참가하지 않아 유사시에 대비하여 전국적 군사 조직 체계를 갖추었다는 데 의의가 있을 뿐이었다.[64]

이러한 군사 조직은 1455년(세조 1년)에 진관 체제로 정비되었다. 먼저 전국적으로 내륙 지방에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주위의 여러 읍을 좌·우·중의 3익으로 분속시켜 군익도를 편성하는 한편 군익도체제가 불편한 곳에는 별도로 독진(獨鎭)을 두어 이원 체제로 운영하게 했다. 1458년(세조 4년)에는 행정 구역상의 도(道)와 혼동하기 쉽던 군익도의 조직을 주진(主鎭)·거진(巨鎭)·진(鎭)으로 재편하여 각 진의 독자성을 살리면서 군사 기지로서의 성격을 뚜렷이 하였다. 진관 체제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의 주진 아래 첨절제사(僉節制使)가 여러 진을 통할하는 몇 개의 거진을 두고, 여러 진의 절제도위(節制都尉)[65]·만호(萬戶) 등이 진을 중심으로 스스로 적을 방어하는 책임을 지는 자전자수(自戰自守)의 체제를 가지게 되었다. 1464년에는 번상군(番上軍)·영진군·익군 등으로 통일되지 않았던 명칭을 정병(正兵)으로 통일하여 균일한 국방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정병 외에도 봉족, 혹은 보인이라는 역종이 있었는데 이는 군대에 나가지 않고 대신 물품[66]을 내거나 일을 도와주어 군대에 나간 정병 집안의 생계를 돕는 역할을 하였다.

10.2. 조선 중기

16세기에 이르러 진관 체제는 진관에 속한 정병이 군역과 요역을 함께 지면서 각종 폐단이 발생하자 포를 내고 군역을 지지 않는 방군수포(放軍收布)로 변질되고, 외세의 침입을 각 진관의 소수 병력으로 자전자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조정에서는 전쟁이 일어나면 도내의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합심 방어하는 제승방략체제(制勝方略體制)를 강구하게 되었다. 제승방략 체제는 많은 군사력을 동원하여 적을 막는 총력방어 태세로서의 이점이 있으나, 후방 지역은 군사가 없어 방어선이 무너지면 적을 막을 방도가 없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왜란 때 이일 상주 전투, 신립 탄금대 전투에서 패전한 뒤 일본군이 한성으로 쉽게 진격할 수 있게 된 원인 중 하나를 제공했다.[67]

10.3. 조선 후기

조선 후기의 군사 제도는 중앙의 오군영(五軍營)과 지방의 속오군(束伍軍) 체제로 특징지을 수 있다. 오군영은 조선 후기에 수도 및 외곽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훈련도감(訓鍊都監)· 어영청(御營廳)· 금위영(禁衛營)· 총융청(摠戎廳)· 수어청(守禦廳) 등이다.[68]

훈련도감은 1598년(선조 31년) 10월 서울 수복 후 포수(砲手)[69]·살수(殺手)[70]·사수(射手)[71]의 삼수병(三手兵)을 중심으로 기민(飢民) 구제와 정병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임시 군영이었으나, 왜란 후에는 오위를 대신하여 후기 중앙군의 핵심 군대로 자리잡았다. 훈련과 조직은 명나라 척계광의 기효신서(紀效新書)의 속오법(束伍法)에 따라 개혁하여 과거의 대부대 단위 전투 형태에서 초단위(哨單位)의 소부대 단위 전투 형태로 바뀌게 되었다. 속오법은 부(部)[72] - 사(司)[73] - 초(哨)[74]기(旗)[75] - 대(隊)[76] - 오(伍)[77]로 연결되는 편제로, 대개 120인 ~ 125인의 병력이 군사 조직의 기본 단위인 1초를 이루었다. 다른 군영과는 달리 정기적으로 급료를 받는 받는 직업 군인 위주로 편성되었다.

어영청은 번상하는 향군으로 편제된 중앙군으로 인조반정 뒤 후금에 대한 대비책으로 설치가 논의되다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을 계기로 중앙군으로 정착되었고, 1652년(효종 3년) 어영청으로 개편되었다. 금위영은 1682년(숙종 8년) 병조에 직속되어 있었던 정초청(精抄廳)의 정초군과 훈련 도감에 속하여 있던 훈련별대(訓鍊別隊)를 합쳐, 6도 향군을 근간으로 조직·편제되었다. 총융청은 1624년 이괄의 난 이후 경기도 일대의 방어가 중요하게 되어 경기도 내의 정군·속오군(束伍軍)·별마대군(別馬隊軍)으로 조직·편제되었고, 군사는 2만여 명에 달하였다.[78] 수어청은 1626년에 남한 산성을 개축하고, 이를 중심으로 경기도 남방을 방어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친위군은 호위청(扈衛廳)[79]과 용호영(龍虎營)으로 정비되었다. 호위청은 1623년 인조반정을 주도한 김류(金瑬)·이귀(李貴) 등이 반정에 사용한 사모군(私募軍)을 거의 그대로 궁궐 숙위에 충당함으로써 설치되었다. 용호영은 조선 전기의 금군을 모아놓은 금군청(禁軍廳)을 1755년(영조 31년)에 개칭한 것이다.[80] [81]

조선 후기 지방 군사 제도의 두드러진 변화는 속오군 조직의 등장과 영장 제도의 설치였다. 속오군은 훈련 도감과 같이 왜란시 임시로 설치된, 양반에서 공·사천에 이르는 총동원 체제로 서 지방의 핵심군이 되었지만 쌍령 전투로 대표되는 운영의 미숙함과 연이은 패배로 붕괴되었다.[82] 이러한 속오군은 병자호란 후 양(良)·천(賤)으로 편제되어 본역 외에 속오역을 지는 일신양역(一身兩役)의 폐해가 발생하였고, 1729년(영조 5년)을 전후하여 천례화(賤隷化)되었으며, 말기에는 수포(收布)·수세군(收稅軍)으로 존재하여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영장제도(營將制度)는 문신 수령이 가지고 있던 군사권을 무신이 담당하도록 한 것으로 1627년(인조 5년)에 후금에 대비해 속오군을 강화할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그러나 수령의 반발·재정 부족·유능한 무장 결핍 등의 이유로 병자호란을 계기로 문신 수령 중심의 훈련 체제로 바뀌었다. 이밖에도 해안과 내륙 지방의 요지에 방어영(防禦營)을 설치하여 방어사가 집중적으로 지키게 하였다. 또한 산성의 중요성이 높아져 별장을 배치했으며, 해안·강안의 요해처에 도(渡)·진(津)을 설치하여 방어망을 구축했다.

11. 인구

세기 국왕 인구
14세기 태조 5,500,000 ~ 5,700,000명
15세기 태종 5,700,000 ~ 6,200,000명
세종 6,200,000 ~ 7,100,000명
세조 7,300,000 ~ 7,900,000명
성종 7,900,000 ~ 9,100,000명
16세기 연산군 9,100,000 ~ 9,700,000명
중종 9,700,000 ~ 11,700,000명
명종 11,700,000 ~ 12,800,000명
17세기 선조 11,500,000 ~ 14,100,000명
광해군 11,200,000 ~ 11,500,000명
인조 10,600,000 ~ 11,200,000명
효종 10,900,000 ~ 11,400,000명
현종 11,400,000 ~ 13,200,000명
18세기 숙종 13,100,000 ~ 16,500,000명
영조 16,800,000 ~ 18,700,000명
정조 18,000,000 ~ 18,400,000명
19세기 순조 16,200,000 ~ 18,600,000명
헌종 16,500,000 ~ 16,600,000명
철종 16,500,000 ~ 16,900,000명
20세기 고종 16,800,000~ 17,300,000명
출처 : 인구 대사전 <표 3-4> 연도별 조선 시대 인구 추정치, 1392년 - 1910년 #
本朝人口之法, 不明錄于籍者, 僅十之一二。 國家每欲正之, 重失民心, 因循至今, 故各道各官人口之數止此, 他道皆然。
본조(本朝)는 인구(人口)의 법이 밝지 못하여, 문적에 적힌 것이 겨우 열의 한둘이 되므로, 나라에서 매양 바로잡으려 하나, 너무 인심(人心)을 잃게 되어, 그럭저럭 이제까지 이르렀으므로, 각도 각 고을의 인구수가 이렇게 되었고, 다른 도들도 모두 이렇다.
세종실록지리지 경기
전근대의 인구 자료를 정확하게 통계낼 수는 없으므로 위 자료는 모두 추정치다. 세금을 피하려고 호구 조사에 일부러 응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세종 실록 지리지 경기도조에 의하면 조선왕조실록에 적힌 조선의 인구 수는 실제 인구 수의 10분의 1 ~ 2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며 조선 세종 시기의 인구는 최대 800만까지 잡을 수 있다고 한다. 즉,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호구를 통해 계산한 인구 수는 그 수치의 8배 ~ 10배 이상을 곱해야 실제 인구 수에 가까운 수치가 나온다는 것이다. 역시 송사, 고려도경을 기초로 12세기 고려 인구가 210만 구였다는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으나 조선 시대 구수 기록과 마찬가지로 고려 대의 호구 / 인구 기록의 완정성에도 의문을 제기해 봄직하다.

임란 직후와 19세기에는 조선의 행정력이 불안정해서 추측이 더 힘들다. 한 연구에서는 조선의 인구 통계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며, 양반 가문에서 내려오는 족보로 인구 증가율을 추정했는데, 18세기의 연 0.4% 증가율에서 19세기에는 연 0.8% 증가로 계산됐다. 하지만 호구조사 상에서는 19세기에 정체하는 것으로 나온다. 결론적으로, 조선이 인구가 계속 증가했는지, 아니면 인구가 정체했는지, 인구가 어떤 추이를 보이는지는 답을 내릴 수 없다. #

조선의 인구는 크게 임한 이전까지 꾸준한 증가 - 임란 직후의 급감 - 임란 이후의 급증 - 19세기의 정체로 표현할 수 있다. 조선 초기의 인구는 수백만명 수준으로 추측된다. 임진왜란 이전까지 지속적으로 증가했던 것으로 추계가 그려진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농지 재개간, 상업 유통 발달, 새로운 기술의 도입(모내기법 등)으로 18세기에 인구가 1.5배 내외로 급증했다. 그러나 19세기에는 인구가 정체되었는데, 당대 동아시아 국가들이 그렇듯 조선도 인구 폭발로 농지와 식량이 한계가 왔고, 개간할 땅마저 모자랐기 때문이다.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삼림은 벌채와 개간으로 축소되어버리고, 자투리 땅마저 농경지로 이용되었을 정도로 인구 압력이 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83] 당대의 유식자들 역시 식량 생산량이 소비량에 미치지 못한다며 우려를 나타냈을 정도다.

12. 외교

초창기의 조선은 고려 시절 적대지간을 맺어왔던 명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왔으며 임진왜란 때는 명군이 파병되어 참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후금을 주축으로 한 여진족이 명을 붕괴시키고 청나라를 세우면서 조명 관계가 끊어지게 된다.

청과는 명을 붕괴시킨 원수지간이라 조선과의 관계는 처음부터 좋지 않았다. 다만 광해군 때에 와서 명, 청간의 등거리 외교를 통한 중립 외교를 통해서 어느 정도 온건한 관계를 맺어왔으나 인조반정으로 오르게 된 인조 때부터 관계가 급변하여 청을 주적으로 지정하면서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겪게 되었고 인조는 청에 항복하였다.[84]

이후 조선은 청과 군신 - 사대 관계를 맺게 되고, 이 관계는 대한제국을 선포할 때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일본의 근대화 발전으로 인해서 이후로 청과의 관계가 긴밀해지게 되었으나 1894년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이후 관계가 소원해졌고 1897년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청과의 유대 관계가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

일본과는 기존의 교린 관계를 맺어왔다가 임진왜란 이후 관계가 악화되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막부 정권이 수립된 후 통신사 파견을 통해서 관계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 이토 히로부미, 사이고 다카모리 등이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고 운요호 사건 강화도 조약을 계기로 불평등한 조일 관계가 수립되었고 문호 개방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의 간섭을 받게 되었으며 1905년에는 을사늑약으로 조선통감부의 감독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가 1910년에는 마침내 일본의 식민 지배권에 들어갔다.

미국과는 수호통상조약 요청을 계기로 대면한 적은 있지만 흥선대원군의 반대로 맺어지지 않았고 미국 상선 제네럴 셔먼 호가 평양 입항을 시도하다가 화재가 발생하게 되고 1871년 신미양요가 일어나면서 다소 악화되었으나 결국 1882년 조미 수호통상조약에 따라 미국과의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에 따라 단교되었다.

러시아 제국과는 명성황후가 일본을 견제할 목적으로 다소 긴밀한 관계를 맺은 적이 있으며 1896년 고종의 아관파천을 계기로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4년에 일어난 러일전쟁 때 러시아가 일본에게 패전하게 되고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을사늑약을 강제로 맺게되면서 관계가 끊어졌다.

이외에도 대영제국, 독일 제국, 프랑스 제3공화국, 이탈리아 왕국, 덴마크 등과도 수호통상조약을 통해서 수교를 맺어왔으나 모두 1905년 을사늑약 때 단교되었다. 단 프랑스와는 선교사들의 처형과 병인양요로 인해서, 독일과는 오페르트의 흥선대원군 부친 남연군 묘소 도굴 사건으로 관계가 소원해졌던 적이 있으며 영국과도 거문도 점령 사건으로 한때 관계가 소원해진 적이 있다.

13. 기타

나라 이름이 조선이라서 배 만드는 기술(조선)이 앞서있다는 드립이 존재한다. 《 요재지이》 등에서는 근처에 신선들이 사는 움직이는 섬이 있다고 나온다. 그 외에 조선에서 온 히로인이 등장하는 등, 중국에서도 은근히 인기 있는 곳이었던 듯.

이미 구운몽에서  모에와  하렘을 깨우치고, 호질 등에서  현실은 시궁창의 이치를 깨달았던, 어떤 의미에서는 앞서가던 나라.  일지매에서는 여자들이 뻑갈 법한, 여자 뺨치는 미모의 성격 더러운 미남 캐릭터를,  임꺽정을 통해서는 느와르물의 뿌리를 보여주었으며, 홍계월전에서는  남장여자 용자물을, 방한림전에서는 남장여자  동성결혼을, 금오신화에서는 인간과 귀신의 귀접현상을 연상시키는 끈적한 사랑을 그려냈다. 심지어는 실제로  후타나리마저 존재했으며(예:  사방지), 민담에 따르면 결박 플레이를 즐긴 사람도 있었다. 거기에다가  수간을 즐긴 사람들도 실록에 존재. 또한 세종대왕의 며느리 순빈 봉씨는  양성애자였다. 그 외에도 작자 미상의 춘화에는 3P 플레이가 나오고, 성애신이 엄청나다(…). 역시  선비의 나라답다! 거기에 영이 사람에게 빙의된 유명 공포영화의 내용이 이미 이때 여기에서 씌여졌다. (예: 설공찬전)

또한 조선 사람들은 흰 옷을 좋아하여 예로부터 백의민족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한편으로는 각종 흉흉하고 음침한 이야기도 많았다. 조선 초기 일본인만 골라 죽인 살인마 이야기라든가 조선 중기에 어린아이가 잔혹하게 살해당한 이야기 등이 기록되는 등, 여하간 기록 하나는 정말 넘치도록 남긴 시기였다. 물론 기록이 많으니 끔찍한 이야기도 많은 법이겠지만.[85]

조선의 왕은 엄청난 업무량을 감당해야 하는 고노동 직책이었다. 조선의 국가 분위기상 늘 끊임없이 공부하고 강론받고 하는 등의 자기 수련을 해야 했다. 게다가 정책 하나 정하려면 먹물 좀 꽤나 먹은 양반들이 덤비는데, 조정에 있는 양반들도 수두룩 빽빽인데, 지방에서도 꽤나 한다 하는 먹물들이 상소로 태클을 걸어왔다. 위에 설명했듯이 왕이 그냥 추진하면 추진할 수 있지만, 그래도 이상적인 정치로 신하들 뜻을 존중해야 하니 이를 논리적으로 논박해야 하는 부담도 심했다. 당대 최고의 유학자 반열이었던 태종, 세종도 왕권으로 찍어눌렀던 경우가 있다고 생각하면…….[86] 게다가 왕은 늘 몸가짐을 바르게 해서 모범이 돼야 했기 때문에 누가 없는 자리에서도 딱히 편하지 못했으며, 밥 먹는 시간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다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해야 했다. 한글을 만들고, 과학 기술을 점검하고 농업 정책 연구하는 등의 업적을 남긴 세종대왕의 건강이 여러모로 좋지 않았던 것이 이해가 간다. 다만 세종은 본인이 자초한 면도 없진 않다. 해당 문서 참조. 그놈의 고기.

여기서 예외가 있다면 연산군 정도.

1880년 ~ 1910년까지를 학습한 사람이라면 맨 뒤에 4가 들어간 해에 굉장히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1884년, 1894년, 1904년 참조. 사실 1914년에도 머나먼 곳에서 뭔가 거대한 일이 터졌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국인들이 스스로 대한민국은 '조선', 한국인은 ' 조선인'으로 칭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마치 과거 조선에서 스스로를 일컬어 ' 삼한'이라 했던 경우와 비슷한 용례인 셈인데, '조선의 4번 타자'와 같이 긍정적인 호칭으로 쓰거나 감정 없이 단순히 한국을 그대로 말할 때도 사용되지만 주로 부정적인 의미를 강조할 때 쓰는 경우가 더 많다. 보통은 한국의 구시대적 악습 등을 비꼬거나 할 때 쓰이는데, 여기서 극대화된 것이 바로 헬조선이다.

14. 연표

  • 참고 서적: 조선왕조실록
  • 1392년 이성계가 고려 공양왕에게 양위받아 국왕(國王)으로 즉위, 동년 이단(이성계)이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으로 고치면서 국호 확립
  • 1398년 세자책봉에 불만을 품은 왕자 이방원이 반란을 도모, 일으켜 정권 장악, 곧 이단이 양위하고 이방원은 자신의 형 이방과를 왕으로 세움
  • 1446년 세종(世宗)이 훈민정음 반포.
  • 1453년 세종의 왕자 이유가 쿠데타를 일으킴, 정권을 장악하고 단종에게 양위받아 즉위.
  • 1460년 경국대전의 호전 완성.
  • 1485년 경국대전 완성
  • 1506년 중종반정으로 인해 연산군이 폐위되고 진성대군이 즉위.
  • 1575년 동서분당, 사림이 분열하여 동인 서인으로 갈라짐.
  • 1589년 정여립이 역모 혐의를 받음, 동년 동인 대부분이 처형됨.[87]
  • 1592년 임진왜란 발발
  • 1598년 임진왜란 종결
  • 1623년 능양군이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국왕으로 즉위.
  • 1624년 이괄이 난을 일으킴( 이괄의 난), 반군에 의해 한양을 점거당했으나 곧 탈환.
  • 1627년 정묘호란 발발.
  • 1636년 병자호란 발발, 이 전쟁으로 인해 조선-청과의 종속관계가 사실상 확립됨, 조선 영토 내의 삼전도비 건립.
  • 1721년 신임옥사 발발.
  • 1762년 임오화변 발발.
  • 1800년 정조(正祖)가 사망, 그의 아들 이공이 즉위. 이 기점으로 세도정치 시작.
  • 1863년 철종이 후사없이 사망, 그러자 왕족 이하응이 자신의 아들 이명복을 왕으로 즉위시키고 정권을 잡음.[88]
  • 1875년 운요호 사건 발생, 조선의 패배.
  • 1876년 조-일 간의 강화도 조약 체결.[89] 이후 조선은 서양 세력들과도 조약(불평등 조약)을 맺음.
  • 1870년대 중반 개화파 성립.
  • 1882년 구식 군인들이 별기군과의 차별 대우에 분노하여 폭동을 일으킴( 임오군란), 이를 무마하기 위해 조선 정부의 고종은 대원군을 긴급히 불러 섭정시킴, 대원군은 개혁정치 대부분을 취소시켜 사건을 무마시키려 하였으나 청군이 대원군을 천진으로 납치함.
  • 1884년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급진파 세력들이 갑신정변을 일으킴. 그러나 3일만에 청군의 개입으로 실패.
  • 1894년 동학 세력들이 교조 최제우의 신원을 위해 운동함( 동학농민운동), 운동이 진행되면서 정치적 운동으로 성장하였고 곧 사회 개혁을 목적으로 움직임. 1차는 정부와 협상하여 종결됬으나 2차는 일본-관군의 연합군에 의해 패배. 동년 청일전쟁 발발. 청-일본과의 싸움에서 일본이 승리하므로써 청은 종이 호랑이가 됨. 동년 조선은 갑오개혁을 실시.
  • 1895년 청 - 일의 시모노세키 조약(하관조약/마관조약) 체결, 동년 조선, 을미사변 발발.
  •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 아관파천).
  • 1897년 고종이 조선으로 복귀, 동년 '대군주' 칭호 사용, 곧 대한제국을 선포하여 황제로 즉위(연호: 광무/光武)
  •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일본 승리로 일본은 조선의 주권을 빼앗는다.
  • 1905년 조 - 일의 을사조약 체결. 이 일로 인해 조선은 일제의 사실상 식민지나 다름없는 국가가 된다.
  • 1906년 일본이 을사조약을 기반으로 통감부 설치.
  • 1907년 고종이 일본의 압력에 의해 강제퇴위/양위, 그의 아들 이척(이하 순종)이 즉위.
  • 1910년 일본이 한일합병조약을 맺음[90]. 조선 왕조가 멸망, 이후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일본의 조선 식민통치가 실시됨. 조선총독부 설치. 황실은 이왕가(李王家)로 격하되었고 순종은 이왕(李王)에 책봉됨.

15. '조선'이 들어간 별명이 붙은 것들

어째 죄다 일제강점기에 이름을 날린 인물/지역이다.

16. 관련 문서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조선(국가) 문서의 r68 판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1] 운요호 사건 이후에는 국제 관례상 국기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1882년에 지금의 모양을 한 태극기를 제작, 국기로 사용하였다. #당시 쓰인 태극기 [음력] 1392년 7월 17일 [3] 이성계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으로부터 왕위를 넘겨받았다. [4] 대한제국까지 포함시켜 1910년으로 잡는 견해도 있다. 이 경우 조선왕조의 존속기간은 도합 518년 24일. [5] 제주도, 울릉도, 백령도, 독도 [6] 개성특급시. 조선 태조 정종, 태종 때 수도였다. [7] 한양, 한성, 서울이라고도 불렸다. 지금의 서울 강북 지역 일대로, 일반 백성들의 경우 사대문 안과 성저십리를 합쳐 그냥 '서울'이라 부르기도 했다. 19세기 제작된 '해좌전도'에도 그냥 경(京, 서울)으로 표기되었다. [8] 함경도 일대 [9] 불교는 권력에서 멀어지는 선에서 인정되었으며 샤머니즘은 천시되었다. 18세기 말에는 가톨릭이 유입되었으나 박해당했고 개화기에는 프로테스탄트가 유입되었다. 같은 유교라 하더라도 성리학이 아닌 양명학 등의 사조는 비판을 받았다. [10] 1. 의정부서사제 ( 1392년 ~ 1414년)
→2. 육조직계제 ( 1414년 ~ 1435년)
→3. 의정부서사제 ( 1435년 ~ 1455년)
→4. 육조직계제 ( 1455년 ~ 1515년)
→5. 의정부서사제 ( 1515년 ~)
→6. 비변사 설치 ( 1517년 ~ 1864년)
→7. 의정부 기능 부활 ( 1864년 ~ 1894년)
→8. 내각제 ( 1894년 ~ 1896년)
[11] 음력 기준 [12] 대한제국 이전 기준을 따르면 1897년까지다. [13] 고종 연간에 중국과의 사대관계가 청산되면서 갑오개혁을 진행했고, 기존의 중국 연호를 버리고 1392년을 개국기원으로 잡는 연호를 도입하여 개국 503년부터 시작한다. [14] 혹은 518년. 대한제국을 조선국의 연장선상에서 볼 경우 이리 볼 수도 있다. [15] 고조선의 '고(古)'는 후에 성립한 위만조선과 구분하기 위하여 훗날 고려시대에 붙인 이름이다. 우리가 아는 단군이 건국한 나라의 원래 국호는 조선이었다. 대개는 후대에 등장한 동명국가의 이름 앞에 '후'를 붙이는 게 일반적이지만, 모든 건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편의에 맞춘 것이라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기준은 없다. 따라서 조선의 경우는 비교적 최근(근세)의 일이라서 그런지 고대에 있던 동명의 국가의 이름 앞에 '고'를 붙이는 듯하다. 태조 이성계(즉위 후 이단)는 고조부 이안사부터 대대로 원의 관직에 있었던 친원가문의 후손이었지만, 원의 고려 이주민 차별 정책이 심해지자 당시 쌍성총관부 천호였던 친부 이자춘과 함께 1356년(공민왕 5년) 쌍성수복전쟁에 참여하여 고려로 귀화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고려 무신으로서의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명성을 쌓았으며, 1388년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1392년 조선을 건국한다. [16] 예를 들어 궁에 고자 내시가 일하는 걸로 확립된 게 고려 말 중원의 영향을 크게 받으면서다. 이전까진 내관이라 하여 하급 문관이 내시의 역할을 대신했으며, 사고로 인해 (가령 개에게 중요 부위가 물렸다든가) 고자가 된 인물만을 내시로써 사용했다. 그 외 적자와 서자, 정부인과 첩의 개념이 확고히 정립된 것도 고려 말. [17] 당시 원나라 유학 중 가장 성행하던 학문. 북송 주희(주자)를 거치면서 완성됐으며, 불교와 도교의 심성론과 종교적 요소를 유학에 도입했다. 그로 인해 유학에 종교적 성향이 강화됐다. [18] 성리학은 절대로 종교가 아니며 단지 종교적인 요소를 반박하지 않았을 뿐이다. 실제로 당대 사대부들도 위급상황에는 자주 도교나 불교에 의존했다. 심지어는 조선 왕조의 창시자인 태조 이성계조차 불교에 호의적이었다. [19] 이는 조선과 대한민국 간의 관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 왕정 국가에서 공화제로 전환된 모든 국가가 해당되는 사항이다. [20] 해외 화폐에는 근대화 이후의 인물을 많이 도안한다. [21] 심지어 대한민국의 국기인 태극기부터 조선 말기에 처음 만들어진것이다. [22] 당시 명나라 황제인 홍무제 왈, "조선은 옛부터 동이의 명칭으로 그 이름이 유래가 깊으며 아름답기 때문"에, 조선을 국호로 사용하게 하였다. [23] 베트남도 원래 국호가 남월이었던 것을 19세기 초 청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여 월남으로 바꾼 일이 있다. [24] 명 스스로가 국호를 선택해줬다는 것은 신생국을 대외적으로 승인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쿠데타로 왕조를 교체한 조선의 정통성을 흠집내기 힘들어진다. 대내적으로도 천조가 인정한 국위라는 점을 정치적으로 활용해 새 왕조의 정통성에 힘을 싣는 것은 덤. [25] 명은 이성계의 즉위를 인정하면서 '변방의 흔단(釁端)을 발생시키지 않는다'는 내용을 포함했다. 그만큼 조선이 중원을 공격하는 것을 견제했다는 의미. [26] 고조선이 멸망한 것은 조선 개국 시대를 기준으로 무려 1500년 전이다. 다만 고려 중기의 권신 이자겸이 조선국공(朝鮮國公)에 올랐던 것 등 조선이라는 이름은 당시에도 고려를 달리 부르는 이름으로 종종 쓰였다. 엄밀히 말하면 중세 조선 왕조 이전에 조선이라는 단어는 한반도 전체보다는 고조선의 수도였던 평양을 위시한 북부 지방에 한정하는 의미가 강했다. 그리고 어쩌면 십팔자위왕 예언을 실현시킨 이성계가 조선이라는 이름을 선택한 것은 과거 이자겸을 보고 참고했을 수도 있다. 당연히 공식 기록에는 그런 거 없다지만. [27] 1217년 최광수가 고구려의 이름으로 봉기했음이 고려사 정의 열전에 있다. 고려가 바로 고구려를 이은 이름인데 어떻게 고려시대에 고구려 부흥운동이 따로 있을 수 있겠나, 라는 의문이 들 수 있지만 후삼국 시기에 비해서 약해졌을망정 각 지방의 옛 삼국 유민의식은 여전히 고려 중기까지 남아 있었고, 당시 고려에서 고구려 유민 의식이 가장 강한 지역은 개경과 옛 고구려의 수도 평양인 서경 일대였다. 그러나 서경은 묘청의 난 진압의 여파로 대단히 대우가 박해져 있었던 터라 권력의 중심지인 개경에 대해 반항 의식이 강했고, 마침 무인 집권기에 접어들어 정권의 정통성이 극히 약화되자 개경은 이제 자격이 없으니 진짜 고구려의 중심지였던 자기네야말로 새로운 고구려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여 고구려 부흥을 내세웠던 것. (참고 자료: 고려 무인 이야기). [28] 비록 관념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29] 백과사전에서는 카라코룸을 화령이라고 한다고 하지만 원사 지리지에 나와 있는 정식 명칭은 화령로(和寧路)였다. 정확히는 화령로가 화령로도총관이 관할하는 상위 행정 구역이었고, 그 아래에 화림, 즉 카라코룸이 있다. 사실상 둘을 병용하기도 했고. [30] 물론 공민왕 역시 카라코룸을 욕보이기 위해서 화령을 썼을 가능성은 낮게나마 존재하긴 하지만, 그보다는 원래 이 지역이 고려의 화주(和州)였다는 역사적 배경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31] 웃기게도 이후에도 화령은 한 번 더 나온다. 청와대와 화령대 두 가지 선택지 중에서 청와대가 선택된 것2번이나 버려진 화령 안습 이때는 화령이 북한 영토라 그랬을지도? [32] 인조 때 병자호란 직전 조선으로 도망쳐온 한인들이 청나라가 고려를 침공하기 위해 말을 먹이는 중이라고 말한 부분이 있다. [33] 북한은 문화어 북한은 어문 규정에 따라 이조가 아닌 '리조' [34] 취소선이 쳐져있긴 하지만 이씨 조선과 김씨 조선 둘다 국호는 '조선'이므로 그렇게 구분하겠다면 저 윗동네는 김조라고 부르는 게 맞다. [35] 사실 중국이나 페르시아 같은 전제군주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아무리 왕이라 하더라도 대신들의 견제를 끊임없이 받았기 때문이다. 즉, 과두정적 요소가 존재한다. [36] 갑신정변 때 정강 14조와 관민공동회 때 헌의 6조에서 입헌군주제를 지향한 적이 있긴 하다. [37] 이들은 의정부(조선 최고의 의결 기관)에 속한 관원이다. [38] 나중에는 목화의 대중화와 생산량 / 교역의 증가로 면포로 대체 [39] 단적인 예로, 경부고속도로 문서에서도 볼 수 있는 내용 중 당시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소요시간이 김포 ~ 뉴욕 항공편보다도 길었다 (…) . [40] 유교에서 지배층의 미덕은 근검절약이다. 유교에서 이상으로 삼는 시대에는 왕이 삼베옷 입고 초가집에 살았다는 식일 정도니... 이로인해 삼국 시대 및 고려 시대보다 오히려 조선 시대의 유물이 더 소박한편인데 그렇다고 조선시대 유물중 화려한 유물이 전무한건 아니며 조선시대의 화려한 유물중 대표적으로 청화백자가 있다. [41] 이런 사회의 변화는 상업을 진흥시키자는 북학파 계열의 실학과 상업을 억누르고 농본주의를 강화시키자는 계열의 실학으로 나뉜 당시 사회상에서도 단적으로 나타난다. [42] 신생 국가가 돈이 있을리 만무하므로 유가 증권의 형태로 사들였다. 때문에 지주들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타격을 입었다. 게다가 곧이어 일어난 전쟁과 산업화로 인해 경제력에 있어서 자본가들에게 크게 밀려나게 된다. [43] 여담으로 통일부 장관 출신인 이종석에 의하면 북한 사람들의 경제력은 앵거스 매디슨의 조선보다 약간 나은 수준이다. # 상당한 과학 기술 발전에도 불구하고 OTL... 북한마저도 조선 왕조에 비하면 많은 과학 기술 발전을 이루어 생산력이 상승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북한 정권은 경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북한 사람들의 키만 봐도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데, # 물론 조선 시대의 키는 표본의 선별을 제대로 하기 힘든 현실과 표본 숫자가 적어 신뢰성이 높지는 않고 실제로는 다를 수도 있겠지만 이 자료를 바탕으로 보면 사실상 조선보다 북한의 정부 수준이 더 떨어질 수도 있다. GDP 등에는 실물이 아닌 서비스 등도 들어가게 되는데, 북한 정부는 과학 기술에 따른 생산량 증가에도 불구하고 조선 왕조보다도 각지에서 생산되는 식량의 적절한 운반, 저장도 제대로 지휘하지 못하여 나타난 결과로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44] 애초에 로마 제국이 당했던 이 현상이 "반달리즘"이라는 말 자체의 어원이다. [45] 양반이라는 이름 자체가 무신 관료를 일컫는 무반(武班)과 문신 관료를 일컫는 문반(文班)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46] 고려도 제도적으론 양천제를 표방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양인 내에 권세와 지위에 따라 귀족, 향리 등이 지배계층으로 존재했다. [47] 고려가 귀족 사회로 일컬어지지만 전대의 통일신라나 삼국시대처럼 귀족이라는 계급이 확고불변한 계급은 아니였다. 사실 고려도 그 이전 시대에 비하면 신분간 상하 이동에 대해 개방적인 모습을 보였다. 자세한 건 고려 문서 참조. [48] 이는 고려도 보장하긴 했으나 실질적인 면에서는 조선대의 유연성이 더 높았다. 고려의 지배층들(후대에 문벌귀족이라 불리는)의 결집도가 높았던 데다 고려의 직접적 행정력과 법제적 기반이 조선처럼 전 국토에 미치지 못한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49] 조선사 전체로 확대하면 상민 급제자 수는 전 과거 급제자 중 1/3에 이른다. [50] 과거 제도 문서를 참조하면 알겠지만 이 과거 급제를 위한 노력과 비용만 해도 만만치 않았다. 아니, 급제는 커녕 응시하기 위해서라도 필수적인게 한자였기에 과거에 응시할 정도의 실력이라면 최소한 한자 정도는 알고 있다는 말이 된다! 물론 이 한자도 당연히 어려우니 한자를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최소한 무식쟁이 취급은 안 받는다. [51] 조선 왕조 사회의 성취와 귀속, 일조각, 2007. [52] 참고로 고려는 무과 시험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군공을 세우기는 더 쉬웠는데, 이는 조선에 비해 전쟁과 변란이 많았기 때문이다. [53] 조선 초기의 조세는 조용조 체계였는데,(정작 이것의 원조인 중국은 진작에 때려치웠다.) 이중 전결에 매기는 "조"를 제외한 나머지 둘은 인두세다. 그런데 양반은 이런 인두세가 면세다. [54] 양반 수의 증가 등으로 재정이 악화되자 조정은 인두세가 아닌 재산세 중심으로 조세를 개편하였으나 이 또한 완전치 못했으며, 결국 18세기에는 고을별로 세금액을 규정하고 그만큼 거둬가는 총액제가 실시된다. 이에 부족한 세금은 피지배계층인 상민층에게 집중되어 갔고, 이후 19세기 세도 정치까지 겹쳐 삼정의 문란을 이끌게 된다. [55] 관료를 지칭하는 건국 초에는 그 수가 2천여 명에 불과했다. 당시 조선의 평균적인 추정 인구치가 400만 ~ 500만인 점을 감안하면, 전체 인구의 0.1%도 되지 않았던 것. [56] 위에서 언급한 사카타 히로시의 기재 오류를 쉽게 이해하려면, 원래 영감(令監)이 종2품 및 정3품의 당상관을 가리키는 표현이었지만, 조선 후기에 들어서며 신분제가 보다 자유로워지면서 신분을 막론하고 뭇 중장년 및 노년의 남성을 가리켜 영감이라고 지칭하게 되는 현상을 떠올리면 된다. 곧 사카타 히로시는 유학을 벼슬을 하는 양반으로 판단 오류를 범했던 것이며 여기서 유학은 '유학자', '양반'이 아니라 전술한 영감과 비슷한 의미를 띤다. 쉽게 말하면, 통상적으로 옛날에 벼슬을 하지 않은 남자와 그 부인이 죽으면 묘비명에 남자는 '유학(孺學)', '처사(處士)', 그 부인은 '유인(孺人)' 이라 기재했던 것과 일맥상통하다. 처사의 '사(士)'자가 관직에 종사하는 양반을 의미하고, 유인이 본래는 9품 관원의 부인에 대한 칭호이므로 신분제가 철저하던 조선 전기에는 이러한 칭호를 묘비명에 남발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심지어 일본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는데, 옛 일본의 사무라이들이 통상적으로 사용하였던 통명(通名)에 '~우에몬(右衛門)', '~사에몬(左衛門)', '~베에(兵衛)', '~조(藏)', ~스케(助, 丞, 輔, 祐, 佑)'이 유독 많이 존재함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호칭들은 본래 엄연한 관직명이었으나 무로마치 막부 이후 실제 해당 관직에 종사하지 않는 몇몇 사무라이들이 해당 관직명을 참칭(僭稱)하는 사례가 다수 발생하기 시작했고 임진왜란, 세키가하라 전투를 거쳐 에도 시대에 들어서는 관직과 아무 관련이 없는 농민, 상인, 기술자들도 사용할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게 일반화되었다. 이러한 호칭은 대대로 세습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관직이 없는 자들의 전술한 호칭들의 참칭을 금지했지만, 이 호칭을 아예 실명으로 호적에 등재하는 경우도 상당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구 일본 해군의 핵심 세력인 사쓰마 출신의 야마모토 곤노효에(山本權兵衛). 이 사람이 전술한 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해당 호칭을 실명으로 호적에 등재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사쓰마번에 봉사하고 녹봉을 받는, 엄연히 관직을 가진 사무라이였기 때문이다. [57] 다만, 조선 시대 호적의 경우 당대 행정 능력의 한계, 세금 및 군역 회피를 위한 농민들의 호적 등록 기피 현상, 정확한 인구 조사를 학정으로 인식하던 관리들의 성리학적 인식(호구 조사 자체가 세금, 군역을 걷으려는 목적이므로) 등으로 인해 실제 조선 인구, 신분 비율을 정확히 반영하지는 못한다는 점을 고려하자. [58] http://news.hankyung.com/article/2014060504341?nv=o [59] 이것은 왕조국가인 조선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데 만일 만민이 평등하다면 양반과 천민이 평등하다는 것은 둘째치고 왕과 양반 혹은 왕과 천민이 평등하다는 소리가 된다. 당연히 조선시대에서 이 얘기를 했다 하면 어느 왕이든 "너 역적" 이라는 말과 함께 코로 사약 한 사발 들이키게 해 줄 것이다. [60] 노비 기준에서 서술해놨지만 양인도 가능, 단 양인은 이미 자유민이었기에 면천은 해당되지 않음 이 경우엔 면천 대신 벼슬을 받는 것으로 대체되었을 것이다. [61] 물론 반대로 이것 때문에 거짓으로 고변하는 사람이 생길 수 있었기에 무고죄(혹은 반좌율)에 의해서 거짓 고변자는 유배 내지는 사형에 처해졌다. [62] 아무리 양반에 비해 격이 낮았다고는 하나 이방이 백정 한명을 위해 이런 편의를 봐준게 이해가 안되겠지만 이방도 박 좌수가 백정이던 시절에 박 좌수 덕분에 곤경에서 벗어난 적이 있었고 그 이후 서로 형동생 하는 지간이었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63] 이후 병마절도사로 명칭이 바뀐다. [64] 이는 임란 이후 도입된 속오군과 유사하다. [65] 거의 각 현의 현감이 겸임하였다. [66] 보통 베나 무명을 내었다고 한다. [67] 그러나 제승방략 체제에 대해 많은 이견이 나오고 있다. 이일이 작성한 북도 제승방략 체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무작정 지방군을 한군데 결집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68] 이 중 도성의 경비를 맡아보았던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을 삼군문(三軍門)이라 하였다. [69] 조총을 사용하는 군종 [70] 창칼 등 근접 무기를 다루는 군종 [71] 활을 쏘는 군종 [72] 현재의 연대급으로, 지휘관은 천총이라고 했다. [73] 현재의 대대급으로, 지휘관은 파총이라고 했다. [74] 현재의 중대급으로, 지휘관은 초관이라고 했다. [75] 현재의 소대급으로, 지휘관은 기총이라고 했다. [76] 현재의 분대급으로, 지휘관은 대정이라고 했다. [77] 다섯명으로 이루어진 편제로, 지휘관을 오장이라고 했다. [78] 그러나 이러한 숫자는 군포를 납부하는 인원으로, 이들 모두가 군 복무를 했을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79] 350명의 호위군관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80] 금군청을 내삼청(內三廳)이라고도 하였다. [81] 금군청 예하에는 내금위 300명, 우림위 200명, 겸사복 200명이 있었다. [82] 병자호란 이후에는 조선 국방 체계는 모병제를 중심으로 한 중앙군( 오군영)으로 개편되었다. [83] 나중에 일본 제국이 조선을 병합하여 식민지로 만들었을때 조선의 인구조사를 하면서 일본 정부는 조선이 인구밀도가 희박하고 미개간지가 많을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오히려 조선은 이용 가능한 토지 대비 인구밀도가 상당히 높았고 미개간지는 많지 않았으며 인구증가율도 높았다. [84] 다만 병자호란의 경우에는 청나라의 경제 위기를 원인으로 지목하는 학자들(오수창 교수)도 존재한다. [85] 조선의 기록 기술은 현대 기준으로 보아도 최고 수준이다. [86] 다만 정조의 경우는 신하들을 가르치고 논박하는 것을 꽤 즐긴 편이었다고 한다. [87] 이 사건에 대해서는 동인에 비해 세력이 열세였던 서인이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일 가능성이 있다. 출처 [88] 정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세도를 축출했고, 비변사 폐지 > 의정부를 부활시켰다. [89] 이는 불평등 조약으로, 조선을 일본과 같은 자주국으로 인정한다 라는 내용도 있었으나(사실상 청의 종주권 배제가 목적이다.), 일본 중심의 조약인 치외 법권과 화폐 통용, 해안을 자유롭게 측량하는 권한 등 불평등한 내용이 매우 많았고 사실상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조약이였다. [90] 이미 효력이 없는 광무제의 옥새를 사용하여 조약을 체결하였다. [91] 원불교 창시자인 소태산 박중빈 역시 비폭력과 민중 계몽을 앞세우며 조선의 간디라 불린 기록이 있고, '조선의 간디'가 한 두 명에게만 붙여진 칭호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다만 당시에 원불교는 지금보다도 훨씬 작은 군소 종교 단체였고, 소태산 역시 종교인으로써 제 역할을 한 것 뿐 직접적인 독립운동가로 보기는 어렵다. 조선 전체에서 인지도나 영향력을 비교해보았을 때, 간디와 비교할 만한 조선의 대표 인물로 조만식을 꼽는 데에 큰 무리는 없어보인다. [92] 러시아 혁명에 참여한 여성 볼셰비키 혁명가(1872년 - 1952년). [93] 비하가 아니라 박열 자신이 자칭한 것이다. 옆 링크 참조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