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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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양군벌| 북양군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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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휘군벌 | 직계군벌 | 봉천군벌 |
奉天軍閥 |
Fengtian clique |
펑톈군벌 奉天軍閥 | Fengtian cliqu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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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 |||
1916년 ~ 1933년[1][2]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중화민국 북양정부 | 만주국 | ||
이칭 |
봉계군벌(奉系軍閥), 봉계, 봉천파, 펑톈군벌 동북군벌(東北軍閥), 동북군 |
||
국가 |
[[중화민국 북양정부| ]][[틀:국기| ]][[틀:국기| ]] |
||
지역 | 만주 | ||
수도 | 공식 | 봉천성 (1916년~1933년) | |
임시 |
베이핑 (1931년~1932년) 러허성 (1932년~1933년) |
||
주요 사건 |
1922년
1차 직봉전쟁 1924년 2차 직봉전쟁 1928년 황고둔 사건, 동북역치 1931년~1932년 만주사변 1933년 열하사변으로 세력 분쇄 |
||
역대 수장 | 1대 | 장쭤린 (1920년~1928년) | |
2대 | 장쉐량 (1928년~1933년) |
[clearfix]
1. 개요
1927~28년 봉천군벌의 전투 모습이 찍힌 희귀한 기록 영상. 장쉐량이 중국군의 대원수라는 설명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는 황고둔 사건 이후에 찍힌 영상으로 보인다. 영상 설명란에는 국공 간의 전투라 설명되어 있으나 이는 오류다. |
중국 동북 지역에서 성립된 북양군벌의 한 파벌. '대원수'라 불리던 장쭤린이 영도했다. 장쭤린 사후 장쭤린의 아들인 '소원수' 장쉐량에게 대권이 넘어갔다. 장쉐량이 동북역치 이후 국민정부에 복종을 선택하면서 군벌시대는 겉모습은 끝이 났으나 각 군벌들의 세력은 여전히 유지되었고 봉천군벌은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세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봉천군벌은 만주사변, 열하사변을 거치며 일본과 충돌하여 본거지인 만주를 상실함에 따라 몰락했다. 그 잔당도 1936년 서안 사건 이후 중화민국 내에서 독자적인 파벌로서도 사실상 소멸했다.
봉계, 봉천파, 봉계군벌(奉系軍閥), 동북군벌이라고도 부른다.
일단 북양군벌의 중요 파벌 중 하나로 분류하기는 한다. 하지만 그 시초가 장쭤린의 마적단이라서 북양군의 고급 장령 출신들이 시초가 된 안휘군벌이나 직예군벌과는 이질적인 면이 강했다. 소련, 일본 제국과 접경해 있다는 특수성 역시 깊게 작용하여 아예 봉천군벌이라는 독자 파벌로 분류하기도 한다.
위안스카이 사후 정국을 주도한 안휘군벌, 1차 직봉전쟁으로 패권을 잡은 직예군벌에 이어 2차 직봉전쟁에서 승리하여 북양군벌의 주요 세 계파 중 마지막으로 중원의 패자가 된 세력이다. 북양정부 몰락 이후에도 국민정부 산하에서도 오래 가기도 했으니 몰락 또한 북양군벌 중에 가장 늦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아편 재배를 엄격하게 금지하고 대두를 비롯한 봉천의 특산물 판매, 관세, 염세만으로 1923년 기준 총수입이 3,000만 위안에 달하는 등 가장 부유한 군벌이기도 했다. 유능한 관료였던 양융장의 공인데, 1922년 봉천성장과 재정청장에 임명된 이후 일 년만의 일이다. 그의 행정 지도 아래 봉천군벌은 외채를 상환하고도 820만 위안의 흑자가 남고 다음 해에는 1,640만 위안의 흑자가 남았다. 가장 부유한 성들을 다스리고 아편 재배에 열을 올리던 다른 군벌들조차 감히 꿈꾸지 못할 탄탄한 재정이 뒷받침되었다는 소리다.
2. 역사
[[봉천군벌| 봉천군벌 수장]] |
|
<rowcolor=#fff> 초대 | 제2대 |
장쭤린 | 장쉐량 |
2.1. 북양정부 시절
직봉풍전쟁 당시 순승왕부에서 우페이푸와 회의를 마치고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장쭤린과 봉천군벌 장령들[3] |
시작은 만주의 마적이던 장쭤린의 비적떼였다. 장쭤린은 러일전쟁, 신해혁명 등을 적절히 이용하면서 일개 마적단에 불과했던 그의 세력을 봉천군벌이라 불리는 거대 세력으로 성장시켰고 멍언위안 등 만주의 경쟁 세력들을 차례로 제압, 만주의 지배자가 되었다. 1917년 호법전쟁이 발발하자 돤치루이의 안휘군벌과 동맹을 맺고 1차 관내출병을 단행하여 동삼성순열사에 임명되었으며 북양군벌 내부에서 무시할 수 없는 힘의 축 중 하나로 성장하게 되었다.
원래 안휘군벌과 동맹관계였던 봉천군벌은 돤치루이의 측근인 쉬수정의 전횡으로 환계와 단절하고 펑궈장의 직예군벌과 동맹하게 되었다. 돤치루이가 쉬수정을 서북주변사 겸 변방군사령관에 임명하여 외몽골 출병을 단행하는 등 동북의 장쭤린에 맞먹는 세력을 구축하려 하자 봉계와 직계는 환계에 대항하는 8성 동맹을 체결하여 환계에 맞섰다. 1920년 3월, 우페이푸의 직군이 호남에서 북상하여 변방군과 대치하자 장쭤린은 대총통 쉬스창의 요청에 따라 중재자 역할을 맡게 되었으나 돤치루이의 입장이 완고하여 협상은 결렬되었고 쉬수정이 장쭤린 암살을 시도하면서 1920년 7월 안직전쟁이 발발하였다. 여기서 봉천군벌은 직예군벌과 힘을 합쳐 크게 승리, 천하의 패권을 쥐게 되었다.
하지만 직예군벌과 관계가 악화되면서 1922년 봉천군벌은 안휘군벌과 다시 힘을 합쳐 1차 직봉전쟁을 일으켰으나 마적단 출신이 대부분이라 현대적 군대와 거리가 먼 오합지졸로 구성되어 있던 봉천군벌은 참패했고[4] 장쭤린은 궈쑹링 등 현대 군사교육을 받은 참모단을 중시하면서 봉천군 현대화에 나섰다. 이후 봉천군벌은 원로들로 구성된 구파, 양위팅을 비롯한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사관파, 궈쑹링 등의 육대파로 분할되었다.
제1차 직봉전쟁에서 직예군이 보유한 40대의 항공기의 폭격과 기총사격에 속수무책이던 봉천군은 1923년 9월 4일 동3성 항공처를 설립하고 공군 창설을 추진했다. 봉천 외곽에 비행장을 건설하고 프랑스에서 대량의 비행기를 구매했다. 조종사를 양성하기 위해 우수한 학생 35명을 프랑스 항공학교로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2차 봉직전쟁이 벌어졌을 때 봉천군벌 공군은 3개 비행대와 100여 대의 각종 항공기를 보유했다. 프랑스제 코드롱-III 전투기와 브레게 19 전투폭격기, 미제 커티스 슈라이크 수상비행기 등의 최신 기체라 직예군이 보유한 구식 전투기들보다 성능이 우월했다. 만주사변 직전에는 5개 비행중대 300여 대의 항공기와 100여 명의 조종사를 보유하는 등 중국 최강의 군벌 공군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5]
양위팅은 일본 육사를 졸업한 봉천군벌의 문무겸비의 브레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장쭤린의 모사를 맡아 정치와 군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봉천군 훈련총감과 동 3성 병기총감으로서 구미와 일본에서 대량의 무기를 수입하고 1921년 당대 중국 최대의 병공창인 동3성 병공창을 건설했다. 투자금은 3억 위안에 육박했고 면적 60만평, 기계 8,000여대, 기술자 1,200명과 노동자 3만명의 중국 대륙 전체에서 가장 거대함을 자랑했다. 1929년 즈음 연간 생산량은 75mm에서 240mm까지 각종 야포 1,000문과 포탄 20만발, 소총 6만정, 탄약 1억 8,000만발,기관총 1,000여정에 달했다. 이와 별도로 봉천 박격포창이 있어 매월 박격포 80문과 포탄 4만발을 생산했다.
봉천군벌의 군사교육기관으로는 1919년 3월 봉천 교외의 동3성 강무당을 개편해 설립된 동북육군강무당이 있었다. 우수한 교관이 부족하던 초기 장쭤린은 한때 자신이 청조에 반역한다고 죽이려 든 궈쑹링과 관계가 좋지 못했음에도 궈쑹링을 포섭,참모 겸 전술 교관으로 임명해 교육을 맡긴다. 궈쑹링은 베이징 육군대학 등 중국 유수의 군사학교를 졸업한 여러 인재들을 불러들여 교관진을 꾸렸다. 교육기간은 1년,한 기수당 입학 정원은 1920년대 말에는 2,000명이 넘었다. 젊은 생도들은 물론이고 봉천군의 고위 간부들도 군사학 재교육을 거쳤다. 짫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엄격한 훈련으로 명성이 높아 바오딩육군군관학교,윈난육군강무당과 함께 중국 3대 명문 군사교육기관으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봉천군은 궈쑹링의 개혁을 통해 군사개혁을 통해 사단 편제를 없애고 여단 편제로 통일하게 된다. 이에 따라 그동안 난립하던 온갖 들쭉날쭉한 부대들이 27개 혼성여단과 5개 기병여단,2개 독립 포병여단, 1개 중포병 연대로 재편성되었다. 전시에는 2개 여단씩 묶어서 1개 사단으로 기동했고,각 여단은 3개 연대(기병여단은 2개 연대)로 구성되었다. 사단은 2개 여단 6개 연대 18개 대대로 편성되었다. 사단 직속으로 128명 규모의 1개 기병중대와 386명 규모의 수송대대가 있었다.각 연대는 1,134명 규모의 3개 보병대대, 1개 기관총중대,1개 박격포중대(76mm 박격포 36문) , 32명 정원의 1개 통신소대로 편성되었다. 포병여단은 3개 연대 9개 대대로 편성되었으며 인원수 1,700명에 75mm 야포 108문을 보유했다. 중포병연대는 105mm 이상의 대구경포 32문을 보유했다.[6]
1922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 프랑스제 르노 FT-17 경전차 12대를 구매하기도 했다. 그 이후로도 24대를 추가 구매했다. 이 전차들로 1926년 1월 봉천군 제1기병여단 산하에 장갑병 대대를 편성했다. 대대장은 상예창 소교였고 6개 중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장쉐량의 직속부대였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전차부대로, 1926년 6월에야 첫번째 전차부대를 편성한 일본보다도 빨랐다.[7]
1924년에는 장쭤린이 돤치루이, 펑위샹과 연합하여 우페이푸와 차오쿤을 축출하고( 2차 직봉전쟁) 북경정변을 통해 베이징을 점령, 돤치루이를 임시 집정에 추대하고 대륙의 지배자가 되었다. 하지만 환계군벌 루융샹, 왕이탕(王揖唐) 등을 축출하고 강남 지역으로 무리하게 세력을 확장하다가 직계의 쑨촨팡 등이 반발하여 손봉전쟁을 일으키고 궈쑹링이 반봉사건을 일으키는 등 위기에 처했다.
1925년 3월 22일 봉천에 독일인 화학자들을 초빙하고 화학 병공창을 설립하는 등 독가스전에도 대비하려는 모습 역시 보여줬다. 허난성에서 우페이푸의 직예군을 상대할때 항공투하로 독가스탄이 처음 사용되었다. 이후인 북벌 전쟁 와중에 옌시산의 산시군벌 계열 군벌인 푸줘이를 상대할 때 500발의 독가스탄을 야포로 발사하는 등 중국 군벌로서는 이례적으로 신무기 도입에 적극적인 모습이었다.[8]
장쭤린은 일단 국민군을 자처하면서 자신을 타도하려는 펑위샹을 견제하기 위해 직계와 연합, 옌시산, 우페이푸와 연합하여 직봉풍전쟁을 통해 펑위샹을 격퇴했다. 하지만 1926년 7월 장제스가 영도하는 중국국민당이 북벌을 선포하고 북상하면서 다시 상황이 급변했다. 북양군벌들은 장쭤린을 중심으로 뭉쳐 장제스에게 대항하려 했지만 국민혁명군은 파죽지세로 하남-산동에 이르는 지역까지 진출했다. 1927년 국민당 내부의 국공갈등이 심각해지면서 4.12 상하이 쿠데타가 발생하는 등 국민당의 내분으로 북벌은 잠시 중단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국공결렬, 영한합작을 거치면서 국민당은 난징 국민정부를 중심으로 통합하여 1928년 2차 북벌에 나서게 되었고 펑위샹, 옌시산도 여기에 가담했다.
북양군벌들은 장쭤린을 중화민국 육해공 대원수로 추대하여 북양정부의 국가원수로 삼았지만 국민혁명군을 당해낼 순 없었다. 결국 장쭤린은 보경안민을 주장하는 구파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관외로 물러나서 후일을 도모하려 했다. 그러나 장쭤린은 고모토 다이사쿠를 비롯한 관동군 과격파의 음모로 1928년 6월 황고둔 사건에서 열차 폭파로 암살당하고 만다. 장쭤린 사후, 그의 장남이자 육대파와 구파의 지지를 받던 장쉐량이 봉천군벌의 수장에 올라 자신을 견제하는 양위팅, 창인화이 등을 숙청하고 권력을 확고히 했다.
만몽분리를 노리던 일본 제국의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장쉐량에게 보경안민에 힘쓰며 국민당과 협력하지 말 것을 요구했으나 이들의 강압적인 요구와 만주까지 불어온 내셔널리즘 열풍에 장쉐량은 오히려 동북역치를 선언, 국민정부에 합류하게 된다.
당시 봉천군벌의 특징 중 하나로 해군력이 있다. 중국은 청일전쟁 이후 해군력 회복에 제대로 손을 쓰지 못했고, 신해혁명 이후 군벌시대가 열리면서 중국의 해군력은 거의 무의미한 수준이 되었다. 그런데 봉천군벌의 해군력은 그 얼마되지 않는 중국의 해군력 중 거의 전부를 차지했다.
물론 시작이 마적떼인 이상 봉천군벌이 처음부터 이런 해군력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다. 초창기엔 봉천군벌도 소형 포함 등 명목상의 해상 전력만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직복풍전쟁에서 칭다오에 주둔하던 원수더(温樹德)의 발해함대를 손에 넣고 이를 강화하면서 봉천군벌의 해군력은 중국 해군 중 가장 강력한 전력을 차지했다. 당시 중국 해군의 규모는 장병 5400여명, 총배수량 42,000톤 정도였는데 그 중에서 봉천군벌의 해군인 동북해군의 전력은 대소 군함 27척과 장병 3300여명, 총배수량 32,200톤에 달하여 전체의 약 77%를 차지했다.
봉천군벌 해군의 변천사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1919년 헤이룽장 독군이던 바오구이청이 베이징 정부 해군부에 요청해 포함 4척을 넘겨받았다. 그 중 3척은 리쑤이, 리제, 리촨으로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오헝제국 군함이었다가 나포된 것이었다. 이 포함들은 러시아 내전 당시 하바롭스크 전투에서 백군을 지원하기 위해 출동한 20척의 일본 군함들과 함께 함포사격을 지원하기도 했다. 한달 뒤에는 지린-헤이룽장 강방함대 사령부가 설립되어 쑹화강과 헤이룽강의 경비를 맡았다. 상선 개조 포함을 4척 더 확보하면서 전력은 배수량 2,070톤 포함 8척으로 늘어난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베이징 해군부 소속이라 장쭤린의 명령을 받지 않았다.
1차 직봉전쟁에서 함포사격을 퍼붓는 직예군의 해군전력에 질린 장쭤린은 강방함내 사령관 왕충원을 회유해 해군전력 확보를 시도했다. 봉급이 열달 밀려버린 강방함대는 베이징과 관계를 끊고 헤이룽장 강방함대로 이름을 바꾸고 동3성 보안사령부에 가담한다. 장쭤린은 1922년 8월 동북 항경처,1923년 1월 동북 항경학교를 건설하는 등 해군 인력 육성에 총력을 기울였다. 1923년 7월에는 2,300톤급의 민간 상선 전하이, 2,000톤급 웨이하이를 구매해 해군 생도들 훈련용 연습함으로 사용하고 전하이의 경우에는 수상기 모함으로 훗날 개조해 실전에 투입했다.[9] 장쭤린은 일본에서 어뢰정을 수입하고 중국 발해함대를 포섭하는 등 꾸준히 봉천 해군의 전력을 증강했고 1920년대 말에 이르면 방호순양함 3척이 포함된 대소 군함 27척, 수병 3,300여명, 배수량 3만 2,200톤의 중국 군벌 최강의 함대를 손에 넣게 된다.
2.2. 국민정부 시절
장쉐량과 장제스 |
일단 동북역치로 명목상 국민정부에 속하게 된 장쉐량이지만 다수의 군벌들이 그렇듯이 깃발만 국민당으로 바꾸었지 실질적으로는 기존의 체제가 유지되고 있었다. 1928년 장쉐량은 봉천군을 동북변방군으로 개칭하고 대대적인 정편 작업에 들어갔다. 군단과 군,사단 편제를 폐지하고 모든 부대를 '국방여단'으로 통일했다. 7개 방면군 50개 군 100만명에 달했던 봉천군은 정편 작업 이후 33개 보병여단,6개 기병여단,8개 포병연대,5개 공병대대,2개 치중대,9개 헌병대로 조정된다. 각 여단은 3개 연대로 구성됐으며 연대 직할로 기관총중대와 박격포중대,평사포중대,통신중대가 있었다. 동북변방군 국방군과 각 성마다 성방군이라고 하여 토비 진압을 담당하는 치안병력까지 합치면 총 병력이 25만명 정도였다. 이 시기 동북변방군 해군은 대소 전함 21척 수병 3,300명 총배수량 3만 2천톤을 유지해 이전 시기의 규모를 어느정도 유지한다. 해군 항공대와 해군 육전대는 3개 대대 2,000명이었다. 동북변방군 공군은 5개 대대로 구성됐으며 270대 항공기를 보유해 여전히 중국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10]
1929년 군사력을 감축하여 교육과 경제성장에 투자하자는 편견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는 장제스가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는 것이었고 국민정부에 합류한 각 지방의 군벌들은 장제스에게 반발하여 반장전쟁을 일으켰다. 1929년 2~3월, 광서파의 리쭝런과 바이충시가 1차 장계전쟁을 일으켰고 5월에 펑위샹이 1차 장풍전쟁을 일으켰다. 장쉐량은 일단 중앙옹호를 타전하며 봉천군벌과 사이가 좋지 않은 펑위샹을 견제하기 위해 옌시산, 장제스와 손을 잡는다는 방침을 잡았으나 반장파에 합류하는 선택지 역시 고려했다. 이때 만주의 경제적 위기가 심화되면서 이를 타개하기 위해 중동로 사건을 일으켰다가 바실리 블류헤르가 지휘하는 붉은 군대에게 봉소전쟁에서 개패듯이 두들겨맞기도 했다.
1930년에는 반장전쟁의 절정인 중원대전이 발발하였다. 그때까지 장쉐량은 장제스와 반장파 사이에서 유리한쪽을 가늠하며 어부지리를 노리고 있었다. 장제스 측이 승기를 잡자 장쉐량은 중앙옹호를 통전, 동북군은 관내진출을 단행하여 베이핑과 텐진을 신속히 장악하였다. 반장전쟁 이후 장쉐량은 국민혁명군 부사령관에 임명되어 국민정부의 2인자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 단물을 오래 누릴 수는 없었다. 화북지방에 개입하면서 동북군의 역량이 분산되었고 본거지인 만주는 그만큼 일본의 야욕과 도발에 취약해졌기 때문이었다. 동북군 내 원로격인 만주구파는 관내진출을 반대하였으나 장쉐량은 개인의 야욕때문에 이를 무시한 셈이 되었다.
1931년 나카무라 사건, 만보산 사건 등 봉천군벌을 도발하기 위한 일본 제국의 음모가 이어졌다. 1931년에는 이시와라 간지 등의 주도로 만주사변이 발생해 일본 제국에게 만주를 빼앗기면서 봉천군벌은 어이없게 몰락하였다. 보경안민을 주장하는 만주 구파를 무시하고 중동로 회수와 관내진출에 나서던 장쉐량은 관동군을 상대로 부저항주의를 취했고 결과적으로 1만 5천명에 불과한 관동군에게 만주를 허망하게 잃으면서 전국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장쉐량의 봉천군벌 잔당은 서쪽의 열하성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일본 제국은 만주 구파를 포섭하여 선통제를 옹립, 만주국을 선포하였다.
서안 사건 당시의 장쉐량과 동북군의 장령들 |
1933년 열하사변이 발생하였을 때도 장쉐량은 무기력하게 패배했다. 장쉐량은 왕징웨이 등 전국의 요인들의 비난을 받았고 사직을 통전, 유럽으로 외유를 떠났다. 이때 갈레아초 치아노, 베니토 무솔리니, 아돌프 히틀러 등을 만나 파시즘 뽕에 빠지게 되었다.(...) 1934년 귀국한 장쉐량은 서북 초비부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장쉐량이 부여받은 임무는 제5차 초공작전으로 개박살나서 대장정에 오른 섬서성의 중국공산당을 토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장쉐량은 공산당 토벌보다는 본거지인 만주 탈환을 하고 싶어했다. 더욱이 공산당의 완강한 저항에 큰 피해를 입게 되자 초공작전에 더더욱 거부감을 가졌다. 이에 장제스의 중앙정부 강화 정책에 불만을 품던 섬서성 군벌 양후청과 합세하여 초공 독전을 위해 찾아온 장제스를 감금하는 서안 사건을 일으켰다.
서안 사건은 어찌어찌 평화적으로 해결되어 2차 국공합작이 결정되었다. 하지만 다 잡은 공산당을 풀어주었던 장쉐량은 가택연금에 처해졌고 양후청은 외유를 떠나야 했다. 봉천군벌의 수장인 장쉐량이 감금당하면서 봉천군벌은 구심점을 잃고 와해되었고 장쭤샹 등 살아남은 원로들도 야인으로 살거나 장징후이처럼 일본에 협력하는 길을 선택하면서 봉천군벌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장제스가 접수한 동북군 부대들은 1934년 장제스가 추진한 60개 사단 정편 계획에 포함되어 개편사단으로서 중국군 중앙군에 흡수되었다. 본거지를 상실하고 지도자도 상실한 봉천군으로서는 중앙정부에 귀속되는 것 이외의 선택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국공내전 때도 전향한 부대가 드문 등 이들의 중화민국 정부에 대한 충성심은 현실을 받아들였는지 비교적 양호한 편이었다.
3. 동3성 병공창
자세한 내용은 동3성 병공창 문서 참고하십시오.4. 기타
카이저라이히 등의 매체를 통해 흔히 봉천군벌의 기로 알려진 위의 기는 사실 봉천군벌의 기가 아니다. 원본은 1932년 만주국 건국에 선행해 설립된 일본의 괴뢰집단인 동북최고행정위원회(東北最高行政委員会)의 기이다. 봉천군벌은 상술했듯 북양정부의 기를 계양했다.
5. 참고 문헌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 만주군벌 장작림, 쉬처, 아지랑이.
- 중국 군벌 전쟁, 권성욱, 미지북스
6. 관련 문서
6.1. 관련 인물
- 장쭤린
- 장쉐량
- 장쉐밍
- 장쉐쓰
- 궈쑹링
- 양위팅
- 장덩쉬안
- 장쭝창
- 장쭤샹
- 탕위린
- 우쥔성
- 쑨리에천
- 장징후이
- 창인화이(상음괴)
- 펑더린
- 리징린
- 마잔산
- 아이신기오로 시치아
- 짱스이
- 장하이펑(장해붕)
- 허펑린[11]
- 자오티[12]
- 쑨뎬잉[13]
- 성스차이
6.2. 사건
- 러일전쟁
- 신해혁명
- 홍헌제제
- 호국전쟁
- 부원지쟁
- 장훈복벽
- 1차 호법운동
- 호법전쟁
- 외몽골 출병
- 하남독군 교체 파동
- 안직전쟁
- 1차 직봉전쟁
- 2차 호법운동
- 영풍함 사건
- 강절전쟁
- 2차 직봉전쟁
- 서산회의
- 손봉전쟁
- 반봉사건
- 직봉풍전쟁
- 국민당의 1차 북벌
- 국민당의 2차 북벌
- 황고둔 사건
- 동북역치
- 반장전쟁
- 나카무라 사건
- 만보산 사건
- 만주사변
- 제1차 상하이 사변
- 열하사변
- 복건사변
- 대장정
- 서안 사건
[1]
1928년의
동북역치 이후부터는
난징 국민정부로, 위의 깃발 역시 동북역치 이전까지만 이용했다. 그 이후로는
청천백일만지홍기를 이용했다.
[2]
동북역치를 기점으로 멸망했다고 보고
1928년까지 존속했다고 서술하는 경우 또한 존재한다.
[3]
1번이 장쭤린, 2번이 장쭝창, 3번이 우페이푸, 4번이 장쉐량이다.
[4]
원로들은 엄정한 기율이나 현대적 군사훈련이 실전에서 병사들을 허약하게 만들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현대적인 군사 교육 제도를 괄시했지만 1차 직봉전쟁에서 원로들은 패주했고 궈쑹링과 장쉐량 등은 오히려 선전했다.
[5]
중국을 재통일한 장제스조차도 이 정도 전력을 손에 넣으려면 1936년은 되어야 했다.
[6]
출처는 권성욱의 저서 "중국 군벌전쟁" 3부 25장
[7]
권성욱의 "중국 군벌전쟁" 4부 31장이 출처.
[8]
출처는 권성욱의 저서 "중국 군벌전쟁" 4부 36장
[9]
중국 최초의 실전을 겪은 수상기 모함이었다. 장제스가 점령한 상하이 폭격에 사용되기도 했다.
[10]
출처는 권성욱의 저서 "중국 군벌전쟁" 5부 40장
[11]
안휘군벌에서 전향.
[12]
1차 직봉전쟁 이후 합류.
[13]
2차 직봉전쟁 이후 합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