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2 20:19:36

대약진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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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특징3. 배경4. 전말
4.1. 농업집단화4.2. 터무니없는 예상치 잡기4.3. 삼림 파괴4.4. 토법고로4.5. 제사해 운동
4.5.1. 살충제 남용
4.6. 심경밀식4.7. 억지로 휴경지 만들기4.8. 가축 폐사4.9. 치수사업4.10. 공포정치와 학살
5. 결과 : 삼년대기근6. 끝없는 식량 징발7. 숨겨진 원흉 첸쉐썬8. 이후9. 관련 매체
9.1. 서적
9.1.1. 정식 발매된 저서9.1.2. 정식 발매되지 않은 저서
9.2. 만화9.3. 영화
10. 관련 문서

1. 개요

대약진 운동(; 大跃进运动[1], the "Great Leap Forward" movement)은 중국에서 중국공산당의 주도로 1958년부터 1962년경까지 실시되었던 경제, 사회 개발 운동이다.

이는 미국과의 체제 경쟁을 진행하던 소련의 노력을 보고 영감을 얻은 마오쩌둥 영국을 따라잡을 목적으로 야심차게 준비한 경제 성장 계획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중국의 성장을 수십 년 후퇴시켰던 역사적인 실책이다. 당시 중국은, 서방 세계의 선도 국가가 미국이고 다음가는 국가가 영국이며, 이에 대응해서 사회주의 국가의 선도국가가 소련이고 그 다음이 자신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똑같이 진영 내 2위 국가인 영국을 추월함으로써 공산주의의 위용을 떨칠 생각이었으나, 계획 자체의 모순과 결함, 기술의 미비, 강압적 추진 태도 및 부정, 부패 등으로 실패하였다.

2. 특징

정식 명칭은 제2차 5개년 계획, 그 유명한 토법고로 제사해 운동도 대약진 운동의 일부분이다. 5천만 명에 이르는 아사자가 속출하고 경제가 후퇴했다는 점에서 현대 중국에서 마오쩌둥의 공칠과삼(공적 70%, 과실 30%) 가운데 과삼으로 비판받는다.

마오쩌둥 중국을 대후퇴시킨 대실책으로 평가받으며, - 문화대혁명과 함께 중국 전체의 문화적, 경제적, 사회적 수준을 20년 이상 퇴보시켰다고 평가 받는다. 이로 인해 중국 전역에서 기근이 발생해[2] 3,000만 ~ 5,000만 명이 굶주림으로 사망했다. 이는 작정하고 중국인을 죽인 난징 대학살의 최소 30배, 국가적으로 수용소를 세워서 어떻게든 더 많이 유대인을 죽이려 했던 홀로코스트의 최소 5배 이상 차이가 나는 수치이기에 지도자의 무능함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중국의 경제성장률 통계를 보면 마오쩌둥 시절의 경제성장률이 쭈욱 낮았던 것은 아니었고, 1950년대 1차 5개년 계획(1953~1957) 때에 9.3%, 1963~1966년도에 2자릿수대의 고성장률을 기록한 적이 있고 1969년과 1970년에도 10%대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하지만 대약진운동으로 1960년과 1961년에 -25%, -27%라는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면서 1950년대 초중반에 이룩했던 경제성장의 성과를 싸그리 까먹었고,[3] 이후로 류사오치의 주도하에서 4년 연속 10%대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지만 1966년도에 문화대혁명이 터지고 나서는 사회혼란으로 1967년과 1968년 2년에 걸쳐 -4.1%, -5.7%의 경제성장률을 목도하였다. 이후로 홍위병이 하방되어 혼란이 어느정도 진정되면서 기저효과로 16%, 19%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게 되나 1970년대 초중반에는 침체를 맞았다.

이처럼 2차례씩이나 경제성장의 성과를 완전히 말아먹은 탓에 대만 홍콩이 비교적 안정적인 성장세를 유지하며 1인당 국민소득이 수십 배 넘게 성장하는 동안 중국은 고작 몇 배의 소득성장밖에 이루지 못했다. 1950년대 말 기준으로 홍콩, 대만의 소득수준이 중국과 현격한 격차를 나타냈을 때는 아니었던 만큼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마오쩌둥이 사망했을 때인 1976년에는 중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176달러였을 때 홍콩은 2,850달러, 대만은 1,158달러였고,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에는 격차가 더욱 커져서 대만이 중국 경제력의 40% 수준이었고, 홍콩도 절정기에는 중국 경제력의 1/4(1993년) 정도에, 남한도 이와 같은 시기에 중국 경제력의 90%에 육박했다. 이는 대만에게 국력을 급속히 따라잡히는 데 큰 영향을 미쳤고, 서방 국가들도 완전고용을 실현하는 등 중국에 비해서 비교적 안정적인 경제성장세를 유지하던 시절이라서 중국의 순위가 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마오 시절에서부터 1998년 이전까지는 집을 나라에서 배분해주어서 애들 용돈에 불과한 푼돈을 임대료 및 관리비라면서 냈고, 도시 노동자의 경우에는 임금이 낮아도 평생직장을 보장받고 의료도 공짜로 받는 혜택도 있었기 때문에[4] 실질 구매력은 176달러보다야 높았지만, 그렇다 해도 대만과 홍콩에서 컬러 TV를 비롯한 각종 첨단 전자제품들이 보급될 때 중국의 대다수 시골에서 전기와 상수도가 설치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고, 자가용이라고 해도 자전거를 사서 타던 수준에 머물고 있었으니 잠재력을 얼마나 갉아먹었는지 알 수 있다. 즉 두 사건으로 인해 중국 경제가 침체되어 후발 국가들에게 줄줄이 따라잡힌 데다가 그 사이에 발생한 인적·문화적·사회적 손실을 감안하면, 그만큼 발전이 늦어지게 되었다는 것이 틀린 말이 아니다.

니키타 흐루쇼프 시베리아와 카자흐스탄 일대에 대규모 농지를 조성하며 " 미국의 경제력을 능가하겠다."고 도발하자, 마오쩌둥이 이에 경쟁심을 느끼며 소련과 마찬가지로 농공업의 대증산 계획정책을 내놓으면서 자기는 영국을 능가하겠다 맞불 놓으며 시작됐다.

중국공산당은 중국 공산혁명과 대약진운동을 최초로 ' 농촌이 주체가 된' 혁명이라고 생각했다. 마오쩌둥주의에서 "혁명의 주체는 도시 노동자가 아닌 농촌의 농민들이며, 산업혁명을 비롯한 여태까지의 혁명은 모두 도시에서 주도했으니, 이번엔 농촌에서 혁명을 해보자"는 게 대약진 운동의 핵심이었다. 그러니까 도시에 제철소 자동차 공장을 만드는 게 아니라, 농민들이 토법고로로 을 만들고 농촌에서 트랙터를 조립해 '우리식'의 혁명을 해보자는 것이 대약진운동의 목표였다.

의도는 그럴 듯(?)해 보였지만, 결국 이는 현실에서는 실현할 수 없는 이상이었을 뿐이다. 산업화에는 반드시 도시 인구의 증가 및 생산시설의 발전이 필요함을 마오쩌둥이 간과했던 것이었다. 사실 저우언라이 천윈, 류사오치, 덩샤오핑 등 측근 인사들이나 심복들이 당초에 대약진운동에 반대하는 등 대약진운동이 무모하고 비현실적이라면서 마오에게 충언을 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마오쩌둥은 자아도취에 빠져서 이러한 충언을 받아들이기는커녕 무시하거나 자아비판까지 시켜가면서 끝끝내 대약진 운동을 밀어붙였다. 1949년과 1950년에 걸쳐 투기자본을 패배시켜 물가를 안정화시키며 화폐개혁도 성공적으로 단행했고, 또한 1차 5개년 계획이 비교적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경험이 오히려 독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또한 마오쩌둥은 국민당이 중국 전체를 지배하던 시절부터 공산당을 이끌었던 탓에 엄청난 권위와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저우언라이, 천윈, 펑더화이, 류사오치, 덩샤오핑 모두 주석이나, 총리, 고위 관직을 지냈던 인물이라 비중이 커 보이지만, 이 당시에는 이들을 전부 합쳐도 마오쩌둥의 권력에 비하면 달과 반딧불만큼이나 차이가 있었다. 공산당과 군부의 간부는 물론이고, 모든 당원과 병사들은 마오쩌둥에 절대 충성을 맹세하고 있었기에, 마오쩌둥이 마음만 먹으면 목숨까지 빼앗길 수 있었다. 실제로 이들 모두 마오쩌둥의 노선을 비판했다가 숙청당하거나 옥고를 치른 적이 한 번씩 있었고, 저우언라이는 실각당하지 않지만 사인방의 공격으로 수양딸이 죽임을 당하고, 사위가 폐인이 되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문화대혁명의 뒷수습을 하느라 고생을 심하게 했다. 여기에 반우파 투쟁의 여파로 야당이 무력화되어 몇 남지 않은 견제기능마저 무력화되었고, 이런 상황 속에서 마오 스스로가 인지부조화에 빠지며 계획이 틀어졌다는 것을 직감하면서도 계속 밀어붙였지만 누구도 제동을 걸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

그나마 처음으로 "계획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공개 석상에서 직언했던 펑더화이가 마오의 눈밖에 나 비난받고 실각당하면서 이는 더욱 심해졌다. 만약 펑더화이가 처음 직언을 했을 때인 1959년 7월도에 계획을 수정했으면, 중국의 경제성장세가 잠시 꺾였다 수준으로 그쳤을지언정, 적어도 수천만 명이 사망한 최악의 기근으로 기록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식량 부족 현상 자체는 1959년 중순부터 지속적으로 보고되고 있던 상황이었지만, 마오는 이러한 보고를 받으면서도 계획을 지속적으로 추진한 결과로 구제는 훨씬 뒤에나 이루어지며 아사자가 대규모로 속출되었기 때문이었다. 군 공식 서열 2위(실질적으로는 1위)이며 오랫동안 마오쩌둥과 함께 싸워온 심복 중의 심복마저 비판적인 직언을 했다고 쫓겨났던 상황이라 다른 공산당 간부들은 감히 이견을 제시할 수 없었고, 결국 몸보신에 급급하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이러한 요인이 겹치며 파국으로 치달았던 것이었다.

최후에는 자연재해까지 겹쳐 기근이 겉잡을 수 없이 번지자 마오가 그제서야 현실을 깨닫고 해외로부터 식량을 수입해서 긴급구제에 나서는 한편 할당 생산량 현실화 및 텃밭 허용, 천윈 재기용 등 계획을 수정하는 조치를 취했지만, 이미 수천만이 목숨을 잃은 뒤였다.

어쨌든 중국공산당도 문화대혁명과 함께 빼도박도 못할 정도의 실책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에서 사회비판적인 요소가 들어간 영화와 소설을 만들 때 문화대혁명과 함께 단골로 쓰이는 소재다. 사실 중국은 유명할 정도로 문화의 검열이 심각해서 사회 비판 작품을 만들기가 굉장히 어려운데, 그나마 공산당도 인정한 실책을 가지고 간접적으로 현재 사회를 비판하는 방법밖에는 없어서 자주 써먹히는 것도 주된 이유다.

3. 배경

" 영국은 철강을 연간 2천만 톤 생산하고 있다. 15년 후 영국의 생산량은 3천만 톤까지 늘어날지 모른다. 중국은 어떻게 될까? 15년 후 중국은 철강 4천만 톤을 생산하게 될지 모른다. 그렇다면 영국의 생산량을 초월하는 것이다. 올해 우리나라는 강철 520만 톤을 생산했고, 5년 뒤에는 1천만~1천 5백만 톤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이다. 5년이 더 지나면 2천~2천 5백만 톤을, 다시 5년 뒤에는 3천~4천만 톤을 달성할 것이다. 내가 허풍을 떠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장래 또 다른 국제 모임에서 만났을 때 여러분은 내가 너무 주관적이라고 비판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지금 상당한 증거를 바탕으로 말하는 것이다. 니키타 흐루쇼프 동지는 ' 소련이 15년 안에 미국을 따라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15년 안으로 우리 또한 영국[5][6]을 추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약진 운동을 선포하는 마오쩌둥의 교시

중국 지도부는 늦게나마 원자폭탄 개발에 필요한 설비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전국 각지의 식량을 비축하고 수출하였는데, 일례로 1959년 6월 중공은 당시 중국 내 도시에 살았던 전 인민이 1년 동안 먹을 343억근의 식량을 비축한 바 있다. 중국은 그해 이 비축량의 약 24%,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415만 톤을 수출하였는데, 이로 인해 베이징, 톈진, 상하이 등 대도시의 식량공급이 끊기는 등 1960년 한 해만 전국적으로 2,400만 명이 식량 공급을 받지 못하였다. 당시 배급상황이 어땠냐면, 1달에 고기라고는 1인당 기준으로 돼지고기 100g을 배급하는 수준에 곡물배급량도 턱없이 부족했고, 영양이 부족하니 부종에 걸린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또한 부종으로 병원에서 진단서를 떼어야 황두 1kg과 500g의 흑설탕을 배급받아서 영양을 보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상황이 이런데도 불구하고, 중공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알바니아, 북한, 북베트남, 쿠바, 몽골 사회주의 국가에 18억 7,000만 위안 이상의 원조를 퍼부었고, 그 밖에 아시아, 아프리카 제3세계 국가들에게 5억 위안 이상을 원조했다. #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중국 지도부는 1958년부터 꾸준히 식량공급 부족에 대한 보고를 받아 보았다고 한다. 즉 중국 지도부는 상황을 잘 파악하려고 노력은 했다. 문제는 계획 자체를 철회할 생각 같은 것은 절대 안 했다는 것이다. #

사실 대약진운동 이전 중국은 건국 이후 여러 부문에서 소련 벤치마킹하는 정책을 폈고, 마오쩌둥은 "짧은 기간에 후진농업국에서 선진공업국으로 탈바꿈한 소련의 발전 경로를 따라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에 따라 소련에서 많은 원조를 받고, 소련의 기술자들을 고용해서 개발계획을 실시했다.

중공은 1950년대 초반 연 20%의 성장을 상정하고 소련에 160개의 산업 플랜트 건설을 비롯한 엄청난 원조를 요청했으나, 이오시프 스탈린은 이를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면서 90개 플랜트로 중공의 계획을 축소시켰다. 마오쩌둥은 소련의 속도조절 요구에 불만스러웠으나, 천하의 마오쩌둥도 스탈린을 거스를 순 없었기 때문에, 스탈린이 살아 있을 때 중공은 대약진 급의 무리한 공업화 드라이브는 나서지 않았다. 또한 천윈을 필두로 한 경제관료들은 균형재정과 물가안정을 중요시하는 정책을 펼치는 등 경제적으로 현실주의 노선을 펼쳤고, 결과적으로 1차 경제계획은 연 9% 성장으로 전후복구기임을 감안하더라도 괜찮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 1950년대를 지나며 토지개혁, 집산화, 전매제 등이 정착해 중국공산당이 농촌 절대 다수를 장악하게 되고 삼반운동, 반우파운동으로 국내 반대파들까지 때려잡게 되면서, 마오쩌둥은 거의 마음대로 정책을 휘두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53년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한 후 집권한 니키타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격하하고 서방과의 화해를 추진하자, 마오쩌둥은 이를 두고 "수정주의"라고 화를 내며 반발하게 된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은 두려워했지만 흐루쇼프의 경우는 '나약한 인물'이라며 얕잡아보고 혐오했으며, 이때부터 중공은 소련을 제치고 사회주의권의 우두머리로 나서기 위해 소련에 대한 노골적인 경쟁심을 보이게 되었다. 그러던 중 흐루쇼프가 " 미국을 따라잡겠다"고 선포하고 처녀지 개간 운동과 경공업 진흥을 비롯한 신 경제정책을 내놓았다. 원래 2차 경제계획 초안의 경우에는 중공업 위주 성장을 도모하되, 경공업에도 어느정도 신경쓰는 균형발전 전략으로 나아갈 계획이었지만, 마오쩌둥 역시 뒤지지 않겠다고 " 영국을 따라잡겠다"고 선포했고, 이 구호는 곧 "7년 안에 영국을 추월하고 15년 안에 미국을 따라잡겠다"는 당시 중국으로써는 무지막지한 목표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또한 이를 위해서 저우언라이 천윈이 주도하던 안정성장 노선을 뒤엎었다. 이로 인해 저우언라이와 천윈은 자아비판을 하는 수모까지 겪어야했다. 반대로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장제스가 물가문제를 등한시하다가 민심이 이반하는 뼈저린 교훈을 얻고 경제정책면에서 무리수를 두기보다는 안정성장 노선을 취하면서 대만의 국력이 중국을 크게 따라잡는 계기가 된 것을 보면, 이러한 결정은 중국/경제의 발전을 20년 늦춘 그야말로 뼈아픈 순간이었다.

당시 중국이 1950년대 당시에는 전후복구와 안정성장 노선으로 경제성장률이 괜찮았고, 공업화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 농업이 중심산업이기는 했다. 물론 이때 다른 서방국가도 이제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날 정도였기에 경제발전이 절정에 달하지 않았다는 점도 컸다. 당시 영국 미국 소련에 뒤이은 세계 3위 경제대국이었지만 대약진운동이 일어나기 4년 전인 1954년까지 배급제가 시행될 정도였고, 다른 유럽 국가들도 사정이 크게 다른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다른 서방국가들의 경제발전이 절정에 달했던 때는 아니었던지라 아시아 기준으로 보았을 때 일본을 제치는 1위 경제대국이었다.

이 당시 일본 태평양 전쟁에서 패전하여 경제가 침체되었고 1950년 한국 전쟁을 기점으로 해서 폭발적인 경제성장세를 보이기는 했지만 초기단계였기 때문에 중국에게 경제규모에서 밀렸던 것이었다. 그러나 대약진운동 이후로 중국의 경제력을 일본이 따라잡았고, 중국이 문화대혁명으로 상당기간 경제성장이 침체했기에 일본을 다시 따라잡는 데에 시간이 걸린 관계로, 중국이 일본의 경제규모를 다시 추월하게 된 것은 2010년부터였다.

세계적으로 보아도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에 뒤이은 5위 경제대국이었고, 미국이나 소련을 당장에 따라잡는 것은 무리이기는 했어도 중국보다 인구가 훨씬 적은 영국이나 프랑스와는 경제규모가 큰 차이가 나지는 않았다. 사실 계획이 제대로 진행되어서 고도성장을 이룩한다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는 규모였으니, 계획만 잘 짜여졌다면 그렇게 터무니 없는 허세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마오쩌둥 중국을 '단순 인구빨로 경제대국인 나라'에서 공업을 육성시켜서 역사상 유례가 없는 속도로 최대한 빨리 발전시키고, 이를 토대로 '국제사회에서 큰소리 떵떵 치는 강국'으로 만들려고 했다. 당시 중국은 5대 강국으로 손꼽혔던 것과는 별개로, 1인당 구매력은 별로 좋지 않았다. 외교적으로도 문제가 있었다. 제3세계 국가들과도 친교를 적극적으로 도모하려 했지만 제3세계의 대표주자격인 인도와 마찰이 있었던 데다가, 대만이 상임이사국으로 지정되어 있을 만큼 입지가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이미 이전 소련의 사례도 있었고 동시기에 경제발전을 이룩하고 있는 나라들의 사례들도 있었으니 이를 열심히 참고한 다음에 미국이나 소련의 경제발전 속도를 뛰어넘어 10년 안에 이들과 맞짱 뜰 강국을 건설한다는 것. 그것을 위해 농업생산과 공업생산을 폭발적으로 늘려 지상낙원 사회주의 국가를 완성하려고 했다.

하지만 문제는 계획을 너무 조급하게 달성하려다보니 제대로 된 계획을 입안해서 시행하기보다는 당장의 성과에 집착하여 속전속결식 대책을 시행하는데 급급했다는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엉터리 정책이 마구잡이로 실시되거나 전시행정이 이뤄지는 경우가 태반이었다는 것이었다. 계획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1958년에 산업생산량이 55%나 불어나는 등 호조였지만 어디까지나 단기적이었고, 1959년 하순부터 기아로 죽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며 정책의 실패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특히 1959년부터 1961년까지 자연재해가 잇따라 발생하면서 전국적인 흉작이 되어 농업생산량은 10년 전 수준인 1950년대 초반 수준으로 추락했고, 산업생산량은 1960년까지 증가하기는 했지만 저질 공산품, 저질 소비재의 범람으로 국방력에까지 악영향을 끼치는 문제점을 드러내어 결국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조정작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또한 대규모 흉작으로 전국 곳곳에 식량배급도 끊어져 국공내전 종료 직후 최악의 고통을 인민들에게 선사해주며, 고도성장의 꿈은 악몽으로 끝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아시아 1위 경제대국이라는 타이틀을 일본에 내주게 되었고, 이후로 문화대혁명의 난맥상까지 겹치며 서독, 이탈리아, 캐나다, 브라질, 스페인, 멕시코 등 인구에 있어서 중국에 훨씬 뒤쳐지는 국가들에게 하나하나 따라잡히게 되면서 중국의 경제규모는 나날히 추락을 거듭하고, 1981년에 호주보다 못한 세계 13위로 추락하게 되었다. 결국 최종적으로 대약진 운동이 목표로 한 성과를 달성하게 된 것은 2000년대 중후반~ 2010년대가 되어서부터였다. 마오쩌둥의 소원대로 영국의 명목상 GDP를 초월하게 된 것은 대약진운동이 끝나고 반세기 정도 지난 2005년~ 2006년이다. [7] 이후 2014년 미국의 PPP를 추월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아직도 2024년 기준 미국의 명목상 GDP의 60%대 후반 정도로 미국 추월은 요원하다.

4. 전말

七年超 十五年赶
칠년초영 십오년간미
7년 안에 영국초월하고, 15년 안에 미국따라잡는다.
마오쩌둥[8]
대약진 운동은 천하의 마오쩌둥도 벌벌 떨게 만들었던 이오시프 스탈린이 죽고 뒤를 이은 니키타 흐루쇼프의 리더십이 중국을 휘어잡지 못하자 발생한 중국 소련 공산주의 영도권 경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스탈린이 살아있던 시절, 중국은 스탈린으로부터 기술, 자본, 건축자재 등을 지원받고 소련이 1930년대에 우랄 산맥 우크라이나에서 행했던 대규모 중공업 건설을 벌였다. 이 시기 스탈린은 중국공산당의 경제정책에 대해 참견하면서 자신이 보기에 무리다 싶은 것은 가차없이 취소하거나 규모를 삭감하는 등, 중국의 경제건설에 제재를 가했다. 또한 자신의 경제지원에 대한 대가로 막대한 양의 중국의 자원을 수탈하듯이 챙겼다. 마오쩌둥은 이 점에 대해 크게 불만이었으나, '공산권의 교황'이나 다름없는 스탈린에게 저항할 순 없었다. 하지만 그 뒤를 이은 흐루쇼프는 서방과의 화해를 도모하는 등, 마오쩌둥의 눈에 나약하기 그지없는 인물로 보였다.

흐루쇼프의 집권을 기점으로, 마오쩌둥은 서서히 소련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소련이 " 처녀지 개간 사업을 통해 미국을 따라잡겠다"고 선전하자, 마오쩌둥은 자신들이 소련에 뒤지지 않을 수 있다는 증거로 "영국을 따라잡겠다"고 선언했고, 이는 대약진 운동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천윈 등 현실적인 방법을 제안한 전문가들은 "제국주의 간첩", "태만에 빠진 부르주아"로 몰려 가혹한 비판을 받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 마오쩌둥은 공공연하게 "배운 사람들은 보잘것 없으며, 무식한 사람들이 사실은 가장 유식하다"는 반지성주의적 발언을 지껄이면서 전문가들을 무력화시키고 기술과 자본을 등한시하고[9], 수억의 인민들을 무제한으로 투입하였다. 하지만 마오쩌둥 본인은 문맹률이 80%대에 달했던 당대 중국 기준으로는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베이징대학 사서로 일하면서 고등교육도 간접적으로 받는 등 고학력자였고, 수많은 서적을 탐독하고 공산당 내 논쟁에 참여하면서 문장력이나 연설 실력은 중국 제일을 달리던 인물이었다. 즉, 반지성주의를 내세운 본인이 지성인이라는 모순인데, 이 시기 마오는 지성인들을 경멸했기 때문에 오로지 자신의 생각을 통해서만 정책을 집행하도록 했다. 다른 인민들은 마오쩌둥을 위해 살아야 했고, 국가의 정책은 마오쩌둥에 의해 집행되어야 했다.

이렇게 남의 나라 계획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파악도 안 하고 타국의 도움없이 계획을 추진하려니, 무리수가 작렬했다. 일단 모든 인민들을 생산 단위로 묶어 취식을 함께 하도록 했다. 덤으로 각 마을마다 할당량을 부과하여 생산하게 했으며, 모든 마을에 소형 용광로 즉, 토법고로를 배치하여 대형 공장을 대체하고 강철 식량을 생산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 근대화"라는 단계를 거치기 위해서는 이 꼭 필요하다. 공장, 건물, 비행기, 선박, 차량, 무기 등 철이 안 쓰이는 곳이 없기 때문. 그래서 메이지유신 당시 일본의 중요 과제 중 하나가 제철소 건설이었고, 우리나라의 1960~70년대 포항제철소 건설도 이와 같은 맥락이었다. 그리고 제철소 건설에 투입한 자금이 바로 일제강점기 시절 보상금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근대화 과정에서 철이 얼마나 중요한지 증명해주는 예.

저런 소련식 공업화 계획은 1930년대 후반 만주국 일본인 관료들이 복사해서 그대로 시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소위 '만주 인맥'이라고 해서 일제강점기 시기 관동군 만주국을 경험한 만철 연구소 출신 관료, 전문가 그룹이 이후 한일 양국 정권에 상당부분 포진해 있었던 것이 20세기 중후반 양국 경제정책을 수행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북한 김일성도 당연히 소련의 영향을 받아서 정부가 주도하는 급진적 공업화를 추진했는데, 북한도 초기에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1970년대 초반까진 제3세계 국가들 중에선 경제발전이나 생활 수준으로도 선두권이었다.

1970년 UN 자료를 보면, 대한민국은 국내총생산 순위가 세계 39위, 북한은 세계 54위다. 우리나라가 북한보다 순위가 앞선데,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대한민국의 인구가 북한보다 2배였다. 1972년을 보면 우리나라가 2,700만, 북한이 1,300만으로, 이 시기에 국내총생산에서 북한을 앞선 것은 인구빨의 영향이 크다. 이때 성공적인 경제 성장을 이룬 북한은 70~80년대를 거치며 경제가 침체기에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냉전이 종식되기 전까지 아시아에 있는 사회주의 국가 중에선 가장 부유했다. 당시 아시아 사회주의 국가 중에서 경제가 정상인 나라가 없긴하다… 다만 그 이후에 '계획경제 특유의 비효율성'에 '국방/경제 병진 노선'을 택하면서 군사비 부담으로 주저앉게 된다. 물론 북한은 소련과 중국에서 받은 '막대한 원조'도 한몫했다. 실제 계획경제 특유의 비효율성이 부각되기 시작하고 소련 동유럽의 원조가 줄어들기 시작한 1960년대 말부터 독립채산제 등 경제개혁에 관한 논의가 북한 내에서 있었으나 곧바로 김일성의 확고한 1인숭배체제가 확립되면서 그냥 묻혔다. 결국 1980년대의 대삽질 소련 해체의 영향으로 경제가 붕괴되면서, 북한의 경제 정책도 실패로 돌아간다.

크게 농업집단화와 토법고로로 나누어지며, 함께 진행된 제사해운동도 워낙 영향이 커서 대약진 운동을 설명할 때 들어간다. 이외에 여러 가지 정책이 있었다. 이 당시에 각 기업소에서 목표달성을 위해 야근을 시키는 경우가 많았고, 1일 10시간, 주 60시간 근무가 보편적이었기 때문에 중국정부 수립 이래로 가장 노동환경이 안 좋았을 때였기도 했다.

4.1. 농업집단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고 나서, 마오쩌둥은 전국민의 0.1~0.3%를 제거하는 가혹한 숙청을 통해 전국을 장악하고 자신이 원하던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1949~1953년에 5억 5천만 중국 인구 중 화중과 화남에서 죽은 중국인 마오쩌둥이 인정한 수치도 71만에 따르고, 중국공산당 내부에선 200만명 설까지도 나왔다. 여기에 화북, 만주를 합치면 최대 400만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개별문서가 있는 대숙청 때 희생자가 최대 150만 명이니, 그만큼 많은 인민이 죽은 것이다.

부농과 중농에 대한 무차별적 공격, 수익을 올리는 것 자체에 대한 적개심, 농민들의 전통적인 부수입인 여러 가내수공업들이 중국공산당의 손에 철저히 파괴되었다. 참고로 윌리엄 스키너가 Late Imperial China 저널에 제시한 후기 청나라의 경제 구조는, 이미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가 해안방어하겠다고 깨뜨린 지 오래였다. 그래서 중공이 전통적 중국 농업경제구조를 무시했다는 말은 처음부터 말이 안 된다. 청대 이미 없어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중국의 둥베이 지방은 지주세력인 리안챤(糧殘)이 미방(정미소)과 유방[10]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지주를 축출하면서 동시에 경제적 순환구조가 무너졌다.

그 결과, 이미 공산당이 장악한 첫 몇 년 동안 중국 전체의 생산량은 국민당 시절보다 30% 이상 감소한 상태였다.

마오쩌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 소련식 집단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인민공사, 영어로는 commune(코뮌)을 설립해서 협동농장으로 개편했다. 소련의 예에서 보듯이 이는 농업생산량을 극도로 떨어뜨리는 조치였다.

공산당은 인구 이동을 법적으로 금했고, 자택에 재산을 쌓아두거나 음식을 저장하는 것은 반동분자의 행위로 몰아 강력하게 처벌했다. 기존 식당과 객잔은 물론이고 사원, 도관 같은 곳도 모두 폐쇄시켜버린 다음 공용급식소로 개편했고, 일반 가정집들도 공산당원이 집집마다 방문해서 곡식과 소금, 조미료, 솥과 그릇, 심지어 수저까지 모두 수거해갔다. 모든 인민들은 일체의 개인 취사를 금지당했으며, 이를 어길 시에는 엄한 벌을 받았다. 식사는 오직 공용급식소에서만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일을 한 이유는 "농민이든 공장에 다니는 공민이든 간에 자신이 해야 하는 일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것과, "개인 취사를 하면 잉여 식량을 비축하게 되고, 이는 곧 계급이 된다"고 보는 공산주의 원칙 때문이었다.

공영급식소 제도는 남한에서는 생소하지만 당시 공산권 국가에서는 널리 통용된 개념이었다. 즉, 구내식당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규모로 체계를 갖추어 운영한 것으로, 단순히 공산주의 사상에 경도되어 도입된 것은 아니다. 공산국가에서는 '전 인민은 각자 정해진 노동을 수행할 때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발전할 수 있었다'고 믿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각자의 노동에 집중하기 위한 기반시설 확충에 신경을 썼다. 그래서 공산권 국가들은 소련을 중심으로 육아를 도와주는 공공 탁아소 임신 출산 여성을 위한 육아휴직, 세탁물을 세탁하고 배달해주는 서비스까지 도입되었으며, 이는 같은 시대의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훨씬 선진적인 것이었다. 공영급식소 역시 이 일환으로 생긴 것인데, 부부라고 해도 각자의 직장에서 일하는 것이 기본적인 사회에서 취사를 개인 가구에게만 맡겨버리면 여자에게 가해지는 노동 부담이 더 커지게 되므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도입된 것이다. 실제로 공산권 국가는 남녀평등을 동시대의 자본주의 국가보다 훨씬 일찍 달성했다.[11]

이러한 사회적인 이유를 빼더라도 도시락을 매일같이 따로 챙겨가서 먹는 것은 귀찮은 일이기도 하거니와, 개별적으로 밥을 사먹는 것은 금전적인 지출을 해야하기 때문에, 직장인들에게 공용급식소에서 밥을 먹게한 것이 맛은 둘째치더라도 금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많은 도움이 되기는 했다. 이외에도 당시 도시 지역에서는 가정용 아파트가 아닌 부엌과 거실을 공유하는 단칸방에서 주거하는 경우가 많아서 개별취사가 어렵기도 했고, 국가의 요구가 결합된 점도 있다. 소련에서 가정용 아파트는 1950년대 중후반이 되어서야 대중화가 시작되었다. 그 이전에는 도시민은 공용 아파트인 코무날카에서 사는 경우가 대다수였고, 전쟁 와중에 많은 주거지가 파괴되어 천막이나 지하실, 바라크 같은 막사형 주거 시설에서 사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이러한 공영급식소 제도는 대부분의 공산권 국가에서는 제대로 시행되었고, 많은 호평을 받았다. 소련에서 직장인들이 공영급식소에서 식사하는 것은 일상이 되었고, 폴란드의 바르 믈레츠니(Bar Mleczny)처럼 공용급식소가 아예 주된 외식장소가 된 경우도 있었다. 믈레츠니는 공산 폴란드 시절 전국에 설치된 일종의 공공식당으로 공산정권 붕괴 이후에도 존속하고 있어, 돈 없고 시간 없는 서민들과 외국인 배낭여행자들의 좋은 외식 장소로 기능하고 있다. 각 바르 믈레츠니는 다른 이름의 간판을 걸고 장사하고 있는데, 2017년 바르샤바 기준 간단한 2코스 런치를 저렴한 가격인 7-10즈워티(한화 2~3천 원가량)로 해결할 수 있다. 다만 카드 결제가 되지 않는 곳이 많다. 또한 의외지만 북한도 공영급식소를 운영했고, 식량난으로 국가 전체를 말아먹기 전까지는 제대로 운영했다. 북한은 밥공장이라 하여 양권(배급권)을 가지고 밥공장에 가면 정해진 분량만큼의 을 제공했다. 보통 퇴근길의 여성이 밥공장에서 밥을 타다가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먹는 모습이었고, 반찬은 각 가정별로 알아서 해먹었다고 한다. 즉, 밥만 따로 테이크 아웃을 하는 셈이다. 다만 반찬공장이 아주 없지는 않아서 간단한 염장 생선(주로 명태) 따위를 양권에 따라 지급하는 곳도 있었다고 한다(주로 평양시 김책시 같은 큰 도시).[12]

이처럼 다른 공산국가에서는 공영급식소를 각 나라의 사정에 맞게 개량하여 사람들의 생활에 편의를 주고, 사회 전체의 효율성 향상을 위해 도입했다면, 중국은 제도 그 자체에만 몰입하여 너무 무계획적으로 시행해버렸다. 그 어떤 나라도 공영급식소를 운영하면서 개인 취사를 금지하지는 않았는데, 중국은 개인 취사 자체를 금지해버린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당시 공산권 국가들 중 최강 대국인 소련마저도 삼시세끼를 무조건 급식소에서 먹으라고 강요하지는 않았는데, 소련의 급식 시스템을 도입하겠다고 강요만 하고 정작 중요한 제도 구축이나 인프라 확충이 되지 않은 채 무리하게 밀어붙이기만 하니, 엉망이 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13][14]

공용급식소의 운영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첫째, 모든 인민들은 자신의 노동에 의한 대가로 밥을 먹는 것이라 음식이 전면 무상이었는데,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양을 먹든 제재할 방법이 없었다. 둘째로 인원 관리 또한 허술했는데, 공용 급식소만 돌아다니며 몇 끼씩 식사를 해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셋째, 공용급식소의 관리인과 공산당원도 자신의 음식과 식재료를 쓰는 게 아니라서 열정적으로 이런 문제점들을 통제하지 않았다. 넷째로 작게는 마을 1개, 크게는 도시 하나의 인구가 모두 집단 식사를 해야한다는 점에서 오는 태생적인 한계가 있었다.
"천 가구가 사는 부락에서 한꺼번에 밥을 지어 먹으려면 솥과 부뚜막이 천 개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부뚜막 천 개가 한 번에 들어갈 곳이 없으니 결국 판소(급식소)를 가호로 나눠야만 했다. 이것이 개인 취사와 다른 게 무언가?"
『易歷求林地區燒給䛩言』, 2003, 吳正龍
물론 처음에는 제법 괜찮은 식사가 이어지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메뉴가 조악한 죽과 빵 등으로 통일되었다. 인간을 노동하는 기계, 식사를 기계에 넣는 연료로만 생각하고 마치 공장을 배치하듯 앞뒤 없는 계획을 짠 탓에, 결국 수억 명이 넘는 백성들의 삶의 질이 완전히 망가지게 된 것이었다. 넓은 중국 대륙에서 각 지역의 경제적 형편이나 환경의 차이, 사회문화적 특징, 기반시설과 제도의 차이 등을 세심하게 고려하지 않은 결과, 이 정책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국가의 시스템이 완전히 역변했기 때문에 완전히 농업 생산량에 맞춰 인구를 재배치하고, 잉여 농산물을 저축, 보관해서 미래를 대비하는 것도 불가능해져, 결과적으로는 재앙을 계속해서 키워버리는 꼴이 되었다. 이후 공용급식소가 완전히 망해버리자, 어쩔 수 없이 중국공산당도 공동식사가 '당군 관계의 악성종양'이 되었다고 인정하면서 예전처럼 개인 취식으로 선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초토화된 개인 가정의 식재료는 둘째치더라도, 정부가 거둬간 솥과 식기 도구도 돌려받지 못해서, 밥을 지어먹으려면 당장 솥부터 구해야 할 형편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묘사는 위화의 장편소설 『 허삼관 매혈기』에서도 잘 묘사되어 있다.
"오늘 거리를 걷다가 붉은 완장을 찬 사람들이 집집마다 들락날락하며 솥과 밥그릇, 쌀, 간장, 식초, 소금까지 가져가는 걸 봤다구. 이틀이나 갈까 싶었는데, 우리 집에도 와서 싹 가져가버렸어. 그러면서 하는 말이, 앞으로는 어느 집이든 밥을 할 수 없다는 거야. 전부 식당에 가서 밥을 먹어야 한다더군. 우선 우리 생사공장에 하나, 천령사에 하나. 그 절간이 식당으로 바뀌었다구. 들이 전부 머리에 흰 모자를 쓰고 앞치마를 두른 주방장이 됐어. 또 하나 우리 집 앞에 있는 극장도 식당으로 바뀌었지. 극장 식당에서는 어디서 밥을 하는지 알아? 바로 무대에서 한다구. 월극에서 처녀 총각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전부 채소를 씻고 쌀을 일고 한다더군."
"생각 좀 해보라구. 솥하고 밥그릇, 쌀, 소금, 간장, 기름, 식초까지 가져간 데다 부뚜막까지 부숴버렸으니. 당연히 대식당이 평생 먹여줄 줄 알았지. 1년도 못 갈 거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겠느냐구. 1년 만에 다시 알아서 밥을 해 먹으라니. 부뚜막 고치는 데도 돈이 들고 솥이랑 밥그릇, 심지어 접시랑 국자도 다시 사야 하는 데다, 쌀, 소금, 간장, 기름, 식초까지 사려면 돈이 얼마나 들까?"

다만 공용급식소 자체는 주먹구구식으로 설립된 만큼 각 일률적인 형태로 운영된 것이 아니라 각 지역별로 따로국밥식으로 운영되었고, 그래서 한 지역 내에서도 계속해서 공용급식소가 운영된 곳이나 운영이 중단된 곳이 공존했다. "차라리 공공식당이라도 정성들여 운영했으면 굶어죽을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말도 나왔다. 공공식당이 지속적으로 운영된 곳은 식단이 부실할지언정 그래도 굶어죽지는 않았는데, 공공식당마저 폐쇄된 곳은 야생동물이나 야생나물, 나무껍질도 먹어야 될 정도로 지옥을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인구이동을 제한하는 제도는 느슨해졌을지언정 21세기가 된 이후로도 시행되고 있는데, 이촌향도 현상을 통제하기 위한 성격이 강하며, 잘사는 지역에 예산을 무한정 늘릴 수 없으니 일정수준에서 통제하겠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겸했다. 호구제(戶口制)라고 하며, 자기가 소속된 호구를 벗어나 다른 지역에 가서 일하는 사람은 여러 가지 불이익을 받는다. 대표적인 사례가 농민공. 물론 2010년대 이후로는 제조업을 중심으로 구인난이 일어나면서 농민공들도 일할 수 있다면 일하는 마인드와 거리가 멀어졌고, 중국의 인구증가세가 꺾임에 따라 도시간 인구쟁탈전이 심해져서 이 정도로 심하게 불이익을 주지는 않지만, 어차피 대도시 지역의 부동산이 너무 비싸서 강제가 아닐 뿐 여전히 정착하기 힘든 건 매한가지다.

4.2. 터무니없는 예상치 잡기

농업과 공업 생산 부문에서 터무니 없는 수치들이 세간의 이목을 다투면서, 곧 중국의 모든 사람들이 목표량 열풍에 사로잡혔다. 기록적 목표량을 달성했다는 이러한 주장들은 당 모임에서 들먹여지고 강력한 선전 기구에 의해 대대적으로 유포되면서, 최신 기록들 뒤에 있는 지도자들에게 영예를 안겼다.

중국 최초의 인민공사가 될 허난성 차야산에서는 1 헥타르(= 0.01km²)당 4.2톤의 수확 목표량이 1958년 2월 설정되었다.[출처] 6천 명의 활동가들이 봇물처럼 쏟아지는 포스터와 전단지, 구호, 현수막으로 무장한 채 시골을 돌아다니자 목표치는 한 단계, 또 한 단계 더 높아졌다. 그해 말이 되자, 1헥타르당 37.5톤이라는 완전히 허구적인 목표량이 약속되었다. 이게 어느 정도로 허구적이냐면, 세계 최고의 농업 기술을 자랑하는 21세기 미국의 밀 생산량이 헥타르당 10.5톤이다. 이것의 3배가 넘는 목표량을 인력만으로 달성하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기록들 다수가 새로운 기록을 달성하는 데 열심인 현지 당간부들이 과대 선전한 다수확 실험용 에서 달성되었다. 이 밭들은 대체로 집단 농장 중에서 단 몇 뙈기에 불과했지만, 훨씬 넓은 곳에 적용될 영농 신기술의 시연장 역할을 했다. 수확량을 증대시키려는 움직임은 비료 쟁탈전을 조장했다. 바다에서 긁어 온 해초와 쓰레기장에서 주워온 찌꺼기, 굴뚝에서 긁어낸 검댕에 이르기까지 상상 가능한 모든 종류의 양분이 논밭에 뿌려졌다.

동물과 사람의 분뇨를 밭으로 져 나르는 사람들의 행렬이 한밤중까지 끊이질 않았다. 심지어 광둥성의 일부 마을에서는 여성들이 비료에 보태기 위해 머리카락을 잘라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공동 식당 출입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토양에 양분을 공급하는 주된 방법은 진흙과 볏짚으로 지은 건물을 허무는 것이었다. 외양간처럼 동물이 살았던, 특히 가축이 방뇨한 건물의 벽은 유용한 비료를 제공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낡은 담과 폐가가 헐렸지만, 증산 운동이 탄력을 받으면서 줄줄이 늘어선 가옥들 전체가 철거되기 시작했다. 흙벽돌이 산산조각 나 들판에 흩뿌려졌다.

후베이성 다볘 산맥 남쪽의 마청에서는 비료를 모으기 위해 가옥 수천 채가 철거되었다. 1958년 1월에 이곳은 후베이성 당서기 왕런중에 의해 1헥타르당 쌀 6톤 수확을 달성한 모범 현으로 치켜세워졌다.[16] "마청에서 배우자!" 인민일보는 열광적으로 부르짖었다. 실험 경작지로 마오쩌둥의 칭찬을 받자 마청은 성지가 되었다.

그 뒤 몇 달 동안 그곳에 저우언라이와 외교부장 천이, 리샨녠을 비롯한 50만 명의 당 간부들이 방문했다. 8월이 되자 1헥타르당 쌀 277톤 수확이라는 새로운 기록이 달성되었다. 1헥타르가 10,000m²이므로 1평(3.3m²)에 쌀이 91kg이 넘게 나왔다는 소리다. 흙을 수확해도 이것보단 덜 나오겠다 선전 기구는 "기적의 시대!"라고 당당히 선언했다. 그해 말이 될 때쯤에는 마청의 건물 5만 채 이상이 파괴되었다. 중국 전역의 다른 인민공사들도 너도나도 뒤를 따랐다. 광둥성 다시현, "25톤 곡물 대학"과 "5톤 밭"으로 전국적 주목을 받은 한 인민공사에서는 당간부들이 가옥의 절반을 때려부쉈다. 다른 유기물들도 결국에는 밭으로 돌아갔다. 장쑤성의 몇몇 지역들에서는 땅이 백설탕으로 뒤덮였다.

깊이 갈기는 농민들을 토양의 변덕으로부터 해방시킬 또 다른 "혁명적" 처방이었다. "작물을 더 깊이 심을수록 뿌리가 튼튼해지고 줄기도 더 크게 자란다"는 것이, 이런 실험 뒤에 자리한 논리였다.[17] "인해전술을 이용해 모든 밭을 갈아엎어라!" 이것이 마오쩌둥의 명령이었다. 관개사업에서 자갈을 퍼 나르는 게 힘든 일이라면 50cm에서 1m 넘게 - 때로는 3m에 달했다 - 땅을 깊게 가는 것은 완전히 녹초가 되는 일이었다. 토법고로의 터무니없는 목표 생산량을 채우기 위해 멀쩡한 연장들까지 고로에 쏟아넣었는데, 생산된 철이 극심한 저질이라 연장으로 만들 수조차 없으니 남아나는 연장이 없었다. 그래서 연장이 부족한 곳에서는 농민들은 손으로 이랑을 팠고, 때로는 횃불에 의지해 밤이 새도록 땅을 갈았다. 간부들에게 들볶인 마을 주민들은, 때때로 기반암에 닿을 때까지 땅을 파고들어가 표토를 파괴하기도 했다. 1958년 9월이 되자 800만 헥타르의 땅이 대략 30cm 깊이로 갈아엎어졌지만, 지도부는 "적어도 60cm 깊이는 되어야 한다"며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강을 따라 계단식 논밭을 경작하여 비교적 번영을 누리던 사천성에서는 인민공사 곳곳에서 계단식 논의 80%가 건조한 채소 재배지로 전환되어 처참한 결과를 낳았다. 마오쩌둥의 광적인 추종자, 사천성장 리징취안으로부터 "산을 경사면이 로 뒤덮인 풍요로운 녹지대로 바꾸는 일을 도와야 한다"는 명령이 내려오면서, 농민들은 비옥한 계단식 논밭을 내버리고 몇 마일이나 떨어진 고지대로 가 돌투성이 땅을 골라야 했다. 심지어 인민공사에서 내려온 명령 중에는 수 에이커의 옥수수 밭에서 잎사귀를 뜯어내는 것도 있었는데, 어느 당 부서기가 "잎사귀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 있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4.3. 삼림 파괴

개간과 연료 및 목재 공급을 위한 삼림 파괴는, 자연 환경에 대한 무분별한 개입으로 인해 1949년 이후 악화되었다. 마오쩌둥은 자연을 극복하고 굴복시켜야 할 적, 대중 동원을 위해 개조되고 활용되어야 할 인간과는 근본적으로 분리된 존재로 보았다. 환경에 맞선 인민은 생존을 위한 끊임없는 투쟁 속에서 자연과의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의지주의적 철학은 인간 의지와 혁명 대중의 무한한 에너지가 물질 조건들을 급진적으로 변형시키고 공산주의 미래로 가는 길에 놓인 그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언덕은 밀 수 있고, 산은 평평하게 할 수 있고, 강의 물길은 들어올려질 수 있다 - 필요하다면 양동이로 퍼올려서라도. 대약진 운동을 개시하면서 마오쩌둥은 "새로운 전쟁이 개시되고 있다. 우리는 자연에 공격을 개시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대약진운동은 을 대량으로 제거했다. 철강증산운동이 조직적으로 전개되는 가운데, 곳곳에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토법고로에는 계속 불을 때야 했고 농민들은 숲으로 흩어져 연료로 쓸 나무를 벴다. 일찌기 후난성 이장현의 은 푸르른 원시림으로 덮여 있었다. 엄청난 벌목이 뒤따라서, 농민들은 토법고로에 불을 때기 위해 숲의 나무 2/3을 쓰러뜨렸다. 1959년이 되자 민둥산만이 남았다. 창사 서쪽 안화에서는 숲 전체가 광활한 진흙 벌판이 되었다. 윈난성부터 쓰촨성까지 도로를 따라 오래된 울창한 숲을 자동차로 통과하면서 소련의 토양 보존 전문가들과 임업학자들은 나무들을 마구잡이로 베어 산사태가 유발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모든 숲이 짓밟혔고, 때로는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비록 벌거벗은 시골 풍광을 푸르게 바꾸려는 캠페인이 시시 때때로 펼쳐졌지만, 광범위한 기근과 부실한 계획, 더 일반적인 권위의 붕괴가 합쳐져 녹화 시도는 좌절되었다. 막 심은 나무들은 곧장 사라졌다. 일례로 1959년에 베이징은 사람들을 보내 십삼릉수공고에 2만 6천 헥타르의 보호수들을 심게 했다. 그러나 현지 인민공사가 불과 반 년 만에 그 보호수의 절반 이상을 베었다.

베이징 바깥에서는 재녹화 사업과 묘목 심기 프로젝트의 1/3에서 4/5가 실패했다. 헤이룽장성에서는 새롭게 방풍림으로 심어진 전체 묘목의 1/3이 관리 부실로 죽었다. 후베이성에서는 어청에 있는 댐 제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심은 나무 약 1만 5천 그루가 땅에 심자마자 바로 불법 벌채를 당했다. 결국 나무를 다시 심었지만 작업을 너무 건성으로 해서, 이번에는 나무들의 대부분이 옆으로 쓰러지거나 말라서 죽었다.

대기근 동안 사라진 삼림 면적이 어느 정도인지는 추산하기 어렵다. 랴오닝성의 일부 현들에서는 방풍림의 최대 70%까지 파괴되었다. 허난성 동부에서는 방풍림의 80%가 사라졌다. 카이펑에서는 방풍림이 아예 몽땅 없어졌고 2만 7천 헥타르의 숲이 사막에 대신 자리를 내주었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산시성까지, 중국 북서부의 광활한 평원 전역에서 전체 수목의 1/5가 베어졌다. 후난성에서는 숲의 절반이 벌채되었고, 광둥성에서는 1/3에 약간 못 미치는 나무가 사라졌다. 비록 과도한 추정치일지도 모르지만, 대기근의 전문가 위시광은 삼림 면적의 80%가 연기로 사라졌다고 주장한다.

4.4. 토법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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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작은 뒤뜰 용광로에서 이렇게 많은 을 생산할 수 있는데, 왜 외국인들은 거대한 제련소를 건설하지? 참으로 한심하군!"
엄청난 양의 똥철이 만들어진 것을 보고 흡족해한 마오쩌둥이 수행원에게 한 말.[18]

마오쩌둥은 "집마다 뒤뜰에 토법고로를 지어서 대규모의 용광로 없이도 강철 생산량을 늘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각 지역마다 증산 경쟁이 벌어졌고, 지방에서는 허위보고와 임시변통, 예를 들면 멀쩡한 물건을 녹여 고철로 만든, 엉터리 생산량을 중앙에 보고했다.

뿐만 아니라 토법고로에 쓸 연료를 구한답시고, 주변 삼림을 모두 벌목해 버렸으나 정작 만든 건 기술부족으로 인한 조악한 품질의, 우리들이 소위 이야기하는 똥철이었다. 덕분에 농기구들은 모두 잡철이 되었고, 이는 다시 농업생산량을 반감시켰다. 당연히 이런 똥철은 철강 등 유용한 재료로 사용할 수 없으며, 제대로 사용하려면 다시 녹여서 불순물을 제거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연료비와 시설 투자가 필요할 뿐더러, 이렇게 해도 애초에 제대로 철강을 생산한 것보다 품질이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작하는 사람들이 대장간이나 철 같은 것을 한 번도 생산해 본 적이 없는 농민들이다. 일반적인 시선과 달리 고대 대장간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기술이 필요하며 제철소에서 일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지식과 기술이 요구된다. 그리스 신화 헤파이스토스가 절름발이인 것은, 당시 사람들이 고급 인력인 대장장이가 도망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일부러 불구로 만들던 것을 반영했다는 말이 있다. 이러니 생전 철이라고는 완성된 농기구 외에는 만져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철을 제대로 만들래야 만들 수가 없었다.[19]

일단 단기적으로 이러한 제철작업으로 철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기에 수치상으로는 성공을 하는듯 보였지만 어디까지나 수치상이었고, 그 철들이 중공업과 소비재 생산에 울며겨자먹기 식으로 투입되기 시작하자 질 낮은 불량품들이 대거 양산되기 시작했다.

불량 철들은 일상의 물건들을 위험천만할 정도로 약화시켰고, 질 낮은 소비재는 중국 사회주의 문화의 표상이 되었다. 상하이에서는 시계가 아무 때나 알람 소리를 울렸고, 금속 대야는 표면에 금이 간 채로 팔렸으며, 우한시에서는 지퍼가 걸리고 부엌칼이 휘어지며 농기구의 날이 자루째 뚝뚝 부러져 버렸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불량품이라는 개념 자체를 비웃고 부정했다.
반품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누군가가 거부한 것이, 또 다른 사람에게는 이득이다.

설상가상으로 이런 똥철에도 보여주기식 생산량 경쟁이 붙어서,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일단 멀쩡한 강철 농기구와 도구[20]를 녹여서 똥철로 만드는 원인과 결과가 뒤바뀐 아스트랄한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거기에 토법고로에 쓸 연료를 구하기 위해 주변 삼림을 모두 벌목해버려서, 대규모 홍수 산사태까지 일어난 것은 덤이다.

4.5. 제사해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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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새는 해로운 새[害鳥]다.
마오쩌둥, 1955년 농촌 현지지도 중 지나가던 참새를 가리키면서.

사해란 참새, , 모기, 파리를 뜻하는데, 대약진운동과는 별개로 " 제사해 운동"이 실시되어 전반적인 위생개선운동을 벌였다. 문제는 위생과 별로 상관없는 참새를 대대적으로 사냥하는 개판을 벌였으니… 거기에다가 참새는 원래 병해충들을 먹이로 사냥하기 때문에, 여름에는 병해충이 들끓게 되었다.

소련에서 파견된 전문가 미하일 플로치코는, 베이징에서 참새 박멸 캠페인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목격담을 남겼다. 그는 자신이 머무는 호텔 옆 건물의 지붕 위에서 왔다갔다하는 어느 여성이 내지르는 비명같은 끔찍한 소리에 아침 일찍 잠에서 깼다. 여성이 대나무 장대에 묶은 넓은 천을 미친듯 펄럭이자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호텔 직원들은 물론 중국 정부 공식 통역관까지, 사흘 동안 호텔 전체가 참새 박멸 캠페인에 동원되었다. 아이들은 새총을 들고 나와 날개가 달린 것이면 뭐든지 닥치는 대로 쏴댔다.

사람들이 지붕이나 장대, 사다리에서 떨어지는 사고가 속출했다. 난징에서는 리하오둥이 참새 둥지에 접근하기 위해 학교 건물 지붕에 올랐다가 넘어져서 3층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새를 쫓아내기 위해 정신없이 천을 펄럭거리던 현지 당간부 허더린은 지붕 꼭대기에서 발을 헛디뎌 추락하는 바람에 등이 부러졌다. 새를 잡기 위해 사용된 총들도 사고를 불러왔다. 난징에서만 화약이 고작 이틀 사이에 330kg나 소모되었을 정도이니, 캠페인의 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참새뿐만 아니라 깃털이 달린 생물이라면 무조건 총이 겨누어졌기에, 진정한 희생자는 바로 환경이었다. 피해 정도는 무차별적인 농약 사용으로 더더욱 악화되었다.

난징에서는 참새잡이 미끼가 토끼, , , 오리, , 비둘기들을 죽였고, 그 중 일부는 대량으로 살상되었다. 또한 호랑이등 각종 맹수들 역시 제사해 운동의 피해자들로 대약진운동의 하나인 삼림파괴, 그리고 제사해운동의 영향으로 남획되면서 생태계 균형도 파괴되기 시작하였으며 그 결과로 멧돼지등 유해조수가 번성하게 되었다.

그렇게 참새를 제외한 나머지는 구제에 실패했다. 쥐, 모기, 파리는 전멸을 피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번성하게 된다. 결국 대기근으로 3천만명이 넘게 죽고 나서야 참새를 바퀴벌레로 바꿨다.

4.5.1. 살충제 남용

가축/농지/수산물에 대한 살충제 및 살균제의 악영향에 대해서는 널리 잘 알려져 있지만, 대기근 시기에 화학 물질에 의한 중독은 농장을 뛰어넘어 널리 퍼져 나가면서 상상도 못했던 곳에 활용되기도 했다. 식량이 절실한 인민공사들이 물고기와 새, 동물을 잡기 위해 농약을 사용했던 것이다.

후베이성에서는 흔히 1605가루, 1059가루로 불렸던 시스톡스와 데메톤 같은 살충제와 더불어 3911로 알려진 고독성 농약을 오리를 잡기 위해 일부러 뿌려댔고, 그렇게 잡은 오리는 도시에 내다 팔았다. 데메톤은 대기 중 노출만으로도 두통 및 메스꺼움으로 시작해 근육 기능 손상과 죽음까지 이어질 수 있는 독성 강한 농약으로, 2010년 한국 농촌진흥청에서 농업 용도로도 사용이 금지된 바 있다. 사커우에서만 수십 명의 소비자들이 중독되었고, 그 중 여러 명이 오염된 오리를 먹은 탓에 사망했다. 굶주린 농민들은 또한 식량을 구하러 다니면서 야생동물을 잡기 위해 연못과 호수에 화학물질을 풀었다. 일부 지역들에서는 물이 초록색으로 변하면서 동물과 사람을 모두 몰살시켰다.

1958년 이후 충해가 확산되어 상당한 비율의 작물들을 망쳤다. 메뚜기 떼가 우글거리며 담요처럼 하늘을 뒤덮고 작물을 먹어 치우면서, 피해는 수확 전에 가장 커졌다. 후베이성은 벼 수확량의 15%이상을 게걸스런 메뚜기떼에게 잃었다. 참새와의 격전을 치른 난징 일대에서는 모든 논밭의 약 60%가 1960년에 충해를 입어 심각한 채소 부족을 겪었다. 저장성은 50~75만 톤의 곡물, 즉 총 수확량의 10%를 1960년에 솔나방, 풀멸구, 솜벌레, 잎진드기들에게 잃었다.

방제 조치는 살충제의 심각한 부족으로 방해를 받았다. 1960년에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했던 농약은, 1958~59년에 이미 자연에 대한 공격으로 허비되었던 것이다. 참새가 사라지고 살충제는 오남용된 후, 농부들이 가까스로 재배한 얼마 안 되는 작물에 급증한 곤충들이 몰려드는 것을 막을 수단은 없었다.

4.6. 심경밀식

"작물은 다른 동무와 함께 잘 자라며, 함께 성장하면서 더 편안할 것이다."
빽빽하게 심기를 장려하는 마오쩌둥의 발언.

, 즉 땅을 깊게 갈고 모를 빽빽하게 심는다는 파종법으로, 에다 아주 빽빽하게 심는 방식이다. 이는 Caltech에서 항공공학과 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Caltech 교수를 역임한 첸쉐썬 박사의 아이디어였다.

문제는 농업분야에서는 문외한인 첸쉐썬 박사가 내놓은 이 계산은, 전혀 농학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첸쉐썬 박사가 제시한 모와 모의 간격은 10 × 15 cm이다.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부연설명을 곁들이면, 모와 모의 간격은 최소한 12 × 20 cm은 유지해줘야 한다. 이것도 계단식 에서나 어쩔 수 없이 쓰는 최소한의 간격이다. 그 이하로 간격을 좁혀 심으면, 와 벼끼리 생장을 방해하고, 벌레가 숨을 곳이 많아져 병충해가 발생하기 쉬운 조건이 된다.

그리고 수확도 크게 줄어드는데, 생장을 방해하는 가까운 보다 더 크게 자라기 위해 낟알을 줄이고 잎을 늘려 광합성을 하는 것이다. 결국 모 20개 심어서 나올 수확보다 정상적으로 모 10개 심어 나오는 수확이 더 많게 된다. 모를 억지로 빽빽하게 많이 심은 결과 도리어 정상적으로 심었을 때보다 수확량이 줄어드는 역효과가 발생한 것이다. 쓸모라곤 쥐뿔도 없는 볏짚 생산량만 감당 불가 수준으로 늘어나버리는 것과, 그 얼마 안 되는 마저 생장을 방해받은 영향으로 기존 파종법으로 심은 똑같은 품종의 쌀보다 맛이나 영양가 면에서 떨어지는 것은 덤. 당연하게도 생산성 하락 등의 농업 재앙의 조짐을 보였다.

종합적으로 보면 한계 이상으로 지나치게 빽빽하게 심으면 태양광이 제대로 비치는 범위가 극단적으로 줄어들어서, 햇빛을 덜 쬐는 상태가 지속됨과 동시에 땅의 한정된 영양분을 두고 서로 경쟁하는 과정에서 성장이 크게 저해되기 쉽다. 설령 영양이 충분하더라도 공간 부족 때문에 잡초 제거 같은 노동이 힘들어지며, 병충해에 심각할 정도로 취약해진다. 즉, 어느 정도 이득은 있긴 하지만 이득에 비해 리스크가 심각할 정도로 크기에 효율적이라고 보기 어려운 위험한 농법이었다.

첸 박사는 생산량 증분을 과학적으로 증명해서 마오쩌둥에게 보고서를 냈고, 이를 본 마오쩌둥이 "신묘한 계책"이라고 하면서 실험도 안 해 보고 전국적으로 실시했다. 마오쩌둥은 농업으로 자수성가한 진짜배기 농민이었던 아버지 마오이창과 달리, 그 마오이창의 피땀어린 노력으로 풍족해진 환경 속에서 태어나 특별한 고생 없이 자랐던지라 수박 겉핥기 수준으로만 농업을 알고 있을 뿐 제대로 된 농업 지식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아마 마오이창은 이 한심한 작태를 보면서 괴로워했을 것이다. 작물 농사는 대성공이었지만 대신 자식농사는 대실패

4.7. 억지로 휴경지 만들기

빽빽히 심고 깊이 갈기(심경밀식)보다 더한 재앙은, "덜 재배하라"는 명령이었다. 마오쩌둥은 "농촌이 엄청난 곡물의 무게에 짓눌려 허덕이고 있다"고 확신하여, 농지의 1/3을 휴경할 것을 제안했다.
"중국의 인민은 평균 3무(600 ㎡)를 경작하지만, 내 생각에는 2무면 충분하다."

도시로 향하는 농민들의 대이동과 결합하여 경작 중인 농지 전체 면적은 급감했다. 후난성에서는 1958년 약 578만 헥타르에서 곡물이 경작되었으나 1962년에 이르자 15%감소하여 492만 헥타르에 머물렀다. 저장성에서는 6만 5천 헥타르의 농지가 매년 사라져서 1961년에 이르자 전체 농지 면적의 10%가 감소했다. 이러한 평균 감소 면적은 지역적 차이가 크다. 예를 들어 우한시 지역에서는 3만 7천 헥타르의 농지 가운데 절반만이 경작되었다. 농업 부문을 관장한 탄전린은 1959년에 대략 730만 헥타르가 휴한지였다고 언급했다. 베이징 시장 펑전은 1961년 초에 발언하면서 경작 중인 면적은 총 1억 700만 헥타르라고 추정했다. 펑전의 말이 사실이라면, 1958년 이후 단 3년만에 2,300만 헥타르, 즉 23만 km²로 한반도의 1.1배의 농지가 버려졌다는 뜻이다.(마오의 대기근:중국 참극의 역사 1958~1962, 프랑크 디쾨터.)

4.8. 가축 폐사

가축폐사의 일부는 축산 방식의 혁신으로 야기되었다. 심경밀식( 빽빽히 심기)처럼 새로운 축산 기법이 중국이 경쟁국들을 앞지를 수 있게 해주리라 여겨졌다.

돼지의 체중을 늘리기 위해 온갖 실험이 이뤄졌는데, 그 중 일부는 트로핌 리센코의 사이비 유사과학 이론에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중공 고위 지도자들은 가축의 잡종 교배를 구상했다. 저장성 당서기 장화는 현장에 <적극적으로 자연을 형성>하는 조치를 요구했다. 그는 "암퇘지와 숫소의 이종교배가 더 무거운 새끼돼지를 낳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작 리센코는 1958년에 대약진운동에 대해 공공연히 경멸을 표해 베이징 공산당 지도부의 심기를 크게 건드린 바 있었다.

불가능한 육류생산 할당량을 채우려고 열심인 현지 간부들도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심지어 15kg에 불과한 것들도 인공수정시켰다.(다 자라고 건강한 돼지는 100~120kg가 나가야 한다.) 그 결과 무수한 가축들이 불구가 되었다.

4.9. 치수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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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 공포정치와 학살

" 진시황은 우리에게 크게 못 미친다. 지금 우리는 진시황 10명처럼 행동해왔다. 단언컨대 우리는 진시황보다 더 강하다. 진시황은 460명을 생매장했지만 그 100배나 되는 우리는 4만 6천 명을 죽여서 묻어버렸다." 실제로는 1,000배 더 곱해서 4,600만명을 매장했다.[21]
- 마오쩌둥
국무원 비서국이 편집한 발행물에서 지적했듯이, 산둥성 머우핑에서는 현지 간부들이 땅에 비료를 주는 데 시신을 이용했다. "그들은 완전히 썩지 않은 시신 몇 구를 밭에 집어던졌다."

이것은 결코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었다. 산시성 군사단 정치위원에게 보내는 보고서에서 당원 허우시샹은 " 후난성 펑현의 고향 마을에 돌아갔을 때, 무수한 관들이 파헤쳐져 집 앞 들판에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고 설명했다. 관 뚜껑들이 비스듬히 열려 있었고, 유해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며칠 뒤 비내리는 오후에, 그는 현지 부서기 집의 굴뚝에서 솟아오르는 연기를 보았다. 집 안에 들어가 보니, 커다란 4개의 솥단지에서 비료로 사용될 시신들이 삶기고 있었다. 밭에 시체 삶은 물을 골고루 뿌리기 위해서였다.

(중략) 현지 사법당국과 충돌하여 살해당한 혈육을 묻어 주려고 한 가족들은 처벌을 받았다. 어느 70세 노파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목을 매자, 노파의 딸이 들에서 허겁지겁 집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현지 간부는 규율 위반에 격노해, 딸을 쫓아가 머리를 후려치고 그녀가 쓰러지자 상체를 걷어찼다. 그녀는 평생 불구가 되었다. 간부는 어머니의 시신을 앞에 둔 딸에게 "먹어도 좋다"라고 비웃었고, 시신은 며칠 동안 방치되어 썩어갔다.

그러나 최악의 시신 모독은 시신을 조각조각 내 비료로 쓰는 것이었다. 그의 아이가 누에콩을 한 줌 훔쳤다고 맞아죽은 덩다밍이 그런 일을 당했다. 당서기 단니밍은 아이의 시신을 호박밭에 뿌릴 테니 비료 속에 넣고 삶으라고 지시했다.
마오의 대기근:중국 참극의 역사 1958~1962, 프랑크 디쾨터

중간간부나 하위관료들은 지도부가 닦달하니 목표달성을 위해 각종 무리수를 두었고, 결국 대약진의 대열에서 낙오하는 사람들을 고문하고 학대하거나 죽이는 사건들이 중국 상당수 지역에서 벌어졌다. 이런 낙오자들의 대열엔 노인, 임산부, 어린이, 병자들이 있었다. 초등학생들이나 잘 걷지도 못하는 노인들까지 모조리 일터로 끌고 가서 일을 못하거나 불평하면 때려죽였다. 가족들에게 때려죽이게 하거나, 아버지에게 아들을 생매장하거나 우물에 던져 죽일 것을 지시하는 막장 상황들이, 지방 당 문서고에 수도 없이 남아 있다. 심지어 부모에게 자식을 죽이게 하고 그 시체를 삶아 비료로 쓰라고 지시한 기록도 있다. 거동하지 못하는 임산부들에게 본보기를 보인다고 벌거벗겨서 빙판으로 내몰거나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때려죽이기도 했다.

정말로 일을 못할 정도로 어린 아이나 나이 든 노인들은 보육원 양로원에 보내졌는데, 부패한 지방 관료와 당 간부들이 이들을 위한 재원을 거의 다 가로챘기 때문에, 국가의 양육시설들은 사형 집행장에 가까웠다. 지방 당 간부들 입장에선 이런 살육에 동참하지 않으면 자신들이 죽을 판이니, 그들도 경쟁적으로 사람을 때리고 죽이는 일에 합류했다. 결과적으로 100만명이 사망했던 1960년의 신양 사태에서 공산당이 때려죽인 인민의 숫자만 7만 명에 달했다. 이 신양 사태 자체도, 신양에서의 식량 공출량을 정부에서 줄여줬으면 100만명까진 죽지 않을 사태였다. 하지만 마오쩌둥의 가오를 위해서 중국공산당은 가차없이 신양의 곡물을 수탈했다. 그 결과 식인이 만연하고, 주민 중 최고령자가 40대 초반이고 최연소자는 7살인 개막장 상황이 신양에서 벌어지고 만다.

1961년 저우언라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60년 후난성의 86개 현 중 82개 현에서 간부들이 주민들을 때려죽였고, 후난성 전체의 사망자의 10%가 맞아죽은 수치였다. 대약진운동이 끝난 후에 후난성의 노인 인구는 양로원 7개에 수용된 1,058명에 불과했다. 충격적인 점은, 이게 그나마 제일 덜 폭력적인 경우라는 것이다.

5. 결과 : 삼년대기근

"2년 뒤에는 당신도 굶어죽을 것이오."
1961년 4월, 허베이성 우안현 보옌촌에 시찰 온 저우언라이에게 이름없는 농민이 한 말.
"나는 40년 동안 고향을 방문한 적이 없기 때문에 정말로 한번 와 보고 싶었습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들의 삶이 얼마나 참혹한지 보았습니다. 우리가 일을 잘하지 못한 탓입니다. 여러분의 용서를 구합니다."
1961년 4월 1일, 고향 마을을 방문한 류사오치의 발언.
"어느날 가마에 물을 끓이면서 면 1근을 넣으라고 했습니다. (아내: 면 1근만 딱 남아있었어요.) 당시 공산당 간부가 지도를 왔는데, 같이 밥을 먹으려 하니 "오늘 이걸 먹어버리면 내일은 먹을 게 없잖습니까? 저는 먹지 않겠습니다. 저는 그냥 물에 소금만 뿌려주세요." 하고 소금 끓인 물만 먹고 갔습니다. 공산당 간부가 이런 수준이었다면, 일반 백성은 더 말할 것도 없죠. (아내: 다들 같은 사정이었죠.) 백성들은 그만큼 먹을 게 없었습니다. 면 1근도 없었던거죠."
한 중국 노인이 한국 다큐멘터리 제작진과의 인터뷰에서 그때를 회상하며 한 말. 이 영상 15분 38초부터
1960~1961년[22]에는 홍수 가뭄 같은 자연 재해까지 발생했는데, 이는 토법고로를 만들기 위해 나무를 캐서 숲을 모두 민둥산으로 만든 탓에 생태계 순환 시스템 자체가 무너진 결과였다. 이 자연재해는 단순히 운이 나빴던 것이 아니라, 삽질에 삽질을 거듭한 결과이다. 당연히 사태가 이런 개판인데 인민들이 개나 돼지도 아니고 앉아서 죽었을 리가 없다. 베이징으로 몰려가 집단으로 진정서를 내고, 숨겨둔 편지를 중앙에서 내려온 조사단에게 제출하거나, 무기를 들고 학정을 일삼는 간부들을 죽이고 징발에 저항하거나, 식량창고를 습격하는 등, 저항이 이어졌다. 하지만 조직적인 저항이 아니라 대부분 식량창고의 식량을 얻기 위한 민란 수준의 저항이라서, 손쉽게 진압되었다. 디쾨터는 "당시 중국 인민들에게는 저항할 생물학적인 여력 자체가 없었던 상황"이라 평가한다.

결국 대약진 운동으로 인하여 발생한 여러 문제점들이 근대사 이래 역사적인 대기근을 발생시켜 무려 3,000~5,000만명이 아사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대기근은 1959~1961년 3년간 발생했는데, 이를 중국에서는 '삼년대기근'으로 부른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인한 삼년대기근의 사망자는 히틀러가 학살 유대인의 수와 제2차 세계 대전 전선에서 죽은 사람들의 수와 맞먹는다. 아돌프 히틀러가 학살한 유대인 600만 명을 포함한 집시, 장애인 등 나치 인종 말살 정책의 총 사망자 수가 1,100만~1,700만 명 정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럽의 동서부전선에서의 사망자가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최소 3,000에서 최대 4,000만 명 중반 정도로 추산되는데, 거의 그 정도의 합계만큼을 전쟁도 안 하고 오로지 아사만으로 죽게 만든 셈이다. 게다가 앞의 사례들은 각각 학살 정책과 전쟁이라는 필연적으로 대규모 사망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경우지만, 대약진운동은 엄연히 국가 경제 성장이 목적이었음에도 그로 인한 인명피해 규모가 앞의 사례들과 맞먹는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이 더 부각된다.[23]

초기에는 미국의 가장 반공적인 학자들조차도 최대 200만 명선으로 추측했으나, 1980년 후야오방은 유고슬라비아 언론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최소한 2,000만 명이 죽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중국 언론에 이 발언은 실리지 못했고, 중국은 "1,700만명 정도가 사망했다"고 공포했다. 이 1,700만 사망설은 오늘날까지도 중국 정부의 공식 입장인데, 어디까지나 수학적으로 1959~1961년 사이에 줄어든 인구를 합산한 결과이다. 그런데 당시 마오쩌둥의 강압적인 피임 금지 정책으로 인해서 출산율도 높았던 것을 감안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구가 줄었다는 것은 당연히 줄어든 숫자 이상의 엄청난 초과 사망자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80년대에 인구학자인 바실 애슈턴, 주니스 배니스터 등의 연구를 시작으로 대약진운동의 사망자 숫자에 대한 추측은 3,000만으로 뛰어올랐고, 이후 중국의 언론인 양지성이 <묘비>를 출판하여 3,600만 명설을 내놓았으며 <아귀>의 저자 재스퍼 베커와 홍콩대학의 프랑크 디쾨터 교수는 <마오의 대기근>에서 4,500만 명설을 주장했다. 2005년, 대약진 연구가 위시광은 5,500만명 설을 내놓았다. 중화인민공화국 공안부 내부에서는 5,000~6,000만 명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1979년 자오쯔양이 주도했던 중화인민공화국의 자체적 조사결과는 4,400~4,600만 명 수준이었다 한다. (국무원 체제개혁연구소장 천이쯔가 미국 망명 이후 내놓은 증언.) 현재 중국 인구학계에서 논의되는 '비정상사망자'의 수치는 2천만에서 4천만 사이다.

아무튼 얼마나 죽었는지 통계수치가 제각기 다르기 때문에 정확히 얼마가 죽었는지는 알기 힘드나, 최소한의 통계 수치에서도 2,000만이 죽은 중일전쟁 사망자를 뛰어넘는다는 점에서 이 사태의 여파가 어마어마한지 알 수있다. 허나 현재 시진핑이 사회적 통제를 강화하고 조직적인 역사왜곡을 명령하는 가운데, 중국의 어용 지식인들은 "기존의 수천 만 명이 사망했다는 분석은 터무니 없는 과장이며, 200~400만에 불과하다"고 깽판을 치며 후안무치의 왜곡을 자행하고 있다.

그나마 억단위의 인구를 가진 중국이었기에 다시 회복이 가능했지, 평범한 인구 수준의 국가 같았으면 단순 인구감소만으로 국가 멸망 트리를 탔을 것이다. 중국의 스케일이 워낙 거대해서 한 번의 치명적인 사고에도 피해가 어이없을 정도로 거대한데, 타격은 수치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적게 받았다고 봐야 된다. 즉 중국이니까 이런 초현실적 재난이 발생했고, 또 놀랍게도 극복할 만한 수치였다. 실제로 19세기 중국에서는 평범한 수준의 기근(?)으로도 천만 명이 훌쩍 넘는 인구가 아작 났고, 이는 동시기 조선이었으면 국가 멸망에 가까운 수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중국 인구는 성장세였다.

그러나 그것을 감안해도 대약진운동으로 인한 삼년대기근은 중국 역사상 최악의 대기근 중 하나로 현재까지 반드시 언급되며, 인류 역사상 가장 사망자 수가 많은 대기근 중 하나이기도 하다. 비율로만 쳐도 대약진운동 당시 중국 인구의 약 5% 정도가 아사하였는데, 동시대 우리나라로 치면 약 150만 명이 사망하는 것이다. 참고로 이 150만명의 수치가 어느 정도이냐면, 우리측 6.25 전쟁 민간인+군인 사망자 수가 120만 명 가까이 된다. 6.25 전쟁이 당대 우리나라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이 대기근이 중국사에서도 엄청난 영향을 미친 사건임을 알 수 있는 것. 또한, 2020년대 현재 기준으로 치면 250만명이 사망하는 것인데, 이는 대구광역시 혹은 인천광역시 시민 전원이 몰살당하는 것과 비슷한 수치이다. 거기다가 전체 인구수 대비 사망자가 고난의 행군과 비슷하나, 고난의 행군이 6년동안 발생한 반면 이쪽은 3년만에 이만한 숫자가 죽었다는 점에서 더욱 충격적이다. 정상적인 국가라면[24] 21세기에 이런 대참사가 일어날 일이 없겠지만, 만약 민주국가에서 저런 일이 발생한다면 이만큼 사태가 진행되기도 전에 이미 정권이 엎어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참고로 중국의 인구는 1955년 606,736,000명에서 1965년 715,546,000명[25]까지 오히려 늘어났다. 대약진운동 이후론 인구가 더욱 빠르게 증가해 1975년 917,899,000명까지 늘어났다. 이는 1951년 12월 31일 <限制節育及人工流産暫行辦法>을 통과시켜버림으로 피임 낙태를 금지해 버리면서 계속되던 인구 폭증의 연장선이었으며, 1950년대 중반에 산아제한의 주장이 나왔으나 마오쩌둥이 피임을 "제국주의자들의 사회주의 분열 책동"으로 매도하면서 산아제한론자들을 반우파운동 시기 대대적으로 숙청해버렸고, 대약진운동의 여파로 기아와 함께 출산율이 일시적으로 격감하여 1958년도에 1,908만명이었던 신생아수가 1961년도에 1,186만명까지 급감했고, 1960년에 아사자수가 너무 많아서 300만이 넘게 인구가 줄어들기도 했지만 대약진운동이 수습되기 시작하는 1962년부터 보상성 출산으로 합계출산율이 5명, 연 출생아수는 2,000만명을 훌쩍 뛰어넘는 2차 베이비붐이 일었고, 이는 문화대혁명 시기인 1970년대 초반까지 지속되었다.

결국 1950년대 초중반에 출생한 1차 베이비붐 세대들이 사회에 한창 진출할 때가 되어 노동력 과잉으로 인한 일자리 부족과 식량부족이 문제되는 상황이 벌어졌고, 이러한 과부하 문제가 계속될 것을 염려한 중국 정부에서 1972년에 2자녀 정책을 시행했는데, 이때부터 중국의 인구성장은 줄어들기 시작하여 1970년대 말에 출산율을 2명대 후반 정도로 떨어졌고, 덩샤오핑 한 자녀 정책으로 인구 증가를 통제하는 데 성공했다. 같은 기간 동안 인도는 404,268,000명(1955)에서 494,960,000명(1965), 618,923,000명(1975)까지 증가했으며, 이후에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1993년을 기점으로 중국도 저출산 국가가 되었고, 2022년부터 인구감소가 시작되었다. 출산율이 약 1명대 중반인데, 이 정도면 인구유지치인 2.1명을 꾸준히 유지하는 중인 미국보다 낮다.

대약진운동 시기 중국의 하루 평균 열량 섭취량은 경악 그 자체.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가 측정한 통계에 따르면, 대약진운동의 참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전이던 1958년 기준 중국의 하루 열량 섭취량은 2,053kcal였지만, 대약진운동의 비극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59년 기준 중국의 하루 열량 섭취량은 1,722kcal로 떨어졌고, 대약진운동의 정점이던 1961년[26]에는 무려 1,415kcal로 떨어졌다. 단 3년 만에 1인당 평균 열량 섭취량이 70% 수준으로 떨어진 것이며, 이쯤이면 농담이 아니라 사실상 국민 절대다수가 하루 한 끼를 겨우 먹는 수준으로 살았다고 봐도 전혀 무리가 없었다. 그나마 류사오치의 경제 회복 덕분에 중국의 하루 열량 섭취량은 1965년 1,797kcal로 겨우 1959년 수치를 회복했고, 마오쩌둥이 사망한 1976년 기준 중국의 하루 열량 섭취량은 1,875kcal였으며, 덩샤오핑 시기 고도성장을 달리며 1978년 2,000kcal를 돌파(2,062kcal), 2010년 3,000kcal를 돌파(3,044kcal)를 돌파, 2018년 기준 중국의 하루 평균 열량 섭취량은 3,206kcal다. 대체적으로 장제스 시기 중국의 평균 열량 섭취량을 마오쩌둥 시대, 특히 대약진 이후엔 제대로 넘은 적이 거의 없다. "차라리 국민당 정권 시기에 더 잘먹고 잘살았다"는 중국 인민들의 한탄이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 #

이때 정부는 대약진운동이 잘 되고 비축 식량이 있다는 걸 선전하기 위해 식량을 무상으로 원조한다든가 외국 인사들을 초청해 파티를 벌였다. 이때 초대된 유명인으로 프랑스 프랑수아 미테랑이나 영국 버나드 로 몽고메리 원수가 있다. 하지만 식량이 가득 차 있다던 창고 문은 굶주리는 인민들을 위해 열리지 않았으며, 마오의 면전에서 "주석도 책임져야 한다"고 항의했던 국방부장 펑더화이는 짤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인민해방군 서열 2위의 원수 중 하나이자 한국 전쟁 당시 중공군의 총사령관으로 맹활약했던 그 펑더화이가 말이다. 이후 펑더화이 문화대혁명 당시 류사오치와 함께 가장 혹독하게 박해를 받게 되었고, 홍위병들의 고문과 조리돌림 속에서 고통받다가 1974년 옥사했다. 덩샤오핑이 권력을 잡고 나서야 다시 당적이 복구되었다.

지역별로도 피해상황이 달랐는데, 피해상황이 가장 심각했던 곳은 안후이성으로 인구의 1/5에 육박하는 18%가 사망했고, 쓰촨성도 인구의 10%가 넘게 죽어나간 것으로 추산되었다. 대도시와 동북( 만주) 지방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피해가 덜했고, 일부 지방의 경우에는 장시성처럼 대약진운동을 슬그머니 따르지 않는 식으로 피해를 축소시킨 곳도 존재하기는 했다.

끔찍한 기근 속에서 식인 사태도 있었다. 2013년 공개된 중국 정부의 공식 문건에 따르면 식인은 안후이성 간쑤성의 여러 지역에서 발생했는데, 안후이성의 경우 1960년 한 해 동안에만 무려 1289건의 ' 인육 사건'이 조사됐고, 피해자는 친지, 친구, 부인, 자녀 등이었다고 한다. #

여담이지만 이 당시의 참혹한 실상을 보고 젊은이들은 경악하거나 분노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중년층 이상 사람들은 익숙한 일이라면서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 당시의 중년층 이상 입장에서 수십년간의 참혹한 전쟁과 물가폭등도 이겨내고 살아남았는데,[27] 기근도 어찌어찌 넘어가겠지라는 마인드로 기근을 버텨냈던것이었다. 물론 진짜로 배급이 완전히 끊겨서 굶어죽는 처지라면 얘기가 달랐지만 말이다.

6. 끝없는 식량 징발

'먹을 게 충분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굶어 죽는다. 인민 절반이 배를 채울 수 있도록, 나머지 절반은 굶어 죽게 둬야 한다.'
不够吃会饿死人,最好饿死一半、让另一半人能吃饱。
마오쩌둥, 1959년 2월, 상하이 금강반점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수확량의 3분의 1까지 징발할 것을 지시하면서,
“중국인들은 모두 채식주의자들이오.”
1960년 에드거 스노우와의 인터뷰에서 마오쩌둥이 한 발언.
식량은 흔히 무기로 악용되었다. 굶주림은 구타보다도 먼저 동원되는 처벌 수단이었다. 루이장 현의 여러 생산대대를 면밀히 살펴본 조사관들은, 굶어 죽은 사람의 80%는 처벌로서 식량을 받지 못해 죽은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공동식당에서 식량을 받은 사람들조차도 종종 공식적 배급량보다도 적은 양을 받았다. 한 농민이 설명했듯이 "솥에서 죽을 푸는 국자는 사람들 얼굴을 읽을 수 있었다." 이것은 많은 인터뷰 대상자들이 공통적으로 기억하는 현상, 즉 공동식당에서 음식을 퍼주는 사람이 "반동분자"라고 간주된 이들을 고의적으로 차별하던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훌륭한 노동자들에게 퍼줄 때는 국자가 솥 안쪽으로 깊숙히 들어간 반면, "반동분자"들에게 퍼줄 때는 국자가 표면을 살짝 떠낼 뿐이라 묽은 죽 물만을 받았다. 농민은 계속 회고했다. "그 물 같은 죽은 푸르스름했고 도저히 먹을 수 없는 것이었다."
마오의 대기근:중국 참극의 역사 1958~1962, 프랑크 디쾨터
"농민은 엄격한 절약을 실천해야 한다. 최대한 검소하게 살고 하루에 두 끼만 먹어라. 그 중 한 끼는 부드럽고 액체여야 한다."
1959년 말 인민일보에 실린 새로 집단화된 농업 노동자 대중을 위한 식단 지침 #[28]

당시 중국 6.25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소련으로부터 소총부터 MiG-15와 같은 최신식 무기까지 대량으로 사들이고, 이후 MiG-17에 대한 라이센스권을 구매하는 등, 소련제 무기를 적극 도입했다. 뿐만 아니라 탄도 미사일 기술과 핵무기 기술을 이전해준다는 조건으로, 1956년 <중소합작>이라는 이름으로 소련에 거액의 계약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중국은 외화가 부족했고, 소련에게 대가로 지불할 만한 것은 식량밖에 없었다. 마침 소련도 식량자급을 못해 상당량의 곡물을 외국에서 수입하던 처지였던지라, 중국이 식량으로 이를 갚는다는 제안에 흔쾌히 동의했다.

그런데 마오쩌둥이 대놓고 "핵전쟁이 일어나도 중국인들은 살아서 새 지구를 건설할 것이며, 핵폭발도 우주적으론 아무 것도 아니다"지구멸망도 우주적으론 아무것도 아닌데 따위의 발언을 하며 서방과 핵전쟁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소련 당국은 마오쩌둥에 대해 큰 경계심을 갖게 된다.

흐루쇼프는 마오쩌둥에게 핵무기의 무서움에 대해서 여러차례 설명하고 미 해군과 함대에 대응하기 위한 공동 군사 기지 건설 등을 제안했으나, 흐루쇼프를 나약한 인물로밖에 보지 않았던 마오쩌둥은 그를 크게 비웃었고, 수영할 줄 모르는 흐루쇼프를 일부러 수영장에 집어넣어 망신주는 등 자극했다. 분노한 흐루쇼프는 결국 중국에 등을 돌리게 되었다.

이런 중소관계의 악화는 가속화되어서, 1959년 흐루쇼프는 1956년에 맺은 중소합작을 파기하고 소련인 기술 고문들을 모조리 데려가버렸다. 이 때문에 중소 사이는 완전히 돌이킬 수 없이 벌어졌고, 중국은 독자적으로 핵무기와 유도탄을 개발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이 되었는데, 문제는 중국의 지도부가 벌인 여러 삽질과 자연재해가 합쳐지면서 곡물 생산량이 반감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중국은 차마 소련에게 " 상환 좀 늦춰주면 안 되겠나?"고 말하지 못했다. 마오쩌둥 특유의 자존심 때문도 있었고, 자국의 기아가 들통나는 것도 경계했기 때문이다. 체제 경쟁 중에 자국의 기아 소식이 알려진다면 소련에게 체면이 안 서므로, 결국 중국은 어떻게든 곡물 수출을 계속해야 했다. 마오쩌둥은 이를 위해 전국의 수확량의 3분의 1을 징발하라는 구체적인 수치를 지시하기까지 했다. 이런 마오쩌둥에게는 연일 중국 각지에서 "수천만 명의 국민들이 굶어 죽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하지만 그는 다음과 같이 대꾸했다.

심지어 " 중국인은 초식동물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육류 수출에도 박차를 가했다. 물론 많은 양의 외화가 중국으로 유입되었기는 했지만 그 외화가 기근 해소를 위해 투입되지는 않았으며 결국 수천만 명의 중국인들이 굶어 죽어 가는데도 " 우리는 풍년이 들었다!" 허세를 부리며 무기 대금 + 기술 제휴비로 소련에 수많은 농축산물을 상환했다.

결국 이러한 행태로 중국 상당수 지역에서 식량이 바닥을 보였으며, 인민들은 과거 황조시대 때 벌어졌던 기근처럼 초근목피로 겨우 연명하는데 급급했다. 또한 그마저도 없으면 굶주림 속에서 얼어 죽어갔다. 또한 때로는 살인을 해서 그 고기를 먹거나 굶어죽어 널부러진 시신들을 먹는 사건이 전국 각지에서 벌어졌다. 이런 마오쩌둥의 행보를 두고 일부 논자들은 대약진운동을 가리켜 학살로 분류하기도 한다. 마오쩌둥이 중국 전역의 기근을 보고받고도 인지부조화로 정책이 실패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데 급급하며 식량징발을 더 늘리는 식으로 고집을 피웠고, 결과적으로 더 많은 아사자가 발생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졌다. 사망자의 숫자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을 파악하게 된다. 단순 아사자뿐만 아니라, 늙고 병들어 일을 못하거나 너무 배가 고파 음식을 훔친 사람들이나 그 가족들을 반동으로 몰아, 지역 공산당 간부들과 민병대원들이 닥치는대로 죽여댔다. 이렇게 맞아죽고, 총살당하고, 생매장되고, 삶아져서 비료로 쓰인 사람들의 숫자만 수백만에 이른다. 중국 정부는 그제서야 부랴부랴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에서 곡물 수입을 승인한다. 1961년에만 400만톤을 수입해야 했다. 1959년에 중공이 세계 각국에 팔아치운 곡물의 양이 400만톤이 넘는다. 그리고 공동급식소 등의 황당무계한 정책들을 일부 폐기했다.
1961년, 기아에 허덕이는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 측에 식량을 지원해주는 중화민국. 비스킷과 같은 비상식량과 쌀 패키지에 장제스 총통의 얼굴과 선전문구가 새겨진 삐라를 동봉해 공군 비행기로 투하했다. 중공 방공망에 격추될 위험을 덜기 위해 야간에 이륙했다. 말이 인도적 지원이지, 사실 중화민국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실행되었다. 마오쩌둥에게 있어 중화민국의 소위 '인도적 지원'은 자신에게 완패하여 벽촌으로 쫒겨난 장제스와 국민당이 능구렁이같이 되살아나서는, 자신의 대대적인 정책 실패를 조롱하며 면전에다 쌀자루를 던져대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천하를 쥐고 있던 마오쩌둥 중국공산당에게는 굴욕도 이런 굴욕이 없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불구하고 공산당 지도부는 외국과의 계약을 철저히 준수하고, 국제적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 곡물 수출을 늘리기로 결정했고, 1960년에는 수출 제일 정책이 채택될 정도였다. 우방국들에 대한 해외 원조를 늘리기로 해서 알바니아 같은 나라들에도 무상으로 곡물을 보냈다. 이 괴리가 얼마나 심했는지, 당시 중국에서 활동한 알바니아 외교관인 푸포 쉬티(Pupo shyti)는 이후 ' 중국인들은 우리에게 모든 걸 내주었다. 뭐든 필요하면 부탁만 하면 되었다. 나는 부끄러웠다.'라고 회상했을 정도다. 원조를 받는 쪽에서조차 '이거 받아도 괜찮은 걸까?'라며 의구심과 괴리감을 느꼈을 정도였단 뜻이다.

또한 징발된 곡물의 우선순위는 베이징, 톈진, 상하이 같은 인구가 성장 중인 도시들과 중공업의 심장부였던 랴오닝성에 주어졌고, 다른 도시 주민들의 필요가 그 뒤를 이었다.
1961년, 당시 영국령 홍콩의 모습. 시장 한켠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출한 수많은 식료품들이 진열대에 그득히 쌓인 채 팔려나가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산 구매자들은 곧바로 구룡반도의 우체국으로 달려가 기아에 허덕이는 본토의 친지들에게 구매한 식품을 보내주고 있다. 당시 중공 지도부의 식량 수출 정책의 모순점을 잘 보여준다. 영상 제목부터가 'Red China's weird food squeeze in Hong Kong(공산 중국의 홍콩에서의 요상한 식량 갹출)'이다.
대한뉴스 #370 <자유를 찾는 중공 피난민>. 기아를 피해 영국령 홍콩으로 밀입국하려는 본토 접경지역 중국인들의 모습.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영상 제작년도가 1962년이고 "4년째 계속되는 중공의 학정과 기아" 운운으로 볼 때, 역시 대약진운동 참상의 언저리를 언급하고 있다.

저우언라이로 말하자면, 그는 갈수록 더 많이 징발하도록 사정없이 밀어붙였다. 저우언라이는 농촌에서 충분한 곡물을 공출하여 도시를 먹이고 외화를 벌어야 할 책임을 진 사람이었다. 그는 직접 만나서나 전화로, 때로는 대리로 보낸 보좌관들과 쉴 새 없이 발송한 <긴급>이라고 찍힌 전보를 통해 지방 성장들을 닦달했다. 그는 중화인민공화국 - 그 자신이 대표하는 - 내부의 이해관계에서 농촌의 필요는 양보되어야 한다는 예민한 위계질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의 과격한 추종자 리징취안이 그에게 넘겨준 엄청난 양의 곡물은 결과적으로 사천성에서 끔찍한 기근을 낳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1958년 5월, 1,300명이 넘게 참가한 공식 당대회에서 저우언라이와 전권을 쥐고 있던 천윈은 또 다른 시험을 준비하도록 불려나왔다. 어떻게 해야 마오쩌둥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더 이상 알 수 없었던 저우언라이는, 며칠을 자진하여 틀어박혀 있으면서 딱 맞는 표현을 찾으려고 고군분투했다. 그와 같은 궁지에 몰려 있던 천윈과 전화통화를 한 뒤 저우언라이는 완전히 낙담했고, 머릿속이 그야말로 새하얘졌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비서를 멍하니 쳐다보면서 몇 마디 말을 뱉어내고는 다시 침묵하는 게 전부였다. 그날 밤늦게 아내는 저우언라이가 책상에 엎드려 있는 것을 보았다. 총리를 도우려는 생각에 비서는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가 "많은 폭풍우를 헤치며 한배를 타왔던" 것에 관한 문단에 밑줄을 그어두었다.

나중에 연설문을 들여다본 저우언라이는 화를 내며 비서를 질책했다. 그는 눈물까지 펑펑 쏟으면서 "비서가 당 역사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비난했다. 결국 저우언라이는 대회에 모인 당 지도자들 앞에서 주석에게 찬사를 쏟아내고, 청중에게 "마오쩌둥은 '진리의 화신'이며, 잘못은 오직 당이 그의 위대한 지도로부터 멀어질 때만 벌어졌다"고 굽실거렸다. 이러한 굴종을 선보인 며칠 뒤,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에게 "주석의 글을 성실하게 연구하고 지도를 모두 따르겠다"고 약속하는 사적인 편지를 건넸다. 저우언라이의 사탕발림에 주석은 마침내 만족했다. 그는 저우언라이와 다른 이들이 훌륭한 동지라고 공언했고, 저우언라이는 자리를 보전했다.

대약진운동의 초기 몇 달 동안 저우언라이는 거듭하여 모욕을 당하고 비하됐지만, 결코 주석에 대한 지지를 거두지 않았고, 난닝에서 주석의 격노를 묵묵히 받아들이는 쪽을 택했다. 저우언라이는 자신의 주인을 타도할 권력이 없었지만, 그의 뒤에는 계획가들이 있었고, 또 자기 경력을 희생하여 물러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비록 동료들의 그늘에 가릴지언정 권력에 머무는 길로서, 주석에게 받는 굴욕을 감수하는 법을 배웠다.

마오쩌둥은 비전이 가득한 열정적인 공상가였고, 저우언라이는 바로 그 악몽을 현실로 탈바꿈시키는 산파였다. 언제나 근신 중이었던 그는 자신의 충성심을 입증하기 위해 대약진운동에 지칠 줄 모르고 전념했다. 마오쩌둥은 현실을 몰랐기에 대약진운동이 인민을 잘살게 할 거라고 굳게 믿었지만, 저우언라이는 인민이 망하게 되리라는 걸 뻔히 알았을텐데도 총리 자리를 지키려고 인민을 지옥으로 밀어넣은 것이다.

다른 이들도 "인민의 아사는 국가의 요구보다 덜 중요하다"는 시각을 완고하게 고수했다. 덩샤오핑은 "계획경제 하에서는 징발이 <마치 전시 때처럼> 가차 없이 강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성 지도자들이 자기 근거지를 지키기 위해 아무리 발버둥치든 간에 당의 노선은 고수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나라는 망하고 말 것이라고 믿었다. 대기근의 참상이 지도부 사이에서도 잘 알려져 있던 1961년 말에 연설을 하면서, 덩샤오핑은 막대한 징발로 수백만 명이 아사했던 사천성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과거에 일부 지역들에서는 징발이 너무 과중했고, 예를 들어 사천은 올해를 비롯해 몇 년 동안 징발이 심했다. 하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다. 나는 사천의 방식에 찬성한다. 그들은 결코 고초에 대해 불평하지 않으며, 불평하면 다 죽이잖아 우리 모두는 사천에서 배워야 한다. 내가 사천 출신이라고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다.

나중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참상에 마오쩌둥 이하 공산당 지도부 전원이 멘탈이 나가서, 마오쩌둥은 에드거 스노우에게 " 중국을 발전시키기 위해 뭘 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다"고 말해 에드거 스노우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아무것도 하지 마 "15년 안에 미국 영국을 초월하겠다"던 마오쩌둥은 "100년이 걸려도 서방을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라며 매우 회의적인 태도로 돌아서게 된다. 천윈이 대놓고 "위대한 인민공화국보다, 반동과 제국주의자가 장악한 장제스 시절이 더 먹고 살기 좋았다"고 자조할 정도였다.

하지만 1961년 니키타 흐루쇼프가 "곡물 100만 톤과 쿠바 설탕 50만 톤을 제공하여 중국의 기아 퇴치를 돕겠다"고 제안하여도 마오쩌둥은 " 소련에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거절하는 등, 수천만 명의 목숨을 값으로 치른 마오쩌둥의 병적인 자존심은 치유되지 않았다.

7. 숨겨진 원흉 첸쉐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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첸쉐썬(1911-2009)

사실 마오쩌둥이 황당무계한 농업정책을 세우게 된 계기는 바로 첸쉐썬 박사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첸쉐썬 박사는 항저우에서 태어나 상하이교통대학을 졸업했다. 이름은 '교통'대학이지만, 중국어로 교통은 한국어의 자동차 교통이 아니라 소통(커뮤니케이션)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공계열 학과가 다 있는 상하이 최고의 대학교이자 지금도 중국 4대 일류대, 5대 일류대에 속하는 최고의 대학교[29]이다. 즉, 중국 버전 MIT인 셈이며, 실제로도 상하이교통대학은 세계적으로도 알아주는 명문대학이다. 첸쉐썬 박사는 그리고 칭화대학 장학금으로 MIT에 진학해서 석사를 한 후, Caltech으로 가서 테오도어 폰 카르만 교수 밑에서 수학과 항공 공학의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초음속 비행체 및 유도탄으로 학위를 얻고 1946년, 34세의 나이로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교수를 역임한 세계적 과학자로서, 매카시즘 시절에 미국에서 중공의 간첩이라는 혐의를 받고 한국 전쟁에서 잡힌 미국 포로와 교환되어 1955년 중국으로 추방되었다. 결국 미국은 스스로 중국에 미사일 개발 1급 인재를 넘긴 셈이었다. 그리고 첸쉐썬을 중국으로 추방시킨 원인이었던 매카시즘은, 현재 오히려 미국의 안보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더 악화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다. 첸쉐썬이 중공의 간첩이라는 혐의를 받은 이유는 어처구니없게도, 그가 중국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중국은 이렇게 미국에서 쫓겨난 첸쉐썬 박사를 대대적으로 환영했고, 첸 박사는 중국의 미사일 개발을 담당하며 마오쩌둥을 자주 만났다. 세계적인 학자였던 첸쉐썬은 마오를 만난 자리에서 "중국을 금방 미국처럼 발전시킬 수 있다"고 말했고, 자신의 논리를 잡지에 기고하기도 했다.

첸쉐썬의 기본 논리는 단위 면적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곡물을 빽빽하게 심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작물은 태양 에너지에 의해 자라는데, 태양 에너지는 충분하므로 물과 비료만 계속 공급하면 작물 생산을 20배 늘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이런 것을 그냥 예상만 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수치로 계산해서 정말로 그럴듯하게 보였다는 점. 전직 MIT 교수가 구체적 수치까지 제시하는데 넘어가지 않는 게 더 이상할 정도였다. 마오쩌둥은 이 말을 듣고 솔깃해서, "신묘한 계책"이라고 하며 대약진운동을 추진했고, 결과는 망했어요.

문제는 첸쉐썬 박사는 일급 과학자였지만 농학은 전공하기는 커녕 식물학의 기본도 모르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소리지만 그의 논리에서 가장 잘못된 부분은 태양 에너지가 무한하다는 것으로 그의 말처럼 태양 에너지는 무한에 가깝지만, 문제는 그걸 식물이 무한히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괜히 식물들이 줄기의 몇 십 몇 백 배 면적에 해당하는 공간에 이파리를 줄줄히 늘여놓는 것이 아니다. 이 공간에 다른 식물이 난입하면 자연스럽게 에너지 수급에 문제가 생기고 생장이 제대로 안 된다. 박사는 순전히 책상머리 계산만 가지고 '비료 증원 + 파종 밀집도 증가 = 식량증가'라는 방정식을 만들어서 검증도 없이 게시한 셈이다.

그렇지만 천쉐썬의 주장이 마오쩌둥에게 실질적으로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둘째치고, 중국의 문호개방이 이미 오래 전부터 진행되었기에 근대 시절의 지옥을 맛보고도 중일전쟁 종결 당시에 이미 유학파 박사들만 수천 명이나 있었고, 공산당을 민주적 정당이라 믿어 장제스를 따라가지 않고 공산 중국에 잔류한 유학파 전문가들이 가득한 상황이었다. 오히려 이들 유학파 전문가들은 대부분 부르주아 반동들로 몰려서 당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핍박과 형편없는 대접만 받고 있었고, 이들의 분노가 백화제방 운동 때 폭발하기도 했다.

첸쒜썬은 마오쩌둥의 "15년 안에 미국을 따라잡겠다"는 뇌내망상을 뒷받침할 개소리를 했기 때문에 마오가 솔깃한 것이지, 만약 첸쒜썬이 "마오쩌둥의 구상은 불가능하다"고 직언했더라도, 마오가 '아 미국 출신 박사가 그랬으니 안 되겠구나!' 하고 깨달았을 가능성은 없다. 그땐 오히려 첸쒜선이 미제의 간첩이랍시고 숙청당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대약진운동 초기에 " 황하를 푸르게 만들겠다"는 마오쩌둥의 말도 안 되는 치수사업을 비판했던 미국 유학파 학자인 황안리는, 마오쩌둥에게 인민일보 사설을 통해 "개소리하지 말라"고 욕이나 먹고 숙청당했다.

대약진운동이 개판으로 돌아갈 동안 첸 박사는 비난을 피했음은 물론이고, 중국의 우주개발을 이끌며 핵무기 제조까지 감독했다. 중국의 1세대 미사일과 인공위성, 핵무기는 모두 그가 이끈 연구팀이 만들어냈다.. 중국이 문화대혁명이라는 국가 멸망에 가까운 사태 중에도 항공 공학이나 미사일 면에서 기술축적을 계속 할 수 있었던 것은, 마오가 비판의 화살을 맞는 동안 무사했던 그의 덕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설령 첸 박사가 저런 헛소리를 했다 하더라도, 최종 결정권자는 마오쩌둥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책임은 그에게 돌아간다.

첸 박사가 당시 소련을 주름잡던 사이비 농학자 트로핌 리센코의 농법을 일부 채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만 트로핌 리센코는 원래 농업 현장에서 오랫동안 일한 농업연구원 경력자였고, 당연히 이런 말도 안 되는 계획이 제대로 작동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대신 자기 계획을 말아먹었다

8. 이후

대기근으로 대약진운동은 철회되고,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중국공산당 내부가 분열하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의 뒤를 이어 국가주석에 취임한 류사오치는 중국공산당 총서기[30]였던 덩샤오핑과 함께 지성 중시, 도회 상업 중시, 대외적 균형에 정책 초점을 맞춰 대대적인 정돈 사업에 들어갔고, 1961년도에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 27%를 기록할 정도로 파탄상태에 접어든 중국의 경제를 다시 성장 기조로 돌려놓는데 성공하여[31] 1963년부터 1966년도까지 4년 연속 2자릿수대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였고 "대약진 운동은 인재(人災)가 7할, 천재(天災)가 3할이었다."고 말하면서 국가 정책의 실패로 규정했다.

마오쩌둥은 이에 대해 격렬히 반발했지만, 류사오치는 마오쩌둥의 면전에 대고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며, 역사책에는 식인행위도 기록될 것"이라는 폭언까지 퍼부었다. 또한 이 시기 마오쩌둥이 중국공산당 주석,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었지만 국가주석은 류사오치였고 중국 내 최고 직위인 주석이 두 명이 되어있었다. 마오쩌둥이 주도한 대약진운동 실패로 국가주석으로서 류사오치도 위세가 상당히 올라갔으며 마오쩌둥이 수세에 몰리기 시작한 1962년 진행된 7천인 대회에서 마오쩌둥은 자아비판까지 해야하는 상황까지 몰렸다. 이에 마오쩌둥은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자본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주자파라고 의심하게 되었고, 가뜩이나 자신의 '멋진 계획'을 비판하던 지식인들에 대한 불만이 쌓여, 결국 문화대혁명이라는,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을 사건을 터뜨리게 된다.

이렇게 대약진운동은 1960년대 들어 진정되었으나, 근본적으로 달라진 건 없었다. 이로 인해 1960~ 1970년대 중국은 마오쩌둥이 사망하는 1976년까지 식량 부족을 겨우겨우 넘겨가면서 기근을 피해야 했다. 1962년을 기점으로 기근이 진정된 이후로는 중국에 큰 기근은 없었으나, 식량은 남아돌지 않아서 배급제가 철저히 실시되었다. 이 당시에는 하루 3끼 정도를 먹을 수 있는 식량을 배급하기는 했지만, 배급량이 꽤나 빠듯해서 3끼를 꼬박 먹을 수 있다고 해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배급표 재발행 조건이 까다로워서, 배급표를 깜빡 잊거나 분실할 경우에는 그달 식량은 없는 것이었다. 때문에 이렇게 되면 남에게 밥을 빌어먹거나, 아니면 공산당원에게 아부를 하든가 하는 수를 써야 했다. 그 덕택에 1980년대까지 중국 서민들에게 배급표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 물품 중 하나였다.

하지만 1980년대를 기점으로 해서 배급제는 점차 축소되어 나갔고, 1993년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그리고 식량이 모자라는 부분은 수입하고, 여러 가지 개간사업을 통해 농지를 늘리며, 거기에 위안룽핑(袁隆平, 1930~2021)이라는 걸출한 농학자가 등장해[32] 식량생산량을 극적으로 늘리면서 아슬아슬하게 인구증가를 지탱할 수 있었다. 덩샤오핑 이후 대대적인 개혁, 개방이 이뤄진 후에야 식량 부족 사태가 완전히 근절되었으며, 덩샤오핑은 "중국에서 최초로 기근을 없앤 지도자"로 칭송을 받게 되었다. 쓰촨에서 했던 지랄은 깔끔하게 잊어주자

여하간 대약진운동이 시행되기 직전의 중국의 경제상황은 낙관적이라 할 수 있었지만,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이 겹치면서 " 영국을 당장에 따라잡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던 것과는 다르게 대약진운동으로 인해서 일본에 따라잡혔다. 일본을 겨우 다시 따라잡은건 40년 이후였다. 이후로도 문화대혁명과 혼란으로 인해서 서독, 이탈리아, 멕시코, 캐나다, 브라질, 동독, 호주, 스페인 등에 차례차례 따라잡혔다, 결국 1981년에 세계 13위권 경제국가로 추락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또한 1980년대에서 90년대 초반까지 중국의 경제력은 중국의 평균적인 성 하나 정도의 인구에도 훨씬 못미치는 대만의 2배를 조금 넘는 수준에 불과했으며 홍콩 반환 당시에 홍콩의 경제력이 중국 전체의 1/5에 달했고, 대한민국의 경제력이 중국에 90%에 육박한 적까지 있을(...) 정도였다. 어쨌든 다시금 경제성장에 전념하면서 이들 국가를 다시 하나하나 따라잡았지만, 2위 경제대국이 된 것은 2010년이 되어서부터의 일이다.

대약진운동과 비슷한 시기인 니키타 흐루쇼프 집권기 소련에서도 이와 비슷한 뻘짓이 있었다. 바로 처녀지 개간 운동. 개요에 조금 언급했듯이 이걸 보고 마오쩌둥이 자극을 받아서 대약진 운동을 시행한 것이다. 그러나 소련 농지에 맞지 않는 농법과 무리한 수확 할당 등으로 인해 소련의 농업 및 낙농업은 그야말로 박살이 났다. 이 일은 흐루쇼프의 입지를 크게 약화시키고 이후 그가 실각당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그나마 소련 정부는 중국과는 달리 상황을 받아들이고 미국, 캐나다, 호주,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해외에서 대규모로 곡물을 수입해서 중국과 같은 대규모 기근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련 농업 및 축산업은 집단농장 등 소련 체제 자체의 한계와 맞물려서 제대로 회복하지 못하였고, 소련은 체제가 해체될 때까지 해외에서 식량을 수입해야 했다. 아무튼 처녀지 개간 사업을 말아먹었다한들 소련은 중국에 비하면 그야말로 최첨단을 달리는 선진국이었다. 이때 생활수준을 보면 소련 텔레비전 세탁기가 보급되기 시작하고 고기를 매일같이 먹을 수 있었으며 별장도 보편화되기 시작한 데 반해서, 당시 중국 자전거 재봉틀이 혼수품이었던 시절이었고, 1980년대까지도 고기는 어쩌다 한번 먹는 음식이었다. 때문에 소련으로 망명가는 중국인들도 일부 있었다.

이 사건의 여파가 중국의 고령 계층에서 좋게 포장하자면 일상속의 생존주의적인 행동으로 나타나 오늘날까지 중국에 피해를 끼치고 있다.

9. 관련 매체

9.1. 서적

9.1.1. 정식 발매된 저서

  • <마오-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집필한 것으로 유명한 장융의 <대륙의 딸>(영문판 : wild swan)이 대약진- 문화대혁명 시기의 중국 모습을 알고 싶을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서적이며 서구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대륙의 딸>은 저자인 장융 자신의 가족의 일대기를 쓴 소설이므로 웬만한 중국 근현대 역사가 다 나온다. 군벌에게 시집간 외할머니, 청렴한 공산당원 남편과 결혼한 어머니, 국공내전, 대약진운동, 그리고 홍위병을 필두로 한 문화대혁명까지.
  • 위화의 소설 허삼관 매혈기도 대악진 운동 시기를 다루고 있다. 앞의 작품과 달리 묘사는 떨어지지만, 허삼관의 묘사로 당시 형편을 짐작할 수 있다.
  • 옌롄커(阎连科)의 소설 <사서(四书)>에서도 토법고로와 기근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 국내에는 홍콩대학 교수 프랑크 디쾨터가 집필한 인민 3부작의 2권인 <마오의 대기근>이 대약진운동을 다루고 있다. 새뮤얼 존슨 상을 수상하였으며, 당시 벌어진 지옥도에 대해서 해금된 중국 국가기밀문서를 바탕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까지 드러내고 있다. 원래 출판 순서로는 1권이나 국내에서 시대 순서대로 재배치하여 2권을 나중에 정발하였다.
  • 당연하겠지만 알렉산드르 판초프의 < 마오쩌둥 평전>, 장융의 <마오>, 로스 테릴의 <마오쩌둥 평전>, 필립 쇼트의 <마오쩌둥> 등에서 대약진운동 이야기가 빠지는 일은 없다.

9.1.2. 정식 발매되지 않은 저서

  • Roderick MacFarquhar, The Origin of the Cultural Revolution:The Great Leap Forward, 1958-1960, 컬럼비아 대학교 출판부, 1983.
  • Alfred L. Chan, Mao's Crusade:Politics and Policy Implementation in China's Great Leap Forward,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 2001.
  • Ralph A.Thaxton, Catastrophe and Contention in Rural China:Mao's Great Leap Forward, Famine and Origins of Righteous Resistance in Da Fo village,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 2008년.
  • Jasper Becker, Hungry Ghosts:Mao's Secret Famine, 헨리 홀트 출판사, 1996년.
  • 그 외에 중국에서도 많은 연구가 나왔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양지성의 허난성 지역의 참상을 다룬 <묘비:1960년대 중국 대기근의 진정한 역사>, 대약진 시기 마오쩌둥 주변의 궁정정치를 다룬 린윈후이의 <유토피아 운동:대약진 운동부터 대기근까지, 1958~1961>, 대약진 시기 농민들의 저항을 다룬 가오왕링의 책 등이 있다. 양지성의 책은 "대약진으로 인한 사망자가 총 3,600만에 달한다"는 주장을 담았으며, 중국에서 금서로 지정되었다. 외국에도 번역되었으니 중국어를 모르는 사람들은 Tombstone - The Great Chinese Famine, 1958-1962, Yang Jisheng을 검색해 볼 것.

9.2. 만화

  • C.M.B. 박물관 사건목록 26권 <징조>편 - 홍위병이 되어 광기에 휩쓸려서 자신의 부모까지 린치해 죽이기 직전까지 치달았었던 중국 재벌이 온전히 참회하고, 자신의 과거를 정면으로 받아들이는(부모의 묘에 성묘 가는) 에피소드. 문혁의 원인 중 하나인 대약진운동에 대해서 설명하고, 새옹지마의 고사를 인용하며 에피소드가 끝난다.

9.3. 영화

  • 대약진운동을 다룬 영화로는 장이머우 감독의 인생이 있다. 공리와 갈우 주연. 이쪽은 중일전쟁, 국공내전,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까지를 폭넓게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 시기 역사를 조금이나마 알고 싶다면 꼭 볼만한 작품. 토법고로, 집단농장으로 대표되는 대약진운동과 홍위병으로 대표되는 문화대혁명과 같은 거대한 사건들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다. 토법고로와 협동농장 부분은 꽤나 자세하게 나오니, 영화라는 점을 감안하고 본다면 당시 시대상을 참고하기에 좋은 편이다.
  • 2018년 중국 다큐멘터리 감독인 왕빙이 대약진 운동 시절 숙청되어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난 사람들의 현재를 다룬 8시간 27분짜리 다큐멘터리 사령혼: 죽은 넋을 만들었고, 2018년 칸 영화제에서 공개되었다. 3부작 중 1부로 앞으로도 더 공개할 예정이라고 한다. 왕빙은 바람과 모래라는 처음으로 만든 극영화에서도 이 소재를 다룬 바 있다.

10. 관련 문서



[1] 한어병음으로 Dàyuèjìn Yùndòng으로 읽는다. [2] 기근의 근본적인 원인은 자연재해지만 자연재해의 피해를 키운 것이 대약진 운동 당시의 여러 실책들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3] 이는 절대 비약이 아니다. 성장률은 작년 대비 올해의 상대수치다. 1950년대 경제가 100이라고 치면 매년 10%씩 1차 5개년 동안 쌓아둔 게 155인데, 거기서 25%를 날려버린 것이니 한방에 39가 날아간 셈이다. 원래대로 10%가 성장했어야 했는데 마이너스된 걸 차치하고도 저만큼 날아간다. 여담으로 이 정도 성장역행이면, 2020년대 현시점 대한민국에서 하루아침에 모든 경제지표의 절대값들이 2000년대 중후반, 대침체 직후 시점으로 회기하는 것과 동급이다. [4] 이런 것들은 덩샤오핑 장쩌민 정권에 걸쳐 불필요한 예산낭비와 부패를 줄이면서 서비스의 질을 높인다는 명목하에 속속 유료화되거나 줄여나가거나 폐지되었다. [5] 당시 세계 경제 순위가 미국이 1위, 소련이 2위, 영국이 3위였기 때문. 물론 ( 중국도 마찬가지겠지만) 영국이 이제 막 제2차 세계 대전의 상흔에서 벗어날 때였고, 배급제가 1954년이 되어서야 폐지될 만큼 풍족함과는 거리가 있는 시절이었기는 했다. [6] 참고로 중국의 GDP가 처음으로 영국을 추월한 해는 마오쩌둥 사망 30년 후인 2006년이다. [7] 중국 2000년대 초반까지 서구 주요국보다 GDP가 낮았었다. [8] 이 대사는 중국 근현대사를 다룬 장예모의 영화 인생에도 촌장의 입을 빌어 나온다. 촌장은 "제련한 대만을 정벌하고, 를 앞서 나갈 것이며, 인공위성을 쏠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했다. [9] 정작 모델이 된 소련의 5개년 계획은 미국과의 기술 제휴를 통해 이루어졌다. 1930년대 미국과 소련간의 외교 관계가 정상화된 후 미국은 대공황 시기 기술자들의 경험을 유지하기 위해 규모가 큰 소련의 일감을 수주하여 수백 개의 공장을 설계하고 수천 명의 소련 기술자를 훈련시켰다. 그 과정에서 중공업 기술 뿐 아니라 공장을 운영하는 경영 노하우가 소련에 일부 적용되게 된다. 중국이 등한시한 경영 노하우는 소련이 군사 장비를 대규모로 양산할 때 큰 효과를 발휘했다. [10] 착유소, 공업화 이전 둥베이 지방의 경제력의 축은 대두에서 나오는 기름이었다. 산미증산계획 일본 한국을 약탈하고 대신 준 것이 만주에서 나오는 잡곡과 탈지대두, 즉 콩 깻묵이었다. [11] 고위직으로 올라갈수록 남성 비율이 늘긴 했지만, 이건 자본주의 국가도 비슷했다. 동구권이 해체되면서 이런 부문은 많이 약해졌다. [12] 문제는 명태를 많이 잡아놓고도 수송난 때문에 유통과 보관을 못해 썩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북한은 이런 상황을 '삽으로 명태를 퍼나른다'고 하여 교묘히 풍어로 배불리 먹는 상황과 겹치는 모습과 강렬하고 문화적 맥락에 맞는 슬로건을 통해 자신들의 실정을 숨겼다고 한다. 또한 1970년대에는 양적으로 모자람없이 배급되었다고 하나 실상은 70년대에도 전쟁 준비라는 미명하에 일일 배급량을 줄이다보니 배급을 받아도 항상 쌀이 모자랐는데, 특히 남자애들이 많은 집은 더욱 어려웠다고 한다. 간식은 물론 부식물도 넉넉하지 못했다고 한다. # 늘 강냉이밥(옥수수밥)만 먹어야 했고 '이밥(쌀밥)'은 명절에나 먹을 수 있는 귀한 것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더 황당한것은 쌀밥은 명절에나 먹을 수 있다지만 쌀을 수출하는 기행을 일삼았다! [13] 소련의 기혼 여성들은 공영급식소를 신뢰하긴 했지만, 가족들에게 식사를 제공해주고 싶어 하는 경향이 강해 되도록이면 가정에서 가족과 식사하려 했으며, 오븐 가스레인지를 비롯한 조리기구에 관심이 많았다. 소련 수뇌부는 이런 여성들을 위해서 각종 조리기구와 가전제품의 증산과 품질 향상, 식자재 제공을 위해 노력했다. 실제로 열량 섭취량 측면에서 소련은 브레즈네프 정권 말기까지 미국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열량을 인민에게 제공했다. 육류 같은 경우에는 그야말로 정권 차원에서 신경 쓰던 것으로서, 1950년대 후반부터 페레스트로이카 이전까지, 인민의 눈치를 봐서 육류의 소매 가격을 인상하지 않으면서 축산 농가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도매 가격은 높여줘서 육류 공급 및 구매 비용이 국가 예산에 어느 정도 부담이 될 정도였다. 1958년에 미국이 체제 우위를 선전하고 소련 인구의 절반인 여성들이 박탈감과 소련 정부에 대한 불만을 느끼게 만들려고 모스크바에서 엑스포를 개최하고 가전제품 전시회를 열었을 때는 꽤나 마음을 졸이기도 했다. [14] 공산주의 사상 자체가 남녀평등을 강조하는 측면도 있고, 전통의 베갯머리송사도 있지만, 서구권과 마찬가지로 소련도 산업화와 세계대전 당시 공장과 전선에 나간 남자들 대신해서 가정과 생산, 운영을 도맡았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여군부대를 대량으로 운용하여 많은 피를 흘렸고 전후 남자들이 2,000만 명 가까이 죽으며 극심한 여초사회까지 되었기에 여성들에 대한 눈치보기는 서구권보다도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할 수는 없었다. [출처] "마오의 대기근: 중국 참극의 역사1958~1962" [16] 덧붙이자면 2023년 대한민국 쌀 수확량은 370만 2천톤이다. 그리고 2023년 대한민국의 논의 규모는 70만 8,012 헥타르로 1헥타르당 약 5.23톤을 수확했는데, 대약진 운동 당시에 6톤을 달성했다는 것에서 이미 뻥튀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7] 는 약 15cm의 깊이로 유지되는 얕은 에서 잘 자란다. [18] 다만 일각에서는 이 발언이 서양을 비웃으며 으스대는 발언이 아니라, 엄청난 양의 똥철 생산 보고를 듣고는 '그렇다면 서방이나 소련에선 이런 일을 왜 안 했던 건가?!'라고 마오가 불안해하는 뉘앙스의 발언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즉, 자기가 했던 게 누가 봐도 이상할 정도의 많은 생산량이 나오자 " 어, 뭐가 잘못됐나?"라고 의심한 것일 수도 있는 뜻이다. [19] 아이러니한 것은, 액체 상태인 철의 탄소 함유량을 조절하여 강철을 생산하는 초강법을 비롯해 용광로, 수력풀무, 코크스 등 수많은 야금술의 혁신이 탄생한 곳이 고대 중국, 그것도 진시황 생전의 일이었다. [20] 그냥 낫이나 쟁기 같이 흔하디 흔한 휴대형 농기구 뿐만 아니라 동유럽 소련에서 비싼 돈 들여서 사온 트랙터를 비롯한 현대식 농업기계까지 토법고로에 들어가서 똥철로 윤회했다. [21] 놀랍게도 대약진운동의 가장 유력한 사망자 수가 4,600만 명과 얼추 비슷한 수준이다. [22] 중국은 1961년 이후에는 인구가 줄어든 적이 없었다. 그만큼 출산 잠재력이 컸던 나라인데도 떼죽음으로 1961년만 인구가 감소한 것. 이후 2022년에 61년만에 처음으로 저출산만으로 인구 감소를 겪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23] 참고로 근대화 이전의 중국은 이런 대기근이 주기적으로 있었기 때문에, 노인들은 이런 참상을 겪고도 매번 일어나는 일 처럼 생각했다고 한다. [24] 당장 현재 가장 경제적으로 망한 베네수엘라 북한도 저 정도로 국민이 아사하지는 않는다. 물론 중국은 너무 많은 인구라는 페널티가 있으나, 그걸 감안해도 저 사망자 수는 터무니없는 수준이다. [25] 대신 중간에 1961년에는 인구가 감소했었다. 그때가 대약진운동 폐해의 나쁜 효과에서 가장 절정의 시기로 수천만명이 떼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다. [26] 굶어죽는 사람이 너무 많은 나머지 인구가 줄어들 정도였다. [27] 특히 허난성에서는 1942년 허난 대기근도 예습(?)격으로 겪었다. [28] 영국이 저널리스트 재스퍼 베커(Jasper Becker, 1956~)가 1997년 출판한 '마오의 비밀스러운 기근(Mao's Secret Famine)'의 서평이다. [29] 베이징의 베이징대나 칭화대가 있다면 상하이는 이 학교이다. 상하이교통대 출신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바로 장쩌민이다. [30] 당시 중국 지도자들 중에서 당-군-정 모두에서 덩샤오핑보다 더 강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은 마오쩌둥 단 한 명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특정 분야에서의 영향력만을 가졌을 뿐이었다. 상무위원단 내 서열과 명망에서 보다 앞서는 류사오치가 국가주석으로서 명목상 서열 2위로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간주됐고, 당 주석인 마오와 총서기인 덩샤오핑 사이에는 부주석인 류사오치, 저우언라이, 주더, 천윈 그리고 루산회의 이후로는 린뱌오 등 6인의 부주석이 존재했으나 당이 모든 분야를 지도하는 중국에서 마오쩌둥을 대리해 당을 총괄한 덩샤오핑의 실제 위상은 류사오치, 저우언라이와 대등했다고 간주해도 무방하다. [31] 경제 복구 과정에서 출산율도 1961년 3.86명에서 1962년 6.08명, 1963년 7.51명으로 거의 2배 가까이 폭등시켰고, 1964년부터 1970년까지 중국의 출산율은 문화대혁명이 한창 전개되던 1967년(5.81명)을 제외하면 6명대를 기록할 정도로 많았다. 이후 덩샤오핑이 집권한 1978년 중국의 출산율은 2.72명으로 15년 만에 거의 1/3토막났고, 2020년 기준 중국의 출산율은 1.28명의 매우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32]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하이브리드 쌀을 만들어낸 중국의 농학자. 70년대 후반 그가 개발한 벼 품종은 중국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도입되어 수많은 사람을 먹여살려 노벨평화상 후보로도 선정되었다. 2021년 5월 22일 향년 9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