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가 남명(南冥)인 조선시대 유학자에 대한 내용은 조식(조선)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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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 大明 | Great Mi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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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4년~1662년[1]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명 | 동녕 왕국 | |
청 | ||
이칭 | <colbgcolor=#fff,#1f2023>남명(南明) | |
위치 | 중국 남부 |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 | |
국가원수 | 황제(皇帝)( 천자) | |
국성 | 주(朱) | |
주요 황제 | 소종 영력제 | |
언어 | 중국어, 오어, 민남어 등 | |
문자 | 한자 | |
종교 | 양명학, 대승 불교, 도교 | |
종족 | 한족 | |
통화 | 영력통보(永曆通寶) 등 | |
현재 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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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나라가 이자성군에게 북경을 함락당하고 실질적으로 멸망한 상태에서 그런 명나라를 다시 부활시키려고 노력한 17세기의 부흥운동들이다.중국사에서는 통일왕조의 수도가 함락당해 실질적으로는 멸망했으나, 강남(중국)에서 왕조를 재건하여 부활에 성공한 동진과 남송의 선례가 이미 있었다. 1644년 명나라의 멸망 이후에도 역시 이러한 시도가 벌어졌지만, 계통이 다른 황제가 난립했고 내부 분열조차 통제하지 못해 허무하게 몰락했다.
2. 역사
2.1. 북경의 함락과 숭정제의 자살
1644년의 중국 형세 |
이자성의 농민군이 북경을 함락시키자, 절망한 숭정제가 자살하여 명나라는 멸망했다. 하지만 명나라의 제2의 수도였던 남경에는 명나라를 지지하는 세력이 많아서 주씨 황족을 옹립하여 명나라를 재건하려고 했다. 게다가 남경은 부도였기 때문에 소규모의 조정을 남겨놓았고, 물자·장비·군대를 집중시킨 뒤 수시로 관리했다. 거기다가 성곽도 튼튼했으므로 설사 북경이 적의 손에 넘어가더라도 나라 자체는 살아남을 만했다. 외적 조건으로만 따지면 오호십육국시대나 정강의 변 때보다 엄청나게 좋은 조건이었다. 따라서 명나라 부흥까지는 아니더라도 종묘 사직의 유지에는 성공한 전례인 동진이나 남송처럼 강남을 기반으로 중국 대륙을 양분할 만 했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대실패하고 허망하게 멸망했다.
2.2. 다른 망명정권과의 비교
같은 입장의 망명 정권이었던 남송과 동진은 각각 송고종 조구, 진원제 사마예를 옹립하여 하나로 뭉쳤다. 물론 내부적인 갈등이 없진 않았지만 이들은 최소한 자기네 지도자가 누구인가는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고, 쫓기는 입장에서 국력은 부족하더라도 일단 그 국력을 외부에서의 침략에 대한 방어에 최우선으로 사용한 것이 특징이었다.그러나 남명은 이와 반대로 동시에 여러 황제가 여기저기에서 나오다보니 내부에서 서로 정통성을 놓고 다투는 구도였다. 아래의 황제 목록에 있는 남명의 역대 황제들은 차례대로 즉위하지 않고 '병립'한 인물들이다. 각각 정권을 만들어 통치 기간이 겹치는 데다, 이 정권들은 서로를 인정하긴커녕 협력도 안 했으며 심지어 서로 싸우기까지 했다. 그나마 제1대 황제인 안종 홍광제 주유숭은 제13대 신종 만력제의 자손으로 직계 황통과 가까워 정통성이 있었고, 명나라 제2의 수도라 할 만한 남경을 차지했기에 남명이 오래 갈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불행히도 그러지 못했다.
과거 남송은 지방 군벌들이 송고종에게 상당히 적극적으로 협조했고, 장방창 등 원래는 북송의 신하였다가 금나라에 투항한 인물들이 은밀하게 남송에 도움을 주는 때마저 있었다. 하다못해 동진마저 문벌귀족들이 다 해먹는 구조라 국가 구조는 더 부실했지만 적어도 이민족인 북조에 나라를 팔아먹진 않았다. 그러나 남명은 오히려 오삼계 같은 투항한 한족 신하들이 적극적으로 공격해 왔다.
2.3. 내부 분열
사실 남명도 과거 동진과 남송이 그러했듯 장강을 방어선으로 삼고 청나라의 남진을 막는 전략을 폈다. 북방 출신으로 수전에 상대적으로 약한 청군이 장강을 건너 화남 지방으로 내려오기란 사실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북경 함락 뒤 겨우 1년 만인 1645년 4월 남경이 다시 함락되었으니 충격적이었다. 여기에는 청군에 투항한 한족 출신 장수 및 군대가 많았다는 점과 함께, 남명 스스로가 내분으로 멸망의 길을 열어젖힌 것이 가장 컸다. 1645년 당시 남명은 장강 방어선 곳곳에 장수와 병력을 주둔시켜 청군의 침공에 대비했는데, 문제는 이 와중에 가장 규모가 컸던 좌량옥(左良玉)이 남명 조정의 실권자인 마사영(馬士英)과 갈등을 빚었다는 것이다.물론 이건 남명 조정의 문제보다 좌량옥의 탓이 컸다. 좌량옥은 권력욕이 매우 넘쳐 흘렸는데, 문제는 국가 위기 상황에서도 그 권력욕을 주체하지 못했으며, 마사영과의 관계도 최악이었다는 것이다. 좌량옥의 권력욕은 황당한 사기극으로 폭발했다. 홍광제의 즉위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숭정제의 태자 주자랑임을 주장하는 인물이 나타났다. 수많은 사람들, 심지어 홍광제조차 속아 넘어갈 뻔했으나 주자랑을 가르친 적이 있는 왕탁이라는 신하가 가짜임을 간파했다(남태자 사건). 그러나 세간에서는 홍광제가 제위 유지를 위해 정통성을 위협하는 주자랑을 제거하려 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는데, 좌량옥은 이를 이용하여 마사영의 남명 조정을 치는 반란을 일으켰다.[2]
2.4. 병력의 공백
결국 남명과 마사영은 좌량옥의 난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최전선에서 청군을 막고 있었던 황득공과 유량좌의 휘하 병력들을 소환했으니, 이런 상황에서 청군이 장강 방어선을 못 뚫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좌량옥의 반란은 어찌어찌 막았는데, 좌량옥이 패배에 격분하여 분사하고, 그 병력을 이어받은 아들 좌몽경(左夢庚)이 그대로 청군에 투항했다. 좌몽경은 이후 청나라의 한인 팔기 중 상남기 한군에 편입되었다.그나마 장강 하류의 양주( 양저우)에서는 홍광제 주유숭의 남명 정권에서 병부상서를 맡은 사가법(史可法)이 투항을 거부하고, 최후까지 청군에 항전하여 명나라의 명줄을 어떻게든 유지하려고 애썼으나, 언 발에 오줌 누기에 불과하여 청군의 남하를 아주 약간 지연시키는 데 그쳤다. 사실 그 전에 사가법이 병부상서로서, 홍광제 정권 초기부터 이른바 강북 4진을 두고 방비를 강화하는 동안 남명 조정의 권신들이 방비할 생각은커녕 사가법이 권력을 장악할지 모른다며 그의 힘을 최소화시키려고 4진들의 사이를 이간질시키며 온갖 공작을 다한 것이 큰 문제였다. 사가법은 병력이 열세인 상황에서 섭정 도르곤의 동생이자 태조 천명제 누르하치의 15남인 예친왕 도도가 이끄는 청군을 상대로 비교적 선전하긴 했지만, 외부 지원군이 와서 포위 중인 청군을 협동 공격하기라도 하던가 해야 하는데 그 외부에서 올 수 있는 지원군들이 뭘 하고 있었는지는 바로 윗 문단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지나친 문치주의로 군대와 국방력의 약화를 불러왔다는 남송만 하더라도 양양 - 번성을 거점으로 몽골군을 수십 년 동안 막아냈을 뿐만 아니라, 양양 - 번성 포위전에서도 무려 5년을 버텼다. 그리고 그 5년 동안은 남송 조정이 절대 놀지 않고, 몽골군의 방해를 받으면서도 악착같이 지원군과 물자를 양양성으로 보내기 위해 무단히도 애를 썼다. 결국 양•번은 함락되었고 이후에 벌어진 남송 최후의 전투인 애산 전투에서도 격렬하게 원나라군에 저항하다가 참패하자 아무도 항복하지 않고 다같이 싸우다가 죽었다.
그런데 남명은 남경으로 향하는 길목인 양주가 위급한 상황에서도 권력 투쟁이나 하다가 지원병 하나 보내지 못했다. 결국 사가법은 청군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사가법의 최후에 대해선 전사했다는 설, 포로로 잡힌 후 투항을 거부하여 처형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어느 쪽을 따르든 대명에 충성하다가 죽은 것은 분명하다. 비록 후대이긴 하지만 청나라조차 사가법에게 충장의 시호를 내려 그 충성심과 애국심을 기렸고, 지금도 양저우에는 사가법 기념관이 있다. 다만 후대에 사가법을 기리는 것과 별개로 당대의 청군은 양주에서의 격렬한 저항에 격분하여 점령한 후 대학살을 벌였다. 그 유명한 양주 10일이 바로 이 사건이다. 그런데 이러고도 중원의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기는커녕 남명의 홍광제 정권을 외면했다. 이들은 청군이 상당히 잔혹한 대우를 해서 청군도 싫어했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2.5. 멸망
안종 홍광제 주유숭이 패몰하여 교살된 이후 제2대 소종(紹宗) 융무제 주율건, 제3대 소종(昭宗) 영력제 주유랑과 부흥군의 분파가 강남(중국) 각지에서 일어나 청나라에 대항했으나 싸우는 족족 패배했다. 1659년 대부분의 영토를 잃고, 끝에 몰린 영력제는 황족들과 수백 명의 신하들을 거느린채 따웅우 왕조 치하의 미얀마로 도망갔으나 1662년에 미얀마의 왕 페 민이 두려움을 못이기고 영력제와 그 일가를 한간 오삼계에게 넘겨줘버렸다. 이후 오삼계가 청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하고자 영력제의 일가를 직접 몰살시키면서 남명의 잔존세력은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다.허약했던 남명의 역사는 《 명사》에 있는데, <본기>가 아니라 <열전>에 있다. 이는 청나라에서 남명을 공식적인 왕조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성공의 세력 범위 빨간색: 정성공의 직할령, 주황색: 정성공의 영향권. |
남명의 부흥을 주도했던 인물들 중 유명했던 정성공은 중국 본토에서의 명나라 부흥이 사실상 어려워지자 네덜란드가 식민 지배하고 있었던 대만 섬을 공격해 차지하고, 거기에 동녕 왕국을 건국했다. 동녕 왕국은 명목상으로는 반청복명의 기조를 유지했고, 오삼계가 주동하여 일으킨 삼번의 난 때는 오삼계 등과 협조하여, 본토에 상륙해 복건성에서 청군과 교전하기도 했다.
남명이 패망한 원인을 두고, 당시 남명의 지식인들이었던 황종희(黃宗羲, 1610~1695)와 전징지(錢澄之, 1612~1693), 구식사(翟式紹)와 왕부지(王夫之, 1619~1692) 등은
"청나라에 맞선 이른바 반청 의병들은 대부분 도적이나 불량배들로, 규율이 문란하여 노략질을 저지르니 백성들이 그들을 따르지 않았다. 혹은 부자들이 부리던 종이나 소작인들이 주인들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나선 것이라 사기가 낮고 겁이 많아서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자가 매우 적었으니, 어떻게 강력한 청나라 군대를 이길 수 있겠는가?"
라며 남명에 가담한 세력들이 나약한 도적이나 불량배에 불과했으니 남명이 망했음은 당연하다고 혹평했다.[3]3. 남송과의 비교
다만, 이렇게 보면 남명은 다른 조건은 나쁘지 않았는데 그냥 자기들이 자멸해서 망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가혹한 평가를 내리기에는 남명이 처한 상황이 여러모로 안 좋았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남명을 옹호하는 동정론도 잘못되었다. 청나라도 당시에 산해관을 넘기는 했지만 당시 통제력이 북경일대에만 집중되었기에 남명도 남송처럼 유지될 기회가 3번이나 있었는데 첫째는 청나라와 이자성의 농민군이 장악하지 못한 경제력으로 가치가 큰 산둥일대를 선점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고 둘째는 청나라군을 이자성군이 요격해서 잠시 일시적으로 대치하는 상황을 활용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남경에 있는 명나라 유신들을 끌어모아서 강남이라도 보존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당시 남경에 있었던 무능한 홍광제 정권이 전부 날려먹었다. 중국 역사에서 남명과 가장 많이 비교될 여지가 있는 남송의 예를 보면 아래와 같은 차이점이 있었다.3.1. 후계 문제
송나라는 정강의 변으로 황실의 후계가 매우 깔끔하게 정리된 덕분에 전화위복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명나라와의 가장 큰 차이점이었는데, 자세하게 풀어보자면 북송 휘종의 아들들, 즉 제위 계승자들의 운명을 하나하나 따져 봐야 한다.순번 | 지위 | 이름 | 순번 | 지위 | 이름 | ||
1 |
황태자 →흠종 |
조환(趙桓) |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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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
|
|
20 | 안강군왕(安康郡王) | 조악(趙楃) | ||
3 | 운왕(鄆王) | 조해(趙楷) | 21 | 광평군왕(廣平郡王) | 조건(趙楗) | ||
4 |
|
|
22 |
|
|
||
5 | 숙왕(肅王) | 조추(趙樞) | 23 | 상국공(相國公) | 조천(趙梴) | ||
6 | 경왕(景王) | 조기(趙杞) | 24 | 영국공(瀛國公) | 조월(趙樾) | ||
7 | 제왕(濟王) | 조허(趙栩) | 25 | 건안군왕(建安郡王) | 조앙(趙柍) | ||
8 | 익왕(益王) | 조역(趙棫) | 26 | 가국공(嘉國公) | 조의(趙椅) | ||
9 |
강왕(康王) →고종 |
조구(趙構) | 27 | 온국공(溫國公) | 조동(趙棟) | ||
10 |
|
|
28 | 영국공(英國公) | 조사(趙楒) | ||
11 | 기왕(祁王) | 조모(趙模) | 29 | 의국공(儀國公) | 조동(趙桐) | ||
12 | 신왕(莘王) | 조식(趙植) | 30 | 창국공(昌國公) | 조병(趙柄) | ||
13 |
|
|
31 | 윤국공(潤國公) | 조종(趙樅) | ||
14 | 서왕(徐王) | 조체(趙棣) | 32 | 한국공(韓國公) | 조상(趙相) | ||
15 | 기왕(沂王) | 조악(趙㮙) | 33 | 없음 | 조극(趙極)* | ||
16 |
|
|
34 | 조주(趙柱)* | |||
17 | 화왕(和王) | 조식(趙栻) | 35 | 조단(趙檀)* | |||
18 | 신왕(信王) | 조진(趙榛) | |||||
굵은 글씨: 탈출 성공 취소선: 정강의 변 이전에 요절 *: 정강의 변 이후 출생 |
휘종은 공식적으로 확인된 아들만 무려 35명에 달하고, 이 중 정강의 변 이후 태어난 3명과 그 이전에 요절한 7명을 제외하면 사건 당시 살아있던 황자는 총 25명이었으니 당연히 제위를 두고 치열한 다툼이 일어났을 법도 하고, 만약 그랬다면 남송도 남명처럼 단합하지 못하고 분열되었을 것이다. 그럼 황자 25명은 뭘 하고 있었을까?
우선 황태자는 휘종 본인의 책임전가로 정강의 변 직전 흠종으로 즉위했다가 휘종과 같이 금나라로 끌려갔고, 남은 황자 24명 중 23명과 흠종의 황태자였던 조심(趙諶)도 개봉에 있다가 도망도 못 간 채 사이좋게 끌려갔다. 그리하여 휘종의 황자 25명과 흠종의 황자 1명 중 단 한 명인, 휘종의 9남 강왕 조구만이 도망치는 데 성공해 남송의 황제가 되었고, 제위 계승의 경쟁자가 될 나머지 형제 및 조카들을 모두 금나라가 잡아가면서 북송의 남은 신료들과 백성들에게 있어 조구는 선택지고 뭐고 할 것 없는 유일무이한 대안이 되었다. 또한 휘종이 황제가 될 때 경쟁자였던 신종의 9남(요절한 황자들을 빼면 사실상 차남) 조필도 정강의 변 훨씬 이전인 1106년에 죽은 상황이었다.[4]
반면, 후대의 남명은 상황이 매우 복잡했다. 제16대 의종 숭정제의 적통 황자 3명은 이자성의 난, 그리고 뒤이어 청나라군이 북경을 점령했을 때 모두 실종되었고, 숭정제의 형 희종 천계제는 간신 위충현 때문에 살아있는 자식이 없었다. 그리고 두 황제의 아버지였던 제14대 광종 태창제에게는 총 7남이 있었는데 천계제와 숭정제 외의 아들들이 요절했다. 결국 정통성을 따지려면 명나라 멸망기 황제들의 조부인 제13대 신종 만력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만력제에게는 총 8남이 있었는데 황제로 즉위한 태창제, 요절한 차남인 빈왕 주상서, 4남인 원왕 주상치, 8남인 영왕 주상부를 제외하면 4명이 남았다. 이중 5남이었던 서왕 주상호는 이자성의 난 와중에 장헌충의 반란군에 잡혀 일가가 몰살당했으나, 이를 제외해도 3남인 복왕 주상순, 6남인 혜왕 주상윤, 7남인 계왕 주상영의 가계가 유지되었고, 결국 이 세 가계가 서로 자기들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대립하는 판국이 되어버렸다. 북송은 조씨 황족들을 모두 수도 개봉에서 살게 했지만 명나라는 황실 강화를 목적으로 지방 각 지역에 주씨 황족들을 파견했다. 만약 명나라가 북송처럼 수도에만 황족들을 잡아놨으면 설령 황실의 피가 마를진 몰라도[5] 강왕 조구처럼 가까스로 탈출한 황족 한 명이 정권을 이끌어 나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일단 남명 정권은 만력제의 남은 세 황자들 중 가장 서열이 높았던 3남 복왕 주상순의 아들이었던 홍광제 주유숭을 정통으로 인정했다.[6] 나머지 혜왕 주상윤과 계왕 주상영은 이후 명나라의 정통을 자처한 정권들에게 이용되거나 견제당해, 혜왕 주상윤은 소무제 주율오가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되었고, 계왕 주상영의 아들이었던 영력제 주유랑은 각지에서 황제임을 자처한 황실의 먼 친척들과 대립해야만 했다.[7]
3.2. 주변국가들의 상황
남송의 숙적이었던 금나라는 후방이 불안정했다. 막북의 몽골은 부족끼리 다투는 중이었지만 어쨌든 제압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하필 이때 몽골족에는 칭기즈 칸의 증조부였던 카불 칸이 등장하여 일시적으로 몽골족을 통일하고, 금나라의 후방을 공격해 금나라는 몽골을 상대로 영토를 할양하고, 주기적으로 가축을 보내야 했으며 몽골의 독립된 지위를 인정해야 했다. 그때가 한참 북송을 끝장내고 송휘종과 송흠종을 잡아가 혼덕공과 중혼후 같은 모욕적인 지위를 내리는 등 꽤나 잘나가던 시절이었는데도 오히려 몽골에게 털렸다. 이후 금나라는 몽골 초원에서 벌어지는 분란에 개입해 몽골족의 힘을 약화시켰지만 일시적으로나마 몽골족은 금나라에게 큰 위협이 될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말 그대로 금나라는 남북으로 적이 있었던 셈이다. 또한 요나라의 경우, 1125년에 멸망시키고 얼마 안되었기에 거란족 유민들의 저항을 금나라가 완벽하게 제압했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한편 고려는 정강의 변 1년 전인 1126년에 먼저 칭신하고 들어와 금나라가 뛸 듯이 기뻐했는데, 이는 반대로 말하자면 금나라 역시 고려를 확실히 제압한 상황이 아니고, 외교적으로만 우위를 점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당장 고려가 170,000명의 대군을 동원해서 여진과 충돌하고, 동북 9성 설치까지 시도한 것이 정강의 변 기준으로 20년도 채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당장 고려의 칭신을 주도한 인사는 바로 저 충돌 당시 선봉에서 싸우며 군공을 세운 척준경이었다. 금나라의 입장에선 고려가 완전히 굴종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상황 때문에 일단 저자세를 취했을 뿐 언제라도 다시 위협을 가할 수 있다는 당연한 해석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결론을 내리면 고려가 먼저 숙이고 들어와 한숨 돌릴 수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방심하다간 고려에게 뒤통수를 맞을 우려도 있는 것이었다. 1125년의 요나라 멸망, 1126년의 고려 칭신, 1127년의 정강의 변이라는 급격한 타임테이블 속에서 후방이 다 안정되지도 않았는데 전력을 다해 금나라군이 화남 지방으로 진격하기는 무리였다. 즉 급속히 두 개의 제국을 멸망시키고, 힘을 키웠지만 아직 그 기반이 구석구석까지 다져지지 못한 이런 상황에서 무리하게 남쪽으로 진군했다가는 비수대전 꼴이 날 수도 있었다. 실제로 금나라는 고려에겐 일관되게 온건한 입장을 취했으며, 심지어 무신정변으로 고려가 혼란에 빠졌을 때도 금나라는 개입하지 않은채 관망하기만 했다. 거기다 고려 중앙군과 지방군 사이의 내전이라고 불리는 조위총의 난이 벌어졌을 때 조위총이 자신들이 보유한 40여 개 성을 금나라에 바칠테니 원병을 요청한 적이 있었는데 금나라는 영토를 사실상 공짜로 획득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도 그 요청을 거부했고 결국 조위총의 난은 진압되고 말았다. 또한 탕구트족의 서하도 금나라에 군사적으로 복속된 것은 아니라서 여기도 병력을 배치해야했다. 결국 금나라는 군사적으로 복속되지 않은 몽골, 고려, 서하의 국경에 병력의 일부를 배치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남송을 전력으로 들이칠 수 있는 병력의 약화를 초래했다.
금나라는 그때나 이후나 경제력이 매우 취약했다. 금세종 이전까지는 국가 예산에 대한 회계조차 없었고, 돈을 받고 관직을 주는 매관매직 행위가 전성기인 금세종 때도 있었으며, 그나마 부족한 경제력을 메꾸기 위해 남송으로부터 세공(금세종의 시기부터는 세폐)을 받아내야 했다. 그나마 초기에는 꽤 많이 받아냈지만 해릉양왕의 삽질 이후 나라꼴이 영 엉망이 되어버리자 일단 안에 있는 문제부터 해결하기 위해 남송과 타협하면서 세폐를 줄였다. 그럼 또 그렇게 받아낸 세폐를 잘 이용했느냐? 그렇지도 않아서 남송과 무역을 하느라 유출되는 양이 꽤 많았다. 이렇게 부가 타국으로 유출되는 일이 많다 보니 조공무역마저 통제할 정도였다.
하지만 후대의 청나라는 달랐다. 신종 만력제의 치세 말기 건주여진은 천천히 착실하게 세력을 키웠고, 만주 지방에서의 확실한 우위를 점하며 내몽골을 완전히 복속시킨 후 칸의 자리에 올랐고, 병자호란으로 금나라 때 고려 포지션이었던 조선까지 거의 확실하게 복속시켰다. 청나라는 금나라와 달리 후방에 대한 우려가 거의 없었던 것이며, 이는 전력으로 남명을 들이칠 수 있었던 호조건이었다. 금나라와는 달리 청나라는 만력제 때부터 세력을 차근차근 키웠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어쩌면 자신들의 조상인 금나라를 반면교사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3.3. 경제적인 여력
정강의 변 당시 북송이나 멸망 이전의 명나라나 암군들의 가혹한 통치로 경제가 어려웠고, 민생이 도탄에 빠졌다. 다만 17세기 중반 당시의 명나라는 그 수준이 심해도 너무 심각했다.북송의 경우, 선대 황제들때부터 재정 적자 문제가 거론되고 있었지만 이것이 국가 멸망까지 치달을 수준은 아니었고 왕안석과 신법당에 의한 개혁을 시도하는 등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 편이었다. 그리고 재정 적자 문제가 당장 민생 파탄으로 이어지지는 않았고 오히려 북송대의 경제는 역대 어느 통일 왕조와도 비교못할 정도로 번성했다. 화남 지방의 개발도 송나라 시기에 계속되었다. 다만, 휘종이 그놈의 예술 덕후질로 세금을 팍팍 걷으면서 민생을 말아먹었을 뿐, 그걸 제외하면 당장 국가 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질 상황은 아니었다. 역설적이게도 뜯어먹을 게 있으니 예술 덕후질을 할 수 있던 것이었다. 이런 북송의 충실한 경제력은 화북을 상실한 이후에도 남송이 금나라에 대해 저항하는데 있어 강력한 기반이 되었다.
반면 후대의 명나라는 처참했다. 북송을 말아먹은 휘종의 통치가 25년이었다면 명나라 후기 4대 암군의 통치는 100년에 달했으며 그 중 가장 심각한 신종 만력제가 혼자 반 세기였다.[8] 이런 기나긴 암군의 통치 속에 명나라의 경제력은 회복불능에 빠졌고 민생은 완전히 박살나서 명나라 말기에 농민 반란군의 수가 100만 명 단위로 쏟아져나오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남송과 달리 장강 이남을 온전히 확보하여 그 경제력을 이용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풍족한 생산력을 지닌 사천 지방은 장헌충의 서나라가 장악하고 있어서 남명의 경제적인 기반이 되어주지 못했고, 역시 화남의 또 다른 경제적 기반이었던 호북성(한나라 시기의 북형주 지역) 일대에는 청군에게 패주한 이자성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나마 제2의 수도인 남경이 위치한 절강성 및 복건성 지역이 경제력과 인구 부양력이 괜찮긴 했지만 이미 사천과 호북을 뺏긴 탓에, 과거 장강 이남 지역의 대부분을 장악한 남송의 경제력과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었다.
3.4. 군사적인 여력
남송이 화남 지방의 경제력을 기반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최종적인 이유는 결국 금나라에 대한 군사적 승리였다. 장강을 넘어 침공해온 금나라의 군대는 악비, 한세충같은 명장들이 잘 조련된 군대를 이용하여 격파했다. 남송에는 아직 풍부한 병력과 유능한 장수들이 남아있었고 자연 환경과 금나라의 보급로가 길어진 것 등을 이용하여 군사적인 승리를 거두어 국가를 존속시킬 수 있었다.하지만 명나라에겐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명나라의 정예병력들과 뛰어난 지휘관들은 대청전쟁과 이자성의 난 와중에 모두 소멸되었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원숭환은 대청전쟁 과정에서 억울하게 처형되었고, 홍승주는 투항했으며, 양사창은 이자성의 난 진압 과정에서 분사했고, 손전정은 숭정제의 무리한 출병 요구에 떠밀려 동관 전투에서 싸우다가 결국 전사했다. 이자성군에게 매번 패배만을 거듭하던 무능한 좌량옥 따위가 남명 최대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결국 반란을 일으켰다가 좌량옥은 죽고, 그 아들은 청나라군에 투항하는 꼴을 보면 경제적 기반이 멀쩡했다한들 남명이 계속 버텼을지 의구심이 든다. 남명의 가장 결연한 항전이었던 양주 전투를 지휘한 병부상서 사가법은 군인이 아닌 관료 출신으로, 남명에는 제대로 된 장수가 한 명도 없었다.
게다가 남명이 청나라의 남진을 막기 위해 설치한 방어선인 강북 4진(江北四鎭)을 구성하던 군벌들인 황득공(黃得功), 고걸(高傑), 유량좌, 유택청(劉澤淸)은 서로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내분을 벌였고, 이를 말리는 홍광제의 명령도 듣지 않았을 만큼 지휘체계도 엉망진창이었다 #.
4. 당시 주변국들의 반응
조선에서도 이 남명의 존재를 알고 있었는지, 송시열은 상소를 올렸을 때'중국 남녘 외진 곳에 한 줄기 정통이...(중략)'
이라는 구절을 넣었고, 남명 최후의 황제인 영력제의 연호를 쓰기도 했으며, 심지어 영력제가 처형당하자 자체적으로 이를 기려서 이를 알게 된 청나라와 외교 분쟁까지 갈 뻔했다. 다만 송시열이 상소에서 '그들을 돕고 있는데 아무도 모르게 하는 건가요?'
라는 표현을 쓴 것을 보면. 조선에서는 최소한 청나라가 대놓고 눈치 챌 정도로 남명을 지원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어차피 거리가 너무 멀어 지원해 주고 싶어도 못했을 것이다. 송시열의 상소에는 전체적으로 남명에 우호적이고, 그들을 도와야 한다 어쩌고 하는 내용이 있지만, 송시열의 행보를 살펴보면 '북벌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자신과 자신의 세력에 정당성을 가져다 줄 수 있으니' 지지한 듯하다. 영력제 사후 조선의 양반들이 영력제를 기리기는 했으나 반청 인사들이 영력 연호가 아니라
숭정 연호를 사적으로 사용한 것을 보면, 아무래도 조선은 남명을 정통 정권으로 인정하지는 않은 것 같다.다급한 남명 정권은 외국에도 구원을 청한 바 있었는데 일본에 지원병을 보내달라고 몇 번이나 사절을 보냈지만 도쿠가와 막부는 청나라와 충돌할 것을 우려해 동녕 왕국과의 교역 이권을 인정하는 수준에서 그쳤다.[9]
남명의 제3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였던 영력제는 로마 교황을 비롯한 서양 세력에 구원을 요청했으나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
5. 남명 정권이 존속했다면?
만약 남명 정권이 청나라의 공세를 막아내고, 하내 사마씨의 동진이나 팽성 유씨의 유송처럼 강남(중국)을 장기적으로 점유하는데 성공했다면 동아시아의 역사가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우선 청나라는 남명과의 대치로 인해 만주와 내몽골, 중국의 화북 지방만으로 영토가 한정되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외몽골 말고도 티베트와 준가르까지 오늘날 독립국으로 남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특히 티베트와 준가르(위구르)는 불쌍할 정도로 운이 나쁜 점이 청-남명, 청-삼번(오주), 청-태평천국, 북양정부-국민정부, 중국공산당- 중국국민당 등 무려 5번이나 대륙이 분단되어 대치하는 시나리오가 가능해서 생존할 가능성도 있었으나 5번 모두 단기적인 분열로 그치고 다시 통합되는 바람에 결국 통일 상태가 된 중국의 침공을 받고,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잃은 채 자치구가 되었다.
남명 정권은 중원을 되찾기 위해 강남(중국)에서 재정비를 한 후 청나라에 반격했거나, 오삼계, 상가희, 경정충 등 청나라에 귀순한 한족 장수들을 다시 회유해서 내부 반란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청나라를 무너뜨리거나, 준가르 및 조선과 동맹을 맺고 청나라를 공격했을 수도 있다. 또는 북벌이 실패하여 청나라와 그대로 대치 상태가 유지되면서 근현대까지 중국이 분단 상태로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의 경우, 북벌론이 더욱 탄력을 받고 남명과 동맹을 맺어 청나라를 공격했을 수도 있으나 아직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내상이 컸던 상황을 고려하면 금나라와 남송 시기의 고려처럼 청나라와 남명 사이에서 적당히 실리를 취하면서 방관하는 방식으로 외교를 했을 수도 있다. 애초에 고려 시절에도 양면협공으로 이민족 제국을 공격한 사례는 없었다.
남명이 존속했다면 남명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청나라가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정변이나 급변 사태에 개입하기가 힘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금-남송이 대치했을 때 사례를 보면 고려에서 무신정변이 터졌을 때 금나라는 남송과 대치하는 중이라서 무신정변으로 즉위한 명종(고려)의 즉위를 승인하기도 했으며, 조위총의 난 당시 조위총이 40여 개 성을 금나라에 바치는 조건으로 구원병을 요청했으나 철저하게 무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인정권의 집권자들이 고려의 국왕들을 자기 마음대로 갈아치우는데도 금나라가 그때마다 이를 막지 못하고, 결국 승인하는 형식을 취한 것을 봤을 때, 남명이 생존해서 청나라와 대치하는 구조였다면 조선에서 정변이 터져도 청나라는 개입하지 못하고, 정변이 성공하면 승인하는 형식을 취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륙을 통일하자 청나라는 한반도 문제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물론 본격적으로 개입을 한 것은 중화질서가 무너지고 있었던 아편전쟁 이후이기는 했지만 남명이 생존에 성공했거나 태평천국이 할거해 성공했다면 개입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터지자 원세개를 보내 무력으로 진압하고, 군대를 주둔시켰다. 이후 갑신정변도 진압해서 청일전쟁이 터지기 전까지 조선을 청나라의 영향력 아래에 확고히 두게 된다.
6. 역대 황제
자세한 내용은 명나라/왕사 문서의
남명의 황제
부분을
참고하십시오.7. 관련 문서
[1]
혹은 1664년.
[2]
남태자 사건에 대해서는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고, 좌량옥이 이를 이용했다는 설, 좌량옥이 계획적으로 준비했다는 설이 있다. 남명 시기의 혼란이 워낙 심한지라 어느 쪽 모두 확실한 근거가 없다.
[3]
출처: 《지도에서 사라진 나라들》/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176쪽
[4]
다만 고종의 어린 아들이 요절한 이후 고종이 자식을 얻지 못하면서 고종의 후계 문제가 발생하기는 했지만, 고종이 방계 황족을 양자로 들여 황태자로 책봉하는 방법을 택하면서 고종의 후계 문제는 별다른 갈등 없이 원만하게 해결되었다.
[5]
실제로 기껏 도망친 송고종은 정작 그 과정에서 어이없게도 고자가 되는 바람에 아들이 없어, 머나먼 조상인 송태조 조광윤의 후손을 양자로 책봉해 즉위시켜야만 했다.
[6]
주상순 본인은 이자성의 난 와중에 이자성군에 잡혀 죽고,
삶아져서 반란군 병사들에게 먹혔다.
[7]
제8대 헌종
성화제 이후로는 황자가 귀해서 제13대 신종 만력제의 후손을 제외한 황족들 중에서는 제12대 목종
융경제의 4남인 노왕 주익류의 가계가 가장 가까운 황족이었고, 그보다 더 먼 황족들은 성화제나 그 이전 황제들의 자손들이라 굉장히 먼 방계였다.
[8]
이 4대 암군이라는 것도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만력제만큼은 어느 시대이건 까이는 군주였다. 오죽하면 명나라는 만력제 때 망했다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이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만동묘까지 세워줄 정도로 대접받았다.
[9]
사실은
1652년 남명의
영력제 정권이
에도 막부의 제3대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미츠에게 주순수라는 사절을 보내어 구원병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쇼군 이에미츠는
막부의 중신들과 회합했는데 이 자리에서 과격파들은 '천하의 불평
낭인 수십만 명을 모아 중원에 진공하여, 달단(만주족을 가리키는 말)을 정복하고 중원을
한족(漢族)들에게 다시 회복시켜 우리에게
조공을 바치게 하자'고 주장했지만 합리적인 막부(幕府)의 수석 각로였던
마츠다이라 노부츠나가 '간신히 얻은 천하태평을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다'며 강력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결국 남명을 돕기 위한 파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 이와 별개로,
주순수는 일본에 그대로 남아, 쇄국 중이었던 일본에 중국의 문화를 재전파하는 데 상당한 공을 세워서 지금까지도 일본에서 기억된다. 남명이 남긴 몇 안 되는 흔적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