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마운트배튼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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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제2대 국방참모총장 | |||
제1대 버마의 마운트배튼 백작 루이 마운트배튼 Louis Mountbatten, 1st Earl Mountbatten of Burm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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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G GCB GCSI GCIE GCVO DSO ADC OM PC FR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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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루이 프랜시스 앨버트 빅터 니컬러스 마운트배튼 (Louis Francis Albert Victor Nicholas Mountbatt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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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0년 6월 25일 | ||
영국 버크셔 원저 프로그모어 하우스 | |||
사망 | 1979년 8월 27일 (향년 79세) | ||
아일랜드 슬라이고 주 물락모어 | |||
묘소 | 잉글랜드 햄프셔 롬지 수도원 | ||
재임 기간 |
제44대 인도 부왕 (Viceroy of Ind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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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2월 12일 ~ 1947년 8월 15일 | |||
초대 인도 자치령 총독 (Governor-General of the Dominion of Ind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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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8월 15일 ~ 1948년 6월 21일 | |||
제79대 제1해군경 (First Sea Lor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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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4월 18일 ~ 1959년 10월 19일 | |||
제2대 국방참모총장 (Chief of the Defence Staf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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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10월 19일 ~ 1965년 7월 15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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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247d><colcolor=#fff> 신체 | 180cm | |
아버지 | 바텐베르크의 루트비히 공자 | ||
어머니 |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 | ||
형제 | 앨리스, 루이즈, 조지 | ||
배우자 | 에드위나 애슐리 (1922년 결혼 / 1960년 사망) | ||
자녀 | 패트리샤, 파멜라 | ||
학력 |
영국해군사관학교 (졸업) 케임브리지 대학교 크라이스트스 컬리지 ( 영문학) 그리니치 왕립해군대학 ( 전기공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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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성공회 | ||
군사 경력 | |||
복무 기간 | 영국 해군 | ||
1913년 ~ 1965년 | |||
최종 계급 |
해군 원수 (Admiral of the Fle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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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
연합작전본부장 (Chief of Combined Operations) 참모총장위원회 위원 (Member of the Chiefs of Staff Committee) 동남아시아연합군 최고사령관 (Supreme Allied Commander South East Asia) 제1순양함전대장 (Commander of the 1st Cruiser Squadron) 제4해군경 (Fourth Sea Lord) 지중해함대사령관 (Commander-in-chief of the British Mediterranean Fleet) NATO군 지중해사령관 (NATO Commander Allied Forces Mediterrane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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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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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귀족, 군인, 정치가. 버마의 마운트배튼 백작(Earl Mountbatten of Burma). 스웨덴의 왕비 루이즈 마운트배튼의 남동생이자,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이고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인 필립 마운트배튼[1]의 외삼촌이기도 하다. 인도제국의 마지막 총독이었으며, 2차대전 당시 영국군의 특수부대 창설에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1900년에 태어나 1979년 아일랜드에서 IRA의 폭탄 테러로 사망했다.풀네임은 루이 프랜시스 앨버트 빅터 니컬러스 마운트배튼(Louis Francis Albert Victor Nicholas Mountbatten)이며 애칭은 디키(Dickie). 디키라는 애칭은 원래 리처드의 애칭으로 자주 쓰이는 이름이지만 루이의 중간 이름에는 리처드가 없는데, 원래 니키라고 하려고 했지만 니키가 가까운 친척인 이모부 니콜라이 2세의 애칭이라 앞 글자를 D로 바꿔 디키로 정한 것. 어머니 헤센의 빅토리아에 따르면 자녀들은 모르겠지만, 루이가 태어나기 전에 루이의 아버지 바텐베르크의 공자 루트비히를 디키라고 불렀다고 했다.
2. 작위
- 바텐베르크의 루이 공자(Prince Louis of Battenberg) (1900)
- 루이 마운트배튼 경(Lord Louis Mountbatten) (1917)
- 사우스햄튼 카운티의 롬지의, 버마의 마운트배튼 자작 (Viscount Mountbatten of Burma, of Romsey in the County of Southampton) (1946)
- 사우스햄튼 카운티의 롬지의 롬지 남작(Baron Romsey of Romsey in the County of Southampton)
- 버마의 마운트배튼 백작(Earl Mountbatten of Burma) (1947)
- 사우스햄튼 카운티의 버마의 마운트배튼 자작(Viscount Mountbatten of Burma, of Romsey in the County of Southampton)
- 사우스햄튼 카운티의 롬지의 롬지 남작(Baron Romsey of Romsey in the County of Southampton)
3.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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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시절의 루이 마운트배튼 |
1900년에 2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1912년부터 1914년까지 영국 해군 제1해군경을 지낸 바텐베르크의 루트비히 공자[2], 어머니는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이자 앨리스 모드 메리 공주의 첫 딸 헤센의 빅토리아로, 루이는 빅토리아 여왕의 외증손자였다. 부계인 바텐베르크(Battenberg) 가문은 19세기 중엽 헤센 대공국의 대공 루트비히 3세의 동생 알렉산더와 율리아 하우케 여백작의 귀천상혼으로 생겨난 헤센다름슈타트 가문의 방계 가문이었는데,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적국인 독일계가 왕실의 친척임을 국민들이 안 좋게 볼 것이라는 이유로 조지 5세의 칙명으로 아버지가 독일 귀족의 지위를 버리고 가문의 성을 영국식으로 마운트배튼으로 바꿨다. 독일어로 산(山)을 뜻하는 '베르크(berg)'를 같은 의미의 영단어 '마운트(mount)'로 고치고, '바텐(Batten)'을 영어식 독음인 '배튼'으로 바꾼 뒤 본래 배열과 바꿔서 '마운트배튼(Mountbatten)'으로 개명했다.[3] 큰누나 앨리스는 그리스의 안드레아스 왕자의 왕자비, 작은누나 루이즈는 스웨덴 구스타프 6세 아돌프의 왕비였고, 형 조지는 아버지의 밀포드 헤이븐 후작위를 이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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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식에서 빅토리아 여왕과 루이 마운트배튼 |
루이의 아버지인 루트비히가 돈 굴리는 재주가 유난히 없는 편이라 재산을 러시아와 독일에 몰빵했다가 러시아 채권은 러시아 혁명으로, 독일 채권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제국이 패배하면서 모조리 휴지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돈은 많이 없었다. 사실 바텐베르크 가문이 원래 돈이 많은 집안은 아니기도 해서, 루이 마운트배튼이 태어났을 적부터 생활 수준은 귀족이라기보단 "해군 장교"하면 떠오르는, 영국 중산층 정도의 살림살이였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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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에드워드 8세, 오른쪽이 루이 마운트배튼이다. |
1922년, 그리스 왕정이 전복되었을 때, 그리스의 안드레아스 왕자에게 시집갔던 누나 앨리스가 망명생활을 할 때 재정적으로 후원하였다. 당시 영국 왕실은 러시아에서 뜸을 들이다가 친척들이 무더기로 처형 당한 경험이 있어서 안드레아스 왕자 일가의 목숨이 위험해지자 곧바로 구하려고 노력했다. 이후 누나 앨리스의 아들 필리포스는 영국에 머물다가 성장해서는 해군 장교로 복무했고 엘리자베스 공주와 사귀게 되어 조지 6세에게 결혼을 허락받았다. 이 때 필리포스는 마운트배튼 경의 권유에 따라 외가 쪽 성인 마운트배튼을 성으로 쓰게 되고, 영국식으로 바꾸면서 필립 마운트배튼이 되었다. 이후 엘리자베스 공주가 왕위에 즉위하여,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으로서 에든버러 공 필립이 되었다.
3.1. 결혼
루이와 에드위나의 결혼식 사진 | 왼쪽부터 루이, 에드위나, 패트리샤, 파멜라. |
1922년 영국 정치인 제 1대 마운트템플 남작[7]의 딸인 1살 아래의 에드위나 애슐리(Edwina Cynthia Annette Ashley)와 결혼했다. 에드위나는 결혼 얼마 전에 외할아버지 어니스트 카셀이 사망해 재산을 대부분 상속받아서[8] 어마어마한 부자였다. 에드위나의 외할아버지 어니스트 카셀은 에드워드 7세의 재산관리인이기도 했던 대금융가에다[9], 영국에서 손꼽히는 자산가로 그가 에드위나에게 상속해 준 재산은 미화로 대략 4천만 달러 정도였다. 이걸 현대의 4천만 달러와 비교하면 안 되는 게 당시 세계 최고의 부자였던 존 데이비슨 록펠러가 1937년 아들 록펠러 2세에게 상속해 준 재산이 5억달러 조금 안 되던 시절이라는 걸 생각해야 한다.[10] 그러니까 이제 막 20살 된 처녀가 역사상 최고 부자 재산의 1/10 정도의 부자라는 뜻이다. 결혼 당시 에드위나의 재산은 남편인 루이의 연 수입의 1만 배가 좀 넘었다고 한다.[11]
해군인 남편과 떨어져서 지내던 에드위나는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결혼한 지 3년도 안 됐을 때부터 여러 남자와 불륜을 저질렀다. 에드위나는 수많은 파티에 참석하고 여행을 다니느라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루이는 에드위나가 불륜을 저지르는지 몰랐지만 친구인 에드워드 8세가 직접 알려줬다. 이 사실을 알게 된 1년 후에야 에드위나와 이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 한 후 잠시 사이가 좋아진 것처럼 보였으나 에드위나는 금방 다시 이전과 같은 삶을 살았다. 조심스럽지 못했던 에드위나의 사생활은 지인들 사이에서 유명해졌고 그들은 에드위나가 마운트배튼 가와 카셀 가를 욕보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에드위나의 행동은 남편을 실망시키고, 그의 이름을 손상시키고, 그의 경력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었다.
지인들은 루이가 진실을 직시하는 것을 도왔다. 결국 결혼한 지 9년 만에 에드위나와 긴 논쟁 끝에 서로 좋은 친구처럼 지내고 비밀이 없도록 하자고 약속했다. 이후 루이도 아내 에드위나처럼 애인을 두기 시작했다.[12] 이혼을 할 수도 있었지만 그로 인해 명성이 나빠져 커리어에 지장이 갈 수도 있는데다, 에드위나의 재정상태는 루이에게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open marriage를 유지하였다.[13] 이런 특이한 두 사람의 결혼은 처음에는 비밀이었지만, 이후 영국 왕실 인사들 사이에서는 거의 공공연한 사실이 된다. 두 사람은 아들은 없고 두 딸인 패트리샤와 파멜라 만을 뒀는데 이들은 모두 생물학적으로 루이의 친딸들이다. 루이의 사후 버마의 마운트배튼 백작 작위는 큰딸 패트리샤가 계승했다.
에드위나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남편의 가족이나 친척들에게 그 엄청난 재산으로 평생 연금을 지급하며, 그들이 곤궁한 생활에서 벗어나고 왕족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14] 어쩌면 이런 경제적 도움 때문에 두 사람의 이상한 결혼 생활에 대해서 입을 닫고 모른 척 했는지도 모른다.
또한 에드위나는 사회 활동에도 열성이었다. 이승만 정부 당시 아동 구호 문제로 방한한 이력이 있다.
루이는 자신의 형이자 조카 필립의 후견인이었던 2대 밀포드 헤이븐 후작 조지 마운트배튼이 사망한 후[15], 1938년부터 17살인 필립의 후견인 역할을 했다.[16] 루이가 필립의 멘토 역할을 하루 아침만에 하게 된 것은 아니다. 처음 후견인을 맡을 때만해도, 필립과 그렇게 친근한 사이는 아니었다. 필립은 여전히 방학 때마다 독일에 있는 둘째 누나 테오도라의 집에 갔고, 런던에 있을 때는 외할머니 헤센의 빅토리아와 켄싱턴 궁전에서 지냈다. 해군의 떠오르는 별 중 하나였던[17] 루이는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바다에 오랫동안 나가 있기도 했다. 하지만 점차 주말과 방학마다 루이의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며 친해졌다.[18]
왜 멀쩡한 부모가 아닌 루이가 필립의 후견인이였냐면 그리스에서 망명한 이후 필립의 어머니 앨리스는 조현병 증상을 보여 요양원에 들어간데다가, 요양원에서 나온 이후에도 자식들에게 돌아가지 않고[19] 그리스에서 자선활동을 하고있었으며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는 가족과 관계를 단절하고[20] 몬테 카를로의 카지노를 전전하며 살다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필립 공은 성장기 대부분을 부모에게서 떨어져 외할머니 빅토리아 공녀와 외삼촌인 밀포드헤이븐 후작 부부에게 양육되며[21] 기숙사가 있는 사립학교를 다녔다. 이렇듯 필립 공이 아버지와 다름없던 루이 마운트배튼을 기리기 위해 영국 왕실에서[22] 거의 사용하지 않는 이름인 루이를 새로 태어난 필립 공의 증손자에게 붙인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23][24]
3.2. 제2차 세계 대전
해군 제독의 예복을 착용한 루이 마운트배튼 |
이후 항모 일러스트리어스의 함장으로 근무하면서 몰타 항공전에도 참여했다. 다만 몰타 항공전에서 항모 일러스트리어스가 가장 큰 공을 세운 전투는 그의 전임 함장이 함장으로 있을 때였고 그는 그 후임 함장이었다.
이후 해군 준장으로 승진, 연합작전본부장(Chief of Combined Operations)으로서 디에프 상륙 작전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이고 지휘하였으나, 하나도 제대로 준비된 게 없었기에 끔찍한 실패로 이어졌다. 그래도 이 작전의 실패로 연합군은 대규모 상륙작전에 대한 교훈을 얻어 여러가지 보완을 거친 다음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성공시켰고, 나중에 루이 마운트배튼은 "디에프에서 죽은 한 명이 노르망디에서 열 명을 살렸다."고 평가했다. 물론 디에프에서 죽거나 포로가 된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기에, 영국군 대신 작전의 주축을 이뤘다가 사단이 전멸하는 피해를 입은 캐나다에선 이에 대한 2부작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기도 했다.
마운트배튼의 저 발언과 달리 디에프 상륙작전이 그 자체로서 실패한 작전이라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는 게 전사가들의 공통된 평이지만 저 때의 경험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준비를 훨씬 철저히 할 수 있었다는 부분만큼은 디에프 상륙작전을 비판하는 전사가들도 대부분 인정하고 있다.
이 무렵 여러모로 신무기에 관심이 많았는데, 당시에 비열하다고 아군에게서도 비난받던 코만도, SAS 등 특수부대를 대폭 지원하였고, 이러한 특수부대의 성공에는 윈스턴 처칠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두터웠던 루이 마운트배튼의 지원이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 외에도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사용된 여러 상륙전 장비들의 개발이 루이 마운트배튼이 연합작전본부장을 재임하는 동안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단순히 왕족으로 얼굴 마담급으로만 활약했던 게 아니라 2차대전의 승리에 상당히 큰 공을 세웠다는 뜻이다.
그 후에는 유럽 전선을 떠나 동남아연합군 총사령관(Supreme Allied Commander South East Asia)으로 부임하여, 영국군, 미군, 중국군으로 이루어진 연합군을 지휘하여 동남아의 일본군과 싸웠다. 그러니까 버마 전선에서 무다구치 렌야가 임팔 작전을 지휘할 때 연합군 최고 지휘관이었다는 뜻이다. 그가 SEAC 최고 사령관이 되었을 때 겨우 43세에 불과해서 처칠의 정실 인사 아니냐는 우려를 사기도 했지만 이 인사는 처칠의 신의 한 수급 인사가 된다. 루이 마운트배튼은 군인으로서도 뛰어난 인재였지만 뭐니뭐니해도 인간적인 친화력이 굉장히 뛰어난 사람이었는데 바로 이 미군, 영국군, 중국군으로 이루어진 삼국 연합군의 사령관 자리라는 게 이 인간적 친화력을 무지무지 요구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루이 마운트배튼은 장제스부터 시작해서 자신보다 나이와 경험도 많고 개성도 강한 삼국의 지휘관을 잘 융화시켜 전쟁 승리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중국 정보에 밝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간적으로 빵점에 가까운 조지프 스틸웰을 이 지역 미군의 총지휘관으로 임명하는 바람에 이후의 작전 전개에 엄청난 장애가 되었던 점과 대조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25]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한다는 점에서 보면 루즈벨트보다 처칠이 한 수 위였던 셈이다. 물론 그가 이런 큰 공을 세운 데 그의 혈통이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는 점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시기에 한국과 약간의 인연을 맺게 되는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보낸 한국광복군의 활약에 긍정적인 인상을 받아서 직접 치하하고 인원을 증원해 달라고 요청을 했지만, 장제스의 거부로 무산되었다.[26]
이후 전쟁이 끝나고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 같은 일본군 점령지를 수복하는 등의 전후 처리에도 상당한 수완을 보여주였다. 그리고 이 경력 때문에 동남아 정세에 정통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이후 인도의 영국 지배를 끝내는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어려운 임무를 받아 인도의 마지막 총독에 임명된다.
루이 마운트배튼은 전쟁 이후에도 일본과 관련된 일은 절대 하지 않았고[27] 웬만해서는 일본인들과 만나지도 않았다. 다만 딱 한 번 영국을 방문한 히로히토와는 접견한 일이 있다. 이것도 처음에는 피하려고 했지만[28] 조카며느리인 엘리자베스 2세가 국가에 필요한 일이라며 개인적으로 요청해서 이루어진 접견이었다.
3.3. 인도 총독
동남아 지역의 전쟁이 정리되고 동남아 지역 최고사령부가 임무를 종료하면서 임시 계급도 원복되어 소장으로 돌아간 마운트배튼은 자작 작위를 받고 인도 제국에 총독으로 부임했다. 그가 받은 임무는 인도 제국의 유지가 아니라 독립이지만, 분리독립을 하던 말던 상관 없이 그 과정에서 최대한 영국의 위신을 차리면서 빠져나오라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영국은 식민지를 유지하기도 벅찼는데 제2차 세계대전으로 한층 더 피폐해져서 식민제국을 유지할 힘이 없었다. 마운트배튼은 마지막 인도 총독으로서 신생 인도 자치령 정부에 원활하게 정권이 이양되도록 활동했고, 인도 자치령 출범 이후에도 인도 자치령 초대 총독으로서 의례적인 국가원수[30]의 역할을 했다.이 때 인도의 독립영웅 자와할랄 네루와 굉장히 친해졌는데 네루와 아내 에드위나 마운트배튼 백작부인 사이에서 염문이 있었다. 이때 에드위나와 네루 사이에 육체 관계가 있었는지 아니면 두 사람의 사이가 플라토닉한 관계였는지는 아직도 의문이 많다. 에드위나의 딸들인 패트리샤와 파멜라에게 물어봤을 때는 두 사람 다 증거는 없지만 엄마의 성격으로 봐서 실제 육체 관계가 있었을 거라고 증언했으나, 네루와 에드위나의 당시 연령[31] 때문에 육체 관계까지 가지는 않았을 거라는 주장도 있다.[32]
에드위나 마운트배튼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는 네루. |
세 사람의 친밀도가 잘 드러난 사진 |
인도 총독 직을 마치고 귀국한 마운트배튼은 백작이 되었으며 지중해함대의 제1순양함전대장을 지냈다. 이후 제4해군경과 지중해함대사령관을 지내고 1955년 제1해군경에 임명되었다. 그의 아버지도 1912년부터 1914년까지 제1해군경을 역임했는지라 부자가 나란히 제1해군경에 임명되는 건 영국 역사상 처음이었다. 1959년부터 65년까지 국방참모총장 직을 지냈다. 제1해군경 재직 중인 1956년에 영국 해군 원수 계급에 올랐다.
3.4. 마운트배튼 왕조의 개창을 막은 원흉?
세간에는 루이 마운트배튼이 경솔하게 입을 놀리는 바람에 영국 왕실이 마운트배튼이라는 성씨를 쓰지 못하고 윈저 가문이라는 이름으로 고정시켜버렸다는 에피소드가 알려져 있지만, 이는 상당히 왜곡된 정보다.대략 알려진 이야기는 이렇다. 1952년 2월 6일, 조지 6세가 사망하고 엘리자베스 2세가 왕위에 올랐다. 이 때 루이 마운트배튼 백작은 무모하게도 "엘리자베스 2세의 남편이 (자신의 조카) 필립이니, 왕가의 이름은 마운트배튼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조지 5세의 왕비이자 조지 6세의 모후이며 엘리자베스 2세의 조모로서 아직 생존해 있던 메리 대왕대비가 매우 격노하고, 영국의 왕가는 앞으로 계속 윈저가 될 것이라고 윈스턴 처칠에게 통보하여 앞으로도 마운트배튼으로 바뀌는 일은 절대로 없게 되었다. 마운트배튼 백작은 자신의 실언으로 현 영국 왕조의 이름이 윈저로 굳어지는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라는 얘기다.
하지만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왕실의 이름을 윈저라고 바꾸던 당시에 영국 왕실의 어른들과 정부 수뇌가 함께 모여 앞으로는 여왕이 즉위해도 여왕의 남편 가문 이름으로 바꾸는 일 없이 영국 왕실은 영원히 윈저라고 한다는 내부적 합의가 이루어진 상태였다. 다만 내부적 합의였기 때문에 현장에 없었던 사람은 그 사실을 모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메리 대왕대비가 격노한 사실도 없다. 메리 대왕대비가 사돈의 경솔한 발언에 격노했다 운운하는 건 메리 대왕대비와 루이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나 나올 수 있는 이야기다. 루이 마운트배튼이 윈저궁에서 태어났을 때 메리 대왕대비는 이미 영국 왕실에 시집와서 아들을 둘이나 낳은 상태로 차차기 왕위 계승자의 아내로 윈저궁에 거주하고 있는 상태였다. 메리 대왕대비는 루이가 태어나는 모습부터 시작해서 빅토리아 여왕이 참석해서 치른 루이의 세례식에도 함께 있었으며, 루이가 자기 아들들( 에드워드 8세, 조지 6세)과 함께 놀면서 자라고 자기 아들들과 함께 왕실 행사에 참여하는 모습을 모두 보았고 또 에드위나와 루이의 결혼식에도 자리를 함께 했었던[34] 인물이다. 메리 대왕대비와 루이는 촌수는 약간 떨어져도 루이가 태어날 때부터 한 집에서 같이 살았던 아주 친한 숙모와 조카 사이다. 루이가 만약 그처럼 경솔한 말을 했다면 메리 대왕대비가 직접 루이를 불러서 타이르거나 가볍게 꾸중을 하면 했지 격노할 사이가 절대 아니다. 상술했듯 내부적 합의였기 때문에 현장에 없었으면 사실을 모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무조건 탓하기도 뭐하고.
이때 상황은 어느 기자가 엘리자베스 2세와 필립 마운트배튼의 결혼 이후 루이에게 앞으로 왕실의 성이 어떻게 되느냐고 질문하자 마운트배튼 백작은 '이제 마운트배튼으로 바뀌는 게 맞는 거 아닐까요?' 하는 식으로 추측해서 대답했을 뿐이었다. 이때 정부에서 왕실의 최고 어른이자 윈저로 가문 이름을 바꿀 때 직접 참여했던[35] 메리 대왕대비에게 당시 정확히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자문을 구했고 메리 대왕대비는 당시의 결정에 대해 설명을 해준 것 뿐이다. 이 이야기가 영국 왕실의 내부 사정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나름 드라마틱하게 들렸는지 한 계단 건너뛸 때마다 점점 불어나고 침소봉대되어 지금처럼 전해진 것이다. 그리고 왕가의 이름이 윈저로 고정될 뿐 왕족의 성씨는 윈저로 고정되지 않는다. 엘리자베스 2세와 필립 마운트배튼의 자손들은 성을 써야 할 경우 마운트배튼윈저라고 쓴다. 다만 House of Windsor라는 가문의 이름은 앞으로도 쭉 고정된다. 성씨(surname)와 가문의 이름(family name)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에 해당된다고 보면 된다.
드라마 더 크라운에선 위의 야사를 받아들인 것인지, 조지 6세의 상중에 루이 마운트배튼이 친인척들을 초대한 만찬에서 마운트배튼 왕조 운운하며 샴페인으로 건배까지 하고, 이걸 당시 만찬에 참가한 하노버 공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36]가 이 메리 대왕대비에게 고자질하는[37] 에피소드가 있다. 실제 역사와는 조금 다르다고 해도 이처럼 흥미를 끌만한 에피소드를 드라마에 안 넣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3.5. 암살
1979년 8월 27일, 아일랜드 북서부에서 요트를 타고 휴가를 보내다가 IRA의 폭탄 테러로 사망했다. 요트에 타고 있는 인원은 루이 본인, 장녀인 패트리샤, 패트리샤의 남편으로 루이의 사위인 존 내치불, 존의 어머니로 패트리샤의 시어머니인 도린 내치불, 쌍둥이 외손자 둘, 배의 선원인 15세 소년 모두 7명이었다. 테러로 사망한 인원은 루이[38] 본인, 외손자 중 한명인 니콜라스 내치불, 패트리샤의 시어머니인 도린, 선원이었고 나머지 인원은 상해를 입고 생존했지만 이 생존자들도 거동이 불편해지고 흉터 등의 후유증을 앓게 되었다. 이 사건의 실행범인 토머스 맥만(Thomas McMahon)은 당시 31세로 종신형에 처해졌고 후일 벨파스트 협정으로 출소했다고 한다. 당시 폭탄은 엔진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IRA는 마운트배튼 경의 사형(execution)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는 바이다. 이 작전은 어떻게 하면 무차별적 만행이 아닌 방법(discriminate ways)으로 영국 당국이 우리 조국을 점령하여 가하고 있는 짓거리에 대하여 잉글랜드 국민들의 관심을 일으키기 위해 집행되었으며, 영국군은 10년 동안의 전쟁을 겪으며 우리를 패배시킬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아일랜드 국민들에 대한 압제와 H-블록에서의 우리 동지들에 대한 고문을 이어가고 있다. 글쎄, 이에 대한 보답으로 우리는 그들의 감상적인 제국주의자적 마음을 찢어버릴 것이다. 마운트배튼에게 영국 정부와 영국 국민들이 표하고 있는 조의와 슬픔은 아일랜드에서 그들의 명령으로 죽어간 아일랜드인 남녀노소뿐만 아니라 전사한 영국인 병사 300명의 죽음에 대한 완벽한 무관심과 대조됨으로써 영국 제국주의의 기만성을 세상에 폭로하고 있다.
마운트배튼 경 암살 이후 IRA 군사 위원회의 성명
당시 잉글랜드에 감정이 안 좋던 아일랜드였던 만큼 불안감이 있었기는 했다. 마운트배튼 경은 늘그막에 꽤 큰 재산을 모았으나 어려서부터 그다지 경호가 필요할 정도로 부유하지도 않았고 "나 같은 늙은이에게 무슨 짓을 하겠어?"라고 생각하여 호위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루이는 왕실의 일족이긴 했지만 윈저 가문 출신도 아니고 혈통도 독일 혈통에 루이 본인은 아일랜드인들과 척진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일랜드 민족주의자, 특히 그 와중에
피의 일요일 사건을 겪으며 키운 영국 당국과 개신교 주류 사회에 대한 증오심을 너무 과소평가했다. 북아일랜드 내 종교/사회 갈등은 1960년대 들어 비폭력 민권 운동의 실패와 잇다른 보그사이드 전투→
피의 일요일 사건을 겪으며 심각해졌음을 인식하지 못했다.마운트배튼 경 암살 이후 IRA 군사 위원회의 성명
루이 마운트배튼은 유럽 각국의 왕실들과 혈연으로 연결되어 있는데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쟁 영웅이고 젊었을 때는 잘생긴데다가 늙어서는 인품도 좋아서 세계적으로 인기가 많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다. 이 테러는 아일랜드와 척진 것 하나 없는 사람 좋은 노인을 왜 죽인 거냐고 하면서 IRA의 테러에 대해 우호적 혹은 중립적 시각을 가진 사람들로부터도 꽤 비난을 받았다. 반면 IRA 본인들 입장에서는 어차피 영국 당국이나 유럽 대륙놈들 반응이야 알 거 없고 오히려 비슷한 시기 전 세계적으로 부상하던 좌익, 민족주의 게릴라와 테러집단들 사이에서 영국 왕실의 최고 어르신 중 하나를 날려버렸다는 위업으로 그 존재감을 부각시켰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IRA는 마운트패튼을 죽인 당일 북아일랜드 서부에 있는 워런포인트(Warrenpoint) 인근의 영국군 수송 행렬을 IED로 날려 하루에 영국군 18명을 살해[39]해 분쟁 내내 IRA의 군사적 성과 중 단일 작전 최고의 전적을 올리면서 70년대 말~80년대 중반까지 IRA의 무력 투쟁 전성기를 열리는 사건이 되었다.
"13 dead and not forgotten, we got 18 and Mountbatten"
( 열셋이 죽었고 우린 잊지 않았다, 우린 열여덟과 마운트배튼을 잡았다)
사건 직후 IRA가 주류인 지역에서 나돌던 그래피티.
( 열셋이 죽었고 우린 잊지 않았다, 우린 열여덟과 마운트배튼을 잡았다)
사건 직후 IRA가 주류인 지역에서 나돌던 그래피티.
유럽 국가의 여러 왕족이 마운트배튼 경의 장례식에 참가했다. 반면 일본 황실은 일본과의 접촉을 꺼린 고인의 유언에 따라 참가하지 않았다.
4. 주요 공직 이력
- HMS 라이온 근무[소위]
- HMS 퀸 엘리자베스 근무
- HMS P.31 부장[중위]
- 케임브리지 대학교 크라이스트 칼리지에서 영문학 공부
- HMS 리나운 근무[대위][43]
- 북부 잉글랜드 지역에서 민방위 근무[44]
- HMS 리펄스 근무[45]
- HMS 리벤지 근무
- 포츠머스 신호학교 근무
- 그리니치 왕립 해군대학에서 전자공학 공부
- HMS 센츄리온 근무
- 지중해함대 함대 통신 및 신호 부장교[소령]
- 포츠머스 신호학교 선임 무선강사
- 지중해함대 함대 무선장교[중령]
- HMS 레졸루션 근무
- HMS 데어링 함장
- HMS 위시아트 함장
- 해군성 해군항공부서 근무[대령]
- 제5구축함전단장 겸 HMS 켈리 함장
- HMS 일러스트리어스 함장
- 연합작전본부장[준장][임시중장]
- 동남아시아연합군 최고사령관[임시대장][소장]
- 귀족원 의원
- 인도 총독
- 제1순양함전대장[중장]
- 지중해함대 부사령관
- 제4해군경[54]
- 지중해함대사령관 겸 NATO 지중해연합군사령관[대장]
- 제1해군경[원수]
- 국방참모총장
5. 가족관계
5.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제1대 버마의 백작 루이 마운트배튼 (Louis Mountbatton, 1st Earl of Burm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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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텐베르크의 루트비히 공자 (Prince Louis of Battenbe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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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센의 알렉산더 공자 (Prince Alexander of Hesse and by Rhine) |
|
헤센 대공국 대공 루트비히 2세 (Louis II, Grand Duke of Hesse and by Rhi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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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덴의 빌헬미네 공녀 (Princess Wilhelmine of Bad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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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아 하우케 여백작 (Countess Julia Hauk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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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모리츠 하우케 백작 (Count John Maurice Hauk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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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 라퐁텐 (Sophie Lafontai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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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센의 빅토리아 공녀 (Princess Victoria of Hesse and by Rhi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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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센 대공국 대공 루트비히 4세 (Louis IV, Grand Duke of Hesse and by Rhi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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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센 대공국의 카를 공자 (Prince Charles of Hesse and by Rhi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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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의 엘리자베트 공주 (Princess Elisabeth of Prussia)[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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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앨리스 공주 (Princess Alice of the United Kingd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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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베르트 공자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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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여왕 (Victoria) |
5.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녀 |
제2대 버마의 여백작 패트리샤 내치불 (Patricia Knatchbull, 2nd Countess of Burma) |
1924년 2월 14일 | 2017년 6월 13일 |
제7대 브라본 남작 존 내치불 슬하 6남 2녀[58] |
2녀 |
레이디 파멜라 힉스 (Lady Pamela Hicks) |
1929년 4월 19일 |
데이비드 힉스 슬하 1남 2녀 |
장녀 패트리사의 딸 아만다(1957년생)는 찰스 3세의 신부감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육촌 관계인 두 사람은 수 년동안 사이가 매우 가까웠었다. 찰스가 1979년 여름에 마침내 청혼을 했지만[59] 아만다는 거절했다. [60] 루이 마운트패튼의 폭사 이후 아만다가 찰스의 청혼을 거절하면서 다이애나 스펜서가 찰스 왕세자의 유력한 신부감으로 떠오른다.
버마의 백작(Earl of Burma) 작위는 맏딸 패트리샤가 계승했고[61][62], 그녀가 2017년 93세로 별세하자 장남 노턴 내치불(Norton Knatchbull)이 현재 3대 백작으로 있다. (아버지의 작위인 브라번 남작위도 겸하고 있다.)
6. 기타
- 선대 영국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인 필립 마운트배튼의 외삼촌으로 그의 후견인인 외삼촌 조지 마운트배튼이 사망한 이후로는 거의 아버지 역할을 대신했다. 본래 필립 마운트배튼의 성인 마운트배튼도 외가의 성으로 바꾼 것.[63] 노년기에는 경험이 없어 혼란스러워하던 찰스 3세의 멘토를 해주며 친할아버지와 손자처럼 지냈다고 한다.[64]
- 루이 마운트배튼의 어머니인 헤센의 빅토리아의 셋째 여동생이 니콜라이 2세의 아내 헤센의 알릭스였다. 그 때문에 루이는 이모의 시가였던 러시아 제국에 방문했다가, 한 살 위의 이종사촌 누나인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을 짝사랑하게 되었다. 아래에 나오는 1968년에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를 보면 루이는 마리야 여대공과 결혼하고 싶었다고 고백했으며, 폭탄 테러로 죽는 그날까지 루이의 서재에는 마리야의 사진이 있었다고 한다. 그의 결혼생활을 생각한다면 의외의 면모가 있던 셈.
- 그가 사망한 지 39년이 지난 2018년, 새로 태어난 조카의 증손자에게 그의 이름을 기려서 '루이' 라는 이름을 퍼스트 네임에 넣게 되었다. '루이'라는 이름이 영국에서 인기가 없기 때문에[65] 영국 왕자로서는 최초로 이 이름을 퍼스트 네임으로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 루이 마운트배튼은 전기 엔지니어 협회(Institution of Electrical Engineers), 현재의 공학 및 기술 협회(Institution of Engineering and Technology)의 회원이었다. 현재 IET에서는 매년 전자 또는 정보 기술 및 해당 응용 프로그램의 진흥에 탁월한 공헌을 한 이에게 마운트배튼 메달을 수여하고 있다. 또한 1939년에는 군함이 다른 선박에 대해 고정된 위치를 유지하게 하는 시스템에 대한 특허를 출원하기도 했다. # 아버지 역시 두 척의 선박 사이의 상대 속도를 측정하는 기기를 고안한 적이 있으니 부전자전이라고 할 수 있다.
- 버마의 마운트배튼 백작 가문은 2대 백작인 패트리샤가 찰스 3세의 대모였고 현 백작의 후계자(루이의 증손자)가 찰스 왕세자의 대자로, 현재에도 영국 왕실과 가장 가까운 귀족 가문이자 손에 꼽히는 명문가다. 마운트배튼 가문의 시초도 바텐베르크의 루트비히와 헤센의 빅토리아가 영국으로 귀화하면서 창설된 가문이다.[66] 멀리 갈 것도 없이 루이 마운트배튼의 이모는 러시아의 황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그의 누나들인 앨리스와 루이즈는 각각 그리스 및 덴마크의 왕자비, 스웨덴의 왕비였다. 또 모계로는 빅토리아 여왕의 혈통이 내려온다.[67] 향후에는 이런 뿌리깊은 귀족 가문이 왕실의 인척으로는 나오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현 왕비인 카밀라 파커 볼스는 남작의 혈통이 흐른다지만 아버지가 평민이니 평민 가문이라고 봐도 무방하고, 케이트 미들턴 역시 평민 가문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유서깊은 백작 가문의 영애였던 다이애나 스펜서의 사례가 고전적이라면 고전적. 또 유럽 각국의 왕실들이 왕실, 귀족 혈통에 구애받지 않는 추세이기 때문에 엘리자베스 2세 사후에는 이런 가문이 왕실과 결혼하는 일도 찾아보기 힘들어질 것이다.
- # 더 타임스에서 충격적인 기사가 나왔다. FBI에서 기밀 해제된 문서들에서 나온 것으로 마운트배튼 백작이 양성애자였고 어린 남성에 대한 애착을 보였다는 것으로, 당시 80대였던 데시 남작부인의 주장이 담겨 있었다. 이후 1942년부터 1943년까지 일했던 운전 기사는 타블로이드에 마운트배튼이 어린 남성에 대한 애착을 보였다고 타블로이드에 증언했다. 그러나 20년동안 그의 비서인 존 바랏은 그런 주장은 사실이 아니며 마운트배튼 경이 그런 일을 가까운 사이인 자기들에게 숨길 수 없다며 부인했다. 어떤 아동 보호 시설 출신자들은 심지어 백작이 자신들이 아직 6~10세의 소년들이던 시절 페도필리아 행위를 가했다고 주장했으나, 피해 주장자들 및 시설에 대해 북아일랜드 성학대 조사 기관의 수사에서는 전혀 근거가 없다고 판명지었다.
- 2021년에 아들이나 마찬가지였던 조카 필립 마운트배튼이 별세하면서 그 영향인지 IRA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던 신 페인 측에서 루이 마운트배튼의 암살 사건 발생 42년 만에 유감의 뜻을 표시했다. # 국내 기사 백작의 암살에 대한 영국 측의 반응을 힐난하는 논평을 낸 바가 있던 게리 아담스[68]는 "그 당시 주장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나는 말을 바꾸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행히 전쟁은 끝났습니다."라고 언급했다.
- 1960년대에 배우 셜리 맥클레인과 오래 만남을 가졌다.
- 신혼 여행으로 미국에도 가 여러 유명 인물들을 만났다. 찰리 채플린과 친구가 되어 미공개 영화를 찍기도 했고 베이브 루스를 만난 적이 있었다.
6.1. 1968년 쿠데타 계획
쿠데타 계획에 일종의 바지사장으로 옹립될 뻔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휴 커들립이라는 언론인의 회고록에 의하면, 해럴드 윌슨 1기 내각이 파업과 경제난으로 혼란을 거듭하던 시절 언론인이자 당시 영란은행 총재였던 세실 킹이 국제 출판조합(IPC) 회합을 소집해 루이 마운트배튼을 불러냈고, 그곳에서 국정의 심각성을 논의한 뒤 군대를 소집해 내각을 뒤엎고 루이가 주도하는 임시 정부를 수립할 것을 요구했다는 것이다.이에 루이 마운트배튼 백작은 옆에 있던 공무원 솔리 주커먼 경에게 의견을 물어봤고, 주커먼 경이 이건 하극상이라고 대답하자 마운트배튼 백작 역시 거기에 동의했다고 한다. 이렇게 쿠데타 발안자들이 모셔다가 우두머리로 삼으려던 루이 본인이 거부했기 때문에 쿠데타 계획은 자연스레 흐지부지되었다고 한다. 여왕이 직접 망설이는 백작을 설득했다는 말도 있다. 물론 이런 일이 실제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이 에피소드는 더 크라운에서도 나온다. 더 크라운에서는 실제 기록과 달리 루이 마운트배튼이 쿠데타의 가능성을 조심스레 긍정적으로 타진해 보는 것으로 나온다. 여기서 루이 마운트배튼은 성공한 쿠데타의 예시로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 등을 언급하며 쿠데타는 언론과 정부기관 등을 신속하고 완전히 장악해야 되고, 군 내부에서도 절대적이자 맹목적 지지 세력이 필요한데 쿠데타측에게 당신들이 그 조건을 만족할 수 있겠냐고 일갈한다. 하지만 이내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지지가 있다면 다른 조건이 결여되더라도, 비상조치에 의해 무조건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 정보는 윌슨 총리를 통해 여왕 엘리자베스 2세와 루이의 누나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의 귀에도 들어간다. 이 소식에 여왕은 루이의 반민주적[69] 조치를 결코 지지하지 않을 것을 단언하며 엄하게 꾸짖고, 버킹엄 궁에 의탁해 있던 바텐베르크의 앨리스도 "젊은이들의 걸림돌이 되지 않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인데 너는 걸림돌이 되려고 하고 있구나"라는 말로 훈훈하게 설득하면서 쿠데타 계획은 완전히 무산된다.
7. 대중매체
20세기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에 자주 끼는 사람답게 대중 매체에 출연하는 일도 잦다. 그런데 위의 사진들에서 보다시피 본인이 웬만한 영화 배우 뺨칠 정도로 준수하게 생겼는데 비해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어째서인지 이런 원판을 잘 재현하지 못한다.-
1968년 영국에서 만들어진 12부작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The Life and Times of Lord Mountbatten에 본인이 직접 등장해서 내레이션을 한다. 유튜브에 풀려 있다.
1화 The Life and Times of Lord Mountbatten 01of12 The King's Ships Were at Sea
- 리처드 애튼버러 감독의 1982년작 간디에서는 Peter Harlowe가 마운트배튼으로 분했다. 작중에서 마지막 영국 총독으로 나와 인도의 독립을 준비하는 과도기를 맡은 유화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마운트배튼 이전 인도 제국의 영국인 정치가들이 몹시도 고압적인 제국주의자들로 묘사되는 것과 달리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인도식으로 합장하면서 인사를 하는가 하면 독립 초읽기에 들어간 인도의 지도자들이 분열되자 중간에서 중재책을 맡기도 한다.
- 1986년작 미니시리즈 Lord Mountbatten: The Last Viceroy에서는 니콜 윌리암슨[70]이 루이 마운트배튼 역을 자넷 서츠맨이 에드위나 마운트배튼 역을 연기한다.
- 디에프 상륙 작전을 다룬 1993년작 TV영화 Dieppe에서 빅터 가버가 연기한다.
- 2017년작 바이스로이즈 하우스(Viceroy's House)에서 휴 보네빌이 루이 마운트배튼을 질리언 앤더슨이 에드위나 마운트배튼을 연기한다.
- EasyTech의 세계 정복자 3, 4편에서 영국의 항공모함을 탄 장군으로 등장한다. 초반에 나오기 때문에 영국으로 한다면 유럽 진출에 유용하게 쓸 수 있으나 다른 추축국으로 한다면 초보자들은 고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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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1~2 | 시즌 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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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크라운에서는 시즌 1~2에서는 그렉 와이즈, 3~4에서는
찰스 댄스가 배역을 맡았다. 장년기의 마운트배튼이랑 상당히 비슷해서 루이 마운트배튼을 아는 사람은 척 봐도 "저 사람이 루이 마운트배튼 역이구나."하고 알 수 있을 정도다.
시즌 1에서는 야사를 반영해서 마운트배튼 왕조가 시작된다고 설레발을 치다 메리 왕대비를 격노하게 만들기도 하고, 에드워드 8세에게는 인도를 내주고 마누라도 네루에게 내준 자라는 조롱을 당하기도 한다. 시즌 3에서는 찰스 댄스가 노년기의 마운트배튼 역을 맡아 쿠데타 음모의 중심에서 포스를 내뿜는다. 실제 역사대로 필립 공과 찰스 3세 부자와 각별한 관계이며 영국 왕실과도 가깝게 지내고, 특히 조카손자인 찰스 왕세자를 매우 아끼고 여러가지로 조언해주는 멘토로 나온다.
시즌 4에서는 카밀라 파커 보울스와의 결혼을 방해해서 잠깐 사이가 소원해진 찰스 왕세자에게 과거사가 깨끗하고, 정숙한 여성을 왕세자비로 삼으라고 조언하는 편지를 보낸 뒤 요트 위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IRA의 테러로 사망한다. 필립 공과 찰스 왕세자부터 엘리자베스 2세까지 모두 루이 마운트배튼의 죽음을 전해듣고 큰 충격을 받았으며, 특히 찰스는 혼자가 되자마자 처절하게 절규하고 비행기 안에서 루이의 마지막 편지를 읽으며 홀로 오열할 정도로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1]
본인도 여왕의 아버지 조지 6세의 6촌 동생이지만 본인 친가쪽 6촌 동생이고 조카 필립은 조지 6세 외가쪽으로 6촌 동생이기도 하다.
[2]
후일 초대 밀포드 헤이븐 후작.
[3]
마운트배튼(Mountbatten) 이외에도 배튼힐(Battenhill)이라는 성을 추천 받았다.
[4]
다만 간과하면 안되는 게 마운트배튼 가문은 상류층치고는 재산이 적은 정도에 속했던 것뿐이다. 하지만 보유한 작위 하나는 남부럽지 않은 집안 출신이다.
[5]
사실
에드워드 8세랑 6촌관계이다.
[6]
사실 친구인
앨버트 왕자에게 순방에 동행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한 것. 덕분에 6살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 8세와 매우 친한 친구가 되었다.
[7]
윌프레드 애슐리. 샤프츠버리 백작의 차남의 아들이다. 그의 브로드랜드를 딸 에드위나가 상속받아 루이 마운트배튼의 주요 거주지가 됐다. 현재는 루이 마운트배튼의 손자며느리인 버마의 마운트배튼 백작부인, 페넬로페 내치불이 브로드랜드에 살고 있다.
[8]
첫째였던 에드위나는 재산을 가장 많이 상속받았는데, 외할아버지는 많은 저택과 그 안에 있는 가구와 보석 예술품과 재산의 25/64을 물려줬다. 나중에는 아버지의 재산, 이종 할머니의 재산 등을 많이 상속받기도 했다.
[9]
덕분에 에드워드 7세는 에드위나의 대부이며, 에드위나의 이름도 에드워드에서 따온 것이다.
[10]
존 데이비슨 록펠러의 재산에 대해서는 여러 연구자들이 조사했지만 현재 가장 신뢰성이 높다고 인정되는 건 그의 손자이자 미국 부통령을 역임했던
넬슨 록펠러가 증언했던 내용이다. 넬슨의 증언에 의하면 록펠러는 각종 재단에 기부한 액수가 5억 5천만 달러이며 그의 아들 록펠러 2세에게 상속한 재산이 4억 6,500만 달러 그리고 세금으로 6,700만 달러를 냈다.(출처: 석유를 지배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앤써니 샘슨 지음, 책갈피 출판 57쪽) 인류 역사상 최고의 부자라는 사람의 재산 치고는 낮아 보일지 모르지만 당시 미국의 GDP와 비교하면 그렇지 않다. 절정기 록펠러의 재산은 미국 GDP의 대략 2%를 차지했다. 다만 이후 미국의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이 지분은 떨어진다.
[11]
아버지
루트비히의 밀포드헤이븐 후작 작위와 이에 딸린 영지는 장남인 형 조지에게 돌아갔고, 이 때문에 별다른 재산을 받지 못하는 차남이었던 루이는 해군에서 나오는 급여만으로 먹고살고 있었다. 사실 작위와 영지를 전부 받아간 조지도 재정 상태가 여유롭지 못해 해군 생활을 그만두지 못했다.
[12]
1932년부터 루이도 욜라 레틸리어라는 프랑스인과 사귀기 시작했다. 욜라는 콜레트의 1944년 소설
지지의 주인공의 모델로 널리 알려져 있다.
[13]
두 사람 모두 결혼 생활 중 "각자의 성생활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는 것이다. 현대인 입장에선 이해 안 될 일이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결혼은 가문 보고, 연애는 사람 보고’ 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
[14]
심지어 에드위나는 죽을 때까지 본 적도 없는 루이의 작은 어머니인 몬테네그로의 안나 공주에게 생활비를 지원했다. 안나의 시조카인
스페인의 빅토리아 에우헤니아 왕비도 지원을 거절했는데 그런 안나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시조카며느리인 에드위나가 도운 것. 안나 공주는
몬테네그로 국왕 니콜라 1세의 딸이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왕비 옐레나의 동생이다. 에드위나는 시누이인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에게도 본인이 사망할 때까지 생활비를 지급했다.
[15]
1937년 골수종 진단을 받고 병 치료를 위해 해군을 퇴역했으며 이듬해 사망한다. 향년 45세. 그의 후작위와 마운트배튼가의 당주 자리는 역시 해군이었던 조지의 맏아들 데이비드에게 넘어갔다.
[16]
조지의 남동생 루이 마운트배튼이 필립의 후견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필립은 어렸을 때 런던의 브룩 하우스와 햄프셔의 애드스덴에서 가끔 루이와 에드위나와 함께 머물곤 했지만, 루이가 진짜로 후견인을 맡은 것은 한참 후다. 1938년까지 필립의 후견인으로 행동한 것은 조지였고, 루이는 형 조지가 사망한 후에 후견인 자리를 대신 맡은 것이다.
[17]
커리어를 보면 위관/영관급 시절을 거의 내내 함상 근무를 하며 보냈다. 아버지가 제 1해군경에 올랐음에도 임기를 못 채우고 사직한 것 때문에 한 맺힌 죽음을 맞았다고 생각해서 왕족임에도 진급에 상당히 목을 매는 타입이었다. 특히 자신과 같은 이유로 해군에서 커리어를 쌓던 형 조지가 골수종 진단을 받고 대령 계급에서 퇴역한 후 1년 만에 사망한 후로는 더 그런 경향이 심해졌다. 다만 형이 죽었을 때는 대령을 단 이후였기 때문에 함장을 맡을 때가 아니고서야 배를 젊었을 때처럼 많이 타지는 않았다. 그리고 직후에 전쟁이 터지면서 장성 보직이 팍팍 늘어났고, 40대 중반에 대장을 달게 된다.
[18]
루이의 조카이자 필립의 둘째 누나였던
테오도라는 루이가 필립과
엘리자베스 공주가 친하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서야 필립에게 큰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루이는 필립과 엘리자베스를 결혼시키려고 필립을 영국으로 귀화시키고 신문사에 청탁하는 등 필립이 결혼할 때
켄트 공작부인 마리나와 함께 가장 노력한 인물이다.
[19]
앨리스는 자신을 요양원에 넣어버린 가족들을 원망했다고 한다.
[20]
헤센 대공가 비행기 추락사고로 가장 아끼던 셋째딸
케킬리아 일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한 고통과 상실감을 이기지 못하고 가족들과의 생활을 단절했다고 한다. 그 이전까진 망명 생활과 아내 앨리스가 요양원에 입원한 와중에도 외아들인 필립과 휴가를 보내고 다른 외손주들도 방문하며 꾸준히 가족들과 교류하며 지냈다고.
[21]
루이는 필립의 해군 경력에 큰 영향을 줬다. 원래 필립의 후견인이던 루이의 형 조지도 직업이 해군이어서 동생하고 똑같은 행동을 했다고... 루이가 필립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의 행동이 마치 네포티즘(nepotism) 같다고 했다.
[22]
필립 공의 아내가 바로 현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2세다. 즉, 루이의 사돈 집안.
[23]
말이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지 라이벌인 프랑스 왕실에서 너무 많이 사용한 이름이라 실제로는 기피하는 이름이었다.
[24]
퍼스트 네임으로 사용한 것은 루이 왕자가 처음이지만 미들네임으로는 종종 사용했다. 필립 공의 막내 아들 에드워드 왕자, 손자인 윌리엄 왕세손, 증손자 조지 왕자의 미들네임에 모두 루이가 들어간다.
[25]
결국 스틸웰은 루이 마운트배튼의 사령부에 배치되었던
앨버트 웨드마이어로 교체되었다.
[26]
한국광복군 자체적으로 인원을 증원하려고 했지만, 편성하는 사이에 전쟁이 끝나버렸다.
[27]
군인이었을 때도 일본과 관련된 업무가 생기면 이런저런 핑계로 차선임자를 대신 보냈고, 왕족으로서 일본인을 접견해야 할 일이 생기면 '난 군인이라는 본업이 있어서 못 감' 식으로 뻐겼다고.
[28]
영국 외무성의 요청을 먼저 받았는데 루이가 자신은 일본인을 만날 수 없다고 거절 의사를 밝혔다.
[29]
참고로 미국의 41대 대통령이자 2차 세계대전 당시 전투조종사로 복무하다가 일본군에게 거의 죽을 뻔 했던
조지 부시도 당연히 사적으로는 일본을 매우 싫어했다.
히로히토의 부고를 들었을 때 '이제야 일본을 용서할 마음이 조금은 생기는 듯하다'라는 말을 남길 정도. 그래도
미국 대통령이란 지위 때문에 공과 사는 구분했다.
[30]
인도 자치령의 진짜 국가원수는
영국 국왕이지만 실질적인 국가원수 역할은 인도 자치령 총독이 도맡았다. 오늘날의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와 비슷한 방식이다.
[31]
네루는 1889년생으로 1945년에 56세, 에드위나는 1900년생으로 1945년에 45세다.
[32]
다만 에드위나의 딸인 파멜라는 최근 인터뷰에서 두 사람 사이에 성관계는 없었을 것이라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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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인도와 영국 사이에는 유혈사태가 없었지만 대신 인도 내부에서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다툼으로 큰 유혈사태가 있었다.
[34]
당시 국왕이던 남편
조지 5세도 현장에 하객으로 와 있었고, 왕세자였던
맏아들은 아예 신랑 들러리였다.
[35]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국민들의 반독일 감정이 극도로 높아져서, 결국 왕실의 독일식 가문 이름까지 문제를 삼게 된다. 영국 왕실은 이런 국민 감정을 고려해 독일식 가문 이름
작센코부르크고타를 영국식 이름인
윈저로 바꾸게 되고, 덩달아 비슷하게 영국에 거주 중이던 독일계인 바텐베르크 가문 역시 마운트배튼으로 성을 바꾸게 된다. 이렇게 왕실은 물론이고 자기네 가문 이름까지 바꿀 당시 루이는 10대 중반의 소년이었고, 이런 중요한 자리에 참여할 수 있는 연령이 아니었을 뿐더러 결정적으로 사관학교에 재학 중이었기 때문에 당시 상황을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다만 영국인으로서 정체성이 확고했던 자신에게 독일계라는 이유로 비난이 가해진 것에 대해서는 언짢게 여겼다고. 실제로 루이의 부친인
밀포드 헤이븐 후작 루트비히는 해군 제독으로 제1해군경을 맡고 있었으나, 독일계라는 이유로 세간의 비난이 너무 심해지자 채 몇달을 재임하지 못하고 사직해야 했고 이게 큰 상처로 남았는지 얼마 후 병으로 세상을 뜬다. 루이의 어머니
밀포드 헤이븐 후작부인 빅토리아도 사직한 남편을 보고, 본인의 사촌
조지 5세의 처사에 누구보다 분노했다고 한다.
[36]
하노버 왕가의 당주.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 3세의 아들이다. 독일 귀족이지만 아버지 대까지는 영국 왕족이기도 했기 때문에 영국 왕족들하고도 잘 노는데, 시즌 1에서도 다른 왕족들과 사냥을 나갔을 때
빌헬름 2세의 소유였다는 대구경 사냥총을 쓴다.(작중에서 사용하는 총기 모델이
윈체스터 M1897의 개량형인 M1912이다.) 어지간히도 대구경인지 포 쏘는 소리가 나서 다들 그거 반칙 아니냐고 투덜댄다.
[37]
다만 작중에서는 메리 대왕대비가 분노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사돈이라는 인간이 열은 그 만찬이 하필
아들의 장례식 바로 다음날이었기 때문. 작중에서도 메리 대왕대비가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에게 파티에서 샴페인도 마셨냐고 묻고, 옆에서
선왕까지 합세하자 겁먹은 하노버 공이 시인하자 내 아들의 장례식 다음날에 샴페인으로 건배를 했냐며 차갑게 분노한다.
[38]
기사의 경인 Sir은 이름 뒤에, 귀족의 경 혹은 공인 Lord는 성 또는 작위명 뒤에 붙인다.
[39]
부상도 아닌 폭살이다. 근본적으로 저강도 분쟁이었던 만큼 북아일랜드 분쟁기 내내 영국 당국의 군경을 상대로 한 테러나 기습에서 사망자는 많아야 10명 내외였다.
[소위]
[중위]
[대위]
[43]
에드워드 왕세자의 호주 순방에 동행했다.
[44]
당시 대규모 파업이 임박하자 영국 해군의 병력이 민방위에 동원되었다.
[45]
에드워드 왕세자의 인도 및 일본 순방에 동행했다.
[소령]
[중령]
[대령]
[준장]
[임시중장]
[임시대장]
[소장]
[중장]
[54]
영국 해군의 보급과 수송을 담당하는 직책으로 한국 해군의 군수참모부장에 해당한다.
[대장]
[원수]
[57]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손녀이다.
[58]
이중 3남은 1952년에 태어나 그 해를 못 넘기고 죽었고, 5남(6남과 쌍둥이)은 루이 마운트배튼과 같이 폭탄 테러로 죽어서 실질적으로 장성한 것은 4남 2녀이다.
[59]
1977년 바하마에서 그들은 함께 휴가를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1979년 스코틀랜드 해안의 서부 섬에 있는 배를 타고 또 다른 여행에서 찰스는 아만다에게 청혼했다.
[60]
참고로 아만다는 2023년 현재 생존 중으로 1987년에 찰스 엘링워스와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고 있다.
[61]
영국의 귀족 작위는 대개 원칙적으로 남계 계승이지만, 국왕의 허가(칙허장)가 있으면 여성이 계승할 수도 있다. 다만 이런 경우에는 작위를 수여받을 때 미리 결정을 해 둬야 하고, 1대에 한해서만 허용된다. (딸→외손자는 가능하지만 딸→외손녀는 불가능) 루이 마운트배튼에게는 자식이 딸 둘 밖에 없어, 1947년에 작위를 받을 당시 국왕
조지 6세의 허락 하에 특별히 딸들의 남자 후손이 계승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62]
패트리샤는 모친 에드위나를 많이 닮았다. 동생 파멜라 힉스는 아버지 루이와 판박이다.
[63]
원래는 본가 성인 올덴부르크를 번역한 올드캐슬을 제안 받았으나,(필립의 친가인
글뤽스부르크 왕가는
덴마크
올덴부르크 왕가에서 파생되었다) 마음에 들지 않아 마운트배튼으로 성을 정한 것.
[64]
찰스 3세의 친할아버지는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 왕자이다.
[65]
영국에서도 '루이스'는 루이의 영어식 이름이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프랑스권의 이름이다.
[66]
밀포드헤이븐 후작 가문. 루이의 형이 가문을 이어 받았다.
[67]
루이 마운트배튼의 어머니인
헤센의 빅토리아가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였다.
[68]
당시에는 영국에 저항하는 시민운동가 및 정치가로, 2018년까지 신 페인 당수로 재직.
[69]
반헌법적이자 불법적 조치는 아니다. 법률상 여왕은 국가 비상 사태에서 내각의 해체와 불신임을 선언할 수 있고 루이도 그걸 언급한 것이다. 단지 근현대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나다보니 사문화되다시피 해서 꽤 오랫동안 역사적으로 실행된 적이 없을 뿐이다.
[70]
영화
엑스칼리버에서 마법사 멀린 역을 맡은 배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