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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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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쿠라 시대 | {{{#!wiki style=""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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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쿠라 막부 鎌倉幕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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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키노미하타[1] | 가몬[2] | ||
1185년 ~ 1333년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헤이시 정권 | 겐무 신정 | ||
수도 |
헤이안쿄(조정) 가마쿠라(막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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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체제 | 무가정권 | ||
수장 | 쇼군[3], 싯켄[4] | ||
주요 쇼군 |
1185년 ~
1199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1226년 ~ 1244년: 후지와라노 요리츠네 1308년 ~ 1333년: 모리쿠니 친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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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싯켄 |
1203년 ~
1205년:
호조 도키마사 1205년 ~ 1224년: 호조 요시토키 1268년 ~ 1284년: 호조 도키무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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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 중세 일본어 | ||
문자 | 한자, 가나 문자 | ||
종교 | 신토, 대승 불교 | ||
종족 | 일본인 | ||
화폐 | 료(両) | ||
주요사건 |
1185년
단노우라 전투 승리로
겐지의 일본 장악 1192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정이대장군 임명으로 공식 수립 1203년 호조씨 싯켄 독점 1333년 겐무 신정으로 멸망 |
[clearfix]
1. 개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1185년에 창설한 일본 최초의 막부.요리토모가 정이대장군(쇼군)에 임명된 1192년이 공식적인 가마쿠라 막부의 시작이지만, 그 이전부터 요리토모의 통치 기구는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막부의 실질적인 성립은 단노우라 전투에서 승리한 1185년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요리토모의 직계는 미나모토노 사네토모에서 단절되었고, 그 이후부터는 외척인 호조 가문의 싯켄이 막부의 실세로 등극했다.[5] 참고로 호조씨는 타이라 중 간무 헤이시의 방계였다. 때문에 무로마치 막부나 에도 막부는 종종 쇼군의 성씨에 따라 아시카가 막부, 도쿠가와 막부라고 칭해지기도 하지만,[6] 가마쿠라 막부를 미나모토 막부라고 부르는 경우는 별로 없다. #[7]
2. 가마쿠라 시대
자세한 내용은 가마쿠라 시대 문서 참고하십시오.3. 역사
<colbgcolor=white,#222> |
가마쿠라 막부의 초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초상화. |
요리토모가 무사 정권의 성립을 명확하게 선언하진 않았기 때문에, 후세의 연구가들은 가마쿠라 막부가 성립한 시기를 논의했다. 성립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 이유로는 가마쿠라 막부가 무사정권의 체제를 정돈하기까지 몇 단계를 거쳤기 때문이었다. 우선 1180년에 가마쿠라의 대창향(大倉郷)에 요리토모의 저택이 되는 오오쿠라 어소(大倉御所)가 건설되었고, 또 막부 통치 기구의 원형이라고도 해야 할 시소(侍所, 사무라이도코로)가 설치되어 무사 정권의 기초가 확립되었다. 그리고 권대납언(權大納言) 겸 우근위대장(右近衛大将)을 맡고, 공경에 참석하여 장원 영주의 정무기관인 정소(政所, 만도코로)를 설치할 허가를 받았다.
말하자면 이때부터 통치기구로서 합법성을 얻어 1192년에 정이대장군 작위를 하사받았다. 특히 단노우라 전투(1185년)로 헤이케 일족을 멸족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렇게 하여 가마쿠라 막부는 가마쿠라 시대를 통해서 명실공히 무사정권으로서 성립하였다. 초기 막부는 수호(슈고)의 설치로 내부 치안 유지를 담당했는데, 그 지배 권역은 동국(동일본)에 한정되었으며 여전히 서국(서일본)은 교토 조정의 영향력이 더욱 강했다. 하지만 점차 영향력 범위를 확대하였고, 특히 조큐의 난과 원나라의 침입 등 국란을 겪으며 전국적인 지배권을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자손이 3대만에 끊겼기 때문에, 이후에는 요리토모의 부인 호조 마사코의 친정인 호조씨가 싯켄(執權, 한국어로 읽으면 집권)으로 실권을 장악했다. 4~5대는 섭관가, 6대 이후에는 천황가에서 황자( 친왕)를 데려다가 명목상의 쇼군으로 앉혔다.[8][9]
하지만 일본 원정 이후 싯켄마저 실권이 약화되고 싯켄이 퇴임하여 호죠 가의 당주인 '도쿠소'로서 실권을 행사하는 막후정치가 반복되다가, 후기에는 그 도쿠소마저도 직속 가신단 수장인 나이간레이(内管領)나 기타 후견인들에게 실권이 넘어갔다가 다시 도쿠소에게 실권이 넘어왔다가 하는 행태를 반복했다. 그러다 1293년 헤이젠몬의 난을 통해 도쿠소가 다시 완전한 실권을 되찾았다. 실제로, 호조 다카토키의 아버지 호조 사다토키는 13살에 아버지가 죽어 싯켄이 된 이후 사다토키의 외조부 아다치 야스모리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1185년의 사모츠키 소동의 결과 아다치 야스모리가 숙청되고 타이라노 요시츠네가 우치간레이로서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다토키는 헤이젠몬의 난을 통해 타이라노 요시츠네를 숙청하고 실권을 회복했다. 가마쿠라의 실질적인 마지막 싯켄인 호죠 다카토키는 어린 시절 싯켄을 계승하여 나가사키 엔키(長崎 円喜) 및 그 사생아 나가사키 타카스케(長崎高資)에게 실권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연구 결과 나가사키 가문은 가마쿠라 시대 당시 그 가문의 일원으로서 어느 역직까지 올라갈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가격(家格)[10] 질서에서 집사가(執事家)로서 어디까지나 호죠 가문을 보조하는 위치로 그리 높은 가계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당시 요리아이라는 호조가 내의 합의체제로 굴러가던 가마쿠라 정부를 독단적으로 이끌었다고 하기엔 상당한 무리가 따르며, 타카토키가 실권자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여튼 이런 식으로 굴러가던 가마쿠라 막부는 고다이고 천황과 그를 따르던 구스노키 마사시게가 끌어들인 닛타 요시사다- 아시카가 다카우지 등의 연합군에 의해 1333년 멸망하면서 겐무 신정을 거쳐 남북조시대와 무로마치 시대가 열렸다. 현 사학계에서는 가마쿠라 막부 멸망의 결정적인 원인이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반란 진압 실패 때문이라고 본다.
2년 뒤 호조 도키유키, 스와 요리시게 등 호조씨의 잔당이 가마쿠라를 재점령하며 재기를 꿈꿨으나 이마저 다카우지에게 격파당했다. 이를 나카센다이의 난이라고 한다. 그로부터 약 20년 후 호조 도키유키도 처형당하며 가마쿠라 막부 재기의 가능성은 사라졌다. 이후 전국시대에 호조씨가 등장하긴 했지만 고호조씨(후호조씨)로 호조씨와는 별 관련이 없다. 이들의 혈연적인 공통조상은 무려 헤이안 시대에 가야 나올 정도로 오래 전에 분가했다.
4. 역대 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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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 제2대 | 제3대 |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 미나모토노 요리이에 | 미나모토노 사네토모 | |
제4대 | 제5대 | 제6대 | |
후지와라노 요리츠네 | 후지와라노 요리츠구 | 무네타카 친왕 | |
제7대 | 제8대 | 제9대 | |
고레야스 친왕 | 히사아키 친왕 | 모리쿠니 친왕 | |
쇼군 (
미야쇼군 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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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쿠라 막부의 역대 쇼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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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 이름 | 재임기간 | 비고 |
<colbgcolor=#021f70><colcolor=#fff> 초대 |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源 頼朝) | 1192 ~ 1199 | |
제2대 | 미나모토노 요리이에 (源 頼家) | 1202 ~ 1203 |
1203년 폐위 1204년 살해됨 |
제3대 | 미나모토노 사네토모 (源 実朝) | 1203 ~ 1219 |
1219년 암살 요리토모 직계 단절[11] |
제4대 | 후지와라노 요리츠네 (藤原 頼経) | 1226 ~ 1244 | 최초의 비(非) 미나모토계 쇼군 |
제5대 | 후지와라노 요리츠구 (藤原 頼嗣) | 1244 ~ 1252 | |
제6대 | 무네타카 친왕 (宗尊親王) | 1252 ~ 1266 | 최초의 황족 쇼군 |
제7대 | 고레야스 친왕 (惟康親王) | 1266 ~ 1289 | |
제8대 | 히사아키 친왕 (久明親王) | 1289 ~ 1308 | |
제9대 | 모리쿠니 친왕 (守邦親王) | 1308 ~ 1333 |
===# 황족 쇼군 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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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대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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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대 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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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대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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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대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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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대 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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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대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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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대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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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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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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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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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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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3대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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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역대 싯켄
가마쿠라 막부 싯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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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호조 도키마사 | 호조 요시토키 | 호조 야스토키 | 호조 쓰네토키 | |
제5대 | 제6대 | 제7대 | 제8대 | |
호조 도키요리 | 호조 나가토키 | 호조 마사무라 | 호조 도키무네 | |
제9대 | 제10대 | 제11대 | 제12대 | |
호조 사다토키 | 호조 모로토키 | 호조 무네노부 | 호조 히로토키 | |
제13대 | 제14대 | 제15대 | 제16대 | |
호조 모로토키 | 호조 다카토키 | 호조 사다아키 | 호조 모리토키 | |
쇼군 ( 미야쇼군 계보) · 싯켄 | }}}}}}}}} |
가마쿠라 막부의 역대 싯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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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재임기간 | 비고 | |
1대 | 호조 도키마사 (北条 時政) | 1203 ~ 1205 |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장인 |
2대 | 호조 요시토키 (北条 義時) | 1205 ~ 1224 | 요리토모의 처남. 조큐의 난 제압으로 전권 장악 |
3대 | 호조 야스토키 (北条 泰時) | 1224 ~ 1242 | 일본 최초의 무가법(武家法)인 고세이바이시키모쿠(御成敗式目)를 제정 |
4대 | 호조 쓰네토키 (北条 経時) | 1242 ~ 1246 | |
5대 | 호조 도키요리 (北条 時頼) | 1246 ~ 1256 | 1256년 출가. 실권은 계속 장악.[12] 회국 전설[13] |
6대 | 호조 나가토키 (北条 長時) | 1256 ~ 1264 | 고쿠라쿠지류 호조씨 출신. |
7대 | 호죠 마사무라 (北条 政村) | 1264 ~ 1268 | 마사무라류 호조씨 출신. |
8대 | 호조 도키무네 (北条 時宗) | 1268 ~ 1284 |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
9대 | 호조 사다토키 (北条 貞時) | 1284 ~ 1301 | 도키무네의 아들, 다카토키의 아버지.[14] |
10대 | 호조 모로토키 (北条 師時) | 1301 ~ 1311 | 무네마사류 호조씨 출신. |
11대 | 호조 무네노부 (北条 宗宣) | 1311 ~ 1312 | 오사라기류 호조씨 출신. |
12대 | 호조 히로토키 (北条 煕時) | 1312 ~ 1315 | 마사무라류 호조씨 출신. |
13대 | 호조 모토토키 (北条 基時) | 1315 | 고쿠라쿠지류 호조씨 출신. |
14대 | 호조 다카토키 (北条 高時) | 1316 ~ 1326 | 1326년 자리에서 물러나고 출가하나 실권은 계속 보유.[15] 실질적 최후 싯켄.[16] |
15대 | 호조 사다아키 (北条 貞顕) | 1326 | 가나자와류 호조씨 출신. 10일간 재임.[17][18] |
16대 | 호조 모리토키 (北条 守時) | 1327 ~ 1333 | 아카하시류 호조씨 출신. 호조가 멸망 며칠 전에 사망.[19] |
도쿠소 겸임은 볼드체로 표시.
[1]
막부 수립 이후에 제정.
[2]
용담꽃과 왕대잎은 검은색도 쓰였다. [3] 13세기 초 이후로는 허수아비로 전락했다. [4] 1203년 호조 도키마사 집권부터. 호조 가문의 권위가 공고해진 13세기 중반부터는 싯켄이라는 막부의 역직이 아니라 호조 가문의 당주인 도쿠소(得宗)가 권력의 핵심이 되었다. 도쿠소는 대부분 싯켄 본인이거나 퇴임한 싯켄이었다. 1333년 호조씨가 멸망했을 때 도쿠소이자 전 싯켄으로 실권자는 호조 다카토키였다. 그러나 다카토키는 건강상태가 영 좋지 않아 직속가신인 어내인들에게 업무 상당량을 맡겼고, 때문에 어내인의 수장인 나가사키 엔키가 실권자였다 보는 시각도 있다. [5]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사후 요리토모의 장인 호조 토키마사가 임명된 것이 시초로 이후 호조 가문에서 대대로 계승했다. [6] 특히 한자문화권이 아닌 외국에서 이런 경향이 강하다. [7] 이는 또한 아시카가씨나 도쿠가와씨와는 달리 미나모토씨는 묘지(苗字)가 아니라 우지(氏)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세한 설명은 일본의 성씨 참고. [8] 이때의 쇼군은 각각 섭가장군(셋케쇼군), 궁장군(미야쇼군)으로 불린다. [9] 섭가장군에서 궁장군으로 바뀐 이유는 섭관가 출신 쇼군이 호조씨에 대립각을 새운 것도 있지만, 황족 쇼군을 옹립하는 것이 막부의 정당성을 확립하는데 도움이 되고, 복잡해진 천황가 계승 문제와도 엮인 부분이 있다. [10] 말그대로 가문의 격을 말한다. 요리토모 이래 쇼군 직속 가신들을 일괄적으로 칭하는 '어가인'과 호죠 가문을 사적으로 섬기는 '어내인'으로 나뉘었고, 그 어가인도 세부적으로는 요리토모의 혈족인 세이와 겐지에 해당하는 문엽(門葉, 몬요), 요리토모 이래 쇼군의 개인 친위 가문들로 구성된 가자(家子, 이에노코), 나머지 쇼군을 섬기는 모든 가신들에 해당하는 시(侍, 사무라이)로 나뉘었다. [11] 쇼군직에서 물러난 후 죽은 형 미나모토노 요리이에의 차남이자 자신의 조카인 구교가 달려들었고, 그대로 피살되었다. [12] 1263년에 죽었다. 8대 집권 도키무네의 아버지로 도키무네를 다룬 NHK 사극에서 와타나베 켄이 이 인물 역을 맡았다. [13] 廻国伝説. 도키요리는 후대의 미토 고몬 비슷하게 백성의 생활을 살피기 위해 나라를 돌며 암행했다는 전설이 있다. [14] 도키무네가 34세로 죽어 12세로 싯켄이 되었고 이때 권력 대부분이 가신들에게 넘어갔다. 성년이 된 후 초기에는 주도적인 정치를 시도했으나 여러 악재로 정치적 실패를 거듭하자 결국 실의에 빠져 정사에 관여하지 않았다. 할아버지 도키요리처럼 회국전설이 있기는 하나 이미 막부의 권위가 떨어져서 큰 효과는 없었던 듯하다. 그래도 호조씨를 끝낸 아들 다카토키만큼은 평이 나쁘진 않다. [15] 뒤의 두 사람은 바지사장이고, 다카토키가 1333년 패하여 자살하면서 가마쿠라 막부도 호조가문도 끝이 난다. 기존에는 나가사키 엔키(長崎円喜)가 실질적으로 실권을 가지고 있었다 보는 시각이 우세했으나, 나가사키 가문이 어내인들의 수장격으로서 막부 중요 요직에 배치되어 큰 힘을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어찌 되었건 그 직위의 세습도 도쿠소의 권한으로 임명되는 것이기에 현재는 다카토키가 바지사장은 아니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진다. [16] 그의 차남이 호조 가문 재흥을 위해 나카센다이의 난을 일으킨 호조 도키유키이다. [17] 다카토키가 갑작스래 출가하자 차석직이었던 렌쇼였기에 자연스래 싯켄직을 계승했다. 허나 반대파에서 극단적인 위협을 가한 탓에(다카토키의 어머니 카쿠카이니는 아예 살해 위협을 가했다.) 버티지 못하고 10일만에 사퇴와 출가를 선언했다. [18] 사다아키 자신은 별로 특기할 게 없지만, 그 아들인 호조 사다유키는 특기할 만한 인물이다. 멸망해가는 호조가를 지키기 위해 제법 잘 싸웠으며, 호조가가 끝난 1333년 음력 5월 22일 다카토키는 그를 로쿠하라[六波羅, ろくはら\] 탐제(探題, たんだい)로 임명했는데 일설에는 싯켄으로 임명했다고도 한다. 어쨌든 그날 사다아키는 싸우다 죽고 다카토키 등은 자살해서 의미는 없으나, 사다유키가 17대 싯켄이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19] 여동생이 아시카가 타카우지의 아내였으나 그녀는 오빠를 배신하고 남편에게 붙었다. 호조가가 망하기 며칠 전 전사 또는 자결했다. 그래서 위의 사다아키의 아들 사다유키가 죽기 얼마 전 싯켄직을 수행했을 가능성이 있다.
용담꽃과 왕대잎은 검은색도 쓰였다. [3] 13세기 초 이후로는 허수아비로 전락했다. [4] 1203년 호조 도키마사 집권부터. 호조 가문의 권위가 공고해진 13세기 중반부터는 싯켄이라는 막부의 역직이 아니라 호조 가문의 당주인 도쿠소(得宗)가 권력의 핵심이 되었다. 도쿠소는 대부분 싯켄 본인이거나 퇴임한 싯켄이었다. 1333년 호조씨가 멸망했을 때 도쿠소이자 전 싯켄으로 실권자는 호조 다카토키였다. 그러나 다카토키는 건강상태가 영 좋지 않아 직속가신인 어내인들에게 업무 상당량을 맡겼고, 때문에 어내인의 수장인 나가사키 엔키가 실권자였다 보는 시각도 있다. [5]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사후 요리토모의 장인 호조 토키마사가 임명된 것이 시초로 이후 호조 가문에서 대대로 계승했다. [6] 특히 한자문화권이 아닌 외국에서 이런 경향이 강하다. [7] 이는 또한 아시카가씨나 도쿠가와씨와는 달리 미나모토씨는 묘지(苗字)가 아니라 우지(氏)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세한 설명은 일본의 성씨 참고. [8] 이때의 쇼군은 각각 섭가장군(셋케쇼군), 궁장군(미야쇼군)으로 불린다. [9] 섭가장군에서 궁장군으로 바뀐 이유는 섭관가 출신 쇼군이 호조씨에 대립각을 새운 것도 있지만, 황족 쇼군을 옹립하는 것이 막부의 정당성을 확립하는데 도움이 되고, 복잡해진 천황가 계승 문제와도 엮인 부분이 있다. [10] 말그대로 가문의 격을 말한다. 요리토모 이래 쇼군 직속 가신들을 일괄적으로 칭하는 '어가인'과 호죠 가문을 사적으로 섬기는 '어내인'으로 나뉘었고, 그 어가인도 세부적으로는 요리토모의 혈족인 세이와 겐지에 해당하는 문엽(門葉, 몬요), 요리토모 이래 쇼군의 개인 친위 가문들로 구성된 가자(家子, 이에노코), 나머지 쇼군을 섬기는 모든 가신들에 해당하는 시(侍, 사무라이)로 나뉘었다. [11] 쇼군직에서 물러난 후 죽은 형 미나모토노 요리이에의 차남이자 자신의 조카인 구교가 달려들었고, 그대로 피살되었다. [12] 1263년에 죽었다. 8대 집권 도키무네의 아버지로 도키무네를 다룬 NHK 사극에서 와타나베 켄이 이 인물 역을 맡았다. [13] 廻国伝説. 도키요리는 후대의 미토 고몬 비슷하게 백성의 생활을 살피기 위해 나라를 돌며 암행했다는 전설이 있다. [14] 도키무네가 34세로 죽어 12세로 싯켄이 되었고 이때 권력 대부분이 가신들에게 넘어갔다. 성년이 된 후 초기에는 주도적인 정치를 시도했으나 여러 악재로 정치적 실패를 거듭하자 결국 실의에 빠져 정사에 관여하지 않았다. 할아버지 도키요리처럼 회국전설이 있기는 하나 이미 막부의 권위가 떨어져서 큰 효과는 없었던 듯하다. 그래도 호조씨를 끝낸 아들 다카토키만큼은 평이 나쁘진 않다. [15] 뒤의 두 사람은 바지사장이고, 다카토키가 1333년 패하여 자살하면서 가마쿠라 막부도 호조가문도 끝이 난다. 기존에는 나가사키 엔키(長崎円喜)가 실질적으로 실권을 가지고 있었다 보는 시각이 우세했으나, 나가사키 가문이 어내인들의 수장격으로서 막부 중요 요직에 배치되어 큰 힘을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어찌 되었건 그 직위의 세습도 도쿠소의 권한으로 임명되는 것이기에 현재는 다카토키가 바지사장은 아니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진다. [16] 그의 차남이 호조 가문 재흥을 위해 나카센다이의 난을 일으킨 호조 도키유키이다. [17] 다카토키가 갑작스래 출가하자 차석직이었던 렌쇼였기에 자연스래 싯켄직을 계승했다. 허나 반대파에서 극단적인 위협을 가한 탓에(다카토키의 어머니 카쿠카이니는 아예 살해 위협을 가했다.) 버티지 못하고 10일만에 사퇴와 출가를 선언했다. [18] 사다아키 자신은 별로 특기할 게 없지만, 그 아들인 호조 사다유키는 특기할 만한 인물이다. 멸망해가는 호조가를 지키기 위해 제법 잘 싸웠으며, 호조가가 끝난 1333년 음력 5월 22일 다카토키는 그를 로쿠하라[六波羅, ろくはら\] 탐제(探題, たんだい)로 임명했는데 일설에는 싯켄으로 임명했다고도 한다. 어쨌든 그날 사다아키는 싸우다 죽고 다카토키 등은 자살해서 의미는 없으나, 사다유키가 17대 싯켄이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19] 여동생이 아시카가 타카우지의 아내였으나 그녀는 오빠를 배신하고 남편에게 붙었다. 호조가가 망하기 며칠 전 전사 또는 자결했다. 그래서 위의 사다아키의 아들 사다유키가 죽기 얼마 전 싯켄직을 수행했을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