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존재했던 국가에 대한 내용은 에조 공화국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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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조([ruby(蝦夷, ruby=えぞ)])는 일본의 도호쿠 북부와 홋카이도에 거주했던 민족이다. 시대에 따라 '에미시(毛人)', ' 에비스'라고도 표기했었다. 이들을 뜻하는 한자인 蝦夷는 일본어로는 'えぞ(에조)', 한국식 독음으로 '하이'라고 읽는다. ' 새우 하(蝦)'자에 ' 오랑캐 이(夷)'자를 쓴다. 夷 자를 쓴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이나 중국에서 나타났던 오랑캐 관념과 비슷하다. 초창기에는 동북부의 이민족(오랑캐)을 모두 칭하는 말이었으나, 대부분이 사라지고 홋카이도 아이누만 남은 후대의 일본에서 에조라 하면 대개 아이누를 뜻하는 말로 해석된다.계통분류상 아이누는 러시아 극동 지역의 아이누까지도 포함하기에 에조와 아이누는 엄밀히 같지는 않지만,[1] 대개 일본이 역사적으로 아이누 계통 종족을 통칭하는 단어라 봐도 무방하다.
2. 문화
일본의 초기 역사를 보면 서기 3세기 경에 야마토 왕권이 건국된 이래 간사이를 중심으로 중원과 한반도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빠르게 발전하여 이를 바탕으로 주변 소국들을 정복해 나가는 양상이었으며, 서기 6세기 경을 전후해서 규슈 남부 지역을 제외한 규슈 북부 및 시코쿠, 간토 남부 이서의 혼슈 지역을 하나의 정치체로 통합했는데, 이후 간토 북부, 도호쿠에 잔존하던 지방 세력들을 에미시라고 칭했다. 간토 지방과 도호쿠 지방에는 현대의 아이누인들과 가까운 종족들이 세력을 이루다가 대략 5~7세기 경에는 간토 북부, 8~11세기 경에는 도호쿠의 에미시 세력이 일본과의 전투·복속·동화를 통해 편입되었다. 이 시기에 일부 부족장들은 일본 조정에 의해 성씨를 하사 받고 호족이 되기도 했다. 후슈 참고.흔히 쇼군이라 부르는 정이대장군은 동북부 지방의 오랑캐(에미시)를 정벌하기 위해 천황으로부터 군권을 이임받은 무가의 수장이었다. 정이대장군은 오랑캐 정벌을 위해 마련된 군사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데다 서일본의 천황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어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후대에 둘의 권력 관계가 뒤집힌 것이라 보고 있다.
이외에도 진수부도 원래 고·중세에 에미시를 상대하기 위해 세워진 관부였다. 진수부의 지휘관은 진수부장군(鎮守府将軍)이었다.
한창 에미시에 대한 일본의 정복이 이루어지고 있던 당시 에미시와 야마토(일본의 주류 민족) 간의 말이 제대로 안 통해서 따로 통역관을 고용했다는 기록이 있고, 도호쿠벤에서 아이누어와 관련있는 단어들이나 지명들이 보이는 것을 토대로 해서 에미시는 아이누어나 혹은 아이누어와 가까운 언어를 썼다고 추측한다. 고고학적으로 보았을 때 이들은 홋카이도 일대의 아이누인들과도 활발한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도호쿠 북부에 잔존하던 에미시가 야마토 정권에 의해 완전히 정복되어 동화된 이후에 잔존 세력들이 홋카이도로 가서 에조로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에서는 사실 에조가 야마토에게 밀려난 또 다른 야요이인 세력이라는 가능성을 제시한 적 있고, 에조가 발해나 퉁구스 계통의 부족들과 교류를 했던 것 자체는 사실로 보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인적교류나 문화적인 교류 자체는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아이누인은 조몬인과 사할린에서 남하한 오호츠크인이 홋카이도에서 만나 섞이면서 탄생한 민족이므로, 에조가 아이누인 계통이라고 분류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 둘 다 조몬인 (혼혈) 계통이라고는 할 수 있겠다.
2020년 연구에 따르면[2] 에미시 중에 아이누와 관련된 세력도 있었으나, 8세기 이전에 이미 야요이 계열 언어가 널리 사용되었다고 한다. 야마토인과 말이 통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한국어, 육진어, 제주어 등 동계어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는 흔하므로 이를 근거로 언어가 완전히 달랐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조선 측 기록에도 등장하는데 강항의 간양록, 이익의 성호사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이규경[3]의 오주연문장전산고 등에 기록되어 있다. 청장관전서에서는 이들 에조인들을 모인국(毛人國)이라고도 하며 험한 길을 다니는데 능숙하고 물에서 헤엄칠 때에는 짐승처럼 빠르다고 기록했다.
3. 역사
3.1. 고훈 시대~나라 시대
에조의 수장 몬베츠슈우(좌)와 츠키노에(우) |
5세기에 야마토 왕권이 이들 세력을 복속했다는 기록이 있다. 왜5왕 중 무(武)[4]가 478년에 유송에 보낸 국서에서 "동쪽으로 모인(毛人)의 나라 55개를 정복하고, 서쪽으로 66국을 항복시키고, 바다 건너 북쪽으로 95개 나라를 병합하였습니다."[5]라고 한 것인데, 여기서 등장하는 모인이 에조로 알려져 있다. 사이메이 덴노 때에 견당사로 당에 갔던 이키노무라치 하카토코가[6] 에미시 두 명을 데려가 당나라 고종 앞에 보여주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실려 있는데, 야마토 조정과의 거리가 가깝냐 머냐에 따라 니키에미시(熟蝦夷), 아라에미시(荒蝦夷), 츠가루(津輕)로 분류해[7] 고종에게 소개했다. 에미시들을 견당사에 딸려보낸 것은 그야말로 ‘세계 제국’인 당에 대해서도 왜가 주변 이민족인 에미시를 번속국으로 거느린 나름 ' 제국'다운 모습을 과시하기 위한 의도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 당시 일본은 간토 지역의 에조를 정복했고, 도호쿠 일대의 에조는 야마토 조정과의 교역 혹은 해양을 통한 교역을 통해 선진문물을 받아들여서 발전했다. 이들은 종종 간토 지역에 나타나서 약탈을 하기까지 하여 야마토 조정에서는 골칫덩어리로 생각했고, 이에 따라 충돌도 빈번해졌다. 야마토 조정은 도호쿠 일부 지역을 정복한 뒤에 간사이나 간토의 주민들을 도호쿠 일대로 옮기는 사민정책을 시행했지만, 충돌이 원체 잦았기 때문에 농민들 입장에서는 주거지로 그리 선호되지 않았다. 그리고 도호쿠 일대의 에미시(에조)들도 야마토 조정의 움직임에 맞서 자체적으로 통치 체계를 갖추고 조정 군대와 엄청나게 싸워댔고 지속적인 소모전으로 인한 과도한 재정지출과 인명손실을 초래했다. 서기 9세기 경 야마토 조정은 오늘날의 이와테현과 아키타현의 중간지역을 경계로 삼고 향후 2세기 가까이 아오모리 일대에 대한 정복을 일시적으로 중단할 정도였다. 그러나 에조는 통일된 국가체계의 형성에는 실패한 부족사회였기 때문에 결국 각개격파당하고 일본의 통치 하에서 단계적으로 동화된다. 이 과정에서 자발적으로 일본에 복속해온 에미시들이 상당히 많았다.
발해에서 동해를 거쳐 일본으로 향하던 사신들이 하필이면 항로를 잘못 들어 그만 북동쪽의 에미시의 땅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에미시들에게 살해당하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일본 측 기록에는 심심찮게 등장한다. 고제덕 문서 참조.
3.2. 헤이안 시대
헤이안 시대 초기, 에조의 족장 아테루이가 에미시들을 이끌고 침공을 강행했지만, 정이대장군인 사카노우에노 타무라마로에게 패배하여 처형당한다.
9세기 경에 이르면 동북부의 끝자락인 이와테현과 아키타현까지 야마토 정권의 치하에 들어갔으며 그 중 이와테에 위치한 히라이즈미는 수도인 교토 못지않게 번성하였다. 그러나 에조를 정복하는 사업에 재정이 너무 들어서 일본 조정은 당분간 에조 정복을 중단한다. 그런데 에조 부족장들이 일본에 복속하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해서 일본에 자발적으로 복속하는 양상이 많아졌으며, 도호쿠 아이누어도 이 시기부터 잘 쓰이지 않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8] 이후 복속된 에조는 부수(俘囚)라고 불렸으며 점차 일본인에 동화되어 자취를 감추었다. 그런데 동화된 부수들이 정부의 지원 미비에 분노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일이 있기도 했다. 부수의 상당수는 천민으로 전락한 것으로 보인다.
11세기 경이 되면 일본 조정은 다시 혼슈 최북단(아오모리)의 에조에 대한 정복 사업을 재개하며 헤이안 시대 중반인 1070년 ‘엔큐 에조 합전(延久蝦夷合戦)’을 통해 츠가루 해협까지 진출하며 혼슈 전역이 일본 영토에 편입된다. 물론 부락 단위로 잔존하던 에미시 세력은 한참 후대인 에도 시대 무렵까지 포착된다.
이 시기에 일본(야마토)의 영토가 된 동북부 지역으로 이주한 후지와라 가문 세력이 세운 지방정권을 오슈 후지와라라고 한다.
3.3. 가마쿠라 시대
오슈 후지와라 집안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 의해 멸망하고 막부가 파견한 고케닌들에 의해 동북부 지역은 가마쿠라 막부에게 지배를 받기 시작했다.3.4. 센고쿠 시대
센고쿠 시대에 들어서면 일본 본토의 에조 세력은 아주 소규모의 부락 단위를 제외하면 모두 일본 문화권에 완전히 동화된 상태가 되었고 에조의 본거지는 홋카이도, 쿠릴 열도, 사할린만이 남게 된다. 홋카이도의 남쪽 끝까지 타케다[9] 가문이 진출했고, 이후 에도 시대까지 에조치(蝦夷地)는 남쪽 일부를 제외한 홋카이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홋카이도 남쪽에 위치한 마츠마에 번은 에조와 독점적으로 교역을 하였다.3.5. 근대
1771년 헝가리의 범죄자이자 탐험가인 베뇨브스키가 캄차카 반도에서 일본에 표류, '편지 사건'을 일으켜 에조에 러시아가 정박하고 있고 일본을 위협하고 있다는 소문이 일본 전국에 나돌았다. 그러자 몇몇 난학자들은 삼국통람도설 등의 책을 써 러시아 제국의 위험성에 대해 알렸고 이에 막부는 에조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그리하여 막부 말기인 1799년과 1807년 막부 당국은 각각 동에조치와 서에조치를 마츠마에 번 관할에서 중앙정부 직할로 바꾸었고, 메이지 유신을 거친 일본 정부는 에조치로 불리던 땅 전체를 홋카이도로, 북에조치를 가라후토로 바꾸어 불렀다. 이 시절의 에조는 아이누를 가리키는 말로 고정이 되었고 홋카이도에 잠시 에조 공화국이 세워지기도 했으나 금방 멸망했고 ‘에조’라는 이름은 역사에서 자취를 감춘다.4. 여담
교토 조정이 있는 기나이 지역에서는 간토 사람들을 비하하려는 의도로 아즈마에비스(東夷)라고 불렀다. 오늘날 가고시마 사람들을 사쓰마 하야토(薩摩隼人)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지역비하 용어[10]이다.에미시는 털 모(毛)를 한자로 쓰는데, 그 때문에 일본에서는 야만인에 대해 '털이 잔뜩 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도호쿠와 홋카이도 일부 지명에는 에조의 영향이 남아있고, 도호쿠벤에 아이누어의 흔적이 남아있다. 한편 도호쿠 일대에서 활동해온 사냥꾼 집단인 마타기의 문화나 언어에 아이누와 연관되는 부분이 많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들이 에미시의 잔존세력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1]
쉽게 비교하자면
스페인인들이
레콩키스타를 하면서
알안달루스의 북아프리카 출신 아랍계 잔당들을 몰아내며 그들을 싸잡아
무어(Moors)라고 부른것과 비슷하다. 에조와 아이누의 차이처럼 무어(무어인)가 현재의 모든 범
아랍인들을 칭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베리아 반도에 머물던 아랍 및 중동계 민족들을 스페인인들이 본인들과 구분한채로 그렇게 불렀던 것은 역사적 사실이며 이는 고중세
일본인들이 열도 내의 아이누 잔당들을 에조 또는 에미시로 칭한 것과 다르지 않다.
[2]
#
[3]
이덕무의 손자이다,
[4]
유랴쿠 덴노로 비정한다.
[5]
마지막 구절에 대해서는
임나일본부설과도 연결된다. 이 국서는 왜가 자신들의 활약상을 중국 왕조 앞에 상대적으로 과장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6]
여담으로 이 사람은 당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되었는데, 그가 사신으로 갔을 때가 서기
659년으로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기 1년 전이었다.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것이라는 정보가
왜국을 통해 백제에 알려져서는 곤란하다고 판단한 당에서 왜국 사신을 백제 공격이 끝날 때까지 억류해 두었다는 것. 이 때문에 이키노무라치 하카토코는
의자왕과
부여융, 좌평
사택천복 등 백제 왕족과 고관들이 당고종 앞에 죄인처럼 질질 끌려오는 광경까지 현장에서 지켜보고 따로 의자왕을 만나 위로의 뜻을 전하고 난 뒤에
661년에야 왜국으로 돌아왔다.
[7]
고려 시대에
여진족을 지칭할 때도 고려 조정과 가까운 사이냐 아니냐에 따라 숙여진, 생여진 등으로 구분했다.
[8]
일부 지역에서는 아이누어가 18세기까지 쓰였다. 그러나 도호쿠 아이누어에 대한 기록이 적어 도호쿠 방언을 토대로 추측하는 수준이다.
[9]
이후 카키자키(蠣崎), 마츠마에(松前)로 가문의 이름이 바뀌었다.
코에이에서 제작한 게임인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도 등장하며,
삼국지 시리즈의 공손씨나
맹획이 속한
남만처럼 변방 세력으로써 컬트적인 인기가 있다.
[10]
조금 애매한 부분이긴 한데, 근본적으로는 지역 비하 멸칭이라고는 하나, 정작 가고시마 사람들도 스스로를 사쓰마 하야토라 부르곤 한다. 단, 이 경우는 그만큼 자신들이 용맹했다는 식이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