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05 13:43:46

콜롬방가라 해전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아시아/태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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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콜롬방가라 해전
コロンバンガラ[ruby(島沖海戦, ruby=とうおきかいせん)]
Battle of Kolombangara}}}
태평양 전쟁의 일부
날짜
1943년 7월 12일~ 1943년 7월 13일
장소
솔로몬 제도 콜롬방가라
교전국
[[틀:깃발|]][[틀:깃발|]][[미국|]]
지휘관
[[틀:깃발|]][[틀:깃발|]][[틀:깃발|]] 월든 아인즈워스 [[틀:깃발|]][[틀:깃발|]][[틀:깃발|]] 이사키 슌지 †
결과
일본 제국 해군의 승리
전력
경순양함 3척
구축함 10척
경순양함 1척[1]
구축함 5척
피해 규모
경순양함 3척 대파
구축함 1척 상실[2]
89명 전사
경순양함 1척 상실
482명 전사
1. 개요2. 배경3. 전개4. 결과5. 외부 링크

[clearfix]

1. 개요

콜롬방가라 해전 태평양 전쟁 중 벌어진 해전으로 솔로몬 제도의 콜롬방가라 인근에서 1943년 7월 12일 1943년 7월 13일에 걸쳐서 진행되었다. 일본 승리로 끝났다.

2. 배경

비록 일본이 과달카날 전역에서의 패배로 과달카날을 상실하기는 했으나 뉴 조지아 제도를 비롯한 많은 섬들은 여전히 일본군의 점령하에 있었다. 이 가운데 뉴 조지아의 콜롬방가라 수비대 보강 결정이 내려졌고 얼마 안되는 구축함들이 1,200명의 병력을 수송하였다. 병력의 보충은 이사키 슌지 해군 소장이 지휘하는 도쿄 익스프레스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이 부대는 수송임무를 맡은 4척의 구축함과 호위임무를 맡은 1척의 경순양함(진츠)과 5척의 구축함(미카즈키, 유키카제, 하마카제, 키요나미, 유구레)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무렵 미군이 문다를 공격하기 위해서 뉴 조지아 제도에 상륙하였다. 아인스워드 제독에게 내려진 임무는 뉴 조지아 제도의 북쪽 해안을 방어하고 가능하면 일본의 증원병력이 상륙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3. 전개

7월 13일 새벽 1시 경 연합군의 레이더가 일본 함대를 탐지했다. 연합군 해군 구축함들은 일본 함대를 공격하기 위해서 속력을 높였고 순양함들은 주포를 발사할 준비를 했다. 10시 10분경 연합군 구축함들이 일본 도쿄 익스프레스 함대를 향해 어뢰를 발사했다. 18기동부대 지휘관 아인스워드 제독은 완벽한 기습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아인스워드 제독의 예상과는 달리, 일본 해군은 10시 8분경 18기동부대를 향해 먼저 어뢰를 발사한 상태였다.

이사키 슌지 해군 소장이 지휘하는 도쿄 익스프레스는 연합군보다 2시간 빠른 23일 23시경 전파역탐지기(초기 형태의 ESM)을 통해 18기동부대의 존재와 대강의 방위를 알아차린 상태였다. 레이더는 안테나에서 발신된 전파가 목표까지 날아가 반사된 뒤 다시 온 만큼의 거리를 되돌아가 약해진 신호를 수신해야 하지만, 전파역탐지기는 상대가 발신한 전파를 그대로 탐지하면 된다. 즉 전파가 절반의 거리만을 날아간 상태이므로 신호 강도가 훨씬 강력한 것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경우라면 레이더보다 ESM이 상대의 존재를 먼저 파악하며, 콜롬방가라 해전에서는 이 강점이 미국보다 훨씬 뒤떨어진 일본의 전자기술이라는 핸디캡마저 극복할 수 있었다. 상대가 전파역탐지기를 갖고 있을 가능성을 무시하고 경솔하게 레이더를 작동시킨 미 해군의 실수가 일본 해군의 선제공격을 허용한 원인이었다. 이후 콜롬방가라 해전은 해전에서 전파침묵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된다.

물론 ESM만으로는 거리를 비롯해 공격에 필요한 상대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없다는 약점이 있으며, 실제로 일본 함대 견시가 연합군 해군의 위치를 육안으로 식별한 것은 연합군 레이더보다 8분 늦은 10시 8분경이었다. 즉 이 허비된 8분의 시간이 해전의 승패를 결정한 중요한 요소였는데, 이는 미 해군을 비롯한 연합군이 일본 산소어뢰의 위력을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6인치 포의 최적 사거리 내로 상대를 끌어들이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연합군 구축함이 어뢰를 발사한 10시 10분경, 진츠는 어뢰를 발사하는 구축함들을 엄호하기 위해 서치라이트를 켜고 포격을 가하려 했다. 그러나 안 그래도 큰 덩치에 서치라이트까지 켠 진츠는 2분만에 연합군 경순양함에게 집중사격의 대상이 되었다. 이때 진츠에게 집중된 화력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것으로, 속사포격에 특화된 브루클린급 경순양함 두 척과 뉴질랜드 경순양함 리앤더가 18분간 2,500발의 6인치 포탄을 소나기처럼 퍼부었다. 진츠는 단 5분만에 무력화됐다. 기관부에만 10여발을 비롯해 다수의 6인치 포탄이 진츠에 작렬했고, 여기 더해 1발의 어뢰가 명중했다. 지휘관 이사키 제독을 포함한 진츠 승무원 거의 전원이 전사했다.

10시 17분경, 순식간에 진츠를 끝장낸 연합군 해군은 혹시 모를 일본 해군의 어뢰 공격에 대비해 남쪽으로 개별 변침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일본 해군이 발사한 어뢰가 10시 22분경 경순양함 리앤더에 명중했다. 리앤더는 구축함 2척의 호위를 받으면서 전열에서 이탈하였다. 아인스워드 제독은 구축함 세 척을 보내 계속 일본 함대를 추격했지만 이들은 아직 떠 있던 진츠를 도망치는 일본 구축함으로 착각하고 공격, 어뢰를 한 발 더 발사하여 완전히 격침시킨다.

한편, 어뢰 발사 후 스콜 아래로 이탈하여 어뢰를 재장전한 유키카제 이하 일본 해군 구축함 네 척은 연합군에 재차 뇌격을 가하기 위해 남하한다. 미 해군 경순양함 호놀룰루는 이들의 접근을 레이더로 파악했지만 일본 해군 구축함인지 아니면 추격을 위해 북상한 연합군 구축함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천금 같은 7분이 흐른 뒤 아인스워드 제독은 조명탄을 발사해 육안 식별을 시도한다.

그러나 일본 해군은 또다시 전파역탐지기로 연합군 해군의 존재와 대강의 방위를 파악한 뒤 접근해왔고, 호놀룰루가 레이더로 일본 구축함을 탐지한 직후 일본 해군 견시 역시 연합군 함대의 정확한 위치를 육안으로 포착했다. 따라서 조명탄이 발사됐을 때는 이미 일본 해군 구축함들이 어뢰를 발사하고 북쪽으로 이탈하고 있었다. 이 어뢰 공격으로 경순양함 2척(세인트루이스, 호놀룰루)과 구축함 1척(그윈)이 피격되어 손상을 입었다. 경순양함들은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으나 그윈은 뇌격처분되었다.

4. 결과

경순양함 호놀룰루와 세인트루이스는 4개월 정도 작전에서 제외되었지만 리앤더는 1년 동안 수리를 받아야했고 다시는 일선에 투입되지 못했다. 진츠를 제외한다면 일 해군의 피해는 가벼운 편이었으며 수송임무를 맡은 구축함들은 성공적으로 1,200명의 병력을 상륙시켰다.

연합군이 이런 피해를 입은 원인 중 하나는 전술했듯 일본 해군의 전파역탐지기 운용을 미리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일본의 산소어뢰의 위력을 잘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특히 일본 구축함대의 재공격 과정에서 아인스워드 제독은 적 구축함을 21km 거리에서 탐지하고도 7분을 헛되이 낭비하여 일본 해군의 산소어뢰 유효사거리 진입을 허용했는데, 산소어뢰의 위력을 정확히 파악했다면 훨씬 빠르게 결단을 내렸을 것이다. 그나마 타사파롱가 해전에 비해서 인명피해는 작았다는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일 해군의 수송작전을 저지한다는 임무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도쿄 익스프레스를 저지하는 임무는 구축함 PT보트에게 넘어가게 된다.

5. 외부 링크



[1] 센다이급 경순양함 진츠 [2] 글리브스급 구축함 DD-433 그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