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30 12:56:34

도쿄 대공습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아시아/태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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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도쿄 대공습
Bombing of Tokyo
東京大空襲
태평양 전쟁 일본 본토 공습의 일부
파일:attachment/tokyo_2.jpg
불타는 도쿄 시가지를 하늘에서 바라본 모습[1]
날짜 1945년 3월 9일 ~ 1945년 3월 10일
장소 일본 제국 도쿄도 전역,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일부
교전국 [[틀:깃발|]][[틀:깃발|]][[미국|]] [[틀:깃발|]][[틀:깃발|]][[일본 제국|]]
지휘관 [[틀:깃발|]][[틀:깃발|]][[미국|]] 커티스 르메이 [[틀:깃발|]][[틀:깃발|]][[틀:깃발|]] 고이소 구니아키
결과 미국의 승리, 도쿄의 초토화
영향 미군이 공습 범위를 일본 전역으로 확장
전력 제20공군 제21폭격기사령부
B-29 폭격기 344대
규모 미상의 항공 및 지상 방공 부대
피해규모 B-29 폭격기 20기 격추 가옥 267,171채 파괴
88,000여명 사망
41,000여명 부상
이재민 100만명 이상 발생
도쿄 산업 생산량 약 50% 감소

1. 개요2. 전개
2.1. 배경2.2. 작전 수립
2.2.1. 네이팜탄( 소이탄)이 사용된 이유
2.3. 작전 개시
2.3.1. 루머
2.4. 결과
3. 평가
3.1. 공습의 의의3.2. 불가피한 작전이었는가?
4. 대공습의 원인
4.1. 인종주의4.2. 인종주의에 대한 반론 및 실리적·복합적 원인설4.3. 6.25 전쟁 초토화 폭격과의 상관관계
5. 영향 및 반응6. 다른 수도 공습 사례와의 비교7. 대중매체에서의 묘사8. 기타9. 관련 어록10. 관련 문서11. 참고 자료

[clearfix]

1. 개요

도쿄 대공습() 또는 미팅하우스 작전(Operation Meetinghouse)[2] 일본 본토 공습 작전의 하나로, 미군 태평양 전쟁 시기 실시했던 도쿄 폭격(Bombing of Tokyo) 작전 가운데 특히 1945년 3월 9일에서 10일 사이 대량의 네이팜탄을 이용하여 전략 폭격을 감행했던 사건을 가리킨다.

가장 규모가 컸던 3월 9일 ~ 3월 10일의 공습은 도쿄 중심부로부터 41㎢에 달하는 지역을 파괴하였으며[3] 약 10만 명의 민간인이 사망하고 100만 명 이상의 이재민이 발생했다.[4] 당시 미군이 군사시설 뿐만 아니라 민간인 거주지에도 폭격을 가하는 등 민간인 피해를 줄이려는 노력 없이 작전을 세우고 실행했기 때문에 드레스덴 폭격과 함께 연합국의 폭격 작전 중 인도적인 논란이 가장 크다.[5]

2. 전개

2.1. 배경

미국의 일본 본토 공습은 작전 반경의 한계 때문에 처음에는 미미한 수준이었다. 1942년 4월 18일 진주만 공습에 대한 보복으로써 첫 폭격을 행한 둘리틀 특공대는 일본 전체에 충격을 줬다기보단 그저 대본영에 충격을 주었을 뿐이며 당시 둘리틀 특공대가 운용했던 B-25는 중(中)형 폭격기었고 숫자도 그다지 많지 않았기 때문에 큰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

자국의 사기 진작을 시급히 원했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요구를 가까운 시일 내에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항공모함에서 발진할 수 있으면서 유의미한 타격을 줄 수 있는 폭격기가 당시 B-25가 그나마 가장 적절했다고 했고 그마저도 착함은 불가능해 폭격한 뒤 중국으로 향했다.
파일:B-29 폭탄량.png
<rowcolor=white> B-29의 최대 폭장량
이 때문에 일본 본토 공습에서 가장 중요한 열쇠는 거대하고 많은 폭약을 실을 수 있었던 최신 B-29 폭격기였다. B-29는 6000㎞에 달하는 작전 반경을 자랑하고, 당시 기술로써는 대공 방어가 어려워지는 3만 피트 이상의 상공에서 항공 폭탄을 투하할 수 있었으며, 당시 일본군의 지상 방공망이 빈약해 지대공 격추가 불가능했던 데다 제로센도 B-29가 3만 피트 이상 비행하면 고도제한으로 인해 요격이 불가능했다.[6] 전쟁 당시 일본 본토에 투하된 항공 폭탄의 90% 정도가 이런 식으로 투하되었으며 연합군이 사이판과 같은 일본 본토에서 가까운 섬들을 점령하면 그 섬에 비행장을 건설해 B-29의 일본 본토 공습 임무를 수행시킬 수 있었다.[7]

최초의 공습은 중국 본토로부터 시행된 제20폭격기사령부의 '마테호른 작전'이다. 중국국민당과 동맹 관계인 미국은 중국 내륙의 비행장들을 이용할 수 있었고 B-29가 쿤밍, 충칭에서 발진한다면 규슈와 같은 일본 본토 서부 지역을 작전 반경 안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제20공군에 의해 수행된 이 작전은 일본군의 점령지를 너무 많이 지나야 하는 탓에 고고도를 오래 비행해야 하는 부담이 강요되었으며 이는 곧 B-29가 도쿄까지 도달할 수 없게 만들고 폭장량의 반의 반조차 쓰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일본 본토에서 충분히 가까운 북마리아나 제도로부터의 폭격 작전은 1944년 11월 제21폭격기사령부가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진행되었다. 그러나 미 육군 항공대의 조사 결과 재래식 항공 폭탄을 이용한 고고도 폭격은 폭탄을 목표에서 벗어나게 하는 정체불명의 강한 바람 때문에 효과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파일:Isley_field_end_of_war_lg.jpg
<rowcolor=white> 종전 당시 사이판의 이슬리 필드에 모여 있는 B-29
사이판 전투에서 미군은 일본군을 사이판 북쪽으로 몰아낸 후 불과 1~2개월 만에 숲이 무성했던 중부 사이판 평원에 B-29를 위한 활주로 5~6개 이상과 관제탑, 유류고, 정비창, 막사 등 주요 기반시설을 완비한 대형 비행장인 이슬리 필드를 건설했다.

그러나 어렵게 확보한 전략 기지인 사이판·괌에서 출격한 B-29 폭격대의 초기 성과는 시원치 않았다. 당시 일본군은 이미 쇠퇴된 공군력에도 불구하고 J2M 라이덴, Ki-45 토류 등으로 반격에 나서 1~3%의 손실을 미군에게 꾸준히 강요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미군은 일본 본토 공습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미군의 주요 폭격 전략은 일본군의 방공 수단이 도달하기도 힘든 7,000~9,000m 이상의 안전한 고고도에서 폭탄을 떨어트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략은 기류가 비교적 안정적인 유럽 상공에서는 효과적이었으나 제트기류의 영향이 있는 일본 상공에서는 폭탄의 명중률을 상당히 떨어트리는 요인이 되었다.[8] 고고도에서 투하되는 폭탄들은 제트기류를 만나 마치 건물 옥상에서 뿌려진 종잇조각처럼 사방으로 흩어져 낙하 탄도가 엉망이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이러한 고고도에서 운항하기 위해서는 사용 가능한 폭장량은 절반 이하에 불과했다.

이러한 전략 상의 하자로 인해 무사시노에 위치한 군수 공장을 폭격할 때는 B-29 약 100여 대가 출격하여 1천 파운드의 폭탄 수천 발을 투하했으나 그 명중률은 고작 2%에 불과했다. 이 시기 도쿄에도 공습이 가해졌으나, 대다수 도쿄 시민들은 당연하게도 이를 심각한 상황으로 여기지 않았다. 민간인들 입장에서는 명중률도 낮은 산발적인 폭격인데다가, 시가지가 아닌 시 외곽의 군수시설이 대상이었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폭격에 대비하기보다는 생업에 종사하는 것에 더 집중했다.

결국 미국 정부, 심지어 합참 소속의 육군, 해군까지 이러한 실망스러운 폭격 성과에 회의감을 갖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미 30억 달러라는 2차 대전 단일 프로젝트로는 최고로 큰 돈을 들인 B-29를 어떻게든 활용하여 작전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압박감에도 시달렸을 것이다. 때문에 21폭격사령부의 상위 부대인 20공군사령관을 겸임하던 헨리 아놀드 육군 항공대 대장은 참모장인 로리스 노스태드[9] 준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1945년 1월까지 일본 열도 폭격작전을 지휘하던 전략폭격대장(제21폭격사령부 사령관)을 기존의 정밀폭격 신봉자 헤이우드 핸셀[10] 소장에서 유럽 전선에서 맹활약하며 어떻게든 상관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내던 커티스 르메이로 바꾸게 된다.

2.2. 작전 수립

일본의 산업 역량을 완전히 무력화하라는 명령을 받은 커티스 르메이는 일단 전임자인 헤이우드 핸셀 소장이 그랬던 것처럼 민간인 거주지역을 피해 산업지대에 다시 한 번 고고도 폭격을 시험해 봤지만 결과는 역시 형편없었다.

그래서 내린 결정이 안전하지만 비효율의 극치를 달리는 주간 고고도 폭격은 집어치우고 대공방어가 취약해지는 야간에 B-29를 대량으로 투입해 1,500 ~ 3,000m의 저고도에서 한꺼번에 폭탄을 들이붓는 것이었다. 때문에 후술하겠지만 르메이는 주간 고고도 폭격 전술에 대해 비판을 가하면서도 전임 지휘관인 핸셀 본인에 대한 비판은 하지 않았다. 핸셀의 능력 문제가 아니라 전술 자체에 결함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11]

겉보기에 자살 돌격처럼 보이는 이 명령에는 몇 가지 계산이 숨어 있었다.
  • 우선 고도 2,000m는 기관포와 같은 소구경 대공화기가 제대로 닿지 않으면서도 대구경 대공포는 시한신관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높이였다.[12] 영국 공군의 야간폭격에 대해 대전 초부터 충분한 경험을 쌓아온 독일의 방공망이라면 대공포를 낮게 조준해서 다가오는 폭격기 대열에 멀리서부터 포격을 가했을 수도 있겠지만[13] 야간 방공 능력이 없는 일본[14]은 저공으로 날아드는 폭격기를 제대로 타격할 수단이 없었다.
  • 기습을 포착하고 대응할 수단이 없었으므로 전투기가 제대로 방공임무를 수행할 리도 만무했다. 전투기를 어찌저찌 띄운다 해도, 저고도 비행하는 폭격기를 줄줄이 떨어뜨릴 만한 훌륭한 조종사들은 이미 다 죽거나 자기들이 죽여 버린 뒤였다. 르메이는 이런 기습을 통해 아군의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했다. 또한 일본군이 모종의 방법으로 폭격기를 일찍 포착하고 요격을 시도한다 해도 이 시점의 미군은 P-51 머스탱이라는 완벽한 호위기를 폭격기 편대에 붙이기 시작해 요격기들의 피해는 늘어만 갔다.
  • 그리고 비교적 안전한 야간폭격으로 폭격기의 빠른 이탈을 막아 연료 소모를 최소화하여 결과적으로 폭격기 설계 시에 상정한 대로 폭장량을 최대로 채워넣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여기에 더해 폭탄 과적을 목적으로 외부 탑재 파일런을 장착하는 현장개수가 시행됐음을 고려하면, 당시 폭장량을 초과한 상태로 작전에 나선 폭격기들도 많을 것이다.

그는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당시 대부분의 일본 가옥이 목조건축으로 지어졌다는 이유를 들어 기존에 사용하던 고폭탄은 집어치우고 B-29에 소이탄을 한가득 채워 보내기로 했다. 고폭탄 60%에 소이탄 40%였던 기존의 폭장 비율을 소이탄 100%로 변경하고 폭격 소티 수를 대폭 늘려서 일반적인 작전이라면 2달 동안 쓸 수 있는 소이탄 물량을 5일 안에 퍼붓기로 한 것이었다.

드레스덴 폭격의 결과를 제21폭격기사령부 전체와 르메이 자신이 이미 잘 알고 있던 참이었으므로 민간인 피해가 크게 발생할 것임은 자명했고 이를 지적하는 부하들도 있었다. 하지만 르메이의 관점에서 이들은 단순한 민간인이 아니라 일본의 공장 노동자, 즉 일본의 군수 산업 역량 그 자체였으므로 이 산업 역량을 무력화시키려면 결국 공장 노동자를 제거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르메이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부하들한테 "사실 저 밑의 스즈키네는 군용 볼트를, 옆집 하루노보네는 군용 너트를 만들고 있을 뿐이다. 이런 걸 가내수공업이라 하지."라고 설명하면서 민간인 피해에 대한 지적을 상큼하게 무시했다. 전후에도 이에 대해서는 '전쟁에서는 당연히 일어나는 일'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비행기 한 대에 부품 약 3천 개가 필요하다. 그 부품 중에는 가정에서 만들 수 있는 것이 약 절반이다. 이처럼 가정에서 만들 수 있는 부품 제작까지 공장에만 맡겨도 좋은 걸까? (중략) 이미 이런 결의에 불타올라 가정에서 또는 도나리구미[15] 공장, 자치회 공장 등에서 묵묵히 항공기 부품을 만드는 주부들이 적지 않다.
주부의 벗(主婦之友)[16] 1944년 10월호 중[17]
그리고 일본은 진짜 가내수공업으로 항공기 부품을 만들고 있었다. 정확히 설명하자면 주부들의 잉여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해 간단히 할 수 있는 조립작업이나 부품 제작을 부업의 형식으로 가정들에 맡겨 버리고 이의 생산을 독려한 것이다. 다른 국가들에서도 여성 노동력을 동원하긴 했지만 이들은 정식 노동자로서 공장에 출근했고 민간 가정의 여성들과 군수공장의 노동자들은 서로 분리된 상태로 관리되었다. 따라서 르메이의 스즈키 네 운운 이야기는 일본의 현실을 정확히 꿰뚫어본 것이다.

2.2.1. 네이팜탄( 소이탄)이 사용된 이유

르메이는 중국-버마-인도 전선에 가 있었던 시절인 1944년 12월에 일본군 제6방면군 사령부가 있던 한커우(漢口)[18]에 대규모 소이탄 공습을 가하고 위력을 확인했다고 했으며 일본에서도 효과가 있을지 확인하기 위해 1945년 2월 4일에는 고베를 공습했다했고 2월 25일에는 도쿄에 소이탄 공습을 가해 260헥타르 면적을 파괴하면서 소이탄의 위력을 다시 확인했다.

소이탄을 쓰기로 한 원인 중 하나는 육군 항공대에서는 고폭탄과 소이탄을 섞어 쓰는 동안 해군 항공대에서는 소이탄만으로 폭격해서 성과를 내는 것을 봤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르메이가 고폭탄과 소이탄을 섞어 쓰던 기존의 방법을 집어치우고 소이탄 100%를 쓴 저고도 폭격으로 폭격 방침을 바꾼 결정적인 배경은 일본 본토 공습을 참고하자.

당시 일본의 가옥은 90% 이상이 목재로 지은 목조건축이었다. 이는 누군가 작정하고 불을 지르면 쉽게 타 무너진다는 것을 의미한다.[19] 일본의 건축물 재료가 주로 목재라는 것은 빌리 미첼(Billy Mitchell) 준장이 1924년에 일본의 전쟁 수행 능력을 평가하면서 작성한 보고서에서도 강조되었던 부분이었다. 더군다나 드레스덴 폭격의 결과를 통해 소이탄의 위력을 폭격기 승무원을 비롯한 육군 항공대 전체에서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엄청난 민간인 피해가 발생할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으나 이런 사실을 무릅쓰고 소이탄을 투입한 이유는 3가지였다.
  • 첫 번째는 몰락 작전 실행이 1년 이내로 가까워졌기 때문이었다. 전략 폭격으로도 일본의 전쟁 수행 능력을 꺾지 못하면 결국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일본 본토를 직접 침공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어느 정도나 인명손실을 입을지 모르는 몰락 작전을 수행할 필요가 없도록 압도적인 화력을 동원하여 전쟁을 일찍 끝내야 일본 민간인도 덜 죽고 미군 장병들도 무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 2번째로, 당시 미군 폭격기가 수행하던 고고도 폭격으로는 폭격의 정확성을 보장할 수 없었다. 당시의 최첨단 정밀 폭격용 조준기인 노든 폭격조준기조차 원형 공산 오차(圓形公算誤差)가 20~370m로 고도에 따라 조준 성능이 크게 벌어졌던 탓에 특정 건물을 정확하게 노려서 폭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것도 기류가 비교적 안정적인 서유럽에서도 명중률이 이랬는데 일본 상공에서 불어대는 제트기류로 인해 아무리 정밀 조준해서 폭격을 한다 해도 폭탄들이 제트기류에 휘말려서 폭탄의 탄도부터 엉망이 되며 폭격 정확도는 개판이 된다. 즉 특정 건물을 노려서 폭격한다 해도 떨어지는 폭탄들이 바람에 휘말리면서 탄착지점이 투하시 겨냥한 곳과는 전혀 다른 곳이 되는 것이다. 일례로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에서도 원자폭탄이 투하 예정지에서 벗어나서 떨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20] 애초에 커티스 르메이의 전임자이며, 정밀폭격론자였던 헤이우드 셰퍼드 핸셀이 제21폭격기사령부에서 전출된 원인도 이것이다. 그래서 르메이는 제트기류를 피해 저공으로 폭격을 가하고, 이왕 저공으로 폭격을 가할 것 같으면 좀 더 광범위한 범위에 피해를 입힐 목적으로 소이탄을 선택한 것이다.
  • 마지막으로 소이탄의 파괴력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이다. 당장 유럽전선에서 석조 건축물 위주였던 드레스덴에 가해진 드레스덴 폭격에서도 발군의 파괴력을 보여준 게 소이탄이었다.[21] 고폭탄과 테르밋 소이탄의 혼용을 통해 석조 건축물 위주인 드레스덴을 완파시켰는데[22] 목조 건축물 위주의 도쿄도 스미다구, 시타야, 아사쿠사구[23] 등 목조건물 밀집지역은 뭘 어떻게 해도 무사할 수 없었다. 거기에 때마침 비록 최고 온도는 기존 소이탄보다 낮더라도 항공기 제조 때문에 공급이 부족한 알루미늄, 마그네슘이 아닌 가솔린을 연소재로 사용해 대량생산 가격 또한 상대적으로 저렴하며, 끈적끈적한 가솔린 젤이 불이 붙은 채 폭발하여 사방팔방으로 퍼져 목조건축물의 경우 한 발로도 완파시킬 수 있는 소이탄이 무려 38개가 들어가는 M69 집속 소이탄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된 무사시노의 항공기 공장을 폭격할 때 르메이와 핸셀은 무려 15번이나 고고도에서 고폭탄과 소이탄을 섞어 쓴 정밀 폭격을 했는데, 해군에서 행한 단 한 번의 급강하 폭격기 저고도 소이탄 폭격의 효과가 이와 비슷한 것으로 밝혀진 것도 르메이의 폭격방침이 바뀌는 근거가 됐다.

중일전쟁 중 일본군의 충칭 대공습을 비롯한 중국 도시 폭격 방법에서도 영감을 얻었다.[24] 간단히 말하면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중국에 쓴 폭격 때문에 미국에게 무차별 폭격을 그대로 되돌려 받았다는 말이다. 실제로 미군의 정훈교훈에서 B-29의 승무원들이 대도시에 대공습을 퍼붓는 것에 머뭇거렸다는 것을 알고 미군에서 일본군이 저지른 충칭 대공습과 같은 일본 제국 일본군의 만행들을 사례로 거론하며 정훈교육을 하여 일본은 자신이 저지른 행위를 돌려받는 것임을 상기시켰다.

도쿄 대공습 전에 커티스 르메이에게 영감을 준 2가지 공습 사건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위에서 언급된 드레스덴 폭격이고 2번째가 다름아닌 이 충칭 대공습이다. 그뿐 아니라 커티스 르메이의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는 말이 충칭 대공습 당시 소이탄을 전쟁 자체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민간인 거주지역에 투하해댄 일본군을 보고 한 말이라는 설도 있다.[25]

일본의 건축물은 목조가 대부분이라는 조건에서 비롯되는 약점은 일본도 인식은 하고 있었다. 워낙 목조 건축물이 많으니 메이레키 대화재 등 역사적인 대화재도 여러 번 겪었고 화재에 예민해진 덕분에 수백 년 전부터 민간 의용 소방대가 치밀하게 조직될 정도로 나름대로의 대책을 강구해 왔다.

파일:/pds/1/200601/10/25/b0043125_1253194.jpg
이런 약점에 처해 있던 차에 사이판이 함락되면서 위기의식을 느낀 대본영은 시내에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서는 화재가 빠르게 확산됨을 막을 수 없을 테니 시내를 일정 구역으로 나누고 사이사이에 화재 확산을 막고자 방화대(防火帶)[26]라는 빈 공간을 만들었다. 방화대 자체는 1906년 샌프란시스코 지진 당시 샌프란시스코 소방대가 선보인 적이 있는 사례가 있듯 서양에도 있던 전술이었으나, 일본은 전체주의 국가답게 그 방화대 안에 있던 원래 가옥은 아무 보상없이 그냥 헐어버렸다.[27] 또 시내 곳곳에 방화수조, 물을 채운 구덩이 등을 마련했는데 이 탓에 모기 떼가 창궐[28]해 이미 반 년이 넘는 소방훈련에 지친 도쿄 시민들을 더 힘겹게 했다.

그러나 이 힘겨운 때가 정말 행복했던 시간이었음을 일본인들이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일본이 나름대로 세운 화재 대책도 미군의 실제 폭격 앞에선 아이들의 소꿉장난에 불과했다.

2.3. 작전 개시

파일:attachment/도쿄 대공습/36.jpg
<rowcolor=white> 도쿄 밤하늘에 떨어지는 네이팜탄. 네이팜의 불길 확산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신관 설정을 저렇게 한 것이다.


커티스 르메이는 소이탄 폭격작전을 예배당 작전(Operation Meetinghouse)이라고 이름 붙이고 폭격기를 준비해 1945년 3월 9일 밤 ~ 10일 새벽에 걸쳐 사이판과 티니안 섬에서 344기[29] B-29가 출격했다. 이들은 기존의 고고도 폭격 대신 5천 피트(1524m)의 저공에서 폭격기 1대당 7톤씩, 소이탄( 네이팜탄) 총 2400여 톤을 도쿄에 떨어뜨리기로 되어 있었다. 조금이라도 비행기 무게를 줄여 비행속도를 높이고 폭탄 적재량을 늘리기 위해 폭격기 후방 기총을 제외한 모든 방어기총과 탄약을 제거한 후, 로버트 K. 모건 소령[30]의 지휘하에 폭격에 나섰다.

도쿄시각으로 3월 9일 밤 10시 30분 NHK 라디오 방송이 B-29 편대의 도쿄 접근을 알렸다. 적기에 관한 정보는 도쿄만(東京灣)으로부터 남쪽으로 오가사와라 제도까지 이어진 일련의 섬에 배치된 감시원들에 의해 잇따라 중계되어 들어왔고 얼마 후 첫번째 공습 경보 사이렌이 울렸다. 몇 시간 뒤인 밤 12시 직전 제 1번기가 동쪽으로부터 저공으로 급히 접근하여 30㎏짜리[31] 네이팜탄 뭉치를 풀어 놓았다. 그것이 땅에 떨어지자마자 지상에서는 화염이 선을 그리며 분출하여 밤하늘을 밝혔다. 제 2번기는 스미다강(隅田川) 상공에서 제 1번기의 진로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며 소이탄을 투하했다. 제 1번기와 제 2번기가 교차하며 던진 소이탄으로 도쿄의 공장, 상점, 소주택이 몰린 도쿄의 동북지역에 거대한 불의 X자가 조용히 그려졌다. 그리고 곧 이어 불의 X자를 표지 삼아 폭격기 280여 대가 폭음을 울리며 3000m의 고도로 진입해 왔다. 책상에 올려 놓은 찻잔 속의 녹차가 밖으로 튈 정도로 도쿄 시민들은 그렇게 낮은 하늘에서 그렇게 많은 B-29의 엔진 폭음과 진동이 울려퍼지는 걸 들어본 적이 없었다. 6시간 동안 300여 대가 넘는 B-29들은 도쿄 상공에 E-46 확산탄 8500발과 M-69 소이탄 자탄 50만 개, 네이팜 소이탄 총 1700톤을 투하했다.

하늘에서 쏟아져내린 네이팜탄과 기름뭉치들은 도쿄 시내 8500여 곳에 떨어졌고 순식간에 불꽃이 밤하늘 30m 높이까지 치솟으며 치명적인 화재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여기에 애초부터 불어 오던 27 ~ 45 ㎞/h의 지상풍이 만나자 화염은 순식간에 옆으로 위로 사방 팔방으로 기세좋게 뻗어나갔다.

처음 15분 동안에 목조 건물들이 밀집해 있는 구역이 소이탄으로 거대한 불구덩이로 변했고 화재로 가열된 공기는 팽창하며 위로 치솟았다. 그리고 다시 주변의 공기를 게걸스럽게 빨아들여 풍속은 점점 강해졌다. 이 격렬한 대류 현상은 거대하게 소용돌이치는 불기둥을 만들었으며 18㎧(64.8㎞/h)를 넘는 강풍은 불붙은 연소물들의 잔해를 빨아올렸다가 사방으로 흩뿌렸다. 그리고 이렇게 퍼져나간 불티들은 다시 잔불을 일으키며 화재를 확산시키고 작은 화재들이 다시 합쳐져 더욱 더 화재를 키우는 악순환이 이어졌다.[32] 이런 불의 쓰나미는 골목길과 애써 만들어놓은 방화대 따위는 있지도 않은 것처럼 수십~수백 m를 우습게 뛰어넘어서 경로상에 위치한 목재든 인체든 가리지 않고 모든 유기물을 닥치는 대로 삼켜나가기 시작했다.[33] 이쯤 되면 불이 모든 것을 태우고 스스로 꺼지거나 큰 비가 내리는 것[34] 외에 인력으로는 소화가 불가능하다. 화재 예상 진로상의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방화대를 구축하는 정도가 한계다.

시민들은 처음에는 소방훈련 때 배운 대로 실천하려고 했다. 소이탄에 물이나 젖은 걸레를 퍼붓기도 하고 양동이 릴레이를 조직하려고 시도했다. 일본 제국 경찰, 경찰 소방대와 의용소방대, 훈련받은 민간요원들이 지시하는대로 행동하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당시의 행동지침을 다룬 군가 겸 가요도 존재했다. 가사 정부 당국은 각 동네의 시민들이 자기 할 일을 완수하면 그 동네들은 무사할 것이고 결국 도시 전체가 무사할 것이라고 말해 왔지만 200대 이상의 적기가 네이팜탄뿐 아니라 기름이 가득찬 2.5톤짜리 폭탄을 2.6㎢당 1개꼴로 투하하고 그로 인한 화재 그 자체가 불의 폭풍처럼 회오리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결국 화재 진압을 시도하던 사람들은 단 1시간만에 화재진압을 포기했고 모조리 화재에 휩쓸려 사망했다. 경찰은 사람들을 방화대, 공터, 혹은 이미 모든 게 다 타버린 장소로 이동시키려고 노력했고 소방대원들은 살아남은 몇 개의 소화전을 통해 화염에 휩싸인 거리를 뛰어다니는 사람들 몸에 물을 뿌려줬지만 화재선풍이 28㎧(100.8㎞/h)에 가까운 속도로 사방팔방에서 덮쳐오는 상황에서는 별 소용이 없었다. 타죽지 않은 사람들조차 불이 산소를 모두 태워 버린 탓에 뜨거운 연기 속에서 질식해서 숨졌다.[35]

도쿄 동북쪽에는 피난민들이 센소지(浅草寺)[36]라는 에 몰려들었다. 그 절은 오랜 세월 도쿄의 숱한 화재들 속에서도 한 번도 불타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절이 관세음보살의 가호를 입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경내의 정원에 불이 옮겨붙자 한 순간에 절의 목조 건물과 수많은 수목들은 거대한 화장(火葬)용 장작더미가 되고 말았다.[37]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에도 막부 시대부터 내려오는 유명한 공창가 요시와라(吉原)가 있었다. 접대부들의 탈주를 막고 외부에서의 화재를 막기 위해 큰 철문들이 닫히게 되어 있었는데 수많은 접대부와 손님들이 그 철문 안에서 불에 타 사망했다.

도쿄 남쪽의 니혼바시 근처에서 경찰들은 피난민들을 유명한 극장인 메이지좌(明治座)[38]로 피난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미 도쿄를 가득 메운 불에 극장 안의 산소도 부족해졌고 설상가상으로 무대의 막에 불이 옮겨붙자 극장 전체가 타올랐다. 극장 안으로 피신해 있던 사람들은 산 채로 화염의 희생양이 되어 버렸다.

도쿄 동북지역을 가로질러 흐르는 아라카와강[39]은 화염 폭풍으로부터 안전할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양쪽 기슭에서 수만 명의 도쿄 시민들이 아라카와강의 관개수로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네이팜은 얕은 수로에서도 꺼지지 않고 잘만 타올랐으며 주변의 산소를 모조리 빨아들여 강에 뛰어든 사람마저 질식시켰다.

네이팜탄의 불길 확산을 위해 같이 투하된 2.5톤 규모의 기름 폭탄은 강렬한 불길을 지속시켰다. 드레스덴에서 소이탄에 희생된 사람들의 상당수도 이런 죽음을 맞았다. 불길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화염 때문에 폭격을 하던 폭격기 동체가 달궈져서 작전 수행이 어려워지고 사람의 시체 타는 냄새가 폭격기 조종석에까지 미쳐 승무원이 구역질을 했기 때문에 산소마스크가 필요할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도쿄를 공습한 B-29 폭격기는 고고도 폭격을 위해 유일하게 여압식 캐빈을 채택한 최신예 항공기였다. 양압 장치가 있어 외부의 공기가 들어올 수 없게 되어 있는데도 시체 타는 냄새가 동체를 비집고 들어올 정도니 공습으로 인한 화염 폭풍이 만들어낸 상승기류가 어마어마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미군의 본격적인 폭격으로 도쿄는 밤에는 시뻘겋게, 낮에는 새카맣게 타올랐으며 3월 9일 밤 12시에 시작된 공습은 3월 10일 새벽 5시 공습 해제 사이렌 소리와 함께 끝났다.

2.3.1. 루머

열기로 인해 부분적으로 수로의 물이 끓어오르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화재를 피해 강에 뛰어든 사람들이 죄다 펄펄 끓는 뜨거운 강물 속에서 삶아져 죽었다는 루머가 퍼졌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는 앞서 말했듯이 화염선풍으로 인한 산소 부족으로 질식사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강에 뛰어든 사람들이 모두 삶아져 죽었다는 이야기는 미국의 역사학자 존 다우어(John Dower)가 1986년 쓴 War Without Mercy에 나오는 내용과 생존자의 증언이 와전된 것이다.[내용][번역] 책 자체가 미국의 전쟁범죄를 다루기 위해 이러한 서술이 들어갔지만 책의 서술에도 나오듯이(some places) 그것이 도쿄 대공습 당시의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물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여러 물질 중 상당히 비열이 높은 편에 속하는 물질이며 아라카와강이 한강 같은 큰 강보다 좁고 얕다고 해도 공습으로 인한 대형 화마 정도로 100℃ 의 수온을 몇 시간 동안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라카와강은 갇힌 호수가 아니기에 계속해서 상류에서 물이 흘러내려온다. 그러므로 새로 흘러들어오는 물을 지속적으로 끓는점까지 가열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아무리 도쿄가 목조 주택이 많아도 도시 화재정도로는 강 전체와 새로 공급되는 수원지의 유량을 충분히 가열할 에너지가 부족하다. 따라서 현실적으로도 강에 빠진 사람들이 삶아져 죽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실제로는 끓는 네이팜이 수로에 흐르기 시작하자 물이 끓긴 했는데 네이팜의 끈적한 기름막을 수증기가 뚫지 못해 계속 압력이 증가하다가 결국 네이팜 막을 뚫고 튀면서 폭발하는 일이 일어났다[42]. 물이 있는 곳곳에서 폭발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라는 증언으로 미루어 보아 강 전체가 끓었다기보다는 곳곳의 물웅덩이에서 다 이런 일이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폭발이 일어나게 되면 불타는 네이팜 방울이나 조각이 튀어서 상승 기류를 타고 위로 빨려 올라갔다가 떨어지는데 이는 생존자들이 보기에 불비가 내리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오히려 수로로 대피한 수천 명의 도쿄 시민들은 목숨을 건졌으며 강에서 나올 엄두를 못 내 저체온증으로 사망한 사람들도 꽤 많았다. 출처

끓어오른 스미다강에 뛰어든 도쿄 시민들이 삶아져 죽었다는 루머는 여러 사실들이 합쳐진 결과 나온 것으로 보인다. 아라카와강은 말이 강이지 역사적으로 치수가 어려워 수많은 관개로가 있었으며 그 중에는 얕은 수로도 있었다. 수심이 얕아 웅덩이에 가까운 수로의 물은 열기에 의해 끓어올랐으므로 도쿄 시내의 강이 (부분적으로) 끓어올랐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화염을 피해 강에 뛰어든 시민들이 (산소부족으로) 죽은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런데 이 두 사실이 교묘하게 결합되면서 '화재를 피하기 위해 끓어오른 강에 뛰어든 사람들이 죽었으니 삶아져 죽은 거겠지?' 라는 추측이 널리 받아들여진 것.

2.4. 결과

파일:도쿄 대공습 사진01.png
파일:도쿄 대공습 사진02.png
<rowcolor=white> 아사쿠사구(현 다이토구) 아사쿠사 나카미세도리(仲見世通り) 일대 우시고메구 이치가야(현 신주쿠구 이치가야) 일대
파일:external/aboutjapan.japansociety.org/tokyo_bombing1.jpg
파일:external/1.bp.blogspot.com/DSCN1356.jpg
<rowcolor=white> 폐허가 된 도쿄 시가지의 모습[43][44]
네이팜 불길에 직접 쏘여 죽은 시신. 혐오 주의.[45]

간토대지진 때문에 막대한 피해를 입어 계획도시로 복구한 도쿄이번 공습으로 다시 초토화됐다. 대공습 직후 도처에는 누군지 알아볼 수도 없을 만큼 심하게 손상된 시체들이 엄청나게 쌓여 있었다. 스미다강을 따라 걸어간 한 군의관은 강 기슭에 쌓인 시체들을 보고 이렇게 기록했다.
표류하는 수많은 시체를 봤다. 옷을 걸친 시체도 벌거숭이 시체도 모두 목탄처럼 검게 타 있었다.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그들이 시체인 것은 틀림없는데 남녀를 분간할 수조차 없고 그 곁을 떠내려가는 물체가 팔인지 다리인지 아니면 불탄 나무조각인지도 식별할 수 없었다.
반상회 조직은 살아남아서 식량조달과 임시거처 마련을 위해 힘썼으며 일본군이 파견되어서 시체들을 수습했다. 신원 확인이 불가능한 시체는 100구씩 모아서 커다란 공동무덤에 매장했다. 3월 10일 아침부터 수십만 명 규모의 대탈출이 시작되었다. 철도는 빠른 속도로 복구되어 이들을 실어날랐다. 폭격 단 한 차례로 대략 가옥 25만 동이 파괴되었고 180만 명이 집을 잃었으며 도심 약 40㎢가 잿더미로 변했다. 사망자 숫자에 대해서는 아무도 확실하게 집계하지 못했다. 정부는 12만 명이 사망했다는 신문 보도도 발표하지 못하게 막았는데, 미국의 역사학자 가브리엘 콜코는 12만 5,000명으로 추정했다. 프랑스인 기자 로베르 기얭(Robert Guillain)은 사망자로 간주되는 피해자 수가 19만 7천 명이라고 보고된 문서를 접했다고 한다.

일본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민간인 사망자 8만 3793명, 중상자 4만 918명[46], 이재민 100만 명 이상이 발생했다.[47]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를 합치면 피해자가 약 20만 명에 달하여 피해가 원폭 이상이다. 공습 피해 및 소개(疏開)[48]로 인하여 1940년 730만이었던 도쿄 인구는 종전 직후 350만까지 줄었다.

게다가 나가사키 원폭 투하 직후에는 도쿄 핵폭격 계획도 입안되었다. 원래는 더 부술 것도 없는 폐허인지라 핵무기 투하 목표 지점에서는 진작 빠져 있었지만, 칼 스파츠 장군은 도쿄에 아직 남아 있는 대본영의 고위 관료들을 노리고 원폭을 투하해야 일본 수뇌부가 확실히 항복할 것이라는 점을 들어 도쿄 핵폭격을 입안하였다. 다만 우선순위 자체는 고쿠라와 니가타에 있었고, 3차 핵폭격 자체도 일본의 항복으로 취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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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미군의 대공습으로 쑥대밭이 되어 버린 도쿄 시가지
6.25 전쟁 시기의 서울의 모습과 다를 게 없는 수준이며, 수도로서 도쿄의 기능은 완전히 마비되었다.
아무튼 이러한 이유로 도쿄에서 과거 에도의 흔적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오늘날 사이타마현 카와고에시는 옛 에도 분위기의 길거리가 보존된 것으로 유명한데 원조 에도인 도쿄는 전쟁 이후 폐허 위에 현대식 건물들이 세워지고 고도 성장기에는 거의 무계획적으로 확장되었으며 이후에는 도시재생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 탓에 이런 곳이 거의 남지 않았다.

안타까운 피해 사례가 있는데 당시 김정희의 자료들이 이 폭격으로 대거 소실되었다. 당시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隣)란 인물은 완당(김정희의 아호)에 관심이 매우 깊어서 그의 글과 그림 등의 자료를 많이 소장하고 있었다. 서예가인 손재형은 후지츠카 치카시를 찾아가서 세한도를 돌려달라고 간청했고 오랫동안 설득한 끝에 세한도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폭격으로 치카시의 서재도 전소되면서 김정희의 자료들이 대거 소실된 것. 손재형의 설득이 아니었다면 세한도마저 소실되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도 소실되지 않은 작품이 있었는지 후지츠카 치카시의 사망 이후 아들인 후지쓰카 아키나오가 물려받아 보관하다가 2006년에 사망하면서 약 1만여점의 자료를 과천시에 기증했고, 이 자료를 바탕으로 추사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

또한 이 공습으로 하루 만에 10만여 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중 조선인 희생자가 10% 정도로 알려져 있다. 도쿄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 사무국장을 지낸 이일만 씨는 여러 자료를 근거로 당시 조선인 희생자를 약 1만 명으로 추산한 바 있다. #

3. 평가

3.1. 공습의 의의

도쿄 대공습은 일본의 수도를 불타는 지옥으로 만들어버린 공습이었다는 점에서 일본 제국에 충격을 주고 일제의 패배를 앞당기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되며, 전술적으로는 미군이 제공권을 획득한 상태에서 치밀한 준비 속에 실행하여 큰 성과를 거둔 성공적인 작전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 미군의 편제 변화에 대한 긍정적인 여론 형성
    전술적 측면에서 보자면, 도쿄 대공습은 미군이 평가하기에는 별 효과가 없었던[49] 일반 폭탄을 이용한 고고도 수평 폭격 대신, 미군의 공습에서 실질적인 성과를 냈던 작전이었다고 평가되는데, 이 공습의 성공으로 인해 미 육군 항공대의 완전 독립과 미 공군 창설에 대한 긍정적인 여론이 진전되는 계기가 되었다.[50]
  • 일본 국민의 동요
    폭탄을 퍼부은 미국 측에선 일본인들의 일인십살 죽창 운운하던 최후 항전 이야기 때문에 이 쪽으로 별 기대는 안 했다고 하는데,[51] 일본 쪽의 기록에 따르면 국민들의 민심이 대단히 요동쳤다고 한다.

    이 사건 전까지 일본인들에게는 진주만 공습, 미드웨이 전투, 과달카날 전투, 이오지마 전투, 동남아에서의 일본 육군의 몰살 등등의 이야기는 그냥 일본 밖 멀리 있는 '전쟁터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했다' 정도로 남 일처럼 취급되었고, 이오지마 전투 전까지만 해도 전쟁 수행국의 분위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폭격 이후로 비로소 일본인들은 '전쟁'을 실감했다. 폭격에 대한 피해가 적었다는 이유로 신이 지켜주는 나라 운운하던 믿음은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한 초장거리 폭격기들의 공습으로 완전히 깨졌고, 커티스 르메이가 여러 시행착오 끝에 정답을 찾아 일본의 수도를 싹 태워 버림으로써 이 도쿄 대공습은 원자폭탄 투하와 함께 대부분의 일본인들의 기억 속에 '직접 피부로 접한 전쟁'으로 남게 되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전쟁에 나간 아들이 천황을 위해 싸우다 전사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사회적 지위와 명망이 높고 가진 돈도 많아 도시에서 떵떵거리며 살던 전쟁 지지자들은 미군이 일본 도시 전략 폭격을 본격화하고 자기 목숨이 위험해지자 폭격을 피해 다 시골로 튀어버렸고, 당연히 피해는 도망가지 못한 하층민과 노동자들에게 집중되었다. 또한 이 사건을 기점으로 순식간에 일본 전역으로 확대된 융단폭격은 일본인들의 전쟁 의지를 아주 크게 꺾어 버렸다. 하지만 일본에게는 반기를 들 여력조차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이 크게 부각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 규슈 상륙작전( 올림픽 작전) 시행을 위한 준비
    규슈 상륙 전에 이와 같은 네이팜 폭격과 상륙지에 원자폭탄 투하가 예정되어 있었다. 미군이 투입될 상륙작전지에 핵을 사용하려 한 것은 그 당시 방사능의 위험을 맥아더 장군을 포함한 장성들과 과학자들이 과소평가했기 때문이다.
  • 군 시설과 군수공장의 괴멸
    이 시기 이미 도쿄는 관동대지진으로 한 번 박살이 난 뒤 재건된 상태였다. 하지만 누가 재건 계획을 세웠는지는 모르나 시가지 내에 민간인 거주지와 군사시설이 무분별하게 뒤섞여 있었다.[52] 물론 이런 무질서한 도시계획은 미약한 산업기반만으로 군국주의 국가로 발달한 일본에선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밖에 없었는데, 요약하자면 대형 공장을 세우고 이를 채울 최신 산업설비를 갖출 능력이 없이 수공업 따위에만 의지하니 주택가와 공장이 섞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53][54] 이러한 흔적은 서울에도 남아 있는데, 을지로 5가에 있는 주한미군 공병대가 일제강점기 일본군 병영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것과, 또 을지로 한복판의 공구 상가나 소규모 영세 공장들과 주택들이 마구 뒤섞인 독산동같은 곳들이 있다. 이러한 예를 생각하면 군사시설, 거주지, 산업시설이 뒤섞인 일본의 당시 상황을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또, 21세기와 비교해 보면 노동자들이 장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이 부족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직주근접[55]의 필요성이 더더욱 컸던 것도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의 일본의 자동차 공업은 매우 미약한 수준이었고, 전쟁 중에는 아예 연료 부족으로 목탄버스가 일상적으로 운행되기도 했었던 것을 감안하면 모든 시설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여있었던 것은 당연했다. 일본 쪽의 기록에 따르면 이전까지의 고고도 폭격으로도 이미 꾸준히 피해를 입었다고 하지만, 또 미국 쪽의 기록에 따르면 수뇌부에서 일본의 전투기 등 병기 생산 능력을 소멸할 것을 폭격 작전 실무자들에게 요구했다고 한다. 커티스 르메이 장군이 "사실 저 밑의 스즈키네는 군용 볼트를, 옆집 하루노보네는 군용 너트를 만들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 게 순전히 자기합리화에서 나온 얘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덧붙이면 "옆집 스즈키네"라는 르메이의 발언은 폭격 당시 미군 장성들의 실제 관점과도 일치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파괴 전까지 항공기 생산 노력을 멈추지 않았던 일본의 항공기 생산 공장들이 더더욱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공식적으로 미국의 공습으로 인한 민간인 학살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당시 국제법상으로도 위법은 아니다. 방어되고 있는 군수공장과 그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집을 박살내야 하는데 원칙대로라면 군수공장만 노려야겠지만 그런 시설과 노동자 주거지를 민간인 주거지에 혼합해 자국 민간인을 인간 방패로 만들어 버린 일본 때문에 민간인 희생이 난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일본 제국은 민간인을 동원한 인간 방패 전술을 실제로 쓴 적이 있다. 일본군의 민간인을 동원한 인간방패 전술에 대해서는 사이판 전투 문서와 오키나와 전투 문서를 참고하자.

3.2. 불가피한 작전이었는가?

다만, 이 공습이 실제로 전술적, 전략적으로 불가피한 작전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 꼭 필요하지 않은 작전이었다 1 : 카미카제 공격을 차단한 비행장 폭격
    커티스 르메이는 당시 일본의 대규모 카미카제 공격을 예측한 니미츠 제독의 요청으로 3월 중순부터 일본군 비행장 폭격을 지휘했는데[56][57], 전후 연구에 따르면 이 비행장 폭격 때문에 일본군이 확보했던 항공기에 비해 실제 출격한 항공기의 수가 급감하여 카미카제 작전의 효율까지 덩달아 떨어트린 효과를 낸 것으로 분석되었다.
  • 꼭 필요하지 않은 작전이었다 2 : 더 효과적이었던 해상봉쇄 작전
    4월에는 추가로 기아 작전(Operation Starvation)의 일환으로 폭격기의 일부를 떼서 항만 지역에 기뢰를 살포하는 작전도 진행되었다. 한 달간 기뢰가 약 12,000개가 살포되며 총 배수량 100만 톤에 달하는 일본 수송선단에 피해를 주어 본토로 들어가는 원자재 수송량을 80%나 잘라버렸는데, 물적 피해도 피해지만 연안 해운에 대한 의존이 큰 일본의 국내 교통망도 동시에 마비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폭격기로 도시 하나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린 도쿄 대공습의 화려함에 비하면 수수한 작전이라 가려지긴 했지만 전후 분석 보고서에서는 이 기뢰 살포작전이 일본 본토 공격 도중 가장 효과가 뛰어난 작전이었다고 서술되어 있다.[58][59] 이 작전으로 일본 전역에서 민간인 약 30만 명이 아사했다고 추정하는데, 민간인을 직접 죽인 것까지 포함한다면 단일 작전으로 피해를 준 숫자로는 가장 높은 것이다.
  • 결과적으로 더 많은 일본인들을 살린 작전이었다?
    Warren Kozak, LeMay: The Life and Wars of General Curtis LeMay에서는 도쿄 대공습과 원자폭탄 투하가 일본 전역의 공업기반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에 일본 본토 상륙작전을 굳이 벌일 필요가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이오지마 전투, 오키나와 전투를 겪어 보니 일본 본토 상륙작전이 미군의 사상자를 천문학적으로 늘릴 것이라는 부담을 느껴 도쿄 대공습에 이어 원자폭탄 투하까지 적극적으로 검토했다는 것이다. 이 두 사건이 수십만 명을 죽였지만 결국 수백만 명의 목숨을 살린 비정하지만 현실주의적인 결정이었다는 것.[60]

    그러나 이 평가는 도쿄 대공습이 아니라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사건과 소련 만주 전략 공세 작전에 적용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61] 지상전의 참상을 그나마 겪어본 만주 전역에서 소련군들을 상대로 겪어 본 관동군 중심의 일본 육군은 소련군이 일본 본토로 넘어온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항복을 선택했고 그것이 전후 일본의 태도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 이러한 논란 자체가 문제이다
    위의 여러 주장들을 떠나서, 민간인 지역에 대한 대규모 폭격을 불가피했다고 평가하는 것 자체에 대한 문제도 있다.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는 민간인 살해를 옹호하는 르메이의 어록이 반일, 혐일 감정과 낭만적 군사주의, 현실주의 덕분에 옹호받기는 했지만 사실 그 자체로는 전쟁범죄로 이어질 소지가 큰 굉장히 위험한 생각이기 때문이다. 비록 현실적으로 민간인 살상이 전략적 유용성이 있고 전쟁의 극한 상황에서 공리주의적, 현실적으로 자행되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도 민간인은 기본적으로 보호되어야 할 존재이며 이 원칙은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르메이는 6·25 전쟁 당시에도 저런 관점으로 한반도에서도 무차별 폭격을 퍼부었으며 이는 당시 미국과 미군의 도덕적 명분을 손상시킨 악수가 되었다. 특히 문제는 정작 북진할 때는 무차별 폭격이 없었는데 북진을 하지 않을 때 발생했다는 것.[62]

4. 대공습의 원인

4.1. 인종주의

대공습의 동기 가운데 당시 미국의 인종주의를 지목하는 설이 있다.[63] 태평양 전쟁기 미국과 일본이 서로 인종차별적인 선전으로 비하하며 서로 증오심을 키운 것을 근거로 제시된다.

이를 뒷받침하는 게 독일 폭격과 북한 폭격인데 독일 지역에 대한 민간인 폭격은 미국에서도 여론이 비판적이었으나 일본과 북한에 대한 폭격에는 독일 같은 비판적인 여론이 거의 없었다.[64][65]

다만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은 여기서도 적용되어서, 미국이 영국에게 독일 폭격에 대해 비인도적이라 까면 영국은 미국의 일본 폭격을 까는 식으로 내가 하면 정당하고 남이 하면 인권유린이라 외쳐댔다.

4.2. 인종주의에 대한 반론 및 실리적·복합적 원인설

단, 인종주의적 이유만으로 폭격했다는 것에는 여러 반론들이 존재하는데 일본의 경우 기계화가 덜 된 노동집약의 시대에 머무르는 산업구조였기에 볼트와 너트같은 기본적인 부품조차 각 집 안에서 곰인형에 눈 붙이듯 국가로부터 할당량을 채우게 강요받는 식의 전시산업이 이루어졌기에 민간지역과 산업지역을 구분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상당한 수준의 산업적 분화와 기계화가 이루어진 독일의 경우 드레스덴의 군수공장들만 폭격했으면 됐지만[66] 기상악화로 인해 영국군이 안개로 보이지 않아 큼지막한 건물들에는 죄다 폭격을 가했기에 민간인 피해가 증가한 경우이며, 최소한 전쟁 중반까지 영국과 독일 사이에는 '도심 민간지역 폭격만은 자제하자' 라는 불문율이 존재했던 발달된 서구권 국가간의 전쟁의 연장선으로 여겨졌기에 오랫동안 유럽 인접국가 사이의 인지상정으로 여겨진 부분이 크다.

그리고 영국, 미국만 해도 굉장히 많은 독일계 국민들이 존재했고, 그 당시까지도 독일인들의 미국 이주가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인종주의적 차별이라기보단 당장 부모님과 형제 친인척 고향이 폭격과 전쟁의 참회를 당했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누군가는 접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같은 서유럽 기독교권 서구인의 동질감 수준을 넘어 실제 물질적, 정신적 피해와 직결되는 부분이 있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미 태평양함대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 허버트 후버 전 미국 대통령, 연합군 총사령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 미국 최고 부자였던 록펠러 일가같은 실제 독일 이주민 출신 미국 중앙정계, 군사계 엘리트가 있었던 반면 일본, 북한의 경우 서구인들의 생활공간과 지구 반대편 거리는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어떤 큰 피해가 발생한다고 해도 서구인들에 와닿는바도 거의 없고 자신들과 친지들의 삶의 질과는 아무 관련성이 없어, 소 닭보듯 여겼다는 것이다. 특히 일본의 경우는 태평양전쟁 발발과 동시에 발효된 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를 통해 미국내 일본 이주민들의 인권은 크게 제약되었고, 당시 저지위였던 일본계 미국인들의 권익을 대변해줄 높으신 분들도 당시에는 없었다. 그렇게 미국은 전쟁의 모든 책임을 일본 제국의 침략으로 떠넘겨 국민의 단결은 물론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전쟁 수행의지를 불태웠다.[67]

위의 단순 인종주의설에 반대하면서 다양한 원인을 제시하는 학자로는 미국 일리노이대학 역사학과 교수 존 린이 있다. 존 린은 진주만 공습, 죽음을 불사하는 일본 군인들의 전투력, 미국인 포로학대, 집단자살 등 군사요소와 문화요소가 태평양지역 미군들에게 영향을 준 것도 복합적인 원인이라고 지적한다.[68]

한국의 김태우 교수는 미국의 폭격전략과 함께 중일전쟁에서 벌인 일본군의 충칭 대공습 같은 무자비한 폭격이 도쿄 대공습의 원인 중 하나였다고 지적했다.[69]

현재 학계에서는 도쿄 대공습이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처럼 전술 전략적으로 불가피한 행위로 평가받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포스트 저널리스트 출신의 작가 말콤 글래드웰의 견해에 따르면 커티스 르메이의 독단과 워싱턴의 판단 착오를 원인으로 꼽는다.
  1. 원래 미군의 폭격 전략은 야간에 특정 지역에 폭격을 쏟아붓는 '지역폭격', '사기폭격'[70]이 아닌 시야가 확보된 주간에 군사적 요충지만 타격하는 '정밀폭격'이었다는 점.[71]
  2. 주간에 이루어지는 정밀폭격 작전은 대공 작전의 위협에 너무 크게 노출된다는 약점이 있고, 게다가 당시 폭격기 기술로는 날씨 등의 변수 통제가 불가능하여 정밀타격 자체가 불가능했다는 점.
  3. 결국 미 국방부는 종전과 같은 지역폭격 방식을 채택하고 마리아나제도에서 폭격임무를 위해 대기 중이던 제21폭격기사령부의 헤이우드 핸셀 준장에게 공습 명령을 내렸다는 점.
  4. 그러나 정밀폭격론을 지지했던 헨셀 준장은 명령 이행을 끝내 거부했고 경질된 폭격기사령부 사령관 자리에 '전쟁 영웅' 커티스 르메이[72]가 임명되었다는 점.
  5. 커티스 르메이가 '민간인 사상자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한다'[73]고 상부에 보고하고 대량의 네이팜탄을 사용한 야간 지역폭격작전을 진행했다는 점.[74]
이와 관련하여 말콤 글래드웰은 역사가 윌리엄 랠프의 평가를 인용했다.
그런 치명적인 작전이 야전사령관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은 대단히 충격적인 일이다. 이런 식의 작전을 세우는 걸 어떻게 허용한단 말인가? 어떻게 그렇게 중대한 윤리적·정치적 결과를 초래하는 결정을 젊은 야전사령관의 손에 맡긴단 말인가? 상부의 직접적인 책임과 적극적인 개입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러한 당시 상황에 대해 칼 스파츠 미 육군항공대 유럽전략공군사령관이 정확하게 이야기해 준다.[75] 1965년 미국 공군의 역사 관련 인터뷰에서 '도쿄 대공습'때는 '독일 폭격'때와 달리 "비난 여론이 전혀 없었다"고 밝힌다. 왜냐하면 당시 미국은 진주만 공습의 기억으로 일본에 신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오히려 미국인들은 일본을 아예 끝장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당시 미국이 일본에게 가졌던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도쿄 대공습은 당시 미국 국민들에게 정당성과 필요성을 인정받은 군사작전이였던 것이다. 또한 지속적 작전 실패로 누적된 육군 항공대의 정치적 부담감도 이런 극단적 작전 실행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가 있다. 육군 항공대는 B-29로 임무를 제대로 수행해 장기적으로는 전후 공군으로 분리독립하고자 하는 거대한 목표가 있었는데 30억을 태워 B-29를 만들어 놓고도 수개월 동안 작전에 실패하면서 그 신뢰를 잃어가는 상황이었다. 그런 위기 상황에서 공군 독립의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는 B-29로 강렬한 임팩트를 남길 수 있는 작전을 한방에 성공시키는 것이었다. 도쿄 대공습은 그 전환점이 된 사건으로 미국 국민들에 전략폭격으로 일본에 통쾌한 복수를 날림으로써 공군의 독립에 정당성을 제공하는 작전 성공이기도 했다.

4.3. 6.25 전쟁 초토화 폭격과의 상관관계

도쿄 대공습의 경험은 6·25 전쟁 시기에 북한군과 중공군에 대한 폭격에서 재현되었다. 물론 이런 초토화 폭격은 무고한 민간인 피해로도 이어졌다. 정밀타격기술과 피아식별이 이때보다 더 진일보한 지금도 민간인 피해가 0%라고 하기 힘든데, 이때는 그런 기술도 없었다. 자세한 건 한국전쟁기 미군의 폭격 문서가 있긴 한데 이 문서와 아래 인용 문구는 처음부터 '불법적인 민간지역 폭격과 관련된 미국 문서를 발견해낼 수' 있으리라는 연구를 하는 한쪽은 공감이 어려운 학자 브루스 커밍스 등 비판도 많이 받는 교수, 심지어 신은미 같은 논란이 많은 인물의 묘사를 옹호하기도 한다. 월미도 등지에서 실제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의 논란은 사실이지만 구월산의 유격대 같이 반대편은 미군의 폭격에도 북한 정부에 저항했다.
르메이는 자신의 경험에 기초하여 미래 전쟁 과정에서 전략항공력의 중요성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는 이 같은 확신 속에 놀라울 정도로 빨리 자신의 업무를 추진해 나갔다. 그는 짧은 기간 동안 전략공군 비행사들의 훈련과정을 체계화했고, 극동지역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들을 불러 모아 전략공군의 중요성에 대한 홍보와 함께 조직의 체계화를 꾀했다. 르메이가 불러들인 인물 중에는 2차대전기 그의 휘하에서 일본폭격을 주도한 오도넬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도넬은 한국전쟁기 최초의 극동공군 폭격기사령관으로서 북한지역 폭격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김태우, 한국전쟁기 미 공군의 공중폭격에 관한 연구, 학위논문(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국사학과 2008, 42-43
민간인 보호와 대량파괴라는 상반된 가치의 공존과 갈등은 한국전쟁에서도 단적으로 표출되었다. 한국전쟁 발발과 동시에 유엔군의 집행대리인인 미국은 북한지역 폭격 시 군사 산업 목표만을 선별적으로 '정밀폭격'해야 한다는 정책을 공식화했다. 그리고 워싱턴의 정 군 최고지도자들은 이 같은 정책의 엄격한 준수를 유엔군사령관에게 명령했다.

그러나 극동지역의 공군 사령관들과 조종사들은 워싱턴의 여러 제한조치들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전쟁 발발과 동시에 극동공군 폭격기사령과으로 부임한 오도넬은 맥아더와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북한의 인구밀집지역에 대한 소이탄 투하는 강력하게 주장했다. 오도넬의 주장은 2차대전 후 전략폭격의 강화를 주도했던 전략공군사령관 르메이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위의 책, 43
전략공군사령관 르메이는 소이탄 사용을 통해 북한 내 목표지역은 효과적으로 파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폭격기사령부는 소이탄 공습으로 주요 산업목표를 파괴함과 동시에 해당 지역을 완전히 전소시킬 수 있었다'''. 전략공군사령부는 자신의 계획을 보다 구체화했다. 전략공군은 폭격기사령부의 B-29기 2대가 1조의 편대를 이루어, 1대는 목표지역에 소이탄을 투하하고 다른 1대는 산업시설에 정밀공격을 가하기 위해 과열폭탄을 투하하도록 했다. 전략공군은 이 계획을 폭격기사령관 오도넬에게 송부하여 극동군 사령관의 승인을 받도록 했다.
위의 책, 43~44)
중국공산군의 압록강 도하라는 새로운 전쟁국면에 직면하여, 1950년 11월 5일 맥아더는 기존에 없던 매우 공세적인 폭격정책을 하달했다. 맥아더는 미 공군의 주요 사량관들에게 북한 민간인들이 거주하는 도시와 농촌지역 자체를 주요 군사적 목표물로 간주하라고 지시했다. 도시와 농촌에 대한 폭격의 목적은 중공군과 북한군의 은신처로 활용될 가능성이 있는 민간지역의 '사전파괴'였다. 맥아더와 미 극동공군 수뇌부는 추운 겨울 한반도 북부의 민가들은 모조리 불태워버림으로써 공산군의 휴식처와 보급기지를 사전에 파괴하고자 했다. 맥아더는 새로운 파괴작전의 성공을 위해 태평양 전쟁시기 일본 본토 공격에서 활용되었던 소이탄 폭격을 지시했다. 인구밀집지역에 대한 소이탄 폭격은 2차대전 시기 영국공군의 독일 도시폭격이나 미 공군의 일본 본토폭격에 비할 수 있는 사실상의 무차별폭격이었다. 맥아더는 새로운 민간인 거주지역 파괴작전을 '초토화정책'이라고 명명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맥아더의 북한지역 초토화작전 명령이 그를 향한 미 극동공군 장교들의 지속적인 건의에 의해 승인되었다는 점이다. 초토화 작전을 강력히 건의한 이들은 극동공군사령관 스트레이트메이어, 전략공군사령관 르메이, 폭격기사령관 오도넬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2차 대전 시기 미군의 극동지역 전쟁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던 인물들'''로서, 전후 전략공군의 확충에 큰 기여를 했던 사람들이었다. 한국전쟁 초기에는 전시민간인보호를 주장했던 미국 내 세력들이 폭격정책 수립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지만, 전쟁이 위기에 처하자 항공력을 공세적으로 활용하길 원했던 미국 내 세력들이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초토화작전이 시작된 후 북한지역은 그 작전명처럼 완전히 폐허로 변하기 시작했다. 1950년 11월 4일 B-29기 수십대의 소이탄 투하는 연일 지속되었다. 1950년 11월 폭격으로만 만포진의 95%, 회령과 남시의 90%, 초산의 85% 강계 희천 삭주의 75%등이 완전파괴되었다. 이 시기 북한지역 폭격에서 더욱 놀라운 사실은 해당지역주민들의 진화작업을 방해하기 위해 소이탄 투하 후 전폭기의 기총소사를 실시하거나 다양한 시간간격의 시한폭탄을 소이탄과 동시에 투하했다는 것이다. 극동공군은 표현 그대로 북한 도시와 농촌의 '초토화'를 기도했다.
위의 책,296-297
지상군의 후퇴에 따라 극동공군의 초토화작전의 범위도 자연스럽게 남한지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한국전쟁기 민간인 집단학살 조사 사례 중에는 1951년 초 미공군의 소이탄 공격에 의한 대규모 집단희생 사례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주로 1951년 1월에 집중적으로 발생한 강원·경기·경북·충북 지역 폭격 피해 사례들은 사실상 1950년 11월 맥아더의 지시에 의한 초토화작전의 남한지역으로의 확대를 의미했다. 그중에서도 도진순에 의해 학계에 소개되어 진실화해위원회의 심도 깊은 현지조사가 실시된 경북 예천군 보문면 산성동 폭격에 대한 연구논문과 조사보고서, 경북 예천·충북 단양·경기·강원 지역 폭격사건 조사보고서 등은 초토화작전의 남한지역 확산과정을 속속들이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꼽을 만하다.
김태우, 폭격, 2013, 326-327
남한지역 초토화작전의 진행과정에서 볼 수 있는 중요한 시술 중 하나는 이 시기 폭격기 조종사들이 남한 내 작전구역 내에서 발견되는 모든 "흰옷을 입은 사람들"을 사실상 적으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적잖은 전폭기 임무보고서의 적정 항목에는 '흰옷을 입은 사람들'(people in white)이 기록되어 있었고, 이 같은 지역에는 어김없이 대규모 네이팜탄 폭격이 진행되었다. 산성동 폭격의 정찰관 중 하나였던 조지 울프는 "많은 사람들이 흰옷을 입고 있었다. 우리는 적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었다"고 증언했다. 산성동 폭격에 관여한 또다른 정찰관 네빌은 "우리는 지상의 움직이는 모든 사람이나 물건은 아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1951년 초, 미공군은 적 점령하의 남한지역 민간인들을 사실상 적 병력과 동일시하고 있었다.
같음, 329-330
뉴욕타임즈의 종군기자 배럿(G. Barrett)은 1951년 초 경기도 안양부근의 어느 농촌 마을을 방문한 후 다음과 같은 기사를 작성했다.

중국군이 마을을 점령하기 3~4일 전에 마을에 대한 네이팜탄 공격이 진행되었다. 마을 어느 곳에서도 시체가 매장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이를 행할 사람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우연히 1명의 늙은 여인과 마주쳤다. 그녀는 그곳에 생존한 유일한 사람인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가족 4명의 시신으로 가득 찬 검게 그을린 마당 안에서 몇벌의 옷을 부여진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주민들은 마을 전체와 들판에서 발견되고 사살되었다. 그들은 네이팜탄 공격을 당했을 때 취했던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한 남성은 막 자전거를 타려는 참이었고, 50명의 소년과 소녀는 고아원에서 뛰놀고 있었으며, 한 가정주부는 이상하게 아무 상처도 없었다. 약 200구의 시체들이 그 작은 마을에 놓여 있었다.
같음, 330

5. 영향 및 반응

5.1. 조선

일단 앞서 서술하였듯이 도쿄 대공습으로 인한 조선인 사망자 역시 1만 명 가량에 이른다. 이는 3년 간의 6.25 전쟁으로 인한 대한민국 측 민간인 희생이 약 37만 명인 것과 비교하면 이틀 만에 엄청난 사람이 죽은 것이지만, 국내에서는 대체로 남의 일로만 여겨지고 있다. 물론 일본의 우경화에 악용될 여지와는 별개로, 자의 반 타의 반 거기까지 일이나 유학 가서 죽은 조선인들의 존재를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때는 나라가 일제로 강제 합병 되었기에 일본 본토에도 노동자나 학생들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군사 시설, 무기 공장의 경우 공습을 당했다. 대만도 공습을 당해 대만총독부 건물이 일부 무너지기도 한다.

도쿄 대공습 같은 대규모 폭격 시 목조주택이 많은 일본 대도시 특성상 일부 지역의 폭격만으로도 화재가 도시 전체로 번지는 일이 많았다. 따라서 폭격을 당해도 해당 지역만 화재가 일어나고 화재가 도시 전체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도시 내부에 마치 도로처럼 줄 모양으로 특정 지역을 비워놓는 소개지역을 대규모로 만들었다. 이는 일본 열도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의 식민지배하에 있었던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경성부(京城府) 중심가에도 이러한 지역이 만들어졌다. 대표적인 곳이 현재 종묘 앞에서 퇴계로까지 남북 구간과 광희동 사거리에서 4호선을 따라 서울역까지 동서 구간이다.

이 남북 구간은 해방 후 그냥 빈 땅으로 남았다가 월남자와 전쟁 피난민들이 움막을 치고 살거나 노점을 했으며 사창가 '종삼'이 들어서기도 했다. 훗날 이 지역을 일제강점기 당시 계획대로 화재가 번지지 않게 만든 방재구간으로서 빈 땅으로 둘 것인가, 건물을 세워 재개발할 것인가 의견이 맞서다가 결국 두 가지 다 하기로 결정하여 세운상가로 개발되었다. 현재의 종로 세운상가에서부터 진양상가가 들어선 곳이다. 동서 구간은 해방 이후 도로포장을 하여 도로로 사용했는데 이것이 오늘의 퇴계로다. 일제강점기 당시 태평양전쟁 전의 경성부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퇴계로에 해당되는 도로는 없었다. 대신 오늘날 충무로라고 부르는 도로는 있었다. 왕복 6차로인 퇴계로 한 블럭 뒤에 있는 왕복 2차로짜리 도로이다.

대공습 당시 조선인들은 이 처참한 소식[76]을 듣고 "우리도 폭격을 당할지 모른다." 고 걱정하기도 했으나 조금이라도 국제정세를 아는 사람들은 "미국은 절대로 조선을 폭격하지 않는다." 고 안심시켰다고 한다. 이미 폭격 2년 전에 루즈벨트 대통령과 연합국의 수장들이 협의한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은 일본의 일부가 아니므로 종전 후 독립시킨다." 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대규모 폭격을 하기는 어려웠다.[77]

다만, 한국에 대한 공습이 아주 없지는 않아서 제주도, 함흥, 원산, 부산, 대구 등지에 소규모의 폭격이 있었다. 하지만 도쿄 대공습과 같은 민간인 주거시설과 산업 및 군사시설 가릴거 없이 무작위로 폭격 하는 초토화 공습이 아닌 함재기를 동원한 산업 및 군사시설, 철도역 등에 대한 정밀폭격이나 제주도, 목포, 신의주 등 항만과 인근 해상을 목표로 화객선에 대한 통상파괴작전이나 소규모의 기뢰 살포 작전이 주를 이루어 민간인 피해는 매우 적었으며 폭격 빈도나 규모도 일본 본토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또한 중국을 기지로 한 폭격기 편대가 일본 본토로 향할 때 한반도 상공을 통과하면서 조선 시내에 사이렌이 올리고 일본군의 대공포나 항공대가 폭격기대를 추격한 사례도 있으나 폭격기 편대가 조선을 상대로 공습을 벌이거나 격추된 사례는 전무하다.

미군은 1944년 말부터 최소 41회에 걸쳐 경성을 필두로 북으로는 나진, 청진에서 남으로는 목포, 여수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주요 도시에 대한 항공 촬영을 실시하여, 추후 조선 도시에 대한 폭격도 고려하고 있었다.

5.2. 일본

일본에서 도쿄 대공습은 지금도 제2차 세계 대전, 즉 태평양 전쟁에서 악몽 같은 날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십만 단위의 민간인 희생자를 발생시킨 대규모 공습으로, 특히 당시의 생존자는 그날 또는 그 3월의 어느 날이라고 부르며 몸서리칠 정도로 매우 끔찍한 사건으로 회상한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 민간인의 피해와는 별개로 일본회의 같은 일본 극우 세력들은 도쿄 대공습, 일본 본토 공습이나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등 일본의 피해만을 기억하여 일본의 우경화에 악용하는 일이 많다.[78] 그러나 일본은 미국에게 일본 본토 공습을 당하기 전부터 중국에게 충칭 대공습 같은 무차별 전략 폭격을 가했다.[79] 결국 인과응보, 자업자득인 셈이다. 물론 일본의 극우들은 일제의 폭격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쇠하거나 합리화를 시전한다.

5.2.1. 일본인의 기억 속에 남은 '폭격'

도쿄 대공습을 비롯한 일본에서의 폭격, 그리고 나아가 핵무기의 공포는 일본인들의 집단적 기억에 현재까지도 강렬하게 정신적 외상이나 마찬가지로 각인되어 있다. 전쟁의 비극 중, 폭격의 기억은 여전히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일본인들의 이 기억은 매우 단편적인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 폭격 가치가 없어 미군이 폭격하지 않은 지방 소도시나 시골 사람들은 대도시가 어떻게 구워졌는지도 모른 채 ' 아니 이렇게 대일본제국이 멀쩡한데 왜 항복하는가'라는 개드립을 쳤을 정도였다. 당시만 해도 일본 인구의 60% 이상이 농민이었고 이촌향도 현상도 일어나기 전이라 결국 현대전의 공포를 제대로 체험해본 일본인은 생각보다 적었다. 심지어 전투기가 날아다니는 걸 구경하는 일본인도 많았다. 나중에는 제로센 같은 것이 아니라 미군 전투기가 대놓고 본토에 돌아다니는데도 아무 것도 모르는 수준이었다. 또한 독일/이탈리아처럼 국민들이 파시즘을 지지하며 전쟁에 자원한 것도 아니고, 당시 그냥 왕국/제국이었기에 국민들은 국제정세에 대해 아무 정보도 없었다.

일본사에서의 전쟁은 외침이 거의 없었다. 과거 고려와 몽골 연합군의 원정 여말선초 대마도 정벌 대마도 규슈 하카타 일대에만 한정되었다. 지상전의 참화는 보통은 주로 내전으로 겪어왔는데, 너무 오래 전의 역사인데다 그마저도 온갖 무사들의 낭만화된 영웅담으로 점철되어 있다. 임진왜란은 아예 조선반도만 전장이었던데다가 명분도 영 없었고, 실질적으로 아무 성과도 없었던 실패한 전쟁이라 일본인들 다수가 별로 생각하지도 않고 있다.

그리고 태평양 전쟁은 대부분 해전이나 공중전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대부분이 육상전인 중일전쟁마저도 중국대륙에서만 진행되었다. 이때문에 대부분의 민간인들은 일본 본토 폭격을 제하고는 전쟁의 참상을 크게 경험해보지 못했다. 이들이 접한 전쟁에 대한 소식은 남방군도, 중국 등지에서 가까스로 집으로 돌아온 생환병들의 이야기나 옆집에 배달된 전사통지서, 라디오 등에서 흘러나온 대본영 통제된 정보가 고작이었다. 일본 본토에 살며 달고 유일하게 태평양 전쟁의 참상을 겪은 지역은 그때까지 오키나와 전투 뿐이었다. 무엇보다, 연합군, 특히 미군은 앞서 독일 본토에 진격하다가 거센 저항으로 많은 희생을 겪었다.[80] 오키나와에서만 1만명이 죽게 되었는데, 그나마도 독일의 경우 가장 저항이 거센 베를린소련에게 맡김으로써 미국은 그나마 인명피해를 덜었지만, 그래도 서부전선에서 미군이 30만명 가량이 사망했다. 일본도 이렇게 점령하자면 엄청난 피해가 늘어날 수밖에 없어서, 미국은 폭격과 폭탄 투하로 압력을 줘서라도 전쟁을 어떻게든 끝내고 싶어 했다. 즉, 일본은 앞서 버티던 독일군이 끼친 미군의 출혈, 오키나와에서 버틴 일본군이 끼친 미군의 출혈 때문에 지상군 상륙이 아닌 폭탄과 폭격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이는 세계대전에서 국토가 쑥대밭이 된 유럽, 그리고 이웃나라 한국에서 만들어내는 전쟁 관련 창작물들과 비교해 볼 수 있다. 한국은 6·25 전쟁 당시 벌어졌던 현대전의 온갖 참상이란 참상은 다 겪어 봤다. 미군이 자행한 폭격 외에도 아군의 어떤 무기로도 파괴하기 어려운 적군 기갑부대의 전격전 침략의 공포, 적군이 근처까지 추격해 왔다는 소식에 혼비백산하는 피난민, 밀고 밀리며 공방이 뒤바뀌던 기동전의 전선, 고지 하나를 두고 벌이는 일진일퇴의 공방전에서 무력하게 죽어나가는 병사들, 반동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북한 공산군과 좌익 자경단에게 민간인 학살 능욕, 약탈 등 여러 전쟁범죄, 인민재판을 당하는 시민들, 인민의용군이란 이름으로 북한군에게 강제 징발되어야 했던 남한 국민들, 또 반대로 국군이 북진하자 부역자로 몰려 국군과 경찰, 우익 자경단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사람들, 이념 대립으로 마을 간에 벌어진 살육전, 밤낮이 바뀔 때마다 주인이 바뀌며 산속에서 진행된 처절한 빨치산 게릴라전, 이산가족의 아픔이나 애환어린 피난 생활, 포로수용소 생활 등 참담한 기억이 매우 다양하다. 그리고 이 참상들은 역사와 전쟁을 묘사하는 매체에 그대로 반영되어 관객에게 전쟁의 여러 비극을 각인시킨다. 언급했다시피 유럽에서도 전쟁터가 안 된 지역이 없다시피하고, 나라가 망하게 생겨서 국민들은 전부 끌려나가고, 전쟁을 겪던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포탄, 탱크, 전투기, 보병 등의 기억이 한국과 동일하게 존재한다.

그리고 중국에서 만들어내는 전쟁 관련 창작물들도 민족주의적 요소가 들어간 것과 별개로 일단 전쟁의 참상을 다루는 것 자체는 대체로 한국과 비슷한 편이다. 아편전쟁, 태평천국 운동, 청일전쟁, 의화단 운동, 신해혁명으로 대표되는 청나라 말기의 전란을 다루는 창작물에서 청나라 관군이 필사적으로 저항하고도 자신들의 암울한 현실 탓에 끝내 적과의 싸움에서 패배하는 모습을 묘사하고[81] 중화민국 군벌에 대해 다루는 창작물에서 청말 중화민국 군벌 시대의 붕괴 후 혼란기, 군웅할거, 난세의 혼란을 묘사하며, 중일전쟁을 다루는 창작물에서 일본군의 전쟁범죄와 일본군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중화민국군(+중국 공산당)의 모습을 세세하게 묘사하고, 대장정 국공내전을 다루는 창작물에서 국민당의 공산주의자 탄압을 세세하게 묘사하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 생략되는 부분이 어느 정도는 있을지언정 대체로 전쟁의 참상을 세세하게 다루는 편이다.

반면 일본 미디어 등에 등장하는 전쟁의 참상에 대한 이미지는 자신들이 겪은 유일한 현대전의 비극인 '미군의 공습' 위주라는 게 특성이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덩이', '불타는 도시', '불타는 도시를 등지고 피난가는 사람들' 또는 '잿더미가 된 도시를 바라보며 분노하는 등장인물'의 묘사이며 지상전의 온갖 참상이나 학살 등 그 외의 현실은 별로 묘사되지 않는다. 오히려 지상전에 대한 묘사는 일본 특유의 군사 문화+자신들이 승자였던 중국 전선에서의 경험담이 악영향을 끼쳐 일부에서 전쟁이 미화된 채 결합되어 낭만화되기까지 했다. 유일하게 참혹한 실상을 경험한 태평양 전쟁 참전자들이 남긴 기록은 이들에 비하면 소수에 불과하고 심지어 그런 기록도 오노다 히로 같은 인물을 프로파간다로 띄워주면서 사회적 영향력도 크지 못했으며 이를 기록물로 남긴 작가들이 은퇴하거나 세상을 떠난 21세기부터는 좀처럼 다시 조명되지 않는다.[82] 그나마 전쟁의 참상을 세세하게 다루는 작품들도 제2차 세계 대전을 소재로 한 작품들보다는 전근대 일본의 혼란기(특히 헤이안 시대 말기, 센고쿠 시대, 에도 시대 말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 및 건담 시리즈 등 미래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 더 많다. 이런 점에선 군인들만 죽어나가고 전쟁의 참상을 잘 모르던 1차 세계대전 직후의 바이마르 공화국과 비슷한 점도 많다.

다만 어찌되었든 도쿄 공습, 원폭 투하는 현대 일본인들에게도 상당한 반전 감정의 발단이 되어 현대도 일본인들은 재무장, 국방비 강화에 대해 국민적 반대가 매우 강한 편이다. 한국이 남녀노소, 좌우 가리지 않고 국방비 강화를 지지하고, 핵무장도 50% 이상의 지지 여론이 있는 것과 크게 대비되는 편이다.

5.3. 미국

진주만 공습의 복수전격. 사실 미국에서도 민간인 폭격에 대해선 논란이 있었지만 일본에는 민간인 거주지와 군수공장이 뒤섞여 있어서 그 당시의 기술로는 둘을 구분해서 공격하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들긴 했다.[83] 지금처럼 정찰 위성이나 토마호크 미사일이나 엑스칼리버 포탄 같은 정밀 타격 무기[84]가 있었다면 당연히 그걸 썼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둘을 구분해서 군수공장만 폭격하려고 계속 고고도 정밀 폭격을 주장했던 핸셀 소장( Haywood S. Hansell)은 결국 기술력의 한계에 부딪히고 시간만 보내다가 르메이에게 폭격단 사령관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차라리 이 정밀 폭격이 완벽 성공했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겠지만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던 르메이는 절대로 핸셀 소장에 대해 성과를 내지 못했다느니 하는 험담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Kozak, 2009) 사실 핸셀이 강판된 이유는 단순히 정밀 폭격을 주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작전 수행의 효율성이 미진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르메이도 취임 초기에는 조직의 최적화를 단행하면서 폭격 소티 수를 2배로 늘렸지만 그렇게 늘린 소티 수로 똑같은 정밀폭격을 시도했다.

민간인 피해를 염려해서 공격하지 않는다면, 거기서 미군을 죽이거나 다치게 할 무기들이 무더기로 생산될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미군은 손놓고 봐 줄 수가 없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은 모든 참전국이 국가의 모든 역량을 전쟁에 결집하는 총력전의 양상을 띠고 있었고 당대의 수많은 폭격 작전에 비추어볼 때 '군수공장이 포함된 도시 파괴'를 전제로 한 도쿄 대공습은 당시의 미군으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는 측면이 있었다.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장병들의 희생은 당시 여당인 민주당에게도 상당히 부담이었고, 2차대전에 대해서는 민주당과 일심동체였던 공화당도 부담이었다. 정부 입장에서도 젊은이들을 계속 희생시켜야 하는 전쟁이 지속되기보단 독일, 일본의 민간인을 많이 죽여서라도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게 우선이었고, 자식들을 전장으로 내보내는 국민들 입장에서도 가장 선호되었다. 영국, 프랑스도 민주주의 국가였다지만 이들은 국가의 존망이 걸려 있어서[85]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전장으로 보내야 했지만 미국은 국가가 국민의 눈치를 보긴 해야 했다. 미국이 독일의 수도를 점령하는 베를린 공방전의 영광을 소련에게 넘긴 것도, 소련이 입은 피해 때문에 소련인들과 스탈린이 강하게 원했던 것도 있지만, 독일 본토로 진격하면서 인명 피해가 크다보니 베를린은 더할 게 분명했으므로, 미 정부와 미군은 이런 부담을 떠안는 게 상당히 힘들었던 것. 당장 원자폭탄 투하 역시 원인 중 하나가 오키나와 전투였다. 서부전선에서 노르망디부터 독일 땅 내부로 진입하는데 엄청난 사상자를 겪은 미군이었는데, 일본에서도 오키나와에 상륙하면서 일본군이 수십만을 갈아넣으면서 미군을 만 단위로 사상자를 내니, 그냥 민간인들에게 공습과 원폭을 가해서라도 투쟁 의지를 꺾는 것이 훨씬 이득이었던 것이다.

또한, 만약 핸셀 식의 정밀폭격을 계속하다가 너무 시간을 끌었을 경우 미군은 몰락 작전을 발동해 일본 본토를 침공하여 어느 제독 진주만 공습으로 아수라장이 된 해군기지를 보고 했던 말 그대로 일본어를 지옥에서나 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만들어 버렸을 것이다. 물론 몰락 작전이 실행되면 미군 역시도 무시할 수 없는 숫자인 수만에서 수십만[86][87]의 장병을 희생해야 했으니 반대로 커티스의 대규모 폭격과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가 지지부진한 소모전에서 벌어졌을 대규모 희생을 최소화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종전 후 르메이는 미국과 우방이 된 일본 항공자위대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공로로 훈장[88]을 수여받게 된다.

5.4. 중국(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국민정부를 비롯한 중화민국이나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도쿄 대공습에 대해 딱히 부정적인 입장을 밝힌 적이 없는데 중화권 또한 일본으로부터 충칭 대공습을 포함한 무차별 전략 폭격을 당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89] 국민당 정부가 충칭시를 임시수도로 정하자 일본은 충칭을 집중 폭격했는데, 전쟁 수행 의지를 꺾는다는 명목으로 고의로 민간인 거주지역을 폭격했을 뿐만 아니라 소이탄도 사용했다. 수많은 민간인들이 방공호를 찾아가다가 피격 혹은 질식해서 사망했으며, 방공호에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 1200명이 질식사한 끔찍한 공격에 대해 일본 정부는 전혀 사과하지 않았다. 중화권의 입장에서는 미군이 자신이 잔혹하게 당한 폭격을 똑같이 가해국의 수도에 되갚아준 상황이니 통쾌했으면 했지 굳이 불편해 할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물론 역사적인 이유로 친일 성향이 강한 본성인들의 입장에서는 확실히 불편한 일이고, 일본인들과 엮일 일이 많은 재일화교의 입장에서도 통쾌함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일이지만 말이다.

6. 다른 수도 공습 사례와의 비교

  • 일제의 도쿄 대공습과 제일 유사한 역사적 사례는 2차대전 참전국 중 일제와 같은 동맹국 추축국 나치 독일이다. 독일 역시 가장 심한 폭격을 당했으며, 드레스덴 폭격과 같은 무시무시한 폭격을 당한 끝에 전 국토가 잿더미가 되었다.
  • 영국도 같은 섬나라라서 본토에서 직접적인 전투는 없었지만 전쟁 초기부터 영국 본토 항공전 이후까지 자국 상공에서 치열한 공중전을 벌였고 여러차례 폭격을 당했다. V1(로켓), V2(로켓)와 같은 무기가 유명하지만 본토 항공전 이후에도 독일은 여전히 폭격으로 영국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믿었고, 대전 말에도 보복을 위해서 영국에 공습을 시도했다. 심지어 항복하기 직전까지도 제트 폭격기인 Ar 234[90] 영국 상공에 날려보내기도 했을 정도였다.
  • 제2차 세계 대전 유럽 전선에서 최초로 대규모 폭격을 당한 나라는 폴란드 제2공화국이다. 그 중에서 수도 바르샤바가 가장 큰 참화를 가장 오랫동안 입었다. 1939년 9월 1일 폴란드 침공이 시작되고 9월 28일 바르샤바 전투 폴란드군 항복으로 끝날 때까지 바르샤바는 매일 폭격을 당했다. 특히 9월 25일에는 독일 지상군의 대규모의 포격과 함께 1,200여 대에 이르는 항공기가 출격하여 바르샤바를 무자비하게 때려부쉈다. 전쟁 전의 바르샤바의 인구는 135만여 명이었는데 바르샤바에서 폴란드군이 항복할 때까지 폴란드군 6천여 명과 시민 2만 5천여 명이 사망했다. 당시의 폭격으로 도시의 12%가 폐허가 되고 50% 이상의 건물이 손상을 입었다. 바르샤바뿐만 아니라 프람폴(Frampol), 비엘룬(Wielun) 등 다른 폴란드 도시들도 독일 공군의 극심한 폭격에 피해를 입었으며 특히 프람폴은 폭격 직후 멀쩡히 남은 것이 도로 2개밖에 없을 정도로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10월 6일 본토의 마지막 폴란드군이 항복하면서 폴란드 침공이 종료될 때까지 폴란드 민간인 10만여 명이 폭격으로 사망했다. 여기서 끝났어도 보통 일이 아니지만 6년 후 독일군은 비단 공군뿐만[91] 아니라 구경이 600mm인 칼 자주박격포나 그것도 모자라서 무려 구경만 800mm에 달하는 구스타프 열차포 같은 대구경 포병 병기들을 끌고와서 바르샤바를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고, 거기에 곳곳에 화염방사기를 뿌리고 공병을 파견하여 계획적으로 도시를 파괴해버렸다.

7. 대중매체에서의 묘사

도쿄 외의 일본 공습 관련작은 일본 본토 공습 문서 참고 바람.
  • 서예의 전위적 대가로 유명한 이노우에 유이치가 이 사건을 작품으로 옮긴 바 있다. 실제로 이노우에는 당시 도쿄의 초등학교 교사였는데 피난 중 졸업식을 위해 돌아왔던 6학년 학생들이 공습으로 모두 사망했고 그 와중에 이노우에는 겨우 살아남았던 경험을 토대로 한다. 제목은 '아, 요코가와 국민학교'이다. 작품 사진
  • 드라마 《도쿄 대공습》: 제목 그대로 대공습을 다룬 호리키타 마키, 후지와라 타츠야 주역의 2008년 2부작 드라마.[92] 다만 해당 작품은 완전하게 피해자 행세를 하는 극우 미디어물 작품이라고 보기는 어려운데 도쿄의 경찰서장인 남자 주인공인 오오바 히로토( 후지와라 타츠야 분)의 아버지가 도쿄 시민들의 피난을 건의하나 이를 천황에 대한 불충이라며 거부하는 꽉 막힌 일본군의 병크가 그대로 그려지고 상이군인과 억지로 입대한 히로토 등을 전면에 내세우는 등 일본군이 결코 긍정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는 점, 간호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적군이었던 미군의 전투기 조종사를 치료하는 의사 이시카와(키시타니 고로 분), 몇 안 되는 생존자 소녀를 입양해 가는 부부가 한국인 부부라는 설정 등이 그 예이며 무엇보다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도 그대로 그려졌다는 점과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죽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일본의 우경화를 위한 일본의 극우 미디어물 작품이라기보다는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며, 이런 일이 있더라도 살아나가야 한다'라는 메세지를 더 강조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 만화 《 맛의 달인》: 쾌락정 블랙의 장인이 피해자다. 당시 묘사를 보면 엄청 충격적이었던 듯.
  • 만화 《 미스터 초밥왕 전국대회편》: 카노 초밥 사장 카노 야헤이는 이 사건으로 가게가 전소돼 아들 쇼헤이를 잃었다. 50여년 뒤 세키구치 쇼타를 알아보기 전까지 뛰어난 후계자를 발굴하지 못했다.
  • 영화 《 언브로큰》: 이쪽은 실화를 다루고 있다. 도쿄 대공습 당일 주인공과 포로들이 수용소 불끄기에 강제동원된다. 이때 '이거 우리가 왜 꺼야 하나? 타버리게 놔두자.'라는 말까지 나온다. 또한 전쟁이 곧 끝나는 것을 직감하지만 일본군이 포로들을 다죽일거라고 생각해서 절망에 빠진다.
  • 애니메이션 《 오소마츠 상》: 2기 18화 '이야미는 홀로 바람 속에'라는 에피소드에서 소녀의 부모가 전쟁 때 죽었다고 하며 소녀는 그때 눈을 잃었다고 나온다. 이야미가 그 이야기를 들으며 도쿄 대공습 당시의 불타는 도시를 떠올린다. 이 에피소드의 배경은 전쟁 직후인 40년대 후반으로 보인다.[93]
  • 드라마/만화/애니메이션 《유리 토끼》: 대공습 당시의 주인공과 가족의 생활에 대해 나온다.
  • 만화/애니메이션 《하나우쿄 메이드대》: 최종 보스인 하나우쿄 호쿠사이가 도쿄 대공습의 생존자들 중 하나다.
  • 영화 《 하울의 움직이는 성》: 전함이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상태에서 공습이 날아오고 그다음 대규모 폭격 전 선전물를 날리는 것이나[94] 공습을 받은 도시 묘사로 보나 도쿄 대공습을 모티브로 한 듯하다.
  • 영화 《 못말리는 람보》: 일본 총리 부처가 참석한 파티장에서 벤슨 미국 대통령(로이드 브리지스)이 연설을 하는데 연설문 첫 대사가 "일본에 폭탄을 쏟아부은 지가 엊그제 같은데, 이젠 일제 차가 속을 썩이는군요" 이 말을 들은 일본 총리가 뭐 씹은 표정을 짓는 건 덤.
  • 만화/애니메이션 《 전생했더니 슬라임이었던 건에 대하여》: 작중 등장인물인 시즈가 도쿄 대공습의 생존자인 것으로 나온다. 도쿄 대공습으로 인해 어머니를 잃고 시즈 본인도 온 몸에 중화상을 입은 채 사망하기 직전 이세계로 건너왔다는 설정. 소설 연재분과 만화판에서도 짚고 넘어가는 설정이지만, 애니메이션 판에서는 이 설정이 한층 중요시되어 아예 애니메이션 1화부터 도쿄 대공습 장면으로 시작한다
  • 소설 뒤의 얼굴은 누우구?는 후반부이 주요 사건으로 나온다.
  • 쓰시마마루 -오키나와여 안녕히-에서 후반부의 사건으로 나온다. 기껏 침몰 사건에서 살아돌아왔는데 이번에는 대공습으로 아버지와 집을 잃어버리는 주인공의 불행을 보여준다.
  •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는 상술한 도쿄 대공습의 루머를 채택해 널리 확산시키는 데 일조했다. 해당 저서는 저술 당시 인터넷에서 떠돌던 설을 많이 채용했는데 예를 들면 도쿄 대공습 당시 미군이 백린탄을 사용했다거나[95] 남일 소련군에 소속되어 독소전쟁을 치렀다는[96] 등의 거짓으로 밝혀진 것이 많아 인용에 주의를 요한다.
  • NHK 다큐 《도쿄 대공습 - 미공군 간부가 말하는 "진상"》[97] : NHK에서 2017년 4월 미공군 간부 246명의 육성 테이프를 발견하여 일본에 대한 공습을 계획하고 실행한 커티스 르메이외의 중요 간부들의 귀중한 증언을 토대로 일본에 대한 폭격 전략의 변경과 도쿄 대공습에 대해 다룬 다큐멘터리이다.
[navertv(43932127)]

* NHK 다큐 《영상의 세기 PREMIUM 제19부 - 도쿄 · 파괴와 창조의 150년中》[98] : 20세기 영상 매체 발명 후 대략 1890년대부터 연합군 점령하의 1952년까지 관동 대지진과 도쿄 대공습이라고 하는 두 번의 괴멸을 극복하고 되살아난 도쿄의 파괴와 창조의 150년을 다룬 다큐멘터리로 실제 일본 본토 공습및 도쿄 대공습당시 약 600여장의 사진을 남긴 경시청의 사진기자 이시카와 코요우(石川 光陽)의 수기와 사진을 바탕으로 공습의 피해 상황을 다루고 있다. [99]
[navertv(59901955)]

8. 기타

  • 안타까운 피해 사례가 속출하였는데 당시 많은 자료 및 유물 문화재들이 도쿄 대공습의 폭격으로 대거 소실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당시 김정희의 자료들.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隣)란 인물은 완당(김정희의 아호)에 관심이 매우 깊어서 그의 글과 그림 등의 자료를 많이 소장하고 있었다. 서예가인 손재형은 후지츠카 치카시를 찾아가서 세한도를 돌려달라고 간청했고 오랫동안 설득한 끝에 세한도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폭격으로 치카시의 서재도 전소되면서 김정희의 자료들이 대거 소실된 것. 손재형의 설득으로 인한 반환조차 아니었다면 세한도마저 소실되었을 것이다.
  • 이후 80여년이 지나서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는 일본의 유명 AV TOKYO-HOT을 이 공습을 가리키는 조어로 쓰기 시작했다.[100][101]
  • 훗날 재일 한국인 문세광에 의해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이 벌어지자 한국 내에서는 단교 이야기가 나왔을 정도로 민간에서나 정계에서나 반일감정이 극심해졌고 마찬가지로 이 사건으로 영부인 육영수를 잃은 박정희 대통령은 격분한 나머지 주한 일본 대사를 청와대로 초치“동경 폭격 못할 줄 알아?”라는 폭언까지 했었다. 다만 이후 미국 정부의 중재와 일본 정부의 뒤늦은 협조로 사태가 커지지는 않았으며 사태도 일단락되었다.[102]

9. 관련 어록

우린 매캐한 잔해 속에서 숯덩이로 발견된 일본인들을 위해 울지 않습니다.
ㅡ 헨리 '햅' 아놀드 장군의 편지[103]에 대한 커티스 르메이의 답장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 그것은 그쪽 정부와 함께 우리와 싸우는 민중들이고 우리는 무장한 적군하고만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소위 죄없는 방관자를 죽이는 것을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104]
('There are no innocent civilians. It is their government and you are fighting a people, you are not trying to fight an armed force anymore. So it doesn't bother me so much to be killing the so-called innocent bystanders.)
커티스 르메이
Killing Japanese didn’t bother me very much at the time…. I suppose if I had lost the war, I would have been tried as a war criminal. (…) every soldier thinks something of the moral aspects of what he is doing. But all war is immoral and if you let that bother you, you are not a good soldier.
(나는 그 당시에 일본인을 죽이는 것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중략) 만약 전쟁에서 패배했다면 나는 전범으로서 기소되었을 것이다. (중략) 모든 군인은 도덕적인 측면을 고민한다. 하지만 모든 전쟁은 비도덕적이며, 만약 이로 인해 스스로 괴로워한다면, 당신은 훌륭한 군인이 아니다.)
커티스 르메이
일본의 형식이란 다음과 같다. 공장이 있고, 그 옆에 민간인 가족들이 살고 있고, 그 사람들은 자기네 집에서 조그만 부품들을 만든다. 그걸 가정식 조립공정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스즈키네는 64호 볼트를 만들고, 옆집 하루노보네는 64호나 65호, 63호 너트, 아니면 그 사이에 있는 어떠한 개스킷을 만드는 식이다. 그러면 공장에서 나온 키타가와씨가 손수레를 끌고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알맞은 순서로 부품들을 모아서 가는 거다.
(In Japan they would be set up like this: they’d have a factory; and then the families, in their homes throughout the area, would manufacture small parts. You might call it a home-folks assembly line deal. The Suzuki clan would manufacture bolt 64; the Harunobo family next door might be making nut 64, 65, or 63, or all the gaskets in between. These would be manufactured right in the same neighborhood. Then Mr. Kitagawa from the factory would scoot around with his cart and pick up the parts in proper order.)
커티스 르메이, 폭격 직전에 민간인 대상 공습이란 상황에 죄책감을 느낀 부하들을 보고.
료 아저씨는 도요코 선을 타고 출발했다. 정답던 료 아저씨가 떠남과 동시에 B-29가 드디어 도쿄 하늘에 나타나 매일같이 폭탄 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도모에 학원에 불이 났다. 밤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학교 바로 옆, 교장선생님 집에 있던 미요와 언니 미사, 그리고 사모님은 다행히도 구혼부츠 절의 연못 근처에 있는 도모에 농원으로 급히 피해 화를 면했다. 하지만 B-29는 계속해서 도모에 학원의 전철 교실로 폭탄을 떨구었다.
교장선생님의 평생 꿈이었던 학교는 지금 화염에 휩싸여 있다. 선생님이 무엇보다도 사랑했던 아이들의 웃음소리며 노랫소리 대신, 학교는 지금 끔찍스런 소리를 내며 무너지고 있다. 그 불길은 어떻게 손을 써볼 수도 없이 학교를 불태워버리고 있었다…
쿠로야나기 테츠코, <창가의 토토>에서

10. 관련 문서

11. 참고 자료


[1] 사진의 검은 부분은 아직 타들어가지 않은 건물들이 아닌 도쿄 만이다. 즉, 물 위 육지의 도쿄 시가지 전체가 미군의 네이팜탄 공습에 불타고 있는 것이다. 불타는 곳 사이의 검은 선은 도로와 아라카와강이다. [2] 1945년 2월 25일의 폭격 작전을 '미팅하우스 1호'로, 3월 9일의 폭격 작전을 '미팅하우스 2호'로 칭하기도 하는데, 작전명에 붙는 숫자는 특별한 구분이 아니라 폭격 지역의 식별 대상이 되는 목표에 대한 1차 공격과 2차 공격을 가리키는 명칭이었다. (奥住喜重, 早乙女勝元『新版 東京を爆撃せよ―米軍作戦任務報告書は語る』 p.37, 三省堂, 2007.) [3] 이 밖에 일본에서는 1944년부터 1945년까지 있었던 약 106회의 도쿄 공습 가운데 특히 격렬한 1945년 3월 9-10일, 4월 13일, 4월 15일, 5월 24일, 5월 25-26일의 다섯 차례 공습을 통틀어 '대공습'이라 칭하기도 한다. [4] Wired "March 9, 1945: Burning the Heart Out of the Enemy" 2011. [5] "Firebombs Over Tokyo: America's 1945 attack on Japan's capital remains undeservedly obscure alongside Hiroshima and Nagasaki", Tokyo WWII firebombing, the single most deadly bombing raid in history, remembered 70 years on [6] 이 때문에 핵투하 작전에도 기용되었고 아예 1기만 보내서 본토 정찰을 보냈는데 이것 때문에 히로시마 원폭 투하 당시 정찰처럼 에놀라 게이만 뜬 것을 보고 경계를 안 했다고 한다. [7] 따라서 사이판 전투의 전략적 의의는 매우 컸다. 사이판, 은 일본 본토를 목표로 하는 안정적인 폭격 기지로서 B-29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었다. 사이판과 괌에서 도쿄까지의 거리는 약 2,500㎞ 정도로, 당시 왕복 5,000㎞ 비행이 가능한 폭격기는 사실상 B-29가 유일했다. [8] 제트기류의 존재를 미군은 1944년 시험 비행에서 처음 발견했으나 당시 군 상부는 이를 일선 조종사들의 임무 실패에 대한 변명으로 여겼다. 정기적인 고층 대기 연구가 쌓인 1950년대 초에야 이러한 기류의 존재가 정식으로 밝혀졌다. [9] Lauris Norstad, 1907.3.24 ~ 1988.9.12 [10] Haywood S. Hansell, 1903.9.28 ~ 1988.11.14 [11] 당시 미군의 전술은 폭격기를 이용해 산업 시설의 기반이 되는 제철소, 고무 공장 등 1차 생산 납품 공장을 공습, 산업망 전체를 마비시킨다는 이론에 기반을 두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각 시설들을 매우 정확하게, 정밀하게 그리고 복구불능으로 타격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는 무식하게 비행기로 폭탄을 들이붓던 2차 대전 당시의 기술력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하고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도 검증되었듯이 천하의 미군이 아니라면 미사일과 정밀폭탄이 나온 현대전에서도 대단히 어렵다. 심지어 그 천하의 미군도 걸프 전쟁에서 공습할 때는 "모든 접시안테나를 전파전략물자로 취급"한다는 억지스러운 논리로 부분적인 지역적 폭격을 동반해야 했다. 이론 자체는 듣기 좋지만 실전에서는 무쓸모한 전술이었던 것. [12] Air Raids on Tokyo, National Geograpghic [13] 이때의 독일 방공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전자식 레이더와 레이더 탑재 야간전투기를 적극 활용하여 연합군 폭격기를 격추해 나갔는데 제공권이 연합군에게 거의 완전히 넘어간 전쟁 말기인 1945년에도 1월부터 3월까지 불과 3개월 동안 영국 공군은 700대를 베를린 상공에서 날려먹었다. [14] 이 당시 일본의 야간방공능력이 없는 원인은 없느니만 못한 레이더에 있다. 일본군/무기체계 문서 참고. [15] 隣組. 도쿠가와 막부 시절 형성된 5~10가구 단위의 최소 행정조직이다. 전후 GHQ의 명령으로 잠시 불법화되었다가 1952년에 다시 허용되어 '조나이카이'(町内会)나 '자치회' 등의 형태로 부활했다. [16] 주부를 주 구독층으로 하는 여성 월간지. 1917년에 창간되었고 전쟁 중에는 주부들을 대상으로 한 전시 프로파간다 활동에 동원되었다. 전후 정상적인 주부 잡지로 돌아왔으며 2008년 휴간(사실상 폐간)했다. 일제강점기 한반도에도 들어온 모양인데 몇몇 일제강점기 시대의 소설에서 언급된다. [17] 출처: 하야카와 타다노리 저, 송태욱 역. <신국 일본의 어처구니없는 결전생활> (2019) 277p. [18] 우한시의 한커우다. 하지만 당시에는 독립된 도시였다. [19] 때문에 동서고금을 통틀어 방화범에 대한 처벌( 사형)이 제일 가혹했던 곳이 에도 막부 시기의 일본이었다. 방화미수범에 대해서도 기본이 화형이었고 거기에 몇 가지가 더 추가되었다. [20] 히로시마는 맑아서 그나마 덜했는데 나가사키는 구름 틈새에 잠시 보여진 맑은 부분을 보고 떨어뜨린 것이기에 더했다. 그리고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의 원래 목표지는 원폭돔으로 알려진 시마 외과병원 건물이 아닌 T 모양의 아이오이 다리였다. 게다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원래 코쿠라에 떨어뜨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날 작전 직전부터 예비 펌프 고장으로 연료 일부를 못 쓰게 된 데다 사인이 안 맞아서 40분을 공중에서 허비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시간이 지나면 차차 맑아질거라던 기상보고와 다르게 코쿠라 상공의 구름과 연기가 걷히지 않아 투하하지 못했고 돌아가다가 길목에 있던 나가사키에 떨구기로 하고 갔는데 나가사키 역시 기상보고와는 다르게 시계가 가려진 건 마찬가지. 연료가 떨어져가자 폭탄을 버리고 도망치느냐 폭탄과 함께 추락하느냐의 갈등을 하고 있을 때 약 30초 정도 구름 틈으로 나가사키의 시가지가 보였고 그것이 운명을 갈랐다. [21] 물론 이때 사용한 소이탄은 도쿄대공습에 사용한 가솔린 베이스의 M69 소이탄이 아니라 알루미늄 혹은 마그네슘을 활용한 테르밋 소이탄이었다. 이 소이탄의 특징은 산화제로써 산화철을 사용하기에 공기가 있든 없든 심지어 물 속에서도 3000도라는 매우 강력한 고온을 낸다는 것이다. 이 정도의 고온이면 석조든 철근 콘크리트든 버틸 수가 없다. [22] 드레스덴 폭격 때는 고폭탄과 소이탄 비율이 4:6이었다. [23] 다이토구 [24] 참고로 르메이는 충칭 대공습 당시 중국 전선의 고문 장교단의 일원으로 참전하고 있었다. [25] 김태우, 폭격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2013, 창비, 51~52쪽 [26] 방화선(防火線)이라고도 한다. firebreak [27]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세운상가와 현 퇴계로도 일제가 이렇게 조성한 방화대 부지 위에 세워졌다. 세운상가는 해방 후 넓직한 공터에 무허가 판자촌이 난립했는데 이를 정비하고 위에 주상복합 아파트를 세운 것이고 퇴계로는 기존의 도로(마른내길)를 확장하기 어려우니 그냥 인근 방화대를 길로 만들어버렸다. [28] 고인 물은 모기가 산란하기에는 최적의 장소다. [29] 이 날의 작전 Operation Meetinghouse에 폭격기 총 339대가 참가했고 그 중 282대가 목표 지역 상공에 도달했다는 기록도 있고 기록마다 조금씩 숫자가 차이가 난다. 영어 위키백과 문서 [30] 이 사람은 유명한 B-17기인 멤피스 벨의 파일럿이다. 멤피스 벨이 유럽 전선에서 물러난 후 소령으로 진급하여 B-29의 조종간을 잡은 것이다. [31] 애초에 확산탄이 아닌 자탄으로서의 소이탄은 고폭탄에 비해 무게가 가볍다. 도쿄에 쓰인 M-69 소이탄을 기준으로 6 파운드(2.7㎏) 정도. [32] 참고로 불과 불이 합쳐지면 위력 상승이 합연산으로 적용되지 않고 곱연산으로 적용된다. 쉽게 말해 위력이 3인 화재 2개가 각각 만나면 위력이 3+3=6이 되는 게 아니라 3×3=9로 계산된다는 소리. 이걸 화재선풍이라고 한다. [33] 2019년 고성-속초 산불을 직접 지켜보거나 뉴스 속보로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산불 발생 지역 쪽에서 영랑호를 두고 떨어져 있던 속초 시내까지 불이 순식간에 미쳤다. [34] 그러나 도쿄의 3월은 가장 건조한 시기라 비 자체가 거의 오지 않는다. [35] 폭격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남긴 증언에 따르면 화재현장의 끔찍한 열기로 인해 가까이만 가도 화상을 입거나 옷이 갑자기 화르륵 타오를 정도였다고 한다. [36] 아사쿠사의 사찰로, 칸논지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하다. [37] 이후 1951년에 당시 본당을 본뜬 신본당이 기공되었고 1960년 마쓰시타 그룹의 기부로 크게 중창되었다. [38] 1873년에 처음 지어진 극장으로, 이때의 메이지좌는 1923년에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된 후 장소를 옮겨 콘크리트로 재건된 건물이었다. 도쿄 대공습으로 소실된 후 2년만에 재건되었고 이후에도 화재 사고를 한 차례 겪은 뒤 1958년에 재건된 파란만장한 역사를 간직한 극장이다. 이후에는 승승장구하여 1993년에는 극장을 갖춘 고층 빌딩으로 재건축하는 등 현재까지 잘 나가는 극장이 되었다. [39] 스미다강으로 알려졌지만 1965년 이전까지 스미다강이라고 부르는 수로는 없었다. 당시에는 현재의 스미다강을 아라카와강으로 불렀다. [내용] The heat from the conflagration was so intense that in some places canals boiled, metal melted, and buildings and human beings burst spontaneously into flames. [번역] 대화재로 인한 열기가 너무나 강렬해서 몇몇 장소들에서는 운하가 끓었고, 금속들이 녹았으며, 건물들과 사람들이 저절로 불타올랐다. [42]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불이 붙었을 때 물을 부으면 폭발적으로 수증기와 기름이 튀는 현상과 원리가 같다. [43] 왼쪽 사진 중 아래쪽은 히가시니혼바시와 니혼바시하마초 지역이며, 스미다가와 건너편으로는 현재 수도고속도로 고마쓰가와선의 고가가 설치되어 있는 타테가와가 흐르고 있다. 타테가와 왼쪽은 료고쿠이며, 돔이 얹혀져 있는 건물이 바로 료고쿠 국기관이다. 타테가와 오른쪽은 치토세이다. [44] 타지 않고 남아 있는 건물들은 불에 타지 않는 석조 건물들이다. 즉, 저 소수의 석조 건물들을 제외하고 모든 목조 건물이 타 버려서 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일본은 목조건물이 지진의 영향이 적기 때문에 대중화되어 있어서 피해가 심했다. 그리고 남은 석조건물들도 어차피 철거해야 한다. 공습으로 철근과 콘크리트가 녹아 균열이 생겨 무너지기 때문. [45] 궁금하지만 보기는 무서운 사람들을 위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사람 모양의 숯덩어리가 된 상태다. 대충 폼페이의 화산재에 묻힌 화석 같은 느낌. 물론 폼페이 유적지에서 볼 수 있는 화석과는 다른데 폼페이 유적지의 그건 시체가 썩어 없어진 공간에 석고나 유리섬유를 부어서 본을 뜬 것이라서 진짜 화석이 아니다. 네이팜의 파란 불꽃은 1,000도를 넘는 고온으로서 인체와 접촉할 경우 수분을 고속으로 증발시켜 버리기 때문에 시체의 형태가 비교적 온전하게 유지된다. [46] 중상이 아닌 부상자를 집계하지는 않은 모양. 이들은 살아남았다고 한들 연기로 인해 호흡기가 손상된 건 물론, 전신에 끔찍한 중화상에다가 심지어 일부는 사지가 검게 타있거나 녹아있는 등 산송장이나 마찬가지가 되어버렸다. [47] 도쿄 대공습의 피해자 중 조선인은 약 1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48] 공습, 재난 등에 대비하여 주민, 시설물 등을 분산시키는 것. [49] 의외로 일본군은 "고고도 폭격기를 격추할 수 없어!"라며 좌절한 전투기 파일럿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50] 이 공습 이전까지 햅 아놀드는 성과 부진을 이유로 맥아더와 어니스트 킹 등에게 의미없는 공습을 그만두고 B-29를 자기들 작전에 동원하라고 엄청나게 닥달했다고 한다. [51] 영국 도시에 먼저 폭격을 퍼부은 나치 독일군과 그것에 대한 앙갚음을 이자까지 톡톡히 쳐서 갚아 준 미군과 영국군의 폭격에 영국/독일 국민들이 각각 어찌 반응했었는지 생각하면, 미국이 일본 국민의 인식 변화에 대해서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건 당연했다. [52] 현대에도 일본 자위대 기지나 시설 등은 도시 한복판에 위치한 경우가 많은데, 대표적인 것이 오이타 분둔지, 네리마 주둔지 등이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이렇게 자위대 기지가 도시 한가운데에 위치하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자위대 기지가 먼저 들어서고 그러고 난 뒤에야 그 주변에 민간 거주시설이 들어서기 시작했기 때문. 이런 케이스는 제네바 협약에 어긋나지 않아서 문제를 제기하기도 곤란하다. [53] "…1944년 즈음에는 일본의 전쟁 경제에서 가내수공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거의 없어졌다. 하지만 부품과 장비의 상당부분은 직원 250명 이하인 소규모 공장에 하청을 맡기는 식으로 조달했다. 이런 소규모 공장은 도쿄에 밀집되어 도시 전체 공업 생산량의 50% 가량을 차지했다." United States Stategic Bombing Survey, 1946, p. 87. [54] 표준화와 대량 생산 분야에서 한참 앞서 있던 미국 입장에서 250명 규모의 공장은 사실상 가내수공업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55] 職住近接 : 직장과 주거 공간이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 [56] 물론 본인은 공장이 숨어 있는 시가지를 폭격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며 불평을 늘어놓았고, 틈만 나면 이 임무에서 빠져나가려 했지만 육군과 해군의 협의에 따라 니미츠 제독에게 르메이의 항공대 병력을 동원할 권한이 있었으므로 별 수 없이 임무를 계속 수행했다. [57] 르메이가 항의하면 킹 제독은 '꼬우면 해군 없이 해보시던가' 라고 했다고 한다. [58] United States Strategic Bombing Survey, 1946, p. 73. [59] United States Strategic Bombing Survey, 1946, p.90~92 [60] 물론 해당 주장을 한 사람은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임을 감안하자. # 군사 보고서를 작성한 사람들과 같은 전문가는 아니다. [61] 존 키건 저, 류한수 옮김, 2차 세계대전사, 청어람미디어, 2007, 864-867쪽. [62] 김태우, 폭격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창비, 2013 참고 [63] 1) John W. Dower, War Without Mercy: Race and Power in the Pacific War, 2) Craig M. Cameron, American Samurai: Myth and Imagination in the Conduct of Battle in the First Marine Division 1941-1951. [64] 일본의 경우 선전포고도 없이 갑자기 진주만을 공습하는, 당시 기준으로도 국제법을 깨뜨린 행위를 했다는 걸 감안할 필요가 있다. 진주만 공습 직후 '일본인을 죽여라, 더 많은 일본인을 죽여라. 그리고 더 많은 일본인을 죽여라'라는 구호가 실제로 쓰였을 정도였다. 그리고 저 구호를 가장 먼저 쓴 사람은 해군의 윌리엄 홀시 제독이다. 과달카날방면 전선 지휘관으로 부임해 와서 기자들과의 인터뷰 도중 대놓고 외친 말이 "Kill Japs, kill japs, KILL MORE JAPS!"(왜놈들을 죽이고, 죽여서, 더 죽이는 겁니다!)다. [65] 다만 알아두어야 할 것은, 2차대전의 시발점인 폴란드 침공이나 독소전쟁의 시작이 전부 선전포고 없는 기습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은 나치독일도 마찬가지다. 이런 점들을 보면 단순히 선전포고를 했다/하지 않았다의 문제가 아니라 전쟁과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 있던 자신들이 직접 타격을 당했다는 사실, 그리고 인종, 문화적인 문제가 겹쳐 반감이 더 커진 것으로 보인다.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나치독일과 미국간의 포로 고문, 학살 등의 문제는 분명히 존재했지만, 독소전쟁과 태평양전쟁의 그것과 비교해보면 엄청난 차이가 난다. [66] 드레스덴 폭격 당시의 민간인 피해는 엄밀하게는 그 당시 폭격 기술이 정밀하지 않아 발생한 일종의 오폭이었다. [67] 비유하자면 현재 아프간 이라크, 시리아에서 수많은 내전이 일어나 수많은 이라크인, 시리아인, 아프간인들이 떼죽음 당하고 있는데 별 신경쓰지 않는 건 그 내전이 한국과 우리 경제와 삶에 별 문제를 야기하지도 않고 한국 국민의 생활에 악영향을 거의 끼치지 않기 때문이며 한국인들이 인종차별주의자여서 신경 안 쓰는 건 아니다. [68] 존 린, <배틀 전쟁의 문화사>, 청어람미디어, 2006 [69] 김태우, <폭격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2013, 창비 [70] Morale Bombing. 인구를 절망적인 수준으로 끌어내려 적군의 사기를 꺾는 것. [71] 말콤 그래드웰의 저서 <어떤 선택의 재검토>에 따르면, 정밀폭격은 당시 미 공군력을 총괄하던 헨리 아놀드를 비롯한 맥스웰필드 육군항공단전술학교 출신 파일럿들의 주류적 생각이었다. 그들은 이것이 효율적이면서도 민간에 대한 피해를 최소화하는 도덕적인 전투방식이라고 여겼다. [72] 특유의 호전적인 기질로 폭격 명중률을 높이기 위한 '저고도 비행', '회피기동 없는 비행' 등을 관철하여 나치독일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73] 정밀폭격론자들의 '피해 최소화' 방식이 민간인이 적거나 없는 군사지역에 대한 폭격이라면 르메이의 '피해 최소화'는 최대한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것이었다. [74] 당시 루즈벨트 내각의 육군성 장관 헨리 스팀슨은 르메이가 두번째로 도쿄에 소이탄 폭격을 하고 나서야 일본에서 일어난 일에 충격을 받았다고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이를 두고 미국의 역사가들은 스팀슨이 이 작전에 무지한 것(또는 무지한 척을 하는 것)이 일종의 '묵인'이라고 해석했는데 말콤 글래드웰은 당시 육군 위주 전략에만 집중하던 미군의 상부가 르메이가 벌이게 될 작전의 수준을 상상하지 못한 것이라고 추측한다. [75] 심호섭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부교수가 역전다방 역전다방 ep38 태평양 전쟁, 도쿄 대공습에서 밝힌다. [76] 당장 조선인 사망자 역시 1만에 육박한다. [77] 결과적으로 조선의 도시들은 다행히 전략폭격을 당하진 않았지만, 그러나 승전국으로 반환이 예정되어 있던 타이베이도 일본 본토의 도시들처럼 전략 폭격을 당한 사실을 감안하면 이 같은 설명이 충분히 신빙성이 높다고 볼 수 있는지, 그리고 당대 사람들이 이 설명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었을지는 의문스럽다. [78] 비슷하게 네오나치들은 드레스덴 폭격을 이용한다. [79] 오히려 미국이 일본이 중국에서 행한 소이탄 대공습에서 영감을 얻어서 일본 공습 때 똑같이 사용했다는 주장도 있을 정도다. [80] 40년대 중반에 독일과 일본이 궤멸 상태였다지만, 그들의 영토에 진입하는 건 엄청난 출혈을 강요한다. 이들이 수비 입장으로 나오면 죽어라 버티기 때문이다. [81] 태평천국 운동은 북양군의 전신이 되는 의병들의 참전으로 가까스로 이긴 것이었지 청나라 관군들이 적극적으로 주도해서 이긴 게 아니었다. [82] 이 때문에 전후 참전 일본군들은 자기들이 승리한 기억만 가진 채 미국필부론을 외치는 극우 인사가 된 중일전쟁 참전자들과 태평양 전역에서 처참한 전투 끝에 살아돌아와 일본군의 실상, 미국과 전쟁의 공포를 알고 반전운동가가 된 태평양 전선 참전자들로 양분되었다. 중일전쟁 이후에 중국에서 일본 본토로 돌아온 일본인들 중 반전주의 성향인 이들은 일본군 패잔병보다는 민간인 출신 히키아게샤가 많다. 다만 모두가 그렇진 않고 예외도 있다. 대표적으로 중일전쟁에 참전했던 일본군 패잔병 중에도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않아서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유리한 상황을 경험하는 데 한계가 있었던 비전투병 출신들(대표적으로 날아라 호빵맨의 원작자 야나세 타카시)은 반전주의 성향인 경우가 많다. [83] 다만 맨발의 겐이란 만화를 보면 당시 일제에 붙잡힌 미군 포로들이 지붕에 P라는 페인트칠을 했는데 그게 미군 포로 수용소란 뜻이라 미군 폭격기들이 공격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당시 일본 민가에서도 지붕에 P라는 페인트칠을 하는 게 유행하기도 했다고. [84] 토마호크 미사일이나 F-117의 레이저 유도 포탄 등 정밀 타격 무기는 핸셀 소장의 주장을 현대 기술로 구현한 것에 가깝다. 민간인 오폭의 정치적/외교적 악영향이 2차대전 때보다 엄청나게 커진 데 따른 운용 교리의 변화이다. 물론 그럼에도 100% 정밀 타격은 아직 갈 길이 멀긴 하지만. [85] 영국은 본토 수도까지 폭격당해 쑥대밭이 되고, 프랑스는 나라 자체가 독일군에게 결국 먹혔다. [86] 단, 몰락 작전이 예상대로 시행되었다고 (대체역사) 가정 시 미군의 예상 피해 규모에 대해서는 상반된 주장이 나오고 있다. 크게는 몇십만 명 적게는 몇만 명 혹은 그 이하로 잡는 추정치도 있다. 자세한 건 몰락 작전 문서에서 미군 피해 규모 예상 쪽을 참조하자. [87] 참고로 이러한 전략을 실제 취했던 것이 베트남 전쟁이었다. 문서 참조. [88] 욱일대수장. [89] 솔직히 말하면 충칭 대공습도 일본의 중국대륙 무차별 폭격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아예 신멸작전이라고 중국인들에 대한 제노사이드 대량학살 전쟁범죄도 서슴지 않고 행했으니. 그 와중에 벌어진 난징 대학살, 100인 참수 경쟁은 덤. [90] Ar 234는 제트기라 속도가 매우 빨랐기에 대공포의 공격이나 영국 공군의 추격을 피할 수 있어서 독일 공군이 애용했다. [91] 사실 바르샤바 봉기 초반에 직접적으로 바르샤바를 폭격한 항공기는 고작 6기에 불과했고 그중 대부분은 Ju 87 등 중소형 급강하폭격기였으나 봉기군이 봉기 초반에 비행장 점령에 실패한데다가 대공 전력도 전무했기에 독일 공군은 고작 6기의 폭격기만으로도 도시에 상당한 피해를 주었다. [92] 위의 피해자 행세라며 올린 영상이 바로 그 드라마의 공습 부분만을 편집해 올린 것이다. [93] 처음 오소마츠 군이 연재되던 62년도를 기준으로 해서 보면 육쌍둥이의 부모인 마츠조, 마츠요, 그리고 데카판 다용(당시 설정으론 53세), 이야미(당시 설정으로는 마츠조 또래)는 태평양 전쟁을 겪은 세대이기도 하다. [94] 이때 경찰들이 선전물을 줍지 말라고 한다. [95] 상술했듯이 미군은 네이팜탄을 사용했다. [96] 저술 당시에는 널리 받아들여진 설이었지만 실제로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남일은 독소전 참전은커녕 소련군조차도 아니었다. [97] 2017년 8월 13일 방송 [98] 2021년 3월 29일 방송 [99] 전후 일본을 통치한 연합국 GHQ는 일본 측의 공습 피해 상황의 공식 기록이 존재 하지 않는 줄 알고 있다가 이시카와 코요우의 공습 촬영 사진의 실체를 알게 되고 끈질기게 원본 필름을 제출하라는 요구를 하였지만 이시카와는 거부 하였고 경시청 또한 공식 사진 기록이 아닌 개인이 촬영한 것이라며 책임 추궁을 피하였다. 하지만 끈질긴 GHQ의 요구로 이시카와는 원본 필름을 프린트한 사진을 대신 제출하고 만약 압수될 상황을 대비하여 원본 필름은 집 정원에 파묻어서 보존 했다 [100] 오히려 2023년 현재는 도쿄핫을 검색하면 도쿄 대공습을 가리킨다. [101] 바리에이션으로 유로비트 중 하나인 No one Sleep in Tokyo를 써먹는 경우도 있다. 제목부터가 "도쿄에서는 그 누구도 잠들지 못해"고, 결정타로 가사 중 하나가 "Tokyo Is on Fire(도쿄가 불타고 있어)"다. [102] 한일협정 당시 외무대신으로 박정희와 함께 회동 했었던 시이나 에쓰사부로가 서울을 찾아 육영수 묘소 참배와 함께 저격 미수 사건에 대해 사과하고 사건 재발 방지책, 한국에 대한 수사 협력, 조총련의 반한 활동 단속 등을 약속하는 다나카 가쿠에이의 서한을 전달했다. [103] "축하하네, 이번 일로 자네들이 무엇이든지 해낼 용기가 있다는 걸 알게 됐어." [104] 커티스 르메이의 이 말은 근현대 전쟁에서 총력전의 개념을 단적으로 묘사한 말로 손꼽힌다. 쉽게 말하면 이러한 총력전은 결국 국민 방관 협조에서 시작된다는 뜻이다. 다만 이 말은 일반화의 오류일 수 있는 게 당시 일본에도 후세 다쓰지 등 군국주의에 저항하다 치안유지법으로 끌려간 반전주의자들은 제법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그들에겐 죄가 없다. 사실 정보가 제한되던 시절 일반인이 군부 정권에 저항할 수단이란 게 기껏해야 불복종 정도인데 그것조차 목숨을 건 용기가 필요한 게 현실이었으니… 거기다 일본에서는 이런 불복종자를 비국민이라 매도하며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악습이 있었다. 르메이 이 양반은 6·25 당시 한반도 폭격도 주도한 바 있는데 이 논리를 그대로 적용시키면 당시 민간인 학살도 별 문제가 아닌 게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