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1 13:43:50

일본의 피해자 행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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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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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전쟁범죄와 그로 인한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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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급 전범
평화에 대한 죄
사형수
기무라 헤이타로 도이하라 겐지 도조 히데키 마쓰이 이와네 무토 아키라
이타가키 세이시로 히로타 고키
복역수
가야 오키노리 고이소 구니아키 기도 고이치 도고 시게노리 미나미 지로
사토 겐료 스즈키 데이이치 시라토리 도시오 시마다 시게타로 시게미쓰 마모루
아라키 사다오 오시마 히로시 오카 다카즈미 우메즈 요시지로 하시모토 긴고로
하타 슌로쿠 호시노 나오키 히라누마 기이치로
피의자 [1]
히로히토 천황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 고노에 후미마로 코다마 요시오 고이즈미 치카히코
구즈 요시히사 기시 노부스케 나가노 오사미 니시오 도시조 다니 마사유키
다다 하야오 다카하시 산키치 데라시마 겐 도쿠토미 소호 마사키 진자부로
마츠오카 요스케 사사카와 료이치 사토미 하지메 쇼리키 마츠타로 스마 야키치로
아모 에이지 아베 겐키 아베 노부유키 아오키 카즈오 아카기 고헤이
안도 기사부로 오카와 슈메이 오타니 게이지로 이사하라 히로이치로 이와무라 미치요
하시다 구니히코 혼다 구마타로 혼조 시게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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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C급 전범
일반 전쟁범죄, 인도에 반한 죄
피의자 약 5,700여 명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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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사건
학살 사건 난징 대학살( 100인 참수 경쟁) | 마닐라 대학살 | 밀리환초 학살 | 바탄 학살 | 보르네오 학살 | 중국 북부 학살 | 치치지마 식인 사건 | 파푸아뉴기니 학살 | 팔라완 학살 | 베허호 사건 | 아라시함 포로 학살
생체 실험 731 부대 | 규슈대학 생체해부
전시 강간 일본군 위안부
강제 노역 정신대 | 죽음의 철도 | 하시마
정치적 추종 세력 및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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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다 순 배열
[1] 불기소 피의자, 재판 전 사망자 포함. 공식적으로는 이들은 무죄이다.
[2] 개별 사건의 중복 피고인까지 합계되었으며, 이 밖에 추축국 피점령지 내 부역자, 기소유예자가 포함된 수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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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설명3. 사례
3.1. 제국주의 관련
3.1.1. 일본은 흑선내항에 의한 제국주의의 피해자이다3.1.2. 일본 조선을 근대화했다3.1.3. 일본은 을사조약을 통해 조선과 조선인들을 보호했다3.1.4. 일본은 테러를 당한 피해자다
3.1.4.1. 안중근 암살자
3.1.4.1.1. 안중근 전쟁포로론에 대한 논란3.1.4.1.2. 전쟁포로론 비판3.1.4.1.3. 전쟁포로론 옹호
3.1.4.2. 독립운동가들은 폭탄 테러리스트가 아니다3.1.4.3. 일본인은 전후 한국인에게 피해를 입었다
3.2. 제2차 세계 대전 관련
3.2.1. 전쟁범죄의 부정과 전쟁범죄자들의 신격화3.2.2. 일본은 연합군에 의한 피해자
3.2.2.1. 전쟁범죄 은폐3.2.2.2. 일본의 피해 과장 및 강조3.2.2.3. 원자폭탄의 일방적인 피해자
3.2.2.3.1. 히로시마 평화기념관 논란
3.2.2.4. 소련군의 불법 참전
3.2.3. 선택적인 국제법 인용3.2.4. 나치 독일에 책임 전가
3.2.4.1. 나치 독일도 피해자?
4. 원인
4.1. 구 일본 제국과의 연속성4.2. 전후 환경의 차이4.3. 학습의 장 부족4.4. 문서화되지 않은 전쟁범죄4.5. 서구 제국주의와의 비교4.6. 좌파 운동의 실패4.7. 패전의 횟수4.8. 중앙정부에 대한 약한 소속감4.9. 피해국의 한계
4.9.1. 약한 국력4.9.2. 일부 피해국들의 반서방성4.9.3. 약한 결속력4.9.4. 지리적 한계
4.10. 일본 민주주의의 특성
5. 비판
5.1. 일본의 미비한 역사 인식과 교육
6. 일본의 피해자 행세가 위험한 이유7. 일본의 피해자 행세를 바라보는 외국의 시각
7.1. 서방 측의 시각
7.1.1. 미국에 살고 있는 일본계의 시각7.1.2. 현재의 경향7.1.3. 개별 사례
7.1.3.1. 스티븐 스필버그의 사례7.1.3.2. 미국 하원의 위안부 문제 결의안 통과
7.2.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시각7.3. 대중매체
7.3.1. 일본이 피해자라는 입장의 작품들
7.3.1.1. 만화7.3.1.2. 애니메이션7.3.1.3. 영화7.3.1.4. 소설7.3.1.5. 게임
7.3.2. 일본이 피해자라는 입장이라고 오해받은 작품7.3.3. 일본을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로 묘사한 작품
7.3.3.1. 소설7.3.3.2. 만화7.3.3.3. 게임7.3.3.4. 애니메이션
8. 클리셰
8.1. 가해자 옹호와 피해자 비하
9. 피장파장의 오류10. 관련 문서

1. 개요

...한 군의관이 어린 딸에게 보낸 편지였다.
이 군의관은 딸에게 앞으로 살아가면서 살생을 하지 않도록 잠자리 같은 미물일지라도 잡으면 바로 놓아주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이 군의관은 연합군 포로들을 학대한 죄로 결국 사형 판결을 받아 처형되었다.
『패배를 껴안고』 p.682. 존 다우어 著, 최은석 옮김
때린 주먹은 잊어버리고 맞은 흉터는 기억한다.
아이티 속담
과거 일본 제국이 아시아 국가를 침공, 병합하거나 불평등한 조약을 강요하고 위임 통치했던 제국주의 시절의 역사,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추축국이자 전쟁범죄를 벌인 가해자였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본토 공습 핵무기 등 자국이 입은 피해만을 부각해 당대 일본이 일방적인 피해자였던 것처럼 묘사하는 역사 왜곡 행태 및 역사 수정주의적 조류에 대해 나무위키에서 가리키는 용어.

2. 설명

언론부터 시작해서 사설과 각종 매체에 이르기까지, 자국이 입은 피해를 중점으로 서술하는 것은 여느 전후 시대에나 흔히 있는 모습이나, 일본은 21세기, 더 자세하게는 2010년대 이후 일본의 우경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전후 연합국에 의해 강요되었던 잘못된 역사관을 폐지하고, 올바른 일본 역사관을 세우자!"라는 명목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요컨대, "일본은 사실 제2차 세계 대전의 추축국이자 침략국이 아니라, 서구 백인들의 규제와 위협에 아시아 인종을 대표해 떨쳐 일어나 영웅적으로 싸웠던 침략 피해자이다."라고 인과관계를 뒤집거나, "전쟁 자체가 원래 나쁜 일이고, 각자 스스로의 신념에 따라 충성하여 싸웠으므로 일본도, 미국도, 다른 나라도 따지고 보면 전부 피해자일 뿐이다."라는 식으로 양비론적인 본질 흐리기가 주로 해당한다.

게다가 과거 자국군이 자행한 731 부대, 난징대학살, 충칭 대공습, 마닐라 대학살, 일본군 위안부 등 대규모 전쟁 범죄를 부정하거나 축소하는 것도 모자라 일방적으로 죽임당했다고 피해자 타령을 하면서도 매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면서 미국을 포함한 우방국까지 거리를 두게 만든다.

심지어 한국의 위키 사이트까지 넘어와서 자기 과거사에 대해 집요하게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사례가 많다. 과거 인조이재팬에서도 365일 내내 상주하며 혐한 날조 자료를 한국인들에게 제시하면서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켜 많은 이들의 분노를 샀다.

게다가 일본은 독도 외에도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문제, 쿠릴 열도 분쟁으로 중국, 러시아와도 영토 분쟁을 지속 중이다. 한국만 고립되게 만들려면 타국과의 협조도 필요한데 이들과의 영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그마저도 어렵다.[1] 게다가 중국은 일본의 침략전쟁과 전쟁범죄의 최대 피해국이었다.

소설,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을 비롯한 일본의 각종 매체에서는 제국체제의 폭력 속에서 전쟁에 동원되거나 피해를 입었던 사람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이러한 기류는 반전 사상의 확산이라는 면에서 순기능으로 호평받기도 하지만, 이러한 묘사로 인해 일제의 전쟁범죄가 덜 조명받는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일본의 현대사에서 공습, 원폭 등의 피해'만' 부각하고 그 전에 해왔던 각종 전쟁범죄들은 한줄 요약이나 생략해 작가의 의도야 어찌 되었든 결국 이용자들로 하여금 역사관의 왜곡을 일으킨다는 시각이다. 이렇듯 노골적인 책임 회피까지는 아니더라도 피해 결과를 유발한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 외면과 방조의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가령 원폭에 의해 피해를 입은 어떤 일가의 모습을 그린다고 해서 "원폭을 맞았으니 일본은 불쌍하고, 전쟁을 일으킨 것에 대해서도 책임이 면제된다!"라는 주장이라고 무조건 간주할 수는 없다. 만화 맨발의 겐은 원폭 피해자를 중심에 두면서도 그 원인이 전쟁 도발이라는 자국의 책임에서 기인함을 분명하게 시인한다.[2]

게다가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 역시 피해자 입장이기에 논쟁의 결이 다르다. 전쟁에서 승리했다곤 하나 대략 10만 미군 장병들이 전사했고 참전으로 인한 경제력 소모 역시 상당했다. 일본의 중일전쟁과 동남아 침략이 도를 넘자 미국이 취한 제재는 정당한 대처였고, 이것 때문에 일어났던 진주만 공습 역시 마찬가지로 미국은 피해자일 뿐이다. 일본은 미국의 금수 조치를 구실로 선제 공격을 감행하였으니, 당연히 일본의 잘못이다.

물론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던 원자 폭탄이나 도쿄 대공습은 미국에도 잘못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으나, 시가전을 벌임으로서 생길 사상자들을 생각해보면 당시 그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었다고 함부로 단정지을 수도 없다. 그러나 진주만을 기습했던 일본에게 개전의 책임이 있음을 상기해본다면 미국에 의한 민간인 희생은 그 책임을 제기하기 어려워지는 게 사실이다. 사실 일련의 사건들은 전쟁 종식을 앞당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실행한 일들이다. 도쿄 대공습은 군수공장 및 가내 수공업의 파괴와 확산 방지가 목적이었다. 당시 일본은 군수물자의 상당 부분을 가내 수공업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들을 파괴하지 않으면 전쟁은 필연적으로 길게 늘어질 수밖에 없었고 이는 미국 피해 역시 늘어날 수도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작전을 입안했다. 원자 폭탄 투하 역시 전쟁의 빠른 종식을 위해 실행한 것으로 미국의 잘잘못을 섣불기 따지기 힘들다. 무엇보다도 만약 2차 대전이 장기화되었으면 가장 큰 피해를 입었을 나라는 일본이었다.[3]

그 외에도 일본의 동남아 침략에 대해서는 미국 역시 동남아 침략과 식민지 점령을 했으니 오십보백보라고 반론할 수 있다. 확실히 미국 및 서유럽 국가들이 동남아 지역을 식민 통치하고 수탈했던 제국주의 침략의 주체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서구 세력을 축출하고 동남아를 점령한 일본 역시 이들 지역들에 대해 심한 수탈과 철권통치를 자행했으므로, 일본군은 결코 해방자로 평가받지 못한다. 가령, 태평양 전쟁기 필리핀 탈환전 당시 일본군의 수탈과 폭정을 견디지 못한 현지 주민들이 미국 및 영연방 등 연합군들에게 각종 정보를 주거나 직접 게릴라에 참가[4]했다는 점에서 증명된다.

참고로 '일본의 피해자 행세'라는 용어는 리그베다 위키와 그를 계승한 나무위키 등 엔하계 위키에서만 사용되는 용어므로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일본인이 피해자인 척한다는 비판 자체는 흔하지만, '일본의 피해자 행세'라는 용어 자체는 학계에서 공식적으로 통용되는 표현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을 반복적으로 쓰는 것은 십중팔구 엔하계 위키에 발을 담근 적이 있는 사람들이다. 문서 이름이 이렇게 되어있으니 이것을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표현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 대개 문서명은 인명, 지명 등 고유명사이거나 사물을 설명하는 일반명사, 그리고 기존에 학계나 일상에 자리잡은 개념 명사들이다. 그러나 문서명은 일반적인 스타일과 위화감이 있게 느껴질 텐데, 이렇게 된 이유는 엔하위키 시절에 문서가 생성될 때는 '일본의 피해자 코스프레'라는 다분히 서브컬처 냄새가 나는 제목이었고, 리그베다 위키 당시에는 토론을 통해 "코스프레"라는 단어를 순화하면서 "행세"라는 표현으로 바꿨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문서명은 특정 개념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집단연구에서 출발한 개념에 대한 지칭에 가깝다. 다소 거리감이 있는 표현이지만 웬만하면 표현에 등장하는 의도는 추론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일본 우익의 레퍼토리로 알려져 있지만, '일본은 미국에 의한 피해자'라는 인식은 전공투를 비롯한 극좌 계열에서도 나타난다. 기본적으로 일본의 반미감정은 좌우를 막론하고 비슷한 흐름을 하고 있다.

3. 사례

일제는 연합군에 의한 피해자 행세를, 침략했던 아시아권 국가들에는 조력자 행세를 한다. 후자는 대동아 공영권 문서를 참조할 것. 제국주의 행보 관련해서는 서양 제국주의 열강들, 2차 대전 관련해서는 같은 추축국이었던 나치 독일을 강조하여 구 일제의 침략 행위를 희석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3.1. 제국주의 관련

3.1.1. 일본은 흑선내항에 의한 제국주의의 피해자이다

일본은 포함외교로 개항을 시작했고, 그로 인해 미국과 불평등 조약 가나가와 조약을 맺었다. 또한 국제사회에 진출하면서 서구의 인종차별에도 많이 시달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일본의 제국주의가 조선, 만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에 남긴 상처가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가해자가 된 피해자의 논리다.

3.1.2. 일본 조선을 근대화했다

http://www.wayto1945.sakura.ne.jp/KOR10.html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은 일본을 침략자로 여기고, 일본인을 한국인들에게 각종 위해와 고통을 준 적대 세력이라고 평가하였다. 매우 당연한 이야기인데, 자신의 조국을 무너뜨려서 식민지로 삼고, 그 식민지에서 한국인을 수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 일각에서는 식민지 시혜론이라는 주장을 꺼낸다. 대강 요약하면 '우리 일본은 가난하고 못 살던 조선을 발전시켜주면서 먹여살리는 것에 총력을 기울였는데 조선인들은 배은망덕하게도 이러한 은덕을 베풀어 준 일본에게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일본에게 독립운동 같은 저항으로, 일본과 일본인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것이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것이, 애초에 일본에게 도와달라고 요구하지도 않았고 도움을 원하지도 않은 이웃 국가를 무단으로 침략하고 점령했다는 사실을 없애놓은 수준의 해석이다. 한마디로 침략 행위가 어느새 수혜로 바뀐 것이다. 마치 흠씬 두들겨 때려놓고, 맷집 좋아졌으니 감사하라는 꼴이다. 조금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알 카에다 미국보고 9.11 테러 덕분에 테러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알 카에다가 피해를 입었다는 수준에 불과한 헛소리다.

물론 일본은 학교, 철도, 공장 등 근대적인 시설을 한반도에 지었지 학교는 한국의 어린이들을 일본인으로 만들려는 목적으로, 철도는 병력 운송 및 자원 수탈 목적으로, 공장은 중국과 전쟁을 치르기 위해 무기를 생산하려는 목적으로 지은 것이었으니 모두 일본의 이득을 위한 것이었다.

일부 극우들은, 당시 한국이 합병을 애원했다는 말도 안 되는 망상에 빠져있기도 하다. 물론 그랬던 멍청이들이 실제로 없었던 건 아니다. 이들은 정상적인 단체가 아닌 그냥 또라이로, 논할 가치도 없고 애초에 일본과 합병하면 자신들에게 이득이 생기니 찬성했던 것이다. 그 대가로 많은 민중이 끔찍하게 겪어야 했을 피해에는 관심도 없었다.

구한말 당시에도 철도, 전기 등을 한국에 공급해줘서 광명천지(光明天地)를 준 것도 일본의 은덕이라며, 힘없고 무능한 조선인들은 이러한 일본의 은덕에 감사해야 하는데도 오히려 이러한 은덕을 모른 채로 일본인을 침략자라면서 무시한다며, 조선인들은 일본의 이러한 감사에 보답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근대적 시설들은 모두 한국 정부로부터 받을 돈은 다 받고, 시설 근방에 있는 조선 백성들을 무보수로 강제노동해서 만든 것들이며, 그 목적도 각종 물자를 일본으로 싣고 나르는 등, 일본의 대륙 침략을 위한 것이었으니 조선 핑계를 대기도 힘든 몰상식의 극치다.

이런 주장을 따르는 작품은 대개, '선량하고 기술이 발전된 일본이 무지몽매한 이웃 국가인 한국에 대해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접근한다'는 스토리를 주로 내세우는데, 실제 상황을 생각하면 봐줄 가치도 없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모르는 제3자 입장에서는 일본이 마치 자원봉사자처럼 보일 수 있다. 실제로 유튜브 등지에서 일본 우익들의 프로파간다 영상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조잡한 것들이 많지만 상당히 절묘하여 당시 상황을 알 리 없는 한국의 젊은 세대도 깜빡 속아넘어갈 정도로 선동 영상이 꽤 보이며, 작정하고 한글 자막까지 넣은 영상도 많다. 이러한 영상들이 더욱 더 양성되면 많은 외국인들을 함께 속여넘길 가능성이 크고 이에 대한 체계적인 논리로 무장한 현명한 대처가 필요하다.

다만, 이는 국가를 주체적인 입장으로 삼았을 때 가능한 논리인데, 근대 국가는 기본적으로 기업을 성립하기 위한 조건에 맞춰서 움직이게 되어 있다. 으로 정치인이 만들어지고, 돈으로 정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19 ~ 20세기에는 참정권 자체가 일정 재산 수준 이상이 되지 않으면 투표권을 가지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돈을 가진 사람들을 위주로 해서 형성되어 있었다. 식민지라는 것도 그 과정의 연장선에 있었던 것이었다.

무엇보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대한제국이 외세의 간섭 없이 충분히 근대화를 진행할 수 있다는 뜻과 성과를 보여주기 위해 수도 중심 근대화를 추진했다. 대표적으로 전기 사업과, 일본보다 빠르게 도입한 전철 등을 예시로 들 수 있다. 다만 전철은 일본 대부분 지역보단 빠르지만 실제로는 교토가 더 먼저 개통되었다. 시범 운용 때도 교토에서 운전사를 데려왔다. 이런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은 일본의 야욕과 기울어지는 국세에 의해, 그 세를 길게 누리지 못했다.

아닌 말로 일본의 주장대로 자기들이 조선을 근대화해줬다고 가정한다고 해도, 그럼 그걸로 조선인들의 삶이 더 나아졌나면 물론 이것조차 아니다. 오히려 조선 말기보다도 더 안 좋아졌다. 일제강점기 소설에서도 조선말과 일제를 비교했을 때 일제강점기가 더 안 좋은 것으로 나온다. 자발적이든 강압적이든 그 '근대화'를 이루어내서 조선인들의 삶이 더 개선되었다면 혹시 모르겠는데, 오히려 더 안 좋아졌다. 이유는 길게 설명할 것도 없다. 애초에 조선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동기, 과정도 엉망인데 결과마저 엉망이었으니 도저히 옹호할 여지가 없다. 그나마 있는 근대화 부산물들도 일반 대다수는 누릴 수 없었다. 선거에 참여하려면 국세를 5원 이상 낼 수 있는 사람들만 참여할 수 있었다. 이 5원이라는 화폐의 가치를 비교하기 위해서 얘기하면, 당시 소학교(초등학교) 교사의 월급이 20원이었다.

몇몇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한국의 한강의 기적까지 연결하기도 한다. 당시의 철도, 전기 등 인프라와 더불어 민중들의 전근대적인 마인드까지 뜯어고쳐졌기 때문에 폭발적인 산업화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태국, 에티오피아처럼 20세기 전후로 식민지 지배를 겪지 않았음에도 한국보다 못사는 국가들을 예를 드는데, 문제는 식민 지배를 당해서 한국보다 못살 뿐만 아니라 태국, 에티오피아보다 더 못사는 前 식민지배 국가들이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에 더 넘쳐난다는 점이다. 백 보를 양보해서 철도, 전기 같은 인프라가 독립 이후 한국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고 가정해도 전혀 사실이 아니다. 물론 이러한 인프라를 이용할 여지는 남아 있었지만 독립 이후 얼마 안 되어 6.25 전쟁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 격렬한 전투 및 인천 상륙 작전 이후 북한군의 고의적인 대대적 파괴로 인해 이 인프라들은 전쟁 이전과 대비하여 약 2%를 남기고 몽땅 파괴되었다. 한 마디로, 남한테 뺏긴 물건을 되찾아와 이제 막 써보려고 하는데 다 부숴진 것이다. 따라서, 일본이 미리 건설한 인프라가 20세기 후반 한국의 경제적 성장에 도움이 되었다는 건 완벽한 억지 주장이다.

다른 나라들의 사례와도 별개로, 당장 독립 직후 한반도의 산업 인프라는 북한 지방에 훨씬 더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는 것이 사실이고, 6.25 전쟁으로 전국이 황폐화된 상황에서 눈부신 성장을 이룩한 것은 식민지 근대화론에서 얘기하는 것과 괴리가 크다. 원래 일본은 2차 대전이 끝나고 농업 국가로 바뀔 예정이었지만 6.25 때문에 기적적으로 부활했다. 따지고 보면, 한국에게 이런 말을 할 자격조차 없다.

이러한 논란에 대한 걸 딱 한 줄로 정리하면, "도살장 설비를 최신으로 해준다고 동물이 감사할 이유는 없다."라고 정리할 수 있다.

한편 이런 시혜론과는 별개로, '일제강점기에는 과연 근대화 자체가 이뤄지긴 했는가?'라는 주장 자체는 생각보다 복잡한 논란이다. 이 부분은 식민지 근대화론 문서에 있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중국공산당 치하 티베트, 위구르에도 적용할 수 있다. 티베트와 위구르의 GDP는 중국의 지배 이전보다 훨씬 발전했으며 # 중국 공산당 치하에서 칭짱 철도 등의 인프라가 건설되었고 교육 상황 또한 통계적으로 향상되었다. # 그러나 일본은 티베트와 위구르의 독립운동을 지지한다. 한국 독립운동을 반일로 매도하는 일본의 주장대로라면 일본도 "반중 운동"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자신들의 조선 통치는 찬양하면서 중국 공산당의 통치는 비판하는 매우 이중적인 태도이다.

혹자는 이러한 식민사관의 주장을 조롱하기 위해 도쿄 대공습이 도쿄의 도시 계획을 앞당겼다며 도쿄 재건축론이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3.1.3. 일본은 을사조약을 통해 조선과 조선인들을 보호했다

식민지 근대화론 같은 주장이 일본인 일각에서 전개된 주장인 것과는 달리 을사조약 경술국치 일본 정부에서 직접 공식적으로 공표한 주장이라는 것에서 큰 차이가 있다. 따라서 이 주장을 그대로 따라하는 작품은 일본의 피해자 행세를 하는 작품을 넘어서서, 당당히 극우 미디어물에 속한다. 그 당시 일본 정부의 주장을 열거하면 이하와 같다.
  • 1905년에 체결한 일본이 조선을 서구 열강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보호하려는 의도 하에 평화적으로 체결한 것인데, 이를 모르는 어리석은 조선인들은 을사조약을 가지고 잘못된 조약이라느니, 강제로 체결한 조약이라고 왜곡하며 일본인들을 공격하였다는데, 이것 때문에 일본인들이 억울한 피해를 입었다.
  • 1910년에 체결한 한일병합조약(경술국치)은 일본의 국역(國域) 확장 및 조선과 일본은 평화적으로 하나의 국가라는 걸 알려주는 정당하고 축하할 일인데, 이 역시 조선인들은 그게 다 일본인의 잘못이라며 억지로 일본과 일본인에게 화살을 돌리고, 그들 때문에 일본인들이 억울하게 죽거나 피해를 봤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조용한 이웃 국가를 강제로 식민지로 만들면 당연히 해당 국가가 격렬히 저항하며 투쟁할 수 있다는 상식부터 무시하고 있으며[5] 을사조약부터 경술국치까지 연이은 조약 체결의 과정에서 당사자에 대한 협박, 문서위조, 인장위조 등의 행위가 발생하여 국제법상 조약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어이없는 주장이다.

을사조약은 고종 황제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렸던 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까지 파견하며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려고 했던 건 뭐가 되는지 문제도 있는데, 이것만 놓고보아도 을사조약이 정상적으로 진행된 조약이 아닌, 강압적이며 일방적으로 맺어진 늑약이란 사실이 증명된다. 무엇보다도 당시 열린 2차 만국평화희의에 대한제국은 참석할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따라서 특사들이 참석하지 못한 건 일본의 강압에 의한 결과물이었다.

한일병합조약은 절대 평화적으로 체결되지 않았다.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을미사변, 러일전쟁, 남한 대토벌 작전 등 각종 무력은 마음껏 써댔으며, 오히려 야만적이고 잔혹한 일도 많았다. 자국민도 아닌 타국민을 마구 죽였고 타국 영토를 전쟁터로 삼았고 타국의 궁궐을 군대로 밀고들어갔으며 칼잡이들을 데리고 왕비까지 시해한 걸 평화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걸 정당하고 축하할 일이라고 말한다.

물론 일본 입장에서야 국역이 확장된 거니까 축하할 일이라고 여긴다면 몰라도 이걸 정당하다고 말하며, 그걸 또 한국과 일본 모두 축하할 일이라고 떠벌린다. 반면에 같은 식민제국을 건설한 영국, 프랑스 등도 식민지를 얻은 걸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변명할지언정 차마 정당하다거나 축하할 일이라는 식으로 말하고 다니지는 않는다.

그리고 폭력적 사건들의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항일운동, 독립운동을 했던 조선인에게 책임을 떠넘긴다. 결국 이건 온갖 폭력과 불법, 부당한 행위로 하나의 나라를 집어삼키고는 그걸 평화라고 내세우고 있으며 그 책임을 피해자에게 전가하고 있는 일이다.

그러면서도 조선인의 피해에 대해서는 일절의 언급이 없다. 당장 을사조약 이후 경술국치까지의 시기는 가히 의병 전쟁이라고 할 만큼 조선에서의 저항이 대단했다. 그러나 일본은 남한 대토벌 작전이라는 학살 계획을 세워 조선의 의병들을 짓밟아버렸다. 이 과정에서 일반인에 대한 학살은 당연히 일어났다. 국내 의병 활동은 경술국치 이후에도 얼마간 지속되었다.

하지만 1915년 7월에 사실상 마지막 의병장이었던 채응언 장군이 포로로 잡히면서 이러한 무장 투쟁 활동은 국내가 아닌 해외로 옮겨진다. 이런 것들을 싹 지우면서도 일본인의 피해는 끈질기게 언급하며 일본과 일본인이 상처입은 된 것은 모두 무능하고 어리석은 조선인들 때문이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였다.

게다가 관동대지진 때는 일본 정부가 의도적으로 조선인이 지진을 틈타 일본인을 해치려고 한다는 유언비어를 유포하거나 유언비어가 퍼지는 것을 알면서도 방조했다. 이런 유언비어는 일본인인 아키야마 요시후루조차 헛소리로 취급했으며 일부 극우 인사들조차 믿지 않았을 정도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수많은 무고한 조선인들이 최소 6,000여 명이나 살해당했다. 이승만 정부 당시 국가기록원의 작성에 따르면 290명으로 나와있기는 하다.[6] 당시 야쿠자를 비롯한 범죄 집단들이 오히려 더 조선인 보호하는데 앞장섰다.

이때 죽은 사람들이 과연 조선인만 있느냐면 그것도 아닌 게, 소위 '자경단'이라고 불리던 이들은 일본인이 아닌 거 같으면 일단 다 죽이고 봤다. 다른 말로 하면 일본인이라 해도 일본인으로 보이지 않으면 죽였기 때문에 죽은 사람들 중에는 중국인, 류큐인, 아이누인은 물론 심지어 도호쿠와 같은 변방 출신의 본토 일본인도 있었다. 돈 벌려고 타 지방에서 온 일본인들이 그 지역의 사투리에 익숙지 않아서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조선인들을 보호했다면서?

물론 뒤늦게라도 경고문이라도 뿌리는 등 대책에 나서긴 했다. 그런데 이것도 주변국의 압력이 심해지고 참상이 조선에도 전해지면서 조선인들의 분위기가 매우 나빠지자 마지못해 했던 것이다.

간혹 이런 식의 주장으로, 독일이 병합 및 보호(?)한 오스트리아와 동치하기도 하지만 오스트리아와는 다르다. 오스트리아는 본래 독일 민족이 살던 국가로, 중국의 주나라처럼 독일 지역의 황제국 노릇을 하던 나라이며 독일 제국의 황제조차 북독일의 황제보다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고 싶다고 비스마르크[7]에게 말할 정도에 오스트리아인 히틀러가 독일을 장악해 전쟁을 일으킬 만큼 조선과는 크게 달랐다. 그래서 2차 대전이 끝나고 영구 분리가 결정되었지만, 유럽 통합 정서가 흔들리는 지금 다시 대독일 건설을 해보자는 주장이 일어날 정도로 양자의 차이는 크지 않다( 이 부분 참조).

3.1.4. 일본은 테러를 당한 피해자다

3.1.4.1. 안중근 암살자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일어났던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이토 의장은 당연히 피해자이며 어리석고 무례한 한국인 괴한에 의해서 억울하게 암살당했다."라고 주장한다. 당시 매국노이자 초악질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완용, 송병준 등도 "안중근이라는 놈은 대일본제국에 반역한 역적이자 대일본 이토 히로부미를 요절하게 만든 괴한"이라며 그자가 이토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물론 당시 일본은 안중근이 일본의 정치가를 저격한 살해범이자 괴한으로 보였던 것이 당연했다. 오늘날 한국에서 이를 의거라고 하는 반면에 일본에서는 당연히 암살, 저격, 테러라고 규정하였다. 한국에서는 안중근을 구국의 영웅, 애국자로 칭송하는 반면에 일본에서는 우익 시각으로 일국의 정치가이자 원수를 저격하고 살해한 괴한, 정치 테러리스트로 여긴다. 다만 일본에서도 옛날과 비교하면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평가가 낮아지고 안중근에 대한 평가가 올라가기는 했다. 물론 역전됐다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총리를 지냈던 스가 요시히데는 총리 재임 시절에 안중근은 암살자이자 살인범이라고 언급했으며 지금의 일본 극우들 사이에서도 안중근을 여전히 암살범이자 살인범이라는 인식이 짙은 편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 합병을 반대했던 인물인데 그런 자를 조선인이 죽였으니 일본 입장에서는 테러리스트라고 본다. 일본은 아무리 늦게 보더라도 1905년부터는 사실상 전쟁 상태[8]에 들어선 셈인데, 요인에 대한 암살이 행해지는 것은 당연한 전시 작전 수행이라는 사실을 무시했다. 이에 더해서 이토 히로부미는 단순한 일본의 정치인이 아니라 한국을 침략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수행하는 인물이라서 당연한 제거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사라예보 사건과 결정적인 차이가 여기에 있다. 사라예보 사건의 범인인 프린치프의 애국 대상은 병합된 보스니아가 아닌, 주권국가이자 제정 러시아와 손을 잡고 오스트리아 제국에 대립하는 세르비아였다. 안중근 의사는 민족주의와는 별개로 자신의 조국이 침략당한 것이라서 당연한 대응을 한 것이고 프린치프는 본인의 조국이 침략당한 것도 아니고 국익(ex: 보스니아 병합을 못한 것)을 챙기는데 방해된다고 죽인 것이다. 참고로 보스니아는 한국과 달리 세르비아계 이외에 여러 민족들도 섞여있었으므로 세르비아의 합병도 원하지 않았다. 유고슬라비아 연방 붕괴 후 즉시 독립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게다가 일본이 항일 의병장과 독립군 지휘관들에게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고 끊임없이 사냥한 것만 봐도 일본도 열심히 한국의 주요 인물에 대한 암살 및 테러를 수행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으며, 이미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를 살해하여 먼저 일을 벌인 것도 일본이다. 시작도 일본이 했고 피해도 일본이 더 많이 주었는데, 반격하면 안 된다는 건 유치한 말장난이다.

다만 을미사변을 주도한 사람이 흥선대원군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 부분은 을미사변의 주동자로 의심되는 유길준 한 명이 주장하는 바에 근거한 것으로, 그 진위여부는 말이 많다. 을미사변 당시 흥선대원군은 주도가 아니라 얼굴마담 비슷하게 이용당했을 뿐이라는 설도 있어서 검증되지 않은 주장이라는 이야기.

안중근이 이토를 살해한 까닭이라는 이토의 죄목을 보더라도 조선의 입장에서는 명백한 범죄자다. 다음은 안중근 본인이 주장한 이토 히로부미의 죄목이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가 이런 죄를 지어서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1. 한국의 명성황후(明星皇后)를 죽인 죄
  2. 고종 황제(高宗皇帝)를 제위에서 내친 죄
  3. 을사조약(5조약)과 한일신협약(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
  4. 독립을 요구하는 죄 없는 한국인들을 마구 죽인 죄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아 통감 정치 체제로 바꾼 죄
  6. 철도, 광산, 농림, 산지를 강제로 빼앗은 죄
  7. 일본 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하여 경제를 혼란에 빠뜨린 죄
  8. 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킨 죄
  9. 민족 교육을 방해한 죄
  10.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키고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죄
  11. 한국사를 없애고 교과서를 모두 빼앗아 불태워 버린 죄
  12.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13. 현재 한국과 일본에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한국이 아무 탈 없이 편안한 것처럼 위로 일본 천황을 속인 죄
  14. 대륙(중국)을 침략하여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15. 일본 천황 아버지를 죽인 죄

지폐 이전에 사용된 동전에 대해서는 당시 한국 황실이 마구잡이로 찍어내면서 폐해가 컸다는 점과 휴대하기가 좋은 지폐가 보급되자 민중의 반응이 긍정적이었다는 점, 안중근이 집필한 『동양평화론』에서 한중일 삼국의 화폐 통합을 주장한 점을 근거로, 일본 은행권 강제 사용을 문제로 삼은 안중근이 이상하다고 주장하는 친일반민족행위자와 일본 학자들이 소수 존재한다.

일단 화폐정리사업의 경우, 황실이 마구잡이로 돈을 찍어낸 바람에 진행할 필요성은 있었다. 필요성은 단지 구실에 불과했을 뿐이었다는 게 문제다. 그리고 삼국의 화폐통합은 (이를테면 유로화처럼) 한중일 삼국의 대등한 관계를 전제로 한 것이며, 화폐정리사업을 진행할 당시 일본은 동양평화론의 내용과는 거리가 멀어진 상태였다.

분명히 의무교육의 도입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크게 개입하였지만 이 교육이 '민족 교육'이냐고 묻는다면 긍정적인 답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안중근은 이것을 이유로 제시한 것이다.

안중근이 근거로 제시한 '천황을 속인 죄'는, 물론 메이지 덴노의 실권은 실권이라는 게 거의 없었다고 하지만, 메이지 덴노가 정말 아무것도 몰랐을 리 없다. 게다가 일본군/인물에서도 알다시피 일본군의 전략을 결정하는 자리는 천황이 임석한 어전회의였다. 게다가 이를 빌미로 "우리 천황께서는 나쁜 군부 놈들 거짓말에 속으셨던 겁니다."라는 일본 측의 변명을 정당화할 수도 있다.

일본 천황의 아버지를 죽인 죄는, 메이지 덴노의 아버지( 고메이 덴노)는 1867년에 급사하였는데, 공식상으로는 천연두로 인한 병사였지만 막부 측의 독살 혹은 토막에서 변화를 거부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존왕파가 독살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즉, 위에서는 존왕파의 이와쿠라 토모미가 고메이 덴노를 독살했다는 설을 취한 것이다. 이 부분은 지금도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다. 메이지 덴노 대역설 참조.

추가로 안중근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이토를 살해한 까닭을 밝혔다.
내가 이토를 살해한 것은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이 이상 멀어지게 하는 것을 막고자 하여 대한제국 의병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이토를 처단한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 그의 개인적 원한이 아니라 그가 살아있음으로 인해서 대한제국과 일본이 끝없이 반목하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 살해한 것이다.

그러니까 안타깝게도 안중근은 죽을 때까지 일본 정부의 의도는 선하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토 히로부미가 천황을 속인 것이라고 판단했다.

정리하면 안중근은 살인자는 맞지만 그저 무고한 일본인을 죽인 것이 아니라, 독립 투쟁의 일환으로 한국 침략의 선봉장으로 나선 인물을 처단한 것이다. 안중근 의사도 이런 이유로 잡히면 사형당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도망치거나 자결하지 않고 순순히 체포된 것이다. 목표가 이토의 처단을 통한 독립 의지 표현이었기에 도망칠 수 없었고, 그가 믿었던 종교인 가톨릭은 자살을 어떤 이유로도 허락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자살할 수도 없었다.

만약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이 단순한 살인이었으면 오늘날 안중근이 독립투사로 대우받겠는가? 그리고 일본인들 중에서 안중근을 존경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겠는가? 이판능이 그냥 묻지마 살인범이지, 독립운동가 대우를 못 받는 이유를 생각해보자. 다만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당시에 동정은 받았다고 한다.

따라서 위에 언급한 암살자 논리를 펴는 일본의 작품도 상황을 잘 모르는 제3자가 보기에는 '무고한 정치가가 흉악한 테러리스트에게 당했다'라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충분히 일본의 피해자 행세에 포함된다.
3.1.4.1.1. 안중근 전쟁포로론에 대한 논란
3.1.4.1.2. 전쟁포로론 비판
다만 위 주장이 국제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주장인지는 의문이 있다. 아무리 침략 행위와 연관이 있다하더라도, 단순한 방문이 문언적으로 '교전'에 해당할 수 있는지는 불확실하다. 설령 이토 히로부미의 방문이 교전에 해당하더라도, 교전 단체에 소속된 자가 교전에 참가한다고 그 자체로 교전자의 자격이 인정되지는 않는다. 당시 적용되었을 헤이그 육전 규칙(1907년) 교전 자격 요건에 의하면, 민병이나 의용병단이더라도 부하에 의해 책임지는 자에 의하여 지휘되고, "고착된 표지", 즉 제복(혹은 이에 해당하지 않더라도 전투원임을 식별할 수 있는 복장)을 갖추고, 공연하게 무기를 휴대하며, 전쟁법을 준수하여야 교전 자격이 인정된다. 군민병이라면 공연한 무기 휴대와 전쟁법 준수만으로도 교전자로서 자격이 인정되나, 안중근 의사를 군민병으로 볼 수 있을지도 의문시되며 안중근 의사가 군민병이더라도 적어도 공연한 무기 휴대 요건이 결격 사유가 된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모두가 볼 수 있을 정도로 권총을 들고 다녔다면 거사는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 아닌가. 그리고 어떻게 보면 그는 전쟁 범죄자가 될 수 있다. 그는 암살 당시 덤덤탄을 썼는데 이것은 헤이그 협약 위반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 외에도 안중근 의사에 대한 재판 과정이 불법적이었다고 볼 수 있는 요소는 많지만, 적어도 안중근 의사가 당시 국제법을 기준으로 교전자로서 포로 대우를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1, 2차 대전 시기이든 현재든 마찬가지지만 적성국의 민간 위장 스파이는 대부분 사형이다.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아도 사형인데, 암살이라면 서구에서 재판을 받았더라도 사형을 면키 어려웠을 것이다.
3.1.4.1.3. 전쟁포로론 옹호
이토 히로부미는 민간인이 아니다. 그는 사망하기 1달 전에, 이토 히로부미는 남한 대토벌 작전이라고, 민간인을 학살하는 전쟁범죄를 지시했다.

불법 전쟁을 일으킨 이상, 적군 수장일 뿐이며, 안중근을 비판하는 건 히틀러 암살을 시도한 사람들을 비판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다. 히틀러 암살을 시도한 사람들은 현재 서양에서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따라서 상호주의 원칙이 적용된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선전포고 하나 없이 진주만 공습을 때려도, 12월 8일에 미국이 일본에게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한 건 그게 필요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해서 일본의 만행을 간접적으로 비판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직후 일본이 소련도 공격해서 양면전쟁으로 유도하려는 독일이, 미국에 선전포고만 하지 않았다면 미국도 독일과 전쟁할 명분도 부족했다.

다른 예를 들어, 상호주의 원칙에 따라, 대량살상무기를 써버린 국가를 상대로 대량살상무기로 반격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3.1.4.2. 독립운동가들은 폭탄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1932년에 일어난 이봉창의 도쿄 의거와 윤봉길의 훙커우 의거에 대해서도 잡음이 많았는데, 일본 입장에서 그 둘은 일본 제국 폭파를 강행했던 사악한 테러리스트들이며 이봉창 때문에 하마터면 천황 폐하께서 서거하실 뻔 하셨다. 또한 윤봉길 때문에 무고한 대일본 고위인사들과 일본 신민들이 폭탄 테러로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한다.

참고로 국내에서도 어떤 역사 교과서에서 이 주장을 고스란히 실으려고 했다가 논란이 된 적이 있다. 2차 세계 대전 추축국으로서의 일본 제국의 입장을 아무 비판 없이 서술하는 것은 현대 민주시민사회로서의 일본국이 일본 제국을 계승한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특히 안중근 의거처럼 이봉창, 윤봉길 이 두 의사는 천황과 침략을 주도하였던 일본 정치인과 군 인사들을 향해 응징하였던 것뿐이었으며 이들 이외에 민간인들에게는 아무런 폭해(爆害)를 가하지도 않았고 살상(殺傷) 역시 저지른 일이 없다. 물론 당시 상황이 상황이었으니, 민간인 피해자도 한두 명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정말 민간인을 노렸다면 폭탄을 던졌던 방향이 정반대라서 말이 안 된다. 특히 이봉창 의사는 주변의 다른 일본인들이 용의자로 몰려서 두들겨맞자, 사형당할 것이 분명했음에도 내가 했다고 당당히 밝히기까지 했다.[9]

또한 일본은 1930년대에 들면서 본격적인 대륙 침략을 개시하였고 이봉창의 의거를 핑계로 중국에게까지 선전포고를 하면서 상해사변을 일으켰고 중일전쟁을 벌였으며 난징 대학살까지 각종 만행을 저질렀다.

한인애국단, 의열단, 그 외 여러 열사들의 의거를 보면 조선 총독부, 사이토 마코토, 동양척식주식회사, 식산은행 등 조선을 식민지화하는데 지대한 공로를 세웠거나 조선을 통치하고 있는 이들을 노린 것이었다. 엉뚱한 민간인을 대상으로 노린 게 아니다.

세계 어느 국가를 보아도, 자국의 역사에서 자국의 영웅을 죽인 적국의 병사, 혹은 의거인들을 이렇게 의도적으로 비하하는 사례는 거의 없다. 그냥 우리 나라의 좋은 영웅이 죽어서 아쉽다는 정도일 뿐이지, 미국에서는 에이브러햄 링컨을 암살하였던 존 윌크스 부스도 시대를 벗어나지 못한 어리석은 저격범 정도로만 여기고, 인격 모독을 하지 않는다.
3.1.4.3. 일본인은 전후 한국인에게 피해를 입었다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패전 후 겪은 고난 사례들이 강조되는 것이 식민 통치의 원죄를 희석시키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된다. 비판의 요는, 전쟁 이후 찾아온 혼란기에 한국인 일본인에게 감정적으로 보복한 소수의 사례만 강조하여 한국인을 악당으로 몰아세우고 있다는 것. 요코 이야기 김완섭이 어느 소설로 날조한 카즈오 이야기 같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8월에 일찌감치 진주한 소련군에 의해 폭력이 이루어졌던 북한 지역과는 달리,[10] 남한 지역에서는 전반적으로 일본군경이 미군 진주 이전까지 통제력을 확보하고 있었고, 미군정 수립 이후에도 잔류 일본인들의 철수는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미군정이 들어오기 전부터 조선총독부와 여운형 간에 협의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 여운형은 당시 정무총감이었던 엔도 류사쿠(遠藤柳作)와 협상을 통해서 정치범의 석방, 서울에 3개월 분의 식량 확보, 건준 활동에 필요한 여러 집회 활동이나 조직에 대한 불간섭 보장을 조건으로 일본인들의 안전한 귀국을 보장하기로 했다.

물론 부동산과 사업체는 모두 몰수되었다. 당시 일본인들은 한반도에서 획득한 재산을 최대한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했으나, 미군정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고, 부동산과 사업체를 현금 재산으로 전환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것들을 잘 사용했다면 좋겠지만, 일본인들이 남긴 재산은 한국전쟁 때 잿더미로 바뀌어버렸다.

전후 일본인들이 한국인에게 피해를 입었던 사례를 성찰한다 하더라도, 해당 보복들은 근본적으로 35년의 식민통치로부터 기인한 것은 짚고 넘어갈 점이다. 마치 소련군이 독일을 점령한 뒤 독일에서 각종 전쟁범죄를 저지른 사실이, 나치 독일의 전쟁범죄를 정당화해주지 못하는 것과 같다.[11] 물론 냉전이 시작되면서 독일에서의 소련군 전쟁범죄 역시 서방을 중심으로 비난받게 되었지만, 소련군이 독일군에게 가졌던 적개심과 보복심리는 어느 정도 참작되는 편이다. 이러한 예는 조선에도 대입해볼 수 있는 문제다. 만화 『 맨발의 겐』에서는 일본인이 조선인에게 곤란을 겪는 걸 보면서 등장인물이 분개하자, 주인공이 "저 사람들은 우리에게 35년간 지배받으며 괴롭힘 당한 거 생각하면 저러는 것도 당연하다. 이건 우리의 인과응보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신고산 타령은 함경도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민요로 또한 역사적으로 원문의 가사를 개작한 다양한 버전이 전해내려 왔다. 다음은 그 중 한 버전으로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조동일 교수가 본인의 『한국문학통사』 5권에 수록한 사료이다. #
신고산이 우르르 화물차 가는 소리에
지원병 보낸 어머니 가슴만 쥐어뜯고요
어랑어랑 어허야
양곡배급 적어서 콩깻묵만 먹고 사누나

신고산이 우르르 화물차 가는 소리에
정신대 보낸 어머니 딸이 가엾어 울고요
어라어랑 어허야
풀만 씹는 어미소 배가 고파서 우누나

신고산이 우르르 화물차 가는 소리에
금붙이 쇠붙이 밥그릇마저 모조리 긁어 갔고요
어랑어랑 어허야
이름 석자 잃고서 족보만 들고 우누나

1절의 화물차와 지원병은 일제 시대 당시 학도 지원병을 태우고 만주로 떠나는 지원병을 의미함으로서 자식을 지원병으로 떠나보낸 어머니들의 슬픔을 말하고 있으며, 2절 역시 딸을 정신대로 보낸 어머니들의 슬픔을 담고, 당시에 쇠죽조차 쑤어줄 수 없는 열악한 환경을 의미하고 있다. 3절은 공출이라는 미명하에 자행된 약탈과 창씨개명이다.

참고로 식민지 피지배국에서 식민지 지배국 민간인이 이렇게 된 일은 꽤 많다. 독일이나 이탈리아나 프랑스나 튀르키예도 겪었는데 집단학살로 민간인들이 대거 학살되었다. 알제리에서 프랑스인들이 당한 오랑 학살이라든지 유고슬라비아에서 이탈리아인들이 당한 포이베 학살사건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럼에도 해당 나라들이나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뭐라고 하지 못하는데 그래봐야 더 많이 학살한 자신들이 역습당하기 때문이다. 물론, 해당 나라들 극우들은 이걸 빌미로 자신들도 똑같이 피해자라고 외치긴 한다.

3.2. 제2차 세계 대전 관련

그나마 공범이 많은 제국주의 정책과 달리 2차 대전 당시 일제에 비견될 악행을 저지른 나라는 추축 동맹인 나치 독일을 제외하면 전무하다. 따라서 상술한 일본의 제국주의 관련 태도에 대해서는 수수방관하는 서양 국가들도 후술하는 일본의 2차 대전 관련 태도에 대해서는 크게 비판한다.

3.2.1. 전쟁범죄의 부정과 전쟁범죄자들의 신격화

야스쿠니 신사 혹은 순국7사묘만 봐도 답이 나오는데, 이 시설들은 전부 전쟁범죄자들을 신으로 받들면서 섬기기 위해 만들어졌다. 특히 야스쿠니 신사는 살아있는 사람에 심지어 일본의 전쟁범죄의 피해자들조차 강제로 합사하고 그 당사자들이 빼달라고 해도 요지부동이다. 제대로 된 민주 국가라면 이런 상황에서 본인이 거부했을 때 받아들여져야 정상이다. 신격화가 되든, 우상이 되든 당사자에게 그 권리가 있지 떠받들려는 자들에게 그런 권리는 없다.

정작 야스쿠니 신사를 대체할 수 있는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이라는 국립[12] 전몰자 추모지가 이미 있음에도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 야스쿠니 신사가 유일한 전몰자들을 위한 묘원이라고 주장하는 한국어 좀 하는 일본 극우가 보인다면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의 주소를 알려주면 된다.

애초에 야스쿠니 신사와 치도리가후치 묘원은 시설의 성격과 봉납의도, 추모객의 성향 자체가 다른 별개의 시설이다. 한국에서 보수 성향 정치인이 봉하마을에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역을 참배하러 가지 않거나, 진보 성향 정치인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역에 참배하러 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이다. 야스쿠니 신사는 국가신토라는 보수 성향의 종교시설이다.

그리고 치도리가후치 묘원은 정치적 성향이 배제된 순수 참배장소이다.[13] 실제로 일본의 야당 인사들은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러 가지 않지만, 여당인 자민당 인사들은 가급적 야스쿠니 신사를 우선적으로 참배하며 치도리가후치 묘원은 야스쿠니 신사의 방문 횟수에 비하면 참배 횟수가 손을 꼽을 정도로 적다.

게다가 순국7사묘는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아서 그렇지 위험도는 야스쿠니 신사보다 더하다. 그리고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식의, 전범들을 섬기는 신사나 사묘들이 일본 내 각지에 퍼져 있어서 이런 곳에서 참배를 하면서도 참배 받는 대상이 누군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일본 각지에는 '호국신사'라는 곳이 있는데, 특히 에히메 현의 호국신사에서 받들어 섬기는 대상 중 하나는 치치지마 식인 사건의 주동자 다치바나 요시오다.

게다가 전쟁범죄자들을 신격화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하는 행동이 전쟁 범죄의 부정이다. 일본 내 극우 인사들이 심심하면 동아시아 국가들을 격노하게 만드는, 전쟁범죄를 부정 내지는 비호, 미화하는 망언들 역시 피해자 행세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가 담긴 도시전설로, 포로 감시를 맡은 일본군 장병이 연합군 포로에게 식량으로 우엉 등을 줬는데 전범 재판 때 포로들이 검은 종이와 나무 뿌리를 강제로 먹였다고 증언해서 억울하게 전범으로 처벌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이런 일로 전범 처벌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김은 당시 일본군 내에서도 상당히 귀한 식재료여서 포로에게 줄 여유도 없었다. 상당히 유명한 도시전설로, 심지어는 아래에 언급할 맨발의 겐에서도 이 내용을 사실로 착각하고 묘사했을 정도이다. 물론 작품의 특성상 전쟁범죄를 전체적으로 부정한 것은 절대 아니고, '단순한 개개인의 선행이 문화의 차이로 인해 폄하를 당했을 수 있다' 정도의 주장이다.

3.2.2. 일본은 연합군에 의한 피해자

3.2.2.1. 전쟁범죄 은폐
전쟁을 다루는 작품의 경향성이 일본이 대륙을 침략하던 시기의 내용은 결여되어 있는 반면, 일본이 참패를 거듭하여 패망 직전에 몰린 절망적 상황만이 중점적으로 묘사된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해당 비판은 일본이 먼저 미국, 필리핀, 파푸아뉴기니 등에 공격을 퍼붓고 점령지에서 잔학 행위를 한 역사적 사실을 흐지부지 얼버무리거나 감추고 일본이 공격당하고 있는 상황만을 집중적으로 부각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조선을 병합하고, 중국을 침략하고, 동남아시아 지역들을 수탈하던 시절에 대한 일은 거의 다 생략된다. 전쟁물로서 제대로 된 전투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점도 있고 연합군에 시원하게 얻어터지는 일본의 모습은 서양 측 관객들에게 어느 정도 어필하는 것도 있으니 이에 대한 표현은 어떻게 하는지는 넘어가더라도 일본이 동남아시아를 합병하는 과정을 세세히 묘사한 일본 작품은 미디어의 종류를 통틀어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물론, 서방의 입장에서도 일본의 동남아 점령 이전까지는 자신들이 동남아에서 제국주의 수탈의 주체였고 심지어 몇몇은 세계 대전 이후에도 재침했기 때문에, 이 문제에서 결코 떳떳하지 못하며 이러한 경향성을 문제 삼는 경우가 희박하다.

하지만 서방 입장에서도 역사논쟁을 관망만 하기 어려운 것이, 바탄 죽음의 행진만 해도 피해자는 일본과 역사갈등을 겪는 중국인이나 한국인도 아니고 미국인 포로들이다. 당연히 미국 측에 객관적인 기록이 있다. 또한 치치지마 식인 사건도 그 피해자가 될 뻔한 사람이 미국의 제41대 대통령을 지낸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이다. 당장 미 해군의 와스프급 강습상륙함 5번함의 함명이 바탄인데, 이 함명이 붙은 이유가 바로 바탄 죽음의 행진에서 희생당한 미군 병사들을 추모하기 위함이다.

이와 같은 배경으로, 일본의 몰락기, 일본과 서방의 대결이 중심 구도에 놓이면서, 마치 "일본이 침략을 당했다"는 이미지를 형성하고 일본이 공격받는 것이 먼저 전쟁을 일으킨 탓에 생겨난 결과가 아니라, 무고하고 평화로운 일본이 일방적으로 미국 등 연합국에게 공격받는 것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왜곡된 인식이 생성된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다만, 일본의 피해가 부각되거나 서방과의 전쟁에만 조명이 놓이고 있는 현실에 대한 비판과는 별개로, 일본군 집단 자체가 미화되고 있다는 것은 한국에 널리 퍼진 오해이다. 물론 일본군 집단을 예찬하는 극우 세력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나, 현대 일본의 미디어에서는 일본 육해군 지도부가 승산없는 전쟁에 국가를 끌고 가 파멸시킨 집단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쇼와 덴노를 미화한다는 비판이 존재하는 일본 패망 하루전에서조차 일본군 상층부는 국민들의 고통에는 아랑곳없이 본토결전과 일억옥쇄를 주장하는 광기 집단으로 묘사된다. NHK 해군반성회 취재에서도 군 지도부에게 명백한 책임이 있는 태평양 전쟁 개전, 특공, 전범재판 면피 등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 시각이 드러난다. 이와는 별개로, 무모하고 무책임한 국가와 군 지도부에 의해 사지에 몰렸던 일선 장병들의 목소리를 전하며 전쟁을 자성하는 취재도 존재한다. NHK 증언기록 병사들의 전쟁
3.2.2.2. 일본의 피해 과장 및 강조
이렇게 위에 언급한 것처럼 태평양 전쟁의 전반부를 짤라내더라도 태평양 전쟁 말기까지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은 엄청나게 많지만, 도쿄 대공습이나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 같이 일본의 민간인들의 희생이 강조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자신들이 당한 피해를 지적하고 지나쳤다고 비난하기도 하는 건 독일도 마찬가지지만,[14] 독일은 최소한 자기가 먼저 잘못했다는 사실은 떳떳하게 인정하고 중립적으로 취급한다.

이런 것을 통해 마치 연합군만 만행을 저지른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서 자신들이 일방적인 피해자인 양 보이게 만든다. 또한 그 당시의 전투를 묘사한다는 핑계를 잡아서 일본 본토에서 벌어지는 방어전을 언급하면서 일본군이 장렬하게 전사하는 것만 중점적으로 언급함으로서 일본군의 침략자 이미지를 자국수호자 이미지로 바꾼다.[15]

그리고 마침내 2013년 5월에 이르러서는 아베 총리가 대놓고 도쿄 대공습이 인도주의에 위배되는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물론 공습 자체가 인도주의에 위배될 소지가 충분한 것은 사실이고 그래서 국제적으로도 비판이 많지만, 일본의 잘못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참조 기사. 마치 북한이 자신이 먼저 대한민국을 침략한 건 언급하지 않고 평양, 원산 공습 등 민간인 피해만 강조하는 꼴이다.

민간인 대상 폭격이 정당한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엇갈린다. 정당하다는 측의 시각은 커티스 르메이의 발언으로 대변된다.
사실 저 밑에 스즈키 네는 군용 볼트를, 옆집 하루노보 네는 군용 너트를 만들고 있을 뿐이다. 이런 걸 가내수공업이라고 하지.

도쿄 대공습 당시 일본의 내부 실상을 보면 커티스 르메이의 이 말은 사실에 가깝다. 총력전 체제를 지탱하는 것은 결국 후방의 민간인들이기 때문이다. 일본 본토와 식민지에서 동원되거나 공출된 인원과 물자를 생각하면 부정하기 어려운 부분.

쉽게 말해 커티스 르메이는 당시 일본의 산업구조가 전쟁의, 전쟁에 의한, 전쟁을 위한 군수산업 최우선으로 굴러가고 있었으며, 일반 가정에서조차 이를 보조하고 있는, 이른바 간접적인 전범이란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커티스 르메이의 또 다른 발언인 "무고한 민간인 따위는 없다." 역시 같은 맥락.

그러나, 인권 중심 담론에서 보자면 민간인 전체를 살상 대상으로 삼는 전쟁관은 상당히 비판받는 시각이다. 애당초, 미국 역시 커티스 르메이 이전에는 주간 정밀폭격으로 민간인 희생을 최소화하고자 했다. 당장, 현대전에서 오폭으로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할시 해당 국가에 빗발치는 비난의 존재를 떠올리면 이해된다.

물론, 연합군의 본토 공습의 정당성을 비판한다면 추축국의 민간인 거주지역 공습도 같은 논리로 비판될 수 밖에 없다. 애초에 도쿄 대공습 전에 커티스 르메이가 참고한 것이 연합군이 독일의 드레스덴에서 한 드레스덴 폭격과 일본이 중국에서 한 충칭 대공습을 포함한 중국 대륙에 대한 무차별 폭격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차이가 있다. 드레스덴은 당시 추축국 중 하나인 독일 제3제국의 군수시설 밀집 구역 중 하나였고 연합군의 목표도 이 군수시설이었으나,[16] 충칭은 국민당 정부가 임시수도로 정하면서 시의 중심부에 군수 시설이 있었는데 일본이 폭격한 곳은 민간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시의 외곽 지대였다. 그러니까 군수시설을 파괴할 목적이었던 드레스덴 폭격과 달리 충칭 대공습은 당시 국민당 정부의 전쟁 수행 의지를 꺾기 위해 일부러 민간인 거주 지역에 폭격을 한 것이다.

일본은 중국 대륙의 각지에 민간인이 있든 없든 무차별로 폭격은 물론 중국인들을 보이는 대로 즉결 사살까지 한, 작전 같지도 않은 민간인에 대한 대량 학살을 정식으로 한 바 있다. 두 명의 미치광이들이 포로와 민간인들을 목 베어 죽이면서 누가 더 많이 죽이는가 경쟁(?)하는 것을 신문기사랍시고 쓴 적도 있었다.[17] 또한 만주에 있던 731 부대는 온갖 생체실험을 자행했다.

특히 충칭 대공습의 경우 일본군이 이 공습에서 민간인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소이탄을 쓰면서 도쿄 대공습에서 커티스 르메이가 네이팜탄을 사용하는데 결정적인 모티브가 되었다. 즉, 일본군은 자기가 쓴 방법에 자기가 그대로 보복당했다. 참고로 일본은 아직도 충칭 대공습에 대한 사과를 하지 않았다.

미국 역시 일본군의 전쟁범죄 피해를 입었는데, 군인 포로들이 겪은 바탄, 태평양 전쟁의 서막을 연 진주만 공습이 대표적이다. 애당초 먼로 독트린에 의거, "무의미한 전쟁은 할 필요가 없다."며 고립주의를 고수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 초반만 해도 전쟁에 직접 개입하지 않던 미국이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유명한 '치욕의 날 연설'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로 한 결정적인 원인이 이 진주만 공습이다.[18]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수행하는 현대 국가 간의 기본적인 전쟁 수행 방식을 생각해 봤을 때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공격을 한 진주만 공습이 말이 안 되는 것이다.

미국도 당장 대중국 최우선 동맹인 일본과의 관계를 위해 일본과의 외교적인 역사충돌을 피하는 것일 뿐, 내부적으로 위안부 개정 법안을 통과시켰듯 구 일본의 전쟁범죄를 인지한다.

게다가 똑같이 객관적인 자료를 확보하고 있음에도 일본이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중국과는 달리 미국은 현재도 일본의 동맹이다. 그래서 일본이 중국에는 대들어도 미국에는 좀처럼 대들 수가 없다. 더욱이 미국도 이런 일에서는 일본에 그리 호의적이지 않아 한 예로 일본 극우에서 2차 대전기의 미국을 비난하자 분노한 네오콘들이 위안부 결의안 통과에 힘을 보태주었고 이를 로비로 저지하려던 일본계 미국인들은 김영옥 대령을 비롯한 2차 대전 참전 군인들이 "우리가 유럽에서 싸운 건 뭘 위해서였습니까?" 라고 하자 다들 물러났다. 네오콘은 부모 세대가 2차 대전 참전자들이고 일본계 미국인들은 태평양 전쟁 시기 일본이 일으킨 전쟁으로 인해 개고생을 겪던 이들이었다.

물론, 일본 지도부에 대한 비판과는 별개로 일반 국민들은 피해자로서의 측면이 있다. 동원 대상이 되었다가 공습으로 희생된 본토의 민간인은 물론이고, 문화적으로도 일본과는 거리가 있던 오키나와 주민들까지 신주불멸이나 귀축영미의 프로파간다 아래 옥쇄를 강요 당했다. 오키나와 전투보다 시기적으로 더 앞선 사이판 전투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있는데, 민간인들조차 항복이 금지되어 결사항전하거나 자살을 택해야 했다. 이들 피해자 가운데에는 어린이, 반전주의자 등도 포함되었기에 단순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전부 가해자라고 비난하긴 어렵다. 하지만 상술했듯 일본 민간인들을 피해자로 만든 것은 다름아닌 일본 군부이다.
3.2.2.3. 원자폭탄의 일방적인 피해자
이것 말고도 일본은 원자폭탄 공격의 피해만 강조하기도 한다. 원자폭탄 자체는 실전에서 사용된 것은 일본에 투하된 2발 외에는 없으며 그리고 냉전의 영향으로 핵공격= 세계멸망이라는 이미지가 생겼다. 이런 반전적인 측면에서 민간인들한테 가져올 피해를 생각하는 의미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일어난 일을 꾸준히 기억하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문제는 자국의 잘못을 언급하지 않고 이걸 이용해서 자신들을 민간인이 핵공격을 받은 불쌍한 나라로 포장해 자기만의 책임을 떠넘기는 것뿐만 아니라, 미국이 이 사태를 일으켰던 원인이라며 역사적인 책임을 물어야한다고 주장하는 극우 정치인들도 있다. 물론 무고한 시민들과 도쿄 대공습 등 공습을 피해 온 사람들까지도 죽기도 했으니 분명 비극은 맞다. 문제는 개전의 책임과 전쟁 중의 만행에 대한 고찰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 사실, 원자폭탄을 맞은 히로시마 나가사키 보다 대규모 소이탄 폭격이 이루어진 도쿄 대공습 때의 민간인 피해가 더 심했다.[19]

이런 주장은 알게 모르게 일본의 저명한 정치가나 노벨상을 받은 석학들도 자주 하기 때문에 단순히 일본 극우주의자들만 주장하는 지엽적인 주장이 아니다. 그러나 화자에 따른 그 차이들은 분명히 인지해야 한다. 적어도 좌익이 주장하는 원폭 피해는 최소한 자기가 먼저 잘못했다는 사실은 떳떳하게 인정한 뒤, 원자폭탄의 피해도 주장하는 것이다. 즉, 적어도 자신들의 전쟁범죄를 인정을 한 뒤에 비로소 자신들의 받은 피해를 주장하는 것이다. 극우들이 논하는 자기 나라가 피해국이라고 하는 것과 180도 다르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자국이 입은 원폭의 피해를 강조하고 선전하면서, 강제동원되었다가 일하다 불벼락을 맞은 사람들은 감추고, 피폭자의 1할에 달하는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은 철저히 무시하고 그리고 결국 25년이 지난 1970년에 들어서야 재일거류민단에 의해 위령비가 세워졌다. 여러 소송 끝에 2011년이 와서야 지원을 했었으나 다시 끊겼다. 정작 참전했던 군인들을 추모하는 야스쿠니 신사는 관리되지만 정작 민간인들을 위한 추모소는 거의 방치가 되고 있는 모순도 드러난다. 당장 국가 신토의 극우들 집성지인 야스쿠니 신사와 일본 정부가 무명의 참전 병사들을 위해 공식적으로 만든 추모지인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일본 정부가 원폭의 피해를 강조한 것은 안보투쟁이 끝난 1970년대 이후이다. 안보 투쟁 이전에는 미국과의 안보동맹으로 인하여 오히려 쉬쉬하고, 보도하려는 관련매체가 있으면 압력을 넣어왔고 오히려 좌익에서 일본 정부와 미국 정부 양쪽에서 버림받은 피해자들을 구제 하기 위해 피해자를 무시하는 일본, 미국 양국 정부를 비난소재로 삼았다. 결과적으로 원폭을 맞을 짓을 해놓고 일반 국민들의 책임도 지지 않으면서 미국에 따까리짓을 하는 구 일제 잔존세력 + 원폭을 떨어트려놓고 피해 진상을 완전히 무시하는 미군 VS 일반 피해자들을 보호하는 참혹한 실상을 무시하는 미국, 일본 극우의 대척점에 있는 좌익이라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이들의 좌익은 움직임은 향후에는 한국인 피해자 구제라는 부분도 이 구도에 끌어들였다. 결과적으로 일본인 피해자만 들어서 일제의 선량함을 증명(?)하려는 극우 VS 일본인 피해자 뿐만아니라 구 식민지 피해자도 구제함으로서 극우의 실상을 까발리고 극우를 제제하려는 좌익이라는 구도가 만들어졌다.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자폭탄 문서에 어쩔 수 없었다는 항목에 있지만, 침략 전쟁을 일으킨 일본제국이 민간인들을 강제동원해서 군수공장에 일을 시켰던 점에서, 당시 폭정을 저지르던 해당 정부에 강력하게 반대하지 않은 한에는 좀처럼 협력자의 위치를 벗어날 수 없다는 관점이 있다. 커티스 르메이의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가 바로 이것. 간혹 전쟁광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무기만능주의에 가깝다.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것 자체를 즐기는 게 아닌, 군부세력들을 없애면서 민간인들이 죽어 나가는 건 어쩔 수 없다는 의미로 발언한 것이다. 물론, 당시의 총력전 체제에서 일반 민중이 권력에 저항에 동원을 거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으며,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는 시각은 오늘날의 인권 중심 담론에서 비판 받는다.

물론 이들 중 원자폭탄을 맞은 나라가 일본 제국 뿐인 것은 맞다. 원폭은 개발에 참여한 당사자들도 경악할 만한 무기였다. 당사자뿐 아니라 실제로 현장에 원폭을 투하한 사람들 가운데 죄책감에 휩싸인 이들도 일부 존재한다. 당시에 원자폭탄을 맞은 사람들도 방사능 때문에 세대를 걸러서 고통받고 있기 때문에 원폭 투하에 대한 도덕적 논쟁은 떡밥으로 남아 있지만, 이는 일본에게 전쟁책임이 있는가 없는가와는 엄연히 다른 이야기이다. 고로 일본이 본인들의 만행에 대해선 상기하지 않은 채 오로지 원폭 피해만 되뇌이며 피해자 행세를 하는 행동은 잘못되었다.

한 예로 일본 네티즌이 미국은 일본에 터뜨린 원폭을 사죄해야 한다는 글을 남겼다가 다국적 네티즌들에게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 물론 원폭으로 비무장 민간인들까지 죽인 것 자체가 잘했다는 것은 아니기에 공감하는 이도 있긴 하나 전반적인 책임은 무리한 전쟁을 벌인 일본 정부가 크다는 의견이 보통이다.

2005년 아우슈비츠에서 홀로코스트 추모 관 야드 바셈 박물관의 개막식이 열렸는데, 이때 일본 외교관이 원폭을 운운하며 피해자 그룹에 참가하려다가 박물관 측에서 나치즘에 물들었다며 비난을 들었다는 이야기가 한국 웹에 퍼지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이스라엘 현지 신문에 나온 외교부 대표의 말에 따르면 일본의 국가원수가 초대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며 주 이스라엘 일본대사관의 직원들만 초청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원폭을 홀로코스트에 비견하려 할까봐' 초대되지 않았다는 것은 루머이며, 단지 일본은 홀로코스트 해방에 기여한 국가도 아니고 홀로코스트에 딱히 관심이 있는 나라도 아니기 때문에 초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원자폭탄 투하의 근본적 책임은 전황의 악화에도 전쟁을 그만두지 않았던 제국 지도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 제국은 뒤로는 강화 협상을 하자면서도 정작 민중들에게는 1억 총 옥쇄같은 터무니없는 작전을 독려하였다. 결론적으로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사용한 이유는 기존 추축국들 중 이탈리아 나치 독일은 이미 항복했는데 일본은 내부적으로 1억 총옥쇄를 외치며, 끝까지 버텼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탈리아는 1943년에 이미 1차로 항복하고 뒤이어 나치의 괴뢰정부가 1945년 4월 27일 항복문서에 서명하여 5월 2일자로 발효됐고 나치 독일은 1945년 5월 7일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5월 23일자로 군이 해체되면서 발효된 상태였다.

결국 미국은 몰락 작전에서 발생할 부담을 피하기 위해서 원자폭탄을 사용한 것이며, 만에 하나 그래도 계속 버텼으면 소련도 끼어들면서 윌리엄 홀시 제독이 진주만 공습으로 박살난 해군기지를 보고 한 말대로, 일본어라는 언어는 정말 이 지구상에서 사라진 언어가 됐을지도 모른다.[20]

많은 사람들이 모르지만 당시 일본도 핵무기 개발에 열을 올렸다. 물론 독일도 개발을 시도했다. 그러나 일본은 기술 미비, 육해군의 상호 비협조 등으로 개발에 실패했다.

교황이 원폭현장을 방문해 피해자 모두 추모하고 애도하면서, 정작 일본 정부는 비핵화 서명을 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날카로운 지적을 한 바가 있었다. # #

만약 일본이 먼저 핵무기를 개발하였으면 일본은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하와이나 괌 혹은 미국 본토에 망설임없이 사용했을 것이고, 실제로도 그런 계획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도 이럴 목적의 폭격기를 개발하고 있었다. G10N 후가쿠 문서로. 하지만 일본 정부는 이런 진실을 숨긴 채, 미국의 핵무기 사용만 비판하고 있다.

일본의 원폭 피해자 강조 행위는 2023년 여름 극장가를 화제로 몰고 온 바벤하이머 밈에 대한 반응에서도 여실히 드러났으며, 여기서도 영락없이 원폭 피해자에 대한 조롱과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차별이라는 논거를 내세우며 노바벤하이머(NoBarbenheimer) 해시태그를 내세워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일본의 역사 수정주의는 일본이 연합군에 의한 전쟁 피해자라는 전제를 중심으로 삼고 있으며, 이러한 일본의 역사 수정주의가 미국(특히 트루먼 전 대통령)을 전범으로 몰게 될 것이라는 지적이 미국 학계에서 제기되었다. "일본 역사 수정의 끝은 미국을 전범으로 만드는 것"
3.2.2.3.1. 히로시마 평화기념관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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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4. 소련군의 불법 참전
본토 대공습과 원자폭탄 못지않게 일본의 피해자 의식에 기여한 것은 종전 직전 벌어진 소련군의 기습적인 침공이었다. 심지어 꽤 많은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2차 대전의 가해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소련군에 한해서는 피해자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이 일로 일본인들은 현재까지도 소련-러시아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으며 또한 쿠릴 열도 분쟁으로 양국은 현재까지 대립 중이다.

사실 중일전쟁, 동남아 전역, 태평양전쟁과 별개로 소일전쟁만 놓고 보면 소련이 먼저 불가침조약을 위반한 것이 맞다.[21] 게다가 남사할린(가라후토)과 쿠릴 열도(치시마 열도)에서는 옥음방송 이후에도 소련군의 침공은 멈추지 않았으며 쿠릴 열도 최남단인 하보마이, 시코탄 점령전은 미주리함 항복 조인식(9월 2일)보다 늦은 9월 5일까지 이어졌다. 따라서 다른 전선과 별개로 오로지 대소전선만 놓고 보면 일본이 억울한 입장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애초에 소련의 침략에 빌미를 준 것은 일본의 침략전쟁이었기 때문에 위와 같은 피해 의식은 일본 내에서나 통용되지 일제의 침략을 받은 동아시아 국가들의 공감을 받지는 못한다. 오히려 소일 불가침조약의 경우 일제의 침략전쟁을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소련의 침공을 두고 일본을 피해자라고 주장하기에는 주변국의 반감만 살 뿐이다.[22]

더군다나 소련 역시 일본에 대해 할 말이 없는 것도 아닌게 애초에 일본은 소련의 전신 러시아 제국에 선전포고도 없이 러일전쟁을 일으킨 바 있다. 실제 소련군의 개입 명분 가운데 하나도 러일전쟁으로 상실한 남사할린의 회복이었다. 오히려 1945년의 소련은 1905년의 일본과 달리 선전포고까지 했으며 이미 얄타 회담 등에서 연합군과 합의한 바에 따라 전쟁에 개시한 것이다.[23] 1945년 4월 소련 정부는 공식적으로 일본 정부에 조약의 파기를 통고했으나 이러한 통고를 정치적 이유로 묵살한 것은 다름 아닌 대본영이다.

다만 대독전선과 마찬가지로 대일전선에서도 소련군은 일본인은 물론 38선 이북의 조선인들에 대해서도 학살과 강간 등 폭압적인 행보를 보였고, 만주 작전 당시 게겐마오 등지에서 일본 민간인들을 학살했으며, 일본군을 비롯한 구 추축군 전쟁포로들을 1950년대 중반까지 굴라그에 수용하는 조치까지 실시했는데 이는 엄연한 소련의 전쟁범죄이다.[24] 그리고 이와 관련한 일화가 있다.
소련에 억류되었던 일본군 포로들과 소련 대표의 첫 공식 만남에서 러시아어와 일본어 동시통역을 맡았던 요네하라 마리(米原万里)의 회고는 흥미롭기 짝이 없다.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로 소련 체제가 붕괴 직전에 놓였던 1990년 일본의 경제원조가 절실했던 소련 정부는 시베리아 억류 일본군 포로 문제에 대한 과거사 청산을 위해 도쿄에 대표단을 파견해 심포지엄을 열었다.

이미 노인이 된 좌중의 시베리아 억류 일본군 전쟁포로들은 심포지엄 시작 전부터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소련 대표단의 역사학자가 만주에 소련군이 들어갔다'는 표현을 쓰자 흥분이 고조되었고 장내는 소란스러워졌다.
일소중립조약을 멋대로 깨트린 소련이 어떻게 '들어갔다'는 표현을 쓸 수 있냐는 항의가 빗발치고 장내의 소란이 가라앉지 않자, 참다못한 소련의 역사학자가 외쳤다.

"시끄러워! 그럼 그때 당신네가 있던 곳은 어디인가? 만주가 당신네 땅이란 말인가?!!!"

그러자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 임지현,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휴머니스트, 2021

3.2.3. 선택적인 국제법 인용

전후 일본은 과거 2차 대전, 태평양 전쟁 당시의 국제법에 대해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연합국들의 국제법 미준수를 사소한 것까지도 물고 늘어지면서 정작 자국이 국제법을 위반한 사례에 대해선 입을 싹 씻는다.

NHK에서는 태평양 전쟁 다큐멘터리를 내보내면서 미군에서 비무장 상선이라도 경고없이 공격해도 된다고 한 지침을 언급하며, 이는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나 마찬가지라고 힐난하며 이는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될 수 있기 때문에 당시 국제법상 금지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NHK스페셜 : 도큐먼트 "태평양 전쟁" (1)

하지만 이는 일본군도 똑같이 했던 짓이며 일본군, 민간선박 격침 '잔인한' 영상물 공개 애초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이나 전후 일본군의 만행을 부정하는 측에게 있어 태평양 전쟁 당시 국제법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고 달면 삼키고 입에 쓰면 뱉아버릴, 자국 옹호에 필요할 때만 선택적으로 써먹는 법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선전포고도 제대로 하지 않고 저지른 진주만 공습 하나로 받아칠 수 있으며 그외에도 일본군이 점령지에서 행한 포로 및 민간인 학살과 약탈, 강간 등 국제법을 수도없이 어겼다. 연합국은 오히려 대추축국 성전이라는 대의명분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 개인 단위의 일탈을 넘어서 조직 차원에서 국제법을 어긴 사례가 거의 없다.

3.2.4. 나치 독일에 책임 전가

일본 미디어들은 나치 독일의 만행, 특히 유대인 홀로코스트를 의외로 강조한다. 8월이 되면 홀로코스트 다큐멘터리 하나 정도는 틀면서 감성을 자극한다. 예전에는 특히 쉰들러 리스트를 주야장천 방송에서 틀어 댔다. 하지만 이러한 미디어 선전에서 "일본 제국도 나치와 한 편을 먹고 세계 평화를 위협한 침략국"이라는 진실은 찾아보기 어렵고 일본의 전쟁범죄 등 일본이 벌인 만행은 거의 알리지 않는다.

또한 일본 극우는 스기하라 지우네의 사례를 내세우고 박해받는 유대인들을 만주로 이주시키려 했다"일본은 나치 독일의 만행으로부터 유대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나치 독일 때문에 정의로운 일본이 욕을 들어먹는다."며 독일을 고깝게 여기는 시선도 존재한다. #

군대 지휘관이 식인을 주도한 사건의 경우 독일군과 소련군도 한 적이 있긴 하지만, 독일군과 소련군의 경우, 식량부족이 워낙 심해서 어쩔 수 없이, 이미 죽은 시체를 대상으로 한 식인이라는 점에서 정상참작의 여지라도 주어지지, 치치지마 식인 사건에서 일본군은 식량이 풍족한데도 술자리에서 안주가 떨어졌다며 특별한 술안주라는 명목으로 산 사람을 죽여서 저지른 식인이라 옹호할 건덕지도 없다. 물론 저 사건은 일본군조차도 이해할 수 없었던 짓이었기에 주범 다치바나 요시오는 다른 일본군 장성들에게도 미친 놈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얻어맞았다.[25]

또한 난징대학살 당시 일본군의 막장 행보는 나치도 경악할 정도였는데 아이리스 장의 <난징의 강간>에 따르면 일본군이 나치 깃발을 불태우고 나치보다 더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외에 난징 대학살을 본 나치당 간부가 이건 좀 아닌듯 이라는 식의 발언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26] 또한 난징 대학살 당시 일부 독일인들은 일본군에 학살당하던 중국인들을 보호했다. 존 라베가 중심이 되어서 설정한 난징 안전지대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한편 몇몇 극우들은 전쟁 도중 일본이 자행한 민간인과 포로 살해도 동맹인 독일의 요청이었다며 자신들을 정당화한다. 전범 재판 과정에서 밝혀진 내용상 독일의 요청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걸 실행한 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이고 애초에 그게 싫었다면 동의하지 않고 거부했으면 그만이었다. 실제 일제는 독일의 유대인 학살 동참 요청을 거부한 전적이 있다. 따라서 이러한 해명은 일본이 독일의 식민지나 속국이 아닌 이상 성립할 수가 없다.

심지어 일본은 홀로코스트와 관련해서도 그리 떳떳하지 못하다. 일제는 대독 정보망을 통해 일찌감치 유대인 수용소와 대학살의 존재를 알았지만 동맹에 금이 갈까 이를 정부 차원에서 묵인했다. 즉, 현대 일본은 홀로코스트를 집중 조명하지만 정작 당대 일본은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알면서도 독일과의 관계를 위해 묵인하고 독일의 학살에 대해 철저하게 입단속한 것이다. 비록 상술한 스기하라 지우네 등 몇몇 의인들은 유대인 구호를 위해 개별적으로 활동했지만 이러한 활동 역시 비호받지 못했고 스기하라는 종전 후인 1947년 파직당했다.[27]

이렇게 독일만 나쁜 놈으로 만들어서 2차 대전의 정세에 대한 왜곡된 편견을 퍼뜨리는 경우가 많다. 물론 독일의 태도도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마냥 깨끗하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정부 수장이 나서서 헛소리를 하는 일본에 비하면 독일은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28] 핵심만 요약하면, 일본의 행동은 독일 등 뒤에 숨는 행동이자 모든 덤터기를 독일에 뒤집어 씌우려는 짓이다.

각종 일본 창작물에서 나치를 주된 악역으로 자주 설정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실제로 게임 리뷰어로 유명한 Zero Punctuation의 얏지가 전장의 발큐리아 리뷰할 때, 게임 자체는 고평가하면서도 일본의 위선을 비판했다.

급기야 2014년 4월 30일 일본 총리 아베 신조는 과거사에 관해 독일과의 비교 불허를 선언했다. #

사실 일본의 반성 태도가 논란을 낳는 가장 큰 원인은 이런 발언을 하고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정치인들이 정말로 반성을 한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행동을 저지른다는 것이다. 총리라는 자가 앞장서서 고노 담화의 무력화를 시도하고 야스쿠니를 참배하는 등의 행동을 줄곧 보이는데 독일은 적어도 정치인들이 이런 추태를 보이진 않는다. 일본이 식민지배에 대한 정부차원에서 사과를 하고 피해국들에 경제적 지원을 해도 주변국에서 이를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앞뒤 다른 일본 정계 때문이다.

다만 일본군의 만행은 어디까지나 관료제의 부실한 부분들이 봉건적인 조직문화와 시너지를 일으켜 일선 부대를 중심으로 발생했지만, 나치 독일의 경우 근대적인 문명 국가의 조직이 관료적이고 체계적인 민간인 학살과 특정 민족의 멸절을 중앙 정부가 직접 주도하며 장려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실제로 민간인 학살과 전쟁 범죄의 절대적 수치에 있어서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은 비교가 되지 않는데, 전사자와 아사자 등을 제외하고 일본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학살당한 민간인의 총합이 대략 500만 명으로 추정되지만, 독일의 경우 그 숫자가 2,000만 명에 이른다.[29] 따라서 서방권의 시각 문제도 있지만 학살의 절대적인 규모의 차이와 양상 역시 나치가 일제에 비해서도 더욱 집중포화를 받는 주요 원인이다.[30]
3.2.4.1. 나치 독일도 피해자?
하지만 나치만 비난하면 일제가 나치와 손잡았다는 비판이 줄곧 따르는데, 이에 대한 반발로 아예 나치까지 정당화하는 주장도 극우 중에서 간혹 나온다. 밑에서도 이야기하는 마르코 폴로라는 극우지의 나치 옹호 주장도 이런 논리이다.[31] 물론 반유대주의 음모론자들은 이걸 가지고 '유대인들이 언론을 지배한다' 따위의 음모론도 제기한다.

이들의 요지를 정리하면, "나치가 착한 놈들은 아니지만, 필요 이상으로 욕먹는다. 유태인 학살도 너무 과장되었다. 그런 학살은 미국, 소련, 영국, 중국, 프랑스를을 비롯한 연합군들도 많이 저질렀으니까 나치도 결국 피해자였다."라는 것이다. 미리 결론부터 내리자면 이 따위 소리를 하는 건 그냥 일본 내의 우익을 넘어 그냥 보편적인 의미에서 네오파시스트라는 걸 스스로 인증 하는 꼴이다.

이런 물귀신 논리에 대한 미국이나 영국 및 연합군 측 반응은 말이 필요없다. 물론 연합군 열강 또한 식민지인이나 소수민족 억압을 해서 그것대로 비판받지만 추축국 전체가 전쟁의 피해자라고 옹호하는 것은 말 그대로 완벽한 자폭이다. 애초에 서양권을 상대로 극우 미디어물을 통한 일본 우익측의 PR 자체가 방구석 인터넷 폐인 집합소에서 조금만 나가면 여전히 사회 전반에서 나치에 대한 금기가 강력한 서구권을 상대로 "나치와 일본은 달랐다! 대동아공영권 레벤스라움과 달리 인종 절멸의 이데올로기가 아닌데 한국, 중국만 우리 욕한다!" 즉, 서양인들의 아시아 근대사에 대한 무지를 이용해서 억지로 나치와 일제를 분리해 팔아 먹는 전략이다. 이 구도에서 그냥 나치 독일도 똑같이 미화, 옹호하는건 그 서양인들 상대로 그냥 논리적으로 자폭하는 것이다.

이 자폭성 주장은 현재 독일에서도 까인다. 네오나치를 제외하면 독일인들은 나치를 흑역사로 여기며 부끄러워하니 당연한 반응이다.

2ch의 다음과 같은 스레들이 이런 부류의 여론에 해당된다. # # # 덤으로 일본의 넷우익에서도 네오나치가 부상하고 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또한 2014년 이케부쿠로 거리에서 하켄크로이츠 깃발을 들고 시위하는 재특회와 2021년 야스쿠니 신사에서도 나치 군복을 코스프레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 여론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 #

덤으로 국수주의/행태/일본 문서에도 있다시피 '가르왈 히말라야'에 수록된 경험담과 본토 독일인들에게 일본에 대한 인터뷰를 한 영상도 이 여론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4. 원인

4.1. 구 일본 제국과의 연속성

현 일본 정부는 구 일본 제국 정부와 뚜렷한 연속성을 보인다. 일례로 역대 일본 총리를 셀 때 2차 대전 이후부터 대수를 세는 것이 아니라 메이지 시대 이토 히로부미부터 계산한다. 이는 전후 일본은 독일과 달리 GHQ를 통한 간접적인 통치에 머물렀으며 내각을 비롯한 정부 구성이 전후에도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정치인 차원에서도 구 일제와 현 일본국 사이에 인적자원의 연속성이 비교적 뚜렷하다. 극동국제군사재판 당시 전쟁을 주도한 군부는 처벌받았지만 내각의 구성원들은 상당수 전후 정치로도 이어졌다. 단적으로 전후 일본 정계를 주도한 아베 신조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 역시 2차 대전 이전에도 거물급 정치인이었으며 만주국 사업에 깊이 관여했다. 이렇듯 패전 이후에도 군부를 제외한 구 일제의 정치적 인적자원은 전후 일본에 그대로 계승되었으며 이는 현대 일본국이 구 일본 제국의 역사와 선을 긋지 못하는 주요 원인이다.

천황제의 유지 및 히로히토의 지속적인 집권 역시 현 일본이 구 일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요인 중 하나이다. 2차 대전 당시 명목상으로나마 수장이었던 히로히토에 대한 형사 처벌이나 천황제 폐지와 같은 강압적인 조치는 물론, 천황 교체와 같은 최소한의 조치 또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전전 일본과 전후 일본을 같은 국체로 여기는 편이다. 일례로 구 일제가 2차 대전을 주도하고 난징대학살 등 온갖 전쟁범죄를 벌인 1930~1940년대와 전후 일본이 버블경제를 통해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1980년대가 모두 같은 쇼와 시대(1926~1989)이다.

이는 독일과 차별화되는 지점인데 현 독일 정부는 콘라트 아데나워 내각으로부터 시작한 서독 정부를 계승하며 따라서 현 독일이 기념하는 건국 연도 역시 종전 이후인 1949년이다. 따라서 현 독일 내각은 2차 대전을 일으킨 나치 독일과 계승관계가 전혀 없다. 게다가 개별 정치인 차원에서도 연합국에 의해 나치 고위당원에 대한 처단과 공직 복귀 금지가 비교적 철저히 이루어져 인적관계의 연속성 역시 일본에 비해 약하다. 물론 서독에서도 68운동 이전까지는 나치 잔당들의 정계 복귀는 이어졌지만 이미 반세기도 더 전에 68운동을 계기로 완전히 사라졌다. 따라서 독일은 비교적 수월하게 2차 대전의 모든 죄과를 이미 사라진 나치 정부의 책임으로 떠넘길 수 있다.

한편 이탈리아 역시 일본과 마찬가지로 파시즘 정권 시기 과거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대표적인 국가로 여겨지는데 이탈리아도 무솔리니를 처단하고 왕정을 폐지했지만 전전과 전후 정계의 연속성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도 내각 체제가 바뀌지 않아 전전 이탈리아 총리 대수를 그대로 인용하며 1943년 비교적 손쉽게 연합국에 항복했기 때문에 전후 정계에 뚜렷한 지각변동이 없었다. 다만 천황제를 유지하고 히로히토의 치세가 지속된 일본과 달리 이탈리아는 자체적인 헌법 개정을 통해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으로 돌아섰기에 일본에 비해서는 파시스트 정권과 다소 연속성이 약한 편이다. 또한 이탈리아의 경우 민간인 학살 등의 전쟁범죄를 저지르긴 했어도 나치, 일제와 동급으로 평가받을 정도의 대량학살을 저지른 적은 없기 때문에 이런 비판을 잘 받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구 일제와 현대 일본을 구분하는 전후의 정치적 제스처가 부족했으며 이는 현 일본의 구 일제에 대한 과거사 청산을 저해하는 주 요인이다. 일본 제국의 역사를 통째로 부정하는 것은 현대 일본의 정체성과 정당성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현 일본 정계가 과거사 문제에 대해 소극적으로 일관하며 이는 일본의 과거사 문제를 지속적으로 낳고 있다.

4.2. 전후 환경의 차이

일본과 독일은 2차 대전에서 패전한 추축국이라는 공통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전후 양국이 처한 상황이 사뭇 달랐다.

독일의 경우 미영불소 4개국에 의해 국토가 분할 점령되었으며 결국 미영불 3개국 점령지는 서독, 소련 점령지의 반쪽은 동독으로 분리 독립했다. 이 과정에서 소련 점령지의 나머지 반쪽은 오데르-나이세 선을 경계로 소련과 공산 폴란드에 할양되었다. 또한 프랑스는 점령지의 일부를 자르 보호령이라는 이름으로 떼내 독일로부터 분리하려 하였고 이를 후일 서독과의 협상에서 지렛대로 활용하였다. 그리고 연합국은 수도 베를린을 분할 점령하였고 미영불 3개국은 1990년 통일 시점까지 명목적인 관할권을 서독에 돌려주지 않았다.

게다가 서독은 통일 시점에도 승인 조건으로 이들 국가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어야 했다. 일례로 프랑스의 요구로 마르크를 폐기하고 유럽 공용화폐를 채택하겠다고 합의했으며 소련의 조건으로 소련에 대한 경제 원조 및 동부 영토의 포기를 승인하였다. 이렇듯 승전국 4개국을 포함한 주변국들은 독일에 끊임없이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할 수 있었고 주권 완전 회복을 위해 동서독은 이들의 요구를 모두 수용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반면 일본은 미국에 일방 점령되었기 때문에 GHQ에 의해 미국 입맛에 맞는 개혁만이 이루어졌다. 미국은 승전국 4개국 중 패전국에 가장 관대한 나라였고 일본은 이러한 미국의 묵인 하에 다른 주변국과의 관계 회복 없이도 주권을 온전히 되찾을 수 있었다. 일제의 최대 피해국인 중국마저 전후 다시 내전의 늪에 빠져 일본에 자국의 입장을 제대로 관철할 수 없었으며 독립과 동시에 분단된 신생국가 한국은 말할 것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일본군의 군화에 짓밟힌 동남아 역시 종전 직후 곧바로 서구 종주국과 독립전쟁을 치러야 했고 유럽 국가들은 독일의 처분, 냉전, 식민지 독립, 국토 재건, 경제 위기 등 여러 문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일본의 처분을 오로지 미국에 맡길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소련은 냉전의 영향으로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를 차지하는 것 외에 전후 일본에 영향력을 전혀 행사할 수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2차 대전 직후 일본에 대한 주변국의 요구사항이 들어지지 않았고 막후에서 일본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은 대소 냉전에 온 신경이 집중된지라 과거사 청산에 관심이 소홀했다. 결국 전후 일본에 대한 피해국들의 영향력 부재는 후에 일본이 우익 정권으로 회귀해 과거사를 미화할 여지를 남기고 말았다.

4.3. 학습의 장 부족

일본의 전쟁범죄가 대개 중국 대륙과 태평양, 동남아 등 이역에서 벌어진 관계로 과거의 잘못을 상기할만한, 소위 ‘학습의 장’이 일본 내에 부족하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일례로 독일의 경우 다하우 강제수용소를 비롯하여 독일 곳곳에서 홀로코스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으며 또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역시 쉥겐 조약의 영향으로 독일인들도 비교적 쉽게 방문할 수 있다. 이들 공간은 일반 시민들의 생활 공간에 존재하며 ‘역사 교육의 장’으로 기능한다.

반면 일본의 경우 그러한 장소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일례로 난징대학살의 흔적은 중국 난징, 731 부대의 흔적은 중국 하얼빈, 바탄 죽음의 행진의 흔적은 필리핀 바탄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 조선인 강제노역의 현장인 하시마 섬, 사도 광산이나 치치시마섬 식인 사건의 현장인 오가사와라 치치시마 등은 일본에 있으나 인구가 많은 시내와는 거리가 멀고 접근성이 좋지 않다.

게다가 강제수용소를 비롯한 물리적 시설에서 전쟁범죄를 다수 자행한 독일과 달리 일본의 경우 731 부대 정도를 제외하면 대개 시내에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따라서 독일과는 달리 역사를 반추할 상징적인 건조물이 상대적으로 적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인들은 독일인들과 달리 자국의 잘못된 과거를 실생활에서 체감하기 어렵다. 오히려 히로시마시 한가운데에 위치하는 원폭돔이나 전후 재건된 많은 건축물들은 미군의 공습을 상기하여 일본인들의 피해자 의식을 자아낸다.

4.4. 문서화되지 않은 전쟁범죄

일제의 전쟁범죄가 대개 문서화되지 않았다는 점도 일본이 전쟁범죄를 은폐하기 쉽게 만드는 주요 요인이다.

2차 대전기 나치와 일제의 전쟁범죄에는 성격 차이가 존재하는데 나치의 경우 ‘민족 멸절’을 최종 목적으로 삼았고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대량 학살이 중앙정부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졌기에 전쟁범죄가 다수 문서화되었다. 또한 독일 특유의 철두철미한 조직 문화도 이러한 문서화 작업에 힘을 실었다. 이러한 이유로 나치의 전쟁범죄에는 정부 문서라는 강력한 증거가 남게 되었고 이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나치 전범들을 기소하고 재판하는 결정적인 증거로 작용했다.

반면 일제의 경우 대부분의 전쟁범죄가 일선 부대를 중심으로 자행되었고 중앙정부는 대개 이를 방조했을 뿐 직접적으로 명령한 경우가 드물었다. 게다가 당시 일본의 미성숙한 조직 문화로 인해 전쟁범죄의 명령 및 행위들은 문서로 남지 않았고 대개 관계자들의 구두 전술에 머물렀다. 따라서 사후 연합국은 극동국제군사재판 과정에서 관계자 및 피해자들의 증언 등에 의존해 직접 책임이 있는 전범들을 색출해 처벌해야 하는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이러한 이유로 직접적으로 범죄를 주도한 일선 부대의 전범들이 책임을 회피하고 간접책임이 있는 사령관들이 대신 처형당하는 상황도 다수 연출되었다.[32]

이러한 이유로 오늘날의 일본 정부는 사실상의 유일한 증거인 피해자들의 증언을 비객관적이고 신빙성이 없다고 치부하며 전쟁범죄 은폐 및 축소를 시도한다. 반면 독일 정부는 전쟁범죄 문서 및 절멸수용소 등 물리적인 증거가 존재하여 이러한 시도를 포기하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4.5. 서구 제국주의와의 비교

이 문단은 제국주의가 아닌 군국주의에 대한 비판에 한정된 담론이다.

일본 제국은 태평양 전쟁을 대동아공영권을 이룩해 귀축영미를 비롯한 서구 제국주의의 압제 하에 있는 아시아인들을 해방하는 ‘성전(聖傳)’이라고 정당화했다. 이러한 이유로 중국, 동남아, 인도 등으로부터 괴뢰 인사들을 초청하여 대동아회의 등을 개최하며 표면적으로 아시아 해방이라는 명분을 적극 표명했다. 전후 일제의 변호인 측은 실제 서구 열강의 아시아 침탈을 사례로 들어 일본에만 책임을 묻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일본을 변호하였으며, 전범들을 비롯한 일본의 지휘부 역시 처형당할 때까지 이러한 자세를 유지했다. 그리고 실제 일본인들이 일본 제국의 본래 의도는 서구 제국주의로부터 해방하기 위한 성전이었다고 믿었으며 실제 몇몇 우익들은 여전히 ‘대동아 전쟁’이라는 명칭을 고수한다.

현재도 인터넷 공간에서 많은 일본인들이 자국을 변호하는 과정에서 영국을 비롯한 구 서구 열강의 사례를 끌고 오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서유럽 모두 제국주의 국가들이었음에도 전쟁의 승패만을 이유로 일본과 독일이 모든 화살을 맞는다고 주장한다. 몇몇 이들은 이러한 이유로 뉘른베르크 재판과 도쿄 재판이 불공평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이들의 주장처럼 제국주의의 경우 많은 강대국들이 공유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오히려 국제사회에서 등한시되는 경향이 있는건 사실이다. 실제로 많은 아시아, 아프리카 식민지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사죄와 배상은 매우 미흡하며 많은 서방국들이 식민지 문제를 시대상으로 치부하며 넘기는 경향이 있다. 과거사 청산으로 유명한 독일마저 독일 제국 시절에 벌인 제국주의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편이다.

하지만 일본인들의 이러한 인식과는 달리 2차 대전은 단순히 제국주의 국가들 내 싸움이 아니었다. 2차 대전의 추축국이 특히 문제시되는 이유는 군국주의 파시즘의 사상이 발호하여 ‘세계대전’을 벌였고 주변국들에 천문학적인 인명피해를 강요했기 때문이다.

독일과 일본은 각각 유럽과 아시아를 침략하여 많은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으며 이 과정에서 무려 수천만 규모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일례로 독일과 일본이 벌인 독소전과 중일전은 2차 대전의 일개 전역에 불과하나 이 두 전선에서 발생한 사망자 수는 인류 역사상 두번째로 큰 전쟁이었던 1차 대전의 총합을 상회한다. 19세기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들에서 수만~수십만 단위의 사상자가 발생한 제한전을 벌였을 뿐 이 두 추축국처럼 수천만 단위의 사상자가 발생한 전면전을 일으킨 바가 없다.

물론 제국주의 역시 21세기 들어 서구권에서도 비판받는 건 사실이고 또한 서유럽 국가들이 제국주의를 벌였다는 사실도 일본의 제국주의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식민지 출신인 한국을 제외하면 일본이 특히 비판받는 이유는 제국주의적 팽창이 아니라 군국주의 발호 후 일제가 벌였던 천문학적 규모의 학살과 전쟁범죄이다. 따라서 1930~40년대 나치와 일제가 벌인 행각은 단순한 제국주의적 행보와 동일선상에서 치부할 수 없다.[33]

4.6. 좌파 운동의 실패

좌파 운동의 실패로 인한 일본 정계의 보수 일변도 역시 일본의 역사 인식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일례로 서독의 경우에도 1960년대 중반까지 과거사 청산이 비교적 미흡한 편을 넘어 일본과 다를 바 없는 수준이었다. 나치에 대한 서독 자체의 처벌이 약해[34] 많은 나치 잔당 출신들이 서독 정계에 빠르게 복귀했으며 독일 사회 분위기도 나치에 비교적 온정적이었기에, 부역자들은 여전히 정치, 경제 부문의 요직에 앉아 부와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어 전 서독 총리, 테오도르 오버랜더 전쟁 피해자-추방자 연방 장관, 한스 글롭케 연방총리청장, 라인하르트 겔렌 연방 정보국장, 헤르만 요제프 압스 당시 도이체방크 총재, 한스마르틴 슐라이어 독일 경제인 연합회장, 에른스트 폰 지멘스 지멘스 감독 위원회 의장, 1950년대 서독 최고 갑부 중 한 명인 프리드리히 플리크 등이 있다. 한 술 더 떠서 무장친위대들까지 무장친위대 상조협회를 결성해 정계의 비호를 받으며 호의호식했다. 그러나 이에 분노한 청년들에 의해 68운동이 발생하며 청년이 키징어 총리의 뺨을 때리고 만년야당 사민당이 집권하는 등 좌파 청년들에 의해 청산이 이루어졌다.

반면 일본에서는 전공투 운동이 있었고 적군파와 같이 과격 단체도 생겼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좌파가 성공하진 못했다. 일례로 보수 정당인 자민당은 전후 70년의 일본 정계 중 60년을 주름잡았다. 게다가 잃어버린 30년과 도호쿠 대지진 이후 아베 신조가 집권하면서 일본의 우경화 분위기는 더욱 심화되었다.[35] 그나마 일본도 2020년대 이후 아베 신조 피살 사건, 통일교 게이트, 자민당 정치자금 논란 등 여러 악재로 인해 극우 세력이 사실상 몰락하다시피 했으며, 기시다 후미오, 이시바 시게루 같은 자민당 내 온건파 총리가 등장하고 50회 중원선에서 좌파 성향 야당들이 약진하는 등 변화의 조짐이 어느 정도는 보이는 편이다.

물론 과거사 문제는 정치적으로 진보/ 보수를 나눌 문제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보수우파보다 진보좌파가 과거사에 전향적인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따라서 전후 일본 사회의 보수적 분위기는 일본이 과거사를 전향적으로 바라보는 데 어느 정도 장애물로 작용하는 형국이다.

4.7. 패전의 횟수

독일의 경우 세계 대전에서 2차례의 패전을 겪었지만 일본은 1차례의 패전먄을 겪었다는 사실 또한 양국의 전후 정체성에 영향을 미친다. 비록 독일의 역사적인 오명은 1차 대전보다는 나치즘과 2차 대전에서 기인하지만 그럼에도 세계를 상대로 2차례나 전쟁을 벌인 ‘문제아 국가’였다는 사실 또한 전후 독일의 정체성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다. 반면 일본의 경우 1차 대전에서는 승전국이었기에 자국이 패전국이라는 인식이 독일에 비해 살짝 얕은 편이다.

4.8. 중앙정부에 대한 약한 소속감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봉건제도를 오래 유지한 나라이다. 가마쿠라 막부부터 에도 막부까지, 메이지 유신 이전 약 700년 동안의 막부시대, 즉 무신정권 집권기의 영향이다. 이 시절에는 자기가 살고 있는 지방의 다이묘만 신경 쓰면 중앙의 천황이나 쇼군의 존재에 대해서는 사실상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36] 그리고 메이지 유신도 따지고 보면 결국 아래에서 일반 민중들로부터 시작된 혁명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쇼군 쌩까고 자기들이 알아서 외국이랑 놀며 힘을 축적해 온 지방 유력자 세력들 그리고 지방 무사계급 출신자들이 다 주도했다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이러한 풍조는 별로 달라진 건 없었다.[37]

그래서 연결고리로만 따지면 일본인들은 대개 지방을 중심으로 해서 해당 지역의 유지 같은 지방 유력자들이 구심점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일본 제국 육군 문서만 보면 알 수 있듯이 징병률은 매우 낮았으며 탈영 비율이 높았기에, 옥쇄 정책이나 귀축영미나 같은 가짜 뉴스에 가까운 수단으로 강제적으로 동원할 수 밖에 없었다. 즉 국가 - 개인보다 지방 - 개인의 연결고리가 더 강하다. 간단한 예로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 중앙에서 잡으려 해도 잡지 못하는 야쿠자들만 봐도 알 수 있다.
분명히 전후, 일본 정부가 조선・대만의 전범들에 대해 냉정한 모습들을 보여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민족차별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쇼와 21년(1946)년 2월에 GHQ와의 각서에 기반한 「칙령 제68조(勅令第六八条)」 [38]가 공포되어 군인, 군속에게 주어지는 연금과 유족들에 대한 부조료 등의 모든 지급이 정지된 것의 영향이다.
たしかに戦後、日本政府は朝鮮・台湾の戦犯たちに対して冷たい対応をとったのは事実である。しかしそれは⺠族差別によるものではなく、昭和二十一年(一九四六)二月に G H Q との覚書に基づく「勅令第六八条」を公布したことで軍人、軍属への恩給と遺族に対する扶助料すべてを停止したことが影響している。

이로 인하여 전몰자의 유족들에게 주어지는 일체의 공적 처우들이 정지당했다. 이들은 금전적으로 고통받았을 뿐만이 아니라, 명예마저도 빼앗긴 것이다.
これにより戦没者の遺族は一切の公的処遇を停止された。人々は金銭的に苦しめられるのみならず、誇りさえも奪われたのである。

그리고 유족, 상이군인, 전범 수형자들을 백안시하는 풍조가 사회에 만연하여, 그들을 옹호하는 것 자체가 「군국주의 찬미다」 라고 비난당한 탓에, 우리나라에서는 국적의 여하를 불문하고 전범들에게 차가운 태도를 보여줄 수 밖에 없었던 것이 현실이었다.
そして遺族、傷痍軍人、戦犯受刑者たちに対して白眼視する風潮が社会に蔓延し、彼らを擁護するということ自体が 「軍国主義の賛美だ」と批判されるため、わが国では国籍の如何を問わず戦犯者に冷たい態度をとってきたというのが実態である。

-겐코츠 타쿠후미(拳骨拓史) 저 "친일파 조선인 지워진 역사(「親日派」朝鮮人 消された歴史)"
중앙집권 전통이 근대화 이전부터 강했던 한국인들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일본인들은 개인과 가까운 영주(요즘이라면 시장이나 현지사, 도지사)와의 관계를 중요시한다. 게다가 한국인들은 ' 줏대'란 가치관을 굉장히 중시하지만 일본인들은 이 경향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패망 직후에 일본에서 유행하던 패션이 미군 점퍼에서 유래된 스카잔이였다. 얼마 전 까지 총옥쇄를 각오하며 싸우던 적의 복장을 멋있다는 이유로 받아들인 것이다. 애초에 "이기면 관군 지면 역적(勝てば官軍 負ければ賊軍)"이라는 속담이 널리 퍼진 곳이라 일본인이라는 공통의 의식은 작용하고 있지만 국가주의는 미국과 중국, 영연방 등 연합국의 점령 후 상당히 희석된 것이다.[39]

문제는 저 옛날부터 이어져 온 "이기면 관군 지면 역적"이라는 일본인들 특유의 풍조는, 까놓고 말하자면 "자기네들에게 도움이 되면 존경해주는 척 하다가, 해가 되거나 패배하면 곧바로 태세전환" 이다. 즉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의 여부 그리고 사유 같은 것들은 그냥 깡그리 무시한 채 그냥 무작정 "이긴 쪽"을 "우리편이자 새로운 지배자"로 인식하고 그 "새로운 지배자"에게 순응하며 시간이 지나면 마치 자신들이 "우리편의 일원"이 된 걸로 생각하는 정신승리와 합리화질의 극단화이다. 이런 풍조가 탄생하게 된 이유는 수시로 내전이 이어지는 길고 긴 전국시대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는데, 일반 백성들의 입장에서 전국시대는 자기들을 다스리는 지역 영주가 가문 내부의 권력투쟁이나 다른 지역에서 온 영주의 군세에 의해 수시로 갈아치워지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높으신 분들이 이렇게 불규칙적으로 바뀔 때마다 눈치껏 신속하게 새로운 지배자에게 순응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아비규환의 시대였다. 실제로 일본제국 당시 쌀소동 이후로 쌀 문제를 알아서 해결한다고 기대하다가, 정작 일본이 패전한 후에는 새로운 지배자인 맥아더 장군한테 쌀 소동 이후로 쌀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아예 빌며 꿇은 적이 있다.
1930년대 등장한 독일 나치즘과 일본 파시즘, 그리고 이들이 일으킨 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그동안 수많은 연구들이 진행되어 왔다.

먼저 일본의 경우를 살펴보면, 첫째, 전전 일본에서 파시즘 등장과 군국주의적 전쟁의 원인을 특정 '악의 세력' 즉 전전 일본 군부의 비정상적인 '일탈행위'로 보는 시각이 있다. 이러한 접근법에 따르면, 1930년대 이후 군부가 전체적인 국가이익을 저버리고 자신들의 편협한 조직이익을 추구하여 쿠데타와 정치 테러로 정치권력을 장악하였고, 나아가 일본국민의 일반의사와 상관없이 무모한 전쟁들을 일으켜 일본 사회 전체를 패망의 길로 이끌고 갔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에서는 그 당시 일본 군부의 우월감, 독단주의, 비이성, 무모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일본 군부에게 전쟁의 책임을 전적으로 돌림으로써, 전전 "대동아전쟁"을 열광적으로 지지했던 일본사회의 전체-천황, 민간 정치지도자, 여론형성 지도층, 재벌, 지식인, 그리고 일반 국민들-의 책임을 매우 희석시킬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 강좌학파와 노농학파로 구성되어 있는 일본 내 좌파적 진보학자들은 전전 일본의 파시즘과 군국주의 전쟁의 원인을 일본 자본주의의 전개과정에 있어서 지배연합 세력들 -메이지 원로, 군부, 재벌-의 공모에서 찾고 있다. 이들의 논의에 따르면, 전전 일본 지배 엘리트들은 국내 시장이 포화 상태에 이르자, 해외의 새로운 상품시장과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 대외팽창적 군국주의 전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좌파적 분석 역시 사회계급구조적 결정론에 빠져 전쟁에 책임이 있는 개인들, 그리고 일반 국민의 책임을 간과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셋째, 일본 파시즘의 군국주의 전쟁의 선택은 그 당시 주어진 국제정치 환경에 대한 대응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이들은 당시 약육강식의 국제정치의 특성, 즉 노골적인 권력정치가 난무하는 제국주의적 국제구조 하에서 일본도 국제사회에서 자신의 독립과 안보를 확보하기 위해 제국주의의 길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특히, 1930년대 중국의 민족주의적 저항을 견제하고, 서구에 만연한 보호무역주의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일본이 새로운 아시아질서 창출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그러나 당시 약육강식의 현실주의적 국제정치 측면만을 강조한다면, 군국주의적 정책을 일으킨 일본의 책임은 전혀 없다는 극단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

-열광의 정치: 일본의 천황제 파시즘과 독일의 나치즘, 박한규, 대한정치화회보 15집 3호.

하지만 일본의 부실한 역사인식을 단순히 봉건제도, 지방자치제 탓이라 보기도 힘들다. 독일도 역사적인 이유로 중앙에 대한 소속감이 약하고 일개 지방을 국가처럼 생각하는 정서가 강하며, 현대에는 아예 연방제를 채택 중이다.[40] 그럼에도 현대 독일 정부는 동유럽 등 주변국에게 전쟁범죄 관련 문제를 분명하게 사과했으며, 학교 등에서도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과거사 문제는 독일 국민 전체가 책임져야 함을 확실히 교육한다.[41] 반면 일본이 봉건제를 타파한 것은 어언 150년이 지났고 현재는 완전한 중앙집권적 국가이다. 현대 일본인들 역시 봉건사회를 경험한 바가 없고 역사 속에서나 봉건제를 배울 뿐이다. 지역 의식과 별개로 ‘일본’이라는 국가에 대한 귀속 의식 역시 확고하다.

일본 국민들이 자기 스스로를 당시의 일본 군부 및 정부에 의해 이용당한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제국주의 반대자나 반전주의자, 징집거부자, 그리고 전쟁과 전혀 무관한 어린아이가 아닌 이상 일본 내부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이고, 당장 일본이 만주사변 중일전쟁으로 아주 잘 나갈 때는 극우 성향의 민간인 지지자도 엄연한 일본 국민이기 때문에 일본 국민 자체가 집단적으로 피해자라고 보기는 어렵다.[42]

4.9. 피해국의 한계

4.9.1. 약한 국력

피해국들이 한국과 중국 외에는 서유럽 정도의 국력 수준을 지닌 피해국이 없으니 축소나 은폐를 한다고 비난해도 호소의 목소리가 필연적으로 약할 수밖에 없다.

일례로 한국의 경제 규모는 일본의 3분의 1, 인구 규모는 2.5분의 1에 불과하며 북한 리스크 + 동아시아의 막장스러운 세력균형이 있어 독일을 상대로 최소 대등한 관계를 맺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 비해 영향력이 제한적이다.

대만은 한국보다 사정이 더 열악한데 인구는 일본의 6분의 1, 경제 규모는 13분의 1에 불과하다. 게다가 사실상 미승인국이며 또한 정치 성향상 일본에 우호적이다. 싱가포르는 도시국가이므로 애초에 영향력이 거의 없으며 인도네시아 역시 국력은 강성해졌지만 여전히 국제 사회의 헤게모니에서는 거리가 있다.

아무래도 국제정치라는 것이 단순하게 도덕성에 기반해서 정치를 하는게 아니라 '국력'에 기반해서 흐르다 보니 일본 입장에서는 피해자 행세를 해도 경제/정치적으로 그다지 손해가 없으니 굳이 반성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UN의 구적국조항 또한 언제까지나 군국주의로 회귀하여 침략전쟁을 일으켰을 때 적용되는 조항이지 혼자서 피해자 행세를 하건 전범을 찬양하든 학살을 부정하든 그 자체에 대해서는 제재수단이 아예 없고 심지어 조항 자체도 사실상 사문화된 상태이다.

이는 경제력, 군사력 뿐만 아니라 소프트파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와패니즈란 용어가 나올 정도로 일본은 그 동안 소프트파워를 상당히 축적했고, 이는 서구권 국가들이 현실 정치에서 일본에 대한 우호감을 쌓는데 영향을 주었다. 이로 인해 일본의 피해자 행세가 더욱 쉬워진 면도 있다.

이는 일본이 미국, 영국, 호주, 네덜란드를 비롯한 서방 국가들에는 확실하게 사죄를 하고 주변국 가운데 어느정도 국력이 있는 한국과 중국에 유감표명이라도 한다는 점을 보면 확실하다. 여전히 사과의 태도에 문제가 많다지만, 그나마 각각 강대국의 최소 수준의 국력을 갖고 있는 친서방국가와 세계 2위의 강대국이기에 이 정도라도 사과받을 수 있었다.

사실 이건 독일도 똑같은데 독일이 사죄한 대상은 어디까지나 경제적으로 막대한 힘을 가진 유대인( 이스라엘) 및 서방 유럽 국가들이었고, 집시나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 식민지배했던 아프리카 국가들에는 아무런 반성을 하지 않았다. 또한 독일에 의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이웃나라 폴란드에 대한 사죄 및 배상도 어디까지나 2차 대전기에 저질렀던 전쟁범죄에 한정되어 있고, 독일 제국 시절 폴란드를 식민지배하고 수탈한 것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하다. 독일이 세계 대전과 유대인 학살에 대해 반성하고 사과한 것은 그렇게 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치 독일을 직접적으로 제압한 나라들은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인데 이중 미국을 제외하면 독일이 과거사 청산을 하지 않아도 적당히 넘길 나라는 없었다.[43] 이들은 1945년부터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어 세계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니 독일이 국제사회에서 활동하려면 당연히 반성과 사과가 선결과제였다. 일본의 경우에는 20세기 내내 한중 포함 주변 아시아 국가들이 비교적 약했기 때문에 굳이 반성과 사과를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독일은 그런 '특혜'를 누리지 못했기 때문에 허리를 굽히는 것 외에 도리가 없었다.

거기다가 독일의 박해를 받은 유대 민족은 이스라엘 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유대 민족은 경제력과 뛰어난 인재풀을 발판으로 서구 사회의 정치를 제외한 거의 모든 분야에 실질적 지배층으로 활약하고 있다. 이들이 적극적으로 홀로코스트에 대한 청산과 사과를 요구하면서 독일은 전쟁범죄를 사과하지 않고서는 국제사회에서 버텨나갈 길이 없었다. 게다가 전쟁범죄로 물어줘야 할 배상금도 법적으로 철저하게 따지지 않고 자발적인 배상금 등으로 어물쩡 넘긴 게 많았기 때문에 사과와 자발적인 배상으로 넘길 수 있다면 하는 것이 누가 봐도 현명한 행동이었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독일이 사과·반성을 한 것을 두고 그들의 민족성까지 칭송할 이유는 없다고도 볼 수 있다. 그나마 최근에 과거 독일령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외교관계 개선과 무역 교류 등을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어서 독일 제국 시절에 독일군이 식민지 흑인들에게 저지른 학살 만행에 대해 사과하려는 모습은 보이고는 있지만 배상은 여전히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등 식민지 문제에 있어서는 일본보다 못하다고 볼 수 있는 행동을 보이고 있다. 실제로 배상 사례로 볼 때 가해국들이 피해국의 요구에 응하는 것은 배상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된다고 판단할 때뿐임을 알 수 있다. 그마저도 투자, 저개발국 지원 등의 형태로 대충 넘어가려는 식이다.

사실 독일이 과거사 청산을 잘했다는 건 서방국가들을 상대로 저지른 전쟁범죄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깔끔하게 사과했기 때문이고 이쪽도 식민지 문제나 비서방국가 상대로 저지른 범죄쪽으로 파고들면 떳떳하지가 못하다. 만약 독일이 아프리카 식민지들 대하듯이 일본이 이 문제를 방치했다간 국력이 강한 중국, 한국이 어떻게 해서든 끈질기게 잡아내서 국제사회 앞에서 강력하게 진상 규명을 요구할 것이 뻔하다. 따라서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사과하면서도 민간차원에서 조직적인 방해, 은폐, 왜곡, 축소 시도를 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반대로 독일은 어차피 아프리카의 식민지 피해국가들이 떠들어봐야 힘이 없기 때문에 방치하는 쪽이 더 이득이다. 이는 괜히 시도했다가 역풍을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독일이 2016년이 되어서야 나미비아에게 사과한 이유도 독일이 튀르키예에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규탄하니 튀르키예에 이 건으로 역공을 당해 마지못해 사과한 것이다.[44]

어쨌거나 일본 입장에서 남는 건 중국, 대한민국을 제외한 만만한 동남아시아 및 오세아니아 나라들이다. 이들 역시도 일제의 피해자이지만, 아직까지 국력상 일본에 못 미치는 나라들이 대부분이며 오히려 경제력이 대부분 약한 동남아시아 나라들에 대해서 공적개발기구(ODA)와 아시아여성기금을 통해 현재까지 꾸준히 지원하며 이들을 일본 정치에 우호적인 입장으로 끌어들이는 중이다.[45] 게다가 현재 동남아에서 중국의 위협이 두드러지면서 일본으로서는 더욱 유리한 환경이 만들어졌다. 중국 역시 서방 여론의 반대편에 위치했기 때문에 한국 혼자서 일본에 대항하는 상황이며 이마저도 한일 간의 협력을 원하는 미국에 의해 압박을 받는 실정이다.

4.9.2. 일부 피해국들의 반서방성

그나마 상술한 국력 문제에서 일본을 확실히 압도하는 나라는 중국 뿐이다. 하지만 중국은 대서방 준적대국이라, 일본에 압력을 행사하려고 과거사를 언급해도 서방에서 듣기는 할지언정, 공감대를 형성하고 일본을 같이 압박할 생각은 별로 없다.

북한의 경우 국력도 약한 약소국인데다 일본인 납북 문제 등을 벌여 일본에 명분만 주는 형국이다. 게다가 북한은 대한민국과 서방세계의 주적이자 인권을 탄압하고 주변국에 안보 위협을 가하는 불량국이기 때문에 이들은 호소력이 전혀 없다.

여담으로 대한민국의 경우 반서방 국가는 아닌데다 반서방주의자들이 극소수지만 제국주의 피해국이자 일제 식민지배 최대 피해국인 관계로 19세기에서 1945년까지 시기 관련 과거사 문제로 가해국인 일본과 알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과는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비롯한 일본에 의한 한반도 식민지배 묵인으로 역사적으로 불편한 사례가 적지 않으며 한국 내 NL계열 운동권 출신 인사들과 반서방주의자들[46]이 해당 역사 문제를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는 관계로 서구권 내에서 한국을 잠재적 반서방 국가 내지 1950년대 이전 과거사를 이유로 반서방 국가로 돌변할 가능성이 높은 위험국가로 인식하는 혐한 인사들이 있다.

4.9.3. 약한 결속력

국력이 부족하다면 피해국들의 단합이라도 잘 이루어져야 하는데 설상가상으로 각 피해국들이 입은 피해 정도가 다른 점도 일본에 대한 정치 스탠스 차이에 영향을 주며 상호 협력을 요원하게 한다. 일례로 35년간 일제의 식민지배를 겪고 고통받은 한국과 14년간 일본과 전쟁을 치르며 본토에서 많은 민간인 피해를 당한 중국은 제국주의 국가 가운데 일본에 대한 비판으로 초점이 맞추어지며 이 과정에서 19세기 후반 한반도의 이권을 침탈하고 중국 대륙 각지에 조차지를 건설한 서구 열강에 대해서는 비판 의식이 약하다.

하지만 동남아 국가들은 상황이 정반대이다. 일례로 베트남과 미얀마는 각각 프랑스와 영국의 식민지배를 한 세기 동안 경험했고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의 식민지배를 수 세기간 겪었다. 게다가 2차 대전 이후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다시 동남아의 구 식민지에 대한 영향력을 재확보하기 위해 강압적인 정책을 펼쳤으며 이 과정에서 식민지 독립 전쟁이 발발하여 잦은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일제의 점령 기간은 고작 만 3년에 불과하며 그마저도 유럽 열강들의 지배 기간 사이에 샌드위치 양상으로 끼어 있으니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옅은 것이 당연하다. 물론 제아무리 짧은 기간이었을 지라도 워낙 일제의 철권통치가 막장이었고 민간인 탄압이 잦았으므로 존재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서구 열강에 비해 미약한 건 어쩔 수 없다. 이러니 동남아 국가들에 한국과 중국 수준의 대일 압박을 요구하기란 어려우며 더욱이 이 문제에서는 한국에서 여론을 움직이려 하는 유럽 국가들이 결코 떳떳하지 못하다.

나아가 한국 및 동남아 국가들은 현 중국의 패권주의, 팽창주의적 행보에 맞서는 형국이다. 이들 국가에 일제의 악행은 과거형인 반면, 중국의 위협은 현재진행형이다. 따라서 사안의 우선순위가 다르기 때문에 대일 협력이 사실상 요원한 상황이다.

이렇듯 동남아 국가들에는 과거사 청산에 있어 자국을 장기간 착취한 서구 열강이 우선적인 타겟인지라 일제에 대해서는 한국과 중국에 비해 미온적인 반응이다. 거기다가 현재진행형인 중국의 위협 때문에 중국과의 협력 가능성이 부각되지 않는 실정이며, 이는 2020년대 이후 한국에게도 어느 정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피해 정도의 차이가 상술한 일본의 경제 지원 및 중국 위협론의 대두와 맞물리며 피해국들의 대일 압박을 약하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4.9.4. 지리적 한계

독일의 경우 주변국과 국경으로 직접 접하기 때문에 주변국과의 평화와 친선을 도모하지 않는 한 생존이 어렵다. 반면 일본은 섬나라이기 때문에 태평양을 통해 미국과 연결되는 한 동아시아 사회와 단절되어도 국가 안정성에 큰 문제가 없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이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친선에 적극적이지 않은 이상 주변 피해국들이 일본에 압력을 가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4.10. 일본 민주주의의 특성

일본의 근대화와 민주주의는 모두 국가주도로 위로부터 아래로 진행된 것이다. 시민혁명을 통해서 스스로 민주주의를 쟁취한 것이 아니라 메이지 유신을 통해서 천황신격화에 바탕을 둔 입헌군주제가 도입되었고, 2차 대전 패전 이후 GHQ를 통해서 민주주의 제도가 단기간에 속성으로 이식된 것이다. 심지어는 현재의 일본 평화헌법은 GHQ의 실무자들이 열흘만에 만들어서 일본 정부에 권고한 것이다. 평범한 일본인 입장에선 어느 날 갑자기 황국신민에서 민주시민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자신은 아무것도 안했는데. 제도는 몰라도 전체적인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이 갑자기 이렇게 바뀌지는 않는다.[47] 따라서 일본의 민주주의는 다른 자발적 민주주의 국가에 비해 많이 발달하지 못했다. 일본의 근대화 자체가 과거 명목상의 지위에 있었던 천황의 신격화를 포함한 전체주의 민족주의 체제를 기반으로 설계되고 이루어졌으며, 민주정은 연합국이 일본인의 '1억 총 옥쇄'로 대표되는 군국주의 세뇌를 탈피시키고자 주입했다.

일본은 근대화가 시민혁명 같은 대중들의 참여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사이고 다카모리, 사카모토 료마 같은 소수 존황양이파 등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에 대중의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이 약한 편이다. 또한 일본인들의 소위 튀기 싫어하는 성향으로 인해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더해졌고, 무라(村)를 중심으로 하는 집단사회가 유지됨에 따라 지역구 의원과 토호들간의 유착으로 지역구 의원의 세습 등이 이루어지면서 일본의 민주주의는 지금의 미숙한 형태로 나타났다. 근대화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받아들였으나, 위로부터의 근대화로 인해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이 전반적으로 약했고 이는 동아시아 국가 특유의 민족주의와 합쳐져 일본 제국은 진정한 의미의 서구 민주주의 사회로 이행하지 못한 채 전근대성과 근대성이 혼재된 과도기적 사회에 머물렀다.

비단 제국 시절의 일본이 아닌 현대의 일본에도 그 잔재가 아직 남아있는데, 재일 한국인은 물론, 선주민인 아이누 류큐인, 계급제가 있던 때의 부라쿠민에 대한 차별은 여전하다. 특히, 부라쿠민의 경우 제도적인 차별은 껍데기만이라도 사라졌으나 실제로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부라쿠민은 부라쿠민 촌, 그러니까 피차별부락[48]에서 태어나기만 했는데도 그 가족까지 차별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 게다가 부라쿠민이란 것이 피차별부락에 사는지 여부만을 따지는 것이기 때문에, 도와지구에서 살면 부라쿠민으로 자동 등록된다.[49][50]

게다가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후 도호쿠 지방 사람들에 대해 또 다른 차별이 암암리에 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화족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이는 일제 시절 귀족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이 역시 법적으로는 폐지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사라진 게 아니라 세습 정치인 같은 개념으로 계속 명맥을 잇고 있다. 아베 신조, 아소 다로 같은 정치인들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애초에 '인민'정도가 적합한 'people'이라는 단어를 굳이 국가주의의 냄새가 강하게 남아 있는 국민(國民)으로 번역한 것 역시, 당시 일본 열도 내에 거주하는 조선인, 대만인 등의 소수 민족을 동등하게 대우하고 싶지 않은 일본의 심리가 섞여 있었다. (출처: 존 다우어, <패배를 껴안고>)

물론 그에 대한 반동으로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에 민권운동이나 개혁운동, 사회주의 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관동대지진으로 일본이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고 치안유지법이 발동하기 시작하면서 수면 아래로 가라 앉았다. 그 이후 일본은 국가의 통제가 한층 강화된 전체주의 국가가 되면서 이를 군부가 접수하면서 군국주의 테크트리가 완성되었다. 이후 일제가 패망하면서 미국을 통해 민주주의를 이식받았으나 경제발전에 관심이 집중되던 당시 사회 분위기 때문에 이러한 담론은 많이 발달하지 못했다.

위에서도 이미 한 차례 언급한 내용이지만, 일반 시민들도 일본군이 중일전쟁에서 중국의 주요 도시를 점령할 때마다 초롱을 들고 길거리에서 축하하는 행위를 거국적으로 벌였다. 이것도, 일본에서는 "그 때는 무조건 동원되어야 했고 동원에 응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당하는 시대였기 때문에 시대가 시대인 만큼 어쩔 수 없지 않았냐?" 라고 항변하지만 이를 통해 '100% 자발적인 것은 아니고 강요당한 부분도 존재한다'라는 주장은 가능해도 '강요당했을 뿐 일반 시민들은 실제로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라는 주장은 무리이다. 무엇보다 일본 극우들이 중일전쟁 당시 일본의 일반 국민들을 넘어 일본 제국 수뇌부까지 감싸는 것을 보면, 일본의 피해자 행세를 주도하는 이들의 본심은 자국 수뇌부의 횡포로 희생된 민간인들을 동정하는 게 아니라 그냥 2차 대전 당시 일본을 미화하는 것일 뿐이다.

5. 비판

5.1. 일본의 미비한 역사 인식과 교육

...언젠부터인지 나는 '일본이 나빴다'라고 할 경우 그것은 현실적으로 어떤 사실을 두고 말하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검증해보고 싶어졌다. 도조 히데키를 악의 화신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도조 히데키에게 책임을 지우고 나머지 모두를 면죄하는 풍토에 의문이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로 도조 히데키를 철저하게 조사하여 그 궤적을 두 권의 책으로 정리했을 때 나는 개인적으로는 도조 히데키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고, 일본 육군의 오류를 그대로 짊어지고 있는 모습에 아연실색했다. 그럼에도 도조에게만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구도에 분개했다. 왜 일본에서는 구체적인 검증도 하지 않고 저 전쟁을 부정해버린 것일까? 그것을 끝까지 추궁해가면 답은 하나밖에 없다. 즉, 일본에서는 역사적 체험에 대한 검증을 진지하게 실천에 옮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의도 목적도 사명감도 그리고 역사에 대한 책임감도 없이 전쟁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한 국민이라는 얘기가 된다. 어떤 경륜도 갖지 못한 국가라는 얘기가 된다. 그래서는 안 될 것이다. 설령 역사적 보편성이라는 게 없다 하더라도, 그 어떤 역사적 사명감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온 나라가 들고일어나 싸웠던 것이리라.
- 호사카 마사야스, <쇼와 육군>

가장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는 현재 일본의 의무교육 과정 중 역사 과목의 근현대사 부분이 매우 지엽적이고 짤막하게 다뤄지기 때문이다.

1980~90년대까지는 너무 가까운 과거의 역사라는 이유로 잘 가르치지 않았고, 90년대 이후는 소위 말하는 유토리 교육 세대라서 최대한 간략하게 가르치는 풍조가 확산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으나 이것은 일본 우익 세력의 변명에 불과하다. 유토리 교육 운운하기 훨씬 이전인 2차대전 패전 직후부터 일본의 근현대사 관련 교육과 인식은 이미 형편없기로 유명했다. 그 결과 의무교육으로 배우는 일본 제국 시절은
...이 수준에서 벗어나지 않게 되었다.

사실 이는 일본 제국의 태생적인 원죄 때문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 대전의 경우 자신들의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가 벌인 전쟁이며, 그 세세한 내막까지 밝히자면 자신의 아버지, 할아버지들의 전쟁범죄들을 모조리 까발려야 하기 때문이다. 자손들의 입장에서 전쟁의 실체를 알게 되면 망신살이 뻗치게 되는 셈이다. 당장 아베 신조, 아소 다로 같은 세습 정치인들의 선조를 거슬러 올라가면 1930~40년대 침략 전쟁에 적극 참여한 전범들이 수두룩하다. 아소 다로 가문은 조선인 강제징용노동자들을 착취하던 탄광재벌 가문이고, 아베 신조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는 군수공업에 관여한 경제관료였다. 게다가 정치인뿐만 아니라 지역 토호, 기업인, 교육자 등 주요 권력 계층 인사들의 선조 대부분이 다 이 모양이니 당당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는 같은 추축국의 일원으로서 마찬가지로 전쟁에 큰 책임이 있는 독일과도 그 양상이 매우 다른데, 독일의 경우 제2차 세계 대전의 역사를 가르치면 자신들이 제1차 세계 대전부터 가해국이었다는 사실을 명백히 밝힌다. 오히려 일본의 전공투 세대를 비롯한 60~70년대의 젊은 세대는 이러한 "추축국으로서의 구세대"에 대한 적개심과 세대의식으로 반전운동 및 평화운동으로 흘렀다는 해석도 있다. 그리고 이로 인해 비행기를 납치해서 북한에 가거나 미츠비시 중공업 등 일본 기업에 폭탄 테러를 하는 등 과격화의 바람이 불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버지의 깃발의 주인공 잭 브래들리는 전후 고향에서 장의사를 하던 중, 아들 중 하나가 일본으로 유학을 갔는데 그곳에서 일본인들이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건 미국과 중국의 압박을 견디다 못해서였다!"고 주장하며, 자신은 그들의 주장에 동의한다는 내용을 편지로 보냈다. 그런데 잭의 또 다른 아들은 누구도 잭이 편지를 받은 후만큼 분노한 모습은 보지 못했다고 한다. 영화에서도 드러나듯 일본의 피해자 내지 약소민족 행세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독일은 자국의 과오에 대해 사과하고 죄를 인정했지만, 독일이 죄책감에 휩싸여 발전이 늦어지는 일 따위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 힘들 것 같던 동서로 나뉜 독일의 통일은 이웃 국가들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사죄로 인해 이룰 수 있었다. 만일 독일이 일본처럼 책임회피와 피해자 코스프레로 일관했다면 아직도 동서로 나뉘어 있었을 것이다. 반면 소련 해체라는 불행을 겪고도 소련 시절 자신들이 저지른 온갖 악행[51]에 대해 어떤 반성도 없는 러시아는 결국 우크라이나 침공을 기점으로 불량국으로 낙인찍혔다.

그리고,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의 주최 측에서는 원폭에서 완전히 회생한 히로시마의 이미지를 강조하고 홍보하려는 상징적인 목적이 있었다. 여기서 타국(아시아) 선수들과 스탭들의 공식 일정 중에, 관광차 원폭 희생자 위령 기념물에 가는 일정이 있었는데 큰 마찰을 겪었다. '원폭 희생자를 기리는...' 따위 멘트를 늘어놓던 일본인 가이드의 말에 "지들이 전쟁을 일으켜 놓고 누굴 기리라는 거야!"라고 타국 선수들과 스탭들이 대놓고 비난해서 분위기가 극도로 험악해지기도 했다.

이 때문에 자신들의 전쟁범죄 행위에 대해 성의없이 서술한 교과서로 공부를 해 온 90년대생 이후의 일본인들이 외국으로 여행이나 이민을 간 경우, 외국에서 바라본 일본 역사에 대해 상당한 충격을 받는다고 한다. 대표적 사례가 일본인 유튜버 유이뿅이 있는데 일제강점기와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보고 상당히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거기에 "일본에선 이런 거 안 알려주냐?" 는 채팅글에 바로 안 알려준다고 말했다. 일본의 역사 교육 수준이 어떤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영상 일본의 역사왜곡과 같은 선에 놓고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한국의 역사 교과서 또한 전두환 정부 시기에 행해졌던 삼청교육대,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은폐 등의 인권 탄압과 학살 행위에 대해 성의없이 서술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인터넷이나 방송 프로그램, 영화 및 드라마 등의 대중매체를 통해 해당 사건의 진실을 알고 충격을 받는 한국인들이 결코 적지 않다.

그리고 중국인들 또한 중국공산당을 미화하는 내용의 역사왜곡 교과서로 공부해 온 90년대생 이후의 세대들이 서방권 국가로 이민을 갔다가 서방권에서 바라본 중국 현대사에 대해 상당한 충격을 받는 경우가 많다. 이런 현상과 비슷한 일은,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의 온갖 악행[52]을 미화하는 내용의 교육을 받고 있는 2022년 시점의 러시아 학생들도 미래에 경험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6. 일본의 피해자 행세가 위험한 이유

우리의 위대한 독일 제국을 괴롭히는 것들 중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것은 영국과 프랑스의 사악한 금융 자본가들이다. 그들은 독일의 모든 부를 전쟁 배상금으로 빨아들이려고 혈안이 되어있다. 우리는 끔찍한 부의 착취를 겪었다. 그러나 독일 땅에 사는 모든 이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이 부의 착취는 금융가들이 조장한 것인데 모두에게 알려져 있듯이 금융업계는 사악한 쥐새끼들이 지배하고 있다. 독일 영토 내에 암약하는 이 해로운 독극물들은 영국과 프랑스에 사주받아 금융 업계를 지배하고 독일인들을 갈취한다. 그렇다! 그들은 유대인들이다. 이들이 착취하는 것은 우리의 부 뿐만이 아니다. 우리의 정신까지 오염시키고 있다. 우리의 제국을 붕괴시키고 제1야당을 이루고 있는 공산주의자들을 보라. 영국 땅에 사는 사악한 유태인인 카를 마르크스는 영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우리 독일을 뿌리까지 흔들고 있다. 그리고 독일 땅의 유대인들은 우리의 땅과 재산을 긁어모아 영국에 가져다 바치면서 떨어지는 콩고물을 주워먹어 비대하게 살이 쪄있다. 우리가 언제까지 참아야 할 것인가?

위는 나치 독일의 유대인에 대한 입장이다. 나치 독일은 자신이 영국-프랑스에 의해 피해를 보았고, 그들이 독일민족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고 선동했다. 여기서 덤으로 악으로 묘사한 것이 바로 유대인이다. 여기서 영국-프랑스를 한국-중국으로, 유대인을 재일조선인으로, 공산주의자를 입헌민주당으로 바꾸면 아래와 같다.
우리의 위대한 일본 제국을 괴롭히는 것들 중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것은 한국과 중국의 사악한 금융 자본가들이다. 그들은 일본의 모든 부를 위안부, 강제노역, 전쟁 배상금으로 빨아들이려고 혈안이 되어있다. 우리는 끔찍한 부의 착취를 겪었다. 그러나 일본 땅에 사는 모든 이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이 부의 착취는 금융가들이 조장한 것인데 모두에게 알려져 있듯이 금융업계는 사악한 쥐새끼들이 지배하고 있다. 일본 영토 내에 암약하는 이 해로운 독극물들은 한국과 중국에 사주받아 금융 업계를 지배하고 일본인들을 갈취한다. 그렇다! 그들은 재일 조선인들이다. 이들이 착취하는 것은 우리의 부뿐만이 아니다. 우리의 정신까지 오염시키고 있다. 우리의 제국을 붕괴시키고 제1야당을 이루고 있는 입헌민주당을 보라. 한부 땅에 사는 사악한 재일들은 한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우리 일본을 뿌리까지 흔들고 있다. 그리고 일본 땅의 재일 조선인들은 우리의 땅과 재산을 긁어모아 한국과 북한에 가져다 바치면서 떨어지는 콩고물을 주워먹어 비대하게 살이 쪄있다. 우리가 언제까지 참아야 할 것인가?

논리가 너무나 유사하다. 여기에 한 발자국 더욱 나가면 재일에 대한 혐오는 '피해자가 표출하는 정당한 분노'와 '억압으로의 해방'으로 바뀌며,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7. 일본의 피해자 행세를 바라보는 외국의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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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서_일본의_징징거림을_바라보는_시각.gif
제목부터가 '아이고 맙소사 또 일본의 전쟁범죄를 부인하는 스레드'다. 4chan 움짤.[53] 2ch 측 혐한·혐중 네티즌과 해외 와패니즈들이 대사를 되풀이하며 함께 춤추는 엑스트라와 그들이 쓰는 재플리시가 포인트. 나오는 대사들이 죄다 "한국은 거짓말쟁이", "난징 대학살은 거짓", " 위안부는 매춘부" 등 병맛이 철철(...) 넘친다. 웃음 포인트는 잠깐 초록으로 등장하는 "너네들은 지금까지 (한국과 중국의 중상모략에) 속아왔다(라고 주장)"→(증거를 대라고 하자) >네 다음 한국인 >일본어로 글 올리기부분.[54] 엄밀히 말하자면 대개는 극우적인 주장을 하는 일본 사이트를 링크하는 경우가 많다. 영어로도 극우적인 주장을 적어놓은 사이트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이트가 훨씬 많다.

잘 알려진 대로, 4chan은 와패니즈 극우 성향이 매우 강하다. 애초에 트럼프 정권 이후 언론에서 한창 논란이 된 대안우파를 탄생시킨 인터넷 소굴이 바로 4챤의 구 정사갤, 즉 /pol/이다.[55] 일본인도 매우 자주 보이고. 한국인이 일본의 과오에 대한 자세에 대해 비판하면 아직도 열폭하냐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다만 이 부분은 와패니즈 성향의 문제라기보다는 이런저런 사건들로 인해 한국 네티즌들에 대한 이미지도 그리 좋지 못한 것 + 별 상관없거나 그들 관점에서 굳이 언급할 이유가 없는 쓰레드에 비판 글을 올리는 모습 때문에 이러는 면이 강하다. 제대로 일본의 전쟁범죄에 관해 언급되는 스레드에서는 4chan이라도 일본에 대해 엄청난 성토의 글이 쏟아진다. 심지어는 한국이나 중국에서나 나올 법한 '핵과 미사일을 덜 맞았다.'는 말까지 나온다. 정말로 심각하다 할 만한 곳은 Sankaku Complex 코타쿠 같은 애니, 망가 관련 사이트들이다. 문제는 헤타리아 슈퍼 소니코 애니 같은 작품에서도 '만화는 만화일 뿐'이라는 시각을 보인다는 것이다. 특히 후술할 두 사이트는 매우 심각하다.

그런 4chan에서 이런 움짤이 나올 정도면 일본 유저들이 얼마나 어그로를 끌어 댔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의 넷우익들이 증거가 확실한 전쟁 범죄나 전범 추모 문제까지 옹호하기 때문에 한국, 중국의 프로파간다로 위장하려고 해도 설득력이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전쟁 범죄로 죽어간 이들 중 미군도 많다. 이 때문에 해외에서도 일본 넷 우익의 이미지는 크게 실추되었다.[56]

gook은 인터넷 상에서는 한국인을 비칭하는 단어이다. 다만 인터넷상으로나 그렇지, 실제로는 겉으로 도무지 중국인이나 일본인이나 한국인을 구별 못하여 그냥 일본인을 비하할 때 국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57] 사실 국이라는 말은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남인을 까던 욕이기도 하고 이후 중국인이나 다른 동남아인까지 싸잡아 까던 욕설이다. 1950년대 재미 일본인들을 멸칭할 때도 이 말을 썼다. 자세한 것은 세계인 비하명칭 참고.

일본이 적으로 삼은 미국 같은 상대 국가의 국력을 논외로 해도 과연 정당한 전쟁이었는지, 전쟁 목적이 뭐였는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을 생략해도 판단하기 쉽다. 경제 발전과 1등 국민의 이득, 승전국 국민으로 누리는 자부심과 차별의식 등을 점철한 당시 일본 국민들의 모습을 본다면 결론은 뻔하다.

거기에 수많은 국가들의 역사서는 폼으로 있는 게 아니다.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들만 나열해도 일본은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주장할 수 없다.

7.1. 서방 측의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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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버 Knowing Better의 Playing the Victim - Historical Revisionism and Japan[58]

일본의 이런저런 징징거림은 일본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그다지 큰 효과가 없다. 일본은 이런 짓 하지 않아도 이미 냉전 시기부터 서방에 매우 중요한 동맹국으로 떠오른 상황인데, 이런 징징거림은 오히려 국가 이미지에 부정적인 영향만 미친다.

한국도 홀로 일본을 비판하기 어려워서 21세기 들어 급성장한 중국과 일정 협력하는데 중국 역시 중일전쟁기 난징대학살을 비롯한 온갖 전쟁범죄의 피해국이기 때문에 일본의 이러한 수정주의적 조류에 반발이 심하다.

심지어, 일본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대만도 일본의 역사 수정주의에 동참하지는 않는다. 사실 대만 정부는 일제와 혈전을 치른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직속 후신이며 만주국, 731부대, 중일전쟁, 난징 대학살, 충칭 대공습 등은 대만 정부가 중국 대륙을 통치하고 있을 때 벌어진 일들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전후 세계 질서인 국제연합 체계는 전쟁 당시 추축국에 대항하여 연합을 결성했던 미국, 중화민국, 영국, 소련을 중심으로 등장했다. 국제연합의 기원은 추축국을 격파하고 전쟁 이후의 세계 질서를 재정립하려는 목적으로 연합국들이 합심하여 만든 국제기관이다.[59] 따라서 이들 국가들 주축으로 건립된 보편적 민주주의의 사상적 배경에는 반파시즘이 원칙적으로 깔려 있다.[60]

따라서 나치 독일, 일본 제국,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현재 세계 질서에서는 곧 인류의 적이고, 국제연합의 구 적국 조항이 이를 반영한다. 적국조항이 독일이나 일본, 이탈리아를 전쟁 피해국들이 마음대로 공격해도 좋다는 보증수표는 당연히 아니지만, 그건 이 세 나라가 군국주의 파시스트 정권으로 복귀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이다.

당시 일본과 교전한 미국, 중화민국, 영국 영연방은 현재에도 세계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세계질서의 양강인 미국과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영국을 비롯한 영연방 국가들 및 기타 유럽 국가들도 세계 정세에서 여전한 지위를 가진다.

한국에서는 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반일 감정이 아시아에만 존재하고 유럽에는 전혀 없다고 인식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오해이다. 일례로 1960년대에 당시 천황인 히로히토가 아내 나가코 황후와 함께 미국, 대만, 영국,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당시 난리법석했다.[61][62] 그나마 미국과 대만에서는 약간의 반일 시위 정도를 제외하면 조용히 넘어갔지만 영국과 네덜란드에서는 매우 살벌했다.

실제로 영국과 네덜란드에선 2차 세계 대전 참전용사들과 그 유족들로 구성된 반일 시위대가 몰려들어 쇼와 덴노 나가코 황후에게 돌팔매와 화염병과 각종 오물을 거침없이 날려댔다. 이들은 하나 되어 히로히토 내외에게 "살인마는 우리나라에서 빨리 꺼져라!"와 "일본 왕을 즉시 전범 재판에 회부하여 사형을 선고하라!"와 "일본 왕이 죽인 우리 가족들을 살려내어 다시 우리들에게 돌려달라!" 등 피켓을 든 시위대가 히로히토 내외가 가는 곳마다 몰려들었고 히로히토 내외는 국빈방문 중에 돌과 화염병, 오물 세례를 맞는 수모를 당했다.

나아가 1989년 히로히토가 죽자 더 선을 비롯한 영국의 신문사들은 히로히토의 부고를 축하하며 그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심지어 1990년대에 아키히토가 영국을 방문했을 때에도 일부 영국 노병들은 휘파람을 불며 야유하고 콰이강의 다리 삽입곡으로 유명한 보기 대령 행진곡을 연주하며 사과와 보상을 요구했다.[63]

그리고 일제를 타 추축국과 비교했을 때 누가 봐도 독일은 무리수지만, 이탈리아는 정상참작할 여지가 있다. 당시 이탈리아는 전체적인 구심점보다는 자체적인 지방에 소속감이 컸고 반 파시즘적인 저항세력인 안티파 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난 곳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1990년대를 분수기로 국내로는 렌조 디 펠리체, 지오반니 파보네, 국외로는 스탠리 페인, 토니 주트 등의 현대 역사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2차 대전 당시 이탈리아 전선은 비단 연합군의 상륙 같은 외부적 요소 뿐만 아니라 전쟁 이전부터 지하에 암약하여 지속적으로 반파시스트 저항 운동을 펼쳐오던 공산주의, 사회주의, 공화주의, 그리고 무솔리니가 이탈리아 왕실을 바지사장으로 만들어 버린 것에 반발한 우파 내의 반파시스트적 인사들이 규합하여 터뜨린, 즉 이탈리아 내부의 반파시스트 요소들이 자체적으로 응집하여 터진 하나의 내전으로 보는 시각이 학계 내에서는 주류이다.

그리고 1944년 겨울 아직 파쇼의 지배가 굳건했던 살로 공화국 영토 내에 여러 개의 동시다발적 무장 봉기를 일으켜 짦은 시간 해방구를 형성했다가 추축군의 재침으로 진압당했던 이탈리아 북부의 수 많은 임시 빨치산 공화국들의 존재는 이러한 이탈리아 반파쇼 빨치산들의 조직과 역량이 결코 연합군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이탈리아 민중 내부의 자체적이고, 자발적인 지원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내부 사정을 제외하고 보더라도 이탈리아는 북아프리카와 발칸, 남프랑스 등 비교적 국소적인 범위에서 제국주의식 침략을 저질렀을 뿐 동유럽이나 동아시아 전선과 같이 수천만의 인명피해를 수반하는 대규모 침략전쟁을 벌이진 않았으며 그렇다고 민간인과 포로에 대한 대규모 학살을 자행하지도 않았다.[64] 게다가 전쟁의 흐름상 이탈리아는 어디까지나 추축국의 보조자 역할에 머물렀지 주 행위자가 아니었다. 이러한 연유로 이탈리아는 독일, 일본과 달리 전후에도 침략국 처우를 어느 정도 면할 수 있었으며 현대에도 2차 대전과 관련하여 크게 지탄받지 않는다.

그리고 '일본이 피해자면 미국이 가해자라는 결론'이 나오는데, 이러한 논리는 네오콘을 필두로 한 미국 우익이 절대로 웃어 넘기지 않는다. 네오콘 상당수가 바로 2차 대전 참전 군인이거나 그 후손들이기 때문이다. 일본 극우들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미국도 그런 게 있다' 운운하며 물귀신 작전으로 끌어들이려다가 네오콘들이 폭발하여 미국 하원에서 위안부 문제 결의안 통과에 기여한 적도 있다. 당연하지만 성노예를 성매매녀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7.1.1. 미국에 살고 있는 일본계의 시각

미국에 사는 일본계 미국인들도 몇몇은 이런 피해자 행세를 지지하는 경향을 보이지만, 대부분 일본의 이런 위선을 좋게 바라보지 않는다. 미국 국민으로 사는 처지이기도 하고, 이외에도 여러 가지 까닭에 피해자 행세에 찬성하지 않거나 마이크 혼다 하원의원처럼 비판한다. 이것은 2차 대전 당시 일본계 부하들을 이끌고 나치 독일에 맞서 최전선에서 맹활약한 김영옥 대령(1919~2005)의 활약이 컸다.

그가 살아있을 때 캘리포니아 의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관련 결의를 하려고 하자 일본계들이 반대 로비를 했다. 그러자 김영옥 대령이 부하였던 일본계 노병들을 찾아가 "우리가 유럽에서 싸운 게 뭘 위해서였냐?"면서 설득하자 이 노병들이 로비하던 일본계들에게 반대 로비를 그만두게 했다.[65]

7.1.2. 현재의 경향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집권기 동안 대대적인 우경화 행보를 보인 탓에 전 세계의 강대국들로부터 안 좋은 의미로 주목을 받았다. 이는 오히려 서양권에 위안부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가 제대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의 우경화가 시작된 것은 아베 신조가 집권하기 훨씬 전부터였지만, 아베 정권의 우경화는 그 정도가 달라 매우 극단적이고 급진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평소에는 일본이 어지간히 찧고 까불어도 방관해 왔던 미국도 지속적인 경고를 주는 등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미국 입장에서 현재 일본은 아시아권의 주요 동맹국 중 하나이니 과거의 악감정은 잠시 접어 두고 어느 정도 방임적으로 봐 줬던 것일 뿐인데, 이제는 대놓고 그 일본 제국 시절의 만행을 옹호하고 정당화시키는 모습을 보이니 좌시하고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다.

더군다나 일본은 21세기에 들어 과거의 거품이 꺼지고 점차 쇠퇴하는 반면, 일본과 척을 졌던 중국은 어느새 일본 경제력의 4~5배에 이르러 일본은커녕 미국과 경쟁하고 있는 신흥강국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중국 못지않게 일본 제국에 원한이 깊은 옆나라 대한민국도 일본이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선진국으로 발돋움한 지 오래이다. 20세기처럼 자기들 국력만 믿고 자신들의 원죄를 외면할 수 없도록 국제정세가 바뀐 것이다.

2013년 동남아시아 지역 회의에 끼어든 아베가 싱가포르에 중국 견제 요구를 하자 리셴룽 총리가 역정을 내었다.[66] 그리고 회의 의장이던 브루나이 술탄 하사날 볼키아가 굳은 표정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중앙일보 기사 일본의 전쟁범죄 피해자 국가들 중 상당수가 동남아시아 나라들이라 이들도 일본에 대한 감정이 썩 좋지 않기 때문이다.

2016년에는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이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로 인한 민간인 희생에 대해 사죄하려고 했는데 되려 일본이 말렸다. 그리고 다음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는 먼저 진주만을 공격한 게 누군데 누가 사죄하느냐며 오바마를 비난했다.

7.1.3. 개별 사례

7.1.3.1. 스티븐 스필버그의 사례
실제로 유대계 미국인인 스티븐 스필버그가 설립한 드림웍스 영화사의 아시아 지역 배급권 계약을 할 당시 나치 독일과 함께 전쟁한 일본 업체는 처음부터 배제했다. 당시 아시아 지역 엔터테인먼트 산업 규모는 일본이 압도적이었고, 한국의 산업 규모는 일본의 1/10 정도였는데도 일본 기업을 제외했다. 이는 스필버그의 조국 미국이 진주만 공습의 피해 당사국이고 스필버그의 조상이 나치 독일에 의한 홀로코스트의 피해자인 관계로 추축국에 민감하기 때문이다.[67][68]
7.1.3.2. 미국 하원의 위안부 문제 결의안 통과
미 하원에서 이 결의안 통과를 묘하게도 일본계 미국인 3세인 민주당 소속의 마이크 혼다(Michael Makoto Honda, 애칭은 Mike) 하원의원이 지지했다. 그는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 일본계로서 사죄하고 유엔 결의안을 비롯하여 더 강력하게 위안부 문제를 따지자고 주장한다. 당연히 일본 극우들은 마이크 혼다를 두고 매국노, 일본의 수치 등 비난하며 싫어하는데 구로다 가쓰히로는 혼다 의원이 한국 정부로부터 매수당했다는 식으로 왜곡했다.[69]

물론 일본계라고 다 그런 건 아니라 일본 극우를 지지하며 위안부 결의안을 반대하던 일본계 정치인들도 있었다. 대니얼 이노우에 연방 상원의원(1924~2012)이 대표적인 사례인데 2차 대전 때 유럽전선에 참전하여 팔을 하나 잃었던 그는 일본의 편을 들어 미국 하원 결의안을 반대했으나 네오콘들이 미국도 마찬가지라고 물타기를 하는 일본 극우들에 분노하여 반대하지 않았고, 결국 결의안이 통과되는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7.2.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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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볼: 다들 그렇지 않아?
다른 아시아 볼들: 좆까
폴란드볼로 표현한 일본의 피해자 행세에 대한 아시아 국가들의 시각. 위 그림에서 나온 볼들은 대한민국, 중국(+ 중화민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미얀마,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필리핀, 싱가포르, 동티모르 등 과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에 의해 피해를 입은 아시아의 국가들이다.[70]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아시아나 오세아니아 국가들도 일본의 징징거림에 전혀 동참하지 않는데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이 일본군에 의한 피해를 겪었기 때문이다.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다소 가혹하게 징병했다는 주장은 있으나 그렇다고 중국 주민들이 일본에 붙지는 않았다. 침략자인 일본은 당시 국민당의 통합은 허울 뿐이고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군벌들의 도움을 받을 걸 기대했으나 오히려 일본의 침략은 원래는 아버지 시절부터 일본과의 커넥션으로 힘을 쌓았던 장쉐량을 필두로 그 위세 높던 군벌들이 명목상이나마 장개석의 권위를 인정하고 숙여 들어가는 중국의 통합에 도움을 주었다. 물론 왕징웨이처럼 군벌 출신 한간이 없는건 아니지만 바이충시, 리쭝런, 옌시산 같은 1930년대 기점으로도 끝발 날리던 군벌들은 거의 다 명목상으로나마 장제스 아래로 숙이고 들어갔다. 오히려 장제스가 평생 염원했던 사방에서 인정받는, 명목상 국민당 내에서의 권력이 아니라 실질적인 국가 지도자로서 통제력과 권위는 일본의 침략으로 만들어졌을 정도로 중일전쟁 당시 국민당과 장제스의 권위는 크게 높아졌다. 당장 일제의 중국 침략 계획 중 큰 열쇠 중 하나였던 군벌로 인한 중국의 분열을 오히려 자기들이 막아주었다고 역설적인 평가도 가능할만큼 일본의 침략 행위는 정치 성향과 지역을 불문하고 중국인들의 전면적인 반발을 샀다.

이렇듯 당시 일본은 점령지 내 소수의 집권 세력을 제외하면 무참히 학대했다. 사실 일본 자체의 영상물, 문학 등 관련 시대를 다룬 예술 작품에서 보이듯 일본인들 스스로 1930~40년대가 결코 서민들이 살기 행복했던 시대가 아니라는건 잘 알고 있다. 그것 마저도 부족해서 태평양 전쟁과 중일전쟁 말기 일본이 한창 발악할 때에는 해외에 거주 중인 일본인 자국민도 비국민으로 몰아세우며 무참히 학대했다. 무슨 그나마 진짜 일본 서민 경제는 혜택을 보면서 다른 나라, 민족들을 그리 수탈했으면 지금와서 하는 역사 왜곡이 머릿속으로나마 이해는 가는데, 막상 전시 일본 군부 독재는 자국민을 딱히 잘 챙겨준 것도 아니고, 오히려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절의 그나마 남아 있던 사회적 자유, 문화적 개방성, 정치적 다양성 마저 박살내면서 전 국민을 전쟁을 위한 도구로 만들었다.

대공황 위기에서 구세자를 자처하며 전체주의 권력을 세우고 국위선양이란 이름으로 침략 전쟁을 벌인 결과, 오히려 전쟁 이전보다 훨씬 더 작아진 일본과 독일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쇼와 시대 일본 군부와 나치 독일은 놀라울 만큼 서로 닮았다. 단순히 둘 다 추축국이였다는 사실을 넘어 이런 사실 관계의 구조, 대민 동원 방식, 정권의 논리 구조와 정당화 기제를 보면 단순히 우연이나 비슷한 환경의 산물이라 보기엔 깊은 연관성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전문 학계 내에서도 '일본에서 튀어나온 건 유럽의 그 파시즘과는 뭔가 다르다'라는 주장 못지않게 '표현과 형태는 문화적으로 달랐어도 일본도 파시스트 체제가 맞았다'라는 천황제 파시즘론도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다.

당장 전쟁 시기 일본에 협력했던 자들조차도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모두 "마지못해 협력했다, 일제는 아주 나쁜 놈들이다."라고 변명한다. 당장에 중국 견제를 위해 일본의 재무장을 지지하는 동남아 국가들도 일제 침략 자체는 절대로 옹호하지 않고 철저히 비판한다. 동남아시아의 국가들도 중국의 세력 팽창에 맞서 일본과의 군사협력이나 일본의 재무장은 지지하지만 정작 일본의 유엔 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한국의 경우, 반민특위가 열렸을 때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변명을 보면 하나같이 일제를 찬양하는 내용은 하나도 없고 "당대에는 다 친일했다"식의 물타기나 "광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는 실수로 일제하에서 민족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서 친일했다"는 식의 변명이 대부분이다. 특히 일제강점기 일본군이나 경찰, 관료 등을 맡았던 자들은 자신들의 친일행적을 "그 때의 경력을 살려서 민족을 위해 쓰겠다"고 말하며 선처를 호소하기도 했고, 실제로 친일파(2번 항목)의 일부는 반공이 애국이라고 주장하며 공산세력 토벌에 앞장서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한국의 친일파를 포함해 구 일제의 파시즘 부역자들을 구원한 것은 마오쩌둥 국공내전 승리로 인한 극동 공산권 블럭의 위협이었다. 자세한 것은 트루먼 독트린 역코스 정책 참고.

일본이 과거사를 희석하려는 의도로 아시아 나라들에 많은 경제적 지원을 해주었지만, 아시아 국가들은 역사적으로 일본도 다른 식민지 제국주의 국가와 똑같다고 확실히 인식한다. 이러한 연유로 아시아 국가들은 지금 당장 중국 견제를 위해 당장은 일본과 협력해도, 전적으로 일본을 지지하진 않는다.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 편을 보면 일본이 2000년대 들어서 유로화를 중심으로 한 유럽연합이나 달러화 강세에게 밀려 엔화의 국제 값어치가 사라지자, 엔화를 중심으로 아시아경제연합을 이루려다가 무시당했다고 그린 바 있다. 실제로 2000년대 초반에 동아시아 경제회의에서 일본 대표가 이런 제의를 하다가 한국, 중국은 물론 심지어 대만과 동남아 국가들조차도 일절 지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일본 극우들은 자국의 만행을 인정하지 않고 동남아 국가들의 반일감정이 중국과 한국의 영향으로 왜곡되었다고 주장한다.

7.2.1. 현재의 경향

최근 대두되는 일본의 우경화 문제는 중국의 영향권 팽창 시도에 대한 주요 각국의 공조를 방해한다. 다만 미국은 중국에 대한 일본의 역할은 더욱 강조하고 있기에, 군비 확장 등을 용인한다.

실제로 일본의 막장 행보 덕택에 동아시아의 대중국 포위망이 금이 가고 있고, 다른 아시아 국가들도 일단 중국 대처가 우선이니 일본에 일반적인 규탄만 한다고 쳐도, 이전처럼 협조하지 않으려고 한다. 멀리 갈 것 없이 한국만 해도 표면상으로는 일본과 협력 관계이지만 대중 협력을 제하면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인다. 게다가 한국은 일본의 우경화와 일본 제국과 관련된 과거사 문제만큼은 중국과 제한적으로나마 협력한다.

애초에 식민지 근대화론을 비롯한 일본의 역사왜곡은 역사적 사실보다는 죄의식의 희석이 주목적으로 삼기에, 서구 열강이 내세우던 주장에 끼워 맞추어졌다. 따라서 일본과 비슷한 역사적 오점을 지니는 나라들의 일각에도 저런 주장이 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 나라들에서 저런 주장은 비판받는다. 이렇듯 역사수정주의의 비판의식은 각자 구체적 형태가 달라도 세계적으로 공유한다.

사실 제국주의와 식민지 착취에 대한 옹호론은 일본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인도를 영국의 식민지배가 발전시켰다고 주장하는 연구가들도 있다. 예컨데 경제사학자 니얼 퍼거슨 교수는 저작 " 제국"에서 일본의 조선탄압 사례를 들며 영국은 그나마 관대한 제국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나마 일제의 군국주의, 전체주의, 2차 대전 당시의 만행과 그와 관련된 현 일본의 태도에 대해서는 서양의 지식인들도 크게 비판하지만 만주사변 이전 일제의 제국주의 행각에 대해서는 서양 주류 국가들도 비판점을 공유하기에 서양의 지식인들도 크게 관심을 가지고 일본을 비판하지는 않는다.
7.2.1.1. 베트남
베트남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를 일시적으로 뭉개고 쳐들어온 일본군을 환영했으나, 국부인 호치민 박헌영을 비롯한 한국인들을 만나 친하게 지내면서 일본 이야기를 들어왔기에 처음부터 일본도 프랑스 못지않은 제국주의 침략자라고 견제했다. 호치민 항목에서도 나오듯이 일부 베트남 독립 세력이 그래도 같은 아시아인이라고 일본을 좋게 바라보자, 호치민은 분노하면서 "일본의 지배를 받는 조선인들이 행복하다고 말하던가? 프랑스나 일본이나 차이가 없음을 알라!" 라면서 엄하게 꾸짖었다.

애초에 베트남은 반불 식민 투쟁 시기부터 중국, 소련 등지를 통해서 다른 아시아 각지의 혁명가들과 교류를 유지했고, 이 와중에는 많은 조선인 독립 운동가, 망명객들과도 비공식적인 친분이 있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식민지 초기부터 판 보이 쩌우가 조선인들의 처지와 자신들을 같이 비교하며 한탄하는 시를 쓰는 등, 독립 운동을 주도했던 초기의 유생들과 후기의 사회주의자들 모두 일제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뜻은 지금도 베트남 교과서에 남아 일본의 식민 지배를 비판한다. 무엇보다 베트남 국부인 호치민도 2차 세계대전 당시 항일 무장투쟁하면서 공산당 세력을 키웠다.[71]

베트남 전쟁을 생각하면 믿기 어렵겠지만 호치민도 태평양 전쟁당시 중국 국민당과 미국의 보급을 받으며 일본군 상대로 게릴라 전을 벌였다. 심지어는 공산국가를 건국한 직후에도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지원이 필요하다며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에게 개인적으로 편지를 보낸 적도 있다. 이때 경험한 실전경험은 훗날 월맹이 프랑스, 미국을 상대로 벌인 전쟁에서 요긴하게 쓰였다.

이렇게 강력하게 규탄한 까닭은 태평양 전쟁 시절 베트남을 점령한 일본은 조선에게 그러했듯 베트남에게도 일본군의 각종 민폐세트와 더불어서 당연히 쌀을 강제로 수탈해서였다. 그러다가 1945년 수탈과 더불어 대기근이 일어났다.

당시 북베트남 인구는 1,000만 정도였는데, 일본군의 쌀 공출과 홍수-가뭄 크리로 온 흉년, 미군 잠수함 크리로 온 남부 베트남 쌀 수송의 난항은 기록적인 대기근으로 돌아왔다. 이 대기근에서 굶주림으로 죽은 사람만 약 200여만 명에 달한다.

이런 상황에서 베트남인들은 일본에 대한 증오심이 넘쳤다. 때문에 호치민은 세력을 크게 늘렸고 일본 항복 직후 일시적이나마 베트남 전토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참고로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베트남인의 체험문학작품을 보면 쌀을 가져갈 때 "안 돼! 가져가지 마라!"라고 울부짖는 여인을 칼로 베어 죽이고 억지로 쌀을 공출하는 일본군의 모습이 보인다. 참으로 일본군 다운 행동일 따름이다.

당연히 베트남 교과서에서는 이 시절의 일본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베트민을 비롯한 반불 저항군이 일본군에게도 맞서 싸웠을 정도라 더 그렇다. 본격적인 미국과의 악연일 때도 이때는 일단 추락한 미국 조종사들을 구해주거나, OSS가 전술 교육, 물자 지원을 해 주는 등 협력 관계로 시작했다.

이 시절에 OSS가 베트남에 파견했던 미군 지원단, 군사 고문 등이 미국인들 치고 현지 문화에 빨리 적응하고, 베트민에게 좋은 인상을 주며 결국 1945년 8월 일제가 철수할 때 터진 베트남 8월 독립 혁명 때 명예 국빈으로 참석하는 등 좋은 무드를 형성했으나 냉전이 진행되고 미국의 정책이 바뀌면서 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졌다.

참고로 이 당시까지도 베트남은 공산국가였음에도 미국의 동맹국으로 남기를 원했는데 이유는 다름아닌 중국 견제 차원이었다. 당장 호치민이 제일 먼저 찾은 나라는 사회주의 동지인 중국이나 소련이 아닌 미국이었다.

여하튼 이 시절 일본의 착취와 약탈로 죽어간 베트남인들에 대하여 베트남 교과서나 언론, 책자로 분명하게 기재하고 일본을 비판하며 침략자, 학살자로서 분노한다. 이에 일본 극우들은 모른다는 변명과 부정만 하고 베트남 역사 교과서로 일본을 침략자로 비난하는게 한국과 중국 탓이라고 개드립을 하며 발광하지만 해당 나라 여론은 당연히 싸늘하다.
물론 후술하는 인도네시아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베트남의 경우 프랑스의 식민지로 고생한 세월이 훨씬 길며 일본군이 떠나간 자리에 프랑스군이 복귀하면서 치열한 독립 전쟁이 벌어졌기 때문에 제국주의 시대에 관해 일본보다는 프랑스에 대한 비판 목소리가 훨씬 높다.
7.2.1.2. 필리핀
필리핀은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에 맞서 싸우던 필리핀 군인들을 영웅시하며 지금도 기리고 존경하며 역사적으로 배운다. 일례로, 필리핀 독립 영웅이자 대통령인 라몬 막사이사이(1907~1957)만 해도 항일 저항군 지도자로 알아주는 영웅이다. 독재자인 마르코스도 비록 행적에 대한 왜곡이 심하지만 대통령 시절 항일 저항군에 들어가 싸운 사실을 자랑했다. 일본 극우들의 미국의 식민 지배를 해방시키고자 도우려던 일본군이라는 주장을 필리핀에서 했다간 맞아죽을수도 있다.

실제로 필리핀은 물질적으로도 태평양 전선의 핵심 중 하나로서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이 지역은 남방작전부터 필리핀 탈환전까지 엄청난 피가 흘러 2차 대전 때 태평양의 이탈리아 전선 소리 들으며 학계의 추산으로 70만~100만, 인구의 5~9%가 2차 대전으로 인한 파괴, 학살, 기아로 죽었고, 수도인 마닐라도 유서 깊은 스페인 식민 시절부터 보존되었던 구시가지가 파괴되었다. 특히 마닐라 대학살 당시 약 10만 명에 이르는 시민들이 무참하게 학살당했다.

필리핀은 당장 바탄 죽음의 행진 같은 전쟁범죄가 대거 발생한 나라인 만큼, 정치적 상황이 혼잡해서 대립이 극심한 나라임에도 항일 투쟁만큼은 공산당이나 신인민군 같은 좌익, 막사이사이 같은 우익, 모로 해방 전선 같은 소수 민족 분리주의 계열마저도 공유하는 역사이다.
7.2.1.3. 인도네시아
한편, 일본 극우들이 메르데카라는 극우 찬양 영화를 만들자 이 영화의 배경인 인도네시아도 반발하여 일본 대사관 앞에서 항의 시위가 벌어졌고 일제 불매 운동까지 벌였다. 인도네시아 교과서도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식민 지배를 일본이 해방시키려고 했다는 일본 극우의 주장은 무시하며 2차 대전 당시 일본도 침략국이었다고 언급한다.

사실 인도네시아는 일본군이 처음 들어오던 시절에는 정말로 일본군을 해방군으로 알고 대대적으로 환영하던 나라였다. 그동안 인도네시아를 지배하던 네덜란드 식민지군을 격파하고 동양인들을 위한 대동아 공영권을 실현할 것이라는 이상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당시 인도네시아의 지도자 수카르노는 일본군에게 인도네시아의 자원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고 인도네시아 청년들도 징병하여 일본군에 합세하도록 했다. 자바 섬에서 군정을 이끌던 16군 사령관 이마무라 히토시는 인도네시아인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호감을 얻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일본군의 인도네시아 통치가 철권통치로 전환되면서 인도네시아인들의 불만도 높아졌고 네덜란드가 차라리 나았다는 목소리까지 등장했다. 당시 일본과 인도네시아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마무라 히토시 문서를 참조할 것.

일본 극우들은 일부 일본군 패잔병이 인도네시아 독립군에 들어갔다는 점을 강조하지만, 그렇다고 과거 일본군이 저지른 해악을 덮을 수 있느냐는 비판이 존재한다.[72]

1946년에 무장해제를 기다리던 일본군 패잔병에게 무기를 인수하러 갔던 인도네시아 독립군을 학살한 사실도 있다. 렝꽁전투

일본 소설 비탄의 아리아에서는 인도네시아 독립에 일본군 잔당이 기여했다고 묘사된다. 일본군 패잔병들이 일부 도움이 된 건 사실이지만 주도했다고 볼 수는 없다. 인도네시아의 독립은 어디까지나 인도네시아인들이 스스로 주도한 것이다.

다만 전술한 베트남의 예시와 마찬가지로 인도네시아는 일본의 점령지로서 고생한 기간보다 네덜란드의 식민지로서 고생한 기간이 훨씬 길며 무엇보다도 2차 대전 패전으로 일본군이 떠나간 후 네덜란드군이 돌아와 식민지 독립전쟁을 벌인 바 있기 때문에 제국주의 시대 역사와 관련해서는 곁다리인 일본보다는 자국을 수 세기 동안 수탈하고 핍박한 네덜란드로 비판의 화살이 세게 향한다. 정작 그 네덜란드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나치 독일에게 침공당하기도 하였고 일본은 바로 그 나치 독일의 동맹국이기 때문이었다.
7.2.1.4. 말레이시아 라오스, 캄보디아
표절작이긴 하지만 일본은 없다에 따르면 지은이 전여옥이 본 일화로 말레이시아 외교부 인사가 일본에 관하여 2차 대전 당시 동남아를 쳐들어와 학살과 약탈을 벌였다면서, 차라리 영국이 조금은 낫다는 말까지 대놓고 하여 일본인들을 무안하게 만든 일이 있다.

일본에게 직접적인 침략을 겪었던 라오스 캄보디아에서 선생으로 봉사했던 한국 봉사단체 KOICA 교사들 증언에 따르면 라오스 세계사 교과서도 '일본은 2차 대전 침략국가로 아시아 여러 나라를 쳐들어가 학살을 벌였다'고 집필한다.
7.2.1.5. 싱가포르
싱가포르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이 주류를 이루는데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에 4년 동안 지배당하며 많은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이 일본군에 학살당했다.[73][74]

그리고 말레이계 싱가포르인 중국계 싱가포르인 간의 갈등을 일본 제국이 조장한 탓에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건국 초기 부터 큰 갈등을 겪었고 결국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했다.

리콴유 일본의 전쟁범죄의 피해자였고, 일본의 재무장에 대해 알코올 중독자에게 봉봉을 어떠한 제재 없이 주는 것이라고 혹평했을 정도이며, 일본군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싱가포르 중학교 세계사 교과서에선 당시 "일본군이 길을 지나는데 갑자기 당신의 배를 발로 찼다면 '아리가토 고자이마스'라고 고마워해야 한다. 일본도로 당신을 베지 않았으니까"라고 나올 정도다. 그리고 공항 주변의 학살 장면에 대해서도 열심히 기록했다.

물론 일본 극우와 넷 우익들은 싱가포르 중국의 꼭두각시 국가라고 비난하지만, 말레이계 싱가포르인 인도계 싱가포르인 역시 일본의 전쟁범죄를 옹호할 까닭은 없다. 단지 중국계 싱가포르인보다 덜 비판할 뿐이다.

사실 싱가포르 넷 우익의 생각과 달리 중국 비우호적 관계를 갖고 있고 이를 견제하기 위해 미국, 영국, 호주, 뉴질랜드, 대만 등에 대해 우호적인 스탠스를 보여주는 것이다.
7.2.1.6. 태국
일본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지는 않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의 강압적인 위협에 굴복해서 억지로 추축국에 가담한 태국 역시 일본에 대해 맹목적으로 좋은 감정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부에서는 태국도 아예 다른 동남아시아 나라들처럼 일제에 의한 피해국으로 보는 시선도 있다.

실제로 교전을 개시한 지 12시간도 안 되어 휴전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태국 역시 엄연히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일본군의 공격을 받은 국가이다. 그리고 이 때 휴전을 하고 일본의 요구대로 동맹을 맺은 덕에 겨우 주권국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게다가 이 때문에 종전 당시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국은 태국을 사실상 일본의 점령지로 여겼을 정도로 일본의 요구에 충실하게 부응했다.

게다가 당시 군사 독재자였던 쁠랙 피분송크람의 친일 행각이 겹쳐서 이 시기에 대한 태국인들의 감정은 다른 아시아인들의 그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게다가 나중에는 연합국에 돌아서서 일본에 대항한 역사도 있다.

물론, 태국 문서의 ' 일본과의 관계' 부분을 보면 알 수 있듯, 태국은 아시아에서 친일 국가이다. 하지만 태국도 평상시의 호의적인 감정과 관계없이 옛날의 흑역사를 부인하면 반발하며, 1991년 아키히토 천황이 태국을 방문했을 때도 푸미폰 아둔야뎃 태국 국왕에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전쟁범죄 행위에 대해 개인적으로 사과하기도 했다.
7.2.1.7. 인도
인도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일본은 찬드라 보스 같은 인도 독립 운동가를 열심히 띄워주지만 정작 인도 세계사 교과서에도 일본 제국은 침략국으로 묘사된다. 그 유명한 임팔 작전 역시 인도에서 벌어졌다. 위대한 영혼(마하트마)으로 일컬어지는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와 같이 국부로 존경받는 인도 초대 총리 자와할랄 네루(1889~1964)가 영국에 의해 투옥되었을 때 딸인 인디라 간디(1917~1984)에게 보낸 편지를 봐도 3.1 운동 유관순 열사를 극찬하며 조선을 억누르는 일본도 영국과 똑같은 제국주의 침략자라고 비판했다. 그런 자와할랄 네루가 초대 인도 총리였으니 인도 세계사 교과서에선 일본은 영국과 똑같은 침략자로 비판적으로 서술되어 있다.[75]

물론 인도의 입장에서는 영국의 식민지배가 너무 길고 광범위했던 반면 일제의 영향권에 거의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반영 감정에 초점이 맞추어진 편이다. 애초에 일본은 임팔 정도를 제외하면 인도 본토에 들어간 적조차 없으며 인도군과 싸운 기간이 기껏해야 3~4년인 반면 영국의 식민지배 기간은 세기 단위이며 포르투갈령 고아 등 일부 해안 지역을 제외한 인도 전 국토가 영국의 식민지였다.

일본의 극우들은 라다비노드 팔이 일본에 무조건 무죄를 주장한 것을 근거로 인도가 일본의 무고함을 알고 있는 나라로 인식한다. 하지만 라다비노드 팔은 인도 전체의 관점을 대변하지 않는다.[76]

게다가 일본은 영국군 소속으로 징병당한 수만여명 인도인 포로들을 학살했던 전과가 있다. 인도에서 그리 언급하지 않으나 가끔 이러한 학살로 죽은 유족들이 일본을 비난한다. 결과적으로 인도 또한 타국에 비해 경미했을 뿐 일본 전쟁범죄의 피해국이었다.
7.2.1.8. 대만
친일 국가로 알려진 대만도 일본의 식민 지배에는 비교적 호의적이지만, 우서 사건을 비롯한 2차 대전기 일본군의 만행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범람연맹의 경우 위안부 문제, 댜오위타이 영토 분쟁 등에 강하게 대응하는 반면, 대만인 정체성을 강조하고, 대만일치시기 때부터 대만에서 거주했으며 이후 국민당 독재 정권에 피해의 영향으로 친일 성향이 강한 범록연맹의 경우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7.2.1.9. 서아시아 및 중동
같은 아시아권이지만 유일하게 서아시아권인 중동 및 아랍권은 역사적으로 일본군의 침략을 받은 영향이 없기 때문에 한국과 중국, 동남아를 비롯한 극동권 동아시아 국가들과는 다르게 일본군에 대한 반감이나 경험이 전혀 없다. 일본군은 아시아 중에서도 한국, 중국과 동남아까지만 침공하였으며 인도와 아랍권에 속하는 서아시아까지는 침략을 하지 않았기에 이 곳으로 갈수록 일본군에 대한 악감정이 전혀 없거나 반일감정도 매우 덜하다. 대신 이 지역들은 과거 자신들을 식민지로 삼았던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적대감이 심하며 동아시아에 비해서 일찍 독립을 이루었던 국가들이 많기에 일본보다는 주로 영국이나 프랑스 등 서유럽 제국주의 열강들에 대한 적대감이 심하다.
7.2.1.10. 중앙 아시아
이 지역들의 경우도 서아시아와 마찬가지로 일본군에 대한 반감이 덜하며 침략을 당한 경험도 없다. 다만 이 지역들은 과거 소련의 연방 일원에 속해있었던 시절이라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1941년 나치 독일이 소련 침공을 하게 된 계기로 소련이 연합국 자격으로 대일 선전포고를 함으로서 소련의 자격하에 일본과 적대관계를 맺게 되었다.
7.2.1.11. 오세아니아
오세아니아에서 가장 크고 강대국인 호주도 1942년에 일본에게 당한 다윈 공습(Bombing of Darwin) 같은 여러 침략을 받아서 마찬가지로 적극적으로 2차 대전 동남아 전선에 연합군이자 영연방의 일원으로 파병하여 열심히 싸우다보니 일본의 이런 피해자 행세에 대하여 대단히 불쾌하게 반응한다. 일본의 전쟁범죄 문서에는 스파이 혐의로 붙잡힌 뒤 참수당한 호주군 군인 레나드 시플릿 중사의 처형 장면이 있다.

오세아니아에서 호주에 이어 큰 나라인 파푸아뉴기니만 해도 90년대 일본 다큐멘터리 영화 <기미가요의 포트 모르즈비>를 보면 당시 일본의 지배를 받아서 기미가요를 부를 줄 아는 현지인 노인들이 등장했다. 노래를 잘 안다고 하자 노인이 노려보듯이 쳐다보며 하는 대사가 살벌한데 "안 외우면 죽어라 얻어맞았고 여러 번에 걸쳐 못 부르면 죽여버린게 당신들 일본인이거든."[77]

일본에 지배당한 다른 오세아니아 작은 섬나라들도 마찬가지이다. 처음에는 ' 백인 양놈보다 저놈들이 더 낫겠지' 하면서 일본군을 환영했으나 오히려 일제의 악행은 더욱 심했다. 끝내 분개한 원주민들은 그나마 나은 미군, 영국군, 호주군, 뉴질랜드군과 같은 백인 군대을 지원했다.

권주혁이 쓴 책자인 핸더슨 비행장에 따르면 일본인들이 세운 일본인 사망자 추모비에 지들이 억울하게 피해자로 학살당했다는 투로 새기자 현지인들이 우리야말로 피해자다라면서 격분하여 추모비에 테러를 감행했다. 이후 그냥 전쟁에서 죽은 피해자를 순수하게 추모한다는 뜻으로 세우고 나서야 겨우 수습할 수 있었다.

7.3. 대중매체

아니메 모에로 대표되는 오타쿠 문화는 21세기 이후 일본의 피해자 행세를 주입시키고, 관력 역사를 미화하는 데 효과적인 도구로 이용된다. 아직 제대로 된 역사관이 발달하지 않은 미성년자 연령대를 시각적, 청각적으로 자연스레 교육하여 자신들의 신념을 주입할 수 있으며, 자칫 불리한 묘사도 연출이나 '창작물 상의 허용' 등으로 빠져나갈 구석을 만들기 매우 용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위는 일본의 민간기업은 물론이고 일본 자위대 등 국가기관에서도 시행된다.

7.3.1. 일본이 피해자라는 입장의 작품들

친일사상과 제국주의 합리화론을 강조해서 다룬 작품들의 목록. 후술하는 맨발의 겐과 같이 한때 이러한 오해를 샀던 작품들은 예시화하지 말 것. 특히 아베 신조 정권 들어서 일본의 급속한 우경화의 촉진과 더불어 일본 서브컬쳐계의 자국 중심화와 찬양물이 급속히 늘어났다. 일본 내의 인기 애니나 게임의 상당수가 우익 논란에 휩싸였는데 이전 90~2000년대에 제작된 창작물들에 비해 그 빈도가 높다. 다만 2020년대 이후 중국의 일본 서브컬쳐계에 자본을 대규모로 들여놓은 후 중국 한정으로 이런 묘사에 신중해지고 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물론 한국 대상으로는 어림반푼어치도 없다. 그나마 여성향 위주의 경우는 일본 한류 팬층이 여성이 주류다보니 남성향쪽보단 다소 진보적인 시각도 있다.
7.3.1.1. 만화
  • 고마니즘 선언: 고바야시 요시노리의 1992년작. 90년대 이후 일본의 젊은 우익들을 결집시킨 만화로 유명하다.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 작품은 아예 대놓고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를 이야기한다.
  • 나츠코의 술: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일본의 국운을 살리고 대동아 공영권을 위한 바른 전쟁이며 나라에 충성한다고 묘사한다. 양조장을 하던 사람들도 피해를 본다고 나오지만 정부나 전쟁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그냥 피상적인 형태의 피해만 그리고 있고 국외의 전쟁 피해자에 대해선 일언반구의 말이 없다.
  • 더 파이팅: 압천 관장의 회상씬에서 미국을 악의 집단처럼 묘사하고 본인들은 정당한 전쟁을 했는데 졌기 때문에 전쟁이 끝나고 고생하는 것처럼 묘사하였다. 한 장면에서는 캐릭터가 제로센을 찬양하는 대사가 나온다.
  • 니혼쨩: 일본이 한국과 중국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는 묘사가 나온다.
  • 불꽃의 눈: 오시키리 렌스케의 만화. 숄골이라는 가상 적국에게 점령당한 일본인이 독립투쟁을 하는 모습을 그린 만화인데, 공습 장면이나 숄골 통치 하의 상황을 그린 걸 보면 영락없이 도쿄 대공습 GHQ 통치 하의 일본. 이걸 과장되게 일본이 피해자인양 묘사한다.
  • 안녕 절망선생: 일본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사과를 강요받는 피해자라는 입장을 강력히 견지하고 있다. 아예 그 입장을 형상화한 카가 아이가 메인 캐릭터에 들어가 있을 정도. 한술 더 떠서 단지 자기들이 피해자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적반하장으로 일본의 침략에 보상을 요구한 나라들을 '피해자 행세하는 나라'라고 매도했다. 이를 통해 작가인 쿠메타 코지가 뼛속까지 극우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용(만화): 굉장히 노골적인 극우 만화답게, 초반부터 일본의 중국 침략을 미화하다가 소련군이 만주로 진공하는 결말부에서는 포악한 소련군에 짓밟힐 위기에 처한 일본 민중을 구해내는 주인공의 영웅적인 활약상이 그려진다. 작가의 미화 솜씨가 워낙 뛰어나서 일본 만화 중에서는 드문 개념작이라는 다소 어이없는 평을 받는다.
  • 블러디 먼데이: 고딩들이 성인들도 못하는 것을 단번에 해내고 테러리스트들과 무쌍을 찍는 것은 일본 만화의 고질적인 클리세니 넘어가더라도, 미국은 사소한 이유로 전쟁을 벌이며 이 나라(일본)에도 핵을 두번이나 날린 적이 있다고 미국의 원폭 투하를 비난하는 내용이 나온다.
  • 앙골모아 ~원구전투기~: 작품 내용은 몽골의 일본원정으로 인해 침공을 당한 대마도 이야기를 다룬다. 이 시절 대마도 사람들은 그저 고려와 일본 사이에서 평화롭게 교역을 하다가, 몽골과 고려의 침략을 받아 참혹하게 희생당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실상을 들여다보면 이들의 생활이 마냥 평화롭진 않았다. 막상 고려사를 보면 왜구가 침략했거나, 침공 이전에 고려 정부가 일본에 왜구 단속 좀 하라 항의 사신을 보냈다는 내용이 나온다. 1263년에는 해적질을 한 대마도 왜구를 징벌했다는 내용도 있다. 뿐만 아니라 주 가해자인 몽골군이 아니라 고려군의 학살을 상당히 부각했다. 물론 중세 일본도 분명 몽골 침략의 피해자였기에 몽골군에 대한 악마화에는 별 문제가 없지만 고려에 대한 묘사는 상당한 왜곡으로 점철되어 있다.
7.3.1.2. 애니메이션
  • 이 세상의 한구석에/드라마: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힘든 생활을 한 주인공을 부각한다. 역사의 과도기 속에 희생된 개인의 아픔에 중점을 둔 이야기이다. 강조했듯, 드라마판과 달리 원작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당시 일본 국민들 역시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 폭력에 가담하고 동조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 콕피트 3부작: 은하철도 999의 원작자 마츠모토 레이지의 작품. 전반적으로 주축군 참전 군인들도 어쩔 수 없이 동참했고, 어려운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서 싸웠다는 인식과 파시즘의 피해자들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남겼다. 특히 2부에서 자살제트기 큐슈 오카를 수송하는 폭격기의 엔진의 상태가 좋지 않자 파일럿이 여자 중 고등학생들이 숟가락, 솥단지 녹여서 만든 부품으로 만들어서 어쩔 수 없다고 농담조로 이야기하는 장면에서는 완전히 피해자 코스프레. 단, 마츠모토 레이지의 경우는 다른 작품에서 보여주는 사상이 콕피트와는 다른 경우가 많고 아예 정반대의 사상을 보여주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이래저래 논란이 많다. 이 작품은 원래는 마츠모토 레이지가 만든 전쟁 만화 시리즈 중 명작 에피소드로 불리는 몇 개를 뽑아서 만든 것이라 문제가 부각된 점이 있는데 이 시리즈는 전체적으로 일본제국을 더 강도높게 깐다. 이 경우는 일본도 나쁘고 미국도 나쁘다는 양비론이다.
  • 마루코는 아홉살: 애니메이션에서 태평양 전쟁과 관련한 피해자적 메시지를 부각하는 에피소드가 방영되었다.
7.3.1.3. 영화
  •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8월의 광시곡" (八月の狂詩曲, Rhapsody in August)이 일본을 원폭 피해자로 묘사했다. 감독 문서 참고.
  • 승자는 없다 / None But the Brave (1965) 일본군도 전쟁에서 피해자일 뿐이라는 시각이 꽤 보이는데 원작부터가 일본 소설이다. 일본 토호가 사실 제작하여 일본영화에 미국이 참여한 정도. 이 영화 감독, 제작과 주연이 바로 가수로 유명한 프랭크 시나트라다! 일단 제작진은 음악이 바로 당시 듣보잡 시절, 존 윌리엄스로 미국 제작진이나 배우로 많이 홍보했지만 일본 영화를 미국이 도운 합작영화라 그런지 일본군 비중도 많고 일본군이 가련하게 나오는 묘사가 많다. 일본군이 억지로 군대로 끌려나왔다느니 다 같이 패자이고 일본군도 나쁜게 아니라는 미화도 많다. 하지만, 2차 대전이 끝나고 겨우 20년이 지날 뿐인 당시였으니 40대 나이로 참전군인들이 무더기로 살아남아 태평양 전쟁 가혹한 전선과 일본군 막장성을 실감했는데 이게 무슨 뻘짓이냐고 분노했고 당연히 미국에서도 개봉당시 싸늘한 평과 흥행에서 쫄딱 망해 시나트라의 처음이자 마지막 감독 영화가 되어버렸다. 가수와 배우로 성공했으나 영화감독은 실패했다. 그래도 블루레이도 나왔지만 그다지 재평가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딱 1번 1984년 10월 13일, 토요명화에서 더빙 방영된 바 있다고 알려졌으나 실상은 '고도의 영웅들'이란 제목으로 MBC에서 더빙으로 1980년 10월 5일 일요영화라고 밤에 방영했으며 1981년 9월 5일 일요일 오후 2시에 재방영한 바 있다. 덤으로 승자는 없다도 1985년 6월 8일 KBS3( EBS)에서 일요특선으로 더빙판을 재방영했다.
  • 이터널스에서 각본가가 히로시마 원폭 투하에 대해서 "일본계 미국인의 한 사람이고 가족은 일본에 사는 사람으로서 이것은 내 삶과 개인적인 역사에 있어서 큰 사건이다."라는 발언 #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7.3.1.4. 소설
  • 꽃피는 에리얼포스: 작중에 나오는 전쟁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아닌 가상의 전쟁이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의 군국주의와 인명경시 사상을 단적으로 대변하는 천황 국체 이론, 자살 특공, 야스쿠니 등을 대놓고 미화하고 있다. 게다가 작중에서 저런 짓들을 태연히 벌이는 ' 황국'은 '불의의 침공을 받은 피해자'로, 적국인 ' 민국'은 ' 의장국'의 사주를 받아 '선전포고 없이 침공을 개시한 비열한 가해자'로 묘사하는 것을 볼 때 빼도 박도 못 할 자위용 피해자 행세. 내용상으로 볼 때 이것은 진주만 공습을 뒤집어서 왜곡한 걸로 보인다. 이 불쏘시개와 작가의 과거 인터넷 찌질이 행각까지 발각되면서 작가의 한국에서 이미지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 형사의 아이: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작중 주요 등장인물의 회상 속에서 도쿄 대공습이 등장하는데, 공습에 휘말려 희생된 시민들의 참혹한 모습을 묘사하면서도 정작 전쟁의 원인에 대해선 그 어떠한 언급도 없다. 만약 세계사에 무지한 독자가 본다면 일본인들이 무고하게 희생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7.3.1.5. 게임
  • 대제국: 여기 나오는 일본 제국은 현실의 일본 제국과는 이름만 같고 세부사항은 180도 다른 정의의 세력으로 나온다. 현실의 일본이 했던 온갖 잔악행위를 미화하는 악질적인 내용이 일품이다. 이 게임 내에서 휘장을 들고 설치는 CG가 있는데, 숫제 대일본제국을 뛰어넘어 초 일본제국이라 쓴 휘장을 들고 국호를 바꾼다고 자화자찬하는 CG도 있다. 게다가 이 게임에서는 어이없게도 이토 히로부미가 너무 착해서 테러리스트들에게 위협받았다는 어처구니없는 역사왜곡을 자행하는데 이토는 조선 침략의 선봉장으로 선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 슈퍼로봇대전 OG1, 슈퍼로봇대전 OG2: 하가네 부대가 DC의 본거지를 기습하는 작전에서 진주만 공습 당시의 구호인 도라도라도라가 나오거나 2차 대전기 일본이 활용한 자살병기인 오카에서 이름을 딴 캐릭터가 있으며, 군국주의 성향을 가진 캐릭터들을 극중에서 상당히 미화한 장면이 있다. 단 리메이크작인 OGS에선 이런 요소를 대부분 수정했고 이후 OG 시리즈에선 그런 요소가 크게 부각되지는 않는다. 더불어 OGS가 나오면서 문제점이 존재했던 GBA판 OG 프로젝트는 종결되었기에 OG 시리즈는 이 논란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 OGS에서 캐릭터가 크게 바뀐 인물과 새로 등장한 도 있고, 이들이 후속작에서 가진 비중이 크기에 종래의 OG1, OG2를 현재의 OG 시리즈 스토리 라인과 연결하는 건 무리이다.

7.3.2. 일본이 피해자라는 입장이라고 오해받은 작품

  • 개구리 중사 케로로: 이런 주장 때문에 투니버스에 방영 중지를 요청하는 청원이 일어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작품에서 묘사된 여러 장면들을 보듯이 원작자는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입장에 가깝다. 작품 자체도 침략자 입장인 케로로 소대의 허당스럽고 용두사미스러운 면모와 케론별의 나사빠진 작태가 구 일본군을 비꼬는 느낌까지 준다. 대장이라는 놈은 건담에 빠져 침략에 뒷전이고 심지어 건담 프라모델을 사기위해 방산비리까지 저지르는데다, 히나타 나츠미에게 가정부로 부려먹히며, 기동보병은 냉혹한 군인 정신을 강조하면서 정작 자신은 사랑에 헬렐레해서 다된 죽에 코 빠뜨리는 일도 기꺼이 하고 작전통신참모는 아예 관심이 없으며 육탄돌격병도 작전통신참모보단 낫지만 중사에 대한 사랑 외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데다 그 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에게서 보급을 취하고 있기도 하고[78] 어쌔신이자 병장은 아예 무력을 통한 자체에 반대하는 등 침략자라 하기에는 너무나도 어이없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물론 애니메이션은 살짝 우익미화물의 성향을 조금 보였지만, 최근에는 애니제작팀도 원작자의 의도를 제대로 해석한 듯한 모습으로 가고 있다.
  • 경계선상의 호라이즌: 현실과는 다르게 극동인(주인공 그룹)은 옛날에 2차 대전을 능가하는 사고를 쳐버려서 자신이 잘못한 걸 알고 있고 200여 년 동안 보상을 하며 비교적 온건한 정책을 피고 있어서 정당성을 부여하긴 하지만 현실(일본)은 잘못도 인정 않고 보상은 모르쇠 일관이니 말 그대로 현실은 소설보다 더 시궁창인 거다. 또한 주인공의 아버지는 조선을 모티브로 한 사토미 출신이다. 즉, 주인공인 아오이 토리는 출신성분으로 볼 때 재일교포에 가까운데 동시에 상징하는 것은 도쿠가와 가문이다.
  • 고지라 마이너스 원: 영화의 줄거리 초반부 내용으로 인해 현지 개봉 초창기에 한국 국내에서 논쟁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 길티 크라운: 방영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당시엔 일본이 피해자라는 설정(일본이 GHQ의 통치를 받고 있다.)과 다릴 얀이 일본인을 죽이는 모습이 나오는 등 논란이 많았다. 그러나 이 애니를 제대로 보고 생각해본다면, GHQ가 일본을 통치하는 것은 일본에서 일어난 아포칼립스 바이러스 팬데믹으로 인해 국가가 제 기능을 못하고, 전 세계에게까지 피해를 줄 가능성이 있어서 그걸 막기 위한 것이지 타국에 공격을 당해 지배받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후반에는 GHQ의 산하소속이었던 Antibodies가 쿠데타를 일으킨 뒤에 세계를 도태시키려 하고, UN군과 주인공 일행이 그들을 막으려는 구조로 간다. Antibodies는 GHQ의 산하소속이긴 하지만, 지휘 계통부터 장비까지 독자적이고 총책임자부터 군인들까지 거의 다 일본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다릴 얀은 물론 아버지의 불륜과 무관심으로 인해 쌓였던 분노가 폭발해서이지만 스스로 자기의 아버지도 죽인 놈이며, 초반엔 학살을 정말 좋아했던 캐릭터 자체가 사이코패스이다. 다릴 얀이 시노미야 아야세의 엔드레이브를 찌르며 한 말에서 알 수 있다.
  • 낙제 기사의 영웅담: 작중 설정이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이겼으며, 그 외에 설정들이 극우스러운 느낌을 주자 한국에서는 굉장히 반발감을 일으키며 논란이 됐는데, 오히려 일본 정부가 제국주의의 부활을 획책하는 악역으로 나온다. 거기에는 주인공 쿠로가네 잇키의 할아버지도 포함. 그리고 주인공 일행은 이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으로 가면서 극우 논란은 일단 잠잠해졌다. 허나 작가의 후속작이 제대로 우익 요소가 가득하면서 이 작품에 대한 시선도 다시금 변화가 생겼다.
  • 남자들의 야마토 : 제목에서도 느껴지듯, 우익단체들이 영화제작 비용의 일부를 책임졌고,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는 이 영화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하지만 오히려 야마토의 비극적 운명을 통해, 군국주의에서 나타난 군부의 병크와 합리적 사고의 실종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희생을 가져오는지 잘 보여주기도 한다. 야마토가 마지막 출항하기 직전 밤에 승선한 군인들이 말다툼 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 쪽은 왜 우리가 개죽음을 당해야 하는지 울분을 토하고 있고, 다른 한 편에서는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당연하다고 외친다. 두 진영이 충돌하자마자, 부함장이 나타나 이들을 제지하며 말한다.

    "일본은 정신주의만을 강조하여 진보와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무시해온 결과 이렇게 비참한 현실을 맞이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어리석은 우리의 현실을 온 국민들에게 깨우치기 위해서는 한번 패배 당해 봐야한다. 그 대가로 우리가 대신 죽어가는 것이니 우리의 죽음은 결코 개죽음이 아니다."

    사실 이런 장면이 없었다면 이 영화는 무개념 군국주의 영화로 치부될 수도 있었다. 이 영화의 캐릭터 설정상 개념인으로 보이는 부함장은 그 외에도 사무라이 정신에 대해 정확한 설명을 요청하는 수병에게 전쟁의 목적에 따라 사무라이의 판단 또한 달라져야 함을 가르치거나 오키나와 특공을 앞두고 돌아올 수 없음을 알아챈 수병들에게 가족과 연인에게 들리지는 않겠지만 작별인사를 할 수 있도록 실컷 소리치고 울부짖게 허락한다.

    그 외에도 극우 캐릭터로 설정된 일부 간부역할을 맡은 주연들이 일제 특유의 똥군기를 비판하면서 수병 대신 구타를 당하고 항명하거나 또는 죽을 자리임이 뻔한 곳으로 출항하라는 명령에 대해 장교회의에서 최종 명령권자는 왜 야마토에 탑승하지 않느냐고 따지는 장면, 마지막 출항직전에 심란해하는 수병들에게 간식을 만들어 나누어주면서 비상이함 훈련내용을 주지시키는 장면, 야마토가 최후를 맞이한 순간 이성을 잃고 퇴함명령을 거부하며 결사항전을 외치는 어린 수병에게 너는 살아남아 해야할 일이 있다고 함 밖으로 내던지는 장면들은 영화의 제목에서 느껴지는 선입견과는 달리 당시 1억 옥쇄를 외치던 군부의 무책임함에 대한 비판과 종전 이후를 생각하고 전후 복구인력을 최대한 살려내고자 애쓰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동일한 인물들이 보여주는 인간의 이중성을 통해 최소한의 자아비판은 실행한 셈이다.

    그래도 반자이 돌격같은 주연들의 결말을 통해 이를 보고 희열을 느낄만한 우익들의 비위도 적당히 맞추는 설정이 포함되어 있다. 일본 내부에 과거사를 솔직히 살펴보려는 지성인들과 전쟁수행 과정에서 발생한 온갖 문제들을 맹목적인 충성으로 합리화하려는 우익들의 의도가 모두 드러나는 형태로 보여진다.
  • 맨발의 겐: 전후 일본의 피해를 다뤄서 오해를 빚었는데, 이 책은 애초 기획부터가 반전, 반군국주의, 반천황제, 반핵을 다룬 작품이다.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주인공이 원폭 피해에 대한 사과를 받기 위해 일왕을 찾아가겠다고 하는 등 오히려 일본 극우들에게는 반일 작품이라며 40년 넘게 비난받는다. 미국에 대한 비판이 있기는 하나 이는 점령 과정에서 GHQ 레드 퍼지라든가 원폭 피해자들에 대한 보도 통제, 표본수집 등 다분히 비인간적이고 비인도적인 사건을 다룬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피해자 행세와는 질적으로 다른 반 제국주의적 작품이다! 실제 내용을 보면 맨발의 겐은 원폭 피해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음에도 그 책임 소재를 전범인 조국에 돌린다. 심지어 10권에서는 '원자탄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일본은 1억 총옥쇄로 달려가 멸망했을 것'이라는 원폭 피해자가 하기 힘든 대사도 등장한다.

    이 작품은 원폭 피해자인 작가 자신을 모티브로 삼은 작품이다. 그런데 주인공도 그렇고 주인공의 아버지도 애초부터 "평화를 이야기해야지 미국하고 싸우려면 못 쓴다"라거나 " 비국민, 비국민 하면서 전쟁에 젊은이들을 내몰고 있는 정신 나간 것들"을 성토하다가 순사에게 붙잡혀서 치도곤을 당하는 등 전전 일본의 제국주의/군국주의에 상당히 비판적인 작품이다. 이 주인공의 아버지는 작가의 아버지가 모티브로 작가의 아버지는 실제로 히로시마에서 원폭으로 사망했다. 1970년대 작품임에도 한국인에 대한 차별을 반대하는 등 여러 모로 뜻깊은 메시지가 담긴 작품이며 주인공의 가장 큰 조력자로 등장하는 사람은 한국인이다.
  • 바람이 분다: 개봉 당시 한국에선 미야자키 하야오한테 실망을 드러내며 비난하는 여론이 불거진 바 있으나, 직접적으로 일제의 행위들을 미화하는 장면은 연출되지 않으며 감독인 미야자키 하야오는 아베 정권의 행각에 대해 여러 차례 비판하는 의사를 인터뷰에서 밝힌 적도 있다. 작중에 나온 전투 장면과 주조역들의 일부 발언에서 나오는 메시지를 포함해, 포스터에선 제로센이 처참하게 부서져 있는 버전도 존재하는데 보통 일본의 피해자 의식을 강조하는 작품에서 제로센 같은 전투병기들이 미화되는 것을 비교해봤을 때, 이 작품이 일제에 대해 옹호적인 메시지가 담겨있다고 판단할 수 없는 대표적인 이유로도 꼽힌다.
  • 은혼: 원작의 캐릭터인 쇼요 선생의 모티브를 두고 이런 오해가 발생했다. 하지만 일본 내에선 쇼요 선생에 대한 묘사로 인해 논란이 빚어졌다.
  • 제도성배기담 - 2차 대전을 묘사하는데다 히틀러에다 일본 제국 병사들까지 등장하고, 어쨌거나 '일단'은 일본군의 편에 서는 서번트가 존재하는데다 오다 노부나가가 나치 군복을 멋있다는 이유로 입고 있어[79] 연재 초창기와 페이트 그랜드 오더와 콜라보레이션을 진행할때 한국 한정으로 잠시 극우 논란이 일었다. 그러나 정작 히틀러를 왜 가슴이 출렁이는 여자 서번트가 안 나오냐고 불평하는 변태로 묘사하고 일본군은 무능한 전쟁범들로 풍자하는데다 결정적으로 코믹스판에서는 전쟁을 그만두길 원하는 눈치의 소년을 비국민이라며 매도하며 억압하는 일본군 상관들이 등장하며 극우 이미지는 사라졌다. 게다가 일본군의 얼굴이 양심 있는 소수나 그나마 결말에선 나름대로 갱생한 듯한 주연급의 인물이 아닌 이상 죄다 공포스럽기 짝이 없는 불쾌한 골짜기 수준으로 묘사된다.
  • 코드 기어스: 반역의 를르슈 시리즈: 프로듀서인 다케다 세이지의 일부 행보로 우익적인 의사가 녹아들 수 있다는 우려를 낳았는데, 이 사람과의 인터뷰로 미루어 보아 확실히 극단적인 피해자 행세를 하는 작품은 아니다. 인터뷰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기획의 방향성에 대해서 타케다씨는 어떤 발언을 합니까.

    : 강대국의 지배에 대해서 테러를 그려도 좋지 않을까 라고 말합니다. 슈퍼파워가 한 나라뿐인 세계에서 일본이 유린당한다면 약자는 무엇을 생각하는지를 그리는 것이 알기 쉽지 않겠냐고.

    - 결과적으로, 신성 브리타니아 제국이 일본을 점령해서 일본은 에어리어 11, 일본인은 일레븐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세계관이 됩니다만, 그에 대한 인상은?

    : 제가 대학에서 메이지부터 전후에 걸쳐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전공했습니다만, 브리타니아 제국이 일본에 대해서 한 것은, 한편으로 일본이 한반도에 대해서 한 것과 공통하는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야스쿠니 문제나 개헌논의가 적잖이 다루어지는 지금, 젊은이들이 코드 기어스 반역의 를르슈를 보고, 동시에 일본이 해 온 것을 상상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닐까 라고. 물론 엔터테인먼트 작품이니까 캐릭터의 드라마를 즐기고, 그 중에서 조금이라도 깊은 테마를 알아 차려주면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다케다의 말에 의하면 애니메이션을 시청하면서 일본인은 자국이 한반도에 저질렀던 만행을 다시 한 번 상기하라는 역지사지의 의미이다. 애초에 다케다가 우익이라는 거부터가 출처 불명의 루머이다. 다케다는 일본 우익들에게 반일 매국노라고 공격받는 사람이다. 그리고 코드 기아스 내부에서는 명백히 일본이 군국주의-제국주의적 탄압을 당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것은 잘못되었다고 강조하기 때문에, 이게 피해자 행세라면 일본 스스로 자기부정을 하는 셈이 된다. 피해자 행세를 하는 매체들은 군국주의나 제국주의적인 면모는 숨기려고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프레이야를 도쿄 조계에 떨어뜨리는 장면이 일본이 핵을 맞은 것에 대한 피해자 행세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깨뜨리고, 프레이야를 발사한 장본인이 일본인에 그걸로 죽은 3,500만 민간인도 몽땅 브리타니아인이라는 언급이 분명하게 나오면서 피해자 코스프레를 넘어 가해자 과장 코스프레라는 평가까지 받았다.

7.3.3. 일본을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로 묘사한 작품

주로 전후 세대나 일본에서 진보주의 운동이 활발할 시기에 제작된 경우가 많다. 지금도 간간히 나오지만 위의 사례에 비하면 마이너로 전락했다.
7.3.3.1. 소설
  • 태양의 아이: 하이타니 겐지로의 작품으로 오키나와 학살을 처절하게 묘사했다. 107~115쪽과 364~368쪽에 있는 묘사가 특히 처절하다. 참고로 작가는 이 소설을 지은 덕택에 혐한에게 죽을 뻔 한 적도 몇 번 있었다.
  • 토끼의 눈(兎の眼): 한국에선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역시 하이타니 겐지로의 작품으로 위의 개념작을 초월한 최고의 명작. 전체 줄거리는 파리연구를 좋아하는 아이와 그 친구들, 그리고 쓰레기 소각장에서 일하는 빈민들의 일상을 그린 소설이다. 작중 주인공인 데쓰조의 할아버지와 데쓰조의 담임 선생님이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 할아버지가 과거를 회상하는데, 일제가 자신의 친구였던 조선인 용생을 어떻게 고문하는지 상세하게 묘사한다. 다음은 이 책 내용 중 일부.
"나는 그 회사의 측량과라는 곳에 배치되었어요. (중략) 나중에는 아예 조선 농민들을 속이는 일까지 도맡아서 했지요. 나는 그런 속임수를 알아차리자 오히려 그 회사에 들어가길 잘했다 싶었습니다."
(중략)
"저는 조선 사람 편에 서서, 몰수당하는 땅을 조금이라도 줄여주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건 안이한 생각이었죠. 3달 뒤 저는 헌병대로 끌려갔습니다. (중략) 헌병대의 고문은 경찰의 고문보다 몇 백배는 심했어요. (중략) 저는 끔찍할 뿐만 아니라 수치스런 고문도 받았죠. 몸보다 마음이 먼저 갈가리 찢기고 말았지요."
바쿠 할아버지는 그때의 고통이 되살아나는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고다니 선생님은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인간은 너무나 나약한 존재예요. 저는 사흘 만에 낱낱이 불어 버렸죠, 이틀쯤 뒤에 헌병이 저한테 그 결과를 보여 주었어요. 글쎄, 한 12~13채쯤 되었을까요? 집은 흔적도 없이 타 버리고, 시커멓게 탄 시체가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더군요. 작은 시체도 있었으니까, 여자와 아이들까지 가차 없이 죽여 버린 모양이었어요. 아까 인간이란 쉽게 악마가 될 수 있다고 했는데, 그건 제 자신을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그 시체를 보고 큰일을 저질렀다는 생각보다는 이젠 살았구나, 하고 기쁨이 솟구치더란 말입니다. 난 용생이한테 어떻게 용서를 빌어야 할까요. 용생이 어머님한테 뭐라고 사죄해야 할까요."
바쿠 할아버지는 눈물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인간은 한번 못쓰게 되면 걷잡을 수 없이 나락으로 떨어지지요. 입 다물고 있으면 누가 알겠냐 싶더군요. 그 뒤로는 흔히들 그렇듯이 술과 여자에 빠져 버렸습니다. 이 배, 저 배를 타고 다니며 유랑자가 되고 말았지요." 143p
(중략)
"과거에 대한 죗값이 그렇게 돌아왔다고 생각하실 테지만, 선생님, 그건 달라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용생이나 용생이 어머님, 그리고 조선 사람들에게 너무 죄송스러워요. 원한으로 따진다면, 저는 조선 사람의 원한을 사서 온몸이 구멍투성이가 되었을 겁니다. 용생이 어머님은 내 죄를 용서하신 대신 아들 몫까지 살아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여기서 살아나지 못한다면 김용생을 3번씩이나 배신하는 꼴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이를 악물었답니다."
"선생님을 울려서 죄송합니다. 술내기를 하쟀다가 그만, 죄송합니다…"
고다니 선생님은 “아뇨.” 하고 말했다.
"할아버지 얼굴이 고우신 까닭을 알았어요. 눈매가 곱디고운 이유도 알았고요."
바쿠 할아버지는 벽장에서 커다란 꾸러미를 꺼내 왔다. 종이로 꼼꼼하게 싼 꾸러미였다. 속에서 첼로가 나왔다.
그러면서 바쿠 할아버지는 첼로를 사랑스럽게 어루만졌다.
"할아버진 지금도 첼로를 켜시나요?"
"아니오. 켜지 않습니다. 이제 곧 용생이하고 같이 켜야지요. 그때까지 이 첼로를 잘 보관해 둬야겠지요?"
고다니 선생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145p
7.3.3.2. 만화
  • 가스 이니스[81]의 배틀필드-'빌리에게'(Battlefields: Dear Billy): 주인공이 일본군 위안부 출신의 영국인 여성으로 일본군들의 학살에서 살아남아 군병원에서 낮에는 간호사로 활동하면서 밤에는 병원에 있는 일본군 포로들을 죽이는 주인공을 둘러싼 주변인물의 이야기와 혼란스런 세계정세 사이에서 고통받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특히 전후 연합군이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막기위해 일본을 지원해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진심으로 분노하며, 국제관계 속에서 뒷전으로 보내진 피해자들의 고통을 상당히 리얼하게 묘사했다. 리뷰글[82]
  • 고바야시 모토후미 Cat Shit One: 미국 측에 전향하는 베트콩 간부의 회상에서 일본군도 프랑스나 다름없는 침략자로 설명한다지만 일본군에 의한 전쟁범죄는 묘사된 적이 없고 이것만 보면 일본군의 피해자 행세를 부정한 건지 그냥 물타기를 해서 일본군의 전쟁범죄 책임을 축소한 건지 불분명하다. 그리고 이 작가 만화 어디에서도 일본군의 전쟁범죄는 묘사된 경우를 볼 수가 없다. 문제는 이 작가가 거하게 혐한 커밍아웃을 했다는 점이다. 위의 취소선은 그래서 쳐져 있는 것이다.
  • 나카자와 케이지의 맨발의 겐: 작중 초반 나오는 나카오카 겐의 아버지는 제국주의와 전쟁을 반대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비국민' 이라는 야유를 받으면서 살았다거나 일제 치하 조선인들이 처했던 문제, 패전 이후의 막장이 된 일본이나 여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정부와 미군의 횡포 등 여러 국면에서 당대 일본의 상황과 문제들을 철저하게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 1화부터 극우주의를 비판하고, 만화에선 대놓고 가장 큰 전쟁 범죄자는 천황인데 여전히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식의 대사가 등장한다. 즉, 단순히 일본 군부를 비판하는 수준이 아니라 신성불가침의 영역인 천황과 일본의 제국주의에 동조하거나 침묵한 민간인들까지 얄짤없이 비판한다.
  • 데즈카 오사무의 단편 만화 '종이요새': 태평양 전쟁 발발 당시 미쳐가던 일본의 상황에 대해 데즈카 오사무 본인이 세세하게 표현한 장면들이 많다.[83]
  • 미즈키 시게루의 ' 전원 옥쇄하라!', 위안부 문제 관련 만화: 후자의 경운 미즈키 시게루 본인이 동남아시아에서 직접 목격한 위안부의 피해 배상에 대해 그 풍경은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기 때문에 꼭 (배상이) 이뤄져야 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미즈키 시게루는 태평양전쟁에서 현재 뉴 브리튼 섬인 라바울의 전선 증원부대로 참전한 참전자이고 연합군의 폭격으로 인해 심각하게 망가진 한쪽 팔을 절단해야 했다.
  • 아카츠카 후지오의 '일본국 헌법이다!': 나가이 켄이치와의 공동 저작으로 1983년에 출간되었으며, 아카츠카 후지오는 일본 정부의 헌법 해석과 자위대의 규모 확장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이 책에서 밝혔다. 아카츠카 후지오는 만주국에서 태어난 히키아게샤 중 1명으로, 귀향한 동네에서 적잖게 차별당했던 경험이 있었다.
  • 아라카와 히로무 강철의 연금술사: 작가가 만화 내에 스크린 톤으로 욱일기 문양을 많이 사용하여 논란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농촌 출신인 아라카와가 민속적인 의미인 풍어기라는 주장도 있으나, 풍어기로서 욱일기가 쓰인 역사는 욱일기가 군기로 쓰인 역사만큼이나 짧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이와는 별개로 과거 세계대전 당시 벌어졌던 일본군의 인체실험, 민간인 학살같은 요소들을 많이 넣어 심지어는 일부 극우파들에게 연재를 중단하라는 협박까지 받았다.
  • 야스히코 요시카즈 왕도의 개, 무지갯빛 트로츠키: 전자는 메이지 유신 당시 일본 제국이 향하던 패권주의와 그를 주장한 인물들을 맹렬히 비판하며, 후자는 작중에서 설정된 '트로츠키 계획'으로 인해 혼란을 겪는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와 그를 선동하는 수뇌부를 비판한다.
  • 카리야 테츠 맛의 달인: 원작에서 일본의 과거사 날조를 비판하고 수상이 개인적으로 사과했을 뿐 국가가 사과한 적 없다고 표현하거나,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자를 만나서 주인공 일행에게 자신이 당한 피해를 설명하고, 이를 들은 캐릭터들은 무척 부끄러워하는 장면이 나온다.
  • 카리야 테츠 일본인과 천황: 요리 만화인 위의 맛의 달인과는 다르게 자국의 과거사가 주된 주제여서인지, 좀더 노골적으로 극우를 씹는다. 심지어 이 작품은 천황제까지 덤으로 씹는 만화이다. 참고로 이 작품은 은연 중에 일본 사회에 만연한 전체주의적, 권위주의적인 사고방식도 함께 까고 있다. 초반에 주인공이 부당한 대우에 항의했다가 축구계에서 매장당할 뻔했는데, 그걸 그의 소속 대학의 이사장이 두둔해주어서 간신히 선수 생활을 유지하는 장면이 나온다. 만화 자체도 반(反) 극우 성향인 이사장이 주인공 일행에게 자국의 부끄러운 과거사를 설명하고, 이를 통해 자국 사회의 권위주의적, 전체주의적인 경향을 자국의 전쟁범죄와 이에 대한 부인주의의 대두, 그리고 극우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천황의 존재에서 찾는 식으로 전개된다.
7.3.3.3. 게임
  • 사쿠라 대전 시리즈: RED 엔터테인먼트가 제작한 게임으로, 기본 설정에서 일본이 러일전쟁에 패해 일본 열도에 틀어박힌 세계관이 나온다. 또한 1편과 2편에 나온 주요 악역들을 보면 제국주의 망상을 가진 놈들이 대다수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게임 내용과 달리 작품 자체가 일본을 무대로 했고, 일본풍 분위기가 대놓고 나오는데다 작중 시간대도 한국에게 가장 치욕스러운 1920년대라서 정발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많았다.
  • 제독의 결단 시리즈: 코에이 테크모의 시뮬레이션 게임. 1편에선 플레이할 시 일본군의 강제노동 장면과 위안부의 묘사가 연출되며,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상황도 여러 차례 나온다. 사실 코에이는 일본 게임 제작사 중에선 역사에 대해 많은 신경을 쓰는 몇 안되는 회사로 꼽힌다.
  • 파워프로군 포켓2: 히든 석세스 전쟁 편에서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이 저지른 터무니없는 작전과 악랄한 모습을 미화 없이 묘사했다.
7.3.3.4. 애니메이션
  • 미즈시마 세이지 감독의 UN-GO: 카미카제는 일제에서 만들어진 거짓된 신앙심에 속아서 생겨났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천황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이 나온다.
  •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의 린의 날개: 직접 제2차 세계 대전을 겪고 그 시대의 문제를 알면서도 오히려 광기에 사로잡혀 일본을 과거로 바꾸려는 캐릭터의 행동을 미국인과 일본인 사이에서 혼혈로 태어난 캐릭터가 막는 전개가 연출된다. 이외에 토미노 요시유키는 기동전사 건담 토미노 요시유키 4대비극 등의 애니메이션에서 전쟁에 대해 비판하는 연출을 삽입한 바 있었다. 점보트3와 V건담에선 캐릭터들이 특공과 자폭을 하는 묘사가 나온다. 하지만 전자는 메카가 파손되거나 전력 추세 약화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특공했으며, 종국에 주인공도 전투 결과에 대해 슬퍼하며 전투에 대한 의구심을 드러냈다. 후자에선 한 파일럿이 특공을 감행했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으며, 성인 파일럿이 주인공 앞에서 충격과 공포를 느껴 자폭을 감행한 장면이 있다. 결과적으로 두 작품에서 해당 파일럿들이 대놓고 xx 만세 같은 대사를 하거나 자신이 저지른 행위를 미화하는 씬은 존재하지 않는다.
  • 잔향의 테러: 작중에서 제작진이 일본 우익의 행태에 대해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연출이 있다.
  • 조커 게임: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원작 소설가 이를 바탕으로 한 애니메이션. 원작과 애니메이션 모두 당시 군국주의와 파시즘으로 미쳐돌아가는 일본의 부조리와 광기를 강도 높게 비판하고 풍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 GATCHAMAN CROWDS insight: 직접적으로 일본의 피해자 행세에 대해 비판하는 모습은 아니지만 10화에서 게르사드라 진영에 대해 일본의 몇몇 선동가들과 언론들이 대중을 부추겨 군중심리를 향상하는 장면이 나온다. 우회적인 풍자 수준이 아니라 아예 대사로 군중심리의 폐해에 대해 언급할 정도. 각본가인 오오노 토시야는 아베 정권의 집단적 자위권 개정안 날치기 통과에 대해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의견을 트위터에 게재했다.

8. 클리셰

8.1. 가해자 옹호와 피해자 비하

이 녀석도 사실은 좋은 녀석이었어 이 녀석도 사실은 불쌍한 녀석이었어가 모두 이런 종류라고 볼 수는 없지만, 가해자를 이상한 핑계를 대고 옹호하면서 가해자에게도 정의가 있다는 메시지를 전파하는 사례는 흔하다. 극적 관점에서 이러한 사례는 어느 정도 있기는 하지만, 유독 일본의 창작물에서 이러한 연출이 굉장히 잦다.

과도한 가해자 옹호에 덧붙여서, 어떤 사죄도 배상도 없이 무조건적인 용서를 강요받는 피해자가 나타난다. 게다가 피해자가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행위 자체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경우도 있다. 사죄와 배상을 요구한다 참고. 대개 주인공 중립적인 입장을 가장하여 가해자를 옹호하고, 이러한 피해자를 모욕하면서 용서를 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경우도 나타난다.

위와 합쳐서 ' 가해자 = 일본, 피해자 = 한국, 중국, 동남아시아 등 주변국'으로 대체해서 보면 이러한 클리셰가 자주 나타나는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일본은 과거사에서 가해자의 입장이기 때문에 극작가들 역시 가해국인 자국에 감정이입을 하는 내용을 쉽게 만들어내고, 피해자를 주변국에 투영해 ' 지겹게 사과와 배상을 강요하는 짜증나는 무리들'로 보도록 유도한다.

주로 극우 미디어물에서 이런 패턴들이 자주 보이는데, 그 이유는 역사적으로 일본은 일제강점기 이후로 대한민국 식민지로 만들어 대한민국의 민간인들을 강제징집, 강제징용을 강요하고 위안부 창설 등 인권 유린을 저질렀으며, 중국을 침략하면서도 민간인 학살을 비롯한 온갖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그리고 이러한 과거사를 직시하지 않고 부정하는 일본 극우 정치인들의 태도와 일본의 우경화 서브컬처에도 영향을 미쳐 이런 상황이 전개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9. 피장파장의 오류

일본은 바다에 오키노토리시마라는 콘크리트 방파제를 설치해 섬이라며 그 주변 배타적 경제수역을 주장한다. 그런데 중국은 일본의 이러한 행위를 맹비난하며 오키노토리시마는 EEZ를 가질 수 있는 섬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정작 중국 조차도 베트남, 필리핀, 대만과 영토분쟁 중인 남중국해의 스프래틀리 군도 등의 암초에 인공섬을 만들고있어 세계적으로 비난을 받고있다. 중국이 이러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데, 중국은 일본에 의한 침략 및 식민지배를 당했고 일본의 전쟁범죄에 의해 수 많은 중국인들이 학살당했으며, 센카쿠 제도를 둘러싼 영토분쟁이 있기 때문에 혐일감정이 매우 심한 나라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똑같은 행동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일본이 싫으니까 일본의 행위를 비난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중국이 오키노토리시마 문제로 일본을 비난할때마다 일본이 남중국해 얘기를 꺼내며 우리만 잘못한 게 아니라 중국도 잘못했다 혹은 다른 쪽도 한 것이니 우린 잘못 없다는 식의 정신승리를 하며 책임회피와 물타기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의 이러한 이중잣대를 비판하는것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일본이 이를 비판하며 논쟁에서 상대방의 주장에 대해 주장 자체의 타당성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발언자의 비일관성이나 도덕성 문제를 근거로 주장이 거짓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꼴이다. 즉, 적어도 자신들의 행위를 인정을 한 뒤에 비로소 타국의 행위를 비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일본의 전쟁범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도 일본의 넷우익들이 주로 사용하는 방식이다. 앞서 밝혔듯이 중국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에게 침략을 받은 피해국가인데, 중국에서 난징대학살을 비롯한 일본의 전쟁범죄 행위에 희생된 중국인들을 추모하면 그럴때마다 일본 넷우익들은 "그딴것보다 천안문 사태나 추모하라"며 물타기하고 있지만 이는 일본이 저지른 죄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나는 침략 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국내 내정이다.

또한 한국이 일본의 전쟁범죄를 비판할 때마다 일본 극우 혐한 세력들은 일본군 위안부 관련 기사마다 라이따이한을 자주 언급하며 일본군 위안부의 물타기용으로 라이따이한 소재를 쓰고 있다. 이들은 라이따이한을 한국판 위안부라 왜곡하여 알리거나 인식하고 있다. 또한 혐한 상당수는 라이따이한을 학살 사건이나 학살 장소로 오해하는 등 무엇인지 제대로 모르고 오직 위안부를 부인하기 위한 수단으로 쓸 뿐이다.

라이따이한은 어디까지나 한국인과 남베트남인 사이에 태어난 2세들을 칭한 명칭이며, 이들이 베트남 내에서 겪는 차별 대우와 한국인 아버지들의 책임이라는 주제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사죄와 책임이라는 주제는 전혀 다른 별개의 사안이지만 이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성노예와 달라 라이따이한 문제는 피해 여성들이 담론의 중심에 있는 게 아니라 이후 출생한 사람들이 담론의 중심으로 언급되는데 괜히 이러는 양상이 나온 게 아니다. 인권, 성노예 등 착취 문제가 주된 담론이 되는 위안부 성노예 문제와 달리 라이따이한은 강압적인 성관계 외에도 자발적인 매춘, 현지처, 동거 문제가 섞여있기 때문이다.

즉, 라이따이한 문제로 한국을 비난하고 싶으면 파월국군이 납북된 것을 가지고 비난해야 하는데, 그럴 정신머리가 없으니, 이런 말도 안되는 소리나 죽어라 내뱉는 것이다.

또한 한국은 미국과 국제사회의 요청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입장이었을 뿐 베트남을 침공하려는 목적에서 군대를 파병한 것도 아니다. 그와는 달리 일본은 을사늑약과 경술년 강제 병합,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태평양 전쟁을 통해서 침공으로 참전하며 한국과 중국, 동남아와 태평양 섬나라들을 무력으로 침공한 추축국이자 전범국이자 패전국이다. 그리고 국제사회의 대변자격인 당시 국제연맹[85]을 스스로 탈퇴하였으며 미국을 침공하려는 야욕도 가진 나라였다. 미국과 국제사회의 요청으로 베트남 전쟁에 군대를 파병해달라는 입장과 스스로 아시아를 침공하여 세계 정복의 야욕을 꿈꾸며 전범 행위를 저지른 입장과는 전혀 다르며 그 반대이다.

즉, 한반도를 식민지화하고 아시아와 태평양을 무력으로 침공하여 패전하였던 일본과는 달리 한국은 미국과 국제사회의 요청으로 베트남 전쟁에 지원군 자격으로 참전한 것이라 엄연히 다르다. 지들이 무력으로 침공해서 전쟁에 참전한 것과 국제사회의 요청으로 지원 자격으로 전쟁에 참전한 것은 엄연히 다르다.

더욱 웃긴 것은 일본 극우들은 한국이 베트남을 침공하려고 참전했다는 헛소리를 지껄이면서도 정작 그런 한국에게 베트남 전쟁에 군대를 파병해달라고 요청한 미국이나 국제사회에 대해서는 아예 침묵하거나 묵묵부답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기위해 한국 등 자유 우방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며 참전을 요청한 것이 바로 미국이었는데도 말이다.

10. 관련 문서



[1] 단, 센카쿠 열도의 경우 독도나 쿠릴 열도와는 달리 일본의 실효지배령에 대해 중국과 대만이 클레임을 거는 것이기 때문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2] 이 작품은 주인공 가족과 주변인들이 원폭에 휘말려 생지옥 속에서 미국에 대한 원망도 하지만 이보다 더 강조하는 것이 이런 막장 상황으로 내몬 자국 군부와 지도부, 심지어 천황에게도 전쟁 책임을 묻고 있는 일본의 몇 없는 작품이다. [3] 당장 원자폭탄을 만들어 낸 맨해튼 프로젝트가 없었더라면 일본 본토를 초토화시킬 몰락 작전이 실행되었을 것이다. [4] 게다가 이들은 소형 보트나 잠수함으로 일본군 점령지를 순회하며 사탕, 초콜릿, 담배 등 요긴한 것들을 주어 공포감을 주고 수탈하기만 하는 일본군으로부터 이반하게 만들었다. [5] 영국, 프랑스 등 다른 유럽 국가들도 본인들의 식민 지배 과정에서 일어난 분쟁은 당시에도 당연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체포된 대부분의 저항군(레지스탕스)을 '전범'으로 취급했으며, '테러범'으로 취급받은 저항군 사례는 거의 없다. [6] 하지만 이건 피해자가 명백히 밝혀진 사례이고, 일본에서 지내던 사람들 대부분이 광복 이후에도 일본에 잔류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즉 이들의 존재까지 다 고려하면 피해자 수가 6,000명이라는 것도 100% 틀렸다고 단정할 수 없다. #, # 조선인들이 살해당할 때도 일본 정부 나 몰라라 하고 있었다. [7] 사실 오스트리아와 독일을 굳이 분리하려고 노력한 비스마르크가 이상한 인간 취급을 받았다. 물론 비스마르크는 나름대로 철저한 계산이 있었다. [8] 이 시기에 러일전쟁이 터졌다. [9] 사실 테러리즘이라는 용어는 이런 식으로 무장독립투쟁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았기에, 저 시대만 하더라도 완전히 틀린 표현은 아니었다. 그러나 1900년대 후반을 넘어서며 테러의 이미지가 점점 안 좋아지다가 9.11 사태 이후로 완전히 나락으로 갔으며, 일반적인 테러리즘의 형태도 크게 변화한 상태이다. 더 이상 가치중립적인 표현이 아니게 된만큼 위의 사례들에 쓰는 것은 심히 부적절한 용법이다. [10] 만주와 북한 지역에 있던 일본인들은 수난을 당했다. 소련군에 잡힌 일본군 포로들은 시베리아로 끌려가 노역을 감내해야 했으며, 민간인들 역시 소련군의 약탈과 강간을 겪었다. [11] 나치 독일이 국가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전쟁범죄른 기획한 반면, 소련은 일선 장병들의 범죄를 묵인하는 수준이었다. 그나마도 안정화 작전 단계에 들어가게 되면 독일 국민들의 민심을 얻기 위해 NKVD가 소련군 범죄자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한다. [12] 소유/관리자가 일본 환경성이고, 묘원이 있는 공원은 국립 공원이다. [13] 전쟁 도중 죽은 민간인과 무명용사들의 유해가 묻혀있다. [14] 애초에 전쟁이라는 것에서 어느 한쪽이 일방적인 정의의 편이라고 할 수 없다. 독일이 2차 대전을 개전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 베르사유 조약의 경우는 연합국에서도 지나쳤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가혹했다. 또한 소련군의 독일 민간인 대량강간 범죄 역시 나치 독일의 만행과는 별개의 엄연히 전쟁범죄 행위였다. [15] GHQ가 반일 세뇌를 자행하고 있다고 헛소리를 하기도 한다. [16] 이 때도 민간인들의 피해가 어느 정도 있었으나, 이건 당대 기술력의 한계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었다. 당시의 항공폭탄들에 정밀 유도 기능도 없었다. [17] 다만 이에 대해서는 기자가 피해자를 민간인이 아닌 적군으로 오인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실제로 당시 신문기자는 전범재판에서 진실을 알고는 허탈해했다고... [18] 심지어 초반에는 개전에 반대하던 상, 하원 의원들조차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저 연설 이후, 압도적인 표차로 전쟁 참가에 관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19] 여기서 도쿄 대공습에서 왜 민간인 피해가 더 심했는지에 대해 쓰면, 도쿄 대공습의 경우는 아예 한밤중에서 새벽 사이에 폭격을 했기 때문이다. [20] 참고로 1945년 8월이면 소련도 만주 작전과 함께 정식으로 대일 선전포고를 한 상태였다. 이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직후의 일이었다. [21] 본래 1941년 4월 체결한 소일 불가침조약의 만료 시점은 1946년 4월이었다. [22] 한국도 소련의 극동 전선 개입이 한반도 분단을 초래했기에 소련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이는 일본을 동정해서가 아니라 소련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남북분단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관점 때문이다. [23] 단, 친소 유화적이었던 루스벨트와 달리 후임자 트루먼은 극동에서의 소련 개입을 철저히 배제하려 했을 정도로 대소 강경파였고 전임 루스벨트의 대소 유화적인 정책들을 대거 되돌렸다. [24] 실제 소련군은 연합군 가운데 가장 질이 안 좋은 군대로 악명이 높았으며 추축국 뿐만 아니라 점령지의 주민들에 대해서도 굉장히 폭력적이었다. [25] 참고로 치치지마 식인 사건와 같은 사건들은 네오나치라도 깐다. 전쟁터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식량이 극한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피치 못하게 시체를 뜯어먹는 막장상황이었던 게 아니라, 단순히 특식으로 먹을 만한 안주감을 찾기 위해서, 그것도 전쟁 포로들을 잡아먹는 미친 짓은 아무리 포로를 우습게 여기는 일본군 내부에서도 상식에서 한참 벗어난 행위였다. 당시 일본 전범들에 대한 무죄를 주장해서 현재까지 까이고 있는 라다비노드 팔 검사조차도 '저것들은 사람이 아니다.' 라며 다치바나 요시오에 대한 즉결처형을 주장했고, 이놈이 수감되자 같은 일본군을 포함한 전범들조차도 '니가 사람이냐' 라면서 사형 집행 당일까지 매일같이 죽도록 두들겨팼다. [26] 만약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이 간부는 나치당 내에서는 그래도 양심적인 축에 들어가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27] 마찬가지로 나치 독일 역시 일제의 전쟁범죄를 잘 알면서도 동맹 관계 유지를 위해 묵인했으며 존 라베와 같은 개인들이 구호 활동을 벌였으나 마찬가지로 독일 정부 차원에서 이들을 입단속했다. [28] 실제로 독일은 아프리카 나미비아 헤레로족 6만 8천명 학살에 대해서 사과는 하겠지만, 식민지 지배는 정당했기 때문에 배상할 수 없다고 아예 못 박았다. 이 점은 일본도 마찬가지지만, 독립축하금 명목으로 사실상 배상금인 8억 달러(1965년 당시 환율로)의 금전을 1965년에 한국에 지불했다는 점에서는 독일보다 더 바람직하다. 다만 독일은 이스라엘과 유럽 국가들에 수십 년 동안 사과와 배상을 하고 있다. #, ## 심지어 독일은 법적으로도 이미 오래 전부터 나치와 관련된 상징을 금지했다. [29] 일례로 루돌프 럼멜 교수의 통계에 따르면 독일은 2,094.6만 명, 일본은 596.4만 명을 학살하여 독일의 학살 규모가 4배 정도 더 크다. # 다만 이런 수치는 통계마다 차이가 있다. [30] 다만 나치가 일제보다도 더 많은 사람을 죽인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2ch 이 스레와 독일 대사관의 트윗에 대한 일본 트위터 유저들의 반응이 이런 부류의 여론에 해당되듯 대개 이런 주장은 일본 우익들의 최후 변론인 '일제가 나치보단 낫다'라는 뉘앙스를 은근 띄고 있는 편이다. 홀로코스트 등 나치의 백만 단위 학살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치라 그렇지 일제의 십만 단위 학살 역시 어마어마한 규모이다. [31] 이 마르코 폴로라는 잡지는 별별 극우적 논평은 있는대로 다 갖다 실으며 홀로코스트 조작설을 내세웠다가 미국의 유대인 단체들이 일본에 압력을 넣어 폐간시켰다. [32] 독일의 경우 SS가 아닌 국방군 장성들의 사형이 드물었다. [33] 히틀러의 나치당 정권은 별명으로 제3제국으로도 불린다. 전대 독일제국과 귀족들은 그를 이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한 정당에서 출발한 나치 정권에게는 공산당과 함께 타파할 대상이었으므로, 복식이나 제도를 따라 한 외형적인 사실과는 별개로 사상, 정치적으로 상당 부분 단절되어 있었다. [34] 사실 기독교민주연합이나 사회민주당이나 모두 나치 치하에서 고초를 치렀던 이들이었다. 때문에 이념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심지어 개인적으로든 나치를 살려둘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가령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는 나치당에게 아내를 잃었고, 쿠르트 슈마허 사회민주당 당수는 게슈타포의 고문으로 장애를 얻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나치가 아니었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적으로 모든 나치 가담자들을 전부 처벌할 수는 없었다. 종전 직후부터 서방과 소련 간의 긴장이 오르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최전선이었던 독일에 대한 가혹한 처분은 재검토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1950년 동아시아에서 한국 전쟁이 발발하며 냉전이 개막하였음이 명확해지자 연합군 수뇌부는 독일을 가능한 빠르게 정상화시켜야 한다는 데 합의를 보게 되었다. 연합군의 군정이 끝난 후 세워진 서독 정부 역시 전후복구와 독일의 국제사회로의 복귀를 강력하게 추진했다. 하지만 모든 공무원, 군인, 회사 임원들을 전부 처단하면 독일의 재건은 물거품이 될 것이었다. 심리적으로도, 전후 독일인들이 선택한 역사 반성 방법은 분리와 망각이었다. 그들은 나치 전쟁 기계에 자신들이 직간접적으로 협력했다는 부끄러운 과거를 들추고 그 안에서 '침잠하는' 대신, 자신들을 나치당의 책임으로부터 분리한 채 새로운 동맹인 서구권 국가들과 함께 민주적 질서 속에서 걸을 밝은 앞날만을 바라보기를 선택했다. 결국 그들은 범죄 행위가 명확하거나 나치즘을 공공연히 떠드는 이들만을 처벌한 후, 빠져나갈 구석이 있던 이들은 대부분 단순가담자(Mitläufer)나 무죄로 분류하여 사면해주었다. 그들의 이러한 선택은 전후 서독이 빠르게 정상국가의 반열에 올라 라인 강의 기적을 일궈내고 프랑스와 화해하며 유럽 연합의 기초를 놓는 동력이 되었다. [35] 참고로 2009년~2012년 당시 집권 정당은 자민당이 아니라 민주당이었다. [36] 막부 시대에도 천황의 명맥은 이어지고 있었다. 단, 쇼군의 힘이 너무 강해서 천황을 비롯한 황족이 전면에 나올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 하에서는 일반인들은 천황을 신경쓸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남북조 시대 이후 천황이 처음으로 정치에 공식적으로 입김을 넣기 시작한 메이지 유신 초기에는 천황이 행차한다는 공문이 내려가도 해당 지역민들이 관심 하나 주지 않았던 일도 있다고 한다. [37] 간단히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만 봐도 알 수 있다. 군대도 해군과 육군의 기원부터 달랐을 뿐 아니라, 무기 체계도 완전히 달라서 사실상 별개의 군대였다. [38] 정확한 명칭은 "쇼와 21년 칙령 제68호 - 연금법의 특례에 관한 건(昭和二十一年勅令第六十八号 - 恩給法の特例に関する件)" 으로 1946년 2월 1일에 공포되었다. [39] 이는 아베 신조의 안보법안 개헌에 따른 일본 시민들의 격한 반응에서도 잘 나타난다. [40] 이에 관해서는 대공위시대 베스트팔렌 조약, 독일 통일 문서를 참조하자. [41] 단, 이 문서에서의 피해자 행세는 2차 대전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국가로서의 팽창주의 정책에 대한 반성 여부 또한 내포하는데 이 부분에서는 독일 또한 미진한 것이 사실이며 나아가 군국주의의 피해자이면서도 동시에 제국주의의 가해자인 타 서유럽 국가들 역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반성 태도가 전무한 수준이다. [42] 전범 중에선 군인 이전엔 가게를 차리며 살거나 직장인들도 있었다. [43] 의외로 미국은 독일의 과거사 청산에 대해서도 전범 처벌이 끝난 뒤에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는데, 애초에 미국이 독일의 직접적 피해국이 아니었다. 미국은 유보트 정도를 제외하면 영국, 프랑스, 소련 등 타 연합국들과 달리 독일에 의한 본토 공격을 한번도 겪지 않았다. [44] 참고로 튀르키예는 이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비난하는 국가들에 이런 식의 주장을 많이 한다. 가령 영국이 이 일을 비난했을 때는 아일랜드 대기근을, 벨기에가 비난하면 콩고 독립국· 벨기에령 콩고 문제를 언급하는 식이다. [45] 사실 한국 역시 1965년 한일협정때 일본 외환보유의 60%가 넘는 8억 달러의 유/무상 보상금을 받아 경제개발에 보탰다. [46] 친중, 종북, 친러 포함. [47] 한국을 보면 민주주의 제도는 1948년에 도입된 것이지만, 구성원 대다수가 확실한 민주시민으로서의 인식을 가지게 된 것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이다. 그럼에도 아직도 우리 주변에서 " 표현의 자유", " 인권" 같은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사람을 쉽게 볼 수 있다. 실제로 1987년 이후에도 한동안 "인권이 밥 먹여 주냐"라는 말이 언론이나 정치인에게서도 흔히들 나왔고, 가정/학교에서의 체벌, 군대/직장에서의 구타도 만연했다. 게다가 "응보주의가 능사는 아니다", "범죄자도 사람이다" 등의 말로 인권 보호에 극도로 집착하는 경향이 강해진 21세기에는 그런 집착이 전관예우, 법조인들의 도덕성 결여 등 법조계의 여러 문제점들과 결합되면서 오히려 인권이 범죄자의 면죄부로 악용되는 새로운 부작용이 일어나 선량한 범죄 피해자들의 인권이 무시되기도 한다. 그만큼 민주주의 가치가 사회 전체에 확고하게 자리잡는 게 오래 걸린다. [48] 도와(同和) 지구라고 한다. [49] 일본인들을 욕할 때 쓰는 표현은 대개 japs 혹은 왜구 정도가 알려져 있는데 이건 대외적으로 알려진 욕이고, 일본 내에서 가장 센 부류에 속하는 욕은 바로 부라쿠민이다. 일본인 친구들에게 이거 쓰는 순간 그냥 절교도 아니고, 얻어 터지고 절교당한다. 절대 함부로 쓰면 안 되는 욕설이다. 이 부라쿠민'이라는 말이 욕설로 쓰일 때 어느 수위의 욕설인지는 문서를 참고하자. 이 부라쿠민과 비슷한 뜻으로 쓰는 욕설로 쓰는 말이 히닌(非人)이라는 말인데 말 그대로 사람이 아닌 것이 사람의 가죽을 쓰고 있다는 뜻이다. 망언 제조기로 유명한 아소 다로가 다른 파벌의 선배 정치인인 노나카 히로무에게 부라쿠민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총리 자격이 없다고 망언을 했다가 노나카로부터 당신 절대로 용서 못한다!라고 극딜을 받고 사과를 해야 했던 사례도 있다. 그런데 이 사건, 2003년에 일어난 일이다. [50] 또한 일본에서 부라쿠민을 그린 대표적인 작품이 있다. 하나다 소년사로 알려진 잇시키 마코토의 만화 피아노의 숲. 물론 배경에 등장하는 마을은 가상의 마을인 숲의 가장자리라지만, 묘사를 보면 영락 없는 부락마을이다. [51] 폴란드 침공, 남북분단, 한국 전쟁 지원, 헝가리 혁명 프라하의 봄 유혈 진압,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 [52] 정적 숙청, 우크라이나 침공 [53] 사실 Yet another X War Crimes Denial Thread라는 시리즈의 일환으로 미국, 소련, 독일, 이태리 등의 예시가 있다. [54] 가령 독일 전범 행위 부인하는 스레드 이미지에도 네오나치 사이트 링크한다는 것은 있지만, 일본판의 오른쪽 인물은 전부 모든 게 다 한국의 거짓말이다/한국인이다라는 게 포인트. [55] 물론 대안우파하고 전혀 상관 없이 포챤이나 디시 같은 인터넷 음지 특유의 독설, 신랄한 맛에 들어가는 사람도 많은지라, 다른 보드들은 /pol/보다는 정치적으로 훨씬 덜 편향된 편이다. 인터넷 음지를 지상파 언론의 양지로 끌어낸 트럼프 당선 이후 오히려 다른 갤러들이 앞서서 "back to the containment board (느그 수용소로 다시 꺼져)"라 하면서 지나치게 대안우파스런 의견은 알아서 손절하기도 한다. [56] 다만 그렇다고 4chan 같은 곳에 가서 이 주제로 일본을 까는 스레드를 작성하면 같이 호응해준다는 기대는 버리는 것이 좋다. 그런 스레드를 올리면 스레드 참여자의 일본에 대한 판단과는 별개로 작성자는 찐따 취급을 받는다. [57] 비슷한 사례로 Chink, Chinky 라는 용어도 있다. [58] 정작 이들에게 일본이 벌인 전쟁범죄나 일본이 벌인 악랄한 식민정책을 언급하면 "증거가 있나?", "옛날일 꺼내지 말라"며 화를 낸다. 오히려 이들은 위안부 문제에서 알지도 못하거나 알면서도 왜곡된 주장한다. [59] UN의 공식 중국어 명칭이 "联合国(연합국)"이다. [60] 참고로 국제연합(UN)의 전신은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 제국주의에 대한 대책 겸 전쟁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창설된 국제연맹이었므로 반제국주의 이념을 내포했다. [61] 단, 2차 대전을 직접 겪은 사람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노쇠해지고 자연사해서 그 수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기에 현재 유럽권에서는 반일 감정이 거의 누그러졌다. 미국과 달리 유럽은 일본에 의한 본토 피해가 전혀 없었고 동남아에서의 교전은 어디까지나 본토 국민들 입장에서는 덜 중요한 주변부의 일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유럽 본토의 주 비판 대상은 당연히 나치 독일이었고 현재는 그 독일에 대한 감정도 완화되었는데 거리가 멀고 유럽 쪽에 철저히 배상한 일본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62] 히로히토는 원래 중국도 방문하려 했는데 전쟁 피해자가 너무 많았던 중국에서 이에 극렬히 반대했고 궁내청에서도 천황의 신변을 우려한 나머지 차선책으로 대만에 갔다. 다만 이후 히로히토가 죽은 이후 히로히토의 아들이자 그 뒤를 이어 천황이 된 아키히토가 1992년에 중국을 공식 방문하며 중국에 사죄와 반성을 하는 등 양심 있는 모습을 보였다. [63] 당시 천황 내외를 태운 마차는 찍소리 못하고 피하기만 했고 상이군인, 노병들이 거리를 두고 비판하니 영국 경찰들도 직접적으로 테러를 가하지 않는 한 뭐라고 하지 못하며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64] 일례로 이탈리아가 저지른 전쟁범죄 중 심각하다고 평가받는 도메니콘 학살이나 포드험 학살 등은 희생자 규모가 백 단위에 불과하며 이탈리아가 운영한 강제 수용소에서 발생한 희생자 규모도 천 단위이다. 연합국 포로에 대한 처우 역시 3국 중 가장 인도적이었다. 물론 학살은 규모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비난받고 반성할 일이긴 하나 분명 절대적인 규모와 수치에서 다른 두 추축국이나 소련이 자행한 전쟁범죄에 비할 바는 결코 아니다. [65] 미국 내 일본계에게도 2차 대전 참전자들은 '큰 어르신'이라서 존경과 같이 발언권이 컸기 때문인데 김영옥 대령이 사망한 이후에도 생존하는 일본계 노병들은 그의 뜻을 존중하여 혼다 하원의원을 비롯한 미 하원의 위안부 결의안에 지지하거나 반대하지 않았다. 더구나 일본계 미국인들은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1, 2세대들이 모조리 수용소로 직행한 적이 있어 이런 우익적인 망언을 경계한다. [66] 잘 부각되지는 않지만 싱가포르도 2차 대전 당시 일본에 점령당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일본과 매우 불편한 관계이다. [67] 물론 대부분의 유대인에게 반독 감정은 있어도 반일 감정은 거의 없다. 아무래도 일본은 유대인을 학살한 적도 없고 역사적으로도 서로 접점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유대인 가운데 일부는 독일은 물론 그 독일과 손잡은 일본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반감을 갖는 경우가 소수 있다. [68] 참고로 이런 상황에서 스필버그는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지역 기업 중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할 수 있는 한국 기업에 우선적으로 접근했다. 처음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에게 접근했는데 당시 스필버그 측 인사의 증언으로는 이건희 회장 측에서 영화 산업보다 반도체 IT에 관심이 많았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삼성그룹이 영화 산업보다는 삼성전자에 대한 투자에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그리고 끝내 이 정보를 입수한 범 삼성계 대기업인 CJ그룹이 접근, 드림웍스에 거액의 지분 투자를 한 후 아시아 지역 배급권을 따냈다. 이런 CJ의 드림웍스 판권 계약으로 충격을 받은 삼성그룹은 그제서야 부랴부랴 영화 산업을 집중적으로 연구했고, 삼성영상사업단을 출범했으나 물론 3년 후에 구조조정 후 완전히 청산했다. 어쨌든 일부 부작용은 있었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삼성영상사업단, 대우그룹의 대우시네마 등 대기업 계열사 중심의 영화사들이 출범하며, 한국 영화계의 규모를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삼성과 대우는 IMF 경제위기 이후 전부 영화계에서 철수했으며, 이후 CJ와 자생적 전문 영화사들이 서서히 뿌리를 내렸다. [69] 참고로 마이크 혼다 의원이 네오콘 내 일본 지지파 의원 설득에도 바로 이런 일본 극우들의 주장으로 어필했다. 일본의 이런 주장은 네오콘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네오콘의 상당수가 2차 대전 참전 군인이거나 참전 군인을 아버지로 두고 그걸 자부하는 이들인데, 일본의 주장은 자신들에게 위안부란 이름으로 성노리개가 있으며 미국이 자신보다 더 나쁘다는 개소리이다. 당연히 네오콘들은 이에 분노해 결의안 통과를 지지했다. 무릇 상대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으면 심기를 맞춰야 하는데 일본은 가장 초보적이면서도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70] 위 그림에서는 태국, 인도, 대만이 빠졌다. 태국은 일본 제국의 위협에 의해 2차 대전 기간 내내 일본군과 강제 동맹 조약을 맺고 전쟁에 반강제적으로 끌려가고 전쟁 당시 태국 여성들이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동원되었고, 인도 역시 1944년 일본군의 임팔작전 당시 인도 동부 지역을 침공받았으며 대만은 일제의 50년 식민지였다. 몽골 할힌골 전투 때 소련군과 함께 일본군과 전쟁을 치른 적이 있었다. 하지만 6년 후인 1945년 만주 전략 공세 작전에서 소련군과 함께 참전해서 몽강연합자치정부 만주국을 무너뜨렸기 때문에 지리적 인접성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전쟁범죄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다. 그리고 타이완 섬은 뭐 아시다시피... [71] 오히려 이 점에서 베트남의 불제강점기의 경험과 조선인들의 일제에 대한 인식은 점점 관련 논문이나 학계의 관심도 높아지는, 탈식민지주의 학계에선 나름 핫한 연구 대상으로 떠오른다. 구체적인 사료가 없을 시절에도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이 조선에 대해 지나가듯 언급하는 모습이 종종 있어서 뭔가 더 커넥션이 있었을거라는 학자들의 심증이 최근 갈수록 호치민이나 다른 인사들 파리 거주 시절 조선 독립 운동가 망명객들과 구체적으로 만나며 교류했다는 사료가 새로 발굴되며 확인되기 때문이다. [72] 여담으로 조선인 양칠성(1919~1949)도 인도네시아 독립군으로 네덜란드군과 싸우다가 잡혀 총살당했다가 1970년대 들어서야 한국에 유골이 돌아오게 되었다. [73] 성공회, 가톨릭 성당의 성체를 훼손하는 행태나 불교 사찰과 도교 사원이 훼손되는 행태 역시 대표적인 예시이다. [74] 무엇보다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의 경우 이 당시 장제스의 국민정부를 열렬히 지지하던 경우가 많아 중일전쟁 당시 국민정부에 후원금을 많이 보탠 바람에 중국과 내통을 한다는 이유로 일본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75] 참고로 네루는 감옥에 갇혀 있는 3년동안 딸에게 세계사를 알려주기 위해서 수백통의 편지를 썼는데, 기네스북에 세계에서 가장 긴 편지로 오르기도 했다. 한국에선 세계사 편력이란 이름을 달아 책 3권으로 출판되었다. [76] 참고로 이런 라다비노드 팔조차도 살면서 이런 미친 놈들은 처음 본다며 학을 떼고 사형을 선고한 작자들이 있었으니 바로 치치지마섬 식인 사건 타치바나 요시오다. [77] 출처- 월간 키노 [78] 사실 케로로 소대 구성원들 모두 적에게서 숙소 등의 보급을 어느 정도는 취하지만, 타마마의 경우 인간 파트너인 니시자와 모모카가 워낙에 다이아수저인지라 태평양같은 집에 전용 훈련방과 하녀까지 마련하는 등 스케일도 그만큼 크다. [79] Fate/Grand Order에서는 그냥 군복이라고만 언급해 순화되었다. [80] 번역하자면 '치욕의 나날들'. [81] 퍼니셔 맥스와 퍼니셔, 더 보이즈의 작가로 유명하다. [82] 중간중간에 일본군의 여러 전쟁 범죄들도 제법 리얼하게 묘사한다. [83] 데즈카 오사무는 본인부터가 일제 군국주의 교육을 받은 당사자다. [84] 시시오 마코토의 에피소드 편이 끝날 때 메이지 정권의 이후 행보를 "폭주"라고 직접적으로 비판한다. 또한 켄신의 입을 빌려 시시오의 약육강식 논리는 틀린 거라고 말하며 동시에 향후 메이지 정권의 행보는 시시오의 논리와 다를 것이 없다는 내레이션을 통해 일제의 행태를 직접적으로 비판했다 [85] 사실 국제연맹은 현재의 UN과는 달리 회원국을 강력히 제재할 힘도 없는 허수아비와도 같은 국제기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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