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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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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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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52년 1월 18일,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이 대통령령 ‘대한민국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의 선언’을 공표하여 설정된 대한민국과 주변국가간의 수역 구분과 자원 및 주권 보호를 위한 경계선이다.

오늘날 배타적 경제수역과도 비슷한 개념인데, 실상은 영해로서 선포된 것이다. 이승만은 이 경계선이 평화 유지에 그 목적이 있다고 밝히고, 그에 따라 '평화선'으로 명명하였다. 해외에선 이승만 라인(Rhee Line)으로 불린다.

2. 발단

1945년 8월, 연합국 일본의 항복을 받고 도쿄 연합군 최고사령부를 설치하였다. 남한이 단독정부 수립 이전까지 미군정의 통치 아래 놓인 것처럼 일본 역시 이를 기점으로 미군정의 통치 아래 놓였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과 싸운 주체는 바로 미국이었고, 미군이 주력이 되어 항복을 받아냈으니 승전국 미국으로서는 당연한 결과였다. 일본 정부는 어디까지나 연합군사령부의 보조기관이었다.[1] 사실 일본군은 만주 전쟁을 통해 내려온 소련에도 투항했으나, 사전에 미국 대통령 트루먼과 소련 서기장 스탈린의 합의 때문에 '일본 주요 4개 섬은 미국의 관할이다' 라는 결정에 따라 일본 본토는 조선이나 독일과 달리 몽땅 미국 지배하에 놓였다.

연합군사령부는 SCAPIN 제677호를 발령하며, 전후 일본의 행정구역에서 독도를 포함한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를 분리시켰다. 여기다 더해 연합군 최고사령관 각서 1033호에 따라 아예 일본 선박의 독도 인근 해역의 출입을 금지했다. 더군다나 1948년 8월 15일, 한반도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며 국제적 승인을 얻었다. 즉,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일본의 주권이 회복될 때까지, 일본은 그때까지도 미군정의 통치 하에 있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이 진행 중이었던 1876년 이래 1900년까지만 해도 독도를 대한제국 관할로 인정했지만 러일전쟁 개전 때 독도를 불법 강탈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한국이 다시 독도를 차지했음에도 기껏해야 주권 없는 행정부만으로 맥아더 장군의 통치 아래에서 행정처리를 집행하는 상황에 놓여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기껏해야 독도가 그려진 우표를 붙여 들어오는 대한민국발 우편물에 독도 부분을 먹칠하여 반송하는[2] 쪼잔한 짓밖에 할 수 없었다.

한국 어민들은 일본 선박의 통행이 금지된 해역에서 마음껏 어로활동에 종사할 수 있었으며, 일본 어민들은 독도 인근 해역에 진입할 수 없었다. 과거 일제는 지도에서 독도를 분명히 울릉도의 부속 도서로 인식하여 일본 직할령이 아닌 조선총독부 치하에 표시하였지만 일본 어민들은 여전히 독도 인근 해역에 출입했고, 한국 어민들도 출입하면서, 이 시기에 양국 어민들 간의 분쟁이 자주 발생했다.

그렇게 일본은 독도와 동해 수역을 멀거니 바라보아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고 생각됐지만...

3. 전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일본은 주권을 회복하고 정부의 권한을 되살렸다. 1951년 9월 강화조약이 서명되고 1952년 4월 28일부로 발효되면서 일본의 주권이 회복되었다. 그전까지 미국의 명령 앞에 숨죽이고 살던 일본이 고개를 들게 된 것이다.

한편 당시 한국은 6.25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북한의 선전포고 없는 불법 남침에 정부가 부산까지 피난을 갔다 다시 한만국경 언저리까지 수복했으나 중공군의 침공으로 다시 서울을 뺏기고 평택 언저리까지 밀렸다가 겨우 올라온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외교 전문가이자 독립운동가 출신으로서 강경한 반일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미국 체류 시절 '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를 통해 일본의 군국주의 특성과 진주만 공습을 예견한 바 있고, 그래서 누구보다 일본의 팽창을 경계하고 바짝 날을 세웠다. 그리고 그런 인식은 당시 스포츠에도 영향을 미쳐서 1954년 스위스 월드컵의 아시아 지역에서 대한민국은 일본과 맞붙게 되었는데, 한국대표팀이 일본 땅을 밟는 것을 불쾌하게 여겨 대표팀의 출전 포기를 감독에게 권유할 지경이었다. 당시 감독은 일본에게 진다면 현해탄을 헤엄쳐서 건너오겠다고 약속하자 출국을 허락, 2경기를 모두 원정에서 치르는 악조건에도 일본을 1승 1무로 제치고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는 쾌거를 이룬다. [3] 참고로 이 1954년 스위스 월드컵도 원래는 서울과 도쿄 두 곳에서 예선전을 할 예정이었는데, 이승만 본인이 일본 대표팀은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한국 땅에 들어올 수 없다고 강력히 반대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도쿄에서 두 번의 예선전을 모두 치러야 했다. 대통령 이승만은 외교에 임할 때 약해빠진 한국이 숙여봤자 깔끔하게 무시당하고 즈려밟힐 뿐이라는 생각으로 없는 살림에도 대단히 공세적인 방식을 선호했다.[4] 낙동강 이남을 제외한 남한 전역을 빼앗겼을 때조차, "대한민국 정부를 돕기 위해 일본군이 지원된다면 어떤가?"라는 미군의 질문에[5] "일본군이 상륙한다면 일본군부터 물리치고 볼 것"(왜관 발언)이라고 일말의 타협도 내비치지 않은 인물이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서명은 1951년 9월이었고 이듬해 4월 발효될 예정이었다. 이에 이승만은 발효를 석 달 앞 둔 1952년 1월, "한일간 평화유지를 위해"라는 명목으로 평화선의 설정을 선포한다.

당시 국제법상 영해의 기준은 3해리(5.56km)였으나, 20배인 60해리(111.1km)를 안전선로 선포했고 이는 당대 통용되던 국제법을 어긴 조치였다. 전쟁 중이지만 미국으로서도 받아들이기 힘든 조치였기에, 선포 한달 뒤인 2월 12일 "평화선을 인정할 수 없다"고 이승만에게 통보했으나 이승만은 미국의 통보를 무시했다.

물론 일본 정부도 대응하려 했으나, 주권이 회복되려면 석 달이나 남았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1월 24일 "영해는 공동으로 논의해야 하는 것", 1월 28일 " 독도를 평화선 내에 포함한 것은 영토 침략"이라는 먼 산 메아리스런 성명만을 내놓았을 뿐이다.

그해 4월, 드디어 일본의 주권이 회복되자 일본 역시 대응에 나선다. 그러나 일본의 대응은 상당히 소극적인 것이었는데, 어업 지도선이 독도에 들어와 독도의 일본 주소( 시마네현 오키군 다케시마/島根縣隱岐郡竹島)를 적은 나무 팻말을 꽂아두고 왔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일본측이 지난 1948년 미 공군의 독도 오폭으로 숨진 조선인 어민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위령비를 바다에 던져 버리자[6] 격분한 이승만은 이를 중대한 도발로 간주하여, 독도에 꽂힌 팻말을 뽑아 바다에 던져버리고 10월부터는 전시 긴급명령으로 포획심판령을 제정하고 일본에 대해 본격적인 실력 행사를 감행한다. 해군 등 가용한 모든 해상 전력을 동원해 평화선 내 해역에서 조업하는 일본 선박들을 나포하기 시작한 것이다.[7] 전쟁 중인 국가의 영토에 들어와서 일본령이라고 적힌 팻말을 적어놓고 가는 불난 집에 와서 도적질을 하는 파렴치한 망동에 대한 당연한 귀결이었다.[8]

이는 나포 시 선내의 모든 물건과 장비를 몰수하고, 선원들은 모두 구속해 재판에 회부하며, 정선명령을 거부하거나 도주를 시도하면 바로 전투배치에 돌입해 총격을 가하고 심지어는 충각으로 배를 격침시킬 정도로 강경한 대처였다.[9]


1954년 평화선 침범 혐의로 나포된 중국 어민들. 이들은 한국 측에 귀순의사를 밝혔고 대만으로의 망명을 요청했기 때문에 그나마 대우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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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선 내를 순찰하는 치안국 해안경찰대가 전투배치에 돌입한 모습.[10]

여기에 보태 전쟁이 끝난 1955년에는 내무부 치안국에 해양 경찰대를 창설하여 평화선을 침범한 일본 선박 나포에 더더욱 힘을 쏟는다. 그렇게 해서 1965년 한일어업협정 체결 때까지 총 328척의 일본 선박이 대한민국 해군과 해경에 의해 나포되었다. 3,929명의 일본인이 부산, 거제도, 제주 한림항 등에 설치된 대한민국 법무부 형정국 형무소에 구금당했고 이 과정에서 44명의 일본인이 사망했다. 붙잡힌 일본인들도 열악한 식사와 의료지원 부족에 시달리고[11] 과거 악감정까지 겹쳐 혐의를 인정하지 않으면 인정할 때까지 고문을 당하는 등 영 좋지 못한 꼴을 당했다. 나중에 가면 급증하는 피해에 기겁한 일본이 일본 선박을 보호하고자 해상보안청 소속 순시선들을 파견했는데 이들 해상보안청 순시선들 역시 전투배치까지 하며 작정하고 달려드는 한국 해군 전투함에게 괜히 함포 사격이라도 얻어맞고 격침당할까 봐 평화선에 접근할 생각은 얼씬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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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해군 전투함이 해상보안청 순시선과 대치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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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함포사격이라도 얻어맞고 격침당할까 봐"라는 대목은 절대 빈말이 아니었다.
당시 순시선이 한국 해군에게 공격받은 부분을 촬영한 것이다.

4. 절정

도쿄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있었으므로, 전쟁중인 한국에게 압력을 행사할 로비는 일본에 수월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공산군 막느라 정신없던 연합군사령부는 일본의 계속된 항의에도 애매모호한 답변만을 내놓았다. 그리고 유엔군사령부[12]에서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는데, 바로 유엔군사령관 마크 클라크 대장이 이른바 '클라크 라인'을 선포한 것이다. 해상을 통한 북한군의 침투 및 밀수활동을 막기 위해 조치된 경계선인데 이는 사실상 평화선과 경계가 일치했다.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강 평화선과 비슷한 구조였다. 일본 입장에서는 미국한테 제대로 물을 먹은 것이었다.[13]

8월 15일 항복한 이래로, 미국에 대들 생각을 할 수 없던 일본은 일단 한발짝 물러서서 형무소에 구금된 일본인들의 석방을 두고 한국 정부와 교섭을 벌였다. 이승만은 억류된 일본인들을 석방하는 조건으로 일본에 불법체류 혐의로 구금된 재일한국인의 석방 및 영주권 부여를 요구했고, 일본은 이를 들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협상이 타결되어 한국 정부는 1958년 부산 수용소의 일본인 전원을 일본 대표부에 인계하는 것을 시작으로[14] 평화선 침범 혐의로 한국 형무소에 구금된 일본인들을 석방했고, 이에 따라 일본 재일조선인 수용소에 구금된 한국인 약 5백여 명이 석방되어 일본 영주권을 부여받았다. 이 과정에서 한국 측은 석방되는 일본인들에게 "평화선을 침범하여 체포되었음"이란 문구가 적힌 문서에 서명하도록 요구하였다. 간접적으로나마 일본도 평화선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일본인만 석방되었지 일본 선박은 석방되지 않았다. 나포된 선박은 정부에 몰수되었고 정부는 나포한 선박과 어구를 민간에 불하했다. 이때 민간에 불하된 일본제 냉동 원양어선은 이후 한국 원양어업의 기틀이 되었다.[15] 또한 일부 고성능 선박은 약간의 개조를 거쳐 해경의 경비함으로 사용했는데, 이는 해군으로부터 이관받은 약간의 총원과 함정 몇 척이 전부였던 신생 해경에게는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그리고 이 기간 내내 한국 어민들은 일본 선박의 출입이 통제되는 60해리(111.1km) 수역에서 단독으로 어로활동에 종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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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어선을 개조한 해경의 고속단정.
8톤급 첩보선 (S-1 정)
밀수 밀항 등 해상범죄 검거단속을 위한 첩보활동 용으로 1962년 9월 19일 법무부로부터 인수(나포 일 어선)
1963년 8월 2일 여수 수산고등학교에 인계
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일본 정부는 평화선을 묵인할 수 밖에 없었다. 1956년 4월 13일, 일본 중의원 법무위원회에서 “외무대신이 이승만 라인(평화선)을 인정하는 듯한 말을 해도 되느냐”는 질의에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16] 당시 일본 외무대신은 “한국은 독립국가로서 주권행위를 한 것이고…일본이 그 주권행위를 부인할 수는 없다”고 답변했다. 대놓고 인정할 수는 없으나, 잠자코 침묵할 수 밖에 없던 당시 일본의 처지를 보여준다. #[17][18]

5. 결말

대한민국 부근 60해리(111.1km) 해역이 모두 대한민국 영해라는 주장은 장기적으로 유지되기 어려웠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당시 국제법상으로 3~12해리(5.56~22.22km)가 영해인데 그보다 20배가 넘는 해역이 공해도, EEZ도 아닌 영해란 것은 끝까지 국제적으로 관철시키기에는 무리가 컸다. 결국 박정희 정부가 출범하고, 한일간 외교관계가 정상화됨에 따라 국제법에 의거한 영해 및 어업에 관련된 수역이 일본과의 협상에 따라 새로 지정된다.1965년 타결된 한일어업협정에 의거, 12해리(22.22km)를 자국의 EEZ로 선포하기로 한일 양국이 합의한다. 이렇게 근 10년 가까이 일본 선박의 출입을 막으며, 한국 어민들 단독으로 동해 60해리 수역에서 어업에 종사할 수 있었던 평화선이 철폐되었다. 평화선의 철폐와 한일어업협정의 조인과 함께, 일본은 대한민국에 9천만 달러를 어업협력자금으로 공여했다.

그러나 한국과 국교를 맺기 직전인 1965년 4월 일본은 한국 정부에 "다케시마(독도)의 불법 점거에 관하여 엄중 항의한다."라는 문서를 보내, 한국과의 국교 정상화에도 결코 한국의 독도 지배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지만[19] 한일어업협정 등을 거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자국 영해 침범을 이유로 일본 선박에 대한 나포행위를 벌인 국가는 비단 한국만이 아니었다 전후 일본은 반쪽짜리 국가 주변에 제대로 항의도 못하는 패전국 신세였기 때문에 한국은 물론, 대만과 중국, 소련까지 나서 공짜 선박을 얻을 기회로 보고 일본 선박을 실컷 나포했다. 그렇게 해서 1945년부터 1965년까지 20년 동안 나포한 일본 선박이 대만은 51척, 중국은 181척, 소련은 무려 1164척[20] 그외에 북한 9척, 미국 53척, 인도네시아 23척, 필리핀 13척, 호주 3척 순으로 나포되었다. 그리고 이들 역시 한국과 마찬가지로 억류한 선원만 풀어주고 나포한 배는 꺼억했다. 물론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행위. 일본의 국력도 국력이거니와, UN 해양법 조약상 연안국은 어족 자원과 관련하여 EEZ 내에서 타국의 선박을 나포할 수는 있어도 보석금이 지불되면 선원과 배를 반드시 그리고 신속히 돌려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엄밀히 법적으로만 보자면, 한국의 평화선은 아직 존재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근거가 된 법령이 아직 살아있는 상태이기 때문. 물론 실질적으로는 실(失)효된 법령이며 국제조약이나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법규는 헌법상 법률의 효력을 가짐에 따라 상위법 우선의 원칙에 입각하여 효력을 가지기는 힘들다.

6. 의의

영해로서의 평화선은 독도를 확실하게 지켜냈다는 결과를 안겼다. 일본이 지속적으로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하고 있지만 실효지배를 하는 국가는 대한민국이다. 또 목전에 앞둔 한일 회담에 임하여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는 일본에게 심리적 압력을 주어 유리한 고지를 점하는 동시에 한국 어족 자원을 보호하고 한국 주권을 내외에 선양한 이승만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로 꼽힌다.[21]

연합군 최고사령관 각서 677호 제6조에 '이 지령 가운데 어떠한 것도 포츠담선언 제8조에 언급된 여러 작은 섬들의 최종적 결정에 관한 연합국의 정책을 표시한 것은 아니다'라는 것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최종 합의문에는 아예 독도(Takeshima)라는 단어 자체를 삭제함으로써(초안에는 한국 측, 일본 측 오락가락 옮기다가 결국 삭제한 것이다.) 한국의 독도 주권은 완전히 인정받지는 못한 상태였다. 또한 미국은 러스크 서한을 몰래 한국에 보여주며(연합국은커녕 일본에게도 전달하지 않았다.) 한국에게 독도를 포기할 것을 은근히 요구하고 있었다.[22] 이렇듯 대한민국의 영토주권이 위태로울 때 직접, 실력 행사를 통해 수호하며 일본에게 충격을 안김으로써 더더욱 분명하고 확실하게 인식시킨 것이다.[23]

영해로 선포함에 따라, 한국 어민들도 폐지되기까지 근 1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어로 활동에 있어 굉장한 혜택을 봤다. 원칙적으로 일본 어선의 접근이 금지됐으니까... 비록 나중에 어로 활동과 관계된 한일 어업 협정을 체결했고, 1998년 일본이 한일 어업 협정을 파기했고, 김대중 정권은 신한일어업협정을 체결했지만 이때도 어업 협정을 통해 한일간 독도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또한 독도의 영유권과 연결할 수는 없다는 것이 한국 정부의 공식 입장이다.[24] 이 공적은 이승만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도 이것만큼은 인정하는 몇 안되는 업적으로 이승만의 탁월한 외교감각[25]을 엿볼 수 있었다.[26]

당연히 일본 극우에서는 독도 떡밥 관련해서 매우 치를 떨고 있는 사안이기도 해서, 독도 문제들로 싸울 때 이때 당한 것을 강조하고 있다.[27] 한국에서는 반민특위 강제해산 및 친일파 미청산 등의 문제로 인해 이승만을 친일적 인물로 보는 시각이 간혹 있는데, 이는 오해의 여지가 있는 시각이다. 역으로 일본에서는 평화선 설정으로 인해 이승만을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중에서도 가장 반일적인 대통령이라 인식한다.[28]

60해리는 울릉도에서 독도까지의 거리를 조금 넘는다. 독도처럼 자연섬이긴 해도 무인도의 경우 영해의 기점이 되는지 여부가 분쟁이 있을수 있으나[29], 60해리를 영해로 설정해버리면 명백한 영해의 기점인 울릉도 때문에 그런 논란과 아무런 관련없이 독도 주변까지 영해가 된다. 애초에 60해리로 결정한 기준이 독도때문임이라 추측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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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때 대한민국의 신군부 시절을 다룬 드라마 제5공화국이 일본에서 노년층을 상대로 컬트적 인기를 끌었다. 그들이 젊은 시절 경험한 도조 히데키의 군국주의 정부와, 뒤이은 미군정을 연상하며 군사정권의 암울한 분위기에 쉽게 몰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 우표는 우편요금을 납부했음을 알리는 일종의 증표인데, 일본은 독도를 한국영토로 인정하지 않았으니 한국이 자국령이라는 상징으로서 발행한 독도 우표도 우표(우편요금 납부확인 수단)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독도우표가 붙은 우편물을 우편요금 미납으로 처리한 것이다. [3] 그리고 일본은 1998년 프랑스 월드컵 까지 예선에서 대한민국에게 처참하게 박살나거나 지지리도 복도없어서 월드컵 본선을 밟아보지 못한다. 심지어 2002년 월드컵 개최를 놓고는 1996년 올림픽 축구에서 벌어진 한일전은 한국의 승리로 끝났고 이 때문에 일본의 월드컵 개최 논의는 흔들리게 되어 결국 한일 양국 공동 월드컵이 되었다. [4] 이를 간단히 말하면 미치광이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미치광이 전략이 장기적으로는 신뢰 하락과 상대방이 진짜 미친놈이라면 안 좋게 흘러간다는 점을 감안하면 큰 탈 없이 성공시킨 이승만은 분명 보는 눈은 있던 것이 틀림없다. [5] 이런 질문은 딱히 이상한 것도 아니라서 한국역사를 알면 절대 내뱉지 않았을, 한국은 일본의 지배를 35년간 받았기에 동질성이 있어서 한국인이 일본인을 환영할 것이다. 같은 말을 하기도 했다. [6] 해당 비석은 1950년 세워졌는데, 훼손된 지 62년이 지난 2015년 해상에서 조업 중이던 어민들이 발견하면서 다시 돌아왔다. [7] 대개는 평화선 내부 해역에서 조업하는 선박들을 나포했지만 평화선 바깥에서 조업하는 선박을 나포하는 경우도 있었다. [8] 애초에 역사적으로도 사이 나쁜 나라지만 해방 직전과 그 이후에도 일본은 한국에 좋은 걸 별로 한 게 없어서 소련이 쿠릴 열도로 밀고 들어오자 한반도 해방에 반대해준다면 류큐를 차지하는 것을 넘어가주겠다고 딜을 걸고 미국과도 어떻게든 한반도만은 유지하려고 기를 썼고 실패한 후에도 조선총독부가 의도적으로 화폐를 발행해서 인플레이션이 일어났으며 끝내 식민지 시절에 있던 문제는 하나도 해결하지 않고 떠났다. 한국 입장에서 보면 도움 하나 되어준게 없었는데 슬금슬금 기어들어오니 '우리땅에서 꺼져라' 같은 반응도 당연한 것. [9] 이 부분은 현재까지 일본 네티즌들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근거로 쓰고 있다. 한국이 침략해서 일본 어부들을 죽이고 독도(다케시마)를 점령했다고 인식하는 듯하며 한술 더 떠서 일본 방송에서는 독도 거주민으로 날조까지 했다. 그러나 같은 논리대로라면 이승만이 평화선에 쓰시마 섬은 포함 안 시킨 것을 설명할 수 없다. 이승만은 독도뿐 아니라 쓰시마 섬에도 1949년부터 1951년까지 영유권 주장을 했기 때문이다. 미국이 확실하게 쓰시마의 영유권을 결정지은 게 1951년 7월이니 반년이나 되는 간극은 있었던 것. 어떻게 보면 독도는 확실히 우리 땅이라 할 만한 근거가 충분하니까 평화선이라는 배짱을 부린 것이고 쓰시마는 빈약하니까 일부러 안 넣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도 쓰시마가 한국땅이라 주장할 만한 근거는 없거나 대단히 빈약한 실정. [10] 잘 보면 소총과 기관총을 겨누고 있다. [11] 이는 한국이 6.25 전쟁 중이었던 영향도 컸다. [12] UN의 전신이 바로 2차 대전 당시 연합국이었다. 한국전쟁 개전과 함께 UN사무총장에게 UN기를 인수받으며 연합군사령부는 유엔군사령부로 승계되었다. [13] 물론 당시 일본은 지금의 일본과는 차이가 컸다, 당장 무리하게 벌인 태평양 전쟁의 결과 국토가 황폐화되었고 1952년까지 주권을 회복하지 못해 지금처럼 발언권이 크지 않았다. 물론 그건 북한과 전쟁하던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였지만, 당시 대한민국은 당장 연합군vs공산군 구도로 열린 냉전시대의 첫 대리전, 즉 레드팀과 블루팀의 이데올로기 전쟁을 치르고 있던 입장이였기 때문에 서양권에서도 남한 정부의 눈치를 어느 정도 볼 수밖에 없었으며, 당장 수 년 전 추축국으로 전과가 있던 일본이 그 분위기를 자기 쪽으로 유리하게 바꿀 힘은 없었다. [14] 여기에는 8.15 광복 이후 미처 몸을 빼내지 못한 히키아게샤도 포함되어 있었다. [15] 이승만이 일본을 적성국으로 인지했다는 방증이다. 냉전시기 적성국이었던 중공의 Il-28 폭격기가 한국측으로 날아와 귀순했을 때, 조종사들은 (불시착 과정에서 사망한 1명을 제외하면) 의사대로 한 명은 대만으로, 한 명은 중공으로 인도하고 기체는 그대로 한국이 먹은 다음 적성무기 연구에 이용했다. 돌려달라는 중공의 요구는 가볍게 씹혔으며(엄밀하게는 사실과 조금 다른 게, 대한민국에서 주고 싶어도 당시 대만수교를 구실로 중공 쪽에서 씹기도 했다.), 중공 민항기 불시착 사건 때까지 적성국 기조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16] USS 미주리 함상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을 끝낸 인물이자 윤봉길 의사에 의해 다리짝이 날아간(...) 바로 그 인물이다. [17] 이영훈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는 이승만의 평화선 선포로 비로소 독도 대한민국의 영토로 굳어졌다고 보았다. [18] 그런데 정작 이영훈 본인은 유튜브 방송에 나와서 "한국 정부는 독도가 역사적으로 고유한 영토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국제사회에 제시할 객관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 게다가 대한제국 칙령 41호의 '석도'가 독도라는 한국 정부 및 연구자들의 주장도 부정하고 있다. 여기서 이영훈의 자가당착이 드러나는데, 이영훈의 논리대로라면 독도는 한국의 고유영토도 아니고 '석도'도 독도(이영훈은 석도가 일본 학자들 주장대로 '관음도'라고 보고있다.)가 아니므로 한국의 '고유영토론'도 '무주지 선점론'도 성립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영훈은 무주지 선점론을 내세운 시마네현 고시에 의해 독도는 일본영토라고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승만은 미 군정에 의해 일본이 주권을 상실한 틈을 타 일본 영토를 침략으로 강제로 빼앗은 것이 된다. 이 행위야말로 자신이 그토록 비난한 ‘반일 종족주의’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이고 질 나쁜 사례 아닌가? 그러나 이승만 비판에 대해선 가장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그가 여기에 대해선 말이 없다. 오히려 그걸 이승만의 업적이라고 추켜세우는 등(물론 이것은 좌우 막론하고 이승만의 중요한 업적이 맞다. 그러나 좌우 어느 쪽이든 이것이 남의 영토를 침략으로 빼앗은 것이라고 보진 않는다.) 모순된 발언을 하고 있다. [19] 출처: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3권/ 29쪽 [20] 이 시기의 소련측의 일본 어선 나포 수치는 소련령으로 재편입한 사할린 북방 4도지역에서 단속된 인원들의 숫자도 포함되어 있다. [21] 許政, 《雩南 李承晩》, 1970, 太極出版社, p. 333-334 [22] 미국이 이런 오락가락하는 태도는 한국전쟁의 전개양상에 영향받은 바가 크다. 대한민국이 전세에 우위를 차지하고 있을 때에는 독도 영유권에 대한 해석이 대한민국에 유리하게 전개되었으며, 공산군에 의해 수세에 몰리며 대한민국 정부의 존립 자체가 불투명할 때에는 일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곤 했다. [23] 이승만의 단호함은 반공포로 석방 사건 등에서도 드러나며, 적절한 약팔이(...)와 벼랑 끝 전술을 통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엄청난 수확을 가져다주었다. [24] 독도가 EEZ 안에 들어옴에 따라 일본의 발언권이 강해졌다는 의견도 있고 외환위기 시절이다 보니 일본 자금을 들여오기 위해 정권이 몸이 달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낭설에 불과하다. [25] 당시 일본은 패전 직후라 주권이 없는데다 당연히 해군도 없는 상태라서 지킬 수 없었고, 미국은 공산군을 막느라 정신이 없었다. [26] 이승만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은 한국인 박사 1호임을 상기하자. [27] 일본 내에 존재하는 독도 영유권 주장 관련 전시관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평화선 관련 언급이다. 한편 한국 관광객 유치에 힘쓰는 시마네현 본토와는 달리 오키노시마초 지역이 유독 독도 영유권 주장에 극성인 것 역시 어업 이권 문제와 연관이 크다. [28] 실제로도 위의 월드컵 때의 일화에서 보듯 이승만은 매우 반일 성향이 강했다. 애초에 조선시대에 태어나서 1904년에 대한제국의 국체보존을 위한 임무를 띄고 미국으로 갔으니 경술국치 6년 전부터 반일 활동을, 그것도 광복 때까지 쉼없이 하였다. 그의 사망 당시 나이가 90이었으니 인생의 반 가까이 반일 독립운동에 힘쓴 사람이니 오히려 가장 반일적인 대통령인 게 당연하다. [29] 현재에도 논란은 있으나 대체로 독도의 경우 EEZ의 기점은 될 수 없어도 영해의 기점은 된다는 해석이 우세하다. 2019년 러시아 비행기에 경고사격을 가한 사건에서도 독도를 기점으로 한 영해와 영공을 침범당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