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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ece5b6> 진
晉 | Jin Dynasty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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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의 노란색 부분 (280년 기준) | ||
265년 ~ 317년 | ||
<rowcolor=#ece5b6>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조위 | 전량 | |
전조 | ||
성한 | ||
대 | ||
동진 | ||
별칭 | 서진(西晉), 사마진(司馬晉) | |
위치 |
중국
화북 → 중국, 베트남 북부 |
|
수도 |
낙양(洛陽) (265년 ~ 313년) 장안(長安) (313년 ~ 317년) |
|
면적 |
3,100,000km² (280년 기준)[1][2] 5,430,000km² (281년 기준)[3] |
|
인구 | 35,000,000명 (300년 기준) | |
민족 | 한족 | |
언어 | 중세 중국어, 한문 | |
문자 | 한자 | |
종교 |
대승 불교,
유교,
도교 중국 토속 종교 |
|
화폐 | 오수전, 원형방공전 | |
정치체계 | 전제군주제 | |
국가원수 | 황제 | |
국성 | 하내 사마씨 | |
주요 황제 | ||
현재 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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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국호는 진(晉)이지만 대중적으로는 동진 시대나 다른 진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서진(西晉)'으로 불리며, 간혹 북진(北晉), 사마진(司馬晉)[4]이라고도 한다. 수도는 낙양(265년) → 업(304년) → 낙양(304년) → 장안(304년) → 낙양(305년) → 장안(311년)사마의의 후손들이 삼국을 통일한 중국의 고대 국가. 사마씨 정권은 정변으로 조위 황실을 무력화하고 실권자로서 촉한을 멸망시킨 후 그 영토를 완전히 계승했고, 황제국이 된 이후엔 손오의 영토를 합병했다. 서진 강역의 최북부는 현재 산시성, 허베이성 및 랴오닝성, 한반도 일부이며 동쪽에는 황해까지, 남쪽은 현재 베트남 북부, 서쪽에서는 간쑤성과 윈난성까지를 차지했다. 면적은 대략적으로 통일 당시 543만 평방 킬로미터였다.
서진 시대의 경제 기반은 여전히 이전 시대와 같은 장원 경제였다. 서진이 전국을 통일한 후 전란이 진정되면서 사회 질서와 생산력이 회복되었으며 팔왕의 난, 영가의 난 같은 내전 이전에는 경제가 번영하여 높은 인구 증가율과 행정력 확보를 보였다. 진무제는 조위의 둔전제를 폐지하고 점전제를 실시하여 왕공귀족 관료들과 평민이 신분적 지위에 따라 얼마나 많은 논밭을 차지하는지 규정하였는데, 객관적으로 점전제는 둔전제에 비해 농민의 부담을 어느 정도 덜어주고 농업의 부흥을 촉진시켰으며, 세가귀족들의 경제적 특권을 법적으로 보호받게 하였다.
서진의 군사는 기본적으로 조위와 마찬가지로 세병제(世兵制)를 채택하고 있는데, 즉 군호는 대대로 병사를 삼았다. 서진의 군대는 지방군과 중앙군으로 나뉘었다. 중앙군은 중군, 중군은 서진 조정에 직속되어 경사에 주둔시키고, 지방군은 지방도독의 외군과 주군의 지방도독이 통솔하는 주군병으로 나뉘었다.
서진은 통일 20년 만에 팔왕의 난을 겪고 30년 만에 다시 분열되었다. 중국 역대 통일 왕조 중에서는 진나라, 수나라에 이어 3번째로 단명했으나, 진(秦)이나 수가 통일하고 얼마 못 가 완전히 멸망한 것과 달리 이 나라는 지방정권으로는 백여 년 넘게 지속되었기 때문에 국가 자체로선 꽤 오래 가긴 했다. 삼국지 엔딩의 허무함 때문인지 사마씨 진나라가 단명정권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건국~삼국시대 기간+통일왕조 기간+동진으로 따지면 155년 이어졌는데 의외로 중국사 주요 왕조 평균수명을 훨씬 상회하는 장수 국가다. 서진 이후 화북에는 오호십육국시대가 시작되고, 진나라는 강남으로 수도를 옮겨 간신히 명맥을 이어간다. 여기서 일단 말해둘 것은 서진과 동진이 왕조가 그대로 이어지므로 진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책인 진서도 동서진 둘을 모두 다루고 있음이다. 서진 이후 중국은 통일왕조가 수백 년 등장하지 못하고 혼란을 겪다가 수나라 대에 이르러서야 통일된다.
2. 역사
진나라의 전체 존속 기간은 265년 ~ 420년이다. 일단 왕조 자체의 존속 기간은 155년으로 중국사 왕조치고는 나름대로 상당 기간 동안 명맥은 유지했다. 이 가운데 수도가 화북에 있었던 316년까지 기간을 서진, 수도가 강남에 있었던 317년부터 기간을 동진(東晉)이라고 나누어 부른다(공백 기간 1년).249년 | 고평릉 사변 |
263년 | 사마소가 진공으로 책봉 |
263년 | 촉한 정벌 |
264년 | 사마소가 진왕으로 책봉 |
<colbgcolor=#aaf782> 265년 | 사마염이 황제로 즉위 / 서진 건국 |
279년 | 독발수기능 격파 |
280년 | 손오 정벌, 천하 통일 |
291년 | 가남풍의 쿠데타 |
300-307년 | 팔왕의 난 |
307-311년 | 영가의 난 |
316년 | 장안의 임시 정부 함락 |
317년 | 건강에서 사마예 즉위 → 동진 |
2.1. 진나라의 시초, 위나라의 권신
처음 조조의 후계자 경쟁에서 조비를 지지함으로써 친위 세력으로 입지를 다진 사마의는 총사령관으로써 제갈량의 북벌을 막고 동연을 붕괴시키면서 조정내에서 입지를 키워 조예의 임종 당시 조진의 아들 조상과 함께 탁고대신이 된다. 조비와 그 아들인 조예가 죽은 뒤 나이 어린 조방을 끼고 실권자로 군림하던 조상은 나날이 부패하여 조정 내에서 원망이 많았다. 사마의는 강력한 조정, 군부 내의 입지와 조상의 실정을 바탕으로 해서, 조상을 정시정변( 고평릉 사변)으로 축출하고 사마의 자신이 위나라의 실권자로 군림했다. 과거 조조가 헌제를 앞에 놓고 무자비한 권력을 휘두르던 상황이 비슷하게 재현된 것이다. 이때가 249년, 사마의의 나이 71세였다.2년 후, 가평 3년(251년)에 사마의가 병사하고 그의 맏아들인 사마사가 권력을 잡았는데 가평 6년(254년), 사마사는 하후현등을 동원하여 자신을 폐하려던 조방을 역으로 폐하고 조모를 황제로 세웠다. 이듬해 사마사가 반 사마씨 반란인 관구검-문흠의 난을 평정한 뒤 죽고 그의 동생 사마소가 새롭게 정권을 잡았다. 감로 2년(257년), 정동대장군 제갈탄이 다시 반 사마씨 반란을 일으켰는데 사마소는 황제를 데리고 동정을 떠나 수춘을 에워쌌으며 이듬해 수춘이 무너지고 제갈탄은 죽임을 당했다. 감로 5년(260년)에 황제 조모는 사마씨의 꼭두각시가 되는 것이 달갑지 않아 수백 명의 하인을 거느리고 사마소의 관저로 진격하다가 죽임을 당한다. 사마소는 죽은 조모를 서인으로 폐한 뒤 조환을 황제로 세웠고, 이로써 조위 정권은 완전히 사마씨의 통제를 받았다. 이렇게 왕릉, 이풍, 하후현, 관구검, 문흠, 제갈탄, 조모 등 몇 차례의 반 사마씨 세력과의 투쟁을 거치면서 조위에 충성했던 내외세력은 대체적으로 제거되었다. 사마사와 사마소는 이런식으로 조정에서 절대적인 지위를 굳혀나갔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사마사 사망 후 사마소는 개국의 공으로 삼기 위해 촉한 정벌에 착수하여 263년 촉한 정벌이 한창 진행되던 중 연이어 승전보가 울리자 전쟁 중인 10월 진(晉)의 공작까지 올랐다. 사마소는 병주의 태원(太原), 상당(上黨), 서하(西河), 악평(樂平), 신흥(新興), 안문(雁門), 사주(司州)의 하동(河東), 평양(平陽), 홍농(弘農), 옹주(雍州)의 빙익(馮翊) 10개 군, 사방 총 700리인 토지를 받았는데 이 지역은 옛 진나라(晉)의 영토로서 사마소는 이 토지를 위나라 마지막 황제 조환에게서 받아내고 진(晉) 공국을 세워 진공(晉公)으로 봉해지고 구석을 받았다. 이렇게 263년 10월, 후세에 서진, 동진 합쳐서 155년간 황제국 진나라로서 존속하는 나라가 공식적으로 처음 역사에 등장했다. 또한 진나라의 관부 설치는 일체 이전의 제도에 따르도록 했다. 아직 제국은 아니었지만 실질적으로 진나라는 이렇게 시작한 셈이다. 괜히 사마소가 태조의 묘호를 받은 게 아닌 것이다.
그리고 263년 11월, 결국 촉한은 진공 사마소가 보낸 정촉군에 의해 멸망했다. 이 공으로 이듬해 3월, 사마소는 다시 왕으로 진봉받아 자그마치 20개 군을 거느렸다. 하지만 정작 사마소는 중풍으로 265년 9월에 죽고, 이러한 건국의 기반은 고스란히 아들 사마염에게로 이어졌다. 이렇게 사마염 이전에 나라의 기틀이 다 잡혔고 사마염은 그걸 받아먹은 것이 대부분이라, 사마염은 사마의와 사마사 그리고 사마소를 고조, 세종, 태조로 추존하고 자신은 실제 초대 황제임에도 세조의 묘호를 받았다. 대체로 태조 묘호는 조조 정도를 제외하면 실제 초대 황제가 받는 경우가 많은데 특이한 사례다.
2.2. 통일 제국의 개창
함희 2년 12월.(265년) 사마소의 뒤를 이어 진왕이 된 사마염은 조위가 내세운 선양 시스템을 통해 조환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위나라의 제위를 계승하여 황제에 올랐다. 그 방법이 위나라가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흥기한 과정을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조조도 근본적으로는 한 황실의 권위를 이용해서 세력을 구축한 뒤, 후한의 근왕 세력을 주륙하고 위왕에 올라 찬탈의 모든 준비를 끝내놓아 조비가 안정적으로 선양받게한 인물이라 도긴개긴이다. 그러나 조조는 헌제에게 불려와서 뿌리박았고 사마염은 사마의부터 시작해서 4대째까지 이어져 내려온 거라 급이 살짝 다를 수도 있다.진나라는 동한 말기부터 조위까지의 할거 국면을 이어받아 지방에서는 호족의 영향력이 제왕보다 훨씬 컸다. 예를 들어 사마씨 자체가 호족 권신으로 조위 조정을 장악하고 결국 위나라를 찬탈하여 자립한 것이었다. 그래서 사마염은 위나라를 찬탈하여 서진을 건국한 후, 다른 호족과 권신들의 본을 피하기 위해 각 종실의 구성원을 왕으로 나누어 봉하고, 지방에서 황실을 지키는 힘으로 삼았다. 동시에 '전지를 점거하는 명령'을 공포하여 호족이 소유한 전지의 면적과 양을 제한했다.
전신이었던 위나라는 황족과 외척들에게 권력을 주지 않고, 방계 친척들 위주로 근황 세력을 구축하다가[5] 그들이 사마씨에 의해 숙청되면서 군권이 사마씨를 비롯한 호족 세력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권력을 잃고 나라가 망했는데, 사마염은 그런 위나라의 쇠망 과정을 막으려고 황족들의 권력을 상대적으로 강화시켰다.
2.2.1. 이봉취진
태시 2년 초. 진무제는 가까운 종친들을 근황세력으로 육성하기로 결정했다. 공신들을 고위 관직에 임명했을 때, 여러 종친들을 제후왕으로 책봉했다. 이를 이봉취진(移封就鎭) 정책이라고 한다. 제후왕으로 책봉된 종실 목록은 다음과 같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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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서진 종실 27인 | |||||
<rowcolor=#ece5b6> 이름 | 자 | 출생연도 | 가족관계 | 책봉 | 식읍(호) | |
사마부(孚) | 숙달(叔達) | 180 | 사마팔달 삼남 | 안평왕(安平王) | 40,000 | |
사마망(望) | 자초(子初) | 205 | 부(孚)의 차남 | 의양왕(義陽王) | 10,000 | |
사마홍(洪) | 공업(孔業) | 불명 | 망(望)의 차남 | 하간왕(河間王) | 없음 | |
사마무(楙) | 공위(孔偉) | 불명 | 망(望)의 사남 | 동평왕(東平王) | 3,097 | |
사마보(輔) | 불명 | 불명 | 부(孚)의 삼남 | 발해왕(渤海王) | 5,379 | |
사마황(晃) | 자명(子明) | 불명 | 부(孚)의 오남 | 하비왕(下邳王) | 5,176 | |
사마괴(瓌) | 자천(子泉) | 불명 | 부(孚)의 육남 | 태원왕(太原王) | 5,496 | |
사마규(珪) | 자장(子璋) | 235 | 부(孚)의 칠남 | 고양왕(高陽王) | 5,570 | |
사마형(衡) | 자평(子平) | 불명 | 부(孚)의 팔남 | 상산왕(常山王) | 3,790 | |
사마경(景) | 자문(子文) | 불명 | 부(孚)의 구남 | 패왕(沛王) | 3,400 | |
<rowcolor=#ece5b6> 이름 | 자 | 출생연도 | 가족관계 | 책봉 | 식읍(호) | |
사마권(權) | 자여(子輿) | 불명 | 규(馗)의 장남 | 팽성왕(彭城王) | 2,900 | |
사마태(泰) | 자서(子舒) | 불명 | 규(馗)의 차남 | 농서왕(隴西王) | 3,200 | |
사마수(綏) | 자도(子都) | 불명 | 규(馗)의 삼남 | 범양왕(范陽王) | 없음 | |
사마수(遂) | 자백(子伯) | 불명 | 순(恂)의 장남 | 제남왕(濟南王) | 없음 | |
사마손(遂) | 자제(子悌) | 불명 | 진(進)의 장남 | 초왕(譙王) | 4,400 | |
사마목(睦) | 자우(子友) | 불명 | 진(進)의 차남 | 중산왕(中山王) | 5,200 | |
사마릉(陵) | 자산(子山) | 불명 | 통(通)의 장남 | 북해왕(北海王) | 4,700 | |
사마빈(斌) | 자정(子政) | 불명 | 통(通)의 차남 | 진왕(陳王) | 1,710 | |
<rowcolor=#ece5b6> 이름 | 자 | 출생연도 | 가족관계 | 책봉 | 식읍(호) | |
사마량(亮) | 자익(子翼) | 불명 | 의(懿)의 삼남 | 부풍왕(扶風王) | 10,000 | |
사마주(伷) | 자장(子將) | 227 | 의(懿)의 사남 | 동완왕(東莞王) | 10,600 | |
사마간(幹) | 자장(子良) | 232 | 의(懿)의 육남 | 평원왕(平原王) | 11,300 | |
사마준(駿) | 자장(子臧) | 232 | 의(懿)의 칠남 | 여음왕(汝陰王) | 10,000 | |
사마융(肜) | 자미(子微) | 불명 | 의(懿)의 팔남 | 양왕(梁王) | 5,358 | |
사마륜(倫) | 자이(子彛) | 불명 | 의(懿)의 구남 | 낭야왕(琅邪王) | 없음 | |
사마기(機) | 태현(太玄) | 불명 | 소(昭)의 칠남 | 연왕(燕王) | 6,663 | |
사마유(攸) | 대유(大猷) | 248 | 소(昭)의 차남 | 제왕(齊王) | 없음 | |
사마감(鑒) | 대명(大明) | 246 | 소(昭)의 육남 | 낙안왕(樂安王) | 없음 |
왕은 물론이고 심지어 군권까지 쥐어주었는데, 이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사마염의 숙부 사마주와 사마준으로, 이 두 사람은 각기 동관왕(東莞王)과 부풍왕(扶風王)으로 책봉되어 오나라와 선비족을 상대로 전선에 나갔다.
당시 진나라의 주요 적국은 강남의 오나라와 농서의 선비족이었다. 이에 농서의 선비족을 관리하기 위해 따로 진주(秦州)를 설치하고 현지 출신인 호열을 자사로 앉혔지만, 터질 반란은 터지기 마련인지라 끝내 270년에 선비족의 독발수기능이 들고 일어나 호열과 견홍 등을 죽이고 진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선비족은 서량을 마음껏 유린했고, 사태를 수습하라고 보내려던 가충은 적절하게 자기 딸을 태자비로 삼는 꼼수를 부려서 부임도 안 했다.
한편 당시 오나라에는 손호가 황제였는데, 그는 폭군의 전형처럼 무리하게 무창으로 천도했다가 재정만 악화시키고 돌아오거나, 신하를 그 자리에서 살해하여 호랑이의 식사로 뒷산에 던져주고, 또 궁녀를 5,000명이나 징발하는 등 수많은 학정을 펼쳤다. 또한 외치 역시 폭군의 전형대로 사마염이 즉위하자마자 이를 깔보고 평화조약을 폐기하며, 예언만 믿고 무리하게 북벌을 추진하다가 그만 폭설에 갇혀서 동사할 뻔 했다. 태시 5년(269년), 사마염은 양호를 보내 군사 요충지인 형주를 지키고, 양호는 형주에 진수한 후 세금을 줄이고 민심을 안정시켰다. 양호는 심리전으로 승리하는 전략을 취하여 오군에게 큰 은혜를 베풀었다. 당시에는 손호가 돈을 헤프게 쓰는 바람에 오나라 부대 사병들은 늘 급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양오는 오군에게 술과 고기를 보내 오군을 와해시키라고 명령했다. 가끔 오군이 와서 투항하자 양호는 오군이 오면 환영하고, 가면 환송하라고 명령했다. 이렇게 사마염은 양양에서 양호에게 인덕으로 오군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명하는 한편, 장강 상류의 익주에서 수군을 훈련시켜 전선을 건조시켰다.
한편 독발수기능이 있는 서북부 지역은 다행히 부풍왕 사마준이 선비족의 우두머리인 독발수기능을 밀어내는 데 성공하고, 진나라에는 양호, 오나라에는 육항이라는 두 명장이 있어서 서로 대치하며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274년에 육항이 죽자 양호는 장화, 왕준, 두예와 함께 오나라 정벌을 극력 주장하기 시작했지만, 이에 맞서 가충, 풍담, 순욱 등의 일파는 선비족이 먼저라면서 씹었다. 이에 양호는 결국 오나라 정벌을 보지 못하고 사망한다. 279년에 때마침 마륭이 독발수기능을 참살하자 진나라는 280년에 가충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사마주, 왕혼, 두예, 왕준 등으로 대대적인 오나라 침공을 개시했다. 10년에 걸친 충분한 준비 끝에 279년 진군은 오나라의 주병력이 곽마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교주로 떠나있는 틈을 타서 오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한 전쟁을 시작하였고, 20만 명의 진군은 동오를 공격하여 한 갈래는 서주에서 건업을 직격하고, 한 갈래는 형주로 밀고 들어가며, 다른 한 갈래는 익주에서 장강을 따라 내려간 결과, 마침내 진나라는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을 완수했다.
2.3. 서진 제국의 명암
2.3.1. 태강지치의 번영
이렇게 해서 사마염의 진나라는 천하 통일을 달성하고 삼국시대의 최종 승자에 올랐다.대개 혼란기를 거쳐 새로 만들어진 제국들은, 그때까지의 폐단이 혼란기를 거치면서 무너져내렸기 때문에 새로운 문화를 빚어내는게 보통이다. 그러나 서진은 조위가 폐단을 나타내기도 전에 조씨 황족을 숙청하고는 찬탈하면서 건국했기 때문에 위나라의 기반을 그대로 이어받았다.[6] 그래서 서진은 이러한 한계를 벗어나고자 전란기의 군벌 집단을 기반으로 성장한 위나라가 필연적으로 지니고 있던 전제적 · 법가적 정책 방향 부정, 지방 사회가 붕괴되면서 강고한 기득권 집단으로 굳어진 문벌들의 귀족적 · 퇴폐적 사회 풍조를 단속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아 나갔다. 이에 그 대안으로 내세운 것이 후한시대 이래 흐트러진 유교 질서의 회복이었다.[7]
이에 따라 재위 초기 사마염은 여러 측면에서 유교적 예법을 준수하며 관대하고 검소한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즉위한 직후부터 사마염이 직접 사마소와 왕원희의 죽음을 3년간 심상(心喪)하면서 유명무실해져 있던 3년상을 부활시킨 것은 곧 가족적 윤리와 국가적 충성을 동일시하는 한대 유교의 국가 운영 논리를 복구하려는 시도였다. 이외에도 간관(諫官)을 설치하고 비판을 관대하게 받아들였으며, 278년 11월 신사일에 태의사마 정거(程據)가 꿩의 머리털만 모아서 만든 옷인 치두구(雉頭裘)라는 가죽옷을 바치자 이를 태워버린 일화가 유명하다. 또한 오나라 전선을 지키던 석포가 반란을 꾀한다는 소문이 돌자 체포령을 내렸다가 석포가 알아서 자진 출두해오자 오히려 최고위관인 사도로 임명했고, 마륭의 능력을 믿어 그에게 독발수기능 토벌을 맡기는 등 사마염은 개인적인 악명은 있었어도 한편으로는 나름대로의 미덕이 존재하는 군주였다. 실제로 통일 이후 시기 사마염의 통치를 당시의 연호를 따서 태강지치(太康之治)라고 하며 서진 시기 준수한 통치의 일면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하여 새로운 업적을 남기기 위해 사마염은 낙양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일련의 조치를 취하여 점차 백성들을 전란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 나라를 발전의 길로 이끌었다. 조정은 개간 장려, 수리 건설, 노동력 확충, 감독 강화 등의 방면에서 농업 생산을 촉진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사마염은 즉위 초인 태시 2년(267년)에 농업 생산을 장려하는 조령을 공포하였다. 대표적인 예시로 태시 5년(270년)에 급군태수 왕굉이 조정의 뜻을 성실히 이행하여 백성들을 부지런히 보살피고 잘 지도하여 5천여 경을 개간하도록 독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사마염은 새 관개수로들을 건설하여 1500 경 양전(良田)에 관개하도록 명령하였다.
또한 서진의 등장으로 조위의 둔전제가 264년 폐지되면서 경작은 일반 민중이 담당하게 되었으며, 그 수입으로 군비의 대부분을 감당했다. 민둔이 폐지된 이후 귀족과 관료들은 앞 다투어 토지를 침범하여 호적을 은닉하였다. 원래의 둔전객이나 세력있는 호족집안, 또는 무위도식하는 상인들과 함께 군 복무를 한 사람 중 절반이 농업생산에 종사하지 않았다. 그래서 둔전제가 몰락하기 시작한 조위 말년에는 농업은 황폐하고, 국고는 텅 비었으며, 백성들은 궁핍했다. 이에 맞서 280년 동오 왕조를 멸망시켜 전국을 통일하자마자 사마염 치세 서진은 화북을 중심으로 한 지배질서의 회복과 농업생산의 부흥에 착수했는데, 당시 중국에서는 호족들이 대토지를 소유하면서 일반 백성들이 몰락하는 사회적 문제가 일어났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이를 막기 위하여 토지제도를 정비하기 위한 여러 조치를 취한다. 이중 사마염이 가장 먼저 실시한 것이 바로 새로운 토지제도인 점전과전제로 귀족의 토지 소유를 제한하고 서민에게 일정한 토지를 소유하게 할 목적으로 실시한 제도가 바로 점전과전제라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점전제는 서민을 보호하는 정책이기도 하나 정부 소득을 보호하면서도 사족적 특권 역시 보호하는 토지제도다. 우선 점전제는 공식적으로 백성들에게 논밭을 수여하는 것도 아니고 지주인 호족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수여하는 것도 아니다, 대신 조위의 둔전제가 파괴된 후 농민이 주인없는 황무지를 점유하고 개간하는 것을 허용한다. 점전제도는 관료사족의 밭 점유, 음객(荫客) 등 특권적 측면에 대한 규제보다는 기득권이 이미 점유한 토지와 인구를 확인하고 보호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러나 둔전제 하의 농민에 비해 군사통제하의 강제근로를 해소하고 토지를 소유하는 것은 농민의 생산 의욕을 높이고 사람들의 황무지 개간을 장려하게 했다.
종합하면 한계가 있긴 하지만 이 제도는 귀족이나 관료에게는 관품에 따라 토지의 한도를 정해 무분별한 토지장악을 규제하려는데 의의가 있었으며 이는 소농민에 대한 국가 규제의 재시도라는 평가를 받는다. 서진 말기의 동란기에 점전제와 과전제는 없어졌다, 그러나 5세기에 북위에서 등장하는 균전제나 유가적 이상으로 꼽히는 정전제처럼 국가에서 양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해주고 토지세를 징수하는 국가 수전제도의 한 예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8]
이렇듯 농업 진흥책과 조치 시행을 통해 농업 생산이 빠르게 발전하자 경제는 다시금 번영하게 되었다. 사마씨에 비판적인 사서인 진서에서조차 "당시에 천하에 사고가 없고, 조세가 균등하며, 사람이 일을 함에 있어서 그 일을 즐겁게 했다"고 했다.(진서 식화지) 당시 하락(河洛, 황하와 낙양을 일컫는 중원 지역) 지역의 경제 및 사회 발전 상황을 반영하여 '소와 말이 들판에 흩어져 있고 남은 곡물이 이랑에 널려 있으며 여행자들을 위한 초가집과 마을 밖 건물들이 폐쇄되지 않고 사람들이 친족처럼 만난다. 부족한것이 있으면 도로에서 자금을 조달한다"고 말했다.(진기 총론) 그래서 '천하에 가난한 사람은 없다'는 속담도 있었다.[9] 천하가 안정되고 이에 따라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인구도 빠르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진서 지리지에 따르면 태강 원년(280년) 당시 전국에는 245만 9천 840호가 있었고 인구는 1616만 3천 863명이 있었다. 새로운 토지제도인 점전 및 과전법 공포 후 3년차인 태강 3년(282년)에는 진 정부가 파악한 수치로 전국에 377만 호가 있었다. 이는 후한말 삼국시대에 감소된 많은 인구를 다시 정부가 등록시켰음을 나타내며 현대 학자들은 가남풍과 장화 등이 죽고 팔왕의 난이 격화되어 서진의 혼란기가 막 시작되려던 진혜제 원강 원년(300년)에 서진 인구가 3,500만까지 회복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10]
서진은 제2의 사마의가 나타나지 않게 면밀한 제도 개혁과 위나라의 각박한 전시 체제 완화에 노력을 기울였다. 훗날 등장하는 유유나 소도성은 이 때문에 사마의와는 꽤 다른 방식을 연구해서 실천해야 했고 실은 바로 그것이 전 황실을 몰살하는 좋지 못한 풍습의 근원적 원인이 되었다. 유유가 각별히 잔인한 것은 이유가 아니었다. 당대의 낙양지가귀의 고사를 만든 좌사의 『삼도부』에서는 극도로 성대하고 화려한 서진 사회의 단면을 찾아볼 수 있다.[11]
2.3.2. 태강지치의 그림자
서진시대의 이상기후 빈도 |
이 시기 중국을 다스리던 서진은 고위 문벌귀족들의 극에 달한 사치와 대비되는, 오히려 소빙하기가 의심되는 자연재해에 시달리고 있었다. 태양의 흑점 활동부터가 중국 역대 어느 왕조보다도 자주 관측되었으며, 특히 271년부터 5년간은 아예 해마다 일식이 일어났다. 농업도 이상기후로 몸살을 앓았다. 계절풍이 위축되면서 화북에는 가뭄이, 강남에는 홍수가 일어나는 일이 잦아졌다. 초여름에 서리가 내려 싹을 틔운 보리가 다 죽어버렸고, 한여름에 우박이 쏟아져 익어가는 곡식들을 망가뜨리기도 했다.[12]
이러한 상황 속에서 농민들이 선택할 수 있는 활로는 많지 않았다. 사채를 쓰거나, 식객이 되거나. 여기에서의 식객이란 간단히 말해 중세 유럽에서의 농노를 생각하면 된다. 객 중에서도 고용인인 용객(傭客)이나 소작인인 전객(佃客)은 사회적으로 비천하게 취급받긴 해도 자신의 가계를 가지고 자기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분상으로 양인에 속하지만, 식객 즉 의식객(衣食客)은 주인에게 가계를 의존하여 의식을 제공받고 있었으므로 사실상 노비에 가까운 상태였다. 이들은 자의가 아닌 타의에 따라서 노동에 종사해야 되었고, 의식객에서 벗어나려면 그때까지의 부양비를 배상해야 되었다.[13]
결국 생업을 잃은 농민들은 개인의 비정상적인 권력과 부에 기생하는 존재가 되고, 얼마나 탈법을 용서받을 수 있는지에 따라 부와 권력의 자기확증이 일어났다. 한마디로 말해, 개인이 소유하는 노비와 사병들의 숫자가 엄청나게 불어난 것이다. 특히 노비와 사병들은 떠나봤자 영위할 만한 생업이 없기에 그 주인의 눈에 들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 진서》 <외척전>에는 양수가 원리원칙 없이 마음대로 사람을 선발했지만, 부하들이 양수의 눈에 들기 위해서 목숨을 내던지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돈을 모으는 방법 자체도 굉장히 악질적이었다. 석숭은 형주자사로 지내면서 지나가는 사신이나 상인을 겁박해 가지고 있는 물건을 약탈하고,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상인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양수는 국가 관청에까지 사채를 씌울 정도였으며, 왕융은 장원과 상업을 경영하던 거대 자본이었는데도 종자가 아까워서 씨에 구멍을 뚫어서 팔았다. 상황이 이 정도면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뇌물수수와 부정부패는 애교일 정도다.
분쟁은 돈이 아니면 이기지 못하고, 관직은 돈이 아니면 트이지 못하고, 원수는 돈이 아니면 풀지 못하고, 명성은 돈이 아니면 떨치지 못한다. 붉은 옷을 입고 요직을 담당한 낙양의 사족들이 나 가형(家兄)을 좋아하는 것이 모두 끝이 없어서, 나의 손을 잡고 시종 나를 안고 있으니, 무릇 지금 사람들은 오직 돈만 알 뿐이다.
《자치통감》 원강 9년(299), 노포의 <전신론>(錢神論)
이렇게 경제 기반이 붕괴되어가는 마당에 정권을 잡은 소수의 거대문벌에게 극단적으로 부와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은 반대로 이러한 주류 카르텔에서 소외된 중소문벌들의 불만과 위기감이 축적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당장 팔왕의 난에서 막후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손수와
이함,
장방이 모두 중앙의 문벌 사회에서 멸시받던 중소문벌 출신의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어지간히 한이 맺혀있었던 저 인간들에게 완장이 한번씩 갈 때마다 무지막지한 피바람이 일어났다. 그나마 자기들끼리는 나름의 카르텔도 있어서 기싸움하며 적당히 건드리다 말았던 주류 문벌 귀족들이었지만 갑자기 힘이 생긴 저 외부자들에겐 그런 눈치 볼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황제가 하사한 산호수를 멋대로 깨먹고도 무사했던 석숭은 자기 애첩을 탐내는 손수를 무시하고 나서는 자기뿐 아니라 3족이 살아남지 못했다. 장방이 낙양을 무지막지하게 들쑤시고 다니며 온갖 인간 백정짓을 다 하고 다녔을 때 역시 중앙 귀족들은 그냥 칼로 베기 좋은 고깃덩어리였을 뿐이었다.《자치통감》 원강 9년(299), 노포의 <전신론>(錢神論)
2.3.2.1. 사상적 퇴보
서진이 표방한 유교 사상의 행보는 한밤중에 길 잃은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보여 사회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는 당시 유학자들이 시대에 발맞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환관과 외척 등의 족벌들에게 대항하던 사인층은 정계로 진출해 권력을 잡은 부류와 그렇지 못한 부류로 나뉘었는데, 전자는 부패한 정부에 발을 맞췄고 후자는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않았던 것이다.서진 때 명교라고 불리는 전통 유가의 경학은 쇠퇴했고 현학은 당시 학문의 주류가 됐다. 위진시대에 사마씨가 권력을 잡았을 때 정변과 반란( 고평릉의 변, 수춘삼반)이 여러 차례 발생하여 정국이 불안한데다 사마씨가 정권을 잡을때 옛 유교에 입각한 통치방식을 취하였는데 그럼에도 격동의 사회환경이 현학의 발흥을 촉진하였고, 서진 시대의 명사들 사이에 폭음이 유행하였으며 청담과 오석산을 낳았다.
사실 후한 시대까지는 광무제 덕분에 그럭저럭 유교 사상이 맥을 유지해오고 있었다. 광무제는 태학의 유학생이었고, 왕망의 한실 찬탈 때 어용으로 이용당하는 유교 사상에 심각한 문제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후한 시기에는 광무제의 개혁 이후로 뛰어난 유학생들이 다수 배출되었으며, 어리고 어수룩한 황제들이 환관 손에 놀아나기 시작하자 유학자들은 여러 방면으로 태클을 걸었다. 이후 환관들의 유학 탄압이 시작되자 관직을 내려놓고 중앙정부를 떠나 백성과 고락을 함께 하면서 학문을 계속한다. 이들을 은자隱子라고 불렀으며, 후한에는 은자들이 유학의 맥을 잇고 있었다. 사회가 혼란스러워짐에 따라 이상적인 가르침보다는 현실을 인식하고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집중하는 현실 참여형 유학자들도 대거 등장한다.
이런 현실 참여형 학자들의 염원을 실현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동탁과 조조였다. 동탁은 환관과 기득권층을 거의 박살내놓았고,[14] 그렇게 박살나 텅 비어버린 관료층을 조조가 채워준 것이다. 재야 여론을 주도하던 사인 식자층은 정치 감각과 뛰어난 통치 능력을 보여준 조조에게 크게 이끌릴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조조 역시도 한말의 문제점에 대해 진저리를 치고 있었으니 유학자들과 뜻이 맞았고, 그들을 받아들여 탄탄한 위나라 정부를 꾸리게 된다. 사마의 역시 이런 사인층 출신이었다.
그러나 유학자들이 잘못 생각했던 것은, 조조에게 있어 지식인들이란 어디까지나 수단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다.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린 것에서 알 수 있고, 공융이나 예형 같은 당대의 유학자들을 탄압해 죽이기도 했다.[15] 그런 조조가 세운 나라가 바로 위나라였고, 서진은 위나라를 상당 부분 이어받은 나라였다. 서진이 통일할 때까지 한 자리 해먹은 유학자라면 이미 나라가 지식인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알고 적응한 경우였고, 적응하지 못하고 떨어져나간 사람들은 그대로 중앙정부와는 인연을 끊어버린다. 이들은 백성과 고락을 함께 하며 현실을 개혁한다는 은자 정신을 가진 것도 아니라서, 그저 현실에서 도피한다는 식으로 아예 깊은 산속에 틀어박히게 된다.
그나마 삼국시대에 마융, 정현, 노식 등의 유학자가 있었으니 그들의 학풍이 계승되었다면 좋았겠지만, 당시 유학의 대표 중 죽림칠현이 유명한 걸 보면 알 수 있듯이, 숲속에 틀어박힌 채로 다소 와전된 유교 사상과 도가 사상을 짬뽕시켜 즐기는 자들이 많았다. 이들 말고는 하안, 왕필, 하후현과 같은 유학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귀족 도련님들이 내세울 법한 세련된 현학이었다. 부패한 정권에 대한 저항 의식, 유학 이외의 다른 학문과 사상에 대한 포용, 탐욕과 권력욕에 대한 경계 등을 주장하는 청담사상은 후한말부터 시작된 청의(淸議)가 구체화된 사상이었고 큰 성취를 이룬 하안이나 왕필 같은 경우 유학 사상에 대해 논할 정도는 되었으나, 현실과 동떨어진 학문이라는 점에 변함은 없었다. 다만 이를 서진에게만 책임을 묻기에도 뭣한 것이 이후 진나라가 남쪽으로 쫒겨난 후 유학자들 사이에서는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아부와 칭찬을 늘어놓는 공담(空談)이 판을 쳤으며, 이런 학풍은 위진남북조 시대가 종결될 때까지 지식인들에게 크나큰 해악을 끼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서진에서는 오석산이라는 중금속 마약까지 유행하여 사회 혼란에 일조하였다. 물론 오석산은 조위 때부터 이미 유행하던 것으로 서진만을 탓할 수는 없다. 이후 당나라 때 단약 유행은 조위, 서진의 오석산 유행보다 더하기도 했고.
2.4. 팔왕의 난
사실상 서진 멸망의 시작은 다른 것도 아니라 진혜제라는 금치산자가 절대군주로 즉위해 중앙정부가 제대로 기능을 못하는 사이 지방의 번왕들이 야심을 드러낸데서 시작되었다.2.4.1. 황족의 지방 할거
황제는 위나라가 고립되었던 폐단을 경계하였으므로 종친을 크게 책봉하고 직임을 주었다. 또한 여러 왕들에게 모두가 스스로 자신의 봉국 안에서 장리(長吏)를 선발하도록 명령하였다. 위장군 제왕 유 혼자만이 그렇게 하지 못하고 모두 위에서 임명해줄 것을 청하였다.
《자치통감》 태시 원년(265)
《자치통감》 태시 원년(265)
사마염은 앞서 위나라는 후한의 혼란을 교훈삼아[16] 황족, 외척, 환관을 강박적으로 배제하고 오로지 측근들을 위주로 국정을 운영했다.[17] 하지만 그 때문에 측근들이 언제나 서로를 견제하고 균형이 유지되도록 안배하지 않으면 아차하는 순간 황권이 그대로 삼켜질 수 있었고, 실제로 이러한 가능성은 능력이 뛰어났던 조씨와 하후씨 일가의 인물들이 대부분 사망하고 사마의 일파가 전면에 나서는 순간 그대로 실현되었다.[18]
그래서 위나라의 전철을 답습하지 않기 위해 사마염은 즉위 직후부터 황권강화를 위해 일종의 봉건제로 돌아가는 방식을 선택, 각지에 할거한 황족의 권력을 비약적으로 강화시켰다. 책봉된 황족에게 휘하 관속을 마음대로 임명할 수 있는 인사권을 주었고, 277년부터는 최대 5,000명에 달하는 군대도 공식적으로 허용해 주었다.
289년 말 종실왕 배치도 및 주요 종실왕. 다만 종실왕의 세력기반은 왕위가 아닌 장군위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 세력의 배치는 왕위의 배치와는 사뭇 다르다. 예를 들면 성도왕 사마영의 세력기반은 봉토인 성도가 아닌 평북장군·진북대장군·정북대장군 등으로서 주둔한 업이다. |
이런 상황에서 사마염이 죽고 뒤이어 즉위한 것이 백치 황제 사마충이었고, 이를 틈타 실권을 장악한 외척 세력이 멍청하게도 황족을 중앙에서 쫓아내는 정치적 도구로 군정권을 사용하면서 지방의 군정권은 오롯이 황족들이 나눠먹게 되었다. 여기에 불만과 위기감에 싸인 중소문벌들이 유리천장을 넘어서기 위한 방법으로 독자적 인사권을 지닌 황족들에게 붙으면서 이들을 중심으로 결집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물론 모든 개막장인 상황에서도 중앙 정부의 정책과 군대만 건전하게 유지되고 있다면 나라가 쪼개지던 최악의 상황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황족 가운데 하나가 반란을 일으킨다고 해도 문제와 대안이 불분명한 이상 다른 황족이 한꺼번에 여기에 동조하기는 쉽지 않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중앙 정부의 토벌군으로 각개격파까지도 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외척이었다. 사실 사마충 같은 백치가 별말없이 태자를 거쳐 황제에 등극한 것이 가충을 필두로 한 하는 귀족집단의 힘과 사마씨 정권의 나약함을 보여주는 일화다. 실제로 팔왕의 난을 일으킨 원인인 가남풍이 태자비가 된 것부터가 가충의 뒷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황제인 사마염이 사마충 같은 장애인을 장자라는 명분하에 황태자 자리에서 내치지 않은 결단을 내리지 못한 점이 크다. 사마염은 근본적으로 사마씨 정권 자체 문제도 있었으나 성품이 사마사, 사마소 등과는 달리 굳세지 못하고 너무나도 너그러웠던 측면이 이와 같은 면을 조장한 일면이 분명했다. 당장 서진의 귀족집단들 가운데서도 아무리 그래도 사마충은 황제가 되어선 안된다고 상주한 개국공신 위관 같은 이들도 있었고 사마염도 이를 주의깊게 들었으나 사마충의 아들 사마휼의 총명함을 믿고 그냥 방치해 버렸다. 왜냐면 사마충이 멍청하긴 해도 개인의 인성이 나쁘지 않았는데 고대에는 황제가 어리석어도 인성이 나쁘지 않다면 용인되는 경향이 있었기에 주위의 보정을 받으면 괜찮으리라 본 것이다. 사실 어느 전제군주제 국가나 권력의 중추인 군주에 문제가 생기면 시스템이 아무리 잘 되어 있어도 나라가 무너지는 현상이 발생하기 마련이며[19] 특히 개국 초 창업군주의 2~3대에는 명군이 나와야 그 왕조가 오래 갈 수 있는 법인데 하필 서진은 2대 황제가 사마충이었던 게 불행이었다.
이에 대해 조선의 학자 홍대용은 신랄한 촌평을 남겼다.
진주(晉主, 사마염)는 조씨(曹氏)가 고립되던 것을 거울삼아 종실(宗室)을 다량으로 봉(封)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서로 해치어서 거의 멸망할 지경에 이르다가 요행히 보존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종실을 봉해야 하겠는가? 봉하지 않아야 하겠는가? 말하자면, 봉하여도 또한 가할 것이고, 봉하지 않아도 또한 가할 것이다. 위(魏) 나라가 멸망하게 됨은 고립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진나라가 혼란하게 됨은 종실에 연유함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임금이 덕을 잃지 않으면 종실을 봉하지 않아도 고립되지 않을 것이고, 봉한다 하더라도 스스로 호위(護衛)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까닭은 생각하지 않고, 구구하게 봉하고 봉하지 않는 것만을 용심(用心)한다면 나는 동쪽에서 멸망하고 서쪽에서 생겨남을 볼 것이다.
홍대용 《담헌서》
홍대용 《담헌서》
이런 일종의 방심은 삼국시대의 종결이란 시대의 전환에서도 비롯된 감이 있다. 서진의 전조인 조위에서 조비가 위를 승계할 당시 위는 일단 한 내부의 왕이고, 형식상 한(漢)은 껍데기만 남았지만 존속하고 있었다. 조비가 조식과 조창에게 형으로서 사적인 권위가 있었긴 했으나 조비 즉위 당시에는 ‘형식적’으로는 조비·조식·조창 모두보다 한의 권위가 더 높았다. 물론 형식적 권위일 뿐 실질적 권력은 없지만, 한나라 부흥의 명분으로 쓸 수 있다는 것은 잠재적 위협이 될 수 있었다. 조위 입장에서는 다행히 조조 사후 빠른 선양으로 조비가 위를 건국했지만, 헌제 본인은 상당히 오랫동안 살아남았고, 위나라의 내분은 헌제를 다시 한나라 부흥의 구실점으로 올리는 상황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데다 유비 역시 파촉를 근거지로 한나라의 명맥을 계속 이어가고 있었다. 때문에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서라도 철저한 집안 단속이 필요했다. 또 조위가 동오(吳)와 촉한(蜀)에 비해 국력이 압도적이기는 하지만, 원씨의 사례에서 보듯이, 집안 싸움이 벌어지면, 외부 세력에게 지원을 요구하는 것은 일상적이었다. 이는 수춘 삼반에서 관구검과 제갈탄이 오나라에 구원을 요청하거나 제갈량의 1차 북벌이 양주 반란과 연계한 사례도 있던 것에서 증명된다.
하지만 천통을 이룩한 사마씨의 진나라는 상대적으로 이런 걱정이 없는 편이었다. 한의 권위는 너무 세대가 오래 지나면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고, 천하통일의 성과로 서진의 권위는 조위, 동오, 촉한 등의 권위를 모두 능가하게 되었다. 집안에서 내분이 일어날 경우에, 결탁할 만한 외부 세력도 이젠 남아있지 않았다.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에게 유의미한 경쟁 국가는 없었다. 기껏해야 국가조차 갖추지 못하고 문명도 뒤떨어진 부족 단위의, 흉노, 선비, 저, 갈, 강족의 위협은 분명히 있었으나 설사 황족간 내분이 벌어진다고 해도, 통일된 중화 제국 앞에서, 세력을 갖추지 못한 부족들이 정상적인 상황에서 위협이 되긴 어려웠다. 물론 현대 사학자들의 연구에서 드러나듯이 후한 말부터 북방 이민족들이 유의미하게 중원을 잠식하고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불과 수십년전에 중원을 일통한 서진 정권의 군대가 그렇게 마구잡이로 내전을 벌이다가 순식간에 소모될 것이며 이 과정에서 이민족들의 발흥을 방치하고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당장 영가의 난 이후에도 서진-동진의 조각난 군대를 이민족들이 꽤 힘겹게 상대했어야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서진 지배층의 이런 안이함과 방심이 서진의 멸망을 부른 것이라고 해도 이상하진 않다.
2.4.2. 현실에 구현된 막장 드라마
천하 통일 뒤 정확히 10년 만에 사마염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서 사마충이 황제에 올랐다. 그러나 사마충은 지금으로 보면 지적 장애를 가지고 있었으리라고 진단될 정도의 백치였다. 사마염도 살아 생전 이를 걱정했지만 그래도 사마충의 아들인 사마휼이 총명하니 어떻게든 되겠지 싶어서 장남인 사마충으로 밀고 나갔고, 그 대신 작은 아버지인 사마량, 장인 어른인 양준(楊駿), 개국 공신인 위관(衛瓘)에게 사마충의 보좌를 부탁했다.하지만 양준은 황족으로 군권을 잡던 사마량을 경계해서 쓰러진 사마염이 애타게 찾는데도 사마량을 예주로 발령내서 쫓아내다시피 보내버렸고, 이에 남은 위관은 알아서 버로우를 타버렸다. 이로써 외척인 양준 일파가 조정의 권세를 틀어쥐고 전횡을 일삼았는데, 이때 이들이 쥔 권력을 매의 눈으로 노리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황후 가남풍이었다. 우선 가남풍은 양준을 꼬드겨서 형주의 군권을 잡고 있던 초왕(楚王) 사마위(司馬瑋)와 양주의 군권을 잡고 있던 회남왕(淮南王) 사마윤(司馬允)을 불러들인 뒤, 순식간에 양준을 반역자로 선포하고 사마위와 사마윤으로 양준과 양씨 일족들을 싹 쓸어버렸다. 그리고 남은 두 고명 대신인 사마량과 위관이 정권을 넘겨받자, 다시 사마위를 꼬드겨서 이들마저 제거한 뒤 그 죄를 물어서[20] 사마위까지 토사구팽해버렸다.
이렇게 조정의 권세를 한 손에 틀어쥔 가남풍은 그래도 장화와 같은 인재를 중용하면서 십여 년 동안이나 정사를 그럭저럭 꾸려나갔다. 오히려 평화로운 시대가 유지되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기도 하는 모양.[21]
어쨌든 전란의 시대가 끝났으니 호족들의 사치와 삽질에도 고생은 적었을 것이다. 삼국시대의 인구는 세 나라를 더해도 777만 명 정도인데, 서진 대에 이르러 갑자기 인구가 1,600만 명으로 불어나는 것은 난세 동안 호적에 안 잡히던 백성들이 통일 뒤 나타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참고로 고대의 호구(戶口)라는 것은 戶의 경우 '집'을 의미하며, 口는 개별적인 인구를 말한다. 사료에 따라 戶만 기록된 경우도 있고, 호구가 기록된 경우도 있다. 보통 이들 口를 신분별로 나누는 것은 시대마다 다양한 용어를 사용해서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전한 시대에는 일단 대남(大男), 소남(小男), 대녀(大女), 소녀(小女)등으로 구분한 것이 보인다.[22] 이처럼 진한 시기에 이미 이들에 대해 성별, 연령에 따른 상세한 인구 파악이 이루어졌으며, 지금도 간간히 목간 자료로 출토되고 있다. 물론 완벽한 파악은 한없이 멀었다. 즉 이 시대에 인구 폭증은 이러한 조사가 훨씬 원활해졌다고 볼 수도 있겠고 사마염과 사마충의 통치는 분명히 성세라고 할만했기에 이 시기 서진이 무조건 난맥상 만을 보였다고 보긴 어렵다.
그러나 당시 중국은 소빙하기에 들어선 기후인지라 황하와 장강이 말라붙을 만큼 극심한 가뭄과 매서운 한파에 시달리고 있었다.[23] 이런 마당에 왕융 같은 귀족들은 제 잇속부터 챙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하고 있고, 실권자인 황후는 밤마다 애들과 놀아나면서 검열삭제를 벌이는 데다, 황제라는 작자는 ' 곡식이 없으면 어째서 고기죽을 먹지 않는 것이냐'라는 지적장애에 걸맞은 개소리나 해대고 있으니 끝내 이러한 현실 속에서 팔왕의 난이라는 실로 핵폭탄급의 사건이 터지게 된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본래 사마충의 태자 사마휼은 가남풍이 아니라 후궁 사구(謝玖)의 소생이었는데, 가남풍은 의붓 아들이 황제를 하면 자신의 정권이 무너질 것을 염려한 나머지 사마휼의 목숨을 빼앗아 버렸다. 그 방법이란 사마휼에게 술을 잔뜩 먹이고 ' 폐하께선 이제 물러나십시오. 안 가시겠다면 제가 보내드리지요.'라는 글을 베껴쓰게 했다. 이 일로 사마휼이 유폐되자 태의령 정거[24]를 보내 독살하려고 했는데, 사마휼이 약을 거부하자 약방망이로 때려 죽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301년, 마침 때를 노리던 조왕(趙王) 사마륜(司馬倫)은 이때다 하고 사촌인 제왕(齊王) 사마경(司馬冏)과 함께 낙양으로 진격해 들어가 가남풍 일파를 싸그리 쓸어버린 뒤 정권을 차지했다.[25] 하지만 사실 사마륜도 부하 손수(孫秀)의 꼭두각시였을 뿐이었다니 또 모순이다. 여기서 끝났다면 또 모르겠지만, 태자는 이미 죽었고 분수를 모르는 사마륜은 사마충을 태상황으로 밀어낸 뒤 기어코 자신이 황제로 올랐다가, 사마경을 필두로 한 나머지 황족들에게 몰려서 3개월 만에 사망했다. 그 뒤로는 황족들 가운데 한 놈이 나대면 나머지가 족치는 무한루프 상태로 돌입해서 자기네들끼리 사이좋게 치고 박고 싸우다가, 사마충 사후[26] 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이 사마치(司馬熾)를 황제로 옹립하면서 팔왕의 난은 가까스로 끝난다.
2.5. 영가의 난과 화북 상실
그러나 내전을 틈타 자립한 이민족이 이미 진나라 내부에 일대 세력을 이룬 상태였다. 특히 조조가 병주에 정착시켰던 흉노가 가장 큰 골칫거리였는데, 사마염 치세 때 잠시 복속되었으나 팔왕의 난 막바지에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潁)과 결탁해 선비족을 끌어들인 사마월과 맞서다가, 이내 사마영이 사마월에게 패사하자 흉노족을 끌어모아서 한(漢)[27]을 세우고, 그의 아들 유총(劉聰)이 남하하면서 그 부하들( 석륵, 왕미, 유요 등)이 화북 각지를 휩쓸고 다니기 시작했다.더욱이 팔왕의 난을 거치면서 서진의 지방 통치는 사실상 와해했기에 문제는 더욱 심각해져만 갔다. 원래 후한말부터 삼국시대에 이르는 시기의 지방 호족들은 군사와 행정의 여러 직책을 겸임하여 독자적인 군벌 세력이 되었다. 그런데 중국을 통일한 사마염은 다시 군사와 행정을 분리시키는 정책을 강하게 밀어붙여서 지방의 군대를 대부분 해산시켰고, 대신 왕으로 분봉한 황족들에게 군사권을 쥐어주어서 이를 보완시키려 했지만 이것들이 지들끼리 치고받다가 공중분해했으니(...).
때문에 실권자인 동해왕 사마월은 중요 거점에 친족들을 보내서 거점을 장악시키는 등 고군분투했지만, 애당초 이러한 자의적인 인사는 황권에의 도전으로 해석할 소지가 컸다. 실제로 자신을 향한 참소가 빗발치자 사마월은 그만 분사했으며, 뒤이어 실권을 잡은 왕연(王衍)이 사마월의 장례를 치른답시고 황제를 버리고 피난가다가 죄다 석륵(石勒)에게 잡혀서 싹 몰살당했다.
이때 왕연과 동행하던 낙양의 주둔군이 다수 죽었기에, 석륵 등은 이 기회를 틈타 낙양까지 쳐서 함락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선발대인 호연안(呼延安)이 배를 모두 불태워버리는 바람에 황제 사마치는 달아나지도 못하고 그대로 포로로 잡혔다. 이것이 바로 영가의 난. 포로가 된 사마치는 2년 뒤에 유총에게 불려와서 노예 복장을 하고 술을 따르다가 그 모습을 본 옛 진나라의 신하들이 통곡하는 바람에 위험 인물로 간주, 살해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에 관중에서 장안을 수복하고 태자로 추대받아 진나라 임시 정부를 이끌던 사마업(司馬鄴)이 사마치의 부고를 접하고 자신이 황제에 올랐다. 하지만 이 또한 각지에 흩어진 군벌들의 지원을 못 했고, 사마업은 죽으로 연명하면서까지 저항했으나 2년 만에 장안이 포위되자 농성 끝에 결국 항복했고, 역시 이듬해에 유총에게 불려와 술을 따르다가 그 모습을 본 옛 신하들이 통곡하는 바람에 또 살해당하고 만다. 이로써 화북의 진나라 세력은 구심점을 잃고 완전히 사라졌다.
다만 강남에서 호족들을 규합하던 사마예가 사마업이 죽은 이듬해인 317년에 그의 부고를 듣고 황제로 즉위하여 진나라의 명맥을 이어나가는데, 이 나라를 동진이라고 부르며, 이후 백여 년 동안 이민족 왕조가 화북에서 조지고 부시고 갈아엎으며 깽판을 치는 사이 강남에서 한족 왕조의 명맥을 이어나갔다.
서진 멸망 후에 농서 일대에 남아있었던 사마보는 319년 스스로 진왕으로 칭왕했는데 이듬해 320년 부하인 장춘, 양차에게 살해당했다. 이후 장춘은 사마첨을 진왕세자로 옹립했으나 전조의 장수 진안에게 살해당하면서 멸망했다.
3. 한국사와의 관계
사마씨 정권은 위나라의 정권을 틀어쥔 이래로 서진 시절부터 포함해 적어도 고구려를 제외한 한반도 세력들에게 상당히 우호적이고 아낌 없이 베풀어주는 정권이었다. 고구려와 모용씨(훗날 전연으로 발전하는 세력이다)에게 샌드위치로 두들겨 맞아 그로기 상태가 된 부여에게 대대적인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하여 부여를 존속시켰고, 때문에 모용씨는 서진이 강남으로 물러나 동진으로 명맥을 이어가던 시절에도 한동안은 동진 눈치를 보며 부여 병탄을 몇 년 미뤄야 했을 정도였다. 물론 부여와 건국 초기부터 부딪쳤던 고구려 입장에선 매우 거슬리는 견제질이었지만, 부여에게는 가뭄의 단비 같은 큰 도움이었다. 게다가 사마염은 모용부가 부여인들을 마구 노예로 서진쪽에 팔아넘기고 있다는 보고를 접하자, 부여인들을 노예로 구입하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했을 정도였다!또한 서진 정권 이전에는 삼한 각 거수들의 상대가 낙랑군, 대방군 혹은 현도군 태수였던 반면, 서진 때부터는 낙랑군, 대방군, 현도군 태수보다 이 분야 업무에서 한 단계 상급자인 동이교위부 우두머리나 평주 혹은 유주 자사가 되었다. 현대 대기업 논리로 따지자면 그전까진 특정 협력 업체 사장들을 일개 부장이 상대했던 반면 이때부터는 이사나 상무가 나와 상대하게 되었다고 보면 된다. 또한 당연한 논리로 베풀어주는 하사품도 양이 늘어났고 교역 기회도 많아졌으며, 그전까진 조공 무역하러 오는 당사자들의 수가 한정되었으나 이때부터는 한번에 수십 거수가 어느 한 거수를 대표[28]로 해서 우르르 몰려와도 일일히 상대해주고 하사품을 베풀어주며 자유로운 무역을 보장하였다. 물론 이건 서진 정권에겐 그 이전 조위 정권에 비해선 상대적으로 경제적인 손해를 더 크게 보게 된 한 발 물러선 양보였지만, 서진 입장에서도 그렇게 해서 얻을 이익이 있었다. 우선 삼한 중 마한은 적어도 3세기 중후반부터는 비록 기리영 전투에서 지긴 했어도 중원 정권에게 만만찮은 타격을 입힌 바 있었다. 즉 이전과는 달리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저항할 수 있는 세력임이 입증된 것으로서, 이는 사마씨 정권-서진이 삼한 세력과 그전과는 다른 관계를 수립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낀 계기가 되었다. 서한 시절 건마국이 주도하던 마한은 서한이 철기 수출을 통제하는 등 마한의 성장을 견제할 때 어떻게 대항을 시도해볼 상황도 힘도 없어 무시당했으나, 그보다 2~300년 지난 기원후 3세기 목지국이 주도하던 마한은 질적, 양적으로 전혀 다른 성장을 이룬 상태였는데 위나라는 이걸 무시하고 고구려를 쉽게 제압했으니 그보다 만만한 마한은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대충 나오다가 나름대로는 큰 코 다쳤던 것이었다.
게다가 이 시기 훗날 오호십육국을 이루게 되는 북방 야만족들은 걸핏하면 반란을 일으키거나 대선우니 천왕이니 등등 내세워가며 무슨 대우를 어떻게 해도 만족을 못하는 측면이 있었으나 한반도의 삼한 세력들은 경제적 번영만 손에 쥐어주면 건방지게 중원 천자의 권위에 대놓고 도전해오진 않았으니 적어도 협력 파트너로 삼기엔 이보다 더 좋은 상대는 없었다. 즉 북송-고려-요 사이의 훨씬 이전 프리퀄 상태였던 것이다.[29]
하지만 고구려는 이런 변화에서 얻을 이익이 별로 없었고, 서진 또한 고구려가 삼한보다 상당히 강대한 방심 못할 상대라고 생각하여 견제를 멈추지 않았기에 비류수 전투부터 맺어진 사마씨 정권-서진과의 악감정은 해소될 길이 없었다. 이렇게 고구려가 한-위-서진 시기까지 중원 정권과 부딪힌 악감정은 낙랑-대방 주민이 고구려에게 저항감을 갖는 데까지 이어져 고구려와 백제의 대결로까지 이어지는 진행으로 비화된다.[30]
게다가 백제 입장에서도 서진 정권은 비록 베풀어주는 건 많은 나라였으나 마냥 좋게만 생각할 수는 없는 정권이었다. 왜냐하면 이 체제에서 진한왕은 마한왕과 어디까지나 동등한 대우를 받았고, 침미다례도 마한 맹주를 자처하며 서진에게 조공했는데 서진이 당시 마한왕인 백제국 거수에게 이렇다할 특혜를 베풀어주지 않고 이들 모두에게 동등한 혜택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백제 입장에선 경쟁자인 진한과 침미다례 또한 서진에게 많은 경제적 이득을 받으며 부쩍부쩍 실력을 키우고 있다는 얘기가 되는데 이는 당연히 백제에겐 절대 기분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또한 서진은 이전 위나라 같이 대놓고 군사적 행동을 하진 않았으나 걸핏하면 낙랑군, 대방군 휘하에 있는 옛 마한 거수국들을 충동질해서 백제를 공격하게 사주했고, 때문에 책계왕이 전사했으며 분서왕은 아예 낙랑군이 사주한 자객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고로 백제 또한 겉으로는 서진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실제로는 기회만 되면 대방군 및 낙랑군의 세력권인 임진강 유역에 공격을 퍼부으며 해당 지역들의 옛 마한 소국들을 해체하여 직접 지배화하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이는 서진에 대해선 분명코 말해 은근슬쩍 저지르는 도전이었고 서진도 이를 알고는 있었지만, 고구려가 복수전을 노리고 있고 북방 야만족에 동오 문제 등도 있어 백제가 가까스로 선만 지키면 직접 하는 응징은 자제한 것으로 보인다. 즉 고구려와 서진의 관계는 대놓고 서로 으르렁대는 관계였다면, 백제와 서진의 관계는 겉으로는 웃으면서 선물을 주고 받아도 등 뒤에서는 서로 칼을 손에 쥐고 딴 생각을 하는 관계였다고 보면 된다.
그예 고구려가 311년 서안평 점령, 313년 낙랑군 점령, 314년 대방군을 점령하면서 서한 시대부터 시작하여 그간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중원 왕조와의 대립에서 열세에 처했던 위치에서 벗어나는 반전 모멘트를 마련하고, 백제 또한 그 시점에서는 목지국을 저버리고 위나라-서진에게 붙은 옛 마한 거수국들 전체를 멸망시켜 직접 지배화하면서 마한과 중원 정권 사이에 있었던 오랜 분란을 완전히 해소한다. 단 이는 무역 경로와 무역 관행을 이제 고구려와 백제에게 이득되는 방면으로 개편당해야 했던 진한과 침미다례 입장에선 영 재미없는 결말이었다. 특히 부여에겐 더욱 악몽 같은 상황 변화였는데, 그건 이제 고구려와 모용씨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약해진 부여를 마음껏 다룰 수 있게 되었다는 신호였다. 훗날 신라로 발전하는 진한은 이 상황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며 생존했고 부국강병을 이루어 통일신라가 되는 발판까지 마련하게 되지만, 침미다례와 부여는 그러지 못해 결국 각기 망하게 된다.
4. 평가
역사적 의의를 떠나 국가 자체로서는 한때의 전성기가 지나자 바로 전형적인 막장테크를 탄 왕조라고 볼 수 있다. 과장된 헛소문이었던 백제의 삼천궁녀와 프랑스의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같은 에피소드가 진나라에서는 현실 정사에 기록된 채로 더 심각하게 등장한다. 게다가 국가 막장 테크에서 빠질 수 없는 내부 분열, 민족과 문화 갈등, 수뇌부의 부패와 체제의 붕괴, 자연적 요인, 전쟁과 외침이 모두 복합적으로 나타난 바 있다.사실 서진이 서기 300년대 이후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을 연이어 겪고 너무나도 비참하게 무너져서 그렇지, 초대황제인 진무제 사마염은 진 건국후 태강지치의 성세를 이루었고 진혜제를 대리해 정치를 주도한 황후 가남풍도 멀쩡한 후계자를 참살하여 번왕들의 봉기를 부르는 등 정치의 난맥을 조장하는 실수를 저질렀으나 그 치세엔 장화 같은 명재상을 등용하여 안정적인 정치를 폈다. 이런저런 악평이 있긴 했으나 전반적으로 보면 사회는 오랜 혼란기를 극복하고 다시 회복되는 과정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서진의 이후 시대 평가는 실질적인 평가라기보단 후대에 인기가 있었던 삼국시대의 세 나라를 서진이 멸망시켰고 무엇보다 중원을 오랑캐에게 넘겨줬다는 후대 한족 사가들의 악감정이 실렸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앞서 귀족들의 난맥상을 언급하긴 했지만 후대 남조, 나아가 수당시대 문벌귀족들의 행태는 서진보다 더 나빠졌으면 나빠졌지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31]
화북에 있어서 형성된 귀족지배의 체제는 지금까지 기술해 왔듯이 화북 각지에 퍼져서 세력을 이루던 호족이 강대해진 탓에 사회의 계층분화가 진행해 가는 경향과 한편으로는 그 경향을 저지하면서 공동체적인 관계를 만들어 내려고 하는 경향, 이 두 가지의 세태가 충돌하면서 생겨난 소산물이었다. 그 중에서 호족들은 무인 영주로서의 지배계급을 만들어 나가는 방향으로 돌진하지 못하고, 공동체를 지향하는 향론위에 서서 지식과 교양을 갖춘 문인적인 "사(士)"로서의 지배층을 양성하게 되었고, 그 "사(士)"계층 위에 귀족 사교계가 형성되어 갔다. 그리고 이들 "사(士)"와 그 위에 선 문인적인 귀족들이 한 제국 붕괴의 대혼란을 이겨내고 중국 문명에 새로운 전개를 가져온 주체였다. 그러나 그들을 배출해 낸 기층의 향촌사회에서는 대혼란에 의하여 입은 큰 상처가 여전히 남아있었고 호족의 강대화를 저지하는 자유농들의 공동체 지향력은 약해져만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진의 귀족층은 전술한 기성 사회의 문제를 직시하지 못한 채 외견상의 평화에만 안주하여 기층 사회로부터 유리되면서 그들의 사교계에 있어서 청담(淸談)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그것이 일부 권력자의 권력 남용의 여지를 내주었고 팔왕의 난과 북방이민족이 함부로 설치도록 하는 결과가 되어서, 수습이 되지 않는 대혼란 동안 당시의 귀족사교계는 말 그대로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귀족 중에는 향촌 사회로 돌아가 그 곳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길을 모색하는 자도 있었으나 대다수는 강남으로 피난하여 그 땅의 일류호족들과 함께 동진 정부를 부흥시키면서 새로운 귀족사교계를 재생하고 그들의 지배체제를 재건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중국 문명의 등불은 화북에서 설치는 이민족에 의하여 꺼지지 않고 강남에서 환히 타오를 수가 있었다. 그렇지만 4세기 초 화북에서 강남으로 피난해온 귀족들은 이 신천지에 이동한 초기에는 뿌리없는 풀과같은 망명자에 지나지 않았다.[32]
즉,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의 의의를 제외하고 왕조 자체를 보면 서진은 후한 말부터 내려온 사회 모순을 여러가지 측면에서 고쳤으나 그 역시 한계가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이민족이었던 오호의 발전을 무시한채 한껏 방심하여 내부투쟁을 일삼아 한때의 빛나는 발전을 길게 이끌지 못하고 자멸해 버린 왕조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후한의 멸망 이후 그 후유증을 370여 년 동안 수습하지 못했던 위진남북조시대의 일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왕조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 때문인지 삼황오제부터 명나라에 이르기까지 황제의 위패를 모신 역대제왕묘에서 서진은 통째로 삭제되어 있다.[33]
그러나 서진 멸망의 가장 큰 문제점은 청담 사상이나 귀족들의 사치보다는 초대 황제인 진무제 다음으로 즉위한 황제가 일반인만도 못한 지적장애인인 혜제였다는 점이다. 혜제가 아닌 무난한 다른 형제들이 황위에 올랐다면 팔왕의 난이라는 중앙 정부를 거의 무너뜨리는 수준의 내부분열이 일어나 이민족들에게 빈틈을 내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론을 내보자면 서진은 분명 여러가지 문제가 있긴 했으나 후한말 여러 병폐가 개선된 왕조였음은 분명하고 건국 초기부터 경제가 꾸준히 발전하여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 같은 대규모 내전이 발생하기 직전까진 이전의 분열기 혼란에서 사회가 분명히 회복되고 있었던 국가란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그렇기에 만약 초대 진무제 이후 제대로 된 황제가 2~3대 정도 더 나와줬다면 서진의 파편인 동진이 나름대로의 역량으로 강남에서 100년을 넘게 버티고 남조 역사상 최대 영토를 얻기까지 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전한-후한 정도의 장기왕조로 유지됐을 가능성도 높다.
4.1. 국가 시스템에 대한 평가
삼국지연의로 널리 알려진 삼국시대를 통일한 최후의 승자이며, 제갈량의 라이벌로 유명한 사마의의 후손들이 세운 왕조인데도 취급이 별로다. 아무래도 삼국지연의 후반이다보니 독자들의 재미와 관심이 떨어진 상태에서 등장한 국가이고, 덕분에 유명도가 함께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삼국지를 모르는 사람은 국내에 거의 없지만, 정작 삼국을 통일한 국가는 어딘지 모르는 경우가 태반사이다. 심지어 서진의 기반을 시작한 사마의는 삼국지에서 제갈량의 숙적으로써 최상급 네임드임에도. 물론 중국이야 자기들 역사이니 아는 경우가 더 많긴 하지만. 그러나, 서진은 역사적으로 분명히 의의 있는 국가다.삼국통일도 거저 먹은 게 아니라 비록 완전히 극복했는지는 논의의 여지가 있으나 각박한 위나라 전시체제의 한계를 반면교사로 삼으려 노력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예컨대 위나라 때부터 내려오던 구품관인법을 개선했다. 사마의가 고평릉 사변 이후 구품관인법을 개정하여 군중정의 상부기구로 주에 대중정을 설치하였고, 이는 군중정의 역할을 축소시키는 역할을 낳았으며 중앙의 사도가 주의 대중정을 임명하도록 했다. 당연히 이건 사마씨 말 잘 듣는 자를 관리로 등용하거나 승진에 유리하게 하겠다는 뜻이었지만 사마씨 집단은 바보가 아니었던지라 서진을 건국한 뒤에 견제 장치를 마련한다. 군중정을 군대중정으로 바꾸고 군소중정도 설치하면서, 군대중정과 군소중정에게도 중앙 관직을 임명하는 한편 중앙 이부에서 중정들이 상신한 바를 한 번 더 검증하게 한 것이다. 또한 대중정이나 이부에 구품관인법 비판론자도 거리낌 없이 임명하는 관용도 보여서, 이후에 예전 자신들처럼 구품관인법을 엉망으로 활용해서 정권을 쓰러뜨리는 자가 다시는 나오지 못하도록 많은 조치를 취하게 되는데, 이는 옹호가 아니라 주어진 사실만 말한 것이다. 물론 이 구품관인법 개혁안은 사마씨 정권이 숙청한 하후현이 먼저 내놓은 것이었는데, 사마씨 정권이 자기네 불리하니 못하게 했다가 막상 집권하게 되니까 그때 못하게 한 하후현의 개혁안을 채택해 다시는 자신들 같은 부류가 나오지 않게 조치한 건 맞다. 하지만 어쨌든 이 개혁으로 유송 정권이나 제ㆍ양 정권이 사마씨 정권에 비해선 역성혁명하기가 상당히 어려워진 건 사실이다. 동진, 유송, 제ㆍ양 정권이 그나마 조금 더 안정적이었으며, 찬탈 세력이 정권 찬탈 과정에서 사마씨처럼 정상적인 인사 제도를 부수면서 기존 관료층을 날려댈 수가 없었기 때문에 현직 관료층의 협조를 얻기 위하여 행동의 선을 지켜야 하게 되긴 했다. 다만 때문에 아름다운 선양의 전통을 지킬 수 없게 된 환경이 조성된 건 문제였지만. 찬탈 세력이 찬탈을 위해 기존 인재풀을 파괴하지 못하게 막는 조치가 낳은 뜻밖의 부작용이었다. 훗날의 유송이나 제ㆍ양이 전 왕실을 싹쓸이해야만 했던 건 이런 제도 개혁 탓에 찬탈 전에 자파 세력을 구석구석까지 심을 수가 없었던 환경이 나온 데 있었다.[34]
사마염의 능력에 대해서도 말이 많은데, 중국을 통일하고 번영의 초석을 닦았으나 후대의 문제로 실패하여 저평가 된 지점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가장 폭력적인 방식을 통해[35] 황제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것은 조위에게도 해당된다. 조조는 헌제의 신변에까지는 손을 대지 않았으니까 최후의 선을 넘지 않은 셈이지만, 조위가 서진보다 나은 점은 이 정도가 전부다. 그리고 사마염도 조환은 놔두어 편히 살다 죽게 했으니 딱히 더 잔인하다고 보기도 좀 그렇다. 애초에 후대의 선양이 이러저래 변질되긴 했으나 그래도 처음 선양시스템을 구축한 위나라-진나라 시대의 선양 자체는 권력 중추를 온건하게 교체하고 피를 최소한으로 흘리려는 측면도 없진 않았다. 당장 중국사에서 마지막으로 선양이 정상적으로 작동한 후주- 송나라의 경우처럼 선양이 제대로 쓰인다면 권력교체 과정에서 유혈사태를 최소화한 사례로 칭찬받는게 사실이고 이는 후대의 촉한정윤론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악평 받는 한위진 교체기에도 어느 정도 적용되는 사안이다.
삼국지연의가 유명한 만큼 연의로 진나라를 접하는 사람들이 많고, 연의 관련 매체에서도 취급은 별로 좋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연의 관련 매체의 관점을 하나의 의견으로 인정하는 만큼, 역사적 흐름에 따라 서진을 평가할 필요는 있다. 삼국지연의의 독자들은 좋아하는 영웅들의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가버렸다면서 썩 달가워하지 않지만, 잘 생각해보면 오히려 영웅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진나라가 있었다고 하겠다. 진나라는 위나라의 기반을 갖춘 상태로 시작했으니 직접적으로 위나라의 덕을 본 셈이고, 또한 위나라와 함께 삼국의 형세를 만든 다른 두 나라에게서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이다.
4.2. 남조의 기반이 된 왕조
이후 역사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면 서진도 분명 남긴 것이 있다. 서진 이후에는 남조와 북조가 탄생하는데, 남조가 바로 서진의 영향을 받았다.서진은 삼국 중 최후의 생존자였던 오나라와 대립하면서 남쪽 국경 지역을 크게 발전시킨다. 동오의 손호는 무리한 군비 증강과 중앙 집권책으로 동오 지역 민중과 호족 세력들에게 큰 고통을 주었는데, 이를 알고 서진에서는 동오와의 국경 지역에서 유화 정책을 펼친다. 도망쳐오는 이주민들을 받아들여 정착시키고, 기반 시설을 정비하여 생산력과 경제력을 향상시킨다. 특히나 양양 지역이 중요했는데, 이 지역을 거점으로 동오의 육항과 대립하던 양호가 군비 증강과 함께 민중을 위한 정책도 다양하게 실시했기 때문이다. 이후 동오를 복속시키고 난 다음부터는, 동오가 기초를 세운 강남의 경제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지역의 생활 수준이 더욱 안정되었다. 이렇게 부강한 강남의 경제력을 받아들인 것은 훗날 동진을 비롯한 남조 국가들이 북조 국가에게 대항할 수 있는 원동력 중의 하나이다. 강남 지역의 경제 및 생산력 향상의 주역은 해당 지방을 다스렸던 손권 뿐만이 아니라, 손호의 기이한 정치 행태를 끝내고 나름대로 동오 지역에도 관심을 기울였던 사마염이기도 하다.
그리고 동진으로 정착한 다음부터는 늘 북쪽 야만족들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는데, 이 때문에 오히려 토착 세력들을 억누르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다. 동오의 호족들은 북에서 내려온 세력들에게 상당 부분 고까운 감정이 있었으나, 아무리 그래도 북방의 막장 야만족보다는 그들이 보다 나은 지배자임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서진이 훗날의 남조 국가들에게 남긴 유산이 또 있는데, 바로 정통성이다. 가장 정통성이 없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쪽은 오히려 갑자기 황제에 즉위하여 의문을 남긴 오나라에게 향해야 할 비판이다. 진나라는 한나라에서 위나라를 통해 건너건너 선양을 받으며 정통성을 갖췄다. 그리고 촉한정통론적인 관점에서도 서진은 정통성을 과시할 수 있는데 서진의 실질적인 시조인 태조 문제 사마소가 최후의 한나라 왕조인 촉한을 멸망시키고 그 공로로 진왕이 된 것이 바로 서진왕조이기 때문이다. 촉한정통론이 최초로 나타난 시기가 동진 시기임을 감안하면 서진-동진 역시 촉한이 내세운 정통성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었다.
유송이 북위에 대해 정통임을 과시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후한-조위(촉한)-서진-동진-유송으로 내려오는 중국 왕조의 정통성 계승 덕분이었다. 사실 북위도 정통성 문제를 의식하고는 있었고, 이름을 북위라고 한 것도 국가시조인 탁발부가 위나라에게 조공을 바쳐서였다. 그래도 형식상이나마 선양을 통해(혹은 직접 나라를 멸망시켜) 계승한 동진의 정통성 앞에서는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남조는 양나라 이전에도 여전히 북방 오호의 불안정한 국가들보다 안정되어 있었으며, 이는 이미 서진의 기반을 계승한 동진에게서 정통성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남조 정권의 강력한 정통성은 오호 국가 및 북위에서 가끔씩 부정했으나, 역사적으로 남조가 더 강력한 정통성을 가졌다는 부정하기 힘들다. 서구 학계에서도 전반적으로 남조를 동양판 동로마 제국으로 보는 시각이 강하며, 일본의 연구자들도 여기에 동의하고 있다. 결국 세력싸움에서 승리한 것은 북조였지만, 남조와는 달리 5호 16국에게는 정통성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없었기 때문에, 서로 불신과 반목을 일삼으며 국가의 생사를 걸고 치열하게 싸우는 시기를 겪어야만 했다.
당대에 조조급이라고 평가받던 유연이 있었고, 조조와 사마의를 무시하던 석륵이 있었으나, 그들조차 동진을 끝끝내 타도할 수는 없었다. 당시의 동진을 잘 살펴보면 촉한을 병합한 직후의 조위보다 기반이 불안했는데도 그랬다.[36] 이는 정통성을 계승한 후손들이 동진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진의 기반을 세운 삼국의 영웅들이 남긴 업적과 한계가 동시에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4.3. 삼국시대의 진정한 끝
삼국시대가 위진남북조 시대의 일부로 포함되긴 하지만 삼국시대 자체는 역사적으로 봐도 진의 통일로 끝난 게 맞고, 이 시기를 다룬 소설인 삼국지연의도 진의 통일로 끝나기에 대중적인 인식도 서진의 막장화는 일반적으로 삼국지의 연장으로 보지 않는다.물론 삼국시대로부터 팔왕의 난- 영가의 난으로 이어지는 서진 멸망의 흐름까지 기간이 너무 짧다보니까 서진 멸망과 그 이후를 기존 삼국시대의 연장선상으로 보는 시각도 있으나[37] 단순히 진의 막장화를 삼국시대 전체의 문제로 뭉뚱그려 설명하기는 어렵다. 진이 전후 안정화에 실패한건 삼국 중 하나인 위를 계승하는 과정에서 사마씨들의 전횡이 도를 넘었던 것에 있지 위, 촉한, 오의 문제를 그대로 가져온게 아니기 때문. 촉한은 제갈량으로 대표되는 권신의 권력이 강력했으나 호족 통제면에서는 안정적이었고, 오의 경우 호족 이전의 통치자의 폭주가 직접적인 멸망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위의 경우 지나친 종실배제가 원인이 되어 호족 사마씨에게 정권을 탈취당했기 때문에 이를 반면교사 삼은 진에서는 오히려 종실중시를 과하게 한 것이 화근이 되어버린 것. 이후 폐단으로 비판받는 구품관인법을 시행한 것도 위와 이를 계승한 진만이었는데, 서진이 답습하지 않거나 해결하려다 실패한 문제, 위나 서진에만 있었던 문제들을 삼국시대 자체의 연장선이라 주장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서진은 전신이었던 위의 기조를 강하게 이어받은 왕조인 동시에 위나라의 각박한 전시체제를 극복하려다가 후한말부터 내려온 내부 모순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처참히 무너진 왕조로서 여러가지로 위나라를 많이 의식할 수밖에 없었고, 촉한과 오는 긍정적인 영향이든 부정적인 영향이든 서진의 정책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특히 오의 경우는 그 위치 때문에 서진 이후 5호의 발호에도 영향을 못 미쳤을 정도. 강남개발사나 명분론 같은 것들을 배제하면 촉한과 오는 멸망 시점에서 할거하던 그 지방의 지리, 역사에만 영향을 끼쳤을 뿐 광의의 의미에서 중국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보긴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삼국 중 오가 멸망하고 진이 천하를 통일하면서 좁은 의미에서 삼국시대도 끝을 고한 것이다.
또, 촉한과 오가 서진에 남긴 것이 적다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촉과 오 역시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들이 중국사에 남긴 성과는 아무래도 위 - 진보단 훨씬 적다. 촉한의 경우 한실부흥을 위해 이민족 회유에 국운을 걸어야했고 북벌의 기본전략도 강족을 편입시키느냐의 비중이 매우 컸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촉한이 강족의 호응을 분명 받긴 했지만 위나라에게 반란을 자주 일으켰던 강족과 촉한의 역량이 위나라를 뒤집지는 못했다. 남중(익주 남부)의 경우도 촉한이 비교적 유화책을 쓰고 통치자들이 점점 현지 주민들의 호응을 받으며 오늘날까지도 그 흔적이 남았지만 제갈량이 죽기 직전에도 이민족인 유주의 반란이 있었다.[38] 기록이 적은 촉한은 그렇다치더라도, 동진이 강남개발에 착수할 때 오나라가 했던 정책 중 참고할만한 것은 했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정책을 제외하면 오의 황제 손권의 일대기만 보더라도 제대로 남기지 못했고 이것 역시 그들의 한계를 증명하는 꼴이지 이민족의 침입을 극복하거나 통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했다.[39]
다만 여기서 연장선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협의(狹義)에 의한 것으로 후한 말부터 시작된 중원의 혼란과 이로 인해 남하한 이들에 의해 시작된 강남개발, 정주민의 약화로 유입된 이민족과 이들의 발호 및 한족으로의 동화라는 역사적인 큰 흐름은 수나라의 통일로 끝이 난다. 대략 370년간 이어진 이 시기를 우리는 위진남북조시대라 부르며, 이렇게 볼 때 후한 말부터 삼국시대는 이 혼란기의 시작점이고 서진은 그 통과점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전체적인 흐름을 놓고 봤을 때 이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또 후한의 멸망과 그로 인한 후유증으로 인한 중원 정주민들 간 내전의 형식이었던 위진남북조시대가 서진의 멸망을 끝으로 정주민간의 내전 형태가 종식되고 오호 이민족의 개입이 시작되어 그 역사적 흐름이 달라지게 되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어찌보면 삼국시대의 내전 양상을 그대로 계승한 서진의 멸망을 삼국시대의 진정한 끝으로서, 나아가 전한- 후한-삼국시대- 서진으로 이어지는 '한나라식 중원 통일왕조'의 종말로 광의적으로 보는 관점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실제로 국내에서는 호한체제론을 주장했던 서울대 박한제 교수가 서진을 삼국시대의 연장선상으로 보아 이런 관점을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또, 이후 위진남북조시대를 강남개발사 중심으로 지칭하는 육조시대로 칭하면서 오나라를 첫머리로 두거나, 서진 멸망 이후 촉한정통론이 본격적으로 대두되고 촉한의 명성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등, 여전히 삼국이 남긴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들 역시 이어지기 때문에 이런 경제적, 사상적 부분에서 촉한과 오는 일정 정도 중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게 되었다고 봐도 좋을것이다.
5. 매체화
진삼국무쌍 6에서 신세력으로 나왔다. 이제 사국무쌍이라 불러야 하느니 개드립이 많았지만만화로는 고우영 십팔사략 8권에서 오호십육국과 남북조 시대를 다루면서, 초반부에 해당하는 서진의 멸망을 재미있게 묘사했다. 다만 고증에 오류가 다소 있다.
토탈 워: 삼국의 DLC인 팔왕에선 사마염 사후 일어난 291년 팔왕의 난 때의 사진을 다루었다.
중국 1998년 드라마 < 난세ㆍ요후>(乱世·妖后)는 가충과 그의 딸 가남풍을 주인공으로 했다.사마사의 집권에서 가남풍의 죽음에 이르는 일을 다뤘다.그것은 오랫동안 유실된 언론이었고 2022년에 되찾혔다.
6. 역대 군주
<rowcolor=#ece5b6> 대수 | 초상 | 묘호 | 시호 | 성명 | 재위 | 능호 |
추존 | - | - | 정서부군(征西府君) | 사마균(司馬鈞) | - | - |
추존 | - | - | 예장부군(豫章府君) | 사마량(司馬量) | - | - |
추존 | - | - | 영천부군(潁川府君) | 사마준(司馬儁) | - | - |
추존 | - | - | 경조부군(京兆府君) | 사마방(司馬芳) | - | - |
추존 | 고조(高祖) | 선황제(宣皇帝) | 사마의(司馬懿) | - | 고원릉(高原陵) | |
추존 | 세종(世宗) | 경황제(景皇帝) | 사마사(司馬師) | - | 준평릉(峻平陵) | |
추존 | 태조(太祖) | 문황제(文皇帝) | 사마소(司馬昭) | - | 숭양릉(崇陽陵) | |
1 | 세조(世祖) | 무황제(武皇帝) | 사마염(司馬炎) | 265 ~ 290 | 준양릉(峻陽陵) | |
2 | - | - | 효혜황제(孝惠皇帝) | 사마충(司馬衷) | 290 ~ 301 | 태양릉(太陽陵) |
임시 | - | - | - | 사마륜(司馬倫) | 301 | - |
복위 | - | - | 효혜황제(孝惠皇帝) | 사마충(司馬衷) | 301 ~ 307 | 태양릉(太陽陵) |
3 | - | - | 효회황제(孝懷皇帝) | 사마치(司馬熾) | 307 ~ 311 | - |
4 | - | - | 효민황제(孝愍皇帝) | 사마업(司馬鄴) | 313 ~ 316 | - |
이하는 동진/역대 황제 문서로.
서진 황실을 더 알아보고자 한다면 서진/계보 문서로.
[1]
Taagepera, Rein (1979). "Size and Duration of Empires: Growth-Decline Curves, 600 B.C. to 600 A.D.". Social Science History. 3 (3/4): 128.
#
[2]
오나라 병합 이전의 면적.
[3]
오나라 병합(삼국통일) 후의 면적이다.
[4]
단 사마진은 말 그대로 "
사마씨의 진나라", 즉 서진 & 동진을 포괄적으로 부르는 명칭이다. 진조(晉朝)도 이와 같은 개념의 명칭이다.
[5]
대표적으로 조진, 조휴가 있다. 이들은 각각 군권을 행사하는 직위인 대장군과 대사마의 지위에 앉아 있으면서 조비 대에서 조예 초기까지 사마씨를 필두로 한 호족세력에 맞서 근황세력의 대표주자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들 덕분에
조예 치세까지는 황권이 신권에 압도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
[6]
구품관인법을 비롯하여 위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두를 그대로 계승했다.
[7]
사실 이건 전왕조인 조위도 개국 초에 실행했던 것이다.
조비는 선양(사실상 찬탈)으로 황제에 올랐지만, 정통성에 자신이 있었는지 퇴위한
헌제에 대해서도 상당한 예우를 갖춰주고, 유교교육도 대폭 강화했다. 그러나 사회기조 자체가 엄격하고 각박하게 돌아갔기에 이러한 노력은 큰 결실을 보지 못했다.
[8]
이런 제대는
송나라 대 부터는 더 이상 시행되지 않고, 이른바 전제불립(田制不立)이라고 하여 국가에서 토지의 소유권에 대해서는 방임하면서 기존에 토지세에 더해서 매매의 과정에서도 세금을 징수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선회하였다. 따라서 관료와 지주 및 상인 계층은 무제한으로 많은 토지를 점유할 수 있었다. 결국 이들은 위진남북조시대부터 수당대까지 흥성했던
문벌귀족은 아니지만 커다란 경제력을 보유한 새로운 사회세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9]
자오쿤성. 《진무제와 태강의 치》: 《
충칭 사회과학》07호, 2007년(赵昆生.《晋武帝与“太康之治“》:《重庆社会科学》07期,2007年)
[10]
갈검웅. 《중국인구사·제1권·도론, 선진에서 남북조 시기》.
상하이:
푸단대학 출판부, 2002년: 452-464(葛剑雄.《中国人口史·第一卷·导论、先秦至南北朝时期》.上海:复旦大学出版社,2002年:452-464)
[11]
『삼도부』는 서진 시기 이전
위,
촉한,
오 세 나라의 도읍, 즉
업,
성도,
건업의 화려함을 그려낸 부로, 구 삼국 세 나라 각각을 대표하는 화자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되기에 사실상 서진 시기를 다룬다기 보단 그 이전인 삼국시대를 다룬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 좌사가 『삼도부』를 쓰고 완성한 시기는
촉한 멸망 후~
오나라 멸망 전후, 삼국의 유풍(遺風)이 남아있던 시기였다.
[12]
실제로 『
진서』 4권, 혜제를 살펴보면, 우박이나 지진, 서리, 홍수, 가뭄, 기근, 전염병, 태풍과 같은 자연 재해에 관한 기록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13]
이공범, 《위진남북조사》, 2003, 234~235쪽 참조.
[14]
물론 이것은 중앙정부를 무력화시키려고 하다보니 중앙권력에 깊숙하게 관여한 환관들도 함께 쓸어버린 것뿐이다. 국가개혁의 큰 뜻 같은건 없었다. 애초에 무고한 인민을 수없이 살상하고 수도 일대를 초토화시키면서 대혼란을 초래한 것에 불과하다. 단, 동한의 큰 암덩어리였던 환관 및 환령 시대에 커진 족벌 계층을 완전히 싹 쓸어버려 조조 같은 훗날의 개혁자에게 큰 도움을 준 건 여하튼 사실이었다.
[15]
특히
공융은 불효자라고 낙인찍어 죽여버린 건 앞뒤가 안 맞는 사례였다. 조조는 불효자이거나 인성이 안 좋은 자라도 능력만 있으면 대접하겠다고 한 바 있다.
[16]
위의 실질적 건국자인 조조는 십상시의 난을 두 눈으로 목격한 사람이다.
[17]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유전자가 남달랐던 건지 조씨와 하후씨 위주로 구성했는데도 이들의 능력들이 뛰어난 편이라 조예 때까지는 아무 문제없이 돌아갔다. 조진, 하후상, 조휴 등..
[18]
특히나 당시 이들을 제어해야 할 조방이 어렸음을 감안하면 측근 중심 정치는 결국 제어할 사람이 그러한 능력이 없으면 붕괴되기 쉬운 체제였음을 보여준다.
[19]
당장 후대의
명나라에서
만력제 같은 황제로 나라가 사실상 멸망한 것을 생각해 보자.
[20]
왜냐하면 두 사람은 인망이 좋아서 죽자마자 진상을 조사해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는 가남풍의 자작극으로 일부러 사마량과 위관을 총애해 사마위의 어그로를 끈 뒤 사마위에게 몰래 사마량과 위관을 제거하라고 한 것이다.
[21]
수년 동안
암군이 즉위해 있는데도 조야가 안정되었으니, 장화 등의 공이었다. 數年之間,雖闇主在上,而朝野安靜,華等之功也。─ 《
자치통감》
[22]
후베이성
징저우시 출토 <이년 서향 호구부> 등.
[23]
유소민(劉昭民), 『기후의 반역』,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4]
사마염에게 치두구를 바쳤다가 혼쭐난 그 인물 맞다.
[25]
태자를 제거한 이상 명분으로는 아주 충실하다. 특히 가남풍에게 다른 자식이 없었으니.
[26]
동해왕 사마월이 떡을 줬는데 그걸 먹고 앓다가 죽었다는 점에서 독살이 확실하나 물질적인 증거는 없다.
[27]
유연의 유씨는 선조 묵특이 한 고조와 화친을 맺을 때 성을 받았기 때문으로, 국호는 이에 근거했다. 유요가 즉위한 뒤에 조(趙)로 개명한다. 이것을
전조라고 부르고, 여기서 분가한 석씨의 조나라를
후조라고 부른다.
[28]
마한왕을 겸한
백제국 거수,
진한왕을 겸한
사로국 거수,
마한왕을 자처하던
침미다례 우두머리 신미국 거수 등
[29]
다만 이는 지나치게 중원 정권 입장에서 말한 것이다. 오호의 조상들이 그간 중원 정권의 변덕에 시달리며 징발당한 인력, 세금 및 이런저런 멸시와 차별은 상당했다.
[30]
물론 한사군 점령 후 한동안 낙랑-대방의 자치를 인정해준 미천왕과는 달리, 고국원왕은 지나치게 직접 지배화를 강압적으로 서두른 탓도 컸다. 그러나 낙랑-대방인들이 상대적으로 백제를 더 좋아하면서 고구려에게 순순히 따를 수가 없었던 건 고구려와 엮인 원한의 세월이 이렇게 상당한 데 있었다. 이러한 반고구려 입장인 낙랑-대방인들이 백제로 대거 망명했기에 고국원왕은 백제를 반드시 손봐주지 않을 수 없었고, 백제도 앉아서 당할 수가 없었기에 결국 직접 충돌로 이어진다.
[31]
단적으로 후대에 문벌귀족을 형성했다고 비판받는
구품관인법만 해도 위진시대 당대 지배층은 많은 부분에서 개선점과 비판을 제기했으며 끊임없이 제도의 개선을 강구했다. 하지만 위진남북조시대가 끝난
수당시대에는 구품관인법이 사실상 사라지고 정말로 혈연으로만 관직을 세습한 서한 초기의 임자제로써 고위관리 선발이 퇴보했으며 과거제는 대부분 하위관료들을 뽑는데 그쳤다. 수당대의 귀족들은 문제의식이라도 있었던 위진시대의 사대부들과 달리 강고한 귀족사회가 형성된 것을 당연히 여겼으며 귀족들이 황제 못지 않은 가문의 위세를 자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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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 가와카쓰 요시오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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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동진 황제들의 위패는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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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 가장 가까운 사례로 보면, 특전사 사령부를 무력화한 후 똑같은 사태가 나오지 못하게 제도를 개혁한 게 바로
신군부였음을 유념하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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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씨는 권력 장악에 방해가 될 것 같으면
황
제라도 거침없이 폐위시키거나 죽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세력도 과감히 제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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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합비에 회수 일대에다 여러 유민 군단들을 더해서 시작한 동진의 첫 출발은 손오가 전성기였을 시절보다도 훨씬 나은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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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제 교수의 중국역사기행1 - 영웅시대의 빛과 그늘 / 사계절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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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촉한 정권이 이렇게 남중에 쌓아놓은 기반은 후일 서진-
성한-
동진이 잘 써먹는다는 점에서 무시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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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렇다고 오나라가 남긴 강남 경제 개발사의 기초를 아주 무시해선 곤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