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0 04:09:17

오보에 작전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아시아/태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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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ration Oboe.

1. 개요2. 배경3. 전개4. 진실

1. 개요

태평양 전쟁 말엽인 1945년 5월~7월에 이루어진 연합군의 마지막 수륙협동공세작전. 당시 중심전장인 일본 인근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있던 데다 공세의 중심이 미군도 아니었고[1], 전세에 전혀 영향을 끼치 못해서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2. 배경

1942년 남방작전으로 동남아시아 지역을 순식간에 휩쓴 이래 이 지역은 일본군의 핵심 전략요충지로 급부상했다. 애시당초 석유때문에 전쟁을 시작한 만큼 일본에게 있어 유일하며 핵심적인 전략자원 수급지역인 동남아시아는 전쟁수행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지역이었다.

특히 보르네오 섬에는 고무는 물론이오, 가장 중요한 자원인 석유가 매장되어 있어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곳을, 전세가 뒤집힌 1944년 이후의 연합군이 냅둘 리가 없었다.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는 전적으로 여기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오키나와 전투가 지지부진한데 다른 곳에서 활로도 찾고, 곧 있을 몰락 작전 대비 상륙전 예행연습도 할 겸, 남아도는 전력 활용도 할 겸 해서 킨케이드 제독의 제7함대를 지원하고, 일본 폭격에서 B-29에 밀리고 항속거리도 짧아 밀려난 B-24를 대거 투입하기로 약속했다.

3. 전개

이렇게 실시된 오보에 작전은 크게 3개의 그룹으로 실시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orneo_Campaign_CMH.jpg

우선 오보에(Oboe) 1로 명명된 첫번째 부대가 5월 1일, 보르네오 섬 북동쪽 타라칸 해안에 상륙, 약 2,000여 명의 수비대를 말 그대로 전멸시켰다. 병력교환비는 약 1:10. 패잔 일본군들은 다 내륙으로 도망가 브루나이 방면으로 향했으나 6월 10일, 오보에 6으로 명명된 두번째 부대가 브루나이에 상륙전을 단행, 보르네오 섬 수비대의 핵심인 제37군 사령관 바바 마사오의 부대를 완파하고 유전지대와 항만, 도시를 장악했다. 미군 B-24 폭격기들의 압도적 폭격하에 일본군은 요격에 나설 전투기도 없이 신나게 두들겨맞기만 했고, 여기서도 병력교환비 1:10이 재현되었다.

마지막으로 7월 1일, 오보에 2 그룹이 셀레베스 섬을 마주보고 있는 보르네오 섬 동부 발릭파판에 상륙, 여기서도 일본군은 신나게 털렸고 이로서 연합군은 마카사르 해협의 통행권을 완벽히 장악하고 동남아시아 각지에 분산된 일본군 간의 교통과 통신을 차단시켰다.

오보에 1, 6, 2 3개 그룹의 모든 작전은 8월 1일부로 끝났다. 나머지 패잔 일본군들은 험난한 정글과 산맥을 헤치며 보르네오 섬에서 마지막으로 유지하고 있던 거점인 쿠칭으로 향했으나, 그동안의 막장통치에 분개하던 섬 원주민들과 영국군 게릴라들의 협공으로 큰 피해를 입고[2] 강을 건너다 악어의 식사가 되는 수모를 당하여 최종적으로 쿠칭에 도달한 일본군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렇게 성공적으로 작전은 끝났고, 2주 후 일본은 무조건 항복한다.

4. 진실

사실 미국은 전쟁 끝날때까지 보르네오를 내버려두려고 했다. 사실 1945년이 되면 일본 해군은 바다로 기어나오지도 못하고 있었고 당연히 전략자원의 본토 수송은 꿈도 못꿨다. 게다가 이미 1944년 후반기 미군이 일본 본토와 동남아시아 점령지 해상 교통망의 중간 지점이었던 필리핀에 상륙, 제해/제공권의 장악으로 일본군이 본토에서 보내는 해상수송은 대만 이남으로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나마도 미 해군의 무제한 잠수함전으로 화물선이 보이는 족족 침몰당해서, 일본에는 보르네오산 전략자원을 본토로 수송할 화물선조차 남지 않고, 얼마 안되는 화물선마저 조선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인 을 싣고 오는데 주력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필리핀 탈환전 오키나와 전투로 동남아시아-일본 항로는 이미 자연적으로 차단된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보르네오 섬에서 석유를 아무리 뽑아낸다 한들 본토로 못 옮기니 냅둬도 그만이었다. 그리고 아주 냅둔 것도 아니고 폭격기로 가끔 두들겨주기도 했다.

사실 연합군이 보르네오 섬 공략을 계획한 건 정치적 문제였다. 중부 태평양에서 시작된 연합군의 대반격작전 대부분은 모두 다 미국이 하고 있었으며 45년 시점에 이르러 영국군 미얀마 대부분을 탈환했지만 여전히 해당 지역에 묶여 있었으며 영연방 호주군 뉴기니 섬과 태평양 각 도서에 고립된 일본군 잔당을 상대하고 있었다. 여기에 일본 본토 진공까지 사실상 미군 혼자 다 하려는 상황이라 영국으로선 매우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미국 혼자 싸워도 일본이 망하는 건 변하지 않지만, 중요한건 일본 항복 이후 태평양-아시아에서의 세력질서와 정치적 지분이었다.

이에 영국은 자국군과 호주군을 주력으로 하고 일부 네덜란드군을 더한 병력을 주력으로 하는 보르네오 섬 공격 계획을 제안하나, 이마저도 미군의 지원이 없으면 할 수 없었다. 때문에 온갖 이유를 다 들이댔는데 대표적인 것이 역시 보르네오 섬의 석유수급루트 차단이고, 그 외에 필리핀을 점령한 미군에의 위협 제거 등등을 거론했고, 맥아더도 자신의 정치적 입지[3]와 동맹국 배려 차원에서 이를 지원했던 것이었다.

실제 전쟁이 끝나고 약 10년 뒤부터 작전의 핵심이었던 호주 내부에서는 어차피 실행 안했어도 이길 전쟁, 괜히 고집부리고 쳐들어가다 수백명의 애꿎은 젊은이만 희생시켰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1] 영국군과 호주군이 주축이었고 네덜란드군 일부가 투입되었다. [2] 원주민들은 네덜란드 식민정부에 의해 금지당한 전통 문화인 '머리 사냥'을 다시 재개해서 수많은 일본군들의 모가지가 마구 썰려나갔다. [3] 당시 독일 항복으로 스포트라이트가 다 유럽에 집중된 반면 오키나와 전투는 지지부진해서 맥아더는 잠시 언론의 무관심을 받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