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04 06:29:55

창더 전투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아시아/태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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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더 전투
제2차 세계 대전 중일전쟁의 일부
파일:Mc1J-fxmttcq1832735.jpg
▲ 창더 전투 형세도
파일:b4006eecd86c7bc7a3385cf837186ed1.jpg
▲ 기관총으로 사격하고 있는 국민혁명군 병사
파일:Changde_battle.jpg
▲ 전투에 투입된 일본군 병사들
파일:20131009104013283.jpg
▲ 독가스로 인해 사망한 병사들
날짜
1943년 11월 1일 ~ 12월 20일
장소
중화민국 창더
교전국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민국
[[일본 제국|]][[틀:국기|]][[틀:국기|]]
지휘관 파일:대만 국기.svg 쑨롄중
파일:대만 국기.svg 왕야오우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요코야마 이사무
결과
중화민국의 승리[1]
영향
일본의 대륙타통작전 입안
병력 파일:대만 국기.svg 약 210,000명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약 6만 명
피해규모 - 일본측 통계: 2만 9천명 사살, 1만 4천명 포로
- 중국측 통계: 6만명 사상
- 일본측 통계: 전사 1274명, 부상 2977명
- 중국측 통계: 4만명 이상 사상.
1. 개요2. 배경3. 전개4. 결과 및 영향

[clearfix]
창더 전투 당시의 모습. 진격하는 국민혁명군에 노획된 수많은 일본군 무기들, 포로로 잡힌 일본군 병사들의 모습이 담겼다.

1. 개요

중국어: 常德會戰(창더 회전)
일본어: 常徳殲滅作戦(창더 섬멸작전)
영어: Battle of Changde(창더 전투)

중일전쟁 중인 1943년 11월 초부터 12월 말까지 일본군과 국민혁명군이 창더에서 맞붙은 전투. "동방의 스탈린그라드 전투"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치열한 공방전이었다. 격전 끝에 일본군이 창더를 장악했으나, 중국군의 반격으로 8일만에 철수하며 중화민국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2. 배경

창더는 과거부터 전략적, 경제적 요충지였고 20세기 들어 철도가 놓이고 공업이 발달하며 그 중요성은 증대되었다. 특히 중일전쟁기 중국 최대의 산업 도시이던 우한을 상실한 중화민국은 창더를 그 대체지로써 중시하였고, 따라서 일본군에게는 주요 공격 대상이었다. 1939년부터 창더에 수차례 공습을 퍼부운 일본은 1943년 스기야마 하지메의 남방작전을 승인, 창더를 점령하여 중국 내륙의 교통을 장악하고 충칭을 위협하기로 결정하였다. 따라서 그해 10월 징저우 등지에서 차출된 일본군 6만 병력이 창더를 향해 남하하였다.

3. 전개

1943년 11월 1일 일본군은 창더에 대한 포위 섬멸전에 나섰고, 3일부터 장강 연안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군 주공의 목표를 확실히 파악하지 못했던 중국군 지휘관 쑨롄중은 일본군 13사단의 참모 사쿠라 중좌의 시신에서 발견된 극비 문서를 통해 창더 함락이 적의 목적임을 깨닫고는 본격적인 방어선 구축에 나섰다. 따라서 일본군은 수차례 시도에도 창더 외곽의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보름이 흐르고 둥팅호를 건너 도시 자체를 기습 공격을 감행한 후에야 석문을 점령하며 전황을 유리하게 바꿀 수 있었다. 다만 일본이 동원한 낙하산 부대는 중국군에게 궤멸되는 등 여전히 전투의 승패를 좌우할 수 없었다. 국민혁명군 제150 사단장 쉬궈장은 결사 항전에도 휘하 병력 대부분을 상실하고 본인도 부상당해 후송되던 중 책임을 통감, 호위병의 권총을 뺏어 자살하는 등 수비대는 처절히 저항하였다. 하지만 21일 츠리현이 함락되며 전투는 시가전으로 전개되었다.

중국에게는 다행이도 창더에 주둔한 국민혁명군 제 57사단은 전투 수개월 전부터 성벽과 골목을 이용해 도시를 요새화하고 주민들을 후방으로 소개시켜 놓았다. 따라서 22일 개시된 창더 공방전에서 수비대는 결사대를 앞세운 일본군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저지하였고, 국민혁명군 제170연대장 장팅린은 솔선수범의 자세로 최전선에서 싸우며 7차례의 중상을 입은 후 결국 전사하였다. 그 결과 일본군 제109 연대는 연대장 누노 대이치 대좌를 포함한 절반의 병력이 전사하는 등 전멸하였다. 공세가 지지부진하자 25일에는 일본군 제120 연대는 수세에 몰리지도 않았는데도 반자이 돌격을 감행했지만 기관총과 박격포 세례를 받고 패주하는 촌극을 벌이기도 하였다. 오히려 중국군이 반격에 나서 정찰 중이던 일본군 제3사단 6연대장 나카쇼 오이치에게 중상을 입혔다. 바짝 약이 오른 일본군은 독가스 살포를 포함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총공세에 나섰다.
"폭탄은 소진되었고 병사들은 얼마 없으며 도시는 부서졌다. 사단장, 정치 부서장, 직원 등이 중앙 은행에 부처를 구성하고 각 부대원들이 저택을 지키며 최후의 저항을 펼쳤으며 죽음을 맹세하고 승리를 기원했다. 74군 만세! 장위원장 만세! 중화민국 만세!"
ㅡ 중앙은행에서 최후의 전투를 준비하던 사단장 위창완[2]의 전보

이로써 수많은 중국군이 독가스로 질식해 사망하였는데, 무차별 살포로 일본군 역시 다수 사망하는 등 일본은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그 결과 12월 1일에 이르면 일본군이 창더 도심에 진출하였고, 살아남은 중국군은 훗날을 기약하며 철수하였다. 12월 3일 마지막 수비대가 탈출하며 일본군이 도시를 장악했으나 곧 중화민국 군단들이 압박해오자 8일만에 후퇴하였다. 이로써 창더 전투는 중국군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4. 결과 및 영향

일본군은 1,274명이 전사하고 2,977명이 부상당했다고 밝혔으나 중화민국 측에선 4만의 일군을 섬멸했다고 밝혔다. 학계에서는 대략 1만의 손실을 입은 것으러 추정한다. 국민혁명군은 2만여 전사자를 포함한 6만여 사상자가 발행했다고 밝혔는데, 일본 측에선 중국군 2만 9천을 사살하고 1만 4천을 포로로 잡았다고 밝혀 양측 주장에 큰 차이는 없었다. 창더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중국군이 이전과 달리 수준이 향상되어 수만 단위로 큰 타격을 주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듬해 벌어진 대륙타통작전 시에는 수십만 단위의 대군을 동원하여 최후의 총공세에 나서게 되었다.

[1] 12월 3일 일본군의 창더 함락, 12월 11일 창더 포기 [2] 이후 자살하려 했으나 부하들의 만류로 접었고, 1백여 잔병과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다. 그가 창더를 버리고 도주했다는 보고를 받은 장제스는 그에게 총살형을 선포했지만, 곧 전말을 접한 후 총살형을 취소하며 26군 군장에 승진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