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17:37:29

청사고

중국의 정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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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고
淸史稿
저자 자오얼쉰 등
시기 20세기 중화민국
언어 한문[1]
권 수 536권(관내본,關內本,), 529권(관외본,關外本,)
분량 1583년 ~ 1911년 (329년)
명신종 11년 ~ 선통제 4년
1. 개요2. 편찬과정3. 평가4. 《청사》(淸史)
4.1. 중화민국 편찬 《청사》4.2. 중화인민공화국 편찬 《청사》
4.2.1. 편찬과정4.2.2. 출간 무기 연기4.2.3. 기타
5.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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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淸史稿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건국되고 나서 편찬된 기전체 역사서.

자오얼쉰(趙爾巽, 조이손)이 주도하여 학자 100여 명이 참여했다. 사서로서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稿)라는 표현이 붙었다. 현재 《청사고》를 바탕으로 중화민국에서 완성한 《청사》가 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청사공정(淸史工程)을 실시하여 청사를 편찬할 예정이나 정치적인 이유로 무산되었다.

《청사고》는 정사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자세한 내용은 이십사사 참조. 중국의 역대 정사인 이십사사에는 들지 못하지만, 《청사고》를 포함하여 25사라고 부르거나 《 신원사》(新元史)까지 포함하여 26사라고 부르기는 한다. 아무튼 2020년대 현재까지는 청사고가 청나라의 역사를 다루는 준정사서 취급을 받고 있다.

중국어 위키문고에서도 《 동관한기》, 《 신원사》와 함께 관련문헌(相關)으로 두었다. 《청사고》의 '고'(稿)란 표현은 이 책이 아직 완전하지 않은 초고라는 뜻이다.[2] 대체로 이런 사서의 초고에는 이렇게 '고'가 붙고, 이는 전 왕조의 사서였던 《 명사》(明史)도 마찬가지였다.

2. 편찬과정

1911년 신해혁명 이후 수립된 중화민국 정부는 공화제였기 때문에 후임 왕조가 전임 왕조의 사서를 편찬하는 중국의 전통을 이어야 할지 말지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이 논란은 위안스카이가 황제를 참칭하면서 새왕조를 열려고 하면서 과거의 전통을 이어야한다는 결론이 나자 갑자기 해결되었다. 1914년 총통 위안스카이는 황제를 참칭하였고, 사서 편찬의 전통을 잇기 위해 '청사관'을 설립해 이 작업을 시작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청나라의 유신인 자오얼쉰(趙爾巽, 조이손)을 청사관장에 임명하여 《청사》(淸史)를 집필하게 했다.

그러나 위안스카이 사후 중화민국은 곧 혼란에 접어들었고, 1920년대 초에 《청사》의 초고가 완성되었으나 편찬이 중단되었다. 1926년 다시 편찬이 시작되었고, 1928년에 동북 군벌 장쭤린의 재정 지원으로 출판하려고 했으나, 출판 직전에 자오얼쉰이 사망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이후 청사관에는 내분이 일어났고, 이어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 북벌군이 베이징을 점령했는데, 《청사고》에 국민당이 역적(賊)으로 표기되어 있고, 신해혁명 이후의 연호도 중화민국 연호가 아니라 청나라 연호인 '선통'을 그대로 쓴 것을 알고 출판을 금지하며 개정 작업에 착수했다. 국민당의 검열을 받아 수정된 판본을 '관내본'이라 하고, 이후 국민당의 지배를 받지 않는 일본 괴뢰국 만주국에서 출판된 원본을 '관외본'이라고 한다. 이때까지는 초고라는 뜻의 '고'(稿)가 붙어서 《청사고》라고 한다.

본래의 《청사고》는 전권 536권이고, 기전체의 전통을 따라 <본기> 25권, <지> 142권, <표> 53권, <열전> 316권으로 되어 있다. 이후 어느 정도 마이너한 체인지가 있었다.[3]

《청사고》 편찬 시점에서 조선은 이미 멸망해 있었고, 일본 제국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외교(外交)<지>(志)에는 <조선지>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베트남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청나라 인접국에 대하여 열전 말미에 속국전(屬國傳)이 4권 배정되어 있는데 속국전 1권에 조선· 유구, 속국전 2권에 월남 등으로 서술되어 있다.

3. 평가

애초에 미완성 정사서라 이런저런 한계점이 존재한다.

《청사고》는 신해혁명 이후에 편찬되었지만, 실제론 편찬자들이 청나라를 끝까지 섬기던 유신(遺臣)들이라 기본적으로 청 왕조의 입장에서 청사를 썼다. 때문에 논조 자체가 신해혁명에 반대하고 청나라의 정통성을 기리는 사상으로 일관했다. 예를 들어 명나라 말기 농민봉기군을 '토적(土賊)', 태평천국군을 '월비(粤匪)'[4], 신해혁명을 '창란(倡亂, 소요)'으로 간주했다.

오늘날에는 중국 본토건 대만쪽이건 신해혁명을 계승하는 입장이니만큼, 현대의 중국 정치인들이 이 책을 좋게 보기가 어려웠다. 편찬 당시에도 난징 국민정부 인사들이 불만을 터뜨렸는데 1929년 12월 14일,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19가지 이유를 들어 '청사고' 발행 금지를 요청했다. 국민정부가 문제로 삼은 책의 내용에는 반혁명, 선열 멸시, 멸망한 청조의 남은 신하들에 대한 칭송, 청조정 복위 장려, 한족 반대, 청나라 옹호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거기다가 미완성이라 교정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그냥 자료들이 정사서의 기준에 따라 묶여있을 뿐이라 사료들에 대해 검토 및 수정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간행 시 교정도 소홀히 하여 시계열, 사실, 인명, 지명 등의 오류를 종종 볼 수 있다. 편찬상의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편찬자들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완성된 사서가 아니라고 인정하는 말도 했다.

다만 이 책에 장점이 아예 없는건 아니다. 청실록, 청나라 국사열전, 청회전, 일부 기록물 등 대부분의 1차사료를 그대로 채록한 사서인터라 내용 자체는 풍부한 편이다. 편집자는 대량의 자료를 모아 초보적으로 정리하여 독자들이 비교적 상세하고 체계적인 청나라 역사 관련 소재를 얻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어떤 지와 청나라 말기의 인물들의 열전은 흔히 볼 수 있는 사료에서 따온 것이 아니라 다른 사료를 채록하여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여전히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다.

또 《청사고》가 편찬한 체제는 기본적으로 《 명사》를 본뜬 것이지만, 어느 정도는 청사만의 혁신이 있었다. 예를 들어 청사고의 지와 표에는 천문·지리·예악·선거·예문·식화 등 기존 정사서에서 각 방면의 활동을 기록한 것 외에 교통지·국교지 등 새로운 분류가 있다. 열전에는 구인, 번부, 속국의 삼전이 창설되어 청나라 사회의 새로운 발전을 반영하였다. 또한 반청의 중요한 인물인 장황언, 정성공, 이정국, 홍수전 등에 대해서도 청사고에 세세한 기록이 전한다.

4. 《청사》(淸史)

어쨌거나 이 《청사고》를 바탕으로 현대 중화권에서 《청사》를 편찬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중화민국에서는 자국판 청사를 저술하여 출판하였고 민간에 공개되어 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자국판 청사를 저술하였으나 출판에 실패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판 청사는 정치적 문제로 인해 공산당 일당독재가 무너질 때까지 민간에서 영영 못 볼 수도 있는 상황이다.

4.1. 중화민국 편찬 《청사》

제2차 국공내전에서의 참패로 중화민국이 대만으로 쫓겨난 이후, 중화민국은 1961년에 《청사》를 편찬했다.

중화민국 판본은 신해혁명이나 중국국민당 정부에 부정적인 부분을 수정하거나 삭제했다. 여기에 대만에서 명나라의 부흥을 꾀한 동녕국의 <정성공재기>(鄭成功載記)나 청에 저항한 명의 유신들을 다룬 <명유신열전>(明遺臣列傳), 남명(南明) 정권을 다룬 <남명기>(南明紀) 등을 포함했고, 태평천국을 다룬 <홍수전재기>(洪秀全載記)와 청나라에 맞선 혁명가들을 다룬 <혁명당열전>(革命黨列傳) 등을 포함했다. 정성공이나 남명 정권을 다루는 것에서 대만으로 국부천대한 자신의 집권을 반청복명에 빗대려는 국민당 정권의 의도를 알 수 있다.

<본기>(本紀) 25권, <지>(志) 136권, <표>(表) 53권, <열전>(列傳) 315권, <보편>(補編) 21권 등 모두 550권으로 구성되었다.

중화민국판 청사는 신해혁명 50주년을 기념하고 대륙을 수복한다는 정치적인 목적에 맞춰 출판된 탓에 기존 청사고에서 국민당 정권에 불리한 부분과 명백한 오류만 수정되고 정작 청사고 그 자체에 대한 학술적 재검토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출간 이후 역사 연구를 통해 1961년판 청사의 문제점이 지적되면서 1978년에 주석이 붙은 청사가 출간되었고, 이 주석만 따로 모아 1987년에 '청사고교주(清史稿校注)'가 출간되었다. 이 때의 연구성과를 반영해 1990년대에 '신청사(新清史)'라는 개정판이 나올 예정이었으나, 2000년에 탈중국화 대만 독립을 추구하는 민주진보당이 처음으로 집권하면서 개정 작업이 중단되었다.[5] 중국국민당 마잉주 총통이었던 2010년에 총통부는 "민주국가에서 소위 정사(正史)나 관사(官史)와 같은 '국가 공인 역사서'는 권위를 가질 수도 없고 국민의 신뢰도 얻을 수 없다"는 예산평가보고서를 올린 바 있어서, 국민당이 집권하더라도 국가에서 나서서 청사를 개정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4.2. 중화인민공화국 편찬 《청사》

4.2.1. 편찬과정

중화민국을 대만으로 몰아낸 중화인민공화국은 중화민국의 《청사》를 인정하지 않는다. 정통성이 있는 정권이 전임정권의 사서를 편찬해야한다는 것인데, 중화인민공화국은 1949년부터 중국의 정통 국가이고 '중화민국을 참칭하는' 대만 당국의 사서편찬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6] 중국 역사의 정통을 자임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은 중화민국 판 《청사》를 인정하지 않고, 《청사》 대신 《청사고》의 관내본을 정사에 준하는 것으로 본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건국 직후부터 자국판 청사를 펴내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대약진운동의 실패와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나라가 거지꼴이 되고 정치적으로도 혼란해지면서 청사 편찬을 할 겨를이 없었다. 특히 문혁 시기에는 청사를 편찬하려는 시도 자체가 반동으로 치부되어 언급할 수도 없었다. 이 혼란을 수습한 덩샤오핑도 자국판 청사를 펴내려고는 했으나, 대륙의 청나라 역사학계의 수준이 해외에 비해 너무 뒤쳐져 있어 미뤄졌다. 그동안 대륙의 학계는 해외 청나라 역사학계와 교류하며 연구성과를 축적해나갔다.

이 때의 성과를 바탕으로,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카를 마르크스의 역사관을 도입하여 2002년부터 본인들 버전 《청사》를 간행하는 청사공정(淸史工程)을 진행하고 있다. 후임 정권이 전임 정권의 사서를 편찬하는 것은 중국의 전통이므로, 《청사》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원래는 2012년~ 2013년에 완성된다는 얘기가 있었지만 좀 미루어졌고 중국공산당의 공식 기관지인 《 인민일보 2016년 1월 1일 해외판 보도에 따르면 초고가 완성되었다고 하는데 그로부터 7년후인 2023년까지 감감 무소식이다. 보통 완성이 되었다고 한다면 해외에서도 관심을 가졌을 것이고 중국공산당의 공정(프로젝트)이니 만큼 뉴스에 나왔을텐데 소식이 없다. 중국 정부의 검열이 미치는 바이두 백과 청사 문서에서는 아직도 중공판 청사가 완성되었다고 기술하고 있지 않다.

4.2.2. 출간 무기 연기

이렇게 중국측이 의욕적으로 프로젝트를 실시하여, 2010년대에는 나올 것이라고 예상되었으나, 중화인민공화국판 청사는 그 출간이 돌연 무기 연기되었다.

이 출간 연기는 정치적 결정이라고 한다. 중국에선 학자들이 저술한 역사책뿐만 아니라 당국이 편찬한 역사책도 '정치심사(政審)'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청사의 경우 2년 동안 정치심사를 통과하지 못해 프로젝트 자체가 무산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해외 신청사학파[7]의 영향을 지나치게 받았다"는 이유다.[8] 이 소식을 알린 장타이쑤(張泰蘇) 예일 대학교 교수는 "20억 위안이 투입된 대형 프로젝트가 정치적 올바름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산됐다는 사실에서 중국 학술 심사제도의 현주소를 확인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이 때문에 20억 위안(약 3600억원)을 투자해 20년에 걸쳐 편찬한 청사는 출판 불가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중국 내부에서도 비슷한 이유로 청사의 출간의 무기연기를 설명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그 이유를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았지만, 이 프로젝트에 정통한 중국의 여러 역사학자들의 기고문이나 논문을 보면, 결국 국가통합의 문제, 즉 정치적 문제 때문에 청사 출간은 시기상조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중국은 다민족국가인데, 청나라 시대에 벌어진 민족간 갈등(청나라 하에서 강제로 중국에 병합된 준가르, 위구르, 티베트 문제, 그리고 태평천국과 같은 한족-만주족 갈등 등등)의 역사가 청사에서 너무 속속들이 밝혀지면, 다민족국가인 중국의 국가통합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덮어두는 것이 낫다고 높으신 분들이 판단했다는 것이다.

또한 중국 대륙 내에서도 대만처럼 "이미 왕조시대가 끝난 지 100년 가까이 되는데, 정부의 획일적인 역사관을 공식화하는 관찬사서가 웬말이냐"는 반발이 학계에 있다고 한다. # 거기다가, 청사고 자체의 여러 지명-인명 오류가 바로잡히지 않았는데 바로 이를 바탕으로 완결판인 청사를 집필하는 건 무리라는 지적도 있었다. #. 여기다가 청사고를 집필할 때 누락되었던 만주어 사료들의 중요성이 부각됨에 따라, 이를 추가해야한다는 주장도 있기 때문에 아직 학술적으로 아직 완전판 청사가 나오기에는 이르다는 분위기도 있다고 한다.

결국 이런 저런 이유로 청사의 출간은 무기한 연기되었으며, 아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4.2.3. 기타

《청사》가 완성되리라 여겼던 2012~2013년 무렵에 한국에서 관련 보도들이 좀 나왔는데, 일부 무지한 기자들이 동북공정의 예처럼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이었다면서 역사왜곡을 하면 어쩌냐는 것이었다. 이게 말도 안 되는 이유는 역사서가 희박한 고대면 모를까 뻔히 명나라를 사이에 둔 외교 문제로 전쟁까지 벌인 조선-청 관계를 왜곡해 봤자 다른 현안도 쌓여 있는 한중관계에 마찰만 일으키고, 국제적 비웃음만 사기 때문이다. 또한 동북공정의 대상은 만주가 한족의 영역 밖이었던 고대에 한정된 것이며, 이미 만주를 기반으로 한 만주족이 중국을 지배한 청나라 시기가 아니다. 《청사고》나 동북공정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기자가 지레 추측기사를 쓴 것이다.

오히려 중화인민공화국의 목적은 《청사고》를 통해 청나라가 자국 영토와 주변 지역을 평화롭게 다스렸다는 것을 알리는 한편, 청나라의 영향력이 미친 남중국해, 티베트, 대만, 신강(위구르 자치구) 등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정당화하려는 것으로 보인다는 시각이 있다. 역사 편찬을 통한 현 정권의 정통성 합리화는 중화인민공화국판 《청사》뿐만 아니라 그동안 편찬되어 온 중국의 관찬 사서에서 항상 나타났던 부분이다. 《원사》를 쓴 명나라[9]도, 《명사》를 쓴 청나라[10]도 마찬가지였으며, 위의 중화민국판 《청사》도 대만을 무대로 한 정성공이나 남명 정권을 강조해 다룬 것을 보면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5. 외부 링크



[1] 다만 중화인민공화국은 청사고의 모든 원고를 표준 중국어로 번역했고, 이것을 바탕으로 청사를 편찬했다. [2] 그래서 영어 명칭도 《Draft History of Qing》이다. 정사서로 완성된 《명사》, 《송사》 등은 《History of Ming》, 《History of Song》과 같은 방식으로 부른다. [3] 《청사고》의 관외본은 일부 권의 첨삭으로 인해 529권으로 나오기도 한다. [4] 월(粤)은 광동성의 약자이다. 말하자면 '광동성 도둑'. [5] 이 신청사는 개정작업이 중단되기 전에 본기 중 일부가 완성되었고, 인터넷에서 열람이 가능하다. [6] 중화인민공화국도 1949년 10월 1일 전까지 중국을 대표하는 정통정부는 중화민국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7] 新清史學派/New Qing History. 청나라의 역사를 중국 왕조나 "만주족을 한화한 역사"가 아니라 만주족 중심, 더 나아가 거시적인 유라시아 역사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사조를 말한다. [8] 중국사회과학원은 전에도 '미국 사관의 영향을 받은 신청사학파(New Qing History, NQH)는 청조의 중화화를 부정해서 하나의 중국을 공격하는 도구이며 건륭제 준가르 토벌과 신강 정책을 패럴렐(parallel)로 놓아 중화인민공화국의 전통적 강역을 좁히려는 영미 사학계의 음모'라고 리뷰한 바 있다. # [9] 원나라의 잔당 북원이 존속했음에도 원사를 작성했다. 당연히 그 당시에 존재한 북원은 정통성 없는 괴뢰집단으로 격하되었다. [10] 숭정제까지만 정통 황제로 인정했으며, 명나라 부활을 위해 부흥군이 세운 남명 및 남명의 황제들을 괴뢰집단으로 취급했으며, 실제로 남명의 황제들은 본기에 넣지 않고 열전에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