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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36349> 연표 | 사건 |
1936년 |
3월
라인란트 재무장 | 7월
스페인 내전 발발 | 12월
방공 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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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
7월
중일전쟁 발발(
루거우차오 사건) ·
제2차 국공합작 | 8월
상하이 전투 | 12월
난징 전투(
난징 대학살) ·
파나이 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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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
3월
오스트리아 병합 | 6월
1938년 황허 홍수 | 7월
하산 호 전투 | 9월
뮌헨 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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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
4월
스페인 내전 종결 | 5월
할힌골 전투 | 8월
독소 불가침조약 | 9월
폴란드 침공(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
가짜 전쟁 | 11월
겨울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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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
4월
노르웨이 침공 | 5월
프랑스 침공 ·
됭케르크 철수작전 | 7월
영국 본토 항공전 | 9월
삼국 동맹 조약 | 10월
그리스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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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
5월
비스마르크 추격전 | 6월
바르바로사 작전(
독소전쟁 발발) ·
계속전쟁 | 9월
레닌그라드 공방전 | 10월
모스크바 공방전 | 12월
진주만 공습(
태평양 전쟁 발발) ·
말레이 해전 ·
남방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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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
4월
둘리틀 특공대 | 6월
청색 작전 ·
미드웨이 해전 | 7월
엘 알라메인 전투 | 8월
스탈린그라드 전투 ·
과달카날 전역 | 11월
과달카날 해전 ·
횃불 작전 ·
노르웨이 중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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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
1월
카사블랑카 회담 | 2월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 4월
바르샤바 게토 봉기 | 7월
쿠르스크 전투 ·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 9월
이탈리아 왕국의 항복(
이탈리아 내전 발발) | 11월
카이로 회담 ·
테헤란 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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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
4월
대륙타통작전 | 6월
바그라티온 작전 ·
노르망디 상륙 작전 ·
필리핀해 해전 ·
사이판 전투 | 7월
브레턴우즈 회의 ·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 8월
바르샤바 봉기 | 9월
마켓 가든 작전 | 10월
레이테 만 해전 | 12월
벌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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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
2월
얄타 회담 ·
드레스덴 폭격 ·
이오지마 전투 | 3월
연합군의 일본 본토 공습(
도쿄 대공습) ·
연합군의 독일 본토 침공 | 4월
베를린 공방전 ·
오키나와 전투 | 5월
나치 독일의 항복 | 7월
포츠담 회담 |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만주 전략 공세 작전 ·
일본 제국의 항복(
옥음방송) | 9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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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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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 왕국 국경 근처에 포격을 가하는 독일 육군 포병 | |
날짜 | |
1941년 4월 6일 ~ 6월 1일 | |
장소 | |
그리스 왕국 및 이탈리아령 알바니아 남부 | |
결과 | |
추축국의 승리 | |
교전국 | |
[[나치 독일| ]][[틀:국기| ]][[틀:국기| ]] [[이탈리아 왕국| ]][[틀:국기| ]][[틀:국기| ]] |
[[틀:깃발| [[영국| ]][[틀:국기| ]][[틀:국기| ]] [[호주| ]][[틀:국기| ]][[틀:국기| ]] [[뉴질랜드| ]][[틀:국기| ]][[틀:국기| ]] |
]][[틀:깃발| ]][[그리스 왕국| ]]
지휘관 |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막시밀리안 폰 바익스|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루돌프 파이엘 [[틀:깃발| ]][[틀:깃발| ]][[세바스티아노 비스콘티 프라스카| ]] [[틀:깃발| ]][[틀:깃발| ]][[우발도 소두| ]] [[틀:깃발| ]][[틀:깃발| ]][[우고 카발레로| ]] |
]][[틀:깃발| ]][[빌헬름 카이텔|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헨리 윌슨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토머스 블래미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버나드 프레이버그 |
]][[틀:깃발| ]][[알렉산드로스 파파고스| ]]
전력 | |
[[틀:깃발| 병력 680,000명 전차 1,200대 항공기 700기 [[틀:깃발| ]][[틀:깃발| ]][[이탈리아 왕국군| ]] 병력 565,000명 전차 163대 항공기 463기 |
]][[틀:깃발| ]][[독일 국방군| ]]
[[틀:깃발| 병력 450,000명 [[틀:깃발| ]][[틀:깃발| ]][[영국군| ]][[틀:깃발| ]][[틀:깃발| ]][[호주군| ]][[틀:깃발| ]][[틀:깃발| ]][[뉴질랜드군| ]] 병사 252,612명 전차 100대 항공기 200 ~ 300기 |
]][[틀:깃발| ]][[그리스군| ]]
피해규모 | |
[[틀:깃발| 7,599명 사망 10,752명 부상 385명 실종 [[틀:깃발| ]][[틀:깃발| ]][[이탈리아 왕국군| ]] 19,755명 사망 63,142 부상 25,067명 실종 |
]][[틀:깃발| ]][[독일 국방군| ]]
[[틀:깃발| 13,408명 사망 42,485명 부상 1,290명 실종 270,000명 포로 [[틀:깃발| ]][[틀:깃발| ]][[영국군| ]][[틀:깃발| ]][[틀:깃발| ]][[호주군| ]][[틀:깃발| ]][[틀:깃발| ]][[뉴질랜드군| ]] 903명 사망 1,250명 부상 13,958명 포로 |
]][[틀:깃발| ]][[그리스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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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0년 10월부터 1941년 4월까지 계속된 추축국의 그리스 왕국 침공이다.
2. 배경
1939년 초, 이탈리아 왕국의 베니토 무솔리니는 발칸반도 남부의 약소국 알바니아 왕국을 강제로 병합하여 발칸반도 침공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했다. 또한 과거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으로 에게해의 도데카니사 제도를 지배하던 이탈리아는 발칸반도에서의 영향력 확대에 골몰하던 차였다.이런 상황에서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다. 당초 전쟁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고 앞선 오스트리아 병합 진행과정에서의 독일군의 추태를 본 이탈리아는 전쟁에 참전하지 않고 숨죽이고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1940년 5월 10일 독일군이 아르덴 산맥을 돌파하며 프랑스 내륙 깊숙히 진군하면서 벨기에에 몰려있던 영국군이 도망가버리고 전의를 상실한 프랑스가 항복해버리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였다.
됭케르크 철수작전이 종료되고 독일군이 적생 상황 작전을 발동하여 파리를 향한 압박을 가하고 있던 6월 10일 무솔리니는 주변 참모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프랑스의 패배에서 콩고물을 얻어먹어보고자 영국과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날린다. 하지만 전혀 준비가 되지 않았던 이탈리아군은 10일 선전포고를 날렸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러던 사이 6월 14일 독일군 제 30사단이 파리를 점령하였고 6월 17일 패탱이 독일에 항복을 선언하자 18일 허둥지둥 뮌헨으로 달려와 히틀러에게 이탈리아의 공격시작 이전까지 프랑스 항복을 받아주지 말라고 요청하였으나 당연히 히틀러는 거부하였고 6월 22일 프랑스와의 강화협정을 체결하였다. 6월 21일 이탈리아 왕국군은 뒤늦게 프랑스군을 공격하였지만 알프스에 배치된 프랑스 산악사단의 강력한 방어선에 고작 8km밖에 진격하지 못하며 체면을 왕창 구겼다. 본격적으로 나치 독일편에서 참전한 무솔리니는 프랑스 전역의 군사적 실패를 만회하고 자국의 영향력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기 위해 발칸반도에 대한 대규모 군사작전을 계획한다.
그러나 무솔리니의 야망은 시작부터 아돌프 히틀러의 반대에 직면했다. 무솔리니는 아드리아해, 발칸반도에서의 패권과 '미수복 이탈리아' 중 하나인 달마티아를 획득하기 위해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공격하고자 했지만, 히틀러는 이에 반대하고 오히려 유고슬라비아를 추축국에 가담시키고자 했다. 이미 히틀러는 6월 18일 무솔리니와의 대 프랑스전 승전 회담에서 이탈리아 해군에 프랑스 해군을 편입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거부하였고 통보도 없이 루마니아로 진주하여 유전을 손에 넣은 상태였다. 여기에 강한 분노와 자신의 꿈인 로마제국의 부활이 위기에 직면했다는 것을 느낀 무솔리니는 유고슬라비아 대신 독일이 손을 쓸 수 없는 그리스 왕국을 자국 세력권으로 편입하고자 했다.[1]
이탈리아는 이집트 전역이 마무리되기도 전인 10월 28일, 그리스 왕국에 주요 거점의 할양, 이탈리아 왕국군의 주둔 허용 등을 포함한 최후통첩을 날렸고, 그리스 왕국의 실질적 지배자인 요안니스 메탁사스(Ιωάννης Μεταξάς/Ioannis Metaxas) 총리는 프랑스어로[2] 이렇게 답했다.
"그래, 전쟁해주마!"
"Alors, c'est la guerre!" [3]
그렇게 이탈리아와 그리스는 전쟁상태에 돌입했다."Alors, c'est la guerre!" [3]
3. 이탈리아군의 패퇴와 그리스군의 반격 (1940. 10 ~ 1941. 3)
졸속으로 이뤄진 선전포고와는 달리, 이탈리아군은 개전결정에서 개전까지 불과 2주일의 준비기간밖에 갖추지 못했다. 더군다나 주력의 대부분은 이집트를 침공 중이어서 그리스 전선에는 많은 병력을 투입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러면서 별 저항없이 그리스를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병참 준비도 허술했다.[4]물론 이탈리아의 전쟁준비가 안일했던 건 사실이지만서도, 양국의 국력 차이를 생각하면 그 누구도 이탈리아가 질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오토바이와 승용차로 구성된 기갑부대, 소량의 전투기[5]가 공군의 전부인 그리스군과 달리 이탈리아군은 나름 CV-33, M11/39같은 장갑차량으로 이뤄진 기갑부대를 보유했고, 해군은 지중해를 두고 영국 해군과 맞상대를 할 수 있을 정도였기에, 당시 기준으로는 그리스를 얕보는 시각이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
<rowcolor=white> ▲ 당시 그리스 육군 지휘관 알렉산드로스 파파고스 대장. [6] |
그리고 곧 알바니아에 겨울이 찾아오고 약소국인 그리스군의 병참 한계가 드러나면서 그리스의 공세는 종료되었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전 세계에 망신을 당했다.[7] 이를 만회할 목적으로 이탈리아군은 이듬해 대규모 병력을 증원하여 1941년 3월 9일부터 약 1주일간 춘계 대공세를 펼쳤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이 종료되었다.
이탈리아 육군이 총체적 난국에 빠졌지만, 평소 자랑하던 이탈리아 해군은 영국 함대에게 도망치기 바빠 전혀 도움을 못 주었으며, 오히려 타란토 공습으로 된통 당한 후에는 바다로 나오지조차 못했다. 거기다가 북아프리카 전역에서는 영국군의 반격으로 순식간에 키레나이카를 상실하고 리비아 식민지를 모조리 잃어버릴 위기에 빠지며 패색이 더욱 짙어졌다.
4. 교착기
한편 나치 독일과 아돌프 히틀러는 애당초 그리스를 포함한 지중해-북아프리카 전선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오히려 제멋대로 그리스를 침공한 이탈리아에 화를 내고 승전 중인 그리스에 축전을 보냈다. 당시 그리스 군사 정권을 이끄는 메탁사스 총리가 친독 성향 인물이었기에 히틀러는 그리스를 추축국에 끌어들이려고 엄청나게 애를 썼고 하다못해 추축국에 우호적인 중립국 수준으로 남아도 매우 이득되는 상황이었는데 쓸데없이 이탈리아가 그리스를 침공하면서 그게 다 틀어졌기 때문이었다. 이는 1941년 당시 독일 육군은 1940년 12월 18일 히틀러가 내린 총통 명령 제 18호에 따라 독소전쟁을 준비하고 있었고 공군과 해군의 경우 대서양과 영국 해협에서 이미 피터지게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지중해 방면으로 전력을 투사할 여유가 없었다.그러나 이탈리아가 하도 못싸워서 전선에서 이탈할 가능성과 함께, 남지중해 지역에서 영국군이 세력을 확대할 조짐이 보이자 결국 독일은 지중해-북아프리카 전선과 발칸반도 개입을 결정했다. 북아프리카에는 에르빈 롬멜을 사령관으로 하는 아프리카 기갑군단이 파견되었고, 발칸반도에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침공하고 루마니아 왕국, 불가리아 왕국을 추축국에 가담시켜 육상로를 확보한 다음, 그리스에 개입하였다.[8]
영국도 그리스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참전계획을 눈치챈 영국은 그리스의 독립 및 안전보장을 약속하며 1941년 3월부터 비밀리에 지상군 병력을 그리스에 상륙시키기 시작, 최종적으로 약 6만여 명을 그리스에 전개했다.[9]
그리스는 이탈리아와는 차원이 다른 군사력인 독일의 참전을 두려워했으며 때문에 對독일 정책에 있어 매우 신중하게 접근했다. 영국의 병력지원 제의도 비공개적으로 수용했으며 독일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메탁사스 총리의 급사로 인해 새로 선출된 총리 알렉산드로스 코리지스(Αλέξανδρος Κορυζής/Alexandros Koryzis)는 전임자에 비해 대외비 유지에 취약했고, 이미 영국군의 그리스 진주는 주 그리스 독일 대사관에 의해 파악된 상태였다. 그나마 그리스로서는 다행히 유고슬라비아에서 페타르 2세의 친위 쿠데타가 일어나 추축국에서 탈퇴하는 일이 벌어졌으나 그저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을 버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5. 독일군 참전과 전역 종결(1941. 4)
1941년 4월 6일, 나치 독일군의 발칸반도 작전이 개시되었다. 당시 그리스는 서부 알바니아 방면, 중부 유고슬라비아 방면, 동부 불가리아 방면이라는 광범위한 지역을 방위해야 했으며, 이 규모의 방어전은 그리스군의 역량을 초과한 것이었다. 이성적인 대응책은 그리스 중부로 후퇴하여 전선을 축소시키는 것 뿐이었지만, 이럴 경우 발칸 전쟁부터 제1차 세계 대전에 걸쳐 얻은 동부 전체와 테살로니키 같은 중요 항구도시, 그리고 무엇보다 예나 지금이나 그리스인들의 정신적, 종교적 수도인[10] 아토스 산 등을 포기해야 하는데, 당연히 그리스군과 그리스 정부가 이를 미쳤다고 받아들이겠는가?게다가 이탈리아군을 밀어붙이고 있는 서부 전선이나 메탁사스선이 건재한 동부 전선과 달리 중부 전선은 아무런 방어 시설도 없이 소수의 경계 병력만 있는 상태였다. 이는 유고슬라비아가 아직 건재하여 중립국으로 남는 것을 상정한 것으로, 설령 유고슬라비아가 침공당하더라도 그리스와 우호국이며, 어느 정도 체급도 갖춘 나라이니 병력 전개를 할 시간은 벌어줄 것이라 생각했는데[11] 그 유고슬라비아가 예상을 깨고 별다른 저항도 없이 2주만에 홀라당 무너져버리면서 중부전선에 거대한 공백이 생겨버린 것이다. 이런 대규모의 전략적 공백은 영국군의 지원으로도 커버할 수 없었고, 독일군은 당연히 이 아킬레스건을 찔렀다.
불가리아 방면의 동부전선에서는 메탁사스선 정면으로 독일군 제18산악군단[12]의 5산악사단, 6산악사단, 72보병사단과 30군단의 50사단, 164사단이 공세를 펼치는 사이, 제2기갑사단이 불가리아 - 유고슬라비아 국경을 넘어 방어선 후방의 항구도시 테살로니키를 함락하고 메탁사스선을 포위해 버렸다. 결국 메탁사선의 그리스군 6만여 명은 1941년 4월 10일에 독일군에게 항복, 동부전선은 붕괴되고 이 여파로 이름만 남아있던 중부전선도 무너졌다.
4월 15일, 중부/동부전선이 내륙으로 크게 후퇴하자 그리스-영국 연합군은 패주를 시작했다. 당시 영국 공군은 아직 본토방위에도 힘겨운 상황이라 그리스 일대의 제공권은 루프트바페가 꽉쥐고 있었고, 이들의 퇴로는 전투기의 기총소사와 Ju87, Ju 88의 폭격에 피로 물들었다. 그나마 남은 영국 공군이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사투를 벌였는데 유명 작가 로알드 달이 참여했었고, 이는 그의 자서전에 비교적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당시 절망적인 교전 중 아테네에서 13기의 호커 허리케인으로 200여기의 독일 전투기와 맞서(!) 90분동안 27기를 격추하는 대전과를 이루기도 했다.[13] 이 사투의 치열함은 전투기 에이스인 팻 패틀(Pat Pattle)[14]이 이 전역에서 전사할 정도로 엄청났다.
이 시점에서 영국군 지휘부는 목표를 그리스 방어에서 영국 원정군의 철수로 방침을 바꿨다. 이는 동시기에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롬멜의 아프리카군의 예상치 못한 공세로 전선이 붕괴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중대한 패배로 국가방위가 불가능해지고 영국이 철수를 준비하자 절망감에 빠진 그리스의 새 총리 코리지스는 4월 18일 권총자살했다.
한편, 서부 알바니아 전선의 주공을 맡은 이탈리아군은 또다시 전면공세가 실패로 돌아가 공세계획이 하마터면 망쳐질 뻔했다. 서부 알바니아 전선의 주공이 그리스와 영국군에 넘어가면서 공세중이던 독일군 측면을 위협했던 것이다. 그러나 중부/동부 전선의 붕괴로 서부전선의 그리스군 역시 후퇴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를 곱게 내버려둘 독일군이 절대로 아니었다. 그리스군의 후퇴를 차단하기 위해 슈츠슈타펠 총통경호대 아돌프 히틀러 여단이 측면에서 비스듬히 내려가는 공세를 단행했다. 그리스군은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안타깝게도 상대는 지금까지 상대했던 이탈리아군과는 질적으로 다른 독일군이었다.[15] 독일군의 포위에 그리스군은 고립되었고, 탈출을 위한 마지막 총반격을 개시했으나 독일군의 역습으로 좌절되자 서부전선의 그리스군 사령관은 4월 20일 항복한다.
웃긴 것은 이 때까지 이탈리아군은 그리스군을 밀어내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며, 더 웃긴 것은 무솔리니가 이탈리아가 항복 조인식에 참여하지 못했다고 항의해서 4월 23일에 다시 항복하는 개그가 있었다는 것이다.[16]
4월 24일에는 과거 테르모필레 전투가 벌어졌던 테르모필레 지역에서 영국군은 지연작전을 개시, 2파운더 대전차포의 매복사격 등을 통해 일시적으로 독일군 기갑부대의 공세를 격퇴했으나 결국 독일 산악부대의 우회공격으로 전격 패퇴한다. 그래도 철수작전을 위한 귀중한 이틀의 시간을 벌어놨다. 테르모필레를 마지막으로 영국군은 크레타 섬으로 철수했으며, 알바니아와 메탁사스 방어선에서 병력 대부분이 항복해버린 그리스는 저항 의지를 상실했다. 결국 4월 27일, 독일군 선두부대가 아테네에 입성함으로써 그리스 전역은 종결되었다.
6. 결과
그리스 침공 결과, 그리스 본토에는 추축국의 괴뢰 국가 그리스국이 수립되었으며, 대부분의 영토는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불가리아 왕국이 분할하여 갈라먹게 된다.그러나 아직 그리스의 마지막 영토인 크레타 섬에 영국, 그리스군 철수부대가 있는 상황이었고, 히틀러는 크레타 섬의 비행장까지 제압해야 플로이에슈티 유전지대가 안전하다는 이유로 크레타 섬에 대한 공격을 지시한다.
한편 유고슬라비아 침공과 이 그리스 침공은 이후 독소전쟁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주었다. 우선 독일군은 이 작전 때문에 바르바로사 작전을 연기해야 했다. 그리고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은 여러가지 정보의 혼선과 이 침공 작전으로 인한 작전 연기로 인해 '독일군은 적어도 올해(즉 1941년)에는 침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오판을 내렸다. 이는 독소전쟁 초기 소련군이 엄청난 피해를 입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1]
유고슬라비아는 당시 독일 오스트마르크 주(=오스트리아), 또 다른 추축국
헝가리 왕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이탈리아가 독단적으로 유고를 침공할 경우 독일이 개입할 여지가 높았다. 반면 그리스는 독일과의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그리스 내에서도
메탁사스 총리를 비롯한 군부는 독일 유학파여서 친독 성향이 강했지만, 귀족들과
요르요스 2세 등 왕실은 친영파였다.
[2]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도 유럽 세계의 외교 언어는 기본적으로 프랑스어였다. 현재의 영어 중심으로 재편된 건 1950년대 이후.
[3]
최후통첩에 대한 대답을 '유감스럽지만 귀국의 이런 무리한 요구를 수용할 수 없습니다'라는
외교적 수사도 아니고 '그래 한판 붙자'라는 매우 공격적인 답신을 해버린 것. 그런데 이 이야기는 와전되어서 메탁사스 총리가 이탈리아의 최후통첩에 그리스어로 "안 되오(Οχι, ohi)!"를 써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마도
겨울전쟁 당시
퀴외스티 칼리오
핀란드 대통령이
소련의 최후통첩에 "안 되오!"라고 대답한 일화와 뒤섞인 듯 하다. 하여튼 지금도
그리스와
키프로스에서 10월 28일은 "Ochi day" 안되는 날로, 공휴일이다.
[4]
한편 리비아에서 이탈리아군을 갈아버리고 있던 영국군은 이탈리아군이 아프리카가 아니라 그리스로 투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 상태가 된다.
[5]
극소량의 폴란드산 PZL P.37 폭격기, PZL P.43, PZL. P.23, 정찰기 겸 경폭격기 PZL P.24, 글래디에이터 복엽 전투기
[6]
산맥을 중심으로 지연전을 수행하며 이탈리아군을 막아냈다. 훗날
그리스 내전에서는
제임스 밴 플리트와 콤비를 이뤄 활약한다. 그간의 공을 인정받아 1949년 그리스군
원수로 진급한다. 상징적으로 원수 계급을 받은 그리스 국왕들을 제외하면 그리스 역사상 유일한 원수이다.
[7]
당시 양군의 물자 부족에 대한 농담이 있다. 그리스 공군은 항공 폭탄이 떨어지자 폭격기에 화장실 변기나 구멍난 신발, 빈 깡통 등을 탑재한 다음 이탈리아군을 폭격했으며, 양측 모두 방한용 장비가 없어 그리스군은 여러 명이 모포 1장을 덮고 잠을 잤는데 그것마저도 없던 이탈리아군은 그리스군 사이에 끼어 잠들었다는 내용.
[8]
이런 결정에는 히틀러가 그리스에서 영국 폭격기들이 출격할 경우, 루마니아의 플로이에슈티 유전이 작전권이란 점이 영향을 미쳤다. 플로이에슈티 유전은 독일이 대전 기간 동안 확보한 최대 규모의, 그리고 거의 유일한 유전이었기 때문이다.
[9]
이렇게 그리스로 지중해 영국 육군이 분산되면서 에르빈 롬멜은 북아프리카 군단의 선두 부대 도착과 동시에 본대가 올때 까지 기다리고 단단한 방어선을 구축하라는 참모부의 명령을 상큼히 씹고 공세에 나섰고 그 결과 제발 롬멜의 큰 코를 꺾어주길 바라던 독일군 참모부의 기대와 반대로 영국군은 큰 피해를 보고 만다.
[10]
그리스는 인구 98%가 정교회 신자이다.
[11]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전신
세르비아 왕국은 1차대전 때 1915년 불가리아가 옆구리를 때리기 전까지 오헝제국을 상대로 버텨냈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2차대전기에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다민족 국가가 되면서 오헝제국에 있던 민족문제가 고스란히 옮겨가 버렸고, 유고슬라비아의 100만 대군은 추축국의 전면침공 속에 민족문제까지 터져나오며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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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일반 보병군단이었으나 1943년에 산악사단 중심으로 구성이 바뀌면서 산악군단으로 변경된다. 당시 사령관은
프란츠 뵈메 보병대장으로, 뵈메 본인도 나중에 보병병과에서 산악병과로 변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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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커 허리케인은 중요부위를 제외한 대부분의 뼈대가 나무로 만들어져서
슈퍼마린 스핏파이어가 물량이 딸릴 때 임시방편으로 나무와 천막으로 만든 전투기라는 이미지가 생길 정도로 난전에는 적합하지 않은 전투기였다. 그런데 이런 전과를 올렸으니 가히 대승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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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인격추 34기 비공인격추까지 합산시 64기. 비공인기록까지 영연방 최고에이스가 되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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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침공과
프랑스 침공 당시 SS
무장친위대의 경우 처참한 전투력에 국방군 육군 부대들에게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앞선 두 전역에서의 실전 경험으로 그리스 침공 당시 히틀러 여단의 전투력은 이전에 비해 향상이 된 상태였고 이후
바르바로사 작전을 걸치면서 타 무장친위대 부대들의 전투력 역시 크게 좋아졌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아는 친위대 정예부대들이 국방군 정예부대들보다도 우위에 서게 된 것은 아무리 빨리 잡아도 1943년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때부터이며 1943년 말 힘러가 군수권을 장악하며 무장친위대에게 보급이 우선적으로 지급된 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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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이때 항복한 서부전선의 그리스군 사령관 요르요스 촐라코글루(Γεώργιος Τσολάκογλου)는 독일군 상대로 선전했다는 평가와 호의적인 반응을 받으며 독일의 그리스 괴뢰정부 수상으로 옹립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