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39년 12월, 중화민국이 일본 제국에 대항하여 감행한 반격 작전. 80개 사단을 동원한 대규모 작전이었으며[1] 지금껏 일본군 소모를 목표로 한 소규모 방어적 공세만 하던 중화민국에서 보기 드문 공세전환용 작전이었으나 전략, 전술적으로 좋은 성과를 얻진 못했다.2. 배경
1939년 5월 일본이 할힌골 전투에서 소련군에게 처참하게 박살나는 것을 목도한 장제스는 소련이 나치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자 일본을 공격할 것이란 기대를 하게 되었다. 더욱이 짜오양, 창사에서의 잇달은 승리로 그는 크게 고무되었다. 장헌문 교수는 장제스와 중국군 지도부가 제1차 창사 방어작전 등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일본군을 경시하는 풍조"를 가지고 " 유럽전쟁의 발발과 같은 국제정세의 변화가 중국 측에 유리하게 작용하였기 때문에 국민정부가 이러한 절호의 시기를 이용해서 대규모의 반격을 계획"했다고 보았다.레이 황 교수는 일본 제국이 인도차이나와 버마로 진출하고 따라서 일본군이 중국에서 대거 철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장제스가 일본의 대중국 포위망의 형성을 우려하였으며 또한 일본군을 지구전에 묶어두어 소모시키는 전략을 유지하기 위해 동계공세작전을 준비했다고 보았다. 장제스 본인이 1939년 7월 14일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쓰기도 했다.
"적의 정규군은 철수할 기미를 보이고 있다. 앞으로 해안을 봉쇄함으로써 우리와 외국의 접촉을 차단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다. 동시에 우리 내지의 전략적 요충지를 확고히 장악함으로써 적의 연락체계의 생명선을 지키려 애쓸 것이다. 우리는 곧바로 적을 좌절시키기 위한 대응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즉 일본군이 철수하여 전쟁 비용을 감축하고 점령한 요충지의 방어를 굳건히 하면서 소모전에서 벗어나려는 것을 방지하려 했단 것이다.
하지만 기세찬 교수는 장제스가 중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대외정세가 흘러갈 것이라 예측한 것은 인정했지만 당장 미국과 소련이 중일전쟁에 가담할 가능성은 없었으므로 그것에 큰 비중을 두는 것을 비판하며 왕징웨이같은 비관론자들의 주장을 일소하기 위해 중국의 역량을 보여주는 것에 목적이 있었다고 보았다. 장제스는 1939년 10월 29일 제2차 난웨군사회의에서 "유럽전쟁이 끝나지 않고 세계문제가 아직 해결되기 이전에 우리가 만약 조급하게 끝내려고 일본과 타협하려는 망상을 한다면, 그것은 바로 스스로 패배를 찾는 것이며 스스로 멸망을 구하는 것이다." 라고 발언하며 화친 주장을 경계했고 "우리가 이후 전심전력으로 참고 분투하여 자신의 역량을 증강시키고, 적의 약점을 타격하여 도처에서 승전을 획득하고 항상 전과를 발양하면, 형세의 발전이 반드시 우리에게 유리하게 될 뿐만 아니라 국제 정의와 평화의 신국면 또한 반드시 우리가 만들고 촉진시킬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한 것에서도 장제스의 의도가 드러난다.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1939년 동계공세작전은 정치적 목적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장제스가 군사적 목적을 경시한 것은 아니었다. 장제스는 "단지 소극적으로 전과를 보존하려는 것은 충분치 않으므로 반드시 적극 전진하여 전과를 확대해야 한다."라며 공세작전을 주문한 바가 있었으며 2차 난웨군사회의에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결정된 전략은 일관되게 사리에 맞고 건실한 것이지 결코 과도한 모험은 아니었다. 이번 호남성 북부의 전투는 전략상 최초로 공세를 취하지 않고 단지 방어전략을 취했다. 그 뒤에 유리한 형세를 틈타 공격하여 결국에 이번의 결정적 승리를 얻었다.(...) 물론 지금 우리의 무기와 장비로는 여전히 철저한 대규모 공격작전을 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부단히 연구하여 실을 피하고 허를 치고 기회를 타 빈틈을 밟는 방법을 도출하여 각지의 적군이 모두 우리의 타격을 받게 한다면 적은 퇴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즉 장제스는 일본군의 허점을 타격하여 지속적인 소규모 승리를 얻어 전과를 거두고자 하는 군사적 목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1939년 겨울 시점에서 중화민국엔 장제스가 후방에서 편성한 군대와 장교진이 1년간의 훈련을 마친 시점으로 공세의 여유가 있었던 시점이다. 위의 추론과 분석들을 종합하면 장제스는 제1차 창사 승전을 비롯한 전황, 국제정세, 왕징웨이를 비롯한 국내정세 문제, 전과확대의 의도, 중국군 전력 확충 등의 목표를 종합적으로 염두에 두고 동계공세작전을 준비한 것이라 하겠다.
3. 전개
3.1. 난닝 전투
일본군은 11월 23일, 작전이 시작되기 직전에 광시성의 성도이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국경의 난닝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폭격과 하이난 점령으로도 하노이 루트를 차단하지 못한 일본군이 육상 공세를 취한 것이다. 당시 난닝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물자를 수입한 하노이 루트와 연결된 중요 거점으로 당시 중국의 최대 보급로였다. 당시 난닝으로 수입되는 물자만 4~6천톤에 달했고 중국의 전투 의지 분쇄와 전투 능력 저하를 위해선 필수적인 공격목표였다 할 수 있겠다. 일본군은 광저우의 21군 산하 5사단을 주력으로 3만명의 병력을 투입하여 중국군 4전구 소속 3만명을 격파하고 26일에 난닝을 점령했다. 중불 국경 지대의 룽저우와 전난관도 일본군 오이카와 지대의 공격으로 차례로 점령되었고 중국군 수비대는 무참히 패배했다. 중국군은 난닝 탈환을 위해 전차 4대와 1500명의 병력을 데리고 반격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룽저우 반격 작전에서도 패배했다. 중국군은 7700명의 전사자와 700명의 포로를 냈고 일본군은 300명의 전사자를 비롯한 경미한 피해를 입은 반면에 막대한 군수물자까지 노획했다. 이에 4전구 사령관 장파쿠이가 사의를 비치기도 했으나 장제스는 이를 반려했다. 난닝의 패배 때문에 장제스는 동계 공세 계획을 전면적으로 수정했다. 공세를 위해 준비되었던 상당수의 병력이 난닝 탈환을 위해 광시로 빠졌고 중앙군, 쓰촨, 구이저우에서 난닝 탈환을 위해 대군을 차출했다. 12월 17일 난닝 탈환을 위해 15만 대군과 100여대의 항공기, 200대의 전차와 장갑차가 집결했다. 바이충시가 지휘하는 난닝 탈환군은 쿠룬관 공격을 시작으로 난닝 탈환 작전의 서막을 올렸다.3.2. 동계공세작전의 전개(1939.12~1940.2)
난닝 전투로 상당한 정예병력과 공군력을 차출해야 했고, 때문에 동계공세작전은 원래의 11월 26일에서 12월 초로 늦춰졌으나 예정대로 시행되었다. 중국의 대반격이 준비되는 동안 일본군은 중국군이 더 이상 그들에게 맞설 수 없을 것이라 자만했다. 옌시산의 2전구, 구주퉁의 3전구, 리쭝런의 5전구가 주공을 맡았으며 웨이리황의 1전구, 장파쿠이의 4전구, 주사오량의 8전구, 쉐웨의 대리인 천청의 9전구, 유학충의 노소전구, 녹종린의 기찰 전구가 조공을 수행하기로 하였다.12월 1일부터 화북의 제1전구 3집단군 소속 유격대들이 일본군의 교통망을 교란시켰고 81사단이 카이펑을 공격하여 탈환했다. 신5군, 9군, 36군도 총반격에 들어가 일본군 35사단을 격파하고 안양을 점령했으며 47군이 타이항산맥을 점령했다. 12월 10일에는 2전구가 반격에 들어갈 예정이었는데 중국의 대부대가 집결 중인 것을 눈치 챈 일본군 37사단이 선제공격에 들어갔으나, 압도적인 숫자의 중국군 한복판에 뛰어들었다가 처참하게 패배했다. 4, 5, 14집단군과 34, 61군이 일본군을 포위공격하기 시작했고 27, 40군도 산시성 중부를 쳤다. 일본군은 잇달아 패배했고 중국군은 창즈를 점령하는 등 선전했다. 이에 일본군 37사단이 반격에 나서서 양측은 매우 격렬한 교전을 벌이게 되었다. 일본군은 포병, 항공부대 등을 지원하며 맹공을 퍼부었지만 창즈의 중국군을 몰아내지 못했고 병력을 추가 파병한 후인 1940년 1월에야 겨우 창즈의 중국군을 격퇴했다. 12월 18일에는 8전구가 쑤이위안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마잔산이 지휘하는 유격대와 연합한 이들은 바오터우에서 일본군을 공격했고 일본군의 증원군들을 차례로 섬멸했다. 일본군은 무리하게 반격하여 중국군 거점 우위안을 일시적으로 점령하기도 했으나 결국 중국군의 반격으로 전멸당했다. 일본군은 대병력을 투입하여 우위안을 다시 공격했으나 중국의 반격으로 점령지를 포기하고 퇴각길에 올랐다.
12월 16일 구주퉁의 3전구가 화중에서 반격을 시작했다. 난창, 항저우, 장강 하류에 중국군 대부대들이 공세를 펼쳤고 일본군은 장강의 여러 거점들을 손실하였다. 일본군은 12월 23일에 반격했으나 중국군의 저항에 3일 만에 공격을 중단해야 했다. 일본군은 4월 22일에 본토에서 2개 사단을 증원받아 중국의 공세를 겨우 격퇴할 수 있었다.
화중에서 가장 거센 공격을 받은 곳은 바로 우한으로 5전구와 9전구에서 동원된 71개 사단, 50만 대군이 우한을 쳤다. 우한은 일본군 11군 소속 4개 사단이 지키고 있었는데 압도적인 숫자의 중국군에게 밀린 일본군은 전멸 위기에 처했다. 중국군은 일본군을 몇겹으로 포위하고 공세를 퍼부었지만 일본군은 전차, 포병, 항공대를 투입하는 한편 철도로 예비대를 지원받아 결국 중국군의 우한 탈환은 실패로 돌아갔다.
12월 17일에는 4전구 소속 중국군 25개 사단이 난닝을 공격해 일본군 1만명을 사살하고 쿤룬관을 점령했다( 쿤룬 패스 전투) 이 싸움에서 일본군 나카무라 마사오 소장이 전사하는 등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결국 일본군 21군 사령관 안도 리키치[2]는 난닝을 포기할 것을 명령했는데 5사단장 이마무라 히토시의 반대와 제공권을 장악한 일본군의 대규모 반격으로 일본군은 난닝을 사수할 수도 있었으나, 장기적인 난닝 사수는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어 1940년 11월에 난닝을 버리고 퇴각했고 중국군은 중불 국경을 탈환하게 된다.
중국군은 전 전선에 걸쳐 40여 일간 1340회의 전투를 치르며 일본군을 위협했지만 1940년 1월부터 전열을 정비한 일본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푸쭤이 등이 지휘한 수원 전역에서는 중국군이 승리했으나 상당수 지역에서는 점령지를 내주고 퇴각길에 올라야 했다.
또한 1940년 5월 1일 우한 지구에서 일본군은 이창 작전을 시작하였다. 소노베 와이치로 중장의 11군, 3개 사단과 각 사단에서 차출한 대대들, 독립여단, 전차연대, 중포병, 비행단이 포함된 8만 대군이 리쭝런의 5전구 산하 6개 집단군 13개군 50개 사단 35만 대군이 지키는 이창을 공격했다. 중국군은 짜오양에서 일본군의 공세를 격퇴하자 반격으로 전환하여 일본군 3사단을 포위하고 병참선을 끊어 한때 일본군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5월 16일 중국군 33집단군 사령부의 위치를 알아낸 일본군 39사단이 반격에 나서면서 일선에서 직접 싸움을 지휘하던 장쯔중 장군이 전사하는 사태가 발생해 5전구의 우익이 통째로 마비되어 쑨롄중, 탕언보도 패배하였다. 리쭝런은 퇴각 명령을 내렸고 일본군은 리쭝런의 사령부까지 밀어붙였다. 그러나 무리하게 진군한 일본군은 중국군의 매복에 223 보병연대장이 전사하는 등의 피해를 입으며 격퇴당했다. 11군 소노베 중장은 더 이상의 작전은 무리라고 판단하여 공세를 중단하려 했으나 참모들의 반발로 다시 공세를 재개해야 했다. 장제스는 최측근 심복인 천청에게 직계군 18군을 맡겨 이창을 방어하게 하였으나 6월 11일의 공세에서 이창은 끝끝내 함락되었다. 이로써 중국군은 거의 파멸상태에 놓였다. 장제스는 이를 항전 이래의 최대의 위기라 불렀다.[3]
4. 결과 및 평가
전략적으로는 실패에 가까웠다. 인명 피해가 막심했으며 요충지 탈환도 대부분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중국군 전력의 2~3할이 소모되었으리라 평가했다. 장제스는 1940년 2월 유주 군사회의에서 각 전구의 협력 부재로 인하여 한개 현도 함락시키지 못했다고 질책하며 여러 장군들의 소극성에 대해서 비판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중국군의 역량 부족에 있었다. 이를 모르지 않았던 장제스는 미국의 힘을 빌려 일본을 몰아내는 장기전을 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황은 자꾸 안 좋아지는데 일본의 동맹국인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쓰러뜨리고 비시 프랑스를 수립하자 하노이 루트가 끊기고 말았다. 영국도 일본의 압력 때문에 버마 루트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장강의 요충지인 이창이 함락됨으로 충칭에 대한 물자 공급이 더더욱 어려워졌고 중화민국의 병참 상황은 더욱 열악해졌다. 거기에 일본군의 공습이 연일 이어져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했다.이 상황에서 장제스는 일본과의 타협을 시도했다. 다이리의 첩보원들이 홍콩을 통해 일본과 접촉했고 충칭 정부의 대표들이 홍콩에서 일본인들과 회담을 열었다. 장제스, 왕징웨이, 일본군 지나 파견군 참모총장이 대면하는 회담을 여는 데에 양국은 합의했지만 일본은 줄기차게 중국의 만주국 승인을 요구했고 장제스는 이를 거부했다. 장제스는 자신이 일본과 접촉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부러 미국에 흘리면서 미국의 지원을 얻고자 했고 이를 위해 쑹쯔원을 워싱턴 D.C.에 파견하여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회담하게 했다. 쑹쯔원은 5천만 달러의 통화 안정 협정과 중국에 차관 제공, 중국 원자재 구입을 약속하는 신용 대부를 얻어냈다. 미국의 대중 원조는 2억 4500만 위안에 달했다. 이어 영국도 천만 파운드의 차관을 제공했으며 버마 루트를 다시 열어 물자를 제공했다.
한편 일본 대본영은 중화민국의 군사력에 대한 재평가를 실시하였다. 11군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그 규모는 예전에 없었던 대규모로 1월 20일경까지 40일간 집요하게 실시되었다. 이 시기에 아군 일선 부대는 거의 대부분 소부대로 고립되어 적에게 중첩 포위된 상태에서 고군분투하였으나 식량과 탄약은 결핍되었고 사상자는 많아졌다. (...) 적의 공세의지는 적극적이고 완강하였으며 그 전투력은 경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전법은 야간공격을 채용하여 은밀히 접근한 후 거점을 포위하였고 수류탄으로 근접전투를 수행하였다. |
육군 중앙부 사와다 참모차장은 이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일본 육군은 중국의 병력을 다소 줄여도 중국군의 공격을 격퇴시킬 수 있으리라는 판단 하에 중국 주둔 병력의 감축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적 주력의 공격을 받은 제11군의 보고를 받은 이후 중국군이 아직 건재해 있다고 판단되어 즉각적인 대반격을 추진하게 되었다. (...) 그 자주적 공세력을 대외에 천명시킨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동시에 적군의 통치역량이 아직까지도 쇠퇴하지 않았음을 실증하는 것이다.
이후 1940년 백단대전까지 겹치면서 일본군은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되었으며 충칭을 함락하기엔 일본군의 공세 능력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자각하고 장기 전략 방침에 따라 현상유지를 목표로 삼고 기존 점령지를 안정화하는 한편 중국 내부엔 폭격을 통한 전력 약화를 꾀했다. 중국의 내륙 오지에는 도로도 철도도 없었고 차량화, 기계화의 부족과 고질적인 병참 경시로 인하여 수송능력이 형편없는 일본군으로써는 중국 내륙에서 전선을 유지할 능력이 없었다. 게다가 그간 입은 손실도 무시할 수준이 못 되었으며 일본군의 자체적인 모순도 심각한 상황이었고 사기 역시 나날이 떨어지고 있었다. 또한 내부 지역에선 유격대의 공격으로 인해 이미 점령한 곳의 치안 역시 유지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장제스도 이러한 점을 눈치채고 일본군의 역량이 한계에 이르렀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화민국의 상황 역시 열악했고 화력, 장비, 훈련도에서 더 뛰어난 일본군의 전술적인 우세는 여전하여 전쟁은 이후로도 오랜 세월을 끌게 되었다.
5. 참고 문헌
- 중일전쟁, 권성욱, 미지북스.
- 중일전쟁과 중국의 대일 군사전략(1937-1945).
-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푸른역사.
[1]
레이 황 교수의 경우에는 45만명이라고 언급했고 중일전쟁의 저자 권성욱 씨는 100만명이라 기술했다. 중국 공산당에서 편찬한 중국공산당사에서는 국민당군의 절반이 동원되었다고 기술했다.
[2]
뒷날 대만으로 발령되었고 전쟁 말기에 마지막
대만총독이 되었다가, 국민혁명군이 대만을 접수하자 항복한 후 체포되어 중국으로 압송되 21군 사령관 시기 전범행위에 대한 재판을 기다리던 중 음독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3]
여담이지만 이 표현은
대륙타통작전이 다시 차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