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2 17:53:52

친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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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일본에 맹목적으로 우호적인 집단 자체를 서술합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제국에 협력하여 반민족 행위를 벌인 친일파에 대한 내용은 친일반민족행위자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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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191919> 일본어 親日派[1], 親日家[2], 親日[3]
중국어 亲日派[4], 哈日族[5]
영어 Japanophile, Pro-Japanese

1. 개요2. 상세3. 역사4. 주의할 점5. 웹 사이트6. 관련 자료7. 해당 인물8. 관련 작품9. 캐릭터

1. 개요

대한민국의 현대사회에서 친일파는 일반적으로 매국노,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의미로 쓰인다. 단, 친일 행위를 옹호하기 위해 용례에 따른 그 외의 담론이 존재한다.

2. 상세

한국은 조선 말부터 일본 제국에게 협조하여 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도와주고 반민족행위를 벌여서 혜택을 독점하거나 위안부, 정신대를 독려하여 민족을 팔아넘긴[6] 사람들이 많았고, 이들을 친일파라 부르며 멸시의 대상으로 삼았다. 게다가 해방 후 친일파 집단이 정치적 힘을 잃고 몰락하면서 그들의 행위를 옹호해줄 그 어떤 것도 남지 않았고, 현대 한국에서 친일파는 매국노, 친일반민족행위자와 동의어가 됐다.

친일파란 단어는 사전적으로 볼 때 '일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가치중립적 단어이긴 하나, 역사적으로 한국인이 이해하고 사용해왔던 친일파라는 단어는 일본 제국을 좋아하거나 수혜를 받은 자 혹은 그의 후손이라는 뜻이며, 사회적으로 누가 자기를 친일파라 부르는 것은 말 그대로 욕이다. 때문에 단순히 현대 일본, 일본인이나 일본 문화를 좋아하거나 일본에 연이 있다는 뜻은 '지일파'란 단어로 대체된다. 6.25 전쟁 후 '동무'라는 단어가 '친구'에 그 지위를 넘겨주고 사어(死語)가 된 것과 같은 사례. ( 일뽕이라는 속어는 지일파를 낮춰부르는 단어 정도이지 친일파란 단어의 역사적 무게감은 없다.)현재 한국의 친일이라 하는 이들은 일뽕으로 그 명칭이 계승되었으며, 일뽕들은 일본을 맹목적 추종한다는 공통점이 있고, 일본의 정치적 입장에 대해 동조하고 때로는 집단적 움직임을 보일 기미도 있다. 디시인사이드의 역사 갤러리, 제식갤, 실시간 베스트 등지에서 주로 서식하며 댓글이나 남기지만, 부산 소녀상 설치 때같이 한일 우호를 외치며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서양인의 경우 오리엔탈리즘에 빠진 경우가 있고 일본뿐만 아니라 동양이라면 다 좋아하는 경우도 제법 있다. 와패니즈, 자포네스크 문서로. 일본에 출장오거나 일본으로 유학 또는 교환학생 프로그램으로 오게 되는 경우가 많으며 일본 사회에서 살면서 친근감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백인들은 지금도 양산되고 있다.

'친일파'라고 함은 지나친 일본 추종이란 의미가 강하므로, 단순히 건전한 수준으로 일본에 우호적인 감정에 대해서 찾는다면 친일 문서로.

3. 역사

일본은 1867년 메이지 덴노가 즉위한 후 근대 서양의 시스템으로 국가를 개조했다. 중국이 정점에 서는 수천 년 간의 조공 제도로 고착된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깨고 천황의 이름으로 대등하게 청나라 조선에 외교 문서를 보냈다. 특히 이듬해인 1868년 조선을 향해 자신들이 '왕정 복고'를 이뤘음을 국서로 통보했는데, 그동안 형님 정도로 자신을 생각하던 조선 조정에 황제를 참칭(?)하는 민감한 언어 선택으로 큰 충격을 줬다. 자연히 '왕'인 조선은 일본에 격이 한 등급 내려간다. 당연히 조선은 국서 접수를 거부하고 일본도 1872년 외교 사절단이 철수하는 등 갈등은 점점 고조됐다.

그러나 1876년 운요호 사건 때 이양선으로 일본이 무력 시위를 하자 조선 조정은 격론 끝에 문호를 제한적으로 개방하기로 했다. 당연히 일본과 통상은 텄다고 해도 조선 조정의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국론 역시 존왕양이의 외세 배척 여론은 더욱 강해졌고, 흥선대원군과 위정척사파는 이런 여론을 잘 이용했다. 이 때만 해도 우의정 박규수와 영의정 이유원 정도가 외세를 이용하자는 의견이었는데 실상 그마저도 동도서기론, 즉 "서양 문명은 기술 면에서 앞서 있을지는 모르나 동양의 정신 문화를 존중하고 배울 점이 있다"는 식의 이상론이었지 일본을 좋아한다는 커녕 최소한 일본에게 뭘 배운다거나 가까이한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었다. 아예 안중에 없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친일파는 이 때까지 제로.

그러다 1880년 대, 우의정 박규수의 제자들인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이 일본 책과 문물을 접하고 일본의 발전상을 흠모하게 된다. 물론 김옥균의 '일본은 동양의 영국을 자처하니, 우리는 프랑스 같은 문화 군사 강국을 이루자'는 언급을 볼 때, 일본과 동급으로 조선을 생각했지, 결코 부하가 된다는 생각은 그들 역시 하진 않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당시 청나라의 도움으로 임오군란 당시 전권을 잡은 대원군을 숙청하고 정권을 잡은 명성황후와 민씨들이 청나라식 근대화, 양무운동을 개화 모델로 삼고 국정을 장악하면서, 상대적으로 일본식 급진 개혁을 바랐던 김옥균의 개화당은 친일파란 누명을 쓰고 권좌에서 밀려났다.

서양에 쓰러지기 직전인 청나라 모델로는 미래가 없다는 건 확실했던 개화파는 초조했다. 1884년 우리 나라 최초의 우체국 우정국 완공 축하연에 난을 일으켰다. 고종의 신병도 확보하고 서울 요지를 선점한 그들의 난은 성공하는 듯 했으나 압록강 근처에 주둔했던 청나라 군대가 삽시간에 반격을 가하면서 실패한다. 갑신정변이다. 역적이 된 개화파는 일본으로 탈출했고, 조선에 일본식 개혁을 말하는 사람은 없어졌다. 친일파가 처음 매국노의 멍에를 쓴 건 한일 강제 합병이 아닌 이 때가 최초다.

그러다 일본이 1894년 청일전쟁에,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한일 합병은 피할 수 없게 됐다. 그 전만 해도 친일 세력을 발본 색원할 것같이 굴었던 수구파(개화당을 제외한 민씨 쪽 친청파 + 이완용)들은 얼굴을 싹 바꿨다. 1905년 외교권을 뺏긴 을사늑약을 시작으로 정미 7조약 등등 대한제국을 해체할 치명적인 조약들마다 수구파들은 누구보다 일본을 위해 열심히 일했으며, 이완용, 송병준 등 매국노들은 각기 무리를 짓고 친일 충성 경쟁을 벌일 정도였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지만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맨 앞에서 길 안내를 맡은 것은 친일파들이 심어놓은 헌병 보조원, 즉 조선인 조센징 앞잡이들이었다. 1910년 강제 병합이 완성되자 이들은 일본 정부로부터 각종 은사금과 부동산 등은 물론 조선귀족 지위까지 나눠 받았다. 과거 대한제국이 부족한 재정에도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던 주미 공사관은 단돈 5달러에 일본에 넘어갔고, 개화파의 거두이자 왕실 종친 박영효는 28만원, 이완용은 15만원, 박제순은 10만원의 은사금을 받고 아주 떵떵거렸다. 구한말 끝날 때까지 그동안 친일을 했든 친청, 친러였든 상관없이 합병 때까지 조선 조정에서 버틴 자들은 모두 친일파라고 봐도 된다.

그 후로도 일본 제국이 35년 간 한반도를 강점하면서 제국주의의 양상도 같은 듯 같지 않게 계속 변모했는데, 친일파들의 친일 부역 행위 역시 변모해 갔다. 조선이 점점 제국주의 일본에 동화되고 식민 지배의 정도도 깊어지고 점차 더 많은 조선인들이 시스템에 편입되면서, 일부 권세를 가진 집안들이 저질렀던 친일 부역 행위 역시 그 범위를 넓히고 곳곳에 스며들었다. 이런 시대를 시각적으로 리얼하게 잘 그려낸 작품이 옛 MBC의 불멸의 명작 여명의 눈동자. 친일파의 출신 성분은 조선 귀족들에서 점차 일반 서민 출신들까지 범위가 확대된다.

4. 주의할 점

그냥 일본 문화를 좋아하면서 우리 문화도 아끼는 사람들이 욕먹는 일은 거의 없다. 대부분 극우 컨텐츠를 옹호하거나 우리 것을 망가트리며 비웃는 식으로 윤리적 공분을 불러와서 비난을 받을 뿐이다. 실제로 초밥 좋아한다고 욕한다면 도리어 욕한 사람이 욕 먹는게 현실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문화에 대한 선호와 일본의 죄악에 대한 맹목적 묵인은 구분하고 있다 말할 수 있겠다.[7]

일본에 대한 악감정 혹은 맹목적 찬양은 한국 사회에서 다양한 말썽거리로 이어지기도 한다. 여야 각 지지층이 상대 진영을 공격하기 위해 근첩몰이, 친일몰이, 친일몰이몰이를 주 패턴 삼아 단순 글 및 댓글과 공론화 글을 하루종일 도배하는 등 인터넷 문화를 저락시키고 혼잡하게 만들기도 한다. 심지어 친일몰이 쪽은 이명박근혜 시기 민주당계 정당 팬덤부터 심했지만 당시 국민 대다수가 이명박과 박근혜를 비토하는 분위기라 묻혔으며 양쪽을 전부 비판하는 국민은 극소수였다. 저들은 사학자들에게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역사를 바르게 정리해달라고 말하긴커녕 됐으니까 우리들한테 유리한 사실만 대충 정리해서 상대 진영을 박살내버리라고 압박하여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중우정치에 일조하고 있다. 세대가 바뀌고 수십 년이 지난 후라면 이러한 국면이 철 지난 유행 내지는 구시대적인 소동 정도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현재로서는 한국 사회의 주요 쟁의라 할 수 있다.

애초에 우리 나라 사람들이 어릴 때 보고 자란 문화 매체는 자유로운 문화 교류가 허용되기 이전까지도 제대로 번안이 안 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것에 영향을 받아서 선호도가 높아진 것도 있다. 어떻게 보면 아직까지도 지나치게 영향력이 남아있는 것같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만 이야기 할 수는 없는 문제다.

한국에서는 대부분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뜻으로 쓰이고 일본 문화를 좋아하는 사람의 의미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친한파의 단어 쓰임과 완전히 반대된다. 일본 문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친일파보다 오타쿠로 불린다. 그냥 일본 문화를 좋아하는 사람이어도 한일관계가 악화된 시기에는 왠지 모르게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오해받는 일이 다반사. 상대국과 사이가 안 좋은 시기에 눈치 없이 상대국 문화를 대놓고 즐기면 적대적으로 보이는게 사실이다. 실제 사례로 미국 뉴욕의 '러시안 티 룸'은 100년 가까이 사교의 장으로 손님들을 받았고 현재 소유주가 러시아인도 아니지만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반러감정이 확산되어 이용이 매우 감소하였다. # 사실 이 때문에 친미파 친러파 같은 친◯파도 어감이 안 좋아졌다. 그런데 반대로 친한파는 어감이 더 좋아졌다. 보통 지일파(知日派) 등 지◯파로 대체하는 듯하다.

그런데 지◯파와 친◯파는 사실 다른 의미로, 후자와는 달리 전자는 대상국에 관심을 갖고 잘 알고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지한파는 한국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감정적이거나 무리한 주장을 하지 않을 뿐, 한국에 반드시 우호적이라거나 적대적일 이유는 없다. 예컨대 일제강점기에 극일(克日)을 외치며 일본으로 유학했던 독립운동가들은 지일파이지만 친일파는 당연히 아니며, 반대로 조선을 반드시 정복해야겠다는 의지를 갖고 조선에 대해 공부했던 옛 일본의 정한론자들은 지한파이지만 친한파는 아니다. 실제로 산케이신문 구로다 가쓰히로 편집장은 지한파를 자칭하면서도 "한국은 일본에 재정복 당해야 잘사는 나라가 된다" 따위의 혐한에 가까운 망언을 내뱉기도 했다.

인터넷 커뮤니티(디시인사이드 등)에 친일 세력이 광복 후 한민당이라는 전라도 대지주가 이끄는 보수정당으로 거듭났다는 주장이 있으나[예시] 전라도 혐오감정에 기반한 썰일 뿐 사실이 아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운영하는 우리역사넷의 관련 설명을 보자.
미군의 상륙을 앞두고 동년 9월 6일 건준이 朝鮮人民共和國(이하 인공)으로 개편되자, 송진우는 9월 7일 ‘國民大會準備會’를 결성하였다.≪동아일보≫사옥에서 결성된 국민대회준비회에는 송진우(위원장), 김성수, 徐相日(부위원장), 元世勳(부위원장), 金俊淵(총무부), 張澤相(외교부), 薛義植(정보부), 尹致暎(경호부) 등이 참여하였다. 국민대회준비회는 重慶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였으며, 이 조직이 모체가 되어 미군이 진주한 직후인 9월 16일 韓國民主黨(이하 한민당)을 결성하였다.
한민당 창당대회는 천도교 기념관에서 1,600여 명의 발기인이 참여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창당대회에서 300명의 중앙집행위원을 선출하고 이승만·徐載弼·김구·李始榮·文昌範·權東鎭·吳世昌 등 7인을 당의 영수로 추대하였다. 송진우가 당의 수석총무로 선출되어 당수 격으로 당을 대표하였으며, 지역 안배에 따라 원세훈·白寬洙·서상일·金度演·許政·趙炳玉·白南薰·金東元이 총무에 선출되었다.
초기 한민당은 ‘지주·자본가 및 친일파’들의 정당이라는 좌익 정치세력의 비난과는 달리 다양한 정치세력이 참여하였다. 연해주·상해·북경 등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복역한 이후 국내에서 활동했던 원세훈은 1945년 8월 18일 高麗民主黨을 결성하였으며, 한민당에 참여하였다. 식민지시기 유명한 항일변호사였던 金炳魯와 李仁 등도 초기에는 건준에 참여한 安在鴻과의 합작을 추진하였지만, 건준의 조직개편으로 안재홍이 건준에서 탈퇴하자, 백관수·조병옥·金若水 등과 함께 한민당에 참여하였다. 식민지시기 친일을 하지 않았던 국내의 우익인사들이 8·15 직후 한민당에 모두 참여하게 된 데에는 공산주의에 반대한다는 이념적 동질성과 함께 민족통일전선을 표방한 건준이 인공으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좌익세력들에 의해 독선적으로 운영되었다는 점이 중요한 이유로 작용하였다.
8·15 직후 한민당에 참여했던 주요 세력과 인물은 다음과 같다.
한국국민당:張德秀·허정·백남훈·윤치영·尹潽善 조선민족당:원세훈·김병로·백관수·조병옥·咸尙勳·김약수·이인 국민대회준비회:송진우·김성수·서상일·김준연·장택상·설의식
한국민주당, 우리역사넷 #

한국민주당은 소위 '친일 대지주'로만 이루어진 정당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자료에서 한민당의 주요 인물로 거론된 사람의 출신과 일제강점기 당시 활동은 다음과 같다:[장덕수][허정][백남훈][윤치영][윤보선][원세훈][김병로][백관수][조병옥][함상훈][김약수][이인][송진우][김성수][서상일][김준연][장택상][설의식]

이 인물들의 출신 지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황해도 3, 전라도 5, 경상도 5, 한성 1, 함경도 2, 충청도 2. 보면 전라도 출신만 모인게 아니라 한반도의 각 지역 출신으로 다양하게 구성되었다. 게다가 상당수가 독립운동가에 가깝거나, 독립운동가는 아니더라도 소위 '유휴분자'에 가까웠다. 친일파로 변절한 사람들도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지고 독립의 희망이 사라져가던 일제강점기 후기~말기에 변절한 경우가 많고 적극적으로 친일을 한 사람은 적다.

5. 웹 사이트


다만 위의 사이트들 중 국내 사이트들의 경우, 몇몇 네이버의 블로그와 카페, 디시인사이드, 나무위키 에펨코리아 같은 거대 웹사이트에는 친일, 일뽕 유저들이 꽤 많이 있지만 이들 웹사이트는 국내 최대 규모의 웹사이트들이고 유저수가 워낙 많다 보니 스펙트럼도 다양하기 때문에 무조건적인 친일 사이트라 부르기엔 무리가 있다.[27] 당장 나무위키만 하더라도 친일 유저가 글을 써놓은 것을 롤백하거나 토론을 거는 등, 수정전쟁이 많이 일어난다.

6. 관련 자료

MBC PD수첩 : 친일파는 살아있다 2 (2004년 2월 17일)
MBC PD수첩 : 친일파는 살아있다 4 (2004년 7월 27일)
MBC PD수첩 : 대학 - 친일 청산의 무풍지대 (2005년 4월 5일)
MBC PD수첩 : 신친일파의 정체를 밝힌다 (2006년 8월 15일)
MBC PD수첩 : 명예는 버려도 땅은 못 뺏긴다 - 친일파 후손들의 반란 (2008년 2월 19일)
KBS1 시사기획 창 : 끈질긴 친일 (2022년 3월 1일)

7. 해당 인물

이하 리스트에서는 일본인이 아닌 사람 중 친일파에 대해서만 적도록 하며, 예외적으로 서양인 중 친일파의 경우는 와패니즈 문서로. 참고로 지나친 일본 추종자( 일빠)가 아닌 건전한 수준으로 일본에 우호적인 인물의 경우라면 친일 문서에 기재한다.
  • 강한나 - 1981년생, 호리프로 소속. 한국 연예인 100명 중 99명이 성형을 한다고 망언을 했다. # 1989년생 배우 강한나와는 다른 인물이니 혼동 주의.
  • 구지원 - 한국 국적의 럭비 선수. 일본에서 열린 2019 럭비 월드컵에도 일본 대표로 출전하였는데 기미가요까지 따라불렀다. 어렸을때 일본으로 이주했는데 국적만 한국이지 일본인이나 다름 없는듯. 아버지도 럭비 선수 출신.
  • 김병헌 - 위안부법폐지국민행동 대표(국사교과서연구소 소장)(친일 극우)
  • 김영환 - 충북도지사. 본인 입으로 기꺼이 친일파가 되겠다고 말했다.
  • 류석춘 - 일제강점기 옹호 및 독립운동가 폄하(친일 극우, 뉴라이트)
  • 박보균 - 윤석열 정부 첫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중앙일보 기자로 근무하던 2014년 일본은 아시아를 지배한 경험이 있기에 일본인들은 시민 의식이 질서있는 반면에 한국인들은 성질이 급하고 호들갑이 많다는 친일적인 칼럼을 기재한 것이 논란이 되었으며 동년에 문창극의 친일 망언에도 애국심이 뚜렷한 분이라고 옹호 또한 논란이 되었다.
  • 변희재 - 미디어워치 대표(친일 극우)
  • 브베 - 기미가요 옹호로 인하여 논란 생김
  • 순왜 - 임진왜란 당시 일본 침략군에 협력한 자들. 그러나 생존을 위해 강요당한 부역들이 많아 국경인 등 일부 악질들을 빼곤 처벌이 가벼웠다고 한다.
  • 윤서인 - 자신이 친일파라고 자처하며 일본 극우 성향을 띤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윤서인/비판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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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 이영훈 - 낙성대경제연구소 이사장(친일 극우)
  • 이우연 -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친일 극우)
  • 한승조 - 본명은 한기식, 전 고려대 명예교수이며 2017년 7월 돌연사

8. 관련 작품

9. 캐릭터



[1] 원래 단어의 뜻은 같으나, 위 아래 문단에서 나오듯이 쓰이는 용례가 다르다. 그저 ' 일본과 친하게 지내는 무리' 정도로 쓰인다. [2] 사실 친일 반민족 행위자도 친일파로 부른 이유 때문에 단순히 일본 문화를 좋아하는 사람의 의미로 사용 될 경우에는 지일파로 구별한다. 한국의 지일파와 비슷한 예. [3] 일본에서 가장 대중적인 표기법. [4] 위의 일본어처럼 원래 단어의 뜻은 같으나, 쓰이는 용례가 다르다. 그저 ' 일본과 친하게 지내는 무리' 정도로 쓰인다. 중국어에서 친일파라는 뜻으로 주로 쓰이는 단어는 매국노와 비슷한 뜻인 汉奸( 한간)이다. [5] 합한족에서 유래한 단어로 보인다 [6] 일제에 부역하여 같은 한국인을 속여 넘긴 친일 한국인들이 당시에 꽤 있었다. 일본에서도 이를 지적하며 위안부, 정신대에 관여한 인물들을 왜 자꾸 죄다 일본인으로 몰아가냐고 거세게 반발할 정도. 물론, 그 위안부 제도를 만들고 이를 집행한 주체가 일본제국이었단걸 생각하면 큰 의미는 없다 [7] 일본 문화에 우호적인 태도를 내보일 경우 이에 불편함을 호소하는 경우도 있긴 하다. 또한 비판의 수준을 넘어서 맹목적인 폄하와 힐난이 동반될 경우 과도한 혐오 감정이 문제시되기도 한다. 또 다른 문제 상황으로 일본에 대한 노골적인 찬양을 토대로 사대주의적 발언을 일삼으며 자국 혐오 성향을 보이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혐일보다도 더 저열한 취급을 받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예시] # # # # # # # [장덕수] 황해도 출신. 합법적인 틀 내에서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을 했으나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전향서를 쓰고 40년대 친일 활동을 하였음. [허정] 경상도 출신. 이승만의 구미위원회 활동을 도움.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끌려가 고문을 당함. [백남훈] 황해도 출신. 1919년 2.8 독립 선언에 유학생 대표로 참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원 역임. 비타협적 민족주의 운동에 관심을 가졌고, 마지막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함. [윤치영] 한성 출신.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고문을 당함. 40년대 일본의 전쟁수행에 협력하면서도 이승만 등 국외 독립운동가와 연락을 취함. [윤보선] 충청도 출신.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서 활동함. 총독부의 요시찰 인물로 지정되었으며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함. [원세훈] 함경도 출신. 1910-20년대에 만주와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27년에 신의주로 압송되었고 이후 망명을 시도하다가 모두 실패하여 45년까지 국내에 은거함. [김병로] 전라도 출신. 1905년 을사의병에 가담함. 변호사 시절 수많은 독립운동 관련 사건을 무료 변론함. 1932년터 은둔생활하면서 창씨개명하지 않고 배급도 받지 않음. [백관수] 전라도 출신. 1919년 2.8 독립 선언에 참가. 1937년 동아일보 사장으로 취임. 1940년 동아일보가 폐간되었을 때 조선총독부로부터 체포되어 1개월간 투옥되어 칩거 생활을 함. 1937-40년 동아일보 사장 시기 친일의혹이 제기되었으나 사후 민족문제연구소 및 대통령직속 친일반민족행위자 진상규명위 보고서 발간위원 측은 '백관수는 친일행위자가 아님'을 확인함. [조병옥] 충청도 출신. 1925년 귀국한 뒤 신간회 총무부장을 맡음.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과 관련하여 일본 당국을 규탄하는 대회를 열어 수년간 옥살이를 함.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2년간 복역하고 전향서를 씀. 이후 1941년 보인광업주식회사의 이사로 취임했다가 광복을 맞음. [함상훈] 황해도 출신. 잡지 '조광' 등에 친일 논설을 발표하고 조선임전보국단 등 친일 단체에서 활동한 친일파. [김약수] 경상도 출신.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했으나 그해 10월 당에서 제명당함. 일본 당국에 체포되어 6년간 옥살이함. 일제로부터 조선임전보국단 가입을 권유받았으나 거절하고 수개월간 구금됨. [이인] 경상도 출신. 1923년 변호사 개업. 1935년 조선변호사협회장에 취임. 일제강점기 당시 가인 김병로, 허헌과 함께 다른 독립운동가를 상대로 무료변호를 하여 3대 민족 변호사로 이름을 떨쳤음.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창씨개명을 거부하였으며,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름. [송진우] 전라도 출신. 동아일보 사장으로 정간 후 사임함. 이후 일본의 협력 요청을 거절함. [김성수] 전라도 출신. 한때 독립운동가로 활동했으나 일제강점기 말기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이사로서 일본의 침략전쟁을 지지하였으며 친일활동을 했음. [서상일] 경상도 출신. 3.1운동 참여.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 미국에 독립청원서 보냄. [김준연] 전라도 출신. 1920년대에 조선공산당에서 일함. 1930년대에 동아일보에서 주필로 일하다 일장기 말소사건을 계기로 사임함. 45년까지 김성수의 농장을 관리하며 소일함. [장택상] 경상도 출신. 해외의 파리위원부와 구미위원부 등에서 독립운동을 함. 귀국 후 독립운동 지원 혐의로 옥고를 치르거나 독립운동가에 자금을 지원하고 고향에 칩거함. [설의식] 함경도 출신.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 편집국장에서 물러남. 이후 금광 등의 산업에 손을 댐. [27] 미국의 레딧이 워낙 거대한 규모다 보니 온갖 유저들이 공존하는 것과 같은 이치. 레딧에도 마찬가지로 친일 성향 유저들이 많지만, 친한파, 친중파등 다양한 계층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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