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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의 항해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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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나라의 환관 정화가 지휘했던 중국의 대항해와 탐험. 정화의 대항해라고도 한다.2. 원정의 배경과 목적
정화의 원정을 중국어로는 하서양(下西洋)이라고 한다. 이것은 고유명사가 되어 버렸으며, 정화의 원정이 처음부터 서쪽을 향해 떠났다는 것이다.성조 영락제가 명령하여 정화가 이끈 원정대의 항해는 거리만 185,000km에 이르렀다. 정화가 이런 원정을 나선 이유는 동남아시아 등지의 조공 무역국을 늘리기 위한 것이라는 설도 있고, 또 하나는 당시 명나라와 사이가 영 좋지 않았던 아미르 티무르 이븐 바를라스에게 명나라의 국력을 과시하기 위함이라는 설도 있다. 또한 티무르 제국을 압박하기 위해 티무르 제국의 서쪽에서 명나라와 함께 협공할 수 있는 동맹국을 찾아 떠났다는 설도 있다.[1] 또한 정난의 변 이후 생사불명인 건문제를 찾아나섰다는 이야기도 있다.
소수설로는 태조 홍무제 주원장은 경쟁 군웅이었던 진우량을 정벌하기 위한 수군을 대거 양성했는데, 파양호 대전에서 진우량을 쓰러트린 이후 수십년 동안 크게 할 일이 없었던 수군[2]에게 일거리를 주기 위함이라는 설도 있다.
3. 원정단 구성
청나라때 편찬된 역사책 《 명사》는 원정단의 기함은 "보선(寶船)"이라고 불리며, 길이 44척(137m) 폭 18쳑(56m), 돛대 6개라고 기록했다. 하지만 이것을 과장으로 보는 견해가 많으며, (아래 논란 참조) 실제로는 그보다 작았을 것이다. 2006년 중국측이 복원한 보선의 길이는 약 63m 정도였다.제1차 원정단은 무려 27,000여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3] 여기에는 수군 및 승조원 뿐만 아니라 역관, 의원, 천문가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또한 함대의 규모는 총 60여척(또는 240~300여척)으로 기록되어 있다.[4]
하지만 함선의 스펙에 대해 현대 조선공학자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다만 원정단 인원 27,000여명은 참가자의 다른 회고록에서 교차검증된다. 원사료의 62척은 이 정원이 모두 타기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현대 학자들은 당시의 명나라 선박의 정원 수를 봐서 240~300척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정화는 이를 위해 중앙아시아인들이 자주 오던 장안에서 당시 서역의 공용어였던 페르시아어 능통자를 찾아 고용하고, 난징에 외국어 교육기관을 설립해 통역원들을 훈련하는 등 철저히 준비했다.
함선의 크기 뿐만 아니라, 정원 27,000명, 60~300척의 함대도 사실 보급을 고려하면 탐험단으로서는 터무니 없이 많기는 하다.[5] 다만 정화는 미지의 해로가 아니라, 철저히 기존에 알려져 있었던 해로로 갔기 때문에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즉 송나라 시대의 이슬람 상인들은 동남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닿았을 뿐만 아니라 고려의 벽란도까지 오기도 했는데, 조선의 <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 아프리카 대륙의 지리까지 나름 상세하게 묘사된 것 역시 이슬람 지리학의 영향이다. 정화의 원정단이 닿았다고 알려진 동남아시아, 인도양의 각 도시, 아라비아 반도, 페르시아 만, 홍해, 아덴만, 동아프리카 해안은 이슬람 상인들의 주 활동영역이었기 때문에 기항지는 쉽게 찾을 수 있었고, 보급에는 별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특히 이 원정의 목적이 탐험보다는 티무르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이슬람 상인들의 활동으로 이미 알려진 인도양, 중동, 아프리카의 각국에 명나라의 위세를 떨치는 것이었으므로, 많은 병력을 데려가는 것은 사실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서에 기록된 정원을 전적으로 부정할 수도 없다.
4. 원정 개요
아래 나오는 정화 원정단의 행적은 날짜만 비교적 정확하고, 구체적인 행적은 학자들이 참가자들의 회고록이나 그밖의 사료로 추정한 것들이다. 그러므로 원정단의 행적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예를 들어 실론 섬(스리랑카)에 세운 비에 적혀진 날짜를 두고 , 이것이 비가 실론에 세워진 날인지(그러므로 제2차 원정중 세워짐), 혹은 비를 남경에서 제작한 날(이렇게 되면 제3차 원정 당시 세운 것이 된다.)인지에 대해서 학자들의 설이 모두 다르다.-
제1차 원정(
1405년 6월 15일~
1407년 9월 2일)
난징에서 출발하여 장강을 따라 동중국해로 나간 후, 남서쪽으로 연안을 따라 항해하여, 참파와 수마트라를 거쳐 인도네시아의 팔렘방에 닿았다. 여기는 화교 출신의 중국인 해적 진조의가 현지인 왕을 몰아내고 자신이 지배자 노릇을 하던 곳이었다. 정화의 함대는 일단 팔렘방에 기항해서 중간 기지로 삼았고, 이후 더 서진했으나, 말라카 해협을 지날 때, 진조의의 해적단과 교전을 벌여 남중국해를 주름잡던 진조의를 생포했다. 진조의를 압송하기 위해 서진을 중단하고, 다시 뱃길을 돌려 난징으로 돌아왔다. 일설에 의하면 인도양까지 진출한 후 돌아오는 길에 진조의를 잡았다고 한다.
영락제는 정화의 원정에서 나온 성과에 흡족해마지 않았고, 명나라에 와서 무역과 향락을 즐기던 외국인들에게도 관대한 태도를 대체로 보였으나, 광둥성 출신의 한족으로서 오래 전부터 해금령을 어기고, 노략질을 일삼았던 해적 진조의에 대해서는 명나라의 체면을 지키겠다는 취지로 처형을 결정했다. 이 진조의 사건으로 인해 인도양의 다른 나라들이 명나라가 보낸 원정함대에 대해 신뢰를 보내게 되었고, 이후 정화는 여러 나라들 사이의 크고 작은 분쟁에서 중재를 맡게 되었다. 정화는 이렇게 원정을 다니면서 귀국길에 여러 나라의 사절단을 데려가기도 했는데, 이들은 영락제에게 큰 환대를 받았으나 문화적인 차이로 인해 중국인들에겐 여러 논란의 불씨로 여겨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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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원정(
1407년 9월 13일~
1409년 여름)
제1차 원정에서 돌아오자마자 영락제는 제2차 원정을 명령했고, 10일후 다시 출발했다. 인도네시아의 팔렘방에서 더 서쪽인 타이, 자바 섬, 실론 섬을 거쳐 인도 서해안인 캘리컷에 도달했다. 이때 실론( 스리랑카)에 한문, 타밀어(현지어), 페르시아어(서역 공용어)의 3개 국어로 된 비석을 남겼는데, 이 비석은 한동안 잊혀졌다가 1911년에 재발견되어서 정화의 원정이 여기 닿았음을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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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원정(
1409년 10월~
1411년 7월)
역시 난징을 출발해, 갔던 길로 가서 실론 섬의 감폴라 왕국을 정벌했다. 이들은 제2차 원정 때 실론 섬에 상륙한 명나라의 선발대를 몰살하고, 노략질을 벌이는 등 명나라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병력이 미진하여 정화는 그냥 두고 귀환했다. 하지만 이번 정벌에서는 알라케스와라(Vira Alakesvara) 왕을 사로잡아 데려왔다. 이때 감폴라 왕국은 일부러 정화의 상륙을 허용하며 콜롬보에 정박하던 정화의 본대로부터 정화를 떼어놓으려 했으나, 정화와 그 부하들이 왕궁을 급습하여 왕과 왕족 및 신하들을 모두 잡아버리는 바람에 전열을 정비해보지도 못하고, 명나라군에게 제압당했다. 정화는 제3차 원정에서 귀국한 후 알라케스와라 왕을 영락제에게 바쳤으나, 영락제는 관대하게도 사면하여 평민으로 만들고, 난징에 온 실론의 대사로부터 왕위를 추천받은 옛 왕족의 후예인 파라크라마바후 6세에게 넘겼다. 이후 알라케스와라를 실론으로 돌려보내는 선에서 명 조정은 감폴라 원정을 마무리지었다. 한편 제3차 원정 다음해인 1412년, 실론에서는 파라크마라바후 6세가 코테(Kotte)에서 새 왕국을 개창하여 코테 왕국( 1412년~ 1597년)이 들어서게 되었다. 실론을 지난 정화의 원정대는 인도의 캘리컷에서 더 서진하여 페르시아만을 거쳐 홍해상의 아덴에 도착했다. 여기서 뱃머리를 돌려 귀환했고, 귀환 중에 조공국인 수마트라 국왕의 요청을 받아 반란 세력을 토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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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원정(
1413년 11월~
1415년 8월)
아프리카의 케냐까지 도달했는데, 케냐의 말린디 특사가[6] "기린"을 조공했다. 원래 이것은 giraffe로 상상종인 기린과는 다른 동물이었지만, 특사가 이것을 '게린'(Gerin)[7]으로 발음하자, 중국인들은 발음과 모양의 유사성때문에 이를 상상속의 동물인 기린으로 여겼고, 영락제는 매우 기뻐하여 특사에게 큰 상을 내린 뒤, 이를 그림으로 기록하라고 했다. 현재 남아있는 판본은 청나라때 원본을 보고 그린 모사작이다. 이후 중국인들은 이 동물이 신화속의 동물인 '기린'이 아님을 알게 되었고, 현재는 '장경록'(长颈鹿, 목이 긴 사슴)으로 부른다. 이 제4차 항해 이후 중국인의 무역 활동은 그동안의 인도보다도 훨씬 서쪽인 호르무즈까지 확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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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차 원정(
1417년 6월~
1419년 8월)
아프리카 동부 소말리아의 모가디슈에 닿았다. 중간에 갈라진 분함대는 1420년 여름에 귀국했다. 귀환할 때 얼룩말, 코뿔소 같은 아프리카 대륙의 귀한 동물들을 실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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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차 원정(
1421년 1월~
1422년 8월)
이 원정은 1~5차 원정때 명나라에 데려왔던 조공 사절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원정이었다. 그래서 항해기간은 비교적 짧았다. 본대에서 갈라진 분함대들이 아프리카, 인도와 아라비아의 여러 곳으로 퍼져나가 30여개국에 달하는 사절들을 고국에 돌려보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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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 중단기(
1422년~
1430년)
그러나 제6차 원정 이후 여러 사건 때문에 항해가 중단되었다.[8] 1424년 명나라 함대의 보급기지 노릇을 하던 인도네시아의 팔렘방에서 왕위 계승 분쟁이 일어났고, 한 왕자측이 명나라의 개입을 요청하여 이를 중재하기 위해 정화의 함대가 다시 떠났다. 정화는 도착하여 팔렘방 왕을 책봉하고 난징에 귀환했으나, 돌아오자 영락제가 이미 1개월 전에 붕어한(1424.7) 것을 알았다. 이후 인종 홍희제가 즉위했으나, 천도 및 재정상의 이유로 이후의 원정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홍희제는 베이징을 영 싫어했기 때문에 다시 난징으로 재천도하려 했고, 이를 위해 정화를 수비태감에 임명해 천도의 사전 정지 작업을 맡겼다. 여기서 대를 이은 황제들의 정화에 대한 신임도를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정화는 1425년 난징의 재건 임무를 맡아 여러 천도 작업에 종사했고, 특히 난징의 불교 사찰인 대보은사의 재건을 떠맡게 되었다. 그가 이슬람 신자긴 했지만, 여러 종교에 관용적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화는 항해 공백기에도 황제의 신임을 받아 중책을 맡고 있었다. 홍희제는 다시 난징으로 오지 못한채 1425년에 붕어했고, 대보은사는 1431년에야 공사가 끝났다.[9] 이 절은 난징의 랜드마크가 될 정도로 규모가 컸으나, 청나라 말기 태평천국의 난때 파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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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차 원정(
1431년 1월~
1433년 7월)
홍희제가 일찍 붕어한 후 즉위한 선종 선덕제는 항해 사업을 재개하기로 결정했다. 정화 자신은 나이가 많다며 임무를 사양했으나 결국 정화를 대신할 인물이 없어 제7차 항해까지 책임지게 되었다. 이때 정화는 성지 메카에 도달해 참배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오랫동안 고생한 것이 탈이 났는지 1433년 4월, 제7차 항해에서 돌아오던 중 사망했다.[10]
시신은 원정대의 관례에 따라 예를 갖추어 인도양에 수장되었으나,[11] 본국에 가묘가 만들어졌다. 원정대는 정화의 부관이었던 환관 왕경홍이 지휘하여 명나라로 돌아왔다. 이후, 다시 항해의 재개가 논의되었으나 정화를 대신할 인물이 없었고, 이런 해외 진출에는 반대가 많아서 선덕제 역시 외정을 삼가고 내정에 치중하면서 항해 사업은 막을 내렸다.
5. 의의
정화의 대원정은 수천년 중국 역사 전체를 돌이켜봐도 비슷한 예를 찾기 힘든 유쾌한 일탈과도 같았다.1644년 명나라가 멸망한 이후 들어선 청나라 역시 마카오를 창구로 삼아 서양과 일정한 통상무역은 했지만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는 소극적이었다. 청나라 시절 조정에서 일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이 어지간한 식자층 중국인들보다 중국과 유럽 이외의 세계에 대해서 더 상세하고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봐도,[12] 정화의 원정에 의해 습득된 외부 세계에 대한 지식이 중국 지식층에 널리 퍼지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화의 대원정이 중국사에 있어서 가지는 의의나 성과를 항목별로 따져보면, 일단 외교적으로는 원정을 하면서 마주친 여러 소국과 부족들을 중화제국이 주도하는 국제질서(조공-책봉)에 편입시키거나 장기적인 우호 관계를 쌓는 일이 없었다. 또한 영토적으로는 해외영토나 식민지를 얻게 되는 일도 없었고, 기술적으로는 해외의 신기술을 도입하여 기술적인 발전이 이뤄지거나 반대로 중국의 기술이 해외로 전파되는 일이 없었으며, 문화적으로는 해외의 문화를 흡수하여 중국의 문화가 더욱 풍성해지거나 반대로 중국의 문화가 해외로 전파되어 중류 열풍을 일으키는 일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경제적으로는 해외 무역이 크게 증가하여 백성의 생활에 보탬이 되고, 정부의 재정을 풍족하게 하는 일이 없었다.[13]
이로써 정화의 대원정은 중국의 사실상 첫 해양 진출이자 마지막 원정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는 있으나, 대원정이 없었더라도 중국사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대서양 같은 어마어마한 대양을 건너는 것도 아닌 철저한 연안항해라는 점에서, 정화 이전 이미 알려진 동아프리카가 그 최대 진출 영역이었기 때문에, 중국사를 뒤바꾸기에는 한계가 명확했다. 설령 정화가 희망봉을 돌아서 유럽이나 아메리카까지 도달했다고 쳐도, 위에서 말한 중국의 사정 때문에 중국인들은 서양인들과는 달리 해외 진출이나 식민지 건설에 더 열의를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결론은 함대의 규모나 원정거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얼마나 변혁시켰는가? 이 부분이 중요한건데, 정화의 함대는 명나라에 새로운 기술이나 재료, 혹은 사상을 도입하여 큰 변혁을 이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6. 명나라의 대양항해가 중단되고 정화가 망각된 이유
6.1. 안보적 이유
정화의 대원정이 끝이 나고, 명나라는 더 이상 해상 진출에 큰 관심을 두지 못했다. 이 원정의 첫번째 목적인 티무르 제국 견제는 이미 티무르 사후 티무르 제국이 지지부진해짐에 따라 필요가 없어졌고, 또다른 목적인 폐주 건문제 추적 또한 영락제의 권력이 공고화됨에 따라 더이상 필요가 없어졌다.이에 반해 북원과의 전쟁은 영락제의 치세 내내 계속 되면서 엄청난 전비를 소모했고, 대선단을 한번 꾸려 보내는 데도 엄청난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결국 정화가 사망한 후로는 선덕제가 내정에 치중하고 외정을 자제하면서 더 이상 대규모 원정대를 꾸리지 못했다. 결국 정화의 원정에 비해서 훨씬 적은 지원을 받으며 소규모 선단을 꾸린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작은 배 몇척으로 신대륙을 발견하고 탐험한 것이 이후의 세계사를 크게 바꾸고, 여러 차례 탐험에 대한 상세한 기록까지 남겨진 것에 비하면 정화의 원정이 남긴 영향과 기록은 지엽적인 수준에 그쳤다.
명나라 입장에서는 해양로를 확보하는 것보다는 북방 국경 방어가 훨씬 중요한 문제였다. 정복왕조인 원나라를 제외하면, 명나라를 포함한 대다수의 중국 왕조들은 항상 서쪽과 북쪽의 유목민족들을 경계했다.[14]
명나라 전대의 한족 왕조인 송나라가 문치주의를 표방하다가 군사력이 약화되어, 북방 유목민 국가인 요나라, 금나라, 몽골 제국에게 잇달아 시달리고 막대한 공물을 바치다가 원나라에 결국 정복당해 중국 대륙 전체가 100여년 동안 몽골족의 압제를 받은 것은 한족 왕조인 명나라에게 큰 귀감이 되었다. 그래서 명나라는 유목민 세력들이 세력을 확장할 수 없도록 예방전쟁을 벌이거나 이이제이의 이간계로 분열시켰다. 하지만 훗날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당시, 명나라는 일본군의 침공에서 조선을 원조하느라 여진족에 이런 이간계를 펼 수 없었고, 여진족의 한 부족이었던 건주여진의 추장 누르하치는 이 틈을 타서 여진족(이후 만주족)을 규합하여 통일하는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후금 즉, 청나라는 명나라를 지속적으로 공격하여, 명나라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이렇게 북방에 대한 경영은 왕조의 존속에 영향을 미쳤으므로, 유목민족에 대한 통제와 방어에 더 치중했던 명 조정은 엄청난 비용을 들여 남방원정을 실시하는 것을 쓸데없는 일로 간주했을 것이다.
6.2. 경제적 이유
정화의 원정은 중국에게 경제적으로 아무런 이득을 안겨주지 못했다. 100여 년 뒤 경제적 이득을 위해 서양에서 시작한 대항해시대와는 전혀 달랐다.명 전기는 상업이 그다지 발전하지 못했고, 명의 해외 무역은 철저히 조공 책봉 관계를 통한 공무역을 통해서만 이루어졌다. 중국인들이 생각하는 '무역'이란 기본적으로 조공국이 천자의 신하를 자처하며 자신들의 특산물을 들여오면, 여기에 대해 황제의 배포라는 이름으로 더 후한 답례품을 주는 조공 무역이었다. 조공국이 조공을 명분으로 명나라에 자국의 특산물을 가져오더라도, 명나라는 황제가 쩨쩨하지 않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더 큰 답례품을 보내야 했는데, 이것은 명나라 재정에 부담이 되었다. 즉 명나라가 해상로를 확보해서 굳이 조공국을 늘린다고 해도, 이는 명나라에게 재정적으로 이익이 된다기보다는 손해가 되는 일이었다. 당시의 명나라 사람들에게 있어 무역이란 현재의 상업 및 수출과 수입의 개념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정화의 원정 기록을 훼손했던 병부시랑 유대하가
"외국의 신기한 물건만 얻어올 뿐, 실익은 없다."
고 말한 이야기가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으며, 결과적으로
명나라 조정은 더 이상의 항해를 중단하게 되었다.당시 명나라 지배층의 성격은 해외 진출과도 맞지 않았다. 원나라는 유목민들인 몽골인들과 상업에 종사하던 중앙아시아인들이 지배층이었지만, 명나라는 농촌 지주들인 향신들이 지배층이어서 농업을 국가 경제의 기본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농업 노동력의 상실을 막기 위해 해금령을 내려서 중국인들이 바다로 건너가는 걸 엄격하게 금지했으며, 위반자는 사형으로 다스렸을 정도였다. 이런 향신들은 해외를 돌아다닌 정화의 원정을 그리 곱게 보지 않았을 것이다.
정화 사후에 즉위한 헌종 성화제 시절,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병부시랑 유대하[15]가 병부에 남아있었던 정화 원정에 관한 여러 기록이나 자료들을 모두 불태웠다고 한다. 이때 당시 병부상서였던 항충(項忠)이 유대하를 질책하자, 유대하는
"이 원정은 국고를 낭비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지만, 기껏 얻은 거라고는 외국의 신기한 물건들 뿐입니다. 어찌 후대가 본받을 일이겠습니까?"
라고 반문했다고 하며, 항충은 이에 수긍했는지 별다른 조치 없이 넘어갔다고 한다. 유대하가 이런 기록 말살을 저지르고도 훗날 병부상서까지 오르는 등 오랫동안 명나라의 고관으로 활약한 부분을 보면, 명나라 정부의 대체적인 분위기도 유대하의 생각과 다를바 없었던 걸로 보인다.6.3. 정치적 이유
여기에 더해 당시 명나라의 내부 사정은 정화의 원정이 묻히기에 딱 알맞았다. 명나라는 다른 통일왕조에 비해 환관의 발호가 매우 심각했고, 조정도 동림당(반환관파)과 엄당(친환관파)으로 나뉘어 당파싸움으로 일관했다. 이때 한쪽이 정권을 잡으면 반대파를 숙청하면서 다른쪽의 업적을 깎아내리기 일쑤였다. 이런 상황에서 환관, 그것도 거의 외국인이나 다름없는 후이족(회족)에다가, 명나라군에 저항한 원나라 잔당의 아들이었던 정화가 아무리 엄청난 항해 성과를 냈다고 해도 반환관파의 사대부들이 좋지 않게 봤음은 명약관화했다. 정화의 기록을 모조리 소각한 유대하도 당시 환관의 우두머리이자 간신이었던 유근(劉瑾, 1451년~ 1510년)과 원수지간이었고, 유근 및 환관 세력 때문에 파직과 복직을 반복했기 때문에, 환관들이 시조로 삼는 정화의 업적을 의도적으로 훼손했다는 추론도 가능하다.7. 희박한 원정 기록과 논쟁
거의 30년에 걸쳐 매회 27,000명이 동원된 7번의 항해라면 항해일지만 해도 수천 페이지 분량이 될 것이고, 중국은 당시 기록문화가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세한 기록이 있을 법 하지만, 정화에 대한 공식 기록은 매우 희박하다. 청나라 시절에 편찬된 《 명사》에 나오는 정화의 언급은 <성조[16] 본기>의 3권 중에서 11번 정도이며, 본기의 기사 특성상 기껏해야 "원정을 떠났다"와 "중국으로 돌아왔다" 수준으로만 나열되어 있다. <정화 열전> 부분조차 600여자 정도의 빈약한 분량으로, 본기와 비슷한 수준의 짤막한 기술로만 이루어져 있고, 심지어는 정화가 언제 어떻게 사망했는지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명사》- <정화 열전>(원문 및 현대중국어 해석본).그리하여 정화가 귀국후에 사망했는지, 혹은 귀환중에 사망했는지도 현재 분명하지 않으며, 여러 설이 있다. 일단 남경에 남아있는 정화의 묘가 가묘라서 인도양 사망설이 유력하다. 게다가 정화 원정대가 작성한 해도나 지도는 명나라의 병부에 보관되어 있었다고 하나, 위에서 말한대로 이를 좋지 않게 보던 유대하가 모두 불태웠다. 여기에 정화의 원정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남긴 회고록은 전근대 기록의 특성상 개인 경험의 제한성 및 한계로 인해 이 원정대의 지리적 발견의 성과를 확인하기 힘들다. 정화 자신은 황제에게 보고하는 장계는 당연히 올렸겠지만 그 외에 개인적인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
정화의 원정에 대해 현재 남아있는 공식기록은 《명사》 외에도, 그 원본이 되는 《명실록》(明實錄) 이 있고, 참가자들의 개인 회고록격인 《영애승람》(瀛涯勝覽)[17], 《성차승람》(星槎勝覽)[18], 《서양번국지》(西洋番國志)[19]가 있다. 이외에도 참가자의 비문 등에 적힌 기록들과 정화 원정 이후 100년 안에 지어진 여러 기록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정화의 원정이 끝나고 160년이 지난 후에 나온 1597년의 《삼보태감하서양통속연의》(三保太監下西洋通俗演義)[20]는 《 삼국지연의》보다도 한걸음 더 나아간 공상소설로, 《 서유기》와 흡사한 내용이며, 정화와 명나라 수군이 영락제의 명령을 받아 서역으로 항해하여 요괴와 괴수 그리고 야만인들을 물리친 후 삼보를 구해온다는 내용이다. 당연히 이 책의 사료적 가치는 전혀 없다. 게다가 정화 원정대의 출발지였던 남경은 명청교체기때 청나라군과 남명군( 정성공 세력)의 치열한 전쟁터가 되었으며, 청나라 말기에는 태평천국의 중심지로서 다시 한번 초토화되었기 때문에 그나마 남아있었던 자료도 모두 소실되었을 것이다.
7.1. 항해 도달 범위 논란
영국 해군에서 장교로 수십년 동안 복무했고, 소령으로 잠수함 함장을 지낸 개빈 멘지스(1937~2020)는 2002년 《1421: 중국이 세계를 발견했다》라는 책을 펴내 이후 정화의 원정이 동아프리카를 넘어 남극, 남•북아메리카, 호주까지 이르렀다는 주장을 했다. 이 책은 서방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정화의 원정 범위에 대한 갑론을박이 시작되었다. 사실 주류학계에서는 멘지스의 주장을 유사역사학으로 규정하고 있고, 심지어 중국 학계에서조차 멘지스의 주장을 터무니없다고 생각한다.[21]위의 <천하전여총도>[22]는 1418년에 제작된 <천하제번식공도>(天下諸番識貢圖)라는 원본지도를 필사했다고 전해진다. 아메리카가 나와있는 건, 원본을 필사할 때 당시까지 알려져 있었던 지리 정보를 추가해서 업데이트한 것이었다.
이 지도는 2001년에 변호사 류강(劉剛)이 발견한 것인데, 지도와 관련하여 중국 네티즌들 사이에서도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유럽의 지리적 대발견은 "지도를 보고 찾아간 것"에 불과하다.). 이 지도는 중국역사지리연구소의 훠양팡(侯楊方)과 싱가포르 국립대학의 웨드 지오프리박사에 의해 위작 논란이 제기되었다. http://san.chosun.com/site/data/html_dir/2013/10/15/2013101503444.html
한편 위 지도는 멘지스의 '정화 아메리카 도달설'의 근거로 이용되고 있다. 멘지스의 아메리카 도달설에 따르면 정화의 함대 중 분함대 하나가 해류를 타고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서 북진하다가 사하라 남쪽에서 그대로 해류를 타고, 대서양을 가로질러 브라질 해안에 도달했으며, 다시 아메리카 해안을 따라서 남진하다가 아마도 드레이크 해협을 통과해서 태평양으로 나갔고, 남아메리카 해안을 따라서 북상하다가 남아메리카 혹은 북아메리카의 태평양 연안 어딘가에서 다시 해류를 타고 태평양을 가로지른 것이 된다. 정화는 모든 함대를 한데 모아 항해한 것은 아니었으며, 중간에 여러 분함대를 파견했다. 그 중 하나가 세계일주를 했다는 것이다.( 정화(鄭和)는 도대체 어디까지 항해했는가?)
사실 아메리카 도달설은 함대 활동에 대한 여러 공상적인 설명 중 일부에 불과하며, 그 이상의 주장도 많다. 아메리카 남쪽에서 다시 함대를 나누어 일부 함대는 남극 대륙을 발견했다거나, 다른 함대는 대서양을 가로지르지 않고 그대로 아프리카와 유럽 해안을 거쳐서[23] 북유럽을 돌아 시베리아 북쪽의 북극권을 항해한 후 베링 해협을 통해서 중국으로 되돌아왔다는 주장 등이다. 온난화로 빙산이 감소중인 요즘도 아니고, 유빙이 가득했을 당시의 남극해와 북극해를 목선이 탐험하는 것은 극히 어렵다. 기술이 더 발달한 19세기 유럽의 탐험가들도 북극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프랭클린 탐험대처럼 전멸하기도 했다.
당연히 이런 주장들은 아메리카 도달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관심을 보인다. 그 외에도 정화의 함대 중 일부가 오스트레일리아에 도달했다는 설도 있다. 이 역시 근거는 박약하지만, 아메리카 도달설 등과는 달리 오히려 항해 난이도상으로는 크게 무리는 없다. 또한 오스트레일리아가 당대로써는 문자가 쓰이고 거대한 국가들이 여럿 나올 정도로 번화했던 인도네시아 일대의 여러 섬과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았기에 동남아시아 상인 중 일부는 뉴기니 및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과도 소규모이지만 무역을 하고 있었으므로, 동남아시아에서 오스트레일리아에 대한 정보를 얻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의 거친 자연, 뒤떨어진 문명 수준, 극히 낮은 인구 밀도를 고려할 때 이곳에 닿았다고 해도 유의미한 교역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호주가 타 대륙과 유의미한 수준의 교역이 가능하게 된 시점은 축산물을 냉동해서 철도와 증기선으로 운송하는 인프라가 확립된 이후였다. 게다가 그곳이 거대한 신대륙인지, 그저 작은 섬의 일부 지역인지조차도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호주와 중국간의 교류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인도네시아가 호주로부터 여러가지 특산품을 수입, 가공해서 중국으로 수출하기도 했고, 일부 중국인 상인들이 진짜로 호주로 찾아와서 호주의 해삼을 수입했다는 얘기가 나온 것을 보면 교류가 없지는 않았다. 단지 문자같은 선진 문물의 전파나 국가 형성같은 것과는 거리가 있을 뿐이었다.[24] 서양사로 비유하자면, 일부 바이킹들이 북아메리카의 뉴펀들랜드 지방에 정착하여, 일부 아메리카 원주민들과의 교류 및 분쟁이 있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정화의 항해와 관련하여 아프리카의 기린으로 보이는 동물의 그림이 남아있고, 포르투갈인들이 스와힐리 해안에 도착했을 당시 현지 무슬림들이 포르투갈인들을 보고,
“당신들이 오기 전에 피부가 흰 이방인들이 여기를 방문했던 적이 있다.”
라고 전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것을 정화가 아프리카에 도달했다는 증거로 보기도 한다.
케냐 북부의 라무 제도에 속한 파테 섬의 한 가문에서 조상이 정화의 원정 당시 난파한 배에서 생존한 중국인 선원이었다는 전승이 내려져 오고 있다. 이런 것들이 정화가 아프리카에 닿았다는 증거로 제시되기도 하고, 주류학계도 일반적으로 정화가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닿았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다.정화 선단의 선원이 모가디슈와 관련해서 남긴 부정적인 기록[25]과 선단의 한 장수가 메카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정화보다 한 세기 이전 모가디슈를 방문했던 이븐 바투타 역시 도로는 전혀 포장이 되어 있지 않고, 길거리에 함부로 도축된 동물의 피냄새가 진동하는 지저분하고 낙후된 도시라는 다소 부정적인 기록을 남겼던 바 있었다.
반면 포르투갈인들은 모가디슈를 두고, 매우 번영하는 도시라고 감탄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포르투갈인들은 서아프리카에서 남아프리카, 스와힐리 해안을 거쳐서 소말리아의 모가디슈에 도착한 것이었고, 모가디슈는 근세 당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여타 항구도시들과 비교하면 인구도 많고 부유한 편이었다. 동아프리카 스와힐리 해안 도시들의 인구 규모는 수천여 명 수준으로, 이런 도시들은 단순히 무역기지의 역할을 한 것이었지,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마냥 인구가 이동해 정착하는 식민도시는 아니었다. 그동안 소규모 항구도시들만 봐왔던 포르투갈인들이 보기에 모가디슈가 거대하고 번영하는 도시였던 것으로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반면 동쪽에서 온 정화의 해상 원정단들은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 중동 각지의 항구도시들을 거쳐서 아프리카에 도착한 것이었고, 이들 입장에서는 모가디슈가 자신들이 들렸던 항구 도시들에 비해 낙후되고, 초라해보일 수 있었다.
사실 말레이시아, 자바섬, 인도, 실론섬, 페르시아 남부, 아라비아 반도 등의 지역은 송나라와 원나라 때 이미 바닷길이 알려진 지역이었으며, 200년 전에 마르코 폴로가 베네치아로 돌아갈 때도 이 경로로 간 적이 있었던 데다가, 정화의 아버지조차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까지 순례를 다녀와서 "하지"의 칭호를 가졌을 정도였으므로, 정화의 원정대가 어렵지 않게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멘지스의 주장처럼 희망봉을 넘고, 대서양을 건너 남•북아메리카나 남극에 도달했다는 것은 증거가 희박하다. 남중국해의 여러 섬을 거쳐 호주에 닿았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지만, 이것도 증거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결론적으로 개빈 멘지스 등이 주장한 '정화 아메리카 발견설'을 비롯한 세계일주설은 증거가 매우 부족해서 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 1421 - 중국, 세계를 발견하다》의 저자인 개빈 멘지스의 경우에는 부정확한 근거를 대거나, 불리하면 학술적으로 해결하기 보다는 대중들을 상대로 여론전을 펼치는 등 전형적인 역사 왜곡의 행태를 벌이고 있어, 학계에서는 인식이 영 좋지 않다. 애초에 정식 역사학자도 아니었으며, 아시아의 신비라는 장사 아이템을 가지고 대중에 영합하여 책이나 팔아먹으려는 전형적인 유사역사가의 행태를 보였다. 정화 함대의 호주, 아메리카, 남극 발견의 증거라며 세간을 떠들석 하게 했던 <천하전여총도> 역시 이미 진위 여부 자체를 의심받고 있는 상황이다. # 현재로서는 호주, 아메리카, 남극 도달설은 가설에 불과하다.
일반적으로 주류학계가 정화의 원정 범위로 인정하는 지역들은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홍해와 아라비아반도, 동아프리카 해안 정도이다.
7.2. 기함의 크기 논란
아래 있는 것이 산타 마리아호.
위에서 지적한 멘지스 뿐만 아니라, 각종 역덕들의 블로그나 게시판글에는 정화 원정대의 기함이 17,000톤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러일전쟁때의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을 능가하는 배수량으로서, 17,000톤 짜리 목재 범선이 건조되고 항해하는 건 애당초 목재의 한계로 인해 어렵다. 위의 사진은 정화의 기함이 17,000 톤급의 배수량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각종 블로그에서 인용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2006년에 Lars Ploungmann이라는 사람이 중동 두바이의 한 쇼핑몰에서 찍어 flickr에 올린 사진으로, #, 권위있는 박물관이나 전시회의 작품이 아니다.
- 정화의 기함인 보선의 크기 문제
- 사료에는 정화의 보선이 길이 44장 4척, 너비 18장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대로 한다면 보선은 축구장보다 긴 길이 134.5m(44장 x 3.03m + 4척 x 0.303m), 너비 54.5m(18장 x 3.03m)에 이르게 된다. 멘지스도 이 사료를 인용하여 보선이 “길이 150m, 폭 60m로, 당시 세계 최대였다”라고 적었는데, 서울대학교의 주경철 교수 또한 이 주장을 아무런 검증없이 사실처럼 인용하고 있다.(《 대항해시대》, p.14) 그러나 보선의 크기를 신뢰할 수 없는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 발견된 유물의 크기도 이 이론을 지지하지 않는다.
- 남경의 삼차하명대 보선창에서 11.07m 길이의 타간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토대로 중잉과 황건위는 선박의 배수량을 1,251톤으로 추정했으며, 천얜항과 시륭페이 등은 17,000톤의 배에는 최소 22m의 타간이 필요했다고 계산했다. 한편 11m의 타간에 적합한 배는 5,972료, 길이 220척, 폭 41척, 높이 14.8척에 970명이 타는 것으로 계산했다. 그리고 신웬어우는 11m 타간에는 배수량 800톤의 선박이 적합하다고 계산했다.
- 또한 천얜항과 시륭페이의 연구에 따르면 17,000톤급 목선에는 적어도 13톤의 철묘가 필요하지만 실제 발견된 유물은 모두 1톤 이하였다.
- 나라의 조선 능력도 17,000톤급 건조에 부적합했다.
- 18세기 영국의 1,000톤~1,500톤급 전열함 건조에 조선공 1,000명이 투입되어 1년이 소요되었다. 《용강선창지》에 따르면 400료선[29]의 건조에 2,487 노동일이 필요했다.
- 정화의 하서양에 필요한 배 대부분을 건조한 용강선창의 조선공은 400가구에 달했으므로, 건조비는 배수량이 증가함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계산의 편의를 위해 일정하다고 가정하면 배수량 17,000톤의 보선은 754,982 노동일이 필요하며, 400명으로 나누면 5년 이상 걸린다.
- 보선 62척을 건조하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소요되어 원정의 수요를 대기에 부족한 것은 물론, 만일 총창 4개, 분창 82개, 선공 3,000명을 보유한 청강선창이 합세했더라도 건조에만 38년이 소요되어, 실제 기록의 1년 8개월동안 보선 건조 및 5년 동안 98척 건조 기록과 큰 차이를 보인다.
- 근거 기록의 신빙성이 낮다.
- 원래 17,000톤의 추정치는 《삼보태감서양기통속연의》(약칭 《서양기》), 《영애승람》, 《객좌췌어》에 나오는 치수 기록인 길이 44장, 폭 18장에 따라 계산한 것이다.
- 《서양기》는 라무등이 1597년에 지은 소설로, 1,456척에 917,280명이 탑승했다고 주장하는 등 정사와 큰 차이를 보이며, 사료적인 가치가 희박하다. 출간 날짜를 판정 가능한 서적으로는 처음으로 《서양기》에서 선박의 치수 기록이 등장한다.
- 《영애승람》의 경우, 원본에는 정화 보선의 크기가 기록에 없었고, 《서양기》가 출간된 당시의 20여 종의 판본 중 어디에도 없이, 호설집본 《삼보정이집》에 처음으로 길이 44장, 폭 18장의 기록이 나타난다.
- 《객좌췌어》는 1617년에 처음 출간되었고, 현재 남은 판본은 광서 32년본으로 《서양기》보다 한참 후다.
- 1621년~ 1655년에 집필된 《곡각》에서 보선 63척의 크기가 44장, 18장으로 등장한다. 아마도《서양기》의 기록을 그대로 가져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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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선으로 크기를 키우는데 있어, 재료의 구조적 한계로 인한 제한이 있다.
현재까지 건조된 가장 큰 목선은 USS 와이오밍호로 길이 329피트(약 90m), 배수량 6,000톤에 달했지만 방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해 항상 펌프질로 물을 빼내야 했다. 따라서 길이 90m 이상의 목선은 재료 자체의 구조적인 한계로 인해 실용적인 건조가 불가능했다. 또한 44.4장의 배는 돛대가 90m여야 하며, 최소한 길이 30m의 재목 3개를 이어붙여야 한다. 재목을 이어붙이면 강도와 내구성이 극히 떨어지며, 장거리 항해에 견딜 수 있다고 보기 힘들다. 그나마 길이 30m의 재목은 사천성 오지의 깊은 산중에서만 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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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과 이후의 최대 선박 크기와도 격차가 매우 크며, 기술적으로 연속성이 없다.
송나라때의 최대 해선은 배수량 550톤이었으며, 청나라 후반의 기영호는 배수량 830톤에 달했지만, 정화 보선으로 주장된 17,000톤과의 격차는 20배 이상으로서, 갑작스러운 크기 증가를 설명할 추가적인 기술 개발 등의 증거가 없다.
- 보선을 운영하기 위한 승무원의 숫자가 부족하다.
- 르네상스시대 1,500톤급 베니스선에 1,200명의 운용 인력이 필요했으며, 1588년 당시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130척, 배수량 30,000톤에 30,493명이 탑승했다. 반면 상륙을 위한 육군이 탑승하지 않았던 영국함대는 총 17,472명이 197척, 배수량 31,985톤에 탑승했다.
- 중국의 400료선(배수량 56톤)에 필요한 인력은 65명이었다. 이를 토대로 외삽하면 17,000톤의 거선에만 10,000명의 운용 인력이 필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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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발견된 비석의 기록 역시 17,000톤 설을 지지하지 않는다.
남경에서 발견된 정해사잔비에는 1,500료, 2,000료선(각 배수량 210톤, 280톤)만이 언급되어 있다. 현재 정화함대가 17,000톤급의 거선들로 이루어진 것처럼 주장하는 경우가 있으나, 현실적인 제반여건으로 봤을 때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사료의 신빙성에 의문이 간다는 것이다. 보 선의 크기에 관해서는 정화 당대의 원사료가 모두 파기된 뒤, 후대에 라무등(羅懋登)이라는 작가가 쓴 《삼보태감하서양기통속연의》[26]에 기록된 44장 4척, 너비 18장이라는 수치가 근거다. 근데 뒤에 붙은 " 연의"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장르는 역사서가 아니라, 《 삼국지》를 각색한 《 삼국연의》에서 보듯이 실제 역사에 픽션과 공상을 섞어 만든 소설에 불과하다. 이 수치는 《 삼국연의》에서 관우가 휘두르던 82근(약 49kg)의 청룡언월도처럼 황당무계한 수치이다. 고대인의 완력이 현대인보다 물론 강했다고 하더라도 저 무게의 무기를 휘두른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명사》의 <정화 열전>은 검증없이 그대로 옮겨 왔지만, 근거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는 목선으로서 150m에 이르는 선박을 건조한다는 것이 현대의 조선공학으로도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이다.[27] 이 문제에 대해 예전에 중국에서 올라온 논문이 있었는데, 저자가 한국인이었다. 그 논문에 의하면 실제로 중국 남경에서 커다란 닻의 유물이 발견되었고, 그 닻이 지탱하는 배의 크기를 측정해본 결과, 거의 120m 가량의 거대한 목제 선박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문제는 거센 파도가 계속 부딪치는 바다로 나가게 되면 그 배에 물이 새어 부서진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커다란 닻의 유물이 실제로 발견된 것은 엄연한 사실이라서 과연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지가 고민이었는데, 그래서 내린 결론은 저렇게 커다란 닻을 달았던 목제 선박은 물결이 잔잔하거나 거의 없어서 배가 안전한 내륙의 강이나 호수 및 인공 호수에서 황제가 개인적으로 유흥을 즐기기 위해 만든 용도였다는 것이다.[28] 정화의 본거지였던 중화권에서는 대만 해양대학의 수밍양이 길이 74m, 너비 12.8m 정도로, 상해교통대학 교수였던 신원어우 교수가 600톤 내지 800톤급으로, 중국 해군 공정학원의 탕즈바가 정화 보선을 길이 55.5m, 선폭 15.3m, 배수량 1,500톤급으로 추정했다. #
참고로 역사상 최대의 전열함인 Valmy호가 약 6,000톤, 최초의 철골구조 철갑선인 HMS Warrior가 9,200톤, 20세기 초반 드레드노트급 전함들이 17,000~20,000톤이었다. 만약에 정화의 배가 정말로 17,000톤이었다고 친다면 정화의 배는 20세기의 전함과 맞먹는 배수량을 가졌다는 뜻이다.
다만, 정화의 선박이 사서에 기록된 대로 아프리카의 기린이나 코뿔소를 태워 중국까지 이송할 만큼의 크기는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20,000톤급 목선은 아니더라도 기린이나 코뿔소 및 그 사료를 충분히 싣고 아프리카에서 중국까지 몇 개월 동안 항해할 만큼의 크기는 분명히 되었을 테니, 당시의 기술 수준으로는 매우 거대한 선박이었음에는 틀림없다.
8. 정화 원정의 현대적 의의
현대의 중국측이 정화의 원정을 중국의 패권주의 및 팽창주의의 동기로 이용한다는 주장이 있다. 2010년대에 들어 중국이 주도하는 일대일로나 중국이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와 마찰을 빚는 남중국해 분쟁과 같은 패권주의를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이 늘어났고, 이들은 정화의 원정이 중국의 팽창주의에 근거를 부여한다고 보는 것이다. 에드워드 카가 말했듯이,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기 때문에, 정화의 원정은 대국굴기를 추구하는 현재의 중국의 입맛에 맞는 역사적인 사건임은 틀림없다.사실 명•청시기에 나온 연의에서 보듯이 정화의 원정은 중국인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진취적인 사건임에 틀림없었으나, 위와 같은 이유로 명•청시대에는 그다지 높이 평가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중국은 농업국가였고, 주민의 해외이주는 농업 노동력의 상실 및 세수의 감소로 봤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막았다. 명•청시대의 해금령은 청나라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정화의 해상 원정이 본격적으로 재평가된 계기는 1907년 광동성 출신인 량치차오가 정화의 원정을 현대의 민족주의에 입각하여 평가하면서부터였다.
오늘날 동남아시아의 화교들은 정화를 자신들의 원조로 기려 정화 원정대가 거쳐갔던 말레이시아 말라카에는 정화의 석상이 세워져 있으며 인도네시아, 필리핀, 태국, 캄보디아에는 그의 사당이 만들어졌다.[30] 중국 본토 내에서 정화가 본격적으로 고평가되기 시작한 계기는 중국의 국력이 신장되어 외부로 눈을 돌리게 된 20세기 말기에 들어서였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우리는 (헤이그) 중재법정의 판결을 갖고 있다.”
라고 반박하자,
시진핑 주석은 “맞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적 권리를 갖고 있다. 당신들은 최근 판결만 가졌을 뿐”
이라며 명(明)대 초기 정화(鄭和)의 남중국해 원정을 언급하며 중국 해역이라고 주장했다.
# 하지만 정화의 원정단은 제국주의나 팽창주의, 패권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정화 원정대는 방문한 지역들의 종교와 문화, 주권을 상당히 존중했다. 이는 당시 기준으로 놀랍도록 신사적인 방식이었는데, 대항해시대에 포르투갈 등이 보여준 초창기 제국주의에 해당하는 면모, 즉 폭력적인 충돌, 노예무역, 강제 개종 및 식민지 주민 강제 착취, 징병 등과 명백한 대조를 이루었다.
예를 들어 바스코 다 가마나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과 같이 정화 사후 약 50~60년이 지나 정화가 기항한 같은 곳들에 닿았던 포르투갈 탐험가들은 당시 기준으로도 유달리 잔혹했다. 이미 항복하고 몸값까지 다 지불한 민간인들을 임산부조차 봐주지 않고 능욕하면서 학살했다. 때문에 포르투갈인들은 당대 유럽인들 사이에서도 상당한 지탄을 받았던 바 있었다. 당시 뱃사람들이 다 거친 사람이긴 했지만, 해적들 사이에서도 몸값을 낸 사람을 함부로 죽이면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었는데 명실공히 왕실에서 보낸 사람이 이를 어겨서 비난을 받았던 것이다.
정화 함대가 당시의 포르투갈인들과 달랐던 대표적인 사례가 있다. 정화 함대가 스리랑카에 남긴 비문은 중국어, 타밀어, 페르시아어 3가지로 되어 있었는데, 페르시아어 비문에는
"하나님(
알라) 덕분에 무사한 항해가 가능했다."
라는 종교적인 내용이, 타밀어 비문에는 현지 타밀족 힌두교도들을 고려하여
힌두교에 관련된 내용이, 한문 비문에는 외교 성과와 관련된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애초에 정화가 여러 공신들을 제치고, 영락제 직속의 정사로 발탁된 이유들 중 하나가
무슬림 출신이지만
불교와
도교,
유교에 대한 이해가 무척 높았던 점에 있었다. 문화 교류 측면에서만 놓고 보면 정화의 해외 원정은 오늘날에 봐서도 선진적이었다.즉 정화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나 바스쿠 다 가마보다는 중국으로 파견되었던 예수회 선교사인 마테오 리치, 아즈텍의 문화 유산을 보존하고 원주민들을 교육하는데 힘썼던 스페인의 베르나르디노 데 사아군과의 비교가 더 적절한 인물일 수도 있다.
이런 대규모 원정대가 기항하는 곳에서는 약탈이나 살육과 같은 무리수가 따를 수도 있었지만, 정화의 함대는 타지에서도 보급품을 공정하게 거래했고, 무력 개입도 현지 동맹 세력의 요청이 있거나 명나라 원정대가 공격받을 때에만 행하는 등 ( 실론), 전근대 시대의 항해자로서는 상당히 이례적이었다. 정화 원정 당시 창궐하던 왜구들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서유럽 각국은 사략함대를 운용하면서 해적질을 공인하거나, 아예 국가가 직접 운영했다. 정화의 원정 이후인 1492년 아메리카 대륙에 닿은 콜롬버스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상대로 한 여러 악행이 계속 발굴되면서, 21세기가 들어선 이래 여러 기념물들이 철거되고 있다.
현재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 태국, 캄보디아 같이 정화의 함대가 기항했던 국가에서도 나쁜 이미지가 없이 정화의 동상이나 사당, 모스크가 건립되어 정화의 탐험을 기념하고 있다.
9. 여담
- 정화는 중앙아시아계 색목인 무슬림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중화권 뿐만 아니라 이슬람권에서도 정화의 항해를 기념하고 있다. 위에서 여러 논란을 만든 두바이의 쇼핑몰에 전시된 정화의 보선 모형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정화 원정대가 거쳐갔던 말레이시아의 말라카에는 정화의 석상이 세워져 있고, 인도네시아의 팔렘방에는 정화 모스크가 세워져 있다.
10. 대중매체에서의 정화의 대항해
- 2009년에 중국에서 정화가 주인공인 <정화하서양>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되었고, '정화의 대항해'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도 여러 차례 방영되었다.
어린 마화는 거세되어 연왕부에 보내졌는데 똑똑하고 충성심이 높아서
영락제와
인효문황후에게 총애를 받는다. 요광효의 제자가 되었다. 연왕 주체를 위해 첩보목적으로 왕경홍같은 태감들을 포섭했다. 인질로 끌려간
고치와
고후를 구출했고, 연왕이 중과부적으로 생포될 위기에서 적장을 저격하기도 한다. 전쟁의 공으로 정씨 성을 하사받았다. 한편으로는 무슬림이라 메카에 가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 중동까지의 장거리 항해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대항해에 부정적인 장군과 관료의 반대속에서도 정화는 충성스럽게 임무를 수행한다.
극 전반에 걸쳐
송나라 때부터 남양군도를 떠돌던 중화의 자손이라고 하여 은근히
중화사상을 내비치나, 유럽인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유럽을 경계하는 내용 또한 비중 있게 나온다. 보통 사극에서 환관들은 간사하고 사적 욕심이나 부리는 간신 내지 과묵한 조력자, 또는 인간도 아닌 걸어다니는 샌드백 수준으로 묘사되지만, 본작에서 정화나 정화와 비슷한 사연의 동기 환관들은 대부분 난리통에 가족을 걱정하는등 인간적인 면모가 강조되었다. 정화도 환관이라는 멸시에 굴하지 않고 꿋꿋이 소임을 다하며
영락제의 '총애'를 넘어선 '신뢰'를 쌓아나간다.
정화 원정의 범위에 대해서도 오버하지 않고 선덕 연간의 마지막 7차 항해에서 남인도양의
남아프리카 인근까지 진출했으나 미처 대비하지 못한 얼어죽을 날씨 때문에 아굴라스곶을 돌지 못하고 정화가 죽기 이전 회항했다고 묘사되었다.
티무르와
영락제의 이뤄지지 않은 데스매치에 대한 떡밥도 묘사되어
티무르 제국이 명나라 서북 방면으로 침공하였으나 전쟁이 커지기 전에 정화의 함대가 인도양 북서부에서 무력시위를 벌이며 티무르 제국에게 본진털이의 위협을 강요했다는 설정이 추가되었다.
- 2019년 중국 드라마 <대명풍화>에서 정화가 짧게 등장한다. 엄청난 CG를 동원해 수십척의 함선을 이끌고 아프리카까지 항해하는 대업적을 거뒀다고 표현하였다. #
- 아래는 대체역사 요소가 있는 창작물들이다.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아시아 왕조(2번째 확장팩)의 중국 캠페인에서 정화 함대의 아메리카 도달설을 채용하였다. 캠페인 중 나오는 지도 역시 다른 국가 캠페인과는 달리, 위에 소개한 천하전여총도로 되어 있다. 해당 캠페인 함장인 지안 후앙 참조.[33]
- 대항해시대2의 해킹 모드 중에는 정화가 등장하는 것도 있으며 '대항해시대2 정화편'으로 알려져 있다. 추가된 컨텐츠들을 보면 상당히 고퀄이다.
- 파 크라이 3에서 종종 중국식 유적과 유물들이 등장하는데, 설정상 정화의 함대가 루크 아일랜드을 들르면서 남긴 것이라고 한다.
- 겁스 무한세계에서는 정화의 대원정을 시작으로 중국판 대항해시대가 시작되어서 대명제국이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중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난 평행세계인 명-3이 있다.
- Victoria 시리즈의 모드 Divergence에서는 지원을 계속 받아서 명나라가 원 역사의 캘리포니아와 오스트리일리아에 중국계 국가를 세우는 데 성공한다.
- Hearts of Iron II의 모드인 동방의 빛에서는 정화의 대원정으로 대명제국이 부흥하다가 명의 4대 암군에 의해서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홀라당 그걸 집어먹고 대청제국을 건설했다 라는 뒷설정이 있다.
- 짐승조선에서도 언급되는데 정화의 원정 당시 쓰이던 보선들이 아직 남아있다고 언급되고 김금수가 그 보선들을 사들여 원양항해로 동물 수집 원정(...)을 가려고 했다. 명나라에서도 자리만 차지하고 쓸모도 없어 썩어가는 배를 돈 주고 사겠다는 말에 좋다고 팔아주고 해금령도 풀어줘서 이 배들은 50여년 만에 다시 날개를 펼 수 있었다.
- 대체역사소설 마지막 바이킹에선 주인공 시그리드의 소문을 듣고 빈란디아(아메리카)까지 원정을 왔으며, 잉글랜드와 제노아 용병들을 편들어 투슈판을 점령했다가 시그리드의 신대륙 연합 및 그 동맹국들과 싸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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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 소말리인 | |
언어 | 소말리어 | |
문화 | 곤데르셰 | |
지리 | 아프리카의 뿔 | |
기타 | 정화의 대원정 |
[1]
이 목적을 가지고 정화가 원정을 떠났다면, 당시
아라비아 반도 일대에
맘루크 왕조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라비아 반도까지 닿은 정화가 교섭할 가능성도 있었겠지만, 정화가 제1차 원정을 떠난 직후에 티무르가
오트라르에서 붕어했고, 그의 사후 티무르 제국은 후계 다툼으로 인해 팽창을 중단했기 때문에 더이상 명나라는 티무르를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2]
제1차 원정단은 당시
이슬람 세계와의 교역항이었던
취안저우가 아니라
난징에서 출발했는데, 난징은 명나라 수군의 본거지였다. 당시 명나라 수군은 전형적인 내륙형 수군이었다. 명나라 수군의 기원은 태조 주원장이 안후이성
허페이의 소호(巢湖)에서 조직한 것으로, 장강의 강변에서 원나라의 수송선단이나 경쟁 군벌의 선단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명나라 수군의 주요 활동무대는
남중국해나
서해(황해)가 아니라
장강이었다. 그러니 명나라가 중원을 통일한 이후에는 할 일이 없어진 것이 명약관화했다. 한편 난징은 40년전 큰 전투가 있었던
파양호와 장강으로 이어진다.
[3]
제1차뿐만 아니라 참가자의 회고록에 기록이 남아있는 4차례의 원정이 모두 정원 27,000명이었기 때문에 7차 항해 모두 20,000명 이상의 대규모 병력이 참가했을 것이다.
[4]
승조원 인원수, 함선의 스펙, 척수 모두 《명사》<정화 열전>이 출처다. (永樂三年六月,命和及其儕王景弘等通使西洋,將士卒二萬七千八百余人,多賫金幣。造大舶,修四十四丈、廣十八丈者六十二.)
[5]
예를 들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탐험단은 총 3척에, 탐험단 정원은 모두 100명 미만이었다. 이것도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재정을 짜내 겨우 조직한 것이었다.
[6]
방글라데시라는 설도 있다.
[7]
소말리어로, 단수형으로는 기리, 복수형으로는 게린이었다.
[8]
이 시점에서 명나라의 수도는 다시 베이징으로 옮겨가 있었다. 하지만 정화의 함대는 난징에서 출발했다.
[9]
당시 명나라의 공문서들은 난징을 수도로, 베이징을 행재소(임시수도)라고 기록하고는 있으나, 실제 황제들은 난징에 내려오지 않고 계속 베이징에 기거했다. 즉, 난징 재천도는 물거품이 되었다.
[10]
일설에는 1433년 제7차 항해에서 돌아온 직후에 병사했다고도 하는데, 정화는 제7차 원정 중 사망했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 출처: 郑一钧, <郑和死于一四三三年>, 《光明日报》 1983년 3월 16일 기고문.
[11]
당시 정화의 해상 원정대는 질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병에 걸려 몸져 누운 환자들을 그냥 바다에 버렸다. 근데 정화의 시신만 따로 본국으로 이송하자니 형평성 및 선원들의 사기 저하 문제가 생길 수 있어서 명나라 본토로 정화의 시신을 수송하는 대신, 수장을 택한 것이다.
[12]
물론 당대의 예수회 수사들, 그 중에서도 중국에 파견될 정도의 인물이면 서유럽 기준으로도 초일류 지식인이었던 점은 감안해야 한다.
[13]
오히려 돈을 엄청나게 썼고, 백성들의 생활에 큰 부담이 되었다.
[14]
비슷한 유목민족 출신 왕조인 청나라가 아예
오이라트(
준가르) 민족을 절멸시킨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오이라트는 명나라때부터 중국의 서북쪽을 계속 공격했고, 고종
건륭제는 아예 후환을 없애려고 오이라트계 준가르 민족 전체를 박살냈다.
[15]
劉大夏,
1436년~
1516년
[16]
영락제
[17]
제4, 6, 7차 원정때의
아랍어 및 페르시아어 통역관이었던 마환(馬歡)의 저서다.
[18]
제3, 5, 7차 원정때 참여했던 비신(費信)의 저서다.
[19]
제7차 원정에 참여했던 공진(鞏珍)의 저서다.
[20]
혹은 《서양기》라는 약칭으로도 불린다.
[21]
바이두백과의 항목 孟氏的观点一经问世,在国际社会产生巨大影响,在国内专业人士几乎一致的反对。"멘지스씨의 관점은 국제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지만, 국내 전문가들도 일치해서 반대하고 있다."
[22]
天下全與總圖,
1763년 제작
[23]
그런데 왠지 유럽인들에게는 전혀 목격되지 않고...
[24]
인도네시아의 여러 제국들도 호주를 굳이 정복하지 않았던데는 가까운 호주 서북부 일대가 사막이 가득한 황무지였고, 호주 동남부와는 거리가 크게 떨어져서 당대 기준으로 개척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뛰어난 향해기술을 가지고있었음에도 무역만 하고 다녔던 것이다.
[25]
'나라는 해변에 접해 있고, 산은 이어져 땅은 넓었으나 메마르고 척박하여 수확이 적다. 해마다 늘 가뭄이 있고 여러 해 비가 내리지 않기도 한다. 풍속은 어리석고 간교하며 늘 군대를 훈련시키고 활쏘기 연습을 했다. 토지에서는 나무가 자라지 않는다. 역시
호르무즈처럼 돌을 쌓아서 집을 지었고, 물고기를 말린 것으로 소·양·말·낙타를 사육한다고 한다.'
#
[26]
三寶太監下西洋記通俗演義
[27]
20세기에 만든 140m 목선인 와이오밍에 대한
블로그글#.
[28]
실제로 전한의 제7대
세종 무황제가 '곤명지'라는 커다란 인공 호수를 만들게 하고, 그 위에 10,000명이 탈 수 있는 거대한 목제 선박을 띄운 후, 그 안에 궁녀와 시종들을 태우고 유흥을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29]
적재량 28톤, 배수량 56톤
[30]
현재 수천만명의 인구가 있는 동남아시아의 화교 커뮤니티도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의 행정력이 약화되고,
중국 대륙에 혼란이 잇다르자
광둥성과
푸젠성 주민들이 대거 해외이주를 하면서 확대된 것이었다. 필리핀의 화교 커뮤니티야 17세기부터 번영했으나, 이는 엄연히 예외적인 경우였고 이를테면 말레이시아의 화교 커뮤니티의 역사는 기껏해야 200년도 안된다. 중국인 개개인의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이주야 중세부터 있었겠지만 본격적인 중국인 공동체 형성을 기준으로 잡으면 19세기 즈음이 맞다.
[31]
정화의 원정 목적 중의 하나가 동남아시아 각국의 조공 사절을 막고 있었던 남중국해의 중국인 해적들의 소탕이었다.
[32]
항목 참조. 두 차례의 원정 모두 가뜩이나 원나라의 독촉하에 날림으로 만들어진 배들이 태풍으로(1차 때는 때아닌 늦가을 태풍으로!) 숱하게 뒤집혀져 물거품이 되었다.
[33]
정작 게임 유닛과 건물은
청나라다. 고증오류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