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7-03 20:19:19

1.
1.1. concubine
1.1.1. 정부, 일부다처제와의 차이1.1.2. 한국1.1.3. 중국1.1.4. 서양1.1.5. 기타
1.2. 과거에 여성이 자신을 낮춰 부르던 일인칭 대명사
2. 3. 4. 인터넷 유행어

1.

1.1. concubine

()은 정실부인 외에 데리고 사는, 통상적으로 정실부인보다 신분이 낮은 여자다.

소실(小室), 측실(側室), '작은집'으로도 불리는데 동양에서 황제나 왕의 첩인 경우는 대체로 후궁이란 단어를 쓴다. 본부인의 입장에서 남편의 첩은 '시앗'이라 부르며 이런 오래된 표현이 잘 남아있는 속담 중에는 '시앗 싸움에 요강장수'나 '시앗을 보면 돌부처도 돌아앉는다' 같은 표현이 있다. 본부인의 자식 입장에서는 '서모(庶母)'라고 부른다.

정식 부인과 달리 첩은 '혼인한다'기보다 '들인다', '데려온다'는 표현을 쓰며, 첩을 들이는 것을 '축첩'(蓄妾)이라 하며, 처와 첩을 합쳐서 처첩이라고 부른다. 속칭 ' 세컨드'라고 부르지만, 사실 영어로 second wife는 어디까지나 이혼이나 사별 후 2번째로 맞이한 정식 아내로서, 말 그대로 '계처(繼妻)'를 뜻하기에 첩과는 다르다. 그러나 현재는 사회통념적으로 애인이나 부인 이외의 외도상대를 이르는 외래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본래 첩은 신분사회에서 계급간의 계승권 구분을 위해 존재하는 차별을 위한 구조이다. 철저한 부계사회로서의 첩 제도로 인해 어머니가 다른 아이들이 잔뜩 태어났고, 단지 어머니가 첩 신분이라는 이유만으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신분사회의 폐해로 생기는 여러가지 차별을 받는 등 악순환을 일으킨다. 예를 들자면,
  • 첩이 낳은 자식은 본처 자식보다 낮은 신분으로 분류해서 가문을 상속받지 못한다. 대개 첩은 여자의 신분이 낮은 경우이다. 우리나라는 왕의 후궁을 제외하면 평민 이하의 신분이였고, 옆나라 일본은 나름 귀족출신 여성들도 많았다.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못했던 홍길동이 이런 경우다.
  • (신분사회가 아니더라도) 정략결혼 등의 이유로 처의 신분에 대한 우대 방법의 하나다. 다만, 처의 계급이 더 높다면 정략결혼이라도 감히 첩을 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조선시대의 부마 같은 경우는 축첩은 물론이고 재혼까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부마여서 피해 본 대표적인 케이스가 박영효. 12살의 어린 나이에 결혼했는데 겨우 몇달 만에 아내인 영혜옹주가 죽어버리는 바람에 평생 첩 밖에 둘 수 없었고, 자식들도 모두 서자로 호적에 올랐다. 그나마 광복 이후 적서차별이 없어진 게 다행이다.

첩의 자식이 차별당하는지의 유무와 그 정도는 시대와 국가에 따라서 상당한 격차를 보인다. 인구에 따라서 그 정도가 차이가 있다는 의견이 있지만, 오히려 인구가 한국보다 늘 많았던 중국에서는 적서차별이 상당히 느슨했다. 또한 고려 조선 두 시대만 비교해도 차별의 정도가 차이가 난다.

1.1.1. 정부, 일부다처제와의 차이

정부(情婦)나 일부다처제의 두 번째 이하 부인과 혼동되기도 하는데 이 둘과 첩은 차이가 있다.

첩이 일부다처제의 둘째 이하 부인과 구별되는 점은, 일부다처제, 특히 이슬람의 일부다처제에서 여러 부인은 법적, 관습적으로 동등한 존재이며 남편으로부터 동등한 대우를 요구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법적, 관습적으로 첩은 정실부인보다 신분이 낮으며, 남편에게 정실부인과 동등한 권리를 요구할 수 없고, 가정 내 대소사에 평등한 자격으로 참여할 수 없고, 첩의 소생은 서자로서 정실부인의 소생에 비교해서 차별받는다. 즉, 혼인 관계이기는 하되, 처(妻)와는 달리 한 단계 낮은 대우를 받도록 지정된 혼인관계인 것이다.

그래서 다처제 사회보다는 다첩제 사회에서 평균적으로 부인의 수가 많다. 부인의 수를 늘리더라도 남성이 부인이나 그 소생 자식에게 해줘야 할 의무가 적기 때문에 남성의 부담이 적기 때문이다. 반면 일부 이슬람 국가 등 모든 부인과 자녀들에게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고 있는 다처제 국가에서는 부인의 수에 비례해서 재산 분배나 양육 등 부담이 커지게 되므로 상류층 남성들이라도 부인의 수는 1명 혹은 2명이 대부분이고 3명 이상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예를 들어 두 처의 살림집을 동등한 수준으로 구해줘야 하고, 두 집을 동등하게 방문해야 한다. 생활비는 물론이고 선물 같은 것도 두 처에게 동등하게 해줘야 한다. 선물로 반지를 요구하고 다른 한 명이 코트를 요구하면, 분란을 막기 위해 반지와 코트를 두 개씩 사서 둘 다 선물하는 식. 이런 문화 때문인지 능력이 떨어지는 남성은 짝을 구하기가 오히려 일부일처제를 법으로 정한 나라보다 더 어렵다는 이야기도 있다. 허영만 작가가 그린 경마를 주제로 한 어떤 만화에서 주인공이 부하 직원 한 명이 자기 같은 사람은 중동 같은 곳에 태어났어야 한다는 말을 하자, '거기는 자네 같은 무능한 남자는 짝을 구하기가 더 어려워서 평생 혼자 살아야 한다네. 그나마 일부일처제 국가라서 자네에게 기회라도 있는 거야.' 하고 코웃음을 치며 비웃는 장면도 나온다.

왜냐하면 경제력 있는 남성이 결혼적령기의 여성들 여러 명과 결혼하니 생활능력이 떨어지는 남성이 결혼할 여성을 구하기가 그만큼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슬람권 국가들 중에도 서양식 가족제도와 법제도를 다소 받아들여서 일부일처제를 법으로 정해놓은 나라들이 생각보다 많다. 유념할 것은, 이슬람교에서 일부다처제는 '허용' 되는 것이지, 결코 '권장'되는 것은 아니다. 무함마드 시대부터 일부다처를 하려는 경우 여러가지 전제조건을 걸어서 다소 까다롭게 만들어놓았으며, 현대에도 일부 다처제를 법적으로 허용하는 걸프 지역 같은 곳들에서도 결혼한 남성들의 90% 이상은 한 명의 부인만 두고 살고 있다.

첩이 정부(情婦, mistress)와 구별되는 점은, 정부가 내연 관계의 여자/남자로서 비교적 정조 의무에서 자유로우며, 정부가 낳은 소생은 남자가 별도로 인지하지 않은 한 사생아가 되지만, 첩은 일종의 불평등한 혼인관계로서 남자에게 묶여 있고, 첩의 소생은 특별히 인지하지 않아도 남편의 자식으로 (단 서자로)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또한 비교적 정조 의무에서 자유로운 정부와 달리, 첩이 외간 남자와 자면 간통으로 취급받았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에 자기 첩이 바람피우는 현장을 덮쳐서 첩을 죽였다면, 남편은 무죄 방면될 확률이 높았다.[1] 하지만 첩이 아닌 정부를 죽인 경우는 짤없이 살인죄로 처벌받았다.

정부는 공식적인 관계가 아닌 아무 경제적 사회적 지원도 의무도 없는 장기적인 원나잇 같은 가벼운 만남이지만, 첩은 정식으로 남녀 합의하에 첩은 정실이 누리는 몇 가지 권리를 포기한 것을 인지한 채로 남자와 공개적으로 혼례를 치르고 첩으로서 가족의 일원이 된 경우인, 차등을 둔 결혼일 뿐이다.

남편이 처와 첩 모두와 동침한 걸 보고 정조가 깨졌다고 오해하는데, 남편이 처와 첩 이외의 사람과 동침한 경우가 되어야 정조를 지키지 못했다고 손가락질을 받을 수 있었다. 외이는 여자도 똑같이 적용되며, 마찬가지로 혼례를 치른 대상 이외와 관계를 하면 정조를 지키지 못한 거다. 애초에 정조의 의미 자체가 “일부일처제”와 전혀 관계 없는 용어이며 “혼내정사”를 지칭한다. 그리고 첩이 되는 건 그걸 상정하고 혼례를 올린 거고.

이외에는 남편의 형이 죽으면 남편은 형수를 가족 구성원으로서 먹여살려야 하는 의무인 형사취수제도 몇몇 나라에 있었는데, 남자로 태어났으면 본인의 혼인 유무와 관계 없이 반드시 지켜야 할 도리로 인식됐다.

1.1.2. 한국

한국은 전통적으로 일부일처다첩제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일부다처가 가능했다. 예를 들어 신라 진흥왕이 이미 부인이 있었지만 백제 정략결혼 소비 부여씨를 두 번째 부인으로 삼았던 것이 있다. 물론 첩까지 부양해야 할 남편의 경제사정이나 혹은 경제사정이 충분하더라도 남편의 가치관에 따라 두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가령 흥덕왕은 첩을 얼마든지 둘 수 있는 왕이었지만 한 여자만을 바라봐 첩을 두지 않았다.

고려시대의 왕은 여러 명의 왕비를 두었다. 대표적으로 고려 태조 왕건은 정실부인이 6명이었고, 첩에 해당하는 후궁은 26명으로 자그마치 29명의 여성과 혼인했고 이후의 왕들도 왕족 여인들을 여럿 취하며 왕비를 두 명 이상 두었다.[2] 그러나 왕실의 예법이 이렇다고 해서 일반 평민은 물론 귀족들도 일반적으로 아내를 둘 이상 두는 건 흔한 일은 아니었다.

원 간섭기 이후 유목민의 풍속이 들어오며 다처 풍습도 같이 들어오게 되었고, 고려 말기에 들어서면 관리들이 고향에는 향처를, 개경에는 경처를 두며 두집살림을 하는 풍속이 일반적이었다. 조선의 국조 이성계부터가 이렇게 했다. 신의왕후는 향처, 신덕왕후는 경처. 다만 신의왕후는 개국 전에 죽어서 개국 당시에는 신덕왕후만 남아있었다. 자기네 국조가 불법으로 두집살림을 했다는 것을 말하기가 껄끄럽다보니 조선 왕조에서는 신덕왕후를 경처가 아니라 신의왕후 사후 태조가 재혼한 후처로 간주했다. 그러나 유교 윤리를 중요시하는 조선시대에 들어오자 이런 관행은 용납되지 않았고, 일부일처를 강제하게 된다. 또 다른 이유로는 조선은 고려 말에 유력가문들이 중첩혼인으로 동맹 맺는 것을 매우 꺼렸기 때문이다.

조선 태종대에 들어와 일부일처제가 확립된다. 태종 이전의 이성계는 후궁이 아닌 정실부인이 2명이었다. 태종 이후 왕도 처, 즉 왕비는 의무적으로 1명만 둘 수 있게 되었고, 나머지는 전부 후궁이 되었다.

조선시대의 경우 첩을 두는 이유는 다양했다.
1. 처가 병들거나 집안일을 돌보기 힘들 때 이를 대신시키기 위해. 일례로 퇴계 이황은 첫 아내와 사별하고 집안일을 돌볼 사람이 없어 첩을 들였다. 이후 두 번째 결혼을 했는데, 그의 계처는 정신에 이상이 있어 안주인으로서 행동할 수 없었으므로 첩실이 계속해서 집안 살림을 보살폈다. 이황은 집안을 잘 돌본 첩에게 감사하는 의미에서 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를 정식으로 호적에 올렸고, 이후로도 집안에서 적서를 차별하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이후로 퇴계 가문의 족보에는 적서를 구별해 기록하지 않았다.
2. 관직 사정상 본가에서 떨어져 지낼 때 그곳에서 살기 용이하게 하기 위해. 이에 대해 남겨진 조선의 기록 중에선 세를 놓고 사는데 집주인의 갑질이 심해지자 그냥 첩을 둘까 하는 이야기도 있다. 보통 양첩의 경우가 이렇다. 애초에 계집종을 첩으로 두는 게 아닌 이상 대체로 첩과 본처는 다른 집에서 살았다. 특히 사대부가 부인들이 시앗을 들여야 할 때 자주 썼던 방식이다.
3. 두말할 필요 없이 여색이 목적. 후궁처럼 왕실에서 첩을 둘 때는 이를 미화하기 위해 '자손의 번성함'을 이유로 하기도 했다. 이 경우는 신하들도 어물렁 넘어가기도 했는데, 신하들도 해릉양왕, 연산군 등의 등급으로 하는 게 아니라면 딱히 터치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많은 사대부들이 공식적으로 본처와 여러 명의 첩을 거느렸다. 이순신도 정실부인 상주 방씨 외에 첩이 2명(해주 오씨, 부안댁) 있었다.

축첩은 조선시대를 넘어 일제강점기까지 인정되었다. 사실 일제강점기 때 개정된 일본 민법의 영향으로 공식적으로 축첩이 금지되어 있도록 "삽입"되어 있었지만, 당대 조선의 기득권층부터가 첩을 대놓고 두었고, 일본도 조선의 축첩 관습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다. 식민지 통치가 시작될 때의 일본은 공식적으로 첩 제도를 폐지했지만 축첩 관습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 화족이나 유력 정치인, 재력가들은 첩을 두었다. 첩을 둔다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의 신분과 재산이 있어야 가능했던 일이기 때문에, 조선이나 대만 유력자들이 축첩한다고 이를 배척하면 식민지 체제의 잠재적 협력자를 잃는 것에 불과하므로 신경쓰지 않았다. 축첩했다고 해서 처벌하는 일이 없었고 불륜을 저지른다 해도 유부녀와 바람나지 않는 이상 이혼 사유로도 인정되지 않았는데, 당시 여성들이 간통을 하면 되려 처벌을 받는 것은 여전했다.

결국 축첩은 1948년, 대한민국 헌법 제정과 함께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겪으며 남자들이 많이 죽어나가 성비불균형이 심했고, 또 원래 관습이란 것이 법이 바뀌었다고 쉽게 없어지는 것도 아니었으며 무엇보다도 전쟁 직후라 경제상황이 개판이었기 때문에 돈이나 권세 좀 있는 남자들이 첩을 여러명 두는 것은 여전했었다. 이후로 규제가 강화되자 1960년대부터는 일부러 첩을 들인 다음 전처에게 이혼을 요구한 뒤 첩에 해당되는 사람과 재혼하는 일이 흔했는데, 이혼소송 시 유책배우자는 이혼을 요구할 권한이 없도록 한 유책주의를 채택한 이유가 바로 이 축출이혼을 막기 위해서였다.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극도로 제한된 1960년대에 축출 이혼당한 본처들은 생계가 막막해지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런 편법으로 인해, 전 배우자와 사별했거나 이혼한 후 재혼한 경우, 재혼 상대가 첩으로 오해를 받는 경우가 있었다. 또한 공식적으로 축첩 관습이 사라지면서 후처가 첩 비슷하게 포지셔닝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우는 전처가 아들을 낳고 후처가 딸을 낳은 경우인데, 남아선호 사상으로 인해 전처의 발언권이 커지기 때문이었다.

축첩 관습이 사라진 것은 1960년대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나서이다. 국가재건최고회의와 그 뒤를 이은 박정희 정부는 구악타파라는 명목으로, 축첩을 하는 공무원, 경찰에 파면 등의 중징계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실효를 거두면서 1960년대 이후로는 축첩이 범죄라는 인식이 지배적인 것이 되면서 비로소 사라졌다. 물론 이전부터 정부 차원에서는 축첩에 대한 단속을 하여 가령 '간통쌍벌죄를 제정하여 간통 시 남자도 처벌하고 혼인신고를 의무화하도록 장려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기존에 첩을 두던 사람들이 싸그리 부인을 1명씩만 가지게 되었다는 소리는 아니다. 법적으로 중징계를 내린다해도 경제력 있는데 첩을 두던 사람들이 사회생활이 다 끝내는 식으로 일처리가 된 것은 아니었고,[3] 결국 이러한 법령과 현실과 괴리감때문에 훨씬 이후의 수많은 막장드라마와 영화의 내용에서도 첩을 두었다는 식의 내용이 남는데 영향을 끼쳤다. 아무튼 이때를 기점으로 주변에서 돈이나 권세가 좀만 있다하면 첩을 여러명씩 두면서 몇집 살림 하는 관행이 이때부터 사라진것은 맞기는 하다.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법적으로는 처와 첩이 구분되지 않아 처를 버리고 첩을 새 처로 맞기 위해서 처 몰래 첩과 혼인신고를 할 수도 있었다.

축첩 관습과 1960년대 축첩 단속은 21세기에도 인사혁신처 공무원 징계 사유에 '축첩'이 있는 것으로 그 유산을 남기고 있다. 관련 링크 21세기까지도 공무원 징계 사유 중 상당히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저 축첩인데, 오늘날에는 진짜 축첩을 하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대부분은 혼외의 정부를 둔 공무원을 축첩으로 징계하는 것이다. 굳이 축첩이라는 케케묵은 표현이 징계 사유로 올라가는 건, 해당 징계 사유가 1970년대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1972년 대법원 판례에 처음으로 축첩이 공무원 해임 사유가 된다는 내용이 나온다.

대한민국에서 첩 계약은 민법 제103조 선량한 풍속에 위배되는 계약으로 간주되어 본처의 동의를 받든, 안 받든 무조건 무효이다. 실질적으로야 어떻든 법적으로 첩이라는 존재는 현대 대한민국에선 있을 수 없다는 것. 재벌과 같은 이들은 암암리에 첩을 들이지만 이 '첩'들은 공식적 지위가 없으므로 첩보다는 정부에 가깝다. 불륜이기에 정식으로 결혼한 총수 부인의 입장에서는 언짢은 일이지만, 구세대 사람들이 그랬듯이 단념하거나, 혹은 배우자 우선 상속분 유산을 남편의 사망 후 챙길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참고 사는 경우도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이건희 회장이 외도 의혹이 좀 있고, 아내 홍라희와 살아생전에 사이가 나빴는데도 불구하고 아내가 이혼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이런 식의 정부 혹은 첩의 대표적인 예로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의 정부인 서미경이 있다. 첩보단 정부에 가깝기 때문에 공식적으론 정조의 의무가 없고, 정조의 의무가 있는 첩처럼 독점하기 위해선 상상을 초월하는 돈이 필요하다. 돈의 양은 남자의 재산에 좌우되는데, 그냥 돈 좀 있는 사람의 경우 적당히 오피스텔 방 주고 외제차 주고 명품 둘러주는 정도면 충분하지만, 신격호 정도 되는 재벌이라면 기업 계열사 하나를 줄 각오가 필요하다. 실제로 서미경 신동빈 한국 롯데 회장과  신동주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 간의 권력 다툼이 비화되면서 수면 위로 대두되기도 했으며, 롯데홀딩스 지분을 신격호의 친자식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도 시대가 바뀌어 재벌그룹 2세, 3세들끼리는 위자료를 받고 갈라지기도 하는 것 같다. 재벌 1세 회장들은 어떻게 보면 당당하게 불륜을 저지르고 자손을 두었지만, 적어도 그 후손들은 딴 여자 생기면 기존 배우자와 헤어지기 위해서 이혼 절차라도 밟으니 본인들의 인식도, 사회의 인식도 변하고는 있다는 것. 어쨌거나 여론은 나쁘다.

현재도 스폰서 등의 이름으로 남아있긴 하다. 이쪽은 정확하게 보자면 일종의 계약관계로 정부에 가깝다.

첩의 존재는 상속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생물학적으로 친자식인 것이 증명된다면, 법이 정한 한도 내에서 자기 몫을 받아갈 수 있다. 정주영의 혼외자식들이 많이 그랬다.

옛날에 첩이었던 할머니들이 21세기 초인 지금도 생존해 있는 경우가 꽤 있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기 때문에 알기 어렵지만, 한 마을에서 수십 년을 사는 시골에서는 누가 본처이고 누가 첩이었는지 주변에서 다들 아는 경우가 많다. 이런 분들 중에는 남편을 사별하고 그 남편의 정처와 같이 의지하며 사는 경우도 왕왕 있다. 젊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충공깽이겠지만, 옛날은 그런 시대였고 힘든 시대를 같이 살다보니 비록 시앗이긴 해도 정이 든 경우가 있고 서로 노년에 의지하면서 산다고 한다. 보통 남자가 여자보다 평균수명이 짧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남편이 아내보다 먼저 죽을 가능성이 높을 테니 나름 맞을 수 있는 말이다. 자식들도 다 독립한 마당에 어쨌거나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것보다는 누구 하나라도 있는 게 그나마 좀 나을 테니 말이다.

그 외에도 가끔 옛날 제적등본이나 족보를 떼보면 자신들은 누구누구가 할머니나 증조모로 알고 있는데 서류에는 다르게 등재된 경우가 많은데, 보통 첩의 자식을 처의 자식으로 올린 경우다. 출생신고 출생증명서 제출이 필수인 현재는 불가능한 일이다. 누구 소생이든간에 자식들 입장에서는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니며, 재산 분란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은 호적상으로는 혼인한 적도 없고 자식도 없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 계층 등으로 지정되어 혜택을 받는 경우가 많다. 그중에는 재산이 있고 자식의 부양을 받으면서도 편법으로 돈을 타내는 부정수급자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상당하다. 첩으로 들어갔다고 해서 남편의 집안이 부유했던 경우는 오히려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호적에 친자식이 올라가 있지 않다는 것은, 복지혜택에서 오히려 큰 장애가 되는 경우가 더 많다. 분명히 친어머니지만 서류상으로는 남남이므로 장례비 보조를 받을 수도 없고, 의료비 지원에서도 실제 부양인인 친자식이 있지만 그 관계가 서류상 입증이 안 되어 자식이 지원을 받기도 어렵다.

첩이 바로 정처의 자매인 경악할 만한 경우도 일부 있었다. 김춘추에게 시집간 문희, 보희 자매나 청나라 광서제 후궁인 진비와 근비가 자매지간이었고 그 외에도 역사상 자매나 고모 - 조카가 한 남편에게 시집가는 경우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런 경우는 '잉첩'이라 해서 보험 삼아 데려가는 경우였다. 왕족이나 귀족 등 사회 지도층의 결혼은 가문끼리, 국가끼리의 결속력을 다지는 중요한 외교적 장치였고 그 결실로서 자식을 얻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으므로, 언니가 자식을 낳지 못하거나 출산 중 죽는 등의 사태가 생겼을 때 같은 집안에 시집 간 동생이 결속력을 유지하는 보험이 되었다. 혹은 자매 중 한 명이 자식을 남기고 죽었을 때, 아이를 생판 남에게 맡기는 것보다 이모에게 맡기는 것이 생존률이나 정서적 안정에 유리할 것이다. 그런 비극이 발생하지 않더라도, 언니가 혼자 시집 가서 낳을 자식보다 자매가 함께 시집 가서 낳을 자식의 수가 당연히 더 많고 그 점은 외교적으로 발언권을 확보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하는 부분이다.

제적등본에서 첩의 자녀가 정처의 자녀로 등록되어 있을 경우 정정이 가능하다. 굳이 할 필요는 없으나 첩에 해당되는 사람이 죽으면 호적상 자식이 없으니 재산은 그 사람의 조카나 형제에게 넘어가므로 첩의 자식 중 한 명이 친자확인 후 법원에 찾아가 친생자관계존부확인의 소를 거쳐 모와친생자관계부존재확인 판결 확정 후 제적등본을 정정하여 바꿀 수 있다. 그렇게 한다면 제적등본상 아버지는 같게 나오지만 어머니는 다르게 나온다.

첩은 처보다 신분이 낮으므로 죽어서 선산에 묻히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1.1.3. 중국

중국의 경우는 신분에 따라서 처첩을 둘 수 있는 숫자가 달랐다. 천자나 제후가 되면 일부다처다첩이 가능했다. 예를 들면 기황후는 제2황후, 즉 둘째 부인이지만 정처에 해당된다. 첩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첩이었다가 처가된 케이슨데, 후궁으로 봉해지고[4] 제2황후로 진봉된 후 정궁황후인 제1황후가 되었다. 고위 관료인 경대부는 일부일처다첩, 하급귀족인 사(士, 선비가 아닌 신사층이라는 일종의 계급)는 일부일처에 2첩 정도, 그 이하는 일부일처였다.

예를 들어서 중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 구운몽에서 주인공 양소유는 2처 6첩을 둔다. 이소화, 정경패 공주 2명이 서로 평등한 정처고, 나머지 기생, 양민, 비녀(婢女) 등 신분 낮은 듣보잡 여자들을 첩으로 두어 차별하는 것이다. 이는 양소유가 제후급 위치라는 것을 의미한다. '영웅은 삼처사첩을 마다하지 않는다' 운운하는데, 여기서 영웅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라 제후를 의미하는 것이다.

중국의 축첩행위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 그러나 현대 중국에서 '얼나이'(二奶)라고 한다. 얼(二)은 2, 나이(奶)는 여성의 가슴을 뜻하며 합하면 두번째 가슴. 보통 금전관계를 매개로한 관계를 의미하며, 숙소와 월급을 지불하는 계약관계이다. 마음에 들어서 근속기간(?)이 길어지면 관계가 끝났을 때 거액의 퇴직금까지 받는 경우가 있는데, 슈가대디를 몇년 상대해 주고 퇴직금으로 가게를 차리는 것이 얼나이계에선 나름 로망이다.

혹은 샤오싼(小三)이라고도 한다. 그야말로 감정적인 교류의 불륜이다. 서로 사심을 갖고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금전보조는 없거나 생활비 정도로 이루어진다. 애까지 낳고 두집살림을 하는 경우도 많아서, 얼나이는 알고도 모른척 하는 부인들도, 샤오싼이 걸리면 바로 난리가 난다. 이런 부유층 및 관리들의 축첩 행위가 심각하다고 한다. 물론 축첩행위가 불법이므로 법적 해석을 따르면 여러 명의 정부를 두는 식인데, 쉬치야오라는 장쑤성 건설청장을 지냈던 자가 첩만 146명을 거느렸다고 하니...그야말로 충격과 공포다.

당연히 사회적인 인식이 좋을리가 없고, 들키면 공무원직에서 짤리기는 하지만 징계를 피하기 위해 일부러 첩의 집을 미국이나 캐나다, 호주같은 해외에 두어서 불륜을 하는 경우가 흔하고, 얼나이로 들어가면 거금을 받거나 고위직과 연줄이 생기기 때문에 의외로 얼나이가 되려는 수요가 있다. 때문에 중국에서는 축첩 행위가 일종의 권력자의 상징처럼 여겨진다고 한다. 2010년대 시진핑이 관료들의 기강을 단속하면서 줄어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할사람은 하는 모양이다. 이 첩들은 (당연히) 씀씀이가 아주 커서 베이징이나 상하이 등 대도시의 사치품 소비의 주역이고, 밴쿠버 등의 도시에는 외국 거주 첩들의 거리가 조성될 수준이다.

사실 중국의 축첩 문화는 전통 문화를 몽땅 없애야 할 악으로 보고 파괴하려 했던 문화대혁명을 겪고도 결코 없어지지 않았을 만큼, 그 유래가 매우 깊다.

1.1.4. 서양

서양에서는 기독교의 영향으로 동양보다 엄격한 일부일처제가 자리잡았다. 서양 남자들이 모두 아내에게만 충실했던 것은 아니고, 첩을 두는 제도가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첩은 '본처에 비해 한 단계 낮은 대우를 받도록 규정된 또 다른 혼인관계'이지만, 서양에서는 남자고 여자고 간에 법적으로 인정된 단 한 사람의 배우자 이외에 중복으로 다른 혼인관계를 맺을 수 없었다. 따라서 서양에서 남성들이 혼인관계 외의 다른 여성과 관계를 맺으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불륜/내연관계를 맺은 것이지 첩을 뒀다고 할 수 없었다. 보통 이렇게 맺어진 내연녀는 정부라고 한다.

그래도 동양의 첩에 비견될 수 있는 '공식 정부'는 있었다. 유럽 왕실에서는 이런 왕의 공식 정부를 로얄 미스트리스(Royal mistress) 라고 부르며 프랑스어로는 메트레상티트르(maîtresse-en-titre), 일본어로는 공첩(公妾), 총희(寵姫)로 번역된다. 첩은 공식적인 제도 내의 존재이기에, 첩실과 서자는 어느 정도의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었으나, 유럽의 정부들은 로얄 미스트리스든 아니든 근본적으로는 내연녀에 불과했기에 법적 보호를 보장받을 권리도 없었다. 당연히 왕족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정부가 낳은 자식도 서자가 아니라 사생아였고, 총애를 잃으면 그대로 궁을 떠나 원래의 삶으로 돌아갔다. 다만 후궁과 달리 정조관념은 더 자유로운 입장이었는데, 이는 후궁은 왕과의 혼인관계에 있지만 정부는 어떠한 법적 제약에도 매여 있지 않은 그냥 '애인'이기에 그러했다.

유럽 궁정에서는 유부녀를 로얄 미스트리스로 두는 경우가 많았다. 요새 관념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지만, 당시에는 결혼을 했다는 사실이 불륜의 변명거리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 한다. 이 정부가 왕의 사생아를 낳았을 때, 정부의 본래 남편이 그 사생아를 호적상 자기 자식으로 처리함으로써 왕과 아내의 불륜에 실드를 치는 용도였다. 물론 눈가리고 아웅이지만(...) 이런 경우 정부의 남편은 막대한 금전이나 높은 작위 등으로 보상을 받았다. 이런 보상에 만족하여 아내가 왕의 정부가 되는 것에 불만이 없거나, 오히려 기꺼워한 남자도 의외로 많았다고 한다(...) 물론 그런 관행이 있었다는 거지 '왕의 정부는 유부녀만 가능'이라고 정해진 법이 있었던 건 아니라, 미혼 여성을 정부로 둔 왕도 적지 않고, 유부녀 정부들 중에서도 눈가리고 아웅을 위해 법률상으로만 결혼한 경우도 많았다.

20세기 초반까지의 유럽 귀족들이 나오는 매체나 역사에서 ' 애인' ' 정부' '첩' 등은 거의 빠지지 않는다. 유명한 로얄 미스트리스로는 루이 15세의 정부인 퐁파두르 후작부인이나 뒤바리 백작부인이 있다.

대부분의 동양권은 이런 왕의 정부를 후궁으로 오해, 또는 후궁/첩과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다.[5] 로얄 미스트리스를 후궁으로 잘못 번역하는 경우도 있고, 정부도 일단은 '본부인 외에 관계하는 여자'이기에 첩과 혼동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첩은 정실보다 낮고 차별을 받을 지 언정 염연히 법적으로 인정받는 아내였지만 정부는 단순한 내연 관계라는 점에서 첩과 정부는 절대 동일시될 수 없다.

1.1.5. 기타

첩에 관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첩을 들이는 것이 합법적이거나 용인되었던 시기에 신분 높고 경제적 능력있는 남자가 첩을 들이지 않으면 지역사회에서 남자의 부인에게 그 '책임'을 물어서 '드세다', '투기가 심하다' 등 매우 나쁜 평가를 내렸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조선의 양반집의 경우 본부인이 나서서 일부러 첩을 들이는 놀라운 경우도 있었다. 조선 왕실에서 왕비가 첩인 후궁을 들이라고 국왕에게 먼저 조언한 사례도 있다. 이런 상황은 여권이 신장되면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일부다처제와 달리 축첩은 인정하는 동네가 많지 않고, 흔한 오해와 달리 이슬람 국가에서도 2번째 아내가 아닌 본처보다 낮은 첩을 들이는 것은 인정되지 않는다. 과거 이슬람권에서는 여자 노예라는 이름으로 하렘에 사실상의 첩들을 들였지만,이것도 이슬람권 전체에 보편화된 풍습은 아니고, 오직 튀르크 문화권에서만 발견되는 풍습이다. 그것도 왕이나 대영주 정도나 할 수 있던 일이었고, 애초에 하렘제도의 시작은 성적쾌락이 아니라 공평한 경쟁(?)을 통한 유능한 자식의 계승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현대 대부분의 순니파 이슬람 국가에서 인정하는 것은 최대 4명까지의 평등한 정처이다.

일부일처다첩제에 익숙한 한국의 시각에서는 둘째 이하 부인들을 곧바로 첩으로 간주해 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상당한 결례이므로 대할 때 주의가 필요하다. 그리고 부유층이 아닌 다음에야 생활비가 쪼달려서라도 2명 이상과 혼인하는 경우가 잘 없다고 한다. 또한 이슬람 사회에서 다처제를 인정하는 중요한 이유는 이혼을 매우 부정적으로 본다. 부인이 배우자로서 만족스럽지 않거나 자식을 낳지 못하더라도 그 부인을 내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대신 쿠란에는 이러이러한 사정이 있으면 이혼할 수 있다고 적혀있기는 하다.

최근에는 이슬람 사회들도 인식의 변화로 두 번째 아내를 들이는 경우보다는 이혼과 재혼이 늘어나고 있으며, 특히 젊은 나이일 수록 여러 명의 부인을 거느리는 남성의 비율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 시간이 더 지나면 일부일처가 완전히 확립될 지도 모르는 상황. 물론 대다수 가정에서는 일부일처를 지키고 있다. 이렇게 일부다처가 점차 줄어드는 이유는 쿠란에 모든 아내들을 동등하게 대하지 않으면 결혼을 취소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기 때문으로, 동등하게 대하다 = 모든 아내 및 처가들에 경제적 부담을 똑같이 들여야 한다 = 경제력이 탄탄해야 한다로 직결되기 때문에 아무리 일부다처가 허용이 되는 아랍권에서도 경제가 그럭저럭인 남자는 아내를 여럿 두기가 어렵다. 천하의 만수르조차 아내는 소박(?)하게 둘밖에 안 두는 세상이다. 심지어 아내가 둘이나 되는 것도 정략결혼이라는 말도 있다.

남자 첩은 남첩(男妾)이라고 한다. 첩(妾)이라는 한자가 여성을 전제하고 만들어진 글자이기 때문에 (해당 글자의 부수부터 (계집 녀)이다.) 남자 첩일 경우 첩 앞에 (사내 남)을 꼭 붙여줘야 한다. 옛날엔 남성 중심 사회였기 때문에 남첩은 비공식적이었다. 여자가 남첩을 두는 경우는 희귀했다. 당시 사회 관념상 여성이 대놓고 남첩을 두는 것은 불가능했다. 드물게 있는 사례는 신분이 높고 권력이 강한 여성인 경우다. 황제로 즉위한 측천무후, 폭군 남동생의 비호를 받은 산음공주 등의 사례로, 본인이 사회 통념을 거슬러도 될 만큼 힘이 있거나 혹은 통념에 반하는 행위를 하더라도 무마시켜 줄 만한 뒷배경이 있었으니 남첩을 둘 수 있었던 이들이다. 남자가 동성애 상대로 남첩을 두는 경우도 있었다. 고위 인물의 남첩은 남총이라고 한다.

1.2. 과거에 여성이 자신을 낮춰 부르던 일인칭 대명사

첩(妾)은 궁중이나 민간에서 여성이 자신을 낮춰 부르던 말이다.

첩(妾)은 원래 여자 노비를 가르키는 말이었다. 높은 신분의 여성 또한 군주 앞에서 자기를 첩으로 지칭하며 낮춰불렀다. 첩의 반대말은 남자 노비를 뜻하는 신(臣)이다. 그래서 신첩(臣妾)은 남자 백성과 여성 백성을 합친 신하를 강조하는 백성을 뜻하는 말이었다. 신민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조선왕조실록부터 구한말의 기록까지 실제적으로 신첩은 이러한 뜻으로 쓰였다. # 조선왕조실록에서 ‘신첩’을 검색해보면 태조~순종 때까지 일관되게 신민, 신하의 뜻으로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관들(남자)인 ‘우리 신첩이~’(저희 백성은, 저희 신민은~)이라며 자칭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흔히 왕비나 후궁이 중국 사극에서 군주 이상에게 신첩을 쓰고, 한국 사극에서는 군주에게 쓰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극에서 쓰이는 법칙 중 하나일 뿐이다. 신첩은 사극에서 쓰는 것처럼 일상에서 쓰이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중국이나 한국, 일본 등에서 첩, 소첩, 첩신(妾身) 등이 주로 쓰였다. 예를 들면 고려시대의 기록인 동국이상국집에서 왕족 여성이 군주 이상(태후, 왕후, 왕)에게 첩으로 자신을 지칭한다. 출처

첩인 여자들만 자신을 소첩이라고 낮춰부르지 않는다. 정실 왕비(왕후)인 인현왕후 숙종과 연애 편지로 밀당을 할 때, 자신을 소첩이라고 부르곤 했다. 이는 중국에서도 그러하다. 현대 대한민국에선 이런 호칭을 쓰는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무협지에서도 종종 이런 표현을 볼 수 있다.

일본에서 쓰는 1인칭인 와라와를 첩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은데, 고풍적인 여성의 1인칭이라는 분위기만 놓고 보면 그럴싸 하지만, 저 단어가 자신을 낮춰 부르는 표현이 아니다보니 의미로 놓고 보면 적절치 않다는 지적도 있다.

2.

한약재를 포장하는 봉지를 세는 단위이다.

현대에 와서 많은 혼란을 빚는 단위이기도 하다. 1첩이 1회 복용분인데, 2첩이 3회 복용분으로 1일분이 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한약을 달이는 방식에 있는데, 먼저 1첩을 달여 1회 복용하기를 2번 하면 이미 한 번씩 전탕한 약재가 2첩이 나온다. 이 2첩을 합쳐서 다시 한 번 전탕하는 것이 3회차 복용분이다. 초탕시 약 성분이 전부 다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고 좀 남기 때문에, 반 정도 추출된 것으로 간주하고 초탕한 약재 2첩을 합쳐 재탕하면 다시 1회 복용분이 나오는 것이다.

1제는 20첩으로 10일분(총 30회)이다.

3.

책. 사진첩이나 수첩의 첩이 이 한자를 쓴다.

4. 인터넷 유행어

적대적 커뮤니티 유저를 지칭하는 첩자의 줄임말.

2000년대에는 와우 갤러리처럼 그냥 '첩', '첩첩' 식으로도 쓰였지만 2010년대 이후로는 근첩, 펨첩, 캎첩( 모바일 게임 등 공식카페가 있는 경우 이를 디시 등지에서 주로 지칭)처럼 커뮤니티 이름 뒤에 붙여 쓴다.


[1] 목격한 당일에 살해한 경우에 한해서이고, 그 날이 지나서 죽인 경우는 살인죄가 적용됐다. 조선 정조는 증거도 없이 단지 의심만으로 첩과 (첩의 불륜 상대라고 의심받은) 남자를 죽인 사람도 무죄 판결하기도 했다. [2] 고려 현종의 경우 자매 셋을 왕비로도 얻을 정도. 이것은 외할아버지가 강제로 결혼을 시킨 것으로써 다소 정상적인 결혼은 아니었다. [3] 사실 당시 대통령인 박정희도 청년기때는 김호남과 억지로 결혼생활하는것이 싫어서 이현란을 속이면서 불륜을 저지른 전력이 있었고, 유력 차기 대권주자였던 김대중은 서자였다. 이렇게 유력 정관계 인사들도 구리구리한 일이 뒷소문으로 나돌아다녔으니 이걸 빌미로 당당하게 나서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4] 무슨 품계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원나라는 후 - 비 - 빈 - 재인(혜종때만 사용)으로 비빈의 위계를 나눴는데, 비, 빈, 재인중 하나였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5] 일본은 로얄 미스트리스는 공첩(公妾), 총희(寵姬)로 번역하되 후궁을 포함한 첩은 측실(側室)로 표기, 정부 같은 내연 관계의 인간은 애인(愛人)으로 번역한다. 그러나 일본도 은하영웅전설 및 양산형 유럽풍 궁정물에서는 정부의 자식을 사생아가 아닌 서자로 표기하거나 서자와 동일시하는 묘사가 많아 완전히 고증을 지키진 않았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