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7 16:43:25

왕숙

위서(魏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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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肅
195년 ~ 256년
1. 개요2. 정사 삼국지
2.1. 동양 철학사에서 왕숙의 위치
3. 삼국지연의4. 미디어 믹스

1. 개요

후한 말, 삼국시대 나라의 인물이며 자는 자옹(子雍)으로 서주 동해군 담현(郯, 지금의 장쑤성 린이시 탄청현 인근) 사람. 위의 중신인 왕랑의 아들, 왕원희, 왕순, 왕건, 왕개의 아버지이며 진 무제 사마염의 외조부이다.

2. 정사 삼국지

아버지 왕랑이 회계태수이던 때에 태어났다. 18살에 형주학파의 대학자 송충에게서 태현경을 배웠고, 그 영향을 받아 신비주의나 정현학파의 참위적 해석을 배격하고 가규와 양웅 등의 현실주의를 계승하게 되었다. 조진 사마의가 230년에 촉을 공격할 때 시세 부득함을 주장하며 군세를 물리도록 주장하기도 했고, 255년 관구검 문흠의 반란 때는 사마사가 그들을 토벌하기 전에 특별히 왕숙과 상담을 하기도 했다. 그 뒤 사마소의 권세를 확립하기 위해 조모에게 조서를 내릴 것을 종용하기도 했다. 후에 딸인 왕원희가 사마소의 아내가 되었기에 더욱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었다.

중령군에 임명되고 산기상시가 더해졌으며, 중병에 걸리자 의사들이 치료할 수 없다고 했다. 부인이 유언을 물어보자 왕숙은 주건평이 자신을 위해 관상을 보았는데, 70은 살 수 있고 관직은 삼공에 이른다고 했지만 모두 실현되지 않았으니, 자신이 무엇을 생각할 수 있냐고 했다.

일주서를 쓴 공조(孔晁)가 왕숙의 학문을 계승한 왕숙학파였다.

2.1. 동양 철학사에서 왕숙의 위치

처음에 왕숙은 가규와 마융의 학문을 좋아하고 정현의 학문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학설의 차이를 채집하여 《상서》,《시경》,《논어》,《주례》,《예기》,《의례(儀禮)》,《좌씨전(左氏傳)》에 주해(注解)를 했고, 부친 왕랑이 지은 《역전(易傳)》을 선택하여 바르게 정리하여 모두 학관에 진열했다.

그가 논박한 조정의 제도, 전제(典制),종묘,상기(喪紀), 경중(輕重) 등도 총 백여 편이 있다. 당시 낙안(樂安)의 손숙연(孫叔然)이 정현의 문하에서 학문을 받았는데, 사람들은 동주(東州)의 큰 유학자라고 했다. 조정에서는 그를 불러 비서감으로 임명했지만 나가지 않았다. 왕숙이 《성증론(聖證論)》을 편찬하여 정현의 단점을 풍자했을 때, 손숙연은 그것을 반박하여 정현을 변호했다.
정사 삼국지 왕숙전

연의에서는 나오진 않으나 실제로는 집안 전통대로 뼛속까지 경학가여서 많은 경전에 주를 달은 바 있다. 왕숙은 형주의 대학자 송충에게 사사한 당대의 석학이기도 한데, 유교사에서 그의 이름은 그가 경전에 달았던 많은 주석과 그의 저서 때문에 꽤 오랜 세월 뜨거운 감자였다. 이미 젊은 시절부터 수많은 경전에 주를 단 그는 정학(정현의 학문)의 열혈 안티였는데, 두 사람 다 금문과 고문을 종합하는 입장이었지만 정현이 금문을 채택한 곳에서는 고문을 채택하고, 정현이 고문을 채택한 곳에서는 금문을 채택했다 할 정도로 왕숙은 그와 철저하게 방향성이 달랐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천년의 떡밥이 되는 공자가어(孔子家語)와 공총자가 등장한다. 전자는 본래 한서에 기록이 있었지만 유실된 고서며 공총자는 기존 경전들의 내용을 인용해 편집한 책인데, 둘 모두 정현의 학설을 완전히 뒤집는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기에 왕숙이 학문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정현의 학설에 반대해 ' 상서', ' 시경' 등에 주석을 달아 이미 실전된 공자가어, 공총자 등의 책을 자신의 주장에 유리하게 위조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는 주장이 후대에 나왔다.[1]

사마씨와의 관계에서 얻은 정치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왕숙의 학문은 일가를 이루어 '왕학'이라 명명되고 그의 해석이 학관에 채택되었으며, 과거 조상 정권에서 하안과 그의 현학이 그러했듯 그와 그의 학문은 사마씨 정권의 학문/사상적 뿌리가 되었다. 왕숙이 과거 조상 일파를 비난하고, 또한 트집이 잡혀 면직된 경험이 있었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2] 그 행동의 가부가 어쨌든 그의 학문은 사마씨의 비호를 받아 조위부터 서진까지 성행하였으나 동진 시기에 사마씨의 권력이 점점 줄어들면서 쇠퇴하였다.

그가 벌인 경전 개찬의 경우엔 날조의 정도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다소의 개찬일 뿐인데 후에 완전 날조라고 했다는 설도 있고, 당시의 주류라 할 수 있었던 정현학파와 다른 각도로 선진(先秦)문헌을 접하고 집대성한 것을 높히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어쨌든 경서의 위조가 되었던 개찬이 되었던 쉬운 게 아닌 만큼 훌륭한 재능을 지닌 학자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왕숙이 정현과는 다른 논설을 편 것과 이런 경전의 개찬은 통하는 부분이 있다. 왕숙이 추종한 이론은 성인의 말씀이라도 비판하거나 고칠수 있다는 왕충의 논형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왕숙은 왕충의 정통 계승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왕숙이 반대한 정현은 마융한테 사사한 학파인데 정현은 대공사회를 논하면서 군주가 공익을 위해 존재하고 세습 대신 선양을 통해 현인에게 후계를 넘기는 사회가 이상적이지만 이러한 사회는 현실에선 절대 성립할 수 없다는 주장을 폈으며, 그 대안으로 대공 사회의 현실적 대안인 소공 사회를 논하면서 권위에 대한 순종을 기반으로 하는 참위론 위주의 주석학을 사용했다. 또한 유씨의 한나라를 옹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참위설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군주의 신이한 탄생 신화 등의 이야기나 공자의 신화화를 경전 해석에 이용했다. 이는 환관과 외척에 의존하는 황제의 정치를 비판하면서도 황제권은 옹호하는[3] 낙양과 인근 수도권 청류 사족들의 분위기를 대변하던 것이었다.

반면 왕숙이 추종한 왕충의 논형은 후한 말에는 채옹 같은 학자들이 이어받았고 위진시대에도 꽤나 유행한 책으로, 공자를 신격화한 기존의 흐름에서 벗어나 공자도 옛날 사람이고 하던 말에 모순이 있으니 취할건 취하고 틀린건 비판하자는 입장을 취했으며, 기존 구습에 대한 타파나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체제를 주장하는 당시로서는 아주 혁신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사상은 황제권의 옹호와 유씨 황실 신성화 재구축을 주장하던 정현학파와 달리, 황제권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와 저항정신의 중시라는 당시 강경 청류파의 정치의식을 대변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때문에 정현이 추구하던 참위론과 재이설이란 한 때의 메인스트림 또한 미신이랑 다를바 없다고 비판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후한 말부터 위진시대에 이렇게 논형의 사상을 이어받은 채옹이나 왕숙이 적극적으로 출사해 많은 업적을 남기면서 마융이나 정현류의 학문에 반발하는 흐름, 왕충의 이론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경전의 재구축 같은 논의가 나올수 있었다는 것이다.

3. 삼국지연의

연의에서는 경학가의 모습보단 주로 군사적인 문제를 조언하는 역사적 장면만 나오는터라 의외로(?) 군략가 포지션이다. 첫 등장은 99화로 조진의 한중원정 당시 장마가 들어 위군에 곤란에 처했을때 후퇴를 주장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이후로는 태위(太尉)[4]의 직책에 올라 이제 막 제위에 오르려는 조모에게 조정에서의 예절을 조언하기도 하고 사마씨에게 군사적으로 조언하는 역할로도 등장하는데, 관구검의 난 당시에는 관우의 뒤를 여몽이 친 고사를 따르라고 사마사에게 조언했다. 이후에는 사마염이 황제위에 오를 때 사마염이 왕숙의 외손자라고 잠시 언급된다.

4. 미디어 믹스

파일:external/kongming.net/272-Wang-Su.jpg
삼국지 9, 10, 11
파일:external/san.nobuwiki.org/0047.jpg
삼국지 12, 13, 14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후기에 등장하기 때문에 비중은 제로에 가깝지만, 영웅집결 시나리오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역사대로라면 왕숙정도의 인재는 차고 넘칠만큼 있는 위나라에서 존재감이 거의 없지만, 영웅집결 시나리오에서는 왕랑의 아들인만큼 왕랑군 소속이 되기 때문. 70 후반~80까지도 찍는 지력/정치만 해도 우번 다음 자리를 놓고 다투며, 70대 중반의 매력으로 우번의 아들인 우사와 함께 영웅집결 왕랑군의 주된 등용 셔틀이 된다. 왕랑, 우번 모두 지력, 정치에 비해 매력이 구린편이기 때문. 삼국지 8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47/26/81/76. 조영, 혼란을 가지고 있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35/21/80/78/76에 특기는 농업, 상업, 혼란, 반박, 명사 5개. 내정, 등용 쪽으로 쓰임새가 많다.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36/22/75/78/71로 특기는 무특기다.

삼국지 12에서의 일러스트는 오른손으로 묶여진 병서를 들어 내밀고 있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36/22/76/78. 특기는 상업 2, 문화 2, 교섭 3, 언변 5. 전수특기는 언변이고 전법은 동요도발이다. 병과적성은 C/C/C다. 후반기 무장임을 감안하면 좋은 문관이다. 하지만 플레이어 대부분 왕숙을 부하로 데리고 있으려는 이유가 따님을 미리 꼬시려는 밑밥 작업이 강하다.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35, 무력 24, 지력 76, 정치 78, 매력 74로 전작에 비해 무력이 2 상승한 대신 통솔력이 1 하락했다. 개성은 동지, 학자, 주의는 예교, 정책은 태학 Lv 3, 진형은 방원, 전법은 업화, 혼란, 친애무장은 송충, 혐오무장은 하안이다.


[1] 다만 공자가어는 이후 목간본이 발견되어 100% 왕숙의 주작은 아니라고 밝혀졌다. [2] 여담이지만,이 사마씨/왕씨 인척관계는 양측의 안티들에게 훌륭한 깔 거리를 남겼다. 사마씨 안티들은 주작질도 서슴치 않는 엉터리 학자와 사돈 맺은데서 사마씨의 도덕 수준이 빤히 보인다고 까고, 왕숙 안티들은 순수한 학문적 성취가 아닌 사마씨 권력과의 인척관계로 일가를 이룬 왕숙을 어용학자라 비난한다. [3] 즉 군신공치와 군군신신을 중시하는 [4] 태위란 사공, 사도와 함께 최고위 관직인 3공의 하나로 군사적 명예직이라 할 수 있는데, 연의에서는 삼공 중 태위만 못해먹은 왕랑도 태위로 설정하고 그 아들인 왕숙도 태위로 세우고 있다. 다소 의도적인 장치다. 다만 연의에서는 왕숙이 왕랑의 아들이라고 직접적으로 나오는 장면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