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17:52:19

허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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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c3d89d><tablebgcolor=#c3d89d> 파일:허균 수결.svg 허균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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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3d89d><colcolor=#000> 소속 <colbgcolor=#fff,#1f2023> 허씨 5문장 · 북인 · 선무원종공신 · 이달의 문화인물
가족 아버지 허엽 · 이복 형 허성 · 동복 형 허봉 · 동복 누나 허난설헌
이복 누나의 남편 우성전 · 동복 누나 허난설헌의 남편 김성립 · 조카 김희윤
매형 김성립의 이종사촌 신흠 · 딸 소훈 허씨의 남편 폐세자 이지
관련 인물 스승 ( 이달 · 사명당 · 류성룡)
제자 ( 서양갑 · 이식 · 기준격)
친구 ( 강변칠우 · 이매창 · 박엽 · 류몽인)
존경하는 인물 ( 정도전 · 이순신)
본이 되는 인물 ( 방회 · 이지)
작품 내 등장인물 ( 이달 · 홍길동)
주군 ( 선조 · 광해군)
관련 장소 허균 일가의 생가와 외갓집 강릉 · 허균의 친가 한양 건천동
허균 일가의 묘소 용인시 · 허난설헌의 묘소 광주시
친구 강변칠우의 거주지 여주시 · 이매창과 교류한 장소 부안군
관련 사건 임진왜란, 정유재란 · 계축옥사
작품 홍길동전 · 도문대작 · 그 외 작품
기록에서의
모습 및 행적
노비 · 특징 · 생애 · 창작물
평가 평가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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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허균 수결.sv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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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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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인
北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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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인
선조
(1591 ~ 1608)
서경덕 조식 최영경 정인홍 이산해
김면 이발 홍여순 곽재우 이이첨
대북 (광해군파) 소북 (영창대군파)
정인홍 이산해 정구 류영경 박승종
홍여순 이이첨 기자헌 류희분 남이공
광해군
(1608 ~ 1623)
대북
육북 중북
이산해 이이첨 정인홍 정구 곽재우
허균 기준격 정창연 류몽인 정온
대북 소북
골북 청북 (남당) 탁북 (유당)
홍여순 류희분 남이공 김신국 류영경
인조
(1623 ~ 1649)
남이공 정창연 정온 김신국 김세렴
남인 서인
조선의 붕당
( 관학파 · 훈구파 · 사림파 · 동인 · 서인 · 남인 · 북인 · 소론 · 노론 · 개화당 · 수구파 · 정동파 · 위정척사파 · 급진개화파 · 온건개화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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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씨 5문장
허엽 허성 허봉 허난설헌 허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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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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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1월
신윤복
2월
안향
3월
이상화
4월
석주명
5월
이익
6월
송흥록
7월
조철호
8월
윤봉춘
9월
한성준
10월
정태진
11월
최제우
12월
이순신
1999년
1월
이중섭
2월
혜초
3월
유형원
4월
최한기
5월
김창숙
6월
권율
7월
맹사성
8월
황현
9월
김시습
10월
최세진
11월
정부인 안동 장씨
12월
이승훈
2000년
1월
남궁억
2월
나혜석
3월
김육
4월
서경덕
5월
진감국사(혜소)
6월
하규일
7월
정인보
8월
김좌진
9월
김수영
10월
류희
11월
김창하
12월
장승업
2001년
1월
김부식
2월
최용신
3월
강항
4월
함석헌
5월
지눌
6월
이병기
7월
이현보
8월
오세창
9월
허균 · 허난설헌
10월
설총
11월
의천
12월
송만갑
2002년
1월
정약종
2월
김환기
3월
이상재
4월
박두성
5월
박수근
6월
조지훈
7월
성삼문
8월
박효관
9월
김병연
10월
신숙주
11월
김승호
12월
손진태
2003년
1월
안확
2월
양주동
3월
이동백
4월
양팽손
5월
정지용
6월
정몽주
7월
김장생
8월
박세당
9월
유정
10월
월명
11월
이인성
12월
유길준
2004년
1월
조희룡
2월
신흠
3월
이항로
4월
이경석
5월
의상
6월
백광홍
7월
이첨
8월
김창조
9월
조헌
10월
최항
11월
장욱진
12월
박두진
2005년
1월
정정열
2월
이예
3월
강경애
4월
신동엽
5월
임윤지당
6월
김종직
7월
강정일당
8월
이규보
9월
나철
10월
이승휴
11월
효명세자
12월
최북
※ 선정 당시 기관명은 문화부(1990~1993) → 문화체육부(1993~1998) → 문화관광부(1998~2005)였다.
이달의 문화인물(1990-1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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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a52a2a><tablebgcolor=#a52a2a> 파일:이순신 수결 흰색.svg 이순신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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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52a2a><colcolor=#fff> 소속 <colbgcolor=#fff,#1c1d1f> 삼도수군통제사 · 선무공신
가족 아내 방수진
장남 이회, 차남 이예, 삼남 이면
맏형 이희신의 아들 이완 · 딸의 시아버지 홍가신
먼 친척 형 이광 · 19촌 이이
후손 ( 이봉상 · 그 외 후손)
관련 인물 친구 류성룡 · 류성룡의 제자 허균
육군 동료 ( 이일 · 신립 · 권율 · 이경록)
수군 동료, 부하 ( 이억기 · 권준 · 김돌손 · 김완 · 김억추 · 나대용 · 무의공 이순신 · 배흥립 · 안위 · 오계적 · 이영남 · 이운룡 · 정운 · 준사 · 최호 · 송희립 · 우치적 · 어영담 · 황세득 · 송여종 · 김인영 · 신호 · 원균 · 배설 · 이언량 · 류형 · 진무성)
주군 ( 선조 · 선조비 의인왕후 · 분조 광해군)
생애 생애 · 전투 관련 · 여담
관련 장소 이순신이 태어난 곳 한양 건천동 · 이순신 일가의 생가 아산
이순신의 묘소 장군묘 · 이순신의 사당 현충사
명량해전이 벌어진 곳 명량수도 · 노량해전이 벌어진 곳 남해 관음포
관련 사건 탄신일 · 니탕개의 난 · 녹둔도 전투 시전부락 전투 · 이몽학의 난 · 백의종군
임진왜란, 정유재란 해전 ( 옥포 해전 · 합포 해전/적진포 해전 · 사천 해전 · 당포 해전 · 당항포 해전 · 율포 해전 · 한산도 대첩 · 안골포 해전 · 장림포 해전 · 절영도 해전 · 초량목 해전 · 부산포 해전 · 웅포 해전 · 장문포 해전 · 명량 해전 · 절이도 해전 · 왜교성 전투 · 노량 해전)
관련 물건 쌍룡검 · 백원 주화 · 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
작품 장계별책 · 난중일기 · 이충무공전서
기록에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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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 성웅 이순신(1962) · 성웅 이순신(1971) · 난중일기(영화) · 칼의 노래 · 천군(영화) · 명량 · 한산: 용의 출현 · 노량: 죽음의 바다 · 칼의 노래(뮤지컬)
파일:이순신 서명.svg 파일:이순신 수결 흰색.svg }}}}}}}}}

한국을 빛낸 백명의 위인들
등장인물 및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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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적으로 언급된 인물/단체
단군
동명성왕 온조왕
이사부 백결선생 의자왕 계백
김관창 김유신 문무왕 원효
혜초 장보고 고왕 강감찬
서희 정중부 최무선 죽림고회
김부식 지눌 의천 이종무
정몽주 문익점 최충 일연
최영 황희 맹사성 장영실
신숙주 한명회 이이 이황
신사임당 곽재우 조헌 김시민
이순신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사육신 생육신 논개 권율
홍길동 임꺽정 삼학사 박문수
한석봉 김홍도 김병연 김정호
영조 정조 정약용 전봉준
황진이 홍경래 김옥균
안중근 이완용 윤동주 지석영
손병희 유관순 안창호 방정환
김두한 이상 이중섭
간접적으로 언급된 인물/단체
민족대표 33인 김좌진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
기울임체 는 부정적으로 언급된 인물이다.
[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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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許筠| Heo Gyun
파일:허균 표준영정.jpg
허균 표준영정[1]
출생 1569년 12월 10일
(선조 2년, 음력 1569년 11월 3일)
조선 강원도 강릉대도호부 사천 애일당
(現 대한민국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사천면 판교리 교산)[2]
사망 1618년 10월 12일
(광해군 10년, 음력 1618년 8월 24일)
(향년 48세, 48년 10개월 2일 / 17,838일)[3]
조선 한성부 서쪽 저자거리
(現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부)
사형 ( 거열형)
묘소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맹리 산61
학력 손곡 이달의 문하 ( 1574년)[4]
소과 초시 급제 ( 1585년)
사명당의 문하 ( 1586년)
서애 류성룡의 문하 ( 1586년)
증광시 생원 복시 급제 ( 음력 1589년 3월 17일)
문과 초시 입격, 복시 을과 급제 ( 음력 1594년 2월 29일)
문과 중시 장원 ( 음력 1597년 4월 2일)
직업 관료, 외교관, 학자, 의병장, 문장가, 비평가, 사상가
서명 파일:허균 수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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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양천(陽川)[5]
국적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공훈 선무원종공신 1등 (宣武原從功臣 一等, 1605)
위성원종공신 2등 (衛聖原從功臣 二等, 1613)[6]
최종
관등
의정부 좌참찬
(議政府 左參贊)
균(筠)
단보(端甫)
교산(蛟山), 학산(鶴山), 성소(惺所), 성수(惺叟), 백월거사(白月居士)
종교 유교 (성리학), 불교, 도교, 천주교 추정[7]
붕당 [[대북|{{{#!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001; font-size: .8em"
작품 홍길동전(洪吉童傳)》
도문대작(屠門大嚼)》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국조시산(國朝詩刪)》
《이 통제사 공신록권(李統制使 功臣錄券)》[8]
《사명대사 석장비명(泗溟大師 石藏碑銘)》
《을병조천록(乙丙朝天錄)》
《한정록(閑情錄)》[9]
부모 부: 허엽 (許曄, 1517 - 1580)
아버지의 정부인: 한이정 (韓二貞, 1515 - ?)[10][11]
아버지의 재취부인이자 친모 : 강릉 김씨 (? - ?)
형제
자매
이복 누나: 허묵석 (許墨石, 1544 - ?)[12]
이복 누나: 허대정 (許大貞, 1546 - ?)[13][14]
이복 형: 허성 (許筬, 1548 - 1612)
동복 형: 허봉 (許篈, 1551 - 1588)
동복 누나: 허난설헌 (許蘭雪軒, 1563 - 1589)
배우자 전처: 안동 김씨 (1571 - 1592)
후처: 선산 김씨 (? - ?)
김씨
송성옥
추섬
옥매
자녀 전처의 아들: 이름 미상 (1592 - 1592)
전처의 아들: 이름 미상 (? - 1618)[15]
전처의 장녀: 이사성의 처, 양천 허씨 (? - ?)[16]
전처의 차녀: 양천 허씨 (? - ?)
후처의 딸: 소훈 허씨[17] (? - ?)
후처의 아들 : 허굉 (許宏, 1606 - ?)
경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언어별 명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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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3d89d> 한국어 허균
영어 Heo Gyun
이탈리아어 Hŏ Kyun
러시아어 Хо Гюн
중국어 許筠
일본어 きょ いん
ホ・ギュン
}}}}}}}}} ||

1. 개요2. 가족3. 노비4. 특징5. 생애6. 어록7. 평가8. 사상9. 작품10. 기타11. 대중매체에서12. 관련 다큐13. 관련 단체

[clearfix]

1. 개요

조선 중기의 관료, 외교관, 학자, 의병장, 문장가, 비평가[18], 사상가.

호는 교산(蛟山)·성수, 본관은 양천.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정치 쪽으로는 뛰어나지 않았지만 허구의 이야기를 꾸며내며 망상하는 것에는 탁월한 재능을 지녔다고 하며 생전 문장, 시, 소설 등 문집으로 이름이 조선 명나라에서 널리 알려졌으며, 아버지 허엽, 이복 형 허성, 친형 허봉, 친누나 허난설헌과 함께 허씨 5문장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자유분방하고, 사회비판적이고, 다양한 사상들을 믿고,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과 거리낌없이 교류했으며, 조선에서 천지간의 한 괴물이라고 비판을 받았다. #

조선 시대 광해군 때 광해군과 사돈 관계[19]까지 갈만큼 잘 나갔으나, 권신 이이첨 막후에서 종사하던 중 인목왕후를 싫어하여 몇 차례에 걸쳐 암살을 기도한 것이 유명하다. 그러나 이 암살 기도 때문에 당시 집권 세력 광해군 북인에게 반역 혐의를 쓰게 되어 거열형을 당하고 역적이 되었다. 역적이 되면서 가문이 풍비박산나고 조선 시대 내내 기피 대상이 되었다. 조선이 망할 때까지 복권받지 못하다가 1999년 4월 23일 양천 허씨 종친회가 가문 차원에서 복권했다.[20] #

허균을 연구한 대한민국 역사학자 이이화는 허균을 "인간을 사랑한 사람... 차별 없는 세상, 약자가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꿨다. 인본주의자이고 자유주의자다."라고 높이 평가하고 대한민국 행정안전부에서 "시대를 앞서간 비운의 천재 허균"이라고 평가하는 등 현대 들어서 한국에서 재평가되었다. # #

2. 가족

동인의 실세인 허엽의 아들로 형제로는 형인 허성, 허봉과 누나인 허난설헌이 있다. 동서 분당을 일으켰던 김효원이 후처인 김씨의 아버지이고 장인이었다.

아버지 허엽의 호는 '초당'인데 '초당 두부'를 고안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허엽은 널리 알고 박식했지만 정작 학문의 깊이는 얕다는 비웃음을 주변 유학자들로부터 받았다고 한다. 신분을 초월하여 누구에게나 친절하였고 온화한 인물이었던 퇴계 이황마저도 허엽을 가리켜 "만약 그 친구가 학문을 하지 않았다고 실토한다면 참 거짓없는 사람이라 할텐데''라고 비꼰 적이 있을 정도다.[21]

허엽은 율곡 이이와 정치적 성향이 달랐기에 서로 크게 대립했는데 오죽하면 허엽의 별명이 '묘지(卯地)'[22]였을 정도. 허엽의 영향을 받은 건지 허균의 작은 형 허봉도 이이와 대립했는데 병조판서로 부임한 이이를 탄핵하다가 유배당할 정도였다.

허균의 가족들은 모두 문장에 재능이 있어 당대에 허균 가족을 가리켜 '허씨 5문장'[23]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집안에 마가 꼈는지 하나같이 최후가 좋지 못하였는데 허봉은 종성군까지 유배를 갔다가[24] 풀려나 방랑하다가 38세가 되던 해에 요절했다. 허엽은 말년에 경상 감사로 나갔다가 지나치게 호색하였고 건강이 좋지 않아지게 되어 약을 복용한 뒤 행정을 괴이하게 하여 결국 관직에서 해임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상주에서 객사했다.

허난설헌은 널리 알려져있다시피 고생 끝에 요절하였으며 허균은 반역죄로 거열형을 당했다. 그나마 장남인 이복형 허성이 좀 낫지만 임진왜란 직전에 일본도 다녀왔고[25] 전란 중에 고생했는데 훈명(공있는 신하에게 주던 칭호)도 받지 못한 채 죽었다.[26] 다만 허성은 1610년 광해군이 생모 공빈 김씨를 추숭하려 할 때 반대 상소를 올린 것 때문에 대간의 탄핵을 받고 한성부 4대문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서울 근교 선영이 위치한 광주부에서 은거하면서 조정에 상소를 올리는 등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1612년 음력 8월 6일 임시 거처에서 병사했다. #

허균은 동복 형제 허봉과 허난설헌과 절친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허균의 저서 성소부부고에서 허균은 허봉을 형님 #, 허난설헌을 자씨 # 혹은 누님 #이라고 불렀다. 이후 허봉과 허난설헌의 사망 이후 형님과 누님을 언급하면서 죽음에 대한 애통함을 여러번 표현한다.

반면 이복 형 허성은 나이차가 있어서인지 거리감을 유지했다. 저서 성소부부고에서 허균은 허성을 형이라 부르는 대신 "사형"이라고 부르는 등 존칭으로 부른다. #

3. 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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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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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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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어록

천하에 두려워해야 할 바는 오직 백성일 뿐이다.

홍수나 화재, 호랑이, 표범보다도 훨씬 더 백성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항상 업신여기며 모질게 부려먹음은 도대체 어떤 이유인가?
ㅡ 《성소부부고》 제11권 호민론 #
국가를 다스리는 사람과, 함께 하늘이 맡겨 준 직분을 다스릴 사람은 인재(人才)가 아니고서는 되지 않는다. 하늘이 인재를 태어나게 함은 본래 한 시대의 쓰임을 위해서이다.

그래서 인재를 태어나게 함에는 고귀한 집안의 태생이라 하여 그 성품을 풍부하게 해주지 않고, 미천한 집안의 태생이라고 하여 그 품성을 인색하게 주지만은 않는다.
ㅡ 《성소부부고》 제11권 유재론 #
남녀간의 정욕은 하늘이 준 것이고, 윤리와 기강을 분별하는 일은 성인의 가르침이다. 하늘은 성인보다 높으니, 차리리 성인의 가르침을 어길지언정 하늘이 준 본성을 거스를 수는 없다.
ㅡ 《순암집》 순암선생문집 제17권 / 잡저(雜著) 천학문답(天學問答) #
...슬픔이 일면 반드시 곡을 하는 것인데, 슬픔이 일어나는 것도 역시 단서가 여러 가지이지요... 모두 품은 생각이 있어서 운 것이지, 이별에 상심하고 억울한 마음을 품으며 하찮은 일로 해서 아녀자의 통곡을 흉내낸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시대는... 더욱 말세요, 국사는 날로 그릇되고, 선비들의 행실도 날로 야박해져서 친구들 사이에 배치되는 것도 갈림길이 나뉜 것보다 더하며, 어진 선비가 고생을 겪는 것도 비단 길이 막힌 것뿐만 아니어서, 모두 인간 세상 밖으로 도망해갈 생각을 하고 있으니 만약... 군자로 하여금 이 시대를 목격하게 한다면 어떤 생각을 품게 될는지 모르겠소. 아마도 통곡할 겨를도 없이, 모두... 돌을 끌어안거나 모래를 품고 투신 자살하고자 할 것이오.
ㅡ 《성소부부고》 제7권 통곡헌기 #

7.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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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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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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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기타

  • 홍길동전 때문에 거열형에 처해진 거라거나, 그냥 사약 받고 죽었다는 둥 잘못 알고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듯하다.
  • 조의제문에 대해 맹렬히 비난하며 김종직이 ‘조의제문’을 짓고도 노모 때문에 마지못해 세조의 조정에서 벼슬한 것처럼 처신한 것은 위선이었다고 비난한다.
  • 정도전을 존경했다 한다. 제자 기준격의 상소에 의하면 허균은 "한평생 정도전(鄭道傳)을 흠모하여 항상 ‘현인(賢人)’이라고 칭찬하였으며, 《동인시문(東人詩文)》을 뽑을 때에도 정도전의 시를 가장 먼저 썼다." # 그러나 성소부부고에서 정도전과 권근에 대한 론을 쓸 때는 정도전이 고려의 신하이면서도 이성계를 왕으로 세웠으므로 고려의 간신이며, 죄가 있어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비판하였다.
  • 부친 허엽의 친가인 한성부 건천동은 이순신의 생가이며, 스승 류성룡은 이순신의 친구이다. 그러므로 이순신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이순신을 존경했으며 스승 류성룡이 이순신을 등용했을 때 이순신을 "나라를 중흥시킨 큰 기틀"이라고 불렀다. # 그리고 1605년 음력 7월 실지 이춘영(李春英)을 대신해서 이순신의 공신록권(功臣錄券)을 쓴 적이 있다. #
  • 이지의 책 분서를 읽은 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허균이 1618년 즈음 엮은 <한정록> 제13권에서 언급된 내용이다.
나는 일찍이 바둑은 세상을 피할 수 있고 잠은 세상을 잊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바둑은 짝을 지어 밭을 가는 장저(長沮)ㆍ걸닉(桀溺)과 같아서 한쪽이 없으면 할 수 없지만, 잠은 바람을 타고 다니는 열자(列子)와 같아서 홀로 가고 홀로 올 수 있으니 아, 훌륭하다 희이(希夷 송(宋) 진박(陳搏)의 호)여, 잠의 뜻을 깊이 터득하였구나. 《이씨분서(李氏焚書)》
ㅡ 《한정록》 제13권 현상(玄賞) #
1615년 허균이 이지의 분서를 읽고 느낀 점을 저서 <을병조천록>에 쓴 적이 있다. 허균 문서의 허균의 사상 참조.
  • 평생을 친밀하게 지내며 벗 혹은 누이처럼 지내던 기생이 있었는데 바로 부안의 명기 이매창.[27] 그러나 남녀 관계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매창은 공공연하게 유희경에 대한 연모의 마음을 밝혔기 때문이다.[28] 허균도 이매창에게 보내는 편지에 육체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 지적 교류를 한 소울 메이트로 남은 것을 평생 자랑으로 삼았다.[29]
  • 허균의 문학 정신을 기리고 변화와 개혁의 시대인 21세기에 어울리는 문학인을 찾기 위해 강원일보와 허균·허난설헌선양사업회[30]가 1999년부터 " 허균문학작가상"이라는 문학상을 전국의 신인 및 기성 작가를 대상으로 수상했다. 2022년 시점 총 13개의 중편소설 작품들을 수상했다. 실제로 허균이 생전 강조한 것이 재능 발견과 인재 양성이었으니 허균의 사상에 걸맞은 문학상이라 할 수 있다.

11.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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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관련 다큐

  • 1995년 1월 21일 KBS에서 허균에 대한 다큐멘터리 <역사의 라이벌 11회 – 허균과 이이첨, 적인가 동지인가>를 방영했다.

  • 2000년 6월 3일 KBS에서 허균에 대한 다큐멘터리 <KBS 역사스페셜 – 조선왕조 기피인물 1호, 허균>을 방영했다.

  • 2008년 7월 5일 KBS에서 허균에 대한 다큐멘터리 <한국사전 48회 – 조선의 자유주의자 혁명을 꿈꾸다, 허균>을 방영했다.

  • 2014년 9월 20일 KBS에서 허균에 대한 다큐멘터리 < 역사저널 그날 43회 - 허균 능지처참 당한 날>을 방영했다.
  • 2020년 8월 15일에서 9월 10일 사이 <토크멘터리 역사>에서 허균의 일생과 작품을 시리즈로 다루었다. #

13. 관련 단체

  • 양천허씨대종회 #
  • (사)교산·난설헌선양회 #

[1] 동강 권오창 화백의 2014년작 표준영정으로, 강원도 강릉시 오죽헌 ·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영인본은 허난설헌생가터 사랑채에 있다. [2] 허균의 가족의 외갓집이다. [3] 세는나이로 50세. [4] 언제부터 이달의 가르침을 받았는지 다양한 추측이 있지만 허균이 5세 때 친누나 허난설헌과 가르침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5] 21대손이다. [6] 위성원종공신은 인조반정 이후 삭제되었다. [7] 1610년 천주교 책인 주기도문(主祈禱文) 12단을 조선에 가져왔으며 1616년 작품인 <을병조천록>에 의하면 허균이 " 하느님(天公)"을 믿었다고 하므로 천주교를 믿었다고 추정된다. 다만 현재로서는 허균이 천주교를 믿었는지의 여부는 추측의 영역인데 자세한 내용은 허균의 사상 참조. [8] 이순신의 공신록권을 말한다. 허균은 1605년 음력 7월 이순신의 공신록권을 지었다. <성소부부고> 참조. [9] 1618년 허균이 중국에서 은둔과 한적 등 도교 사상에 대한 글을 모은 책이며 옥사로 죽기 전 쓴 유서(類書)이다. [10] 임영대군의 외증손녀. [11] 왕실 족보인 선원록에 이름이 나와 있다. 한이정 [12] 왕실 족보인 선원록에 이름이 나와 있다. 허묵석 [13] 왕실 족보인 선원록에 이름이 나와 있다. 허대정 [14] 우성전의 처이다. [15] 허굉을 제외한 허균의 아들은 허균 사망 직후 모두 죽었다. [16] 이사성과 허균의 장녀의 아들 이필진이 허균이 사형당한 이후 허균의 작품 <성소부부고>를 간행했다. [17] 광해군의 아들 폐세자 이지의 후궁이다. [18] 문집인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는 호민론 등 허균의 사상을 정리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실제로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문학 비평서이다. [19] 정확히는 정실부인이 아니라 후궁이었지만, 세자의 후궁은 일반인의 첩과는 차원이 다르다. 광해군의 아들이자 세자였던 이지의 후궁이 바로 허균의 딸 허씨다. [20] 다만 정부수반이나 국가원수가 복권을 선언한 것은 아니므로 정부 차원에서 선언된 정식적인 복권은 아니다. [21] 다만 이황의 중인 컴플렉스는 감안하여야 할 것. [22] 무덤이 있는 묘지가 아니라 십이지에서 토끼(卯)로서 방위는 정동쪽이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십이지 항목 위에 있는 시계 사진에서 토끼가 어디에 있나 확인해 보자. 여기에 빗대 동인의 핵심이었던 허엽을 풍자한 표현이다. [23] 허엽, 허성, 허봉, 허난설헌, 허균. [24] 율곡 이이를 탄핵했다가 유배를 가게 되었던 3명의 동인 인사 '계미삼찬'의 한 사람으로 나머지 두 인물은 송응개 박근원. 그들은 이이를 탄핵했으나 당시 이이를 정치적으로 지원하던 선조는 오히려 그들을 유배보내었다. 형제가 이이와 대립했기에 허균 집안과 율곡 이이는 악연으로 맺어진 셈. [25] 조선 통신사로 간 김성일, 황윤길을 따라서 서장관으로 갔다. 돌아오고 나서 황윤길과 함께 왜침을 주장했다. [26] 허성의 졸기를 보면 허성이 죽자 광해군이 "훈명을 받지 못했는데 갑자기 죽었으니 제사를 지낼 때 필요한 물품을 지원해주자"고 말한다. 요절한 동복남매와는 다르게 환갑을 넘었다. [27] 국어 수업 시간에 꼭 배우는 '이화우 흩뿌릴 제~' 라는 시조를 쓴 기생이 맞다. '계랑'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28] 그런데 이매창과 유희경은 거의 아빠와 딸 정도로 나이 차이가 있었다. 자주 만나지도 못했는데도 정절을 지켰다고 한다. [29] <미쳐야 미친다>(정민, 푸른역사) 중 '2. 맛난 만남 - 산자고새의 노래' 참고. 138쪽부터. [30] 강릉의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을 관리하고 있는 단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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