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2 14:31:29

양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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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성립과 변천
2.1. 기준의 변화2.2. 양반과 귀족의 관계2.3. 붕괴2.4. 현대 한국어에서
3. 국반4. 현대인의 시각5. 여담6. 관련 문서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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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
양반()은 고려 조선의 지배계급으로, 귀족적 성격과 관료적 성격이 혼합된 상류 신분을 가리킨다.

2. 성립과 변천

양반은 고려 초인 976년 경종 1년 전시과를 기점으로 하여, 조선 시대에 이르러 신분화된 사족으로,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을 아울러 일컫는 말이다.[1] 문반과 무반은 각각 동반(東班)과 서반(西班)으로도 불렸는데, 이는 궁에서 조회(朝會)를 할 때, 가운데의 국왕을 기준으로 동쪽에 문관들이 서고 서쪽에 무관들이 섰던 것에서 유래한다. 고려 당시에는 남쪽에 기술관이자 궁내 실무직인 남반(南班)이 있었으나 이런 기술관은 조선 시대에 들어 중인 계급으로 낮아지고 동반(문반)과 서반(무반)만 남아 양반이 되었다. 이들 문반과 무반을 따로 칭할 때 일렬로 시립해 있다는 점에서 '반열' 이라고도 불렀는데, 바로 여기에서 출세했을 때 '~의 반열에 서다'라는 표현이 나왔다. 문반이든 무반이든 일단 반열의 말석에 섰다는 것은 이제 출세할 일만 남았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들은 후손이 노비가 되지 않을 특권 같은 등은 있었으나[2] 다른 사회의 귀족 집단들처럼 끊임없이 신규층과 몰락층이 나오는 나름대로 개방적인 집단이었다.

양반은 유동적인 계층으로 양반에 포함되고 퇴출되고는 사회적인 인정에 좌우되는 것이었다. 양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봉제사 접빈객으로 양반은 제사와 방문객 접대를 통해 해당 지역 사회에서 인정받는지 아닌지가 중시되었다. 이는 관직 진출과 가문의 명성 등에 의해 규정되었다. 즉 양반이라는 것은 흔한 오해와는 달리 상대적이고 유동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상대적이고 유동적이었다고 해서 기준이 모호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사회에서 통용되는 의식적, 암묵적 룰이 존재했고 그것에 의해서 양반으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었다. 애당초 양천제가 법제적 신분이었던 것과 달리 반상제는 사회적 계급이었다. 과거 시험 급제 가문을 보아도 알 수 있겠지만 조선의 양반 계층이 비유동적이었다는 것은 무지의 산물에서 나오는 헛소리이다. 그리고 이러한 양반 계층은 통혼을 통해 상호 결속력을 제고하고 이것이 조선 후기에 이르러 비교적 명확한 틀이 확립되어 간다. 조선시대에 한정된 용어로 알기 쉽지만, 개념 자체는 고려 시대에서도 있었다. 즉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양반이라고 하는 것이 사회적 계급과 법적 신분 양자의 성격을 모두 지니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때 양반은 시기에 따라 범주가 달랐는데, 조선 초기에는 위로 3대가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양반 자격을 박탈당했다. 이를 4대 무현관(四代無顯官)이라고 한다. 그러나 과거에 합격하는것은 문과가 아닌 무과와 잡과라 할지라도 어려운 일이었으며. 당연히 조선 초기 양반은 인구에 10%에 못미치는 소수계층이었다. 반대로 평민이라도 과거에 합격하면 양반이 되었다.[3] 그러다가 조선 중기 이후로는 4대 무현관 원칙을 무시하고 조상 중에 벼슬을 지낸 관리가 있으면 양반이라고 쳐주게 된다. 거기에다가 조선 후기에는 무과로 뽑는 인원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에 이 두가지가 결합하여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양반의 비율이 시간이 흘러서 지속적으로 증가, 조선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된것이다. 조선 말기에는 족보 매매도 있었기 때문에 양반을 지칭하는 사람이 더 늘었다.

즉, 무작정 조선 초기 4대 무현관에 따른 양반 비율만을 보고 절대다수는 조선시대 때 양반이 아니었다고 해서는 안되고, 양반이었다가 평민이 된 사람도 있었으므로 신분 계층 간에 이동이 불가능했다고 착각하여 일반화해서는 안된다. 참고로 조선 시대에는 평민도 성씨를 갖는게 가능한 사회였다. 애초에 천인을 제외한 양민들은 법적으로 양반과 똑같은 양인이었다.

2.1. 기준의 변화

관제상의 문·무반을 뜻하는 본래의 양반 개념은 고려· 조선시대의 지배 신분층을 뜻하는 양반 개념으로 바뀌게 되었다. 양반 관료체제가 점차 정비되면서 문·무반직을 가진 사람뿐 아니라 그 가족, 가문까지도 양반으로 불리게 되었다. 가부장적(家父長的)인 가족 구성과 공동체적인 친족 관계 때문에 양반 관료의 가족과 친족도 양반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법제적으로 시작된 문·무반이 유교 사상을 기반으로 혈통화되어 사회적으로 확장된 것이다. 이는 혈통이 쉽게 변하지 않았던 시대의 신분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동아시아 신분(혈통)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인 유대관계도 이들이 양반임을 규정하는 하나의 장치로 기능했다. 예를 들어 지역마다 양반 집단에서 동류 의식으로 결합되었고 이는 누구와 통혼하고 있었는지로 확인된다. 조선시대 풍헌안, 향안 등을 다룬 연구에서도 확인되지만 동류로 인식된 집단에서만 배우자를 찾고 다른 지역의 양반으로 행세했던 사람도 쉽게 동류로 끼워주지 않았다. 심지어 국왕의 호소도 먹히지 않을 정도로 이러한 동류 의식은 강력한 것이었다.

때문에 조선시대에 양반이 인구의 몇 %였네 하는 통계는, 이러한 면을 감안하여 받아들여야 한다.

조선 시대 후기 들어서는 공명첩과 관직 매매 등으로 인해 극소수였던 양반 계급의 양적 증가가 두드러짐에 따라 같은 양반 가문 내부에서도 구분이 생기게 되었다.
양반 중에는 문벌 가문이 있는가 하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양반임을 모칭(冒稱)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그리하여 같은 양반 중에는 문묘에 종사된 대현(大賢)이나 종묘 배향공신(配享功臣)을 배출한 국반(國班) 및 대가(大家)·세가(世家) 이외에 도반(道班)·향반(鄕班)·토반(土班)·잔반(殘班) 등의 구분이 생기게 되었다.
- 양반 [兩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양반은) 법제적인 절차를 통해서 제정된 계층이 아니라 사회관습을 통해서 형성된 계층이요, 따라서 양반과 비양반과의 한계 기준이 매우 상대적이요 주관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양반과 비양반과의 한계 기준이 상대적이요 주관적이었다고 해서 그것이 애매모호한 것이었다고 생각하면 이는 잘못이다. 실제에 있어서는 지극히 명확한 기준이 있었다. 다만 그 기준은 성문화된, 그리고 언제 어디에서나 적용이 될 수 있는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따라 변경 설정되는, 즉 어느 특정한 상황 하에서 관련된 사람들의 의식구조상에서 설정되는 주관적이고도 상대적인 기준이었다.” -송준호 <조선 사회사 연구>

2.2. 양반과 귀족의 관계

흔히 '양반≠귀족'으로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지만, 양반 역시도 귀족의 부분집합이다. 귀족이란 법률에 명시적으로 적혀있지 않더라도 관습적·사회적으로 특권을 지닌 상류층으로서 그 신분을 세습하는 존재인데, 양반 자체의 정의가 세습과 무관할지언정 실제 구성원들은 사실상 그 지위를 후대로 넘겨주는 일이 많았고 그에 따라 다른 이들보다 우월한 계급이라고 인식했으므로 귀족의 정의에 부합하기 때문이다.[4] 최소한 당대 조선인들은 양반 혹은 명문 양반을 '귀족'이라고 부른 것이 분명하다.
都承旨李景奭啓曰: "被擄之人, 貧不能贖還, 而凡民, 異於貴族, 價亦不多。 今若捐百餘兩銀, 分授通官, 使之贖還, 則所得雖不多, 豈不足以感民心哉?"
答曰: "殊甚矜惻。 令該曹優給價銀, 多數贖還。"
도승지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사로잡힌 사람들이 가난하여 속(贖)바치고 돌아올 수 없는데, 일반 백성들은 귀족(貴族)과 달리 그 값이 또한 많지 않습니다. 지금 만약 1백여 냥의 은(銀)을 내어 통관(通官)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속바치고 돌아오게 한다면, 소득은 많지 않다 하더라도 어찌 족히 백성을 감동시키지 않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매우 불쌍하고 측은하다. 해조로 하여금 값으로 주는 은을 넉넉하게 지급하게 하여 많은 사람이 속바치고 돌아오도록 하라."
하였다.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13일 계미 4번째기사 1637년 명 숭정(崇禎) 10년
大運等私謂我東異於中國, 列聖重妃匹之際, 名門貴族, 世膺德選, 上所以難之者, 其在於所出之微乎
권대운(權大運) 등이 사사로이 말하기를, ‘우리 동방(東方)은 중국과 달라서 열성(列聖)들께서 비필(妃匹)을 중히 여겨 반드시 명문 귀족(名門貴族) 가운데서 대대로 부덕(婦德)이 출중한 사람을 선발해 왔다. 임금이 어렵게 여기고 있는 것은 희빈(禧嬪)의 출신이 미천하기 때문인 것이다.’ 하였다.
숙종실록 20권, 숙종 15년 4월 26일 임진 2번째기사 1689년 청 강희(康熙) 28년
書下諺敎曰歷數入我朝四百年邦慶豈有如昨冬無疆之荐慶乎日吉辰良大禮順成繼而兩殿疹候一時平復億萬年磐泰之休其自今伊時此豈但國朝所未有實亦往牒罕聞其在擧國同慶之情豈可無大比識喜之科今玆特命以增廣設行者良以此也然挽近以來私意橫流公道不行日甚一日漸爲痼弊干囑多歧巧僞層生勢家貴族蓋多坐得寒門冷閥每歎勞而無功
언문 전교(諺文傳敎)를 써서 내리라고 하고 이르기를,
“우리나라 400년 동안의 경사를 두루 꼽아 봐도 어찌 지난해처럼 한없는 경사가 거듭하는 일이 있었겠는가. 길한 날 좋은 때에 대례(大禮)를 무사히 이루었고 이어서 양전(兩殿)의 진후(疹候)도 일시에 회복하였으니, 억만년 반석과 태산 같은 복록이 이제부터 시작될 것이다. 이것이 어찌 다만 국조(國朝)에 없던 경사이겠는가. 실은 지난 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다. 그러니 온 나라가 함께 기뻐하는 마음에 어찌 기쁨을 기념하는 대비과(大比科)가 없을 수 있겠는가. 지금 이에 특별히 증광시(增廣試)로 설행하라고 명한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근래에 사심(私心)이 횡행(橫行)하고 공도(公道)가 행해지지 못한 것이 날로 심해져서 점차 고질적인 폐단이 되어 버렸다. 청탁하는 방법은 다양해지고 교묘한 거짓은 층층이 생겨나서 권세가와 귀족은 대부분 집안에 들어앉아 손쉽게 공명을 얻는 반면, 한미한 집안은 매번 죽도록 고생하고도 공효가 없는 것을 탄식하게 되었다.”
하였다.
일성록, 순조 3년 계해(1803) 2월 14일(경술)

더군다나 조선 바깥에서도 '귀족'은 법제적이지만은 않았고, (마치 양반처럼) 사회적이기만 한 집단에게도 쓰인 개념이다. 가령 고대 희랍에서 귀족은 '귀족 가문이라고 법적으로 인정된 가문'이 아니라 그냥 사회적으로 인정 받는 엘리트 가문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 '엘리트 가문'은 사회적인 관계망 형성에서 현대의 엘리트보다 훨씬 폐쇄적이며 '가문 중심'이었다는 것에서 21세기 엘리트와는 구분된다. 그런데 고대 희랍의 '사회적' 엘리트 가문들은 귀족인데, 조선의 '사회적' 엘리트 가문들은 귀족이 아니라고 하면 굉장히 이상해질 것이다. 중세 및 근대 잉글랜드에서 출현한 젠트리의 경우 아예 잉글랜드의 법률에서만 귀족이 아닐 뿐 대륙권 기준으로는 장티욤이나 이달고 등처럼 명백히 귀족에 해당하였다.

귀족 가문을 법적으로 구분한 것은 근대 유럽의 사례인데, 사실 앙시앙 레짐 당시의 귀족 역시도 끊임 없이 '유입'과 '퇴출'이 양산되어 나름 개방적인 집단이었다. 조선 사회에서 똑똑한 농민이 '진사'나 '생원'이 되어 양반이 되는 사회적 시스템이 있었듯이, 유럽 사회에서도 상인이나 농민이라도 똑똑한 자들은 교회에 들어가 성직자가 되거나 대학에서 '박사'가 되면 귀족 영주들에게 고용되거나 공직에 나아갈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사회적으로 귀족 취급을 받거나 아예 관직에 맞추어 서임을 받고 귀족이 되는 시스템이 있었다.[5] 유난히 현대 서양인들이 박사 학위 소유자를 꼬박꼬박 '박사님'으로 불러주는 예절에 집착하는 이유도, 유럽 사회에서 '박사님'이 조선의 '진사님', '생원님' 기능을 하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충분히 부유한 평민들이 영락한 하급 귀족과 통혼하거나 스스로 영지 및 그에 딸린 권리를 사들이는 식으로 영주가 되어 귀족이 되기도 하였다.

사실 흔히 양반과 비교되는 고려의 문벌만 하더라도, 관료제와 혼맥이 결합된 '명문가'를 말하는 것이란 점에서 조선의 양반과 매우 흡사한 성격을 가진다. 고려 문벌의 특권은 어디까지나 관료제 기반이며,[6] 흔히 음서 위주의 고려 문벌과 과거 위주의 조선 양반으로 단순화됨에도 불구하고 『고려사』 열전의 등장인물 650명 중 음서제를 사용한 인물은 오직 40명 뿐이다. 그리고 340명이 과거 출신자이다. 반면 조선의 경우 음서 출신자의 대우가 고려보다 못한 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서는 명문가 자제들의 관료 사회 입장권으로 애용되었고, 심지어는 직부전시(直赴殿試, 과거급제 쿠폰)를 통해 일부 권세가의 아들들은 과거를 면제 받았다.[7] 다시 말해서, 고려 문벌과 조선 양반의 차이는 흔한 통념보다 매우 미묘한 것이다.

2.3. 붕괴

백성들 가운데 사족(士族)이란 명색(名色)의 사람이 거의 5분의 2나 됩니다.
정조실록 정조 2년(1778) 윤6월 23일 신사 2번째기사, 대사성 유당이 올린 상소 中

조선 초에는 양반을 보는 사회적 기준이 곧 법제적 기준과 같았기에, 사회에서 통용되는 양반의 수가 약 1% 미만이었다. 따라서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지배계층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사회적 기준과 법제적 기준의 갭이 어마어마하게 커치게 된다. 철종 시대에는 전 국민의 70%가 양반이 될 정도가 되었다는 일본 학자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8]의 통계는 조선시대 호적에서 유학호로 기재된 것을 양반으로 취급한 것으로, 실제 사회에서 통용되던 양반의 수가 증가하였음을 보여준다.[9]

송준호에 의하면 조선 후기에 '모칭유학'이라고 하여 호적에 유학이라고 칭하는 것이 행정상 가능했으며 여간한 사람은 다 유학으로 직역에 기재되었지만 이것이 그 사람이 양반임을 뜻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천민 취급 받는 사람들도 있었다. 법제적인 의미에서 양반의 기준은 조선 초중기에는 과거를 치를 수 있는 신분 자격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거 조차 평민, 천민도 치를 수 있도록 개정되었다. 법제적인 신분은 양인과 천인으로만 구별하며 양반은 사회적 신분의 범주에서만 인정될 뿐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과거 시험에 대한 사항을 무시한 결과이다.

1910년 전국 호구 조사에서 확인되는데[출처불명], 총 가구(家口) 수 289만 4777호 가운데 양반이 5만 4217호로 전체 인구의 겨우 1.9%에 불과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양반을 헤아린 통계이다. 그나마 충청남도가 전체 가구 수의 10.3%로 가장 양반이 많았고 다음으로는 충청북도(4.5%), 경상북도(3.8%), 한성(2.1%), 강원도(1.1%) 순이었다. 그 뒤로는 전라북도(1%), 경기도(0.8%), 함경북도(0.8%), 전라남도(0.5%), 경상남도(0.4%), 함경남도(0.4%) 순이며 최하위는 황해도(0.3%), 평안북도(0.2%), 평안남도(0.1%)였다.[11] 군현을 단위로 양반이 많았던 고을은 경상북도 경주군(2599호), 충청남도 목천군[12](2388호), 경상북도 풍기군[13](2294호), 충청남도 공주군(2238호), 경상북도 봉화군(2213호) 순이었다. 인구 대비로 봤을 때는 충남의 상당수 지역은 양반의 비중이 20~30%대였고[14] 충북 일부 지역, 안동 일대는 10% 후반~20대 중반 정도였다. 경주가 11.5%로 여기까지 지역이 10%를 넘었고 나머지 지역은 10%를 넘지 못했다.

양반이 많은 지역들의 특징들을 살펴보면 충청도 경상북도, 한성( 서울)에 양반들이 집중되었고 그나마도 전 인구의 5%를 넘지 못했다. 소위 서울 장의동(장동)에 세거하던 김상헌의 안동 김씨인 이른바 '장동 김씨', 서울 정동에 세거하던 이상의의 여주 이씨인 이른바 '정동 이씨' 등 한성의 경화세족은 급격한 변화로 무너지고, 오늘날 경상북도 경주 안동, 그리고 충청도를 양반의 고장으로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경주에선 이언적의 후손인 여주 이씨의 토대 양동마을, 안동에선 류성룡의 후손인 풍산 류씨의 하회마을이 한국의 대표적인 반촌(班村)이라 하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이 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정리하자면 조선시대 때 양반의 의미는 두 가지로 쓰였다. 좁은 의미로는 4대 무현관만을 양반으로 인정한다. 이 정의는 조선 초중기에는 엄격히 지켜졌을 것이다. 바로 위의 지역별 통계는 그 정의를 따른 것이다. 반면 넓은 의미로는 조선 중기 이후부터 통용되기 시작한 의미로, 심화된 신분 격차로 벼슬을 지낸 관리의 후손들을 폭 넓게 지칭하는 말이었다. 특히 전란 중에 공명첩 등으로 양반이 크게 늘자, 그 정통성을 따진답시고 족보의 중요성이 강조되었고 이러면서 양반은 사회적 계급이 아닌 세습 계층이 된 것이다.

그러나 원래부터 납속으로 가선대부니 통정대부와 같은 품계를 받은 '납속품관'은 명예직이라 받아도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양반이 아니었다. 게다가 조선 후기로 가면서 이전보다 더 활발해진 화폐의 상용화 등으로 빈부 격차가 심화됐고 벼슬자리보다도 지주로서 지위에 만족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이들은 족보를 들이밀어 자신들이 과거 벼슬을 지낸 사람의 후손이니 자신 또한 양반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심지어 부를 쌓았으나 조상 중에 벼슬을 지낸 사람이 없는 경우는 돈을 주고 족보를 조작하기도 했다. 이렇게 사회 경제적 상류층을 일컫는 말로서 양반이라는 의미가 조선 후기에는 거의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양반의 정의는 이 후자 쪽에 훨씬 가깝다.

2.4. 현대 한국어에서

현재에는 그저 남에 대한 존칭[15] 또는 자기보다 높은 사람을 살짝 비꼬는 말이다. 가령 자주 쓰이는 예문으로 어르신들끼리 시비가 붙었을 때 "야 이 양반아, 당신 몇 살이야?"가 있는데, 이 용례에서는 존칭이라기보단 '놈'이라는 단어보단 그냥 듣기 덜 기분 나쁜 지칭 대명사일 뿐이다. 영감과 비슷한 사례. 당신이 만약 사회인인데 자기 손아래 사람에게 '에라 이 양반아'라는 말과 '에라 이 놈아'라고 불러 보자. 반응이 꽤 다를 것이다.

즉, 친한 사람끼리 장난삼아서 서로 부를 때는 그렇게 기분 나쁜 말은 아니지만, 그렇지 않은 분위기에서는 '놈', '양반'이라고 부르는 것은 시비조가 되거나 심지어 욕설이 되며, 특히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면전에서 대놓고 이런 표현을 쓰면 영락없는 욕설이 된다. 대표적인 사례는 둘리 고길동에게 말다툼을 하면서 "이 양반이 왜 이래?"라고 싸가지 없이 말하자 고길동이 분기탱천해서 "뭐? 이 양반? 이 양반이라니?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라고 말하며 둘리에게 꿀밤을 때렸다. #

이 외에도 점잖은 사람이나 사물을 비유할 때나 어떠한 상황보다 낫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한 단어인데도 뜻이 완전히 정반대인 경우다. '차라리 양반'이라는 말을 쓰는데, 못마땅할 때 그나마 낫다는 의미이지 완전한 칭찬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가치중립적인 지칭어나 친근함이나 호의를 담은 존칭(주로 동년배 또는 아들뻘)으로도 쓰이곤 한다. 단, 이 경우에는 형사양반 또는 의사양반처럼 직업 이름 뒤에 주로 붙인다.

3. 국반

양반 중에는 문벌 가문이 있는가 하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양반임을 모칭(冒稱)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그리하여 같은 양반 중에는 문묘에 종사된 대현(大賢)이나 종묘 배향공신(配享功臣)을 배출한 국반(國班) 및 대가(大家)·세가(世家) 이외에 도반(道班)·향반(鄕班)·토반(土班)·잔반(殘班) 등의 구분이 생기게 되었다.
- 양반 [兩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문묘 배향 18현이나 종묘 배향 공신을 배출한 가문을 국반(國班)으로 부르기도 한다. 문묘 및 종묘에 함께 배향된 인물을 배출한 가문은 총 6개 가문이며 다음과 같다.

4. 현대인의 시각

대체로 부정적인 시각을 보이는 이들이 많다. 가장 큰 이유는 양반이 성리학에만 매달리고 근대 학문과 과학 기술 도입에 소홀하여 일제 강점기를 초래했으며 노비를 부리고 백성을 수탈했다는 인식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알아야 할 점은 전근대에는 동서를 막론하고 지배계층은 피지배계층을 향해 착취적인 성격과 동시에 호혜적인 성격을 둘 다 갖췄다는 점이다. 양반 성립 시점인 976년부터 신분제가 폐지된 1895년까지 양반이 그 기간 내내 백성과 노비를 부리고 수탈만 한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시기에 따라 수탈이 심했던 시기는 있었지만, 그 수탈이 심했던 시기도 단순히 양반 때문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당시 사회상, 경제 상황, 정치 상황 등 여러 사회맥락을 철저히 무시하는 처사이다.

일단 양반의 착취가 다른 국가나 지역보다 더 심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노예, 불가촉 천민 항목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어느 지역이든 차이는 있으나 최하층 계급을 착취하는 일은 보편적이었다. 대명률에 따라 양반들은 자기 소유의 노비를 함부로 죽였다면 극형만 면했을 뿐, 이러한 범죄를 저지르면 장형 100대에 멀리 변방 지역으로 유배되었다. 다만 경국대전에 따르면 노비가 주인을 고소하는 경우 그에 대한 처벌은 사형이었으므로 실질적으로 노비에게는 법적인 방어권이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금계필담》에서 언급된 조선 후기의 문신, 이서구(李書九)가 자신의 소유 노비를 사적으로 살해한 행위까지 옹호했다 주장하는데 이서구의 노비는 주인인 이서구의 이름을 들먹이며 술에 취해 욕설을 퍼부어서 문제가 된 것이다. 그것도 세 차례나. 이서구는 이미 두 차례나 용서했으나, 노비가 세 번이나 반복해서 욕설을 하고 술주정을 벌이자 결국 이서구가 다른 노비에게 이를 때려 죽이도록 지시한 것이다. 당시 대명률집해에 따르면 주인을 욕하는 경우 교수형에 처해질 수 있었기 때문에, 이 노비를 관청에 인도하여 처벌을 받게 했어도 결과적으로 사형이었기 때문이다. 형조 서리가 현장을 방문했으나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돌아간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현대사회의 법치주의와 인도주의의 관점에서 보자면 크게 어긋나지만 전근대 사회의 관점에서 예속민이 주종관계에 있는 귀족을 모욕한 것에 대해 제재를 가한 것은 정당한 일이다.

"종년 간통은 누운 소 타기보다 쉽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조선 시대에는 양반이 여성 비를 상대로 한 성착취가 만연한 것은 사실이다. 다만 그렇다고 주인이 여성 노비를 마음대로 강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례로 조선 전기 권신 이숙번이 남편이 있는 소비라는 비를 겁탈하다가 소비가 이숙번의 이마를 칼로 찌르며 저항하는 사고가 벌어졌다. 원래라면 주인에게 해를 끼쳐서 처벌받아야 마땅하지만, 소비의 저항은 남편 있는 여자가 정절을 지키려는 행위로 판단해 당시 관료들은 용서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처벌을 받지 않았다. 또한 남편이 있는 노비는 건드릴 수 없었다. 그리고 하층 계급 여성을 상대로 한 성착취는 조선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양반은 군포나 군역만 면제되고, 토지세인 전세, 국가 봉사와 같은 부역, 왕실을 위한 특산물 공납 등을 부담했다. 심지어 일부 지역에서는 호포제를 시행하여 양반도 군역을 부담하는 경우가 있었다. 조선의 공식 신분제는 양인과 천인 둘로 이루어진 양천제였다. 양반은 귀족이 아닌, 귀족적 성격이 들어간 최상위 양인 계층이었다. 그래서 양반은 과전법에 따라 토지를 받았고 그에 상응하는 군역과 직역을 수행해야했다. 하지만 성종 시기 더이상 지급할 과전이 부족해져 과전법이 폐지되어 버린다. 과전이 더이상 지급되지 않자 양반들은 그에 상응하는 직역과 군역을 수행하려 들지 않고 국가 역시 양반에게 군역을 강요할 상황이 못되었다. 여기에 충순위, 충찬위 같은 양반 사족들의 군역을 위한 특수병종에 근무하면 나오는 체아직, 관직 진출 기회 같은 특권들이 사라져서 양반들도 더이상 군역을 수행할 이점이 사라진 것도 한 몫했다. 그래서 양반이 사실상 군역을 면제받은 것이다.

일제강점기만 해도 양반 의식이 잔존하고 있었다. 신분제도는 갑오개혁으로 사라졌지만 일제시기 작위를 받은 귀족들은 여전히 존재했고[20] 일본 역시 왕정이었으니 신분제는 사실상 계속 존속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의 의식에서 완전히 없앨 순 없었다. 그러나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고 유교적 가치가 멸시를 당하면서 정통 양반 의식은 슬슬 힘을 잃어갔고[21] 해방정국 6.25 전쟁을 거치면서 공화주의가 정착되고, 지주 양반들이 토지개혁, 인민재판 등을 겪음과 동시에 어마어마한 인구 이동과 경제적 격변이 일어나 양반의 전통은 거의 사그라들었다.[22] 그 잔재로는 과거와 같은 시험으로 출세를 하는 듯한 직업을 숭상하며 육체노동을 천하게 여기는 귀천 의식이 타국보다 심하게 남아 있고, 이런 풍토를 옹호하는 경우도 지금도 존재하나 경제 상황에 여유가 없어지고, 자본주의의 고도화로 이런 직업군이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생겨나며 그 풍토에 대한 비판 여론도 서서히 생겨가고 있다. # #

구한말부터 대규모 족보 위조가 발생했고, 6.25 전쟁 당시 대다수 사람들의 기반이 리셋되었기 때문에 일부 극소수 종갓집을 제외하면 누가 진짜 양반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게 되었으며 전통적인 의미의 양반은 대거 줄어들었다.

일부 남아있는 종갓집에서는 결혼 등 중대사는 물론 사소한 일상 생활에서도 가문을 따지는 경우가 많다. 유홍준 베스트셀러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만 봐도 경상도 안동 지역의 노인이 방문객을 보고 "자넨 어디 집안 사람인가?" 라고 묻기에 " 은진 송씨입니다."라고 대답하자 '크흠' 하면서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는 묘사가 나온다.[23] 이런 전통은 집안 어른인 대부의 영향력과 인맥[24]이 종중 전체에 미치는 등, 가문과 양반의 전통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에 지방 집성촌들 기준으로는 여전히 남아있다.[25]

5. 여담

  • 선비와도 관련이 많다. 옛날 이야기에서는 아주 선하거나 아주 나쁘거나 하는 극단적인 캐릭터상을 보여주거나 하지만 대개 자신이 주인공이 아닌 한 주인공의 돈줄로 등장하는 경우가 다수이다.
  • 양반은 두 가지 의무가 있었다. 소위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으로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맞이한다는 의무가 있다는 것. 이는 박지원 허생전 양반전[26]을 보면 잘 묘사되어 있으며 이 두가지 의무는 숨을 거둘 때까지 지속된다. 심지어는 임진왜란 피난 중에도 이 두 가지는 꼭 지킨다.[27] 또한 제사를 잘 지내고 손님을 잘 맞이한다는 것은 결국 그에 대한 비용을 많이 쓰게 된다. 이는 조상을 기릴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회ㆍ경제적 지위를 현시하는 의미이기도 했다.
  • 양반에게는 본래 4대까지 제사를 지낼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28] 제사에는 봉사대수라는 것이 있는데, 쉽게 말해 몇 대 조상까지 제사를 모실 수 있나 하는 것. 원래는 신분에 따라 제사를 모실 수 있는 조상의 대수가 달랐으나 후기로 갈수록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 4대까지 지내게 되었다. # # 상민 역시 1대까지는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조선시대 때 구휼 정책 중에 돈이 없어서 제사를 못 지내는 양민들을 지원하기가 있었으니 말 다 했다.
  • 이러한 제사는 양반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었는데, 서양 귀족들이 자기들을 차별화할 때 고상한 언어와 깍듯한 에티켓, 그리고 복장 등으로 구분한 것과 같이 조선의 양반은 유교적인 예의범절을 준수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관대하게 베푸는 것으로 자신을 차별화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정점에 제사가 있었다. 복잡한 제사 절차와 화려한 제삿상 등 우리가 아는 제사는 바로 주자가례에 따른 제사이자 양반층의 제사로 제사는 양반만 지내라는 법은 없었지만 그 복잡한 절차를 완벽히 숙지하고, 온갖 화려한 음식을 상에 차리는 건 부유층이 아닌 일반 평민들은 따라 할 수 없거나 따라하기 힘들었다. 따라서 당시 양반의 제사는 그저 고인을 추모하는 것 뿐만이 아닌 온 고을의 소문거리로 아예 기안이라고 해서 마을 내의 양반들의 제사를 모아 놓은 달력도 있을 정도. 양반들은 이 복잡하고 화려한 제사 행위를 지내는 걸 과시해서 자신의 지위를 각인시키고 동류에게 인정받았고,[29] 평민들은 그 제사에서 음복이라는 명목으로 그 제삿상을 먹고 즐길 수 있었다. 제공되는 음식은 제사용이다 보니 정성이 들어가고 고기 생선, 과일, 적전, 한과 등 귀한 음식들이었고, 양반집에서 먹기에는 너무나 양이 많았으니 양반들은 민심을 얻고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인심 좋게 나눠준 경우도 많았던 것.
  • 이러면서 점점 과시를 위해 제사 음식은 더 많고 화려해지고 절차도 복잡화되어서 건전가정의례준칙이 나올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제사란 명목으로 모여서 서로 그 제삿밥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서 제삿상을 차린 집은 일종의 카페 역할도 어느 정도 했다. 이들 양반이 지역사회에서 인정받는 또 다른 방법은 접빈객. 그냥 손님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냥 지나가는 아무나 숙박할 곳이 필요하다면 양반집 대문을 두들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양반들 또한 이들을 접대함으로서 지역사회에 인정을 받고 하층민에게 존경을 받았다. 또 타 지역에서 온 이들을 통해 새로운 정보를 얻는 것으로 경제적 이득을 보거나 손해를 줄이는 등의 밥값을 얻기도 했다. 양반이 접객에 얼마나 신경을 썼냐면, 1년 수입의 30%를 접객에 사용했으며 여러 기록에 따르면 제사만큼 손님 대접을 제사와 동급으로 여겼다는 게 나타난다.
  • 그리고 양반들에게 접빈객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경제생활을 영위하는 매개체였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조선은 민본주의 국가이기에 세율이 낮았다. 그래서 국가의 재정이 부족하니 자연스레 관료들도 수탈이나 부정부패에 의존하는 폐단이 나타났다. 심지어 정1품과 종9품 간에 녹봉이 이렇다 할 차이가 없었다.[30] 오늘날의 공무원들보다도 더욱 박봉이었던 것, 그러면 부정부패만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냐 하면 그건 아니다. 양반들은 주로 "증답경제(선물을 주고 받아 경제생활을 영위하는 것)" 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31]. 이렇다 보니 양반들이 경제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서로 간의 선물 교환이 중요했고, 자연스레 접빈객을 중시하게 되었다.
  • 양반들이 얼마나 증답경제(선물)에 의존했는지는 다음과 같다. 이는 미암 유희춘 가에서 무려 1568년 봄철에만 선물을 주고받은 내역이다. 뇌물로받은게 죄다 생필품이다.
    선물 보답(지출): 쌀 12말 2되, 말린 꿩 1마리, 은어 4마리, 청어 10마리, 전복 10첩, 김 3첩, 곶감, 장지 3권, 붓, 먹 7정, 부채, 머리빗, 바늘, 분

    책값(지출): 삼베 2필, 부채 10자루, 장지 34권 32장, 김 2첩, 술, 전복

    부조(지출): 의약품, 쌀 1말

    증여(수입): 벼 3섬, 밀가루 3말, 메밀쌀 2말, 마초 200묶음, 포육 19첩, 말린 꿩 13마리, 생꿩 3마리, 생기러기 1마리, 말린 청어 30마리, 청어 100마리, 말린 문어 3마리, 문어 10마리, 전복 13첩, 생전복 100개, 숭어 2마리, 전어 20마리, 말린 대구 5마리, 김 10첩, 곶감 2접, 김치, 새우젓 1말, 간장 1병, 깨 8말, 꿀, 빗 6개, 도롱이, 안장, 가죽신 4켤레, 빙자리 1잎, 초 8쌍, 가위 2개, 인두 2개 숫돌, 칼, 적쇠, 무명 3필, 종이 41권, 먹 7정, 부채

    선물(수입): 마초 200묶음, 홰 25자루, 포육 10첩, 생꿩 4마리, 말린 꿩 5마리, 닭 1마리, 말린 숭어 2마리, 청어 2마리, 조개, 전복 20개, 김 13첩, 대추 10되, 배 15개, 김치 2동이, 채소, 간장 2동이, 된장 20말, 생강 1말, 엿 1상자, 떡, 방석 2개, 자리 2개, 등잔대 2개, 띠, 보자기, 먹 23정
  • 양반에 관한 역사학 이론 중 조선이 완전한 신분제도가 아니라는 주장이 있는데[32] 그 주장은 양반과 고관대작 세습되지 않으며 단지 양반의 경우 권세와 재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부를 편히 할 수 있었고 때문에 유학을 공부하며 관직에 진출하기 쉬워 기득권을 계속해서 잡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순조 때 시작된 세도정치 시기에는 안동 김씨로 대표되는 특정 성씨만 과거에 합격하여 출세하는 것[33]이 여러 사람에 걸쳐서 폐단으로 지적되었으나 끝끝내 고쳐지지 않았고 결국 지역 차별을 유발하여[34] 조선 최대의 민란으로 부를 수 있는 홍경래의 난까지 불러왔을 정도다.
  • 과거에 오랫동안 급제하지 못하거나 재산을 잃은 몰락 양반들은 잔반이라 불렸는데, 어쩔 수 없이 생계를 위해 스스로 농사나 장사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 예로 시골에 살던 양반들인 이른바 향반들은 대부분 먹고 살기 위해서 스스로 농사를 지었다.[35] 자기 소유의 토지나 장사 밑천이 있으면 그나마 나은 편으로, 상민이나 외거 노비 출신으로 땅부자인 천민에게 소작을 해 되려 이들에게 수확물을 갖다 바치며 연명하게 되면 아예 양반으로서의 존대나 해 주면 다행이었다. 그 외 글공부한 걸 바탕으로 서당 훈장[36]이 되거나,[37] 중인들이 주로 하는 송사의 소송서를 써주거나, 의약업 등을 하며 간신히 손에 흙은 안 묻히고 체면 유지하는 경우도 많았다. 오늘날로 치면 법무사, 세무사, 회계사, 변호사 약사, 의사같은 전문직과 비슷하다. 최악의 상황으로 가면 족보를 팔거나 족보에 신분 상승한 사람을 넣어주고 돈을 받는 식으로 생계를 꾸려가기도 하였다. 여러 모로 결국 돈과 관직 그리고 가문이 진정한 신분을 좌지우지 했다. 다만 본래부터 가문이 좋았던 양반 출신들과 평민들 사이에 수준[38] 차이가 심했기 때문에 몰락 양반들도 일반적인 경우에는 하찮은 대우를 받고 다니진 않았다.
  • 양반이라 해도 3대에 한번은 '초시'라도 합격해야 양반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벼슬에 뜻 없고 학문에만 힘쓰고자 하는 산림 처사라도 초시(향시) 중 생원시나 진사시에 응시해야만 했다. 그래야 군역과 부역을 면제하고 학문에 힘쓸 수 있었다. 학문만 하는 건 어려워서 못하겠다고 하면 공부 시간을 어느 정도 줄이고 줄인 만큼 운동을 열심히 해서 무과에 응시하면 된다. 무과도 병법서와 기본 유교 서적들에 밝아야 합격이 가능했지만 전체 학습량을 따지면 문과에 비할 바는 못 되기 때문이다. 다만 무과에 합격할 경우 오늘날의 장교에 해당되는 벼슬을 받고 변방에서 군역을 짊어야 한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공무원 시험을 볼 생각 없는 사람이 대학 교수나 학자가 되기 위해 또는 생계를 위해 국가전문자격증과 석박사 학위를 따려고 하는 것이다. 또한 무과는 허들이 낮은 대신 그만큼 중인, 양민, 서얼 등 천민 빼고 다 몰리는 분야라서 다른 의미로 경쟁률이 높았다.
  • 양반은 사회적이고 관습적인 집단이기에,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오늘날에는 (설령 족보가 진실하더라도) "우리 집은 양반 가문이야"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
  • 북한에서도 양반들을 봉건통치배라 칭하며 비난하고[41] 증오하도록 선전하고 있다.[42]

6. 관련 문서



[1] 가끔 문반만 양반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엄연히 무반들도 양반이다. [2]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39_0040_0040_0010_0010 [3] 그러나 평민이 과거에 합격하는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한자를 익히고 각종 유교 경전과 학문적 소양을 익혀도 합격하기 어려운것이 과거인데, 평민이 어린 시절부터 그런것을 익히기에는 시간적/경제적 여건상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나마 무과의 경우에는 조선이 징병제 국가라서 당연히 군대에서 무예를 익혔기 때문에 응시자는 많았지만, 이 역시도 기초적인 문자와 사서삼경 정도는 읽고 외우는 실력은 있어야 했고, 고인물급인 군경력자들은 넘쳐났기 때문에 만과 소리 들을정도로 뽑는 인원이 많은것이 아니라면 합격하기 쉽지 않았다. [4] 그래서 연구자 중에는 이를 양반 사족으로 구분하여 보기도 한다. [5] 특히 중세 독일의 미니스테리알레스들은 원래 농노 신분이었는데도 군주나 제후, 주교들의 가신이 되어 관료귀족을 형성하였고, 이를 토대로 사회적으로 귀족 취급을 받거나 아예 해방되어 진짜 귀족이 되는 일이 많았다. [6] 문벌의 경제적 기반이라는 '공음전'도 일단 5품 이상의 '관료'가 되어야 나오는 것이다. 물론 고려 관료 사회가 문벌이 유리한 '기울어진 운동장'인 건 누구도 부정하지 않겠지만 이건 조선도 똑같다. [7] 직부전시(直赴殿試)란 전시만 보게 하는 특권이다. 그런데 전시는 순위 시험에 불과하기에, 직부전시는 사실상의 급제 쿠폰에 해당한다. 원래는 성균관 우등생에게 주는 특권이었으나 조선 후기엔 명문가의 아들들에게 주워졌다. 가령 김조순의 아들 김유근은 직부전시로 과거를 합격했다. [8] 도쿄대학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의 교수를 역임했으며, 일본의 역사학자들 가운데 마이너에 속하는 한국사를 전공하였다. [9] 조선시대 호적에서 호주의 직역으로 신분을 추정하기도 하지만 현재 호적 연구에서 직역과 신분은 무관하다는 견해도 있다. [출처불명] [11] 정작 평안도는 조선 중기때부터 과거 합격자수가 증가하기 시작해서 조선 후기에는 합격자율 1위 지역이었는데 양반수는 가장 적었다. [12] 천안시 동남구 동부. 중심지는 현재의 목천읍. [13] 영주시 북서부. 중심지는 현재의 풍기읍 [14] 한 예로 연산군(오늘날 논산시 동부, 계룡시 일대)에선 3명 중 한 명 꼴로 양반이었다. [15] 존칭 쪽은 " 선생님"으로 하는 게 대다수이므로, 현재 "양반"이라는 말은 비꼬고 낮잡는 뉘앙스다. [16] 동방5현이 함께 문묘 종사되었다. [17] 동방5현이 함께 문묘 종사되었다. [18] 1682년 성혼과 함께 문묘 종사되었으나, 1689년 기사환국으로 성혼과 함께 출향되었고,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성혼과 함께 복향되었다. [19] 정조 즉위년인 1776년 정조는 송시열을 효종의 묘정에 추배(뒤늦은 배향)하도록 윤허하였으나, 동춘당 송준길에 대해서는 수차례 상소에도 불구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송준길은 이미 문묘에 종사되어 있었기 때문에 만약 정조가 이를 윤허하였다면 은진 송씨는 문묘, 종묘 동시 종사된 인물을 2명이나 배출할 수 있었다. [20] 일제시절 친일파 상당수는 이미 조선 내에서도 권력을 잡고 부귀영화를 누리던 상류층이었다. 조선귀족 문서로. [21] 일부 양반들은 개화파가 되어 정치운동을 하거나 평민들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형평운동에 참여하며 근대적 평등의식 함양에 힘쓰기도 했다. [22] 노비제도 6.25 전쟁 이후세야 비로소 자취를 감추었다고 본다. 법제적으로는 갑오개혁 이후 사라졌다지만 실질적으로는 제법 오랫동안 사회 의식 면에서 살아남아 있었다고. [23] 송시열로 대표되는 충청 노론 이황, 유성룡으로 대표되는 영남 남인 앙숙관계이다. 경북 안동은 영남 남인 양반의 대표적인 본거지인데, 그때의 지역감정이 아직 남아있던 것. [24] 이를 잘 보여주는 영화가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이다. 시대 배경은 80년대지만 지금도 사라지진 않았다. [25] 한편으로는 지방의 대규모 인구 이탈로 인해 전통을 중시하는 고령층 위주로만 집성촌에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26] 물론 양반전은 애당초 사회상에 대한 풍자가 목적이라 과장이 좀 섞여 있기는 하다. [27] 오희문의 쇄미록에 따르면 오희문은 임진왜란 기간인 1598년에도 무려 28번이나 제사를 지냈다. [28] 그런데 이것은 조선 전기에 국한되는 이야기이다. 조선 사회가 이행됨에 따라 조선 중후기부터는 평민이나 양반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 게다가 법제적인 호적 상에는 평민도 4대조까지 기록하는 건 당연하다. [29] 미야지마 히로시도 제사가 단순히 조상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현 세대의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는 행위였다고 설명했다. [30] 경종 때 기준으로 정1품의 녹봉은 쌀 2석 8두+ 콩 1석 5두, 종 9품의 경우 쌀 10두, 콩 5두. [31] 유희춘의 미암일기에 따르면 11년 동안 무려 선물을 받은 횟수 2,788회, 선물을 준 횟수 1,053회나 선물을 주고 받았다. 심지어 그것도 단순히 형식적으로 소소한 선물을 주고 받는 게 아니라 선물 한 번에 쌀이 몇 가마니씩 오고 가는 수준이다. [32] 미야지마 히로시, 「호적대장에 나타나는 사람들 ; 조선시대의 신분, 신분제 개념에 대하여」, 대동문화연구 42, 2003 [33] 과거 시험 자체는 더 많은 계층에게 열려 있었으나 승진이 어려웠다는 뜻이다. [34] 특정 성씨만 합격하면 그 특정 성씨가 사는 지역만 우대하는 결과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35] 대동법으로 유명한 김육 역시 후일 영의정 자리까지 올라가게 되지만 젋은 시절에는 생계를 위해 화전민 생활을 했다. [36] 그나마 스승이 존경받는 조선 사회다 보니 웬만큼 막장이 아니면 이 직업으로 먹고 사는 이상 적어도 지방에선 개무시당할 일은 별로 없었으며, 귀양이나 파직 등으로 물러나 내려온 전직 관리가 훈장을 한다면 되려 주변에서 "우리 아이들 좀 가르쳐 달라"고 몰려오는, 현대의 명문입시학원 스타강사 같은 대우를 받았다. [37] 이러한 몰락 양반의 후손들은 근대에도 비록 신분은 영세농이었을지라도 문맹 퇴치 차원에서 야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몰락 양반 가문이 아닌 진짜 평민(상민), 천민 가문 출신이었다면 영세농이 이걸 할 역량을 갖추는 것이 어렵다. 물론 이러한 야학 형태의 개인 교습은 일제강점기에 박해를 받아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38] 양반들은 이덕무의 사소절에 의하면 음식물을 더러운 손으로 먹지 않거나 독상으로 먹었는데 평민들은 숟가락을 섞어서 먹거나 음식이나 노약자들 앞에서도 담배를 아무렇지 않게 피웠다. https://folkency.nfm.go.kr/kr/topic/detail/7342 [39] 출처 [40] 왕자인 순화군이 궁녀를 강간하자 봐주지 않고 유배보낸 나라인 조선에서 여자 노비도 아니고 자기 부인을 다른 양반에게 성접대하라고 시영시키거 양반이 다른 부인과 성관계를 하는 영상 속 상황은 실제로는 엄연한 중범죄였다. [41] 한국 교과서가 비판을 하는 수준이라면 이쪽은 시도때도 없이 비난을 하는 수준이다. [42] 심지어 봉건통치의 잔재라며 조선시대식 결혼을 금지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