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9 22:55:08

법가

제자백가
농가 도가 묵가 법가 명가 병가 유가 음양가 잡가 종횡가 소설가


1. 개요2. 상세3. 문제점
3.1. 반론
4. 몰락과 영향5. 사상가6. 여담7. 매체8. 같이보기

1. 개요

법가(), (영어: Legalism)

중국 고대의 제자백가 중 하나. 법(法), 술(術), 세(勢)를 이용하여 왕권을 강화시키는 통치술을 중시하는 사상이다.

민주적 정당성을 요구하는 현대의 법치주의와 차이가 있으나, 형식적 법치주의와는 완전히 다르다고 해석할 수는 없다.[1]

2. 상세

법가에서는 법집행의 힘이 공화국 국민들로부터 나오는게 아니라, 왕권으로부터 나온다. 군주가 법을 제정하면 신민은 그것에 복종해야 한다는 개념이다. 다만 법의 엄격함 뿐만 아니라 공정함도 강조했다. 군주는 법 위에 있으나 그것은 법의 틀 안에 서 있을 때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완전히 평등은 아니더라도 군주또한 특별히 법을 무시하는 일을 하거나 해선 안 된다며 경계했다.

이에 관한 한비자에 기록되어 있는 일화가 있다. 어느날 장왕이 태자를 긴급히 불렀다. 그때 비까지 내렸기에 태자는 수레를 타고 궁에 들어가고자 했다. 그러나 문을 지키는 관리는 그 누구도 수레를 타고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 태자가 왕이 긴급히 불렀다고 설명하지만 관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급기야 태자가 수레에서 내리지 않자 관리는 태자의 수레를 부숴버린다. 태자가 왕에게 이 이야기를 하고 관리를 처벌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왕은 태자에게 '자신이 왕일때 그는 법을 지켰고 네가 후계자인데도 아첨을 하지 않았다. 이토록 공정하니 그야말로 모범이다'라고 말한다

법가는 법 자체만이 아니라 통치학·제왕학 전반에도 깊은 관심을 표했는데, 법가에서 가장 주요한 관심사는 군주가 어떻게 하여야 국가를 부강하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전반적인 것이었다. 말하자면 군주가 어떻게 하면 신하들을 잘 부릴 수 있으며, 어떻게 하면 백성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을 실무적 관점에서 다루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백성을 어떻게 체계적으로 잘 다스려서 국가를 부강하게 할까에 치중한 학문이다.

사상적으로는 유가 순자 학파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라는 주장이 강하다. 그런데 상앙과 신불해가 거의 비슷한 시기의 사람이고 맹자는 둘보다 20년가량 후대 사람이며, 순자는 맹자의 손자뻘 세대 사람이다. 시대 순으로 볼 때 사실상 순자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런데 법가의 학문적 체계는 상앙, 신불해, 신도 등의 법가를 거쳐 한비자에서 집대성되고 이사가 법가의 행정정치인으로서 크게 이름을 남겼는데, 이 후기 법가인 이사와 한비자가 모두 순자의 제자였기 때문에 순자로부터 법가가 시작되었다는 인식이 생겨났다.[2]

국가체제로는 기존의 주나라가 택했던 혈연적 봉건제도가 아니라 중앙집권체제를 추구했는데, 이는 봉건 제도를 유지시키는 원동력이었던 '혈연'이 후대로 갈수록 의미가 퇴색되어 결과적으로 국가가 사분오열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실제로 춘추전국시대의 도래는 혈연에 기반한 종법 질서가 무의미해짐에 따라 중앙 왕실이 지방 제후국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에 따라 법가에서 내세운 대안은 다분히 중앙 집권적이고 관료제적인 방향으로 입안된다.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발상으로서, 변방국이었던 진나라가 법가를 받아들인 이후 빠른 발전을 이룩하여 결국에는 전국 통일을 달성하는 것으로서도 그 우수성이 증명될 수 있다.

법가의 요체는 세(勢), 술(術), 법(法)인데, 이는 모두 법가사상의 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군주가 누려야 할 것들이다.
  • 신도를 중심으로 하는 세(勢)는 법을 따르게 하기 위한 군주의 강력한 권력을 의미하는데, 신도는 군주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세가 있다고 했지만, 한비자는 군주 자신에게 지혜, 지식, 논리력 등의 주체적인 역량이 갖춰져야 세를 누릴 수 있다고 비판하였다. 신도의 말은 군주의 권위는 신하와의 사랑 따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와 세력에서 나오므로 이를 유지하는데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이니 유가나 묵가에 대한 비판에 가깝고, 한비자는 이를 보속한 것에 가깝다.[3]
  • 술(術)이란 은밀하게 권력을 운용하는 것을 말하는데, 풀어서 말하자면 신하들의 말을 들어 그 진위 여부를 파악하여 그들이 군주를 기만하는지 그렇지 않는지를 판단하고, 기만한다면 책임을 추궁하고 질책하거나 벌하는 것으로, 이는 ‘그럴 듯한 명령과 속임수’라는 도구로서 이뤄지고 ‘아는 것을 감추고 모르는 척하며 질문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가장 좋은 예는 옹정제가 신하들의 마작놀음을 추궁한 사건인데, 해당 부분을 참조하면 옹정제가 신하들에게 얼마나 철저한 군주였는지 알 수 있다. 법과 대비하여 본다면 술은 군주가 신하를 제어하는 기술적 요령이라고 할 수 있다.[4]
  • 마지막으로 법(法)이란 말 그대로 법을 뜻하는데, 그 내용과 집행이 명료해야 할 뿐만 아니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어야 하며, 군주는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고 그 아래에 있는 모든 신민(臣民)들이 그 법령의 내용을 다 알게 해야 한다는 것, 또한 술과 함께 사용되어야 법의 준수가 확실해진다는 것이 한비자의 요체이다. 술과 대비하여 본다면 법은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서 신하가 준수해야 할 규칙이다. 한비자 정법 편에 신불해와 상앙 두 사람의 학설은 서로 보충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언급한다. 군주에게 술이 없으면 위로부터 문제가 발생하고, 신하에게 법이 없으면 아래로부터 혼란이 발생한다고 한다.

초기 법가에서는 법이, 그 이후부터 술, 세가 강조되기 시작했는데, 상앙은 이전까지 각기 독립적인 것으로 생각되던 법, 술, 세가 상호 보완적임을 주장해 법가 사상의 새로운 기틀을 다진다. 그의 저술이 바로 그 유명한 상군서였지만, 최종적으로 완성한 것은 한비자였다.

3. 문제점

법만을 추구하므로 얼핏 법가의 이상이 공정해 보이지만 세상에 완벽한 학문이란 없듯이 자세히 들여다보면 문제점이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부분은 법가를 집대성했다 할 수 있는 한비자의 사상에 대한 비판이다.

법가는 1명의 위대한 군주의 정치보다는 99명의 보통 군주의 정치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하지만 오히려 법가의 이상을 제대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군주가 거의 '성인(聖人)' 수준의 초인적인 역량을 갖출 필요가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군주가 천재적 두뇌의 보유자면서 엄청난 인내심과 추진력까지 갖추는 능력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5] 이는 사실상 왕 혼자서 광대한 제국을 지탱하는 관료와 백성들을 통제하고 제어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법가는 군주가 권력을 장악하고 중앙집권을 이루어 국가의 통일성을 제고하는 방법론에 집중한 나머지 정작 군주가 권력을 적절하게 휘두를 능력이 없는 경우에 대한 고려가 없었다.[6] 위에서 나왔듯 법가에서는 세, 술, 법 3가지가 중요한데 문제는 이 3가지 중에서 2가지가 군주의 역량에 달린 것이다. 법은 신하들의 능력으로 어찌저찌 하더라도 세와 술만은 어쩔 수 없다.

법가 옹호론자들은 상군서등에 기록된 상앙의 발언을 통해서, 현대의 법치국가와 고대의 법가 체제 하의 진 제국의 동질성을 찾고자 한다. 이를테면 군주도 은연중에 법의 제약을 받는다거나, 군주가 법의 실행에 있어서 자기가 당장 처리해야 할 일과 아닌 일을 구분하고 신하들에게 일임할 수 있는 융통성이 법가 이론에 포함되어 있다는 식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막상 현실에서 법가의 이론이 적용되어가는 과정에서는 이런 이론과 현실의 괴리가 당연히 극심했을 뿐만 아니라, 법가 이론이 가지고 있는 다른 측면들이 이런 유연하고 현실적인 법치를 가로막는 역설적인 현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게 한 법가 이론의 다른 측면은 다음과 같다.

그리고 옹호론자들의 말처럼, 이러한 군주에 의지에 종속되는 법령과 공동체에 대한 해법이나, 군주가 어떤 이상과 목표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고찰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상앙과 한비자와 같은 핵심적인 법가 이론가들의 저술에서 이런 부분은 미비하거나,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즉 그들도 이런 문제를 생각 자체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들이 생각한 군주의 권력 강화, 신민의 순응, 법령의 엄격함과 강력한 신상필벌 등에 비하면 위에서 열거된 법가 사상 체계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법가 사상의 근본에 대한 질문 자체를 피할 수 없고, 그들이 설파하던 이론 체계 전반이 흔들릴 수밖에 없기에 아예 이런 질문 자체를 두루뭉술하게 넘기거나, 아예 무시해버리는 것이다. 참고로 이런 식으로 학문의 근간이 되는 이론 체계를 흔들 수 있는 질문이 특정 학파나 이론 체계에서 무시되거나 경시되는 것은 학문의 역사에서 드물지 않은 일이며, 법가 사상은 신이 내려준 무언가가 아닌 어디까지나 인간들이 만든 것이므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결코 놀랍거나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실 사상 측면에서 법가의 가장 큰 문제는 부국강병을 위한 스킬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법가는 막장에 빠진 천하를 건져내는 것을 목표로 잡은 유가나 묵가와 비교할 때, 때문에 본질적으로 백성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지, 어떻게 이들을 구제시켜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기껏해야 '나라가 부강하면 백성들도 행복하겠지' 같은 두루뭉실한 이야기뿐인데, 비록 한비자는 당계공과의 대화에서 '백성의 이익'이라는 나름대로 숭고한 목적으로 말했으나, 법가가 말하는 백성의 이익은 전체주의에서 말하는 의미로서의, 개인이 철저히 배제되는 이득에 가깝다. 위에서 말한 전국통일 이후의 법가를 다시 살펴보자. 진이 전국을 통일하고 나서, 정말 태평성대가 열렸냐하면 물론 결코 아니다. 물론 후대에 유가를 밀어주던 통일 왕조들도 완전한 태평성대를 구현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유가의 경우는 통일 이후에도 '이렇게 저렇게 하면 태평성대가 온다'라는 대안을 제시할 줄은 알았다.[7] 하지만 법가는 그 자체로는 단지 부국강병을 위한 스킬에 불과하기에, 부국강병을 구현한 이후에는 무엇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대안이 제시되지 않는다. '오랑캐들도 때려잡자'라는 목적 아래에 또다른 전쟁을 일으키거나, 혹은 끊임없는 준전시체제로 민중을 압제하는 게 고작이다. 이런 면에서는 법가가 그토록 비판하던 유학자들보다 훨씬 비현실적이다. 즉 난세에는 써먹을 만한 사상이나 평화로운 시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사상인 셈

관중에서 웅거하던 진나라가 본격적으로 다른 전국칠웅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기 시작하자, 그 뒤부터는 상시적인 군사적 대립이 상정된 상황에서, 단순히 영토확장 뿐만 아니라 국가의 존립을 위해서 다른 전국칠웅과 이민족을 견제하고 무너뜨릴 필요성이 그 무엇보다 강조되었다. 그리고 이런 진나라의 정치적 상황이 지속되는 한, 진나라 군주의 목표는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국강병을 실행하고 연횡책등을 비록한 정치적 술수를 통해서 다른 국가들을 이간해야 했다. 그 와중에 내부적인 정치적 혼란 자체를 철저히 방지하고, 사실상 상시적인 계엄 상태가 유지되는 것이나 다름없는 진나라의 내부적인 상황에서 군주, 신하, 백성은 어느정도 이해관계가 일치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일사분란하게 작동하는 하나의 거대한 전쟁 기계가 필요하다는 공동의 목표 하에 법가적 이론 체계는 더할 나위 없이 효율적이고 정확하게 작동했다. 즉 단순히 법가체계를 통치에 근간으로 삼았기에 진나라가 다른 전국칠웅에 비해 우월했다는 판단은 현실과 맞지 않다. 진나라는 다른 중원의 국가들과 달리 변방의 척박한 지역에서 여타 다른 이민족들과 군사적으로 대립하고, 경쟁하면서 생존을 위한 투쟁을 거듭하면서 일찌감치 상명하복의 질서를 지닌 병영국가적인 성향을 보유했다. 그후 관중의 넓은 농토를 차지한 이후 농업에 치중하면서 군사적 분쟁을 억제하는 등, 국력을 다질 기반이 오랜 기간 있었고, 거기에 육국과의 대립 및 호족 억제에 대한 군주와 법가이론가들의 이해관계 등이 잘 들어맞는 등, 법가사상과의 궁합이 유달리 좋았기 때문에 법가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경시할 수 없는 것은 이런 엄격하고 가혹한 정치체제는 마치 굴러가는 수레바퀴 같아서 한번 굴러가기 시작하면, 그 역풍이 끼칠 수 있는 정치적 위협이나 모반에 대한 공포 때문에라도 이를 시행하는 지도층이 더더욱 냉혹하고 가혹해질 수밖에 없는 성향을 가진다. 실제로 유가를 표방했으나 상시적인 전쟁과 정치세력의 분열에 대한 위협에 시달린 조조 치하의 위나라가 과거 진제국 못지 않은 강력한 법령 실행과 실질적 군주 가문인 조씨 천하를 위해 조조에 대한 충성경쟁을 일으키고, 신하들을 점차 숙청시키는 방향을 보이는 등, 법가적 통치를 지향하면서 보인 것이 이런 실제와 일치한다.

그리고 법가 사상의 옹호자들은 결국 대놓고 반항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진나라는 좋은 나라며 법가의 통치는 성공적이라는 결론으로 쉽게 이행하곤 한다. 하지만 법가 사상의 통치 시스템 하에서는 아예 대놓고 반항할만한 종자들은 그 기미만 보여도 숙청되고, 법령에 순응하는 사람만 남기 쉽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 특히 이러한 종자들을 걸러내기 위해서 상군과 한비자, 이사등은 엄격한 법령 실행 뿐만 아니라, 가혹한 형벌을 상보다 더 강조하면서 끊임없이 권위에 대한 복종과 공포에 의한 순응을 활용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실행했다. 이미 상앙의 정치 체계 확립을 거치고, 군주들에게 그 유용성을 입증 받아 법가적 통치를 장기간 유지해온 진나라의 백성들에게 법이 잘못됐고, 나라가 개판이니 고친다는 식의 발상이 어려웠으리란 것은 생각하기 어렵지 않다. 실제로 과거 진나라의 법 체계와 정확히 반대되는 시스템인 약법삼장이 한고조에 의해서 발표하자, 이에 대해서 진나라 백성들은 환호하면서 이에 순응한다. 이것은 단순히 가혹한 정치에 대한 반감 뿐만 아니라, 일단 정해진 법령에 순응해야 한다는 공동체 의식을 공유한 결과물로서 이해해도 아주 그르지는 않을 것이다.[8]

그리고 위에서 열거된 문제점들은, 진나라가 나머지 6국을 제패하고 난 이후에 수면으로 부상하며 진 제국을 파멸로 이끄는 거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위에서 언급되있듯이, 진나라와 법가체제의 좋은 시너지는 어디까지나 외부 위협이 끊임없이 상존하고, 이로 인한 불안과 공포, 부국강병에 골몰할 수밖에 없는 군주의 심리적 상태가 지속되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육국의 제패가 끝나, 더이상 부국강병을 위해 군주가 노력할 필요 자체가 없어지자, 진 제국의 군주들과 법가체제의 이론가들에게 남은 것은 도구가 된 신하와 백성, 그들이 찍소리도 하지 못하게 통제하는 강력한 법령과 행정 시스템과 군사력, 그리고 비대해진 군주의 자아 뿐이었다. 목표를 잃은 군주의 자아는 방향성을 잃고 이룩한 성과를 끝도없이 자찬하며, 스스로를 치하하고, 또한 군주의 영도력이 천년만년 지속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불로장생이나 대규모 무덤건설 등을 강요하게 된다. 그리고 부국강병을 위해 사용되었던 법가식 통치시스템은, 오로지 군주의 욕망과 의지에 종속되어 이를 강화하기 위한 시스템으로 빠르게 탈바꿈 된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현재의 국력과 민심, 경제력등을 세심하게 고려하여 만들어졌어야 할 만리장성이 단지 군주의 말 한마디에 전 육국의 백성들을 쥐어짜는 형태로 시행되고, 부국강병이나 민심안정과는 하등 상관없으며 백성들의 불만만이 커질 수밖에 없는 노역, 징발 등이 상시적으로 이뤄지고, 효율적으로 국가를 관리해야 할 군현제와 같은 시스템이, 효율적으로 백성들을 뽑아서 부려먹는데 사용되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리고 법가의 대표적인 이론가이자, 실행자였던 이사는 이런 식으로 국가를 좀먹어가는 군주의 판단을 견제는커녕, 이를 부추기는 행태를 지속한다. 법가의 실패를 부정하기 위해서 이 모든 막장 행각을 조고와 호해에게 전가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진 제국의 멸망은 통일 이후 시황제의 말년 통치에서부터 그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법가는 군주에게 옳은 것을 권장하고, 옳은 길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군주조차도 물러나야 된다고 보았던 유가와는 다르게 군주의 말이 법이며, 그에 순응하여 스스로를 보존하는 것이 가장 옳다고 주장한다. 이사가 그전까지 부국강병을 위해 자신의 모든 지식과 지혜를 짜냈다가, 말년의 진시황이 불로불사니, 내 업적이나, 자신의 신적 지위를 위해 다른 소리를 하는 놈들은 아닥시켜야 한다고 소리를 늘어놓자 또 이를 위해서 자신의 온갖 능력을 발휘하는 장면은, 유가의 입장에서 보면 어처구니 없는 행보였으나, 법가 입장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행위였다.

그리고 시황제가 사망하게 되자, 실권자로 등극한 조고, 그리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리석은 행보로 순식간에 그 강대했던 진 제국의 국력을 말아먹으며 새로운 혼돈기의 문을 연 호해 또한 이런 법가적 통치체제와 이론을 무기삼아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했다는 것을 결코 잊으면 안된다. 특히 시황제의 옆에서 오랜 기간 진 제국의 통치 시스템을 고찰하고, 이에 대한 이론에도 매우 빠삭했던 조고는 법가가 가진 한계를 너무나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실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이미 시황제 시기에 이르러 정점에 이른 군주의 막강한 권한과 권위, 직언 간언은 없고, 그저 주인에게 개처럼 복종하는 관료집단과 재상들, 그리고 그들에 의해 통치되는 제국 전역이라는 현실을 파악한 조고는 호해라는 허수아비를 내세워 손쉽게 국정을 농단하기 시작한다. 사구정변을 일종의 만들어진 신화나 우화쯤으로 해석한다고 쳐도, 호해라고 하는 실권자의 의중을 장악한 조고는 부소를 종이쪼가리 하나로 숙청하는데, 얼핏 보면 자살한 부소가 어리석다고 볼 수 있으나, 이미 군주에 의중에 신하와 백성은 물론이오 왕족까지 철저히 복종할 수밖에 없는 진 제국의 성격에 의하면 오히려 당연한 일로 해석될만하다. 법가 사상을 통해 확립된 군주는 단순한 실권자가 아니라, 모든 것의 생사여탈권을 지닌 절대자에 가깝고, 진 제국의 시스템이 이를 위해 굴러가는 상황 속에서 부소가, 아무리 사망했다고는 하나 죽은 절대자의 말을 쉽사리 거역하는 것이 가능키나 했을까?

그리고 조고는 같은 방식으로 법령과 군주의 의지를 무기삼아 위협이 될 왕족들을 빠르게 숙청하기 시작한다. 그것도 사지를 찢는 가혹한 퍼포먼스등을 통해서 만방에 이러한 행위를 알리면서. 그 와중에 이사는 무엇을 했는가? 딱히 한 게 없다. 법가 이론에서 신하는 군주의 의지에 간접적으로만 접근이 가능했고, 묵가나 유교처럼 사상적 근간에 위치한 가르침을 통해 왕을 질타하는 행위 따윈 상상도 할 수 없었고, 설령 그렇게 해준다고 해도 같이 직소할 선비나 지사 따윈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사는 조고에 의해 군주와의 관계가 차단된 상태에서 한없이 무력한 존재로 전락한 것이다. 그렇다고 옳은 말을 하기에는, 그가 평생을 두고온 연마해온 법가의 이치에 옳은 말같은 개념을 세우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걸 상정하지도 않고, 오히려 조롱하는 법가의 사상에서 군주를 가로막을, 그것도 실권자를 가로막고 그 향방을 바꿀 수 있을만큼 정교하고 확고한 논리를 무슨 수로 만든다는 말인가?[9]

결국 이사는 현실의 다른 정치가들이 해볼법한 파당의 형성이나, 정치세력의 결집 따위의 수를 써보지도 못한 채 고립된다. 우스꽝스럽게도 군주라는 절대 권력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법가 이론가의 삶에서, 군주의 의지를 거슬러야만 쓸 수 있는 처세나 모략 따윈 성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사는 자기가 만드는데 일조한 현실에서 갈피를 잃고 헤매기 시작한다. 그는 황제가 그를 거부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멘탈이 붕괴되어, 무려 신불해부터 상앙, 한비자에 이르기까지 법가 이론가들의 학설을 하나하나 나열하며 호해의 개삽질과 막장행각을 합리화하는 아부를 시전한다. 이 대목에서 법가가 그토록 부르짖던 부국강병이며, 통치의 합리성이란 것이 무엇이었는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호해와 이사 사이의 관계는, 그전의 시황제와 이사 사이 만큼 긴밀해지지 못했고, 오히려 조고에 의해 뒷공작을 당하면서 점점 호해의 미움을 사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제서야 이사는 호해가 나라 말아먹을 놈이니, 진나라는 끝장났니 같은 소리를 하며, 법가가 그토록 무시하던 옛 예교와 고대의 정치와 같은 유교식 정의를 그제서야 들먹여가며 현실을 지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사는 지사나 충신이 아니었고, 기껏해야 조고가 황제의 눈을 흐린다느니 하면서 현재 돌아가는 판을 읽지 못하고 끊임없이 호해에게 자비와 지지를 구걸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이미 조고에게 완전히 조종당하는 꼭두각시인 호해에게 이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소리였고, 그는 만고의 충신 조고를 지탄하는 야심가 이사가 되어 조고에게 죽도록 고문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는 자결조차도 못한다. 그는 그토록 법가 사상에 충실하며 황제의 충실한 도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모든 것을 잃고, 삼족이 멸족되기 직전까지 몰린 자신의 처지를 제대로 고찰하지 못하면서 그래도 내가 지은 죄가 없고, 모반할 뜻이 없음을 밝히면 황제가 용서는 해줄 거라고 믿으면서 버티기를 시전한다.

그렇게 조고의 빈객들에게 천번 넘게 매를 쳐맞고, 결국에는 꾸미지도 않은 역모죄를 꾸몆다는 거짓 토설을 할 때까지 그저 끝없이 고문을 당하던 이사는 마지막 상서에서 조차, 자기의 삶에서 무엇이 어긋나 있었는지 고찰하지 못한 채, 일생토록 궁구하고 이루었던 업적을 최후의 상서에서 열거하고, 그 끝에는 이것이 본인이 지은 죄이니 황제에게 용서를 구한다는 대목으로 이를 마무리한다. 이를 자신의 끝도 없는 기여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죽음에 몰아넣은 진 제국에 대한 배반감에 찬 울분이었는지, 자기가 행한 업적을 봐서라도 목숨이라도 살려달라는 구걸로 보든지 간에, 이사는 그가 열거한 대업적들에도 불구하고, 그가 제대로 통찰하지 못하고, 방비하지 못했던 법가 시스템의 함정과 자신의 실책으로 가장 끔찍한 형태로 몰락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이사는 엄청난 구타와 고문도 모자라 오형을 당하고, 요참형에 삼족까지 멸족당하는 최악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10]

이런 식으로 법가적 통치 시스템의 빈틈을 뼛속까지 이용하는 조고는 이사의 숙청 뒤에도 이를 이용해 끝없는 권세를 누리게 된다. 호해가 군주는 그 권력을 마음껏 누리고, 그를 통해서 군주가 원하는 모든 것을 충족하기 위해 권력과 국가를 이용해야 한다는 조고의 설득에 넘어간 것은, 그것이 그의 입맛에 맞는 매우 달콤한 말이기도 했으나, 군주가 끝없이 궁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국가란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과 고려가 턱없이 부족한 법가사상 체제의 공백을 교묘하게 이용한 조고의 능력에 기인했다. 호해가 평생을 두고 공부하고 익혀온 진나라의 방대한 법령과 법가에 기반한 학문체계 속에서는 그런 질문 따위가 존재할리 만무했다. 군주가 뭘해야만 권력을 장악할지, 신하와 백성을 어떻게 통제해야할지, 그를 위해서 법을 어떻게 써먹어야 할 지에 대한 내용이 그득한 법가적 이론체계에서 이미, 그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다면? 군주가 할 일은 자기의 욕망을 채우는 것 말고 뭐가 또 있겠는가? 라는 조고의 설득은, 다른 유파에서는 기겁할 소리였지만, 법가에서는 매우 맞는 말이 될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뒤로 계속해서 이어진 막장 치세와 진승과 오광의 난에서부터 장한의 토벌이 좌절되고, 조고가 호해를 살해한 뒤, 영자영을 새로운 허수아비로 삼으려다 역으로 살해당하고, 사실상 진제국이 그 자리에서 붕괴되는 과정에서도 법가가 가진 한계는 끝없이 노출된다.

당장 진나라의 멸망을 불러온 진승과 오광의 반란도 기일 내에 당도하지 못하면 바로 참수형당하는 막장 법률 때문이었다. 진나라 자체는 상대적으로 건조한 지역이었으므로 태업을 하지 않는다면 대체로 정해진 기일 내에 도착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지만, 통일 과정에서 흡수한, 비 때문에 발이 묶이는 지역에서는 이는 그야말로 죽으라는 법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당시의 법가는 이런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만한 역량이 없었다.[11][12][13].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면 반항하면서 죽겠다는 것이 사람들의 심리[14]이고, 막상 진승과 오광이 반란을 일으키자 사방에서 이에 호응하는 반란이 대규모로 발생하여 결국 진나라를 붕괴시킨 것을 보면 당대 법가가 보인 백성들 대한 통치 능력의 실태를 짐작하기에 충분할 것이다.[15]

진나라 법가는 농업에도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데 농사도 나라가 정한 방식으로 짓지 않으면 처벌되었다. 예를 들어 밭고랑 넓이도 나라에서 정한 면적으로 하지 않으면 처벌대상, 파종 및 추수도 나라에서 정한 방식 아니면 처벌되는 통에 농민들의 불만이 가중되었다. 농업에 종사하는 분들도 아시겠지만 같은 작물이라도 지역에 따라서 파종시기나 추수시기 그리고 땅 가는 방식도 조금씩 차이가 난다. 하물며 중국처럼 광대한 나라에서는 지역별로 기후나 토양이 확연히 다른데 그것을 진나라 기후기준으로 농사 지을 것을 강제로 시행하니 농사가 잘 될 턱이 없다.[16]

진 제국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진 제국의 법령에 익숙한 옛 진나라의 땅 백성들의 지지와 군사력, 그리고 그들을 효율적으로 동원할 수 있었던 행정능력은 여전하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 장한의 행보였다. 육국의 땅에서 발생한 민란에 온갖 야심가들과 육국의 후예들이 편승하는 과정에서 장한은 진 제국의 장점을 살려서 진승과 오광의 군세를 개박살내버리는데 성공하며, 반란의 불길을 최소 절반 이상 잡아내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사실상 스스로가 군주나 다름없는 조고는 정치적 위협의 대상으로 장한을 인식하고, 반란이 어느 정도 잡힌 이상에서 그를 숙청하려 든다. 물론 역사에서 군공을 세운 장수를 불필요하게 견제하다가 군사적 위협에 의해 망하는 케이스는 수두룩하나, 철저한 진 제국의 장수이자 신하였던 장한은 무려 20만이나 되는 군사력과 잇다른 군공으로 인해 얻은 신망, 그를 보좌할 사마흔과 동예같은 측근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역성혁명의 대의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다. 군주에게 절대 복종해야 하는 법가적 통치체계에서 관직을 거치고 성장해온 장한에게 있어서 군주가 내 목을 조르는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 따윈 없었다. 반란을 진압하라는 군주의 명령에는 충실히 복종했고, 놀라운 성과를 거뒀으며, 왜 반란이 발생하고 번져가는지를 고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그는 칼을 돌려 제국의 암덩어리를 제거할 수도 없었고, 온갖 군벌이 난립하는 군웅할거의 시대가 도래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예 생존을 위해 독자 군벌화하는 행보 따위를 보일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그가 살아온 시스템 하에서 장한은 스스로의 목과 처지를 남에게 의탁함으로서 새로운 군주에 복종하는 선택지 말고는 택할 수 있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 조고와 호해의 최후 또한 통치의 근간이 오염되어 버린 법가적 시스템이 얼마나 더 비참하게 망가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지록위마의 고사에서 처럼, 호해를 완벽한 자신의 개로 만드는데 성공한 조고는, 장한의 패배등으로 진 제국의 끝물이 보이자 호해-> 유방, 혹은 다른 군벌이라는 환승을 위해 거리낌없이 주군을 주살한다. 모든 것이 자신이라는 군주를 위해 돌아가는, 한마디로 우주의 중심에 군주인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던 호해는 죽는 순간까지도 그 시스템을 이용한 조고에 의해 자신이 농락당했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이런 식으로 자신이 편승할 군주를 끝없이 모색하며, 그를 이용할 궁리만을 지속했던 조고는, 그 와중에 어그로만 끌고 실질적인 세력도, 명분도 없는 자신을 유방이 걷어차버리자, 이번에 또 다른 환승을 기획하며 영자영에게 접근했다가 죽임을 당함으로서 끝장나 버린다. 이런 조고의 삶과 죽음에서는 당연히 정치가로서 국정운영에 대한 성찰이나 목표의식도 없었고, 이해나 무엇을 이용하고, 버릴 것인지에 대해서 현실 전반을 꿰뚫는 통찰도 엿보이지 않는다. 그는 평생을 두고 자신의 삶을 지배해온 통치 시스템에 철저히 길들여져 있었고, 그것을 만들어낸 정치사상을 자신의 정치적 행위의 근간으로 삼으면서, 이를 자신의 욕망을 위해 철저히 이용하는 삶을 살았다. 그의 현실적인 감각, 정치적 판단은 그 개인의 영달을 추구하라는 욕망을 제외하면 이러한 법가적 통치체제와 이론에 철저히 포섭되어 있었으며, 그것이 그의 성공과 실패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군주의 권력, 신하의 순응, 엄격한 법령이 끝없이 강조되는 시스템은 바로 조고처럼 그런 시스템에 기생하는 기생충이 가장 성공하기 쉽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조고가 보여준 시황제->호해->유방->영자영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이용할 주군을 찾는 행보와 군주를 지탱하는 시스템에 끝없이 기생하려는 태도는 그 권력과 권위가 확실할 때는 그 무엇보다 효과적으로 작용해 그를 최고의 권력자 자리까지 끌어올리나, 그 권력과 권위가 바닥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자 그를 바닥에 내동댕이쳐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가고, 그가 의존하던 시스템까지 붕괴시키고 만 것 이다.

이렇게 군주와 신하를 몰락의 길로 끌고간 법가의 통치 시스템은 약법삼장이라는 전혀 다른 프로세스가 등장했을 때, 백성들에게 마저 버림받음으로서, 후안무치하고 탐욕스러운 권력자들의 지배보단 법에 의한 혹독한 지배가 낫다는 모토마저 부정하기에 이른다. 참고로 한고조가 약법삼장을 제시한 곳은 바로, 진 제국의 핵심인 관중으로 누대에 걸쳐 진나라에 충성해온 신민들이 뿌리내린 곳이었다. 기존의 법을 모조리 다 버리고 법 3개만 남긴다는 파격적인 결정에 그들이 어떻게 답했는가? 법가 옹호론자들의 주장대로라면, 왜 진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의향에 관심이 많은 유방에게 엄격하고 세밀한 법으로 우리를 보호할 기회를 달라고 주장하지 않았을까? 제멋대로인 권력자들보단 법에 의한 통치가 더 좋았고, 그것이 입증된 것이 진나라 아니었던가? 그러나 현실은 약법삼장으로 법을 간략화시키고, 과거의 강력한 법치와 혹형을 부정한 유방은 사마천의 기록에 의하면 진나라 백성들에게 '유방이 왕이 안되면 어떡하나?'라는 걱정까지 살 정도로 인기 대폭발이었고, 항우의 18제후왕 분봉 이후, 진나라의 관리출신이었던 장한과 다른 두 제후는 신안대학살의 죄업이라는 큰 문제가 있었음을 감안해야 하나, 똑같은 법가적 통치에 익숙한 관리자들이었음에도 철저히 외면당하고, 관중 지방의 백성들은 유방의 가장 충실한 지지자가 되어 초한쟁패기에 유방이 버틸 수 있는 저력이 되어주었다.

참고로 한나라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고 나서 일어난 유방의 이성왕 숙청, 초창기의 조참을 위시한 재상들의 도가적 정치성향, 전한의 최전성기를 열었던 문경지치는 결국 국가의 통치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결국 민생을 안정화시키고, 국가 내부의 정치세력이 지나치게 분화되고 갈등하는 것을 막는 한편, 국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만큼의 군사적 역량을 확보하는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했던 것은 가혹한 법령과 신상필벌, 군주의 절대 권력이 아니라, 민생과 국가의 안녕이 가장 중요하다는 목표의식, 그리고 이러한 정치 제도의 중심에 있는 군주가 스스로 모범을 보이며 신하와 백성에게 신뢰감을 주는 행동과 그에서 비롯되는 유연하면서도 현실적인 정책 실현에 있었다. 그게 실현되자 국가는 자연스럽게 안정일로를 걸을 수 있었으며 굳이 강한 신상필벌이 아니어도 백성과 신하는 군주에 충성하면서 안정적인 통치가 가능했던 것이다.

후한말이나 전한 말의 유가적 통치체계가 실패하는 과정과, 유교를 숭상하였던 조선이 처참하게 망한 역사에서는, 백성의 삶을 온존케하고 사직을 보존하며, 군주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하고 그로 나아가게 한다는 유교가 어떻게 타락하는지를 알 수 있다. 즉, 현실적 제반을 고려하는 '중용'과 '실질'을 잃은채, 형식과 담론만을 끝도 없이 몰아붙이며, 그 실질보다는 껍데기를 내비치며 현실과 괴리되면서 붕괴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유가와 다르게 '실질'과 '현실'을 논하며 이기적 인간본성을 담론의 중심으로 내세우며 이러한 인간을 통제하라는 통치철학을 내세우는 법가적 이상론과 방법론은 유가에 비판적이거나, 도덕에 기반한 정치에 실망한 사람에게 일견 매력적으로 느껴지기 쉽다. 그러나 법가적 통치의 극을 달린 진 제국의 몰락과 그를 추종한 대표적 사상가들의 비참한 말로[17]는 다른 방향에서 많은 것을 시사한다.

집중된 권력의 말 한마디에 기계처럼 일사분란하고 매우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기계와 같았던 진의 행정과 통치 시스템, 그리고 법령을 통해 그에 순응하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백성과 신하, 그리고 이러한 권력의 집중을 공동체 전반의 이익을 위해 투사할 수 있었던 현명한 군주들의 존재는 그야말로 부국강병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모습을 보이며, 진 제국의 성공 시대를 열어젖혔다. 그러나 그 방향성과 목표에 대한 성찰이 부재한 상황에서, 그들이 일차적으로 내세웠던 육국제패와 부국강병이라는 모토가 실현된 순간, 군주, 신하, 백성의 삶을 떠받치고 그들의 공동체를 작동하게 만들었던 정교한 이론체계와 행정, 법령은 가장 효율적으로 그들의 숨통을 조이고, 상상을 제약했으며, 결론적으로 그들 모두를 파멸로 이끌었다. 사마천의 사기에서 상앙, 한바지, 이사와 같은 인물을 기록하며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러한 성찰의 부재와 시스템에 대한 순응, 그리고 이기적인 인간에 천착했던 그들의 사고방식이 만들어낸 자승자박적인 행태들이다. 상앙은 엄격한 법령과 바뀐 군주의 의지에 의해, 스스로가 내세웠던 순응하는 신하라는 탈을 벗고, 그가 내세운 이론체계를 배반하다가 죽임을 당한다. 이사는 철저히 군주를 위한 도구이자, 그에 순응하는 처세로 성공가도를 달리지만, 그 군주의 의지와 엇나가는 순간 이도저도 못하다가 개죽음을 당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론을 집대성한 한비자의 죽음 또한 이러한 연장선상에 있다. 법가 옹호론에서는 한비자의 죽음에 대한 이사의 개입을 사익을 배제한 정치적 행위로 묘사하면서, 일종의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한다. 그러나 한비자의 죽음을 군주의 치세에 위협이 되는 불안요소를 제거하기 위한 신하들의 조건반사적인 정치적 행위로 보던, 차기에 군주의 사랑과 지지를 빼앗길 수 있었던 이사가 자신의 처지를 두려워하여 실행한 경쟁자 제거라는 비도덕적 행위로 보건, 법가의 사상은 이를 부정하기는 커녕 철저히 긍정하고 이에 대한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한다. 신하로서 군주의 차후 근심거리를 제거하는 것은 당연하고[18], 군주의 밑에서 살아남기 위해 한정된 총애라는 자원을 얻어내기 위해서 자기보다 뛰어날지도 모르고, 갈등할 수 있는 또다른 경쟁자를 제거하는 것도 당연한 처세다. 한비자 또한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 추구했던 이론체계에 의해서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 였던 셈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법가적 통치체제의 일부를 국가에 성공적으로 이식하려고 했고, 또 성공했던 정치가들은 법가적 통치가 가진 한계에 대한 깊은 성찰과 이해를 통해 이를 억제하고자 했다. 촉한의 재상 제갈량은 법령의 실시를 통해 국가기강을 단단히 잡고, 상시적인 군사적 위협과 한나라의 부활이라는 목표를 위해서 군사적 역량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국가의 존속과 백성과 군주를 위한 것임을 천명하며 그 뜻을 잃지않고, 정책의 실행과 관리에 있어서 융통성과 세심함을 발휘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같은 의미에서 상군서와 같은 법가적 이론 체계에 대한 저술이 사라지지 않고, 통치철학에 편입된 것은 사실이나, 오랜 기간 부침을 겪으면서도 유수의 학자를 끝없이 배출하며 학파적 전통을 잃지 않은 유가와 달리 법가가 진 제국의 멸망 이후, 실질적으로 법가의 적통을 이은 학자들을 배출하지 못하고 제자백가의 하나로 잊혀져 간 것도 결과적으로 올바른 목표와 유연한 배치및 세심한 고려가 뒷받침 되었을때에만 비로소 제대로 쓰일 수 있는, 법가의 이론체계 내에서는 제대로된 답을 찾지 못한채 다른 학문 유파에 의존해야 하는 현실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 법가의 이론체계에만 의존하면 법가의 서술과 이론의 궁극적인 목표가 군주의 뜻과 법령에 철저히 복종하기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런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고, 그로 인한 부작용이 너무나 심각하므로, 군주와 신하, 백성 전반이 서로 납득할 최소한의 가치와 그것에 대한 성찰이 뒷받침되는 유가와 같은 다른 학문이 가져온 고찰이 뒷받침 돼야만 했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중요한 점은 법가사상에서 말하는 '법'이 오늘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법과 다르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현대사회에서 법이라는 것은 지배자가 횡포를 부릴 수 없도록 돈, 권력 등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범죄, 상업계약 등의 영역에 있어서 모두가 공평한 권리와 책임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 라는 말이 바로 이런 뜻이다. 그러나 법가에서 말하는 법이란 이런 권력자에 대한 견제 따위와는 일만 광년 정도 떨어져 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다. 한비자와 법가사상은 철저하게 왕 입장에서 어떻게 하면 국가를 왕 마음대로 다루고 백성, 신하들을 철저하게 왕에게 복종시킬 것인가를 논하고 그 방편을 가르치는 책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법가사상은 딱히 사상이라기 보다는 철저한 처세술, 현실 권력 장악술에 대한 책이라고도 볼 수 있고, 그 내용을 거창한 사상과 이데올로기 적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비밀'같은 처세술 책의 전국시대 국왕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법가적 정책으로 큰 성공을 거둔 상앙의 경우가 재미있는데 처음 상앙은 진효공에게 가서 '성인의 도'와 '천자의 도'를 먼저 설했다. 하지만 진효공은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데 이에 상앙은 '패자의 도'를 설했고 그러자 진효공이 깊은 관심을 보이며 중용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앙이 법가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과 '성인', '천자', '패자'가 무엇이냐는 건데 성인은 삼황오제, 천자는 하은주의 성군들 그리고 패자는 춘추오패, 준패자 등과 같은 이들을 일컫는듯 하며 이들이 걸었던 패자의 길은 존왕양이라는 이름으로 (명목상으로나마) 천자를 섬기고 오랑캐를 물리치며 타 제후국의 으뜸이 되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진효공이 춘추오패, 준패자들이 따랐을만한 길을 골랐다는 것과 상앙이 법가와 관련이 깊다는 점은 결국 법가는 제후국들의 우두머리가 되는 '패자의 도' 이며 '패자의 도' 이기에 진나라가 여러 나라들이 난립한 전국시대에는 강력한 효과를 나타나게 했지만 정작 '천자의 도'가 필요한 통일 왕조시대에 이르자 제대로 된 효과가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고 해석해도 될 듯

그리고 한비자와는 관계없이 법가 뿐 아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강한 힘을 쥔 군주에 의해 좌지우지 될 수 있다는 문제점도 빠질 수 없다. 법가에 따르면 어쨌거나 군주가 큰 권력을 가져야 한다. 허나 군주가 이런 권력을 가지고 법가사상을 버리면? 실제로도 진나라가 법가를 채택하기는 했지만 초나라도 초도왕 시기, 오기를 등용하여 비슷한 정책을 취하기도 했다. 하지만 초나라는 진나라와는 달리 도중에 이런 정책을 중지시켰는데 여기에는 오기를 미워한 귀족들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초도왕 사후 즉위한 초숙왕이 상앙만 쳐내고 법가는 유지한 진혜문왕과는 달리 오기도 내치고 그의 정책도 내쳤기 때문이다. 이 점에 관해선 유가도 완전히 자유롭진 못하나[19] 적어도 유가는 지방 등지에서 서원 등의 교육시설을 통해 유가를 공부한 사람들이 중앙 관직에 진출하여 끊임없이 왕을 견제하고 어쨌거나 유가에 따른 정치에서는 왕에게 무한한 권력과 동시에 이를 마음대로 휘두르지 못하는 장치도 제법 채워져 있었기에 법가보다는 안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어차피 전제군주제 하의 사상인 만큼 군주가 폭주할 시의 대책이 반정이나 역성혁명밖에 없다는 한계는 있지만 어차피 유가에서도 맹자의 경우엔 그것마저도 당연한 일로 귀결하기는 했다.[20]

이러한 문제점을 부채질해주는 것이 바로 법가에서 중요시하는 세, 술, 법 세 가지 요소와 관련한 부분인데 상앙 시절부터 이 셋은 상호보완적인 존재로 인식되었지만 그래도 셋 중에 우위는 초기에는 법, 후기에는 세와 술로 서로 달랐다. 문제는 세와 술은 군주의 역량에 달렸다는 것, 또다른 문제는 안 그래도 세와 술은 군주의 역량에 달렸는데 그걸 더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갔다는 것이다. 즉 법가를 취하더라도 역량없는 군주가 나오면 그대로 폭삭 주저앉을 수 있는게 법가의 한계다. 거기다가 법가는 이런 상황을 대비한 장치를 마련하지도 않았다. 물론 유가도 시간이 지나며 처음 모습에서 변형을 거쳐 맹자의 역셩혁명론보다는 충효가 더 강조되는 등의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적어도 혼군이나 폭군이 나올 시에 대한 얘기 정도는 이미 있었다. 물론 이래도 일 안 할 군주는 일 안 하고 멋대로 할 군주는 멋대로 하긴 했지만 전제군주제 특성상 군주가 대놓고 배째면 어쩔 수 없는건 그 정치체제의 한계다. 그래도 유가가 더 나았던 것은 유가는 배째는 군주를 어떻게든 돌려놓을 방안을 생각하기라도 했지 법가는 그것도 없었다... 거기다가 유가는 이후 경연, 사관, 간관 등의 군주 견제장치들을 고안해내기도 했다.[21]

공교롭게도 전국 통일을 이룰 정도로 강대했던 진나라 진시황의 사후 형편없이 쉽게 무너져내렸다는 것은, 위 지적에 대해 많은 점을 시사한다.

3.1. 반론

다만 반대 의견도 있다. 영정 사후 진 제국의 붕괴는 법가의 경직된 통치철학 탓이라기보다는 어머니에 의한 군사 쿠데타를 겪은 탓에 절대권력 확립에 집착해 모든 사무를 스스로 처리하려고 했던 시황제 개인의 성격과[22] 2세 황제 호해의 무능함, 궁 내에서의 파벌싸움 탓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문제점 항목의 태반은 전제군주제가 가진 공통적인 문제를 마치 법가의 탓인것처럼 호도하고 있고, 사기 등의 기록에 나타나는 진 제도의 막장적인 측면도 검증되지 않은채 넘겨짚은 부분이 많다. 특히 사상으로서의 법가가 아닌 진나라에 실현된 법가를 까는 부분은 실제로 진나라의 행정과 법률의 구제적인 실물이 매우 부족한 상황에서 부족한 근거에 기반한 주장이다. 조고의 전횡으로 법과 원칙이 무너져 막장이된 호해시절을 예시로 법가를 까는 것도 매우 많은데 이는 구한말을 근거로 유교를 까는것과 마찬가지로 부적절하다. 조고의 전횡도 법가때문이라는데 환관의 전횡이 심했던 후한이나 명나라도 법가였나? 진나라가 망한이유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는 복잡한 문제인데 모든 원인을 오로지 법가사상 그 자체로 몰아버리는 것은 악의적인 낙인찍기에 불과하다.

결국 법가사상으로부터 나온 요체가 2000년간 이어지면서 전근대 동아시아세계를 관통하는 통치체계의 핵심으로 유지되었다. 법, 술, 세의 요체도 용어나 표현이 다를뿐 시대를 막론하고 제왕의 통치술의 기본이지 않은가? 법가사상에 일부 실패한 부분이 있으나 상당히 많은부분은 동아시아 역사전체에 걸쳐 중요하게 살아남았다. 부분의 실패로 전체를 매도하여 법가라는 이름은 욕받이가 되어 사라졌지만, 정작 전한의 제도는 진의 제도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마이너 리비전이었다. 흔히들 진의 제도를 법가사상과 동일시 하면서 진의 제도를 약간만 수정한 전한의 제도는 법가와 철저히 선을 그어 완전히 반대되는 것으로 취급하곤 한다. 나쁜건 다 법가가 근본적으로 글러먹은 탓이지만 좋은건 그저 수단일 뿐이라 법가 덕이 아니라는 식의 가불기... 법가사상에 분명히 결점이 존재하나 그것은 동시대 모든 제자백가도 마찬가지였으며 걔중에 실 정치에서 뚜렷한 성공사례를 낸 유일한 사상이 법가임을 상기하자. (훗날 크게 성공한 유가도 있지만 이 유가는 법가를 비롯한 여러제자백가에 나중엔 불교까지 듬뿍 첨가한 마개조 버전이라 비교가 안된다)

또한 진에서 법가를 수용하더라도 진의 법가사상이 법가 전체를 대변한다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을것이다. 즉 진나라의 체제적 문제가 법가사상에 의하다는 주장이 될수는 없다. 진나라의 실패를 법가 사상 자체의 근본적인 실패로 연결짓고 유학을 채용한 국가의 실패는 유학과는 별개로 보는것은 편파적인 시선이다.

진대의 법률에 대한 비판 부분도 고고학적으로 교차검증결과 잘못된 부분이 많다.

지나치게 가혹한 진나라의 제도의 예시로 "노역에 지각하면 사형"이 사기 열전의 기록만으로 사실처럼 퍼져있는데, 실제 발굴된 진시황대 진나라의 법조문을 살펴보면 진승과 오광처럼 노역에 지각하는 경우는 벌금형에 처하고 문맥상 벌금형의 대상이 노역에 동원되는 자가 아닌 인솔 관리로 추정된다. 사기의 기록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사실이다.

또한 농업에 관한 이야기도 의문스러운 것이 진은 상앙의 변법 이후 통일 이전 기간에 관중 밖에서 얻은 땅이 많다. 대표적으로 파촉지역은 관중과 그 기후가 매우 판이한데 100여 년을 무리없이 다스렸으며 농업생산량도 뛰어나서 진의 국력상승의 큰 기반이 되었다. 속설과 같은 피해가 있었다면 이는 어찌 설명할 수 있는가? 법가는 중농주의를 주장하였는데 상군서에서 나라의 가장 중요한 일 두가지가 농사와 전쟁이라고 수없이 강조 할 정도로 중히 여겼다. 애초에 농업기반 사회에서 발생한 사상이 농사 초보도 아는 사실을 고려하지 못할 리 없다. 이걸 고려 못했다면 중원 위나라 출신인 상앙이 관중에서 주도한 개혁이었으니 중원 기준으로 농사짓다가 바로 흉년 크리로 초장에 망했을듯.. 오히려 원활한 농업 생산력 증대를 위한 농사 메뉴얼이나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으로 보는 게 자연스럽다(법을 으레 형법과 민법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시스템을 규정하거나 메뉴얼적인 요소도 많다. 발굴돈 진률에서도 창고와 물자를 관리하는 방법의 메뉴얼에 해당하는 법조문이 큰비중을 차지한다). 뒷날 초한대전 와중에도 진나라 시절 창고에 가득 쌓아둔 곡식을 꺼내다 쓸 정도인데 전술한 내용이 사실이었다면 그게 더 대단하다..

실제로 수호지 진묘에서 발굴된 진률18종에 농업에 관한 규정이 일부 포함되었는데 (파종하는 종자의 양에 관한 규정) 파종을 얼마 이상 하되 토질이 좋으면 따르지 않아도 괜찮다는 구절이 있다. 이외에도 관리 책임과 죄벌을 다루는 조항이 아니면 생각보다 융통성 있는 조문이 많이 있다. 처벌도 주로 벌금형이 많으며 그 다음으로 노역형이 많은데 노동력과 돈에 집착하는 듯한 인상을 줄정도라 그 노동력을 상실하는 사형은 흔하지 않다. 사형도 간간이 나오긴 하지만 지각을 하면 사형을 받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수준이며 (지각시 인솔자에게 벌금을 부과하는 조항과, 노역에 도망쳤다 잡힌자도 사형이아닌 태형이라는 조문이 확인된바있다.)한대의 법률에 똑같이 등장하는게 대부분(애초에 복붙이긴 하지만). 다만 진시황의 폭정에서 관리들이 상부에 잘 보이고자 실적을 무리하게 올릴려고 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통치하거나 2세 황제 호해의 실정으로 국가기강이 무너져 관리들의 비리도 심해졌다면 사기에서 나온대로 법가의 의도와 다르게 사회가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애초에 진나라가 무너진 것도 진시황과 호해의 치세 동안 대규모 토목공사와 과도한 수탈 등 지도층의 무능과 부패로 인해 제대로 된 정치를 못했기에 무너진 거지 행정과 사법체계가 잘못되어서 무너진 게 아니다.[23]

특히 진 본토에서는 통일 이전까지 거의 200년 가까이를 법가의 통치가 매우 잘 돌아갔고 그덕에 초강대국이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통일 이후에도 진본토에서 큰 반발이 있었다는 정황은 없다. 이를 두고 법가를 탓한다면 유가적 통치를 하다 망한 수많은 후대 나라들은 모두 유가 때문에 망했다고 해야 하는가? 진의 멸망은 단기간에 본토의 몇 배나 되는 나라를 멸하고 그 정체성과 반감이 강하게 남은 상황에다 그들에게 생소한 제도까지 새로 정착 시키는 일을 진의 국력으로 감당치 못한게 아닐까? 당장 남북 통일만 해도 월등한 국력과 기술을 가진 남한이 북을 흡수해서 자유시장경제를 이식하는 일도 엄청난 혼란과 리스크가 예상되는데 그게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잘못은 아니다. 더욱이 명백히 말해서 중국의 첫 통일왕조는 실질적으로 진나라였고[24] 그 기간만 해도 주나라가 호경에서 낙읍으로 천도한 시점을 기준으로 봐도 500년이나 되어서 진나라가 천하통일을 하자마자 한 것이 화폐, 도량형, 문자의 통일이라는 것을 유념하자 그만큼 진나라의 천하통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참고할 선례가 있는 후대의 왕조들도 지방세력의 반발로 국초에 위기를 겪는 사례가 많았는데 진나라는 최초이면서 중앙과 지방의 이질성은 후대보다 훨씬 큰 더욱 어려운 환경이었다.

법가들의 '법'이 불문법이며 관리들은 자율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고 오로지 황제의 해석만을 기다려야 한다는 오해가 인터넷에서 퍼지기도 했지만, 법가 학자들은 관습법이나 불문법이 아닌 성문법, 그것도 명확한 형태로 규정되어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게 표현된 성문법을 요구했다. 또한 상앙은 상군서 2편 간령편에서 통치의 방식을 宿治(그날 일을 묵힌 뒤 처리함), 夜治(그날 일을 밤 새워 처리함), 日治(그날 일을 그 낮에 처리함)로 구분했는데 이 중에서 일치를 가장 좋은 것으로, 야치를 그 다음, 숙치를 가장 유해한 처리 방식으로 보았다. 또한 군주가 1000리 일을 판단하면 나라가 약해져 깎여나가고, 100리 일을 판단하면 나라가 부강해지고, 10리 일만을 판단하면 천자 노릇을 한다고 했으니 사실 법가가 군주의 절대명령을 중시하고 관리의 자율적인 일처리를 금기시했다고 볼 수는 없다. 실제 진나라 사법체계에서도 이를 위한 조치가 확인되었는데, 앞서 언급한 운몽 수호지 진간에서 법률문답이라고 하여 판결의 가이드라인이 되는 일종의 판례모음(실례인지 가상의 상황인지는 불분명)이 발굴되었다. 해당자료를 보면 관리들이 황제의 해석만 기다렸다거나 단순히 법조문을 기계적으로 처리한것으로 보기는 어렵고 자율적으로 판단하되 애매한 부분은 상급자에게 물어보고 처리하는 지극히 상식적인 과정을 거친것같다.

다만 자율적인 일처리를 싫어했다는 것은 보기에 따라서는 맞다고도 할 수 있다. 법가 학자들은 내용이 구체적이고 명백해서 사람들이 그 해석을 놓고 왈가왈부할 여지가 없이 오로지 복종만을 할 수 있는 법이 가장 좋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관리들이 오로지 황제의 해석만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근데 어째 지금의 유권 해석과 비슷한 거 같다

진나라의 법은 분명 가혹한 점이 많았지만, 일반 백성들 역시 군공 등의 공적을 세워 이십등작에 해당하는 작위를 얻을 수 있었으며 죄를 지어도 작위가 깎이는 것으로 대신할 수 있었다. 즉, 법이 가혹하기는 하지만 공적을 작위로 기록해두고 그만큼 봐주기도 했기 때문에 마냥 혹형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제도는 자연스럽게 통일 이후 옛 진나라 사람과 새로 복속된 육국(六國)의 백성들을 차별하게 된다. 진나라 사람들은 군공과 작위가 있으므로 가혹한 형벌을 어느 정도 면제받을 수 있지만, 패배하여 병합된 육국의 백성들은 혹형에 그대로 노출돼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야진간 등의 시황제부터 멸망까지의 행정문서들의 고고발굴 결과 기존 육국 작위를 인정해준 정황이 보인다. 시황제~호해 기간의 진 지방 행정문서인 <리야진간>에서 호적을 기록한 호적간에 "남양호인형불경모모"라는 기록이 있는데 학자들은 이중 형불경을 진작 불경에 준하는 초작(형=초. 장양왕 영자'초'를 피휘)을 가진 초나라 출신 백성의 작위를 페하지 않고 진의 작위고 인정해준것으로 해석한다. (<죽간 목간에 담긴 고대 동아시아> 성균관 대학교 출판부, 2011)

이 때문에 전한은 진나라의 법률을 계승했음에도 확실히 진나라보다는 너그러웠다고 볼 수 있는데, 한고제가 이십등작을 전 백성에게 나이와 재산 등을 보아 마구 나눠주는 특혜(…)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오히려 백성들을 위해서 만든 민작(民爵)이 무의미해지는 부작용이 나타났다. 모두가 가지고 있으면 희소성이 없어 쓸모가 없어지기 때문.[25]

4. 몰락과 영향

결론적으로는 법가는 너무나도 융통성과 목표의식이 없어서 일찍 몰락했다.[26]

그러나 '수단'에 불과하다는 법가의 문제점은, 역설적으로 법가를 흔적으로나마 존속시켜 이후의 동북아시아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진나라처럼 법가'만으로' 통치하면 폐단이 발생하지만, 법가 자체는 수단에 불과하기에 다른 사상과 함께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다. 진 이후의 왕조들은 법가 자체는 공식적으로 금지하면서도, 법률과 관료체제 자체는 법가에 준해서 만들며, 국가 통치 이념과 법의 적용에 대해서는 유가나 도가의 사상을 받아들여서 조치에 경중과 가감을 두었다.[27] 이렇게 하면 체계적인 국가체제를 만들 수 있음과 동시에 백성들의 민심을 끌어모으고, 법이 규정하지 않은 예외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럭저럭 백성들의 민심을 다독일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순수한 법가는 진 왕조와 함께 박살이 났지만, 법가는 유가에도, 도가에도, 심지어 현대의 조직론이나 리더십 등에도 쓸 수 있는 만능의 양념으로 살아남은 것이다. 실제로도 어떠한 사상만으로 통치를 하는 것은 쉽지 않아서 가령 유교적 통치를 모토로 하던 조선조차도 이 법가적 제도를 도입하기도 했고 중상주의 공산주의에 비판적인 자본주의 국가들도 이들 요소를 딴 경제체제를 시행하기도 했으며 오히려 너무 사상에만 매몰된 공산주의 국가들은 결국 자본주의 국가들을 따라잡지 못하고 패망했고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국가들은 생존했다.

전한 유방이 진나라 땅을 점령한 후 진나라 법을 폐지하고 약법 삼장만을 남기자 백성들이 기뻐했다는 사기의 기록을 두고 진나라의 법가 통치체제가 반발을 불렀다고는 하지만, 사실 전한의 법 체계는 진나라의 법을 거의 그대로 가져다 썼다고 해도 될 정도이다.

이중톈의 '이중톈, 정치를 말하다'에서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한나라 선제 유순은 아들 유석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한가(한 왕실)의 오랜 제도는 본래 패도와 왕도가 섞여 있으니 어찌 순수하게 덕교만 의지하겠느냐?" 이 말이 진실이다. 원래 그들이 말하는 도덕이란 주로 신민에 대한 것이지, 자신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고 싶으면 말하고,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하지 않으면 그뿐이다. 비록 ' 왕도'를 말하지만 그것은 남의 이목을 가리기 위함일 뿐, 골수까지 꽉 찬 것은 역시 ' 패도'였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역대 중국 왕조의 통치 비결(?)은 이념 사상은 유가를 지향하지만 실제로는 법가로 통치한다 정도가 될 것이다.

5. 사상가

6. 여담

한비자 노자 무위지치를 법치로 인해 이 가만있어도 제도가 알아서 해주는 것으로 이해해 도가를 법가에 응용한다. 단, 장자의 사상과는 큰 관련이 없다. 묵자를 봐도 어느 정도 법가와 통할 만한 부분이 보이며, 후기 묵가는 법가로 어느 정도 흘러들어갔다는 주장도 있다.[28] 특히 인간 개개인의 성품보다는, 다수의 인간 앞에 공평한 논리나 시스템을 갖추는 게 낫다고 본다는 점에서는 법가와 어느 정도 통한다. 묵가의 규율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기 자식도 기꺼이 죽일 만큼 엄격했다는 점도 법가와 통하는 면이 있다. 묵가의 "겸애"를 아가페적인 사랑[29]쯤으로 이해한 사람 입장에서는 뜨악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유가와는 대립적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일본 역사 콘텐츠 같은 곳에서 꽤 평가가 높다. 한비자의 주석집인 '한비자익취'도 1808년에 일본에서 나왔다. 일본은 유교 문화권이고, 에도 막부 시절 유교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았었고,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도 대부분 유교와 성리학에 심취한 사람들이었지만,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법치주의와 가장 유사한 법가가 시대를 앞서 갔던 사상으로 보이기 때문인 듯하다.

그래서인지 일본인들이 쓴 삼국지 관련 서적이나 글들을 보면 조조 제갈량 등의 삼국지의 유명인물을 전부 법가라고 주장하는 서술이 자주 보인다. 특히 조조 같은 경우는 한국에서도 철저한 반유가적 입장을 취했으며 실리적인 법가를 신봉한 인물이라는 평가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시대에는 이미 순수한 의미에서의 법가사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시대에 있는 유가 사상이란 게 춘추전국시대의 그 것과 완전히 같은 게 아닌, 여러 제자백가 사상이 혼합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전한의 한무제가 동중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백가쟁명을 끝내고 앞으로는 유술로만 논쟁하라(罷黜百家 獨尊儒術)'며 유가 사상을 나라의 유일한 관학으로 공인하고 이를 위해서 다른 제자백가 사상들을 유가 사상에 짬뽕시켜 사상적 통합을 했기 때문이다. 이후의 유가사상은 한무제 이전과 다르다고 봐야 한다. 법가 역시 이쪽의 대표적인 인사들인 이사와 한비자가 스승인 유학자 순자에게 가르침을 받아서 어느정도 유가의 영향을 받았고 한비자가 남긴 저서와 그에 대한 역자의 서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도가의 영향도 받았다.[30]그리고 해당항목에 보다시피 조조는 오히려 개인적으로 도가 사상에 심취해 있었다. 다만 상술했듯이 도가 역시도 유가처럼 이리저리 영향을 받고 혼합되었기 때문에 조조가 무슨 가를 신봉했느냐를 따지는 건 크게 의미가 없다. 어쨌든 흔히 "유가적"이라고 불리는 관점과는 거리가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다만, 법가를 통치에 활용했다는 것이 법가를 후대의 왕조들이 긍정했다는 것이 아니다. 법가적인 모습인 꼼꼼한 관리와 엄정한 처벌을 강조하기만 하면 아무리 유학자라도 '저놈 법가다' 모함하여 실각시키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 전한, 후한(그리고 후세의 조선에 이르기까지)의 제도를 비교하면 후대로 갈수록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유가적 관념이 강해지면서 오히려 관료 조직은 줄어들고 신하 개인의 재량권이 늘어나게 된다. 직책이 세분화되지 않고 오히려 진이나 전한 시대의 관직이 후한에서는 폐지돼버리는 일이 많았으며, 여러 직책의 업무가 하나로 통합되면서 관료제가 간략화 되어버린다. 이는 '행정비용'을 감소시켰기 때문에 민간의 자율성이 늘어나게 된다.

예를 들어 본래 진(秦)에서 군(郡)에 행정과 재판을 맡는 태수(太守), 치안과 군사를 맡는 도위(都尉), 군의 업무를 감찰하는 감어사(監御史)의 3명의 지방관이 부임시켰다. 전한에서는 군의 감어사가 폐지되어 상부 행정 단위인 주(州)에 부임하여 각 군을 순시하며 감찰하는 자사(刺史)로 바뀌었고, 후한에서는 도위도 폐지되어 태수가 군의 행정, 재판, 치안, 군사를 모두 겸하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권한이 통합되니 행정 비용은 줄어든 반면 태수의 권한이 너무 강화되어 '군주'나 다름없게 되고, 자사의 감찰 기능은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결국 이것이 중앙 통제가 무너진 순간 단숨에 폭발하여 후한의 멸망을 불러오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대표적 법가 사상가인 상앙, 이사, 한비는 어째서인지 뒤끝이 좋지 않았다. 상앙은 변법을 단행, 변방의 진나라가 패권국으로 성장하는 밑바탕을 깔았으나 그의 변법에 불만을 품은 자들에 의해 자신이 제정한 법에 따라 붙잡혀 거열형에 처해졌고, 이사는 간신 조고와 결탁, 호해를 진시황의 계승자로 세우면서 이제 막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를 급격한 몰락의 길로 이끌었을 뿐더러 그 자신도 진나라의 멸망을 보기도 전에 조고에 의해 숙청당했으며, 군주들에게 그 누구도 믿지 말고 모략에 빠지지 말 것을 가르쳤던 한비도 자신과 동문수학한 학우인 이사의 모략을 간파하지 못한 채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어떻게 보자면 싱가포르는 법가의 이상향이라고 할 정도로 엄벌주의 등이 법가와 잘 어울리는 국가다.

7. 매체

중국의 사극인 대진제국 시리즈는 유난히 법가를 띄워주는 내용이 들어있다. 특히 1부는 도가 지나칠 정도로 미화했다. 다만, 대진부 25회에서 이사, 목가, 순우월 등 직하학궁 동기들이 술잔치를 할 때 순우월이 '법가는 오래가진 못한다'며 유가 사상이야말로 치국의 최적 대안이라고 말하고, 이에 이사가 그러는 유가사상은 전국시대의 일곱 국가중 한 국가의 중심사상으로 선택한 나라가 있냐며 맞받아친다. 법가는 분명히 진나라가 난세의 시대에 살아남아 패권을 얻는 일에 기여했으나 그렇게 이룩한 패권을 오래 유지시켜주진 못했고, 유가는 패권을 얻는 일에는 그렇게 도움이 못되긴 했으나 후에 중국을 재통일한 한나라가 한무제 이후 유가를 국가의 중심사상으로 정한 후 수백년 동안 나라가 유지되는데 기여했으니 두 사상의 장단점이 생각나게 하는 대화다. 요약하자면 치세에 필요한 리더십과 난세에 필요한 리더십은 다르고 환경과 시대가 바뀌면 그에 맞춰 통치철학도 바꿔야 하는 것이다.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실제로는 누구도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게 문제지만.

8. 같이보기



[1] 법에 의한 지배 [2] 사실 유학도 공자에서 시작되긴 했지만 공자 자신은 "내가 만든 건 하나도 없고 다 옛것을 따르고 있다(述而不作)고 했던 만큼 법가도 이런 과정을 거쳤다고 봐야 할 듯하다. [3] 관자 명법해에도 비슷한 말이 나온다. [4] 조선시대를 기준으로 보면 왕들의 숙청기법(?)을 들 수 있다. 대체적으로 조선시대 왕들은 태종이 사용했던 숙청기법을 애용했는데 그 방법이 뭔고 하니 측근, 삼사 등에 숙청대상을 공격할 근거를 주고 이에 맞춰 삼사나 대신들이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몰랐는 척 행동하면서도 일단 별별 이유를 들어 처벌 못하는 척 하다가 계속 요구가 이어지면 낮은 처벌을 청하고 서서히 처벌수위를 높여나가다가 만족할 단계에 이르면 그만둔다. 예외적으로 중종과 문정왕후는 밀지를 사용하였지만 기본적으로는 비슷하다. [5] 실제로 진나라의 진효공 시절의 상앙과 비슷한 인물인 초도왕 시절에 오기를 두었던 초나라는 진나라처럼 될 수 없던 것도 진나라는 새로 즉위한 진혜문왕이 상앙은 죽였을지언정 그 정책은 계속 이어받았지만 초도왕의 뒤를 이은 초숙왕은 오기가 죽고 나서는 오기의 정책을 폐기했기 때문이었다. 즉 군주가 법가 사상에 의한 통치를 배척한다면 언제든지 도로아미타불이 될 수 있었다. [6] 신하에게 판단권을 분담한다는 선택지에 극도의 알러지 반응을 보이는 점이 크다. 신하가 법에 대해 판단하기 시작하는 순간, 신하 자신의 보신을 위해 법이 쓰여 부패와 음모가 시작된다는 이유로 한비자는 신하에게 판단권을 주지 말 것을 주문했다. [7] 기본적으로 유가는 주나라 시절을 지향하는 편이었고 주나라는 그래도 통일왕조인 진나라와는 달리 그럭저럭 천하 전체를 (봉건제 형식으로나마) 다스릴 줄 알았기에 자연스레 유가도 천하를 통치하는데 있어 지향점이 있을 수 밖에 없다. [8] 영씨 왕족에 대한 진나라 백성들의 높은 우호도 당연히 군주에 대한 충성심과 순응을 끝없이 강조하는 법가 사상과 그런 군주를 낳은 혈통에 대한 존중의 결합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똑같이 법가적 통치하에 있었던 육국의 백성들이 수탈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에 민란이라는 형태로 대응한 것과는 달리 오랜 기간 이 시스템하에서 살아온 진 백성들은 시황제와 호해의 막장 행각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법가적 통치에 기반이 된 군주와 그 혈통을 충실히 섬긴 것이다. [9] 우울하게도 이사는 자기 인생의 끝물에 가서야 옛 예교와 같은 유가식 정도를 독백으로 뱉지만, 결국 이를 군주에게 제대로 설파해보지도 못한채 고문당하고 죽는다. [10] 그의 장자였던 이유는 전장에 있었던 터라, 운이 좋았더라면 살아남을수도 있었지만 전쟁에서 패해 전사해버리는 바람에 문자 그대로 완전히 대가 끊기고 만다. 물론 살아 돌아왔어도 삼족을 멸한다는 명 때문에 죽은 목숨이었지만. [11] 비록 한비자는 그 시대의 상황에 맞는 제도를 선택해야 한다고 언급하기는 했지만, 상황에 맞춰 법을 수정해야 한다는 개념이나 그 절차와 같은 것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12] 다만 법가 사상 자체에 개념이 없었다는 건 억지에 가깝다. 실제 법규정이 아닌 사상서에서 구체적 방법론이 없다고 아예 없는 개념으로 취급하는게 정당한지는 의문. 한 구절 한 구절이 중요한 고대 중국 문서에서 그만한 언급이 있으면 확실히 존재하는 개념이라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그리고 한비자에서 중요한 전제가 되는 개념이 하은주 삼대의 제도가 서로 달랐고 옛 성인들의 시대와 지금이 다르니 새로운 통치방법을 써야한다는 것인데 법을 수정하는 개념이 없다고 해석하는 건 부자연스럽다. [13] 그러나 어쨌든 남아있는 건 사상서의 글귀 한 줄 뿐이고, 이를 구체화할 방법이나 역량을 제시하지 못했고 실제로 상황이 닥쳤을 때 적절히 대응하는 행정능력을 전혀 보이지 못했다는 점에서 '법가의 실패'로 보는데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단지 이를 사상 자체에 개념이 아예 없었다고 해석한 쪽이 너무 나갔을 뿐. [14] 심리라기보다 당연한 현상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무리한 탄압이 가해지면 그에 반항해온 사례는 수없이 많다. 훗날 진나라 바로 뒤에 열린 한나라의 고조 유방도 그랬고. [15] 다만 백성들이 법가를 무지하게 싫어했다는 건 오바인 게, 법가에 가장오래 시달린 진 본토에서는 반란이 없었고 왕가에 대한 지지가 매우 강했다는 게 함정. 사실 법가의 시조인 이회나 자산의 개혁 그리고 상앙의 개혁에서도 법가식 개혁 초창기엔 백성들이 매우 싫어했지만 적응되면 오히려 좋아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아무리 좋은 제도도 급격히 시행하면 진통이 심한 법인데 조국을 멸망시킨 어제까지의 적국에 대한 반감도 얽힌 상황을 고려해야한다. 특히 진나라의 이십등작은 분명 좋은 점도 있었지만 통일 이후 진나라 본토 백성들과 구 육국 출신 백성들을 차별하게 되는 부작용이 있었다. [16] 아까 말한 초나라를 예로 들면 초나라 역시도 진나라와 기후가 달랐다. 진나라가 상대적으로 건조한 기후라면 초나라는 습한 기후라고 할 수 있겠는데 진나라식으로 농사짓는다고 하면 그게 되겠는가? [17] 상앙, 한비자, 이사 [18] 설령 그것이 그러한 이론체계를 집대성하고, 더 나아가서 국가통치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인물이라고 해도 [19] 유가를 채택한 국가에서도 유가 따윈 개나 줘버린듯한 군주들도 많이 나왔다. [20] 맹자의 경우엔 왕이면서도 제대로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는 왕은 왕이 아닌 그저 필부에 지나지 않기에 그런 왕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는건 정당하다고 보았다. [21] 다만 이건 유가의 본가인 중국보다 조선에서 더 효과가 컸다. 정작 중국에서는 명나라 이후에는 그 기능이 많이 쇠했다. [22] 하루에 처리한 공문이 죽간으로 120근가량이었다고 한다. [23] 중국의 통일 왕조들 중에 단명한 왕조는 진나라, 신나라, 서진, 수나라 정도인데 모두 창업군주가 잘못했거나 그 뒤를 이은 군주의 책임이 크다. 헌데 아무리 그렇다고 쳐도 진나라가 이들과 대조되는 점은 진시황 사후 단 3년만에 나라가 무너졌다는 거다. 왕망의 신나라도 15년은 유지되었고 서진도 사마염 사후 20년은 넘게 유지되었고 수나라도 수양제의 재위기간도 13년은 된다. 왕망은 전방위적으로 병크를 워낙 많이 저질렀고 서진은 사마염부터가 개념 말아먹은 정치를 한 데다가 뒤를 이은 사마충은 백치 황제였으며 수양제는 그나마 능력은 있었는데 폭정이 심했다. 근데 그런 인간들도 10년 이상은 재위했는데 이세황제만은 3년이다. 그렇다고 이세황제가 특별히 폭정이 심했냐면 기껏해야 선대부터 이어온 토목공사를 이어받고 형제자매들을 다 죽이고 이사를 죽이고 조고에게 정사를 위임하고 본인은 놀고먹기만 한 일들밖에 없는데 고작 정도로 나라가 3년만에 무너진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마저도 찬탈에 대운하와 고구려 원정을 벌인 수양제에 비하면 특별히 더 심하다 보기도 어렵다. 결국 이세황제 때 갑자기 나라가 폭삭 주저앉은건 진시황때부터 누적되어온 불만이 이세황제에 이르러 폭발했다는 해석 밖에 더 안 된다. 최초의 통일과 최조의 중앙집권체제기 때문에 재지세력의 스탠스가 후대와 크게 달랐을테니 참작은 가능하다. [24] 하, 은, 주 등은 당시 주변에 자국과는 다른 체제를 가진 국가가 있었거나 자국이 봉해준 국가이긴 해도 어쨌거나 사실상 '다른 나라' 인 나라들이 많았다. 즉 진짜배기 통일왕조는 진나라가 처음이다. [25] 이 때문에 전한말쯤 되면 관내후와 철후(한무제 이후는 열후) 외에는 잘 취급도 안 해주게 되는데 이 작위들은 진나라 시절만 해도 사실상 명예직에 불과할 정도로 수가 적었다. [26] 참고로 목표의식이 없어서 몰락한 것은 서양의 중상주의와 비슷하다. 흥미롭게도 중상주의 또한 목표의식이 없어서 몰락했지만 중상주의적 정책 자체는 살아남아 개발도상국 등에서 쓰인다는 점은 꽤 닮았다. [27] 예를 들자면 성리학의 이념으로 건국된 조선조차도 상앙이 만든 오가작통으로 백성들을 통제했다. 또한 경국대전을 반포함으로써 성문법에 기초한 국가를 이룰려고 했다. 사실 성리학 자체도 보면 알겠지만 그거 하나로만 밀어붙여도 폐단이 발생한다. 조광조가 가장 좋은 사례 [28] 한국에 출판된 묵가 완역판 초입부에서 자 같은 측량도구에 비유하여 효율적인 통치 시스템의 중요성을 언급하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한비자의 주장과 동일한 것이다. 법가와 묵가 중 어느 쪽이 먼저 주장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서로 간에 약간 정도는 영향을 주고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29] 실제로는 절대 공유와 절대 평등을 통한 인간애 정도로 해석하는 견해가 많은편이다. [30] 현재 존재하는 한비자 25장 안위편에 대한 일부 학자들의 해설을 보면 '한비자는 법치사상을 중심으로 하되 유가와 도가의 사상을 취사선택하는 방식을 썼다'고 한다. 한비자 37장 난이편에서는 묵가의 영향을 받은 흔적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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