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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2018-1)[A] 대한민국 국보 (2018-2)[B] |
|
<colbgcolor=#315288> 삼국사기 三國史記 | Samguk sagi |
|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A] 서울특별시 중구[B] |
분류 | 기록유산 / 전적류 / 목판본 |
수량/면적 |
50권 9책[A] 50권 9책[B] |
지정연도 | 2018년 2월 22일 |
제작시기 |
1145년 (
인종 23)[7] 1573년( 선조 6)[A] 1512년( 중종 7) 추정[B] |
1. 개요2. 번역본3. 가치4. 이름에 대한 이야기5. 인용 문헌6. 판본
6.1. 옥산서원본
7. 논란6.1.1. 국보 (2018-1), 구 제322-1호
6.2. 정덕본6.2.1. 국보 (2018-2), 구 제322-2호
6.3. 보물 제722호: 성암본6.4. 일본
궁내청본7.1. 신라 우선주의 서술 여부
8. 삼국사기의 구성9.
북한이 보는 삼국사기10. 그 외11. 같이보기7.1.1. 편찬 목적
7.2. 신라 우선주의가 아니다.7.2.1. 오해 받는 이유: 사료 부족
7.3.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수정하면
식민사관?7.4. 여타 문제점[clearfix]
1. 개요
|
《삼국사기》 전권의 모습 |
|
《삼국사기》 내부의 모습 |
고려 인종이 하명하여 조정의 지원하에 1145년, 편찬 책임자 김부식과 그 외 보조를 맡은 참고(參考) 8명 및 행정사무를 전담한 관구(管句) 2명 등 총 11명이 편찬한 관찬 역사서.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후삼국시대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10][11] 사마천이 처음 서술하여 동아시아의 고전적 역사 서술 방식으로 자리잡은 기전체 형식을 따르고 있다. <본기> 28권( 신라 12, 고구려 10, 백제 6), <연표> 3권, <지> 9권, <열전> 10권. 총 50권 9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현대에 남아있는 《삼국사기》 원서 중 김부식이 편찬한 원본은 없다. 《삼국사기》 서적 중 가장 오래된 원서는 보물 722호 성암본으로 13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성암본은 성암고서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내용 전체가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현존 국내 사료 중 논란의 여지가 거의 없는 가장 오래된 공식 한국사 역사서다. 《 화랑세기》의 경우 시기상으론 삼국사기보다 앞서지만 현존하는 필사본은 위작이라는 의견이 주류라 논란이 있다. 현존하는 삼국시대 관련 사료 중 가장 분량이 많기도 하며, 여러모로 일연의 《 삼국유사》와 더불어 삼국시대 연구자라면 절대로 빠뜨릴 수 없는 필수적인 사료이다.[12]
이름은 《'삼국'사기》이지만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룬 이후부터 고려 초까지, 즉 '삼국'이 있지 않았던 약 260여 년 역사도 같이 다루었는데, 《삼국사기》는 신라가 아닌 고려에서 작성한 것으로 아무래도 당시 고려인들의 시각으로 봤을 때에는 다시 나눠진 후삼국시대를 고려가 재통일한 것을 통일의 종결로 여겼던 것에서 기인한 것 같다.[13] 《삼국사기》는 고대도 고대지만 당시 고려왕조의 현실도 그나마 엿볼 수 있는 역사책이기도 하다.
또한 고려의 칭제건원과 서경천도운동을 실행했던 묘청 일파를 반대하고, 몸소 묘청 일파를 숙청한 김부식이 사직하고 집필한 사서이고, 중국 측 사서를 다수 인용해서 고구려 후기 기록의 경우에는 내정 기록은 부실한데 반해, 조공 기록은 지나치게 상세하여 이미 구한말 때부터 사대주의적이란 비판을 받기도 하는 역사서이기도 하다. 중국 사서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부분이 다수라는 점에서 이런 비판이 나오는데, 이미 삼국시대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시기였으니 김부식 시대에는 이미 국내 사료가 많이 부족해진 상태라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을 감안해야 할 필요는 있다. 또한 칭제건원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삼국시대에 기록되어 남아 있던 사료들 중 중국 기록과 겹치는 것은 모두 중국 사서를 참고하였는데 그 중 몇몇 삼국시대 인물들에 대한 열전은 빠져 있다.
《일본서기》와 중국의 《 한서》 등의 사서들은 최대한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타국을 낮추고 사신 파견도 모두 조공으로 간주하는 주관적인 기록이 매우 많은 반면 《삼국사기》는 중국 사서와 일본 사서에 비해 어떻게 보면 객관적이라 할 수 있다.
2. 번역본
《 조선왕조실록》과 마찬가지로 《삼국사기》도 인터넷에서 무료로 검색, 열람할 수 있다.-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공되는 온라인 열람 서비스. 주석도 상당히 많다.
- KRPia: KRPia에서 제공하는 온라인 열람 서비스. 원문에 가까운 것을 제공하며, 검색 기능도 좋고 이병도의 주석도 달려 있어 우월하다. 다만 유료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이병도의 주석의 경우에도 지금 보면 틀린 것도 많다. 게다가 이병도 본인의 친일행적도있어서 좀그런것도 있다.
- 네이버-원문으로 보는 삼국사기: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제공하는 온라인 열람 서비스. 한국인문고전연구소에서 번역한 《삼국사기》를 제공하며, 접근성이나 편의성에서 일반인들이 사용하기 가장 좋다. 각주도 KRPia만큼은 아니나, 일반인들에게는 꽤 유용한 정보들이 담겨있다.
《 삼국유사》와 더불어 한국 고대사 연구의 필수 자료답게 여러 학자들의 손을 거쳐 번역된 바 있으며, 번역본의 출판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위의 링크에도 있듯이 이미 네이버 지식백과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등 여러 사이트에서 무료로 열람이 가능하므로 이를 참고해도 좋다. 누구든지 손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 최강의 장점.
서적으로 출판된 것 중에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1997년에 간행한 5권의 《역주 삼국사기》가 가장 좋은 평을 받고 있는데, 노중국 등을 비롯한 한국 고대사 학계의 권위자들이 참여하여 상당한 퀄리티를 자랑한다. 2012년에는 개정판을 내놓았는데 이 역시 좋은 평을 받았다. 단점은 5권[14]으로 이루어져 있는 데다가 한 권의 가격이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4만~5만 원에 육박하는지라 전부 소장하려면 돈이 꽤 많이 깨진다는 것이다.
교양서 수준에서 읽는다면 이강래 전남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번역한 《삼국사기》1, 2(한길사), 한국인문고전연구소에서 발간한 《삼국사기》[15]도 나쁘지 않다.
참고로 '상고사학회 # '[16] 라는 단체에서 펴낸 《삼국사기》는 대륙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므로 주의할 필요가 있다.
봉의고등학교의 영어교사 이병곤이 《삼국사기》 전체를 영어로 번역했다. 이미 해외에서 <본기>를 개별적으로 번역한 바가 있지만 전체를 번역한 것은 처음이다. 영문 제목은 《The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관련 기사
3. 가치
비록 불분명한 부분도 있고 비판받을 부분도 존재하지만, 《삼국사기》는 한국사를 다룰 때 그 중요도가 엄청나다. 《삼국사기》는 제대로 인정받는 한민족 최고(最古)의 정사(正史)인 것이다.《삼국사기》와는 반대로 《 삼국유사》는 책 이름의 '유사'가 '남겨진 사실', '버려진 사실'이란 의미인 데서 알 수 있듯 이전의 사서[17]에서 빠진 내용들을 기록했다는 뜻으로, 《삼국사기》에서 상당수 누락시킨 설화, 불교적 이야기를 중점으로 다루고 있다. 그나마도 《삼국유사》는 《삼국사기》 편찬 이후에 기술되어 《삼국사기》를 적극적으로 반영했기 때문에, 삼국시대를 정통적인 사관에서 다루는 유일한 사서는 《삼국사기》 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고구려, 신라, 백제가 충돌했던 기록이나, 율령 반포, 불교 수용 같은 중요 기록들은 빠지지 않고 언급되고 있으며 삼국시대의 국왕의 시호[18], 이름, 가계 등도 온전히 전하고 있다. 예컨대 신라 금석문에서 보이는 모즉지 매금왕(牟卽智 寐錦王), 모즉지태왕(另卽智太王),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의 경우, 우리는 법흥왕이라는 걸 알 수 있지만 만약 《삼국사기》가 없었다면 왕의 시호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 몰랐을 것이며, 신라의 율령 반포가 법흥왕 대에 일어났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19] 물론 《 구삼국사》나 《 신라고기》, 《백제고기》, 《삼한고기》 등 다른 사서들도 존재했으나 전부 실전된 상황이라 아쉬울 따름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은 《삼국사기》의 존재로 인해 한국사는 세계적으로 보았을 때 고대사 기록이 많으면 많지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이다. 수많은 전란 등으로 잃어버린 기록들이 많음에도 말이다. 비교대상이 중동, 이집트, 중국, 그리스, 로마와 같은 인류 문명의 요람들이라 그렇지 한국은 《삼국사기》 덕분에 세계사로 넓히면 고대의 기록이 굉장히 많이 남아있는 나라다. 그래도 기록이 많이부족한편이지만...《삼국사기》 덕분에 기원전부터 기록이 어느 정도 남아있는 한국의 고대사의 분량을 다른 나라들의 고대사와 비교해 보면 《삼국사기》의 가치가 더욱 부각된다.
-
아시아:
인도는
인더스 문명의 발상지임에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문화가 단절되었고, 인더스 문자도 해독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실정이다. 이후 기원전 브리흐미 문자가 생기면서 이때부터 인도 아대륙 전역에서 문자가 사용되기 시작했고, 이 시기부터 힌두교 경전과
불경, 그리고 자이나교 경전을 통해 당대의 역사적인 사실을 상당수 짐작할 수 있지만 설화적인 성격이 강하다.
패엽은 보존성이 낮았기 때문에 실증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공문서 기록들의 대다수는 소실되어 있는 상태이다. 기원후 200년대인
굽타 왕조대에 들어서야 본격적인 기록들이 나타난다.
스리랑카는 고대 연대기인 마하밤사와 디파밤사, 쿠라밤사가 소실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보존된 덕택에 기원전 5세기부터의 역사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그러나 이 역시도 삼국유사와 유사하게 설화적인 내용이 많이 섞였다. 인도네시아는 기원후 4세기 이후에나 역사시대에 들어서고, 일본은 기원전부터 역사시대에 들어갔다고 얘기하지만, 《 일본서기》, 《 고사기》 등 초기 기록은 말 그대로 신화적인 요소가 강하고 4세기 기록은 중국과의 교류가 없어 공백 수준이다.[20] 부탄은 처음으로 통일 왕조를 건국한 때가 1907년임을 감안해도 역사 기록이 매우 적어 19세기 이전의 역사는 개괄적으로 파악하는 정도이다.
- 유럽: 그나마 기록이 많은 잉글랜드조차 5세기 무렵에 형성된 고대 7왕국 시절까지의 기록은 개인의 연대기에 의존해야 하며, 스웨덴은 기원후 800년대까지도 신화의 영역이다. 독일과 덴마크 등의 조상격인 게르만족의 역사 또한 그들이 직접 남긴 기록이 없어서 그들과 교류해온 고대 로마인들이 남긴 기록을 참고해야 한다. 동유럽도 마찬가지라서 불가리아나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체코는 초기 역사를 연구할 때 동로마 제국이나 서방 교회, 독일 쪽 기록을 필수적으로 참고해야 한다.[21] 폴란드는 아예 서기 966년 폴란드 영지 성립 이전 역사가 존재하지 않으며 발트 3국은 11세기가 되어서야 자국의 역사가 시작된다.
- 아메리카: 마야 문명, 아즈텍 제국, 잉카 제국은 기원후 1000년 즈음부터야 겨우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22] 심지어 파라과이는 부탄 이상으로 역사 기록 부재가 심각하다. 16세기 중반부터 스페인인이 남긴 기록이 풍부했음에도 3국 동맹 전쟁 당시 브라질이 파라과이 역사 관련 자료 및 유물을 대량으로 약탈했다. 안타깝게도 이런 유물들은 대부분 소장되었던 국립박물관에서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기 때문에 무려 19세기 후반인 1870년까지의 역사들도 불분명한 사실이 많다.
- 아프리카: 그나마 에티오피아가 역사 기록이 꽤 많이 있는 편이다. 그러나 사하라 이남 지역은 고유한 문자나 이렇다 할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이 때문에 13세기까지 존속한 가나 제국의 역사조차 불분명한 부분이 많다.
4. 이름에 대한 이야기
《삼국사기》의 '사기'(史記)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사마천의 《 사기》를 따른 것으로 여겨지며, 《삼국사》라는 이름도 자주 쓰였다. 이를 들어 원래의 이름은 《삼국사》였지만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삼국사기》라는 이름이 굳어졌다는 주장이 있다. 참조기사[* 참고로 이 기사를 쓴 박정학 한배달 대표는 역시나 # 이유립의 제자로 언급되는 등 # 유사역사학계 인물이다.]기사에 따르면 ① 《고려사》나 조선 초기 김종직의 《동문수》에 실린 <진삼국사표>, ② 옥산서원본을 발간한 김거두가 쓴 발문에 있는 《삼국사》라는 표현, ③ 남아있는 《삼국사기》의 표지에 쓰인 《삼국사》라는 제목, ④ 《조선왕조실록》에서 《삼국사》라는 명칭이 더 빈번하게 쓰였기 때문에 원래 제목이 《삼국사》가 아니었겠느냐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학계에서 전혀 공인받지 못한다. 《삼국사》라는 약칭이 널리 쓰인 것도 맞기는 하지만 학계에서는 가독성과 구분 편의 등을 이유로 《삼국사기》를 쓰는 것이고, 일제가 《삼국사기》라는 명칭을 밀었다는 주장에는 뚜렷한 근거가 없다. 상세히 살펴보면 ① 《삼국사》(三國史)라는 표현은 《삼국사기》라는 표현에 비해 '삼국의 역사'라는 일반명사로 오인될 가능성이 있고, ② '삼국사'라는 명칭은 이전 시기 편찬된 《 구삼국사》 혹은 《해동삼국사》와 혼동을 빚을 가능성이 있으며, ③ 사료상 《삼국사기》와 《삼국사》라는 표현이 혼용되고, 《동문수》(1488)와 달리 《동문선》(1478)에서는 <진삼국사표>가 아닌 < 진삼국사기표>라는 명칭이 있기 때문에 《삼국사》는 그 약칭일 것이다.
외국에서도 이 책의 서명을 《삼국사기》로 아는 사례가 이미 《삼국사기》 편찬 34년 후를 기록한 남송대 사료에 등장한다.[23] ④ 옥산서원본과 잔존 《삼국사기》의 표지 등에 《삼국사》라고 쓰였다고 하지만, 정작 조선시대에 작성되었을 발문과 표지와는 달리 고려시대의 원문을 옮겼을 《삼국사기》 본문에는 스스로 《삼국사기》라고 적었다. 옥산서원본 정덕본 그러니까 고의적인 사실 왜곡을 하려 한 것이거나, 본문을 다 잊어버리고 표지와 발문만 기억한 것이 아니라면, 이 기사를 쓴 사람은 《삼국사기》 표지와 발문[24]만 보고 본문은 보지 않았다는 말이다. 맞든 아니든 학계를 비판하기에는 수준 이하이다.
따라서 《삼국사》라는 명칭보다 《삼국사기》라는 명칭이 정식 명칭일 가능성이 오히려 더 확정적이며, 거기에 더해 ①과 ②처럼 구분상의 문제로 《삼국사기》를 쓰는 것이 가독성 면에서 더 편리했기 때문에 《삼국사기》가 선택된 것이다. ③과 같이 공식적인 명칭과 편의상 쓰이는 약칭이 의미 전달에 큰 차이가 없다면 오히려 약칭이 널리 쓰이는 것도 빈번한 일이다. 예를 들어 공식명칭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대신 광개토왕 내지 광개토대왕이 더 널리 쓰이거나, 《선화봉사고려도경》 대신 《 고려도경》이라는 이름이 더 널리 쓰인 것처럼. 게다가 일제강점기에 《삼국사기》라는 이름을 밀었다는 주장에는 제대로 된 근거가 없다.[25] 오히려 나쁜 건 모두 일제가 했다고 주장하면 되는 유사역사학계의 사고방식을 매우 잘 보여주는 기사인 셈이다.
5. 인용 문헌
《삼국사기》에는 어떤 기록을 인용했는지 중간중간 언급된다. 동일한 책도 서로 다른 이름으로 기록된 경우가 있는데 특히 중국 사서를 기록할 때 《자치통감》-《통감》, 《신라국기》-《신라기》, 《신라고기》-《라고기》 등 축약되어 기록한 것이 확인된다. 이는 사관들이 기록을 취합하면서 서로 다르게 기입을 한 것으로 추정한다. 《삼국사기》에서 전거가 확인되는 인용 문헌은 다음과 같다.5.1. 국내 문헌
삼국을 다룬 사서이니 만큼 김부식은 1차 자료로 당시에 남아 있던 국내 사서를 다수 참고했다. 백제 멸망, 고구려 멸망, 그리고 고려-거란 전쟁 등으로 인해 수많은 사서가 사라진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끌어 모았으며 중국 측 사서와 교차 검증에서 서로 내용이 다르면 되도록 한반도 국가의 사서를 우선시했다. 인용한 사서들은 《 구삼국사》를 비롯한 삼국 통합 역사서와 《 신집》, 최치원이나 김대문 등 신라의 당대 역사학자들의 역사서들, 김유신 등 유명인의 《 행장》, 그리고 각종 금석문을 참조했다고 추측한다.-
《고기》(古記)
말 그대로 옛 기록을 통칭하는 것인지, 특정 서적의 이름이 고기인 것인지는 알수가 없다. < 유례 이사금 본기>, < 진평왕 본기>, < 효소왕 본기>, < 경덕왕 본기>, < 헌덕왕 본기>, < 헌강왕 본기>, < 근초고왕 본기>, < 잡지>1 제사, < 잡지>1 악, <잡지>6 <지리>4 고구려, <잡지>6 <지리>5 백제, <잡지>9 고구려·백제에서 언급된다. -
《
삼한고기》(三韓古記)
< 동성왕 본기>에 언급된다.
< 태조왕 본기>에 사용되었다.[26] -
《
신라고기》(新羅古記)
<잡지>1 악, < 강수 열전>에서 언급된다. -
《
본국고기》(本國古記)
<잡지>9 고구려·백제에서 언급된다. -
《
해동고기》(海東古記)
< 태조대왕 본기>, 《 삼국사기》 <잡지>1 제사에 언급된다. -
《신라고사》(新羅古史)
< 의자왕 본기>에 언급된다. -
《사전》(祀典)
고려의 국가 행사의 규칙이나 규격을 기록한 책으로, 《 삼국사기》 <잡지>1 제사에 언급된다. - 《예전》(禮典)
-
《
구삼국사》(舊三國史)
《삼국사기》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진 않으나 이규보가 남긴 《 동국이상국집》 < 동명왕>편에 온전히 남은 기록과 《 삼국사기》 < 동명성왕 본기>를 비교해보면 거의 차이가 없음을 알 수가 있다. 다만 《삼국사기》는 기이한 내용을 최대한 배재한 반면, 《구삼국사》는 야사에 가까운 내용들도 가감없이 실었다는 차이점이 있다. -
《
고승전》(高僧傳)
< 김대문 열전>에 나오는 책으로 김대문이 저술했다는 기록만 나온다. -
《난랑비》(鸞郞碑)
최치원이 쓴 비문으로 < 진흥왕 본기>에서 화랑을 다루며 언급된다. -
《고운문집》(孤雲文集)
최치원의 문집으로 < 진성여왕 본기>에 언급된다. -
《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
최치원이 통일신라시대에 쓴 책이며 원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에 존재하는 책은 위서다. < 지증 마립간 본기>에 언급된다. -
《
화랑세기》(花郞世記)
김대문이 쓴 책으로 《화랑세기》는 < 진흥왕 본기>에 등장한다. 또한 사다함, 관창 열전등 화랑을 다룬 기록들도 《화랑세기》에서 인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다만 현대에 발견되어 남당 박창화의 위작설이 유력한 '《화랑세기 필사본》'은 마지막에 '記'가 아닌 '紀'자를 쓴다. 어차피 별 차이는 없지만. -
《
계림잡전》(鷄林雜傳)
김대문이 쓴 책으로 < 법흥왕 본기> 중 이차돈 설화를 다루며 언급했다. 그외 < 남해 차차웅 본기>, < 유리 이사금 본기>, < 눌지 마립간 본기>, < 김흠운 열전>에도 김대문의 글이 인용된다. 편찬자들이 서명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학계에서는 도미 설화 등을 같은 저자의 《한산기》(漢山記) 내용을, < 백결선생 열전>은 《악본》(樂本)에서 일부 인용한 것으로 본다. -
《아도화상비》(我道和尙碑)
한나마(韓奈麻) 김용행(金用行)이 쓴 책이라고 하며 < 법흥왕 본기>에 이차돈 설화를 다루며 "《계림잡전》의 내용과는 다르다."라는 식으로 짤막하게 언급된다. -
《장의사의 재문》(莊義寺齋文)
고려의 태조가 직접 쓴 글로 < 헌덕왕 본기>에 인용된다. -
《김유신비》(金庾信碑)
< 의자왕 본기>에 언급된다. -
《
김유신행록》(金庾信行錄)
< 김유신 열전>은 김유신의 후손 김장청이 쓴 《김유신 행장》 10권을 축약해서 옮겨 놓은 것이다. -
《삼랑사비문》(三郞寺碑文)
< 의자왕 본기>에 언급된다. -
《
신집》(新集)
영양왕대에 편찬된 고구려의 역사서로 총 5권으로 구성된다. 실제로 인용된 저서로 《신집》의 이름이 나오진 않으나 정황상 《신집》이 인용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 신집》 항목 참조.
5.2. 중국 문헌
아무래도 고대 한반도 국가들의 기록이 상당수 소실됐던 탓에 중국 문헌도 상당수 참고했다. 흥미로운 것은 인용문들 대개가 중국 측 기록보다는 한국 측 기록을 신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다.몇 가지 사례를 들면 고구려 〈 태조대왕 본기〉에는 "《해동고기》에는 146년에 돌아가신 걸로 나오는데 《 후한서》에는 121년에 돌아가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의 기록과 중국이 서로 엇갈리니 《후한서》의 기록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라고 말했고, 신라 태종 무열왕의 경우에는 "우리쪽 기록에는 김용수의 아들로 나오는데 《당서》에는 진덕여왕의 아들로 기록되었으니 《당서》가 틀렸다."라고 나온다. 신라의 기이한 민족인 장인(長人)에 대해서도 "《 신당서》에는 장인의 존재가 사실인거 처럼 기록했는데 우리쪽 기록을 보면 소문에 불과하다."라며 지적하고 있다. 물론 왕의 생몰년이나 계보를 따지면서 당사국의 기록을 더 중시함이 당연하지만, 이를 통해 흔히 알려진 바와 달리 '중국 기록을 우선시한, 소위 사대주의에 찌들어 있는 역사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주필산 전투를 기록한 대목에서는 유공권(柳公權)의 소설[27]을 언급하며 "당시 이세적을 포위한 고구려의 군세를 본 당태종이 지렸다고 나오는데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에는 왜 그 내용이 빠져있냐? 쪽팔리니 빼버린 것이 틀림없다."[28]라고 대놓고 깠다.
하지만 김부식이 중국의 문헌을 인용하면서 기록을 면밀하게 살펴본 것은 아닌지, 산상왕의 이름인 이이모(伊夷模)와 동천왕의 이름인 위궁(位宮)을 각각 고국천왕과 산상왕의 이름으로 기록하는 오류를 저지르기도 했다. 이름만 잘못 기록했으면 다행이겠지만, 덕분에 사건의 연도까지 잘못 비정되어 버렸다. 《삼국지》에 나오는 고발기와 관련된 기록을 <고국천왕 본기> 원년조에 실었고, 동천왕이 태어났을 때 태조대왕처럼 사람을 볼 수 있었다는 일화를 <산상왕 본기> 원년조에 실어놓았다. 덕분에 후대 사람들이 고발기가 두 명이라 착각하게 만들기도 했다. 고국천왕을 왕계에서 누락해놓은 《후한서》와 《삼국지》의 고구려 왕계 기록이 문제의 시발점이긴 하지만.
- 《 삼국지》(三國志)
-
《
한서》(漢書)
잡지3 지리1, 잡지6 지리4 고구려에서 언급된다. -
《
후한서》(後漢書)
유리왕 본기, 민중왕 본기, 태조대왕 본기, 잡지1 제사, 잡지3 지리1, 잡지6 지리5 백제에서 언급된다. -
《
위서》(魏書)
동명성왕 본기, 산상왕 본기, 개로왕 본기[29]에서 언급된다. -
《
진서》(晉書)
의자왕 본기에서 언급된다. - 《 송서》(宋書)
-
《남북사》(南北史)
유리왕 본기에서 언급된다. -
《북사》(北史)
온조왕 본기, 잡지1 제사, 잡지1 악, 잡지2 색복, 잡지6 지리5 백제, 잡지9 고구려·백제에서 언급된다. -
《
수서》(隋書)
평원왕 본기, 영양왕 본기[A1], 을지문덕 열전[A1], 연개소문 열전[A2], 온조왕 본기, 개로왕 본기, 법왕 본기, 무왕 본기[A1], 잡지2 색복, 잡지9 고구려·백제에서 언급된다. -
《
구당서》(舊唐書)
태종 무열왕 본기, 효소왕 본기, 성덕왕 본기, 경덕왕 본기, 원성왕 본기, 헌덕왕 본기, 영류왕 본기[A1][A2], 보장왕 본기, 의자왕 본기[A2], 잡지1 제사, 잡지2 색복, 잡지3 지리1, 잡지6 지리4 고구려, 잡지6 지리5 백제, 잡지9 고구려·백제에서 언급된다. -
《
신당서》(新唐書)
진평왕 본기, 선덕여왕 본기, 헌덕왕 본기, 평원왕 본기, 영류왕 본기[A1][A2], 보장왕 본기[A2], 의자왕 본기[A2], 잡지1 제사, 잡지2 색복, 잡지6 지리5 백제, 잡지9 고구려·백제, 최치원 열전, -
《
자치통감》(資治通鑑)
진평왕 본기, 선덕여왕 본기, 효소왕 본기, 경덕왕 본기, 원성왕 본기, 헌덕왕 본기, 태조대왕 본기, 동천왕 본기, 평원왕 본기, -
《책부원귀》(冊府元龜)
법흥왕 본기, 동성왕 본기, 잡지1 제사, 잡지1 악, 잡지2 색복, 잡지9 고구려·백제에서 언급된다. -
《
통전》(通典)
잡지1 악, 잡지2 색복, 잡지3 지리1, 잡지6 지리4 고구려, 잡지6 지리5 백제에서 언급된다. -
《
신라국기》(新羅國記)
당나라의 영호징이 쓴 신라 역사서. 진흥왕 본기, 진덕여왕 본기, 경덕왕 본기에 언급된다. -
《괄지지》(括地志)
위왕 이태[41]가 지은 지리지로 동천왕 본기에 언급된다. -
《양서》(梁書)
동천왕 본기, 안장왕 본기, 안원왕 본기, 전지왕 본기, 잡지1 제사에서 언급된다. -
《수당가화》(隋唐嘉話)
보장왕 본기에서 언급된다. -
《제서》(齊書)
후대에 《남제서》로 이름이 바뀌는 책으로 동성왕 본기에 언급된다. -
《신서》(新書)
잡지3 지리1에서 언급된다. -
《고금군국도현사이술》(古今郡國道縣四夷述)
잡지3 지리1, 잡지4 지리2 신라 삭주, 잡지4 지리2 신라 명주에서 언급된다. -
《번천집》(樊川集)
당나라 시인인 두목이 지은 책으로 장보고· 정연 열전은 《번천집》을 참고했다. 신라본기에는 장보고의 행적을 기록한 신라쪽 기록을 인용한 반면, 열전은 당나라쪽 기록을 인용해 서로 다르게 기록된 부분이 있으며 장보고 열전에도 "신라 본기와 다른 내용이 있다."라고 언급했다.
6. 판본
현대에는 김부식이 직접 집필한 《삼국사기》 원본은 남아있지 않으며, 후대에 새로 인쇄하거나 필사한 판본만이 현존하고 있다.6.1. 옥산서원본
총 50권 9책 완질본. 일명 옥산서원본(玉山書院本)이라 불린다. 1512년( 중종 7년)에 개각한 목판을 가지고 1573년( 선조 6년) 8월에 찍은 것으로 경주부(慶州府)에서 꺼내 찍어 이언적을 배향하여 영남의 양대 서원으로 위상이 높은 옥산서원으로 보낸 것이다.
각주의 글자가 너무 작은 점 등 인쇄 상태가 좋지는 않지만, 현재 우리가 보는 《삼국사기》의 내용은 이 옥산서원본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1970년 옥산서원본이 도난 당하는 일이 있었고 이 일을 계기로 보물로 지정되었다. 2018년 2월 22일 보물 제525호에서 국보로 승격되었다.
6.1.1. 국보 (2018-1), 구 제322-1호
《삼국사기》는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이 1145년(고려 인종 23년)에 삼국시대의 역사를 기전체(紀傳體)로 편찬한 것이다.《삼국유사》(三國遺事)와 함께 삼국시대 연구의 기본사료로 인식되고 있다. 국보 제322-1호 《삼국사기》는 1573년(선조 6) 경주부(慶州府)에서 인출(印出)하여 옥산서원에 보내준 것으로, 고려시대에 처음 새긴 원판(原板)과 조선 태조 때에 개각(改刻)한 것, 중종 때 다시 개각한 것 등 3종의 판(板)이 종류별로 섞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총 9책으로 구성된 완질본(完帙本)이자 인출상태와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또한 1573년 당시 유통경로와 더불어 사용한 종이와 장정(裝幀) 양식 등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어 조선시대 학술 동향은 물론 목판인쇄 사정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총 9책으로 구성된 완질본(完帙本)이자 인출상태와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또한 1573년 당시 유통경로와 더불어 사용한 종이와 장정(裝幀) 양식 등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어 조선시대 학술 동향은 물론 목판인쇄 사정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6.2. 정덕본
총 50권 9책 완질본. 1512년(조선 중종 7년)에 경주부(慶州府)에서 간행되어 정덕본(正德本)이라 통칭하며, 경주부간본이라고도 한다.
위의 옥산서원본과 정덕본은 모두 경주부에서 간행되었는데 이에 관한 발문이 2개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1394년( 태조 3년)에 《삼국사기》를 처음 개각할 당시 경주부사 김거두가 쓴 발문이다. 여기서는 ' 계림에 있던 《삼국사》(三國史)의 인본(印本)이 오래돼 망가졌고 세상에는 사본(寫本)만이 돌아다니고 있다. 책을 간행하기 위해 판본을 널리 구해보았으나 쉽게 얻을 수 없어 지금이라도 복각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완전히 없어지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안렴사 심효생이 한 벌을 얻어 이것을 전 경주부사 진의귀(陳義貴)와 함께 간행하기로 하여 계유년(1393) 7월에 착수하여 갑술년(1394년) 4월에 마쳤다.' 라고 되어 있다. 이때의 선견지명이 있었기에 삼국사기가 다른 삼국시대에 대한 사서와는 달리 역사속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두 번째로 개각한 1512년에는 경주부윤 이계복이 다시 발문을 썼다. 여기서는 '우리나라의 《삼국본사》(三國本史)와 《유사》(遺事) 두 책은 다른 데서는 간행된 적이 없고 오직 본부(경주부)에만 판이 있는데 오랜 세월을 지나 판이 깎이고 상해 한 줄에 겨우 4~5글자만 읽을 수 있는 정도다. 다행히 성주목사 권주(權輳)가 내가 이 책을 구한다는 말을 듣고 완본을 구해주었기에 기쁘게 받아 여러 읍에 나누어 주어 새기게 한 후 돌려받아 간직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앞서 1394년에 한 번 개각한 판본이 120년이 지나 거의 망가져 다시 개각한 것이다. 발문에 언급된 《 삼국유사》도 같이 새로 간행했는데 《삼국유사》의 경우 해당 판본이 현존하는 완질본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원판이 닳아서 복구할 수 없는 곳, 잘못된 글자, 빠져 있는 글자 등의 결점이 있지만 국보 제322-1호인 옥산서원본(玉山書院本)과 함께 현재까지 내려오는 둘 뿐인 완질본이다.
2018년 2월 22일 보물 제723호에서 옥산서원본과 함께 국보로 승격되었다.
6.2.1. 국보 (2018-2), 구 제322-2호
국보 제322-2호《삼국사기》는 우리나라 최초의 관찬사서(官撰史書)라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그 속에 반영된 역사의식의 객관성과 민족 자아 의식에도 높은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다. 1512년까지 증보된 보각판에 기초하여 찍은 인출본으로, 인출 당시의 원형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총 9책의 낙장이 없는 완질본이다. 고려와 조선시대의 판각본이 혼재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고려 및 1394년 잔존 목판본의 조성형식과 보존상태 등도 확인할 수 있다.
6.3. 보물 제722호: 성암본
권 44~50권 분량으로 총 7권 1책. 성암본이라 불린다. 1981년 서울 성암고서박물관에서 발견된 판본인데 고려 후기인 13세기 후기에 찍어낸 것으로 현존하고 있는 《삼국사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지만 단 1책만 존재하고 있다.
권말의 끝부분 장(張)이 떨어져 간기나 발문이 없다. 또한, 복각할 때 사용한 초간본의 상태가 좋지 않다. 초간의 원각에서 탈락된 것을 그대로 판각한 듯한데, 초간본의 후쇄본을 가지고 복각한 것으로 보인다. 몇몇 부분은 기존의 옥산서원본이나 정덕본과는 다른 데 대표적으로 온달이 참전한 장소인 배산(拜山)이, 성덕본에서는 이산(肄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6.4. 일본 궁내청본
1981년 2월 아키히토 당시 일본 황태자의 지시로 일본 궁내청 서원부(황실 도서관)의 장서를 정리하다가 《삼국사기》 정덕본을 수정, 가필한 《삼국사기》가 발견되었다. 50권 9책 완질본이다.아키히토가 왜 저 시점에 장서 정리를 지시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은데, 1960년 생인 나루히토가 막 성년이 된 해라서 고쿄 정리 차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정리 과정에서 《삼국사기》 외에도 한국, 중국, 일본, 심지어 유럽 국가들의 역사서들이 추가로 발견되는 성과도 있었다. 대부분은 일본 제국 시기에 수집한 것으로 보인다.
궁내청본이 언제 일본으로 넘어갔는지는 불분명하나, 1981년 이전에 서원부를 정리했던 것은 일제강점기 이전 메이지 유신 때인 1870년이다.
일본에서는 이 《삼국사기》 발견 이후 보존을 위해 영인을 하고 나서 보존처리 후에 다시 황실 도서관인 서원부에 보존하고 있다. 영인본은 2020년 현재 공개 여부에 대해 알려져 있지 않다.
7.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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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페셜 - 현존하는 최고의 역사서 800년논쟁 《삼국사기》의 진실은 |
7.1. 신라 우선주의 서술 여부
일제강점기에 신채호가 《삼국사기》와 그 저자인 김부식을 전격적으로 비난한 이후 이 주장에 동의하여 그를 디스하는 학자들이 상당히 많아졌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부분은 《삼국사기》는 누가 보아도 질과 양을 볼 때 철저히 신라 위주로 기술되었다는 것. 북한 또한 《삼국사기》가 신라 우선주의로 쓰였다고 본다.이부분과 관련하여 삼국사를 정작 읽어 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을 것이지만 이 것은 결론적으로 거짓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삼국을 공정하고 균형되게 서술하려고 했다. 삼국사기는 신라가 신라본기12권, 고구려가 고구려 본기10권, 백제가 백제본기 6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언뜻 보면 신라의 양이 제일 많고, 고구려 백제 순인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신라는 936에 망했고, 고구려는 668년에 망했으며, 백제는 660년에 망했다. 고구려가 망하고도 약 300년이나 더 존속한 신라의 역사가 겨우 고구려보다 2권 더 기술 되어 있을 뿐이다. 또한 500년 까지 보면 신라는 본기 3권이고, 백제는 본기 4권 중간이며, 고구려는 본기 7권이 시작한다. 그리고 통일할 때의 왕들은 각각 신라 고구려는 본기 2권에 담고 백제는 본기 1권에 담고 있다.(즉 문무왕신라본기 6권 7권, 보장왕 고구려 본기9권 10권, 의자왕 본기 6권이다.) 그러므로 양적으로 신라 우선이라는 설명은 틀렸다.
또한 《삼국사기》의 주요한 편찬자인 김부식은 이자겸이 금나라에 사대했을 때 찬동했던 인물인 동시에 고구려 계승 의식이 있는 서경파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과정에서 제거한 신라 계승주의를 주도한 동경파[42]의 대표자라는 점이 지적받으면서, 이전에는 고려의 입장과 동시에 김부식이 포함된 당시 문벌귀족들의 입장이 강하게 표현되어 고구려 계승 의식이 쇠퇴한다는 지적이 있어왔다. 고구려 계승 의식을 표방했을 가능성이 있는 《 구삼국사》[43][44]가 유실된 점을 아쉬워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45]
7.1.1. 편찬 목적
조금 더 자세히 풀어본다면 일단 《삼국사기》를 어떤 시점으로 봐도, 고려라는 나라를 구성하는 요소 중에 신라의 지분이 가장 크며[46] 《삼국사기》는 당장 《삼국사기》를 쓰는 사람들의 현 소속국가였던 고려의 시점에서 역사를 재정비하는 것이 우선적이라, 고려의 영토 대부분이 위치한 한반도 중부와 남부를 다스리던 국가인 삼한을 한때 아우른 신라가 고려 태조에게 귀부하고 고려는 흉악무도한 후백제를 물리치며 그것을 이어받은 정통성있는 국가라는 인식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경순왕이 우리 태조께 귀의함과 같은 것은 비록 부득이하여 한 일이지만 역시 가상한 것이며, 오히려 만약 힘써 죽기로 싸워 태조의 군사에 저항하다가 힘이 다하고 형세가 곤궁하기에 이르렀다면, 필시 그 종족이 뒤집혀 멸망되고 그 해독이 무고한 백성에까지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명령을 여쭈어 기다리지 않고 미리 나라의 창고를 봉하고 군․현을 기록해 바쳐 왔으니, 그의 우리 조정에 대한 공로와 백성들에 대한 은덕이 매우 크다 하겠다. 옛날 전씨가
오월의 땅을 들어 송나라에 바치매
소자첨이 그를 충신이라고 했거니와, 지금 신라의 공덕은 그보다 훨씬 더한 것이다.
《삼국사기》권12 <신라본기>. 종결부의 사론
《삼국사기》권12 <신라본기>. 종결부의 사론
신라의 운수가 다하고 도의가 상실되니 하늘이 돕지 않고 백성은 돌아갈 바를 몰랐다. 이에 뭇 도적들이 틈을 타고 일어나 마치 고슴도치 털과 같았거니와, 그 가운데 심한 자는
궁예와
견훤 두 사람뿐이었다. 궁예는 본래 신라의 왕자이면서도 반란하여 주종의 나라를 원수로 삼아 멸망시킬 것을 도모해 선조의 화상을 베기에 이르렀으니, 그 어질지 못함이 심하였다. 견훤은 신라의 백성으로서 일어나 신라의 녹을 먹으면서도 모반의 마음을 품고 나라의 위난을 요행으로 여겨 도읍을 침노하고 임금과 신하 베기를 마치 짐승 죽이듯 풀 베듯 했으니, 실로 천하의 극악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궁예는 그 신하에게 버림당했고 견훤은 화가 그 아들에게서 일어났으니, 이는 모두 스스로 자초한 것들인지라 다른 누구를 허물할 것인가. 비록
항우나
이밀과 같은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서도
한나라와
당나라의 흥기를 대적하지 못했거늘, 하물며 궁예나 견훤과 같은 흉악한 이들이야 어찌 우리 태조를 상대해 항거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단지 태조를 위해 백성을 몰아다준 이들이었을 뿐이다.
《삼국사기》권50 <견훤 열전>. 말미의 사론
《삼국사기》권50 <견훤 열전>. 말미의 사론
김부식은
김부를 오월의 전씨에 비교하여 공덕이 월등히 크다고 하였는데 무엇을 보고 그러한 것인가? 오월은
송나라에 대하여 번병으로서 술직[47] 하니 그 군신의 직분이 정하여 있었다. 그러나 신라는 고려에 대하여 이와 같지 않은즉,
태봉은 신라의 반적이요 고려 태조는 태봉의 신하였던 것이다. 비록 태봉이 이미 무너지고 고려의 국운이 날로 창성했다 하나 신라가 고려에 대해 일찍이 무릎 꿇고 칭번한 적이 없었거늘 하루아침에 종묘사직을 버리고 토지를 바치며 북면하여 조회하는 것이 옳겠는가. … 뒷날 비록 부귀하고 외손이 번성하였으나 어찌 나라가 망하고 자신을 잃는 큰 수치를 씻을 수 있겠는가! 경순왕과 같은 자는 이미 큰 절의를 잃었으므로 그 나머지는 취할 바가 없는데, 김부식이 전씨에 견주어 경순왕의 우월함을 비교하니 도대체 무엇을 보고 그러한 것인가?
《 동국통감》 권12 고려 태조 18년 사론
《 동국통감》 권12 고려 태조 18년 사론
김부식은, 신라와 고려의 관계를 중국의 제후왕과 중앙 왕조의 고사에 비유하며, '신라 왕은 고려 태조에게 토벌당하기 전에 순순히 나라를 바친 겸손한 제후왕'이란 고려 중심적 서술을 하여 신라 왕조를 고려 왕조에 비해 격하시키고 있다. 반면, 조선 왕조의 서술자는 '고려 왕조야 말로 근본없는 태봉의 후신인 수준인데, 김부식이 고려 왕조 띄워주려고 근본력 넘치는 신라 왕조를 격하하는 역사 날조 시도하고 있네!' 라는 식으로 김부식의 고려 중심의 역사관을 공격하고 있다. 이것만 봐도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가 어떠한 생각과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또한 후대의 사람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여기서 또 봐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 삼국유사》다. 《삼국유사》에도 《삼국사기》와 어느 정도는 비슷한 시각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후백제견훤조>는 기이편의 마지막 항목인 <가락국기조> 바로 앞에 자리한다. 《삼국유사》에서 기이편이란 단군조선에서 출발하여 고려 왕조 성립 이전까지를 대상으로 하여, 흥법편 이하 불교 신앙의 홍포와 신이한 이적에서 오는 감동의 공유를 위한 시공간적 배경 설정과도 같은 것이다. 즉 고려 태조에게 귀부한 경순왕의 행적을 마지막으로 하여 시간 순서에 따른 기록은 완결되는 것이고, 아울러 사실상 신라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역사 계승은 마무리되는 것이다. 그런데 <김부대왕조> 이후에 <남부여전백제조>, <무왕조>, <후백제견훤조>가 배치되었다. 이러한 배치는 일단 시간 순서에 따른 기이편의 서술 체계와는 상반된다. 따라서 《삼국유사》의 후백제 및 견훤 관련 자료의 분석에는 <김부대왕조> 이후 네 항목에 대한 편찬자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때 < 가락국기조>는 자료명 자체가 제목을 이루고 있다는 데서 일연 이후의 추가로 보는 시각이 있음을 환기하게 된다. 이러한 지적은 그에 대한 동의 여하와는 상관없이 본 문제에 의미 있는 시사점을 제공한다. 즉 후백제견훤조는 기실 ‘삼국사본전’ 곧 《삼국사기》 견훤전에 주요한 바탕을 두고 있되, 《 고기》(古記) 등의 정보를 제시하는 데 본의가 있었던 것이므로, 가락국기조의 맥락과 상통하는 바가 있다고 본다. 또한, 무왕조 자체가 고기에 근거했음은 물론이며, 남부여 전백제조 역시 고기 계통 정보를 담고 있었다. 다시 말해 후백제 견훤조를 위시한 네 조목의 편록은 유사를 자처한 《삼국유사》 저자 일연이 삼국의 ‘본사(本史)’로 간주한 삼국사기에서 배제된 고기류의 정보를 제시하는 데 주안 했던 것이다. 덧붙여 《삼국사기》에 가장 자료량이 풍부한 김유신전 역시 고기로 불린 그의 행록을 크게 절삭한 것인데, 그 절삭된 부분이 바로 《삼국유사》의 김유신조나 가락국기조 등에 반영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견해가 있다. 즉 《삼국유사》의 김유신 설화는 그 서술 목적이 《삼국사기》의 열전과는 다르며 지배이념의 구현보다는 그 인물의 신이한 행각이라든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일화를 표기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고기에서 무왕은 용의 아들이며 견훤은 지렁이의 아들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대비된다. 비록 이들의 출생담은 건국 신화적 요건을 갖춘 야래자신화(夜來者神話)로 파악되고, 이 ‘야래자신화’는 온조 등 백제 건국 주체 집단의 동명 신화가 하늘에서 온 아버지-지상의 어머니였던 것과는 달리 물에서 온 아버지-지상의 어머니로서 마한의 신화였을 가능성에 주목하기도 하나, 둘 다 뭔가 비정상적인 일이라고 하는 것은 몰라도 적어도 신성한 이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남부여전백제조 말미에 고기의 전승으로 파악되는, 이른바 '용바위' 전승은 사비하(백마강/백강)가에 한 바위가 있는데 소정방이 일찍이 이 위에 앉아 물고기와 용을 낚아 냈기 때문에 바위 위에 용이 꿇어앉은 흔적이 있으므로 용바위라고 하였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소정방의 이 행위가 백제의 멸망을 예비하는 조건으로 이해된 것처럼, 역시 부정적 예조(預兆)일 뿐이다. 요컨대 김부대왕조를 끝으로 마무리되어야 할 기이편의 구성에서 경순왕조 뒤에 있는 전-후백제사의 세 조목은 고기의 편린에 자저자의 강조점이 있되, 그것은 백제와 후백제에 대해 우호적이지 못하였다. 또한, 고구려사의 전말도 전혀 배려되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로 보아야 할 사안이며 여기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집필되던 시기의 좀 배웠던 사람들의 주류시각과 고려의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 생각건대 저 구려는 오늘날 발해로 되었는데, 비로소 근래 와서 계속 과거에서 분에 넘치는 성과를 거두었으니, 이는 곧 외방이 착함을 사모하는 정성을 기록하시고 대국의 공평한 덕화를 드러내심이나 …
최치원. 당나라 예부 배상서에게 보내는 편지(與禮部裵尙書瓚狀)
최치원. 당나라 예부 배상서에게 보내는 편지(與禮部裵尙書瓚狀)
… 구려가 이윽고 미친 회오리바람이 잦아지자 간신히 불탄 나머지를 거두어 따로 고을들을 취합할 것을 도모하더니 문득 나라 이름을 도적질하였으니 곧 예전의 구려임을 알 것이요 이가 오늘의 발해인 것입니다. … 최치원이 요행히도 천박한 재주를 가지고 … 실로 지극한 공정함을 만나 이전의 치욕을 씻었으니 변화됨은 한 번 돌보아주심에 깊이 힘입었고 그 광영은 멀리 삼한에 퍼졌습니다.
최치원. 당나라 고대부에게 편지(新羅王與唐江西高大夫湘狀)
최치원. 당나라 고대부에게 편지(新羅王與唐江西高大夫湘狀)
… 신이 삼가 발해의 원류를 살피건대, 구려가 아직 멸망되기 전에는 본래 사마귀만한 부락이었던 것이 말갈의 부류가 번창해지자 그 가운데 속말이라는 작은 번속이 있어 일찍이 구려를 따라 내지로 옮겨왔는데 그 수령
걸사비우와
대조영 등이…[48]
최치원.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
최치원.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
고려가 발해사를 편찬하지 못한 것을 보면 고려가 떨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옛날에 고씨가 북쪽 지방에 거하면서 고구려라 했고, 부여씨가 서남지방에 거하면서 백제라 했으며, 박씨․석씨․김씨가 동남지방에 거하면서 신라라 한 바 이것이 삼국이다. 이 삼국에는 마땅히 삼국에 대한 사서가 있어야 할 텐데, 고려가 이것을 편찬했으니, 옳은 일이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한 다음 김씨가 남방을 차지하고 대씨가 북방을 차지하고는 발해라 했으니, 이것을 남북국이라 하는 바,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하거늘,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유득공. 《 발해고》
유득공. 《 발해고》
이 사료들까지 본다면 신라가 나라가 망하고 있던 시기에도 통일 전쟁 시기부터 표방해온 삼한일통에 대해 얼마나 집작하고 있는지[49], 또한, 건국 초에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뚜렷하게 표방하였으나, 북벌정책이 거란과의 전쟁을 거치며 종료되고 신라말의 삼한일통 의식이 고려의 주류 역사관으로 자리 잡은 것을 알 수가 있다.
7.2. 신라 우선주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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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페셜 - 김부식은 왜 삼국사기를 썼나 |
- 일단 《 구삼국사》가 좀 더 고구려 계승 의식에 근거해 고구려 우선적 서술이 있었을 확률이 있지만, 그렇다고 고구려 관련 기술을 김부식이 의도적으로 빼진 않았다는 게 정설이다. 실제로 구삼국사의 기록이 일부 온전히 남아있는 이규보가 남긴 《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을 읽어보면 《삼국사기》 동명성왕본기에 수록된 내용과 별반 다르지가 않다, 아니 세세한 업적 등은 구삼국사 부분에 없고 《삼국사기》에만 적혔으므로 오히려 《삼국사기》의 기록이 더 많다.
- 분량으로 봐도 통일 시점까지를 따지면, 고구려가 10권, 신라가 7권으로 고구려가 더 많다. 특히 건국 시점부터 4세기~ 5세기초까지 기록은 고구려본기가 신라본기의 2배 넘는다.[50]
- 삼국의 역사를 제후의 용어인 세가(世家)가 아닌 황제의 역사에 해당하는 본기(本紀)로 구성하여 황제의 역사와 동등하게 취급했다. 그 당시는 다원적 천하관이 자리잡은 시기로 이때 고려는 해동천하를 내세우며 내부적으로 황제의 격에 맞는 용어를 쓰는 등 황제국을 표방하여 외왕내제적 성향이 강했다. 훗날 조선에서는 고려사를 편찬할 때 고려 역대 국왕에 대해 세가를 사용한 것과 비교하면 오히려 '이 사람 사대주의자 맞아?'라고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따라서 책을 평가할 때에 김부식이 합리적 유교 사관에 입각하여 이상과 현실을 적절히 타협하여 서술했음을 전제로 논해야 한다.
-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을 모두 똑같은 본기를 사용했다는 점을 통해서 삼국을 동등한 위치의 국가로 봤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신라에 우선순위를 두었다면 신라만이 본기고 고구려 계승 의식만을 내비쳤다면 고구려만 본기일테고 어떤 경우든 어중간한 백제의 왕과 역사는 세가에 따로 넣었을 것이다. 이는 비슷하게 병존한 3개 국가를 동시에 편찬했던 중국의 사서 삼국지에서도 촉과 오의 군주들은 열전 처리하고 위진 계통만을 본기로 서술해 조위정통론을 분명히 했던 것과 비교된다.
- 제일 늦게 중앙집권국가로 시작하고 전성기도 제일 늦게 맞이한 신라가 3국 중에서 제일 먼저 건국했다는 것도 주요 논쟁거리였지만 최근에는 신라 건국 시기를 긍정적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사실 먼저 건국했다고 항상 먼저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위략』, 『삼국지』의 진국(辰國)과 진한(辰韓)에 관한 기록을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요동지역의 세력이 점점 남하하여 경상도에 최종 정착했다는 주장이다. 진한은 당시에 세력은 후퇴했으나 정치적으로 진국의 충분한 경험이 있었고, 신라는 진한의 6소국이 모여 성립된 나라이므로 삼국 중 먼저 건국되어도 모순되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신라가 가장 늦게 발전한 것은 진국 통치의 경험, 지리적 위치로 인한 현상으로 바라본다.[51] 사로국 항목도 참조.
- 삼국사기에 수록된, 김부식 등 사관 본인들의 직접 평가라고 할 수 있는 사론(史論)들을 살펴봐도, 신라본기의 사론 10개는 전부 신라의 제도를 비판하는 사론이다. 신라삼보는 사람이 만든 사치한 물건일 뿐이니 나라를 통치함에 있어 필요가 없었다든가, 여자를 왕으로 올렸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든가. 반면 고구려본기에서도 비판적인 사론도 있지만 을파소나 안시성주 등을 사론으로 오히려 칭찬하고 있다. 김부식 등 삼국사기 편찬자의 성향이 신라에 더욱 우호적이라면 이런 식으로 서술할 이유가 없다.
7.2.1. 오해 받는 이유: 사료 부족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고구려와 백제의 직관(職官)이 오래되고 기록이 없어서 고기(古記)와 중국 사서에 나타난 것만 기록한다.'고 서술했다.[52]고구려와 백제의 제사 제례는 명확하지 않으므로 다만 고기(古記)와 중국 역사에 쓰여 있는 내용을 상고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삼국사기》 제32권 잡지 제1- 제사
《삼국사기》 제32권 잡지 제1- 제사
신라는 연대가 오래 되었으며 문헌과 사서들이 사라져서 그 제도를 자세히 말할 수 없다.
(중략)
고구려와 백제의 의복제도는 고찰할 수 없으므로 여기에 중국의 역대 사서(史書)에 보이는 것만을 기록하기로 한다.
《삼국사기》 제33권 잡지 제2 - 의복
(중략)
고구려와 백제의 의복제도는 고찰할 수 없으므로 여기에 중국의 역대 사서(史書)에 보이는 것만을 기록하기로 한다.
《삼국사기》 제33권 잡지 제2 - 의복
고구려와 백제의 관직은 연대가 오래 되었으며 기록이 모호하여 자세히 알 수 없다.
《삼국사기》 제40권 잡지 제9 - 관직
게다가 아래 구성에서 보듯, 삼국통일까지의 시점을 따지면 고구려 10권, 신라 6권, 백제 6권으로 고구려본기의 권수가 가장 많다.' 따라서 양적인 문제를 근거 없이 비판하는 것은 잘못됐다.《삼국사기》 제40권 잡지 제9 - 관직
이런 논란이 벌어지는 이유는 《삼국사기》 편찬 당시 사료가 매우 부족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7세기 이전 파트는 적어도 500여 년 전 일이었는데도[53] 당시에도 자료가 너무 없어서 중간 저자인 김부식조차도 "마한은 온조왕때 망했다며? 100년이 지났는데 왜 갑자기 또 나오는거냐?"라고 의아해 하는 주석을 달기도 했으며 구이신왕처럼 재위, 사망만 다루는 것을 넘어 사반왕처럼 아예 통으로 날려 먹은 파트도 존재한다.
70년(서기 122),
임금이
마한,
예맥과 함께 요동을 침입하였다. 부여왕이 병사를 보내 요동을 구하고, 우리를 격파하였다.【마한은 백제
온조왕 27년에 멸망하였는데, 지금 고구려왕과 함께 군사 행동을 한 것은 아마도 멸망한 후 다시 일어난 것인가?】
《삼국사기》 제15권 고구려본기 제3 태조대왕. ##
《삼국사기》 제15권 고구려본기 제3 태조대왕. ##
백제, 고구려쪽은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수도가 함락되는 과정에 대부분 기록이 불에 타거나 약탈로 없어졌을 것이다. 신라의 기록 역시 견훤의 서라벌 약탈과 여요전쟁으로 인해 상당수 소실된 것으로 추측된다.[54]
당시에 그나마 남아있었던 자료들조차도 그 양이 매우 부족해서 신라 편향적이라고 욕을 먹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박혁거세부터 진평왕까지의 일을 기록한 책은 단 4권이다. 이해하기 힘들다면 고려의 승리에서 비롯되는 후백제 관련 자료의 한계는 7세기 이후 멸망한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가 승리한 신라인의 관점에 충실한 형태로 재편되었던 사정과 다르지 않고, 또한 멸망한 나라의 사서는 업데이트나 보존을 위한 노력이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알기 쉽다. 사실 통일신라 시기의 신라본기도 기록의 양이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다. 기록의 밀도가 높아서 실감이 안 날 뿐이지, 효소왕~ 혜공왕 시기 기록과 효공왕~ 신덕왕 시기 기록은 각 연도별 사건들이 미천왕 이후 고구려본기급으로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다.
아쉬운 점은 고려 시대에는 국가에서 주도적으로 전대 왕조에 대한 정사를 편찬하는 시기가 너무 늦었다는 것에 있다. 전통적으로 동양 왕조들은 건국 후 바로 전 왕조의 정사(正史)를 편찬하는 전례가 있어 왔던건데 고려는 그러지 않았다. 고려는 초창기부터 왕건의 역성혁명으로 건국된 나라였고 후백제와의 전쟁으로 왕건이 도망다닐 정도로 고생한데다 그 다음으로 일어난 왕위쟁탈전이 끝나자 곧이어 일어난 고려-거란 전쟁, 그리고 천추태후 등의 실정과 그로 인해 벌어진 권력 투쟁인 계속된 전쟁으로 고려 초는 혼란기가 적지 않아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사료 자체가 또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여요전쟁만 해도 2차 침입 때 개경이 함락되면서 적지 않은 역사 자료가 파괴되었다. 또 전조의 정사 편찬은 본래 중국의 관습인데, 고려 초는 근친혼이 성행하는 등 아직 중국식 문화가 후대에 비하면 덜 유입된 시대이기 때문에 필요성 또한 적게 느꼈을 것이다. 애초에 중국의 왕조들이 대체로 200~300년 주기로 교체되는 것에 비하면[55] 한반도 국가들은 그야말로 한도 끝도 없이 주구장창 이어지는 수준이라 이런 정사 편찬에 대한 감각이 없는 것도 당연했다. 국체의 교체만으로 따지면 그야말로 천 년만의 일이었으니.
그런 이유로 17대 왕인 인종대에 와서야 《삼국사기》를 집필하는데 이를 근거했을 당시의 자료가 시기상 고구려나 백제가 멸망한 지 500여 년이나 지난 시점이었고 이들의 기록을 상당수 가졌을 발해와 통일신라도 멸망한 지 무려 200년은 된 시점인데다가 발해 유적은 대부분 고려 땅이 아니었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구하는게 불가능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동아시아 내에서 직접 구할 수 있는 것은 한정적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구할 수 있는 것들의 대부분은 당연히 고구려나 백제가 신라보다 먼저 망했고 신라가 수백 년은 더 오래 간데다 더 최근까지 존속하였기에 신라인들의 관점에서 재정리되어 있는 것이 많았고, 혹은 그것을 토대로 고려에서 재정리한 것이었다. 또한, 북방의 대륙에 위치한 국가였던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의 기록이 중국왕조에 의해 훼손되고 백제와 삼한의 기록이 신라에 의해 훼손되면서 기록이 부실해 짜깁기식으로 기록을 편집한 채로 편찬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김부식도 비슷한 내용의 옛 기록들을 찾아보았으나 인용할만한 기록이 거의 없어 기술을 포기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집필하던 1100년대 중기에는 이미 신라, 백제, 고구려 등의 여러 국가가 수백 여 년 동안 기록하여 남긴 역사 사료들을 모두 긁어모아 재정립해도 단 아홉 권에 그칠 정도로 이미 이전대의 역사 사료들이 상당수 사멸한 상태였고[56] 이러다 보니 어느 정도의 비중 문제는 어쩔 수 없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부식도 나름대로 고구려와 백제 관련 자료를 박박 긁어모아서 찾아보려 한 흔적이 곳곳에서 드러나는 등 오히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혹자는 김유신 열전을 언급하며 신라 우선주의라고 매몰차게 비판하기도 한다. 10권으로 이루어진 '열전'에 수록된 인물 69명 중에 고구려, 백제인은 합쳐서 11명에 불과하고 또 10권 중에 김유신 열전이 3권을 차지하고 있는 점을 들어, 아무리 당시에 기록이 적어졌다 하더라도 두 국가를 합쳐서 11명밖에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편향적이며 신라의 시각과 신라 편향적인 자세에서 글을 쓴 것은 도저히 피하기 힘들 정도로 비판받을 만한 거리라는 것. 하지만 삼국사기를 좀 더 들여다본다면 그런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김유신의 기록마저 부족했기 때문에 김유신의 후손이 쓴 김유신행록을 그대로 베꼈기 때문이다. 심지어 김유신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처럼 "꼴 베는 아이와 가축을 기르는 아이까지도 또한 그를 알고 있다"고 할 정도로 고려 시대에도 매우 유명한 인물이었는데, 그런 사람에 대한 기록도 부족할 지경이었으니 다른 인물들에 대한 기록이 풍부히 남아있을 리는 만무했다.
유신의 현손(玄孫)으로서 신라의 집사랑(執事郞)인 장청(長淸)이 행록(行錄) 10권을 지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는 만들어서 넣은 말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일부 삭제해 버리고 기록할 만한 것들을 취하여 전(傳)을 만들었다.
《삼국사기》 제43권 열전 제3 김유신 하
그래서 김유신 열전 초반부에는 군자불어
괴력난신(君子不語怪力亂神)과
술이부작(述而不作)[57]에 따라서 작성된 삼국사기의 내용과는 전혀 동떨어진 전설들이 등장하며[58], 당시 허구헌날 백제에게 개털렸다는 신라본기의 기록과는 정반대로, 김유신 열전에는 김유신이 가는 곳마다 승리를 이끌어 낸다고 나와 와있는 등 앞뒤 기록이 안 맞는 경우가 발생했다. 한마디로 김유신과 같이 통일신라 시대의 주역의 자료도 빈약한 상황이었다는 걸 알 수가 있다.[59]
연개소문도 관련된 자료의 부재로 《삼국사기》 '
연개소문 열전'은 《당서》의 연개소문 관련 대목을 거의 그대로
복붙해버렸다. 그 때문에
당고조의 이름인 이연(李淵)을
피휘하느라 천개소문(泉蓋蘇文)이라고 적은 것을 그대로 가져와 버린 웃지 못할 실수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후대의 삼국유사가 이걸 그대로 베끼는 바람에(...) 오랫동안 연개소문은 천개소문으로 알려졌다. 이런 쌍사의 삽질 덕분에 한때 교과서 등에
연개소문이 천개소문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본 열전이 기본적으로
적대국이 남긴 기록인 까닭에 연개소문의 부정적인 모습들을 실상보다 훨씬 과장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은 더 큰 문제가 된다.[60] 그 외에 본기나 다른 문헌에서 전재하지 않은 독자적인 전기를 가진 사람은
온달과
도미 단 두 명뿐이다.《삼국사기》 제43권 열전 제3 김유신 하
而史失其姓名, 與揚子所云, “齊·魯大臣, 史失其名.” 無異. 甚可惜也.
하지만 역사(史)에서 그 성명(姓名)을 잃어버리니 양자(楊子)가 말한 것처럼, '제로대신(齊魯大臣)[61]은 역사(史)에서 그 이름을 잃었다.'라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심히 애석하다.
《삼국사기》 제21권 고구려본기 제9 보장왕 상
또한
고구려의
명장 중 한 명인
안시성주는 김부식이 그렇게 위대한 영웅의 이름을 알지 못해서 한탄스럽다는 평을 위와 같이 남겼다. 이런 대단한 업적을 남긴 인물들 기록도 사라진 판에 다른 이들의 기록이 남아있을 확률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열전 중에서는 이름만 언급되어 있고 행적이 없다고만 적힌 인물들도 있다. 사실 당대 최고 명문장가였던
설총도 당시 기준으로도 남아있는 글이 거의 없어서[62] 어떻게든 박박 긁어모아도 삼국사기에 실을 수 있던 글이
화왕계 하나밖에 없던 판이었으니 설총보다 명성이 떨어지던 나머지 문장가들은 뭐...하지만 역사(史)에서 그 성명(姓名)을 잃어버리니 양자(楊子)가 말한 것처럼, '제로대신(齊魯大臣)[61]은 역사(史)에서 그 이름을 잃었다.'라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심히 애석하다.
《삼국사기》 제21권 고구려본기 제9 보장왕 상
박인범(朴仁範), 원걸(元傑), 거인(巨仁), 김운경(金雲卿), 김수훈(金垂訓) 등은 글이 전하는 것은 조금 있으나 역사기록에 그들의 행적이 없으므로 전기를 만들 수 없다.
朴仁範元傑巨仁金雲卿金垂訓輩 雖僅有文字傳者 而史失行事 不得立傳
삼국사기 제46권 열전 제6 - 박인범, 원걸, 거인, 김운경, 김수훈 등
[63]朴仁範元傑巨仁金雲卿金垂訓輩 雖僅有文字傳者 而史失行事 不得立傳
삼국사기 제46권 열전 제6 - 박인범, 원걸, 거인, 김운경, 김수훈 등
굳이 쓰지 않아도 됐을 이야기를 삼국사기에 남긴 행적만 봐도 김부식이 열전을 편향적으로 쓴 게 아니라, 박박 긁어모아서 쓴 게 현재의 삼국사기였다는 것이다. 개별열전은 구체적인 일생이 담겨있어야 저술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 예로 거인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진성여왕을 비판하는 글을 쓴 것으로 몰려 옥고를 치렀다가 전해지는 행적의 전부로 왕(王)이라는 성씨도 삼국유사에만 등장하는 내용이며 그 외의 내용은 삼국사기와 동일하다. 즉 위의 기록에도 나와 있지만 거인에 대한 "글이 전하는 것은 조금 있으나 역사기록에 그들의 행적이 없으므로" 열전을 만들 분량이 나오지 않아 열전을 만들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김부식을 비롯한 제작자들이 최선을 다해 사료들을 모아서 삼국사기를 제작했으나, 사료부족으로 인해 9책 50권 분량의 삼국사기 내용은 적은 편이다. 단적으로 얘기해서, 삼국사기는 삼국시대 ~ 후삼국 통일까지 거의 1천년을 다루지만, 고작 90년을 기록하고 65권 분량의 정사 삼국지보다 내용이 적으며,[64] 137권 75책 분량 고려사와 비교하면 12% 수준이고, 1,894권 888책 조선왕조실록과 비교하면 1% 수준이다. 그나마도 이건 일제에 의해 편찬되어서 사실상 조선왕조실록으로 취습 안 하는 고종, 순종 실록은 제외하고, 철종실록까지 비교했는데도 이렇다.
7.3.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수정하면 식민사관?
자세한 내용은 삼국사기 초기기록 수정론 식민사관설 문서 참고하십시오.7.4. 여타 문제점
- 태조대왕을 비롯한 삼국 초기 왕들의 재위 기간이 지나치게 길게 나타나는 문제등이 있어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설'이 비중있게 제기되기도 했다. 고구려, 신라, 백제 할 것 없이 《삼국사기》를 펼쳐보고 왕들의 재위 기간, 출생 연도를 하나하나 따져보면 왕들의 나이가 실로 예술이다. 고이왕처럼 아버지가 죽는 해에 태어났다고 쳐도 120살이 넘게 살기도 하고, 심지어는 석탈해와 같이 아예 태어나기 전부터 활동한 사람도 있고, 대무신왕처럼 어머니가 죽은 뒤 수년 뒤에 태어난 사람도 있다. 편찬자들의 실수도 있겠지만 그전에 김부식이 인용한 원사료들부터가 문제가 심했던 것으로 유력하게 추정된다. 예를 들어 백제는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개국 이래 문자로 사실을 기록한 적이 없다가, 근초고왕 때에 이르러 고흥이 처음으로 『서기(書記)』를 썼다고 되어있다. 즉 그 이전은 글로 쓰지 않고 기억에 의존해 입에서 입으로 전했을테니 근초고왕 이전 시대 백제의 기록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지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 원사료도 또다른 고대 사서인 《 일본서기》처럼 백제사를 미화하기 위해 의도적인 윤색까지 가해졌던 책일 가능성도 예상할 수 있다.
- 이러한 불신론에 의거, 《삼국지》 위지 '동이전'[65]에서 70~80개의 소국이 병립된 것으로 묘사되는 2~3세기에 백제와 신라가 각각 한반도 서남부 지역과 동남부 지역을 석권한 집권 국가임을 드러내는 초기 기록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사학계 내부에 팽배했다. 이러한 기류는 풍납토성 발굴을 계기로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이후 신라의 나정/ 신궁 유적 발굴로 인해 어느 정도 학설이 수정되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해체 국면에 들어간 것은 아니다. 일반인들의 이러한 흑백론적 사고방식은 역사 이해에 큰 걸림돌이 된다. 역사는 모 아니면 도가 아니다. 이를테면 최근 발굴 조사 결과로 보건대 고구려계 유이민이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일대에 나타난 건 아무리 올려잡아도 기원후 3세기 중반이 한계며, 경기도 전역으로 범위를 넓혀도 기원후 2세기 중후반이 고작이다. 신라 또한 비슷한 문제가 있는데 기원후 2세기 후반이 되기 전까지는 서라벌 일대에 있었던 고만고만한 세력들이 한 세력 아래 통합되지도 못했던 것으로 드러난다.[66] 즉 시조인 온조왕대 이미 마한 전체를 아울렀다는 기사, 고구려보다도 신라의 건국 연대가 앞선다는 기사를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는 얘기다. 삼국의 초기 역사에 대한 기술은 건국자에 대한 미화 등을 목적으로 후대의 윤색이 들어갈 여지가 크기 때문에 이렇게 신뢰성이 낮을 수밖에 없다. 훨씬 후대의 국가인 조선왕조의 경우에도 용비어천가나 태조실록은 미화와 과장이 많은 것처럼 어느 나라나 다 마찬가지인데 특히 고대는 문자기록시대 이전의 이야기를 입에서 입으로 전한 것이므로 더욱 그렇게 될 수밖에는 없었다.
- 정치적인 이유에서 직필하지 않고 어물쩍 넘긴 부분이 있는데 궁예는 901년 고려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세웠(혹은 사실상의 국가 상태에서 왕국을 선포하였)지만 삼국사기 신라본기나 궁예 열전에서는 901년 왕을 칭한 사실만 기록하였다. 김부식 본인이 소속된 국가였던 왕씨 고려의 정통성이 훼손되니까 이 부분에서 객관성을 찾기는 힘든 면이 있다. 왕건의 정통성과 당시 고려인들의 역사관[67]을 생각하면 그렇게 서술한 것이 당연하긴 하지만 삼국사기를 액면 그대로 믿는 것은 곤란하다는 증거이다. 편찬 목적이 아예 다른 《 삼국유사》에는 연표에 궁예가 고려라는 국호로 901년 건국한 것이 명확히 기재되어 있다.
- 고려사에선 식화지가 있을 정도로 신라의 문란한 토지제도까지 비판했지만 삼국사기에선 토지제도에 큰 이야기가 없었다. 이후 이제현은 고려 경종 평가에서 역분전이 신라의 문란한 토지제를 옛날 관료전처럼 역분전으로 정한 걸 미봉책이라고 비판했다. 이후 전시과를 그나마 높이 평가했는데 전시과마저도 후세에 고칠게 많다고 비판했다. 삼국 시대의 토지 제도에 대해 당시에는 남은 기록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려사 식화지의 내용이나 이제현의 사평을 통해서 반대편 측에선 신라의 관료전이 신문왕 시절에 시행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본다면 꽤나 뜻이 깊은 논평이라고 보여진다. 나름대로 이제현의 사평과 고려사 식화지 서문은 이를 뒷받침하고 고대의 토지제도에 관련된 교차검증이 한발 더 앞서갔다는 것이다.[68] 이제현 또한 신라가 문란하다고 깠을 뿐이지 신라의 토지제도가 무엇인지는 전혀 말하지 못하고 있다. 직관지나 열전만 보아도 복원하지 못한 과거의 사실이 너무나 많다.
- 열전에 별의별 듣보잡 인물이 다 들어가 있다는 비판도 있다. 백제와 싸우다가 죽은 여러 듣보잡 인물들의 열전들이 다 있다. 열전은 한정된 지면에서 중요한 인물들의 사적을 간단히 돌아보는 곳이지 이런 사람들의 공을 찬양하는 곳이 아니다. 실제로 고려사 열전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듣보잡들은 그룹으로 묶어 간단히 논하고 만다. 그러나 기전체의 열전은 원래 주관이 상당히 들어가는 부분이므로 듣보잡 인물이 들어갔다고 비판할 수 없자는 견해 또한 있다. 기전체의 정석인 사기에 실린 열전에는 백이, 손자, 오자서등 우리가 역사책에서 익히 이름을 들은 유명한 이들도 있는 반면 오왕비나 장창처럼 생소한 이들의 단독 열전도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을 두고 듣보잡을 단독으로 열전에 실었다고 비아냥대는 경우는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듣보잡의 기준이 지극히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오왕 유비는 종친이며 나중에 오초칠국의 난[69] 을 일으킨 자이니 당연히 기록될 만하며, 장창은 승상도 지냈고 음양가 철학의 대가로서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열전의 수록 기준은 편찬자의 의도에 따라 나뉘는 것이지 "이런 사람만 들어가야 올바른 사서다!"라는 것은 없다. 충, 효등 유교적 사상에 입각해 저술된 삼국사기의 경우에는 당연히 열전에도 그런 의도가 담겨서 편찬될수 밖에 없었고 따라서 현대의 일부 사람들이 듣보잡으로 취급하는 위인들도 열전에 수록된 것이다.
삼국사기 편찬 당시에는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고구려의 영웅 안시성주의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아 삼국사기 사관이 이름을 알지 못해 한탄할 정도였고, 김유신의 경우에도 기록 부족으로 가문의 행록을 줄이고 줄여서 열전에 올릴 판이었다. 한마디로 열전에 이름을 남긴 이들은 교훈과 더불어 기록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김부식이 의도적으로 유명한 재상들을 빼서 수록했다는 주장은 그 근거가 무척이나 부족하다. 연개소문은 아예 중국측 사서를 그대로 옮겨와 성이 강제개명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고 을지문덕과 장보고의 경우에는 중국의 기록을 참고할 수 밖에 없었다는 아쉬움을 드러내는 대목이 삼국사기에 남아있다.
비록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지략과 장보고(張保臯)의 용맹이 있었어도 중국의 서적이 아니었다면 모두 사라져 후세에 알려지지 못하였을 것이다.
『삼국사기』 제43권 열전 제3 김유신 하
이런 상황에서 다른 재상들의 세세한 기록이 남아있을 리는 거의 없다. 또한 고구려의 기록을 인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신집이
동명성왕부터
고국원왕 대까지의 일을 담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을파소나
명림답부처럼 비교적 상세한 기록이 그 시기에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기록 부족으로 재상들의 이름이 빠졌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하물며 역사서 편찬 기록이 거의 없는[70] 백제는 더욱 그 기록이 부족했을 것이다.『삼국사기』 제43권 열전 제3 김유신 하
이와 같이 '史記(사기)'의 총권수는 50권으로, 1권의 분량이라야 몇 장이 되지 못하고 옛날 舊版(구판)의 粧冊(장책)으로는 통히 9책 내지 10책을 넘지 못하고, 근래 新活字版(신활자판)의 책자로는 1책 내지 2책에 지나지 않는 적은 분량의 책이다. 三國(삼국)의 歷年(역년)이 오래고 그간에 발생한 역사적 사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史記(사기)'의 內容(내용)·卷帙(권질)이 이와 같이 빈약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면 도대체 史料(사료)가 부족했던 까닭이다. 돌아보건대, 三國(삼국)은 일찍이 각자의 역사를 기록 또는 편찬한 일이 종종 있었던 것이다. 즉 고구려는 國初(국초)로부터 한문을 사용하여 일찍이 『留記(
유기)』 백권의 史書(사서)가 있었던바, 嬰陽王(
영양왕) 11년(서기 600년)에 太學博士(태학박사) 李文眞(이문진)으로 하여금 『留記(유기)』를 刪修(산수)하여 新集(
신집) 5권을 만들게 하였고, 백제는 近肖古王(
근초고왕) 30년(서기 375년)에 博士(박사) 高興(
고흥)을 얻어 國史(국사)를 닦게 하여 백제의 書記(
서기)가 있게 되었다. 『日本書紀(일본서기)』 중에 인용된 「百濟本記(
백제본기)」·「百濟紀(
백제기)」·「百濟新撰(
백제신찬)」 등도 모두 百濟人(백제인)의 손에 된 史書(사서)일 것이다. 신라는 眞興王(진흥왕) 6년(서기 545년)에 大阿湌(대아찬) 居柒夫(거칠부) 등을 명하여 國史(국사)를 編修(편수)케 한 일이 있거니와, 이후에도 누차의 修史(수사)가 있었을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러한 三國(삼국)의 史籍(사적)은 兵亂(병란)에 이미 湮滅(인멸)된 지 오래되어 金富軾(
김부식) 당시에는 제2차 내지 제3차적 史料(사료)인 古記類(고기류)가 存傳(존전)하여, 그것과 또 中國史書(중국사서) 중에 실린 記事(기사)를 採取(채취)하여 편찬한 데 불과하였던 것이다.
이병도 삼국사기 해제. 서문.
앞서 예시로 언급된
고려사의 경우
조선이 건국한 직후 편찬을 준비했고 그 결과 상세한 기록들이 소실되지 않고 고스란히 역사책에 담길 수 있었다. 하지만 삼국사기는
삼국통일전쟁이 끝나고 500여 년,
통일신라가 멸망하고도 200여 년이 지난 후에나 작성된 역사책이니 소실된 기록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이병도 삼국사기 해제. 서문.
8. 삼국사기의 구성
삼국사기(三國史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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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
{{{#!folding [ 열전(列傳) ]
}}} ||총 50권 9책으로, '권'은 내용 구성상의 단락을 나눈 단위이고 '책'은 물리적으로 책 한 권을 묶은 단위를 뜻한다. 즉 현대인의 관점에서 재구성해 말하자면 목차가 50개의 챕터로 이루어진 총 아홉 권의 책인 셈.
8.1.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
자세한 내용은 진삼국사기표 문서 참고하십시오.- 《삼국사기》를 올리는(進) 표문(表)으로, 김부식이 썼다. 자세한 내용은 진삼국사기표 참조. 참고로 현존하는 《삼국사기》 판본에는 이 부분이 전하지 않으며, 조선 전기에 편찬된 시문선집인 《 동문선》에 실려있다.
8.2. 본기
본래 본기는 기전체 역사서에서 중화 세계를 지배한 통일 국가와 천자에 대한 기록을 쓰는 것인데, 김부식은 한국사가 중국사에 못지 않다는 점과 셋 중 어느 한 나라만이 아닌 대등하게 계승하였음을 강조하기 위해 3개국 모두를 본기에 편입해 썼다. 상술된 대로 고려사에서는 본기가 아예 없고 모든 고려왕을 세가에 넣었다는 점에서 대조된다.- 본기
8.3. 연표
도표 형식으로 사건을 기록한 것.- 연표
8.4. 잡지
당시의 생활상이나 제도, 풍속 등을 기록한 사회사 기록.- 잡지
- 권32 제사, 음악
- 권33 색복(옷), 거기(車騎: 수레와 마구), 기용(器用: 그릇), 옥사(屋舍: 가옥)
- 권34·35·36 지리 1, 2, 3 신라
- 권37 지리 고구려, 백제
- 권38·39·40 직관 상, 중, 하: 관직에 대한 기록이다.
8.5. 열전
역사에 이름을 남겨 모범, 반면교사가 되는 여러 인물에 대한 기록. 마지막 10권은 역적을 다룬 반역열전에 준하게 구성하고, 나머지 앞의 인물들은 인물의 중요성을 칭찬하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수록되어 있다.또한 본기와 다르게 열전은 당대 전해져오는 내용을 가공없이 기록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한 예로 가야의 경우에도 본기에는 금관국, 반파국, 안라국등 다양한 국가들을 가라혹은 가야로 일괄적으로 통칭하고 있으나 열전에는 해당 국가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이 있다. 포상팔국의 난의 경우에도 본기에는 “가라국 왕자가 도움을 요청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열전인 물계자전에는 “아라국이서 도움을 요청했다.”라고 명시해놓았다. 김유신열전은 아예 후손이 쓴 열전을 허무맹랑한 것을 제외하고 축약해서 옮겨 놓았기 때문에 당대의 기록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
- 열전
- 권41·42·43 김유신 상, 중, 하: 김유신 뿐만 아니라 김유신 후손들의 행적도 수록되어 있다.
- 권44 을지문덕, 거칠부, 거도, 이사부, 김인문(부록 김양도), 김양(부록 김흔), 흑치상지, 장보고· 정연, 사다함
- 권45 을파소, 김후직, 녹진, 밀우· 유유, 명림답부, 석우로, 박제상, 귀산, 온달
- 권46 강수, 최치원, 설총, 최승우, 최언위, 김대문: 이 권의 말미에는 박인범·원걸·거인·김운경·김수훈 등도 문장으로 유명했으나 자료가 없어서 열전을 만들지 못했다고 덧붙여져 있다. 사실 이 권에 실린 인물들은 모두 문장과 유학으로 유명한 인물들이다.
- 권47 해론, 소나, 취도, 눌최, 설계두, 김영윤, 관창, 김흠운, 열기(부록 구근), 비령자, 죽죽, 필부, 계백: 여기 수록된 인물들은 열기와 구근을 제외하고 전장에서 전사한 무장들이다.
- 권48 향덕, 성각, 실혜, 물계자, 백결선생, 검군, 김생(부록 요극일), 솔거, 효녀 지은, 설씨녀, 도미
- 권49 창조리, 개소문: 둘 다 고구려 재상이지만 전 왕을 시해하고 다른 왕을 옹립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개소문 열전에는 그의 아 들 들의 행적도 실려 있다.
- 권50 궁예, 견훤: 후삼국시대의 군웅들.
8.6. 편찬자
- 편수(編修)
- 김부식(金富軾)
- 참고(叅考)
- 김영온(金永溫)
- 최우보(崔祐甫)[73]
- 이황중(李黃中)
- 박동계(朴東桂)
- 서안정(徐安貞)
- 허홍재(許洪材)
- 이온문(李溫文)
- 최산보(崔山甫)
- 그 외
- 김충효(金忠孝)
- 정습명(鄭襲明)
- 김거두(金居斗)
- 최득경(崔得冏)
- 민개(閔開)
8.7. 발문
사기와는 다르게 삼국은 제후를 봉하지 않았으므로 제후들의 역사를 다루는 세가가 없다. 고대 삼국은 자국만의 작위를 쓰고 왕작, 공작, 후작 등 오등작을 봉하는 등 각국 국왕이 자국 내에서 천자로서 군림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진짜 주나라 마냥 땅을 떼준 게 아니라 '제후 칭호'를 봉한 것이다. 삼국은 부족 연합체, 소국 연합체에서 조금씩 진화해 군현제 국가로 성장했지 봉건제 국가로 성장하지 않았다.[74]9. 북한이 보는 삼국사기
북한의 교과서인 조선력사에서는 지금의 한국 사학계와 달리 신라 사관을 토대로 신라에게 우호적으로 쓰인 책으로 비판되고 있지만 역사적 가치는 인정하고 있다.《삼국사기》는 왕조사로 서술된 책으로서 신라중심으로 세나라력사를 서술하고 외국자료를 무비판적으로 인용리용한 것[75], 신라의 사대외교를 긍정한것, 삼국이전 즉 고대사자료들을 전혀 서술하지 않은것 등 근본적인 결함을 가지고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옛 력사책가운데서 제일 오래된것으로서 삼국시기 력사연구를 위한 귀중한 자료로 된다.
- 조선력사 -
- 조선력사 -
10. 그 외
2013년도 도쿄대학 본고사 국어(일본어)의 고문(古文) 파트에서 삼국사기가 지문으로 등장하였다. 중국고전의 출제가 대부분인 해당 파트에서 중국 외의 고전이 나온 건 이례적.[76]11. 같이보기
[A]
구 제322-1호,
옥산서원본
[B]
구 제322-2호, 정덕본
[A]
[B]
[A]
[B]
[7]
이 판본은 실전되었다.
[A]
[B]
[10]
궁예의
태봉이나
견훤의
후백제는 나라로서 따로 <본기>가 있는 건 아니고
건국군주 두 사람 개인의 <열전>으로 실었다. 존속 기간이 짧아서 길게 쓸 기록도 별로 없었다.
[11]
그 외에 동시대에 존재한
가야나
부여,
탐라,
발해 등은 삼국과 연관된 부분에서 타자로서 간접적으로 여러 번 등장하긴 하나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현대인들 중에서는 가야 등의 역사를 같이 쓰지 않은 것을 비판하는 시각도 있는데, 이는 《삼국사기》의 편찬 목적이 종합적인 한국사
교과서를 만드는 게 아니라 당장 편찬자 본인들이 소속된 조국인
고려 왕조가 정통성을 얻는 배경을 기록하는 데 있는 관찬 사서였으므로 고려 왕조 성립에 직접적 연관이 있는 가장 중요한 3국만을 서술한 것이다. 책 제목부터 세 나라만 다루는 책이라서《 '삼국'사기》다.
[12]
북한은 알려진 정보가 적어 소장중인 사서에 대해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남한에 비해 소장한 역사적 유물이 빈약한 편이고, 소장한 유물도 얼마나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을지 의문이다. 민간은 더 그렇다. 그러므로 남한에도 없는 새로운 비공개 고서가 발견된다면 좋겠지만, 그 가능성은 낮다.
[13]
사서에 따라서는 《
동국통감》처럼
삼국시대와
통일신라를 구분하는 경우도 있다. 사서마다 달랐다.
[14]
번역본 1권+색인 1권+감교 1권+주석 2권
[15]
<신라본기>, <고구려&백제본기>, <잡지&열전>으로 분리해서 번역하였다
[16]
한국연구재단에 등록된 학회 가운데 학회명에 '상고사'가 들어가는 학회는 '대한상고사학회'와 '한국상고사학회'가 있으며, '상고사학회'는 없다. 따라서 이 '상고사학회'는 앞의 두 학회와 다른 유사 학회일 가능성이 높다. 이곳은 사단법인이며, 이중재라는 개인이 주도적으로 운용하던 곳이다. 해당인은 2011년 세상을 떠났다.
[17]
일반적으로는 《삼국사기》를 가리킨다고 추측한다.
[18]
물론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처럼 실제 시호를 극단적으로 줄여버리긴 했지만 이건 당대 기록이 그런 것이니 《삼국사기》 편찬자들만 탓할 건 아니다.
[19]
실제로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이 기록을 신뢰할 수 없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으나
울진 봉평리 신라비의 발굴을 통해 최소한 법흥왕 시기에 성문화된 법률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20]
4세기 일본 기록이 공백인 이유는 기록 부족도 이유가 될 수 있으나, 근본적인 이유는 《일본서기》가 편찬될 시기에 천황가의 신성성을 강조하려고 실제 연도에서 120년 전으로 연도를 끌어올리는 등(
이주갑인상) 연대조작을 가했기 때문이다.
[21]
한국사로 비교하면 삼국이 아닌 고조선, 부여, 가야, 발해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된다. 그나마 불가리아는 당대에 제작된
금석문이 남아 있다.
[22]
메소아메리카 국가들은 고대로부터 문자가 쓰여 왔고 자체적으로 종이도 만들었기 때문에 고대로부터 기록물이 존재했지만 전란과
스페인 제국의 식민지배 시기를 거치면서 대다수가 소실되어서 남아 있는 것들이 많지 않은 실정이다. 잉카의 경우에는 기원전부터 문명이 존재했지만 자체적인 문자가 없어 말 그대로 구전되어 오는 설화나 유적들을 통해 추측할 수밖에 없는 수준이다.
[23]
"淳熙三國史記 : 元年五月二十九日, 明州進士沈忞, 上海東三國史記五十卷, 賜銀幣百付祕閣"(《옥해》 권 16, <지리> -이역도서-) ; "三國史記 : 【書目】五十卷, 高麗金富軾撰, 首載新羅, 次高句麗, 次百濟, 有紀表. 海東三國通曆十二卷, 高麗高得相撰, 係以中朝歷代正朔"(동일 출처).
[24]
현대로 치면 출판사에서 쓰는 추천사 정도?
[25]
기껏해야 참고 도서에 이마니시 류의 저작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인데, 새로운 연구 성과를 내면서 과거의 대표적인 연구 성과에 대해서는 어떤 평가를 하든 참고 문헌에 인용해야 된다는 것은 학계의 기초 중 기초, 상식 중의 상식이다.
[26]
추정
[27]
실제 해당 내용이 나온 책은 유속이 쓴 《수당가화》(隋唐嘉話)로 《삼국사기》 편찬자가 잠깐 헷갈린 듯 하다.
[28]
柳公權小說曰 駐蹕之役 高句麗與靺鞨合軍 方四十里 太宗望之 有懼色 又曰 六軍爲高句麗所乘 殆將不振 候者告
英公之麾 黑旗被圍 帝大恐 雖終於自脫 而危懼如彼 而新舊書 及司馬公通鑑 不言者 豈非爲國諱之者乎.
[29]
정확히 《위서》라고 언급되진 않았지만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표문은 《위서》의 본문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추정한다.
[A1]
별도의 언급은 없으나 《수서》의 내용을 거의 붙복했다.
[A1]
[A2]
별도의 언급은 없으나 《당서》의 기록을 상당수 참조했다.
[A1]
[A1]
[A2]
[A2]
[A1]
[A2]
[A2]
[A2]
[41]
당태종의 넷째 아들로 배움을 즐겨해
이세민이 상당히 총애했다.
[42]
3경 체제라고는 하지만, 고대 국가에서 수도의 위상은 엄청난 것이었기에 지방 유력자들은 끊임없이 중앙으로 진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5소경을 세웠다느니 해도 결국에는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판치는 신라 말의 상황이나
무신정변 이후 서경, 동경을 비롯한 각지에서 삼국을 계승한다는 분립적인 상황은 수도와 지방의 위상 차이와 별개의 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러한 분립 의식은 대체적으로
여몽전쟁에서
조선으로 들어가는 시기 사라진 것으로 본다.
[43]
현재
이규보의 동명왕편을 통해서 일부만 전해지는 《구삼국사》의 경우 편찬 시기가 고려 초기로 보여지는 만큼 고구려 계승 의식을 표방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 당장 '고려'라는 국호도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선택된 것이었다.
[44]
혹자는 고구려 관련 기록이 더 많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지만 《구삼국사》 <동명왕편>에 실린 내용과 《삼국사기》 <동명성왕 본기>를 보면 《삼국사기》 내용이 더 많다. 《
구삼국사》항목을 참조.
[45]
숙종 때 편찬된 《대각국사문집》에서 《구삼국사》로 추정되는 《해동삼국사》라는 책을 인용되는 것으로 보아 고려 초까진 구하기가 어렵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단 《해동삼국사》가 《삼국사기》인지 《구삼국사》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또한 《
구삼국사》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대각국사문집》에서 인용된 부분은 《삼국사기》 <보장왕 본기>에 똑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고려는 전쟁을 벌였다하면 수도가 함락되고 문화재와 사료가 대량분실될 정도로 전란이 잦은 나라였기 때문에 사라졌을 확률이 꽤 높다. 고려 왕조의 가장 중요한 사료였던 《
고려왕조실록》의 초기 기록조차도
거란의 2차 침입 도중 개경이 함락당했을 때 불타버렸을 정도였다. 이규보의 시대에도 이미
몽골한테 죄다 털리던 중이었고, 이후로도
왜구,
홍건적이라는 2단 콤보가 들어왔다. 그리고 《삼국사기》도 사라질 뻔한 걸 조선 초기에 발견해서 다시 찍어냈다는 걸 감안하면 《구삼국사》가 《삼국사기》때문에 의도적으로 사라졌다는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다.
[46]
《삼국사기》 편찬 당시인 고려 중기까지의 영토와 인구는 아무리 잘 봐줘도 통일신라가 약 90%, 발해가 약 10%다. 7세기 삼국시대로 비교해봐도 신라의 영토가 60% 수준이다. 단, 삼국시대 전성기 최대 강역을 따졌을 때는 고구려의 비중이 압도적이다. 다만, 전성기 시절까지 따지면 너무 오래 전이다...
[47]
중국에서, 제후가 조회에 나아가 천자에게 직무의 상황을 아뢰던 일. -네이버 국어사전-
[48]
이 내용의 신뢰성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긍정하는 쪽에서는 '표'라는 이름에서 보듯이 당나라 조정에 보낸 공식적인 문서이므로 개인적인 편지보다 신뢰성이 높다고 본다. 반면 부정하는 쪽에서는 발해를 디스하려는 내용일 뿐이니 믿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49]
고구려에서도 묘지명에 스스로 요동 삼한인이라고 하였고 당에서도 고구려의 장군들에게
마한 추장이라고 불렀던 것을 보면 삼국이 정립된 이후에는 서로간에 동질의식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0]
4세기경까지 고구려본기는 신집5권의 내용을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51]
자세한 내용은 서의식의 『신라의 정치구조와 신분편제』, 『뿌리 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1』을 참고
[52]
관련 내용은 윤종일의 「김부식의 역사인식 연구」라는 논문을 참고
[53]
오늘날로 치면 조선 초~중반과 비슷한 포지션이었던 셈이다.
[54]
거란 2차 침입때
현종은 몸만 급히 피신해야했고, 개경은
궁궐을 비롯하여 대부분 불에 타거나 약탈 당했다. 현종 입장에선 몸만 피하기도 바쁜 와중에 신라 역사서까지 챙길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신라 뿐 아니라 고려 초의 기록 역시 마찬가지로 굉장히 부실한데 당장 선조들의 실록조차 불에 타서
7대실록을 새로 만들어야 했을 정도였다. 고려 초기 역사가 훨씬 전대의 7세기 삼국시대보다도 부실한 결정적인 이유다. 7세기 삼국시대는 중국과 일본에 참고할 자료라도 많기 때문.
[55]
한나라가 400년을 이어왔지만 중간에 신나라로 인해 교체된 전한과 후한을 따로 보면 각각 200년 정도다.
[56]
그 때문에 편찬 시기가 빨라 백제의 기록이 좀 더 많이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 《
일본서기》가 비록 일본발 구라가 잔뜩 섞여 있지만 어쨌든 실제 역사에 과장을 덧입힌 내용이기 때문에,
포상팔국의 난 등 한국 사료에서 찾을 수 없는 기록들이 많다. 따라서 어떻게든 과장 속의 진실을 밝혀보고자 한국 고대사 연구자들이 반드시 숙지할 고대 사서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57]
군자는 괴상한 것(무속신앙, 전설등)을 기입하지 않으며, 없는 사실을 지어서 작성하지 않는다.
[58]
물론 삼국사기 초반부에 김부식이 "중국에도 탄생설화가 기이한데 우리라고 없는 법 없냐!"라며 쓰긴 했지만, 그 부분을 제외하곤 대체로 술이부작 원칙에 충실히 작성되었다.
[59]
그런데 2019년에 중국에서 비교적 최근에 공개된
금석문 사료인 '풍사훈묘지명(馮師訓墓誌銘)'의 내용에 따르면 당이 백제 정벌군 편성 직전인 659년부터 이미 소정방에게 당나라 내부에서 '
계림도대총관' 직위까지 수여했음이 밝혀지면서 당나라는 이 때부터 백제와 함께 신라까지 기습할 준비를 해왔음을 증명하는 당대의 자료가 나타났다. 기존 문헌 중에는 오직 김유신 열전과 삼국유사에만 존재하던 당의 은밀한 신라 침공 계획과 김유신의 간파, 대비 기사와도 일맥상통함이 밝혀졌다.(이민수, 백제 멸망기 당의 신라 침공 계획,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19) 열전의 이 부분은 후손들이 김유신을 신격화하기 위해
나당전쟁을
예언한 것처럼 첨삭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던 대표적인 부분이었고,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김유신의 소정방 신라침공 야욕 간파 기록은 굉장히 설화적으로 각색된 내용이고 일연 본인조차 일단 쓰고도 바로 밑에 주석으로 신빙성이 부족한 기록임을 보충설명해두었을 정도라서 학계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김유신의 행동에 대한 개연성을 설명하는 이 발견을 통해서 물론 삼국유사 기록처럼 김유신이 소정방을 암살한 것까진 아니더라도 실제로 어떤 모종의 대립이 있었는데 설화적으로 각색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 이 발견은 근래 김유신 열전의 신뢰성을 의심하는 유행이 일던 추세와 반대로, 김유신 열전의 정확성이 검증된 사례가 되었다.
[60]
《삼국사기》와 더불어 양대 사서인 《삼국유사》는 지나치게 불교 중심적이어서 불교 세력을 억압하고
도교를 장려한 연개소문을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이래저래 연개소문이나 그와 관련된 인물들의 기록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점이 있다.
[61]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와 노나라의 대신들을 뜻한다.
[62]
김부식은 이에 대해 "또 글을 잘 지었는데 세상에 전해지는 것이 없다. 다만, 지금도 남쪽지방에 더러 설총이 지은 비명(碑銘)이 있으나 글자가 결락되어 읽을 수가 없으니 끝내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없다."고 언급했다. 적어도 설총이 글을 쓴 비문이 당시에는 더러 남아 있었으나 대부분이 훼손된 상태였고 시간이 지나며 이들도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63]
그나마 이들 대부분은 생존 시기와 대략적인 행적은 알려져 있고 작품이 전해지는 경우도 있지만, 원걸은 이 구절을 제외하면 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64]
특히 열전 쪽은 정사 삼국지가 압도한다.
[65]
《삼국사기》가 12세기 기록인데 반해 《삼국지》를 편찬한 진수는 3세기의 인물. 거의 천 년이 앞선다. 게다가 삼국지는 위진 시대에 한국과 교류한 중국 국가들의 분명한 당대 기록이다.
[66]
여기서
영산강 유역에 5세기까지 어느 정도 자치력이 있는 정치 세력이 존립하고 있다는 고고학적 사실이 거론되는데, 그 정도 자치력이 있는 마한 소국들은 충청도에는 4세기까지도 존속했고 심지어 경기도에도 3세기까지는 자치력을 보유한 소국들이 있었다. 영산강 유역 세력은 372년 근초고왕의 정복 이후 적어도 독자적 국호나 칭호조차 주장하지 못하고 백제의 산하로 들어갔기에 이는 거꾸로《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연대적, 기사적 신빙성을 입증하는 증거일 뿐 배치되는 사례는 아니다.
[67]
서긍의
고려도경을 보면 (송나라에서 나온 책이다.) 고려인들은 고려는
주몽이 세우고 내려오다 중간에 왕씨로 바뀌었다는 역사 인식을 갖고 있었다. 또 몽골 침략 후
쿠빌라이 칸마저
당태종도 제압하지 못했던 그 고구려가 자기한테 친히 항복했다고 기뻐하면서 이야기하고 있다.
[68]
이는 현대가 되어 고대 사료를 싹싹 긁어모은 현재에도 큰 차이가 없다. 유일하게 언급되는 것이 신라의
민정문서이지만 이 또한 1930년대 일본의
도다이지
쇼소인에서 그릇 보존을 위해 끼워넣은 종이를 복원한 것이며, 그 이외에는 말 그대로 '제도'를 기술한 것이 아닌 단편적인 사료를 긁어모아 재구성한 것이다. 가령 우리는 신라의
정전제(721)가 국가가 농민의 토지 소유를 인정한 것이라고 교과서에서 배우지만 이에 대해서 명시하고 있는 사료는 전혀 없으며, 대체로 민정문서의 '연수유답'을 그것이라고 보지만 이 또한 학자마다 의견이 달라 온전히 합의된 근거가 있다고 할 수 없다.
[69]
지금이야 듣보잡 전쟁이지만 당시
전한에서는 나라의 반이 연관된 엄청난
전쟁이었고 이후에도 큰
트라우마를 남겼다.
[70]
근초고왕대에 박사 고흥(高興)이
서기를 편찬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 책이 역사책인 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뉜다.
[71]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조회해보면 현재 남아있는 것은 조선시대에 필사한 것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김부식이 살아있던 시기에는 혜종의 이름인 무(武)를 쓸 수 없었기 때문에 호(虎)라고 썼을 수도 있다.(대표적으로 <
삼국유사>)
[72]
문무왕과 마찬가지로 당대에는 호왕이라고 기록했다.
[73]
수원 최씨 가문 출신. 한남군 공작
최사위의 고손자.
[74]
사실 엄밀히 말하면 신라가
보덕국이나
탐라국에 책봉관계 비슷한 관계를 맺기는 했다. 특히 보덕국은 정말로
안승과 고구려 유민들에게 중국 주나라마냥 금마저 땅을 떼주고 책봉의 절차를 밟았으며 봉건제와 같이 보덕국 내에서 자치가 이루어졌다. 다만 이는 고구려 왕가의 정통성을 신라에 흡수해
삼국통일의 명분을 강화하기 위한 퍼포먼스로서 상당히 예외적이고 단기적인 사례고 기록도 상세하진 못해서 그냥 고구려본기와 신라본기에 몇 줄의 단편적인 기사만 남겼다.
[75]
그러나 김부식은 타국 자료를 인용하기는 했지만 타국 자료와 자국 자료가 충돌하면 꼭 "(기록은 하지만) 내가 보기엔 우리나라 기록이 옳은 것 같다."라는 식으로 기술했다.
[76]
제 45권 「열전」 제 05 溫達(
온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