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7 23:26:51

홍길동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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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소설
홍길동전
洪吉童傳

Hong Gildong jeon
파일:external/www.hanauction.com/4210L.jpg
▲ 소설 《홍길동전》의 한국어판
<colbgcolor=#c3d89d,#697455><colcolor=black,white> 저자 파일:조선 어기.svg 허균(許筠)[1]
공개 CE 16세기 후반 ~ 1618년[2]
언어 한문[3] 또는 한글( 한국어)[4]
종류 소설
장르 영웅소설, 가상역사물
배경
시간
CE 1432년 ~ 1501년 ( 조선 세종 ~ 연산군)
공간
조선( 한성부, 경상도, 함경도),
남경 저도[5], 율도국
등장인물
홍길동, 홍 대감, 홍인형, 춘섬, 유씨, 초란, 관상녀, 특재, 임금, 이업, 백룡, 울동, 백소저, 조소저, 김현충, 율도왕 등
분량
권수
1권 (한글 단행본)
1. 개요2. 특징3. 작품 구성4. 의의
4.1. 시대 초월의 비판을 담은 오락 소설
5. 논쟁
5.1. 최초의 한글 소설인가?5.2. 저자가 허균인가?
5.2.1. 이윤석 교수의 주장5.2.2. 반박
5.2.2.1. 택당 이식의 기록5.2.2.2. 원본과 이본의 차이 여부5.2.2.3. 허균의 작품들의 출판 과정5.2.2.4. 유석재 기자의 반박5.2.2.5. <송오참군자어대형환천조>
5.3. 홍길동전의 메시지에 대한 비판과 반박
5.3.1. 자신의 왕국을 세웠다?5.3.2. 서자임에도 첩을 뒀다?5.3.3. 왕이 되는 결말의 의미는?5.3.4. 검토: 이는 허균의 사상인가?
6. 기타7. 대중매체에서8. 같이보기

[clearfix]

1. 개요

"됴션국 셰둉ᄃᆡ왕 즉위 십오 연의 홍희문 밧긔 ᄒᆞᆫ ᄌᆡ상이 잇스되 셩은 홍이요 명은 문이니…"(원문 철자)
조선국 세종대왕 즉위 십오 년의 홍희문 밖에 한 재상이 있으되 성은 홍이요 명은 문이니…(현대식 철자)
소설의 첫문장. 홍길동전 완판 36장본. 홍길동전의 여러 판본 가운데 학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판본이다. 원본보다 훨씬 후대에 작성된 이본(異本)이다.

작가 허균으로 추정되는 고전 소설. 정확한 창작년도는 허균의 생전 16세기 후반과 1618년 사이로 보고 있다.

2. 특징

허균의 문집에는 홍길동전에 대한 언급이 없기에, 허균이 저자라는 것에 대한 논란이 있으며, 작자 미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허균이 지었다는 근거는 허균과 동시대의 인물이자 허균의 제자인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문집 《택당집(澤堂集)》에서 허균이 저술하였다고 서술되어 있는 것이다. 아래 내용 참조.
세상에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수호전(水滸傳)》을 지은 사람의 집안이 3대(代) 동안 농아(聾啞)가 되어 그 응보(應報)를 받았는데, 그 이유는 도적들이 바로 그 책을 높이 떠받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허균(許筠)과 박엽(朴燁) 등은 그 책을 너무도 좋아한 나머지 적장(賊將)의 별명을 하나씩 차지하고서 서로 그 이름을 부르며 장난을 쳤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허균은 또 《수호전》을 본떠서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짓기까지 하였는데, 그의 무리인 서양갑(徐羊甲)과 심우영(沈友英) 등이 소설 속의 행동을 직접 행동으로 옮기다가 한 마을이 쑥밭으로 변하였고, 허균 자신도 반란을 도모하다가 복주(伏誅)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농아보다도 더 심한 응보를 받은 것이라고 하겠다.
《택당선생 별집》(澤堂先生 別集) 제15권 〈잡저〉 ‘산록’ #
택당 이식 이후 심재(沈梓, 1624년 - 1693년)의 《송천필담(松泉筆譚)》과 홍한주(洪翰周, 1798년 - 1868년)의 《지수점필(智水拈筆)》은 이식의 <택당집>을 인용해서 "허균이 홍길동전의 저자"라고 서술하고 있다.

택당 이식은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다고 말하면서 수호전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는데 허균은 홍길동전을 저서에서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저서 <성소부부고>와 <한정록>에서 직접 수호전을 언급한 적이 있다.
내가 희가(戲家)의 소설 수십 종을 얻어 읽어보니, 《삼국지연의(三國誌演義)》와 《수당지전(隋唐志傳)》을 제외하고, 그 밖에 《양한지(兩漢志)》는 앞뒤가 맞지 않고, 《제위지(齊魏志)》는 옹졸하며, 《잔당오대지연의(殘唐五代志演義)》는 추솔(粗率)하고, 《송태조용호풍운회(宋太祖龍虎風雲會)》는 소략하며, 《수호전(水滸傳)》은 간사한 속임수에 기교를 부렸다. 이것들은 모두가 독자를 교훈하기에 충분하지 못한 것들인데 한 사람의 솜씨에서 저술이 되었으니 나관중(羅貫中)의 자손이 3대를 벙어리로 살아간 것이 당연한 일이다.\

《서유기(西遊記)》라는 책이 있는데, 종번(宗藩)에서 나왔다고 하는 것으로 이는 곧 현장(玄奘)의 취경기(取經記)를 가지고 그것을 부연한 것이다.

여기에 대한 사실은 《석보(釋譜)》와 《신승전(神僧傳)》에 대강 나타나 있으되 반신 반의(半信半疑)의 사이에 속한다. 지금 보건대 그 책은 독특하게 불가(佛家)의 수련(修煉)하는 의미를 가설(假說)하였다. 후왕(猴王)의 좌선(坐禪)은 곧 몸을 단련하는 것이며, 노조궁(老祖宮)에서 단(丹)을 훔친 것은 곧 서주(黍珠)를 삼킨 것이며, 대요천궁(大鬧天宮)은 곧 연념(煉念)이며, 법사(法師)를 모시고 서역(西域)에 가는 것은 곧 하거(河車)를 운반(運搬)하는 것이며, 화염산 홍해(火炎山紅孩)는 곧 화후(火候)이며, 흑수(黑水)가 천하(天河)에 통한다는 것은 곧 퇴부후(退符候)이며, 서쪽에서 동쪽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곧 서호(西虎)가 동룡(東龍)과 교제하는 것이며, 하루에 서천(西天) 10만 리를 돌아온다는 것은 곧 온 하늘의 빽빽한 별을 일시에 셈한다는 것이다. 이는 비록 지리하고 막연하며 그 말들이 올바른 말이 아니지만 종종 다 단결(丹訣)을 가탁하여 이야기하였으므로 진정 내버릴 수는 없다. 나는 특별히 이 책을 간직하고서 진체(眞諦)를 수련하는 여가에 피곤하면 이것으로써 수마(睡魔)를 몰아낼 생각이다.
ㅡ 《성소부부고》 제13권 서유록 발(西遊錄跋) #
"전기(傳奇)로는 《수호전(水滸傳)》ㆍ《금병매(金甁梅)》 등이 일전(逸典)이 될 수 있으니, 이를 익히지 못한 자는 보면옹장(保面甕腸 식견이 좁은 것)에 지나지 않을 뿐, 음도(飮徒)가 될 수 없다."
ㅡ 《한정록》 제18권 상정(觴政) #
여기서 허균은 <성소부부고>에서 "<수호전>을 '사람을 간사하게 속이고 교활하게 권모술수를 부렸다.'고 하여 교훈적이지 못한 소설로 평한 반면, <서유기>는 신선의 연단술을 빌려 말을 세워기에 없애 버릴 수 없다"고 말하면서 서유기를 더 높이 평가했지만 다른 저서 <한정록>에서 원굉도의 말을 인용해서 "<수호전>을 익히지 못한 자는 식견이 좁아서 술 마시는 무리가 될 수 없다."라고 다르게 평가하는 것을 알 수 있다.[출처1]

홍길동전의 이본의 내용은 허균이 지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원본이 전해져 오지 않고 있다. 자세한 것은 후술.

창작 당시의 원본은 아직 발견되지 못했고, 후대에 간행된 이본(異本)들만이 전해져온다. 크게 보면 서울에서 간행된 경판본 계열과, 전주에서 간행된 완판본('완'산주( 전주)에서 인쇄된 판본) 계열, 기타 필사본 계열들로 나뉘어진다. 아래 30장 경판본이 홍길동전의 전체 모습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인공 홍길동은 실제 도적이었던 홍길동(洪吉同)을 모델로 삼았다. 다만 홍길동전의 홍길동은 洪吉童으로 한자는 다르다.

7차 교육과정 중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 나온 작품이다.

3. 작품 구성

홍길동의 어머니 춘섬은 홍판서의 첩이었다. 얼자로 태어난 홍길동은 호부호형을 요청하지만, 이를 거절당하여 집안에서는 더욱 고립되고, 상황이 꼬여서 사회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야인이 되어버린다. 그는 도적단을 접수하여 정의의 비밀 결사 활빈당을 세우고 조선 전국을 무대로 의적활동을 하던 중, 길동의 형과 아버지를 협박한 임금 앞에서 일부러 잡혀주지만, 유유히 도술을 써서 탈출하고, 홍길동을 잡을 방법이 없었던 임금이 병조 판서 자리를 내준 후에, 저도라는 섬으로 부하들을 데리고 갔다가 옆의 율도국으로 쳐들어가 결국엔 율도국의 왕이 된다.
(완판본에서는 율도국의 왕에 오른 후까지 다룬다. 세월이 지나 태자에게 왕위를 주고 중전과 함께 도를 닦아 백일승천白日昇天하여 신선이 되는 결말이다.)

홍길동전의 구성은 영웅 소설의 구성과 매우 유사하다. 고귀한 혈통, 비정상적 출생, 비범한 능력, 위기, 위기를 벗어나고 극복하는 전형적인 고전 소설의 구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조선 시대의 '입신양명'만이 제일 가치였던 1차원적인 단순한 오락 소설들보다는 발달한 주제를 보여준다.

이 작품이 던진 교훈은 주로 서얼 제도의 문제점, 그리고 민초들의 마음을 대변하여 계급 제도의 모순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대인들이 보기에는 계몽 소설로 보기에는 미비한 점이 많다. 그로 인해서 단순한 활극 소설로 치부해버리는 경향도 존재한다. 다만 이는 대중 장르를 겸하는 고전 소설의 근본적인 속성이기에 지나친 폄하라고 할 수도 있겠다.

4. 의의

홍길동전에서 "평등 의식"은 존재하지 않고 홍길동 개인의 입지전일 뿐, 결코 계몽적인 메시지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 다만, 홍길동전이라는 소설에 대한 비평은 계몽성을 내부에 숨긴 대중소설이냐, 아무런 의미도 없는 단순한 오락 소설이냐를 분간하려는 논쟁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편할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 소설은 적서 차별 제도와 탐관오리의 횡포를 비판한다. 그 당시 사찰들이 자신들의 이권을 불리는 데 열중했기 때문에, 도적이 되어서 맨 처음으로 한 일이 바로 해인사 탈취였다. 즉 당시 시대 상황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볼 수 있다.

홍길동전의 의의는 철학에까지 왕조 사상의 프로파간다 때문에 사회적인 발전이 늦었던 동아시아에서, 서얼 제도라는 '피부에 와닿는' 요소를 통해서 차별 제도의 근본적인 모순점을 파헤치고, 이를 대중 소설로서 널리 읽히게 만들었다는 점에 있다. 비교 대상은 현대적인 가치가 아니라, 당시의 계급 제도를 두둔하는 프로파간다, 이에 길들여진 대중 소설들 사이에 계몽적인 성향을 스며들게 만들었던 작가의 통찰력이라고 보아야한다. 또한 당시의 부조리했던 관리에 대한 비판도 담고 있다.

4.1. 시대 초월의 비판을 담은 오락 소설

홍길동전에 대한 비판들은 전부 근대 이후의 가치관을 기준에 두고 있다. 유럽에서조차 일부일처제는 기독교를 통해서 받아들여지는데 수백년이나 걸렸고, 일부 이슬람교 국가에서는 아직도 일부다처제를 허용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일반적인 가치관으로 받아들여지는데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16세기에 동양의 조선에서 나온 소설이 이 모든걸 동시에 생각해 내지 못했다고 비판하는건 말이 안 된다.

홍길동전에서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습은 동양 철학 전반의 한계이지, 허균이 주장했던 온건한 신분제 개혁과 양립 불가능한 소재들도 아니다. 즉, 홍길동전은 수백년 전의 대중 소설에서 계급 사상의 모순을 통찰하고 이를 퍼트린 비판 능력으로 고평가를 받는 것이다.

물론, 인본주의를 기반으로 엄청나게 진보했던 서구의 사회 철학에 비할 작품은 아닐 수 있다. 토머스 홉스의 사회 계약론이 담긴 리바이어던은 1650년대에 출판되었는데, 홍길동전은 학술서가 아닌 대중 소설이니만큼 단순비교는 불가능하지만, 천한 존재가 왕이 될 수 있다는 마무리가 있었다는 점에서 당대 동양 사회에서는 쉽사리 떠올려선 안 될 개념을 대중 소설로서 읽히게 만들었다는 의의는 분명히 낮게 평가할 수 없다.

단 유교에서 불교나 기독교 같은 평등 사상은 아니지만 폭군은 결국 역성혁명을 맞아 무너지고, 천한 사람도 순임금이 될 수 있다고는 등 충분히 유교적 가치관에 맞는 소설이다. 즉 유교적 이상주의를 바탕으로 한 장르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이다.

즉, 홍길동전의 한계는 동양 사회의 사상적인 한계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심지어, 현대 대한민국에서도 권위주의에 찌든 사람들은 홍길동전의 주제를 정치적으로 곡해하는 경우가 부지기수.

결국 홍길동전이 당대 조선 사회를 기준으로 상당한 파격적인 메시지를 던졌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홍길동 같은 인재가 사회 제도적으로 차별받았던 계기, 즉 '호부호형'이 자유롭게 허락되는 세상이 나타나는데 얼마나 많은 세월이 걸렸는지를 생각해보자.

5. 논쟁

홍길동전은 작품 내적이 아닌 외적으로 많은 논쟁이 있는데, 하나같이 다양한 가설들이 혼재하고 있어 명확한 답을 내리기 어렵다. 주요 쟁점은 다음과 같다.
  • 원본이 한글본인가?
  • 원본이 최초의 한글 소설인가?
  • 허균이 홍길동전의 저자가 맞는가?
  • 허균은 원본과 이본 중 어느 쪽을 저술했는가?
  • 원본과 이본 사이에 달라진 내용은 없는가?

5.1. 최초의 한글 소설인가?

과거에는 단순히 '최초의 한글 소설'로만 알려져 있었는데 현재는 거듭된 연구결과로 이렇게 수식하는 사례가 거의 없어졌다.

홍길동전의 원본은 발견되지 않았고 후대의 여러 이본(異本)만 존재하며, 원본이 한문이나 한글로 쓰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관계로 최초의 한글 소설인가에 대한 의문은 남아 있다. 즉, 원본이 한문본일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홍길동전의 한문본은 유일하게 '위도왕전(韋島王傳)'이 전하는데 이는 역으로 한글본을 한문본으로 번역한 것이다.

비슷한 케이스로 소설 설공찬전의 경우, 원본은 왕명으로 모두 불태워져 전하지 않고 묵재일기 이면에 필사된 한글 번역본이 1997년에 발견된 바 있다. 서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이복규 교수가 발굴.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 '설공찬전이 언문으로 번역되어 전파되면서 민중을 미혹시킨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서 설공찬전의 원본은 한문본임이 명확하다.

홍길동전과 관련된 가장 큰 쟁점들은 최초 저자가 허균이냐는 논란과 원본이 한글 소설이냐는 논란인데 둘중 하나는 성립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저자가 허균이 맞다면, 굳이 한글로 저술할 이유가 딱히 없기 때문. 허균은 엄처사전(嚴處士傳)·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장산인전(張山人傳)·남궁선생전(南宮先生傳)·장생전(蔣生傳)과 같은 한문 소설을 여러 편 지은 바 있기 때문에, 허균이 정말 지었다면 홍길동전도 최초본은 한문으로 지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후대 작품인 구운몽처럼 저자 김만중이 한문을 잘 모르는 어머니를 위해 일부러 한글로 지었다는 목적이 확실한 경우라면 모를까 여지껏 한문으로 집필을 잘 해오던 허균이 갑자기 홍길동전만 한글로 적었을 가능성은 낮다고 볼 수 있다. 다만 허균은 1598년 한글로 시를 쓴 적은 있다. 자세한 내용은 허균/작품의 조선시선 참조. 허균은 명나라의 학자 오명제가 시선집을 간행할 때 한글로 쓴 시를 오명제에게 주었는데, 중국에서 간행하기 위해 한글로 시를 쓴 적이 있으니 비슷한 목적으로 한글로 소설을 쓰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결론을 내리자면 '최초의 한글 소설'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려우며, '현전하는 고전소설 중 가장 연대가 오래된 한글 소설일 가능성이 높은 소설' 정도로 봐야한다.

5.2. 저자가 허균인가?

5.2.1. 이윤석 교수의 주장

2019년 4월 24일, 이윤석 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에 따르면 한문 홍길동전을 찾아냈으며, "한글 홍길동전은 허균이 아닌 18세기 후반에 알 수 없는 어떤 작가가 창작했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 그동안 이윤석 전 교수는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라는 책에서 이미 홍길동전을 허균작품이라고 보기 어려운 근거를 내놓았었는데 한글 홍길동전이 허균 작이 아닌 5+1가지 이유
  • 허균(1569~1618)은 16세기의 인물인데 '홍길동전'에는 17세기 후반의 인물인 장길산이 등장한다.
  • 소설에 등장하는 선혜청은 18세기에 들어서야 활성화된 관청이다.
  • '홍길동전'을 제외한 모든 한글 소설은 18세기 후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이유로 허균이 시간여행자가 아닌 이상은 홍길동전의 저자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를 내놓았었다.

이윤석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최초의 홍길동전은 황일호가 쓴 '노혁전'으로, 현재 대중들에게 알려져있는 '홍길동전 판본'은, 후대의 인물인 장길산 등이 언급되는 것을 보아 18세기 이후에 불명의 저자가 각색하거나 변형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황일호의 '노혁전'은 일종의 야담 모음집인데 이게 사실이라면 홍길동전은 사회 비판을 담은 저술로 보기는 어려워진다.

이 밖에도 학계에서는 홍길동전의 저자가 허균이라는 데 많은 의문점을 제시한다. 허균 문서에도 보듯이 허균은 한문에 능한 문장가인 데다 홍길동전을 제외하면 한글로 남긴 글이 없다는 말이 있다. 다른 글들을 모두 한문으로 남겼는데 홍길동전만 한글로 남길 이유가 있냐는 것이다. 허균 작가설의 근거가 뒷대의 사람인 이식(1584~1647)이 쓴 '택당집'에 등장하는 "허균은 '수호전'을 본떠서 홍길동전을 지었다."라는 문장 하나뿐이라 근거가 빈약하다는 것, 이식의 주장대로 이러한 소설을 쓴 것이 큰 죄라면, 왜 허균이 처형될 당시에는 관련 죄목이 거론되지 않았느냐는 것 등이다.

다만 허균은 명나라의 문인 오명제가 쓴 <조선시선>에서 한글로 된 시 <송오참군자어대형환천조(𨓵吴叅軍子魚大兄還天朝)>를 쓴 적이 있다. 즉 모두 한문으로 남겼다는 말은 틀리다.

5.2.2. 반박

5.2.2.1. 택당 이식의 기록
물론 이에 반박하는 의견 역시 만만치 않게 존재한다. 우선 허균이 홍길동전의 저자라는 근거는 동시대를 살았던 이식의 기록 때문이다. 허균은 1569년생이고 이식은 본문에도 나왔다시피 1584년생인데 두 사람의 나이는 15세 정도 밖에 차이가 나지 않으며 허균이 죽었을 때 이식은 이미 30대 중반의 선비었으므로 허균의 행적을 실제로 보고 들었을 가능성이 높아 실질적으로는 동시대 사람이라고 해도 무리는 없다. 그리고 이식은 허균의 제자였다. 직접 보고 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

이식의 말은 인과관계를 헷갈릴 만한 복잡한 내용도 아니고 공개적인 장소에서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발언한 것도 아닌, 자신의 문고에 적은 내용이므로 딱히 곡필했을 가능성은 낮다.

택당 이식 이후 심재(沈梓, 1624년 - 1693년)의 《송천필담(松泉筆譚)》과 홍한주(洪翰周, 1798년 - 1868년)의 《지수점필(智水拈筆)》는 이식의 <택당집>을 인용해서 "허균이 홍길동전의 저자"라고 서술하고 있는데, 허균 사후 조선의 문인들이 허균을 <홍길동전>의 저자로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재는 남인의 과격파이며, 홍한주는 정조 초 세도가 홍국영의 친척 홍낙명(洪樂命)의 손자이다. 당파나 출신과는 관계없이 택당 이식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한 것을 보아 이식의 기록이 당시 문인들에게 신뢰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전하는 최초의 한글 소설일 가능성이 높다'는 지금의 상황에서야 재조명받은 것이다. 이식이 살던 당대에는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또한 공개석상에서 중요하게 한 발언도 아니고 그냥 자신의 문고에 '홍길동전의 저자는 허균이다' 정도로 짧게 적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만약 허균이 홍길동전의 저자가 아니었다 해도, 이식이 의도적으로 허균을 홍길동전의 저자로 만들어서 얻는 이득은 사실상 없다고 볼 수 있다. 소문 자체를 잘못 들은 것이 아닌 이상 진실을 적었을 확률이 높다는 것.
5.2.2.2. 원본과 이본의 차이 여부
이윤석 교수의 허균이 홍길동전의 저자가 아니라는 주장에 대한 근거는 이본(異本)의 내용에 근거한다. 하지만 현재 전해지는 '이본' 홍길동전의 내용에 시간이 지나면서 글이 추가되거나 소실되면서 다른 내용을 후대 사람이 넣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쉽게 말해 '이본'의 내용에 허균이 알 수 없는 내용이 나온다고 해서 그게 '원본의 저자가 허균일 가능성'을 없애는 것은 아니다.

고전소설 중에 유명한 사례로는 나관중의 ' 삼국지연의'가 있다. 나관중은 원명교체기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적절한 내용이지만 소설 배경과는 맞지 않는 점이 존재한다. 병력 규모가 원나라 말기 군벌과 비슷하거나 후대에 고안되는 무기가 나오는게 대표적. 하지만 나관중 이전에도 삼국지를 다룬 소설은 많았으며, '삼국지연의'도 크게 보면 삼국지평화 등 이전 삼국지 소설들의 한 갈래에 불과하다.

때문에 전해지는 '이본'에 허균의 시대적 상황과 맞지 않는 요소가 등장하더라도 저자가 완전히 아니라는 근거로는 보기 어렵다. 즉 '이본'이 저술된 시기는 '장길산'이나 '선혜청'이라는 요소를 봤을 때 18세기 이후인 것이 거의 명확하지만, 원본과 이본이 얼마나 다른지 알기 어렵기 때문에 허균이 원본의 저자일 가능성은 아직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한글 소설이라는 점을 근거로 허균이 저자가 아니라는 주장을 펴기도 하는데, 애초에 원본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무의미한 논쟁이다. 현재 전해지는 홍길동전의 '한글본'들은 죄다 이본이며 한문본도 한글본을 번역한 이본이다. 당시 조선은 식자층을 위한 한문소설과 일반 평민들 및 아녀자들을 위한 한글소설로 저작 문화가 나뉘어 있었으며 두 계층 간의 번역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따라서 전해지는 한글 이본들도 원본을 '번역'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이본들을 보면 한글본들이 많이 남았기 때문에 한문을 잘 모르는 계층에게 인기가 있었다는 것은 확실해 보이지만, 그것이 원본이 한글본인 이유가 되진 않는다. 허균은 한문본으로 남겼는데 이게 한글본으로 번역된 것이 히트를 쳐서 많이 퍼졌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5.2.2.3. 허균의 작품들의 출판 과정
허균의 주요 문집인 <성소부부고>는 허균 본인이 역모로 죽고 나서 외손 이필진(李必進)이 편찬하는 과정에서 내용이 바뀌었을 가능성이 제시된다. 역모 혐의로 죽고 나서 허균의 작품은 역적의 작품이라 모두 불태워질 뻔하다가 허균이 처형되기 직전 전처의 장녀의 남편이자 사위 이사성의 아들이며 허균에게는 외손자가 되는 이필진(李必進)에게 자신의 작품의 일부를 남겨서 문집 <성소부부고>로 편찬될 수 있었다. 이필진은 발문에서 허균 사후 50년이 지난 1668년에 "겨우 주변 사람들에게 공개했다"고 말했다. <국조시산>, <을병조천록> 등 허균의 다른 작품들은 허균 사후 다른 문인들에 의해 전해졌으며, 이후 허균의 작품은 비밀리에 읽혀졌다. #

1695년 숙종 시기 문인 박태순이 허균의 재능을 칭찬하면서 허균이 초고를 쓴 정도전에서부터 권필에 이르는 35가(家)의 각체시 877수를 수록한 시선집 <국조시산>의 서문을 쓰고 간행했는데, 박태순은 서문에서 "허균의 저술들은 허균이 목숨을 잃은 후에 거의 인멸되기에 이르렀다. 혹 호사가(好事家) 가운데 수록하여 둔 자가 있어도 밖으로 드러내기를 좋아하지 않아 빛을 보지 못하였다고 한다."라고 말했다. #

허균이 1616년에 쓴 작품 <을병조천록>은 2005년 번역본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출판하기 전까지 <성소부부고>의 출판자이자 허균의 외손자 이필진의 발문을 통해 책의 제목만 알려지고 내용을 찾을 수 없었는데 국립중앙도서관이 허균의 동복 형 허봉의 책 《하곡조천기(荷谷朝天記》 2권의 하책으로 묶여 있는 것을 발견해서 2005년에 출판될 수 있었다.

즉, 현재 전해지고 있는 허균의 다른 작품들은 원본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허균 사후 출판한 이본(異本)이거나 원본이 허균의 형 허봉 등 다른 문인의 작품에 묶여서 발견되지 못하고 있거나 대부분의 원본은 조선 조정에 의해 인멸된 상황에서 허균의 작품이라고 전해지는 홍길동전도 있는 그대로 전해졌을 가능성은 전무하다. 결국 이 논란은 원본이 발견되지 않는 한,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5.2.2.4. 유석재 기자의 반박
2022년 7월 조선일보의 유석재 기자가 이윤석 교수와 인터뷰를 했는데 "한글 소설의 발전 단계상 허균(1569~1618)이 살았던 16세기 후반~17세기 초엔 한글로 쓴 소설이 출현할 수 없었고, ‘허균이 홍길동전을 썼다’는 학계에서의 거론은 경성제국대학의 한국학자였던 일본인 다카하시 도루(高橋亨·1878~1967)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근거는 "허균의 제자 이식(李植)이 1674년(현종 15년)에 쓴 문집 <택당집(澤堂集)>에서 "허균은 수호전을 본떠 홍길동전을 지었다"는 기록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유석재 기자는 택당집에서 허균이 한글로 홍길동전을 썼다는 기록이 없으니 허균 생전 허균이 쓴 <홍길동전>은 한문으로 쓴 글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그리고 조선 중기의 문인 황일호(1588~1641)의 작품 <지소선생문집>에 <노혁전>이라는 홍길동의 간략한 전기가 실려 있는데, 유석재 기자의 말에 의하면 "명망가 출신이지만 비천한 신분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홍길동은 사람은 죽이지 않고 재물만 빼앗는 도적이 됐는데, 관아에 잡히지 않고 40년 동안 도적을 이끌다 깨달은 바가 있어 무리를 해산시키고 착해져 천수를 누리다 세상을 떠났다"는 현재 한글 소설로 전해지는 <홍길동전> 이본과 매우 비슷한 내용이다.

그러나 유석재 기자는 이에 대해 황일호가 "홍길동의 이야기를 전라감사 종사관으로부터 전해 들었다는 시점은 1626년(인조 4년)이었습니다. 그런데 허균이 사망한 해는 1618년(광해군 10년). 황일호가 ‘노혁전’ 속의 홍길동 스토리를 들은 시점으로부터 최소한 8년 전에는 허균이 ‘홍길동전’을 수호전 스타일로, 그러니까 홍길동이 ‘의로운 도적’인 것처럼 썼다는 얘기가 됩니다."라고 설명했다.

위의 사실을 토대로 해서 유석재 기자는 <홍길동전>이 어떻게 허균의 원본에서 현재의 이본으로 전해졌는지 설명했다.
"허균의 한문소설 ‘홍길동전’(1618년 이전)→’노혁전’(1626년)→한글 소설 ‘홍길동전’(1692년 이후)
여전히 허균의 ‘홍길동전’이 한글 소설 ‘홍길동전’의 원형일 가능성을 굳이 부인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유석재 기자의 말 #
즉 허균의 <홍길동전>의 원본은 한문소설이었는데 이후 황일호의 <노혁전>으로 전해졌고, <노혁전>을 토대로 해서 현재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 이본이 출판되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허균의 다른 작품들이 원본이 인멸되고 다른 사람들이 이본을 출판한 것처럼 홍길동전도 비슷한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이상의 유석재 기자의 주장은 이미 학계에서도 이윤석 교수 본인을 비롯하여 여러 연구자들 사이에서 충실히 이야기된 내용이다. 이윤석 교수를 비롯하여 허균 창작설에 부정적인 이들이 제시하는 것은 결국 현전하는 한글 소설 홍길동전이 어떻게 창작된 것인지 알 수 없는데, 관련한 한문소설이나 전을 썼다고 하여 허균을 홍길동전의 작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점이다. 단 유석재 기자의 기사에서 '학계의 시각이 다르다'고 이야기한 내용과는 달리, 여전히 국문학계에서는 허균을 홍길동전의 작가로 보는 관점이 주류이다. 다소의 의혹은 있어도 택당 이식의 기록을 부정할 만한 근거는 없으며, 허균의 삶과 사상이 홍길동전에 드러난 주제의식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는 것이 주된 이유.

출처: [유석재의 돌발史전] 홍길동전은 허균이 쓴 게 아니었다고?
[유석재의 돌발史전] 한영우 교수 “소설 속 홍길동의 정체는 바로...”
5.2.2.5. <송오참군자어대형환천조>
파일:송오참군자어대형환천조 1.jpg 파일:송오참군자어대형환천조 2.jpg
<조선시선>에 실린 허균의 한글 시 <송오참군자어대형환천조> #[7]
위의 이윤석 교수의 주장과 유석재 기자의 반박과는 달리 허균은 1598년 명나라의 문인 오명제가 쓴 <조선시선(朝鮮詩選)>에서 한글로 쓴 시 <송오참군자어대형환천조(𨓵吴叅軍子魚大兄還天朝)>를 실은 적이 있다. 즉 허균이 생전에 한글로 글을 명나라의 시집에 직접 실은 적이 있으니 홍길동전을 한글로 썼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시선의 원본은 국립중앙도서관 웹사이트에서 열람할 수 있으며, 허균의 한글 시는 80쪽과 81쪽에서 확인할 수 있다. #

5.3. 홍길동전의 메시지에 대한 비판과 반박

5.3.1. 자신의 왕국을 세웠다?

율도국을 정복한 홍길동은 정작 자신도 왕위에 올랐으므로, 민중을 살피기보다는 전형적인 왕조 소설의 인물이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심지어 원래 주인이 있는 나라의 왕족을 몰살하고 세우는 것이다. 외딴 섬에 이상국을 세운다는 줄거리로 비슷한 허생전은 "세우려다 말고 그냥 간다"라는 쿨한 모습을 보여주는 차이점이 있다.

하지만 동양에서는 애초에 민주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자연주의를 주장한 노자도 왕국 체제를 유지한 상태에서 이상 사회를 주장했다. 즉, 동아시아에서 왕정은 왕-공작-후작-백작 등의 계급 제도가 아닌 단지 체제를 의미하는 개념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현대의 평등 사상은 사회 계약으로 모종의 규칙 때문에 권리가 침해받지 않은 계약 이전 상태의 순수한 권리인 자연권에 의거하여 평등한 권리를 가정한 자연법 사상의 산물이다.

하지만 동양에서는 신들조차도 계급이 정해져 있는 철학적으로 꽉 막힌 상태였음을 감안한다면, 홍길동의 왕이 된다는 마무리를 현대적인 사상으로 비판하는데는 무리가 있다. 즉 허균 입장에서는 당대 동양은 물론 당대 전 세계에서도 군주제 이외의 정치 체계를 상상해보지도 못해서 홍길동이 새로운 이상 국가를 만들 때 정치체계가 왕국이 된 것뿐이다. 이를 두고 홍길동이 무슨 독재자가 된 영웅 같은 것으로 전락한 것이라 평가하는 것은 심한 무리수다.

과거에도 왕조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하면 그냥 좋지 않은 상태로 그냥 사는 게 아니라 역성혁명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었다. 그 시대 사람들도 바보는 아니며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반란들 상당수가 기존의 부패한 세력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는 시도였다.

그래서 "천리"라는 개념이 존재했다. 물론 홍길동이 소위 문명국의 출신이고 조선과 중국에 조공하게 되었으므로 춘추필법에는 기존 " 오랑캐" 왕가들 보다는 더 긍정적으로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왕족들의 씨를 말리는 것은 당시 기준으로도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예를..들어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씨를 말려버린 후로 개성 지방에서 이성계를 욕하는 민담이 많았다.

애초에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는 '공화국'이라는 제도 자체가 생소했다. '공화국'이 됐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프랑스가 전 유럽의 침공을 받았을 정도다. 심지어 바렌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프랑스 내에서조차 입헌군주제가 대세일 정도였다. '왕'이 존재하지 않는 국가는 상상할 수 없으니까. 그리고 의 목을 날려버린 프랑스 혁명의 결과는 황제가 통치하는 제정이었고, 이후로도 왕정과 공화정을 오가다가 보불전쟁 이후에야 공화정이 정착되었다.[8] 의회제를 선택한 영국도 왕 자체는 명목상이나마 남겨 지금까지 이어지고 미국의 대통령 또한 초기 개념은 선출하는 '왕'이었다. 그런데 늦어도 18세기 후반에 작성된 데다가 15세기를 배경으로 한 홍길동전에서 '왕국'을 이상향으로 제시했다고 비판하는 건 타당치 않다. 애초에 21세기 현대에도 말만 민주공화국이지 독재 공화국인 나라들도 즐비하고 그 중에는 대통령직을 세습까지 하는 절대왕정이나 다름없는 공화국들도 즐비한 만큼, 현대 기준에서도 공화정을 일방적인 선으로, 군주제를 일방적인 악으로 딱 잘라서 말할 수 없다. 공화국의 군주주의가 타국에선 예상 외로 흔한 것이 괜히 그런 것이 아니다.

아무튼 이런 비판 때문인지 일부 판본에서 율도국 왕과 왕족들은 충혜왕, 연산군 수준의 답이 없는 폭군으로 묘사되어 왕가 몰살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고, 또 일부 판본에서는 홍길동은 율도국 왕을 살려주려고 했는데 율도국 왕과 왕족들이 지레 겁을 먹고 자결해버리는 것으로 나온다. 몇몇 판본에서는 섬을 접수하는 과정이 아예 요괴 퇴치로 바뀌어있다. 참고로 이때 퇴치하는 괴물이 한국 요괴 중에서 은근히 오우거랑 비슷한 위치에 해당하는 지하국대적의 카테고리에 속한 괴물이다. 그리고 홍길동전의 주제 의식을 현대적인 평등이 아니라 '역성혁명으로 인한 새로운 규칙(또다른 왕정)을 만든다' 는 생각으로 생각해본다면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5.3.2. 서자임에도 첩을 뒀다?

홍길동전의 서술을 보면 '처첩'이 아니라 두 부인, 즉 '이처'를 두었다고 나와 있다. 처와 첩은 지위 및 그것이 갖는 의미가 전혀 다르다. 실제로 구운몽에선 주인공 양소유2처 6첩을 두며 2처를 6첩과 다르게 동등하게 대한다. 일단 작중 내용에 따를 때, 홍길동이 세운 율도국에서 서얼을 차별하는 의식이나 관념이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본을 보면, 홍길동은 백 소저와 조 소저 두 아내를 두었는데 그 사이에서 3남 2녀를 낳았고 그 중 장남을 세자로 삼고 나머지는 모두 대군으로 삼았으니 결코 자식들을 차별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즉 홍길동전은 어디까지나 첩의 자식이 차별받는 서얼 제도를 비판하면서 계급제도의 모순을 통찰한 작품이다. '처첩'을 두고 자식에게 차별 대우를 했다면 작품의 주제 의식이 흐트러지겠지만, 여러 여인들을 거두더라도 서로 동등하게 대우했다면 이 문제는 해결된다. 오히려 두 부인과 그 자식들을 동등하게 대우함으로서 차별철폐라는 주제의식을 완성하는 장치로 파악 할 수 있다.

5.3.3. 왕이 되는 결말의 의미는?

오히려 홍길동이 왕이 된다는 마무리는 출신이 천한 인간도 왕이 될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테마를 보여준다고 해석하는 편이다. 노비의 자식 = 왕이라는 등호를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홍길동전의 마무리는 당대 기준으로 파격적인 것이었고 단순히 평등 의식이 없는 영웅론적 왕조 소설이라고만 평할 수가 없는 가치가 있다.

현실에 존재하는 건국 설화에서는 왕족이 하늘이나 자연에서 출생한다는 신화소를 통하여 왕족이 '인간들과 다른 존재'임을 강조한다. 심지어 현대의 독재자들조차도 종교와 권위 태몽의 힘을 빌려서 자신의 혈통을 신성한 것으로 포장한다.

위에서 적혀있지만 당시에는 계급 사상이 더욱 철두철미해서 같은 가족끼리도 서얼과 노비들은 적자들에게 을 기본으로 하거나 대중소설들마저도 죄다 정숙한 선비와 하늘의 혈통 따위를 강조하는 주인공들만 성공하는 근본적으로 계급 사상에 모든 사람들이 푹 삭어버린 상태였다.

5.3.4. 검토: 이는 허균의 사상인가?

위에서 말한 “홍길동전의 진짜 저자 논란”에서도, 홍길동전에 대한 여러 “이본(내용의 차이가 있는 판본들)“이 있다고 적혀 있다. 즉, 홍길동전이 허균의 저술이라는 것과, 현재 대중적으로 알려진 홍길동전의 내용이 허균이 저술한 원문 그대로 전해지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이다.

이미 언급이 되었듯 현재 널리 알려진 홍길동전 판본에서는 허균보다 후대 사람인 도적 장길산이 언급되는 등, 허균 본인이 홍길동전의 원본을 저술했다고 가정하더라도 후대에 가필이 있었다는 점은 사실상 100% 팩트라고 할 수 있다.

홍길동전의 진짜 저자 논란 문단에서 언급된 황일호의 《노혁전》 내용을 다시 한 번 인용해보자.
명망가 출신이지만 비천한 신분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홍길동은 사람은 죽이지 않고 재물만 빼앗는 도적이 됐는데, 관아에 잡히지 않고 40년 동안 도적을 이끌다 깨달은 바가 있어 무리를 해산시키고 착해져 천수를 누리다 세상을 떠났다.
노혁전의 내용에는 홍길동이 조선을 떠나 여러 여자들을 처첩으로 얻고 율도국을 건국한다는 내용이 없다. 허균이 실제로 홍길동전을 썼다고 가정하면 노혁전은 현존하는 이본 중 가장 빠른 이본이라 할 수 있는데, 노혁전에 “율도국 건국, 여러 여자들을 처첩으로 삼음” 내용이 없다는 것은 그 내용들이 훨씬 후대에 제3자가 가필해서 적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다만, 유석재 기자의 조선일보 기사에서 언급된 <허균 평전>의 저자 한영우 교수가 말했듯 “허균이 실제로 반역을 꾸몄다”고 했듯, 오히려 노혁전이 내용을 축소해서 적었을 가능성 또한 있다.[9] 또는, 허균의 홍길동전과 황일호의 노혁전이 공통된 원본 전승이나 민담에서 파생되었는데, 홍길동전이 조금 더 살을 불려 적었을 가능성도 있다.

한 가지 참고할 점은, 뛰어난 힘이나 지혜를 가진 영웅이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여 여러 여인들을 처첩으로 거느리는 이야기는 조선 후기의 영웅 패관소설에서 흔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가장 유명한 사례로 구운몽 옥루몽의 이야기가 있다. 홍길동전의 허균 저작을 의심하는 이윤석 교수는 율도국 건국 이야기는 “그저 액션을 넣기 위해 첨삭된 장면“ 이라고 한다. 허균이 실제 저자가 맞다고 하더라도, 후대의 이본에서는 ”홍길동전의 차별 반대 의식“ 보다 ”도술과 신통력을 부리는 신묘한 영웅 홍길동“ 에 더욱 초점을 맞추어 패관소설의 클리셰가 혼합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다만 "율도국과 같은 이상적인 섬나라로 가는 도술과 신통력을 부리는 신묘한 인물"이 허균의 소설 <장생전(蔣生傳)>에서 등장하긴 한다. 자세한 내용은 허균의 작품 참조. <장생전>의 주인공 장생은 도술을 부리는 인물인데, 죽고 나서 벌레로 변해 날아갔고, 부활한 모습으로 친구 홍세희(洪世熹)에게 "사실 자신은 죽은 것이 아니라 바다 동쪽으로 향하여 이상적인 섬나라를 찾으러 간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후 일어날 전쟁을 예언했다.

"도술과 신통력을 부리는 신묘한 인물"은 허균의 다른 소설 <장산인전(張山人傳)>에서도 등장하는데, 한미한 가문 출신 장산인이라는 인물이 <옥추경(玉樞經)>이란 책들을 수만번 읽고 귀신을 희롱할 수 있게 되었고, 지리산에서 이인(異人)이라는 인물에게 도술을 배워서 두 승려와 함께 길을 가다가 호랑이를 꾸짖어서 호랑이의 등에 타고 절에 갔으며, 서울 동대문 밖 흉가의 뱀을 죽이고 죽은 물고기를 살렸다. 임진왜란 당시 왜적의 칼에 맞았으나 쓰러지지 않고 흰 기름과 같은 피를 흘려서 왜적들이 두려워했다. 그 뒤 죽어서 승려들이 시신을 화장했으나 부활해서 강화에 사는 친구를 만나고 금강산에 갔다. 금강산은 고려 후기 이후 "평생 한번만 밟으면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불교의 이상향으로 알려진 곳이었다. # 즉, 장산인도 홍길동전의 홍길동이 이상향 율도국을 찾으러 가는 것처럼 이상향 금강산으로 간 것이다.

즉 반대로 생각하면, 조선 중기의 인물 허균이 "조선 후기의 영웅 패관소설에서 흔한 이야기"를 소설 등 저서에서 다룬 것으로 보아, 허균은 시대를 앞선 인물이라고 평할 수 있다.

6. 기타

  • 이 소설로 인해 '홍길동'이라는 이름은 매우 유명해져서, 현대 한국에선 마치 미국의 John Doe와 같은 '대표적인 이름' 위치에 올라 현대에 이르러서는 가장 다양한 종류의 문서를 작성한 사람이 되었다. 또한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이기도 하다. 지방 자치 단체에서 홍길동의 고향이 어디냐를 문제로 다툰 일도 있다고 한다.
  • 소설 속 홍길동이 조직한 활빈당은 훗날 동명의 조선 말 의병운동 단체의 이름으로 쓰이게 된다.
  •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기가 세종 때이기에 이를 근거로 세종이 그다지 명군이 아니었다는 떡밥이 뿌려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소설에서 세종을 딱히 암군으로 묘사하고 있진 않으며 역사적 사실과는 관계없이, 당시로서는 오래된 임금 중 널리 알려진 왕의 이름을 끌어온 것 뿐이다. 애초에 저자가 세종에게 반감을 가졌다고 볼 수 없는 것이 소설의 첫머리를 보면 세종 15년부터 "사방의 일이 업고 도젹이 업스며 시화연풍하여 나라이 태평하더라."(현대식 철자법 : "사방에 일이 없고 도적이 없으며 시화연풍하여 나라가 태평하더라")고 나와 있는데 이를 보면 세종 치세는 오히려 평안한 시대로 묘사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오히려 저자가 세종의 이미지를 역이용했다는 해석도 있다. 즉, 성군인 세종의 치세 때도 적서차별과 같은 사회의 폐단은 존재했으며 따라서 극복해야 할 존재임을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시기를 따져보자면, 완판본에서 나와있듯이 세종 15년에 아버지가 동침해 애를 가졌으니 실제 홍길동의 출생은 10개월 뒤인 세종 16년( 1434년)일테고, 11살에 집을 뛰쳐 나왔으니 세종 27년( 1445년)이다. 이후 천하를 주유하다 도적단의 두목이 되어 활빈당을 세웠는데 도적단의 두목이 되려면 아무리 못해도 15살은 넘었을 테니 1450년 이후일 것이다. 세종의 재위 기간이 딱 1450년까지니까 소설 속 홍길동이 실질적으로 활약한 시기는 세종대가 아닌 대략 문종 이후 단종, 세조 치세일 것으로 추정된다.
  • 사회주의적 계급투쟁 요소 덕분에 북한에서 많은 인기를 얻었고 무장투쟁기 김일성의 신격화에도 축지법, 둔갑술 등 많은 요소들이 홍길동전으로부터 차용되기도 하였다. 소련을 포함한 동구권에서는 번역서를 통해 홍길동전을 접한 사람들이 많았고 80년대에는 홍길동전을 소재로 한 오락 영화가 북한에서 수입되어 제법 인기를 얻기도 했다.
  • 홍길동전의 '호부호형'에 대한 오래된 꽁트가 있다. 홍 판서가 홍길동에게 호부호형을 허락한다고 말하자 홍길동은 울먹거리며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데 호부호형을 허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고 말한다. 이에 홍판서가 답답해하며 '그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게 하고, 형을 형이라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한다.'라고 말하자 홍길동은 여전히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게 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게 하면 무합니까. 호부호형을 못하는데......'라고 말한다는 바보 개그. 그러자 홍판서가 화가 나서 홍길동을 칼로 베었는데, 도술을 써서 홍길동이 두 명, 네 명, 해서 계속 늘어나 결국엔 홍판서가 맷돌에 홍길동을 모두 갈아서 홍길동전이 되었다는 버전도 있다.
  • 개그콘서트 파일럿 당시 홍길동전이라는 코너에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데 호부호형을 허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라고 하였다가 여러 대화끝에 결국 이해하고 어머니에게 "아버지께서 호부호형을 허락했습니다."라고 말하자 어머니도 똑같이 말하며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으로 나왔다.
  • "빨간 길에 떨어진 동전의 이름은?"이란 수수께끼의 정답이다.

7. 대중매체에서

  • 현대 홍길동의 이미지는 신동우 화백의 명작 만화 《풍운아 홍길동》으로 인해서 만들어졌다. 이전까지는, 위에서도 비판받았던 중세적인 캐릭터성이 조금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때부터 위에서 나온 모순적인 캐릭터성이 대규모로 물갈이 되고, 푸른 쾌자 초립을 쓰는 이미지도 해당 만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 위 소설을 바탕으로 에이플러스[10]가 제작하여 1993년 발매한 동명의 롤플레잉 게임이 있다. 당시에 발매된 게임 잡지에 실린 정보에 따르면 출시 당시 가격은 3만원이고 약 7천 부가 판매되었다고 한다. 이 당시에 도트를 찍지 않고 그림을 스캔해서 넣었다고 홍보를 했는데, 256색의 한계로 인해서 스캔 후에 다시 도트 하나하나 색을 보정해야 해서 작업량이 2배가 되었다는 후문이 있다. 1993년 마이컴에 나온 제작진 기사. 잠뿌리 리뷰한 것. 흙오이 같은 존재로만 알려졌던 풍류협객의 실제 카피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이 게임이 최초의 국산 IBM PC용 RPG 게임으로 알려졌었다. 놀라운 사실은 이 게임 스토리라인이 원작에 충실하다는 것이다. 한편 유튜브에도 플레이 영상이 없는 게임이었는데, 침착맨이 방송에서 이 게임을 다루면서 유튜브 최초로 홍길동전 영상이 올라오게 되었다. #
    • 1995년에 2편도 나왔지만 드래곤즈 레어 짝퉁에 난데없는 1:1 격투 모드를 넣어 망했다. 전편은 나름 평작이라고 리뷰한 잠뿌리는 사람을 원수지간으로 만들자면 이걸 권하라고 난이도라든지 여러가지를 악평했다. 그럼에도 엔딩까지 본 영상이 있다.
    • 1995년에 미리내소프트가 개발한 롤플레잉 게임 망국전기가 이 게임의 정신적 후속작이다. 일단 같은 홍길동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시대적 배경을 '홍길동전 이후의 만약'을 상정한 것. 율도국에서 건국왕 홍길동 이후 세월이 지나 이뤄지는 이야기로 뭣보다 최종보스 이름이 적대마인이다. 다만 망국전기의 시나리오 자체는 본시 1993년 '제1회 게임시나리오 공모전'에서 류재용의 입상작을 기반으로,미리내가 극화한것이라고 봐야 타당하다. 망국전기 공략
  • 사실 최초의 홍길동전 비디오게임화는 재미나와 더불어 한국 부틀렉게임의 대부중 하나였던 크로바소프트가 MSX와 SG-1000/ 세가 마스터 시스템 용으로 내놓은 동명의 횡스크롤 게임이 있다. 게임팩을 복사해 팔던 회사[11] 치고는 놀랍게도 의외로 오리지널리티가 좀 있는 회사였다.
  • 고우영판의 경우 홍길동이 양반의 서자가 아닌, 모함으로 몰락한 양반의 자제로 나온다.
  • 뱀발로 실질객관동화 60화에서 이걸 막장 드라마에도 쓸 수 있는 재료라 한다.
  • 소련시절에 부패한 권력에 저항하고 약자를 돕는다는 스토리 때문에 호응을 얻어 상당히 유명했다.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8. 같이보기


[1] 2019년 4월 24일, 이윤석 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홍길동전>의 이본을 토대로 허균이 작가가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현 시점에서는 허균이 작가라고 설명한 택당 이식의 기록을 부정할 수 있는 <홍길동전>의 원본이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현 시점에서는 허균으로 전해지고 있다. [2] 허균 생전을 토대로 했을 때 출판연도이다. 다만 이본은 1692년 이후에 출판됐다. 자세한 내용은 유석재 기자의 글 참조. # [3] 다만 허균이 한글로 시를 쓰고 명나라의 문인 오명제의 시선집 <조선시선>에 실은 적이 있으므로, 허균 본인이 한글로 썼을 가능성이 있다. [4] 한문은 고전중국어이므로 한글로 쓴 글부터 한국어이기 때문에 한글 소설이 아니라 한국어 소설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 다만 일각의 주장일 뿐이고, 한문으로 쓴 글도 한국어로 보기 때문인지 조선 시대에 한글로 쓴 글을 한국어가 아니라 한글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한글 소설이라고 부른다. [5] 판본에 따라 제도라고도 한다. [출처1] 이종호 지음, 조선의 문인이 걸어온 길 241쪽 (2004) [7] 허균의 한자 이름 "許筠"이 있으므로 허균의 시인 것을 알 수 있다. [8] 그것도 잦은 혁명의 여파로 프랑스 국민들의 피로도가 심하여 프랑스 제2제국 붕괴 이후 입헌군주제를 세우기로 합의를 보고 임시정부 형식으로 제3공화국을 세웠다가 공화파보다 오를레앙파를 더 증오하던 샹보르 백작 앙리, 일명 "앙리 5세"가 즉위를 거부하여 프랑스의 공화정 체제가 우연히 굳어진 것이었다. 19세기 후반까지는 프랑스에 군주제 복고를 주장하는 운동이나 정당, 의석 등등이 있었으나 1차대전 이후 주변국들도 공화정이 되면서 완전히 공화정 체제로 굳혀진 것. [9] 허균이 홍길동전을 쓸 때 모티브로 삼았다는 수호전에서도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수호전 작가 시내암의 원전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추정되는 100회본이나 120회본에는 양산박 일당이 송나라에 귀순해 관군이 되고, 다른 반란군과 싸우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청나라 시대의 김성탄이라는 학자가 “지나치게 번잡하며 도적을 미화하는 내용이다“ 라며, 양산박 108두령들이 송나라에 귀순하는 장면에서 끝마치는 70회본을 만들었으며, 이 70회본 또한 매우 유명하다. [10] 당시 학습지 출판사였던 중앙교육진흥연구소의 브랜드로 A+가 있었는데 중교진과의 연관성은 불명. [11] 이 회사의 전적도 재미나 못지 않다. 홍콩 게임인 Poppaq the Fish를 방울을 쏜다는 이유만으로 '보글보글'이라는 제목으로 갈아서 팔고,(근데 재미있는건 Poppaq the Fish가 버블보블보다 먼저 나온 게임이었다) 슈퍼보이의 아류작(즉, 슈퍼마리오 브라더스 아류작의 아류작)이었던 슈퍼 바이오맨의 실개발에 관여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