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4 17:42:43

후삼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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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발생 배경3. 진행4. 후삼국시대의 종식과 고려의 통일5. 후대에 미친 영향6. 신라의 지위7. 존재했던 나라8. 여담9. 주요 사건10. 후삼국시대 주요 인물11. 관련 창작물
11.1. 창작물 목록

1. 개요



한반도를 통일했던 신라의 힘이 약해지면서 태봉(→ 고려), 후백제, 그리고 영토를 잃고 경상도로 축소된 신라가 서로 맞선, 한국사에서 유일하게 군웅할거 전국시대가 펼쳐졌던 시대.

시기적으로는 서기 892년~936년으로, 892년은 견훤이 무진주( 광주)를 점령하고 을 칭한 때이고,[1] 936년은 후백제가 멸망한 때다. 고로 후삼국시대로 칭해지는 시기는 후백제의 존속 기간과 같다.

중국 당나라 말, 오대십국시대의 초반기와 대략 시기가 겹친다. 당시 중원과 형주, 주장강 유역은 혼란한 반면에 사천과 장강 하류 지역의 정권들은 대체적으로 안정되어 있었는데, 특히나 오월 남당은 북쪽 정권들에게는 복종하면서 자기들 동네에서는 깡패질하는 전형적인 지방 왕초 세력이었다. 견훤이 이들과 손잡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고려의 연이은 방해 탓에 오월, 후당하고만 드문드문 교류했다.

2. 발생 배경

통일신라 말기에 신라의 지배력이 쇠퇴하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단순한 도적이나 군벌에 불과하던 반란 세력들은 국가 체계를 갖추면서 옛 삼국을 부활시키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정통성을 세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반도는 옛 백제 땅에 견훤이 건국한 후백제, 옛 고구려 땅에 궁예가 건국한 태봉, 그리고 대야성( 합천군)마저도 나중엔 후백제에게 빼앗기고 금성( 경주시) 등의 경상도 일부 지역만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는 신라로 나누어지게 된다.

신라 김씨 왕조는 헌강왕 때만 해도 안정기였으나, 후계자가 없어 아우 정강왕이 왕위에 오르고 1년 만에 죽자, 이번에는 여동생 진성여왕이 올랐다. 진성여왕 때부터 지방반란을 통제하지 못했고 이에 후삼국시대가 시작된다.

설상가상으로 신라는 내부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후계자가 없었던 진성여왕은 출생도 미묘한 헌강왕의 서자 효공왕을 왕위에 올렸다. 효공왕도 후사가 없어 5년 만에 사망하여 박씨 왕조로 교체되고 신덕왕이 왕위에 올랐다. 아달라 이사금 이후, 김씨를 대신해 733년 만에 박씨가 왕위를 계승( 신덕왕)하는 등, 혼란이 거듭되었다. 게다가 신덕왕도 단 5년만 재위하고 아들 경명왕이 계위했으며, 경명왕 2년에 김씨의 반격이 있었지만 진압당했다. 하지만 경명왕도 7년 만에 죽어 경애왕이 올랐는데, 후백제의 침공 이후로 경애왕이 살해되고 김씨가 왕위를 되찾은 것도 김씨의 암묵적인 협조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래도 신라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일 수 없었던 건 아니었고,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경주의 신라인들은 아무리 지방 통제력을 일거에 잃었을 망정 적어도 백 년 이상은 한반도를 잘 다스린 경험이 있었고, 박씨 왕가가 구원 투수로 나선 경명왕 때부터는 기회를 잘 엿봐가며 가능한 수단은 뭐든 해보려 했으며 그래도 경북 동쪽 절반 일대에서는 세금 징수, 인력 징발 등 그럭저럭 통제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견훤이나 궁예가 월등한 무력으로 삽시간에 구축한 통제력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그래도 그럭저럭한 어중이떠중이 호족보다는 물적 지배력이 강했다.

3. 진행

후삼국시대는 주로 고려와 후백제의 주도권 싸움이었다. 지도상의 영토는 작지만 전라도 곡창지대의 생산력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주도권은 후백제가 가지고 있었고, 군사력도 후백제가 더 강했으며, "생산력은 두배인데 왜 우리가 지는거냐"라는 투의 표현도 있다.

신라의 경우, 경애왕 때에는 고려와 손을 잡고 후백제를 물리치려 했고, 실제로 군대를 편성해서 고려와 연합 작전을 해서 후백제의 침공을 적어도 한번 이상은 막았고 대야성은 그 전에도 신라가 자력으로 방어에 성공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에 자극받은 견훤이 공들여 준비한 일격인 경주 습격 이후에는 견훤의 체계적인 국가 체계 파괴 공작[2]으로 그나마 유지하던 주변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죄다 잃었다. 이후에는 그저 후백제와 고려의 실질적인 괴뢰국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한편, 나라 이름이 삼국시대와 같은 이유는 백제나 고구려가 멸망한지 이미 백 년 이상이 되었지만 아직도 각지에는 삼국의 유민 의식을 가진 사람이 많았던 데에 있다. 그냥 이름만 빌린 것에 불과하다는 반론도 있지만, 실제로도 중동이나 유럽 같은 데선 고구려나 백제와는 비교도 안 되는 세월인 수백 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 동안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았음에도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소수민족 집단은 허다하다.[3] 지방에서의 봉기 시, 망국의 국호를 쓰려면 그전에 먼저 유민 의식부터 있어야 가능하다.[4] 대표적으로 견훤이 건국하면서 내세운 이유는 ' 의자왕의 한을 풀기 위해서'였다.[5]

궁예 또한 비슷한 이유를 들어 신라가 당을 끌어들여 나라가 멸망하고 평양이 황폐화되었다며 고려[6][7]라고 국호를 정하고 신라를 멸도라고 부른다. 실제로 신라인들은 한반도 의식 통합에 실패하여 삼국 공통의 시조는 남북국시대 내내 등장하지 못했고, 삼국 공통의 시조인 단군이 등장한 건 고려 시대에 가서였다. 고려 시대 또한 그렇게 동화정책에 힘썼는데도 불구하고 무신정변기에 다시 민란과 더불어 삼국 부흥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몽골 제국 침략 뒤에야 삼국 유민 의식은 비로소 사라졌다.

비슷한 경우로 금나라 청나라의 관계를 생각해볼 수 있다. 금이 멸망하고 금의 중심 세력이었던 완안씨 황족이나 중앙 귀족들은 학살당하거나 숨어살게 되면서 완전히 와해되어 버렸고 중심 세력과 한참 떨어져 방계 세력이라 할 수 있는 변방 호족급의 여진족들이 원나라 명나라의 지배 하에 복속되어 근근히 여진족의 정체를 이어갔을 뿐이었다. 금의 부흥을 기치로 들었던 누르하치의 선조들 또한 건주좌위지휘사(建州左衛指揮使)라는 명나라의 지방관직을 대대로 하고 있었다.

궁예의 고려(후고구려)는 초기에는 기세가 좋아 견훤이 손을 뻗히기 전에 충청도 대부분을 장악하였으며, 신라를 멸도라 부르며 경북 지역까지 진출하였고, 북쪽으로는 대동강 유역까지 나아가 평양을 수복하였다.[8] 또한, 왕건을 시켜 나주를 탈취하고 견훤을 수전에서 박살낸 것은 후백제에게 큰 타격이었다.

하지만 궁예는 국호를 마진, 태봉으로 바꾸고, 자신을 미륵이라고 자칭하는 등 지나친 중앙집권화를 진행하면서 패서(지금의 평안도) 호족들(고구려 출신)의 인심을 잃었다. 결국 궁예는 정변으로 쫓겨나고 왕건이 즉위하면서 국명은 다시 고려로 돌아갔다(918).

4. 후삼국시대의 종식과 고려의 통일

본격 한국판 초한지.

왕건이 고려를 세운 직후만 해도 후백제는 고려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고, 서로 볼모를 교환하는 등 평화로운 편이었다. 그러나 견훤이 패전을 거듭했던 대야성 전투에서 마침내 승리하자(920), 왕건은 견훤의 진격을 막기 위해 구원군을 보내었고 견훤은 일단 군대를 물렸지만 이후 고려와 후백제는 전쟁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조물성 전투에서 양군이 맞서다가 역병이 돌고 고려군이 계속 증강되자 견훤은 일시 고려와 화친하기도 했다.(924-925) 그러나 신라의 경애왕이 계속 친고려적 태도를 취하고 후백제가 보낸 인질인 견훤의 생질 진호가 돌연히 죽으면서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9]

2차 전쟁 초기에는 후백제가 유리하였다. 웅주를 취해 충청도 전역에서 우세를 점하고, 견훤이 친정하여 서라벌을 점령해 경애왕을 죽이고 왕건의 군대를 공산 전투에서 격파하는 등 그야말로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했다. 이 싸움에서 왕건은 신숭겸 등의 개국공신들이 죽음으로 방어하는 동안 간신히 몸만 빼서 도망쳤다.(927) 게다가 그 후에는 왕건이 궁예 휘하에 있을 때 빼앗겼던 나주를 다시 되찾는 성과를 이루기도 한다(929). 이 나주탈환을 거점으로 예성강 전투를 벌여 고려의 수도를 위협하고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932)

그럼에도 후백제는 점차 호족들의 지지를 잃으면서 밀리게 된다. 고려 건국 직후,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였던 상주에 세력을 잡고 있던 아자개가 고려에 항복했는데, 그는 다름 아닌 견훤의 아버지였다.(918)[10] 그 밖에 대표적인 케이스가 공직의 항복이었는데(932), 일벌백계라고 자식과 부인의 다리 힘줄을 지져 버렸지만 도리어 역효과만 낳았다. 결국 고창전투에서의 패배(930)로 쇠퇴하기 시작하고, 운주성 전투의 패배(934)로 결정타를 입게 된다.

이렇게 대세는 고려로 확실히 기울게 되고, 운주 전투에서 패배한 후백제는 설상가상 후계자 갈등이 일어나 견훤의 맏아들 신검이 쿠데타를 일으켜 견훤에게 총애받던 서자 금강을 죽이고 아버지 견훤을 몰아내어 왕이 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러나 아들 신검에게 쫓겨난 견훤은 적국인 고려에 망명하게 되고, 왕건은 견훤에게 상부라는 직위까지 내리며[11] 견훤을 우대했다. 한편 고창전투와 운주전투에서 대세가 고려에게 기울어지자 오랜 전쟁과 권력층의 부패로 황폐화된 신라는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여 신라를 고려에 바쳐 고려와의 병합을 고려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경순왕의 아들인 마의태자와 월광태자 등은 항복에 반대하며 결사항전을 하거나 고려의 속국이 되어서라도 사직을 유지해볼 것을[12] 주장하며 아버지의 항복 시도에 맞섰지만 끝내 경순왕이 935년 고려에 항복해 신라가 고려에 흡수, 멸망함으로써 후삼국은 경순왕의 항복으로 신라를 흡수하여 영토를 경상도까지 확장한 고려와 내분으로 무너져 가는 후백제 2개국만 남게 된다.

한편, 고려에 항복한 견훤은 왕건에게 형제를 죽이고 아버지를 쫓아낸 신검을 응징해줄 것을 요청한다. 결국 왕건은 견훤의 의견을 반영, 936년에 전군을 동원해 후백제의 신검을 공격하면서 일리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고 결국 후백제는 일리천 전투에서 10만명을 동원한 고려의 물량 공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패배하며 멸망하고 만다. 이렇게 다시 삼국으로 나뉘었던 시대는 고려의 통일로 막을 내린다.

5. 후대에 미친 영향

전쟁은 끝났지만 호족들은 왕건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혼인 정책으로 유대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혜종, 정종 때에도 외척의 세력은 무척이나 강했다. 그러던 것이 4대 임금인 광종 때의 적극적인 견제로 세력을 많이 잃고, 일부는 신라의 경주 김씨 세력 등과 함께 문벌 귀족을 이룬다.

불교적으로는 신라 왕실 중심의 교종을 대신해 호족들이 믿기 편한 선종이 융성했으며,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풍수지리설, 도참설 등도 발달했다. 고려를 개창한 태조 왕건도 정치적 명분 쌓기에 풍수도참설을 내세우곤 했다. 육두품 세력들이 지배층 주류에 편입된 시기, 즉 골품제가 무너진 시기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이 중간에 발해가 멸망해, 일부 잔존 세력이 고려로 망명하기도 했다. 발해는 요동에서 10여년간 잘 싸우다가 부여성이 함락된 직후 상경용천부로 쳐들어온 거란군에게 왕 대인선이 항복하면서 급작스레 멸망한 데다 고려는 후백제와에 전쟁으로 이들을 도울 시간적, 군사적 여유가 없었다. 대신에 왕건은 발해의 태자 대광현을 비롯한 유민들을 후대하고,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 거란)를 적대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발해의 멸망은 한창 후백제와 대립하던 고려 측에게 도움이 되기도 했다. 고려로 남하한 발해의 잔존 세력으로 인해 고려의 군사력 및 행정력에 필요한 인적 자원들이 공급되었기 때문이다.

6. 신라의 지위

견훤이나 왕건이 칭왕을 했으나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완전한 대외적 독립국을 형성한 건 아니었다. 표면적으로나마 신라에게 머리를 숙이고, 신라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형태로 전개됐다. 이것은 삼국사기의 견훤전에 실려 있는 견훤과 왕건이 서로 간에 주고받은 국서의 내용에서 간접적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여기에서 견훤과 왕건은 '존왕의 의(義)', '왕실을 높인다', '천지와 같은 두터운 은혜', '큰 나라를 섬기는 마음이 깊다'라는 식으로 신라 왕실을 형식적으로나마 상위에 있는 주군과 같은 위치에 놓고 있으며, 왕을 시해한 견훤은 왕망이나 동탁[13]에 비유해 비판하고 있다.[14][15] 단 궁예는 이 범주에서 제외된다. 궁예는 신라에 극도로 적대적이었고, 적어도 기록상으로 나타나는 대외 교섭은 전혀 없었다. 심지어 신라에서 항복해온 이들을 족족 죽이는 수준이었으니 이정도라면 농담으로라도 그렇게 볼 수 없을듯...

실제로 견훤은 경애왕을 죽일 때도 신라를 멸망시킬 수 있었으나 고려군이 몰려오는 판에 서라벌(경주)에서 놀고 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고 한편으로는 정통성 확보라는 명분이 있는지라 결국 '선양'을 목적으로 경애왕과 다른 정치세력에 속한 김씨 경순왕을 즉위시켰다. 아마도 실제로 고려가 그랬듯이 삼한을 통일한 후 선양과 유사한 방식을 거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는 되려 임금에게 칼을 겨눈 역적이라는 인식을 낳아 역으로 고려에게 명분이 돌아가는 결과를 낳았다. 적어도 신라에 동정적인 호족들이 후백제 대신 고려에 붙을 명분은 충분했다.

이러한 묘한 관계가 무너진 것은 고창전투에서 견훤이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고 난 후 무게추가 기울어 버린 후인데, 930년의 고창전투에서 승리한지 1년 만인 931년, 왕건은 전격적으로 경주를 방문한다.

그전까지 신라의 위치를 생각해 본다면 방문이 아니라 입조의 형태를 취했어야 했겠지만 어디까지나 방문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고 신라 왕실의 보물을 선물이라 쓰고 강탈이라 읽는 형태로써 챙기는 등, 그 이전까지의 신라 왕실에 대한 존중의 태도에서 대등한 위치, 혹은 관계가 역전되어 버린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16] 이런 왕건의 행동에 대해 신라 귀족들이 반기를 들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단연 견훤 때문이었다. 왕건이 어지간히 무례를 저질러도 아예 왕경을 약탈한 견훤에 비하면 나으니까 선택지가 없는 것이다.

이후에 왕건의 고려 정부와 신라 사이에 오간 국서에서, 경순왕이 왕건을 대왕이라 일컬으며, 고려에서 온 사신을 대등 혹은 보다 우위에 있는 국가의 사자로 대우하고 있는 반면, 왕건 자신은 이에 대해 전혀 이의 없이 당연하다는듯이 받아들이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이를 통해 '존왕의 의'따윈 경순왕 귀부 이전에 완전히 없어졌다는 걸 볼 수 있다.

7. 존재했던 나라

삼국시대의 구도가 다시 재현되었다고 해서 후삼국시대라고 하지만, 이들 삼국이 각 지역을 중앙집권적으로 지배했던 것은 아니었고 호족들이 전국에서 판을 치고 있었다. 경남 일대에는 특히 군소 호족들이 세력을 모아 백제와 고려 사이를 왔다갔다했고, 고려와 후백제, 신라의 국경선에도 독립적인 호족 세력이 널려 있었다. 결국 고려, 후백제라고 해봤자 수도 인근에서 비교적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는 정도였고 사실상 다른 지역은 이들에게 신종하는 호족들의 지배 아래 있었다.

이들 후삼국 이외에 공식적으로 독립된 나라임을 선포한 세력으로는 경명왕의 아들 사벌대군(沙伐大君), 박언창(朴彦昌)에 의해 세워진 후사벌(後沙伐)이 존재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후사벌은 존재 자체에 대해 신빙성 논란이 있다. 그밖에도 호족 왕봉규 김순식이 사실상 독립 세력으로 한동안 존재했다.

8. 여담

드라마 태조 왕건의 성공에서 볼 수 있듯이 드라마, 소설, 게임 등으로 꾸미면 충분히 각광받을 만한 소재이다. 중국의 삼국지,[17] 일본의 센고쿠 시대와 비교해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영웅들이 일어나고 끝났다는 것, 그 중에서 특출난 소수, 특히 세 명의 영웅이 나오고 그 셋을 위주로 역사가 흘러갔다는 것, 기존 정치세력 - 후한, 신라, 무로마치 막부 - 이 유명무실화 되었지만 겉으로는 존중하고 이용해 먹는다는 것 등에서 공통점이 있다. 삼국시대가 너무 길다는 걸 생각하면 이 때만큼 화려하면서도 완결성 있게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시기가 한국사에는 없다시피하다. 그만큼 한반도는 평화로운 편이었다는 얘기도 되겠지만.전국시대가 없는만큼 외세와 싸웠지.

예를 들면

그외 기타등등 굳이 창작각색하려 하지 않아도 캐릭터성이 풍부하고 드라마가 될 만한 요소도 많다. 그만큼 혼란스러운 시대였던 것이기도 하지만.

하지만 아직도 후삼국시대에 대한 인지도는 안습 수준. 어쩔 수 없는 게 한국은 외국과의 전쟁이 너무 많았고 여기에 큰 비중을 둬 왔다. 수, 당과의 전쟁, 거란, 여진, 몽골과의 항쟁, 왜란 등이 그것인데 오히려 이들과 비교하면 50년 정도인 후삼국시대는 부정적으로 볼 경우, 내전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 개요에 나와 있듯이 후삼국시대의 중국은 당나라의 멸망과 오대십국 분열기로 이어지는 터라 후삼국에 사실상 영향을 끼칠 수가 없었다. 중국의 삼국시대와 일본의 전국시대가 이후 역사서로든 민간 전승으로든 극이나 소설의 형태로든 끊임 없이 만들어졌다는 걸 생각하면 아쉬운 부분. 반대로 한국은 왜란, 호란 등에 대한 창작이 활발했으니… 한국의 특성으로밖에 볼 수 없는 부분이다. 또한, 자료가 부족하다는 점도 꼽을 수 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단편적인 자료가 실려 있지만, 나머지 자료는 오랜 기간 동안 소실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태조 왕건도 창작 요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또다른 측면에서 보면 고려가 통일왕조를 이루었기 때문에 고려시대에는 고려 태조가 주연급인 후삼국시대에 대해 자유로운 창작은 불가능했을 것이고, 조선이 건국된 이후에는 후삼국시대의 기억이 잊혀진 것이나 마찬가지라서 창작의 대상에서 소외된 측면이 있을 것이다. 서진이 금방 망해버린 중국의 삼국시대나 극후반을 제외하고는 도쿠가와 가문이 대단찮은 조연에 불과했던 일본의 전국시대와는 이 점에서 다르다. 역사의 승리자를 원탑 주인공으로 놓아야만 하는 상황에서 좋은 창작물을 만들기는 쉽지 않다. 삼국지를 사마씨 가문의 영웅서사시로 구성해야 했다면 과연 재미가 있었을까? 나관중은 삼국지연의 이외에도 수-당 교체기를 다룬 수당연의와 같은 작품들도 썼지만 삼국지연의에 비해 거의 인지도가 없다. 물론 초한지라는 걸출한 반례도 있기는 하지만, 전설적인 시조가 아닌 건국영웅의 행적을 파악할 수 있는 최초의 시기라는 점과 미약한 독립세력으로 시작한 한고제의 특별한 상황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파일:external/corea.moyiza.com/%ED%9B%84%EC%82%BC%EA%B5%AD.jpg
현재 국사 교과서등에 실리고 있는 후삼국시대 초기 당시 후고구려, 신라, 후백제 등 한반도 왕국들을 나타낸 지도. 그러나 이는 편의상 간략화된 것으로, 후삼국 최후반기를 제외하면 독립적인 세력은 수십에 달했다.

파일:d0103687_4ee495c697766.jpg
파일:892~895 호족 분포도.png
전국시대가 따로 없던 후삼국시대 초기 상황.[25]

삼국시대의 수만~수십만 단위의 병력이 움직이는 전쟁을 보다가 이 시대의 전쟁을 보면 초라하기 그지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고려와 후백제의 전투들 규모를 보면 동원된 양 측의 병력이 고작 수천인 경우가 다반사. 일리천 전투쯤 되야지 양군 합쳐서 10만 단위로 들어선다.

다만, 이 시대는 호족들이 난립하여 국가의 지방통제력이 극도로 떨어져있기도 했거니와 고려 통일 직전까지는 말이 국가지 정상적인 동원체제를 구축할 수 없을 정도로 정부조직도 허술했기 때문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전선이 방대했다. 판도도 삼국시대때 보다 작은데 어째서 전선이 방대한게 말이 되냐 할수 있는데 당시 후백제,고려,신라 전선 지역은 맞닿은 지역 전부가 언제 상대편에 붙을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실제 전장터는 배신이 밥먹듯 일어났다. 또한 나주, 경남, 경북 지역 등 동시 다발적인 전투도 잦았다. 즉, 삼국시대 경우 수만 단위의 전투들 경우 한번에 일어나는 전투인데 비해 후삼국시대 유명한 전투들은 동시에 일어난 전투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 많았다는 것이다. 드라마 태조 왕건] 에서 이를 이해 하기 쉽게 재현했는데 당장 공산 전투 쯤에 근 시기에 고려의 군대가 대야성을 노리거나 수군을 보내 우회기동시키는 등 짧은 시기에 여러차례 군대 이동을 시켰으며 견훤이 서라벌 습격이 벌어지자 왕건이 5천명을 이끌고 구원하러 간다. 즉, 단 일전이 아니라 전시에 동원된 병력을 보면 수만은 가까이 된다. 당연히 이를 막는 측도 상시 그를 막기 위한 병력들을 주둔 시켜놓아야 한다.

실제 이후 통일한 고려 경우 고려 초 준비 끝에 거란과의 전쟁에서는 수십만 단위의 병력을 운용하기도 하는 등 여력을 보이긴 한다.
사실 오늘날처럼 모든 지역에 행정권이 미치게 된 것은 조선 시대 들어서라는 것을 생각하면 당시 기준으론 동원력이나 인구도 작다고만 볼수도 없는 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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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시대 말기 신라가 멸망할 때쯤의 신라 영역. 동해안 일대를 모두 잃었는지는 논란이 많으니, 참고만 할 것. 동해안 영토 갖고 있는지, 잃었는지 논란해봐야 몇년 가지도 않아 신라는 망해서 별 의미 없다

지도에 오류가 있는데, 실제로는 저 영역보다는 넓었다. 약장현 등 경주 동부의 동해안 지역은 워낙 경주 중심부와 가까워서 신라가 후삼국시대 말기 영토들을 다 잃고, 경주와 그 인근을 지배하는 소국으로 영토가 축소된 상황에서도 멸망 직전까지도 신라의 영토에 속해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문무왕릉이 위치해있는 곳이어서 신라 왕실이 지배해야 하는 곳이라는 상징성도 컸다.

견훤에게 경남 합천의 대야성을 잃고, 고창 전투(930) 이후 안동 주변부까지 고려 영토가 되고 나서는 신라의 영토는 건국 당시 수준으로 축소되었다. 삼국사기만 봐도 왕건 포항 쪽에 성을 쌓고, 경순왕 경주시와 그 주변만 겨우 다스린다고 할 정도. 포항이면 경주에서 고작 30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자전거를 타도 2시간이면 간다. 말 그대로 내 앞 마당까지 남의 영토가 된 것.

9. 주요 사건

후삼국통일전쟁 주요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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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후삼국시대 주요 인물

11. 관련 창작물

궁예라는 인물의 매력 덕분에 일제강점기 때 마의태자,[26] 일목대왕의 철퇴 등 후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들이 나왔으며, 김동인의 장편소설인 견훤도 있었다. 현대에도 후삼국기, 궁예, 왕건 등으로 몇 차례 소설이 나온 적도 있다. 하지만 이 시대의 인기 자체는 사극 태조 왕건을 기점으로 폭발했다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정도. 조선 중기 쯤에 후삼국지연의 같은 소설이 나왔어야 했다.

한반도 유일의 전국시대임에도 중국이나 일본에서 전국시대가 소재로 인기가 높은 것과는 반대로 창작물로는 무시되는 편인데, 우선 한국 사극은 대체로 외국의 침공이나 내부 권력 암투의 비중이 높은 편이고, 무엇보다 이 시대를 다룬 최고의 히트작 태조 왕건 때도 큰 문제였듯 시대배경상 연출해야 할 대규모 전투가 너무 많아서 제작비가 치솟을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 궁중암투물이 아닌 이상, 전쟁이야 어느 시대나 어느 정도는 있지만 후삼국시대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쟁으로 연출해야 하기 때문에 제대로 만들기가 어렵다.

물론, 임진왜란 시기가 배경이었던 징비록 부산진 전투, 행주 대첩, 옥포 해전 등 주요 전투 장면을 제외한 채 전쟁 연출 장면을 생략하고 저예산 비용으로 제작한 것처럼 주요 전투를 제외한 채, 전쟁 장면을 생략하거나 예산을 적게 들여서 전투 장면을 찍는 식으로라도 후삼국시대 사극을 새로 만드는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제작하려면 제작할 수는 있다는 이야기. 실제로 이웃나라 일본의 사극도 이런 방식으로 제작되고 있다.[27]

하지만 최근에 방영한 징비록조차도 방영 당시에 임진왜란을 불멸의 이순신보다 못 하게 묘사하고 일부 전투도 나레이션으로 대충 넘어갔다고 사극 팬들로부터도 욕 얻어먹은 것을 고려하면 후삼국시대도 징비록과 같은 방법으로 드라마 촬영을 찍게 될 경우, 되레 욕 얻어먹을 확률이 높다. 징비록 시즌 2 후삼국 시대 드라마 신작 홈페이지 시청자 게시판의 댓글들 - 왜 공산 전투, 고창 전투 왜 허접하게 찍었나요?, 견훤이 신라 침공하고 경애왕 죽이는 씬 왜 안 넣었죠?, 태조 왕건보다 못한 드라마. 솔직히 고창 전투나 운주 전투는 크게 묘사해도 되는데 견훤이 경애왕 죽이고 경순왕 세우는 장면은 안 넣고 나레이션으로 퉁쳐도 된다.[28]

다만, 징비록은 방영 당시 정도전+ 불멸의 이순신과 비교당하며 비판이 많았지만 징비록/평가 항목에서 알 수 있듯이 정통사극의 면모는 어느정도 갖춘 편이라 대하드라마 고정팬 역시 비판은 했어도 비난은 거의 없었다. 어느 나라든지 사극은 동시기를 다룬 작품들과 비교당할 수밖에 없는데 불멸의 이순신이 인기와는 별개로 문제점이 상당히 많은 사극이었기 때문에 징비록 입장에서는 다소 부담이 덜했던 것이다. 한편, 정도전 용의 눈물이 워낙 역대급 사극이라 부담이 상당했으나 정통 사극의 맛은 살리면서 스타일도 차별화해 호평이 많았다. 태조 왕건은 흔히 용의눈물과 함께 KBS 대하드라마의 리즈 시절 작품으로 손꼽히지만 작품성 면에서 용의 눈물보다 낮은 점수를 받은 작품이다. 즉, 훗날 후삼국시대를 다루는 작품은 제작에 부담이 있을 것은 사실이지만 의외로(?) 문제점이 많았던 태조 왕건이기에, 정도전이 용의눈물에 가졌던 만큼의 부담보다는 되려 적을 것이다. 태조왕건의 장점은 살리면서 단점을 메꿔서 제작한다면 부담은 덜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한국사에서 기승전결이 뚜렷한 시대이자 매력적인 인물들도 많기에 언젠가는 또 사극으로 제작될 것이 분명하다.

11.1. 창작물 목록

  • 만화
  • 연극
    • 마의태자(이희진 각본)
  • 영화
    • 왕자 미륵
    • 풍운 삼국지(1967)
    • 태조 왕건(1970)
    • 천년호


[1] 왕을 칭하면서도 한편으로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 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상주국 한남군개국공이라는 최충헌에 맞먹을 기나긴 관직명을 혼용했다. 아직 완전히 독립할 자신감이 없었던 듯하다. 이후 900년엔 완산주(전주)를 점령하고 본격적으로 국호를 백제(이전의 백제와 구분하기 위해서 후백제라고 부른다.)라 정한다. [2] 무기 만드는 대장간을 파괴하고, 장인 및 숙련병을 모조리 압송. 임금을 죽인 것도 큰 충격이지만 이것도 상당한 여파였다. [3] 영국 옆의 아일랜드의 경우 800년의 지배를 받았음에도 정체성을 지켜서 독립했고, 아시리아인은 나라를 잃은 지 26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4] 물론 야심 있는 지방 세력가가 이용하기에 상당히 좋은 명분이고 또 실제로도 그렇지만, 이런 시도라도 아주 기초적인 공감대와 불을 불일 계기 및 사람이 있어야 가능하다. 사심이 전혀 없이 뭔가 숭고한 정체불명의 애국심만으로 상하가 똘똘 뭉쳐 반기를 든 일은 동서고금에 전혀 사례가 없다. [5] 견훤이 정작 상주 가은현 즉 현재의 경북 문경 출신에 불과해서 백제 유민으로서의 정체성은 별로 없었을 거란 추론은 물론 타당하지만, 그가 자기 고향도 아닌 곳에서 실력만으로 그런 주장이 가능한 현상 자체가 백제 유민 의식이 그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다는 강한 반증이다. 다른 말로 하면 백제인들의 유민의식에 견훤의 권력욕이 호응 및 동화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정복 국가는 정복지의 부흥 운동이 일어나지 않게 멸망시킨 나라의 왕족 관리 및 지방 세력가 포섭에 공을 들이기에, 많은 세월이 지나 부흥 운동이 벌어져도 결국 그 주모자는 오히려 정복 국가 체제에서의 실력자가 될수밖에 없다. [6] 사서에 나타나는 후고구려는 구별을 위한 표기며, 고구려 장수왕 이후 국호가 고려로 바뀌었다. [7] 이 사람은 아예 신라 왕족 출신이란 설이 유력하다. 견훤보다 더 막간 경우. [8] 통일신라 시대 신라의 통치력은 예성강 유역까지였다. 물론 김춘추의 담판으로 대동강 이남은 신라의 영토라는 것이 신라의 기본 입장이었고, 이후 성덕왕 때에 발해를 치는 대가로 당나라로부터 대동강 이남은 신라 땅이라는 증명서도 떼왔으나 직접 통치는 힘에 부쳤던 모양. 덕분에 옛 고구려 경기 지역에 해당하는 패서 지역 호족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지낼 수 있어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9] 물론 포로로 와있던 왕건의 6촌 동생 왕신은 살해당했다. [10] 동명이인이 아닌가 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왕건이 직접 마중나가 맞이했다는 구절 등을 보면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11] 한마디로 견훤을 아버지처럼 대한다는 것으로 이미 화평을 맺었을때부터 이렇게 불렀다. 물론 왕건이 그렇게 부를정도로 나이 차이가 많은건(고작 10세) 아니었지만 우대 차원에서 그렇게 한것으로 보인다. [12] 하지만 이는 신라가 한반도 정통 왕조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와 체제를 갖춘 국가였지만 정통성 측면에서 취약했던 고려나 후백제의 입장에서는 신라를 필히 병합해서라도 정통성을 확립해야 했기에 사실상 불가능했다. [13] 둘 다 신하로서 천자를 살해한 자들이다. [14] 삼국지의 후한과 같은 형태. 칭왕하고도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신라도 대왕 같은 형태로 표현되는 부분적인 외왕내제적인 면모를 띄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에서 왕의 장인 등 가까운 친족에게 ' 갈문왕'의 칭호를 내렸던 것도 외왕내제적 체계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15] 그래서 후삼국시대의 전문 연구자 중 하나인 신호철 교수는 후백제의 견훤이 반신라적이었다고 기술하는 개설서나 교과서의 내용이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16] 심지어 왕의 동생을 볼모로 잡아가기까지 했다니 말 다했다. [17] 수많은 전국시대가 있었지만 한중일 삼국에서 가장 유명한 전국시대는 이 시기다. [18] 자신을 신( 미륵)과 동일시하고 관심법 같은 초능력까지 튀어나오는 이런 사이비 종교 교주 유형의 군주는 한국사는 물론 동아시아에서 비슷한 경우도 거의 없다. 그나마 비슷한 예로는 황건적의 난을 일으킨 장각이나 태평천국 운동을 일으킨 홍수전이 있는데 전자는 빨리 망했다. [19] 굳이 비슷한 예가 있다면 태국의 딱신 대왕이 있긴 하다. 미얀마의 침략으로 멸망한 아유타야 왕조의 혼란을 수습하고 옛 영토를 거의 회복했으나 광증에 걸려 스스로 미륵이라고 칭하고 폭정을 하다가 동료 장군이었던 짜크리 장군에게 죽고 왕조도 바뀐다는 점에서 궁예와 매우 흡사하다. [20] 김순식, 대광현, 경순왕은 물론이고 적의 아버지인 아자개, 적의 사위 박영규, 그 적인 견훤 모두 그에게로 갔다. [21] 부인과 자식들이 많은데 물론 정치적인 이유도 있지만 왕건 개인적인 성향도 보인다. 부인은 30명(6정실 24후궁)고 자녀는34명(25남 9녀)이다. [22] 물론 사서의 기록은 이렇지만 반론도 있다. [23] 진성여왕과 같이 반론도 있다. [24]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아자개와 견훤은 유사한 점이 꽤 된다. [25] 참고로 궁예가 입고 있는 가사는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의 복식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26] 유치진의 소설로 마의태자는 페이크주인공이고 진주인공은 궁예. 왕건은 여기서 사실상 악역으로 나온다. [27] 한국이나 중국의 사극 드라마의 경우 의외로 외국에서 고평가 받는 부분이 태조 왕건이나 불멸의 이순신, 삼국지, 초한지, 주원장 등에서 등장하는 화려한 전투 장면이다. 그에 비해 일본 사극은 영화를 제외하면 드라마에선 대부분 최대한 전투씬을 줄인데다가 선보이는 전투씬이 중국이나 한국 사극 드라마의 전투 장면에 비해 다소 밋밋한 편이다. 실제로 일본 NHK 대하드라마의 경우 최대한 전투 장면을 생략하고 지도상의 CG 설명 등을 활용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빈도가 높아진지 좀 되었다. [28] 그나마 임진왜란은 관련 기록물이나 유물, 유적 등이 풍부한 조선시대에 벌어진 전쟁인 만큼 제대로 혹은 못해도 허접하게 묘사하는 게 가능하지만 조선 이전 시기인 후삼국시대는 기록물이라고는 삼국유사 삼국사기 정도 빼면 거의 없는 데다가 관련 유물이나 유적 등도 많지 않아서 제대로 고증하기도 어렵다. 당장에 대성공을 거둔 태조왕건조차도 여러가지 한계성과 비판을 불러왔으니… [29] 절판되었으나 2016년 2월 전 5권으로 재출간되었다. [30] 그 단재 신채호가 맞다. [31] 태조 왕건이 방영 되었을 당시 트리거 소프트에서 제작한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으로 그만큼 태조 왕건이 당시에 인기가 높았던 드라마였다.